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주간 베스트 월간 베스트 3개월 베스트 베스트 게시물
너를 탐내도 될까? (70회) 2 201 죽으나사나
너를 탐내도 될까? (71회) 2 125 죽으나사나
너를 탐내도 될까? (66회)21 1 233 죽으나사나
너를 탐내도 될까? (65회)16 1 181 죽으나사나
너를 탐내도 될까? (69회)10 1 181 죽으나사나
너를 탐내도 될까? (67회) 1 176 죽으나사나
연길시 신화서점 조선말 도서

22세기 시간여행(제3회)

l판도라l | 2023.02.14 10:13:25 댓글: 2 조회: 525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2164
3.

이번에는 바깥이 아닌 저택안이었다. 높고 웅위로운 담장으로 둘러싸인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내 앞에는 향로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 나는 아마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듯 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나는 내 몸에 걸쳐진 옷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넓고 긴 소매와 긴 치맛자락을 보아 이 또한 고대복색이 분명했다. 이번엔 누굴까? 설마…

내 예감은 항상 적중했다. 시녀 옷차림을 한 여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승상께서 들어오셨어. 앞채에 차를 올리라고 명하셨어.”
“혼자가 아니고 귀한 손님과 같이 오셨다는데?”
“그 귀객 얼굴을 봤니?얼마나 준수한지…용맹하기는 또 이를데 없대. 승상님께서 그분을 휘하에 거두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그런데 정말 눌러앉은 거 맞어? 언제라도 형님 찾아 갈 거라 했다면서?”
“그러니까 저리 극진하게 대접하는 거야. 곧 폐하께 부탁해서 중매를 서서 혼인도 치뤄줄 생각이시더라.”
“어느 가문 아가씨가 복이 있어 그분과 혼인을 하겠는지…”
“왜?부러워서?”
“아니, 그 댁 찾아가서 그 아가씨 시중을 들다가 시집가는데 따라가려고. 그러면 시첩 자리는 차려지지 않을까?”
“꿈 깨. 차나 빨리 우려. 이년아.”

나는 향로를 거두고 방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때 그녀들이 나를 발견했는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야, 거기 너. 맞어. 동탁한테 갔다가 여포한테 붙어먹은 너. 관장군 옆에 껄떡대기만 해봐. 죽는다?”

나는 그녀들에게 눈을 한번 찍 흘겨주고는 방문을 닫았다. 그랬다. 이번의 내 신분은 초선이었다. 그래, 삼국연의에서 연환계와 미인계를 썼던 그 초선 맞다.

그런데 그 초선이 왜 이런 곳에 와있을까?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여포가 죽자 초선은 여포를 따라 죽었다는 설도 있고 여포의 부장에게 시집을 갔다는 설도 있지만 제일 유력한 설은 바로 조조가 거두어주었다는 설이었다. 보아하니 조조는 동탁, 여포와는 다른 것 같았다.

만일 조조가 초선을 첩으로 들였다면 저 시녀들이 저렇게 무례할수는 없는 법이다. 장신구들과 방안의 시설들을 보니 그냥 보통 물건들이었고 오히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조조는 왜 초선을 부중에 남겨두었을까.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아까 다른 시녀들에게 구박을 받던 그 시녀였다.

“미안한데…풍로에 차를 끓여야 하는데 바람에 자꾸 먼지가 날려와서 눈을 뜨지 못하겠어. 나대신 좀 풍로를 부채질 해주겠니?”
“못할 건 없지.”

군식구라면 시키는 일은 해야 하는 게 내 신조다. 언제까지 여기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할테니 가서 화장이나 고치고 와.”
“많이 티나? 눈화장 한거?”
“응, 그런데 예쁘다. 가서 좀 더 손보고 와.”

시녀를 보내고 마당에 나가 풍로에 물을 끓였다. 끓인 물을 식혀 앞채에 내갈 차를 우려내고 있을 때였다.

“저어.”

등뒤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무관 옷차림의 한 남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있었다.

“갈증이 나서 그런데, 그 차 한잔만 먼저 주시겠소.”

하대를 해도 된다고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고 차 한잔을 그에게 건넸다. 남자가 차를 마시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손에서 차쟁반을 놓칠뻔 했다.

“복주…”

복주루가 아니다. 내가 왕소군이 아닌데 복주루가 왜 여기 있겠냐 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있었다. 범려에 이어 복주루, 그리고 눈앞의 남자에 이르기까지…원래도 준수한 얼굴이었지만 자주 보니 더 끌리는 듯 하다.

“차 고마웠소.”

남자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되돌아섰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차잔에 차들을 채워놓았다. 이제 그 시녀가 와서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라는 시녀는 안오고 앞채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체 차를 올리는 게 왜 이리 꾸물거리고 있느냐? 여봐라…대청에 귀객이 온 걸 알리지 않았더냐?”

나는 하는수없이 차를 쟁반에 받쳐들고 앞채로 나갔다. 대청에 들어서니 한 중년 사내의 예리한 눈초리가 나를 훓고 지나간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차를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예리한 눈초리를 가진 중년사내가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오늘 연회에서 술을 적지 않게 마신 것 같소만.”
“이는 다 승상께서 이뻐해주신 덕입니다.”

중저음의 목소리다. 나는 고개를 들어 힐끔 그 사람을 보았다. 아까 후원에서 차를 한잔 개평하던 그 남자였다.

“피곤할터이니 잠시 부중에서 쉬어가는 게 어떻겠소?”
“두 형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내자를 보내 두 부인을 시중들게 하였소. 장군은 시름 놓으시고 여기서 나랑 미주(美酒)를 즐깁시다.”

중년사내가 하도 극진히 권하니 남자는 일어서기가 무엇한 모양이다. 곧 술상을 봐오라는 명이 내려졌고 나는 빈 차잔을 거두어 대청을 물러나왔다.

내 방에 돌아온지 반식경도 채 안되었을 때였다. 한 나이 지숙한 부인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승상의 명이시다. 곧 여기를 꾸며서 귀객을 묵게 하라.”
“네에.”

시녀들이 대답한 후 일제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벽화며 병풍이 새걸로 바뀌어졌고 침상 물건들과 휘장까지 아름다운 걸로 바꿔졌다.

“그럼 저는 행랑방으로 가겠습니다.”

살림어멈으로 보이는 부인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부인은 딱딱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시오.”
“네?”
“몸치장하고 관장군을 모시라는 승상의 명이시오.”
“네???”

나는 눈을 흡떴다. 부인은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상의 덕분으로 천하의 영웅을 섬기게 되었으니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에…그건 무슨 불경스러운 태도인가.”
“아…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승상께서 목숨을 구해주시고 부중에 거두어 주셨는데 이정도 은혜도 갚지 않는다면 그대는 천하의 비웃음을 감당키 어려울 것이요.”
“아…네.”
“저 아이들이 목욕물을 대령할 것이요. 몸치장 곱게 하고 대기하시오.”

부인은 말을 마치자 홱 가버렸고 나는 꼭두각시처럼 멍하니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목욕을 마치고 얇은 잠자리 날개같이 반투명한 옷을 입자 곧 머리가 틀어올려지고 얼굴에 이것저것 덧칠까지 해졌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자 자정이 거의 되었다.

앞채에서 술자리 파하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내 방쪽으로 오고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다. 술에 푹 취한 모양으로 남자는 인사불성이 되어있었고 시녀들은 남자를 내게 맡겨두고는 앙앙불락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나는 남자를 침상에 눕힌 후,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남자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범려와 복주루의 얼굴이 남자의 얼굴위에 덧놓였다. 서시와 왕소군은 그후 잘 살았겠지? 내가 나름 지혜롭게 대처해준 덕분에?

내게 고대 생활을 체험하게 하는 그 신비한 앱의 기능과 저의는 대체 무엇일까? 그동안 숨가쁘게 적응해 왔지만 처음으로 이런 의문이 생겼다. 혹시 나의 순발력과 적응력을 빌어 그녀들의 삶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게 하지는 말아달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초선을 위해 하는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

초선과 관운장 사이에는 과연 로맨스가 존재하는 것일까. 초선이 조조의 부중에서 늙어갔는지 아니면 아무한테나 시집갔는지 역사에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관운장이 조조를 떠날 때 초선이 그 옆에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시선을 들었다. 물에 적신 수건을 사이두고 내 손과 남자의 얼굴이 잠깐 스친 것 같았다.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
“…”
“누구…”

남자의 질문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초선입니다.”
“초…선?”
“사도 왕윤 부중의 가기, 왕사도의 명을 받아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하여 연환계를 썼던 그 초선입니다.”
“아, 성함은 익히 들었소.”

그가 깍듯이 대답하면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을 살짝 눌렀다. 조금 닿았을 뿐인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뭐하시려구요?”
“승상께 작별인사를...”
“승상께선 꿈나라로 들어간지 오래되었을 겁니다.”
“아…그럼.”
“누워 계셔요. 지금 나간다 해도 알리바이는 어렵습니다. 이미 들어오신지 꽤 되었거든요.”

그가 말없이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왠지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고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암튼, 초선이 장군님의 명성을 더럽힌 것이라 해도 어쩔수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오늘밤 술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
“참 장군님은…지금껏 전장을 누벼왔지만 정계 또한 보이지 않는 칼싸움임을 그리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가 여전히 말이 없자 나는 혀를 살짝 찬후 그에게 매실차를 내밀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거친 숨소리,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조조는 분명 이 사람의 술에 춘약을 탔을 것이고 그런 조조의 의도는 하나, 초선을 빌어 관우의 정절을 망가뜨리자는데 있었다.

“삼국연의”에서 조조가 관우의 임시 항복을 받아들였을 때,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관우 혼자였다면 죽을지언정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그런 성정이었다. 그의 성정이 그의 불행한 최후를 결정했을지도 모르지만, 후세사람들 높이 사는 것 또한 그의 이런 충정이 아니겠는가.

관우가 항복한후 유비의 두 부인을 관사에 묵게 할때, 그들 군신간의 정절을 어지럽히려고 조조는 그들에게 방을 하나만 내주었었다. 하지만 관우는 두 부인을 방안에 들게 한 후 밤새도록 촛대를 들고 문밖에 서있었다고 한다. 그런 관우에게 조조가 내민 최후의 패가 바로 초선이었다. 이것이 조조가 여포를 죽인 후 초선을 부중에 거두어준 진짜 이유라고 할수 있었다.

만일 관우가 초선을 취한다면 그 미색을 탐내 유비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게 조조의 희망사항이었다. 만일 관우가 초선을 취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지금처럼 한방에 든 이상 세상은 그를 손가락질 할 것이었다. 동탁에게서 초선을 빼앗았을 때 세상 역시 여포를 손가락질 했었다. 가끔 약하고 무기력한 여인의 존재라 해도, 그 여인때문에 명성을 어지럽히는 일은 지금 이 시대 남자들이 제일 꺼리는 일이라는 걸 나 또한 잘 알고있었다.

그것을 정리해내자 나는 조조의 음모를 그대로 방치해둘수 없다는 의무감까지 느꼈다. 역사에서 초선의 기재가 제일 적었던 건, 그녀가 정쟁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무릇 정치라는 건 원래 이긴자의 역사만 기록하는 것이니까. 만일 초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천천히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내들었다. 아까 시녀들이 준비하는 틈을 타 몰래 간직해 둔것이었다. 관우는 내 행동에 놀랐는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다.

“초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목숨 허타이 굴 성격은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만 장군의 팔을 좀 빌려줄수 있을까요.”

그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눈을 감고 비수로 그의 팔을 스쳤다. 얼마나 예리한 칼날이었는지 잠깐 스쳤음에도 피가 주르륵 흘렀다.

“지혈은 잠시후에 하시지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 남자,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왜 그리 순진하십니까.”
“네?”
“팔을 내어달라면 내어주시고, 지혈을 하지 말라 해도 고분고분 말을 듣고…원래 이렇습니까.”
“아…여인과는 말을 오래 하지 말라 들어서.”
“그렇다고 정당한 주장도 펼치지 말라는 말입니까?”
“초선이 나를 해칠 이유는 없으니까.”

남자의 간단한 대답이 내 마음을 스쳤다.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대공무사해야 저런 믿음을 지닐수 있을까. 의심이 많은 조조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춘약의 효과는 이제 사라졌을 것입니다. 피가 어느 정도 흐른 다음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르십시오. 초선이 장군을 해친다고 하십시오.”
“그건 왜…”
“조승상으로 하여금 오늘밤 일을 덮게 해야지요. 그는 지금 날이 밝는대로 성안에 소문을 퍼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장군이 술에 취해 여포의 미망인을 곁에 두었다고 말입니다.”
“아…”
“그러니 우리는 날이 밝기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초선이 위험하지 않겠소.”
“저는 여포를 위해 수절하려고 장군을 찔렀다고 주장할 겁니다.”
“…”
“이 또한 인지상정이라 만일 이 일이 알려지면 조승상의 위세가 한낱 여자로 하여금 장군을 모시라고 협박한 것으로 사람들은 수근거릴 겁니다.”
“조조로서는 이 일을 덮을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초선은 왜 나를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것입니까.”

관우가 올곧은 시선을 들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이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요.”
“하늘?”
“초선의 역사적 사명은 연환계가 끝이었습니다. 세상은 더이상 초선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
“동탁이 죽으니 여포에게, 여포가 죽으니 또 다른 사람에게…이 시대 여자의 운명이란 이러한 것이겠지요.”
“…”
“그래서 한번 바꿔보고 싶습니다. 초선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본다고 해야 할까요. 역사는 이런 사람을 잊지 말라고. 기록에서 찾을수 없다 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아있고 싶다고.”

관우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빙그레 웃은후 손수건으로 그의 상처를 가렸다.

“이젠 사람을 부르셔도 됩니다.”

다시 시선을 든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참…지금 유현덕은 원소에게 가있습니다.”

……

조조의 얼굴은 연일 먹구름이 꽉 끼어서 험상궂기 그지없었다.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떠나겠다는 주청을 올렸기 때문이다.

유비가 죽으면 관우를 잡아둘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원소에게 이간하는 편지도 보냈지만 유비의 지혜로 원소는 그 이간책에 들지 않았다. 그후부터 조조곁의 명사들은 관우를 죽이라고 조조를 권했다.

하지만 관우의 영용함이 아까웠던 조조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보였다. 다만 병을 빙자하고 관우를 만나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날 소동이 있은후 내 예상대로 조조는 부중 상하에게 그 일을 엄히 입단속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붙여 나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쯤하면 초선은 자결을 선택해야 했다. 조조의 마지막 패로서의 사명도 다한 셈이니까. 하지만 나는 초선이 아니었다.

카메라 앱이 작동되기 전까지는 여기를 벗어나기 어려울듯 했고, 나는 적당히 시기를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시녀가 가져다준 멀건 죽물을 마시고 저녁밥상을 물렸을 때였다. 찬그릇을 거두러 온 시녀가 내게 가만히 종이말이를 찔러주었다. 그러고보니 찬을 가져가주는 시녀가 내게 풍로를 맡겼던 그 시녀였다. 그녀가 나가자 나는 촛불을 켜고 종이를 펼쳐들었다.

봉이 나는 듯한 필치로 관우가 보낸 서찰이었다. 언제 승상부의 시녀까지 매수했대? 보기와는 달리 세상물정에 완전 숙맥은 아니군. 나는 내용을 한번 훑어본후 그것을 촛불에 불살랐다.

“뭘 또 같이 가.”

내 입가에 비스듬히 미소가 걸렸다. 충직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나를 두고 가기엔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가 보다. 조조가 자신을 피하고 있으니 장군 인을 숙소에 걸어놓고 떠나겠다고 그가 서찰에 썼다.

다만 꼭 나와 같이 가고싶으니 오늘밤 자정까지 뒷문으로 나오되 만일 나오지 않는다면 포기하고 떠나겠다는 내용이었다. 매수한 시녀가 감시하는 사람과 문지기를 따돌릴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세상일이 어디 그리 쉽나.”

문득 나는 몸을 일으켜 방안을 바장였다. 조조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두 부인을 모시고 몇개 관문을 넘어야 하는데 그가 제대로 몸을 뺄수나 있을지…

향과 향로를 갖추고, 방문을 나섰다. 감시하는 시종에게 향로를 들어보인 후 나는 후원으로 향했다. 달빛이 유난히 밝은 날이었다.

향로에 향을 피우고 나는 두손을 합장했다.

“달이 이렇게 밝으면 성을 빠져나가기 힘들텐데.”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내 말을 들어주었는지, 바람에 구름이 한조각이 불어와 달을 가렸다. 설핏 입꼬리를 올렸을 때였다.

“폐월(闭月)의 전고를 내 오늘 목격하는구나.”

등뒤에서 조조의 웅글진 목소리가 울렸다. 매일 이 시각, 후원을 산책하는 그의 동선을 나는 파악한지 오래였다.

“승상님.”

나는 향로를 거둔 후 그에게 조용히 예를 올렸다.

“오늘은 춘풍이 만면하십니다.”
“이게 다 초선의 어여쁜 얼굴을 보아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조조가 허허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 잠시 이채가 스쳤다. 의도한 것이지만 속은 떨렸다. 조조가 말했다.

“바깥은 차니 방으로 가서 차나 한잔 하자꾸나.”

나는 몸을 돌려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초선이 꽃잎을 받아 차를 우려내는 방법을 익혔사온데 한번 맛보시겠습니까.”
“그래. 오너라. 오늘 두루 좋은 일이 많으니.”

나는 향로를 안고 조조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겉옷을 벗어던지고 침상에 앉았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차를 대령해야지요.”
“어허…이리 가까이 오래두. 차가 뭐 급하더냐?”
“…”
“왕윤과 동탁의 말은 고분고분 들었을 게 아니냐.”

나는 시선을 들었고 조조는 얄궂게 웃었다.

“전일의 소동을 잊었느냐? 내가 덮어주지 않았더라면 너는 저잣거리에 능지처참을 당할 명이렷다. 감히 폐하께서 아끼는 장군의 몸을 다치게 하다니.”
“그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게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답을 해야지. 네게 남은 게 미인계밖에 무에 있겠느냐.”
“승상님.”

나는 향로를 그의 발치에 내려놓고 차분히 말했다.

“시간이 긴데 무얼 그리 서두르십니까.”
“무어라.”
“저는, 측근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게 싫습니다.”

조조의 침실 주위에는 항상 측근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내가 그들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조조는 껄껄 웃었다.

“그래, 초선이 싫다면 내보내야지.”

측근들이 나가자 조조는 제 옆을 가리켰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운장에게 내어주었으나, 네가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니 누굴 탓할테냐. 오늘 내 말을 거역한다면 넌 이 부중에 그냥 있을수도 없을터.”
“네, 승상님.”

시간이 슬슬 되었는데 왜 아직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까? 살짝 조바심이 일었지만 나는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았다.

“비천한 몸 승상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 난 시첩들을 미모로 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오늘만은 네게 특별히 은정을 베푸는 것이니 잘 뫼시도록 하여라.”

거 참 드럽게 말이 많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승상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그래그래…다들 왜 널 어여삐 생각했는지 알겠구나. 무릇 여인은 고분고분한 멋이 있어야 하느니라. 여인이란…그러니까 여인들이란 말이다…”

휴우, 겨우 끝났군. 조조가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잠들었고 나는 그의 발치에 있는 향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게 생각보다 수면마취 시간이 오래 걸리네.”

아까 방문을 나서기전 시녀들에게 신경안정을 취하기 좋은 향을 가져다달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조조가 생각보다 늦게 잠이 들긴 했지만 미리 해독차를 마신 나까지 졸음이 몰려오는 걸 봐서 향초기운이 꽤 쎘다.

나는 향로의 불을 끈 후 부랴부랴 조조의 물품들을 뒤졌다. 아무리 뒤져도 인감이 보이지 않았다. 서안의 서랍장을 뒤지고 있는데 목뒤에 서늘한 느낌이 와 닿았다. 날카로운 단도가 내 목뒤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

“올줄 알고 있었습니다.”

대문밖에서 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달빛아래 환하게 웃는 이 남자, 순수하고 충직한 저 마음으로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가려는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동행하려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손안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조승상의 인(印)?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습니까.”
“하북의 원소에게 가려면 도합 다섯개의 관이 있습니다. 장군의 지혜와 용기로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리라 믿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이것을 사용하십시오. 장군들 그 누구도 승상의 인은 막지 못할 것입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관우가 재촉하자 나는 빙긋 웃었다.

“저는, 같이 갈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감, 미 두 부인을 모시고 가야 하는 장군입니다. 이미 보살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 한사람 더 추가된다 해도 충분히 호위할수 있습니다.”
“제가 싫습니다.”

하도 단호하게 말하자 그가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싫…다구요?”
“네, 무얼 믿고 같이 가자는 겁니까. 그날 잠시 도와드렸다 해서 제가 장군께 마음이 동한 거라 생각하십니까? 왜 장군 마음만 중요하고 내 마음은 확인하지도 않으십니까.”
“초선…”
“가요. 지체하다간 성을 못나갑니다.”

그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어이없게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번 바꿔보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역사는 이런 사람을 잊지 말라고. 기록에서 찾을수 없다 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아있고 싶다고.”

내가 했던 말을 곱씹는 이유는 뭘까.

“세상이 뭐라 손가락질 해도 그날 내 마음엔 이미 당신을 담아버린 걸…어떡하란 말입니까.”
“…”

나는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섰다. 올곧고 진중한 눈빛이었다. 그가 왜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관우는 우직하여 여인의 마음을 살줄 모릅니다. 어떻게 연모하는 사람의 환심을 사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내라도 기회를 한번 주고 싶거든…”

그가 내민 손을 나는 이윽토록 보았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가슴을 스친다. 매번 이런 관건적인 시각에 꼭…

그랬다. 짐작했던대로 품속에 간직한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승상부엔 더이상 몸을 붙일수 없습니다.”
“…”
“그러니 저는 성밖의 암자에 가서 일신을 기탁하겠습니다.”
“초선…”
“암자에서 수행을 하겠습니다. 장군이 현덕공을 만나고 천하를 평정한 다음, 그래도 지금 마음 변치 않는 거라면…”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르륵 카메라 앱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땐 저를 데리러 와주세요.”

조조가 내게 인감을 내어준 것, 그리고 그가 내게 일시 암자로 가있으라고 조언한 일은 관우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줘도 그가 현덕을 찾아가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영웅도 아끼고 미인도 아낀다. 내가 가지지 못한다 하여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닐 터. 인감을 줄테니 가거라.”
“고맙습니다. 승상님…헌데 승상님은 내가 천하사람을 저버릴 지언정, 천하사람이 나를 저버리게 할수는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때는 그랬었지. 하지만 그렇게 얻은 강산이 오래 갈수 없을 터. 지금은, 빼앗은 것이 아닌 지키는 것이 갑절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승상부를 나서기전 조조와 나누었던 대화만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

다음호에 계속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2) 선물 (1명)
IP: ♡.109.♡.60
로즈박 (♡.193.♡.212) - 2023/02/15 00:26:50

하하..이번에는 초선인가요?옛날에 삼국연의를 본적이 잇는데 인젠 다 까먹엇네요..조조랑 유비 관운장 이름은 생각이 나는데 내용은 기억이 하나두 안난다는..ㅠㅠ

l판도라l (♡.109.♡.60) - 2023/02/15 19:28:13

사실 초선의 이야기가 제일 픽션이지요. 나머지 세사람의 역사는 기재된게 많은데 초선은 사실은 그냥 여포 부중의 가기였다는 말도 있고 여포의 시첩중 한사람이라는 말도 있고요. 삼국연의도 삼국지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니까요^^ 댓글 감사합니다.

22,939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2947
여삿갓
2024-04-20
0
57
죽으나사나
2024-04-18
2
125
죽으나사나
2024-04-16
2
201
죽으나사나
2024-04-16
1
181
죽으나사나
2024-04-15
1
171
죽으나사나
2024-04-15
1
176
죽으나사나
2024-04-14
1
233
죽으나사나
2024-04-14
1
181
죽으나사나
2024-04-13
0
243
죽으나사나
2024-04-13
0
160
죽으나사나
2024-04-12
0
186
죽으나사나
2024-04-12
0
172
죽으나사나
2024-04-11
1
157
죽으나사나
2024-04-11
0
108
죽으나사나
2024-04-10
1
204
죽으나사나
2024-04-10
0
115
죽으나사나
2024-04-09
1
210
죽으나사나
2024-04-09
1
145
죽으나사나
2024-04-07
1
179
죽으나사나
2024-04-07
1
153
죽으나사나
2024-04-04
2
212
죽으나사나
2024-04-04
1
206
죽으나사나
2024-04-02
2
244
죽으나사나
2024-03-31
1
239
죽으나사나
2024-03-28
1
231
죽으나사나
2024-03-26
1
325
죽으나사나
2024-03-24
1
358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