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43회) 나, 당신을 좋아해도 될까요?
3월이 되어 채이는 자신이 원하던 캠퍼스에 들어갔다. 원하던 대학 생활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웃으며 밥을 먹고 수업을 듣는 게 생각보다 어색하고 적응하는 게 시간이 걸렸다.
사람을 적응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갓 입학한 1학년 신입생들은 무척이나 바빴다. 셀 수 없이 많은 모임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 환영회는 무조건 가야 한다고 해서 어색한 자리를 함께했고, 여러 동아리에서 신입 뺏기에 들어가면서 각종 모임에 끼워 넣었다.
선후배 사이가 좋아져야 원활한 대학 생활을 할 수가 있다며 정말 별난 이름을 붙여가며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의 끝에는 항상 술과 함께였다.
갓 성인이 되어 음주에 익숙하지 않던 신입생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붓듯이 죽어라 들이켰다. 당연히 실수도 잦았고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려 끙끙 앓는 동기들이 많았다.
채이는 이미 한차례 크게 겪은 적이 있었던지라 신고식이랍시고 비워내는 내내 술잔을 채워주는 선배들의 술을 요래조래 피해 가면서 적당히 마셨다.
[술, 적당히 마시고.]
작별 인사를 하면서 건넨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 키가 엄청 크고 저보다 더 뽀얀 얼굴을 가졌으며,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그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늘도 애꿎은 폰만 매만졌다. 한 달이 훨씬 지났는데 대체 언제 연락한다는 거지, 먼저 연락을 해볼까.
통화를 한다면 무슨 말부터 시작하지? 라이브로 그를 응대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거 같으니, 문자를 보낼까.
몇 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은 포기했다.
이 정도면 나란 존재는 잊은 거 같기도 한데, 쉽게 포기가 안 되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만 자꾸 나갔다.
“피아노 학원 알아보시나요?“
“네? 아, 아니요. 수고하세요.”
염탐하다 들킨 채이가 어느새 저한테로 다가온 학원 관계자를 마주하고 깜짝 놀라했다. 삽시에 빨개진 볼이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가늠할 수가 있었다.
집과 캠퍼스를 오가면서 많은 상가 건물을 통과하게 된다. 대학교가 있는 동네라 그런지 건물마다 학원이 즐비했다. 문리 어학계열
학원을 비롯해 예체능 계열 학원도 많았다. 특히나 피아노 학원만 보이면 저도 모르게 발길이 그리로 향했다.
혹시나 정말 우연처럼 나랑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는 않을까,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정말 우연히 말이다.
그래서 자꾸 기웃거리게 되었고 또 오해를 받았다.
채이는 겉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상 지독한 상사병에 걸린 여자가 되었다. 수강 신청을 하랴, 싫다는 사람 붙잡고 동아리 타령을 하는 선배들을 따돌리느라 정말 바빴지만, 마음 한구석은 항상 허전하고 고팠다.
보고 싶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갈망한 적이 없어 더욱 목이 마르고 애가 탔다.
채이의 마음이 그러하든 말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분홍색 벚꽃잎이 온 하늘에서 마구 흩날리던 4월의 어느 날, 드디어 전화가 걸려 왔다. 익숙한 그 번호로.
“잘 지냈어?”
단번에 그사람인 걸 알았다. 그래서 부푼 가슴을 부여잡고 여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었다. 연락처에 뭐라고 저장해야 할지 몰랐기에.
“이름이 뭐예요?”
“……”
상대방은 다짜고짜 묻는 말에 당황했는지 몇 초 정적이 흘렀다. 질문이 이상한 건가 싶어 머리를 굴리던 채이가 아차, 싶은 마음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게, 누군지 아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이름을 안 물어봤었더라고요. 정말 궁금했었어요.”
해명이 필요했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난 네가 누
구인지 알고 있고 잊은 적이 없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듯했다.
안도하는 작은 웃음이 전화기 너머로 흘러들어 왔다.
“강유하.”
강유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2개월 만에 통성명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도 좋을 수가 있을까, 자꾸만 궁금하고 자꾸만 보고 싶을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섬에서 헤어진 이후로 몇 개월 만에 유하랑 다시 만나기로 한 채이는 주말 아침 일찍부터 너무 바빴다. 옷장 속 많지 않은 봄옷을 죄다 끄집어내서 침대 위에 널어놓았다.
작년에 샀던 하얀 블라우스는 여리여리한 게 포인트라 마음에 드는데, 거기에 맞춰 입을 치마가 애매했고, 심플한 티는 당연히 데이트 룩으로는 너무 심심….
으멋, 데이트래, 데이트!
꺄아아악~~!
옷을 고르던 채이가 침대에 발라당 누운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채이야, 주말 아침부터 왜 그리 소란스러…. 어머, 이게 다 뭐야?“
주방에 있던 엄마가 채이 방문을 열어보며 깜짝 놀라했다. 항상 저절로 정리정돈을 잘하던 딸아이 방이 어질러 있는 걸 보았던 것이었다.
“아, 약속이 있어서요. 엄마 나가요. 나 바빠.”
채이는 얼굴을 붉혔고, 황당해하며 방안을 자꾸 훑는 엄마의 등을 떠밀었다.
엄마가 나가자 다시 오늘 입을 옷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
약속 시간은 오전 11시, 설렘으로 아침 일찍 기상한 채이는 결국 물 한모금도 못 마신 채 허둥지둥 약속 장소로 뛰어갔다. 옷을 고르고 서투른 화장을 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름 괜찮은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하늘은 맑았고, 세상은 벚꽃으로 온통 하얗게 물들었지만 채이는 그걸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웠던 이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총총 빠른 걸음으로 움직일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사한 벚꽃 나무 아래에 우뚝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저 하얀 티에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화보를 찍고 있는 연예인 같았다.
다리는 왜 저렇게 길어.
채이는 문득 궁금했다. 저 정도의 다리 길이를 소유하면 살면서 바짓단을 줄일 일은 없겠다고.
채이는 손을 폈다. 엄지와 검지를 맞물려 앵글을 만들어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유하에게 향했다. 채이는 커다란 유하를 손가락으로 만든 앵글 속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유하와의 거리가 좀 있는지라 그게 가능했다.
찰칵, 소리를 죽인 채 손가락 사진을 찍은 채이가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서, 넋을 잃고 그곳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채이의 코끝을 자꾸 자극했다.
사르르-,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벚꽃잎이 봄바람에 또 한차례 공중에 마구마구 뿌려지고 있었다. 고심 끝에 골라 입은 채이의 무릎까지 오는 하얀 원피스 끝자락도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채이는 유하에게서 눈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화사한 벚꽃 눈이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아보았다.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채이의 양 볼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들었다. 올해의 봄은 유난히 따뜻하고 예쁜 것 같았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내렸다. 벚꽃 감상은 끝났고 이제 궁금했던 그한테 가볼 차례였다.
빨리 가서 아는 척을 하고 싶어서 연분홍색 펌프스 구두를 내디디던 채이가 멈칫했다. 담담한 시선이 어느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하나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꼼짝을 안 했고, 서로를 마주한 눈빛이 엉키는데 채이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 당신을 좋아해도 될까요?
“예쁘네.”
도통 움직일 줄 모르던 채이에게 먼저 다가온 유하가 한 첫마디였다.
…
남해 끝자락 욕지도로 관광을 간 건 정말 잘한 거 같다.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었을까.
아마, 이 평생 없을 거야.
채이는 그렇게 믿었다.
유하와 채이는 조용히 벚꽃 거리를 걸었다.
길 양쪽에 벚꽃 나무가 무성해서 꼭 마치 끝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거 같았다.
유하는 걸음이 느린 채이의 보폭을 따라 긴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와 나란히 섰다. 아까부터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거 물어도 돼.“
앞을 주시하며 걸어가던 유하가 정적을 깨버리자 채이는 보폭을 더욱 줄였다. 조금 앞서가던 유하가 멈춰서 채이를 돌아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물어도 되는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는 채이의 정곡을 찔렀다.
”많이 바빴어요?“
왜 이제야 연락했어요?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고요.
채이가 입술을 꾹 닫았다.
”조금.“
아버지와 타협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
“날 잊었을까봐, 좀 걱정했어요.“
좀이 아니라 많이요.
직설적인 성격이 절대 아닌데 채이는 자꾸 속에 들어 있는 진심을 끄집어냈다. 의도한 건 절대 아니요, 그냥 오늘처럼 이렇게 만났을 때 안 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거 같았다.
”나도.“
두툼하게 닫혀있던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놀라운 말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에요?“
들었음에도 재차 확인을 했다. 듣기 좋은 말은 백 번 들어도 기분이 좋다는 걸 알기에.
”네가 궁금했고, 나 역시 네가 날 잊었을까 봐 걱정되었어.“
채이의 갈색 동공에 지진이 난 듯 마구 흔들렸다.
망했다.
심장이 너무 제멋대로 쿵쿵 뛰어대서.
싱긋 웃으며 홀리듯이 흘린 유하의 진심은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채이를 설레게 했다.
벚꽃 길을 걷는데 자꾸만 그의 기다랗고 고운 손등이 스쳐 지나며 닿았다. 와락 그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채이는 참았다. 여자가 너무 적극적이면 안 되지. 지조를 지켜야지.
그러면서 배시시 삐져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가 없어 저 혼자 입꼬리를 들춰 올렸다.
주말이 되면 유하를 만났다. 평일의 그는 바쁜지 짧은 문자만 주고받았지만 채이는 기다리기로 했다. 피아노 학원에 학생들이 많은가보다. 그저, 그렇게 여겼다.
4월의 어느 날, 그날도 유하와 마지막 벚꽃길을 조용히 걷던 채이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여자 친구는 안 보고 싶어요?”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채이는 섬에서 술김에 유하와 주고받았던 얘기들이 차츰 떠올랐다. 그는 여자 친구가 있어 보였다.
걸어가던 유하가 우뚝 멈춰 섰다.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외국에 두고 온 여자 친구가 보고 싶지 않나 해서요.”
채이가 고개를 내리고 혼자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사실, 여자 친구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외국에서 살던 남자라 언젠가는 돌아갈 것만 같았고 언제 돌아가는지도 묻지 못했지만 다 궁금했다.
유하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묻지 못했다. 묻는 그 순간 그가 내일 당장 떠난다고 할까 봐서.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 너랑 이렇게 자주 만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그저 무심한 듯 툭 던지며 유하가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늘졌던 채이 얼굴에 약간 생기가 감돌았다.
말뜻인즉 없다는 거지?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거야.
유하의 뒤를 총총 쫓아갔다.
그날, 채이는 집 근처까지 데려다준 유하를 향해 용기내 고백했다.
유하는 좋고싫음의 말이 없었지만, 채이의 고백에 화답하듯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한테서 좋은 향이 났다.
채이는 그날을 연애 1일 차로 정했다.
…
“유하 오빠, 이번 주말 뭐할까?”
음료수 중 최애인 딸기 쥬스를 빨대로 쪽쪽 빨던 채이가 마주 앉은 유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날 뭐 하고 싶어?”
턱을 괴고 테이블에 상체를 바짝 붙인 유하가 느른하게 물어왔다. 오늘따라 힐끗거리며 유하의 눈치를 보는 채이가 이상할 만도 할 텐데 그는 묻지 않았다.
“오빠는? 유하 오빠는 뭐 하고 싶은 게 있어?”
“글쎄, 채이가 좋다면 난 뭐든지 좋을 거 같은데.“
아니, 모르는 건가. 친구 말대로 유하는 이번 주말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건가보다.
[만난 지 100일이 된다고? 대박. 그럼 채이 너 드디어 딱지를 떼는 건가?]
아닌 거 같아. 친구야. 나의 연애는 나만 직진인 거 같아서.
[딱지?]
순진한 얼굴로 채이가 묻자 친구가 그랬다.
[으이그, 순진하긴. 보통 연애 100일 때 디데이로 잡는대. 남자들은.]
순간 그렇게 가슴이 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