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외전-여우구슬(제4회)

l판도라l | 2023.02.27 02:41:04 댓글: 1 조회: 490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6002
7.

“과연 강감찬장군의 후손 답군요.”

복숭아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허부인이 말했다. 회는 묵묵히 시선을 들었다. 고작 사흘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녀와는 아득히 먼 거리가 느껴졌다. 하얀 소복에 붉은 기운이 서린 눈빛,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과 뾰족한 귀는 그녀의 모습을 한결 괴기스럽게 만들었다. 아아...항상 정숙하고 아름답던 허부인의 모습은 단지 구미호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을까. 회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끝내 오셨구려.”

그가 허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를 이용할까 생각했지만 아비로서 못할 짓이라 생각되었다. 다행이 그의 짐작대로 허부인은 진작 허씨댁에 와있었고, 그가 허마님을 건드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실텐데요. 설마 제가 제 아이들을 버리고 갈 것이라 생각하세요?”

허부인이 쌀쌀하게 웃었다 .회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버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이리 온 것이요. 당신은 지금 아이들을 데리고 갈수 없소.”
“어째서입니까...”
“일전에 주상전하께서 불러 입궐한 일을 기억하시오.”
“네, 청의 문물을 구경하라 했다지요.”
“그곳에서 구미호의 초상화를 발견했소.”

회의 시선이 언뜻 허마님에게로 향했다. 허마님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두문불출한지 오래다 하지만 내명부에서 어찌 사대부 부인들의 얼굴을 모를수 있겠소.”
“...”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 문제요.”
“그래서 그날 그렇게 물으셨군요.청에 다녀온 적 있냐고.”

허부인의 말에 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여우구슬을 찾고 계시오. 초상화가 있는 이상 여우구슬의 행방은 쉽게 알수 있을 터.”

허부인과 허마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회는 허부인의 얼굴을 보며 차분하게 그 뒤를 이었다.

“선왕께서 승하할 당시 나는 먼저 퇴궐을 하였지만, 그대는 잃어버린 노리개를 찾아야 한다고 궐안에 남아있었소.”
“...”
“내가 짐작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대는 바로 그때 여우구슬을 되찾았고 그때문에 어머니의 병도 낫게 된 것이요.”
“여우구슬은 원래 우리거에요!”

허부인이 언성을 높였다.회는 설핏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누구도 그대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요. 여우구슬은 선왕께서 조선까지 가지고 온 것이고, 만일 지금 그대에게 여우구슬이 있다고 세간에 알려진다면 그대는 시군의 혐의를 벗지 못할 것이요.”
“여우구슬이 없었더라면 선왕은 왕이 되지도 못하고, 소갈병으로 청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에요.”
“이 또한 그대의 말뿐이요. 역사는 선왕을 정통으로 기록을 했고, 내 아버지는 소현세자로 남았소.”
“그럼 어떡할 건가요? 당신처럼 항상 움츠리고 살면서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건가요?”

허부인의 날카로운 말에 회는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란 것은 우리 가문에 일점 혈육이 남는 일이었소.“
“…”
“만일 두분 형님께서 살아만 계셨더라면...”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그가 다시 시선을 들어 허부인을 주시했다.

“청으로 가는 배를 구하고 사공을 매수해놓았소 .날이 밝는대로 어머니와 함께 길을 떠나시오.”
“서방님...”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은 데려갈수 없소. 한양이 즘즘해지면 내가 기회를 타서 데려가리다.”
“약조...하시는 겁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청으로 오실수 있겠습니까.”
“청으로 파견하는 사신단에 종친이 동행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요.”
“믿어도...되는 겁니까.”
“부인.”

그녀를 바라보는 회의 눈빛에 얼핏 서글픈 기색이 스쳤다.

“5년을 함께 지낸 부부였소. 이런 일이 우리 가문엔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허부인은 알릴락말락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말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고려 강감찬장군이 구미호와 사람의 후손이라는 설이 세간에 떠돈다는 것을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청구마을에서 그에게 정체를 들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구미호가 여우구슬을 잃어 법력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에게는 구미호를 구별하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허씨댁을 나서기전 회는 허마님에게 머리를 돌리고 당부했다.

“청으로 가면 저 사람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소.”

허마님의 대답에 회는 그녀를 향해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심양 관사에서 제 목숨과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까는 저 사람을 유인하느라 무례함이 컸으니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참으로 고운 분이셨지.”

허마님의 눈길은 그의 얼굴을 넘어 아득히 먼 기억을 더듬는 듯 보였다.

“강인하고 단단한 분이셨고. 경안군이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구려.”
“그렇습니까.”
“심양에서 기다리겠소.”

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켠 하늘에서 피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8.

이른 새벽, 한양성밖 나루터.

계명성을 떠이고 작은 배 하나가 나루터에 비밀히 닿았다. 구렛나룻이 더부룩한 뱃사공은 몇번이나 배전을 나와 나루터 길목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동녘하늘이 희붐이 밝아올 무렵, 나루터 길목에 여염의 옷차림을 한 두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뱃사공은 실눈을 지으며 배전으로 나와서 여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인들의 뒤를 주시해보던 뱃사공의 눈이 차츰 커졌다.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면서 한무리 기마군사들이 여인들의 뒤에 나타났다. 뱃사공은 재빨리 배전으로 몸을 감추었고 여인들은 인기척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게 섰거라!”

어영청 대장인 듯 보이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외쳤다. 젊은 여인은 단단히 각오를 다진 얼굴로 다가오는 군사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부터 성안팍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주상전하의 어명이시오.”

앞장선 어영청 대장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젊은 여인의 얼굴을 주시했다. 여인은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어영청 대장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그녀 뒤에 움츠리고 있는 나이 지숙한 여인의 얼굴에 닿았다.

“잠깐 고개를 들어보시...”
“대장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오.”

귀에 익숙한 한 목소리가 어영청 대장의 말을 잘랐다. 뒤를 돌아본 어영청 대장은 말위에서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경안군마마 아니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어인 행차이십니까.”
“어흠...실은 외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세.”

경안군 회의 시선이 어영청 대장을 향했다. 하지만 등뒤에 뒷짐을 진 그의 손은 가만히 두 여인에게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여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영청 대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아...흠흠...꽃다운 부인을 두고 경안군마마께서 과연 호기가 넘치십니다. 차자의 탄생일이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집밖의 생활이 더 그리운 것 아니겠소.”

회의 말에 어영청 대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틈을 타 두 여인은 살며시 나루터쪽으로 향했다. 회가 알려준대로 은밀한 곳에 닻을 내린 배를 찾아 올라타자 배전에서 뱃사공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청으로 가시는 분들이시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젊은 여인-허부인의 말에 뱃사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만 더 기다려보시오. 아직 사람이 더 있습니다.”

뱃사공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누군가가 배에 몸을 실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허부인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서방님...”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일세. 이 강을 벗어날 때까지만 동행을 하지.”

회의 미소가 싱그럽다. 허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뭐 새삼 그런 인사를...”

회의 말에 허부인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침 햇살이 배전을 가볍게 어루만졌고, 눈부신 물보라가 그들의 주위에 흩날렸다. 서로 뒤엉킨 시선이 수많은 말들을 주고 받았다.

바로 그때, 뒤에서 어영청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안군마마!”

부름소리에 회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고, 곧 푹 하고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

두 눈을 크게 뜬 회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안으로 제 배에 꽂힌 검이 들어왔다. 그 검을 바라보던 회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어영청 대장을 주시했다. 대장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서늘한 얼굴을 한 어영청 대장이 품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선왕의 밀지를 받들어 역모를 꾀한 경안군을 처결하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회의 배에서 검이 뽑혀나갔다. 이윽고 회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휘청거리는 회의 몸을 뒤에서 허부인이 부축했다. 어영청 대장은 검을 검집에 넣은후 몸을 돌려 뭍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아악!!!”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크게 눈을 흡떴다.

“구...구...구미호...!!!”

긴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흩날리고, 창백한 얼굴을 한 허부인의 눈에 붉은 기운이 서려 꼭 마치 피를 내뿜는 듯 보였다. 뒤이어 뾰족한 귀가 머리위로 솟았고, 아홉개의 커다란 꼬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귀...귀...귀신이야!!!”

어영청 대장은 이 말을 끝으로 숨이 꺽 막혀버렸다. 허부인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목을 단번에 관통했기 때문이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가 버렸고, 강바람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거센 풍랑을 거두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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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75.♡.27) - 2023/02/28 11:28:48

어마나...어떡해요?경안대군이 혹시...아님 여우구슬로 살아나는건가요?이리 빨리 가시면 안되는데ㅠㅠ
다음집에서 어떻게 되는지 너무 궁금해요..빨리 올려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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