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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향을 찾아보세요 (20) - 안도 송강진,이도백하진,량강진,만보진,신합향,영경향편

무학소사 | 2022.11.11 14:52:52 댓글: 0 조회: 255 추천: 0
분류연변조선족자치주 https://life.moyiza.kr/yanbian/4428849

이번기에는 안도현의 송강진,이도백하진,량강진,만보진,신합향,영경향 조선족마을 지명유래를 소개하려 한다.2003 삼도향과 소사하향이 송강진에 합병되였다.

송강진 조선족마을 지명유래

【茂朱村】무주(茂朱):안도현 송강진 무주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송강진에서 북쪽으로 7.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8 조선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53세대 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마을을 세웠다.그리운 고향의 이름을 따서 마을명을 무주(茂朱)라고 하였다.1963년도에 마을명을 홍광(红光)이라 고쳤다가 1981 지명조사때 원래 이름을 회복하여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다.1983 소사하향에 속했는데 2003 소사하향이 송강진에 합병되였다.지금 비록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여전히 조상들이 지어놓은 이름을 부르고 있어 천만다행이라 생각된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双丰村】양초(羊草):안도현 송강진 쌍풍촌의 한개 자연마을인데 송강진에서 동북쪽으로 10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0년부터 조선에서 들어온 이민들이 하나둘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마을을 세웠다.처음에는 사냥하고 약초 캐면서 생활하하다가 후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당시 이곳에 양초(羊草) 무성하였다하여 마을명을 양초툰(羊草屯)이라고 하였다.1937 조선 함경남도의 북청군(北青郡) 풍산군(丰山郡) 76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집단마을을 세웠다.1967 문화대혁명시기에 홍기(红旗)라고 이름을 고쳤다가 1981 지명조사시에 다시 원이름 양초를 회복하였다.1983 소사하향 양초촌에 속했고 2003 소사하향이 송강진에 합병되고 2007 양초촌이 쌍풍촌에 합병되였다.지금 비록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곳이고 이민1세들의 애환이 묻어있는 고장이다.

【东南村】동남(东南):안도현 송강진 동남촌의 소재지인데 송강진에서 북쪽으로 7.5키로메터 떨어진 산구에 자리잡고 있다.이곳은 동쪽과 남쪽 골짜기가 교차되는 지대에 위치해 있다하여 동남차(东南岔)라고 하였고 간략하여 동남이라고 하였다.1936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갑산군(甲山郡)에서 56세대 388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마을을 세웠다.마을명을 동남툰이라고 하였고 간청하여 동남이라고 하였다.후에 조선족들이 모두 다른곳으로 이사가고 한족들이 자리를 메워 마을이 계속 유지되였다.1983 소사하향 동남촌에 속했고 2003 소사하향을 따라 송강진에 합병되였다.지금 비록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南道村】남도(南道):안도현 송강진 남도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송강진에서 동남쪽으로 6.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9년에 조선 전라북도,경상남도,충청북도 100세대 이주민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와서 토지를 개간하며 마을을 세웠다.부락이 2대구(第二大沟) 이도구(二道沟) 남쪽 평탄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 이름을 남이도구툰(南二道沟屯)라고 하였다.후에 간략하게 남도(南道)라고 불렀다.1983 삼도향에 속했고 2003 삼도향이 송강진에 합병되였다.지금도 마을에는 조선족들만 모여사는데 안도현에서 몇안되는 조선족마을이다.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旭阳村】욱양(旭阳):안도현 송강진 욱양촌의 한개 자연마을이다.송강진에서 서북쪽으로 10.5키로메터 떨어진 산구에 자리잡고 있다.1936 조선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을 세웠다.그리운 고향 창원군의 이름을 따서 마을명을 창원툰(昌原屯)이라고 하였다.후에 조선족들이 이사가고 한족들이 자리를 메우고 1967년에 조양(朝阳)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 사하촌에 속했었다.1996 마을에 욱양촌(旭阳村) 신설하고 마을명도 욱양(旭阳)으로 고쳤다.늦게 건설된 촌이여서 방금 떠오른 태양에 비유하여 욱양이라고 하였다.원래 소사하향에 속했는데 2003년에 소사하향이 송강진에 합병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北道村】북도(北道):안도현 송강진 북도촌의 소재지인데 송강진에서 동쪽으로 7.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8 조선 전라북도 100세대 이민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와서 처녀지를 개간하며 마을을 건설하였다.마을이 이도구(二道沟) 북쪽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북이도구툰(北二道沟屯)이라 불렀다.후에 간략하게 북도(北道)라고 불렀다.1983 삼도향에 속했고 2003 삼도향이 송강진에 합병되였다. 마을은 지금도 조선족들만 모여사는 안도현에서 몇안되는 조선족마을중의 하나다.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松花村】송화(松花):안도현 송강진 송화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송강진에서 동남으로 2.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송강분지 동쪽 평탄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속명이 팔리툰(八里屯)인데 오도백하(五道白河,原名二道松花江)연안에 위치해 있어 송화(松花)라고 이름을 지었다.1962년부터 거주호가 있었는데 1968년에 영풍대대에서 부분적 농민들이 이곳에 이사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지금까지 송강진에 남아있는 몇안되는 조선족마을중의 하나다.

【沙金沟村】두도툰(头道屯):안도현 송강진 사금구촌의 한개 자연마을이다.송강진에서 동북쪽으로 6.5키로메터 떨어진 송강분지 동쪽 평탄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민국초년부터 주민호가 몇호 있었고 부락이 송강에서부터 삼도향으로 가는 첫번째 골짜구 어구에 있다하여 두도구구자(头道沟口子)라고 불렀고 간단히 두도구(头道沟)라고 하였다.1942 조선에서 이민온 50세대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마을을 세우고 협성툰(协成屯)이라고 하였다고 지명지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협성툰의 유래는 아직 밝힐길이 없다.1961 원이름을 회복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兴隆村】흥륭(兴隆):안도현 송강진 흥륭촌의 한개 자연마을이고 촌소재지이다.송강진에서 남쪽으로 7키로메터 떨어진 장백산용암대지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사도백하(四道白河) 마을을 가로 질러 흘러간다하여 사도백하()이라고 하였다.사도(四道) 사도(死到) 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고 여겨 후에 흥륭툰(兴隆屯)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간략하여 흥륭(兴隆)이라고 하였다.

<<안도현개황>> 기재에 의하면 안도현 경찰대 대장 목흥운이 투자하여 조선농민들을 이곳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9.18>>사변후에도 계속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집단이민>>들이 이주해 오기전에 이곳의 인구는 1000 되였는데 대부분이 조선자유이주민들이였다.1938 조선 전라북도 임실군(任实郡) 50세대 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였다.후에 농사조건이 여의치 않아 조선족들이 대부분 타곳으로 이사가고 지금은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兴隆村】대흥(大兴):안도현 송강진 흥륭촌(兴隆村) 한개 자연마을인데 송강진에서 서남쪽으로 6.6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있다.1936 조선 이재민들이 이곳에 와서 개발하면서 마을을 세웠다.앞날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심을 담아 마을명을 대흥이라고 하였다.1940 조선 충청북도와 충청남도의 50세대 이민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정착하고 생활하였다.건툰시초에는 흥륭촌에 속했고 후에 대흥촌이 되였다가 다시 흥륭촌에 합병되였다.지금은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여전히 조상들이 지은 지명을 사용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营林村】영림(营林):안도현 송강진 영림촌에 속한 자연마을이다.송강진에서 남쪽으로 8.8키로메터 떨어진 장백산용암대지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민국초기에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1937 조선 전라북도 임실군 100세대 집단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그래서 한성툰(韩姓屯)이라 불리웠고 한흥툰(韩兴屯) 혹은 한대파(韩大坡)라고도 불리웠다.후에 조선족들이 타곳으로 이주해가고 1957 안도현 영림소에서 이곳에 묘포장을 건설하면서 영림(营林)이라고 고쳐서 불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板石村】정읍(井邑):안도현 송강진 판석촌에 속해있는 자연마을인데 송강진에서 서남쪽으로 4.6키로메터 떨어져 있다. 1938 조선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50세대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마을을 세우고 고향 이름을 따서 마을명을 정읍이라 하였다.1954 조선족 촌민들이 떠나갔다.1972년에 다시 마을을 세우고 사도백하툰(四道白河屯)이라 하였다.1981년도에 정읍(井邑)이란 지명을 회복하였다.지금 비록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여전히 정읍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어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이도백하진 조선족마을 지명유래

【奶头山村】내두산(奶头山):안도현 이도백하진(二道白河镇) 내두산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이도백하진에서 동남쪽으로 11.6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868년에 조선 북부 6진에 엄중한 재해가 들어 함경북도 무산군 일대의 6~7호의 이재민들이 처음으로 월강하여 안도현에 천입하여 내두산과 두도백하에 거처하면서 사냥을 위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1931년에 70여호 조선족농민들이 이곳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마을을 세웠다.마을부근에 두개의 작은 산이 있는데 모양이 마치 젖꼭지 같게 생겼다하여 산이름을 내두산이라고 하였다.마을이 내두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명을 산이름을 따서 내두산(奶头山)이라고 하였다.후에 항일련군의 활동구역이 되면서 일본군의 삼광정책에 의해 한동안 무인구로 되였다.1940 일본군이 조직하여 마을에 <<무장이민부락>> 건설하였다.한창섭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족 무장이민대오가 화룡현에서 떠나 이곳에 오면서 50자루의 보총과 100마리 소를 몰고 왔다고 한다.광복후 무장이민들은 모두 다른 고장으로 이주해가고 1946년부터 조선 함경남도 갑산군으로부터 이민들이 륙속 마을로 이사왔는데 지금 마을의 촌민들은 대부분 그들의 후예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량강진 조선족마을 지명유래

【四岔子村】사차자(四岔子):안도현 량강진 사차자촌의 한개 자연마을이고 촌소재지이다.량강진에서 동북쪽으로 5.6키로메터 떨어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이곳은 고동하(古洞河)에서부터 대해골(大海沟) 네번째 골의 갈림목에 위치하고 있어 사차자(四岔子)라고 하였다.1937년부터 이곳에 인가가 있었고1939 일제에 의해 주민이 살해되고 마을이 재더미로 되였다.1940 조선 전라북도 장수군(长水郡) 집단이민 100가구가 이곳에 정착하고 생활하였다.후에 농사조건이 여의치 않아 모두 다른곳으로 이주했다.1961 산동성 이민들이 이곳에 이주와서 다시 마을을 건설하였다.1966 문화대혁명때에破四旧”운동을 하며 마을명을 사신툰(四新屯)이라고 고쳤다.1983 지명조사시에 다시 원이름을 회복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片砬子村】편라자(片砬子):안도현 량강진 편라자촌의 한개 자연마을이다.진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3키로메터 떨어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1937 조선 전라북도(全罗北道)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마을명을 전라북도에서(全)”)자와(北)”자를 선택하고 조합하여 전북(全北)이라고 이름하였다.후에 조선족들이 이사가고 산동 이민들이 자리를 메웠는데 지명을 편라자(片砬子)라고 고쳤다.마을부근에 돌벼랑(石砬子) 하나 있었는데 많이는 편석(片石)이여서 편라자(片砬子)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六人沟村】륙인구(六人沟):안도현 량강진 륙인구촌의 한개 자연마을이고 촌소재지이다.량강진에서 서쪽으로 0.25키로메터 떨어진 량강분지 서쪽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다.함풍년에 한변외(韩边外) 여섯 사람을 이곳에 파견하여 채금하였다하여 륙인구(六人沟)라고 불렀다.1940 조선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집단이주민 50세대가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생활하였다.후에 조건이 여의치 않아 대부분 주민들이 떠나가고 한족들이 자리를 메워 마을이 계속 유지되였다.1945년부터 량강촌(两江村)으로 불리우다가 1983 륙인구촌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江南村】강남(江南):안도현 량강진(两江镇) 강남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량강진에서 서남쪽으로 2.9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7 조선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터를 잡고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는데 익산툰이라고 불렀다.후에 일본군에 의해 마을이 황페되였다가 1940 전라북도 임실군의 50세대 이민들과 다른곳에 있던 조선 이민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다시 마을이 세워졌다.이도백하 남안에 자리잡고 있어 강남(江南)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지금은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만보진 조선족마을 지명유래

【江源村】강원(江源):안도현 만보진(万宝镇) 강원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만보진에서 남쪽으로 1키로메터 떨어진 고동하남안에 자리잡고 있다.청말기부터 인가가 있었고 대전자남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남대전자(南大甸子)라고 불렀다.1935 일제가 집단부락을 실시할때 민들이 떠나가고 마을은 황페되였다.1936년에 조선 강원도(江源道)104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이사와서 다시 마을을 세우고 고향 강원도의 이름을 따서 마을명을 강원(江源)이라고 하였다.1959년부터 조선족들이 외지로 이사가서 10여호밖에 남지 않았고 공영대대에 속했었다.1960년 산동성에서 변강을 지원하여 이곳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다시 마을이 형성되고 강원대대를 설립하였다.비록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여전히 강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共荣村】공영(共荣):안도현 만보진 공영촌의 소재지인데 만보진중부에 자리잡고 있다.청말에 개간된 이곳은 만보진과 흥농촌과 공영촌의 공동 소재지인데 개발초기에는 대전자라고 하였다.당시 고동하곡지(古洞河谷地) 야초가 무성하였다하여 대전자(大甸子) 이름을 얻게 되였다.1937년에 조선 강원도 금화군의 집단이민 63세대 322명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마을이 세워졌다.1956 초급사를 건설할때 공동히 번영하자는 뜻으로 초급사이름을 공영(共荣)이라고 하였다.1958 강원대대의 67가구 농민들이 이곳에 와서 공영대대(共荣大队) 설립하였다. 마을은 지금도 조선족이 대부분이고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金化村】금화(金化):안도현 만보진 금화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만보진에서 동북쪽으로 3.6키로메터 떨어져 있다.마을 북쪽으로 고동하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1936년도에 마을이 세워졌는데 대전자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 북대전자 (北大甸子)라 불리웠다.1937년에 조선 강원도 금화군(金化郡)103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면서 마을 이름을 금화(金化)라고 고치고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지금 혼합마을로 되였지만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新兴村】신흥(新兴):안도현 만보진 신흥촌의 소재지인데 만보진 서남부에 자리잡고 있다.1935년부터 인가가 있었고 1953년후에 주민호가 늘어났다.1958 신흥대대(新兴大队) 설립하였는데 지명속에 새로 설립한 대대이고 농업이 번창하라는 뜻이 담겨있다.지금 비록 혼합마을로 되였지만 개발초기에는 조선족 개척민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유서깇은 고장이다.

【红旗村】홍기(红旗):안도현 만보진 홍기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만보진에서 서남쪽으로 2.4키로메터 떨어져 있다.고동하연안 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수전농사에 천연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는 고장이다.민국초년에 마을이 세워졌고 이호부락(二号部落)이란 이름을 가졌는데 간단히 이호(二号)라고 하였다.1958 인민공사때 홍기대대(红旗大队)라고 이름을 고쳤다.툰도 자연히 대대이름을 따라 홍기(红旗)라고 하였다.비록 혼합마을이지만 개발초기 조선족 개간민들의 고된 삶이 스며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前进村】전진(前进):안도현 만보진 전진촌의 소재지인데 만보진에서 동쪽으로 6.6키로메터 떨어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1964년부터 조선 강원도(江原道)에서 이주해온 부근마을의 조선족들이 이곳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고 마을명을 강원(江源)이라고 불렀다.1968 만보대대(万宝大队)에서 부분적인 사원들이 마을에 이사와 생활하면서 마을이 커지고 대대를 건립하고 전진대대(前进大队)라고 명명하였다.

신합향 조선족마을 지명유래

【十骑村】십기가(十骑街):십기가는 안도현 신합향과 십기촌의 소재지인데 고동하의 북안에 자리잡고 있다.청나라말부터 이곳에 인가가 있었고 중화민국시기에는 이합호(二合号)라고 불렀다.1920 류씨 성을 가진 두사람이 합작하여 이곳에 점포를 개장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1932 많은 조선 이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1934 일제의 제십기병퇀(第十骑兵团) 이곳에 주둔하면서 마을명을 십기가(十骑街)라고 하였다.문화대혁명시기에는 신홍(新红)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1982 지명조사시에 다시 십기가를 회복하였다.조선 이민들이 이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도 일구고 수전도 개발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후에 대부분 조선족들이 생활조건과 생산조건이 좋은 외사구로 이사를 가서 십기가는 점점 한족마을로 변해갔다.신합향의 조선족들이 十骑街 <<스치제>>라고 발음해야 옳았는데 모두 <<스치개>>라고 발음하였다.안도현의 조선족들은 <<스치개>> 신합향을 말한다는것을 알고 있다.신합향은 해방후에 신설한 향이고 십기가는 일제시기부터 불러온 이름이기 때문에 신합토배기들은 지금도 신합이라 하지 않고 <<스치개>>라고 부르고 있다.십기가는 조선 이민1세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靠山村】고산(靠山):안도현 신합향 고산촌의 소재지이다.신합향에서 동쪽으로 7.4키로메터 떨어진 황구령 서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1936 조선의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거주하면서 한국툰(韩国屯)이라고 하였다.후에 조선족들이 모두 이사가고 마을이 황페되였다.1972 한족들이 이사와서 마을을 다시 세우고 동산(东山)이라고 불렀다.1981 지명조사시 고산(靠山)이라고 지명을 고쳤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寒葱沟村】한총구(寒葱沟):안도현 신합향 한총구촌의 한개 자연마을이고 촌소재지이다.신합향에서 동쪽으로 4.8키로메터 떨어진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민국초년부터 이곳에 인가가 있었고 부근 산에 旱葱 많이 자란다하여 한총구(旱葱沟)라고 하였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한총구(寒葱沟) 되였다.다른 설은 한총 만족어인데 사냥군들이 야외에서 사용하는 쟁개비(小锅) 말하는데 사냥군들이 주숙하는 곳을 두루 가리킨다.1936 일제의 협박하에 대황구툰 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거주하게 되였고 같은해 조선의 이민들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일본툰(日本屯)이라고 불렀다.1939 조선 전라북도 30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생활하였다.이렇게 조선 이민들은 원주민과 함께 이곳을 개발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후에 조선족들이 모두 떠나가면서 페촌되였다.1960 산동성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거주하면서 대대를 설립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西韩村】서한(西韩):안도현 신합향(新合乡) 서한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신합향에서 남쪽으로 2.4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20년부터 인가가 하나둘 있었고 1937 조선 강원도 금화군(金化郡) 69세대 이주민들이 이곳에 입주하면서 부락이 형성되였다.십기가(十骑街)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서한(西韩)이라고 하였다.1965년에 동승(东升)이라고 개명하였다가 1981 지명조사시 다시 원래 이름을 회복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青沟子村】청구자(青沟子):안도현 신합향 청구자촌의 소재지이다.신합향에서 서남쪽으로 6.4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5 마을이 서고 청구자(青沟子)라고 불리웠는데 만족어 지명이다.“水流浅,直而小的沟”라는 뜻이다.후에 조선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115세대 집단이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원주툰(原州屯)이라고 고쳐 불렀다.1945 조선족들이 모두 이사간 후에 한족들이 자리를 메우고 원이름 청구자를 회복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대파(大坝):안도현 신합향 대파촌의 소재지인데 신합향에서 동남쪽으로 5.5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있다.1920 이곳은 고동하의 나루터였는데 로가란 사람이 나루터를 경영하였다하여 로가선건물(卢家船房子)라고 불리웠다.1937 주민호가 점점 늘어나고 부근의 골짜기에 배나무가 배나무골(梨树沟)이라고도 불리웠다.1940 충청도의 120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집단부락이 세워졌다.1941 이민들이 서한촌에 가서 일년 농사를 짓고 후에 부분적 이민들이 영경촌의 고성에 가서 정착하였다.나머지 이민들도 얼마 안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것 같다.1951 이곳에 로개농장(劳改农场) 꾸리고 벽에 하얀 칠을 하였다하여 白房子라고 하였다.1965년에 이곳에 장백산로동대학을 건설하였다.1967 다시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전진대대에 속했었다.1981 지명조사시에 대파촌(大坝村)이라고 이름을 고쳤다.마을이 고동하 제방뚝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대파(大坝) 지명을 얻게 되였다.지금 비록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충청도 이민들이 로고가 스며있는 곳이다.

영경향 조선족마을 지명유래

【金盛村】금성(金城):안도현 영경향 금성촌의 한개 자연마을이다.영경향에서 동쪽으로 19키로메터 떨어진 대사하남안에 자리잡고 있다.청동치초년에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 이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경성(镜城)이라고 불리웠다.청동치말년에 이곳에서 금이 많이 나와 금공장(金厂)이라고 불리웠고 후에는 로금공장(老金厂)이라고도 불리웠다.일제시기에도 이곳에서 도금(淘金)하였다.광복후 마을은 황페되였다가 1972 한족들이 이사와서 다시 마을이 세워지고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高登村】고등(高登):안도현 영경향(永庆乡) 고등촌의 소재지인데 영경향에서 동쪽으로 6.5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청동치년간에 이곳에 금이 나와 금을 캐던 산재호가 있었다.대사하남안(大沙河南岸) 하곡에 위치한 곳은 需要步步登高 한다하여 고등장(高登场)이라고 하였다.후에 간칭하여 고등(高登)이라고 하였다.1936 조선 함경남도 여러 (郡) 80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마을을 건설하였다.지금도 마을에는 조선족들만 살고있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古城村고성(高城):안도현 영경향(永庆乡) 고성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영경향에서 동북쪽으로 4.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7년 조선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80세대 농민들이 일제의 탄압에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을 세웠다.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지명에 담아 마을명을 고향 군의 이름을 따서 고성(高城)이라고 하였다.지금도 이 마을엔 조선족들만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신농(新农):안도현 영경향 고성촌의 한개 자연마을인데 영경진에서 동북쪽으로 3.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55년 고성대대(高城大队)에서 부분적 농민들이 갈라져 나와 이곳에 마을을 세웠다.작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소남툰(小南屯)이라 했다.그리고 마을 서북쪽으로 황니하(黄泥河)가 흐른다하여 황니허툰(黄泥河屯)이라고도 불리웠다.1977년에 사회주의 새농촌이란 뜻으로 마을명을 신농(新农)이라고 고쳤다.

【勇进村】용진(勇进):안도현 영경향 용진촌의 한개 자연마을인데 영경향 동부에 자리잡고 있다.영경향과 용진촌과 부강촌의 소재지는 대사하툰(大沙河屯)이다.마을이 대사하남안(大沙河南岸) 위치해 있다하여 마을명을 대사하툰(大沙河屯)이라고 하였다.1937 조선 함경북도(咸镜北道) 무산군,경흥군,온성군,길주군,성진군과 함경남도(咸镜南道) 북청군,서천군에서 73세대 436 이민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생활하면서 수전도 개간하고 한전도 개간하였다.1958 용진대대(勇进大队) 설립하였다.후에 조선족들이 타곳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지금은 비록 혼합마을로 되였지만 개간초기 조선족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春光村】춘광(春光):안도현 영경향 춘광촌의 자연마을이고 촌소재지인데 영경향에서 동남쪽으로 5키로메터 떨어진 대정자산 중부에 자리잡고 있다.1936년에 조선 함경남도 안변군(安边郡),정평군(定平郡), 문천군(文川郡),고원군(高原郡),영흥군(永兴郡) 군에서 80세대 449명의 이주민들이 고등(高登) 안착하였다.1957 고등에서 일곱호의 사원들이 이곳에 와서 마을을 세우고 마을명을 안평(安平)이라고 하였다.고향 안변군(安边郡) 정평군(定平郡)에서 한자씩 선택하고 조합하여 지은 지명이다.후에 이사호가 늘어나고 인구가 부쩍 불어1958년에 안평대대(安平大队) 설립하였다.1981 지명조사시에 춘광대대(春光大队)라고 이름을 고쳤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立新村】립신(立新):안도현 영경향 립신촌에 속한 한개 자연마을이다.영경향에서 서남쪽으로 7.3키로메터 떨어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1937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北青郡) 신흥군(新兴郡) 49세대 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개간하면서 마을을 세웠다.그리운 고향 북청군의 자와 신흥군의 자를 선택하고 조합하여 청흥툰(青兴屯)이라고 마을명을 지었다.후에 조선족들이 떠나가고 1963 부강촌에서 산동이민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하는데 대부분 청년들이여서 청년툰(青年屯)이라고 하였다.1964 새롭게 건설한 마을이여서 마을명을 립신(立新)이라고 명명하였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朝阳村】조양(朝阳):안도현 영경향 조양촌의 소재지이다.영경향에서 서쪽으로 2.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1939 조선 강원도 양양군(襄阳君) 50세대 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그리운 고국을 잊지 못해 나라 이름 조선(朝鲜) 이름 양양(襄阳) 한자씩 따서 조양(朝阳)이라고 명명하였다.지금도 조선족들만 모여사는 안도현에서 보기드문 조선족마을중의 하나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通阳村】통양(通阳):안도현 영경향 통양촌에 속한 자연마을인데 영경향에서 북쪽으로 7.8키로메터 떨어져 있다.고동하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원래 북류수하툰(北柳树河屯)이라 불리웠다.1937년 조선 강원도 통천군(通川郡)과 양양군(襄阳郡)50세대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 지으면서 마을을 세웠다.그리운 고향을 못 잊어 두 군의 이름에서 자와 자를 따서 마을명을 통양(通阳)이라고 하였다.1959년에 대부분 조선족들이 이사가고 이듬해에 산동이민들이 대체하였다.마을이 류수촌의 북쪽에 있어 북류수툰(北柳树屯)이라고 불리웠고 얼마 안지나 원이름 통양(通阳)을 회복하였다.지금은 한족마을로 되였지만 여전히 통양으로 불리우고 있다.이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柳树村】류수:안도현 영경향 류수촌의 소재지인데 영경향에서 서북쪽으로 6.1키로메터 떨어진 고동하(古洞河) 동안에 자리잡고 있다.1910년에터 이곳에 산재호들이 있었고 이곳에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었다하여 류수하자(柳树河子)라고 하였다.후에 간칭하여 류수(柳树)라고 하였다.후에 조선 강원도 고성군에서 50세대 200여명이 이곳에 이사와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였다.지금도 조선족이 대부분이다.이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清山村】청산(清山):안도현 영경향 청산촌의 소재지인데 영경향에서 서북쪽으로 6.6키로메터 떨어진 고동하서안(古洞河西岸) 자리잡고 있다.1944 조선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97세대 이재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고 마을을 세웠다.마을동쪽에 맑은 고동하가 흐르고 있어 마을명을 동청(东清)이라고 하였다.동청촌과 하나 사이두고 있다.1980 청산대대(清山大队) 설립하고 마을명을 청산(清山)이라고 하였다.지금도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조선족이다. 마을도 개발초기 조선 집단이민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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