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5회) 사랑해, 수호 오빠.
“아~~ 배불러.”
채이가 위가 빵빵해진 제 배를 톡톡 두드리며 가게를 나섰다.
“많이 먹었니? 채이 너는 더 많이 먹어서 살 좀 찌워야 돼.”
”어머니 덕분에 너무 많이 먹었어요.“
미란이가 별로 나오지도 않은 배를 제게 쏙 내밀어 보이는 채이를 보며 픽 하고 웃었다. 악마 같은 남편을 벗어난 것도 천지개벽할 일인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니….
참고 살아온 세월에게 고마웠다. 안 좋은 시간들을 흘러 보내고 나면 좋은 날도 필히 온다는 그 말을 믿고 버티기 잘했다.
“얼른 채이를 데려다주고 와.”
흐뭇하게 채이를 넌지시 바라보던 미란이가 늦은 시간이란 걸 자각하고 수호의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 다음에 또 맛있는 가게 찾아놓을 게요.”
“그래. 알았어.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
미란에게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나눈 채이가 수호와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걸어갔다. 아들과 손을 꼭 잡고 가느다란 팔을 휘휘 저으며 신나게 가는 뒷모습을 보며 미란의 입매가 많이도 휘어져 올라갔다.
쭉 요즘 같았으면.
***
“왔어?”
“응~~~ 소은 언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채이는 저를 반기는 소은한테 와락 안겼다. 소은의 어깨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왜 이래, 한채이.”
애교가 많은 채이라 집에 들어오면 종종 이렇게 강아지처럼 매달릴 때가 많은지라 왜 그러냐는 말과는 다르게 소은은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있었다.
“술 마셨구나?”
“와아~~~”
소은의 어깨에 기댔던 채이가 상체를 벌떡 세웠다.
딱 맥주 한 잔을 마셨는데 그걸 눈치챘다고?
“한잔했구나?”
“응. 딱 한 잔.”
팔짱을 두르고 한쪽 눈썹을 치켜뜬 소은을 마주한 채이가 검지를 빼어들고 배시시 웃었다.
“수호 씨는 그냥 갔어? 들어와서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고 하지.”
“나도 그랬는데 오늘은 택배 일을 안 나가는 대신 대리운전을 하러 간다고 하길래.”
“와…. 수호 씨 정말 열심히 산다.”
정수기에서 갓 받은 시원한 물을 소은에게서 건네받은 채이가 식탁 앞에 앉았다. 벌컥벌컥 들이켜고 물컵을 식탁에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렇지? 수호 오빠랑 있으면 난 굶어죽는 일은 없을 거 같아. 남자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이 한채이가.“
”그래. 수호 씨는 부지런하지 착하지, 채이 너한테 잘하지. 남자 하나는 잘 골랐다.“
소은이가 인정해 주자 채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 남자만 아니면 요즘 정말 좋은 일들만 있는 건데.”
웃던 채이가 금세 시무룩해지며 혼잣말을 했다.
“응? 그 남자라니?”
채이의 앞에 마주 앉으며 소은이가 물었다.
“어? 아. 손님 얘기야. 진상 손님이 있었거든. 하, 하하.“
과하게 웃어넘겼다.
”그래? 그런 이상한 놈들은 좀 지구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네. 우리 채이 괴롭히지 말고.“
”그러게~~.“
머리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채이가 소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저한테서 들은 얘기는 태산 그룹 차원에서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지한이가 건네준 비밀유지 각서에 사인까지 하고 왔으니….
아무리 소은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채이라고 할지라도, 소은이가 어데 가서 막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사기꾼이거나 치매를 앓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채이가 끝내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건 TV에서 보았던 그 얼굴과 똑같은 인물이 채이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비밀유지 각서에 사인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장난질에 장단을 맞춰주자는 마음으로 해주었다. 읽어보니 자신한테 불리할 내용은 없었으니. 돈 봉투를 보았을 때는 살짝 의아했지만 요즘은 사기를 치기 전 먼저 투자를 하는 건가 싶었다. 아니면, 가짜 수표던가.
그다음 날 지한의 말대로 강유하는 정말 퇴근하는 채이의 앞에 나타났다.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가, 부드러웠다가 또 서늘했다가. 여러 기운이 그에게서 들락거렸다.
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또 보자고 했는데 그건 그냥 오기겠지. 얼마나 좋아했던 이제 저를 기억도 못 하겠다, 사랑한 기억조차 없다고 하는데 자존심도 없이 구질구질하게 다시 찾아오겠어? 그것도 태산 그룹의 상속자라는 그 대단한 인물이.
채이는 피식 헛웃음을 치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에 시원하게 샤워를 끝낸 채이가 느른한 몸을 침대 위로 던졌다.
“오늘 수호 씨랑 하루 종일 뭐 했어?”
손에 화장솜 한 뭉치와 하얀 통을 들고 온 소은이가 침대 옆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내년에 같이 살 집을 구경했지. 아이
쇼핑.”
채이가 눈을 감은 채 히쭉 웃었다.
”벌써? 일 년이나 훨씬 남았는데?“
소은이 하얀 통을 좌우로 마구 흔들어댔다.
”그냥~ 미리 어떤 집들이 있는지 구경하는 거지 뭐.“
감았던 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이었다.
”그래 마음에 드는 집이 있던?“
소은이 채이에게 손을 내밀자 뜻을 알아차린 채이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제 팔을 꺼내들었다.
”있었지~ 아니. 많았지.”
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분명 좋은 집은 많은데 선택은 한계가 있었다는 아쉬움이었을 것이었다.
소은이 화장솜에 하얀 통에 담겼던 액체를 묻히며 입술을 떼었다.
“눈 감아.”
채이는 말없이 두 눈을 꼭 감았다.
채이의 손목 안쪽에 화장솜을 갖다 대었다. 진한 컬러의 타투 스티커가 리무버를 바른 화장솜에 의해 지워지고 있었다.
“근데 언니는 왜 내가 화상에 데인 자국을 못 보게 해?”
말을 잘 듣는 채이가 두 눈은 질끈 감은 채 소은에게 물었다.
“너 징그러운 걸 잘 못 보잖아.“
리무버에 의해 말끔하게 지워진 손목에 다시 새로운 타투 스티커가 소은에 의해 입혀졌다.
”나 근데 언제부터 타투 스티커를 하기 시작했어?“
”뭐야, 잊은 거야?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러면 어떡해. 내가 타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하기 시작했잖아.“
“그게 언제야?”
여전히 감은 채이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들춰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줌마가 돌아가신 충격이 컸구나 정말. 다른 건 다 기억하면서 가끔 이러는 게.”
“그런가….”
채이가 수긍을 하는지 조용해졌다.
4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채이의 엄마는 일 년을 병상에 계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그때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엄마의 몸이 시간이 흐르면서 갖은 흉터로 변하는 걸 본 채이는 그때부터 심적으로 그런 걸 보기 힘들어했다.
병원을 오가며 고생하던 채이가 생각난 소연은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며 파르르 눈꺼풀을 떨고 있는 채이를 불렀다.
“이제 눈 떠. 채이야.”
한쪽의 커다란 눈을 빼꼼 열어버린 채이가 제 손목을 들어 올렸다.
“어? 이번엔 다른 글이네? 뭐야 이거?”
이번에도 짙은 컬러를 바탕으로 그 위에 짧은 글귀가 있었다. 읽을 줄은 몰라도 저번 글귀랑 다르다는 정도쯤은 알 수가 있었다.
“라틴어야.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소연이 다 쓴 화장솜을 챙기고 리무버 뚜껑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좋은 글귀네.”
채이는 새로 바뀐 타투 스티커를 빤히 쳐다보고 싱긋 웃었다.
채이와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서로를 잘 아는 소연은 몇 년 전 타투에 빠져서 몸에 크고 작은 타투를 새기러 다니다 문득 저 자신이 직접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면서부터 타투이스트의 길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서 지금 작은 가게를 직접 운영하고 있는 소연은 사실 전부터 채이에게 영구 문신을 추천한 적이 있었다. 채이가 거절을 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많이 아플가봐 였다.
“언니. 피아니스트 중에 강유하라고 알아?”
채이가 침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앉았다.
”응?“
채이의 방에서 나가려던 소연이 우뚝 멈추었다.
“누구?”
“강유하.”
소연이 두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모르겠는데. 왜?”
“아니야. 그냥 TV에도 나오는 사람이라 혹시 이름만 들어도 아나 싶어서.”
채이가 얘기할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몸을 축 늘어뜨려 침대에 누웠다. 딸기 패턴이 잔뜩 들어간 얇은 차렵이불을 당겨 제 배를 덮었다.
“잘 자. 언니.”
“응. 너도 잘 자.”
싱거운 채이를 한 번 더 흘깃 쳐다보던 소연은 점등을 하고 채이의 방에서 나갔다. 소연이 나가자 바로 잘 것처럼 감았던 눈을 뜬 채이가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한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전 회장님께서는 생전에 강유하 전무님이 태산에서의 자리를 뺏길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땐 발톱을 감추고 있던 그자들이 전무님만 남으시게 되면 발톱을 드러내고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할 거라는 걸 잘 알고 계신 거죠. 그래서 그동안 홀로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자신의 형과 여동생의 약점이 될 각종 정보들을 수집했었고 그걸 어딘가에 보관을 해두었죠. 문제는 전무님한테만 그 장소를 알려주셨는데 그 기억을 잃으셨으니….]
발톱 얘기에 온화하던 지한의 모습에서 점점 분노로 이글 거리는 눈빛을 보고 채이는 더욱 마음을 굳혔다.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자.
조용히 살다가 내년에 수호 오빠랑 결혼을 하고 오빠와 나를 반반 닮은 아이도 낳고…
여기까지 생각한 채이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아직 수호한테 꺼내지 않은 말이지만 수호의 어머니인 미란이도 모시고 함께 살 집으로 알아보자고 해야겠다며 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오는 눈꺼풀을 못 이기고 하품을 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채이는 악몽을 꾸었다. 강유하한테 억지로 보쌈을 당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인형처럼 그의 앞에 전시되어 있는 아주 끔찍한 꿈을. 꿈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
악몽으로 잠을 설치던 채이가 동트는 걸 확인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점심까지 늦잠을 자는데 연신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눈을 뜬 채이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채이야!”
“수호 오빠. 웬일이야?”
수호였다. 얼굴에 긴장이 가득 곁든 채 채이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이만 부은 두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었다.
“여태 잠을 잔 거였어? 후우…”
“우아암~~~ 응.”
하품을 요란하게 하며 채이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다행이다.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전화도 안 받고 말이야.”
“전화? 아…. 배터리가 없을 거야. 충전한다는 걸 깜빡하고 그냥 잠들었어.”
채이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가 멋쩍게 웃으며 이마를 긁었다.
“소은 누나는 가게에 이미 나갔다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넌 이 시간까지 잘 안 자잖아. 어제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채이의 머릿결을 습관처럼 쓰다듬으며 수호가 안도했다.
“미안. 어제 악몽을 꾸는 바람에 아침 다 되어서 다시 잠들었거든.”
“응? 무슨 악몽을 꾸었길래.”
수호가 호기심에 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디 도망도 못 가고 강유하한테 잡혀서 인형처럼 전시되어 있었다는 말은 하면 안 되겠지. 채이가 머리를 저었다.
“무서운 유령을 보았거든. 자는 내내 쫓겨 다녔어.”
“아…”
씨익 웃으며 별일 아닌 듯 재잘 거리는 채이에 수호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아기같이 뽀얗고 여린 채이를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수호가 입매를 한껏 올렸다.
“이거 때문에 들르고 일하러 가려고 했거든.”
그제야 제 손에 한참 들려 있던 무거운 짐을 채이 앞에 내밀었다. 여러 반찬이 가득 담겨 있는 반찬 통들이었다.
“뭐야~ 저번에 주신 반찬 아직 남았는데 어머니가 또 주셨어?”
채이가 얼른 받아들며 고생해서 만든 반찬이 자꾸 저한테로 오는 것만 같아 안타까워했다.
“엄마가 어제 주려다가 갖고 가는 거 힘들다고 오늘 나보고 갖다주라고 해서. 엄마가 채이 너 생각해서 따로 만든 거니까 먹어. 다 먹으면 또 만들어줄 거니까.”
“수호 오빠…”
채이의 똘망한 두 눈망울에 감동과 미안함을 동반한 아련함이 묻어났다.
너무나도 착한 남자를 알게 되어서, 또 저 자신을 딸처럼 여기는 예비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어서 더없는 행복감을 느낀 채이가 반찬 통을 바닥에 내리고 이 고마운 사람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사랑해. 수호 오빠.”
채이가 기억을 잃었다는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네요.
네. 사연이 또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