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각사 11

3학년2반 | 2022.01.21 07:49:33 댓글: 0 조회: 530 추천: 0
분류인터넷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3985
달빛조각사 11권

차례 : 1. 뱀파이어의 땅

2. 세이룬
3. 퀘스트
4. 로세린 구출 작전
5. 이현의 첫 수업
6. 현지 조달의 법칙
7. 뱀파이어의 편지
8. 실낱같은 희망
9. 프로그램 위드. 정규 방송의 시작!
10. 첫 MT

1. 뱀파이어의 땅 -
위드는 흡혈 박쥐들을 타고 뱀파이어의 왕국 토둠으로 향하면서 크게 기대했다.
"토둠이라면 돈과 보물이 넘쳐 나는 곳이겠지. 밤의 귀족들이라니……. 토리도를 키워 준 대가로 끝내 주는 보상을 해 주지 않을까?"
부푼 기대!
천공의 도시 리바이스에서는 데스 나이트를 물리치고 프레야 교단이 잃어버렸던 성물인 헤레인의 잔을 되찾아 주었다.
그러면서 대신관의 부탁으로 하게 된 파고의 왕관 퀘스트!
진혈의 뱀파이어족을 물리치고 프레야 교단의 성물인 파고의 왕관을 가져오라는 연계 퀘스트였다.
그때 토리도는 진혈의 뱀파이어족의 수장이었다.
래벨 400의 보스 급 몬스터.
언데드의 군주 바르칸의 부하다.
위드의 레벨은 불과 200도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다.
알베론과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성기사들과 사제들에게 걸린 석상화의 저주를 풀어 주었다. 그들이 희생한 덕분에 진혈의 뱀파이어족을 물리치고 토리도마저 굴복시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의 서막!
많은 모험을 거치면서 위드는 성장했다. 억지로 굴복시켰던 토리도도 과거보다 더 강해졌다.
이제 그 토리도가 뱀파이어의 왕국으로 돌아가면서 보답 으로 위드를 초대했다.
꿀맛처럼 달콤한 보상의 시간!
"뱀파이어들은 고급스러운 걸 좋아하지. 보물들과 미술품을 사랑하고, 웅장한 거성에서 주로 활동한다. 그러니 토둠도 대단한 곳일 꺼야. 이런곳에 초대를 하다니, 토리도 그 녀석이 제법 은혜를 아는구나."
위드는 일행과 함께 아름다운 환상을 품고 흡혈 박쥐들을 타고 지하로 내려왔다.
하지만 대지의 구멍을 통과하여 그들이 떨어진 장소는 오염된 물이 흐르는 강가였다.
"어푸푸!"
거꾸로 떨어진 사람들은 옅은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보급품을 가득 실은 마판의 마차들은 검치 들이 밀어 주어 무사히 강가로 나올 수 있었다.
메이런이 물었다.
"근데 여기가 어디죠?"
"글쎄요. 박쥐들을 타고 오긴 했는데 말이죠."
패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
위드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건 마찬가지 였다.
'분명히 우리는 토둠으로 왔어야 하는데.'
토리도는 약속했다.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 초대한다면서!
밤의 귀족들이 거주하는 뱀파이어의 왕국!
고대 미술품과 보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며 지상에서 찾기 힘든 아름다운 여인들이 사는 나라.
3개의 달이 떠오르며 뱀파이어들에게만 허용된 약속된 땅!
수억 마리의 박쥐와 쥐 들이 살며, 영원한 어둠이 자리 잡은 뱀파이어들의 세상.
이블 홀.
그 말에 따라 흡혈 박쥐들을 타고 대지의 구멍을 통해 지하로 들어왔는데 썩은 물이 줄줄 흐르는 강물 속에 빠진 것 이다.
패일이 주변을 살피더니 대표로 물었다.
"다시 모라타 마을 근처의 강가로 돌아온 건가요?"
위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모라타는 아닙니다. 그 근처에는 이렇게 검은 물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강은 먹물이라도 풀어 놓은 것처럼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었다. 주변의 대지들에도 초록빛 수풀 대신에 거친 회색 모래들이 굴러다녔다.
갈대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낙엽이 이리저리 쓸린다. 하늘은 핏물을 ㅁ금은 것처럼 붉었다.
모라타일 수가 없는 풍경이었다.
페일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뱀파이어 왕국에 온 것은 맞습니까?"
"글쎄요. 그건 물오보면 알겠지요. 콜 뱀파이어 로드 토리도!"
위드는 토리도를 소환해서 이곳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토리도의 반응이 없었다.
휘이잉!
거침없는 찬바람이 분다.
토리도가 자유의 몸이 되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페일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위드 님, 우리 속은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요."
위드는 토리도를 믿고 싶었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뒤통수를 맞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위드님. 그냥 방금 제가 해 본 생각인데요. 토둠이 굉장히 멋진 곳이 아니라 썩은 물이 흐르는 근처였던거 아닐까요."
"……."
페일이 정곡을 짚었다.
토둠에 대한 환상!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고, 우아하고 고전적인 뱀파이어 왕국!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썩은 강물이 흐르는 황폐한 땅에 떨어진 것이다.
위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런 건 아니었는데!"
토리도를 어떻게 키웠는데 기껏 이런 보상이란 말인가.
황금이나 향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햇빛도 없고 별들도 없다. 심지어는 바람마저 퀴퀴한 냄새를 품고 있다.
완전히 지옥이나 다를바 없는 황량한 대지였다.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 오기는 했으나,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제피가 마침내 본심을 중얼거렸다.
"역시 저주 캐릭터."
"……."
"매번 고생만 하고, 이번엔 우리까지 고생길에 데려온 거야."
"……."
로뮤나의 말은 위드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렀다.
거기에 치명타를 가하는 수르카의 순진한 한마디!
"그럼 우리 이곳에서 신나게 노가다나 하고 가는 거예요?"
토리도를 성장시킨 대가로 즐거운 여행을 꿈꾸었는데, 어딘지도 모를 위험한 땅에 안내자도 없이 떨어진 셈이다.
바닥까지 몰리고 나니 위드의 정신이 들었다.
'내 주제에 무슨 황금의 왕국이냐.'
지금까지 운 좋게 풀렸던 적은 없다. 끝없는 고생을 통해 극복했을 뿐!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토둠에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토리도의 레벨이 얼마던가.
언데드의 군주 바르칸의 직속 부하!
레벨 400이 넘는 토리도를 성장시켜서 간신히 올 수 있는곳이다.
'보이는 이곳이 전부는 아닐 거야. 여기가 어딘지 몰라도 굉장히 위험히겠지. 특히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토리도의 수준이라면 지금까지 해 온 여느 퀘스트들처럼 방심할 수 없었다.
위드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접었다.
이제부터는 생존이 가장 우선순위에 올랐다.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서는 한 번이라도 죽으면 인간들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어 버리고 마니까.
이것도 하나의 극악한 페널티라고 할 수 있었다.
베르사 대륙의 금지라고 하더라도, 위험만 감수한다면 몇번이든 들어가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곳은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
뱀파이어들은 시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토둠에서는 한 번 이라도 죽음을 경험한다면 즉시 추방이 되어 버린다고 했다.
어렵게 잡은 기회이지만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다시 베르사 대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릴 수도 있는 것.
위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토둠이 어디든 간에 난 물러서지 않아. 돈! 돈이 걸려 있으니까.'
큰 판돈이 걸린 도박장에서 본전을 떠올리는 사람의 집착처럼 강한 것은 없다. 바퀴 벌레처럼 생존해서 어떻게든 콩고물을 얻어먹을 작정이었다.
'이곳이 위험하다면 그만큼 강한 몬스터들도 많이 나올 테고,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할 수도 있다!'
부풀어 오르는 희망.
그러나 뮈든 위드의 생각대로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혼자서 왔더라면 묵묵히 토둠에 대하여 조사하고 일을 해결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수의 동료들이 있는 탓이다.
"우리가 어디로 와 버린 거지?"
"돌아가지도 못하는 거 이니야?"
검사백칠십오치와 검오백삼치가 살짝 주늑 든 음성으로 웅성거렸다.
뱀파이어 왕국을 구경할 희망에 부풀었는데. 어딘지 알지도 못할 장소에 도착했다.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조금도 겁먹지 않고 싸울 것이다. 하지만 퀘스트나 모험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낯선 강가에 떨어진 그들!
겁을 먹을 리는 없지만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막대한 위기였다.
위드는 이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밥부터 먹고 생각하죠!"
"우오오오!"
식사는 푸짐하게!
김치들은 갈구했다.
"맛있는 걸 줘!"
"초콜릿처럼 달짝지근한 게 좋아."
"생크림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식사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역시 고기가 아니겠나?"
"술 한 잔 곁들이면 더 좋고……."
방금 전까지 이곳이 어딘지도 몰라서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없다. 식탐에 입맛을 다시는 돼지들이 있을뿐!
순식간에 화제가 음식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사범들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검삼치, 검사치, 검오치는 그저 기뻐할 뿐이었다.
"무슨 음식을 만들어 줄까?"
"기다리기 지루한데…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기다려야겠지."
"먹고 마시자!"
"우와아아!"
세에취는 탄식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난 직업을 잃어버리고 말거야."
고도의 정신분석학 논문들이 쓸모없는 낙서로 변해 버린 느낌이다. 어쩌면 이렇게 단순한 인간들이 있는지!
지옥의 불길에 떨어져서도 삼겹살을 구워 먹을 인간들이 아닌가!
세에취가 버틸 수 있는 건 정상인들도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다. 페일이나 제피, 메이런처럼 일반인들은 올바른 생각을 가졌을 테니까.
페일은 제피와 심각하게 의논을 하고 있었다.
"오늘 식단은 뭘까요?"
"토둠에 가면 음식 재료들도 팔겠죠?"
"그럼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요."
화령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위드 님은 이렇게 요리도 잘하시고, 정말 못하는 게 없으신 것 같아."
"……."
세에취는 새삼 서글퍼졌다.
'역시 정상인이 없어.'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고밖에는 말할수 없었다.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영웅들이 위험한 땅을 탐험할 때에는 불굴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어떤 위기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난관들을 극복해 내는 정신력.
타협하지 않는 도전 정신.
뜨거운 동료애.
번뜩이는 재치와 판단력까지.
뱀파이어들의 땅을 탐험하려면 이런 리더십은 필수였다.
하지만 위드를 보면서 그런 영웅의 면모를 발견하기란 힘들다.
세에취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냥 수준이 같은 거야. 저 검치 들과 완전히 똑같은 수준이야!"
그저 단순한 인간들일 뿐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위드가 만들어 낸 요리는 거리 거창하지는 않았다.
담백한 자라탕!
모리타 마을을 떠나기 전에 구입했던 재료를 최종적으로 다듬어 끓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음식의 재료가 바로 자라입니다.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자라. 엎어지면 못 일어나는 자라. 남자의 정력에는 완전 끝내 주는… 크흐흐!"
음식을 앞에 두고 위드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사탕발림.
마지막에는 여운을 남기는 비열한 웃음까지!
조각사라는 직업으로 시련의 세월을 겪어 와서, 물건을 과대 포장하는 데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음식도 마음이다. 맛있는 음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서 기분이 즐거울 때에 먹어야 더욱 맛있는 법.'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해서는 요리사의 한마디에 귀를 귀울이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오옷, 정력!"
검치 들이 무섭게 자라탕을 들이켰다. 건더기를 먹을 때에는 평소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그러면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꺼억!"
"시원하다!"
검치 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은 것은 물론이었다.
화장실에서도 라면을 3개씩 끓여 먹는 식욕을 가졌는데, 뱀파이어의 대지라고 해서 그들의 입맛을 잃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
하물며 정력에 좋은 자라탕이라는 이야기도 듣지 않았던가!
페일과 제피도 만만치 않았다.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자라탕을 먹었다.
"많이 드세요. 남기지 마시고요"
메이런은 옆에서 부추기고 있었다.
위드는 여자들에게는 다르게 말했다.
"자라가 피부 미용에는 그만이라서 먹으면 이십 일은 어려지는 효과가……."
"빨리 주세요! 얼른요!"
"듬뿍 퍼 주세요, 위드 님."
이리엔과 로뮤나도 급했다.
아직 어린 수르카도 피부 미용에는 관심이 많아서 자라탕을 떠먹기에 바빴다.
실제로 어려지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십 일이란 딱 그만큼 애매한 날짜였다. 기분이 좋아지면 오늘은 좀 옛되어 보이기도 할 수 있는 그만큼의 시간!
혹시 속았다고 느끼더라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설사 어려진다고 하더라도 로열로드 내에서만의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로열 로드 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다들 이곳의 외모에도 상당히 많이 신경 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위드는 이름까지 붙였다.
"동안 요리입니다. 동안 요리! 먹으면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여자들도 당연히 게걸스럽게 먹었다.
하지만 마판은 음식 속에 있는 무서운 음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음식을 구매할 당시의 일이었다.
상인인 마판이 조달을 도맡아서 했지만, 식자재들은 위드가 골라 준 것들을 위주로 샀다. 어차피 위드가 요리할 것들이었으니 필요하다고 하는 재료들을 사 주었다.
그런데 마판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자라 17마리요?"
위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라는 1마리에 3골드도 넘는 고급 재료이니,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을 수야 없죠."
"자라로 배를 채우기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인원이 500명이 넘는데 그 적은 양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아무리 위드 님의 요리 쏨씨라고 해도 없는 요리 재료를 만들어서 할 수는 없는 건데, 자라 17마리면 거의 탕 속에서 헤엄만 치고 나올 정도일 텐데요."
자라탕을 만들려고 한단다. 그런데 정작 건더기가 없다면 실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위드는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자라는 보관이 어려워서 금방 상하는 재료잖습니까?"
"네. 그런데요?"
"그래서 아마도 뱀파이어의 땅에서 첫날이나, 혹은 둘째날에 먹게 될 겁니다. 어떤 위험이 있느냐에 따라, 혹은 사기가 낮아진다면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풍족한 식사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니 자라를 더욱 많이 구입해야……."
"아닙니다."
"네?"
"그런 식으로 배불리 먹어 버리면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
위드는 숙달된 요리사로서 설교를 시작했다.
"원래 음식 장사야말로 마진이 높은 것! 적게 남겨 먹으면 요리하는 맛이 안 나죠. 그러니 재료에 과잉투자를 하는건 좋지 않습니다. 사형들이나 스승님이 한끼에 5골드가 넘는 밥값을 지불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아니요. 그러실 순 없겠죠. 힘들 겁니다."
검치 들은 대체로 가난한 편이다. 돈이 모일 때마다 무기를 바꾸고, 장비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또 돈을 벌기 위해서 만만한 몬스터를 많이 사냥하기보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더 강한 놈들을 잡았다. 사냥의 즐거움. 극도의 쾌감을 맛보면서 도전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이제 그들도 밥값 정도는 직접 지불하려고 했다.
"스승님과 사형들이 원하는 건 푸짐하게 먹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격대는 최대한 낮추고 재료를 저렴하게 조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자라 17마리면 사람이 많아서 먹을 게 없을 텐데요."
"방법이 있습니다. 명태 값이 요즘 많이 하락했지요?"
"네? 명태야 원래 제일 싼 식재료니까요."
"명태 2,000마리를 구입하세요. 자라탕을 명태 살로 만들면 됩니다."
"맛이 다를텐데요?"
"그쯤은 향신료와 색소, 조미료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라탕!
하지만 실상은 명태탕!
마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양심이 찔리고 있었다.
"근데 이거 사기가 아닐까요?"
위드는 단칼에 우려를 불식시켰다.
"붕어빵에도 붕어가 없는법."
"……."
* * * * * * * * * * * * * * * * * * * * *
식사를 마치고 나니 모두 기운이 났다.
위드의 요리 솜씨로 인하여 체력이나 활력이 증가한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고급에 이른 손재주는 음식을 맛깔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요리법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대부분의 음식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음식의 진정한 맛은 손맛이라고 하지 않던가.
요리도구들은 잘 이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음식의 기본은 역시 손맛이다.
위드의 완숙에 이른 손맛은 일행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이리엔이 다가왔다.
"위드 님 잘 먹었어요. 그런데 맨손으로 요리를 하시던데, 괜찮아요?"
"그래야 더 맛있거든요."
이리엔은 충분히 공감했다.
위드가 맨손으로 조미료들을 버무리고 음식을 만드는 광경이 아주 맛스러워 보였으니까.
이리엔이 장난삼아 물었다.
"그런데 손은 언제 씻으셨어요?"
당연히 농담으로 한 질문이었다.
위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1달? 아니면 2달일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기억이 잘……."
"……."
이리엔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꺼어억!"
"역시 자라탕이 맛있군. 예전에 먹었던 바로 그 맛이야."
"다음에 또 먹고 싶어."
"모험에 따라오길 잘했지."
검치 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기뻐했다. 그리고 마판과 이리엔은 조용히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판 님, 자라 외의 대체 어떤 재료들을 구입하셧죠?"
"그게… 실은, 교역품을 모으다 보니 예산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저희도 돈을 드렸잖아요."
페일이나 이리엔, 수르카 들이 지금껏 모은 돈도 다 합치면 2만골드는 넘는다.
"위드 님의 의견으로 다 교역품을 장만하는 데 썼습니다. 나중에 교역품을 팔아 이윤을 남겨서 돌려드린다고요."
"그럼 저 많은 식료품은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돈이 모자랐던 것치고는 양이 너무 많은데요."
"그게, 아주 싸게 사 왔는데……."
"어디서 사셨는데요."
"됫골목입니다."
"뒷골목이라뇨?"
마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망설임 끝에 말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중국산……."
"아흑!"
이리엔은 눈물을 찔끔 삼켰다.
겉으로는 한없이 맛있어 보여도 실상을 알고 보면 결코 쉽게 먹을 수 없는 재료들이었다.
유통기한이 끝나 가거나, 혹은 살짝 넘어 버린 재료들! 3등급, 4등급의 저렴한 재료들도 양만 많으면 닥치는 대로 구입해서 마차에 실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먹었던 자라탕은 정말 맛있었다. 불량식품이 입에 더 잘 달라붙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식사도 끝냈으니 모험을 계속하죠."
위드에 말에 사람들은 빠르게 한자리로 모여들었다.
스르릉.
검사백구치가 검을 뽑아 들었다.
"크흐흐! 드디어 모험인가."
검십오치는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더러운 뱀파이어들 따위, 단칼에 베어 주면 되겠지."
검치 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볍게 검을 쥐고 서 있는 자세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고,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진형을 갖췄다.
그리고 투지!
어떤 적이 나타나더라도 겁내지 않는다.
더 강한 적에게 꺽이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칼을 쥐고 덤벼드는 것이 검치 들이다.
제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드 형님이 왜 이분들을 그토록 믿고 있는지 잘 알겠군.'
뱀파이어 왕국은 지극히 위험하다. 어떤 적이 튀어나올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1명도 와 본 적이 없는 대지!
정보 자체가 없으니 직접 부딪혀 보면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목숨을 걸어 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곳이 일반적인 베르사 대륙이라면 그런 시행착오를 격으며 적응했으리라.
하지만 한차례라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뱀파이어들의 세상이다. 실수가 없어야 하며, 모든 위험에 능동 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전투의 달인인 검치 들이 그런 존재였다.
수십 번의 사선을 넘나드는 실전 경험들을 통해서 얻는 노련함과 광기!
검치 들이 있으면 모험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그 미묘한 흐름의 변화가 동료들에게 기운을 주었다.
미지의 땅.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파해쳐 보기로!
페일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모험은 이런 재미죠!"
수르카도 주먹을 쥐었다.
"시작해 볼까요? 저도 준비됐어요!"
위험한 장소에 와 있다. 그러나 동료들이 있다면 어떤 위험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리바아스도 같이 탐험한 동료들이었으니 서로에 대한 믿음이 돈독했다.
위드가 검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아마도 뱀파이어들의 세상입니다.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스승님께서 지휘를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검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에 대해서 잘 모른다. 몬스터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무지하지. 그러니 위드 네가 지휘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구나. 네가 가진 각종 생산 스킬들이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 움직임도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다. 그러니 지휘도 네가 하거라."
"스승님과 사형들께서 계신데 어찌 제가 명령을 내릴 수 잇겠습니까?"
"아니야, 규율이나 형식 따위를 따질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잘 아는 사람이 지휘를 해서 가장 많이 살아남는 게 낫다."
검둘치도 거들어 주었다.
"위드 네가 명령을 내리도록 해라. 이런 곳에는 우리보다는 네가 더 익숙할 테니까."
위드는 검삼치와 검사치, 검오치가 있는 쪽을 차례차례 돌아보았다.
"스승과 첫째 사형의 뜻을 따라도 되겠습니까?"
"암."
"네가 알아서 해라."
검오치는 격려의 차원에서 어깨도 두들겨 주었다.
"우린 초대를 받고 왔으니 응당 네가 해야 할 일이지. 막중한 책임감이 있는 자리이겠지만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진심 어린 사형들의 격려.
위드는 검육치부터 검오백오치 들을 살펴보았다.
도장의 수련생들.
그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 욕심보다는 사나이의 의리, 책임자에게 맡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수르카와 이리엔, 로뮤나가 보기에는 이토록 멋진 장면이 없었다. 사나이들의 가슴 뜨거운 열정을 보는 것만 같다.
"어쩌면 좋아."
"정말 반할 것 같아."
"아! 검치 님들은 정말 멋있는 사내들이로구나."
유일하게 세에취만이 내면에 숨겨진 복잡한 진실을 파악했다.
'저기 나이 든 다섯 사람은 맛있는 요리 해 주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귀찮아서 떠넘긴 것 같아. 다른사람들은 그나마 위드가 만만했을 테고.'
검치나 다른 사범들은 무섭다.
위드가 때로 독하다고 하지만, 다른 사범들은 범이나 호랑이보다 두렵다. 훈련을 할 때에도 인간의 한계라는 걸 인정하지 않다 보니 매번 죽을 마시었다.
실수라도 저질렀을 경우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공포!
'예전에 검삼치 사형이 인상 쓰는 걸 봤지. 그 후로 사흘동안 새벽 훈련을 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잤다.'
'검오치 사형은 벽 속에 바퀴 벌레가 지나가는 길이 있다고 주먹으로 벽을 부숴 버린 분이지. 피가 질질 흐르는데도 주먹이 이기나 벽이 이기나 보겠다면서…….'
'검치 스승님! 젊으실 때는 아무도 못 말리셨어. 요즘 로열 로드에서 회춘한 기분이라고 하셨는데…….'
수련생들은 위드가 지휘하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위드는 일단 페일이 있는 쪽을 보았다.
"페일 님."
"네."
"메이런 님과 함께 언덕 위에 올라서 이 근방을 정찰해 주십시오. 몬스터가 있다면 교전은 하지 마시고 그냥 돌아와 주시면 됩니다."
"살피고만 오면 되는 거죠?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페일과 메이런은 함께 언덕으로 향했다.
궁수들의 시야는 넓다. 그 장점을 활용하여 이 근처 일대를 수색하기 위함이었다.
페일과 메이런은 언덕에서 주위를 살피고 나서 다시 돌아왔다.
"이 근처에 몬스터는 없습니다, 적어도 숨어 있지 않고 활동하는 몬스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형이 문제인데……."
"지형이 어떻지요?"
"이 주변이 강과 절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갈 수 있는 방향은 한 곳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쪽으로는 작지만 길이 나있었습니다."
"길이라면 우선은 그쪽으로 움직여야 하겠군요."
위드가 방향을 정했다. 일행은 긴장을 풀지 않고 천천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언덕을 넘어서 숲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검치가 위드에게 물었다.
"위드야, 너는 흡혈귀들을 상대해 보았지?"
"예, 스승님."
"흡혈귀들이라면 물지 않느냐?"
"흡혈귀, 주로 뱀파이어라고 하지요. 뱀파이어들에게 물리면 생명력을 빼앗기고 놈들의 하수인이 되니 각별히 주의해야 딥니다."
"따로 약점 같은 건?"
"생명력과 체력이 강하고 마법도 곧잘 이용합니다. 무기는 쓰지 않지만 움직임도 상당히 빠른 편이고 곤충이나 쥐, 박쥐 들을 불러서 공격도 할 수 있습니다."
"약간 귀찮겠구나."
"방어력도 높고, 퀸 뱀파이어들은 저주 마법이나 주술도 잘 사용하는 고위 몬스터들이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특성들도 있느냐?"
"짐승이나 오우거, 트롤처럼 단순 몬스터들과는 달리 지능도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부족별로 뭉쳐서 생활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크흠! 그런 특징이 있단 말이지? 가까이 두지 말아야 겠군."
"예."
그렇게 10여분을 걸었을 때였다.
붉은 하늘에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박쥐때가 나타났다.
"뱀파이어의 흔적!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뱀파이어들은 박쥐들을 부릴줄 아니, 이제부터는 긴장해야 합니다."
위드의 말이 없더라도 모두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가졌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저절로 힘을 더했다.
토둠에 올 때에도 흡혈 박쥐들을 타고 왔다. 하지만 적일지도 모르는 흡혈 박쥐들의 규모가 저렇게 많다니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박쥐들은 그들을 발견하고도 공격하지 않았다.
위드는 판단해야 했다.
"우선은 계속 나아갑니다. 만약 박쥐들이 가까이 접근한 다면 먼저 공격하도록 하세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박쥐들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전진했다.
박쥐들이 상공을 가득 덮은 채로 지나다닌다. 수천수만 마리의 박쥐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흩어졌다.
"흐흐흣."
마판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사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쥐들이 내려와서 공격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절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바위들이 무너져서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그런 아찔한 상상속에서 흥분이 되었다.
'역시 모험은 이 맛이지.'
무엇이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금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디더야 한다.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만이 진실이다.
모험의 묘미는 미치도록 흥분되는 것이었다.
전 재산을 들고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는 상인들!
상인들이야말로 승부를 즐길 줄 알았다.
"크흐흐흐."
검구치의 온몸에서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남들보다 더욱 거대한 근육질의 몸!"
지방과 비곗덩어리가 아니라 훈련으로 극한까지 발달한 근육들이다. 그만한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힘을 쓰고 싶다. 박쥐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와라!"
검구치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언제라도 발출할수 있도록!
상황이 변하기만 한다면 박쥐들을 향해서 시원하게 검무를 추어 보리라.
아마 다른 검치 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박쥐들은 가까이 내려오지 않았다.
박쥐들이 먼저 습격을 하지 않는다면 로뮤나의 마법 외에는 저 멀리 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들을 공격할 수단이 없다.
그렇게 계속 전진한 위드아 일행은 작은 산등성이를 넘었다. 그러자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 보였다.
수백여 채의 고급 저택들로 이루어진 마을!
넓은 정원과 분수, 조각품들을 가진 저택들이 별장처럼 아름답게 지어져 있다. 마을의 도로에는 걷기 좋게 청석들이 오밀조밀하게 깔렸고, 성벽도 튼튼해 보였다.
2. 세이룬
위드는 일행과 함께 성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성문 옆에 경비병 들이 흰 장갑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뾰족한 이빨!
창백한 얼굴!
등에는 검은 망토를 둘렀다.
"뱀파이어 경비병들이다."
위드는 일정 거리를 두고 정지했다.
"공격하지 않을까요?"
마판이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능이 있는 몬스터일수록 공격부터 하는 경우는 드물다. 초식을 위주로 하는 몬스터들, 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몬스터들도 먼저 공격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새끼들을 품에 안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상당히 미묘했다. 인간들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위드가 조금 앞으로 나섰다.
"머리가 좋은 놈들이라 대화가 통할 것도 같으니, 일단 말로 해 보겠습니다."
"위험할 텐데……. 조심하세요, 위드 님."
이리엔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위드가 말한 위험한 장소로 나서니 유린도 은근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위드가 어떤 인간이던가. 솔선수범해서 나설 때에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뱀파이어 경비병 정도라면 어떻게든 살아 돌아울 수 있을테니까요."
믿는 것은 맷집과 인내력!
조각사치고는 무식할 정도로 키워 온 방어 능력만을 믿었다.
뱀파이어 왕국 토둠의 경비병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미지수 였다. 그래도 진혈의 뱀파이어족과 싸웠던 경험도있고, 토리도의 전투도 많이 보았다.
뱀파이어들의 전투법이나 습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목숨 정도는 챙길 수 있을 듯했던 것.
검오치가 옆으로 다가왔다.
"나도 같이 가자. 너 혼자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는 없구나."
"예, 사형."
위드는 검오치와 함께 뱀파이어 경비병들을 향해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옮겼다.
검오치는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레벨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흉악한 인상은 다른 몬스터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준다. 다만 어두운 밤에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지않는다면 검오치에 의해 무서워질 수도 있지만.
"그런데 위드야. 그냥 놈들과 싸우면 안 되는 것이냐? 흡혈 박쥐도 그렇고 저 뱀파이어 마을도 그렇고, 공격해서 없애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베르사 대륙에서 몬스터들이 장악한 지역들은 인기 높은 사냥터였다. 주로 고블린들이 많은 편인데, 야밤에 와서 나무로 성채를 지어 두고 시위를 한다.
고블린 마을이나 고블린 성채 들!
그러면 인근 왕국이나 성의 치안도가 낮아지고, 생산 활동이 감소한다.
이런 때 보통 영주들의 의뢰에 의해 모여든 사람들이 몬스터들의 성채를 공략한다.
명성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이며, 전리품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위드는 다른 생각을 가졌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좀 이른 결정 같습니다."
"이르다고?"
"예. 우린 뱀파이어 왕국을 제대로 구경도 못 해 봤지 않습니까? 그런데 뱀파이어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을 겁니다."
"하긴. 다짜고짜 싸움부터 건다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많이 줄어들기야 하겠지."
"전쟁은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
위드와 검오치는 뱀파이어 경비병들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갔다.
"멈춰라!"
경비병들이 칼날처럼 솟아오른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군. 너희는 인간인가?"
"그렇습니다."
위드는 탐색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간들이 우리의 땅에는 무슨 일이지? 여긴 너희가 들어올 필요가 없는 곳이다. 볼일이 없다면 돌아가라!"
"썩 꺼지지 않는다면 너희으 ㅣ뜨거운 피를 듬뿍 마셔 주지."
뱀파이어 경비병들은 대놓고 공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적대적이다.
도통의 모험가라면 그 말에 따라 얌전히 돌아가거나, 아니면 수단이 없다고 생각하고 경비병들을 제압했으리라!
일반적인 수순은 그렇게 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위드는 달랐다.
"날씨가 우중충하니 참 좋군요! 이런 날이야말로 박쥐들이 마음껏 날아다니고, 쥐들이 찍찍대며 기어 다닐 수 있겠습니다."
"인간 주제에 뭘 좀 아는 것 같군."
"그러게 말이야."
두 경비병이 약간이나마 반응을 보였다.
"밤의 귀족 분들은 참으로 고급스러운 옷들을 입고 계십니다. 기품과 멋이 우러나오는 검은색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망토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은 밤의 귀족 분들밖에 없을 겁니다. 앗! 혹시 그건 그 유명한 어둠의 망토? 대단한 걸 보게되어서 영광입니다!"
위드는 호들갑을 떨면서 아부를 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뱀파이어 들의 특성을 적극 고려한 아부!
왼쪽 경비병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인간을 보는 것 같군."
오른쪽 경비병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이던 전투 자세를 풀었다.
하지만 여기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눈치와 아부로 살아온 인생.
친밀도가 약간 상승하긴 했겠지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다시 적대적으로 돌변할 여지가 있다.
위드는 조각칼을 꺼냈다.
오른쪽 경비병이 물었다.
"뭘 하려는 것이냐?"
"두 분께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선물?"
"예, 조각사의 진정이 담긴 작품이니 기쁘게 받아 주시기를."
위드는 가지고 있던 나베목을 꺼냈다.
친밀도를 상승시키는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말로써 올릴수 있는 친밀도는 효과가 즉각적이지만 한계가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친밀도는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만난다면 그 이상의 친밀도도 올릴 수 있으며, 상대의 성격에 맞는 행동을 보인다면 절친해질수도 있다.
더 나아가 도움이 되는 퀘스트를 해 주거나 사냥을 같이한다면 목숨까지도 맡길 수 있는 사이가 되리라.
하지만 그보다 간편한 방법도 존재했다.
'선물을 마다하는 놈은 없어!'
위드는 나베목을 깍았다.
'뱀파이어들은 예쁜 소녀를 좋아해.'
서윤을 조각할 수도 있다.
서윤의 나이는 20대 초반, 하지만 피부가 너무 좋고 예뻐서 10대 소녀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정도다.
미녀는 나이를 따질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서윤을 조각하기란 정말 어렵다. 아름다움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
그야말로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대의 미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서윤을 대충 조각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뱀파이어에게 선물로 넘겨주기란 더욱 껄끄러웠다.
'대신 뱀파이어가 좋아하는 소녀로서 검증된 상대가 있어.'
위드는 모리타 마을의 프리나를 떠올렸다.
진혈의 뱀파이어족 토리도의 눈에 들어서 수십년간 석상이 되어야 했던 불행한 소녀!
꽃을 가꾸는 걸 좋아했던 순박한 소녀, 청조한 풀잎같은 매력을 가진 소녀였다.
위드는 이 프리나를 팔아먹기로 했다.
이제는 조각칼을 놀리는 것도 검술만큼이나 숙달되어서, 프리나를 조각하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여기 선물입니다."
"이렇게 예쁜 선물을……! ㅇ리는 예술을 아는 사람을 좋아하지, 거기에 이 소녀는 꼭 우리의 취향이로군."
경비병들은 감격했다.
소녀를 좋아하는 뱀파이어의 특성!
"그대의 직업이 조각사인가?"
"그렇습니다."
조각사라면 우리 밤의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격이 있지, 마을 안으로 들어가도 돼. 많은 동족들에게 그대의 조각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어."
띠링!
『-뱀파이어 마을 세이룬의 출입이 허가되었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위드는 아부와 선물로 뱀파이어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려 주었다.
"잘생기셨습니다."
"늠름하시군요."
"역시 밤의 귀족 분들!"
페일과 제피, 마판은 한마디씩 아부를 해서 환심을 샀다.
그런 다음에는 선물!
"직접 잡은 물소의 꼬리입니다."
"사냥으로 얻은 전리품 중에 반지가 있는데 드리겠습니다."
"보석입니다. 헤헤."
경비병들은 뇌물을 꿀꺽 삼키고 마을 진입을 허가했다.
"착한 인간들이군. 좋아, 들어가! 하지만 말썽을 피우면 쫓겨날지도 모르니 조심하도록 해."
메이런, 로뮤나, 수르카, 유린은 아예 심사도 하지 않았다.
"예쁜 소녀들은 많을수록 좋지. 통과!"
이리엔에게는 얼굴을 조금 굳혔다.
"불쾌한 느낌이 나는군. 혹시 믿고 있는 신이 있나? 뭐, 상관은 없겠지. 우리는 저주받지 않았으니까. 시끄러운 낮보다는 고요한 밤을 더 좋아하며, 생명의 근원을 좋아할뿐이니. 하지만 소녀여, 마을 안에서는 조심하도록 해. 함부로 신성력을 발휘 한다면 싫어하는 동족들이 많을테니. 그 후에 벌어질 일은 우리도 책임질 수 없을 거야."
뾰족한 송곳니를 보이면서 경고를 던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무사 통과였다.
"넌 안 돼!"
그러나 세에취는 단호하게 가로막혔다.
오크라면 열등한 생명체!
스스로 고상한 존재로 알고 있는 뱀파이어들이 마을 안을 활보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취익, 취익! 왜요."
세에취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경비병들의 눈은 차가웠다.
"우리 마을은 오크들이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제 검치 들의 차례!
위드는 심하게 불안했다. 과연 검치 들이 잘 해낼 수 있을것인가.
검오치는 자신 있게 나섰다.
"뭐, 간단하지. 너희가 하는 걸 봤으니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예, 뭐 그렇습니다만……."
"조금만 기다려 봐. 사형들,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검오치가 먼저 경비병에게 말을 걸었다.
"형씨들, 그러지 말고 길 좀 터!"
"뭐, 형씨? 감히 우리에게 하는 말이냐?"
경비병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래. 얼굴은 허여멀게 가지고 마을 입구나 지키는 주제에……."
"이 더러운 입을 가진 인간 따위가!"
"뭐야? 이 흡혈귀 자식들아!"
검오치와 경비병들이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듯한 일촉일발의 위기 상황!
"이러지 마세요!"
"안 됩니다."
위드와 제피가 때어 내서 간신히 수습했다.
이번에는 검삼치가 나섰다.
"내가 하는 걸 잘 봐."
위드는 불안했지만 이번에도 일단은 말리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검오치의 실패로 뭔가를 배웠으리라. 학습 효과 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인간. 들어가지 못한다."
경비병들이 저지했다.
"알았어. 수고해."
검삼치는 경비병들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려고 했다.
"인간. 여긴 너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다."
"어허, 괜찮다니까."
"미천한 인간 따위가 들어올 수 없는 장소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발길을 돌려라!"
"뭐야? 다 죽……."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내뱉기 직전!
위드와 제피가 다시금 말려서 진정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마판이 심각하게 말했다.
"이대로는 마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겠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검치 들이 전원 마을 입구조차도 통과하지 못할 위기였다.
"사형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조금만 아부를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위드의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대화가 잘 통하는 대사형 검둘치도, 뱀파이어들에게 아부를 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사내가 자존심이 있지! 저런 몬스터 따위에게 허리를 숙일 수는 없다."
검둘치가 차갑게 선언했다.
검삼치나 검사치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수련생들도 뱀파이어들에게 사정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위드는 망설이다가 꾀를 냈다.
"그러면 저에게 조각술을 배워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급 조각술 스킬을 가지고 있는 위드는 다른 이에게 스킬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예술을 사랑한다. 조각술을 배운 인간이라면 인정을 해 줄 테니 마을 진입에 무리가 없어 보였다.
"조각술? 그런 걸 꼭 배워야만 하는 거냐?"
검둘치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예. 예쁜 조각품들은 여자들도 아주 좋아합니다. 조각술은 취미 생활로도 그만이죠."
"그래? 역시 여자들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기술 하나쯤은 있어야겠지. 그럼 배워 볼까?"
검둘치가 솔깃해서 배우려고 들었다.
위드는 조각칼을 꺼내서 먼저 나무를 깍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렇게 따라 하시면 됩니다. 조각품을 완성하면 제가 조각술을 전수시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어렵지 않아 보이는구나."
검둘치나 사범들, 수련생들은 검에 재능이 있었다. 소검을 다루는 것도 능숙해서, 나무토막을 가지고 금방 간단한 조각품을 완성했다.
띠링!
『-지혜가 낮아 조각술을 배울 수 없습니다.』
위드는 할말을 잃었다.
어떻게 지혜가 낮아서 스킬을 못 배울 수가 있단 말인가.
"사형들, 대체 지혜가 몇입니까?"
"그게… 어디보자. 8이구나."
"……."
검삼치는 한술 더 떳다.
"난 6인데?"
검사치도 만만치 않다.
"난 5야."
수련생들 중에는 더 심한 부류도 있었다.
"역시 사범님들은 대단하셔. 난 3인데."
심지어는 지혜 3까지 나왔다!
위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처음 시작할 때도 지혜가 10이지 않습니까?"
조각술은 마법과는 달리 기본적인 수준의 지혜만 있어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검치들은 그 기본 수준도 되지 못했다.
검삼치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지혜가 줄어든 것이구나."
"……."
"아니, 위드야. 그런 뜻이 아니라… 처음에는 우리도 지혜가 10이었다. 그런데 무예인으로 전직하면서 지혜가 60으로 늘었지."
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을 하면서 스텟들이 오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무예인이라면 전투에 특화된 직업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런데 왜 그 지혜가 이렇게 줄어든 겁니까?"
"내 생각에는 반복된 사냥과 스킬의 연마 때문인 것 같다. 며칠간 검만 휘두르다 보니 지혜가 점점 줄어들더구나. 사냥을 할 때도,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몬스터만 잡ㅇ니 지혜가 줄어들었었다.
"그러셨군요."
단순 반복을 하면서 지혜가 감소한 것이었다.
위드도 만만치 않게 사냥을 해 왔다. 하지만 사이사이 다양한 스킬을 익혔다. 조각술을 기반으로 요리나 낚시, 수리, 대장일, 재봉, 약초 수집까지 짬짬이 활용했다.
하지만 검치 들이 익히고 있는 스킬은 전투에만 국한되어있다. 그렇게 오로지 전투만을 계속하며 스킬을 연마하니 지혜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단순 무식!
이것이 행동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스텟에도 반영된 것이다.
위드는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지혜가 낮으면 필요한 전투 스킬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지혜를 올려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편이 좋을 듯싶구나."
어쨌든 지금 당장은 조각술도 익힐 수 없다. 마을에는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근처를 돌며 사냥을 해서 레벨이나 올려야 되나? 스텟을 모두 지혜에 투자한다면 조각술을 익힐 수 있을 텐데.'
오죽하면 위드는 이런 생각까지도 했다.
검치 드른 고집불통이고, 자존심이 워낙 센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열린 성문 사이로 마을의 거리가 조금 보였다. 저녁이 깊어질 무렵이라, 집집마다 문이 열리고 황량하던 거리에 뱀파이어들이 등장했다.
뱀파이어들은 밤을 좋아하니 마을의 활성화도 밤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그러더니 거리에서 조촐한 시장이 열렸다.
"사과 사세요!"
"꿀처럼 달콤한 사과를 팔아요."
시장에서 사과를 팔고 있는 여자 뱀파이어들!
피부는 뽀얗고 콧날은 오똑했다. 몸매는 또 얼마나 날씬한가. 그러면서도 나올곳은 제대로 나와서 육감적이었다.
요부처럼 화끈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순수하고 청순하게 생긴 여자 뱀파이어들.
"커헉!"
"이, 이상형이 이런곳에……."
검삼치와 검사치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검오치와 검오백오치가 재빨리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들을 선두로 하여 검치 들이 경비병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갔다.
"경비병 형님!"
"……."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뭘 좋아하십니까? 등이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여기 아껴 두었던 보리 빵이라도……."

3. 퀘스트
검치 들에게 아부의 재능은 없었지만, 그래도 간절함으로 뱀파이어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경비병은 간단한 퀘스트를 주었다.
"건강한 인간들이군. 여자들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싱싱한 피를 가지고 있어. 지친 뱀파이어에게는 피는 좋은 활력소가 되지."
띠링!
『- 뱀파이어 우르간의 갈증
마을 세이룬을 지키는 경비병 우르간은 고된 경계 엄무로 인하여 피로가 누적되어있다.
우르간이 바라는 것은 피!
젊고 건강한 인간의 피다.
난이도 : E
보상 : 마을 진입 허가.
퀘스트 제한 : 흡혈 후에는 일정 기간 활동력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
검치 들이 퀘스트를 승낙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경비병은 검치 들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쭈우우욱!
『- 흡혈을 당하고 있습니다.
채력이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하락합니다. 』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아픔!
검치 들은 경비병들에게 차례대로 피를 주고 나서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깟 피 따위……."
"일백 번 죽어서라도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다면 무엇이 아쉬우리."
페일과 제피는 깨닫는 부분이 많았다.
'메이런 님에게 더 잘해야겠다.'
'저렇게 나이 먹지 말아야지. 여자들이란 어쩌면 남자들의 부족함을 드러나지 않게 해 주는 존재들일지도.'
극도의 바람둥이였던 제피가 제정신을 차리는 순간이었다. 쉽게 넘어오는 여자들을 상대하고, 허무함에 빠져서 낚시질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괜찮은 여자들도 참 많지.'
제피는 동료들을 돌아봤다.
이리엔은 순박했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로뮤나는 가끔 앙칼지긴 하지만 은근히 아는 것도 많고 활달해서 즐거움을 준다.
수르카는 아직 어리지만 앳된 귀여움이 있고, 화령은 아름답고 고혹적이다.
춤이 이런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 바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모험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였다.
다재다능한 그녀!
하지만 제피는 알았다.
화령이 좋아하는 사람은 위드뿐이라는 것을.
'형님만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
노골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위드가 만들어 주는 요리라면 뭐든 맛있게 먹었다. 수프를 살짝 찍은 빵이나 간단한 고기구이 종류라고 해도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매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음식도 절대 남기지 않는다.
조각품을 깍을 때는 그윽한 눈빛으로 위드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조각품이 다 완성될 때까지 시선을 때지 않는다.
활발한 그녀가 위드에게만 말도 적고 어수룩한 면을 보이는데, 이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
위드는 혹시라도 떼어먹은 돈이 있어서 그러나 꺼림칙해할 때가 많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주변인들이 더 잘 알아채는 법이다.
메이런은 페일의 여자 친구이고, 유린은 위드의 여동생이다.
유린은 참 귀여웠다. 그 웃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몰래몰래 눈길을 주게 된다.
하지만 제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녀만큼은 절대로!'
차마 그녀와 가까워진다면 명이 엄청나게 단축되고 말 테니까!
'가문이 갈라놓은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나마 멋이라도 있었지.'
검치들의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그녀를 좋아하는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검치 들의 흡혈이 거의 끝났다.
비틀거리는 검치 들.
체력과 생명력이 소진된 만큼 봄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만큼 경비병들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백짓장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생기가 흐르고 송곳니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피를 마신 뱀파이어의 특성상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오크 세에취는 경비병들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오크의 피는 맛이 없어."
"……."
"넌 마을에 들어오지 마."
그말에 세에취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검둘치가 나섰다.
"세에취 님 대신 저의 피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경비병은 반색했다.
"인간의 피? 좋지. 맛있게 먹어 주지."
검둘치는 스스로 두 번이나 흡혈을 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세에취를 위해서 였다.
"취익! 검둘치 님."
세에취가 눈을 글썽였다.
흡혈을 마친 검둘치가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는 것을 세에취가 부축해 주었다.
비만 오크가 부축하고 있는 건장한 인간!
그 후에야 모든 일행이 뱀파이어 마을 세이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마을 세이룬의 최초 발견자가 되셨습니다!
혜택 : 명성이 180 증가.
미탐험 지형의 마을을 발견함으로 인해서 해당 마을에서 받는 퀘스트 보상이 일주일간 2배로 증가합니다.』
최초 발견자의 혜택!
위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2배라니……."
퀘스트 보상이 2배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이상의 혜택이 있었다.
어차피 뱀파이어 왕국 토둠 인근에 있는 사냥터는 무조건 최초 발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냥터에서의 아이템 획득과 경험치에서도 2배씩의 이득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리엔과 페일도 기뻐했다.
"명성도 올랐어요."
"정말 좋은 곳이네요."
위드는 발길을 재촉했다.
"어서 마을을 돌아보죠."
하지만 다들 쉽게 발걸을을 옮기지 못했다.
처음 들어가는 뱀파이어의 마을이라는 사실!
베르사 대륙이 아닌, 새로운 땅을 여행한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흥분으로 못 박힌 듯이 마을 입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특히 메이런은 아까부터 뱀파이어의 마을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
예쁘게 지어진 별장 형태의 저택들, 길거리에서 검은 망토를 몸에 두르고 걸어다니는 뱀파이어들은 이국적인 광경 그 자체였다.
'역시 이 맛에 모험을 하는 거야.'
알지 못하는 장소를 여행하며 새로움을 발견한다.
마금이 급했다.
"네. 빨리 가요!"
유린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화가는 방문하는 도시나 풍경을 그림으로써 스킬의 숙련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을 세이룬을 볼 때부터 수십장의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위드와 마판은 일행과 함께 우선 상점들부터 들어갔다. 모라타에서부터 가져온 교역품들을 처분할 필요성이 있었고, 또한 새로운 장비들을 구입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마판이 주인에게 물건들의 시세를 확인해 보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류들이 무척 비싸게 팔립니다. 모피와 양탄자도요!"
"성공이군요!"
위드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정말 좋으시겠어요, 마판 님."
"역시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수르카와 페일이 옆에서 재빨리 축하의 말을 건넸다.
마판이 큰돈을 벌게 되면 혹시 떡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면서 은근히 위드의 눈치를 살폈다.
'위드 님 덕분에 이곳에 오게 된 건데…….'
지상의 다른 교역소에서 판매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이윤을 남긴다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뱀파이어의 땅은 아무도 찾아오지 못한 매개척 지역!
처음으로 판매하는 물품들은 이곳에서 특별 취급을 받아서 20%나 30%의 가격을 추가로 더 쳐줬다. 그야말로 상인에게는 노다지 같은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위드는 정말 전혀 부럽지 않은 얼굴로, 아기처럼 순수한 기쁨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위드 님은 좋은 분이었어."
수르카도 부끄러움에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제가 위드 님을 오해했나 봐요. 이렇게 바다처럼 넓은 포용심을 가지고 있는 분인 줄 몰랐어요."
그만큼 위드가 짓고 있는 미소가 너무 구김 없이 밝았다.
위드는 마판을 부추기기도 했다.
"마판 님, 얼른 물건을 팔아 보세요."
"그럴까요?"
"네. 비싼 값에 팔리길 기원합니다."
마판은 교역소 주인과 흥정을 개시했다. 교역소 주인도 당연히 뱀파이어였다.
"이렇게 예쁜 보석들을 가져온 상인이여, 꼭 나에게 팔게."
마판은 모피 열 필과 양탄자 다섯 개 그리고 보석들을 삼분의 일 정도 꺼냈다.
"얼마나 쳐주시겠습니까?"
"25만 골드. 아니, 아니야. 이런 물건이라면 27만 골드라도 쳐줄 수 있어."
"죄송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가격이 낮군요."
"이런! 가지 말게! 내가 다시생각해 보니 303,000골드까지 지불해 줄 수 있을 것 같군."
『- 1차 흥정이 성공하셨습니다.
지금 물건을 판매할 경우 회계 스킬의 숙련도각 2.3% 오릅니다.』
마판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판매하고자 하는 물품들을 구입한 원가는 겨우 11만 골드!
지금 판매를 하더라도 대박에 가깝다. 2배 이상 남는 장사는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마판은 더 욕심을 내 보기로 했다.
"괜찮은 가격이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어서……."
뱀파이어는 잠시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판의 얼굴과 그가 내놓은 교역품들을 번갈아서 바라봤다. 갈등하는 눈치였다.
"처자식이 있다면 내가 인심을 써 주지. 368.000골드. 꼭 사고 싶은 물건들이라서 후하게 쓴 거야.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는진 몰라도, 더 이상은 나도 곤란해."
『- 2차 흥정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금 물건을 판매할 경우 회계 스킬의 숙련도가 6.2% 오릅니다.』
마판은 입을 떠억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설마하니 이렇게 대성공을 거둘 줄이야.
"이 가격에도 팔지 않을 건가?"
"아, 아닙니다. 팔겠습니다."
마판은 내놓았던 교역품들을 처분했다.
띠링!
『- 대규모의 무역 이익을 거두셨습니다. 명성 630 상승.』
『- 회계 스킬의 레벨이 중급 6래벨로 상승했습니다. 냉정한 계산으로 인하여 물건을 사고팔 때에 가격을 더욱 후려칠 수 있습니다. 어수룩한 구매자들의 등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인으로서의 최대 희열!
마판에게는 70% 정도의 교역품이 더 남아 있었다.
교역품들을 한꺼번에 대ㅔ량으로 팔면 시세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일부만 비싼값에 판 것이다. 나머지는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 가서 처분할 계획이었다.
거리의 뱀파이어들이 말했다.
"마판이라는 인간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어 보았나? 인간 주제에 제법이야."
"마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어? 그 인간이 내 앞을 지나가면 좋겠는데. 만약 지나겨면 어쩔 거냐고? 으슥한 골목길에서 그냥 목덜미를……."
교역품 판매 대박!
마판은 이처럼 큰 이윤을 거두자, 위드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좋으시겠습니다."
"이게 다 위드 님 덕분이죠."
"아닙니다. 마판 님이 잘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위드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모라타의 영주로서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마판은 모라타의 주민으로 등록을 했다. 북부에서의 상거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모라타의 주민이 된것이다.
그 결과 모라타에 세금을 내게 되었다.
드래곤보다도 무섭다는 무시무시한 소득세!
상인이 납부하는 세금은 이윤의 3%.
36만 골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거액을 벌어들였으니 1만골드가 넘는 세금을 모라타에 내야 한다.
다단계의 종점은 세금!
'역시 세금처럼 좋은 게 없어.'
위드가 괜히 자신의 일처럼 기뻐할 리가 없었다.
돈을 벌어들인 다음에는 무기점에 들렀다.
당연히 이번에도 뱀피이어가 주인인 무기점!
말을 할 때마다 두꺼운 송곳니가 튀어나오는 남성 뱀파이어가 주인이었다.
"어서 와라. 우리 뱀파이어들의 무기를 구입하고 싶나? 아쉽게도 우리 뱀파이어들에게는 무기가 따로 필요하지 않아. 그래서 모아 놓은 무기는 몇 개 안 되지만. 기품을 위한 장비들이나 귀한 방어구들은 많이 있으니 빨리 둘러보도록 해."
뱀파이어들은 검이나 도를 휘두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금속성의 무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피를 흡수하는 장갑, 어둠의 표창을 소환하는 허리띠, 정신착란과 환영을 일으키는 망토도 있었다. 뱀파이어들의 특징에 맞는 무기류들이었다.
이곳에서 화령은 드레스를 발견했다.
"앗! 저 드레스 좀 보세요."
금붙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붉은색 드레스. 그런데 노출이 심했다.
배와 옆구리가 그대로 훤히 트여 있을뿐더러, 가슴 부위도 상당히 파였다.
몸매에 자신 없다면 대단히 입기 힘든 복장이었다. 그러나 화령은 현실에서 이보다 더 심한 옷을 입고 콘서트를 한 경험도 있었다.
"저 옷 어때요?"
화령은 일단 위드에게 의견을 구했다.
재봉 스킬을 중급까지 이룩했으니 보는 눈썰미가 남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일단 위드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었다.
"놀랍군요."
"역시 예쁘죠?"
"예. 저렇게 원단을 아껴서 옷을 만들 수 있다니. 한 벌 만들 재료로 두 벌도 만들 수 있겠는데요. 역시 재봉을 통해서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어! 그런데 내 실력이 모자랐던거야."
위드는 드레스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반성했다. 왜 진작 이런 옷들을 떠올리지 못했단 말인가!
사실 흔히 판매되는옷의 종류는 아니다.
저렇게 노출이 심한 옷들은 필연적으로 방어력이떨어질수밖에 없어서, 외모와 매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댄서들이 아니라면 입기 어려운 복장이었다.
"저 드레스 저랑 잘 어울릴까요?"
"글쎄요. 일단 가격이 중요하겠는데요."
"제가 입으면 예쁠까요?"
위드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쁠 것 같네요."
"고마워요. 그럼 마판 님, 저 대신에 드레스 좀 구매해 주세요."
상인인 마판이 구매를 대행해서 구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드레스의 가격이 무려 148,000골드였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화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싸네요."
현실에서는 수천만 원짜리 구두들도 사고 있었으니 이쯤이야 싶었던 것.
일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싼 드레스 때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그들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리고 댄서의 직업적인 특성상 14만 골드 정도의 옷을 입어 주는 걸 과소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정작 옷의 정보들은 확인도 안 하고 그냥 위드 님이 예쁠 거라니까 덥석 구매를 하겠다나.'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다.
가격도 구매하기로 결정한 후에 물어본 것이지 않던가!
다행이 불ㄺ은 드레스는 화령이 가진 댄서의 스킬들을 더욱 높여주고 민첩성과 기품마저도 상승시켜 주는 좋은 옷이었다.
화령이 드레스로 갈아입자 그녀만의 매력을 더욱 뽐낼 수 있었다. 노출이 이전보다 심해졌지만 전혀 천박하지 않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는 늘씬하면서 여성적인 매력이 한껏 살아났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만 화령은 그 옷보다도 더욱 아름다웠고, 자신감 넘치는 도발적인표정과 눈빛에는 생동감까지 담겼다. 괜히 무대 위의 요정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예뻐요, 언니!"
수르카가 먼저 달려들었다.
요즘에는 여자들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그렇게 한동안 소동이 벌어진 후에야 다들 무기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후 잡화점으로 들어가니 기본적인 여행 도구들을 팔고 있었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여행 도구들만 있어서 쓸모 있는 것들은 없었다.
애초에 위드에게는 물건을 구입할 생각이 없었다. 소유하고 있던 돈은 몽땅 모라타의 발전, 사실은 장기적인 착취에 투자를 해 버렸다.
'돈이 있더라도 아껴야지. 그래야 부자가 될 수 있어.'
위드는 쓸모없는 충동구매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저 물품들의 가격 정도만 살폈다.
그런데 그때 주인 뱀파이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은근슬쩍 뒤에서!
"크아아아!"
입을 쩌억 벌린 채로 다가온 주인 뱀파이어! 하지만 위드가 낌새를 느끼고 돌아보니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
"흠흠, 민망하군 신선한 인간의 피를 마셔 본 게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그런데 뭘찾나?"
필요한 물건은 없었지만. 위드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물었다.
"조각사가 쓸 만한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조각사라고? 자네가 쓸 만한 것들은 토둠에 가면 있을걸? 작은 마을인 여기에서 찾으면 곤란해. 토둠에는 조각사에게 특별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 마을은 토둠과 무슨 관계입니까?"
"그저 작은 마을이다. 번잡함을 싫어하고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뱀파이어들이 머무르는 곳. 토둠으로 가려면 여기서 동쪽으로 며칠은 가야 할걸. 하지만 추천하고 싶진 않아. 그 곳은 정말 위험해졌다는 소문이 많으니 말이지."
주인 뱀파이어의 말에 따르면 세이룬은 일종의 초보지역 이라는 것었다.
'약하다면 토둠은 구경할 생각도 하지 말고 이곳에서 만족하며 머물러야 한단 소리군.'
그때부터 뱀파이어 주민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정보 수집에 나섰다.
"세이룬? 이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묻는 건가? 3개의 달중하나의 이름이야. 발룬, 고룬, 세이룬. 밤의 귀족들의 도시토둠에 가면 같은 이름을 가진 뱀파이어 퀸들이 있지. 그녀들은 아주 예뻐. 내가 인간이었다면 심장을 꺼내어 바치고싶을 정도로."
"이 마을을 구경 온 인간들이군. 밤에는 뒷골목을 조심하게. 그곳에는 마을에서도 내놓은 노는 뱀파이어들이 많아 인간의 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들이야."
"토둠에 대해서도 알고 싶나? 그곳은 원래 죽은 자들이 안식을 취하는 공동묘지였어.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들이 깨어났고, 피를 찾아 마시기 시작했지. 지금은 밤의 귀족들의 도시가 되었어. 살아 있는 인간이 잇냐고? 밤의 귀족이 되는 영광을 왜 포기하겠는가!"
"뱀파이어의 땅에서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아. 죽은 인간들의 시체는 지상으로 올려 보내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어찌하냐고? 우리 뱀파이어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니 그대로 넣어 줘. 다만 골동품이나 보석류 들은 가끔씩 사라지기도 한다지."
"쯧쯧! 요즘 어린 뱀파이어들은 자기만 잘난 줄 알지. 무슨 있지도 않은 황금 흡혈 박쥐를 찾아 나서겠다고……."
"내가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어린 뱀파이어들ㅇㄴ 늦은 아침에도 마을로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아. 부디 무슨 사고라도 안 당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 예쁜 여자 뱀파이어들이 많지 그녀들의 몸매는……. 크흠! 어디가서 내가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하지는 말게."
길거리에 있는 뱀파이어 어른들!
어디에나 세대 차이가 있는지, 어린 뱀파이어들을 못마땅해했다.
위드는 청년 뱀파이어들에게도 말을 걸어 보았다.
"인간인가? 혈관을 타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좋아, 훌륭해! 우리 마을의 뒷골목에는 가 보았나? 풍광이 아주 수려한 곳이지. 혹시 가고싶다면 내가 안내를 해 줄 수도 있는데……."
"여자 뱀파이어들. 그녀들은 믿기 힘든 말을 자주 지껄여. 우리 일족이 자꾸만 실종된다는 거야. 다 헛소리지. 뭐 사실이더라도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괜찮아."
"우리 세이룬에 있는 뱀파이어 퀸중에서는 로세린이 제일 이쁜편이야. 그런데 요즘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아. 어디에 있을까."
* * * * * * * * * * * * * * * * * * * * *
검치 들은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따로 모아서 여자 뱀파이어들로부터 정신없이 사과를 사 먹었다.
가끔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뱀파이어 왕국 만세!"
"뱀파이어들이여, 영원하라!"
"크흑!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 고맙다. 위드야."
검치 들의 추태!
검둘치나 검삼치, 검사치는 기쁨을 만끽했다. 검치와 검오치는 사과를 먹느라 바빴다.
마을 세이룬은 노총각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장소였다. 사근사근 웃으면서 대하는 여성 뱀파이어들은 어여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많이 드세요. 팔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뭘 이런 것을 가지고 다……."
"고마워요."
여성뱀파이어들이 보답으로 검삼치의 양쪽 팔에 매달렸다.
"으허허허허!"
그 흐믓한 촉감!
"돈이 아깝지 않아!"
검삼치가 스승을 보았다.
"스승님! 우리 아껴 놨던 돈 있잖습니까."
"알았다, 제자야. 마음껏 먹자꾸나! 다 사 먹자!"
검치는 과감하게 가진돈을 탈탈 털었다. 미인계에 당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돈이야 사냥을 해서 벌면 되는 것.
궁핍하게 살았던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만큼 쓰는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여성 뱀파이어들의 호감도를 상승시켜 주고 있었다.
검삼치의 팔에 메달려 있던 뱀파이어가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예? 뭘 도와 드려야 될지……. 사과를 더 사 먹으면 되는겁니까?"
"사실 우리를 붙잡아 죽이는 존재들이 있어요. 그들을 물리쳐 주세요."
뱀파이어가 처연하게 눈물을 글썽였다.
그광경을 보는 검삼치의 마음이 타들어 갈 듯이 아파왔다.
"아니, 그런 못된 놈들이! 대체 어디 있습니까? 내 이놈들을 당장……!"
"안내할게요. 저희를 따라오세요."
* * * * * * * * * * * * * * * * * * * * *
위드와 일행이 정보를 수집하고, 퀘스트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닐 때였다. 검삼치가 급하게 뛰어왔다.
"위드야!"
"예?"
"우리가 퀘스트를 찾은 것 같다."
"언제, 어떻게 찾으셨는데요?"
"저 여자들한테 사과를 사 먹는데 말해 주더구나."
뱀파이어들!
인간과 비슷한 몬스터로 분류되지만, 검치 들이 보기에는 여자들이었다.
"보상과 난이도는요?"
"아직 모르겠다. 자꾸만 어딘가로 따라오라고 하는데, 너한테 물어봐야 될 것 같아서."
"일단 가 보죠."
위드는 일행과 같이 여자 뱀파이어에게로 향했다. 뱀파이어의 주변에는 검치 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위드야, 어서 와라. 이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하겠다는구나. 동료들이 위험하다고 빨리 같이 가 달라고 해!"
검둘치가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따라나설 태세.
위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면서 뱀파이어들을 향해 물었다.
"우리더러 어디로 따라오라는 겁니까?"
"그건 따라와 보시면 알아요."
뱀파이어가 쌜쭉하니 입을 내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위드는 뱀파이어를 믿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을 일삼던가!
탐욕과 질투, 시기심으로 가득한 뱀파이어들은 위기에 몰릴 때마다 거짓말을 마구 지어낸다. 지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몬스터들이 뱀파이어 였다.
위드는 요구했다.
"동료가 위험하다는 게 사실이라고,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라고 피의 맹세를 할 수 있습니까?"
피의 맹세.
뱀파이어들은 생명의 원천이 ㅗ디는 피를 걸고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진혈의 뱀파이어족을 상대하면서 배웠던 사실이다.
'거짓말이라면 모른 척 발뺌을 하겠지.'
그러나 위드의 예상과는 달리 여성 뱀파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나 뱀파이어 미노르는 신성한 피를 걸고 이 인간들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 맹세합니다."
"갑시다."
위드는 일행과 함께 뱀파이어 미노르를 따라나섰다.
미노르는 마을의 뒤쪽 평야 지대로 그들은 안내했다.
넓은 들판,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들, 광활한 초지를 지나니 또 하나의 마을이 나왔다.
놀랍게도 인간들이 거주하는 마을!
목책으로 벽을 두르고, 기사와 사제 들이 불침번을 섰다.
미노르가 처연하게 말했다.
"저기 모여있는 인간 광신도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어요."
"로세린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이들입니까?"
"네, 신을 믿는 발칙한 존재들이죠. 저들은 우리 뱀파이어 일족을 납치해서 매일 밤마다 1명씩 화영을 한답니다. 저쪽을 자세히 보세요."
미노르는 손가락으로 마을의 정문 근처에 모여 있는 화형대를 가리켰다.
뱀파이어들이 밧줄로 묶인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주변에는 기름을 부운 장작들이 쌓여 있었다.
"오늘 밤에 화형을 당할 제 친구 로세린이에요. 부디 저기 모여 있는 광신도들을 몰아내고 로세린을 구해 주세요."
띠링!
『- 뱀파이어의 구출
세이룬의 뱀파이어들에게는 우환거리가 있다.
그들을 위협하는 종교재판관들, 사제들, 성기사들의 존재!
신앙심으로 무장된 피는 마실 수도 없으며, 그들의 땅은 축복받은 곳이라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미르노는 정의와 법을 수호하는 타론의 광신도들을 처치하고 로세린과 뱀파이어 퀸드를 구원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난이도 : B
보상 : 뱀파이어의 포션.
미노르의 저주받은 인형.
퀘스트 제한 : 3개의 달이 떠오르고 화형식이 거행되어 로세린이 사망하면 의뢰 실패. 』
매우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의뢰!
뱀파이어가 내주는 의뢰였다.
인간들과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위드는 망설였지만, 검치 들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저기 묶여 있는 여자가 로세린인가?"
"저렇게 이쁜데 도와줘야지!"
"암! 사내라면 당연한 선택!"
"걱정 마시오. 우리가 도와주겠소."
검치 들은 뱀파이어 퀸 로세린의 얼굴만 보고 대책 없이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위드도 마음을 정했다.
"로세린을 반드시 구출하겠습니다."
『-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신앙이 15 감소합니다.
명성이 200 하락합니다.
행운이 3 줄어듭니다.
매력이 15 증가합니다.
성향이 미약하게 악인에 가까워집니다. 』
4. 로세린 구출 작전
퀘스트의 성공과 무관하게 의뢰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스탯에 변화가 생겼다. 뱀파이어의 의뢰를 받은 대가였다.
"으앙! 명성이 줄어들었어요."
위드를 따라서 퀘스트를 받은 수르카가 울상을 했다.다른 사람들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명성은 여간해서는 잘 오르지 않는다. 퀘스트의 반복이나 전투로 200의 명성을 올리려면 일주일도 모자랐다.
신앙심의 하락이나 행운 감소도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명성만큼 민감하지는 않다.
명성은 받을 수 있는 퀘스트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고, 심지어는 2차 전직, 3차 전직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검치가 진지하게 물었다.
" 위드야. "
" 예, 스승님. "
" 만약의 경우인데, 명성이 0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
검치 들의 명성은 썩 높은 편이 아니었기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위드는 실상 퀘스트를 받은 때부터 어느 정도의 페널티는 있을 거라고 짐작했따.
' 난이도 B급의 의뢰를 어떤 사전 준비도 없이, 연계 퀘스트도 없이 그냥 할 수 있었어. 여기가 뱀파이어의 땅이라고 해도 상당한 손해가 있을 거야. '
정작 퀘스트를 받고 보니 우려했던 것보다 큰 피해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위드는 추라고하는 사기를 막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야 무기점에서 좋은 무기들은 팔아 주지 않겠죠. "
" 왜? "
"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은 좋은 무기를 쓸 자격이 없다고 말입니다. "
" .... "
검치의 무기 욕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실제로도 명검들만 모아 놓는 그에게, 무기를 구매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당한 슬픔이었다.
그때 검삼치가 반문했다.
" 꼭 무기점에서만 무기를 사라는 법은 없다. 대장간에서 직접 주문해서 만들면 되지 않을가? "
" 기본적으로 이름 있는 대장장이들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무기를 유명인들이 써 주길 바라니까요. 명성이 하락하면 일단 구매 가격이 전반적으로 올라가고, 그 후로는 무기를 구입하기도 힘들어집니다. "
검삼치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뭐 그 정도라면 참아 줄 만하지. "
무기들은 위드나 마판을 통해서도 살 수 있다.
대장간에서 주문 제작한 무기는 사용자에게 딱 맞는 것으로 고유의 특성들을 더 올려 주지만, 필수적이진 않다. 유저 대장장이에게 웃돈을 얹어 주더라도 주문을 해서 만들면 되니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위드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식당도 이용하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
" 그. 그건 왜? "
" 좋은 식당은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거든요. "
" 으흐흑! "
검삼치가 괴로워했다.
식욕을 억제해야 하는 건 그만큼 큰 고통이었다. 현실에서 철저한 금욕 속에서 살고 있기에 로열 로드의 세상에서는 더욱 음식을 밝힐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 뭐야, 명성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
" 우린 큰일 난 거 아니야? "
수련생들도 우왕좌왕했다.
추락하고 있는 시기!
위드는 이번에도 간단한 방법을 찾았다/
" 사형들! "
" ……? "
" 싸움입니다! 미녀 뱀파이어들을 구출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녀들이……. "
" 그녀들이? "
꼴깍!
수련생들의 침이 넘어갔다. 그러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절대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
' 저놈이 나보다 먼저 구하면……. '
' 급하다! 여자들을 구출해야 된다. '
위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릇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미묘한 발언!
" 우와아아! "
수련생들을 시작으로 사범들이 마을을 향해 돌격했다. 경쟁 심리 때문에라도 뒤쳐질 수 없었다.
" 비켜! 로세린은 내가 구할 거야! "
" 나보다 밑의 서열들! 다 내 뒤로 집합해! "
" 사형, 지금 서열 따질 판입니까? 여자가 걸려 있는데! "
수련생들과 사범들의 아우성!
" 비켜라! 내가 제일 급하다! "
검치도 질풍처럼 내달렸다.
여자 뱀파이어들은 인간을 닮은 종족이나 몬스터들 중에서도 상당히 예쁜 편이다.
하이 엘프, 우드 엘프 들이 청순한 매력을 가졌다면 뱀파이어들은 요녀였다.
유혹적이고 육감적인 몸매.
뱀파이어 퀸 로세린을 구출하는 데에 망설인다면 검치들이 아니었다.
수르카가 고개를 숙였다.
"절망이야."
로뮤나도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그래도 사내답고 강인한 모습이었던 검치 들이 뱀파이어 퀸을 구출하기 위해 뛰어드는 모습을 보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와중에도 검둘치와 검십육치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메이런은 사뭇 이유가 궁금했다.
"검십육치 님, 뱀파이얼ㄹ 구출하러 가지 않으세요?"
검십육치의 인상은 검치 들 중에서도 더럽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조카들이 어릴 때 숱하게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설날에 세배를 하면서도 벌벌 떨었다고 하니 오죽 하겠는가.
검십육치가 밝게 웃으며 답했다.
"여자 친구와 귓속말 중입니다."
"여자 친구요?"
모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검십육치와 여자 친구!
도저히 연상이 안 되었다.
검치 들 중에서 여자 친구가 있는 이를 최초로 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잖아."
"설마 벌서 치매?"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만 본인은 진짜라고 믿는……."
"납치였을지도 몰라요!"
구구한 억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메이런이 간신히 평정심을 찾았다. 그리고 힘겹게 물었다.
"그 여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데요?"
"본 드래곤과의 전투 중에 알게 되었죠. 이름은 리비안. 이름도 참 예쁘지 않습니까? 허허허!""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검십육치.
목숨을 바쳐서 마지막까지 싸워 친구 등록을 했다. 꿈인지 의심스러웠지만 현실이었다. 그 후에는 틈만 나면 귓속말을 나누었다. 어눌하지만 솔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검십육치 때문에 리비안도 무척이나 재미있어 했다.
그는 모든 검치 들에게 존경할 만한, 본받을 만한 대상이었던 것!
모두가 여자 뱀파이어를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간 이유이기도 했다.
메이런의 눈에 감탄이 스쳤다.
"과연 그러셨군요! 이렇게 듬직한 분이라면 당연히 인기가 있으시겠죠. 그건 그렇고… 검둘치 님은 왜 안 싸우세요?"
"전 여기 이분을 지켜야지요."
검둘치는 검을 뽑아 들고서 세에취 옆을 지켜 섰다.
키가 크고 뚱뚱한 암컷 오크와 인간!
검둘치의 육체가 근육질이라곤 해도, 키가 2미터도 넘는 세에취의 체격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지켜준 다는 말이 이상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성인 세에취를 보살펴 주기 위해 남은 것이다.
"검둘치 님! 취익, 취이잇!"
세에취는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 일행에 속하고 나서부터 얼마나 많은 설움을 격어야 했던가!
다들 착한 사람들이었기에 나쁜 말은 하지 않아 무난하게 섞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경험치와 전리품을 가져가는 빈대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에 끼지도 못하고, 짐을 드는 짐꾼의 역활 정도만 수행해야 했다.
외롭고 쓸쓸하고 자괴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위해 주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들이 이랬던 적이 처음이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미모의 정신과 박사인 그녀였기에, 소개팅을 하더라도 옷 잘 입고 잘생긴 남자들이 즐비하게 나왔다.
그런 남자들의 호의에 익숙해져 있지만 로열 로드에서는 추악한 오크로 활동하면서, 그런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아껴 주고 보살펴 주려고 하는 남자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업었다.
검둘치는 사범들의 맏형답게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깊은 편이었다.
위드가 나섰다.
"그럼 우리도 싸우러 가죠."
"위드 님, 축복을 걸어 드릴게요. 그대의 몸에 신성한 힘이 깃들어 보살펴 주고, 상처받지 않도록 해 주세요. 영원의 기원!"
이리엔이 기도했다.
성직자인 그녀의 기도에 따라 주변이 흰빛으로 뒤덮였다.
이리엔이 새로 익힌 축복 스킬!
일시적으로 물리, 마법 방어력을 높여 주고 신체 치유 능력을 향상시켜 주었다.
"사악한 악에 맞서 쌍는 그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도록 해 주십시오. 블레스!"
연속적인 축복에 위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몸에 활력이 돌았다. 최고의 사제라고 할 수 있는 교황 후보 알베론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리엔의 신성마법도 꽤나 효과적이다.
전투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
위드는 유린을 보았다.
"동생아."
"응?"
"여기에만 잘 숨어 있어라. 마판 님과 같이 있으면 될거야."
"알았어."
"몬스터들이 오면 사형이 처리할 때까지 잘 도망 다니고."
"걱정하지 마. 나 달리기 빠른 편이야."
"혹시 배고프면 마차에 있는 육포 먹도록 하고."
"배부른데."
"만약에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밥 잘 먹고 잘 지낼게."
"남자는……."
"다 늑대지. 믿을 놈은 하나도 없어."
워드는 그 후로도 한참을 이야기 했다.
뱀파이어들은 여자를 밝히는 편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남자 뱀파이어가 유혹을 하더라도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몸이 피곤할 때에는 쉬어라. 체력이 약하니 금방 지치게 된다. 무리하면 과로를 하게 되고, 심하면 만성피로와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마판은 질린 얼굴을 했다.
"위드 님이 저렇게 말이 많은 분인 줄 몰랐는데."
페일도 동감이었다.
"그걸 묵묵히 참고 듣고 있는 유린 님도 대단하고요."
제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동생과 오빠의 관계니 그렇겠죠. 여동생이 짧은 치마를 입고 외출할 때 오빠의 심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까요."
그렇게 잔소리를 쏟아 낸 후에야 위드가 전장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이 급하니 지금은 짧게 여기까지만 하자."
"응, 오빠."
"시간은 많으니까."
"이렇게 일찍 끝나니 허전하네. 나중에 천천히 다시 말해 줘."
"그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질린 얼굴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드가 움직일 무렵, 광신도들의 마을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뱀파이어에게 현혹된 어리석은 이들!"
"회개하라. 회개하라!"
"이곳은 지옥이니 죄를 속죄하라! 신의 품으로 저들을 보내 주어라!"
"제1기사단, 앞으로!"
광신도들.
암흑 성기사들과 암흑 사제들이 공격 태세를 갖췄다.
마을을 공격하면서 지루한 공성전의 형태가 벌어지리라 예상했는데, 안에 있던 인간들이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왔다.
"너희가 걸어가는 길에는 신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
마을을 향해서 달리던 검치 들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발걸음이 무거워 지고, 강한 역풍이 불어 움직임을 제약했다.
암흑사제들이 재차 마법을 펼쳤다.
"악에 현혹된 인간들이여, 너희는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들이다! 지독한 병에 걸려서 추악한 냄새를 내뿜게 될 것이다!"
검치 들의 몸이 푸르게 변했다. 전염병에 걸려서 코가 썩어 들어갈 것만 같은 악취를 내뿜었다.
보통 인간들이었다면 괴로워했으리라! 전투 의지를 잃어 버린 채로 퇴각하여 다시금 기회를 노렸으리라.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치 들은 그런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검삼치가 히죽 웃었다.
"이 정도로 뭘! 열흘 만에 발 씻은 물로 세수한 적도 있다고!"
검사치도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듯 음흉한 얼굴을 했다.
"2년 동안 열대우림에서 수행을 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왔지. 그리고 목욕탕에 갔을 때 나 때문에 모두 도망쳤어. 흐흐!"
"난 머리카락에서 바퀴 벌레 길러 본 적도 있습니다!"
지옥 같은 수련을 하면서 더러움이나 냄새에는 단련이 되어 있다.
검치는 마냥 좋다고 웃을 뿐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검을 배울 때에는, 집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다. 가끔 수련 도중에 먹을게 생기면 화장실부터 쪼르르 달려갔다.
남들이 간섭할 수 없는 안락한 장소!
그때에는 뒷간이라고 불렀다. 물을 이용하는 시설이 아니라, 오래되고 낙후되어 가득 차면 퍼내야 하는 순수 재래식 화장실!
화장실 안에서 별미를 맛보았다.
"쪼그려 앉아 버너로 라면을 끓어 먹었던 게 최고의 맛이었지."
캐내면 캐낼수록 끔직한 과거를 가진 검치 들!
전염병이 걸려서 몸에 힘이 빠지고 관절이 욱신욱신 쑤시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무사의 돌격!"
"멈추지 않는 검!"
검치 들의 몸이 희미한 빛에 휩싸였다.
달리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무사의 돌격.
통상적인 질주보다 속도가 무려 25%나 늘어나느 기술!
기사들의 차지 공격처럼 강력한 돌진을 바탕으로 더 큰 파괴력을 이끌어 낸다.
체력을 적지 않게 소모하지만 공격력만큼은 단연 일품이었다.
멈추지 않는 검은 스킬의 이름처럼 중간에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베고, 찌르고, 내려치고!
검이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
그렇기에 검을 다루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면 배워도 쓰지 못하는 기술이다. 눈앞의 몬스터를 보고도 엉뚱한 곳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그 이후부터는 중심이 흐트러져 제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세 번, 혹은 네 번의 휘두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며, 몬스터의 대응에 맞춰서 변화까지 주어야 한다.
스킬들을 익히고 숙련도를 올리는 것은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잠재력을 이끌어 내고 그 이상으로 활용하는 것은 개인의 전투 능력에 달렸다.
"베어 버려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검치 들은 미친 인간들처럼 검을 휘두르면서 전진했다.
바람을 베는 검!
검을 휘둘러서 사제들이 만들어 낸 강한 역풍을 흐트러뜨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성기사들과 가까워졌다.
"쳐라!"
"불신자들은 신의 품으로!"
광신도들과 검치 들의 격돌.
"신의 망치!"
"대지의 역류!"
검과 방패가 부딪치고 신성 마법들이 작렬했다.
"증오하라. 증오만이 신의 뜻!"
이단 심판관들도 추악한 마수들을 불러내며 활약을 펼쳤다.
"성령의 힘이여, 여기 고통받는 이를 구원해 주소서. 치료의 손길!"
사제들은 성기사들을 축복해 주고, 그들의 생명력이 떨어질 때마다 즉각 치료를 해 주었다.
공격 마법은 그리 강하지 못하지만 보호와 회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 성직자, 신관, 사제 계열들이다.
검치 들은 맹렬히 두둘기고 공격했지만, 성기사들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즉시 회복되어 버렸다. 레벨도 그다지 낮지 않았을 뿐더러, 묵직한 갑옷을 제대로 받쳐 입어서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여기에 사제들이 후방에서 마음껏 지원을 해 주고 있었으므로 성기사들이 힘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성기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멋진 갑옷!
위드의 눈이 돌아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갑옷 세트! 그것도 성기사 전용이다."
성기사는 대중적인 직업중에 하나다.
검이나 철퇴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를 다룰 수 있다. 마법도 사용할 수 있고, 높은 방어력으로 잘 죽지 않아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성기사의 갑옷 세트라면 비싸게 팔리겠지."
구태여 경매 방식대로 시간을 끌며 처분할 이유도 없었다. 구매자들이 널려 있으므로 비싼 가격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편하게 팔 수 있다.
"역시 뱀파이어의 세계에 오길 잘했어!"
그러자면 전투를 이겨야 한다.
후방에 있는 사제들은 끊임없이 축가와 승전곡, 치료와 축복을 반복하고 있다.
"이놈들 왜 이렇게 안 죽어!"
"뒤에서 사제들이 자꾸 치료를 하는 것 같습니다."
"비겁하게……."
검치 들이 아우성쳤다.
맞으면 맞는 대로 생명력이 깍이는 그들과는 달리, 기사들은 사제들의 치료 덕분에 금세 멀쩡해진다. 그래도 조금씩 죽어 나가는 자들이 생겼지만, 사제들의 치료를 받아서 죽기 직전의 이들이 회복되기도 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성기사들의 벽이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단단히 뭉쳐서 방패를 앞세우고 밀어내니, 검치 들이 오히려 조금씩 뒤로 밀렸다.
"마법 화살!"
"아이스 볼트!"
사제들은 간단하지만 방비하기는 힘든 마법까지 사용했다. 그들이 쏘아 내는 마법들이 검치 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폭팔했다.
여타의 직업보다 생명력이 많고 끈질긴 검치 들이었지만 피해가 점점 크게 누적되었다.
검치 들이 너무 앞서 나간 탓에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던 페일이 안절부절 못했다.
"이러다 퀘스트 실패하는 거 아닐까요?"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는 성공합니다."
뱀파이어의 마을에서 얻게 된 퀘스트!
토리도가 지휘하던 진혈의 뱀파이어족과 싸우는 퀘스트가 난이도 B급이었다.
그당시에는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 온갖 스킬들을 힘겹게 동원하고 알베론의 조력까지 얻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검치 들도 당시 위드의 레벨보다는 높고, 전투에도 달인들이다.
그럼에도 위드는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진 않았다.
"퀘스트는 성공하겠지만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
"여기서는 한 번이라도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아, 그런 제약이 있었군요!"
페일과 제피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죽으면 퀘스트가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고, 뱀파이어들의 세계에서 영구히 추방되어 버린다!
한 번이라도 죽으면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검치 들의 특징은 뛰어난 공격력에 있다. 대신 방어력은 취약하기 이를 데 없고, 생명력도 특출한 정도는 아니다. 그 흔한 성기사 1명도 없어서, 치료 마법은 애초에 사용하지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전투가 길어져서 피해가 누적된다면 검치 들의 특성상 죽는 사람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만큼 전력은 하락하는 셈이다.
페일은 깨달았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검치 님들이 죽겠군요!"
이리엔의 부족한 신성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는 무리였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누구든지 희생될 수 있다. 특히 방어력이 약한 검치 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한계가 있었다.
그야말로 전투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검치 들을 비롯해서 살아남는 아군의 숫자가 감소하는 것이다.
위드의 방식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해 두는것이다.
아군을 양성하고, 적들의 전력을 시험한다 이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시간도 모자랐다.
이제 막 3개의 달이 모두 떠오르려 하고 있다.
마녀재판.
화형식이 일어나기 전에 로세린을 구출하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기사들과 사제들러 이루어진 철벽의 방어벽을 단숨에 돌파해야만 한다.
'한 번의 숭부에 모든 것을 건다.'
위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꼇다.
'성기사 갑옷 세트. 저것을 포기해야만 피해를 주일 수 있어.'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전투를 벌여야만 이 전투의 최소로 할 수 있다.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을 통솔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나 지휘를 포기해 버린다면 전투는 승리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커지게 되리라.
이런 난전에서 진형을 추슬러서 싸우게 만드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욕심에 사로잡힌 검치 들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터였다.
위드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로세린,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제피 님이 구하러 갑니다!"
쿠르르릉!
포효 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위드의 사자후가 불러일으킨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지금까지 서로 협력하지 않고 제각각 로세린을 향해 전진하던 검치 들이 발끈했다.
"뭐야? 저 허여멀건 바람둥이가 우리의 로세린을 구한다고?"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차라리 사형들이 구하면 배라도 덜 아프지."
"잘생긴 놈들은 다 매장시켜야 돼!"
검치 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서로를 견제하며 맹목적으로 로세린을 향해 달려나가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성기사들과 맞붙어 싸웠다.
"회전 찌르기!"
"열십자 베기!"
"칠단 자르기!"
검치 들이 스킬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검은 직접 타격을 하는 병기.
검기를 발출하면 장거리 공격도 가능하지만 마나 소비가 커지고 데미지는 약해진다. 그러므로 검치 들은 직접 맞붙어서 근접 공격 위주로 싸웠다.
단순 명료하면서도 효과적인 스킬들의 구사.
마법 화살이 날아올 때는 땅바닥을 구르거나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회전하면서 검을 휘두르는 검치 들.
민첩함, 순발력, 판단력, 경험까지!
무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이 숱하게 나왔다.
뛰고, 눕고, 창수처럼 검을 앞세워 찌르고……. 공격과 방어가 굉장히 현란해진 것이다.
성기사들과 싸우는 와중에 마법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검치 들은 절박했다.
"절대 저놈에게만은 넘겨줄 수 없어!"
"아무리 불공평한 세상이라지만 제피 저놈만은 안 돼!"
일대일의 싸움은 명예를 걸고 하는 대결에서나 통한다.
전쟁에서는 승리한 자가 강한 법!
검치 들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3~4명이 한꺼번에 성기사들을 공격했다.
일부 성기사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고립시키고, 하나씩 사냥했다. 사제들의 끈질긴 치료와 저주가 있었지만 검치들은 성기사들을 조금씩 밀어붙일 수 있었다.
풍부한 전투 경험을 살려서 하나의 적에게 집단 공격을 한다. 사제들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사이에도 다른 성기사들이 성난 멧돼지처럼 달뛰었기에 많은 시간을 쓰지는 못했다.
전투의 와중에, 짧은 찰나의 순간!
1명의 성기사에게 빈틈이 보이면 사형제들의 검이 5개, 6개씩 동시에 타격했다.
위드는 눈물을 머금고 전장을 멀리 우회해서 사제들에게 접근했다. 성기사가 아닌 후방 부대라고 할 수 있는 이단 심판관과 사제 들을 공격할 작정이었다.
다다다다다닥!
허허벌판에서 숨어서 다가가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위드는 개의치 않고 벌판을 질주했다. 그런데 옆에서 제피도 질풍처럼 쫓아왔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였다. 위드가 달려가니 비슷한 속도로 따라오기 위해서 내달렸다.
그러다 어느새, 둘은 경쟁이라도 붙은 것처럼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남자의 자존심!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되었지만 체력을 모두 소모하더라도 절대로 뒤처질 수는 없다.
동일한 조건에서라면 당연히 위드가 조금 더 빠르겠지만, 현재는 무거운 갑옷을 입었다. 그렇기에 제피도 위드와 비슷한 속도로 뛸 수 있었다.
위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힘들어도, 숨이 벅차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제법이군."
"별거 아닙니다."
제피도 멀쩡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만 속도를 늦추지? 힘들 텐데……."
"형님이야말로 힘들지 않습니까? 저는 몸이 아주 가벼운 데요."
"후후, 바람이 좀 선선하군. 지금까진 내 힘의 1%만 발휘 하고 있었어."
"저야말로 제 힘의 0.2%만 쓰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의 유치한 자존심 경쟁은 끝이 없었다.
그때 위드가 손을 등 쪽으로 가져갔다.
사제들과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숨겨 두었던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하이 엘프 예리카의 활.
모든 궁수의 꿈.
위드는 시위에 화살을 재었다. 그리고 사제들을 향해 쏘았다.
슈슉!
물의 정령의 기운이 깃들었다. 그리하여 화살이 지나간 궤적으로 물방울들이 이어졌다.
이윽고 화살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푸와왁!
파도처럼 물길이 일어나 사제들을 휩쓸었다.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명품 활이 가진 위력!
위드의 궁술은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검술에 의존해서 했다. 멀리 있는 몬스터들에게 가볍게 화살을 몇번 날린 정도였지, 스킬의 숙련도도 낮아 잘 맞지도 않을 뿐더러 위력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예리카의 활을 스니 사제들에게 놀랄 정도로 큰 범위 데미지를 준 것이다.
'역시 무기가 좋아야 해.'
위드는 달리면서 예리카의 활을 이용하여 사제들을 향해 계속 화살을 쏘았다. 마나가 빠르게 줄어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비겁한 놈들아!"
"우린 신을 모시는 사제다."
"너희에게 천벌이 내려지리라!"
광신도들의 울부짖음!
위드와 제피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서 사제들에게 근접했다.
위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갑옷 세트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사제도 많은 이들이 택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제복은 갑옷 세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전투의 최일선에 서지 않는 사제들에게는 방어력이 그리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옷 세트!'

아이템에 맺힌 처절한 한!

"달빛 조각 검술!"

목표는 사제들!
위드는 사제들의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검을 휘둘렀다.
퀘스트를 통해서 레벨도 상당히 높아진 덕에, 사제들은 거의 두세 번의 칼질에 목숨을 잃었다.

'팔찌, 반지, 귀걸이, 마법이 걸린 스태프!'
위드는 돈이 되는 물건들만을 찾으며 사제들을 휩쓸었다.
제피도 낚싯대를 휘두르며 광역 공격을 하고, 수르카가 근접해서 주먹을 휘두른다. 어느새 페일과 메이런도 언덕위에 자리를 잡았다.

"트리플 샷!"
"치명적인 일격!"

둘이 화살을 쏘면서 지원하는 옆에서, 로뮤나는 마법을 외웠다.

"파이어 토네이도!"

거대한 불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직접적인 피해보다, 광대한 영역에서 이루어진 공격으로 사제들의 신성 마법에 장애를 주는 게 목적이었다.

화르르르!

"끄아아악!"

사제들이 비명을 질러 댄다.

불길 속에서도 위드는 집요하게 사제들을 노렸다.
사제들의 보호와 치료 마법이 사라지자 성기사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갔다.
그 틈을 타서 검둘치와 검삼치가 위드가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도와주마."
"역시 보급 부대부터 끊어 놓아야지."

전투의 흐름을 읽고, 성기사들이 밀집한 곳을 단신으로 돌파하여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들도 호락호락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거룩한 수행으로 승화시키며
불신자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리라. 』

성기사들.
불리해지자 이 광신도들이 단체로 축가를 불렀다. 그러면서 방어에 전념하던 이제까지와는 달리 방패를 내던졌다.

『 우리의 신실한 삶은 영원 속에 함께하며
죽음조차 영원하게 이어지리라
신을 위해 생명을 바쳐라. 』

노래가 지속될수록 성기사들은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로 오로지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벌이는 전투.
검치 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서 버텨야 했다.

"젠장!"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와서‥‥‥."

살아 있는 성기사들의 규모는 여전히 검치 들의 거의 2배!
검치 들은 성기사들이 둘러싸고 몰아붙이는 것을 막아내면서 빈틈만을 노려 반격했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 맹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성기사들 때문에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적들의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40여 분에 걸친 치열한 혈투!
그렇게 암흑 사제들이 먼저 정리되고, 그 후에는 성기사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검치 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커헉."
"오랜만에 정말 힘들었다."

체력이 모두 소진될 정도로 힘든 전투였다.
사냥이라고 하면 만만한 적들을 대상으로 하고, 중간에 휴식 시간도 갖는다. 하지만 성기사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퀘스트였기
때문에 쉴 틈도 없이 끝까지 버텼던 것이다.
검십삼치가 씩 웃었다.
"다행이지. 저 애들은 다치지 않았으니까."
검십구치도 동감이었다.
"우린 남자잖습니까. 저 애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들이 버텨 준 덕에 암흑 성기사와 사제 들로부터 후방에 있는 세에취나 유린이 무사했다.
사내들의 자존심.
곧 죽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여자들을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면에서 맞붙어 싸웠던 것이다.
그렇게 전투에 승리하고 난 후 살펴보니, 수련생들 34명이 줄어들었다. 격전 속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주로 경험이 적은 검사백치
이상의 하위 서열들이 혼전의 와중에 죽었다.
"커허험."
검치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검둘치나 검삼치를 비롯한 사범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실망이 크구나."
"‥‥‥."
"오늘 밤 전부 집합이다."
"예."
"죽은 놈들은 따로 이름 적어 놔."
"옛!"

목숨을 잃은 대가로 경험치와 레벨이 떨어지는 정도는 매우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지옥 수련!
당사자들은 최소한 1달간은 지옥문을 두들기게 될 것이다.

"휴우."
"허어어, 마음 놓고 죽지도 못하겠구나."
"앞으로는 수련생들까지 돌봐 가며 싸워야 하다니‥‥‥."

사범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었다.
검술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로열 로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현실보다 훨씬 뛰어난 오감과 스킬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검술의 극의에 오르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몬스터들의 행동이 평생을 검에 바친 이들의 눈에 찰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모험을 하는 중에 수련생들을 보살피고 다스리면서 지휘력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표과도 나타났다.
그렇게 전투가 마무리되고 나서 검치와 사범들, 수련생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로세린에게 다가갔다.
꿀꺽!
검치의 목울대에서 침이 넘어갔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고혹적인 자태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내, 내가 구해 주겠소."
"고마워요."

검치는 로세린을 묶은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맙다는 듯이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용사님 덕분에 제가 풀려날 수 있었어요."
"커헉!"

띠링!
『- 뱀파이어의 구출 완료
타론의 광신도에게 잡혀 있던 로세린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위대한 퀸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그녀는 이제 싱싱한 피를 마시면서 더욱 아름다워지리라.
퀘스트 보상 : 미노르에게 받으십시오. 』
로세린을 비롯한 뱀파이어 퀸들은 풀려날 때마다 고마움에 끌어안아 주고, 손에 입을 맞춰 주었다.

"위대한 인간의 영웅이시여, 미천한 저를 구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검치 들은 감동했다.

"오오오!"
"좋구나!"
"역시 뱀파이어의 세계로 오기를 잘했어!"

퀘스트를 완수하고 나서의 뜨거운 성취감!
사범들부터 수련생들까지, 차례대로 로세린과 포옹을 했다.
퀘스트를 완수하는 과정이 그러한지라 페일도 슬며시 눈치를 보면서 퀘스트를 완료했다.

"메이런 님,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서‥‥‥."
"알아욧!"

미노르에게서는 보상으로 저주받은 인형을 10개씩 얻었다.
석상화와 피의 저주를 걸 수 있으며, 신전에 바칠 경우에는 큰 명성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무멋보다 경험치가 상당한 편이라서 레벨이 낮은 검치 들은 2∼3개씩 레벨들이 올랐다.

"역시 보상이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어."

위드는 만족했다.
미녀 뱀파이어의 감사를 받은 검치 들 역시도 충분히 행복해했다.

"이런 퀘스트만 계속 있으면 좋을 텐데‥‥‥."
"여인을 구하고 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다니, 역시 기사도의 표본이야."

그렇게 시작된 뱀파이어 마을의 퀘스트!
난이도 B급과 C급의 퀘스트를 4개씩 해치웠다.
최초의 전투에서는 다소의 피해가 있었지만 그 후부터는 위드의 확실한 지휘 덕분에 피해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붉은 성벽 너머에 있는 야생 야크 떼를 물리칠 때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먹잇감들을 미리 파악하여 살포해 두었다.
그리고 야크들이 먹이를 먹고 있을 때 포위하여 각개격파!
19명의 검치 들이 사망했다.
혼돈의 마수들을 사냥할 때에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마수들은 흑마법을 이용할 줄 알고 육체적인 능력도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면에서 싸운다면 피해가 클 수 있다.
위드는 수련생들 중 상위 서열 100명만 전장에 투입하기로 했다.

"어떻게 싸우면 되냐? 놈들을 다 없애 버리면 되는 것이냐? 믿어만 준다면 목숨을 걸고 저놈들을 최소한 절반은 없에 버리겠다."

검십이치가 다부지게 말했다.
마수들에 비교하여 전력상으로는 훨씬 열세였지만, 어떤 적과 싸우더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수들과 싸우면서 최대한 오래 버텨 주시면 됩니다."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예! 놈들의 공격을 죽기 직전까지 맞아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아울러 맷집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요. 정말 어려울 겁니다. 저런 마수들에게 죽을 만큼 맞고 도망치기란요."
"그래? 재밌겠군. 어디 한번 해 보자."

위드도 상위 서열들과 함께 마수들에게 덤볐다. 그리고 마법과 물리 타격을 비롯하여 온갖 공격을 실컷 두들겨 맞았다.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직전, 다 함께 바람처럼 도주했다.

"붕대 감기!"

오랜만에 써먹는 붕대 감기 스킬.
위드는 부상자들에게 마차에 넉넉하게 실어 온 붕대를 감으며 체력을 회복시켰다.
그사이에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던 수련생들 100명이 검둘치와 함께 전장에 나섰다.

"사악한 마수들아!"
"우릴 죽여 봐라!"

흑마법의 저주와 물리적인 타격에 피해를 입으면 퇴각한다.
일종의 차륜전!
맷집을, 그것도 회복력을 이용하여 승부하는 방식이라니!
마수들도 시간이 지나면 체력과 생명력이 차오른다. 그러나 이놈들은 지능이 낮은 짐승류의 몬스터들이라서, 적이 있으면 무조건 덤벼들었다.
돌진, 돌진!
쉴 틈을 주지 않고, 싸움을 걸면서 더 빨리 퇴각한다.
교황 후보 알베론과 함께 많이 싸워 보았던 위드였기에 생각해 낼 수 있는 방식이었다.
100명씩 번갈아 가면서 마수들의 체력과 마법력을 소모시키고, 그리하여 마수들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일시에 몰아쳤다.
그 결과 불과 13명의 검치 들만이 죽고 승리!
그나마도 마수들의 틈에 끼어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은 이들이었다.
페일이 중얼거렸다.

"결국 이 퀘스트도 노가다잖아."

제피도 동감했다.

"내가 지치나 적이 지치나의 승부군요."
어떤 퀘스트든 노가다로 이끌어 내는 재능!
노가다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위드의 결론이 어느새부터 인가 정당화되었다.
그 덕에 페일이나 이리엔의 의식도 조금 바뀌었다. 남들이 스킬을 올리기 어렵다고 아우성을 칠 때에도 태연했다.

"천 발을 쏴서 변화가 없다면 만 발을 쏘면 되지."
"신성 축복 스킬의 숙련도가 올리기 어려워요? 매일 10시간씩만 수련을 하면‥‥‥."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죽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대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만은 없었다.
페일 일행은 뱀파이어의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시기라서 우선은 안전 위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수련생들의 입장에서는, 죽으면 그때부터 지옥문이 활짝 열린다.
수련생을 돌봐야 하는 사범들도 사정은 엇비슷했다. 느리게 진행이 되더라도 피해를 줄여서 퀘스트를 완수하는 게 우선이었던 것!
검치에게는 맛있는 음식과 화령의 애교로 시간을 끌었다.
위드만 속이 탈 뿐이었다.
일주일에 2배라는 보상은 흔한 게 아니다.
하나의 의뢰라도 더 수행하고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데, 동료들을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시간 낭비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66명이 죽었다. 갈수록 동료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퀘스트의 난이도는 높아지겠지. 최대한 많이 살려야 해. 이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까.'

뱀파이어의 땅에서 점점 고립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런식으로 순차적으로 죽어 간다면 나중에는 최후의 몇 사람밖에 남지 않으리라.
위드는 가장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들을 택하여, 몬스터들의 힘을 빼 놓으면서 사냥했다.
어떤 사냥터에서도 다수로 소수를 몰아치고, 마법사와 성직자 계열들부터 척살하곤 했다.
그럼으로 인해서 위드는 더욱 바빠졌다.
퀘스트 자체는 신중하게 진행하지만, 정작 도중에 쉬는 시간은 최대한 줄였다. 위드는 마판과 함께 음식까지 준비하여 든든한 보급까지
맡아야 했으니 쉴 사이가 없었다.
검치 들의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유린과 이리엔 등 여자들까지 도움을 주어야 했다. 설거지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료를 다듬고
불을 피워 밥도 했다.
음식 재료와 조미료를 넣고 끓이는 건 위드의 몫이었지만, 갈수록 그녀들이 맡는 일감도 늘어나야만 했다.
위드 혼자만 하면 하루에 거의 5시간 이상을 요리에만 써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요리를 돕는 덕분에 그녀들의 요리 스킬도 빠르게 늘었다.
화령이 바닥에 주저앉아 겉절이 김치를 담그며 미소 지었다.

"김치 참 맛있겠어요."

그러면 이리엔이 슬프게 중얼거린다.

"그래 봐야 중국산."
"‥‥‥."

재료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화령은 신 나고 즐거웠다. 이렇게 땅바닥에 앉아서 요리를 거드는 경험이 신선했으니까. 유린과 수르카도 비슷한 또래라서 요리를 하며 금방 어울렸다.
제피와 페일도 남자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장작을 만들어야 했고, 요리 재료들도 준비했다.
마수나 몬스터 들의 고기는 독이 있어서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페일은 화살로 새를 잡고, 제피는 강가로 가서 낚시를 하며
부지런히 음식 재료들을 보충했다.

"빨리요! 여기 생선 떨어졌어요."
"예예, 알겠습니다."

제피는 낚시에 있어서 결코 서두름이 없었다. 언제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시간을 보내 왔다.
하지만 위드를 따라나서기로 한 이후로는, 식량 조달을 위해 허겁지겁 낚아야만 했다.
하나의 낚싯대도 아니고 무려 10개나 되는 낚싯대를 관리 하면서 물고기를 잡으니, 망상에 빠질 틈도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잔챙이들, 희귀하지 않은 물고기들을 낚는데도 스킬 숙련도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고급에 이르고 난 이후부터 정체 상태에 있던 낚시 스킬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었는지도.'

낚싯줄을 금세 끊어 버리는 힘 좋은 물고기들이 아니었다.
낚시 기록에 남을 만한 물고기들도 아니다. 그런데 단지 빠르게, 많이 잡는다는 이유만으로 스킬의 숙련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역시 낚시 스킬도 물량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낚시란 여유로운 취미로 시작된 건 아닐 거야. 생존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야 했던 거지. 그 절박한 마음이라‥‥‥.'

매사 느긋하던 제피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물고기를 잡으면서 저절로 스킬들이 연마되었다.
낚시꾼으로서 몬스터를 사냥할 때의 공격력은 중간을 조금 넘는다. 생명력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게다가 생존 능력이 늘어서 잘 죽지 않는다.
아무리 맞아도,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 끈질김이야말로 낚시꾼이 가진 최대의 장점!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살아남았다.
물론 겉모습에 굉장히 집착하는 제피로서는 절대 그런 상황까지 가게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게 매일이 살벌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퀘스트를 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
바스라 마굴에서 쉬지 않는 사냥을 할 때에는 그게 끝인 줄 알았다. 더 이상의 단계란 없는 줄 착각했다.
하지만 음식을 마련하는 데에까지 참여함으로써, 모두의 일감은 더욱 늘어났다. 한 단계씩 성숙해지는 것처럼,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일거리가 증가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모험이라는 게 고되었지만, 모르던 지역을 탐험하고 도전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으로도 바꾸지 못한다.
강한 중독성으로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제피가 왠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처음에 먹었던 음식은 먹을 만했는데."

마판이 음식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예?"
"왠지 점점 군대 밥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요."
"‥‥‥."

지금 먹는 음식들은 새고기, 어죽, 고기, 이것저것 가리지않고 섞였다.
그래도 초기에는 갂므 과일도 맛볼 수 있었고, 향신료의 냄새도 좋았다. 하지만 점점 음식의 질이 떨어지더니, 어제는 맛보다는
배가 고파서 먹게 될 정도였다.
몸이 고된 데다 매우 조금씩 이루어진 변화라서 눈치 채는 것이 늦었을 뿐!
그럼에도 식비로 내는 돈은 그대로였다.
마판이 급히 위드를 보았다.

"저기, 위드 님!"

하지만 위드는 서둘러서 일어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바쁜 일이 생각나서, 그럼!"
"‥‥‥."
세상의 어디에나 있다는 급식 비리!
어느 단체 배급 식당이든 초창기에는 밥을 잘 준다. 그러나 점점 음식의 질이 덜어지기 시작하고, 중후반으로 가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하는 법이다.
이렇게 불만들이 과하게 누적된다 싶으면 위드는 적당한 시기를 봐서 특별식을 만들었다.
평소보다는 훨씬 나은 식사를 요리해 주고 크게 생색을 내는 것이다.
음식도 맛있는 것들만 먹으면 질리고 만다.
못 먹다가 제대로 먹어 주는 한 끼가 더욱 배가 부른 법!
위드가 넌저시 내뱉은 말처럼 무서운 게 없었다.

"배가 불렀으면 그만 드세요!"

밥숟가락 놓아도 된다는 살벌한 위협!
불만의 목소리들이 쏙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에 일행도 느꼈다.
하루가 다르게 경험치와 스킬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늘어난다. 레벨 100 이하였을 때처럼 엄청난 속도였다.
물론 검치 들의 뛰어난 공격력과, 2배라는 보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전투와 휴식이 전혀 어긋나지 않도록 계획을 짜고 숨 가쁘게 움직이는 위드 덕분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적을 찾아서, 효율적인 방식으로, 우세한 전력을 이용해 철저한 승리를 이끌어 낸다.
끊임없는 긴장감과 도전에, 한눈팔 시간도 없다.
위드를 따라다니면서 얻는 경험치 증가 속도나 사냥 패턴을 한번 겪고 나서 다른 사냥 파티에 속하면 지루함을 느낄정도다.
남들보다 스킬들도 높은 페일 일행이 쉽사리 다른 파티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이런 까닭도 있었다.
위드와 함께 몰아치듯이 사냥을 하다가 다른 파티에 속하면 너무나도 지루했던 것이다.
아직 레벨이 낮은 검치와 수련생들은 경험치를 모아들이는 속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다.
그렇게 퀘스트를 성공시킬 때마다 주변의 평가도 달라졌다.

"역시 얍삽해."
"비열한 방법도 서슴지 않는군."
"저 잔머리는‥‥‥."

위드의 지휘력이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는 마을 세이룬에 있는 중요 퀘스트들을 대충 마쳤다.
민첩을 45 늘려 주는 올데린의 다리 보호대, 마나의 최대치를 늘려 주고 회복에도 도움이 되는 블레인의 서클릿을 얻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소득이라면, 혼돈의 마수 퀘스트를 완료하고 무기와 방어구 들을 강화해 주는 제련석들을 다수 획득한 것이었다.
위드의 레벨도 2개씩이나 올랐고, 다른 이들은 최소 5개에서 10개씩은 올렸다.
이제 퀘스트의 보상이 2배나 되는 기간도 끝났다.
검치 들의 숫자는 최종적으로 92명이 줄어들었다. 로뮤나와 수르카도 죽을 고비를 두 번씩이나 넘겼지만 간신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토둠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들을 습득했다.

"토둠에는 웬만하면 가지 말게. 그곳으로 떠난 뱀파이어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 이유?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
"토둠에 어린 망자의 한에 대하여 들어 보았나? 우리 밤의 귀족들이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지도 몰라."
"우리 고귀한 밤의 귀족들을 구해 줄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일지도 모르지. 왜 하필 인간이냐고? 뱀파이어들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지."

5. 이현의 첫 수업
이현은 버스에 올라탔다.
'휴우! 드디어 대학교에 가게 되는군.'
남들은 대학교에 입한한다고 하면 가슴이 설레리라.
대학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 MT, 학회일들.
다양한 지식과 교양,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멋진 기회다.
그러나 이현의 입장에서는 다 헛소리였다.
막막함. 어두움. 절망!
한창 로열 로드에서 수입을 올려야 할 시점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 것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현의 귓가에, 여대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월요일 전공으로 무슨 과목 수강 신청했어?"
"난 재생 의학 상급 과정. 관절 치료에 대해서 더 배워 보고 싶어서."
"그래? 잘됐다. 나도 듣기로 했는데. 한민수 교수님은 참 강의 잘하시는 분이니까. 소윤이 넌?"
"난 분자생물학."
"휴우! 힘든 과목이네. 만날 리포트에 시험으로 유명할텐데."
재기발랄한 여대생 3명의 대화.
한국 대학교로 가는 버스이다 보니 여대상들이 타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의대생인가 봐.'
'귀여운 여자 애들이…….'
'공부도 잘하는구나.'
버스에 탄 탑승객들은 여대생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마음껏 보냈다.
하지만 이현은 정반대였다.
'불쌍하군.'
6년의 대학 생활!
의대는 다른 전공보다 학비도 훨씬 비싸다. 웬만한 집안은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위하여 교육부가 은행들과 손을 잡고 준비한 제도.
학자금 대출.
무려 6년이라는 기간 동안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대학을 나오고 나면 그 후로는 빚더미 신세!
"쯧쯔."
이현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런데 그 광경이 여대생들에게는 달리 보인 모양이었다.
"소윤아, 또 너 보고 침을 흘리는 남자가 있어!"
"정말 그놈의 인기는 버스에서도 끊이지 않는구나."
"가서 뭐라고 말 좀 해 줘."
두 여학생들이 소윤이라는 여자 애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소윤이 이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남자 친구는 없지만 당분간 학업에만 전념할 계획이거든요."
조심스럽게,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애써 달래는 듯한 어투였다.
이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하는 대신에 고개를 숙였다.
'괜한 내 행동에 오해를 한 모양이군. 내 주제에 여자는 무슨 여자. 여대생들은 커피도 비싼 것만 마신다던데……."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여성에 대한 편견!
구태여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숙여 버린 것이다.
버스 안에서 잠을 자면 수면 부족과 체력 회복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 광경을 보며 소윤은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쩜 좋지. 충격이 너무 큰가?'
버스가 한국 대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이현은 고개를 수깅고 있었다.
"드르렁. 쿠우울."
여학생들에게는 너무나 괴로워서 억지로 잠을 청하는 듯한 모습으로만 비쳤다.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진 않은데 우리가 잘못한 건가.'
'소윤이가 너무 심했어.'
'물어봤으면 연락처 정도는 가르쳐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오해를 만들어 내며 학교에 도착한 이현은 어렵게 강의실로 찾아갔다.
대학교 강의실은 크고 웅장했으며, 각종 첨단 설비에 음향기기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현은 억울했다.
'내 등록금을 받아서 이런 곳에 처발랐구나!'
이미 납부한 학비 때문에 대학 당국에 갖는 끝없는 악감정!
돈이 아까워서 이런 식으로라도 울분을 해소해야만 했다.
'혜연이도 지금쯤 수업을 듣고 있겠지.'
이혜연과는 전공이 달라서, 월요일에는 함께 듣는 수업이 없다. 금요일에 교양 과목 하나 정도만 같을 뿐이었다.
'어쨌든 수업이나 들어야지.'
강의실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입학을 하기 전에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도 여러 차례 열어주었다. 다른 동기 학생들은 그런 자리들을 통해 안면을 익히고 친분도 나누었지만, 이현은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 회비 2만 원!
이 세상에 공짜는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입학을 하고 나서 일주일가니안 대학교를 빼먹었다. 보통 새학기 초기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편이라서 일부러 강의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즉, 이현이 강의실에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누구지? 모르는 얼굴인데."
"복학한 선배인가?"
"예비역인 것 같은데, 몇 학번이야?"
전공 수업을 듣는 시간이었기에 같은 과 학생들이 이현을 보며 소곤거렸다.
이현은 꿋꿋하게 무시하며 지정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오래된 구형 노트북.
인터넷 장터에서 저렴하게 장만한 물건이었다. 무겁고 투박하지만 성능은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
짐에서 쓰는 컴퓨터의 경우에는 여기저기서 부품들을 모아서 조립한 것이기에, 오히려 그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현은 낭패스러운 얼굴을 했다.
'교재가 없구나.'
실존하는 가상현실에 대한 강의 시간.
어떤 교재를 구입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현이 난처하게 앉아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여자 애 하나가 슬그머니 책을 가운데로 밀어 주었다.
"저랑 같이 보세요."
"고맙습니다."
"뭘요. 선배님이신데요."
"……."
이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선배 아닌데요."
그러자 여학생이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선배님, 장난하지 마세요."
새내기 여학생들에게는 유독 많은 남자 선배들이 관심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농담으로만 받아들였다.
'정말 선배 아닌데……."
어느새 빚어진 오해.
박순조나 최상준처럼 입학 설명회에서 만났던 아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이 과목을 듣지 않는지 강의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현은 체념해 버렸다.
이런 오해들은 저절로 풀릴 때까지 내버려 두는 편이 제일 좋은 법.
곧이어 교수가 들어오고 강의가 진행되면서부터는, 수업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교수가 말하는 주제는 이현에게도 관심이 많은 분야였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여러 분야에,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장점을 가지고 개발되었습니다. 생존률이 높지 않은 위험한 임무에 투입해야 하는 특수부대들의 경우, 그곳과 동일한 지형의 가상현실에서 미리 전투를 경험합니다. 이는 생존률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으며…….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가상현실은 아니었습니다."
이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면에서 부족했지. 전툴르 위하여 개발된 것이기에 아무래도 교육과 훈련용으로 만들어졌지. 실제 그 안에서 생활을 하고, 또 다른 현실을 만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어.'
교수가 말했다.
"초기에는 미흡히던 가상현실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높여 줄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가능성을 키워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업들이 가상현실을 만드는 연구를 개시했습니다. 기업들이 노리는 목적은 간단했습니다."
'결국 돈이었지.'
이현의 지론은 변하지 않았다.
돈이야말로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는 것!
"기업들은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면 그만큼 재화의 소비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측한 것입니다. 그리고 경쟁적으로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맟미내 유니콘사에서 지상으로 존재했던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게임, 인류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로열 로드를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교수는 가상현실의 역사를 비롯한 쉬운 부분부터 강의를 진행했다.
이현은 슬슬 지루함을 느꼈다. 한때 로열 로드를 연구하면서부터 수없이 많은 논문드을 봐 왔다. 그 덕에 너무나도 기초적인 교수의 이야기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으하암!"
이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해 버리고 말았다. 버스를 타면서부터 많이 피곤했는데, 의자에 앉아서 강의를 듣고 있으니 잠이 쏟아졌던 탓이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들이 질책을 담고 쏟아졌다.
'지금까지 수업에도 들어오지 않더니 첫 수업부터……. 공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어.'
'저게 학생이야, 아니면 백수야? 어떻게 저런 놈이 우리 학과에 들어올 수 있었지?'
'예비역 같은데……. 이 과목 F를 받아서 재수강하는 거겠지. 더 열심히 배울 생각은 못 하고. 쯧쯧쯧.'
이 과목을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신입생들이었기에, 대놓고 욕은 못 해도 상당히 불쾌한 얼굴들이었다.
이현은 얼른 손을 제자리에 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척하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옆의 여학생과 함께 보던 교재가 조금 멀어졌다.
미묘하게 딱 3센티 정도만!
그만큼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가상현실의 유래와 발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럼 여러분이 좋아하는 로열 로드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네!"
"교수님, 말씀해주세요."
로열로드의 인기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가상현실 학과의 학생들 중에는 로열 로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가상현실을 즐기는 것도 우리에게는 좋은 공부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술 계열의 스킬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교수가 질문한 내용은 다소 뜬금없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학생들은 이내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로열 로드에서 예술 계열 스킬들은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음유시인인 바드가 부르는 노래는 낭만과 함께 모험을 전한다. 동일한 퀘스트를 수행했다고 하더라도 바드나 악기 연주가들이 참여했다면 그 소문이 더 멀리까지 퍼지게 되고, 그만큼의 명성을 더 얻는다.
특별한 퀘스트들은 바드들이 노래로 만들어서 부를 수도 있는데, 이럴 때면 추가적인 명성의 보너스를 더 받는다.
그 덕에 험하고 힘든 퀘스트일수록 바드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대단히 솜씨 좋은 화가.
베라너가 그린 그림들은 대륙의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매한다고 한다.
모험가의 초성화는 명성과 고귀함이라는 인망을 늘려 준다. 그래서 마을마다 자신이 그려진 초상화가 걸려 있다면, 보통 때에는 받지 못할 특수한 의뢰도 얻는 게 가능하다.
친밀도를 극도로 높여야만 믿고 맡길 수 있는 의뢰. 혹은 현재의 수준으로는 받아 내지 못할 의뢰.
이런 의뢰들을 얻을 수 있으니 화가들의 가치는 다시금 평가받았다.
그림으로 모험가를 알려 주는 직업이라고.
"예술은 간단히 말해서, 앞마당에 오크들이 득시글한데 그림이나 그리고 있어서 어쩌겠냐는 선입견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로열 로드에서 예술은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굉장히 힘든 길이지만,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장인보다도 훨씬 더 존중받게 되었습니다."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수긍하고 있었다.
"베르사 대륙을 여행하는 예술가라니, 정말 멋진 일이야."
"미지와 혼돈으로 가득한 땅에서 예술을 펼치는 위대한 영혼들!"
몇몇 학생들은 환상까지 품은 것 같았다.
솔직히 웬만해선 거의 죽지 않는 워리어나 성기사를 택하더라도 몬스터들의 위협에서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전투력도 약하면서 베르사 대륙을 모험하며 불꽃처럼 영혼을 불태운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직업이었다.
"나도 요즘은 예술가의 직업을 택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
"예술을 펼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다니, 얼마나 매력적일까."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현은 욕을 해 주고 싶었다.
"다들 착각 속에 빠져서 살고 있군."
예술가들의 도시 로디움에 가 본다면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리라!
기껏 만들어 낸 작품이 세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을 때의 아픔과 고통, 굶주림!
이현도 애써 조각품들을 깎아 사람들에게 겨우 몇 쿠퍼에 팔아 치워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조각품을 의미 없는 장식품으로 여기고, 최대한 갑을 후려치려는 사람들과 말다툼도 벌여야 했다.
그런시련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하고 에술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물론 이현의 경우, 커플들에게는 갖은 아부를 다했다. 조각품의 가격을 한 푼이라도 올려 받았고, 어리버리한 사람들에게는 전문적으로 가격을 후려쳤다.
주머니 속에 있는 잔돈까지 몽땅 털어 가는 악덕 조각사!
잠시의 웅성거림 후에 교수의 말은 계속되었다.
"예술가들은 고생 끝에 만들어 낸 작품들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면 명성이 오르거나 스킬 경험치를 받습니다. 걸작, 명작,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 정말 대성공인 셈이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 가치를 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김현준입니다, 교수님. 관련 스킬의 숙련도가 결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검술이나 궁술처럼 대부분의 공격 기술들의 데미지는 스킬 레벨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킬 레벨이 전부가 아니야.'
조각술이 초급이었을 때에도 잘 만든 조각품은 걸작이 나왔다. 하지만 중급을 오른 이후에도. 공을 들이지 않은 조각품들은 예술적 가치가 형편없었다.
만약에 조각술이 고급에 올랐다고 해서 대작들을 펑펑 찍어 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 스킬 레벨이나 사용 도구의 성능이 어느 정도 작품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절대적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다른 학생도 의견이 있다면 말해 보세요."
"박수민입니다. 세밀한 묘사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요, 교수님?"
이번엔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 애가 대답을 했다.
이현과는 옆으로 두 칸 떨어진 자리였다.
'이것도 정답은 아니지.'
만약 그랬더라면 크기만 키운 빙룡 조각상이 명작이 되진 못했어야 한다.
세밀한 묘사.
장점도 있지만 분명히 한계도 있다.
예술은 결코 기술이 될 수 없다. 작은 부분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하려고만 한다면, 그 조각품은 결코 작품이라고 불릴 수 없다.
이현이 알고 있는 로열 로드의 시스템은 그렇게 엉터리가 아니었다.
'무턱대고 크기만 키워도 안 돼. 크기가 커도 공을 들이지 않았다면 소용이 없어.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물건이 되어 버리지.'
몇 명의 학생들이 더 대답을 했지만, 교수는 매번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묻기만 했다.
마침내 더 이상 의견들이 나차나지 않을 때에야 교수가 말했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로열 로드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제한 채로, 현실에서 예술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교수가 말을 이었다.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꿈꾸며 삽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평생 예술과 벗 삼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예술이 의미가 없진 않을 겁니다."
예술에 꿈과 인생을 거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의 호응이 없어도 그 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은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들이 만든 예술품들은 높은 가격이 책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보고 있는 사람이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반면에 정말 예술을 사랑했지만 그 길을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김 작품은, 본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예술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엄마를 처음 그린 그림. 선사시대에 가족들이 무사히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원하며 동굴에 그린 벽화. 마음이 담겨 있기에 그 가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이란 그 형상적인 아름다움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그려 내고, 조각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하지만 로열 로드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로열 로드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작품들은 예술적 가치가 평가되어 걸작, 명작, 대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공정한 방법을 완성하기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컨대 실수 하나 없는 공정한 방법을 완성하기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컨대 실수 하나 없는 완벽한 표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예술을 기계적인 영역으로 전락시키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 로드에서 수없이 많은 조각품들을 깎았지만, 실수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걸작이 나오진 않았다. 비교적 잘 만들었다고 조금 더 가치는 인정받았어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우리의 세계에는 많은 거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솜씨를 기반으로 평가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특정적인 방법이나 표현법 들을 로열 로드의 시스템에 등록해 놓고 이를 바탕으로 평가한다면?"
학생들은 꽤나 공정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존재하는 모든 표현 방식들이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줄 테니까. 하지만 교수는 이내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다.
"그랬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에 인정받았던 표현법, 작품 들을 비슷하게만 만들어 내는 데에만 치중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했던 것을 비슷하게 만드는 건 에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을 넘을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거장들의 위대함을 엿볼 수는 있겠지만, 거장들의 실력에 벽을 느끼고 좌절해 버리겠죠."
학생들은 침묵했다.
교수의 말을 듣고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작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해야 가장 공정한 방법이 될 수 있는지. 사실은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극찬한 작품? 대중과 괴리되어 소수의 사람들이 작품을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주류에 인정받지 못한 예술 작품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로열 로드의 시스템 구성은 완벽한 보안에 따라 운용되고 있습니다. 예술을 평가하는 부분도 1급 기밀에 속해서, 공개된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교수님도 모르세요?"
학생들의 질문에 교수는 무안함에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가 평가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스킬의 숙련도나 작품의 특징 들이 영향을 주겠지만, 아마도 그 변수들은 수백 가지가 넘을 것입니다. 어쩌면 수천 가지가 넘을 수도 있겠죠?"
"그렇게 많은 변수라니……. 일일이 맞춰서 점수를 얻기가 힘들잖아요."
조금 전에 은근히 예술가를 꿈꾸었던 학생들이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몇 가지의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점수를 얻기가 훨씬 쉬울 텐데, 알려지지도 않은 변수들이 셀 수도 없다니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예술을 어렵게만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수백 가지의 변수들에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걸 만드는 게 훨씬 좋습니다. 바로 로열 로드가 가상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
"로열 로드는 단순한 게임은 아닙니다. 게임일 뿐이라면 스킬만 있으면 되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로열 로드는 또 하나의 세상을 주제로 완성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가치를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가상현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그럼으로써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룰 수 없는 꿈과 도전을 펼칠 수 있는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즐길 지는 본인이 결정해야 합니다."
교수는 로열 로드에서 독측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진 직업은 조경사.
꽃이나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는 직업이었다.
이 특이한 직업은, 초반에 수행했던 퀘스트 때문에 얻게 되었다.
어떤 고마 아이가 쪼그려 앉아 시들어 가는 꽃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교수를 보고 이 꽃이 죽지 않게 잘 키워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퀘스트의 발생!
교수는 물과 거름을 주면서 꽃이 훌륭하게 자라게 만들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경사가 되었는데, 이는 좋은 화초들, 나무들을 기르면서 먹고사는 직업이었다.
때론 일거리를 얻어 정원을 가꾸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많지 않았다. 당연히 남들보다 가난하고, 자랑으로 내세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꽃들은 별과 나비 들을 불러오고, 풍성한 향기를 뿜어낸다.
만개한 꽃들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
생기를 가득 머금고 피어난 화초들은 큰 감동을 주었다.
로열 로드에서 색다른 재미, 자신의 길을 찾은 셈이었다.
교수가 힘주어 말했다.
"사람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 앞으로 여러분이 배울 수업은 현실과 가상현실의 조화에 대한 것이 될 겁니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우수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아, 배고파."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늦으면 줄 서야 될지도 모르니까. 넌 밥 먹고 뭐 할 거야?"
"도서관이나 갈까?"
"난 동아리 활동하러 가야 되는데."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무처깅나 바쁜 편이었다. 이현을 놔두고 금세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면서 같은 학과임이 분명한 이현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어느새 무능한 복학생으로 낙인찍힌 탓이다. 입고 있는 옷도 유행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졌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이이다 보니 아예 무시를 하고 있었다.
'나도 점심이나 먹어야지.'
이현은 혼자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가 도시락을 들고 간 곳을 캠퍼스 내의 잔디 광장!
학교 식당에 가는 대신에 많은 사람들이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 중이었다.
피크닉이라도 온 것처럼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움식을 먹고, 일부는 잔디밭에 누워서 잠을 청한다.
대학생다운 낭만과 정취!
밝게 웃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이현도 도시락을 꺼내서 먹었다.
우걱우걱.
열무김치와 흰 쌀밥!
간단한 식사지만 맛은 좋았다.
'역시 김치는 직접 담가 먹어야 제 맛이 나지.'
요즘 시대에는 마트에서 김치를 사 먹는 게 보편화되었다.
'그래도 음식은 재료와 정성이야.'
이현은 가격이 비싸다는 점 때문에라도 직접 김치를 담가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주변의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봄이 다가오고 있다.
'졸리군.'
이현은 도시락을 먹고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다음 강의는 2시간 후!
도서관을 간다고 해도 딱히 볼만한 책이 없다.
'당분간은 인터넷을 할 필요도 없고.'
지금은 뱀파이어의 세상에서 모험을 하고 있으니, 아이템들의 시세는 나중에 확인해도 된다.
'그럼 부족함 잠이나 좀 청해 볼까?'
이현은 잔디밭에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화창한 날이라서 낮잠을 자기에는 그만인 날씨였다.
눈을 감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때, 학교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나온 가상현실 학과의 학생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아까 그 선배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여기서 밥을 먹었나 봐."
"그러네. 근데 자나 봐."
"먹고 자고……."
"어휴, 창피해!"
학생들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이현이 있는 잔디밭을 빠르게 지나쳤다.
게으름과 나태함의 표본.
이현은 그렇게 같은 학과 학생들로부터 기피 대상이 되었다.
오후의 강의는 가상현실과 기술에 대한 시간이었다. 강의실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최상준과 민소라, 이유정이 이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
"안녕."
이현이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를 했을 때, 그들은 잔뜩 얼어붙은 얼굴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
"여기 앉으실래요?"
"너희는?"
"우린 뒷자리로 갈게요."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뒤쪽으로 갈게."
"아니에요. 저희가 갈게요."
일부러 맡아 놓은 앞쪽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이현의 나이는 그들보다 두 사링나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무도 학과 학생들의 인사를 받은 것이 큰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반말을 하며 대했는데, 서먹해져서 얼굴을 똑바로 보기조차 힘들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현은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자리에 앉았다.
강의 시간이 다가오면서 학생들이 계속 들어왔지만, 누구도 이현의 옆에는 앉지 않았다. 제일 앞자리라서 부담스럽기도 했거니와, 다들 은근히 이현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띠리리리리.
강의 시간이 4분 정도 남은 시간. 이현의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대학교에 오면서 여동생과 연락을 하기 위해 중고로 구입한 구형 휴대폰이었다. 흔한 입체 영상 통화도 되지 않고, 단종된 지 오래인 고물 휴대폰.
휴대폰을 받으니 신혜민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이현 님.
KMC미디어의 기획 회의.
다들 로열 로드와 관련된 방송 아이템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유행이 빠르게 변해 가고, 아무리 신선한 소재도 일주일만 지나면 식상해져 버리기 때문에 기획 회의는 치열했다.
"지난번에 시켰던 장비류 분석 어떻게 됐어!"
"내일 오전 중으로 끝납니다."
"늦어! 야근을 해서라도 오늘 중으로 끝내. 끝내기 전까지는 퇴근할 생각도 하지 마!"
"커헉!"
강한섭 부장은 직원들을 독려했다.
방송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만 매일이 바쁘다. KMC미디어처럼 성장하는 방송사라면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모자랐다.
"요즘 초보자들이 대폭 늘고 있으니까 초보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늘리는 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아. 대부분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라고?"
"예. 어르신 세대입니다."
"방송 내용을 쉽게 풀어서 해 드려. 모험에 비중을 두면 괜찮을 것 같아. 방송 시간대는… 저녁 10시로 맞추자."
"지상파 드라마와 겹치는 시간인데요."
"그래야 가족들이 모여서 편하게 볼 수 있지."
로열 로드를 즐기는 장년층은 제법 무시 못 할 숫자였다. 그런데 그 장년층의 비율이 매달 꾸준히 늘어 가고 있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느리지만, 일단 참여한다면 막강한 구매력을 자랑하는 세대다.
"초보 때부터 잡아야 돼. 초보 시절부터 우리 방송을 본 살마들이 나중에 충성도 높은 시청자가 되는 거야."
"넷!"
"프로그램에 붙을 광고도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쪽으로 알아보고."
"시청률과 기획만 좋다면 광고를 받는 거야 일도 아닐 겁니다."
날로 늘어나는 KMC미디어의 시청률. 더불어 로열 로드의 인기로,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료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게임 채널들도 탄생하면서 경쟁은 치열해졌다. 아예 로열 로드만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게임 채널들도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부장님, 이번 달의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해야 할 텐데요."
연출자 1명이 슬그머니 물었다.
일에 치여서 사는 요즘 같아서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방송이 며칠 남지 않았다.
베르사 대륙 이야기와 같은 정규 방송들과는 달리 1달에 한차례씩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하는데, 그 날짜가 닷새 앞이었다.
"전설의 망치 길드와 은빛 날개 길드의 앙숙 관계는 어때?"
"벌써 두 번이나 우려먹었습니다."
"북부로 떠나는 모험가들의 이야기는?"
"지난달에도 써먹지 않았습니까?"
"그럼 뭐 신선한 거 없어?"
강 부장이나 연출자들이나 골치가 아파 왔다.
로열 로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끊이지 않는다. KMC미디어에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생명으로 시청률을 꾸준히 이어 나가고 있었다.
새로 발견되는 휴양지들.
퀘스트들.
세력들 간의 전쟁!
꿈틀대는 베르사 대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특집 프로그램은 방송국의 얼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웬만한 것으로는 모자랐다.
강 부장과 연출자들은 머리를 끙끙 싸매고 아이템 회의에 들어갔다.
"어떤 방송을 해야 어울릴까."
"어쨌든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북부 쪽을 방송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북부도 괜찮지. 그래도 연속해서 방송하긴 곤란해. 그리고 정규 프로그램에서도 북부에 대해서 많이 알리고 있잖아."
"그것도 그렇습니다."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고,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런데 문득, 강 부장의 눈에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 보였다.
"신혜민 씨는 왜 안 보여?"
"모르셨습니까? 로열 로드에서 모험을 떠나느라 당분간 회의에는 참석 못 한다고 했는데요."
"그랬어?"
"팔자도 좋다."
강 부장이나 연출자들은 워낙 바빴기에 신혜민의 근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회의가 한참 길어지면서 신혜민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방송을 2시간 앞두고 도착한 그녀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강 부장이 자나가는 말로 물었다.
"신혜민 씨,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빠?"
"죄송해요. 퀘스트 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없어요. 조금만 봐주세요."
"무슨 퀘스트인데?"
강 부장은 기대도 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위드 님과 같이하는 퀘스트예요."
"위드?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무슨 위드인데."
"아시잖아요."
"내가 알긴 누굴 알아."
"모를 리가 없는데. 어떻게 위드 님을 모를 수 있죠?"
"위드라는 이름의 유저가 어디 하나 둘인가. 혹시 전신위드?"
"네."
강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신 위드와 퀘스트를 한다고?"
위드.
잡초라는 뜻의 흔하디흔한 이름.
로열 로드에서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다.
방송사에는 은인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흉악한 오크 카리취.
불사의 군단과의 전투에서는 시청률의 돌풍을 일으켰다.
다크 엘프와 오크 들을 이끌고 리치 샤이어와 벌였던 긴박감 넘치는 전투!
틀에 박힌 공성전이 아니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투였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난 이후로, 방송사에서는 모처럼 마음 편히 회식을 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북부 원정대가 벌인 본 드래곤과의 교전에서도 느닷없이 나타나서 환상적인 전투 동작을 보여 주었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전투 방식.
전신 위드라는 말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었다.
"그런 위드와 퀘스트를 하고 있다니……."
"정확히 말하면 모험을 떠난 거예요. 그런데 그 모험에서 여러 퀘스트를 받았어요."
"어떤 모험인데?"
"뱀파이어 왕국 토둠으로 떠난 모험인데요……."
강 부장이나 연출자들은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뱀파이어 왕국이 어디야? 베르사 대륙이 그런 곳도 있었어? 북부에 새로 발견된 곳인가?"
"아니에요. 실은 토리도라는 뱀파이어 로드를 성장시켜서……."
신혜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강 부장과 연출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오로지 한 번만 개방되는 뱀파이어 왕국 토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미지의 세상으로 떠난 원정대.
그들의 모험!
시청률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강 부장이 소리쳤다.
"특집 프로그램이다! 아니, 특집 프로그램은 취소! 한 편 짜리가 아니라 최소한 1달 치는 되겠어. 정규 방송으로 편성하면 어떨까? 일단 전화해! 바로 위드에게 전화해서, 방송하자고 설득부터 해!"
이현은 강의실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네, 실은 방송 일 때문에 전화를 드렸는데요.
"방송요? 무슨 용건인데요? 혹시 KMC미디어에서 제 모험에 대해서 방송하겠다는 건가요?"
이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였다.
번잡하던 강의실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
학생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이현을 봤다.
가상현실 학과의 학생들.
졸업 후에 다양한 분야에 취직하게 될 테지만, 현재 로열 로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상현실을 배우게 된 계기들도 대부분은 로열 로드 때문이었다.
그런 로열 로드에 대한 소식들을 알려 주고 보여 주는 KMC미디어!
'우리가 뭘 잘못 들은 거겠지?'
'에이, 설마.'
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현의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네, 맞아요.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 대한 방송이에요. 그런데 허락하시는 건가요?
"혜민 씨도 동료의 한 사람인데 제 허락이 필요합니까?"
-네. 모험을 주도하고 그곳으로 이끌어 주는 건 위드 님이잖아요. 저도 참여한 사람으로서 모험의 영
상을 갈무리할 수는 있지만, 도의적으로 위드 님의 허락이 없다면 방송은 이루어지지 않겠죠. 다른 분들에게도 일일이 다 허락을 거고, 출연료에 대한 부분도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학생들은 화들짝 놀랐다.
'혜민 씨? 설마 신혜민?'
'저 예비역이 신혜민과 통화하는 거야?'
'그 유명 진행자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 베르사 대륙 이야기 진행자인 신혜민의 이름이 이현의 대화에서 나왔다.
학생들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럼 세부적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를 하죠."
-네. 지금 방송국에서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난리랍니다. 실은 저도 깜빡 잊고 있었어요. 위드
님과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 간 게 너무 정신이 없어서, 방송 일정도 잡아야 될 것 같아요. 방송은 어느 정도 모험이 이루어졌을 때부터 이틀 간격으로 한 번씩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요.
"알겠습니다."
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학생들은 머뭇거리다가 급히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하려고 했다.
이현의 비어 있는 양쪽 옆 자리에 앉으려는 경쟁!
띠리리리.
그때 또 이현의 휴대폰에 울렸다.
학생들의 몸은 다시금 경직되었다.
'신혜민이 또 전화를 했을까?'
'설마…….'
'혹시 나한테 바꿔 주기라도 한다면…….'
은근히 초조한 기다림!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그런데 이현이 들어 올린 휴대폰에서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심해서 전화해 봤어요. 지금 뭐 하고 계세요?
악기처럼 영롱하고 고운 목소리.
정효린이었다.
"아, 정효린 씨였군요. 저는 지금 강의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례가 된 건 아니죠?
"예. 뭐 아직 교수님도 안 들어오셨으니까요."
-그럼 잠깐만 놀아 주세요.
"뭐 그러죠. 참, 신곡 준비하신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넷에 나왔던데요. 정효린 신곡 발표 임박이라고요."
-네. 싱글 앨범이에요.
학생들은 조소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의혹이 사실이 되었다. 지금 통화하는 사람이 가수 종효린이라고 한다.
'아까부터 뭔가 수상쩍더라니.'
'이런 사기꾼.'
'무슨 정효린이 전화를 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허풍이나 떨고 있네.'
학생들은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다들 묵시적으로, 이제 이현의 존재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 버리기로 결정했다.

6. 현지 조달의 법칙
모라타에는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늘어났다. 방문객들이 북부의 모험과 퀘스틀 위하여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 마법사, 레벨 310. 대기 계열 전공하였는데 파티 구합니다. "
" 이쪽으로 오세요, 마법사님! "
" 여기예요! "
" 검사, 레벨 296. 힘 위주로 키웠으며 가끔 몸빵도 해 줄수 있습니다. "
" 검사님, 아이템 조금 더 챙겨 드릴게요. 우리 파티에 가입하세요! "
" 공격수가 부족하던 참인데 검사님, 같이 퀘스트 안 가실래요? "
광장은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다.
북부에서는 매일 새로운 퀘스트와 이야기 들이 탄생하고 있다.
모험가들을 뜨겁게 만드는 생생한 경험담!
어떤 던전에서 무슨 몬스터를 사냥했는지, 어떤 아이템을 습득했는지가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덤으로 처음으로 발견한 던전들에서는 2배의 경험치와 아이템도 얻을 수 있다.
몰려든 모험가들은 위험을 함께할 믿음직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모라타로 모여들었다. 현재까지는 모라타가 가장 번성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 단창! 전투에는 이보다 실용적일 수 없는 단창 팝니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견제를 함께할 수 있는 무기. 속성은 직접 확인해 보세요! "
" 카달리나의 단검. 이름만 말씀드립니다. 가치를 아시는분만……. "
광장 구석에는 사냥으로 얻은 물건들을 파는 전사들이 쪼그려 앉은 채로 손님을 기다렸다. 가치 있는 전리품들의 경우에는 상점에 판매하지 않고 직접 구매자를 찾으면 가격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철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철검 파오. 대장장이 게암의 이름을 걸고 만든 물건. 중급자에서 고급자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쓰기에 좋을 것이오. 단, 구입 후에는 환불 불가! 추후 수리 보장은 안 해줌. "
" 방패 제작 명인. 대장장이 스킬이 중급에 이르러 명인의 반열에 오른 저 파베루가 직접 맞춤 방패를 만들어 드립니다. 다만 미리 말해두지만, 가격은 다른 사람들보단 조금 비쌉니다. "
" 마법 부여해 드립니다. 하루짜리, 사흘짜리, 일주일짜리 마법 있어요. "
대장장이나 재봉사, 인챈터 들을 비롯한 생상직 직업들도 모여들었다. 북부에서는 조금만 엉뚱한 지역으로 들어가도 함정과 몬스터 들이 들끓는다. 매번 목숨의 위기를 넘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비에 관심이 커지게 되어 수요가 확대되었던 것. 장비와 상거래 시장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그것을 노리고 각종 생산직 직업들도 영업을 했다. 이제 모라타는 각자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고 동료를 구하는 장소로 널리 이름이 퍼지게 되어서, 모험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 비옥하고 넓은 땅이군. 밀을 뿌리기에는 딱 좋겠어. "
" 어딘가 광산이 있을 텐데. "
농부, 광부, 목축업자 들도 기회의 땅인 모라타로 왔다. 비어 있는 땅을 개간하고, 광산들을 찾아냈다. 스스로 찾아낸 광산은 일정 액수의 세금만 바치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기에, 광부들도 몰려와 대박을 쫓는 모험가처럼 금광을 찾아 헤맸다. 북부의 거점 도시 모라타! 실상 도시라고 하기에는 과분했다. 아직은 마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인구도 적고, 건물들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매일 늘어나는 사람들도 인해서 활기가 돌았다. 모라타에서는 바쁘게 움직이는 모험가들과 사냥을 떠나는 전사들. 급하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생산자들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난 이후의 밤! 대낮의 번성함이 사라지고 마을은 텅텅 비어 버린다. 모두 빛의 탑을 보러 간 탓에 돌산 부근에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다.
" 찹살떡 사려! "
" 간식으로 좋은 군밥 팝니다. "
빛의 탑 부근에서는 여행객들로 인하여 간식과 음식 들의 소비가 무척이나 활발하게 일어났다. 커플들과 여행자들은 간식을 먹으면서도 밤새도록 빛의 군무를 관람했다. 별과 달, 구름의 이동에 따라서 다채로운 광채를 뿜어내는 조각품.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사랑을 속삭였다. 연인이 없는 여성들은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 이렇게 훌륭한 조각품을 창조해 내는 사람의 감성은 도대체 얼마나 섬세할까? "
" 조각사하고 친해지고 싶어지네. "
반면 전사와 마법사들은 빛의 군무를 보자마자 급하게 떠났다.
" 빨리 가자! "
" 사냥이다. "
조각품의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의 에펠탑. 뉴욕의 자유의 여신 상. 도시들을 상징하는 위대한 조각품들처럼, 모라타는 빛의 탑으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지고 번영했다. 문화가를 보여 주는 힘. 자윽밋을 심어주고, 도시를 널리 알린다. 북부의 많은 성과 도시들을 다 알수는 없지만, 빛의 탑이 있는 모라타는 알게 된다. 어느 덧 북부를 떠올릴 때에는 반드시 모라타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모라타가 여행자들의 거점 도시로 발달하고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빛의 탑이라는 조각품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로자임 왕국 출신의 여행자들도 모라타에 찾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이 내뱉은 첫마디!
" 여기가 모라타 마을인가요? "
" 조각사 위드 님이 영주로 있다는 그 마을? "
" 이곳에 오면 풀죽을 준다던데요! "
마을 장로는 위드를 대신해서 모라타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다.
" 우리 마을의 주민들이 더 이상은 굶주리지 않게 했으면 좋겠어. "
그래서 대규모 개간 사업을 벌였다. 땅을 일구고 곡식들을 심어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북부는 그동안 식물이 잘 자라지 않아서, 사람들은 굶주림에 익숙하고 인구도 잘 늘지 않았다. 그 악순환을 끊어 버리기 위한 투자!
『모라타의 황무지들이 개간되고 있습니다. 개간된 땅에는 밀이 심어질 예정이며, 밭에는 채소와 과일 나무들이 자라게 됩니다. 첫 추수는 4개월 후입니다.
개간 면적 : 14만평
경제력 증가 : 7
세금 수입 : 매달 800골드
곡물 생산량 : 830% 증가』
수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투자 대비 효율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라타의 인구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니 요긴한 투자였다. 마을 장로는 이 개간 사업에 3만 골드라는 막대한 돈을 지출했다.
" 마을의 건물들도 너무 낙후됐어. 마을이 깨끗해야 주민들의 자부심이 늘어나게 되지. "
거리 청소에 2,000골드, 주택과 상가 건설에도 26,000골드를 썼다. 수로도 정비하고, 마을로 들어오는 정문도 대리석으로 건축했다. 주민들의 자부심을 위해!
『모라타 주민들의 사기가 89입니다. 위생과 보건 상태가 매우 양호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모험가들이 장로의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반뎀과 쿤타, 호르간이라는 바바리안들은 요든의 마굴에 있는 몬스터들을 깨끗하게 소탕하고 귀환했다. 다른 도시에서는 200골드 정도의 수고비와 30 정도의 명성을 획득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모라타 마을의 장로는 역시 남다른 면이 있었다.
" 오, 훌륭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우리 모라타 마을 사람들은 그대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을 장로가 호들갑을 떨자 반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전사로서 응당 히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 아닙니다, 아니에요. 험한 과거를 가진 우리가 몬스터들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당신들은 알지 못합니다. "
마을 장로를 포함하여 모라타의 주민들은 몬스터들에 대한 유별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뱀파이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과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을 장로는 전사들을 좋아했다.
" 우리 주민들의 숙원과도 같은 일을 처리해 준 그대들에게 영주님을 대신해서 사례하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대들에게 여비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띠링!
『의뢰에 대한 보상으로 360골드의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명성이 46 늘었습니다.』
" 이렇게 많을 돈을……. "
" 더 많은 몬스터를 잡아 와주세요. 그러면 더 큰 돈을 드리지요. "
마을 장로의 실컷 퍼 주기! 영주를 대신한다면서 펑펑 주고 있다. 위드가 남기고 간 13만 골드는 금세 탕진해 버렸고, 그 후부터는 들어오는 세금 수입들이 밑천이었다. 모라타의 주민들은 몬스터들을 처리해 준 전사들을 크게 숭상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명성치의 획득도 큰 편. 이처럼 마을 장로가 막대한 돈을 지출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세금의 수입도 늘고 있었다. 어차피 모험가들이 퀘스트의 대가로 받은 보수들은 장비와 식량을 구입하고, 여관 등에서 숙박하는 데 지출된다. 몬스터를 처리하고 남은 부산물들, 여러 아이템과 가죽, 잡템 들도 시장을 돌면서 가치를 키워나갔다. 대부분의 기술과 농업, 산업 들은 낙후되어 있지만 모라타의 방직 기술만큼은 최고 수준! 뛰어난 가죽과 천 들을 만들어 냈고, 이 상품들은 모험가와 상인 들에게 비싼 값에 팔렸다. 모라타의 세금 수입이 놀랍도록 증가하는 원인의 하나였다. 그렇게 세금이 늘어나면 마을 장로는 가만있지 않았다.
" 우리 마을을 지켜 주는 프레야 여신님과 교단의 형제들에게 헌금을 하고 싶습니다. "
" 오오, 그대에게 축복이 있으라! "
통 크게도 5,000 골드씩 펑펑 던져주었다. 또한 문화 사업도 크게 벌였다. 전투 계열의 길드들도 설립되지 않은 마당에, 예술가 길드들을 개설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대회와 전시회 등을 개최하면서 돈을 물 쓰듯이 썼다. 모라타에는 하루가 다르게 각종 진열품, 조각품, 미술품들이 무수히 늘어만 갔다.
" 크크크크. "
" 주인이 갔다. "
" 신 난다. 이제 우린 자유다. "
와일이, 와둘이, 와삼이, 와오이, 와육이, 와칠이! 그들은 행복했다. 착취하고 억압하던 주인이 뱀파이어의 세상으로 떠남으로써 그들은 임시지만 자유를 얻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처억! 첫째인 와일이가 날개를 활짝 펴며 소리를 쳤다.
"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던가! "
" 맞다. "
" 정말 괴로웠다. "
와이번들의 열렬한 호응.
" 골골. 정말 주인 잘못 만나서 심하게 고생했다. 내 금 껍질 거칠어진 것 좀 봐라. 골골! "
금인이도 열심히 고개를 끄덖였다.
" 춥고 배고프고……. 이제 우리는 고난 끝에 달콤한 자유를 얻었다. 우리에게는 이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왜냐면 주인이 여기에 없으니까! "
와일드는 기고만장했다. 위드가 떠난 것은 그만큼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드의 명령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뱀파이어의 세계로 떠나기 전에, 와이번들과 금인이를 모아놓고 웅변하듯이 설교를 했던 것이다.
" 저 높은 창공에서 아래를 보아라. 걸어 다니는 몬스터들이 보일것이다. 와삼아! "
" 말해라, 주인! "
" 너 와이번이지? "
" 그렇다. "
" 창공의 제왕으로, 가장 강하고 빠른 와이번이 맞지? "
" 맞다. "
이때 와삼이는 닭처럼 날개를 푸드덕대면서 열렬히 신을냈다. 위드가 드물게 칭찬을 해 주니 당연히 기분이ㅣ 좋았다. 하지만 칭찬을 하며 부추겨 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 그런데 왜 내 와이번들이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보다 약하냔 말이야! 창공의 제왕인 와이번이 어째서 마음껏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움츠러들어야 하느냐. 지상을 걸어 다니는 열등한 몬스터들보다도 약해 그들을 피해야 하느냐! "
위드는 와이번들의 연약함을 맹렬히 질타했다.
" 미안하다, 주인. "
와이번들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실제로 그들이 약한 이유는 위드의 실력이 모자라서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지만, 지능이 나빠 간단히 설득당해 버렸다.
" 강해져라! 너희보다 약한 몬스터들을 제물로 삼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존재로 거듭나라. 진정한 하늘의 제왕, 와이번들이 되어서 다시는 동료들을 잃지 않도록 하라. "
" 쿠오오오! "
" 우리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다니."
그때 와이번들은 감격으로 부리를 떨었다. 당시 위드가 떠나면서 했던 이 연설로 인하여 와이번들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 강해지자. "
자유롭게 사냥터들을 돌아다니며 성장을 혼다. 주인이 없는 동안 보여된 목표였다. 한동안은 그러게 위드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냥했다. 통솔력과 카리스마! 와이번들을 직접 만들었으니 친밀도도 높았다. 위드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다들 조금씩 성장했다.
" 오늘따라 바람을 좀 쐬고 싶군. "
그런데 와일이가 점점 사냥을 타맨하게 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높은 절벽가에서 날개를 접고 서 있기도 하고, 혹은 강해지는 데에는 쓸모없는 토끼들을 잡아먹기도 했다. 다른 와이번들도 나쁜 짓은 금방 따라했다.
" 크크크. "
" 노니까 좋다. "
"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자자! "
사냥을 하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와이번들은 제멋대로 굴었다. 한가로운 대낮에 푸른 초원 위에 자빠져서 잠든 와이번들!
" 우린 너무 혹사당해 왔다. "
" 조금 쉬어도 돼. "
" 주인이 없을 때 쉬어야 된다. 주인이 돌아오면 틀림없이 우리를 다시 부려 먹을거야. "
" 어서 놀자. "
그래도 가끔은 사냥을 했지만, 그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아무리 통솔력과 카리스마가 높다고 하더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만 효과가 적어진다. 위드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빚어낸 결과였다.
" 크크크. "
" 행복하다. 이렇게 편안할 수가 있다니. "
와이번들은 땅바닥에서 뒹굴거렸다. 게으름을 잔뜩 부리면서도 맛있는 것들은 마구 찾아 먹었다. 그러면서 급속도로 뒤룩뒤룩 군살이 쪄 갔다. 목살이 늘고, 배는 더 이상 튀어나올 수가 없을 정도로 볼록해졌다. 옆구리에도 살이 붙어서, 날갯짓을 할 때 심한 장애가 되었다. 애초에 날렵한 편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비만으로 인해 하늘을 나는 속도도 크게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간신히 날개를 파닥거려서 조금 날아오를 뿐!
" 지상도 좋다. "
" 그래. 우리라고 꼭 힘들게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에 떠 있을 필요가 있나. "
와이번들은 의기투합해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발라당! 가끔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대지위를 달리기도 했다. 뒤뚱뒤뚱!
위드가 접속했을 때에는 메이런이 이미 일행에게 방송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였다.

" KMC미디어에서 우리의 모험에 관심을 갖다니 대단하군요. "

페일은 상당히 놀라워했다. 방송에 관심이 많은 그였지만, 설마하니 그들의 모험이 방송에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메이런이 웃으며 설명했다.

" 뱀파이어의 땅을 모험하는 사람들은 우리뿐이니까요. 그럼 모두 방송을 하는 건 찬성이신가요? "

화령은 방송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기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난 찬성. "

페일은 조금 망설였지만 메이런이 추진하는 일이었기에 동참의 의사를 밝혔다.

" 저도 찬성입니다. "

로뮤나와 이리엔, 수르카도 은근히 기대가 들었다.

" 나도 싫진 않아. 뱀파이어 세계를 모험하는 게 숨길 일은 아니잖아. "
" 방송에 나오다니 좀 창피하긴 한데‥‥ 괜찮겠죠? "
" 우리가 방송에 나오다니, 신난다! "

검치 들에게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방송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그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이들이 일어서더니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바람에 머리가 흩날려서 멋진 모습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하지만 짧게 자른 깍두기 머리를 하고 있는 그들이 그런 모습을 연출해 내기란 무리였다.
사범들은 아예 별도로 모여서 대책 회의까지 하고 있었다.

" 너희 저번에 위드의 동영상을 봤냐? "
" 예, 둘치 사형. "
"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좀 멋있었지? "
" 시청률이 굉장히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
" 우리도 질 수 없다. "
" 암요. 이번 방송의 주인공은 우리입니다. "

그때 검삼치가 자신있게 나섰다.

" 사형들, 제가 계획을 세워도 될까요? "
" 믿어도 되냐? "
" 그럼요. 일단 우리의 노래부터 한 곡 만들어야겠습니다. "
" 노래? "
" 왜, 위드도 노래를 불렀잖습니까. "

오크 카리취가 불렀던 최악의 노래!
그럼에도 상당히 호쾌하였기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우리가 그보다 멋진 노래를 불러 주는 겁니다. "
" 좋은 판단이야. 다 같이 합창을 하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런데 노래는 누가 만들지? "
" 위드에게 작곡을 맡기면 될 것 같습니다. 경험자이기도 하고, 또 잘하니까요. "
" 위드가 만든 곡을 우리가 부른다면 정말 멋지겠군. "

이렇게 사범들은 별도의 작전을 짜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수련생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얘기했다.

" 사나이들의 기상을 보여 줘야 합니다. "
" 적들을 압도하는 고함도 질러야죠. "
" 우리의 멋진 몸도 보여 줘야 됩니다. 그러자면‥‥‥. "
" 맞아! 웃통을 벗는 겁니다. "

일반인들. 정상적으로 로열 로드를 즐기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계획들도 튀어나왔다.
몬스터들과 맞부딪쳐서 웃통을 벗고 싸운다? 당장 죽고 싶어서 미쳐 날뛰는 게 아니라면 터무니없는 짓이다.
아무리 가벼운 천으로 만든 옷이라고 해도 기본 방어력이 상당하기 때문.
천 옷이라도 입고 있으면 그냥 맞는 것보단 절반 이상으로 데미지가 줄어든다. 그 줄어든 데미지도 매우 큰 편이라서 쉽게 죽기
때문에 다들 더 좋은 방어구를 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데, 오히려 방어구들을 벗어 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검삼십팔치의 이 황당무계한 의견은 검삼치에 의해 적극 받아들여졌다.

" 좋은 생각이다. 삼십팔치야. "
" 역시 삼치 사형이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
" 그럼! 그런데 아무 때나 벗으면 죽을 위험이 너무 커지지않겠냐?"
" 역시! 저도 그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강한 놈을 만났을 때 벗어야지요. 기백으로 몬스터들을 압도해 버리는 겁니다! "
" 멋진, 정말 훌륭한 계획이다. "
" 삼십팔치야. 네가 이렇게 똑똑한 줄은 정말 몰랐다. "
"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릴 때 그 학원 선생님이 했던 칭찬들이 기억납니다. "

검삼십팔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검삼치가 정말 부러운 듯이 물었다.

" 어떤 말을 들었는데? "
"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 한다고 하더군요. "
" 오, 그렇게 훌륭한 칭찬을‥‥‥! "

학원 선생님들이 흔히 하는 거짓말들!
아이 부모님을 만났을 때에 으레 해 주는 말들이어었다.
그래야 열심히 학원에 보내게 될 테고, 공부에 돈을 쓰게 될 테니까.

" 제가 만날 꼴찌를 하긴 했지만, 원래 머리는 비상했습니다. "
" 그래. 이렇게 보니까 정말 머리는 좋았던 것 같다. "
" 제가 만약 공부를 했으면 최소한 반에서 30등 정도는 그냥 했을지도 모르죠. "
" 정말. 우리 중에서 넌 뭔가 특별해 보인다. "

보통 때에는 말수가 없던 검치까지 그 자리에 끼어들었다.

" 크흠. "
" 스승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

검둘치를 비롯한 사범들과 수련생들은 서둘러 스승의 말을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검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내 생각인데, 우리를 상징하는 어떤 표구가 있어야 된다고 본다. "
" 암요! 우리는 이렇게 숫자도 많은데 아무 표구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요. 스승님께서 하나 정해 주시겠습니까? "
" 그래.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말은‥‥‥. "

검치는 본인이 떠올린 것이 스스로도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우리의 검은 무적이다! "
" ‥‥‥. "

매우 간단명료한 말!
그러나 검치의 수많은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어떤 적과도 싸우겠다고 한다.
검은 부러지지도 깨지지도 않는다. 검이 상할 때에는 그검의 주인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두고 익혀 온 검술.
그에 대한 믿음.
검치에게는 인생이 담겼다.
남들에게는 한 자루의 검에 불과하지만, 그 검을 통해서 세상을 배웠다.
검을 통해 세상과 싸웠다.
꺾이지 않는 기상이 검에 있다.
그런 검을 갈고닦아 나아가겠다는 사나이의 당찬 포부와 다짐!
검둘치가 그 말을 곱씹었다.

" 우리의 검은 무적이다! "
" 우리의 검은 무적이다! "
" 우리의 검은 무적이다! "

검치 들을 상징하는 표구가 정해진 셈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드를 비롯한 일행도 모여서 회의를 벌였다.
페일의 이마에는 흥건한 땀마저 어려 있다.

" 저분들이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

화령과 제피는 그 말에 심하게 동감했다.

" 정말 무서운 계획이에요. "
" 웃통을 벗고, '우리의 검은 무적이다!' 라고 외치면서 뛰어 들어가는 검치 님들을 상상하니 왠지 숨이 막힙니다. "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이거야말로 미치도록 창피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만큼은 몬스터들보다 검치 들이 훨씬 두려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창피해서 그날부터 물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리엔이 애절하게 호소했다.

" 위드 님. 위드 님이 말려 주시면 안 되나요? "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 사형들을 어떻게 제 힘으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저분들만의 계획이 다 세워져 버렸는데. "
" 휴우! "

다들 한숨만 쉴 뿐, 아무도 감히 검치 들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세에취는 이제 드디어 포기했다.

' 정신의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저 사람들을 이해할 수는 엇을 것 같아. '

지금까지 관찰해 왔지만 검치 들의 사고방식을 헤아리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때보다도 훨씬 힘겨웠다.
사나이답게 호쾌하지만 가끔은 어린아이들처럼 쪼잔하다.
검과 전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자에 대해서는 굉장히 전전긍긍한다.
복잡함이나 숨김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알아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기상천외한 일들을 생각해 내고 또 실제로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검치 들뿐이리라는 사실이다.
위드가 말했다.

" 우리에게도 대책이 필요합니다. "

수르카가 울상을 지었다.

" 정말 필요해요. "

로뮤나도 한마디를 보탰다.

" 어떤 식으로든 저분들과 엮이면 곤란해져요. "

마판도 끼어들었다.

" 제 생각에‥‥ 검치 님들이 민망한 짓을 벌이면 멀리 떨어지는 게 어떻겠습니까? "

위드도 괜찮은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전 마판 님의 말씀에 찬성인데, 다른 분들은요? "

메이런과 이리엘, 페일, 세에취가 거의 동시에 기염을 토했다.

" 최대한 먼 곳으로! "
" 고개도 돌리고, 절대로 모른 척해야 돼요! "
" 우리 쪽으로 달려오면 냅다 도망이라도 쳐야 됩니다. "
" 취익. 그땐 우린 남남인 거죠. "

순식간에 튀어나온 대답들은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느끼게 했다.
의기투합!
인생을 살면서 민망한 순간들을 참 많다. 하지만 검치 들과 어울려서 저런 상황들을 겪느니,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렇게 비밀리에 대책들을 수렵하고 있을 때였다.
슥슥.
유린은 가만히 땅바닥에 앉아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 스킬의 숙련도 상승을 위하여 쉬지 않고 그리는 것이다.
동료들과 함께 검치 들의 만행에 대해 심각하게 상의를 하고 있던 제피는 왠지 그녀가 처령해 보였다.

' 오빠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아이. '

위드는 유린에 대해서 자세한 말은 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사실이 있었다.
부모님은 그녀가 어릴 때에 돌아가셨으며, 가정 형편이 정말로 어려웠다고 한다.

' 돈이 없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인형들도 외제는 가지고 놀지 못하던 아픔이겠지. '

제피가 경험해 본 가난은 그런 종류들밖에 없었다.
어릴 때 장난감 대신에 보석을 갖고 놀기를 즐겼는데, 비싸다고 많이 사 주지 않았다.
방 청소를 하지 않으면 용돈을 안 주거나, 성적이 떨어졌을 때에는 부모님들이 플래티늄 등급의 신용카드를 정지시키기도 했다.
그럴 때에는 나이트에 가서도 친구들이 대신 내주는 돈으로 놀거나, 외상을 깔아야만 했다.

' 이렇게 착하고 예쁜 소녀가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며 살았다니. '

제피는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면 차라리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으리라.
최소한 로열 로드에서만이라도 밝게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면 좋을 텐데, 검치 들에 의해 민망한 상황까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제피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
" 네? "

유린이 생뚱맞다는 듯, 무슨 말을 하냐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즐거웠다. 구상한 것들을 그리고 색을 입히면 정말 예쁜 그림들이 만들어진다.
완성된 그림을 보았을 때의 행복!
이렇게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위로를 하니 의아했다.
제피는 의외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 아니, 방금 듣지 못했어요? 검치 님들이 어떤 민망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바람에 대책 회의를 하고 있잖아요. 지금 거기에 대해서‥‥‥. "

유린이 눈을 반짝였다.

" 왜요? 멋질 것 같은데요? "
" ‥‥‥."

제피는 입을 떠억 벌렸다.

" 그림으로 그려서 평생 간직할 거예요. 그리고 그런 쪽의 취향을 가진 여자 애들에게 팔아먹어야지. 헤헤헷. "
" ‥‥‥. "

제피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앳되고 귀여운 소녀 유린에 대해서 잠깐씩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위드의 동새잉었다. 절대로 평범할 수가 없었다.


위드를 포함해서 일행은 일단 토둠을 향하여 동쪽으로 움직였다.
세이룬에서 모은 정보에 의하면 토둠은 무려 열흘이나 걸리는 거리!

" 정말 머네요. "

제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통 때라면 당연히 말이나 마차 같은 이동 수단을 이용했으리라. 그런데 여기는 뱀파이어의 세계다.
말처럼 편안한 이동 수단이 따로 없다.
마판이 타고 있는 마차가 있긴 하지만 탈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어서, 체력이 떨어지는 이리엔을 비롯하여 화령, 로뮤나, 유린
정도만이 탈 뿐이었다.

" 헉헉. "
" 힘들다, 정말. "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체력이 저하될 때마다 이리엔의 회복 마법이 빛을 발했다.
하루를 꼬박 걷고 나서 저녁 무렵, 일행은 식사 시간을 가졌다. 음식은 물론 위드가 만들어야 했다.

" 열흘이나 가야 하니 피로 회복과 체력 증강에 좋은 음식들을 만들어야겠군. "

위드는 약초와 닭을 넣고 끓였다.
몸보신에 좋은 삼계탕!
물론 약초들은 오래된 도라지들이나 매우 작은 인삼들이었고, 닭은 질려서 맛이 없는 장닭들만 넣었다.

" 푹 끓이면 그래도 먹을 만해지니까. "

같은 거리를 똑같이 걸어왔다. 누구나 육체적으로도 피로해서 드러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뿐.
그런데도 위드는 막대한 양의 요리를 해냈다.
사실 화령과 유린은 음식을 만드는 걸 돕기 위해 옷소매를 걷고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위드가 도움을 거절했다.

" 보통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니 제가 요리를 하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

요리 스킬이 낮은 사람들이 만들면 거의 재료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 네. 그래도 힘들면 부르세요. "
" 오빠, 아무 때나 시켜 줘. "

화령과 유린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위드가 만들어 낸 삼계탕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다시 저녁에 이동을 재개했다.
사각사각.
위드는 이제 걸으면서도 조각품을 깎았다.
평범한 나무 조각품들은 스킬의 숙련돌르 아주 조금 올려줄 뿐이다.

" 그래도 이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걸 이루는 법이지. "

조각술은 대작이 나왔을 때 스킬 숙련도가 상당히 많이 오르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드는 매일 수십 개씩 조각을 했음에도,
정작 만들어 낸 명작이나 대작의 개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사냥을 하는 와중에도 쉴 때에는 조각품을 깎았고, 재봉이나 대장일. 낚시를 할 때에도 조각품을 만들었다.
요리를 하면서도 뜸을 들이는 와중에 약간씩만 시간이 나면 나무와 조각칼부터 꺼냈다.
큰 것 한 방을 노리면서 살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오래 걸린다.
쉬지 않고 정진하는 길이야말로 꿈을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조각술을 비롯하여 여러 생산 스킬을 습득했던 원동력이다.
끝도 없는 노가다의 길!
하나라도 더 익히고 강해지는 게 적성에 맞았다. 완전히 체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겨운 것만도 아니다.
강해져야 하는 데에는 목적이 있고, 이유가 존재한다.
베르사 대륙에는 수없이 많은 던전들과 사냥터들, 퀘스트가 존재한다. 더 강한 몬스터와 싸우고, 위험을 극복해 나가려고 한다면
강해져야만 했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잠시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을 걸었을 때였다.
마차에 타고 있던 화령이 미안한 듯이 물었다.

" 위드 님. 걷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
" 아닙니다. 그저 방송 분량이 걱정될 뿐! "
" ‥‥‥! "

어느새 위드도 방송에 대해서 알았다.
이렇게 밥을 먹고 무작정 걷는 내용만 끊임없이 방송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시청자들이 대번에 채널을 돌려 버리고 말 것이다.
방송 분량이 늘어날수록 돈이라는 생각에, 더 빨리 걸어서라도 토둠에 도착하고 싶을 뿐이었다.
화령은 이번에는 검구치에게 물었다.

" 힘드시죠? "
" 아닙니다. "

씩씩하게 대답하는 검구치!

" 힘드시면 그렇다고 하셔도 돼요. "
" 수행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
" ‥‥‥. "

위드나 검치 들이나, 노가다와 육체 단련에는 이골이 나 있었기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제피와 페일, 메이런, 수르카만이 번갈아서 마차에 타면서 휴식을 취했다.
물론 상인인 마판은 계속 마차를 타고 있는 상태였다.
그날 점심 무렵!
일행의 행렬과 마차는 산을 넘었다.
들꽃과 꽃나무 들이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입들이 떨어져서 날린다. 일시에 수천수만 개씩의 꽃잎들이 날아오르면서 장관을 연출했다.

" 와아! "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광경.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는 달콤한 향기가 남았다.
북부의 대지에서 혹독한 대자연과 싸워야 했던 위드였지만, 뱀파이어들의 땅에서는 절경들이 보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이 있는 세계라니!
유린이 부탁했다.

" 오빠, 이곳에서 조금만 쉬어 가면 안 돼요? "

이리엔과 로뮤나도 대찬성이었다.

" 그래요, 위드 님! 여기서 좀 쉬고 가요.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
" 딱 1시간만 머물다가 가요. 너무 힘들어요. "

말은 안 했지만 화령이나 메이런, 수르카도 이 장소가 좋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쉴 수 있다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도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으리라.
사실 육체적인 피로야 마법과 음식으로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그렇지 못하다.
끊임없이 이동만 하면서 지루하고, 고단했다. 이런 꽃밭에서 풍경을 보면서 휴식을 취한다면 힘이 나리라.
그러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 위드 님이 아무 의미 없이 이런 곳에서 쉬려고 하진 않을거야. '
' 그냥 바로 출발해 버리겠지. '

메마른 감수성!
위드의 평상시 모습을 감안한다면 휴식을 취하려고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위드는 흔쾌히 허락했다.

" 그럼요, 이렇게 좋은 곳에서 1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아예 한 7시간 정도 머물다가 가죠. "
" 꺄아, 정말요? "

수르카가 환호성을 질렀다. 다른 여자들도 기뻐했다.
이런 산속의 풍경 속에서 꽃놀이를 하다니, 얼마나 분위기가 있는가.
하지만 마판이나 제피는 노골적으로 미심적은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 이건 보통 때의 위드 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어. '
' 설마 이 근처에 몬스터라도 있나? '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꽃밭이었다.
다른 장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수려한 꽃들이 천지에 피었다. 꽃들과 꽃나무가 가득하고, 잠자리와 나비 들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모습.
이런 곳에 던전이 있을 리도 없고, 몬스터 따위가 숨어 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만약에 몬스터가 있더라도, 궁수로서 시력이 좋은 페일이 훨씬 먼저 발견을 했어야 옳았다.

' 대체 무슨 이유일까. '

마판이나 제피는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하고 고뇌에 잠겼다.
화령, 이리엔, 로뮤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 위드 님도 이렇게 어여쁜 꽃들과 나무를 보면서 쉬고 싶었던 거야. 어쩌면 나와 같이 산책을 하고 싶으신 건지도‥‥‥. '
' 위드 님도 동생은 끔찍이 아끼시니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시는구나. 정말 가정적이고 은근히 마음이 여린 분이라니까. '
' 정말 아름다운 장소네. 예술가의 감수성이라면 당연히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거야. 혹시 위드 님이 이곳을 보면서 무슨 영감을 얻으신 건 아닐까? 그래서 멋진 조각품을 만드실지도! '

로뮤나는 스스로의 의견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느꼇다. 그래서 다른 일행을 모아서 말해 주었다.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

" 어멋, 정말요? "
" 위드 님이 조각품을 만드실 것 같다고요? 그럼 우리가 조각품을 깎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예요? "

화령의 눈이 반짝였다.
메이런도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 그럼요! 그러니까 굳이 7시간이나 쉬겠다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
" 와,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정말 그런 거였구나! "

위드가 일상적으로 만들어 내는 조각품은 상당히 많이 보았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표현한 물체들.
스킬 숙련도를 위하여 노가다로 찍어 내는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탐이 나는 물건들이 많다.
하지만 위드가 작정하고 만들어 낸 작품들은 차원이 다르다. 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베르사 대륙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위대한 조각품!
빛의 탑이나 빙룡 조각상처럼 대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만드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페일마저도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검치도 은근한 기대가 되었다.

' 조각칼로 작품을 만든다. 소검을 이용해서 마음을 담고 물체의 결을 다듬는 것인가? '

모두가 위드의 움직임만을 주시했다.
함부로 입을 열거나 위드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않았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슬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꽃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윽고 위드가 움직였다.
로뮤나의 예상처럼 자하브의 조각칼을 빼어 든 상태였다.
조각사의 신물과도 같은 물건.
수많은 조각품에 혼과 생명을 불어넣은 자하브의 조각칼.

" 달빛‥‥‥. "

위드가 꽃나무들의 앞에 서더니 소리쳤다.

" 조각 검술! "

달빛 조각술이 아닌, 달빛 조각 검술!
위드가 조각칼을 휘저을 때마다 광채와 함께 꽃나무들이 우수수 베였다.
이리엔이 작게 입을 벌렸다.

" 어라? "

제피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 저게 뭐죠? "

얼핏 위드의 모습을 본다면, 꽃나무들을 깎고 다듬는 게 아니라 밑동에서부터 싹둑 잘라 내고 있었으니까.
화령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더 지켜보도록 해요. 조각품이란 다양한 영역의 표현을 할 수 있잖아요. "

빛을 이용해서도 조각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위드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꽃나무들이 많이 필요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안고 묵묵히 기다렸다.

" 후후. "

위드는 음침한 괴소를 터트리며 꽃나무들을 잘라 내었다.
수북하게 쌓인 나뭇가지들!

" 돈 주고 사려면 이게 다 얼마야! "

위드는 대단히 만족했다.
조각술을 펼치려면 좋은 재료가 필요하다.
재질이 훌륭한 나베목이나 엘프목의 경우에는 조각 재료점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
철저한 현지 조달 법칙!
위드의 경우에는 가능한 재료들을 구입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조각술을 펼칠 때마다 약간씩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숙련도의 상승이 줄어들고, 나중에 조각 상점에 판매할 때에도 비싼 가격을 쳐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뜻하지 않게 생기가 넘치는 꽃나무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무의 결도 좋고, 표면에도 윤기가 흐른다.
생명력이 약동하는 다양한 나무들!
휴식의 목적도, 나무들을 잘라 내서 한 푼이라도 더 절약하기 위함이었다.

" 놀면 뭐 하나, 조금이라도 벌어야지! "

위드는 거추장스럽던 수북한 나뭇가지들을 쳐 내고 굵은 토막들만 남겼다. 그러자 마판이 달려들었다.

" 위드 님. 도와 드리겠습니다! "

마판은 잔가지를 쓸어 마차에 담았다.
돈을 벌기 어려운 초보자들이 초반에 하는 유용한 용돈 벌이! 산이나 숲에서 장작이나 땔나무로 쓸 나무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마판은 널려 있는 잔가지들을 모아서 팔아 치울 계획이었다.
둘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
무수한 꽃나무들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며 일행도 이 작업의 의미를 깨달았다.

" 역시 돈이었어. "
" 어쩐지 위드 님이 선선히 허락을 하시더니‥‥‥. "

엄습해 오는 실망감.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제피가 중얼거렸다.

" 위드 님의 여동생은 꽃을 사랑하니까. "

페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 저 짠돌이 정신이 유전은 아닐 테니까요. "

발랄한 유린이라면 꽃으로 화관을 만들고,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으리라.
소녀답게 그렇게 놀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들은 유린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이 본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유린이 꽃밭에 앉아 있는 것은 맞았다. 문제는 쑥을 캐는 아줌마들처럼 꽃밭에 쪼그려 앉은 채로 두 손을 이용해 마구 꽃잎들을 따서 바구니에 쓸어 담는 것이 아닌가.

" 대체 왜‥‥‥. "

제피가 다가가서 이유를 묻자, 유린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 천연염료잖아요. "
" 염료? "
" 꽃잎을 모아서 염료를 만들 수 있어요. 그 염료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면 공짜예요. "
" ‥‥‥. "

자린고비 정신!
유린의 경지는 위드와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 좀 도와주세요. "

제피는 유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꽃잎들을 따 모았다.

" 색깔별로 모아 줘야 해요. "
" 예. "

나무 치기와 꽃잎 모으기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꽃구경을 하고 있던 수련생들은 금방 지루해했다.

" 이렇게 태평한 곳에 앉아 있자니 좀이 쑤시는군. "
" 여기서 뭘 볼 게 있다고 시간을 끄는 거야. "

메말라 비틀어진 감수성을 가진 건 위드만이 아니었던 것!
위드가 그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었다.

" 나무를 한 짐씩 모아서 저에게 주시면 고기 한 그릇씩 드립니다. "
" 고기다! "

수련생들이 질풍처럼 내달려서 꽃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휩쓸고 간 뒤에는 꽃나무 밑동의 잔해밖에 남지 않았다.
검의 내구력이 떨어지면 아예 힘을 주어서 뿌리째 뽑아내기도 하였으니 초토화되는 것은 순식간!

" 고기 줘, 고기! "
" 어서 구워 먹자! "

마판이 나무를 가져온 수련생들에게 고기를 배급해 주었다.
페일은 망연자실했다.

" 이럴 수가! "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위드와 수련생들이 움직일 때마다 자태를 뽐내던 꽃나무들이 밑동을 드러내며 잘려 나가는 것이다.
사범들과 검치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 이쪽에 꽃나무들이 많다. "
" 여기 나무들은 굵어서 조각용으로는 아주 그만이야! "

수련생들을 인솔하면서 나무를 모은다. 때때로 일부러 위드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말이다.
위신이 있기 때문에 차마 직접 나서서 나무들을 자르지만 않을 뿐. 오히려 이들이 더욱 고기에 집착했다. 수련생들 보다는 고기를
최소한 한 점이라도 더 먹어야 사범들로서 위선이 사니까!
그런데 화령이 갑자기 굳은 얼굴을 하고 위드를 향해 걸어갔다.

' 이제 화령 님이 말려 주시겠지. '
' 역시 화령 님이 나서 주시는구나. '

일행은 기대했다.
위드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검치와 화령뿐이다.
검치의 경우에는 검을 가르쳐 주는 스상이라는 점이, 화령은 범접하기 힘든 외모와 분위기로 존재감이 강하다.
그녀가 나선다면 위드의 태도도 바꾸리라.
하지만 화령은 위드를 말리지 않았다.
나무를 잘라 내는 그의 앞에서 묵묵히 옷깃을 날리며 춤을 추었다.
춤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언어다.
위드가 일을 하고 있으니 그의 피로를 덜어 주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비처럼
사뿐사뿐 움직이면서 춤을 추었다.
화령이 춤을 출 때마다 굽이 뾰족한 신발이 꽃송이들을 마구 짓밟았다.
완벽한 자연 파괴.
그들이 머물고 난 자리는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강 부장과 기획부 직원들은 가슴이 설레였다.

' 전신 위드의 모험을 볼 수 있다니. '
' 방송국에 입사하기를 잘했다. '

위드가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시청률은 보증받은 셈이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전쟁의 신으로 널리 알려진 유저!
불가해의 침략자.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사냥꾼.
어둠의 기사.
다양한 별명들이 있지만 '전쟁의 신' 만큼 위드를 잘 묘사하고 있는 단어도 없다.
싸우고 투쟁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적으로 삼든다. 그리고 승리하여 혼자 살아남는다.
마법의 대륙에서 벌였던 사건들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CTS미디어에서 거금을 들여서 계정을 구입했던 일이 위드의 명성을 더욱 높여 놓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도 막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 불사의 군단 퀘스트 정도만 떠 준다면 대박일 텐데 말이지. "

강 부장의 희망 섞인 바람에 연출자들도 긍정적이었다.

" 아무럼요. 뱀파이어 왕국 원정인데요. 무엇보다도 위드가 그 원정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못하긴 해도 불사의 군단 그 이상의 화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
" 틀림없겠지? "
" 그럼요! "

방송국 관계자들은 확신했다.
이들의 모험을 방송하기만 하면 시청률은 대박이 나리라는 것을!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뒷받침뿐이다.

" 음향팀, 특수효과팀! 오늘부터 24시간 대기해. 방송 화면이 넘어오는 즉시 편집에 들어간다. "
" 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
" 작가들은 임펙트가 강한 부분마다 자막 설명 준비하고. "
" 어렵지 않아요. 위드의 모험은 강렬해서 그냥 다 붙이면 멋지거든요. "
"그래. 국장님의 명령이야. 지난번의 경험도 있었으니, 편집은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해. 우선은 최대한 빨리 방송 일정부터 잡는다. "

방송국은 베테랑들만 모아서 비상체제로 운영되었다.
명문 길드의 원정이나 대규모 보스 몬스터 사냥처럼 특별한 날에나 이루어지는 일을, 오직 위드라는 유저 1명만을 보고 준비한다.
그만큼 위드에 대한 신뢰가 두터움을 증명했다.
기획실 직원이 버럭 소리쳤다. 그가 보고 있는 화면으로 모험의 영상들이 떴기 때문.

" 부장님! 드디어 화면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 이제야 보내 준 건가? 어서 메인 화면으로 띄워 봐. "
" 예. 지금 바로 띄우겠습니다. "

방송국 사람들의 시선은 메인 화면으로 향했다.
각자 맡은 분야에 따라서 분주하게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업무에 앞서서 위드의 모험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갖고 화면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위드와 일행이 험난한 산들을 넘었다.
까마득한 절벽과, 구름이 흘러가는 곳.
개울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꽃과 나무 들로 뒤덮인 곳이었다.
꿀꺽.
강 부장의 목울대에 침이 넘어갔다.
첫 화면부터 이렇게 절경이라니, 기대했던 보람이 있지 않은가!
화면 속의 위드와 일행이 꽃으로 뒤덮인 곳에서 이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몇 마디의 말을 나누더니 각자 흩어진다.

" 휴식을 취하려는 모양이로군요. "
" 응. 그런 것 같아. "

하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벌목과 꽃잎 캐기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흩어져서 움직일 때마다 꽃과 나무들이 추수하듯이 베여 나간다.
일정 지역을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나서는 다음 지역으로 이동.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던 꽃들이 뽑히고 잘려 나갔다.
쑥대밭!
황폐화!
초토화가되어 간다.

" ‥‥‥. "

강 부장을 비롯하여 모두의 말문이 막혔다.
위드와 일행이 이동할 때마다 찬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가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화이초들을 비롯하여, 형태가 멋진 나무들도 모두 잘려 나가고 사라진다.
그런 장소 위에서 태연하게 밥을 해 먹고 고기를 구워 먹는 무리.

" 이걸 방송에 내보내야 하나? "
" 당연히 안 되겠죠, 부장님. "
" 그래. 오늘은 그렇다고 치고, 내일부터는 제대로 된 모험을 보여 줄 거야. "
" 그럼요. 위드인데요. "

강 부장은 여전히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전신 위드.
그의 투쟁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도 영광이다.
마법의 대륙에서는 모든 도전자들을 무릎 꿇리고, 가로막던 적들을 부숴 버린 절대의 존재. 그런 위드와 독점 계약을 하고, 그의 모험을 방송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벌써부터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 내부 정리를 끝내 놓은 상황이라서 방송국 전체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위드와 일행은 무려 아흐레 동안이나 이동하는 곳마다 만행을 저질렀다.
그럴 때마다 강 부장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7. 뱀파이어의 편지
뱀파이어 왕국 토둠.
위드와 일행은 꾸준히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늘을 향해 삐죽하게 솟아오른 첨탑들.
오래된 고성들 수십 개가 모여 있는데, 주변에는 산들이 보였다.
부서진 묘비와 파헤쳐진 봉분들.
공동묘지로 이루어진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아아, 여기가 토둠이구나."
"성들이 정말 많아요."
"무덤도 많고요."
토둠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흘렀다.
춥지는 않지만,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지는 곳!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로막혀서 멀리 보이지도 않았다.
『- 뱀파이어 왕국 토둠의 최초 발견자가 되셨습니다!
혜택 : 명성 820 증가.
놀라운 발견의 기록을 베르사 대륙의 귀족이나 왕족 들에게 보고한다면 추가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탐험 지역의 왕국을 발견함으로 인해서 해당 왕국에서 받는 퀘스트 보상이 일주일간 2배로 증가합니다』
토둠!
토리도가 불렀던 약속된 장소에 온 것이다.
위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태연한 척은 했지만 긴장을 풀지 않았다.
'느긋해져서는 안 돼. 지독한 내 불운이 이대로 사라질 리가 없어.'
왕국에 도착하기까지는 편안한 여행이었다. 그럴수록 경계심은 더욱 높아졌다.
'폭풍이 치기 전이 가장 고요한 법. 어려운 의뢰가 나오기 전에는 항상 방심을 하게 만들지.'
보상이 크거나 위험할수록, 의뢰 전에는 한껏 기대를 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잘될 것처럼 느껴지고, 반짝거리는 기대로 달려가게 했다.
그 후에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등장하는 연계 퀘스트들!
피하지도 못한다.
도망치면 끝장이다.
무조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상대해야 하는 퀘스트들이었다.
다소 초보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세이룬에서도 처음 시작부터 난이도 B급이었으므로, 뱀파이어 왕국 토둠에서는 그보다 훨씬 높은 난이도가 나타나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퀘스트의 조짐이 보인다. 지금도 심상치 않아.'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지어진 고성들이 서로 연결되어 큰 성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흔적은 없더라도 박쥐 떼나 뱀파이어라도 목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큰 성채에 지키는 이 하나 없었던 것.
토둠의 거대한 모습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위드가 성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흘려 쓴 목판 조각들을 발견했다.
《우…리들은 착한 뱀파이어다.》
"……."
위드는 황당했지만, 일단 목판을 계속 읽어 보기로 했다.
《하루에 피는 세 번씩 마시고, 아침잠은 절대 거르지 않는 규칙적인 뱀파이어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토둠은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나는 늦은 밤 관 속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박쥐로 변하여 토둠을 비행하는 게 취미였다.
피의 궁전이나 유혹의 방에서 열리는 연회는 우리 뱀파이어들의 고급스러움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주변에 살던 인간들은 이미 노예가 되어 우리로부터 착취당해야 했다.
인간들은 소처럼 일만 하며 우리에게 피를 바쳤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인간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졌다.
갈수록 토둠을 둘러싼 어둠의 힘은 강성해졌고, 뱀파이어들 또한 힘을 더해 갔다.
하지만 그 막강한 어둠의 힘은 우리의 숙적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페가수스.
순결한 여자를 좋아하는 유니콘.
신수들이 우리 토둠을 일제히 공격한 것이다.
전설의 신수들은 어둠의 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두려웠지만 맞서 싸워야만 했다.
참, 왜 뱀파이어들이 유니콘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는가? 거기에는 역사적인 깊은 이유가 있다.》
위드는 여기서부터 빠르게 목판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뱀파이어와 유니콘의 앙숙과도 같은 관계에 대한 오랜 서술이 무려 7장의 목판에 적혀 있었다. 뱀파이어가 점찍었던 처녀를 유니콘이 가로챘다거나, 보석과 황금을 훔쳐 갔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사연들이었다.
《아무튼 그런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공격은 우리 뱀파이어들로서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인간들에게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우리의 마력이 통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토둠의 밤과 낮을 그들이 차지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피의 일족에게 닥친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더욱 강성해진 어둠의 힘은 망자들마저 자극하고 마았다.
고대에 살았던 인간들이 섭리를 거슬러 올라 되살아난 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땅인 토둠에 탑을 세웠다.
영웅의 탑.
그곳을 파괴하고 우리 뱀파이어들의 자존심을 되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유니콘과 페가수스만이라도 퇴치해 주기를.
참고로 우리 뱀파이어 일족이 가진 건 돈밖에 없다. 부탁을 들어준다면 우리의 보물 창고에 들여보내 줄 것을 약속한다.》
띠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뱀파이어의 요청
토둠에 남겨진 뱀파이어의 기록.
뱀파이어들은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등쌀에, 관 속에 숨어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선량한 뱀파이어가 남아 있을지는 과연 의문이지만, 그들의 요청에 따라 움직여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뱀파이어 일족의 보물 창고에는 콜드림이라는 인간의 영혼이 속박된 구슬이 있는데, 구슬이 깨지는 순간 그의 영혼은 해방될 수 있으리라. 뱀파이어 왕국 토둠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목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라.
난이도 : A
보상 : 레벨 400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유니크 무기. 뱀파이어의 무기 창고에서 직접 선택할 수 있음.
콜드림의 해방.
퀘스트 제한 : 사망 시에는 베르사 대륙으로 강제 이동. 퀘스트가 실패됨.』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난이도 A급의 의뢰!
『*추가 설명: 콜드림의 해방
30년 전 칼라모르 왕국의 기사 콜드림.
하벤 왕국과의 무수히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 그의 기마술은 따를 자가 없었으며, 병사들의 충성을 한 몸에 받았다. 마지막 순간 하벤 왕국의 비열한 음모에 빠져서 죽은 것으로 알려짐.
그러나 진실은 이와 같다.
하벤 왕국의 사주를 받은 뱀파이어들은 무력으로 그를 납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뱀파이어들은 꾀를 내어 미인계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리따운 뱀파이어 퀸을 이용하여 강직한 그를 유혹해 낸 것이다.
고독하던 콜드림은 음모에 빠져서 영혼을 구슬에 봉인당했다.
만약 콜드림이 해방된다면 그는 베르사 대륙에 부활할 것이며, 끝나지 않은 하벤 왕국과 칼라모르 왕국의 전쟁이 재개되리라.
콜드림을 해방할 경우 칼라모르 왕국의 국가 공적치 23,000 획득.
칼라모르 왕국과 하벤 왕국의 전면전 발생.』
"으아아아아!"
"말도 안 돼! 이렇게 어려운 의뢰라니."
"페가수스! 레벨 420이 넘어요. 유니콘은 그보다도 약간 더 세고요."
"거기다가 얘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잖아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의뢰가 아니에요."
처음으로 난이도 A급의 의뢰를 접하게 된 일행은 공황 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검치와 사범들의 마음은 달랐다.
"둘치야."
"예, 스승님."
"페가수스와 유니콘이 센 놈들이냐?"
"전설의 신수라니 강하겠지요."
"나보다 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승님은 무적이십니다."
아부는 이럴 때 해야 한다.
특히 먼저 옆에서 아부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다가는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었다.
검삼치도 재빨리 소리쳤다.
"스승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십니다!"
검치와 사범들은 매번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한가롭게 경치나 구경하면서 열흘 동안 이동을 했으니 더욱 전투를 원했다.
수련생들도 의뢰에 대해서 호의적인 편이었다.
"뭐 기왕에 죽는 것, 강한 놈한테 죽는 게 더 낫겠지?"
"그럼요! 페가수스에게 죽어 볼 기회가 어디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제가 로열 로드 게시판을 좀 다녀 봤는데, 전설의 신수들은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더군요."
"뭐, 위드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대책 없는 그들.
어떤 식으로든 알아서 되리라는 심정으로 조금도 고민을 하지 않았다.
'맞아. 사실 위드 님이 있었지.'
'위드 님이라면 잘 판단하실 거야.'
일행은 위드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까지처럼 최선의 선택을 하리라 믿으면서.
사실 말이 안 되는 의뢰이기는 했다.
페가수스와 유니콘은 자연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며, 이동속도가 빠르고 하늘을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레벨을 떠나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다.
당연히 본 드래곤보다야 약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체적인 난이도를 감안한다면 더 쉽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몬스터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떼거지로 몰려 있다는 점이기에.
'어림도 없어.'
'차라리 자살을 하는 편이 낫지.'
일행의 간절한 눈망울을 덤덤히 맞받아치며 위드는 보상에 눈이 멀어 있었다.
"뱀파이어의 보물 창고 그리고 콜드림의 해방이라."
보물 창고에 어떤 게 있을지는 모르지만, 난이도 A급 퀘스트의 보상이니 간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리카의 활, 바하란의 팔찌, 모라타의 백작 위 등이 지난번 퀘스트로 받은 수확이었으니까.
콜드림의 해방도 엄청난 일이었다.
"국가 공적치 23,000이라면 어마어마한 수치야."
공적치는 아이템과도 바꿀 수 있고, 병사들을 빌리는 데 쓸 수도 있다. 물건을 사고팔 때도 도움이 되며, 위드의 경우에는 거의 필요하지 않지만 명성을 올리거나 작위를 구하는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큰 보상을 주는 퀘스트가 난이도 A급이라니 정말 대박이다."
엄청난 보상에 평소의 냉정함도 잃었다.
위드는 대뜸 말했다.
"이런 퀘스트는 받아들여야죠."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조각칼을 꺼내서 목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버렸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엇."
"위드 님!"
놀라서 다들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아무리 위드라고 해도 너무나 무리한 퀘스트를 선뜻 수락하고 만 것.
위드는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조각칼을 움직여 목판에 다른 이름들도 새겼다.
페일. 메이런. 수르카. 이리엔. 로뮤나…….
『-페일 님이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메이런 님이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위드가 이름을 새길 때마다 각자의 메세지 창에 글귀들이 떠올랐다. 파티의 리더로서 목판에 이름을 새겼기에 자동으로 퀘스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크흐흐흐!"
"싸움이다."
검치 들은 대책도 없이 즐거워만 했다.
페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위드 님. 페가수스와 유니콘을 상대할 계획은 있으시겠죠?"
"아니요.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
"그럼 대체 왜 퀘스트를 받아들이셨는데요?"
"여기까지 왔으니 토둠 구경은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퀘스트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다시 세이룬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여기까지 와서 얻는 게 고작 왕복 이십 일간의 관광!
매달 로열 로드의 사용 요금을 내는 위드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드 님의 판단이니까 존중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희의 이름까지 목판에 적으셨는데요?"
"혼자 죽을 수는 없으니……."
"……."
위드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봤다.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가죽. 재봉용으로는 극상의 아이템이다. 그걸로 재봉을 하면 스킬 숙련도가 크게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비싼 가격에 팔 수도 있을 거야.'
가죽뿐만이 아니었다.
유니콘의 뿔은 마법적인 성능이 탁월해서 스태프의 주재료가 된다.
무기류 가운데 가장 비싼 마법 스태프!
대장장이 스킬과 재봉 스킬을 향상시키고, 덤으로 아이템도 제조해서 팔아먹을 수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콜드림의 해방도, 뱀파이어의 보물 창고도 중요하지만 이들 몬스터와의 사냥도 쉽게 찾아오기 힘든 선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다시금 메세지 창이 떠올랐다.
띠링!
『고대 인간들이 세운 영웅의 탑
전투를 추종하던 부족 헤라임들은 베르사 대륙 곳곳에 흩어져서 영웅의 탑을 건설했다.
미개척지와 오지 들에만 있는 12개의 영웅의 탑.
헤라임들이 어째서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다.
총 5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웅의 탑.
다른 이름으로는 중급 수련관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만약 3층 이상에 오른다면 헤라임의 힘과 기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난이도 : 확인 불가.
보상 : 각 층마다에서 헤라임들이 준비한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음.
퀘스트 제한 : 토둠의 뱀파이어들이 주는 퀘스트를 받아들여야만 수행 가능.
기초, 초급 수련관을 통과한 사람들만 영웅의 탑에 오를 자격이 있다. 』
위드에게는 무조건 퀘스트를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되었다.
두 번째 퀘스트.
영웅의 탑은 베르사 대륙을 아무리 찾아 헤매도 발견하기 힘들던 중급 수련관이었다.
바로 그 중급 수련관이 퀘스트의 형식으로 열린 것이다.
'최소한 3층까지는 가야 해.'
난이도 확인 불가!
기초 수련관과 초급 수련관의 난이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기초 수련관이 가공할 인내심을 바탕으로 한다면, 초급 수련관은 어두운 통로를 걸으며 쉴 틈을 주지 않고 덤벼드는 적을 통해 집단 전투에 대해 이해해야만 했다.
전투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절대로 깨지 못할 관문.
당시 위드가 초급 수련관을 통과했던 시절에, 베르사 대륙에는 불과 400여 명의 통과자들만이 있었다.
'지금이야 숫자가 많이 늘었겠지만.'
검치 들도 초급 수련관에서 무예인으로 전직했다.
이제 초급 수련관의 존재 자체도 비밀은 아니게 되었다.
그럼으로 인해 기초 수련관을 통과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초급 수련관에 도전했다.
실패를 맛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노력 끝에 성공도 많이 했다. 이제는 최소 3,000명 정도는 초급 수련관을 통과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중급 수련관을 통과한 사람은, 많이 쳐주더라도 150명이 넘지 않으리라.
이 수련관의 관문을 넘으면 그들 중 1명이 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스킬과 능력을 갖추게 된다.
위드는 결심했다.
"일단 제가 토둠에 잠입해 보겠습니다. 유니콘과 페가수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아보고, 또 그들의 약점도 살펴봐야 하니까요."
"안 돼요!"
"그건 자살 행위에요!"
일행은 다들 만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위드의 고집을 꺾기는 무리였다.
"우리가 토둠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정보는 필요합니다. 그러니 어차피 누군가는 침입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형님, 절 빠드리면 섭섭하죠."
페일과 제피가 잠입에 동참하려고 했다.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페일 님은 이 일행에서 저보다도 훨씬 중요한 전력입니다."
"예?"
"공중 몬스터인 유니콘과 페가수스를 잡으려면 궁수의 조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요."
페일은 부인하지 못했다.
이는 바로 궁수들의 특징으로. 파티에 속하면 그 전력을 상당히 상승시켜 준다.
방어력은 약해도 워거리 공격으로 적의 생명력을 빼앗는게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공중 몬스터를 상대해야 할 때에는 궁수야말로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화령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저라도 같이 갈게요."
"화령 님도 안 됩니다. 위험한 순간에 유니콘들을 재울 수 있는 건 화령 님뿐이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위드 님과 같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그리고 우리둘이 해결하지 못할 정도의 숫자가 덤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발각될 확률이 높아서 은밀한 정찰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괜찮겠어요?"
"몬스터 무리를 살피는 게 처음도 아니니까요."
화령은 애틋함과 불안함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까지 돌아오실 건데요?"
"놈들을 정탐하려면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 정도는 거릴 겁니다."
"네?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려요?"
"토둠은 넓은 성이니까요. 전체를 확인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입구 근처만 확인해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외에도, 토둠에 대해 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위드는 놈들을 철저하게 정찰할 작정이었다.
토둠의 지리를 파악하고, 적들의 숫자와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또한 가장 안전한 길, 유니콘들과 패가수스들이 다니지 않는 곳들만을 찾아야 한다.
퀘스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일단 받은 퀘스트는 보상에 눈이 멀어서라도 성공해야만 한다.
유린이 선뜻 자신의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오빠, 내 스케치북을 쓸래?"
"응?"
"몬스터들이 있는 곳이나 함정 들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편하잖아."
"아!"
일리가 있는 말!
모험가와 화가 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스킬이 있다. 모험가들이 만들어 낸 지도의 경우에도 정확한 좌표와 함정이나 던전에 대한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화가들의 정밀한 그림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난 그림 그리기는 배우지 않았는데."
"내가 전수해 줄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위드는 짧은 시간 동안 유린에게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스킬을 습득하는 방법은, 간단히 사과를 그리면 되었다. 위드의 지혜나 손재주들이 예사롭지 않아서 웬만한 스킬들은 쉽게 배워 버리기 때문이다.
그사이 화령은 이리엔과 함께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조각술이 저렇게 뛰어나신 분이 이제 그림까지 그리게 되다니요."
"정말 엄청난 작품들을 많이 만드시겠죠? 위드 님의 감수성이라면 충분히 그럴 거예요."
하지만 정작 위드가 그린 그림은 못 봐 줄 정도였다.
쥐가 한 입 갉아 먹은 사과!
둥글지 않고 참외처럼 길쭉한 사과!
간단한 사과 하나를 그리는 데에도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다.
미술시간마다 졸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려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장비로 스케치북과 연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은 크레파스와 물감을 이용해서 색칠을 했다.
위드는 그런 재료들이 없었기에 아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림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각술도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다기보다는 억척스러운 노력으로 쌓아 온 기술이었다.
스킬 숙련도를 위해서 끊임없이 조각했다.
그리고 조각을 할 때마다 조금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서 팔아 보겠다는 사심!
매번 집중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빠르게 결점들을 수정해 나갔다.
그런 위드였기에 그림도 잘 그리리라고 여기는 것은 큰 오산이었다.
아직까지 그림 그리기를 배우지 않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띠링!
『- 완성된 그림이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손재주와 예술성 덕분에 스킬 습득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 스킬 그림 그리기를 습득하셨습니다.』
『- 스킬 물감 칠하기를 습득하셨습니다.』
화가로서 필수적인 두 가지 스킬을 전수받았다.
사실조각사로서도 물감 칠하기는 상당히 요긴하게 쓰이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워래 재료의 색깔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완성된 조각품에 색을 칠하게 되면 다른 느낌을 주는 게 가능하다.
위드도 알고 있었고, 조각사 길드에서 배울 수도 있었지만 현재까지 배우지 않았던 기술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료 값도 아까운데 물감까지 살 수는 없어!'
자린고비 정신으로 쓰지 않았던 기술.
사실 물감을 칠하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완성된 조각품의 가치가 높아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반대로 하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각 재료와 색상이 맞지 않거나, 물감 칠하기 스킬의 수준이 너무 낮을 경우에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완성된 조각품에는 가능한 손을 대지 않는 편이 낫다.
위드는 유린이 건네주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품에 넣고 나서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죽으면, 적이 어느 정도나 많이 있는지 유린을 통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전력으로 어림없는 수준이라도, 여기까지 온 이상은 싸워 봐야 할 테니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위드는 보무도 당당히 토둠의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고 고독하기 이를 데 없다.
화령이 한숨을 쉬었다.
"휴! 성공하셔야 될 텐데."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유니콘과 패가수스 들이 있는 성에 혼자 들어가다니,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에 선뜻 나서 주는 사람도 필요 했다.
"역시 제자는 잘 길렀지."
검치가 흐뭇하게 웃었다.
검둘치는 서둘러 검부터 꺼냈다.
위드가 완벽한 정찰을 마치고 올 때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멍하니 놀고 있느니, 그사이에 무기술 스킬이나 향상시키는 편이 좋다.
제피는 낚싯대를 들고 근처에 강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페일은 메이런과 함께 인근엣 토끼와 새를 잡으러 떠났다.
다시 토둠을 공략하게 된다면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 * * * * * * * * * * * * * * * * * * *
토둠의 안으로 향하던 위드의 거침없는 발걸음은,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180도 바뀌었다.
살금살금!
발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걸었다.
일행이 보이지 않는 지점부터였다.
'발각되면 안 돼.'
페가수스나 유니콘 1마리라면 싸워 볼 만은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적들이 모여들면 곤란하다.
위드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서 벽에 몸을 붙이고 앞으로 기어 다녔다.
추하지만 상관없었다.
"생존이 우선이야.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중에 스승이 있다고 했지. 쥐나 바퀴 벌레가 잘 안 죽고 도망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위드는 인간이 아닌 쥐나 바퀴 벌레에게서도 교훈을 얻었다.
죽고 나서 후회해 봐도 때는 이미 늦을 뿐!
띠링!
『- 스킬 네발 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스키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웅크리고 바닥을 기다 보니 어느덧 스킬을 사용하기에 최적의 자세가 된 것.
"사용한다."
위드는 조용히 스킬을 사용했다.
그 순간!
위드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
샤샤샤샤샥!
바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잽싸게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위드는 흥분을 느꼈다.
이 저열한 쾌감.
그 누가 위드의 기어 다니는 속도를 따라올 수 있겠는가!
'역시 난 최고야.'
매우 사소한 부분에서 느끼는 자부심이었다.
토둠은 굉장히 거대한 성들로 이루어졌다.
로자임 왕국의 세라보그 성 같은 곳들이 수십 개나 몰려 있었다.
정찰의 기본은 은폐!
위드는 몸을 바닥에 바싹 깔고 은폐물들만 찾아 움직였다.
높은 첨탑 근처에는 은빛 유니콘들과 붉은 페가수스들이 날아다녔다.
진혈의 뱀파이어족들이 진을 치고 있던 모라타 마을에 잠입했던 적도 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뱀파이어들은 지상을 천천히 걸어 다닌다. 대부분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니 정찰병들의 눈을 피하기는 쉬운 편이었다. 다만 피를 흘리게 된다면 뱀파이어들은 훨씬 먼 거리에서도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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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프로그램 위드. 정규 방송의 시작!
약속된 열나흘이 지나고, 검치 들은 모두 레벨이 270의 고지를 넘어섰다. 스킬을 연마하지 않고, 주로 퀘스트에 전념하면서 명성을 쌓았던 이들까지도 최하 274레벨에 도달했다.
검치와 검둘치 등 사범 급들의 레벨은 279 정도 였다.
힘이 약해서 페가수스와 유니콘에게 당할 수는 없다!
이런 뚜렸한 목표가 생기자, 쉬엄쉬엄하는 게 아니라 잠시의 휴식도 없이 사냥을 해서 성과를 거두어 낸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검치 들의 숫자는 60명이나 줄어들었다.
전투의 와중에 하나 둘 죽어서 353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검치 들은 면목이 없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퀘스트가 실패할지도 모르겠구나."
검둘치가 사나이답게 깨끗하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관찮죠, 위드 님?"
"잘될 거예요."
이리엔과 화령이 급히 나섰다.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들이 축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딱해 보였다. 하물며 검치 들은 자존심 빼면 시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초반부터 전력에 큰 타격을 입어 퀘스트가 실패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들도 심했다.
"사형"
"그래. 위드야. 무슨 질책이라도 달게 받겠다."
"아닙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솔직히 피해가 너무 컸어. 우리 때문에 일이 어긋난 것 아니냐?"
"퀘스트에는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세요."
"정말 괜찮겠느냐?"
"전력상으로는 시작하기로 했을 때부터 열세였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기회는 있을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줘서 고맙구나. 이퀘스트에서 위드 네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마."
검둘치가 단단히 약속을 했다.
그가 약속을 하면 검치 들 전원이 따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위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분간이겠지만 사형들을 실컷 부려 먹을 수 있겠군.'
검치 들은 전투에 있어서 전문가들이다. 그들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큰 강점이었다.
어떤 몬스터라도 일단 덤비고 볼 정도로 용기와 자신감이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일로 완변하게 위드의 지휘를 따르게 되었다.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점점 본색을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긍정적이었다.
'오히려 60명밖에 죽지 않다니 대단해.'
위드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예견하고 있었다. 숨히 가쁠정도로 빠르게 사냥을 하면서 성직자가 이리넹 1명으로 감당이 될 리가 만무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살았군.'
100명에서 최대 170명까지 죽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심하면 그런 막대한 피해만 입고 레벨을 올리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별다른 정보도 없는, 모르는 사냥터들을 전전하면서 레벨을 올리기란 매우 힘들다. 그런데 불과 60명의 피해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위드와 검치의 눈이 마주쳤다.
-어떠냐. 네 사형들의 실력이 그럭저럭 쓸 만하지?
검치도 귓속말을 보내는 법을 배우고 능숙하게 써먹었다.
혹시라도 여자 친구가 생겼을 때에 귓속말도 보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그래서 배운 귓속말이었는데 정작 위드에게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말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형편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해낼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흠흠. 나도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검치도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사범들이 수련생들을 이끌고 전장을 돌아다닌다. 퀘스트를 위한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사형제 간의 의리가 돈독해진 시간이었다.
'둘치가 대사형답게 애들을 잘 다뤄. 배려심도 깊고, 동생들을 아우를 줄 아는군. 삼치는 좀 멀었어. 싸울 줄만 알지 극한 상황에서의 판단력은 떨어지는 편이었지."
사범들과 수련생들에 대한 평가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치는 승부욕이 너무 강해서, 빨리 그리고 많이 잡으려고만 해. 잘될 때는 좋지만 조급함은 일을 망칠 수 있지. 오치는 힘에 의존한 검술을 펼치느라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부족하더군. 검십팔치였던가? 인승이 이녀석은 뜻밖에도 애들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도장에 나온 지도 벌서 17년이나 되었던가. 검술은 조금 부족해도, 어떤 일을 시켜도 믿고 맡길 수가 있겠어."
로열 로드에서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전투를 하고, 탐험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이 가진 됨됨이와 품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매시간마다 결정을 해야 하고, 믿고 따르는 수련생들을 챙겨야 된다. 개개인이 가진 그릇의 크기가 쉽게 드러났다.
검치가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위드뿐이었다.
'명성이란 운으로 만들어지기는 해도, 그것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
검치도 위드의 과거와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 들어 본적이 있었다.
마법의 대륙에서는 위드는 어려운 던전, 남들이 깨지 못하던 곳을 혼자 격파해 나가면서 전설을 만들어 갔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던전을 사냥하고 퀘스트들을 해결한다.
그 당시에 보여 주었던 절대적인 카리스마!
난공불락의 성들이 부서져 나갔다.
세력을 과시하던 길드들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위드에게 척살당하기도 했다.
위드는 홀로 끊임없이 강해졌다.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평가받던 던전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퀘스트들을 완수 하면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아이템들을 독식했다.
모든 기록들이 수정되었다.
위드를 막을 수 있는 던전은 없었다.
일부러 죽고 싶어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무작정 부딪치고 싸운다. 강해질수록 죽음과 명성을 잃어버리는 걸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끊임없이 도전을 한다.
마법의 대륙에서 위드의 명성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때의 위드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마법의 대륙, 유일무이한 전신 위드!"
단신으로 1마리으 ㅣ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던 위드의 캐릭터.
그 장소에 수천의 무리가, 왕국을 지배한다는 강대 길드 둘이 전쟁을 벌이려고 모여 있었다. 그런데 정작 위드가 등장하여 그 평원을 가로지르자 모두 슬금슬금 물러났다.
위드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그가 가는 길을 막지 않기 위해서 대부대들이 물러났다.
이런 것들은 위드가 만들어 낸 숱한 일화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고독한 전신 위드.
어떤 사내의 가슴이라도 뒤흔들어 놓는 투혼을 가졌다는 세간의 평가였다.
그런데 마법의 대륙이 아닌 로열 로드에서도 위드는 매우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검술 실력 하. 도장에서 기본기를 철저하게 1년간 배웠다. 로열 로드에서는 적당히 써먹을 수 있겠지. 스킬과 스탯이 있는 이곳에서는 육체를 활용하여 발휘하는 극한의 검술까지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순발력과 응용력, 상대의 허점을 잘 파악하기만 하더라도 전투는 어렵지 않다. 그때 도장에서 보여 준 독기라면 이렇게 빨리 강해지는 건 당연한다. 요즘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강인함이지. 어디서라도 살아남을 것이고, 강해질 수 밖에 없을 거야.'
검치는 스스로의 기준으로 로열로드의 전투가 쉽다고 여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바로 코앞까지 달려들어서 독화살을 쏘아 대는 몬스터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꼬리를 휘드르고, 검과 창을 내지른다.
흉악한 몬스터들은 더 강한 힘으로 중병기를 휘두르기도 한다.
이런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험과 실력이 필요한데, 위드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적응했다.
타고났다고밖에 볼수 없는 투지와 승부욕.
몬스터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경험치와 아이템, 꺽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목표는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뿐.
위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잡초처럼 살아남으면서 성장했다.
이미 상당한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가 나오는 방송은 군중을 열광하게 만든다.
평범하게, 보통으로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들은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 못한다.
희망과 용기, 투쟁심, 집념.
위드의 행동들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검치는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위드의 그릇을 볼 수 있으리라 여겼다.
KMC미디어에서는 방송팀 3개가 이번 프로그램에 매달려 있었다.
"음향 보정은?"
"거의 끝나 갑니다!"
"출연자들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음악들 선곡해 봐. MC는 누굴 섭외했지?"
"신혜민은 안 되겠죠?"
"그럼 말이라고 해! 신혜민은 주요 모험가들 중 1 명 이잖아."
"배선희의 스케줄이 비어 있습니다."
"그럼 투입할 준비해!"
방송팀에서는 급박하게 모든 준비들을 맞춰 갔다.
완벽한 준비를 갖춰, 영화를 능가하는 영상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무려 6시간의 장대한 스토리!
최대한 줄이고 줄여도 6시간 정도는 방송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영상만을 가지고 편빙르 한것이라서, 추후 퀘스트가 진행되면 분량은 훨씬 더 늘어난다.
연출자들은 난색을 표시했다.
"더 이상 줄일 수가 없습니다."
토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알려 줘야 했다.
경관들도 보여 주고, 초반에 얻은 몇몇 개의 퀘스트들은 재미도 있어서 시청률을 위해서 빠뜨릴 수 없었다.
강 부장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국장님과 담판을 짓기로 하지."
강 부장은 국장실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사정을 설명했는데, 국장은 간단히 해결책을 제시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탈리라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지요. 매주 1회 정도씩 토요일에 방송을 하면 되겠군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가?"
"위드의 모험을 방송하기로 했을 때부터 정규 프로그램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었던 것 아님니까?"
"국장님 말씀이 맞기는 합니다만…."
토둠의 여행과 퀘스트의 분량이 상상외로 많아서 특집 프로그램으로는 다 소화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방송을 할까도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하지만 퀘스트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보류하고 있던 참이었다.
국장이 말했다.
"강 부장,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가 있습니까?"
"옛?"
"모험이란 무엇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더욱 흥미로운 겁니다. 막 떠나기 전의 설렘과 긴장감. 로열 로드에서 사냥과 탐험을 떠날 때 강 부장도 그런 느낌을 받아 보았죠?"
강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파티를 결성하고, 힘을 합쳐서 사냥터로 떠날 때의 느낌!
그 느낌이 몸서리쳐지도록 좋아서 매번 일부러 큰 사냥터 근처에서 파티를 구했다.
약한 이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가끔 힘과 능력을 과시하면서 친구들을 사귀었다.
"모험입니다. 우리는 모험을 방송하는 것이지 이미 다 만들어진 영화를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는 게 아닙니다."
뉴스처럼 사실만을 전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본까지 만들어 놓고 진행한다면 모험을 중계하는 의미가 없다.
실패한 모험도 성공한 모헙도,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 큰 즐거움이 된다.
강 부장은 반성했다.
'진홍의 날개 길드 때문에 내가 너무 소심해져 있었어.'
스콜피온 왕의 저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 결과 길드는 해체되고 당사자들은 몰락하고 말았다.
크게 실패한 경우들을 떠올리며 걱정하다 보니 용감하게 나서지 못했던 것.
'모험은 떠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우리 방송국에서 해야 할 일은 이 모험을 중계해서 더 많은 이들을 기쁘게 만드는거야.'
국장의 말이 방침이 되었다.
굳이 어느 한쪽으로 분위기를 유도해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부장은 연출자들에게 지시했다.
"방송팅! 지금까지 짜 놓은 시나리오들은 모두 폐기해! 그리고 배선희 씨한테도 연락해."
"넷, 알겠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진행자가 필요 없다고 전해."
"예?"
"이렇게 된 바에야 있는 모험 그대로를 보여 주기로 한다."
꾸미고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준다. 어떠한 사전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노출해서 보여 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전부 비공개로! 직접 보고 듣고 시청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 줘! 영상과 음향은 최고 수준으로 하고, 모험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마!"
방송 프로그램은 위드가 나온다는 사실마저도 철저히 숨긴 채로 준비되었다.
"그런데 프로그램 이름은 뭐로 할까요?"
"응?"
"새로 편성하는 프로그램이니 이름부터 정해야 하잖습니까."
"음. 토둠에 간 모험대는 어때?"
"너무 설명식인 것 같습니다."
"그럼 피의 모험."
"뱀파이어들이 피를 상징하니까 듯은 맞긴 한데, 왠지 잔인한 느낌이 …. 그리고 위드의 모험이 이걸로 끝나는 것도 아닐 텐데요."
"역시 그렇지?"
프로그램의 흥망성쇠는 제목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 부장과 연출자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수백 개의 제목을 놓고 갈등했다.
심사숙고 끝에 강 부장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위드."
"예?"
"위드를 프로그램 이름으로 하자. 위드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께하자는 뜻으로만 알 거야, 괜찮아."
"그러다가 정말 위드가 출연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요?"
"그때는 대박이지,"
"자연스럽게 방송 내용을 통해 알려지도록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강 부장과 연출자들은 음흉한 웃음을 교환했다.
정기적으로 KMC미디어의 프로그램에 나온 그 인물이 전신 위드였다면!
그때의 충격파는 엄청날 것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프로그램 위드는 토요일에 첫 방송을 했다.
뱀파이어들의 땅에 떨어진 장면부터 뱀파이어 퀸을 구출하는 장면까지가 분량이었다.
첫 회의 평균 시청률은 0.6%.
게임 방송사들만을 놓고 비교했을 때에는 12.8%의 다소 평범한 점유율로 방송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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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첫 MT
정신과 박사 차은희는 환자들을 상대로 상담을 해 주고 있었다.
"선생님,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 남자친구는 다 좋은데 너무 가난하거든요."
"직업은요?"
"회사원이에요. 그런데 집안 빚 때문에 모아 놓은 돈이 없어요. 그리고 실은… 얼마 전에 소개팅을 받은 남자가 있는데요, 나이도많고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전문직이거든요. 저한테 굉장히 잘 해 줘요."
지금은 막 결혼 적령기의 여성을 상담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와는 헤어지고, 전문직인 그 사람을 택하실건가요?"
"모르겠어요. 정말 결정할 수가 없어요. 이런 속물인 제가 너무 미울뿐이에요. 그래서 밤에 잠도 잘 수 없고, 두통이 심해요."
흔히 있는 우울 증상.
차은희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은 고민해 보는 현실이니까.'

차은희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마음이 편해질 수 있도록
결정을 도울 뿐이었다.
"환자 분."
"네?"
차은희는 차트를 훑어보았다.
"지금 환자 분의 나이가 서른 살이시네요."
"네."
"한 사람의 평균 수명을 아흔 살로 잡았다고 쳤을 때, 환자 분은 이미 인생의 삼분의 일을 사신 거에요."
"벌써 그렇게 시간이……."
"앞으로 10년 후면 마흔 살이 되겠죠? 20년 후면 쉰 살이에요."
"……."
"인생이라는 게,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순식간에 흘러가 있는 것 같아요. 평생에 한 번뿐인 시간을 사랑하는 남자와 보낼지, 아니면 넓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면서 지내고 싶은지 본인의 마음의 소리부터 들어 보세요."
차은희는 부드럽게 일러 주는 것으로 환자와의 상담을 마쳤다.
가벼운 우울증의 경우에는 서너 차례의 대화만으로도 증세가 호전되기도 하였으니 며칠 두고 경과를 지켜볼 셈이었다.
"에효, 이걸로 오늘 아침 상담은 대충 끝이 난 건가?"
옆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들은 무척 감동한 얼굴이었다.
"대단하세요, 박사님!"
인생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평범한 몇 마디의 말로 환자의 심리 상태를 바꾸어 놓기란 굉장히 어렵다.
차은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감탄할 필요 없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실은 전에 상담했던 어떤 환자의 이야기야."
"뭐 하는 환자였는데요?"
"소설 작가."
"네? 작가도 고민이 있어요?"
"작가도 인간인데 당연하지.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괴로움, 집에 냄비 코팅이 벗겨져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마다
바닥을 벅벅 긁어야 한다는 압박감!"
"……."
방어구 등의 장비 세트가 인간과 호환되지 않아서 구하기 힘들다. 오크 대장장이들의 형편없는 솜씨로는 조악한 물품들밖에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오크들의 개체 수도 무섭게 증가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점심시간에도 로열 로드에 접속해야지.'
차은희는 요즘 들어 로열 로드만 떠올리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건강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나이. 검둘치!
오크 세에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사람이었다.
아직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진 않았지만,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 하는 태도에서 신중함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간혹 황당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마음이 끌렸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을 때도 많았다.
"후훗."
차은희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검둘치와 이야기를 나누며 부족한 솜씨로 생선이라도 구워 먹는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차은희는 혼자만 기뻐할 수 없기에 조심스러웠다.
"서윤이도 빨리 말을 해야 될 텐데."
서윤의 치료에 진전이 있었다.
로열 로드에서이지만 첫마디를 떼어 놓게 된 것!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금세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괜찮아.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리긴 했지만, 예전처럼 다시 돌아올수 있다는 거니까."
이럴 때일수록 억지로 서두를 필요는 없다.
차은희는 서윤을 독촉해서 말을 하도록 시키지는 않았다.
강제로 끌어내려고 하면 오히려 더 깊이 숨어 버리는 법이다. 10년이 넘도록 기다려서 지금까지 왔으니 좀 더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도록. 자연스러운 계기가 생기도록 지켜볼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업은 잘 받고 있을까?"

차은희는 조금 걱정되었다.
서윤도 학교를 다니고는 있었다.
젊은 나이에 병원에만 머무르면 나중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된다. 그리하여 중학교 때까지는 가정교사들을 통해 공부를 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녔다.
물론 특수한 아이들을 위주로 교육하는 곳이었지만.
그리고 작년에는 대학교에 입학도 했다.
사정상 매일은 나가지 못하고 가끔 학교에 가는 정도였는데 올해에는 오늘 첫 수업에 들어간 것이다.
"괜찮겠지. 무슨 사고를 저지를 애도 아니고, 설마 학교에서 내가 모르고 있을 때 또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차은희는 괜한 기대를 가져 보았다.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현은 비싼 학비를 내고 다니는 것이니만큼 수업을 빠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남들은 미팅이며 동아리 활동, 학회 활동, 교내 방송 활동 등을 활발히 하는데 그는 오직 수업만 들었기 때문이다.
"평균 C는 받아야 된다. 그래야 재수강을 안 해도 돼."
학사 경고나 낙제를 받게 되면 성적 제한에 걸려 졸업을 못 한다. 그러면 비싼 학비를 내고 계속 다녀야 하니, 어떻게 해서든 수업을 충실히 들었다.
다행히 대학교에서는 출석률만 꾸준하면 웬만해서는 C정도의 학점은 준다는 사실이 희망적이었다.
이현은 매번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교수에게 눈도장을 착실히 찍었다.
"너도 정동민 교수님 소문 들었어?"
"응. 강의를 정말 잘하신다더라."
"다음 학기에는 꼭 그 강의 신청해야지."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이 떠드는 이야기들이 귓가에 들려 왔다.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이 절반쯤, 나머지는 로열 로드에 대한 대화들을 나누는 편이다.
"근데 오늘은 메디움에서 사냥할 거지?"
"장비부터 맞춰야 돼."
"전격 속성 방어가 있는 세본 세트."
"돈은 모아 놨어?"
"한 달 전부터 모으고 있었어. 오늘 구매하기로 했는데 세본 세트의 착용감은 어떨까. 정말 기대돼."
"휴. 난 언제 세본 세트를 입을 수 있지? 부러워, 정말."
이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배어 나왔다.
'역시 학생들이군.'
세본 세트의 현금 구매 가격은 42만원!
레벨 200대 중반 정도가 무난하게 착용할 수 있는 방어구였다.
'하기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아직은 레벨이 대체로 낮겠지.'
다크 게이머인 자신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학생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때 다른 학생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말들이 들렸다.
"저 복학생 오빠 또 우릴 보고 웃고 있어!"
"진짜 음흉하게 웃는다."
"완전 저질이야."
이현은 학과 내에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만 향했다. 학과 활동도 안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데다, 허풍쟁이로 낙인찍힌
탓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이현은 쉬는 시간에는 교재라도 틈틈이 보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주위의 반응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공부하는 척 하기는……."
"수업 시간에 입 쩍쩍 벌리고 하품이나 하지 말든가."
이현은 이래저래 욕을 먹을 팔자였다. 선입견이 있으니 사람 자체를 나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맞는 면도 있었다.
이현이 공부를 해서 받으려고 하는 학점의 목표치는 2.0!
'학사 경고는 받지 말아야지. F도 없어야 돼.'
제적이나 낙제를 면할 정도로만 공부를 했다.
출석은 부지런히 해도, 교수가 내주는 리포트들은 몽땅 빼먹었으니 주변의 평가가 좋을 리가 없었다.
'내 팔자가 이렇지 뭐.'
이현은 체념하고 학교를 다녔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애초에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특별했다. 학생들의 기분이 들떠 있었다.
"올해에는 어디로 간대?"
"몰라. 그건 절대 안 알려 준다니까."
"작년에는 정말 재미있었대!"
이현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말에 어디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건가?'
이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강의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교수가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강의 내용은 끝났지만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이번 MT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대학교 첫 MT!
다른 학생들은 선배나 친구 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현만 모르고 있던 일이었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군!'
이현은 당연히 MT를 빠지려고 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몬스터를 한마리라도 더 때려잡고, 조각품을 한 개라도 더 만들 테니까!

하지만 교수는 그런 이현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가상현실을 잘 알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험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MT는 놀고 먹기 위해서 떠나는 게 아닙니다. 각 조마다 목표별 성과 점수를 내서 교수들이 전공 성적에 반영하게 될 텐데요. 불참한 학생은 당연히 학점이 나가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세요."
학생들은 환호했다.
MT를 통한 전공 성적의 반영!
이현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교수님, 이번 여행의 목표가 뭔데요?"
"어떤 컨셉으로 MT를 가는 거에요?"
가상현실 학과의 MT는 독창적이었다. 술을 마시고 노는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의 장으로 활용한다.
매번 MT마다 특정 컨셉이 있었는데, 그것은 해마다 바뀌었다.
물론 교수는 절대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조 편성이 끝났을 때에 공개됩니다. 그럼 오후에 대강당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참,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서윤 학생도 출석했더군요. 혹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되지만 그 학생도 MT에 갈지 모르니, 남학생들은 기대해도 괜찮겠지요?"
순간 남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현은 다른 수업들을 마치고 나서 천천히 대강당으로 향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 학생들로 우글거리는 잔디 광장이나 시청각실도 한가했다. 학교 식당이나 매점에서도 사람들을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났나 보군.'
이현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MT에 참여하기 위해서 가긴 하지만 어차피 마음이 없었으니 대충 시늉만 낼 작정이었다.
'학점은 받아야 되니 참가에 의미를 두자.'
이현은 천천히 걸어서 대강당에 도착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남자들로 아우성이었다.
"밀지 마!"
"어디야, 어디 있어?"
"저쪽!"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안달했다.
"전자공학과에서 나왔습니다. 불쌍한 공대생입니다. 우리도 구경 좀 하게 해 주세요."
"공대생은 자제하세요!"
"맞아요. 그녀를 보고 높아진 눈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요."
"크흑! 저희는 여자 친구를 사귀기는 틀렸으니 부디 구경이라도……."
뒤쪽에 있는 남학생들로부터 간절한 호소들이 메아리쳤다.
이현은 간신히 사람들을 뚫고 대강당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는 가상현실 학과의 선배들이 신원을 확인하고 들여보내는 중이었다.
"죄송하지만 다른 학과 학생들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선배들은 이현도 제지했다.
"저도 가상현실 학과입니다."
"예?"
"1학년입니다."
이현이 담담히 대답했을 때에도 선배들은 서로의 얼굴만 돌아봣다.
"신입생이라는데 누구야?"
"누구 아는 사람?"
이현을 아는 선배는 한 명도 없었다.
워낙에 죽은 듯이 학교를 다녔기에 벌어진 일.
여자 선배가 곤혹스럽다는 듯이 얘기했다.
"실례지만 학생증을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여기요."
이현은 학생증을 꺼내 보여 줬다.
"맞네요. 그럼 들어가세요."
"예."
이현은 학생증을 보여 주는 것으로 무사히 입구를 통과해서 대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가상현실 학과의 신입생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특이한 점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정말 예쁘다."
"여신이야. 여신."
"어쩌면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부디 그녀의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녀가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군대를 두번 가도 좋아."
남자들은 열벙에 걸린 사람들처럼 중얼거렸다. 여자들도 비슷했다.
예쁜 여자는 여자들도 좋아한다. 질투심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그것마저도 초월해 버리는 상대라면 선망하기 마련.
이현도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대체 뭘 보고 있기에 저러지?'
그리고 이현은 발견할 수 있었다.
서윤!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맑고 깨끗한 피부에 사슴처럼 고운 눈망울.
인간의 눈이 이렇게 예쁠 수는 없다.
잘 어우러진 단정한 눈썹과 이마. 콧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래 보고 있으면 빠져 들어 버릴 것 같은 빛나는 얼굴.
심지어 손도, 발도, 몸매도 예쁘다.
입고 있는 옷마저도 절묘하게 어울려서, 오직 그녀만을 위해 탄생한 것 같다.
온몸에서 광채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현도 심하게 놀랐다.
"커헉!"
서윤이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니!
'매력 스텟을 최대치까지 찍은 줄로만 알았는데.'
실물에 비하면 로열 로드에서의 미모가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다.
'하기야 로열 로드에서는 투박한 갑옷을 입고 다녔으니까.'
이현은 묵묵히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어떤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갑자기 이현이 있는 쪽을 휙 돌아보았다.
"헉!"
이현은 재빨리 여학생들의 뒤로 숨어서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생존을 위한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
로열 로드에서 서윤에게 많은 죄를 지었다.
몰래 만든 그녀의 조각상만 몇 개던가!
매번 피하고 주눅 들어 있던 게 일상화되다 보니 현실에서도 눈길부터 피하려는 것이었다.
서윤은 이현이 숨어 있는 곳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이현은 여학생들 틈에서 나올 수 있엇다. 그리고 슬며시 서윤을 피해 반대편으로 향했다.
뒤에서 여학생들이 몰래 소곤거렸다.
"방금 봤어? 눈길 피하는 거."
"어우, 소름 돋아!"
"진짜 주책이야."
다시금 오해를 받고 있었다.
어느새 싹터 버린 불신의 골은 너무나도 깊어진 상태.
돌이킬 방도가 없었다.
MT는 교수들과 선배들이 주도했다.
"올해의 MT는 섬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가기로 한 승봉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선배들이 취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정작 학생들의 관심은 오직 서윤에게만 향했다. 그녀의 맑은 눈을 보느라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서윤의 주변에는 당연히 사람이 많았다.
그러면서 신입생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도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저 사람이 서윤 선배구나. 소문이 과장된 줄 알았는데 저렇게 예쁠 수가 있다니."
"연예인보다 더 예쁜 것 같아."
"그런데 왜 친구가 없을까?"
"몰랐어? 서윤 선배님은 어릴 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말을 할 수 없대."
"정말? 그래서 저렇게 무표정한 거로구나."
"학교도 아주 가끔 나오는데, 올해에는 처음 온 거야."
"진짜 여리고 순수한 사람 같아."
이현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전부 속고 있어!'
어떻게 서윤이 여리고 순수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서윤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이현이 잘 알고 있다.
그녀가 3박 4일 동안 몬스터들을 학살하던 장면을 보았다면 여리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웬만한 수준의 유저들 따위는 일검에 베어 버릴 정도의 여전사!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에는 이현조차 섬뜩할 정도였다.
'저렇게 강한 여자를 보고 어리다니.'
거기다가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있다.
이현도 그녀가 말을 못하는 줄로 깜박 속았다. 그런데 본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분명히 친구라고 말을 했다.
'떨어뜨릴지도 모를 아이템이 아까워서 그리고 나를 잡아두기 위해서 친구 등록을 하려고 말을 했던 거지.'
그녀의 악독함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후에 이현은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 그녀가 접속했을 때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런데 전혀 대답이 없었다.
'흑돼지 가죽 옷. 돌려받을 필요도 없는 물건이라고 무시 하는 거지. 자기는 좋은 퀘스트를 하거나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느라, 내가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했어.'
서윤의 비정한 인간미!
이현은 주변인들이 속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선배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선 조 편성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번 MT는 여느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올해의 컨셉은 바로 야생입니다."
"야생요?"
신입생들 중에서 일부가 물었다.
야생이라는 말이 잘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 말 그대로 야생입니다. 정해진 숙소도 없고, 따로 준비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물건들은 어떻게 하나요?"
"직접 만들어야죠."
"예?"
"여러분은 각 조별로 알아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만 정해진 예산의 한도는 1인당 5만 원! 그 예산에 맞춰서 물건과 도구 들을 장만하여 MT에 참여해야 됩니다."
선배의 말에 신입생들은 기겁을 했다.
"세상에! 5만 원이라니!"
"5만 원으로 뭘 할 수 있지?"
신입생들이 전혀 호응을 하지 못하자, 선배가 덧붙였다.
"물론 5만 원이 2박 3일을 보낼 수 있는 예산으로는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을 잘 짜고 같은 조원들끼리 똘똘 뭉쳐서 헤쳐 나가면 되겠지요? 야생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서 교수님께서 학점도 부여해 주신다고 하니, 모두 열심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식당에서 먹는 괜찮은 밥 한 끼가 만 원인 시대였다. 그렇기에 1인당 5만 원이라는 돈으로 MT를 준비하기는 상당히 빠듯해 보였다.
이현은 다르게 생각했다.
'엄청난 호화 MT로군. 세상에 무슨 산에 가서 이틀을 자는데 5만 원이나 필요하지?'
아낀다면 일주일 생활비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다. 산속이라도 밤에만 조심한다면 신문지 1장으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리라.
이현에게 필요한 물품은 단지 신문지 5~6장! 혹시 그조차도 없으면 아예 맨몸으로 가도 괜찮다.
돌덩어리를 쪼개서 그걸로 땅을 깊이 파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자고, 나무뿌리를 씹어 먹으면서도 이틀은 버틸 수 있으니까!
"한 조는 8명씩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번 MT에서는 따로 선배들이 조를 정하지 않겠습니다. 원하는 사람들끼리 직접 조를 정해 주기 바랍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여자와 남자가 각각 3명 이상씩은 포함되어야 합니다. 지금 조를 정해 주세요."
신입생들은 일단 자신들과 친한 사람드루터 찾았다.
"선아야, 이쪽이야."
"재진아, 여기!"
각자 친한 사람이나 선배들에게 가서 뭉치는 것!
8명이 단단히 결속을 해야 하므로 대체로 잘 아는 이들끼리 한 조를 이루기 마련이었다.
이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나중에 빈자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되겠지.'
학점에 욕심은 없었으니 어떻게든 조 편성만 된다면 상관없다.
"동현아, 이쪽이야!"
"상호 선배, 우리랑 같이 한 조 해요."
이현의 생각대로 사람들은 각자 조들을 편성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이제 삼분의 일도 남지 않았다.
그중에는 안면이 있는 박순조나 이유정, 민소라도 조를 정하지 못한 듯 남아 있었다. 인맥이 넓지 못한 신입생들은 선배들보다 쉽게 조원들을 만들기 어려웠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은 불과 스무 명!
박순조가 이현을 보았다.
"이현 형님,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두 자리가 비어요."
기왕이면 모르는 이보다는 이현이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이현은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난 MT에 참석할 생각이 별로 없었거든."
"에이! 같이 가요 형님!"
"그럼 그럴까? 뭐 꼭 원한다면야."
이현은 예의상 살짝 튕겨 준 후에 박순조의 조에 합류했다.
설명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 이유정, 민소라, 최상준의 패밀리였다. 못 본 사이에 그간 신입생 여자 애들 두 명이 더 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홍선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주은희예요."
"이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명의 여자들은 이현을 내켜하지 않았다. 학과 내에서 평판이 상당히 안 좋았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끼어서 MT를 다녀오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이현은 긍정적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대학교 첫 MT가 은근히, 아주 약간은 기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현의 뒤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섰다.
대강당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그녀. 서윤이 이현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서윤은 MT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누구도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게 무서워서 스스로를 꽁꽁 속박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현을 발견했다.
'그 사람이야.'
로열 로드에서와 생김새가 똑같았으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우연히 만나서 동행을 하며 요리를 해 주고, 조각품을 만들었던 그 사람.
'마음이 따뜻해지는 조각품, 연인들을 만들었던 사람.'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이현에게로 다가왔다.
이현도 주변의 반응으로 서윤이 온 것을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탓이다.
"설마 너도 MT 가려고…요?"
서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현이 간다면 MT를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친구였으니까.
서윤은 친구 등록을 하기 휠씬 전부터 이현을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
"커헉!"
이현에게는 끔찍한 사태!
악독한 서윤이 이제는 MT까지 따라온다고 한다.
'그것도 정확히 나를 노리고 있어!'
로열 로드에서 괴롭히는 것으로 모자라서 현실에서까지 쫓아온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려고!'
이현은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미소를 지었다. 싫은 티를 내면 역시 후환이 두렵다. 로열 로드에서 어떻게 보복을 가할지 모른다.
'평소에 얌전하던 애들이 더 무섭지.'
살인자인 그녀이니 수틀리면 죽이려고 들지 어찌 알겠는가.
이현은 정말 힘들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썩은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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