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79회)

죽으나사나 | 2024.05.22 04:03:13 댓글: 0 조회: 487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69951
너를 탐내도 될까? (79회) 혼란, 그리고 소환된 그날 밤의 기억. 

말도 안 돼!!
의사가 들어와서 전하는 말들을 하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당장이라도 병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을 뻔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라고.
"임신 9 주차입니다. 지금 시기에는 엄마가 영양분을 많이 섭취해야 합니다. 태아의 뇌세포가  발달하기 시작하거든요. 요즘 속이 메슥거리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한껏 자상한 얼굴로 하정을 마주 보며 하는 의사의 말에도 하정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있었다.
"입덧까지는 모르겠는데 요즘따라 속이 안 좋다고는 했었어요."
망부석이 되어버린 하정이 대신 미연이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때쯤에 대부분 입덧이 절정을 달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몸이 허약하니 이틀 정도 병원에서 영양 공급을 집중적으로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조금 쉬고 계시다가 초음파 실로 오십시오. 아기 심장 소리를 들어야죠. 기다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미연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하정의 상태를 살피고 나가는 의사의 뒤를 따라나섰다. 넋이 나가 있는 하정이 앞에서 묻고 싶은 걸 다 물을 수가 없었으니 나가서 물을 참이었다.
병실엔 멍한 표정의 하정과 어떤 말을 꺼냈으면 좋을지 모를 정연이만 남았다.
"저... 하정아."
입만 달싹이다 겨우 벌린 입이었지만 크나큰 충격을 받은 하정은  정연의 부름에도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원래 모든 게 간단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 감추면 되는 거고 이성적인 머리가 그를 한없이 밀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정말 간단했다.
그래서 요즘 그에게 은근 휘둘리고 있는 것도 맥스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장단에 맞춰주는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황을 보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으니.
그 일만 해결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고 권기혁은 제 인생에서 다시는 안 봐도 될 사람이었다.
그냥 그랬다. 
그랬어야 하는데...
하정이는 문득 기혁이와 있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날 밤 일을.
[자, 잠깐만 요, 대표님.]
기혁이 끈적한 눈빛과 함께 집요하게 하정에게 달라붙자 정신이 흐릿해져 가던 하정이가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미간을 구긴 기혁이가 ‘그때처럼  또 막을 겁니까?' 하는 열기가 식은 시선을 보냈다. 

무척이나 긴장해 하는 하정을 제 품 안에 가둔 채 지그시 내려다보던 기혁은 그녀의 아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러다 이내 하정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거침없이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달뜬 숨을 내쉬는 하정에게서 입술이 떨어진 그가 대뜸 입꼬리를 올리며 말아 올렸다.
[오늘은 그때처럼 포기를 안 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느른하게 파고드는 젖은 음색이 하정의 귀를 간지럽혔다. 하정의 심장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고 정신이 다시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이걸로 끝이라고 말을 했는데,
겪어보지 못한 그 끝에 대한 두려움도 당연히 있지만 그것보다 더 미치겠는 건 크루즈선 내 룸에서의 스킨쉽을 시작으로 또 그와 느끼며 이러는 게 너무나도 좋다는 거였다.
피임 도구도 없이 이래도 되는 걸까? 
우리, 정말 괜찮은 걸까?
불안한 하정이 흔들리는 두 눈동자를 확인한 기혁이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섭습니까? 이제 와서?]
[아, 아니요.]
하정이 짐짓 괜찮은 척 오기를 부렸다. 눈동자는  지진이 난 듯 아까보다 더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만할까요?]
꼭꼭 여미어 입은 가운 위로 그녀의 허리를 느슨하게 잡고 있던 기혁이가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채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하정의 동의를 바라는지 더 이상의 동작은 없었고  기다란 제 속눈썹을 자랑이라도 하 듯 느릿하게 음영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는 기혁이.
이렇게 달아오르게 하고서 끝낼 수가 있을까 싶었지만  저 자신이 싫다는 말 한마디면 그는 정말로 여기서 끝낼 것만 같았다. 

굳게 결심을 한 하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어깨 옆에 내리뜨리 운 그의 손을 천천히 잡아들었다. 그리고 풀릴까 봐 있는 힘껏 조여매었던 가운 끈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저 자신은 다시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팔을 감은 그의 목을 저한테로 당겼다. 서툴지만 그의 입술에 잘게 입맞춤을 했다.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더 갈증만 불러왔다는 걸 몰랐지만 더 이상의 용기는 없었다.
긴장으로 무척이나 굳은 얼굴을 하고서 하는 하정의 서툰 행동에 기혁이는 그녀가 재밌는지 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도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 떨림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정이가 딴 생각을 하기도 전에 기혁의 손에 잡혔던 가운 끈은 맥없이 풀려나갔다. 그렇게 열심히 매듭을 지었던 게 무색할 만큼. 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발개진 하정이가 부끄러움에 손으로 몸을 가리려고 하자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시선은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지그시 꽂혔다.
[밀당은 이제 그만하죠.]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말캉하고 따뜻한 기운이 하정이에게로 스며들었다. 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의 위를 탐색이라도 하 듯 천천히 쓸어 내려갔다. 야릇한 느낌에 하정의 몸이 꿈틀거리자 그녀의 가는 허리를 저한테로 당긴 그와 빈틈 하나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에어컨을 틀었는지 조금 서늘하던 공기었는데 그의 따뜻한 체온을 그대로 느낀 하정은 경직되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내 강도 높은 그의 손놀림에 생각보다 많이 파르르 떠는 하정에게 그가 처음이냐 물었던 기억도, 거기에 대고 한번뿐이라 했으니 괜찮다고 말했던 자신의 모습도 생각해 보니 낯이 다 뜨거워졌다. 

그러나 말만 한번뿐이었던 거지, 하정이 아득해진 정신으로 지칠 줄 모르는 그와 새벽까지 길게 이어지며 버티느라 온몸이 힘들었다는 것도 머릿속에 다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하정아. 너 열나는 거 아냐?"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하정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져 있었다. 정연이가 걱정스레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아, 아니야."
하정이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에 바빴다.
"대표 님이랑 둘이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언제 아이까지 만들 줄은..."
정연이 중얼거리듯 하정에게 입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하정의 눈초리가 꽤 뾰족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난 그냥... 너무 놀라서."
정연이 억울하다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근데 9 주나 되도록 몰랐던 거야? 너 생리 주기가 안 맞는 건 알지만 그래도 두 달이나 안 왔을 거 아냐. 몰랐어?"
정연이 말이 맞았다. 

평소 생리 주기가 매번 달랐던 난 다른 여자들처럼 같은 날짜에 생리가 오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러다 몸이 피곤하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한두 달을 거른 적도 몇 번 있었던지라 이번처럼 생리가 안 온 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속이 부대끼는 것처럼 몸의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감정 소모가 많았던 2개월이었다. 

몸에 그냥 한계가 오고 있나 싶었을 뿐이었다. 

저번에 회사 근처에 있던 약국에 약사가 염려하던 말이 진짜였다니…

하정의 잇새로 한숨이 쏟아져내렸다. 

어떡해야 하는 거지?

이제 난 뭘 어떻게 해야…

강은서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거지?

아무 일도 없었던 일처럼 살아가기엔 이미 다 틀어졌는데…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미연은 넋이 나간 하정을 데리고 초음파 실로 향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하정의 아랫배에 차가운 젤리를 꼼꼼히 바르고 그녀의 배 위로 탐촉자를  살살 굴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여기 보이시죠? 9주 차 태아는 이제 젤리 곰같이 귀여운 모습을 띄고 있죠? 태아 크기는 이제 2센치 조금 넘고요. 아주 작습니다.“

초음파 화면 속에는 의사의 말대로 아주 작은 생명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꼭 젤리 곰 같아보여서 너무나 귀여웠다. 

겉보기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정의 두 눈은 화면에서 떨어질 줄을 몰라 했다. 곁에서 화면을 같이 확인한 미연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팔다리도 생겨서 한층 더 아기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답니다. 주수에 맞게 잘 자라고 있고요. 임신이 되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기 심장소리도 오늘 처음 듣게 되겠네요. 한번 들어볼까요?“

얼떨떨한 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귀를 쫑긋했다.

중년으로 보이는 어여쁜 의사가 싱긋 웃으며 스피커 음을 올렸다. 

“쿵, 쿵, 쿵, 쿵….”

2센치 조금 넘는다는 작은 태아의 심장소리는 엄청 크고 빨랐다. 

하정의 동공이 확장되고 크게 떨렸다. 

“우렁차죠? 박동수 수치도 정상이고,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엄마에게 알려주는 거 같죠? 엄마가 자신의 존재를 늦게 알았어도 건강하게 잘 크고 있었어요. 9주 차면 유산의 위험도 팍 줄고 큰 걱정을 안 해도 되겠습니다.“

”저… 선생님.“

하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네. 말씀하세요.“

”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어요. 또… 또 7월 초에 많이는 아니지만 약도 복용을 했었어요. 전… 정말 모르고 그랬지만… 아기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 아니겠죠?”

하정이 곧 울음을 터뜨릴 듯 다급하게 물었다. 

”안 마셨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다른 분들도 임신한 줄 모르고 간혹 술을 마시기도 한답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대신 이제 알게 된 이상 술은 금지고요. 7월 초면 극 초기인데 그때 드신 약도 큰 문제는 없을 거로 보입니다. 3주 뒤에 기형아 검사가 진행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는 생각보다 강하니까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건네는 의사의 긍정적인 대답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되는지 하정이 들썩이던 어깨가 차츰 잦아들었다. 

***

간호사에게서 초음파 사진과 아기 수첩을 받아든 하정은 미연과 정연이 함께 병실로 돌아왔다. 미연은 며칠 입원해야 하는 하정이 곁에서 간호를 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지낼 물건들을 챙기러 집으로 갔다. 정연이가 제 차로 같이 가자고 했지만 하정이 곁을 지켜주라고 한사코 거절을 하며 홀로 병실을 나섰다. 

하정은 그저 조용히 한참 동안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귀엽다. 그치?”

정연이 딱딱해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하정아. 

정연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없이 한참을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던 하정의 모습이 이상해 보였다. 

“하정아??”

정연은 당황했다. 

자신의 배를 어루쓸던 하정이 두 눈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그득 올라 찼다. 

“그 사람이 정말 미워.”

하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가 강은서의 동생이란 걸 알면서도 나한테 아무 언급도 안 했던 권기혁이 너무 싫어!”

하정이 날선 목소리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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