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4회)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아한 듯해요.
“강유하 씨?”
앞에 바위처럼 우뚝 서있는 이 남자는 불쾌해하는 채이의 반응이 안중에 없는 듯 그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남자도 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노려보는 거야?
그 아저씨는 싫으면 거절하면 된다고 했는데. 왠지 이 찝찝한 느낌은 너무 예감이 안 좋다.
“발목, 아픈 거야?“
그제야 알았다. 강유하는 채이가 못마땅해서 노려본 게 아니라 서 있는 자세가 점점 흐트러지며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두 눈에 다 담고 있었다는걸.
“너무 오래 서있어서요. 별거 아니에요.”
새초롬한 목소리가 유하의 귀에 닿았다. 다신 볼 일이 없는 이 남자한테 자신의 상태를 일일이 얘기해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김지한 이라는 그 아저씨한테서 이미 대충 들었어요. 전 강유하 씨가 생각하는 그때 한채이가 아니에요. 몇 년 전 기억을 잃었고 기억을 잃기 전 강유하 씨를 얼마나 좋아했던 말았던 제 기억에는 없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채이가 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 강유하 씨를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아한 듯해요.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는 데도 심장이 떨리거나 그런 건 하나도 없거든요. 전에 어디에서 본 적이 있어요. 기억은 잃어도 몸의 다른 세포들은 그 사람을 기억할 수가 있다고요. 제 심장은 일단 강유하 씨한테 두근거리지 않아요. 사랑했다면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그쪽한테 설레는 게 아니라도 가슴이 절절하고 아프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기 쪽에 좀 알아볼까, 이 순간 채이는 나름 독하게 뱉은 제 발언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약속대로 돈은 받았으니 난 네가 찾는 한채이가 아니라고 콕 집어서 얘기는 못 하겠고, 기억을 잃었으니 너란 사람은 모르겠다, 배 째를 시전했다.
통했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
여태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것처럼 강유하는 무감한 태도로 채이를 대하려는 듯했다. 더 이상의 오가는 대화가 없던 강유하가 채이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더 이상 발목의 통증을 못 이기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딱딱한 바닥에 앉은 그 느낌? 괜찮아. 자주 있었던 일이었고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거니까.
문제는, 강유하라는 이 남자를 독한 말로 떨쳐낸 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이 찝찝한 기분은 어떡하지?
분명 강유하는 채이의 마지막 말까지 듣고서 많이 흔들렸다.
어금니를 앙 문 채이는 눈빛이 흔들리는 강유하를 보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독해야 한다. 다시는 이 불쌍한 영혼을 마주하지 않으려면. 난 강유하가 원하는 한채이가 아니니까.
본인 절로,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길 바라요.
왜 그럴까, 단단해 보이던 바위가 자세히 뜯어보니 수년의 모진 비바람을 맞았는지 핵심 자리에 크나큰 구멍이 뚫려있는 것만 같았다는걸. 분명히 멀끔하고 단정하기 짝이 없는데도 너덜너덜해진 누더기 같았던 그 허연 얼굴과 공허한 눈빛은 이상하게 채이의 단단한 속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
“어머니~”
너무나도 밝고 애교스러운 채이의 고운 목소리가 조용하던 시장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어머, 채이야. 여긴 왜 온 거니. 이 더운 날에. 바로 식당에서 만나자니깐.”
채이를 보자마자 안타까워하며 바로 그녀의 두 손을 꼭 맞잡아주었다.
“수호야. 채이 데리고 먼저 식당에 가 있어. 엄마가 금방 마무리하고 갈 거니까.”
선풍기가 두 대나 틀어져 있지만 무더위 속 시장 안은 습하고 많이 후덥지근했다.
”채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있어야죠.“
오늘은 채이가 편의점을
쉬는 날 달에 두 번정도 수호 어머니인 미란이와 채이, 수호 셋이서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수호도 분명히 채이를 말렸었다. 시장에서 반찬을 만들어 팔고 있는 미란이한테 가서 돕자는 채이의 말을. 미란은 수호한테 절대 채이를 더운 시장 안에 발을 못 들이게 하라고 했었고. 그러나 채이는 미란이가 혼자서 고생한다고 또 말을 안 듣고.
혼자 중간에서 이상한 놈이 되었다.
채이는 미란이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팔다 남은 김치를 담은 대야를 번쩍 들어 냉장고가 있는 창고로 옮겼다.
“어이구. 허리 다칠라. 이놈아. 빨리 가서 건네받아.“
미란이 혀를 끌끌 차며 다른 대야를 들고 있는 아들의 등짝을 내리쳤다. 그제야 어느새 저보다 먼저 행동 개시에 나선 채이를 발견한 수호가 그녀한테 얼른 다가갔다.
”채이야. 넌 가만히 있으라니깐. 나 엄마한테 혼나.“
”셋이서 같이 하면 금방 끝나잖아. 응? 수호 오빠아~“
채이의 왕방울만 한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빛을 발사했다.
채이 너를 어떡하면 좋으니. 예쁜 데다가 마음씨도 착해서.
수호의 두 눈이 반달로 접혔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채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
“채이야. 많이 먹어라. 왜 이렇게 살도 안 찌는 거야. 응?”
동네에 꽤 유명한 해물찜 가게로 발을 들인 미란은 먹음직스러운 낙지와 여러 해물들을 접시에 듬뿍 담아서 채이의 앞에 내밀었다. 접시에 담을 집게를 잡는 것도 채이와 눈치 싸움을 하며 얼른 낚아챘다. 매번 가만히 있을 채이가 아니라서 또 가장 맛있는 해물들을 제 앞에 대령할 게 뻔했으니 이번엔 미란이가 먼저 이 예쁜 예비 며느리한테 듬뿍 떠주고 싶어서였다.
”어머니~ 너무 많아요.“
채이가 손사래를 치자 미란이 주름이 깊은 두 눈에 부러 힘을 주었다.
”안 돼. 오늘은 내가 주는 거 다 먹어야 돼.“
”흐잉.“
채이가 앓음 소리를 내며 귀엽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젓가락으로 유난히 큰 통낙지를 집어 미란이 앞접시 위에 얹었다.
“오동통한 통낙지는 더운 곳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드시는 걸로 해요. 전 에어컨 빵빵한 편의점에서 일하잖아요. 더운 곳에 오래 있으면 기력이 떨어지니 힘에 좋은 낙지는 어머니께서 드셔야 해요.“
“에그, 이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안 되겠다. 이러다 서로 접시에 옮기다 말겠다 싶은 수호가 말렸다.
“엄마, 그냥 드세요. 채이가 엄마 생각해서 하는 예쁜 마음인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낙지는 아까 추가를 했으니까 아래에 더 깔려 있을 거예요.”
수호가 미란에게서 집게를 건네받고 해물찜을 얼른 뒤적거렸다. 정말 수호의 말대로 통낙지가 또 한 마리 튀어나왔다. 수호가 통낙지를 집게로 집어 채이 앞에 얹어 주면서 가위로 잘라주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미란은 팔자 주름이 더 깊어지도록 활짝 웃었다.
수호는 미란이 앞에 있는 낙지도 먹기 좋게 잘라주며 입을 열었다.
“엄마 허리 아프시던 거 어때요? 병원은 잘 다니고 있는 거죠?”
미란이와 한 집에 살고 있지만 새벽같이 시장에 나가서 반찬을 만들어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는 미란이와, 밤이고 낮이고 쪽잠을 자면서 택배 일을 하는 수호는 집에서 사실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응. 병원에 다니고 있지. 당연히.”
“병원 진료받은 거 확인 시켜줘봐요.“
수호는 낙지를 한 입 베어 물며 끄덕이는 미란이 말을 믿지 않았다.
“뭘 확인까지 한다고 그러냐. 얼른 먹어. 우리 아들도 고생하니, 이 전복이 좋구나. 얼른 먹어.”
어색한 표정으로 급하게 전복을 집어 아들 앞에 밀어놓는 걸 봐서는 또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병원에도 안 간 게 뻔했다.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요. 엄마.”
“맞아요. 어머니. 병은 키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채이가 정말 미란이가 걱정스러운지 미간에 없던 주름을 만들었다.
“엄마가 알아서 할게. 얼른 먹어.”
미란이 멋쩍게 웃으며 다시 낙지를 입안에 넣었다. 오동통한 낙지가 입안에 들어오니 하루 종일 힘들었던 게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해물찜은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살았던 미란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걸 잘 아는 채이가 휴대폰으로 검색하며 찾은 숨은 맛집이었다. 미란은 꽤 도톰한 낙지다리를 집어 수호 입에 넣어주고 있는 채이와, 맛있다고 엄지를 척 내밀며 깨알이 쏟아지는 이 커플을 마주 보며 더 없는 행복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50년 넘게 살았던 고향을 떠나 3년 전 아들 수호와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추억이 많이 깃든 고향을 떠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박에 미쳐 가정을 파탄 낼 일만 남은 남편이라는 작자를 멀리하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젊었을 때의 남편은 안 그랬었다. 착했었고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호가 중학교를 다닐 때쯤인가, 하려던 작은 사업이 지인의 사기로 물 건너가고 하루하루 타락의 길을 걷던 남편은 급기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없는 살림에 도박까지 하니 구멍 난 집에 메꿔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살점을 도려내고 있었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살자는 미란의 잔소리에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처음으로 발길질을 한 다음부터는 가정폭력까지 겸한 저급한 인간이었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은 어김없이 매질을 해댔다. 말리는 아들 수호도 매질의 대상이었다. 도박할 돈이 없어도 때리고, 고기반찬이 없다고 때리고, 그저 기분이 나쁘다고 때리고.
옆집의 신고로 경찰도 다녀갔지만 아이의 아빠라 그냥 돌려보냈다. 그렇게 수년을 지냈다.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아지겠지. 사기를 당한 배신이 커서 그러는 거겠지. 정신을 차리는 날이 오겠지.
그러나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날도 반찬을 팔아 조금 번 돈을 억지로 빼앗은 남편은 몇 번의 발길질을 한 뒤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일하러 나갔다 들어온 수호는 그날따라 맞아서 얼굴이 찢어지고 부은 미란을 보고서 많이 안타까워했다.
상처에 약을 꼼꼼히 발라주던 수호의 눈빛이 평소보다 많이 어두웠다는 것쯤은 어미인 미란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빼앗은 돈으로 술을 거하게 마신 남편이 밤늦게 돌아왔다. 입에는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고 몸을 제대로 못 가눈 채 여기저기 벽에 부딪히는 바람에 소란스러웠다.
[좀 적당히 하시죠.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람이 맨날 술 처 드시고 도박이나 하는 인간으로 살지 말고 좀! 사람답게 살라고요!]
중학생 때부터 긴 세월 동안 이어오던 폭력적인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수호였다. 그날은 눈알이 돌아간 수호가 참다못해 남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처음이었다.
[뭐라고 이 새끼가!!!]
당연히 커다란 손바닥이 수호의 뺨에 거칠게 내려앉았다. 분이 안 풀린 남편이 또다시 팔을 들었을 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수호의 손아귀에 남편의 팔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들이 작정하고 힘겨루기를 하니 늙은 아비는 아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 집에 당신은 필요 없는 인간이니 다시는 그 더러운 몸뚱어리를 들이지 마세요. 나가세요.]
거칠게 남편의 팔을 내치며 수호가 돌아섰다.
[너 이 새끼!! 네가 감히 나한테 대들었다 이거지!]
부엌에 있는 식칼을 거머쥔 남편이 수호에게 달려들자 미란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수호야!!! 조심해!!!]
정말 다행이었다. 미란의 다급한 외침에 큰 화를 피한 수호는 다행히 손에 칼날이 스친 것 빼고는 큰 상처가 없었다. 취한 남편이 제 몸을 제대로 못 가눈 덕도 있었다.
수호는 취해서 쓰러진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다. 수년간 이어오던 가정폭력과, 도박. 그리고 흉기로 아들을 찌르려고 했던 중범죄. 수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경찰에 다 진술했다.
미란은 후환이 두려워 떨었지만 수호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남편은 감옥에 들어갈 테고 우린 여기에 남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남편은 실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미란은 아들을 따라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수호도 불쌍한 사람이네요. 수호가 채이 많이 좋아하는데 유하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해서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요.
불쌍합니다. 쓰다보면 왜 자꾸 불쌍한 컨셉을 잡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잃은 유하도 불쌍하고 다 너무 마음 아픈 사람들이네요.
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