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庸 白马啸西风 2

3학년2반 | 2022.01.13 07:52:51 댓글: 0 조회: 38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1941
四. 원수를 만나다.

문득 밖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을 향해 오는 듯했다.
초원에는 이미 눈이 많이 쌓였으므로 말이 발을 빼는데 힘이 드는
듯 매우 느릿느릿 오고 있었다.
말 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니 계노인도 그소릴 듣고는 혼
자 중얼 거렸다.

"또 눈보라를 피해 오는 사람이로구나!"

그러나 소보와 아만은 아직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건지 서로의 손을 꼭 쥔 채 바짝 붙어서 얘기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그 말이 문앞에 닿더니 탕탕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계노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문을 열었다. 문앞에 서 있는 자는 양
피옷을 입은 당당한 체구의 사내로 구불구불한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었고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밖에 눈보라가 대단해 도저히 말이 꼼짝도 할수 없소!"

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서투른 카자흐어였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내부의 사람들을 눈여겨 살폈다.

"들어오시지요. 우선 술을 좀 드시지요."

하고 계노인이 말하며 술 한잔을 그에게 건네준다.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불가로 다가앉아 옷을 풀어 헤치는데 허리 양쪽에
날카로운 빛을 내며 반짝이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그 두개의 단검
은 하나는 금자루요, 하나는 은자루였다.
이문수는 이 한쌍의 소검을 보자 온몸이 떨려와 목구멍에 뭐가 막
힌 듯하고 눈앞이 아찔해 왔다.

(분명 엄마의 쌍검이야.)

금은소검 삼낭자가 세상을 떠날때 이문수의 나이 비록 어렸으나
이 한쌍의 소검은 너무나 눈에 익은 물건이었으므로 결코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슬쩍 이 사내를 훑어 보니 더욱 인상이 분
명했다. 그때 무리들을 이끌고 그녀의 부모를 살해한 세명의 수령
중의 하나인 것이다. 십 이년이 흘러 그녀 자신은 완전히 몰라보게
변했으나 삼십여 세의 사내는 십 이년이 지났는데도 거의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혹 그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감히 더 이상은
그를 살피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이 눈보라가 없었다면 소보를 만날리도 없었고 이 원수 또
한 볼 수가 없을 뻔 했구나.)

계노인이 물었다.

"손님께선 어디서 오셨는지요? 먼곳으로 가시는 중이었나요?"

그러나 그 사내는 흠, 흠! 히며 스스로 술 한잔을 따라 마실 뿐이었다.
이때 불가에는 다섯사람리 둘러앉아 있었다. 소보는 더이상 아만
과 속삭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계노인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 하더
니만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저 여쭙고 싶은 사람이 있읍니다."
"누군데?"
"제가 어렸을 적에 함께 놀던 친구인데, 한인소녀..."

소보가 여기까지 말하자 이문수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두
근거렸다. 그녀는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소보는 이러한 그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수아라고 하는데 팔구년 동안 한번도 그녀를 본적이 없어요. 그
녀는 한인 노인과 함꼐 살았었는데 바로 할아버지 시죠?"

계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흠, 흠! 하
고는 뭐라 딱 대답을 못한다.
소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의 노래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천영조
보다도 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했었죠. 그러나 이 몇
년간 단 한번도 그녀의 노래를 들은적이 없읍니다. 그녀는 아직
도 이곳에서 살고 있나요?"

계노인은 참으로 뭐라고 대답 하기가 난처하였다.

"아니, 아냐. 그녀는... 그녀는 이제 없어..."

이문수가 옆에서 끼어 들었다.

"댁이 말한 한인 아가씨는 나도 알고 있는데 죽은지 이미 여러해됐읍니다."

소보는 몹시 놀랐다.

"그녀가 죽다니? 어쩌다 죽게 되었소?"

계노인은 이문를 힐끔 보며 말했다.

"병으로...병으로..."

소보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언제나 그녀와 양을 치러 다녔는데 그녀는 내
게 많은 노래를 들려줬고, 얘기도 들려줬었소. 벌써 여러해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는데, 설마...설마 그녀가 죽었으리라고는.
계노인도 따라 탄식한다.

"아, 가엾은 것!"

소보는 다시 불길을 쳐다보는데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이 악당들에게 죽임을 당해 가엾게도 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

아만이 끼어들었다.

"그 아가씨는 예뻤었나요?"
"그때는 너무 어려서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걸. 단지 그녀의 고
운 노래 소리와 고사를 즐겨 들었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야."

곁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사내가 불쑥 말했다.

"지금 한인 아이라 했나? 부모는 죽고 혼자 이곳엘 왔다고?"
"맞아요. 당신도 그녀를 아시나요?"

사내는 그에는 대답도 않고 계속 물었다.

"그 아이는 백마를 타고 다녔겠지, 그렇지?"
"그래요. 당신도 그녀를 본적이 있나보군요."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계노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아이가 여기서 죽었다구?"

계노인은 어물어물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의 물건은? 전부 보관하고 있소?"

계노인은 그를 의아해 하며 쳐다 봤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몹시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계집이 훔쳐 달아
났소. 도처로 그 아이를 찾아 헤매도 찾을수 없어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소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허튼 소리 마라. 수아가 어째서 네 물건을 훔친단 말이냐?"
"네가 뭘 안다구?"
"수아와 어려서부터 함께 지냈소. 그녀는 정말 좋은 아가씨로 결
코 남의 물건에 손 댈 사람이 아니오."

사내가 입을 삐쭉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내 물건을 훔쳐 달아 났어."

소보가 손을 뻗어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얹으며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이름이 무엇이지? 카자흐족 같지 않은데. 그 한인 강도일지도 모르겠구나."

사내가 문 쪽으로 달려가 대문을 열고 밖을 살피려 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눈을 동반한 바람이 마구 들이 닥친다. 들판은 눈보라가
천지를 뒤덮고 있어 사람과 말은 이미 다닐수가 없었다. 사내는 혼자 궁리 했다.

(밖에서 누국가 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 집안에는 여자와
노인, 그리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소년 한명이 있을 뿐이니 다 일
격에 쓰러뜨릴수 있는 이들이다. 오직 이 건장한 체격의 소년만좀 애를 먹이겠구나.)

"한인이 어떻다구? 나는 진달해라 하는데 강호에서는 청망검이라
부른다.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소보는 한인들의 강호 규칙을 알리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 본 적이 없소. 당신은 한인 강도가 아닌가요?"
"그 반대요. 강도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니 어떻게 강도일수 있겠소?"

소보는 그가 강도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표정을 좀 누구러뜨렸다.

"한인 강도가 아니라니, 그럼됐소! 일찌기 한인 중에도 좋은 사람
이 많다고 들었소. 내 아버지는 절대 믿지 않지만. 그러니 이후
로는 수아가 당신 물건을 가져갔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진달해가 냉소를 띠며 말했다.

"그 아이는 이미 죽은지 오래인데 여지껏 그녀를 기억해서 뭘 하는가?"
"그녀가 살아 있을때 내 친구였듯이 쥰어서도 내 친구임에 변함이
없소.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녀를 헐뜯는걸 용서할수 없소. 알겠소?"

진달해는 더 이상 그와 왈가왈부 다툴 마음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돌려 다시 계노인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물건들은 어쨌소?"

이문수는 소보가 자기를 위해 저토록 애써 변호하는 걸 보고는 감
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나를 잊지 않고 있었어! 게다가
나를 이렇게 위해 주다니.)

그러나 진달해가 자기의 위품에 대해 다시 한번 캐묻자 궁금해 견달수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 나는 그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는데 도데체 뭘찾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계노인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께서는 뭘 잃어버리셨나요? 그 아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
니다. 이 늙은이가 보장할수 있읍니다."

진달해는 뭔가 깊이 생각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한장의 그림이오.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
오. 허나 그건... 그건 내 선친께서 손수 그리신 것이라 나는
꼭 그 그림을 찾아야만 하오. 그 아이가 일찌기 여기서 살았으니
당신도 그 그림을 본적이 있겠군요?"

"어떤 그림 인가요? 산수화, 혹은 인물화?"

계노인이 이렇게 물으니 진달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산...산수화라구?"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보가 진달해를 비웃으며 사
이에 끼여들었다.

"어떤 그림인지도 모르면서 어째서 공연히 트집을 잡고 애매한 사
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가?"

진달해는 벌컥 화를 내며 허리에 차고있던 장검을 빼어 들었다.

"요 쥐새끼 같은놈이 살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지?"

소보도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며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라도 카자흐인을 죽이기가 그리 쉽지 않을껄."

아만이 옆에서 소보를 말렸다.

"소보, 제발 참아!"

소보는 아만의 만류로 뽑았던 칼을 천천히 칼집에 도로 넣었다.
진달해는 고창미궁의 지도를 찾기위해 십년을 머물며 사방 수천리
의 사막과 초원 구석구석 안다닌 곳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이문
수를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가 그토록 찾아 헤메던 것이 눈
앞에 보일듯 말듯 하는 상황이니 작은 것을 참지 못하다가 큰일을
그르친타고 스스로를 타이렀다.
소보를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는 계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림은 지도라고 볼수도 있소. 대사막 중의 산수지형을 그려놓은 것이오."

계노인은 자기도 모르는 새 몸을 부르르떨며 말했다.

"당신 어떻게... 도대체 지도가 어찌 그 아이의 수중에 있다고생각하시오?"
"틀림없는 일이오. 만일 그지도를 찾아낸다면 많은 보수를 주겠오."

하고 말하며 진달해는 품에서 은화 두 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계노인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본적이 없소."
"내가 직접 그 아이의 유물을 찾아봐야 겠소."
"아니, 이...이 놈이..."

진달해는 노기등등해 하며 금은 소검을 뽑아 팍! 탁자위에 꽂았다.

"뭐라구, 이 놈이고 저 놈이고 간에 내가 직접 내 눈으로 확인 해야 겠소."

하며 양초에 불을 붙여 들고 문을 걷어차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가 처음 들어간 곳은 계노인의 침실이었다. 그는 언뜻보고 아닌듯
싶자 닥치는데로 상자를 엎어 버리고는 다시 이문수의 침실로 갔다.

"하, 많이 자라고 죽었구나."

하며 세세히 살피는데 이문수가 어렸을 적에 입던 옷까지 모두 들
춰냈다. 이 옷들은 엄마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라서 나이 들어 더이
상 입을수 없게 되었어도 고이고이 간직한 것들이었다. 진달해는
이 몇가지 옷을 보니 어렴풋이 십년 전 대사막에서 그녀를 추적하
던 정경이 떠올라 소리질렀다.

"맞아, 맞아, 틀림없는 그 애다!"

그러나 아무리 침실을 샅샅이 뒤지고 안감 속까지 헤집으며 살펴
봐도 지도는 그림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소보는 그가 이렇듯 이문수의 유물을 제멋대로 함부로 다루는 걸
보고는 오르는 화를 누를길 없어 몇번이고 칼에 손이 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만의 만류에 간신히 참고 있었다. 계노인이 힐끔힐끔
이문수를 곁눈질해 봐도 그녀는 망연히 타고 있는 불더미만 바라볼
뿐 전혀 진달해의 폭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계노인은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심히 난감하였다.

"하긴 저렇게 흉폭한 칼앞에 무슨 뽀족한 수가 있단 말인가!"

이문수는 소보가 분개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하였다.

(그가 지금껏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게다가 지금 내 유물을 지
키기 위해 목숨마저 불사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저 악당이 내가 훔쳤다고 말한 지도는 대체 무슨 지도란 말인가?)
그 날 그녀의 어머니는 죽기 직전 한폭의 지도를 그녀 옷속에 넣
어 주었으나 워낙 긴박한 사항인지라 뭐라 설명할 새도 없었다. 진
위표국의 일천 명의 사내들은 십 년간이나 그녀의 행방을 찾았으나
이문수 자신은 지도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진달해는 아무리 찾아봐도 전혀 실마리를 발견할수 없자 화가 극
도로 치솟아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무덤이 어디 있소?"

계노인이 놀라 잠시 멈칫했다.

"먼 곳이오. 아주 먼곳."

진달해는 벽에서 가래를 집으며 말했다.

"날 데리고 가시오!"

소보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뭘 하려는 게요?"
"상관 말아라. 내가 직접 그녀의 무덤을 파 봐야 겠다. 그 지도가
무덤속에 같이 묻혀 있는지도 알수 없는 일이니까."

소보는 칼을 뽑아 문을 가로막으며 호통쳤다.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게 할순 없다."

진달해가 가래를 번쩍 들어올려 소보를 향해 정면으로 내려치며 호통쳤다.

"비켜라!"

소보는 왼쪽으로 살짝 몸을 피하며 쥐고 있던 칼로 가래를 내리쳤
다. 진달해가 가래를 버리고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드니 쨍그렁! 하
며 칼롸 검이 부딪혔다. 두 사람이 각각 뒤로 한걸음 성큼 물러섰
다가는 동시에 나아가며 한데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집은 워낙 넓지 않은고로 칼과 검이 맞부디치며 휘둘러대니 계
노인과 아만은 벽에 바싹 붙어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아만은 좀전에 진달해가 꽂아
놓은 탁자의 소검을 재빨리 집어 소보를 도우려 했으나 달라붙어
싸우고 있으므로 끼여들 틈이 없었다.
소보는 그의 부친의 무예를 전수한지 오래이므로 그 도법이 변화
무쌍하고 극히 날카오웠다, 소보의 예리한 공격에 진달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요런 카자흐족 놈이 중원의 고수에게도 무공이 뒤지지 않을 줄은몰랐구나!)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뭔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
려보니 소검이 날아왔다. 아만이 기습한 것이었다. 진달해가 옆으
로 살짝 비키며 코웃음을 치는데 소보의 단검이 그의 왼팔을 긋고
있었다. 진달해는 크게 노하여 쉭쉭쉭! 연속 세번을 찔렀는데 바로
그의 주특기인 청망검법 이었다. 소보는 눈앞에서 검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움직이는걸 보니 마치 이무기가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것
과 같아 그 검의 끝이 어디를 찌를지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적의 장검은 이미 그의 면전에 닿아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데 목에 이미 칼이 스쳐 선혈이 흘렀다.
진달해는 피할틈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소보의 팔목을 찌르니 쨍
그렁! 하며 단도가 땅에 떨어졌다.
잇달아 다시 칼을 날리는데 소보는 전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자
칫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이문수가 한 보 앞으로 내딛으며 진
달해가 세번째의 검을 쓰기만하면 대금나수(대금나수)를 펼쳐 그의
팔을 낚아 채려했다. 그 때 갑자기 아만이 앞으로 몸을 날려 소보
의 몸을 막으며 외쳤다.

"안 돼요!"

진달해는 아만의 용모가 꽃과 같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소보를 향하던 검을 그녀의 가슴께로 옮기더니 웃으며말했다.

"그를 그토록 걱정하다니 이 놈이 그대의 정랑이란 말인가?"

아만이 얼굴을 붉히며 끄덕인다.

"좋아, 그대는 내게 그의 목숨만 살려 달라고 했으니 내일 눈이
그치는 대로 나와 함께 가야 한다!"

소보가 크게 분개하여 으르렁대며 아만의 뒤에서 덤벼들었다. 진
달해의 장검은 잠시 부르르 떠는 듯하더니 이미 소보의 목구멍을
겨누고 있었다. 그가 왼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소보가 퍽!
하고 거꾸러졌다. 그러나 장검은 여전히 소보의 목을 겨누고 있었
다. 이문수는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진달해가 소보를 해하려 들
기만 하면 즉시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의 무공으
로 저 자를 상대하기란 실로 우수운 일이었다.
허나 이토록 든든한 응원부대가 곁에 있는 줄 꿈에도 모르는 아만
은 워낙 상황이 급한지라 애원할 따름이었다.

"제발 죽이진 마세요.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진달해는 속으로 몹시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칼을 거
둘 생각은 않고 한번 더 다짐을 해둔다.

"내일 나를 따라가기로 했으니 결코 취소할순 없다. 알겠나?"

아만이 이를 막물며 대답했다.

"절대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 검을 거두세요."

진달해는 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달아나고 싶어도 결코 그렇게는 안될껄!"

하며 장검을 칼집에 꽂으며 소보의 단검을 집어 움켜 쥐었다. 이
렇듯 집안에서 오직 그 혼자 무기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느 누구
도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아무래도 나갈수 없을테니 내일 날이 개거든 무덤을 파러가야지."

아만이 소보를 옆에서 부축하려 하는데 그의 목에서 선혈이 멈추
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만이 당황하여 자기의 옷고름을 찢어 그의
상처를 싸매려 하는데 소보가 품에서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이 수건을 써요!"

아만은 수건을 받아들고 그의 상처를 감싸면서 강도의 수중에 떨
어진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보가 겨우 소리를 내어 꾸짖었다.

"개 같은 놈, 좀도적 같으니!"

이미 그는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만일 저 강도가 정말 아만을 끌
고 가려 한다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와 일전을 벌여야겠다고 비장
한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싸움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다섯 사람이 불가에 빙 둘러
앉아 있는데 모두 긴장된 상황이었다. 진달해는 한손에는 칼을 잡
고 한손으로는 술잔을 쥔채 아만을 쳐다보다 소보를 돌아보다 하고
있었다. 밖에선 북풍이 노호하며 눈덩이를 말아 올려 벽과 지붕에
부딪치고 있는데 안의 다섯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저 악당이 다시 한번 미친짓을 벌인다면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

그 때 불더미 속의 나무가 팍! 하고 터지며 불꽃이 어두워지는듯
하더니 갑자기 더욱 밝아 졌다. 그 불빛에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
게 드러났다. 문득 소보의 목을 감싼 수건을 본 이문수는 놀라 눈
며 그 수건을 몇번이고 쳐다보는 걸 보고는 물었다.

"소보, 이 수건은 어디서 난건가?"

소보가 번쩍 정신이 드는듯 목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대답 했다.

"이 수건 말씀인가요? 그 죽은 수아가 제게 준 것입니다. 어릴적
우리가 함께 양을 치고 있는데 커다란 회색이리 한 마리가 물려
고 덤벼 제가 그 이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도 크게 다
쳤는데 수아가 이 수건으로 제 상처를 싸매 주..."

이러한 소보의 말을 듣고 있던 이문수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
그렁해 모든게 가물가물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었다.
계노인이 내실로 들어가 하얀 천을 꺼내오며 소보에게 건네줬다.

"이 천으로 상처를 싸매고 그 수건을 내게 풀어 주게나. 한번 보고 싶네."
"왜요?"

이때 옆에서 계노인의 말을 듣고 있더 진달해가 뭔가 감을 잡은듯
소보의 목을 감싸고 있는 수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칼을 들며 일어섰다.

"내게 그걸 풀어 줘, 어서!"

소보는 노기를 띠고 꼼짝도 않았다.
아만은 또 진달해가 무력을 쓸까 두려워 얼른 수건을 풀어 계노인
에게 건네 주며 흰천으로 소보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계노인이 피로물든 수건을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등불에 비춰 보기
도 하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진달해가 눈
을 부릅뜨고 살펴보더니만 기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맞다, 맞아, 바로 고창미궁의 지도다!"

하며 수건을 가로 챘는데 하하하! 웃으면서 기쁨에 들뜬 모습이었다.
계노인은 오른팔을 내밀어 수건을 빼앗으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않았다.
바로 이러한 때에 문득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보, 소보..."
"아만, 아만..."

그 소리를 듣고 소보와 아만이 동시에 펄쩍 뛰며 외쳤다.

"아버지가 우릴 찾으신다."

소보가 급히 문 쪽으로 달려나가 문을 열려 하는데 문득 목 뒤가
서늘해졌다. 장검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앉아, 꼼짝 말고!"

하는 진달해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있어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문앞까지 다다랐다.
소로극의 음성이 들렸다.

"그 한인놈의 집 아냐? 절대로 안 들어간다."

차이고의 음성이 뒤이어 들렸다.

"안 들어가겠다구? 그렇담 어디서 이 눈보라를 피한단 말야? 난
벌써 코와 귀가 얼어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데."

소로극은 한기를 쫓기 위해 호리병을 손에 든채 오는 동안 내내
술을 마셔 왔기 때문에 이땐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곤드레만드
레 취한 목소리 였다.

"이대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한인의 집엔 들어가지 않겠다."
"들어가지 않겠다면 어쩌 겠단 말야. 나는 들어가야만 하겠어."
"내 아들과 자네 딸도 잦지못하고 어떻게 저 한인 놈으 집으로 피
하 겠단 말야? 자네는 도데체 남자답지가 못하군."
"지금껏 아무도 그들 둘을 본 사람이 없는걸보니 틀림없이 어디론
가 피신했을 게야. 걱정 마, 두 아이를 찾기는커녕 두 늙은이가
먼저 얼어 죽겠구먼."

소보는 진달해가 칼을 빼들고 문 뒤로 숨는걸 보고는 누구라도 안
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단칼에 찌를게 분명한 것을 눈치 챘다.

"들어와선 안 돼요!"

진달해가 눈을 부릅뜨고 소보를 향해 으르렁댔다.

"다시 한번 소리를 내면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말테다."

그러나 부친이 이토록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가만 있을수는
없는 일이다. 소보는 막대기 하나를 집어들고 진달해 에게 달려들
었다. 진달해는 살짝 몸을 비키며 소보의 허벅지를 찔렀다. 소보가
윽!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진달해가 다시 한번 내
려칠까 두려워 그는 몸을 민첩하게 움직여 바닥을 뒹굴렀다.
그러나 진달해는 더 이상 그를 쫓을 생각은 않고 칼을 들고 문뒤
에서 지켜서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네가 만일 저 한인 집에 들어간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면서 소로극은 차이고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차이고 역시 발
을 걸어 넘어뜨렸다. 눈 위에서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소로극이 눈을 한 줌 집어서는 차이고의 입을 틀어막으니 차이고
는 왝왝 하며 눈을 뱉어냈다. 소로극이 기분 좋아하며 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고 있는데 입안의 눈을 다 토해낸 차이고가 퍽! 하며
소로극의 코에 일격을 가했다. 코피가 흘러도 소로극은 전혀 아픔
을 못 느끼고 그저 배를 잡고 웃을 따름이었다. 소로극은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차이고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소보와 아만은 애를 태우면서 소로극이 이겨 차이고가 안으로 들
어오는걸 저지하길 바랬다. 그러나 문밖에서는 여전히 퍽! 퍽! 하
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네가 한대, 이번엔 내가 한대, 하고 웃으며
욕하는 취한음성이 그칠줄 모른다. 갑자기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찬바람과 눈이 안으로 마구
불어 닥쳤다. 소로극과 차이고가 서로 껴안은채 데굴데굴 굴러 안
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너무나 뜻밖에 문이 덜컥 열렸으므로 문 뒤
에 숨어 있던 진달해는 칼을 휘두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
든 일에 아랑곳없이 소로극, 차이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엉켜붙어 싸우며 놓을줄을 몰랐다.
차이고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자, 자네 어쩌다 여길 들어왔지?"

소로극이 몹시 분해 하며 팔로 그의 목을 누르며 고함을 질렀다.

"나가, 나가!"

두 사람이 땅바닥에서 엉겨붙어 다투고 있는데 한 사람은 상대방
능 끌고나가려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앉
히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로극이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
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자네가 나를 꺾을수 없으니 나는 카자흐 제일의 용사다. 소보는
그 다음, 소보가 앞으로 낳은 아들이 세번째, ... 자네 차이고는 다섯째..."

진달해는 두 취한이 떠들어대는 걸 보고는 문뒤에 숨어 있던 자신
이 우수워졌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닥쳐 불더미의 불꽃이 난
무 하는걸 보고는 억지로 문을 닫아 걸었다. 소보와 아만은 자기들
의 아버지가 불더미 쪽으로 굴러가는 것을 보고는 급히 달려가 일
으켜세우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그러나 이 두 사람 다 육중한 체구라 단번에 일으켜 세울수가 없었다.
소보가 참을 수 없어 소리질렀다.

"아버지, 아버지! 한인 강도예요!"

소로극은 아무리 취했다 해도 십 년간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있던
불구대천지 '한인 강도'라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어디야?"

소보가 진달해를 가리켰다. 소로극은 허리로 손을 뻗어 칼을 뽑으
려 했다. 그러나 차이고와 정신없이 한참을 뒹구는 통에 문 밖 눈
속에 칼을 떨어 뜨리고 말았으므로 아무리 더듬어 봐도 칼은 만저지지 않는다.

"칼, 칼! 저 놈을 죽여야 돼!"

진달해가 장검을 뽑아 그의 목을 향하며 고함쳤다.

"끓어앉아!"

소로극은 잔뜩 화가 나 그를 덤치려 했으나 술에 취한 탓에 힘이
빠져 적을 덮치기는커녕 자기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진달해가 그를
보고 냉소를 지으며 칼을 휘두르자 소로극의 어깨에 핏물이 베어
나온다. 소로극은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온힘을 다해 일어서
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몸을 세울수가 없었다.
그를 본 차이고도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진달해를 향해 몸을 날
렸다. 진달해가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편 다리를 찔렀다.
계노인은 고개를 돌려 이문수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을 뿐더러 두려운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진달해가 냉소를 띤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카자흐 놈들, 오늘 이 몸이 하나씩 다 처치해 주마."

아만이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그의 몸을 가로막아 서며 진
달해에게 애원했다.

"이미 당신을 따라가기로 약속했니 제발 이들을 죽이진 마세요."

차이고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절대 안돼! 저 도적놈을 따라가선 안돼.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낫다!"

진달해가 벽에서 양을 옭아맬때 쓰는 긴 끈을 집어 아만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며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넌 나의 포로다. 넌 나의 노예야! 당장 멩세를 해라. 오늘
이후 절대로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그래야 저 카자흐 몇 놈을
살릴수 있을게다.!"

아만은 만일 자기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와 소보가 다
그에게 죽임을 당할것을 생각하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맹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라신께 맹세합니다. 오늘부터 저는 주인의 노예입니다. 주인의
모든 명령에 따르고 분부를 쫓으며 영원히 달아나지 않겠읍니다.
만일 맹세대로 하지 않으면 사후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만겁이
되어도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진달해는 하하하! 하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밤 이미 고창
미궁의 지도를 손에 넣은데다 이 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취했으니
마치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회강에 산 지 오래
되었기에 카자흐인이 회교를 경건히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알라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만 하면 죽을때까지 감히 배반하지 않
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진달해는 올가미를 씌우며 말했다.

"이리 와서 네 주인의 발앞에 앉아라!"

아만은 분하기 그지 없었으나 할 수없이 그의 발 아래로 가 않았
다. 진달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니 아만은 마
침내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내어 통곡했다.
이것을 보고 어찌 소보가 참을수 있으리오. 몸을 솟구쳐 진달해를
향해 덮치려 했으나 진달해의 장검이 이미 그의 가슴을 겨누고 있
었다. 소보가 반척만 앞으로 내딛어도 그의 가슴은 예리한 칼끝에
찔릴게 뻔했다. 아만이 절규했다.

"안돼, 소보 뒤로 물러나!"

소보의 눈은 불을 뿜어내는 듯했고 이는 부러져라 악 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서 있던 그도 마침내는 서서히 뒷걸음
질치더니 털썩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달해는 혼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키며 그 수건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폈다.
계노인이 물었다.

"이게 고창미궁의 지도라는 걸 어떻게 아오?"

하는데 한어를 쓰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진달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테니 얘기한다 해도 안될것 없지.)

그렇지 않아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던 참에 잘됐다 싶어 얼른 양손
으로 수건을 잡으며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찾던 고창미궁의 지도는 분명 이삼 부부가 가졌었다. 그
런데 그들 부부의 시신에서도 찾을수 없었으니 그들의 아이가 가
지고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다. 이 수건은 그 아이의 것인데 산천
도로가 그려져 있으니 틀림없는 그 지도다."

하며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요. 이 수건은 실로 짜여진 것인데 이 산천 사막의 도형은
중앙에 금실로 짜여져 있오. 실도 황사요, 금실도 황색이니 평시
에는 알아볼 수가 어뵤는 것이오. 단 피로 물들기만 하면 금실은
보통 실보다 더 많은 피를 빨아들이므로 분리가 되는것이오. 알겠소?"

이문수가 수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과연 그가 말한 데로 선혈이
묻은 곳은 도형이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피가 묻지 않은 곳은 그냥
황색일 따름이었다. 소보가 이리에게 물렸던 날은 출혈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 아주 조금밖에 도형이 드러나지 않았었으나 오늘밤은
칼에 입은 상처가 워낙 심해 거의 도형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이 수건에 이처럼 크나 큰 비밀이 감춰져 있는 줄 이제서야 비로소알게 되었다.
소로극과 차이고의 상처는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다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술이 깨거든 저 한인 강도놈을 없얘야지!)

차이고가 말을 꺼냈다.

"노인장, 물 한 모금만 주시구려."
"그러구려!"

하며 계노인이 물을 가지러 일어서려 하자 진달해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 누구도 내 허락 없안 움직여선 안돼."
계노인이 흥! 하며 자리에 다시 앉는다.

진달해는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것들이 만일 힘을 합쳐 한꺼번에 달려들면 곤란한데. 저 늙은
카자흐 놈들이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으니 먼저 죽여야겠다. 조심하는 게 최고야.)

눈치채지 않게 소로극에게 가만가만 다가가서 돌연 장검을 뽑아
그의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이 일격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인
데다 진달해의 행동 또한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소보가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달해가 단칼에 소로극의 머리를 내리치려 하는 찰나, 후!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자기의 면전을 가로막았다. 그토록 빠른 기세로
날아가면서도 행여 사람을 상하지 않도록 왼쪽으로 비켜 핑, 퐁 하
는 소리를 내며 튀기며 날더니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
은 찻잔 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보니 찻잔을 날려 그를 막은
이는 다름아닌 이문수였다.
진달해는 크게 노하였다. 이 카자흐 소년은 여자처럼 허약하고 창
백해 보여, 지금껏 전혀 싱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파리
한마리가 호랑이를 건드릴 줄이야. 그는 당장 칼을 뽑아들어 그녀글 겨누었다.

"이 쥐새끼 같은 카자흐놈, 네가 살고 싶질 않은가 보구나?"

이문수가 천천히 카자흐인의 겉옷을 풀어 해치니 안에 한인 저고리가 나왔다.

"나는 카자흐인이 아니요. 한인이요."

왼손을 들어 소로극을 가리키며 카자흐어로 말을 잇는다.

"저 카자흐 분께서는 한인은 다 극악무도한 강도인 줄로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한인이 결코 다 강도가 아닐 뿐더러 좋은
사람도 있다는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만일 이문수가 찻잔을 던져 그를 막지 않았다
면 방금 전의 진달해의 단칼에 소로극은 이미 산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소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소로극은 여전히 그에 기가 꺾이지 않고 소리 높여 말했다.

"난 결코 한인이 내 목숨을 구해 주는 걸 원치 않는다. 차라리 저
강도가 날 죽이도록 내버려 둬라."

진달해가 성큼 앞으로 한보 내딛으며 이문수에게 물었다.

"누구냐? 한인이라면 도데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게지?"

이문수는 얼굴에 냉소를 띠며 웃었다.

"당신은 날 못 알아볼 테지만 난 당신을 똑똑하 알고 있소. 카자흐
부락을 습격해 적지 않은 카자흐인을 해친 바로 그 한인 강도요."

이렇게 말하는데 마은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만일 너희 강도놈들이 그처럼 몹쓸짓을 마구 저지르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소로극이 지금처럼 우리 한인을 증오할 리가 없을 텐데.)

소로극은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이 늙은이랑 무슨 관계지?"

문득 이문수가 아만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여자는 너의 노비이니 내가 빼앗아 내것으로 삼겠다."

이 한 마디에 사람들은 다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었다.
진달해는 순간 몸이 떨려옴을 느꼈으나 여전히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좋다. 할수 있다면 한번 빼앗아 봐라."

하며 장검을 휘두르니 웅웅 하며 칼이 우는 소리를 냈다.
이문수가 고개를 돌려 아만에게 다짐을 했다.

"네가 알라의 이름으로 그의 노비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니 내가 그
를 꺾는다면 넌 내 노예가 되는 거야. 알아듣겠지?"

본래 카자흐인은 타종족과 싸워 포로를 잡으면 노예로 삼는것은
회교의 코란경에도 씌어 있는 명문 규정이었다. 일단 노예가 되면
가축과 다를 바 없이 매매 되는 것이다.
아만은 그녀의 말을 듣고 혼자 곰곰히 생각했다.

(어짜피 노예가 된몸, 저처럼 흉악한 강도를 따라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느니 차라리 저 이를 주인으로 섬기는게 낫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마... 그를 이기진 못할 거예요. 저 강도의 무공이 저처럼대단한 걸요."
"넌 신경쓸 것 없다. 내가 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에게 죽게될뿐인걸."

하며 두손을 부딪쳐 탁 치며 진달해 쪽을 돌아보았다.

"자, 덤벼 보시지!"

진달해는 그 모양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빈손으로 나와 싸울 셈인가?"
"너 같은 악당을 죽이는데 병기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진달해는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 안에 있는 자들이 다 적이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겐 불리할 뿐이다.)

"칼을 받아라!"

하고 벼락같이 소리지르며 예리한 검을 뽑아 독사출동(毒蛇出同)
일초로 이문수의 가슴을 향해 찔러 나갔는데 그 기세가 몹시 급박했다.
계노인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빨리 뒤로 물러나라!"

그는 이문수가 결코 그와 맞설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문수는 몸을 날려 재빠르게 피하며 팔꿈치를 뒤
로 쭉 펴서 그의 허리를 쳤다. 진달해도.

"좋아, 그렇다면 나도 가만있을순 없지!"

하고는 장검을 휘두르며 그녀의 팔꿈치를 노렸다. 이문수가 오른
발을 잽싸게 날려 그의 팔목을 차니 이는 곧 엽저비연(葉底飛燕)
일초였다. 이는 화휘의 절초 중 하나로서, 민첩하고 재빨라 굉장한
효과를 볼수 있는 초식이었다. 이문수가 칠팔일간을 피나게 연습하
고 나서야 숙달할수 있었던 것이다. 진달해는 급히 손을 움츠렸으
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그 차는 힘이 그다지 세지 않았으므
로 진달해는 가까스로 장검을 놓치지 않을수 있었다.
그는 으르렁대며 뒤로 한보 성큼 물러섰다. 지켜보던 계노인의 입
에서 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나 놀
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듯했다.
진달해가 팔목을 주무르며 검을 뽑아 다시 이문수와 맞붙었다. 이
때에는 이미 얕보는 마음이 싹 가셨다. 보아하니 그의 손동작과 발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청망검법을 펼치는데 그일
초 일초가 매우 잔악하여 이 소년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는 듯했다. 이문수는 사부 화휘에게 무예를 전수받았는데 그
몸동작은 민첩하고 초식은 정교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허나 지금껏
누구와도 초식을 나누며 싸워본 경험이 없었던 탓에 조금 당황스러
웠다. 처음에는 부모를 죽인 원한을 갚기 위해 오직 이 악독한 도
적을 죽일 일념으로 싸웠으나 점차 적의 검법의 형세에 대한 감을
접가 사작하자 평정을 찾아갔다.
계노인의 집은 본래 협소한데다 불까지 피웠으니 진, 이 두 사람
이 몸을 솟구치고 날며 맞붙어 싸우는데 그 검과 주먹의 거리가 일
촌이 채 되지 않을때가 많았다. 진달해의 매 일검은 다 이문수의
목숨을 노리며 휘두르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피하거나 그 공격을
끊어 놓을 따름이었다. 소로극 등 몇 사람은 멍하니 입을 크게 벌
린채 싸움을 지켜볼 따름이었으나 계노인은 점점 두려워져 몸을 벌벌 떨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진달해가 영사토신(靈蛇吐信)일
검으로 이문수의 목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갔다. 아문수가 고개를
숙여 검을 피하고는 그를 덮쳤다. 왼팔로 적의 오른팔에 일격을 가
하며 그가 주춤하는 새 진달해의 허리에 꽂힌 금은소검 두자루를
움켜줘었다. 검을 뽑는 동시에 퍽! 하며 그의 좌우 겨드랑이에 꽂았다.
진달해가 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장검을 떨어뜨렸다. 비틀거리
며 뒤로 물러서서는 벽에 등을 기댄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
다. 그 양검이 자루까지 푹 빠지게 겨드랑이에 꽂힌것은 아니지만
그 끝이 등을 뚫고 나온 것을 보니 이미 근맥이 끊어져 양팔에 전
혀 힘을 쓸수가 없었다. 오른팔을 뻗어 왼쪽어께의 소검을 빼내려
하나 오른쪽 어깨를 들어 올릴 수가 없으니 어찌하리오?
이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강도를 눌렀다. 저 악독한 강도를 이겼다!"

소로극조차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소보와 아만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허나 계노인은 여전히 온몸을 부들부
들 떨며 이를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이문수는 그가 자기를 걱정한 나머지 그토록 두려워 하고 있는줄
알았다. 그에게로 가 그의 거칠고도 큼직한 손을 잡으며 그에 귀
에다 바짝 입을 대고 속삭였다.

"할아버지, 걱정마세요. 저 강도는 결코 저를 이길 수 없어요."

허나 여전히 그의 손은 차디 찼으며 몸은 떨고 있었다.
이문수가 고개를 돌리니 소보와 아만이 바짝 껴안고 있는게 보였
다. 순간 가슴속에 충만했던 승리의 희열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걸 본 그녀는 자기 자신 또한 떨기 시작했는데
계노인을 잡고 있던 자기의 손 또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노인의 손을 놓으며 아만의 목에 걸려 있던 끈을 잡아
끌었다. 아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기만 하였다.

"너는 나의 노예이니 나를 따라 가야만 한다."

소보와 아만의 마음도 동시에 얼어 붙은듯했다. 둘은 서로를 부둥
켜안고 있던 네 개의 손을 살며시 풀었다.
그들은 카자흐족에게 자자손손 전해 내려오는 이 규칙을 결코 어
길수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문수는 한숨을 내쉬며 아만의 목을 옭아매었던 끈을 벗기며 말했다.

"소보가 그대를 아끼는데, 내... 내가 그를 상심에 빠뜨릴 순
없지. 그대는 소보의 사람이다!"

하며 가볍게 아만을 밀어 소보의 품에 안겨 주었다.
소보와 아만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하는듯 동시에 물었다.

"정말 입니까?"

이문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소보와 아만은 그녀의 손을 부여잡으며 연신 흔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들은 기쁨에 어쩔줄 몰라 이문수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
들의 손등을 적시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로극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 큰손으로 이문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인 중에도 과연 좋은 사람이 있구나. 허나... 아마도 그대
하나뿐일 것이오."

차이고도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좋아, 내가 한턱 내지. 사람들을 불러 악독한 강도를 잡은걸 축
하 해야지. 어! 강도가...?"

차이고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보니 진달해는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이문수와 아만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그 강도는 기회를 틈타 뒷문으로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소로극은 끓어오르느 화를 참을 길 없었다.

"빨리 쫓자!"

하며 문을 열러 젖히니 엄청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소로극은 바
람에 밀려 맥을 못 추고 땅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한풍과 눈의 기세가 워낙 세차 사람들은 숨조차 못 쉴 지경이었다.
아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같은 뉼보라에 그가 도망가 봤자 멀리 못 갈 터이고, 억지로
쫓아가다 공연히 눈속에서 죽기 쉽상입니다. 내일 날이 밝아 바
람이 좀 가라앉거든 그 악당의 시신이나 찾으면 될 거예요."

소보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문을 닫아 걸었다.
소로극은 눈을 부릅뜨며 한참 동안 이문수를 쳐다봤다.

"형제여, 그대는 카자흐인이지 않은가?"

이문수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 한인 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일 한인이라면 어째서 한인강도를 때려눕히고

우리 카자흐인을 구해 주었는가?"

"한인 중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
저는 결코 나쁜사람이 아닙니다."

소로극은 혼자 중얼거렸다.

"한인 중에도 좋은 자가 있다고?"

평생 한인을 증오해 왔는데 지금 그 신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
다. 그는 자신에 대해 부글부글 화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
다. 하필이면 어젯밤 곤드레가 되어 저 한인 강도와 한바탕 결투를
벌여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위급하고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그처럼 한심한
꼴을 보이다니! 다행히도 저 소년이 구해 줬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
았다면 그 강도의 장검이 이미 자기의 정수리에 꽂혀 있을 것은 명
약관화한 사실이었다.

五. 고창미궁(高昌迷宮)을 찾아서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 무렵 마침내 눈보라가 멎었다.
소로극과 차이고는 즉시 사람들을 소집해 한인 강도를 추적하기시작했다.
눈위의 발자국이 뚜렸한데다 상대는 중상을 입었으니 틀림없이 멀
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혹시 그 강도가 나머지 한인 강도에
개로 갔다면 이번 기회에 십 이년 동안 맺힌 원한을 풀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카자흐인 중 가장 건장한 남자 삼백여 명으로 제 일 추격대를 조
직하고, 기타 제 이, 제 삼의 추격대가 그뒤를 따르기로 했다. 물
론 진달해 하나를 잡을 생각이라면 이토록 많은 인원을 동원할리없었다.
소로극과 차이고가 선봉을 섰다.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은 십여리
떨어져 천천히 따라오게 했다. 소보는 어젯밤에 상처를 입긴 했으
나 그다지 중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만 또한
아버지를 따라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차이고 또한 두명의 제자
를 데리고 갔는데 하나는 민첩한 상사아요. 하나는 '낙타' 라는 힘센 청년이었다.
이문수 역시 선봉대에 끼었다. 소보가 우선 대찬성 이었는데 어젯
밤 이후 이문수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차이고
또한 그녀의 참가에 반대를 하지 않았다. 소로극은 불만스럽긴 했
으나 반대의 뜻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계노인은 어젯밤의 일이 큰 충격이었는지 아침에 우유를 마실때에
도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문수가 그에게 차를 따라줄때에도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차 또한 옷에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문수가 그에게 괜찮으시냐고 물었지만 그의 눈빛
은 공포와 분노의 빛을 띠고 있었다. 계노인은 별안간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가더니 방문을 꼭잠그고 틀어 박혔다.
워낙 눈이 깊이 쌓였기에 말을 타고 가기는 어려웠다. 별수없이
칠인은 눈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다. 보아하니 진달해의
발자국은 곧장 서쪽을 향한 듯했다. 아마 사막을 통과해야 할듯 싶
었다. 진달해는 양팔을 다쳤다고는 하나 다리 힘은 여전히 좋은것
같았다. 여섯명의 카자흐인은 불현듯 고비사막에는 악귀가 많다는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생각나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소로극이 분연히 나선다.

"오늘 악귀를 만난다 할지라도 강도를 포기할순 없다. 소보, 그렇
게 되면 네가 내 대신 엄마와 형의 원한을 갚아다오!"
소보는 뒤질세라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를 따르겠읍니다. 아만, 넌 돌아가!"
"소보가 가면 나 또한 갈거야."

하고 말하는 아만의 심중은 이러했다.

(네가 죽으면 나 혼자 살아 남아 무엇하리!)

소로극이 한 마디 거들었다.

"아만, 넌 네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게 좋겠구나. 차이고
는 담이작아 악귀를 무서워하니까!"

차이고는 소로극을 한번 무섭게 흘겨보더니 누구보다도 먼저 앞으로 나갔다.
고비사막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도 가도 물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나 지금 한바탕 눈이 퍼붓은 후인지라
허리를 굽히면 빙설이니 가장 큰 걱정거리가 해결된 셈이었다. 서
쪽으로 가면 갈수록 진달해의 발자국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의
발자국 위에 전혀 눈이 덮이지 않은걸 보면 눈보라가 멈춘후에 지
나간것이 분명했다. 차이고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 강도도 대단한 놈인데, 이 눈보라 속에서도 죽지 않았다니!"

별안간 소로극이 소리를 질러댔다.

"어이, 여기 또 한사람의 발자국이 있네!"

그가 발자국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그강도의 발자국을 밟고 지나갔네. 자기의 발자국이
따로 드러나지 않도록 애쓴 것 같은데."

사람들이 다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발자국마다 깊이 패인것과 얕
게 패인 두 층이 있었다.
사람들의 추측만 분분할 뿐 도데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길이 없
었다. 낙타가 홀연 말했다.

"귀신이란 말인가?"

다들 마음속으론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누군가 말을꺼
내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일행은 용기를 내어 계속 서쪽을 향해 갔다. 워낙 정강이까지 푹
푹 파묻히는 눈길인지라 그들의 걸음은 빠를리 없었다. 그날 밤은
눈 위에서 노숙하기로 하고 우선 쌓인눈을 깨끗이 쓸어내고 모래
구덩이를 파낸 다음 담요로 몸을 둘둘 말았다.
이문수의 모래 구덩이는 낙타가 파준것이었다. 그는 내심 이 한인
영웅을 흠모하고 있었기에 그 넘치는 힘으로 그덩이를 파주었는데
그 위치는 낙타와 소보 사이였다. 일곱개의 모래 구덩이는 하나의
커다란 원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엔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그들 머리 위를 덮고있는 하늘은 쪽빛이었고 별들은 그 맑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와 사막 위의 백설을 말아 올렸
다. 이문수가 아래 위로 어지러이 나는 눈을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
는 사이에 중얼거렸다.

"한쌍의 나비 같구나!"

소보도 덩달아 한마디 했다.

"맞아, 정말 똑같군. 아주 오래전에 한인소녀가 있었는데 내게 나
비에 관한 고사를 들려 줬었지. 한 한인 소년과 소녀가 있었는데
두사람은 몹시 사이가 좋았지. 그런데 그소녀의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어. 소년은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고 말았어. 어느날, 그 소녀가 정랑의 묘를 지나다 묘에 엎드려 통곡을 했지."

얘기가 이에 이르자 소보와 이문수의 마음속엔 팔구년 전의 정경
이 떠올랐다... 나즈막한 언덕에서 한 소년과 소녀가 어깨를 나
란히 하고 앉아 양때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는 고사를 얘기해 주
고 있었고, 소년은 열심히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 한인 아가씨가
정랑의 묘 앞에서 슬피우는 장면을 얘기할때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고 소년 또한 몹시 가련하게 느꼈던 것이다.
소보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 아가씨가 묘 앞에서 한참을 슬피 우는데 갑자기 묘가 벌어지
지 않겠어. 그 아름다운 아가씨는 서슴지 않고 그 안으로 뛰어들
었지. 후에 이 한쌍의 연인은 한쌍의 나비가 되어 언제나 함께
날아다니며 영원히 해어지지 않게 되었지."

아만이 끼어 들었다.

"정말 슬픈 이야기야. 이 고사를 들려준 이는 네게 지도가 그려진
수건을 주었던 그 소녀겠지? 이미 죽은 그 소녀?"

소보는 풀이 죽은 듯 대답했다.

"응, 바로 그녀야. 그 한인 노인이 그녀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하셨지."

이문수는 물었다.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시오?"
"물론이지요.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이오?"
"그런데 어째서 그녀의 묘를 보러 가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 강도를 없앤 후에 그 한인 노인께 부탁해 한번 가봐야겠어."

다시 한번 이문수가 물었다.

"만일 그 묘가 벌어진다면 그대도 따라 들어갈 생각이 있소?"

소보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건 고사에나 있는 일이지 결코 그런일이 있을 리가 있겠소?"
"만일 그 소녀가 그대만을 그리워하여 밤이고 낮이고 그대만을 바라다가 죽었는데
정말로 묘가 벌어진다면 그대는 그 묘 속으로 들어가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하겠오?"

소보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 소녀는 단지 내 어릴 적 친구일 따름이오. 나는 한평생
아만과 더불어 살 것이오."

하며 손을 뻗어 아만의 두손을 꼭잡았다.
이문수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이러한 대답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참
지 못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답을 듣고 보니 마음이쓰라렸다.
문득 멀리서 천영조 한 마리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소
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소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예전에 난 언제나 천영조를 잡아 놀곤 했는데 다 갖고 논 다음엔
죽이곤 했지. 어느날 천영조를 몹시좋아하던 그 소녀가 올팔찌를
내게 주며 그 새를 놓아 주게 했지. 그 후 난 다시는 새를 잡지
않았어. 단지 한밤중에 부르는 천영조의 노래소리를 들을 뿐이었
지. 들어 봐, 정말 듣기 좋지?"

이문수가 음! 하고 물었다.

"그 옥팔찌, 아직도 갖고 있소?"
"워낙 오래전 일이오. 부러뜨린지 오래오."

이문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음, 오래된 일이라, 부서진지 오래라구."

천영조는 쉬지않고 노래부르고 있었다. 본래 추운 겨울밤에는 노
래부르지 않는 법이었는데 무슨 가슴 아픈 일이 있길래 참지 못하
고 저리도 그 아픔을 토해 내는가? 소로극, 차이고, 낙타, 이들 셋
의 코고는 소리는 천영조의 노래소리보다 훨씬 크게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칠인은 건량으로 요기를 한 다음 발자국
을 좇아 추격했다. 오후가 되니 발자국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 두번째 사람은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에 지쳤음에 분명했
다. 소로극 등 칠인이 모두 환호했다. 그럼 그렇지, 이는 사람이지
귀신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사람은 누구한 말인가?
이번에 칠인이 걷는 방향은 이문수가 평소에 사부의 처소를 다니
던 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이 강도가 아마도 그들 동료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수건에 그
려진 지도를 좇아 혼자 고창미궁을 찾는가 보구나.)

그녀가 마음속의 추측을 얘기하자 소로극 등은 잠시 놀라더니 다
투어 그녀를 칭찬했다. 상사아도 한마디 했다.

"이 일대 사막은 평소에는 물 한모금 없는곳이니 한인강도가 이곳
에 올리가 없읍니다."

소로극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가 미궁으로 도망갔으니 우리도 미궁으로 가자. 지구 끝까지라
도 쫓아 이 악당을 잡아야 한다."

부족 내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대 고비사막에
미궁이 있는데 그 안에는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은 보물이 있다는
것이다. 허나 누구도 미궁으로 가는 길을 아는자가 없었고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게되면 그야말로 위험천만이었으므로 지금껏 감
히 미궁을 찾아 나서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도도 있겠다,
이 삽십일 동안 녹지 않을 만큼의 눈도 있으니 물걱정 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곧이어 대부대가 뒤따라 올 터인데 주저할 게 뭐가있으랴?
이문수가 말하였다.

"그래요. 정말로 고창미궁이란게 존재하는지 아닌지 한번 알아봅시다."

그녀는 부모가 고창미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으니 만일 자기가
미궁을 찾아낸다면 부모의 유지를 받드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아만이 말했다.

"부족의 노인들 께서 말씀 하시기를, 고창미궁의 보물이라면 천산
남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편안히 살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러한 전설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지만 아직 누구도 찾아내지못했어요."

소보도 신이 난 듯 한마디 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찾아냔다면 모두가 아주 편안히 지낼 수 있을
테니, 이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아만이 소보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생활은 좋지 않단 말야?"
"아니, 지금도 참 좋아. 정말 좋아!"

한편 이문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창미궁의 보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결코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어.)

팔일째 되는날, 칠인은 발자국을 쫓아 산으로 들어갔다. 산은 깊
고 험했다. 들어갈수록 더 걷기 힘들어만 갔다. 산세가 몹시 험악
하고 길은 울퉁불퉁 했으며 따로 난 길이 없엇다. 다행히 눈위에
찍힌 발자국이 몹시 선명하므로 그 발자국을 따라 산비탈과 산계곡
을 통과할 따름 이었다. 얼핏 보기엔 길의 끝가는 데를 알수없어
눈위에 난 발자국은 흡사 지옥으로 곧장 향하고 있는 듯했다.
소로극과 차이고는 사방의 정세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위험한것 같
았다. 두 사람은 내심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했으나 서로 심중의
생각을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소로극이 말했다.

"차이고, 그렇게 덜덜 떠는 걸 보니 그 작은 담이 터져버릴까 걱
정스럽네. 자네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면 보물을 찾아서 자네
에게도 몫을 나눠주겠네. 어떤가?"
"내가보기엔 아무래도 자네가 먼저 도망갈 것 같은데. 아니면 자
네아들이 한발앞서 도망갈듯도 싶고."
"천만에. 우리 부자는 귀신을 만나더라도 도망갈 힘은 있다네.
자네처럼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도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땅
바닥에 무릎꿇고 떨고 있진 않을걸세."

이렇게 두 사람은 이렇쿵저러쿵 말다툼을 하면서도 사막의 악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방은 이미 칠흙
처럼 깜깜해져 있었다. 소보가 말했다.

"아버지, 오늘밤은 여기서 묵도록 하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떠나도록 하죠."

아들의 말에 소로극이 묵묵부답인 것을 본 차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좋지. 그대들 부자는 두려워 어쩔줄 몰라하니 여기서 묵도록 하
시오. 아만, 너는 이 아버지와 함께 가자. 낙타, 상사아, 우린
다 귀신이 무섭지 않으니 어서 길을 떠나도록 하자."

소로극은 퇘! 하며 침을 뱉더니만 앞장서서 가버렸다. 이문수는
두 사람이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안보이려고 서로 질세라 큰소리치
는걸 보고는 할수없이 그들 뒤를 따랐다. 허나 이때 아만은 몹시
지쳐 몸도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소보, 상사아는 마른 가지를
주어서는 횃불을 피웠다. 그들은 발자국을 따라 깊은 숲속으로 들
어갔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것만
같은 숲속에 있으니 누군들 무섭지 않으리. 어쩌다 새우는 소리가
나거나 나뭇가지를 덮고 있던 눈이 툭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숲속을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아만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이런!"

소보가 급히 물었다.

"왜 그래?"

아만은 저만큼 앞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팔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봐. 아까 내가 떨어뜨린 팔찌야."
팔찌는 그들 앞의 두세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도데체 어째
서 이곳에 그게 떨어져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아만이 말했다.

"나는 이 팔찌를 떨어뜨리고는 나중에 돌아오는길에 찾아야지 했
었어. 그런데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는걸까?"

차이고가 말했다.

"잘 보아라. 확실히 네것인지 아닌지."

아만이 주우러갈 엄두도 못내고 있자, 소보가 주워 갖고 왔다.
그러나 아만의 확인이 필요없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자마자 곧
그게 아만의 팔찌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틀리없어. 바로 네 거야!"

하며 팔찌를 아만에게 건네려 하였다.
그러나 아만은 가까이할 엄두도 못내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버...버려. 난 필요 없어."

소보가 말하였다.

"귀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불빛 아래 칠인의 안색은 모두 두려워 질려있는 듯했다.
모두들 아무 소리도 못 내고 한참을 있었는데 이문수가 먼저 입을열었다.

"차라리 귀신의 장난인 게 나을거요. 더 낭패인 것은 아무래도 우
리가 지나갔던 길을 다시 온 듯합니다. 이 길은 아까 우리가 갔던 길입니다."

이문수의 말에 사람들은 다 그유명한 전설이 불현듯 생각났다.
사막 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갑자기 발바국을 발견하고는 미친듯
이 좋아하며 그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 발자국이 바로 자기의 발자
국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돌고 돌다가 결국엔 죽고 만다는 바로 그 전설.
사람들은 모두 이문수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만이
팔찌를 떨어뜨린게 확실하고 그후 한참이 지났는데 갑자기 오래전
에 떨어뜨린 팔찌가 눈앞에 있다니, 이건 분명 한 바퀴를 돈게 틀
림없었다. 지나간 길을 다시 돌아 오다니. 워낙 어두운데다 피곤이
겹쳐 조금 전까지 더듬어 찾아온 발자국이 과연 두 사람의 것인지
아니면 일곱 사람의 발자국이 또 겹쳐 졌었는지 아무도 확신할순
없었다. 낙타가 횃불을 들고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살펴보더니 외쳤다.

"많은 사람의 발자국이에요. 우리들 발자국이 틀림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잔뜩 질려 있었다. 칠인은 다 서로 얼굴
만 처다볼 뿐이었다.
이문수가 말했다.

"지금껏 그 강도와 또 다른 한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왔으니 그들
또한 뱅글벵글 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이곳으로 올 게 분명합니다. 일단 여기서 쉬면서 과
연 그들이 오나 안오나 보도록 합시다."

다들 그녀의 말에 동의 할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눈을 쓸어내고
담요를 펴고는 함께 앉았다. 낙타와 상사아가 모닥불을 펴 그들 칠
인은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어느 누구도 잠이 올 리 없었고 어느
누구도 말할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달해와 다른 한 사람이 나
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들이 나타날까 두려
웠다. 만일 그들이 한바퀴를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그야
말로 자기들의 운명을 그들과 함께 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나자마자 칠인은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
자 그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이 짧은 순간에 이 일곱 사람
은 자기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도 들리는 듯했다. 돌연 발자국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더니 서북방으로 멀어지는 듯 했다. 바로
이때, 질풀이 불어와 눈을 날렸다. 눈이 모닥불을 덮어 버려 불은
꺼지고 말았다. 사방은 칠흙 같은 어둠에 싸이고 말았다.
쉭! 쉭! 쉭! 하는 소리만 났다. 이문수 등 육인이 동시에 칼을 빼
어든 것이다. 아만이 아! 하며 소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검은 흰눈에 반짝이는데 발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날이 밝았어도 숲속에 별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정신이 들었다.
다시 길을 찾기로 하고 한참을 가는데 아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길 좀 봐요!"

왼편의 관목이 몇 그루 밤혀 있었다. 소보가 그곳을 헤쳐 살펴보
니 두 갈래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환호했다.

"여기로 갔구나!"

아만이 말했다.

"아마 그 강도는 지도를 잘못보고 한바퀴 돈 거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제대로 이곳으로 찾아간 걸 거야. 공연히 우리만 하룻밤 꼬박 떨게 했잖아."

소로극이 하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겠지. 차이고네 집안은 워낙 담이 작아서 하룻밤 내내 귀신
이 나올까봐 시달렸겠지. 소로극 집안의 두 용사는 도리어 귀신
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귀신이 나오기만 하면 그 귀를 잡
고 똑똑히 봐 두려고 했는데."

차이고는 그의 말을 들은체 만체 코방귀도 뀌지 않고 있었다.
갑지가 손을 들어 소로극의 귀를 잡아당겼다. 소로극이 소리를 지
르며 펑! 하고 그의 등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차이고는 휘청하
면서도 한번 잡은 손을 놓질 않았다. 여전히 소로극의 귀를 잡은
채였다. 소로극의 귀에서는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번더 힘을
쓰면 귀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소로극과 차이고는 서로 퍽퍽거리
며 여러번 주먹이 오고간 뒤에야 갈라섰다. 한 사람은 코가 파랴고
한 사람의 눈은 부어올라 있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한참을 다투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
갈수 있었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마구 꼬부라졌다 해서 걷기가 몹
시 힘들었다. 때로는 움푹 파인 곳을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동굴
을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만일 눈의에 찍힌 발자국이 없었다면 정
말 힘들었을 것이다.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미궁은 은밀하기 그지없는 곳에 있구나. 지도가 없다면 찾
을 업두도 낼 수 없겠는걸.)

점심 때쯤 되자 간밤에 한숨도 못 잤으므로 다들 몹시 피곤했다.
오직 한사람, 이문수만은 수련이 워낙 든든했으므로 여전히 맑은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소보가 말했다.

"아버지, 아만이 더 이상 걸을수 없으니 잠깐 쉬도록 해요."

소로극이 채 대답을 하기전에 맨 앞장 서가던 차이고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소로극은 재빨리 앞으로 뛰어나갔다. 쭉 늘어서 있는 나무들을 돌
아가니 산이 보였다. 부채가 펼쳐진 듯한 두개의 철문이 보였다.
그 문은 눅슬고 얼룩덜룩한 것으로 보아 몹시 오래됐음에 틀림없었다.
칠인이 동시에 환호성을 올렸다.

"고창미궁이다!"

하며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소로극은 있는힘을 다해 철문을 밀
어 보았지만 두 개의 부채꼴형의 문은 끄떡도 아니했다.
차이고가 말했다.

"그 놈의 도적이 안에서 문을 잠갔나 보다."

아만은 철문 주위를 세세히 살펴보았지만 하늘이 만들어 놓은듯
조금도 틈을 찾아낼수 없었다. 아만이 다시 문고리를 잡고 왼쪽으
로 돌려보았지만 끄떡도 않는다. 이 미궁이 건설된지 몇백년이 됐
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막의 기후가 건조하다 해도
철문에 녹이 슬었을 법도 한데 아무리 밀어 봐도 도대체 요지부동
이었다. 그때 아만이 다시 한번 오른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뭔가
헐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쉬지않고 몇번이나 돌렸다.
소로극과 차이고는 자기들의 힘센 기운으로 문을 밀고 있었다. 갑
자기 철문이 활짝 열렸다. 잔뜩 힘을 써 문을 밀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너무나 뜻밖의 일인지라 두 사람
은 아픈것도 잊은채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들은 동시에 정신이 든 듯 갑자기 큰소리로 웃으며 서로 부둥켜 안았다.
내부는 빛이라고는 전혀 스며들지 않는듯 몹시 깜깜했다. 소보는
횃불을 붙여 한손에 쥐었다. 또 다른 손엔 장도를 든채 선두에 서
길을 인도했다. 길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세갈래 의 갈림길이 나왔
다. 미궁 내부에는 그들이 지금껏 쫓아온 눈 위의 발자국이 있을리
없었으므로 그 두사람이 과연 이중 어느길로 갔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모두 몸을 굽혀 발자국을 살펴 보았다. 왼쪽과 오른쪽의
두 갈래길에 뭔가 흐릿하게나마 발자국이 나 있었다.
소로극이 말했다.

"네 명은 왼쪽으로 가고 셋은 오른쪽으로 가보자. 이따 여기서 다
시 마나기로 하고."

이문수가 말했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미궁이라 불리는곳 입
니다. 분명 구불구불한 길이 많을테니 함께 행동하는 게 좋을듯합니다."

소로극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런 동굴 중에 길이 구부러지면 얼마나 구부러진다고. 한인은
본래 담이 작은 종족이니 정말 별수 없군."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칠인은 떨어지지 않고 함께 행동을
하기로 했다. 그들은 오른쪽길이 비교적 넓은걸 보고는 오른쪽으로향했다.
십여장쯤 갔을까. 문득 소로극은 생각했다.

(과연 저한인의 말이 옳았구나.)

가며 가며 계속 갈림길이 나왔던 것이다. 칠인은 모두 주의깊게
발자국을 살피며 나아갔는데 때로는 양갈래의 갈림길에 다 발자국
이 있는 적도 있었다. 그럴 경우엔 어느 한쪽을 임의대로 택할수밖
에 없었다. 한참을 가도 도대체 이 동굴 중에 갈림길이 몇이나 되
는지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한쪽으로 갈림길을 택할때
마다 아만은 동굴 벽에다 칼로 기호를 그리곤 했다. 그러지 않고서
는 도저히 이 길을 다시 무사히 빠져 나올수 있을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활짝 열리는 듯하더니 훤히 뚫린 공지가 나타
났다. 그 끝에는 다른 부채꼴형의 철문이 바위에 박혀 있었다.
칠인은 공지를 지나 문앞으로 다가갔다. 소로극이 전처럼 문고리
를 돌려봤다. 그러나 그 문은 잠겨 있던게 아니라 그냥 닫혀 있었
을 뿐이었다. 살짝 밀었는데도 저절로 문이 열렸다. 칠인이 안으로
들어가니 그 내부는 전당 이었다. 사방의 벽은 흙이나 나무로 조각
된 불상이 늘어서 있었다. 전당에서 내부로 더 들어가니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매 칸의 방에는 다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가끔씩
벽에는 한문이 씌어 있는 것도 있었다. '고창국국주'(高昌國國主),
'문태'(文泰), '대당정관십삼년'(大唐貞觀十三年) 등등이었다. 어
느 전당에 모신 것은 다 한인의 소상이었는데 그가운데 노인이 있
었거, 현판에다 '대성지성선사공자위'(大成至聖先師孔子位)라고 씌
어 있었다. 그 죄우에 수십인이 늘어서 있는데 안회(顔回), 자로(
子路), 자공(子貢), 자하(子夏), 자장(子張) 등의 이름이 써 있었
다. 소로극은 이렇게 쭉 늘어서 있는 한인들의 소상을 보더니 미간
을 찌푸리며 고개를 싹 돌리고 지나갔다.
이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 사람들은 다 회교를 믿는데, 어째서 이 미궁 안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또 한인의 소상이 있단 말인가. 벽에 써 있는것조차
한문이라니, 정말 알수 없는 일이로군.)

칠인은 하나하나 방을 통과하며 지나갔는데 대부분이 이미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어느 전당에는 황사가 잔뜩 쌓여 있어 출입구까
지도 막혀 있는 곳도 있었다. 미궁 안의 길은 원래부터 구불구불
복잡한데다 벽까지 모래로 막혀 있으니 정말로 갈피를 잡을수 없
었다. 칠인 모두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고 갈팔질팡했다.
어느 때는 길 가운데 백골 몇 구가 있을 때도 있었다. 그 궁중의
기물용구는 다 회강의 물건이 아니었다.이문수는 어렴풋한 기억속
에서 이것들이 다 한인의 물건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여전히 사람
들은 계속 이어지는 여러 가지 정경들에 눈이 어지러워 경탄의 소
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전설의 금은 보화라고는 눈꼽만큼도찾아볼수 없었다.
칠인이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돌연 으시
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곳에서 천년을 조용히 살아 왔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수
선을 피운적이 없었다. 어디 담이 큰놈은 이리로 와 봐라. 그자
리에서 죽이고 말 것이다!"

그 소리는 카자흐어를 쓰고 있었다. 그 음성은 아주 분명했고 전
혀 울리지 않아 그 말하는 바를 똑똑히 알아들을수 있었다.
아만이 놀라 말했다.

"악귀예요! 악귀. 들어봐요, 여기서 천년을 살았대요!"

하며 소보의 손을 잡아끌어 뒤로 몇보 물러나게 했다.
낙타가 외쳤다.

"저건 사람이야, 귀신이 아냐!"

하며 횟불을 높이 치켜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상사아도 뒤질세라
앞으로 나가 그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 갔다. 막 모
퉁이를 꺽어졌을때 갑자기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뒤로 거꾸
러지고 말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쩔 줄
을 몰라 하고 있었는데 소로극과 차이고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버리고 부축하러 갔다. 어둠속에서는 괴기한 웃음 소리만이 들려올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천년을 살았다. 천년을 살았어. 지금껏 이 안으로
들어온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차이고는 더 이상 우물쭈물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재빨리 낙타를
안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소로극도 상사아를 안고 나머지 사람들
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들 뒤로 괴기한 웃음 소리만이 입구
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안뜰로 나와서 낙타와 상사아를 살펴보니
두 사람의 입가에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고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
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뿐 말을 이을수가 없
었다. 그들은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단지 경악할 따름이었다.
아만이 말했다.

"저 악귀가 사람들이 들어오는걸 싫어하니...소란을 피우는걸
싫어하니...우리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요!"

일이 이렇게 된 상황이니 소로극과 차이고도 더 이상 용맹을 과시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두 구의 시체를 안고 오며 표시해 놓
았던 기호를 따라 미궁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차이고는 두명의 아끼던 제자를 잃었으니 그 상심이 대단했다. 그
는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소로극도 더 이상 그를
놀리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차이고를 위로했다.

"그 두 명의 한인강도 또한 미궁에 들어간 후에 그 종적을 찾을길
없는걸 보니 틀림없이 미궁의 악귀에게 죽음을 당했을거야. 그럼됐지 뭐."
"빨리 돌아가요.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는...다시는 이곳에 발
도 들여 놓지 않도록 해요."

차이고가 말했다.

"우리 부족의 대부대가 곧 들이닥칠 터이니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돼. 이궁에 들어갔다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소로극이 말했다.

"좋아! 미궁 밖에 있는다면 설마...설마 괜찮겠지."

정말 그의 말대로 괜찮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은 좀더 마음을 놓기 위해서 육칠리 가량 더 뒤로 물러났다. 사방
이 탁 트인 광활한 평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그 자리에 머물기로
했다. 소로극이 말했다.

"악귀는 태양을 무서워하니 이렇게 태양이 내려쬐고 있는곳이 라
면 두려울게 없지."

아만이 물었다.

"밤에는요?"

소로극은 머리를 긁어댈 뿐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다행이도 어두워지기 전에 제 일 부대가 도착했다. 소로극 등은
미궁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 안에 사람을 해치는 악귀가 있더라고얘기를 해주었다.
아무리 대담한 자라 해도 선뜻 살펴보자고 말을 꺼내는 자는 없었
다. 두 시간 남짓 되자 제 이부대, 제 삼부대가 앞을 다투며 도착
했다. 그들 수 백인은 그곳에서 노숙하기로했다. 십여 인 마다 간
격을 두어 커다란 모닥불을 피웠다. 설사 악귀가 다시 나타난다 해
도 이처럼 많은 불 앞에서는 어쩔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문수는 암석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멀고도 먼 중원에서 회강까지 오신것은 오로
지 고창미궁을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미궁도 채 못 찾고
목숨만 버리고 말았다. 만일 미궁을 찾을수 있었어도 역시 미궁
의 악귀에게 목숨을 잃었거나 악귀의 목소리에 놀라 도로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겠지. 혹시 모르는 일이야. 아버지와 엄마
의 무공이 대단하니 틀림없이 악귀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을
꺼야. 아니야, 아무리 사람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악귀를 당해
낼순 없을거야. 그래, 감히 악귀와 맞붙을 생각은 못할 거야.)

그때 그녀의 뒤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듯이 발자국 소
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아야."

이문수는 몹시 기뻐 벌떡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오셨군요."

계노인이 말했다.

"도데체 마음이 놓여야지. 아무래도 널 봐야 할것 같아 사람들을 따라왔지."

이문수는 몹시 감격해서 그의 손을 쥐며 말했다.

"그렇게 길이 험한데 그 노구의 몸을 끌고 오시다니, 정말 고생이
많으셨죠? 여기 앉아서 좀 쉬세요."

계노인은 그녀가 잡아끄는 대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때 홀연
날카로운 올빼미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은 몹시 귀에 거슬렸
다. 사람들이 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멀리서 뭔가
희뿌연 물체가 보였다. 그 물체는 암흑 속을 휙! 가로질러 무리로
부터 약 네장 정도 떨어진 곳에 우뚝 섰다. 어렴픗이 보아하니 인
형인것 같았다. 그러나 불빛에 보니 백색옷을 걸치고 얼굴에는 선
혈이 낭자한 것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 흰옷또한 피에 젖어
있었다. 키또한 보통을 훨씬넘어 평범한 사람과 비교하자면 최소한
오 척은 더 클 듯싶었다. 어둠속에서 이러한 현상을 보니 그 무서
움은 무엇에도 비교할수가 없었다. 그 물체가 별안간 양손을 앞으
로 쭉 뻗는데 그 열 손톱이 손가락보다 길었고 손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 숨도 멎은채 누구하나 정적을 깨는 자가 없었다.
그 요괴는 갑자기 요사스럽게 웃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미궁에서 천년을 살면서 누구도 감히 미궁으로 들어오게 하
지 않았었다. 감히 소란을 피우다니 이처럼 대담한 짓을 시킨자가 누구란 말이냐?"

그 말은 카자흐어였고 이문수가 바로 전에 미궁에서 들었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요괴는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세 장 가량 떨
어져있는 한필의 말을 가리키며 외쳤다.

"죽어라!"

그리고는 몸을 돌려 쏜살같이 가버렸다.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요괴가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니 요괴가 가버리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놀라 소리
를 지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요괴가 두손을 들고 가리켰던 그
말이 갑자기 네 다리를 꺾으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사람들
이 앞을 다투어 말을 보러 가는데 말의 몸에는 조금도 상처가 없었
다. 입이나 코에도 전혀 피가 흐르지 않았는데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수 없었다. 단지 마법에
걸려 죽었나 보다 하고 짐작할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귀신이다, 귀신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진작부터 사막에 귀신이 있다는걸 알았었어."

또 다른 사람이 한마디 했다.

"미궁에 천년씩이나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니 과연 귀신이 지키고있어서 그랬군."

질세라 또 한마디 거드는 사람이 있었다.

"귀신은 다리가 없다던데 그 귀신이 발자국을 남겼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사람들이 다 횃불을 손에 손에 들고 그 요괴의 자취를 살피는데
모래위에 뭔가 작은 구멍이 주개 나 있었다. 그 자국은 오척가량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다 만일 사람이라면 이토록 발이 작을리
도 없을 뿐더러 그 거리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을리도 없다고 생각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자는 없었다. 미궁에
요괴가 출몰한다는건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미궁속에 뭐가 있든지 다 필요없다. 내일 날이 밝기만 하면 빨리돌아가도록 하자."

밤새도록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다음날 태양이 떠오
르자 사람들의 가슴속의 두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몇몇
청년들은 미궁을 살펴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소로극과 차이고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도 그들 귀에 그 말이 들어갈 리 만무였다.
두 사람은 미궁을 가려면 우선 여러가지 궁리를 한다음에라도 늦지
않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상의한다고 뽀족한 수가 나올리 있겠는가? 할수
없이 여기서 하룻밤을 더 지낸 다음에 다시 한번 묘책을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덧 해시(亥侍)가 가까웠다. 바로 어젯밤 요괴가 출몰한 그 시
각 이었다. 서쪽에서 세 번 날카로운 올빼미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때 흰옷에 긴 다리를 하고 온몸
이 피로 얼룩진 요괴가 쏜살같이 날아와서는 수 장 밖에서 뭡춰섰다.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다니, 흥! 하루만 더 이 부근에서 어물쩡
댄다면 하나씩 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가 미궁에서 천년
을 살았지만 감히 어느 누구도 들어올 엄두를 못 냈었는데 눈에
뵈는 게 없는가 보군."

이렇게 얘기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두 손을 치켜들어 멀리
있는 한 청년을 가리켰다.

"죽어라!"
이 세 자를 말하고는 왔던 때와 똑같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달빛
아래 그가 멀어지는 모습이 보이더니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 청년은 고개를 떨구더니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한채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의 몸을 살펴보니 어제와 똑같
이 상처를 찾아 볼수 없었다. 어젯밤엔 말 한 필을 해쳤을 뿐이었
지만 오늘은 급기야 건장한 청년 하나를 해치기까지 한 것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니 누가 더 머물고 싶겠는가? 게다가 소로극등이
말하기를, 미궁 안에 아무런 보물이 없다지 않은가? 금은 한 조각
찾아볼수 없다지 않은가? 날이 어둡지만 않았어도 사람들은 모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그곳을 도망쳤을 것이다. 다음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아우성치며 돌아갔다.
이문수는 이미 어젯밤에 그 말의 시체를 자세히 조사해 봤다.
오늘 다시 한번 청년의 시체를 살펴보고 나니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건 귀신의 짓이 아니야!"

그때 바로 그녀의 등뒤레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귀신이야, 귀신! 수아야, 이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거란다. 우리
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

하는데 어느새 계노인이 그녀의 등뒤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계노인의 말에 이문수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요, 가요!"

바로 그때 소리 높여 외치는 소보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만, 아만, 어디있니?"

차이고도 놀라 말했다.

"아만이, 너와 함께 없었니?"

그도 소리높여 외쳤다.

"아만, 아만! 어디있니? 빨리 돌아가자!"

그느 이리저리 정신없이 딸을 찾아 다녔다.
소보의 애타는 음성이 여전히 들렸다.

"아만, 아만!"

그는 언덕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폈다. 그때 서쪽 길에 화두건이
보였다. 아무래도 아만의 것 같았다. 그는 급히 달려가 집어들어
보니 과연 아만의 두건이었다.
그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소리쳤다.

"아만이 그 요괴에게 잡혀갔어요!"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떠닌지 오래였다. 낙타와 상사아, 그리고
다른 한명의 청년의 시체까지도 남김없이 데리고 떠난뒤였다. 오직
소로극과 차이고, 소보, 이문수 그리고 계노인 다섯명만이 남아 있
을 뿐이었다. 소로극은 소보의 외침을 듣고 얼른 달려왔다.
소보는 화두건을 손에 든채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햇다.

"이건 아만의 것이에요. 그녀는... 그녀는... 그 요괴에게잡혀가고 말았어요."

이문수가 물었다.

"언제 잡혀갔지?"
"나도 모르겠소. 아마도 한밤중일 것이오 그녀... 그녀는 그녀
의 여자 친구와 함께 잠잤소. 그리고 오늘 아침엔 찾아볼 수 없었소."

그는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미궁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갔다.

"죽더라도 아만과 같이 죽을 테다!"

아만이 이미 요괴에게 잡혀간 이상 소보로서는 그녀를 구해낼 방
도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러나 만일 아만이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
니라면 그 또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소로극이 외쳤다.

"소보, 소보, 이런 멍청한것. 빨리 돌아와라, 정말 죽고 싶냐?"

그러나 그러한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모습이 점점 멀리
사라지자 마침내는 그도 아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자식에 대
한 사링이 귀신에 대한 공포마저도 누르고 만 것이다.
잠시 멍하니 넋이 나간 듯 있던 차이고도 외쳤다.

"아만, 아만!"

그도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이를 본 계노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수아야, 우린 돌아가자!"

이문수가 말했다.

"안 돼요, 할아버지. 전 그들을 구해내야만 해요."
"그렇지만 네가 귀신을 이겨낼순 없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계노인은 더 이상 그녀와 아웅다웅해봤자 소용이 없다는걸 깨달았
는지 가만히 있는다. 그는 갑자기 왼손을 뻗어 이문수의 팔을 꽉움
켜줬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수아야, 비록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라 해도 무서운건 마찬가지야.
내 말을 들어라. 빨리 돌이가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우리는 한인이니 더 이상 회강에 머물지 말고 중원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계노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이문수의 눈은 소보의 등이
사라져가는 곳을 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자 속이 타 견딜수 없었다. 계노인의 손을 뿌
리치려 했으나 뜻밖에도 계노인의 힘음 몹시 셌다. 이문수가 아무
리 벗어나려 힘을 써봐도 도무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애원 하기 시작했다.

"제발 날 놔 주세요! 소보, 소보가 죽을지도 몰라요!"

계노인은 그녀의 얼굴이 벌게져서는 안달하는 걸 보고는 탄식을
했다. 그는 더 이상 어쩔수 없다는걸 느끼고는 그녀를 잡았던 손을놓아 주고 말았다.

"저 카자흐 소년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질 않는구나!"

이문수는 몸이 풀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러한 그
녀에게 계노인의 말이 들리리가 없었다. 그녀는 단숨에 미궁앞에
다다랐다. 소보가 장도를 미친듯이 휘둘러대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 죽어 마땅할 요괴, 아만을 해쳤으니 어디 너도 죽어 봐라. 아
만이 죽었으니 나도 더 살고 싶지 않다. 자, 나와 봐라! 나는 소
보다. 빨리 나와서 나와 겨뤄보자! 내가 두렵단 말인가, 응?"

하며 그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리려 했으나 마음만 급하고 온전
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 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로극은 여전히 소리 지르고 있었다.

"소보, 이런 바보 같은놈, 들어가선 안돼!"

그러나 소보가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이문수는 소보가 저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미친듯이 날뛰는걸
보니 몹시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는 소보를 향해 크게 외쳤다.

"아만은 아직 살아있소!"

소보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순간 번쩍 정신이 돌아로는 듯했다.
급히 그녀에게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아만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그대... 그대가 그걸 어찌 알지?"

이문수는 대답했다.

"미궁 속의 그 요괴는 정말 귀신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야!"

소보, 소로극, 차이고 등 삼인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요괴인데, 어찌 사람일수 있단 말인가?"

이문수가 말했다.

"그건 바로 사람이 꾸민것이었소. 그는 일종의 매우 가는 독암기
를 쏴서 말과 사람을 죽였던 것이오. 그래서 상처를 찾아 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오. 그는 또 다리 밑에 높은 막대기를 대고 있
었소. 겉에는 장포를 덮어씌워 가리고 있으니 알아챌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가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나 키가 그토록 큰것,
그처럼 빠른 걸음 같은것은 다 이렇게 해서 가능했던 것이었소."

그녀의 설명에 다른 사람들은 감히 입도 열수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있소. 그의 암기를 쓰는 수법을
보고 알아낼수 있었소. 말과 그 청년의 시체에서 이미 그 암기
의 흔적을 찾아냈소."

이렇게 앞뒤가 다 들어맞는 논리정연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소로극
등은 단번에 그 말에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이때 계노인이 도착했다.
그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 요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소. 부디 그 미궁 안
으로 들어가지 마시오. 그래야만 목숨을 지킬수 있을 것이오. 나
는 노인이니 내가 하는 말은 틀림이 없을 것이오."

소보가 말했다.

"요괴이든 사람이든간에 어쨌든 난 들어갈 것이오 아만을구해 내야만 합니다."

그는 이문수의 말대로 요괴가 아니라 사람이길 바라고 있었다.
만일 이문수의 말이 맞는다면 어쨌든 아만을 구해낼 가능성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문고리를 돌렸다. 이번에는 돌리자마자 문이 열렸다.
이문수는 말했다.

"나도 그대와 함께 가도록 하겠소."

소보가 고개를 돌려 이문수를 바라봤다. 그의 가슴은 뭐라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감격 스러웠다. 그는 말했다.

"이영웅, 그대는 들어가지 마시오. 매우 위험한 일이오."

이문수가 말했다.

"걱정할것없소. 내가 그대와 함께 가면 위험할게 없소."

소보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말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문수는 생각했다.

(그대가 그토록 내게 감격하는 것도 다 아만을 위해서일 뿐이겠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계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장께선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안돼, 그럴순 없지. 나도 함께 가겠소. 그... 그자는 몹시 흉폭한 자이니."

이문수가 말했다.

"연세도 많이 드시고 무예도 할줄 모르시니 밖에서 기다리시는게
좋겠읍니다. 전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넌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얼마나 위험한 곳이라구. 너를 돌봐줘야해."

이문수는 차마 더이상 그를 떨치지 못하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날 보호해 준다구? 내가 할아버지를 도와 줘야 할텐데.)

다섯사람은 횃불을 든 채 한번 지나간적이 있는 그길을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六. 밝혀지는 진상들

그들은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어갔다. 소보가 소리소리 지르며아만을 불렀다.

"아만, 아만, 어디 있니?"

그러나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은 없었다. 이문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가 놀라 도망가게 하는 게 제일 낫겠군.)

"우리 다 같이 크게 외칩시다. 대부대가 온다고. 어쩌면 저 악인
이 놀라 도망 칠지 모릅니다."
소로극, 차이고, 소보는 이문수의 계략에 따라 크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만, 아만, 무서워 떨것 없다. 우리 대부대가 너를 구하러 갈테니."

그 고함소리는 미궁 내부 사방에 부딪치며 울려퍼졌다.
한참을 더 가는데 문득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만의 목소리 같았다. 소보가 소리나는 쪽으로 급히 달려가 부채
꼴 형의 문을 미니, 바로 그곳에 아만이 구석에 몸을 도사리고 있
었다. 두 손은 뒤로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은 놀라움과 기쁨에 약속
이나 한것처럼 동시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소보는 얼른 그녀의 묶인 손을 풀어 주며 물었다.

"귀신이었니?"
"귀신이 아니야. 사람이었어. 방금까지도 이 자리에 있었는데 밖
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자 나를 안고 도망치려고 했어. 그런데 내
가 죽을 힘을 다해 버틴 데다가 그는 대부대가 오는 줄 알고 얼
른 도망쳐 버리고 말았어."

소보는 가볍게 숨을 돌리며 물었다.

"도데...도데체 어떤 사람이었니? 왜 너를 잡아간 거지?"
"오는 내내 내 눈을 가리고 왔어. 미궁에 도착 했을 땐 사방이 캄
캄해 그의 얼굴을 볼수가 없었어."

소보가 고개를 돌려 감사의 눈빛으로 이문수를 바라봤다.
아만이 차이고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그 사람이 자기가 와이랍제(瓦耳拉齊)라고 했어요. 아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이고와 소로극은 합창이나 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와이랍제!"

두 사람의 외치는 소리만으로도 뭘 말하고 있는지 충분히 미뤄 짐
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냥 와이랍제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에 대해서 무척 자세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차이고가 말했다.

"와이랍제라구? 그럴 리가 없어. 정말 자기 입으로 와이랍제 라고
했단 말이냐? 잘못 들은게 아니냐?"

아만이 말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엄마를 잘안다고 했어요."

소로극이 말했다.

"그렇다면 두말 맣것 없군. 틀립없는 와이랍제야."

차이고는 혼자 중멀 거렸다.

"네 엄마를 안다고 그랬다구? 와이랍제란 말인가? 어... 어쩌
다 미궁의 귀신이 되었단 말인가?"

아만이 말했다.

"그는 귀신이 아니라니 까요. 사람이었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엄
마를 좋아했었데요. 그런데 엄마가 눈이 삐었는지 아버지처럼 멍
청이에게 시집갔... 아이 이런, 아버지 죄송해요. 그 나쁜 사람이 말한거예요."

소로극이 하하! 크게 웃으며 말했다.

"와이랍제는 나쁜놈이긴 하나 그 말은 틀린데가 없는데. 네 아버
지는 정말 멍청이..."

차이고가 주먹을 한방 먹이려 하자 소로극은 웃으며 살짝 피하고말했다.

"와이랍제는 옛날에 네 아버지와 서로 네 어머니를 놓고 경쟁을
벌였단다. 와이랍제가 졌지. 그 자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란다.
한밤중에 칼을 들고와서 네 아버지를 죽이려 했단다. 봐라, 네
아버지의 귀에 칼자국이 나 있는걸. 바오 와이랍제에게 당한 흔적이란다."

사람들은 동시에 차이고를 쳐다봤다. 과연 그의 왼쪽 귀에는 긴
칼자국이 있었다. 그 상처는 이미 이전에도 봤었지만 그 내력에 대
해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만이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얼마나 아프셨어요?"
"이 아비가 비록 그의 암계에 말려들긴 했지만 내가 그를 쓰러뜨
렸지. 그를 바닥에 꼼짝 못하게 해 놓곤 묶어 버렸지."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으시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차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음날 부족장께서 부족인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지. 그리고는 이
렇게 몹쓸 놈은 부족에서 추방한다고 선포하셨지. 영원토록 다시
는 돌아올 수 없으며 만일 몰래 돌아오다 발각되는 날엔 처형시
키 겠다고 했단다. 그 후 지금껏 그를 보지 못했지. 그 놈이 이
미궁에서 도데체 뭘하고 있던 게지? 참, 아만. 넌 어쩌다 그놈에게 붙잡히게 됐지?"
"오늘 아침 막 날이 밝을 무렵 나는 일어나자마자 소변을 보러 나
무 뒤로 갔어요. 어찌 알았겠어요. 그악인이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를 덮쳤어요. 소리를 못 지르게 내 입을 틀어막고 여기
까지 왔어요. 그는 엄마를 얻지 못했으니 엄마 대신 나라도 얻어
야겠다고 했어요. 나는 놔 달라고 애원했어요. 엄마가 당신을 좋
아하지 않은것처럼 나 또한 결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내 애원이나 협박에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말했어
요. '네가 날 좋아하건 말건 넌 내거야. 그 카자흐 겁장이 놈들
은 감히 이 미궁으로 널 찾으러 오진 못할거야.' 그의 말은 확실
히 틀렸어요. 아버지, 소로극 아저씨, 두분은 다 영웅이세요. 그
리고 이영웅, 소보, 계노인까지 와 주시다니. 날 구해 주러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차이고가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낙타와 상사아를 죽인 놈이니 빨리 뒤를 쫓도록 하자. 그를
잡아서 사형에 처해야지."

이문수는 본래 자기가 예상하고 있던 요괴의 정체와 실제가 완전
히 빗나간 걸 보고는 창피하기 그지 없었다. 공연히 애매한 사람에
게 죄를 덮어씌울 뻔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아직 입밖에 내어 말하
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정말 일이 우습게 될 뻔했다고 생각했다. 그
녀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카자흐인도 독침을 쏠 줄안단말인가? 어찌 이리 수
법이 똑같을수 있단 말인가? 그도 대사부님꼐 배웠단 말인가?)

요괴가 바로 와이랍제가 분장한 거라는 사실을 안 소로극 등은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와이랍제의 무예는 평범하기
이를데 없었으니 부딪치기만 하면 붙잡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죽 먹
기였다. 차이고는 제자의 원한을 갚겠다는 일념으로 횟불을 높이
들고는 앞장서서 갔다.
계노인은 이문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카자흐인들의 문제일 뿐이야. 우리는 참견할 계제가 아니니
밖에 나가서 그들을 기다리자."

이문수는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저기 안뜰에서 저를 기다리도록 하세요.
그 카자흐인의 무공이 강해서 소...소로극이 당해 내지 못한
다며 제가 그들을 도와야만 돼요."

계노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겠다."

이문수는 계노인을 향해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일은 곧 매듭을 지게 될 터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계노인은 그녀와 어께를 나란히 하며 걸어갔다.

"이 일이 잘 매듭지어지면 나는 중원으로 돌아가려한다. 수아야, 너도 함께 가자."

이문수는 난처했다. 중원은 그녀의 고향이지만 그녀 마음속엔 어
렴풋한 한편의 그림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대초원에
서 십여 년을 살아왔다. 이곳의 열풍과 대설, 황사, 그 끝을 알수
없는 평야, 소와 양, 한밤중의 천영조의 노래소리... 아 모든걸사랑하고 있었다.
계노인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은걸 보고는 또 말을 이었다.

"우리 한인은 중원에서 사는게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좋단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있지. 이 할애비가
이지 적지 않은 돈을 모아 놨으니 중원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아
주 편안히 살 수 있을게야. 중원은 정말 아름답고 번화한 곳이란
다. 그곳이야말로 사람이 살만한 곳이지."
"중원이 그토록 좋다면 왜 여지껏 돌아가지 않으셨죠?"

계노인은 이문수의 물음에 놀란듯 잠시 그대로 몇걸음 옮기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중원에는 내 원수가 살고 있단다. 내가 회강으로 온것도 다 화를
피하기 위한거였지. 이처럼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 원수도 틀
림없이 죽었을 게야. 수아야, 우린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도록 하자꾸나."
"안돼요. 할아버지 좀더 빨리 걸어야 겠어요. 지금도 저들과 너무멀리 떨어졌어요."

계노인은 음, 음, 하며 조금도 속력을 내지 않았다. 이문수는 그
의 나이를 생각하고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계노인이 말했다.

"중원으로 돌아가면 강남에서 살도록 하자꾸나. 우리는 큼직한 집
한채를 사는거야. 사방에 온갖 나무와 꽃을 심는거야. 봄이 되면
붉은건 복숭화꽃, 푸른건 버드나무, 검은건 버드나무 가지 아래
를 오락 가락하는 제비로 온 정원이 가득차지. 수아야, 우린 커
다란 연못을 만들어 잉어를 잔뜩 풀어놓자. 금색, 홍색, 백색,
황색의 물고기들. 너는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거야. 분명히 여기
보다 맘에 들거야..."

이문수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리 강남이 좋은 곳이라 해도 난 여기가 더 좋은걸. 그렇지만
... 이 일이 다 매듭을 짓게 되면 소보와 아만은 결혼하겠지.
그렇게 되면 성대한 잔치가 배풀어지겠지. 시름대회가 있을 테고
모닥불가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래요, 할아버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거든 다음날 바로 중원
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계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흥분하여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 그러자구! 집으로 돌아가거든 다음날로 바로 중원으로 가자."

갑자기 이문수는 와이랍제가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람하는 사람을 얻지도 못한데다 부족에게서 추방까지 당
하다니, 지금껏 이 미궁안에서 외롭게 살아 왔다니. 아만이 지금
열 여덟 살이니 이 미궁에서 그는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이십년이
넘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 됐는지도 몰랐다.

"와이랍제, 그 자리에 서!"

돌연 앞서 가던 차이고의 노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문수는 더 이상 계노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급히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대전 입구에 이르러 보니 전당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몸을 낮추
었다 붕 떠올랐다 하며 미친듯이 장도를 휘둘러대고 있는 차이고와
싸우고 있었다. 그 자는 손에 아무것도 든게 없었다. 몸에는 백색
의 장포를 입고 머리에는 백색의 복면을 쓰고 있었다. 두 눈만이
보일 따름 이었다. 복면 장포는 다 피로 얼룩져 있는게 틀림없이
어제와 그젯밤에 출몰했던 그 요괴의 복장이었다. 바로 아만을 납
치해 갔던 와이랍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긴 나무막대기를
밟고 서 있지 않아서 장포가 걸려 제대로 몸이 움직이지 못하고 넘어지곤 했다.
소로극과 소보 부자는 차이고가 칼을 갖고 있는데 반해 상대방은
빈손인걸 보고는 차이고가 틀림없이 이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들은 나서서 그를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고 횃불을 높이 지켜든채
잘 싸우라고 고래고래 성원만 보내고 있었다.
이문수는 그들이 싸우고 있는 수초를 보고 곧 알아차릴수 있었다.

"조심해요!"

하며 막 출수하려 하는데 펑! 하며 차이고는 가슴에 일장을 맞았
다. 그는 선혈을 분수처럼 뿜어내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소로극부
자는 몹시 놀라 들고 있던 횃불을 동시에 내팽개지고는 칼을빼며
앞으로 다가섰다. 협공으로 적을 공격할 셈이었다. 두개의 횃불은
땅에 던져져도 여전히 타고 있었으나 전당은 어두워져 겨우 물체를
식별해 낼수 있을 정도 였다.
이문수는 유성추를 들고 소리쳤다.

"소보, 뒤로 물러서! 소로극 아저씨 뒤로 물러서세요. 제가 그와싸워야해요."

소로극은 노하여 말했다.

"물러서라."

하며 장도를 빼 획 바람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갔다.그는 카자흐
의 도법을 새로이 만들었던 자이니만큼 만만치가 않았다.그의 공격
은 매우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 그의 적수인 와이랍제 또한 민첩하
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한다리를 날리더니 소보가 들고 있던 장도를 걷어차고 말았다.
이문수는 다급한 나머지 유성추를 바닥에 내려놓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와이랍제가 걷어찬 소보의 장도를 공중에서 떨어지기 전에
잡아첸다. 쉭! 쉭! 휘두르며 와이랍제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녀가 사부에게 배운것은 권각(拳脚)과 유성추로 도법은 아직 배
우지 못했었다. 허나 지금 이렇게 네사람이 엉겨붙어 싸우고 있는
데 그녀가 유성추를 쓴다면 아직 일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그녀
의 실력으로는 자칫 소로극 부자를 상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그녀
는 자신있는 유성추를 버리고 정신을 집중해 대결했다. 소로극 부
자는 무기를 놓쳤으니 주먹으로 상대할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러
하니 와이랍제는 혼자서 셋을 상대하고 있으나 여전히 우세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합을 겨루다가 와이랍제는 노호하며 왼 주먹을 휘둘러
소보의 콧등을 내리쳤다. 뒤이어 소로극의 복부를 걷어차니 소로극
부자가 차례로 쓰러져서는 더 이상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원래 와이랍제의 권각의 내공이 심후해 공격을 당하고 나면 더이
상 저항하기란 힘들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니 이문수 혼자서 강적과 맞붙어 싸워야만했다.
와이랍제가 소리쳤다.

"빨리 이자리를 피해라 너만은 살려 주겠다."

이문수는 순간 모든 상황을 어림잡아 봤다. 만일 자기가 이 자리
를 피할수 있다면 기껏해야 계노인만을 구해내 도망칠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소보 등 삼인은 독수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것이다.
그녀로선 도저히 그렇게 할수 없었다. 그녀는 더이상 자기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둘수 없었다. 지금껏익힌 무예를 다 동원해 그와 맞
섰다. 와이랍제가 왼손을 들어 날렸다. 이문수는 오른쪽으로 싹피했다.
그러나 그의 이 동작은 실은 허초였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을 재빨리 날렸다.
펑! 하며 그녀의 왼쪽 어깨에 일격을 가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거의 엎어질뻔 했다. 그때 그녀의 머리속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일초 '성동격서'(聲東擊西)는 사부가 내게 가르쳐 준것이다. 어찌 잊을소냐?)

와이랍제가 소리쳤다.

"정말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면 나도 죽이는 수밖에 없다!"

이문수는 갑자기 자포자기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도 좋다!"

하고는 몸을 솟구쳐 수 초룰 겨루기도 전에 허리에 또 일권을 맞
고 말았다. 마움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제목:[양과][김용] 백마소서풍 6/6 end

(아, 죽겠구나!)

그때 그녀의 바로 옆에서 뭔가 후!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와이랍제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문수는 바닥을 한번 굴러 고개를 돌려보고는 도저히 자기의 눈
을 믿을수가 없었다. 계노인이 오른손에 비수를 든채 신법을 펼치
고 있었다. 그는 이미 와이랍제와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계노인의 동작이 민첩한데다 출초함이 바람과 같아 도저히 늙어빠
진 노인아라고는 볼수 없었다.
더욱 알수 없는것은 계노인의 손동작과 발동작이 와이랍제와 구별
이 안될 정도로 똑같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녀가 사부 화휘에게 전
수받은 그 무공이었던 것이다. 이문수는 그제서야 모든 상황을 깨달을수 있었다.

(그랬구나. 중원의 무공은 다 이렇구나. 할아버지와 이 카자흐악
인도 다 중원에서 배웠나 보구나. 그러지만 할아버지가 무예를
익혔을 줄은 지금껏 까맣게 몰랐는데.)

두 사람의 대결은 점점더 긴박해지고 있었다. 홀연 와이랍제가 날
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마가준(마가준), 잘있었나?"

계노인은 흠칫놀라 뒤로 한보 물러났다. 와이랍제가 왼손을 날리
니 바로 성동격서 반초를 쓰는 것이었다. 계노인은 그의 상대가 되
지 못했다. 비수로 오른쪽을 노리며 찔렀으나 와이랍제는 성동격서
반초도 쓰지않고 왼손을 잽싸게 내밀었다. 계노인의 얼굴을 할퀴는
듯 움켜쥐더니 그의 얼굴가죽을 거칠게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문수, 소로극, 아만, 삼인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문수
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와이랍제는 몸을 날리며 왼다리와 오른다리를 원앙처럼 꼬아서는
계노인의 몸을 걷어찼다. 바로 이때 뭔가 번쩍하는 듯싶더니 계노
인 의 비수가 그의 손을 벗어나며 적의 복부에 꽂히고 말았다.
와이랍제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쌍권으로 오뢰굉정(오뢰굉정)
일초로 계노인의 천령계를 무섭게 내려쳤다. 이문수는 이 양권 일
격을 맞으면 계노인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더는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있는힘을 다 모아 몸을 날렸다. 그때 뚝! 하는
소리가 나더니 양팔이 부러진 것처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두 사람은 죽은듯이 그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와이랍제는 내
려칠수 없엇고 이문수 또한 그를 공격을 할수 없었다.
이때쯤 소로극은 몸을 움직일수 있게 되었다. 그는 몸을 날려 평
생의 힘을 끌어모아 와이랍제의 아래턱에 일격을 가했다. 와이랍제
는 뒤로 벌렁 넘어지며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온몸의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문수의 울음섞엔 못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

하며 계노인을 부축했다. 그녀는 계노인이 피로 얼룩져 처참한 몰
골일 거라는 생각에 차마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볼수 없었다. 그러
나 어찌 알았으리,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보니 그녀의 눈앞에있는
사람은 건장한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눈이 동그
래지고 말았다. 얼굴의 수염만 깨끗이 깍는다면 틀림없이 잘 생긴
얼굴일 것이다. 깜박깜박하며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횃불 아래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 보이기는 하나 삼십을 넘지 않
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오로지 그 눈동자만이 지금껏 그녀가 봐 왔
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완전히 처음보는 사람의얼굴이었다.
이문수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아! 하며 계노인의 몸을 밀고 뒤로
비켜 섰다. 그녀는 아까 와이랍제와 대결할때 입은 상처로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은채 말했다.

"당신... 당신은..."

계노인이 말했다.

"나...나는 너의 할아버지가 아니다. 나... 나는..."

갑자기 왝! 하며 분수처럼 선혈을 뿜어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난 마가준이란다 지금껏 노인으로 행세했었지. 수아,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수아'하고 부르는 이 한마디는 십여년간 한결같이 따뜻한 마음을
담아 부르던 것과 꼭 같았다. 이문수는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할아버지를 나쁘게 볼리가 있겠어요. 당연히 할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어요. 지금껏 내게 그토록 잘해 주셨는데."

그녀는 마가준을 보다가 벽에 기대 있는 와이랍제를 보니 마음속
에 의심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이때 아만은 그녀의 아버지를 부축하며 그의 가슴의 상처를 감싸
고 있었다. 소로극, 소보 부자는 장도를 집어들고 절룩거리며 와이
랍제에게로 다가갔다.
와이랍제가 말햇다.

"수아, 아까 내가 너보고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할 때 왜 내말대로하지 않았지?"

그는 한어를 쓰고 있었는데 그 말투가 그의 사부 화휘와 완전히
똑같았다. 이문수는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무의식중에말이 나갔다.

"사부!"

와이랍제가 말했다.

"결국은 나를 알아 버리고 말았구나."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복면을 서서히 벗겨냈다. 과연 화휘였다.
이문수는 놀랍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한꺼
번에 감당해 낼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외쳤다.

"사부, 사부. 정말 사부님을 이해할수 없어요. 난 처음부터 이렇
게 추측했어요. 분명 사부일 거라고, 그러나 그들은 카자흐인 와
이랍제라고 말햇어요. 정말 그런가요?"

와이랍제는 껄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카자흐인이야. 와이랍제야!"

이문수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한인...한인이 아니란 말이예요?"
"나는 카자흐인 부족에서 추방당해 영원히 돌아갈수 없게 되자 중
원으로 갔지. 그 한인 지방에서 나는 한인의 무공을 익혔단다.
후후후. 거기서 난 한인을 제자로 삼았지. 마가준, 바로 마가준. 하하하!"

마가준이 말햇다.

"사부, 비록 사부께 은혜를 입긴 했으나 그러나..."

이문수는 더욱 놀라 펄쩍 뛰며 말했다.

"할아버지.할...할아버지도 그의 제자였다구요?"

마가준이 말했다.

"계노인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난 마가준이란다. 그는 내 사부지.
나는 그에게 무공을 익혔고 우리는 함께 회강으로 왔단다. 한밤
중에 날 데리고 카자흐족의 철연부에 와서는 독침으로 아만의 어
머니를 죽이고 말았지..."

그는 한어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기이한 일의 연속이라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그녀는 카자흐어로 아만에게 물었다.

"당신의 어머니가 그의 독침으로 돌아가셨나요?"

아만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차이고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그렇소. 바로 그래 아만의 엄마, 내 사랑하는 아려선(雅麗仙)은
어느날 밤 갑자기 온몸이 거뭇거뭇해지더니 별안간 병을 얻어 죽
고 말았소. 이제 봤더니 네 놈, 바로 네가 그녀를 죽였었구나."

그는 와이랍제에게 달려들어 결판을 내려고 덤볐으나 워낙 중상을
입은지라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의 통증을 참을수 없었으므로 도로주저 앉고 말았다.
와이랍제가 말했다.

"그래, 바로 맞았다. 아려선은 바로 내 손에 즉었지. 누가 그렇게
제대로 사람 볼 줄도 모르고 너 같은 멍청이에게 시집가라고 했
나. 게다가 함께 도망가자고 해도 듣지도 않고."

차이고가 참지 못해 외쳤다.

"저런 죽일 놈, 저런 죽일 놈이!"

마가준이 카자흐어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차이고를 죽일 생각이었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 차이고가 어디 있는지 그 행방을 알수 없었소. 이곳저곳을 다
뒤져 봐도 끝내 그를 찾아낼수 없었소. 와이랍제는 자기가 차이
고를 찾으러 갈테니 나더러는 우물에 독을 풀어 넣으라고 했소.
전 부족을 몰살 시킬 계획 이었지 그러나 내가 하룻밤 묵었던 카
자흐 가족이 내게 너무나 잘 대해 주었기에 난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소. 결국엔 독을 풀지 않기로 작정했소. 사부는 돌아와서는
끝내 차이고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소. 그리고는 내가 우물에
독을 풀어 넣지 않은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냈소. 그는 내가 그
의 비밀을 누설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면서 영원히 내 입을 봉하기
위해서 날 쥰이겠다고 했소. 그가 이토록 날 무섭게 몰아세우니
난 선수를 칠수밖애 없었소. 그러다 뜻밖에 그의 등에 세 개의
독침을 쏘고 말았던 것이오."

와이랍제의 음성에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배은망덕한놈, 드디어 오늘에서야 내 손에 죽고 마는구나."

마가준이 이문수에게 말했다.

"수아, 그날밤 네가 진달해와 맞붙던 날, 난 곧 알아챌수 있었단
다. 네가 사부에게서 무공을 익힌 것을. 그리고 세개의 독침을
맞고도 여전히 사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와이랍제가 말했다.

"흥, 그까짓 유치한 무공으로 날 죽이겠다고?"

마가준은 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이문수에게 말했다.

"십여년간 회강에 머물면서 나는 노인으로 가장해서 철연부에 숨
어 살았지. 혹 사부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을까봐 난 몹시 두
려웠단다. 이 철연부에는 그가 결코 발을 들여 놓을수 없다는걸
알고 있었으므로 계속 그곳에 머물렀지. 나는 그가 이 부근에 아
직도 있다는걸 알자마자 빨리 중원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단다."

이문수는 그의 호흡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보고 아까 와이랍제의
공격으로 내장이 파열된것을 알았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
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와이랍제를 보니 그 또한 복부에 비수를
꽂고 있었다.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수 없을것 같았다. 그녀는 자
신이 회강에 온후 십년간을 오직 이 두 사람만이 자기를 진정으로
보살펴 주고 아껴 줬었는데 서로 원한으로 얽혀있어서 결국에는 서
로를 죽이기에 이르른걸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다. 자기를 아
껴 주던 단 두 사람이 서로를 해치다니. 자기의 운명이 어찌도 이
리 기구한 것일까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
다. 그녀는 마가준에게 물었다.

"할아... 마숙부, 사부가 아직 살아 있다는걸 알고서도 왜 당
장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마가준은 처연한 웃음을 띄우며 들릴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말했

"강남의 버드나무는 이미 그 싹이 파랗게 돋아났겠구나. 수아 너
혼자라도 중원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이후... 이후로는 몸
조심해야 한다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는 더 이상 널 돌봐줄수 없으니까..."

그의 음성이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문수는 그의 몸에 엎드려서 울부 짖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발 죽지 마세요."

마가준은 그녀의 물음에 채 대답을 마치지도 못한 채 죽었지만 이
문수는 분명히 알수 있었다. 마가준이 그의 사부를 얼마나,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그러면서도 그는 당장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
리어 그녀를 따라 미궁으로까지 들어왔다. 그는 자기가 노인으로
변장하고 있는 한 와이랍제가 결코 자기를 알아볼수 없으리라 여겼
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가 그토록 두려워 하는 사람과 싸우기 위
해서 출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모든게 다 그녀 하나를 위한 것이다.
십년 간을 한결같이 그는 마치 할아버지처럼 자기를 아껴 주었었
다. 사실 그도 늠름하고 젊은 사내 였는데, 세상에 어떤 친할아버
지라도 자기 손녀에게 그토록 잘해 줄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 개의 횃불은 하나는 이미 꺼진지 오래였고
하나는 거의 꺼져가는 상태였다.

"정말 알수 없는 일이로군. 방금 두명의 한인과 한명의 카자흐인
이 싸우는데 나도 모르게 카자흐인의 얼굴에 공격을 하다니."

이문수가 물었다.

"왜 그랬죠? 어째서 갑자기 한인을 도울 생각을 하셨어요?"

소로극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는걸."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대는 좋은 사람이고 저 카자흐 놈은 나쁜 사람이지!"

그도 마침내 인정을 하고 말았다.
이문수는 생각했다.

(만일 그때 아저씨께서 지금처럼 생각하셨다면 그처럼 거칠게 소
보를 때리지 않았을 테고, 모든게 지금과는 달랐을 거예요. 그렇
지만, 정말로 달라질수 있을까요. 어릴적에 소보가 나와 그토록
친했다 해도. 또 모를 일이야. 그가 나이 들어 아만을 보고는 지
금처럼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는지는, 사람의 마음은 정말 알수
없는거야. 전혀 모르겠어.)

소로극이 큰소리로 말했다.

"와이랍제, 보아하니 살아날것 같지 않으니 구태여 널 죽일 필요
까지 없겠군. 안녕!"

와이랍제의 눈에 돌연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오른손을 들려했다.
이문수는 그가 독침을 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 제발..."

바로 이 순간, 마지막 남아 있던 불꽃이 사그러졌다. 손가락을 펴
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위는 어둠에 휩싸였다. 와이랍제는 독
침으로 쏘려고 하다 돌연 주위가 어두워지자 제대로 조준을 할수
없었다. 이문수가 외쳤다.

"빨리 나가세요.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요, 빨리요!"

소로극, 소보, 차이고, 아만 네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살금살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와이랍제의 독침이 아주 치명적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당을 빠져나온 네 사람은 이문수가 안
나오는 것을 알았다. 소보가 외쳤다.

"이영웅, 이영웅, 빨리 나오시오!"

와이랍제는 말했다.

"수아, 너... 너도 갈 거니?"

그의 음성을 처량했다. 이문수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나쁜 사
람으로 온갖 악한 일을 다하고 다녔다고는 하나 자기에게만은 잘해
주지 않았는가? 이 어둠 속에 혼자만 남겨두고 간다면 그는 외로이
죽어 갈것이다. 그렇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녀는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사부, 제가 여기에 있겠어요."

소보가 밖에서 또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이문수는 큰소리로 외쳤다.

"먼저 나가세요. 나는 조금 있다 나가겠어요."
"그사람은 흉악하기 짝이 없는 자요. 이영웅은 부디 조심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이문수는 더 이상 그의 말에 대답히지 않는다.
아만이 말했다.

"어째서 여전히 이영웅이라 부르지? 이소저라고 부르지 않고?"

소보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소저? 여자란 말야?"
"모르는 척하는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한다구? 그... 그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난데 어떻게여자일 수 있겠어?"
"눈보라가 있던 그날밤, 계노인의 집에서 그녀가 나를 노예로 삼
겠다고 했다가 도로 날 풀어 줬었잖아. 난 그때 알았어, 그녀가여자란 것을."

소보가 손벽을 치며 말했다.

"아, 그랬었군. 만일 남자였다면 너처럼 예쁜 노비를 풀어줄리가있겠어?"

아만이 얼굴을 발그스레 붉히며 말했다.

"그게 아냐. 그때 난 그녀가 널 바라보는 눈빛을 보고서야 그녀가
아가씨라는 걸 알았어. 세상에 어떤 남자가 그 같은 눈빛으로 널
뚫어지게 바라보겠어!"

소보는 고개를 흔들며 미친듯이 웃어댔다.

"난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었는걸."

아만은 그를 따라 환하게 웃는데 그 모습은 한 떨기 꽃처럼 곱기
만 했다. 그녀는 소보의 눈길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아, 제아무리
많은 아가씨들이 그를 넋을 잃고 쳐다본다 해도 그는 영원히 모를
것이라 생각하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전당은 칠흙 같은 어둠에 싸여 이문수와 와이랍제조차도 서로를
알아볼수 없었다. 이문수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속에 싸여 사부 켱
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소보와 아만의 즐거워하며 웃는 소리가 점
점 멀어져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당 안에는 오로지 이문수와 거의 죽어가고 있는 와이랍제, 그리
고 계노인의 시체뿐이었다.
와이랍제가 또한번 물었다.

"아까 내가 나가라고 했을때 왜 내 말을 안들었지. 만일 네가 나갔다면...에이."

이문수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 사부는 사랑하는 여인을 얻지 못하자 그녀를 죽여 버리셨
죠. 전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수 없더라도 그가 죽는건 참을수 없었어요."

와이랍제는 냉소했다.

"그랬었군."

한참을 침묵하다 탄식하며 말했다.

"너희 한인은 정말 알수 없어. 마가준처럼 은혜도 모르고 제 사부
를 죽이려 드는 자가 있지 않나, 곽원룡이나 진달해처럼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강도가 있지 않나, 반면에 너처럼
착한 마음씨를 가진 아가씨도 있으니."

이문수가 물었다.

"사부, 진달해 그 강도는 어떻게 됐지요? 우리는 줄곧 그의 자취
를 따라왔는데 눈위의 발자국은 두 사람의 것이었어요. 다른 하

나는 사부의 발자국이었겠지요?"
"그래, 바로 내 발자국이야 마가준, 저 못된 제자에게 독침을 맞
은 후부터 몸이 몹시 쇠약해져서 십여 년을 이 동굴에서 지냈지.
그렇지 않고서는 견뎌낼수 없었을꺼야. 뜻밖에도 널 만나게 돼
내 독침을 빼주었지. 나는 상처가 점점 나아지자 한밤중이면 늘
철연부의 장막에 가 엿보곤 했지. 나는 차이고와 날 추방한 족장
을 죽일 생각이었지. 그렇지만 너 때문에 차마 우물에 독을 풀수
가 없었다. 눈보라가 있던 그날 밤, 난 네집 밖에 있다가 네가
진달해를 붙잡는 걸 보았지. 그리고 너희가 고창미궁의 지도를
발견했다는걸 알 았어. 진달해가 거길 빠져나와 도망치자 난 그
의 뒤를 쫓았지. 그는 곧장 미궁으로 향했단다. 난 그의 뒤통수
에 일격을 가해 기절시킨후 그를 미궁안에 가뒀지. 그저께 오후
에 난 그의 품에서 그 수건에 그려진 지도를 꺼내 실오라기 열개
를 빼낸 다음 도로 그의 품에 넣어줬지. 그리고 그의 눈을 가리
고 그를 말등에 묶은 다음 말 엉덩이를 한대 철썩 갈겨줬지."

이문수는 이렇게 잔인한 성격을 가진 사부가 사람을 살려주다니
퍽 의외라고 생각했다.

"왜 그 지도에서 실오라기를 빼냈죠?"

와이랍제는 한참을 통쾌한 듯 웃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실오라기를 뽑아냈는 줄은 모른다. 그 지도에서 몇개
의 실오라기만 부족해도 미궁을 찾아냘 순 없다. 그 강도는 나머
지 도적들 에게 갔을 게야. 지도를 보며 미궁을 찾고 또 찾을꺼
야. 그렇지만 그들은 대사막을 레매고 헤매다 결국엔 영원히 초
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겠지. 이 강도들은 사막 한 가운데에
서 목이 타 죽으면서까지도 미궁의 보물을 그리다 죽을 거야. 하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정말 재미있어!"

한떼의 무리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아무리 가고 가도 끝이 없
는, 그리고 한모금의 물도 없는 대사막을 돌고도는 정경을 생각하
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와이랍제는 쯧쯧쯧 혀를 차며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한일이 근사하다고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사실 이 미궁 안에는 손톱만큼의 황금도 없단다. 이곳에 숨겨진
물건들은 다 중원에 가면 쌔고 쌘 물건들 뿐이란다. 탁자, 의자,
침대, 커텐, 많은 서적들, 바둑, 칠현금, 사기그릇, 솥... 등
, 이런 것들 뿐이란다. 보물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단다. 한인들
지방에는 모두 천지에 널린 것들이지. 그런데 저 한인들이 목숨
을 걸고 찾으려 들다니, 후후,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문수도 이미 두번째나 미궁에 들어와 봤으나 다 일상용품들만 보았을 따름이었다.

"사람들의 전설은 다 믿을게 못 되는군요. 미궁은 비록 거대하기
는 하나 전혀 보물이 없잖아요. 아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마저
도 이것때문에 공연히 목숨을 잃었어요."
"이 미궁의 내력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아뇨, 사부님은 알고 게시나요?"
"이 미궁에서 두개의 돌비석을 본적이 있단다. 그 앞에는 미궁을
짓게 된 경과가 새겨져 있었다. 당태종때 지은 거란다."

그러나 이문수는 당태종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와이랍제는 이따금씩 쉬어가며 천천히 미궁의 내력에 대해 그녀에게 들려줬다.
원래 이곳은 당나라 때 고창국이 있던 곳이었다. 그 당시 고창은
서역의 대국이었다. 문물이 풍성하고 국세가 대단했었다. 당태종
정관 연간에 고창국의 국왕에 국문태(鞠文泰)라는 자가 올랐다. 그
는 신하로서 당을 섬기게 되었다. 당은 고창에 사자를 파견해 한인
의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국문태가 사자에게 말했다.

"매는 하늘을 날고, 꿩은 숲에 숨어 있습니다. 고양이는 집을 마
음대로 돌아다니고 쥐는 쥐구멍에서 찍찍거립니다. 이처럼 다 각
자의 처할곳이 있는데 어째서 스스로 알아서 사는 것을 나쁘다고하십니까?"

그 뜻은 즉, 너희가 아무리 대단한 매로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우
리는 꿩으로 풀숲에 숨어살뿐이고, 너희가 고양이라 집안을 왔다갔
다 하지만, 우리는 쥐에 불과해 구멍 안에서만 찍찍거리며 울수 있
을 뿐이지만 너희 마음대로 우리를 다룰 순 없다는 뜻이었다. 사람
들은 다 각자의 삶이 있기 마련인데 어째서 우리에게 한인의 규칙,
습관을 따르라 강요하는가? 당태종은 이 말을 듣고는 대단히 분노
했다.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여겨 그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국문태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백관들에게 말했다.

"대당은 여기서 칠천리나 떨어져 있고 중간의 이천리는 대사막이
다. 풀도 없는 땅인데다 한풍은 칼처럼 매섭고 열풍은 태울듯이
뜨거운데 어찌 대군이 이곳에 올수 있으리오? 그들이 우리를 치
러 온다 해도 그 병력이 많다면 그 군량이 수효에 미치기 힘들것
이다. 만일 삼만 이하의 병력을 파견한다면 그 또한 두려워할 필
요도 없다. 우리의 힘으로 능히 도성을 지킬수 있다. 이십 일만
버틸수 있다면 당의 군사들은 식량이 더 떨어져 후퇴해 갈수밖에없을 것이다."

그는 당병의 위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싸우지 않고서도 지킬수 있
는 계책을 짜냈다. 그래서 많은 인부를 동원해서 극히 은밀한 곳에
미궁을 지었다. 만일 도성을 지키지 못한다 해도 도피할곳을 마련
해 놓은 것이다. 당시 고창국의 풍부한 인력과 서역의 빼어난 장인
들이 다 여기에 모였다. 그리하여 미궁은 구불구불하고 기기묘묘하
기 이를데 없이 지어졌다. 그들은 국내의 진귀한 보물이란 보물은
다 궁안에 숨겨놓았다. 국문태는 만일 당군이 미궁으로 쳐들어 오
더라도 결코 그들의 소재를 찾아낼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당태종은 고창국을 토벌하기로 하였는데 명령을 받은 후군집(侯君
集)은 일찌기 이청(李晴)에게서 병법을 배운 자였다. 그는 용병에
능해서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와 대사막을 지나갔다. 국문태는 당나
라의 대군이 밀려오니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놀람증으로 죽
고 말았다. 그는 아들 국지성(鞠智盛)이 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
었다. 후군집은 대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함에 연전연승 을 거두며
고창국을 대파시켰다. 당군에게는 성을 공격하는 일종의 높은 차가
있었는데 그 높이가 십 장에 달했다. 그 높은 모습이 새집 같다 해
서 소차(巢車)로 불리웠다. 이 소차가 성에 밀려들면 군사들은 높
은 곳에서 돌을 던지고 활을 쏴대니 고창군은 저항하기 몹시 힘들
었다. 국지성은 미궁으로 도망치기도 전에 성이 함락돼 그는 투항
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국가)가 고창국을 건립하여 구대를 내려와
백 삼십 사년이 되었는데, 당 정관 십사년에 이르러 마침내 멸망하
고 말았다. 당시 국토가 동서 팔백리, 남북 오백리에 이르렀으니
실로 서역의 대국이라 할수 있었다.
후군집은 국왕 국지성 및 문무백관과 대호족들을 포로로 잡아장안
으로 돌아갔다. 미궁 안의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남김없이 가져간
것은 물론이었다. 당태종이 말하기를, 고창국이 한족에 동화되지
않아 중화상국의 문물, 의관의 좋은점을 알지 못하니 많은 한인의
서적, 의복, 도구, 악기 등을 고창에게 하사한다고 했다. 고창인은말 하였다.

"꿩은 매가 나는것을 배울수 없고 쥐는 고양이의 울음 소리를 배
울수 없는 바이니, 너희 중화 한인의 물건이 아무리 좋다해도 우
리 고창야인들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당태종이 하사한 서적 문물, 여러 도구들 및 불상, 공자
상, 도교의 노자상 등등의 물건들을 다 미궁 안에 방치해 놓고 누
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다.
천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막도 많이 변했다. 수목이 무성하
게 자라 본래부터 은밀하게 지은 고궁은 한층 더 은밀해졌다. 만일
지도가 없었다면 누고도 찾아낼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인과 옛날의 고창인들은 조금도 상관 없는 것이다.
와이랍제는 중원에 머물 당시 문무를 겸비해 한인의 서적을 많이
읽었기에 당대의 역사에 대해 그토록 소상히 알수 있었다.
그러나 이문수는 본래 한인이되 조금도 아는 바가 없으니 아무런
흥미도 느낄수 없었다.
그녀는 와이랍제의 호흡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사부, 좀 쉬세요.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한인의 황제가 얼마
나 많은 일을 했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걸 좋아했든지 간에
다 그들의 일일 따름인데 뭘 그렇게 애쓰며 말씀하시려 해요. 아
이, 사부께서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항상 얻을수 없었죠."

"수아, 나... 나는 몹시 외로웠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처럼
긴 이야기를 해본적이 없단다. 나와... 나와 함께 있을테냐?"

"사부, 지금 여기서 사부와 함께 있잖아요."
"난 곧 죽을 테고 내가 죽으면 넌 곧 여길 떠나겠지, 그리고 다시
는 돌아오지 않겠지."

이문수는 뭐라 대답도 못했지만 몹시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는 오
른손을 내밀어 사부의 왼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천천히 식어 가고있었다.
와이랍제가 말했다.

"영원히 여기서 나와 함께 있도록 할테다.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않도록..."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른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는 엄지 손가락
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두매의 독침을 쥐고 있었다.

(이 두 매의 독침을 네 몸에 살짝 찌르기만 하면 넌 이 미궁 안에
서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내 곁을 떠날 수 없지.)

"수아, 너는 아름답고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니 정말 훌륭한 소녀
다. 영원히 내 곁을 떠니지 말려무나. 나는 평생을 고독하게 산
사람이다. 어느 누구 하나 날 돌봐 주는 이 없었다... 수아,
넌 정말 영리하고 좋은 소녀야..."

두매의 독침은 천천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암흑 중이라 그녀는 전혀 볼수 없었다.
와이랍제는 생각했다.

(내 손의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 천천히 찔러야지. 공연히
서둘렀다가 그녀가 밀쳐내기라도 한다면 그땐 더이상 그녀를 찌를수가 없게돼.)

독침은 일촌 일촌 그녀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겨우 두척이 될
까 말까, 이제 한 척의 거리...
이문수는 독침이 자기에게서 겨우 몇 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
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 채 말했다.

"사부, 아만의 어머니는 얼마나 예뻤나요?"

와이랍제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만의 엄마... 아려선... "

돌연 전신의 힘이 다 빠지고 말았다. 영원히 그에게는 오른손을
들 힘은 없어지고 말았다.

"사부, 지금껏 내게 이토록 잘해 줬으니 영원히 사부님을 기억할거예요."
이문수의 목소리만이 전당 내부를 울릴 뿐이었다.

옥문관으로 향하는 사막 한가운데에 한 아가씨가 백마를 몰며 서
서히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심중에 카자흐 철연부 부족과 이별할때 그들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로극은 말했다.

"이소저, 가지 마시오.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좋은 사람이
많으니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남편으로 삼도록 해주겠오.
또 많은 양과 소를 주고 가장 좋은 장막을 세워 주겠소."
이문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가 한인인 것도 별로 중요한게 아니오. 한인 중에도 좋은 사
람이 있는 걸. 한인도 카자흐인과 결혼 할수 있을까? 음."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로 합복랍모(哈卜拉姆)에게 물어 봅시다."

합복랍모는 철연부족 중 코란경에 가장 정통하고 가장 총명하며
가장 학식이 높은 노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 아는게 아무것도 없소."
"만일 학식이 높으신 합복랍모께서 모르신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더욱 아는 바가 없읍니다."

"코란경 제 사십 구장에 이르기를,

'들어라, 이제 내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했으니 너희는 많
은 민족과 종족을 이루리라. 알라께서 보시기엔, 너희 중에 가
장 존귀한 것은 바로 가장 선량한 것이다.'

세계의 각 민족과 종족은 다 진정한 신이신 알라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는 무릇 가장 선량한 것이 바로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코란경 제 사장에 이르기를,

'너희는 마땅히 이웃과 먼 이웃, 동료를 사랑하고 아껴야 하며
나그네에 대해서는 환대해야만 한다.'

라고 했소. 한인은 우리의 먼 이웃이니 만일 그들이 우릴 침범하
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아끼고 환대해야 하는 것이오."

"정말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딸이 한인에게 시집갈수 있습
니까? 우리의 아들이 한인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 들일수 있습니까?"

합복랍모가 말했다.

"진경 제 이장 제 이백 십일 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우상숭배를 하는 여자를 아내로 취해서는 안 된다. 그녀
가 진실한 믿음을 가질때까지는. 또 너희는 딸을 우상 숭배를
하는 사내에게 시집 보내서는 안 된다. 그가 진실한 믿음을 가질때 까지.'

라고 씌어 있지. 또 진경 제 사장 제 십삼 절엔 남편이 있는 부
녀자를 취하는 걸 엄하게 금하고 있소. 자기의 직계 친족도 마찬
가지지. 이 밖에 모든게 합법이오. 노비나 포로를 취하는짓 역시
마찬가지요. 이러한데 한인과 결혼하는게 어찌 불가능 하겠소?"
합복랍모가 코란경의 경문을 외울때에 부족인들은 다 공손하고도
엄숙한 태도로 경청했다. 경문이 그들의 미혹했던 점을 깨끗이 해
결해 주자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거룩하신 지시를 받아 다시는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읍니다."

어떤이는 합복랍모의 총명과 학식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합복랍모만 찾아가면 돼.
그는 언제나 현명한 답을 가르쳐 주시거든."

그러나 합복랍모가 아무리 총명해고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다 해도
그에게 해답을 줄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코란경일지라도 그
답은 찾을수 없었다... 만일 당신이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
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녀를 태운 백마는 한보 한보 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마는
이미 늙어 비록 아주 천천히 달릴 수 밖에 없지만 중원에 돌아갈수
있었다. 강남에는 버드나무가 있었고 복숭화꽃, 제비, 금붕어가..
... 있었다. 한인 중에도 영준하고 용맹스런 소년과 소탈하고 맑
고 깨끗한 인품의 소년은 있었다. ... 그러나 이 아름다운 아가
씨는 옛날 고창국 사람들처럼 고집이 셌다.

"다 좋은 사람들이야. 허나 내가 좋지 않은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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