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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손원평 작 (5)

호수 | 2021.09.14 18:54:29 댓글: 0 조회: 47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3565


13.
할멈과 함께 살게 된 엄마가 고른 새로운 직업은 헌책을 파는 거였다. 물론 할멈의 도움이 있어서 였다. 하지만 엄마표현에 따르면 '뒤끝 작렬' 인할멈은 틈만 나면 투덜대곤했다.
- 하나 있는 자식 공부시키자고 평생 떡을 팔아 놨더니, 지 공부는 못하고 헌책 장사나 하고 있군, 썩을 년.
'썩을 년' 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꽤 끔찍한 표현인데도 할멈은 자나 깨나 엄마를 향해 그 소리를 퍼부었댔다.
- 엄마는 딸한테 썩을 년이 뭐야, 썩을 녀이?
- 내가 틀린 말 했냐? 어차피 사람은 다 죽어서 썩게 돼 있다. 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지.
어쨌든 할멈과의 재결합으로 그 전까지 이사를 반복하던 우리는 정착 생활을 하게 됐다. 적어도 할멈은 엄마에게 왜 더 돈 되는 일을 하지 않느냐는 타박은 하지 않았다. 할멈에게는 이른바 활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랬기에 없는 형편에도 어린 엄마에게 책을 많이 사 주었고 엄마가 '글자깨나 읽는 가방끈 긴 여자' 가 되길 원했던 거다. 사실 할멈은 엄마가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더 나아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고독하되 늙은 '여류' 작가가 되기를 바랐던것 같다. 그건 사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진 다면 할멈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이 었다. 엄마에게 '지은' 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그래서였다.
-지은아,지은아, 부를 때마다 멋들어진 글자를 지어낼줄 알았는데, 똑똑해지라고 책을 많이 읽혔더니만 책에서 배운게 겨우 무식한 남자랑 무모한 사랑이 빠지는 거였다니. 으이그......
종종할멈은 툴툴 거렸다.

이미 인터넷 중고 거래가 성행하는 상황에서 한책방이 잘되는 장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끝까지 헌책방을 고집했다. 헌책방은 현실적인 엄마가 내린 가장 비현실적인 결정이었다. 그건 엄마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이기도 했다. 한때는 할멈의 소망대로, 엄마에게도 작가가 꿈인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 할퀴고간 자국들을 엄마는 차마 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그건 작가의 깜냥이 아닌 거라고 했다. 그 대신 엄마는 다른 사람들의 책을 팔기로 했다. 이미 시간의 냄새가 밴 책들. 때 되면 들어오는 신간들 말고, 이왕이면 엄마가 하나하나 고를 수 있는 것들로, 그게 헌책이었다.

가게가 자리 잡은 곳은 수유동 주택가 골목이었다. 아직까지 수유리로 부르는 사람이 많은 동네. 과연 여기까지 누가 헌책을 사러 올까 싶었지만 엄마는 자신만만했다. 엄마는 오래된 책들을 고르는 안목이 탁월했고 싼값에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사들이는 방법을 알았다. 잡은 가게 뒤에 딸려 있었다. 방 두개에 거실, 욕조 없는 화장실. 우리 셋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자다가도 손님이 부르면 나올수 있었고 내키지 않으면 문을 걸어 잠그면 그만이었다. 반짝이는 유리창 위에 '헌 책방' 이라는 글자가 붙었고 '지은이책방' 이라는 간판도 내걸렸다. 가게를 열기 전날 밤 엄마는 손을 탁탁 털고는 씨익 미소 지었다.
- 이제 더 이상 이사 안가. 여기가 바로 우리 집이니까.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할멈은 희한한 일이라고 자주 중얼거렸지만, 어쨌든 먹고살 만큼은 책이 팔렸다.

14.
나도 그곳이 편안했다. 다른 사람들의 언어로는 '좋았다' 라거나 '맘에 든다' 가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쓸수 있는 단어로는 '편안하다' 가 최대치다. 정확히 말하자면 헌책의 냄새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처음 맡았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대하듯이. 틈만 나면 책을 펼쳐 들고 냄새를 맡는 나에게 할멈은 퀴퀴한 헌책 냄새는 맡아 뭐하느냐고 핀잔을 놓았다.
책은 내가 갈수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만날수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껶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애초에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영상 속의 이야기는 오로지 찍혀 있는대로, 그려져 있는 그대로만 존재했다. 예를들어 '갈색 쿠션이 있는 육각형의 집에 노란머리의 여자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가 책의 문장이라면 영화나 그림은 여자의 피부, 표정 손톱 길이까지 전부 정해놓고 있었다. 그 세계에 내가 변화시킬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겠노라.
그것이 죄가 될지 독이 될지 혹은 꿀이 될지 영원히 알수 없더라도 나는 이 항해를 멈추지 않으리.
의미는 전혀 와닿지 않지만 상관없다.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의 향을 느끼며 한 글자 한 글자 모양과 획을 눈으로 천천히 쫓는다. 그건 내겐 아몬드를 씹는 것만큼이나 신성한 일이 없다. 눈으로 충분히 글지를 더듬었다고 생각되면 이번엔 소리를 내어 읽어 본다. 나는, 너를, 사랑하겠노라. 그것이 죄가, 될지, 독이, 될지, 혹,은 꿀이, 될지, 영원히알,수없,더라,도나,는,이항,해를,멈추,지않,으리.
글자를 씹듯이 음미하며 목소리로 내밭는다. 계속 계속, 외울 때까지 계속. 같은 말을 여러 번 되뇌면 말의 뜻이 흐릿해지는 때가 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자는 글자를 넘어서고, 단어는 단어를 넘어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계어처럼 들린다. 그럴 때면 내가 헤아리기 힘든 사랑이니 영원히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이 재밌는 놀이를 엄마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사랑. 사랑,사랑,사랑사랑,사,랑, 사아아라아아앙. 사랑.사랑.사랑사.랑사.랑사.
영원, 영원, 영원,영,원.여어엉.워어어언.

자. 이제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백지였던 내 머릿속처럼.

15.
계절은 도돌이표 안에서 움직이듯 겨울까지 갔다 다시 봄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 했다. 엄마와 할멈은 이런저런 일들로 티격태격하고 자주 깔깔대다가도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말수가 줄어들었다. 해가 공기를 붉게 물들이면 할멈이 소주를 들이켜며 캬, 소리를 냈고 엄머는 가슴에서 부터 나오는 목소리로 좋다. 하고 장단을 맞췄다. 캬, 좋다! 엄만 그 말의 뜻이 행복이라고 했다.
엄마는 인기가 많았다. 할멈과 함께 살게 된 뒤에도 몇 차례 연애를 했다. 할멈은 성격도 모난 엄마에게 남주들이 들러붙는 이유가 젊은 시절의 자기를 닮아서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입을 삐죽댔지만 결국은" 우리 엄마가 예쁘긴 했지." 라고 확인할 길 없는 말을 했다. 엄마의 남자 친구들은 궁금해한 적은 별로 없다. 엄마의 연애 패턴은 일정했다. 먼저 접근하는 건 늘 남자들이었지만 끝에 가서 매달리는 건 언제나 엄마였다. 할멈은 남자들이 원하는 건 그저 연애인데 엄마가 원하는 건 내 아빠가 되어 줄 남자여서 그런거라고 했다.
엄마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녔다. 동그랗고 검은 눈에 늘 밤색 아이라이너를 그려서 그러지 않아도 큰 눈이 더 커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는 미역처럼 까맸고 입술은 늘 붉게 칠해 뱀파이어를 연상시켰다. 이따금 나는 엄마의 옛 사진들을 들춰 보곤 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마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사진 속의 엄마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옷차림이며 머리 모양, 생김새까지도 모두 비슷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늙지 않은 채 키만 조금 씩 자란 것 같았다. 나는 ' 썩을 년' 이라는 할멈의 입버릇에 기분 나빠하는 엄마를 위해 '썩지 않는 여자' 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하지만 엄마는 입을 삐죽 내밀며 그 별명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할멈도 늙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다. 회색 머리는 더 검어지지도 희어지지도 않았고, 거대한 몸집이나 사발로 들이켜는 술의 양은 해가 가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우린 옥상에 올라가 카메라를 벽돌에 괴어 놓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늙지 않는 뱀파이어 엄마와 거인 할머니를 둔 소년인 나만이. 변하지 않는 두 여자 사이에서 홀로 쑥쑥 자라 났다.

그해, 그 일이 있던해. 그 겨울. 첫눈이 내리기 얼마 전 나는 엄마의 올굴에서 낯선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짧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줄 알았다. 그걸 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주름이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꽤 깊이, 그리고 길게 파여 있었다. 처음으로 엄마가 늙는 걸 알았다.
- 엄마도 주름있네.
내 말에 엄마는 방긋 미소를 지었고, 그러자 주름이 길게 뻗어 갔다. 나는 점차 늙어 가는 엄마를 상상해 보았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다.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였다.
- 이제 엄마에게 남은 건 늙는 일밖에 없단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얼굴엔 웬일인지 웃음기가 지워져 있었다 엄마는 무표정하게 먼 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늙어서 호호 할머니가 된 모습을 상상하는 거였을가. 하지만 엄마의 말은 틀렸다. 엄마에게 늙을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16.
설거지를 하거나 바닥의 먼지를 닦을 때면 할멈은 딱히 맬로디랄 것도 없는 음에 가사를 실어 흥얼거리곤 했다.

여름이면 옥수수, 겨울이면 밤 고구마.
맛있어요. 달아요. 어서어서 먹읍시다.

그건 할멈이 젊은 시절 고속터미널 역에서 팔던 것들이 었다. 역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오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팔던 것들.
젊은 할멈이 유일하게 눈으로나마 호사를 누린것은 일이 끝난 뒤 길고 긴 고속터미널 역 안을 쏘다니는 거였다.
그중에서도 할멈의 혼을 쏙 빼간 건 부처님 오신 날고 크리스마스 풍경이었다. 늦봄에서 초여름 이면 터미널 밖으로 연등이 줄지었고, 겨울이 되면 그안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가들 찼다. 자신의 일터였음에도 그런 풍경들은 할멈에게 동경의 세계였다. 조악하게 만든 연등이나, 가짜 나무인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렇게 가져 보고 싶었단다. 할멈이 옥수수와 군고구마를 팔아 모은 돈을 떢볶이 가게를 얻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예 쁜 연등과 미니 크리스마스트리르 산 거였다. 계절은 상관없었다. 할멈의 떡볶이 가게엔 사시사철 연등과 크리스마스 장식이 사이좋게 달여 있었다. 할멈이 떢볶이 가게를 닫고 엄마가 헌 책방을 연 뒤에도 할멈의 철칙 중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처님 오신 날고 크리스마스만큼은 제대로 챙겨야 한다는 거였다.
예수나 부처가 진짜 성인인건 분명하다. 겹치지도 않게 계절을 골라 태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뭐니뭐니 해도 크리스마스이븐지.
할멈이 내 머릴 쓰다듬으며 말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내 생일이었다. 그날이 되면 우린 늘 내 생일을 기념해 맛있는 밥을 먹으러 나가곤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우리 셋은 나갈 채비를 했다. 아주 춥고 축축한 날이었다. 하늘은 흐렸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피부 밑으로 파고들었다. 코트를 여미면서도 나는 굳이 내 생일을 축하하러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나가지 않는 쪽을 택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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