5.
칠흙같은 밤,장옷을 머리에 쓰고 길을 재촉하던 나는 인적이 드문 구간에 이르자 뒤에서 따라오는 포졸들의 발걸음소리가 차츰 사라지는 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길을 조이던 순간, 앞에서 서너명의 장정이 길을 가로막았다. 조선시대에도 강도가 득실거리는군...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년이 확실해?”
장정 한명이 묻자 다른 한명이 대답했다.
“저 미색을 보니 맞는 것 같군. 손써.”
“당신들 뭐야.”
나는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김향단 인생도 참 버라이어티하다 .타임워프도 모자라서 이젠 강도까지 만나다니. 체육시간에 배운 호신술 정도가 먹힐런지...
“우리를 알 필요까진 없고. 황천에 가서 우리를 원망하진 말거라. 다 시켜서 하는 짓이니.”
장정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장정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아아...겁탈이 아닌 청부살인?내가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장정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 한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들 다 죽었어. 내가 조선시대 처녀귀신이 되어 너희들 다 잡아먹을테니. 목에 선득한 것이 닿는가 싶더니 문득 챙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바로 거두어졌다.
간신히 눈을 뜬 내 앞에 누군가가 막아나섰다. 아마 방금전의 칼도 그가 쳐낸 것 같았다. 아아 역시 조선시대라 협객이 존재하는군...그리 감탄을 금치 못할 때였다.
어스름한 달빛을 빌어 눈부신 무예로 장정들을 물리치는 도포차림의 남자, 아니 저 사람은...
“사또나리...”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방에게 지시하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몰래 뒤따라온 모양이다. 저런 젠틀함에 단단한 무예실력까지...아아, 대체 저 남자는 못하는 게 뭐야.
마지막 남은 장정까지 물리친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괜찮소?”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의 다정한 눈빛을 보다가 나는 문득 그뒤의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했다.
“나리!!!”
그는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칼날을 완전히 비켜가지는 못했다. 빨간 피가 그의 도포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를 향해 칼을 날린 장정은 어둠을 타서 도주해버렸고 그는 더이상 쫓지 않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으시오?”
“피가 납니다.”
“어디?”
그의 눈이 순간 긴장한 빛을 띄는 것을 보며 나는 왠지 가슴이 스르르해졌다.
“제가 아니라 나리께서 말입니다.”
“아...작은 상처요. 소저가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소.”
바보같은 양반...나는 입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그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어디 한번 봐요. 어머...상처가 깊네요. 어떡해요?”
“관아에 가서 처치하면 되오.”
“그래도 지혈은 시켜야지요.”
나는 치마를 걷고 속바지를 북 찢었다. 흰 천으로 그의 팔을 동여낸후 상처자리에서 피가 더이상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그가 나를 보는 시선이 퍼그나 괴이한감을 느끼고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치마...”
“네?”
“그 치마를 내려주시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차림을 본후 급히 치마로 드러난 속곳을 덮었다. 속바지가 찢어져서 단속곳이 드러났고 지금 이 시대에서는 그것이 맨다리를 드러낸 것보다도 더 미묘하고 은밀한 느낌을 줄수 있다는 것을 그의 복잡한 눈빛에서 나는 알수 있었다.
“실...실은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떠듬거렸고 나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풋 웃었다.
“알아요.”
“...”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나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오늘 죽은 목숨이었을 거에요.”
“...”
“저자들은 누구일까요?왜 절 죽이려 하는거죠?”
그가 잠시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는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가 말했다.
“저자들은 한양 말투를 썼소.”
“네?”
“한양에서 내려온 자들이요. 아마도 성소저를 노린 자들 같소.”
“춘향아씨를...”
“내가 오늘 성소저를 불렀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틀림없소. 그 뜻인즉...”
“그 뜻인즉 관이에 내응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잠시 이방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소저는 참 기이한 분이시오.”
“제가요?”
“담략이나 지혜가...성소저댁 식솔로 있기엔 아까운 사람이요.”
“그것이 소인의 팔자인 걸요.”
어울리지 않게 웬 팔자소관이지. 나는 입속말로 궁시렁거린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춘향아씨의 팔자는 저리 되어선 아니되지요.”
“나 역시 성소저를 보호해야 하오. 저놈들이 오늘 헛탕을 쳤지만 이제 또 성소저를 해할까 염려되오.”
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입술을 옥물었다.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그것은 곧 구체적인 방안이 되어 머리속에서 윤곽을 그려갔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날이 밝는대로...”
나는 그의 귀가에 낮게 속삭였다. 멀리서 새벽닭이 홰를 치고있었다.
......
6.
“퇴기 월매의 딸 성춘향은 관아로 와서 점고를 받을지어다.”
이른아침, 대문간에서 전하는 포졸의 말에 월매마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향단아, 이게 무슨 변고냐?내가 기적에서 제명을 한지도 수십년인데 왜 춘향이 점고를 받아야 하느냐?”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인데요. 어젠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혹시 사또께서 답례품이 마음에 드시지 않아서 그럴까요?”
나도 일부러 얼떠름한 기색을 지었다. 우리 둘이 말을 주고받는 소리에 춘향이는 이불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 참...한양 가신 몽룡도련님과 상봉하는 꿈을 꾸는 중인데...좀 나가서 얘기해요.”
“이것아, 그런 허황한 꿈얘기는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월매마님은 춘향의 등을 짝 소리나게 스매싱했다.
“어제 사또가 부르는데 가지를 않았더니 오늘은 관아에 가서 점고를 받으라는구나.”
“점고?난 기녀가 아닌데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누가 아니?다 이 에미가 못나서 네게 좋은 출신을 주지 못한 탓이니라.”
월매마님 답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는다. 나는 악의 섞이지 않은 눈길로 월매마님을 흘겨보았다.
“그만하세요, 마님. 아씨께선 관아로 걸음하실 거에요.”
“그래주겠니?”
언제 울었냐싶게 월매마님이 반색을 하며 춘향의 앞에 바싹 다가들었다.
“상처를 해서 혼자라더구나. 나이는 23, 대궐에 뜨르르한 뒷배가 있다는 소문도 돌아. 도호부사들 사이에선 제일 젊다더구나.”
“어머니!”
“깜짝이야, 그렇게 큰 소리 낼 필요 없어 얘, 한양 가신 이도련님이 언제 온다고 그렇게 기다리겠니?지금 봐. 간지 한달인데 서신조차 없잖냐.”
“...”
“향단의 말을 들어보니 생긴 것도 훤칠하니 미남이라고 하더구나. 향단아, 맞지?”
월매마님이 팔굽으로 나를 툭툭 쳤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옆으로 돌아앉아 입술을 감쳐물고 있는 춘향의 고운 자태를 물끄러미 보았다.
“향단아!”
월매마님이 이번에는 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건 왜 또 이리 청승맞은 표정이냐?외간 남자에게 혼이라도 뺐겼냐?”
“아, 쫌!”
나는 고개를 돌리고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프다고요!그리고 혼?정말 낯선 사내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뻔 했어요!그분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분???”
월매마님과 춘향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또나리 말씀이에요.”
“그 준수한 사또나리께서 그리 무예까지 출중하시다니...”
월매마님은 반색하며 춘향에게로 돌아앉았다.
“들었냐?당장 관아로 가자. 사또께서 널 부르신다질 않느냐.”
“정확히 말하면 기녀 점고에요.”
나는 월매마님의 말을 정정했다.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니었다. 괜히 기쁘게 갔다가 실망이 클가봐 하는 소리였다.
“내가 가보겠어요.”
춘향이 치맛자락에 바람을 일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월매마님의 희색 만면한 얼굴을 뒤로 하고 춘향을 따라나선 내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관아로 가니 이미 한껏 단장을 마친 기녀들이 줄느런히 서있었다. 말이 점고지 실은 신관 사또의 눈에 들어보겠다는 기녀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그 기녀들을 헤치며 춘향이 서슬 푸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녀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우리 귀에 들려왔다.
“누구래?”
“그 한달전 소문 짜했던 광한루앞 그네인연...이몽룡을 위해 수절하는 성춘향이라잖아.”
“아, 퇴기 월매의 딸?”
“응. 다들 성참판댁 여식이라고 추켜세워주지만 기녀가 낳은 딸도 기녀야. 제가 우리보다 나은 게 뭔데.”
“사또 납시오.”
기녀들의 말을 중단하며 전갈소리와 함께 변학도가 동헌앞에 나타났다. 기녀들의 숙덕소리가 삽시에 감탄소리로 바뀌었다.
“어머, 저분이 변사또?”
“최연소 도호부사님?”
“어쩜 귀티가 좔좔 흐르니. 대궐에 빽이 있다는 게 참말이군.”
“빽이 뭐니, 빽이. 우리도 그런 저속한 단어는 좀 쓰지 말자. 뒷배라고 해야지.”
“그런데 노랑머리 쟤는 뭐야?아까부터 괜히 눈에 거슬리는데.”
“그러게, 처음보는 얼굴이네. 야, 거기 너. 그래 노랑머리에 얼굴 희고 코 큰 너. 너 어느 기방 소속이니?”
“나?이태리에서 왔다 왜?”
“다들 조용!”
이방이 소리치자 기녀들이 잠잠해졌다. 이방은 기녀들을 한번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성가 춘향이만 남고 다 물러가시오.”
“왜요?아니 이거 짜고치는 고스톱 아녀?”
“나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부화장했는데 뭥미?”
“우리 이태리에도 이런 일 없었어요.”
이방은 기녀들을 쫓아냈지만 몇몇 기녀들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않고 관아 대문에서 기웃거렸다. 뒤이어 넓은 동헌 뜨락에서 이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춘향이 네 본읍 기생으로 신관 도임 초에 현신 아니하기를 잘했느냐.”
춘향이 고개를 들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구관 사또 자제 도련님을 모시는 고로 대령치 못하였습니다.”
“뭬야!너 같은 기생이 수절이라니!잔말 말고 오늘부터 신관 사또의 수청을 들라.”
“소녀 만 번 죽어도 그것은 못하옵니다.”
오오,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전해진 “춘향전”의 내용이지 않은가. 또한 어제밤 변학도에게 내가 대어준 계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
7.
어제밤,나는 변학도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춘향아씨를 보호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진 않죠.”
“무슨 방법이오?”
“날이 밝는대로 성참판댁에 사람을 보내세요. 기녀 점고를 한다 하시고 춘향아씨를 불러내세요.”
“연후엔?”
“그리고 춘향아씨한테 사또나리의 수청을 들라 하세요.”
“아...그건.”
“연기를 잘 하지 못하겠거든 이방을 시키세요. 그런 거 잘할 거에요.”
“아...”
과연 지금 보니 이방은 변학도가 시키는대로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저런 고얀년을 보았나. 여봐라...당장 형틀을 대령하거라.”
이방이 집장을 바라보자 집장이 머뭇거렸다.
“저기...이방나리.”
“뭣이?”
“형틀이 고장났는뎁쇼.”
“뭐라.”
“수리를 불렀는데 요즘 이놈들이 업무태만이 장난 아닙니다. 24시간 지났는데 그냥 기다리라는 전갈만...”
“에라이, 이런 바보 멍충이들.”
이방이 벌컥 화를 내자 변학도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켰다.
“일단 성소...성춘향을 하옥하시오.”
“네, 사또나리.”
춘향이 옥으로 끌려가자 나는 변학도를 바라보았다.
“저도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아니...같이 들어가시면 소식을 전할 이가 없습니다.”
변학도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동헌뜰안의 사람들이 다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내게 시선을 주었다.
“옥바라지는 춘향의 어머니를 부를테니 소저는 다음 일정을 알려주시오.”
“다음...다음은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네?”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는 일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네에?”
변학도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저는 이몽룡을 잘 아시오?”
“저야 잘 모르죠. 다만 아무리 과거에 급제한다 쳐도 그 누구든 암행어사직을 바로 전수받을수는 없잖아요.”
“그렇소만.”
“일단은 지금으로서는 옥이 제일 안전해요. 누가 옥까지 뛰어들어서 목숨을 해하겠습니까. 어제 범인은 알아보셨나요?”
“아...아무래도 한양에 있는 성참판댁 자제들이 하수인 같소.”
변학도의 말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성참판의 자제들...그 사람들이 왜 춘향을 해하려 할까요?그것도 지금껏 뭐하다가 이제야 와서.”
“글쎄, 그 사람들을 빼고 딱히 짐작 가는 사람들이 없소. 성소저를 해하려는 이유는 범인을 잡아야 추궁할수 있소.”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변학도에게 왜 춘향을 보호하고 싶어하는지를 묻고싶었으나 그것만은 참았다. 사내가 여인을 보호하고 싶어한다면 연정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묻는 내가 바보일 것 같았다.
그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월매마님이 통곡하면서 관아로 와서 춘향이를 옥바라지 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 동헌에서, 별당에서, 혹은 그날 내가 봉변을 당할뻔한 수림이나 번화한 저잣거리에 나와 변학도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우리는 한양말투를 쓰는 장정들을 찾았으나 수확은 거의 없었다.
“춘향아씨를 너무 안전하게 숨겼어요. 놈들에게 미끼를 던져줘야 해요.”
내가 미간을 모으며 말하자 변학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내 생일이요. 춘향을 생일날에 수청을 들라고 옥에서 나오게 하는 방법은 어떻겠소?”
“그게 좋겠네요. 내가 아는 책 내용과도 맞군요. 그러면 일단 소문을 퍼뜨리세요.”
나는 말을 멈추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괜찮으세요?이번 일로 나리 평판이...”
“그런 건 상관 없소. 성소저만 무사할수 있다면.”
춘향에 대한 그의 마음이 이렇게도 컸던가.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웅뎅이가 있었다. 금방 비가 내렸는지라 웅뎅이에는 물이 잔뜩 고여있었다. 춘향에 대한 변학도의 마음을 생각하느라 골똘해있던 나는 웅뎅이를 지나는 마차 한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랴 소리를 듣고 펄쩍 피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촤악. 물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물벼락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누군가가 내 앞을 버티고 서있었다. 흙탕물이 얼굴이며 몸에 튕겨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된 변학도가 넓은 도포 소매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리...”
잠시 고개를 든 나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의 눈빛과 엉켰다. 비록 흙물이 흘러내려 그의 준수한 얼굴이 거뭇하게 변했지만, 비록 진흙이 튕겨 그의 단정한 옷차림이 엉성하게 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그토록 깊고 진지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길을 조심하시오.”
“옷은...제가 세탁해 드리리다.”
이것이 관아까지 오면서 우리가 유일하게 주고받은 말이었다.
......
8.
관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옥으로 가서 춘향을 만났다.
“일단 수확은 크지 않고,우리 계획은 이래...”
춘향은 옥안에 있다 뿐이지 기거에 전혀 불편함이 없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언녕 우리 계획을 오픈했다. 얼굴에 바로 표가 나는 월매마님에게 비밀로 하라는 전제를 붙여서 말이다. 월매마님이 집에 옷을 가지러 간 틈을 타 나는 그녀에게 우리 계획을 상세하게 얘기했고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사또나리 생신?”
“응, 아직 보름 남았어.”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숙여 품속에서 흰 명주수건 몇개를 꺼냈다. 아까 변학도와 나갔을 때 저자거리에서 사온 것이었다.
“이건 네가 일전에 부탁한 거. 명주수건에 수놓이를 하고싶다며?”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한쪽에 쌓아놓은 일거리들을 보았다.
“재주가 좋으니 바느질 부탁하는 사람들도 많네. 그거 쉬워?”
“뭐가?”
내가 눈짓으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명주수건을 가리켰다.
“수놓이 말인데, 나도 좀 가르쳐줘.”
“지금 배워서 뭐하려고?”
“나도 수놓이 손수건을 선물로 주고싶어서.”
“네가?누구한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춘향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내게 손짓했다.
“얼른 들어와.”
나는 옥안으로 들어가서 그녀 옆에 바싹 붙어앉았다. 그녀가 수놓이틀 하나에 명주수건을 고정시켜서 내게 주었다. 수놓이틀에 바늘을 대던 나는 그만 아야 하고 비명을 질렀다.
“찔렸어...”
빨간 피가 삽시에 하얀 명주천 귀퉁이를 물들였다. 춘향은 그곳을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첫코를 떼기 시작했다.
“향단이 니 이름을 본따서 여기 귀퉁이에 목단꽃을 수놓자꾸나.”
“알았어. 하나하나 가르쳐줘.”
“그런데 너 수놓이를 할줄 몰라?”
“내가 허드레일만 했지, 언제 수놓이를 할새 있냐?”
다행이 그녀는 내 말에 더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수놓이를 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한양 가신 이도련님 말이야.”
“응.”
“만일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넌 어떡할 거야.”
“수절하지.”
“정말?”
“당연하지.”
“변사또는 어떻게 생각해?”
“사또나리?”
춘향이 잠시 수놓이를 멈추었다. 나는 감히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수놓이틀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향단이 너, 사또나리가 정말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춘향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풋 하고 웃으며 손으로 내 이마를 찔렀다.
“바보.”
“내가 왜 바보야.”
나는 저도 모르게 발칵했고 그녀는 입술을 오무리고 웃었다.
“암튼, 너나 사또나리는 둘다 바보야.”
“내가 바보일지는 몰라도 사또나리는 아니거든.”
그분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훌륭한 사람인지 모른다고 어필하려던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나는 듣고야 말았다. 아아...나 설마,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젊고, 준수했고, 착하고, 다정다감했다. 그런 그를 누가 좋아하지 않으랴. 어쩌면 동헌 뜰안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나의 마음은 이미 그 한사람으로 가득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놓이틀을 내리고 나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어떤 책을 봤는데 말야.”
“책?어떤 책?금서야?어느 세책방에서 빌렸어?”
춘향이 눈을 반짝거렸고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
“그저 금서만 밝히면서...그 책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춘향이어서 인상 깊었어.”
“그래?어떤 내용인데?”
“응, 책 제목은 춘향전이라고...주인공 춘향이 한양 가신 도련님을 위해 수절하다가 옥에 갇혔는데, 그 도련님이 암행어사로 내려와서 춘향이를 구해주고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
“어머, 그거 내 이야기네?향단이 니가 세책방에 팔았어?내 이야기를?”
춘향의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떻게 네 이야기냐?넌 몽룡도련님이 암행어사로 내려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못될 것도 없지.”
“그래, 내려온다고 치자. 그 집안에서 널 받아들일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이것저것 다 겁내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냐?”
춘향의 당당한 말에 나는 머리를 한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랑?”
“그래, 이것저것 조건 따지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사랑은 그런 게 다 배제되어야 해. 집안, 가문, 현실적인 가능성 다 따지면 그건 맞선이지 사랑이 아니야.”
“…”
“한양 가신 도련님과 백년가약을 약속할 때, 난 도련님이 꼭 돌아와서 나를 아내로 맞이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였어.”
“그럼 왜 수절하고 기다리는데.”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
“향단이 니가 아무리 도련님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어머니가 아무리 나를 사또나리께 밀어도, 내 마음은 몽룡도련님 한사람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거니까.”
“…”
“설령 도련님이 평생 다시 여기로 못오신다 해도, 내겐 추억이 있으니까. 평생 그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갈거야.”
“춘향…”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편하게 살아갈수 있게 해주는 거야. 집안이 반대하면 안와도 되니까. 과거에 급제하고 명문가 부인 맞이해도 되니까…나, 그냥…지금 이 자리에서…조용히 내 마음 지킬수 있게 해주라.”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나직히 중얼거렸다.
“바보는 우리가 아니구나.”
“응?”
춘향이 시선을 들자 나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고마워. 그런 얘길 해줘서.”
“고맙긴 뭘…”
“나도 이젠, 용기를 낼수 있을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암튼…수놓이만 잘 가르쳐줘. 목단을 수놓는다 했었지?”
우리는 옥안에 나란히 붙어앉았다. 달빛이 처마밑에 걸려 춤추고 있었고 수놓이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향단의 방자는 이번에는 안 등장하나봐요..ㅎㅎ그럼 향단이는 변학도와?하녀와 사또?오우..신춘향전이 더 재밋을거 같네요..다음편이 기대되요..
방자는 이몽룡을 따라 갔기때문에 향단의 전 신분과 뭔가 썸이 있었을수는 있겠네요. 지금의 이 향단은 현대의 내가 돌아가서 대체한 인물이니 방자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