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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손원평 작 (18)

호수 | 2021.10.01 18:09:03 댓글: 0 조회: 79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9887

55.
햇살이 긴 오후, 하굣길 이었다. 공기는 차가웠고 해는 아주 멀리서 지구를 내려다 봤다. 내 착각인지도 몰랐다.어쩌면 쨍쨍 내리쬐는 땡볕에 견딜 수 없는 무더위였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나와 회색빛 담벼락을 따라 커브를 돌 때였다.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몹시 강한 바람이었다.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흔들렸고 나뭇잎들이 빠르게 진동했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파도 소리였다. 순식간에 바닥에 온갖 색깔의 나뭇잎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인데, 분명히 하늘에선 태양이 빛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시야엔 온통 낙엽들뿐이었다. 주황색, 노란색 잎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오므린 채 쏜아져 있었다.
저 멀리 도라가 서 있다. 강한 바람에 머리칼이 왼쪽으로 높이 쏠렸다. 길고 윤이 나고 하나하나가 굵은 실처럼 두꺼운 머리칼이다. 그 애의 걸음이 느려졌고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기 때눔에 우리의 간격은 점점 좁아졌다. 몇 마디 말을 섞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몇 개 박혀 있고 바람을 피하느라 앏게 뜬 눈엔 속 쌍거풀이 져 있다. 그 눈이 나와 마주치자 놀라듯 조금 커졌다.
갑자기, 바람이 목적지를 바꾸었다. 도라의 머리칼이 천천히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애의 냄새를 실은 바람이 내 코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맡아 보는 냄새였다. 낙엽 냄새 같기도 하고 봄날 새순의 냄새 같기도 했다. 모든 반대되는 것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냄새였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코 앞에 있었다. 그 애의 머리칼이 내 얼굴을 때렸다. 아. 내가 짧게 신음했다. 따가웠다. 갑자기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내려 앉았다. 무겁고 기분 나쁜 돌덩이가.
- 미안
도 라가 말했고,
- 아니.
내가 대답했다. 가슴에 걸린 말이 쇳소리로 나왔다. 바람이 나를 강하게 떠밀었다. 나는 바람에 저항하기 위해 조금 전보다 속도를 내 걷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환영 같은 영상들이 머릿속에 한없이 반복 재생됐다. 출렁이던 나무들, 색색의 이파리들, 그리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 있던 도라,
벌떡 일어나 괜히 서가 사이을 걷고 국어사전을 뒤졌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단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몸이 더웠다. 맥박이 귀밑에서 팔딱거렸다. 손끝에서도 발가락끝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별로 상쾌한 느낌은 아니었다.머리가 아팠고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그 순간을 자꾸만 떠올렸다. 도라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던 순간. 그 감촉과 냄새와 공기의 온더를. 새벽녘이 되고 하늘이 푸르스름해진 뒤에야 겨우 잠들었다.

56.
아침이 되자 열은 내렸다. 그 대신 낯선 증상이 찾아왔다. 학교에 가자 누군가의 뒤꼭지가 빛나고 있었다. 도라였다. 얼굴을 돌렸다. 종일 가시가 박힌 것처럼 가슴이 따가웠다. 해가 질 무렵 곤이 녀석이 가게로 찾아왔다. 왠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고 곤이의 얘기에도 귀가 잘 기울여지짖 않았다.
- 뭔 일 있냐. 너? 얼굴이 좀 안좋다?
- 아파.
- 어디가.
- 모르겠어. 전부 다.
곤이가 뭔가를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곤이는 입맛을 다시더니 사라졌다. 찌뿌둥한 몸을 이리 틀고 저리틀었다. 어디가 불편한 건지 잘 알수가 없었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심 박사와 얼굴이 마주쳤다.
- 저녁 먹었니?
그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 밤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번엔 메밀국수 였다. 청소년기에 먹기엔 칼로리가 너무 낮다며 심 박사는 왕새우튀김도 시켜 주었지만 손대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면을 우물거리는 동안 나는 내 몸이 겪고 있는 이상한 증상들을 털어놓았다. 말이 헛돌아서 짧은 말인데도 평소보다 시간이 배나 걸렸다.
- 감기 증상인 거 같아서 약은 먹었어요.
간신히 말을 마쳤다. 심 박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박사이 눈은 달달 떨고 있는 내 다리로 가 있었다.
- 자, 이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볼까?
- 지금보다 더 자세하게요? 어떻게요?
내가 되묻자 박사는 빙그레 웃었다.
- 글쎄다. 단지. 네가 정확한 표현을 몰라서 말을 안 한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 뿐이야. 그러니까 조금 더 차근차근 얘기해 주겠니. 언제부터 그런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이를테면 무슨 계기나 출발점 같은 게 있었는지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사작점을 돌이켰다.
- 바람요.
- 바람?
박사는 나를 따라 하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실눈을 떴다.
- 좀 설명하기 힘든데. 그래도 들어 주시겠어요?
- 물론이지.
심호흡을 한 번했다. 그러곤 어제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히 말하려 애썼다. 막상 말로 하려는 참 건조한 얘기였다. 바람이 불었는데 나무잎이 떨어졌고, 도라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내 뺨을 때렸고, 그 순간 가슴이 콱 막히듯 답답해지더라... ... 이렇다 할 줄거리도 맥락도 없는, 잡담 축에도 끼지 못할 얘기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동안 심 박사의 얼굴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더니 이윽고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커다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손을 맞잡자 박사는 손을 위아래로 두어 번 흔들었다.
- 축하한다. 너는 지라고 있단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여전히 웃음을 띤 채 그가 말을 이었다.
- 올해 초보다 얼마나 컸니?
- 9 센치요.
- 그것 봐라. 무서운 속도다. 몸이 자라니 머릿속도 자라는 거다. 내 생각엔 네 머릿속의 지형도가 꽤 변했을 거 같은데. 내가 신경외과 의사였다면 지금쯤 MRI 를 찍어서 확인해 보자고 했을 거다.
고개를 저었다. 사진을 찍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 아직은 생각없어요. 이왕 한다면 편도체가 좀 더 부풀어 오를 때까지 기다려 봐야죠. 그리고 사실 이게 축하할 일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불편하기도 하고 잠도 잘 못 잤고요.
- 원래 이성에 대한 관심이 그런 거란다.
- 제가 그 앨 좋아하는 걸까요?
말을 맺자마자 아차 싶었다. 심 박사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답했다.
- 글쎄. 그건 네 마음만이 알겠지.
- 마음이 아니라 머리겠죠. 뭐든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 뿐이니까요.
-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린 마음이라고 얘기 한단다.

심 박사의 말 마따나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아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전처럼 박사 에게 나의 호기심을 일일이 알리고 싶지 않아졌다. 입에서는 말이 헛돌았고 단순한 질문도 뱅뱅 꼬여 나왔다. 종이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머릿속이 정리될까 싶어서 였지만, 어쩐지 문장이 아닌 단어만 반복해적고 있었다. 그 단어들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면 종이를 구기거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귀찮은 증상도 계속 됐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도라를 볼 때면 관자놀이가 지끈거렸고, 멀리서도, 여러 사람의 틈새에서도 그 애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면 귀가 곤두섰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앞질러 버린 모이 여름에 입은 봄 외투처럼 불필요하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벗어 버리고 싶을 만큼.

57.
도라는 자주 놀러왔다. 오는 시간은 일정치 않았다. 주말에 갑자기 들르기도 했고 평일 밤에 오기도 했다. 도라가 올 때가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렸다. 지진을 미리 느끼는 동물처럼, 폭풍우가 치기 전 땅 밖으로 기어 나오는 벌레처럼.
몸이 근질거려 문밖으로 나갔다 하면 어김없이 지평선 끝에서부터 그 애의 머리꼭지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불길한 거라도 본 양 급히 가게로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일들을 했다.
책 정리를 도와 주겠다면서도 도라는 제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한참이고 앉아서 같은 폐이지만 들여다 봤다. 자연도감이라든지 곤충, 동말도감 따위에 관심이 많았다. 그애는 어디에서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거북이의 등딱지에 서도 , 황새의 알이나 가을 늪지대의 갈대에서도 대칭과 자연의 놀라운 손길을 찾아냈다. 도라는 아름답다는 말을 참 자주했다. 나는 그 단어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 찬란함까지 생생히 느낄 수는 없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책방의 책이 다 정리될 때까지도 도라와 나는 우주에 대해, 꽃과 자연에 대해 얘기했다. 우주의 크기, 벌레를 녹여 먹는 꽃, 거꾸로 누워 헤염치는 물고기에 대해.
- 그거 알아? 우린 공룡이 크다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콘트라베이스만 한 공룡도 있었대. 콤프소그나투스. 귀여웠겠다.
도라의 무릎 위에 알록달록한 동화책이 펼쳐져 있었다.
- 내가 보던 거야. 어렸을 때 엄마가 읽어 주던책.
- 이 책을 읽어 주던 엄마가 기억나?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만 한 힙실로포돈, 강아지만 한 미크로케라톱스,50센치쯤 되는 미크로파키케팔로사우루스, 그리고 작은 곰돌이 인형만 한 무스사우르스, 그 길고 이상한 이름들이 다 기억났다. 도라의 입이 조금 올라갔다.
- 엄마한테 자주가니?
- 응, 매일.
도라가 잠깐 말설였다.
- 나도 같이 가도 돼?
- 응
생각해 보기도 전에 대답이 먼저 나와 버렸다.

엄마의 병실 창틀에 작은 공룡 인형이 놓였다. 오는 길에 도라가 산 거였다. 누군가와 함께 엄마 병실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때때로 심 박사가 들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도 나도 같이 가자고 애기를 나눈 적은 없다. 도라는 미소를 띤 얼굴로 엄마를 굽어보더니 엄마의 손을 조심히 잡고 쓰다듬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윤재 친구 도라라고 해요. 참 예쁘세요, 윤재 학교도 잘 다니고 건강해요. 꼭 그 모습을 보셔야 해요. 얼른 일어나실거예요.
- 이제 너도 해.
- 뭘?
- 내가 한거.
- 엄만 어차피 소릴 못 들어.
목소릴 낮춘 도라와 달리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소리로 얘기했다.
- 이상한 거 아니야. 그냥 인사드리는 건데. 뭐.
도라가 나를 가볍게 밀었다.

천천히 엄마 한테 다가갔다. 지난 몇 달간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아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 나갈까 너 혼자 있을래?
- 아니.
- 내가 너무 강요한 거면 ... ...
그 순간 내 입에서 엄마, 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조용히 엄마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하지 않은 얘기가 너무 많았다. 당연하다. 아무런 말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천천히 말했다. 할멈이 세상을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고.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벌써 가을이라고, 버텨 보았지만 결국 책방을 정리하게 됐노라고,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말을 마치고 뒤로 물러섰다. 도라가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엄마는 여전히 천장의 별자르만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엄마한테 말을 해 보니 그렇게까지 의미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심 박사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빵을 굽는게 이것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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