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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망가뜨릴 시간 (44회)

죽으나사나 | 2025.04.30 07:08:19 댓글: 0 조회: 166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53186
너를 망가뜨릴 시간 (44회) 떠나야 할 사람

강유하를 만나면서 여태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 들어보았다. 직접 얼굴 보고 말하는 게 어렵다면 문자라도 가능했을 텐데, 그게 아닌가 봐.

심지어 보고 싶다는 말도, 채이는 직접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항상 그녀였다.

-보고 싶어.
-나도.

항상 그랬다. 애타는건 나뿐이지.

[너 남자 친구 간수 잘해야겠더라.]

어느 날엔가 친구가 정문에서 수강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유하를 보았다.

[지나가는 여학생들 막 난리도 아니었어. 한채이, 너 어디에서 그렇게 잘난 남자 친구를 찾은 거야. 부럽다, 부러워.]

모두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그는 정말 우월했기에, 채이도 인정했다. 그래서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일까.

유하는 채이한테 잘해준다. 항상 자상했고 따뜻했으며 데이트가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얼마 전, 채이는 학교랑 집이 멀다는 이유로 자취방을 얻었다. 가난한 학생이라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계단이 많은 동네로 이사 갔지만 채이는 테라스가 있는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유하가 집 앞까지 와보더니, 여긴 여자 혼자 다니기엔 위험한 거 같으니 다른 데로 옮기면 안 되냐고 했었지만 채이는 괜찮다고 했다. 아빠 없이 혼자 힘들게 돈 버는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야 했으니.

엄마가 생활비를 보내주지만 채이는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주에 두번 정도는 고깃집 알바도 뛰었다.

유하는 열심히 사는 채이를 진심으로 안쓰러워했다.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재미있는 영화가 나오면 나란히 앉아 관람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유하는 변함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해서 같이 있을 시간이 얼마 없음에도 유하는 채이 얼굴을 잠깐이라도 보러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런데도 자꾸 목이 마르는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채이 너랑 30센티 다 되는 키 차이라고 해서 무슨 꼬맹이랑 거인이 만나는 거냐 했었는데, 저번에 뒷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없더라.]

친구가 침이 마르도록 유하를 극찬했다. 그런 남자는 잘 숨겨두어야 한다고. 그게 안 되면 너한테 푹 빠지게 해야 한다고.

[뭐? 아직 키스도 못 해봤다고?]

만난 지 50일이 넘어갈 쯤 친구랑 서로 남자 친구 얘기로 수다를 떨다가 자연스레 스킨십 얘기까지 나왔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사랑하는 사이인데? 난 사귀기로 한 그날 남자 친구가 못 참고 달려들던데.]

그게 정상이라고 했다.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하면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부처님 모시듯이 털 한 올 안 건드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고, 친구의 남자 친구가 그렇게 말하더란다.

긴 한숨이 흩어져 나왔다. 맑은 눈동자가 채이를 빤히 들여다보는 게 느껴졌다.

채이가 벌떡 일어섰다.

“나 알바하러 갈게요.“

“아직 20분은 남았는데?”

유하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예약 손님이 많아서 준비할 게 많아요.“

기운을 쏙 뺀 채이가 컵을 반납하고 커피숍을 나섰다. 유하가 뒤따라 나오며 손목을 끌어당겨 그녀를 돌려세웠다.

“왜 그래? 갑자기.”

어제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 채이였다. 오늘은 평일이었고 어쩌다가 아르바이트 가기 직전의 채이를 불러 보고 싶던 얼굴을 마주한 건데.

진욱은 유하가 회사로 들어가기 전 우선 집에서 기본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유하한테 경영 수업을 가르치던 스승이 사적인 일로 저택에 못 오게 된 날이다. 물론 진욱이가 꽂아놓은 전문가였고 주말을 제외한 날마다 유하와 함께 있었다.

유하는 매일 같이 듣기 싫은 경영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게 진절머리가 났지만, 올해만 배워보라고, 그때 가서도 싫다면 다시는 회사에 들어오라는 말을 입 밖에 뻥긋도 안 할 거라는 진욱의 호언장담에 수긍했다.

못 이기는 척해 본다고 했지만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잠재운 이유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요물 같은 여자 때문이라는 걸, 이 여자는 알까.

절대 모르겠지. 아니, 몰라야 해. 올해가 지나 새해로 들어서면 유하는 뉴욕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원래의 삶을 살 거라서.

행동이나, 말을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이 여자는 앞으로 또 다른 남자에게 빠질 가능성이 너무나 무궁무진했다. 이렇게 티 없이 깨끗한 여자는 더럽히면 안 되겠지. 더군다나 자신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이 아닌가.

“별일 없는데요.“

평소처럼 반말이라도 그냥 하면 모를까, 갑자기 유하에게 존대하는 채이는 누가 봐도 이상했다.

”한채이, 무엇 때문에 이리도 심통이 났을까?“

유하는 허리를 굽혀 상체를 내렸다. 심통 난 그녀의 빵빵한 볼을 꼬집으며 기분이 풀어지기를 바랐다.

”하지 마요.“

그랬더니 매끈한 이마에 실주름을 만들며 채이가 유하의 손을 차갑게 밀어냈다.

이건 단단히 삐진 건데, 왜??

뭔가 싶어서 최대한 빨리 굴려보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혹시,“

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날인가?“

”……“

웃자고 하는 말이였는데 채이 마음을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불 심지를 키웠다. 세모로 치켜 뜬 커다란 눈망울이 유하를 싸늘하게 올려다보았다.

원래 큰 것보다 작은 거에 더 움찔하는 게 맞는 건가? 유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무얼 잘못했는지 몰라 입만 쩝, 다시고 있는데 어느새 채이는 가느다란 몸을 홱 돌려 고깃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옆 가게라 유하가 더 이상 쫓아갈 수가 없었다.

”끝나면 시간 맞춰 연락할게.“

고깃집으로 들어가는 채이의 뒤통수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녀는 돌아보는 것 없이 그대로 들어갔다.

바보 바보 바보! 유하 오빠는 바보야!

고깃집으로 들어오며 문을 쾅 하고 닫은 채이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있었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강유하는 분명히 이번 주 토요일이 만난 지 100일이 되는 날이라는 모를 거야. 아니라면 그런 심드렁한 대답을 안 하겠지.

뭐? 내가 좋다면 다 좋다고? 평소랑 똑같은 하루가 될 게 뻔하네.

역시, 나만 이렇게 좋아하는 거였어. 나만, 나만이야.

가슴이 아팠다.

좋아하는 사람의 온도가 저하고는 많이 다른 거 같아서.

***

별로 기다리지도 않은 토요일이 다가왔다. 오늘 유하랑 점심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다. 최근에 한식, 중식, 일식을 골고루 먹더니 오늘은 양식인가 보다. 유하가 문자로 찍어준 주소를 검색해 보니 스테이크가 나오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래도 유하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채이는 화장을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쇼핑몰에서 새로 산 예쁜 원피스를 입었다. 전신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보며 문제없나 살폈다.

쇼핑몰 사진으로 보았을 땐 그렇게 짧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허벅지를 절반도 못 가린 치마를 아래로 당겨보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에잇, 몰라.

어차피 뭘 입던 크게 관심도 없을 거야.

김이 빠진 채로 채이는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현관을 나섰다. 낮은 구두를 신었지만 계단을 밟을 때마다 은근 따닥따닥 하는 구두 소리가 컸다.

앞에서 먼저 내려가던 옆집 남자가 채이의 구두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남자는 채이를 보고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채이도 머리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어디 가세요? 오늘 엄청 예쁘시네요.“

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고 평소에도 채이와 마주치면 꼬박꼬박 인사를 하던 남자였다. 그래서 그가 하는 칭찬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채이였다.

”약속이 있어서요.“

”데이트 하나 보다.“

남자가 싱긋 웃으며 채이가 내려오길 기다렸고 어느새 둘은 나란히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근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늘 스타일 정말 예뻐요. 남자 친구분 너무 좋아하시겠네요.“

남자가 또 한 번 채이를 칭찬하자 채이는 멋쩍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닐 걸요. 유하 오빠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거 같은데.

채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옆집 남자와 심심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느새 1층에 도달했다.

”뭐 타고 가세요? 남자 친구가 데리러 온 거 아니면 제 차 탈래요? 가는 데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 괜찮아요. 저는 그냥…“

빵—

귀를 찢을 듯한 경적이 좁은 골목길에서 울려댔다. 깜짝 놀란 채이와 남자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허름한 동네와 어울리지 않은 외제 차가 떡 하니 빌라 앞에 세워져 있었다.

달칵- 하는 차량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반짝반짝 빛나게 닦은 구두가 먼저 바닥에 닿으며 시선을 끌었다.

어…, 어?

가늘어진 눈으로 무심하게 쳐다보던 채이의 눈동자가 한없이 커졌다.

“우와…. 멋있다.“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하는 감탄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한채이,뭐 하고 있어. 얼른 와.“

립글로즈를 곱게 칠한 반짝이는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이건, 사기야. 말도 안 돼.

나 오늘 좀 꾸몄어요,를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한껏 수트빨을 뽐내고 있는 유하를, 채이는 넋을 잃고 보았다.

기가 막히네….

“미쳤다.”

곁에 있던 남자가 다시 한번 감탄을 외웠고 그의 말대로 미친 수트빨이 채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바닥에 닿는 구두소리가 무겁고 듣기 좋았다.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해가고 채이 시야에 미친 존재감을 뿜어대는 유하만이 동화 속에 빠진 듯 알록달록했다. 물론, 수트는 그레이 컬러로 통일되었지만.

“안 갈 거야?”

넋이 나간 채이랑 다르게 왜인지 모르게 얼굴에 균열이 간 유하가 다시 한번 물어왔다.

“네? 가야지.“

삐걱거리며 채이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유하는 채이를 아래위로 훑다가 한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채이 못지않게 입 벌리고 있던 남자를 힐끗 노려보았다.

워낙에 그리 선한 눈매가 아니었다. 눈을 깔고 내려보는 시선에서 매서운 찬 공기가 흘렀다. 남자는 섬뜩함을 느껴 이내 그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유하는 채이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움직였다.

“가자.”

채이는 유하가 이끄는 대로 외제 차 앞까지 걸어갔다. 유하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고 채이는 어색한 표정과 함께 얼른 올라탔다.

유하가 차를 끌고 나온 것도, 이렇게 격식을 차려입은 것도 처음이라서 어색했다. 마치 딴 사람인 거 같다고 해야 할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요리조리 눈알만 굴리고 있던 그녀에게 유하가 상체를 기울였다. 채이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고 이내, 안전벨트 클립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창피해.

눈을 떠야 하는 게 맞는데 창피함에 도저히 바로 뜰 수가 없었다.

언제 뜨지? 언제 뜰까. 출발 안 하나?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 떠?“

큼, 채이가 괜스레 헛기침하며 천천히 눈을 뜰 타이밍을 찾았다. 그러다 뭔가가 툭 무릎 위로 떨어지는 느낌에 번쩍 두 눈을 떴다.

유하의 재킷이 채이 다리를 가리고 있자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하는 그녀에게 시선을 안 준 채 시동을 걸었다.

유하는 한참 말없이 운전만 해댔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색해하던 채이가 생각보다 긴장이 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낯선 모습의 유하였지만, 벨트를 당기려고 불쑥 다가왔던 그한테서 익숙한 향이 났으니.

강유하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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