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외전-여우구슬(제2회)

l판도라l | 2023.02.19 16:42:15 댓글: 1 조회: 490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3891
3.

임금의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조정은 매일과 같이 신하들의 쟁론이 끊길 사이 없었고 머리에 난 종기는 이미 그 통증이 신경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제는 북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의관을 불러 시술을 하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침구로 하는 시술은 그 위험이...”
“어허...감히 어명을 거역할소냐.”

도승지가 임금의 호통소리에 납작 부복했다. 임금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도승지를 내려다보았다.

“경안군의 혼례는 잘 치렀는가.”
“네…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겠다 하더이다.”
“양천 허씨 가문의 여식이라지. 경안군에게 일러 언제 부인과 함께 입궐하게 하라.”
“네, 오늘 마침 입궐하여 중전마마를 뵈옵고 있습니다.”
“그래...”

임금은 다시 침상에 누웠다. 본래 종친이 혼례를 치르면 입궐하여 내명부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 왕가의 예법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든다.

“중전께 인사를 마치면 편전에 들라 하라.”

임금은 맥없이 눈을 감았다. 최근엔 눈만 감으면 피투성이가 된 소현세자와 강빈의 원귀가 나타나서 꾸짖는 바람에 도통 잠을 이룰수 없다. 오늘도 그가 눈을 감자마자 나타난 소현세자는 한결 준절한 어조로 말한다.

“보위를 이었으면 무엇 하느냐? 북벌만 추진하면 헐벗고 굶주리는 이 나라 백성들은 어떡할테냐.”
“삼전도의 치욕을 잊으셨습니까! 저희가 청에 볼모로 끌려가던 그 치욕은요! 형님은 관사에서 천륜지락을 누렸을지 몰라도 저는 삶의 매 한순간 설욕을 꿈꿔왔습니다...”

임금은 악을 바락바락 쓰며 소현세자에게 소리쳤다.

“너만 그 치욕을 기억하고 견디는 줄 아느냐!”
“...”
“우선은 민생이 안정되어야 나라의 부강을 이룰수 있다. 북벌에 필요한 세금징수가 저 여린 백성들의 고혈이라는 것을 네 모르진 않을 터.”
“형님...”
“우리 둘중 누가 왕이 되는 것은 중요치 않다. 그때 아바마마께서 내린 탕약이 문제가 있는 줄 내 정녕 모르는 줄 알았더냐.”
“형님의 뜻인즉...”
“부디 내 죽음이 헛되게 하진 말거라.”

소현세자의 모습이 멀어지자 이번엔 강빈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온다.

“대군...아니, 주상전하. 어린 제 자식을 거두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형수님...”

임금은 강빈의 얼굴을 보다가 참괴함에 머리를 숙였다. 심양 관사에 끌려갔을 때 청의 관리들은 조선의 세자빈에게 수모를 주고자 가마를 타지 못하게 했지만 그 일은 강빈의 오기를 막지 못했다. 아직도 임금의 기억속에는 말잔등에 뛰어올라 심양 거리를 주름잡던 강빈의 영특한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있다. 고려 강감찬장군의 19대 손녀가 한낱 승마를 겁내겠냐는 강빈의 호기어린 말도 뇌리에 또렷이 박혔다.

“참괴합니다.”
“전하를 탓하지 않습니다...”

강빈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진다.

“경안군 회를 거두어주어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귀담아 들으시옵소서. 전하...”
“형수님...”
“...슬을...멀리하시옵소서.”
“네?무엇이라 하였습니까?무엇을 멀리하라구요?”

강빈의 모습도 희미해진다. 언뜻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정수리에 확 소름이 끼친다. 임금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밀상궁이 편전에 들어와서 아뢴다.

“경안군께서 문안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며 자색 단령이 눈에 띄인다. 얼마전 편전에 들었을 때부다 훨씬 늠름한 모습의 소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년의 뒤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고운 모습이 보였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회야.”

임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회가 가까이 오고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둘이 임금에게 큰절을 올리고 좌정하자 임금은 흐릿한 시선을 들어 여인을 보았다. 임금의 시선이 닿자 여인의 눈빛이 흠칫 떨렸다. 임금이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사헌부 허장령의 규수라 들었소. 집안은 안녕하시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아버님은 별 탈 없사오나 어머니가 오랜 병환으로 누워계시옵니다.”
“저런...경안군이 자주 가서 문안을 하시게.”
“어명을 받들겠습니다.전하...”

임금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편전을 나서고 얼마 안지나 의관 신가귀가 의녀 하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전하.”
“그래, 시술준비는 잘 되었느냐.”
“실은 아직 준비가…침으로 종기를 터뜨려야 하는데 이는 위험천만한 일이라 부디 통촉하여...”
“언제부터 그 말을 하였느니! 네놈이 감히 어명을 거역할소냐! 당장 시술하라!”

대성질호하는 임금의 노기가 하늘을 찔렀다. 의관은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부복했다. 의녀가 의관의 침구를 앞으로 가져왔다. 의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을 잡은 후 임금의 정수리 종기를 겨누고 찔렀다.

“으악....”

순식간에 종기가 터지고 피가 솟구쳐 흐른다. 임금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의관은 뒷걸음질 쳐 편전을 나선다. 의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가...가서 사람을 불리오겠으니...예서 기다리거라.”

의관이 넘어질 듯 편전을 나가자 혼절한 임금의 곁에 홀로 남은 의녀가 씻은 듯 표정을 거둔다.

다시 임금을 바라보는 의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임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시리도록 하얀 빛을 내뿜는 구슬이 임금의 입에서 나와 의녀의 손안에 들어온다. 바로 그때 혼절한줄로 알았던 임금이 번쩍 눈을 떴다. 임금은 의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꺽 하고 숨을 들이켰다.

“너...너는...!!!”
“또 뵙는 군요. 이젠 이걸 임자에게 돌려주셔야지요. 전하.”
“어찌…어찌 여기를…”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버텨내신 건 다 이것때문이니까요.”

의녀의 눈에서 차거운 섬광이 번뜩하자 편전의 촛불이 모조리 꺼졌다.

1659년, 반청(反清)주의 강골군주 효종이 승하를 하고, 효종에게 사혈을 했던 의관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했다.

......

4.

5년후.

한양 경안군의 사가에는 둘째 아들의 출산을 축하하는 하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효종때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던 경안군 이회는 현종때에 이르자 임금과 같이 심양에서 출생해서 자랐다는 이유로 누차 임금의 부름을 받아 종친가운데서 대궐출입도 제일 잦은 편이었다.

“부인, 이 아이를 보시오. 미간의 정기가 꼭 부인을 떼닮은 듯 하오.”

어느덧 소년티를 벗어버리고 준수한 사내로 성장한 경안군 회는 품속의 아기를 어르면서 자신의 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번의 출산을 거쳤음에도 전혀 외모와 체형의 변화가 없는 허씨 부인의 아릿다운 얼굴에 작게 미소가 피어났다.

“어찌 저를 닮았다 하십니까. 집안식솔 모두가 서방님 어릴때와 꼭 같다 하더이다.”
“그들이 어찌 내 어릴 적 모습을 알겠소.”

회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인 강빈은 왕실 저주사건에 휘말려 사사되었으며 두 형은 제주도에서 잇달아 객사했다. 어쩌면 숙부인 효종이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경안군 자신 또한 이미 유배지에서 죽은 목숨이었다.

“전하께서 오늘은 왜 또 부르십니까.”

유모어멈에게 아기를 넘겨주고 단령을 갖춰입는 회에게 허부인이 물었다.

“심양에서 청의 문물들이 도착한 모양이요. 전하께서 내게 혹시 기억나는 물건이 있는지 와서 보라고 하였소.”
“서너살때 일을 어찌 기억한다고 그러십니까.”

관복을 다 갖춰입은 회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인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신속히 다녀오리다.”
“석반을 들이기 전에는 오시겠지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시오. 혹시 전하께서 주찬을 내리실수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허부인의 집요한 말에 회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허, 어찌 그리 고집을 부리시오.”
“저의 성정을 몰라서 물으십니까? 빨리 다녀오기나 하십시오.”

허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회도 피씩 따라 웃었다.

회가 입궐하자 임금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다른 종친들과는 달리 그들의 우애는 극진한 편이었다. 임금은 회의 손을 잡아끌고 편전 안쪽으로 향했다.

“오늘 청에서 문물이 도착하여 내 급히 불렀네.”
“예, 전하.”
“혹시 심양 관사에서 우리가 어릴때 그 일을 기억하는가.”

임금의 말에 회는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그 일이라면...”
“선왕의 침소에서 내가 그것을 훔쳐낸 일 말일세.”

기억을 더듬던 회의 눈에 작게 웃음이 스쳤다.

“하얀 구슬 말입니까.”
“기억하는군!”

임금은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곧바로 미간을 구겼다.

“허나 이상한 일은...그때 아버지께 크게 혼나고 후에는 그 구슬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는 걸세. 청에 두고 왔는가 하여 사람을 보냈지만 관사에서는 찾을수 없다 하더군. 다 헛수고를 하고 말았다네.”
“혹시 국고에 두지 않았습니까.”
“이미 사람을 시켜 샅샅이 찾게 하였으나 아무 자취도 흔적도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왜 그걸 꼭 찾으려고 하십니까.”
“선왕께서 그토록 아끼던 물건이니 유물로 보관할까 해서 찾는 중이네. 이게 심양 관사에서 온 문물들이니 같이 한번 보세.”
“명 받들겠습니다.”

나인들이 상자를 열어젖혔고 회는 그 물건들을 찬찬히 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에 한곳에 고정되었다. 하나의 액자 비슷한 그림이었는데 아마 청나라의 미인도 같았다.

잠시후 액자를 든 회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림속의 미인은 고즈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미인의 치마자락 밑으로 길게 몇가닥으로 늘어진 뭔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건 무엇입니까.”

회가 묻자 임금은 힐끗 그림을 쳐다보았다.

“아, 그건 청의 구미호 그림일세.”
“구미...”

문득 회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임금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심양 관사에서 주어들었던 이야기였네. 산에서 구미호가 내려와 사람과 똑같이 분장해 다닌다고.”
“...”
“실제로 목격했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건 아마 그 사람들이 그린 그림일세. 아마 사람의 간 천개를 먹거나, 인간 남자와 10년을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산다면 사람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10년...”
“그런데 여우구슬을 가진 구미호라면, 10년을 5년으로 줄일수도 있다고도 하였네.”
“...”
“또한 그리 되면 원래 천년의 수행을 겪어야 하는 구미호는, 사람이 되어 수행을 계속하면 500년을 앞당겨 천호(天狐)가 될수 있다 하였네.”

여기까지 말한 임금은 문득 말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임금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임금의 눈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다.

“그 구슬...”
“이 그림...”
“우연이 아니었군. 심양 관사에 구미호가 있었네.”
“그럼 그 구슬과 구미호는 지금...”
“구미호는 구슬을 잃으면 안되네. 그 구슬을 선왕이 가지고 왔다면 구미호도 우리 조선으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있지. 이것 참 대단한 발견일세.”
“에이...설화에나 있을법한 일이 어찌 우리 왕실에 생기겠습니까.”

회는 웃으면서 그림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상자문을 닫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굳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거두어졌다. 그의 입가의 미소도 거두어졌다. 뭔지 모를 어두운 기색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사라졌다.

“그런가? 하긴 구미호는 전설에나 있을법한 얘기지.”

임금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보였고 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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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93.♡.130) - 2023/02/22 00:21:52

어마나..의녀가 그럼 구미호?무섭군요..근데 이들은 왜 왕궁하고 연계가 잇을가요?먼가가 잇군요..그리고 경안군 부인도 쪼꼼 이상하구요..담집 빨리 보고싶어요..무슨 사연이 잇는거 같은데 너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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