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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신화서점 조선말 도서

22세기 시간여행(제1회)

l판도라l | 2023.02.10 00:01:32 댓글: 2 조회: 736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1088
프롤로그

이른 주말아침,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습관적으로 폰을 집어들었다. 냉수 한컵 들이키면서 간밤에 온 문자들을 확인하는데 못보던 카메라앱 하나가 눈에 띄였다. 새로운 기능을 테스트하는 앱이겠거니 하고 무심히 그것을 클릭해서 설치했다.

요즘은 참 이런저런 새로운 카메라앱들이 난무하는 것 같았다. 몇일전에는 여자들이 남장한 사진이나 남자들이 여장한 사진들이 모멘트를 달구더니 이건 또 어떤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었을까? 앱을 작동시키자 잔잔한 배경음악이 울리면서 한줄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가고싶습니까.”

과거의 시간? 설마 추억 테마의 사진앨범인가? 나는 간밤의 숙취로 지긋지긋해나는 태양혈을 누르며 또 냉수 한컵을 들이켰다. 술에 절어 산지도 이년째, 만일 현대의 천체물리학이 급속도로 발전해서 요즘 핫한 드라마나 소설의 설정대로 타임워프가 가능하다면…

나는 머리를 흔들며 피씩 웃었다. 그리고 앱이 요구하는대로 회원가입을 하고 간단한 개인정보들을 입력했다. 카테고리중 사진도 요구하는 란이 있어 평소 촬영해두었던 셀카 한장을 업로드하기로 했다. 시간을 선택하는 카테고리도 있어서 잠시 눈을 비비고 숫자를 골라 확인할 때였다.

“자, 준비되셨습니까.”

폰 터치를 잘못 했는지 또 한줄의 문자가 뜬다. 무슨 준비? 아마 촬영준비를 말하는가보다 하고 렌즈를 응시하는 순간,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렌즈로부터 하얀 섬광이 번쩍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고 한줄기 빛이 머리를 관통하는 감을 느끼며 나는 그만 폰을 떨구어버렸다.

……

1.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내울가였다. 돌돌 흐르는 시냇물의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걸 봐서 추정한 일이었다. 나는 깊숙히 미간을 구겼다. 도심에 이런 시냇물이 다 있었나. 그리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것 봐, 저리 눈살을 찌푸리는데 뭐가 이쁘다고. 동시 니가 훨씬 이쁘다.”
“그렇지? 애초에 오나라에는 내가 갔어야 했어. 쟤가 아니라.”
“그래도 니가 안가길 잘했다. 쟤 봐라. 가서 십년 있다가 와서 쥐뿔도 남은 게 없잖아. 제 남자 잡아먹은 팔자라고 우리 왕후님께서 궁에서 내쫓았잖니.”
“월왕님은 그래도 궁에 남기고 싶어 하셨다고 하더라.”
“남겨선 뭘해. 저런 나라 망치는 요물은 우리 나라에서도 내치는 게 좋은데. 왕후께서 너무 너그러우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라고만 했으니.”
“쉿…듣겠다.”
“들으면 또 어때?”

건너편을 보았더니 빨래감을 한짐 두고 낯선 여인들이 적대감이 역력한 눈길로 내쪽을 보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눈빛보다도 그녀들이 주고받는 말들과 옷차림에 정신이 팔렸다. 뭐지? 저 뜬금없는 고대복색은…혹시 여기가 촬영세트장인가.

하긴 전직이 어느 잘나가는 배우의 매니저였던지라 지금 촬영세트장에 와있다 해도 별로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아니 왜 저분들이 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거지? 나는 또 어느 배우의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 건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으레 있어야 할 카메라나 감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타임워프를 했다고 보기엔 그것을 부정할만한 증거가 있었다. 분명 내 손안에는 아까 떨궜던 핸드폰이 고스란히 들어있으니 말이다. 다만 떨궈서 고장이 났는지 폰은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또한 이런 산골에 wi-fi는 말할 것 없겠고.

나는 여인들이 눈을 희번득 거리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여기가 어딘가요? 지금 어느 드라마 촬영중이시죠?”

분명 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손에 든 핸드폰을 들어 흔들었다.

“데이터가 잡히지 않아서요. 누가 핸드폰 있으면 좀 빌려주실래요?”

여인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그중 미색이 좀 수려한 여인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궁에서 쫓겨나더니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나?”

나는 한결 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궁? 내가 왜 쫓겨나? 넌 누군데? 나 알어?”
“내가 누구냐고? 너때문에 10년동안 [동시효빈(东施效颦)] 이라고 놀림을 당해야 했던 동시(东施)야. 오나라에 오래 있더니 이젠 나도 못알아보는구나.”
“쳇, 니가 동시면 난 서시냐? 무슨 뜬금없는 오나라…”

나는 말하다 말고 여인들의 경직된 표정에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 서시야? 내가?”

자신이 동시라고 말하던 여인이 머리를 끄덕였고 나는 지끈지끈해나는 관자노리를 지긋이 눌렀다.

“아이고…머리야. 대체 무슨 영문인지 좀 알아듣게 설명해줘봐.”

동시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제야 냇가에 비치는 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러니까, 여기가 월나라라는 말이지?”
“응.”
“지금의 시간인즉 오나라왕 부차는 죽고 쓸개 먹던 구천이 오나라를 항복시켰고.”
“얘도 참…모가지 떨어질 소리를…어찌 그렇게 왕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담니? 그리고 뭐? 쓸개를 먹어? 그 쓰거운 걸? 우리 왕님이 왜?”
“아, 됐어. 또 그런 게 있어.”

나는 팔을 홱 내저었다. 그러다가 내 손을 다시 들어보였다.

“그럼 정말 이건 본적이 없어? 이건 핸드폰이라는 건데 이걸로 멀리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할수 있고 인터넷도…”
“폰? 넷? 뭐하는 건데? 먹을수 있는 거냐?”
“아 동시 너 쫌…넌 왜 먹을 것밖에 모르니?”
“야, 지금 세월에 먹을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니가 몰라서 하는 말이구나. 하긴 오나라에서 호의호식 했겠으니 그걸 어떻게 알겠냐.”

동시는 불퉁한 기색을 지었다.

“다 물어봤으면 나 간다? 빨래 다 했으니 집 가서 때시걱 끓여야 해. 남편이랑 애기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래, 가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녀가 걸음을 떼지도 않았는데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안돼. 니가 가면 난 어떡해.”
“뭘 어떡해.”
“나도 가면 안될까? 너네 집에.”
“뭐?”

동시는 펄쩍 뛰다싶이 하다가 다시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 참…충격이 컸는 모양이구나. 어디를 어떻게 맞았기에…”
“…”
“하긴…돌아가도 집도 없고 식구들도 없으니, 너도 참 기구하다.”
“그러니까…나 좀 불쌍히 여겨주라.”

나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인간의 적응능력과 현실수용능력이란 이토록 놀라운 것이다. 곧 해가 지는데 달랑 핸드폰 하나를 들고 이 산골짜기에 남아있을수 없었다. 꿈이라 하기엔 너무 생생했고 타임워프라 하기엔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야 했다. 서시로 빙의했든 미녀로 환생했든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암튼 눈물의 덕이었는지 동시가 마음이 약했던 건지 한참후 나는 동시가 차려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을수 있었다. 밥상이라고 해봤자 멀건 죽물에 나물채 한가지 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궁금증으로 가득찬 동시의 남편 얼굴을 마주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후 수저를 들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죽 한사발과 나물 한접시를 삽시간에 깨끗이 비우자 동시가 혀를 차며 죽 한사발을 더 내밀었다.

“내것까지 먹어.”
“아니야. 됐어.”

아무리 그래도 염치라는 게 있지. 나는 죽사발에서 시선을 거두며 동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나 먹어. 하루종일 돌아치고 힘들었겠는데.”

동시는 고개를 끄덕인후 죽그릇을 들어 마시며 내게 말했다.

“하루밤 정도는 재워줄수 있어. 하지만. 우리 집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널 거두어주긴 힘들어.”
“그래, 고마워.”
“이젠 어쩔 타산인데?”

솔직히 그녀의 질문은 내 번민이기도 했다.

“궁에 다시 가볼까?”
“미쳤어? 왕후께선 널 죽이려다 여기 보낸 거야. 정확히는 유배 보낸 거라고. 네가 궁에 갈 동안 이미 목숨을 잃을 걸.”
“왜 날 죽이려 들지?”
“국사께서 널 요물이라고 했어. 오나라 국사 오자서도 니가 부차 꼬드겨 죽였다며? 오나라에 오자서만 살아있었어도 그리 쉽게 안망한다고 들었어.”
“꼬드기긴 뭘 꼬드겨. 다 지네 이해타산이 서로 안맞아 죽여놓고 여자들한테 들씌우는 꼴이라니. 여자들이 뭐 죽을 거야?”
“뭐 암튼, 궁에는 못가. 다들 니가 옥생각 할 거라 생각하던데 생각보다 질긴 목숨이구나. 밥 먹는 거 보니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
“걱정? 날 걱정했어? 니가?”

내가 쳐다보자 동시는 죽을 후르륵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애들 재워야겠다. 자리 펴뒀으니 넌 여기서 자.”
“고마워.”

동시는 대답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남편도 뒤따라 나가버렸고 피로가 밀려온 나는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

뭔가에 짓눌리는 느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엔 꿈에 가위에 눌린줄로만 알았다. 눈을 떠보니 한 검은 그림자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누구야!”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 그 그림자를 벗어났다. 그림자는 나가 떨어지더니 다시 슬금슬금 다가들었다.

“소리치지 말고 한번만 말 들어줘. 어차피 이놈 저놈 붙어먹던 년이 한번 내 말 듣는다고 크게 손해 나는 것도 아닌데. 고분고분 말 들으면 내일 고기라도 구해서 먹여주마. ”

아까 보았던 동시의 남편 목소리였다. 나는 분이 치밀어 부들부들 떨었다.

“소리칠 거야.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적국의 왕도 되고 범대부도 되는데 난 안된다고? 그래봤자 넌 진상품이었어. 다 써먹고 남은 돌인데 한번 더 쓴다고 탈 나냐?”
“나쁜새끼. 동시한테 이를 거야.”
“일러. 네가 날 꼬셨다고 말할테니. 아까 밥먹을때 추파도 던졌고 방 나가기전 밤에 오라고 불렀다 할테야. 동시가 날 믿을까? 널 믿을까?”

징그럽게 웃으면서 다가드는 놈을 젖먹던 힘까지 다해 뿌려치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달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하면서 터덜터덜 걷느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여자로 산다는 것, 이런 시대에 약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울 일이 될줄은.

그리고 지금의 내 신분이 정녕 서시라면 오나라도, 월나라도 더이상 발붙이고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체념하고 있을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리 큰데 나 하나 용납할 곳이 없을텐가.

길옆 바위에 앉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서시가 오나라로 가기전 범려는 미인을 구하느라 이 고장까지 왔다가 완사계에서 비단을 씻는 서시를 보았다고 한다. 자고로 방울을 매단자가 방울을 풀어야 하지 않을까. 이 단계 역사에 대한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쯤 범려는 공을 세우고 아마 관직이 상장군에 이렀을 것이다.

날이 희붐히 밝자 나는 다시 동시의 집으로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대문을 연 동시의 남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나는 바싹 다가가서 그의 귀가에 대고 나직히 말했다.

“어제밤 일을 내가 동시에게 낱낱이 알려주기전에…”

뒤로 한걸음 물러선 나는 일그러진 동시의 남편 얼굴을 바라보며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가서 범대부에게 전해주세요. 완사계(浣纱溪)에서 서시가 기다린다고요. 올때까지 기다릴테니 꼭 와주십시사 하고 전달해주세요.”

그래도 동시의 남편이 머뭇거리자 나는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탰다.

“고기 넉넉히 먹을만큼 수고비가 생기는데 설마 마다하진 않겠죠?”

……

냇가에 한 여인의 모습이 비쳐 얼른거린다. 손으로 조금 물을 퍼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새어나가 흘러버리고 그 서슬에 물고기들이 물속 바위틈에 숨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있을 때였다.

“과연 침어(沉鱼)의 평가가 그른데 없군.”

누군가의 말이 등뒤에서 울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부 복색을 한 준일한 외모의 한 남자가 서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전설속의 그 범려일까.

조용히 예를 올렸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본 춘추시대 예법이 맞길 바라면서 말이다. 남자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그의 얼굴에 서글픈 기색이 언뜻 스쳤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도 소원해졌소.”
“지금은 그 옛날이 아니니까요.”

눈치놀음도 적당히 해야만 했다. 그동안 하도 연예계에서 오래 굴러다니면서 여러 엔터테인먼트 대표들과 배우들 비위 맞춰주느라 나름 내공을 쌓았으니 망정이지…들통이 나더라도 지금 시점은 아니어야 한다.

“오랜만입니다. 대부님.”
“…”
“아니다, 이젠 관직이 상장군에 이르겠지요?”
“날 비꼬는 것이요?”
“소인이 어찌…”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자 그가 고통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겠소.”
“…”
“여긴…애초에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던 곳이였소.”
“그랬…지요.”
“아직도 날 원망하시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부차가 죽은 후, 당신도 따라 죽으려 했다는 말에 난 당신을 만날 얼굴이 없었소. 왕후께서 당신을 구했지만 궁에는 두기 어렵다고 여기 보냈다는 걸 알면서도…난 당신을 만날 생각을 못했소. 당신이 날 이렇게 불러주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나요?”
“그렇소.”
“왜요?”

그가 문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난…나약하고 무능한 놈이니까.”
“…”
“내가 연모하는 이를…대의를 위한답시고 적국에 바쳐야 했으니까…”
“…”
“오나라로 가기전, 당신이 날 찾아온 그 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
“당신은, 나더러 당신을 데리고 멀리 떠나달라고 했었고…나는 그런 당신을 외면했소.”
“당신이 떠난 다음 매일 밤을 후회했소. 10년을 후회했소. 그래도 한가닥 희망은 있었소. 어서 국력을 키워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당신를 되찾아오면 되는 거라고.”
“…”
“하지만 당신이 부차를 따라 죽으려 했다는 소식에 나는 절망하고 말았소.”
“…”
“난, 철저한 패자였소.”
“제가…부차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따라 죽으려 했겠소?”

나는 고개를 들고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차를 사랑했기보다는, 아마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겠죠.”

고작 하루였지만 이런 시대에서 서시같은 여인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을 했기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범려는 어정쩡한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살아갈 용…기?”
“네. 오나라 백성들은 절 죽이려 들거고, 막상 고국인 월나라는 또 저를 용납할까요? 지금이 아주 좋은 예가 아닙니까.”
“…”
“다행이 목숨이 질겨 죽지 않았는 모양이네요. 그래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서시의 운명은 이리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내가, 용납할수 없습니다.”

중국 고대 사대미인중 첫사람인 서시가 이리 비극적인 삶을 살게 해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에 세운 공이 있는 사람에게…적국에 가서 스파이 노릇을 하느라 힘들었을 사람에게 뭐? 요물이라고? 싫다고 할때는 온갖 거창한 명분 다 거들어가며 보냈을거면서,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월왕 구천은 환난은 같이 지낼수 있으되 향락은 같이 누릴수 없는 사람입니다. 강하긴 하나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지요. 10년을 복수를 일념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문종과 당신이 아무리 유공자이긴 하지만, 지금의 이 자리가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에서 공부했던 역사지식을 그에게 풀어야만 했다. 어릴때부터 역사에 흥미가 깊은 나는 모 엔터테인먼트 매니저대표가 되기전 사학자가 꿈일 정도였다.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당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를 이윽토록 주시했다.

“오자서도 이렇게 죽였소?”
“오자서는 부차가 죽였지요.”
“그래도 배갯머리 송사가 무서운 법이요.”
“지난 일은 구구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잠시 중단했다.

“상장군께선 토사구팽이라고 들어보셨겠지요. 사냥개가 토끼를 잡으면 주인은 사냥개를 삶아먹습니다. 문종과 당신은 구천의 사냥개에 불과합니다. 문종은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그가 어떻게 되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와 인연이 있었으니…”

서시와 범려의 감정이 어디까지였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말을 들어보면 범려의 일방통행은 아닌 듯 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에게 일장 권고를 하고싶습니다. 그래서 불러냈습니다.”
“귀 기울여 듣겠소.”
“우선, 구천을 떠나십시오. 아니, 월나라를 떠나십시오. 당신은 때와 흐름을 잘 파악하고 정치보다 경제에 더 밝은 사람입니다. 박수칠때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월나라를 떠나 상업이 발달한 제나라로 가면, 당신의 평소 포부를 크게 떨칠수 있습니다.”
“내 포부를…아시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모두 변화하는 것처럼 시세의 흥망성쇠도 이와 같으니, 따라서 때를 기다려 행동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했었지요.”
“…”
“즉 당신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대기(待機)’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했던 것입니다. 이는 경제사상 면에서도 자연의 순환에 주목하여 [귀한 것이 극에 이르면 도리어 천한 것으로 바뀐다]는 원칙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서 경제학자의 사고방식입니다. 또한 가진 부를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당신의 품성은 후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평가받을수 있겠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건 뭐하는 것이요?”
“암튼, 당신은 후세에 재신으로 받들리게 되며 상성(商圣)으로 칭송받게 될 것입니다. 월나라에 구구히 몸을 붙여 구천의 패업을 도와준다 해도, 그는 나중에 꼭 당신과 문종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떠나십시오.”

그래도 범려가 여전히 고민하는 듯 보여 나는 손을 내밀어 살짝 그의 손위에 얹었다.

“마차를 준비해주시고.”

범려가 눈을 들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의 얼굴이 잠시 환희로 빛났다.

“나를…용서해 주는 것이요?”
“용서라기보단…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
“어쩌면 저 자신에게두요. 대신 강요는 하지 마십시오. 10년간 얼었던 마음이 언제 풀릴지 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기다리겠소. 10년이든 20년이든, 혹은 내 평생의 시간이든…그대에게 모든 마음을 다 바쳐 속죄하리다. 그러니 이런 나를 따라 가시겠소?”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의 눈부신 얼굴을 보면서 내 마음도 조금은 움직였다. 아마도 서시가 마음이 동한거라 나는 생각했다.

몇일후, 나는 범려와 함께 태호의 일엽편주에 몸을 실었다. 떠나기전 문종을 권고했으나 그가 듣지 않았다는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파악하여 손을 놓을수 있는 사람이 결코 많지 않음을 나도 알고있었다. 범려는 그런 부분에서 과감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줄 아는 사람이었다.

떠나기전 범려에게 은전을 받아 동시에게 넘겨주었다. 거금을 받은 동시는 눈물이 글썽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한끼 식사와 하루밤 거두어준 은혜 나 이걸로 갚았다?”
“이리 많은 은전을…”
“너무 동동거리지 말고 이걸로 작은 장사라도 해서 살림살이에 보태봐. 그리고 남편 잘 만났더라. 둘이 잘 살고.”

동시 뒤에 서있던 동시의 남편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빙그레 웃어보이고 그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뭘 그리 웃소?”

배전에 부딪치는 물의 소리가 부드럽다. 나는 물색에 비친 범려의 단정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시 생각을 하고있어요. 둘이 그 돈으로 고기 사먹자고 계획하지 뭐에요.”
“시중의 고기를 많이 사들여 절인 고기를 만들어 저장했다가 겨울철이나 흉년에 고기가 없을때 내놓는다면 큰 돈을 벌수 있소.”
“아유…누가 장사군의 시조 아니랄까봐.”

나는 피씩 웃다가 문득 내 손을 내려다 보았다. 부르르 진동을 하며 핸드폰에 신호가 들어와있었다. 뭐지? 태호에서 신호가 잡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언제 작동했는지 카메라앱이 켜지며 또 한번 섬광이 번쩍했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차츰 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나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아스라이 범려를 보았다. 그는 눈앞의 상황에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한 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이윽토록 응시하고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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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1) 선물 (1명)
IP: ♡.21.♡.220
로즈박 (♡.193.♡.180) - 2023/02/12 01:12:24

역시 역사지식이 깊네요..그냥 서시는 4대미인중의 한사람이라는거밖에는..오나라가 망하고 범려하고 결혼한거죠?..범려가 서시를 지금말하면 간첩으로 보내버렷네요..대의를 위해서 그랫을가요?그래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적군에 보낸다는게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좀 그러네요..그때에는 어쩔수없는 선택이엿는지는 모르겟지만..암튼...
미인박명이라고 서시도 그리 행복한 삶이 아니엿던거 같애요..

l판도라l (♡.109.♡.60) - 2023/02/14 19:46:02

언젠가 사대미인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한번 허구해본 글입니다. 현대인의 생각을 가지고 고대로 시간여행을 가면 어떻게 역사를 바꿀수 있겠는지…또 그중에서도 고대 여인들의 팔자가 더 신경이 씌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알고있는 옅은 역사지식에 허구와 상상을 입혀 새로 각색한 글이니 앞뒤 이치에 맞지 않아도 그냥 재미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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