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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조각사 18

3학년2반 | 2022.01.22 08:02:15 댓글: 0 조회: 86 추천: 0
분류인터넷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4265


달빛 조각사 18권





- 아르펜 제국 옥새에 담긴 기억
- 남자의 여행
- 날개
- 아르펜의 건축물
- 풀죽신교의 창설
- 위드의 노래
- 모라타 방어전
- 종전 협상
- 조각품의 역사
- 유령선
- 캡틴 더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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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펜 제국 옥새에 담긴 기억>



"게이하르 폰 아르펜!"

위드가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어 낸 황제의 도장은 조각술 마스터의 작품이었다.
베르사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제국의 황제.
아르펜 제국의 옥새!
위드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악어가 배부르게 먹고 졸려서 하품을 할 때 맺힌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과연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구나. 세상의 정의는 어긋나지 않았어. 역시 착하게 산 보람이
있었어."

일찍이 베르사 대륙에 출현한 적이 없었던 세기의 골동품이라고 할 만하다.
아르펜 제국의 옥새는 옵션만 보더라도, 조각품으로서 완전한 상태가 아니어도 누구나 탐낼 만한 물건이었다.

"완전한 상태가 아닌데도 이 정도의 작품이라니......"

지금 시점에서도 보석보다 백배는 가치가 큰 조각품이다.
마법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신성한 물건이라서 누구나 다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각품을 복원하여서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면 진정한 아르펜 제국 옥새의 권능이 눈을 뜰 것이다.

띠링!

-고전 시대 아르펜 제국 건물 양식들을 감상하셨습니다.
조각사로서 새로운 건물들을 관찰하게 됨으로써 소유하고 있는 마을과 성, 지역 등에 고전 시대의
건물들을 지을 수 있습니다.
고전 시대의 건물들은 매우 장엄하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며,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습니다.
건축비는 제법 비싼 편이지만 마법적인 효과가 부여되며 지역 내에 출생률을 증가시킵니다.
특수 건물들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아르펜 제국의 황궁
건축 비용 최소 8백만 골드.
전 대륙에 단 1개만 건설되는 건물입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대륙 전체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가장 높이 오르며, 기사들의 충성심이 증가합니다.
휘하의 귀족들이 배반할 가능성을 낮춥니다.
많은 시녀들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
매우 넓은 영토가 필요합니다.
논이나 밭을 황궁을 지을 터로 개발한다면 영주민들의 불만도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특수 효과 : 소재한 도시의 발달 속도를 최대로 만듦.
방랑 기사들이 충성을 바칠 확률을 높임.
외교적인 효과가 주어짐.

조각품의 추억 스킬을 통해서 퀘스트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따. 관찰을 통해 역사적인 고전 시대의 건물들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소득이었다.
아르펜 제국의 황궁은 사치의 결정판!
위드에게는 물론 건설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영주성 근처의 잡초를 뽑기 위해 고용하는 인부에게 드는 비용조차도 아까운 마당이었다.

『대형 콜로세움
건축 비용 최소 30만 골드.
검투사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용맹한 이들이 이름을 날리고, 관객들은 이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관람 수입을 거둘 수 있지만 유지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갑니다.
대형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것만으로도 영주의 명성이 높아집니다.
콜로세움을 통해서 용감한 검투사들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특수 효과 : 검사들의 검투사 전직 가능.
병사들의 훈련도가 빠르게 높아짐.

『암벽으로 된 성채
건축 비용 최소 50만 골드.
마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성채.
절벽이나 높은 산에만 지을 수 있습니다.
필수적인 상점들과 군대가 머무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음.
천혜의 지형을 바탕으로 한 방어 능력으로 대량의 몬스터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 퇴치 및 원정 퀘스트의 발생 빈도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몬스터의 사체에서 나
온 부산물을 거래하는 시장이 크게 열릴 것입니다.
성채가 함락되면 치안과 영주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하게 하락하게 됩니다.
특수 효과 : 영토의 확장.

『아르펜의 특수 곡물 창고
건축 비용 최소 4만 골드.
매우 특별한 건물입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초대형 건물!
아르펜 제국에서는 이 초대형 곡물 창고의 내부에 여러 개의 층을 만들어서 곡식을 저
장했습니다.
방대한 양의 곡식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으며, 지하에는 술이나 나무 열매 등을 신
선하게 보관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굶주리는 주민이 줄어들고, 식료품의 가격이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주민들은 이 초대형 곡물 창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식량에 대한 걱정을 덜고 아이를 가
질 것입니다.
아르펜 제국이 대륙을 통일했을 때의 핵심적인 건물로, 치안과 경제, 출생률을 증가시
킵니다.
도시 전체에 축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수 효과 : 인근의 굶주리는 주민들의 이주를 촉발함.

『요정의 신비한 연못
건축 비용 1,000골드.
매우 작은 자연계 꼬마 요정들이 좋아하는 맑은 물이 흐르는 연못입니다. 고요하고 소
란스럽지 않은 장소에 지어야 합니다.
연못이 만들어지고 나면 꼬마 요정들이 찾아오게 되는데, 장난기 많은 그들은 여러 사
건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정들의 장난은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요정들의
여왕은 뜻하지 않은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특수 효과 : 자연이 깨끗해지고 신비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함.

『아르펜의 연립주택
건축 비용 최소 2,000골드.
돌로 만든 4층 주택입니다. 견고하여 쉽게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중산층 여러 세대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강가나 호수 주변에 건축하면 크게 인기를 끌 것입니다.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의 만족도와 치안을 높여 줍니다.
특수 효과 : 기상 악화나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를 경감시켜 줌.

『복잡한 조각사 동굴
건축 비용 최소 3만 골드.
조각사들이 대규모로 모여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일정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협력해서 예
술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문화를 발전시키고 도시를 가꾸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폐허의 성
건축 비용 최소 7만 골드.
이 건축물은 문화와 예술, 기술이 고르게 발달해야 지을 수 있습니다.
아르펜 제국 시절에는 스펙터들이 살아가는 특별한 공간이 존재했습니다.
스펙터들은 어린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숨바꼭질을 하면 절대 잡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스펙터들이 영지 내에 살게 되면 몬스터에게 희생당하는 어린이들이
대폭 줄어들 것입니다.
이 건물은 또한 마법의 발달을 촉진합니다.

『아르펜 상인 회관
건축 비용 최소 2만 5천 골드.
아르펜 제국은 상인들과 예술가들을 우대했습니다.
자유 상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입니다.
치안이 좋은 장소에만 지을 수 있으며, 마차들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미술품의 거래가 가능해지며 마차들의 이동속도를 정해진 날짜만큼 올려 줍니다.

『기울어진 사탑
건축 비용 최소 15만 골드.
비정상적으로 기울어진 사탑은 자연에 대한 탐구력을 길러 줄 것입니다.
원소 계열 마법사들이 전직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특수 효과 : 소재한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른 마법의 개발이 이루어집니다.

『가죽 제품 전시장
건축 비용 최소 1,200골드.
가죽 재료와 완성품들을 매매하는 장소입니다.

아르펜 제국의 건물 양식은 군사, 경제, 교육 관련 건물들까지 합치면 총 300여 개나 되었다. 기본적으로 필요 요구
치를 돈만 보았지만, 석재나 귀금속, 보석 등을 별도로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위드의 영주성이나 영주 전용 창고에는 꽤 많은 양의 광물과 석재, 많은 양의 나무 그리고 약간의 은이 쌓여 있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건축을 하는데, 문화나 기술, 경제력 수치가 낮으면 건설을 하더라도 형편없는 건물이 나올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다.
아르펜 제국의 황궁 같은 경우는 귀금속이 부족해서 지을수도 없을 정도였다.
위드가 목록을 다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대장장이 스킬이 아르펜 제국 무기와 갑옷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였습니다.
아르펜 제국은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영토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들뿐만 아니라 대형 몬스터들도 전문적으로 사냥
해야했습니다.
아르펜 제국의 갑옷은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낮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가죽을 덧대
어서 높은 방어력을 가졌습니다.
제국 기사복, 근위병 갑옷, 황궁 기사 갑옷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재봉 스킬이 아르펜 제국의 복장들을 파악했습니다.
황제의 복장에서부터 마법사의 로브, 귀족들의 연회복, 궁중 요리사와 시녀의 의복까지 다
양한 옷들을 재봉할 수 있습니다.
-조각품의 추억 스킬이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를 완전하게 읽어 내지 못했습니다.
훼손 정도가 심해서 조각품의 복원이 필요합니다.

예술이 경지에 이른 노가다야말로 진리!
위드가 다양하게 올려놓은 스킬 덕분에 조각사의 추억 스킬을 통해 얻는 소득이 더욱 컸다.
대장일과 재봉 스킬에 대한 장비 제작법까지 함께 습득할 수 있었다.
위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요즘 세상에 한 우물만 파면 금방 말라비틀어져서 죽어 버리는 거지."

살아온 인생, 노가다의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환희!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는 정말 오래된 역사적 아이템이다. 이렇게 엄청나게 다양한 소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
직도 완전하게 읽어 낸 것이 아니라니!

"크흐흐흐."

위드에게서 비열한 웃음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사냥을 해서 검이나 갑옷 같은 고급품을 얻었을 때 터지는 진득한 웃음!

"이 정도 물건이라면 고대의 방패나 데몬 소드보다도 훨씬 좋은 거로군."

견적 계산도 끝났다.
조각사로서는 구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 스탯까지 올려 주었으니 더없이 귀중한 보물인 셈.
아르펜 제국이 몰락하고 난 이후로도 어딘가로 흘러들어 갔으리라. 조각품에 담겨 있는 남아 있는 추억들을 읽으려
면 훼손된 부분의 복원이 필요하기는 했다.
위드의 조각술 복원 스킬은 별로 사용한 적이 없어서 현저히 낮은 상태!

"걸작 몇 번 부수고 고치면 될 거야."

S급 난이도의 퀘스트를 찾아내기 위해서도 복원 스킬을 올려야겠지만 남아 있는 기대감이 커서 즐거운 작업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은퇴한 늙은 용병 스미스의 말에 위드는 금세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통곡의 강에서 비싼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던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기까지도 하였다.
하지만 그를 돌보느라 했던 고생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용병패에, 제국의 옥새까지 받았다.
줄 것을 다 주고 떠나가는 늙은 용병의 뒷모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드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더 얻어 낼 것은 없겠지.'

빈털터리 은퇴 용병이니 당장은 더 뜯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나중에 언젠가 한번 확실하게 털어낸 것인지 확인
은 해 봐야겠지만.
위드는 늙은 용병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별을 하면 또 언제 다시 보게 되지요?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
고 살펴 가세요. 그리고 안주 꼭 챙겨 드세요."

이별을 아쉬워하며 다정다감한 말을 한마디라도 더 해 주면서도 흐뭇하게 올라가는 가식적인 입꼬리.

"늙은 나를 보살펴 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르 왕국까지 돌아가려면 서둘러야겠군. 이제 그만 놓아주게."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용병 생활에 대해서 듣고 싶은 게 참 많은데요."

은퇴한 용병들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의외로 정확하다. 베르사 대륙의 역사서를 보는 것보다도 실감나고, 퀘스트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위드는 알고 있었다.

"허허허."

스미스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용병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친밀도를
올려 주는 일도 없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야 들려주는 경우가 많지만.

"내 단골 술집에 찾아오면 언제든지 환영하지. 이제 가겠네."
"살펴 가세요. 다음에 만날 때는 조카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세요."

늙은 용병 스미스를 떠나보내고, 위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통곡의 강 주변에는 위드에게 엠비뉴 교단 11지파의 파멸 퀘스트를 공유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퀘스트 마감 판매!
그들에게도 의뢰를 공유해 주고 돈을 받아 챙긴 뒤에 모라타로 돌아왔다.



베르사 대륙 최고의 조각사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위드!
그에게도 조각술에 대해 숨기고 싶은 과거는 있었다.

"와이번들. 그놈들을 제대로 조각해 주지 못했던 게 아쉬워."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에 앞서서 시간에 쫓기어 허겁지겁 만들어싿. 오죽하면 와이번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나서도
발로 조각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겠는가.

"그래도 손으로는 조각했는데......"

위드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와이번들이었다.
최초로 조각품에 생명을 부여한 녀석들을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뾰족하고 각진 얼굴에, 공중을 날 때에는 바람의 저항도 컸다.
그럼에도 그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던 녀석들이 위드의 명령에는 끔뻑 죽는 시늉도 한다.

"야, 갔냐?"
"주인 갔어?"
"갔다. 완전 자유다!"

와이번들이 얍삽하다거나 배반을 잘한다는 평가는 수정해야 될 것 같았다. 위드가 만든 와이번들은 생명을 부여받은
맏이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고먹느라 비만 와이번이었던 시절도 있지만, 북부에서 금인이와 함께 몬스터들을 충실하게 사냥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위드는 모라타에 돌아오고 나서 그들을 뒷산으로 불러 모았다.
6마리의 와이번들이 날개 간격으로 좌우로 도열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금인이는 목욕을 마친 후인지 유난히 깔끔한
모습이었다.

"너희... 잘 지냈지?"

위드가 조금 미안한 투로 말했다.
전쟁에만 동원하고 평소에는 관심도 별로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약간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 우리는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행복하다."
"우리에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주인을 자주 못 본다는 것뿐이다. 보고 싶었다. 주인."

갸르르르륵.
와일이가 대표로 나와서 얼굴을 비벼 대었다.
그러는 사이에 위드가 들을 수 없도록 비밀리에 와이번들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왜 우리에게 잘해 주는 거지?"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조심하자."

위드는 와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들. 내가 돌아오니까 그렇게 좋으냐."

사실 매우 끈끈한 정으로 엮여 있는 위드와 와이번들이었다.

"오늘 모이라고 한 것은 너희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였다."
"......"

와이번들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을 즐기는 그들에게 위드란 존재는 가끔 구속이었던 것이다.
위드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너희의 힘이 좀 약하지 않으냐. 사냥을 하면서 좋은 음식들을 좀 얻은 김에, 너희 몸보신이나
시켜 주려고 부른 거다."

아껴 놓았던 킹 히드라와 이무기의 고기!
딱 와이번들과 금인이가 나눠 먹을 만큼만이 남아 있었다.

"사랑한다, 주인."
"고맙다."

와구와구.
와이번들이 고기에 주둥이를 틀어박고 게걸스럽게 뜯어 먹었다.
금인이는 우아하게 작은 칼을 꺼내어서 썰어 먹었다.
먹는 장면에서도 상당히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고 나서 와이번들은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렸따. 시험을 잘 본 아이가 부모에게 자랑을 하
듯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우리 며칠 전에 곰 기병대를 잡았다."
"곰 기병대?"
"모라타에서는 상당히 먼 곳에, 곰 부족이 있다. 그들을 잡아먹었다. 다음에 주인에게도 그 맛을 알려
주고 싶다."

인간의 유사 종족들이 있다는 뜻이다.
베르사 대륙의 북부가 워낙에 넓은 지역이기에 탐험대도 대충이나마 지나가며 들렀을 뿐 세부적으로는 알려지지 않
은 장소가 많다.
그런 장소에서 사냥을 했다는 이야기이리라.

"너희 레벨은 얼마나 되지?"
"376이다."

다른 와이번들의 레벨도 370대를 넘었다.
위드가 레벨 300이 안 될 때에 생명을 부여한 녀석들이었으니 그럭저럭 잘 성장한 셈.
금인이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가왔다.

"주인!"

금인이는 위드를 어려워했다.
금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이후로 아까워서 자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래, 잘 먹었느냐."

위드는 오늘은 잘해 주리라 결심했다.
금인이가 수줍음이 많아서 그렇지 전투 능력은 쓸 만한 정도를 넘어서 뛰어났다.
양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빠르게 달린다.
약한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도륙을 해 버릴 뿐만 아니라, 궁술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뽐냈다. 와이번에 탑승한 채 활
을 쏠 줄도 알았다.
대작 조각품 출신!
20%의 추가적인 효과를 가지고 태어나서 레벨도 420부터 시작한 엘리트였던 것이다.
위드가 생명을 부여했던 그 어떤 조각품보다도 탄생부터 우월한 존재였다.
누렁이는 바위의 재질이 약했고, 불사조들의 레벨은 간신히 400에 도달한 정도에 불과했었다.

"주인, 내 레벨이 446을 넘었다. 골골골."
"잘했다. 정말 수고가 많았다."

금인이는 와이번들이 노는 동안에도 혼자 던전에 들어가서 사냥 등을 하면서 열심히 했다고 했다. 생명을 부여해 준
위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잡을 만한 몬스터들이 근처에 없을 때에는 광산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모라타 인근의 폐광들!
위드가 개발을 하지 않아서 몬스터의 소굴이 되어 있는 광산들이 많았다. 금인이는 몬스터들을 제압하고 곡괭이질을
해서 광물을 캤다는 이야기였다.
영주 직속 소유의 광산에서 나온 광물들은 팔지 않으면 그대로 창고에 보관된다. 위드가 건축물을 세우거나 대장장
이 스킬을 이용해서 물품을 만들 때에 그 광물들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광물을 캐다가 새로운 스킬도 습득했다. 골골."
"오오오."

위드는 자식을 키우는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금인이처럼 기특한 녀석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딱 금인이 같은 놈으로 100명만 있으면 조각사의 팔자도 나쁘지 않겠구나.'

광산에서 획득한 스킬이라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광물 발견, 초급 곡괭이질. 어떤 스킬이라도 반길 만
한 일이었다.

"무슨 스킬이지?"
"놀라지 마라, 주인. 마법이다."
"마법!"

금인이의 지성이 높은 편이기는 했다.
대장장이 스킬로 만들어서 불에 대한 속성도 절반쯤 있고, 금속과 물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마법까지 쓸 수 있다니 감격이었다.

"잘했다, 금인아. 근데 마법에도 종류가 꽤 많이 있잖아. 어떤 마법인지 확인 좀 해 보자. 금인이 스
킬 창!"

위드는 자신이 만든 조각품들의 스킬 창을 열어 볼 수 있었다.

초급 검술 9(26%) : 검을 휘두르는 기술. 레벨이 높아질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중급 궁술 7(88%) : 화살의 정확도가 높아지며 긴 사정거리를 가진다. 빨리 장전할 수 있게 된다.
중급 화염 제어 기술 4(16%) : 불을 일으킬 수 있다. 탄생의 근원에서 얻은 무제한의 힘이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화염은 스스로의 몸도 녹이게 만든다.
초급 액체 변환술 3(15%) : 불의 힘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몸을 액체화할 수 있다. 손상된 육체를 복구
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신체의 일부를 영구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

금인이가 가진 독창적인 여러 스킬들과, 검술과 궁술이 떴다.
그리고 기대하던 마법 스킬의 등장!

초급 보석 파괴 마법 6(69%) : 보석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끌어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마법의
위력은 시전자의 마법 활용 능력과 보석의 가치에 따라서 달라진다.
마법을 쓸 때마다 일정한 양의 보석을 소모함.

보석의 힘을 이용하여 마법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마법보다 시전 속도도 빠르고 광범위한 위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으로 보석을 소모한다.
레벨이 446이나 되는 금인이는 민첩과 힘처럼 육체적인 전투력뿐만 아니라 지혜와 지식이 굉장히 높았따. 매우 뛰어
난 수준의 마법사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특성들을 살릴 수 있는 마법 능력을 개발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럭셔리 프리미엄의 결정판!
재료값만 7,000골드가 넘었던 금인이에게 적합한 기술이었다.

"사용 금지."
"네? 골골골."
"앞으로 이 기술 쓰고 싶으면 액체 변환술부터 사용해. 금괴로 변하고 나서 써라."

금괴로 변신한 후에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즉, 팔아 치울 테니 몸값을 받기 편하게 변하라는 뜻이었다.

"주인."

금인이가 울상을 지었다.
화사하고 잘생긴 남자아이의 외모를 가진 금인이는 더없이 귀여웠지만 위드의 취향은 아니었다.
청춘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고등학교 때 여자애들과 떡볶이 먹을 돈도 아꼈던 위드다.
위드가 금인이를 무시하고 있을 때였다.
와삼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따. 동료이며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금인이를 변호해 주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
었다.

"주인."
"왜."
"주인이 다스리고 있는 마을 부근이 심상치 않다."

위드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무슨 일인데?"

와이번들은 모라타 주변에서 사냥을 하면서 주변 지역에 대한 정찰까지 하고 있었다.
위드는 모라타에 투자한 돈만 해도 30만 골드가 넘을뿐더러, 조각품까지 다수 만들어 놓았다. 프레야 교단이 정해진
기간 동안은 보호를 약속했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은행이나 증권사도 믿지 못하는 마당에 프레야 교단의 기사들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

"최근에 다른 마을 근처에서 사냥감이 줄어들고 있다."

와삼이는 자기 방식대로 설명을 했다.
정신연령이 비슷하지 않고서야 알아듣기 힘든 화법이었다.
위드는 그대로 이해했다.

"병사들을 늘리고 있는 모양이로군."

병영을 건설하고 병사들을 징집한다.
모라타 인근의 마을들은 주민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북부의 거친 사내들이 이주민으로 와서 정착을 하더라도, 숫자가 별 볼일 없어서 큰 힘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용병
이나 다른 전사들을 모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와이번들의 먹잇감이 줄어든다는 뜻은, 그 근처에 사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여행>





안현도가 슬며시 말했다.

"이번에 막내의 수행에는 누가 따라가겠느냐?"

원래는 안현도가 직접 동행하려고 했다.
젊어서는 방랑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던 그였다. 한국을 떠나서 외국에 갔던 게 꽤 오래되
었으니 이참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려고 했다.
그런데 로열 로드에서 만난 여인과 좋은 분위기의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었다.
사범들은 침묵만 지켰다.
검을 익히기 위한 많은 수행들이 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하는 '견문의 수행' 만큼 반가운 게 없다.
서로 가고 싶었지만 먼저 나섰다가는 역으로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다만 앉은 자세에서 어깨를 펴고 든든한 가슴을 쑥 내밀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서로 시켜 달라는 애원이나 다름 없는 것.
안현도는 사범들의 눈을 1명씩 마주쳤다.
정일훈은 대사형답게 대범하면서도 인자한 면모가 있었다.
검술에서도 도장을 이끌어 나가는 핵심 인재.
어디에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고, 차후 도장을 더욱 크게 발전시킬 수제자였다.

'이놈이 가면 내가 할 일이 많아질 게야.'

안현도는 사범들을 가르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까운 시간을 빼서 도장 운영에 적극적으로 다시 나서고
싶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로열 로드에서 최근에 만나고 있는 그녀와 해변에라도 한번 가 보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었다.

'이놈은 안 되겠고.'

안현도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휙 돌려서 역순으로 넷째 사범을 보았다.
막내인 이인도는 최근 한창 검의 성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가상현실인 로열 로드라고 해서 크게 기대하
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무언가 발전의 계기를 찾았던 것이리라.
도전하는 의지, 나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 아니면 새로운 검의 활용법.
검술만 가지고 살아가기에 로열 로드는 만만치는 않은 세계였다.
독도 있고, 마법도 있다.
숲에서 날아 들어오는 기습, 날아다니는 몬스터도 있어서 무자정 검술만 믿고 안이하게 덤빌 수는 없다.
죽어도 곧 되살아나는 로열 로드에서 무수히 많은 도전을 하고, 실패도 겪었으리라. 그리고 어떤 각오를 했는지 도
장에서 개인 수련에 힘쓰고 있었다.

'상범이도 쓸 만한 구석이 많지.'

마상범은 수련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가장 길었으니 빠지면 역시 도장 운영에 걸림돌이 된다.

"종범아."
"예, 스승님!"
"이번에는 네가 막내를 데리고 가라."
"알겠습니다."

도장에서의 삼인자.
로열 로드에서의 닉네임 검삼치에게 임무가 맡겨졌다.

"비행기 티켓은 이미 끊어 놓았고, 필요한 장비들은 현지에 다 준비되어 있을 거다. 대충 하고 싶은
대로 돌아보면 될거야."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내일이다."
"막내에게는 뭐라고 말을 하지요?"
"사실대로 말할 필요 있겠느냐? 내가 적당히 제주도나 간다고 해 놓겠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한국 대학교의 가상현실학과에서는 매년 특이한 방학 과제를 내놓기로 유명했다. 돌발적으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내준다.
이현과 동기들은 학기말의 마지막 전공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이현은 맹렬히 문제를 풀었다.

'이건 3번이군. 아는 문제야. 예전에 로열 로드를 공부할때 어떤 박사의 논문에 있었어.'

논문의 주제나 박사의 이름은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한국 대학교의 교수가 쓴 논문도 있었고 유니콘 사에서 내놓은 발표물들도 상당수였지만,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내용.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들이 나온 문제는 손쉽게 풀었다.

'이건 모르는 거군. 3번이 지금까지 많이 나오고 2번이 적었으니 이건 무조건 2번이다!'

확실히 아닌 답을 제외하고 찍었다.
주관식이나, 해설이 필요한 부분들도 아는 한도 내에서 정확하게 서술했다.
이현은 자신이 있었다.

'과제는 안 했어도 출석은 착실하게 했어. 교수들 눈도장도 잘 찍어 주었고, MT에서도 나름 나쁘지 않
게 활약을 했으니 F는 뜨지 않겠지!'

학사 경고만 받지 않으면 만족이었다.
학점이 다소 나쁘더라도 F만 안 나와 주면 재수강을 할 계획은 추호도 없다.

'졸업만 하면 돼.'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
이현이 시험지를 다 풀었을 때에는 제한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마지막 전공 시험이라서 이제부터는 방학이다.
대학생들의 여름방학은 두 달이 넘는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이지!'

방학 동안에는 로열 로드에서 본격적으로 레벨을 올려 보리라.
이현이 필기도구를 챙기고 가방을 싸고 있을 때였다.
강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주종훈 교수와 조교들이 들어왔다.
조교들이 들고 오는 장비들은 디지털 캠코더였다.
촬영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장비!
디지털 저장 매체의 발달로 최대 열흘 정도도 연속 녹화가 가능했다.
단상에 오른 주종훈 교수가 말했다.

"올해 여름방학에는 여러분이 꼭 해 오셔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나서 방학만 잔뜩 기대하던 학생들은 늘어진 표정을 지었다.

"아, 뭐야. 귀찮게......"
"또 과제야?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어 오라거나 물리 엔진을 만들어 오라는 과제는 안 내주겠지?"

학생들은 우려하며 작게 속삭여 댔다.
이현도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과제들은 거의 빠졌었는데......'

강의 시간에 내놓는 과제나 리포트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이번 과제는 범상치 않을 것 같았다.
주종훈 교수가 시범으로 캠코더를 작동시켜 보이며 설명했다.

"가상현실을 멋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이 어떤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부터 잘 알아
야 하지 않을까요? 방학 동안에 여러분의 특별한 생활을 캠코더로 촬영해 오는 게 과제입니다. 수영장
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 여행을 떠나는 것.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어떤 방학을 보냈는지
캠코더로 촬영해 오세요."
"......"

강의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현은 짧은 순간 눈치를 봤다.

'만약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학생이 있을 것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주종훈 교수가 이어서 말했다.

"이번 방학 과제 제출은 필수입니다. 개강하면 서로를 잘 알기 위해서 학과생 전원이 모여서 함께 시
청하게 될 것이고, 다음 학기 필수 전공 수업도 이 과제를 바탕으로 진행할 예정이니 만약 빼먹는 학
생이 있다면 전공 수업 수강 신청을 취소해야 될 겁니다."

무사히 졸업하려면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될 과제!
어렵다고 하면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이현에게는 방학 때 도장에서 체력을 키우고 로열 로드에서 레벨을 올릴 생각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은 금세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해졌다.

"가족 여행으로 푸켓 가기로 했는데... 거기서 찍으면 되겠다."
"우린 남해 리조트에서 쉴 거야."
"모델 수업 받기로 했는데, 그걸 촬영해야지."

여름방학을 보낼 계획을 이미 짜 놓은 학생들이 많았다.
스무 살이 되어서 대학생으로 맞이하는 첫 여름방학인데 허술하게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기다려 온 방학 날의 저녁!
위드는 통닭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였다.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방학이로군."

어떤 화려한 휴가도 필요하지 않다.
베르사 대륙을 탐험하고, 레벨을 올리고, 스킬 숙련도를 향상시키는 데에 모든 걸 바쳐 볼 작정이었다.

"일단 조각품부터 복원하고......"

아르펜 제국의 옥새를 복원하려면 약간 귀찮은 스킬 노가다가 필요했다. 이미 만들어진 조각품들 중에 쓸모가 덜한
걸작 조각품들을 추려 내서 일부러 파손한 후에 고쳐야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기억력과 솜씨가 없다면 시도하기 어려운 기술!
위드는 자잘한 조각품을 만들 때에도 늘 정성을 쏟았으니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부수고, 나중에 점점 크게 부숴 보면 더 잘 고칠 수 있겠지."

조각품 복원 스킬은 조각술의 하위 스킬에 불과하다. 스킬의 숙련도야, 번거롭기는 해도 금방 늘어날 것이다.
위드의 목표는 중급 5레벨 정도였다.

"그쯤이면 아르펜 제국의 옥새를 고칠 수 있겠지. 그런데......"

위드는 가슴 한구석에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조각품을 복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퀘스트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망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르펜 제국의 옥새도, 아직 복
원도 시도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어제 마을버스를 타면서 카드를 두 번 긁었나? 아닌데. 갈치도 신선한 놈으로 샀고, 화장실에 불도
안 켜 놨는데......"

불현듯, 갑자기 드는 생각!

"그러고 보니 프레야 교단이 지켜 주기로 했던 날짜가 거의 다 되지 않았나?"

1년이라고 하니 굉장히 길고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겨우 4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슬슬 끝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군사 현황 정보."

위드가 정보 창을 띄웠다.

『모라타 지방의 군사력
초급 기사 : 10인.
평균 레벨 : 219.

제멋대로인 병사 : 1,187인.
평균 레벨 : 45.
충성심 : 98%.
훈련도 : 79%.

기사들의 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엄격한 규율에 길들여지지 않은 기사들은 언제라도
이탈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의 모라타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병사들을 제외하고 전
체적인 수준이 열악하며, 규모가 적어 치안을 유지하는 데 자경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공성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벽은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프레야 교단의 약속된 보호 기간이 닷새 남았습니다.

딱 닷새의 낮과 밤만 지나면 모라타 지방에 대한 프레야 교단의 보호가 종료되는 것.
위드는 프레야 교단에 쌓아 놓은 공적치가 있기 때문에 알베론을 만났다.

"교황 후보 폐하, 부탁이 있습니다."

예법에도 맞지 않는 극존대!
알베론과는 퀘스트를 하면서 친밀도를 상당히 쌓아 놓은 상태였다.
알베론이 친구를 대하듯이 반갑게 맞이했다.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위드 님께서 저 같은 일개 사제를 찾아 주시다니요.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 모라타가 어떤 곳입니까? 알베론 님이 저와 뱀파이어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해 내어 함께 이
룩한 마을 아닙니까?"

좋은 것은 함께 나눈다.
몇 마디 말과, 같이 고생했던 퀘스트를 구실 삼아 한데 묶어서 동질감을 형성했다.

"한 발자국도 앞이 보이지 않는 북부에서 이 모라타는 희망의 등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야 여
신님이 이 땅을 평화롭게 하고 번영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모라타야말로
여신님의 소망을 가장 잘 받드는 마을입니다."
"위드 님, 저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 거추장스러운 말을 하기 싫어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프레야 교단이 모라타를 더
오랫동안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위드는 그렇게 말해 놓고 조금 덧붙였다. 아쉬운 것은 알베론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우리가 남입니까? 알베론 교황 후보 폐하와는 모라타로 엮인 사이이고......"

일단 끌어들인 지연!

"피를 함께 나누면서 싸운 사이이지 않습니까?"

혈연.

"프레야 교단의 교리를 매일 읽으면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고 있습니다."

학연.
대한민국에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혈연과 지연, 학연을 구실로 삼아서 청탁을 넣는 위드!
알베론이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지 않았다면 뇌물까지 꺼낼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프레야 여신님께서는 더 많은 이들을 구휼하기를 바라십니다. 더 어려운 곳에서 고통 받
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사단과 사제들은 약속된 기일이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친구들에게 밥을 사 달라고 부탁을 하다가 모두 거절을 하면 그때에야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밥을 사 먹던,
바로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레야 교단에 제가 쌓은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모라타를 더 오랜 기간 동안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공적치는 수치에 따라서 장비나 희귀한 보물을 얻는 데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위드는 아까워서 피눈물이 날 지경이
었지만 결국 남겨 놓았던 최후의 보루를 쓰기로 한 것이다.
발전도가 낮던 모라타에 군사력까지 함께 성장시키기란 무리였다.
전투 계열 길드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충 영입한 방랑 기사들의 자질이 모자라서 병사들을 잘 이끌어 주지도
못 했을 것이다.
공적을 이야기하자 알베론이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였다.

"위드 님께서는 우리 프레야 교단에 많은 헌신을 하셨습니다. 위드 님의 부탁이라면 교단에서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들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위드 님, 얼마나 더 긴 기간동안 모라타가 보호받기를
원하십니까?"

띠링!

-현재 프레야 교단의 공적치 : 13,290.
프레야 교단의 보호를 위해서는 하루에 110의 공적치가 소모됩니다.

프레야 교단에서 모라타에 파견해 놓은 기사단이나 사제들의 병력이 엄청난 것을 감안하면 공적치의 소모가 큰 것도
어쩔 수 없다.
위드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공적치를 무기나 방어구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참아야만 했다.

"알베론, 내가 프레야 교단에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던 만큼, 최대한 긴 기간을... 보호해 다오."

금방 되살아난 반말!

"프레야 교단에 세운 모든 공적을 모라타 지역을 지키는데 쓰시겠습니까?"
"어. 그래."
"그럼 120일을 더, 기사단과 사제단이 머무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드 님의 요청이니 저 개인적
으로도 부탁을 해서 30일 정도는 더 머무르도록 해 보겠습니다."

알베론이 베푼 호의로 30일의 추가적인 증가!
위드가 그를 끌어안았다.

"형제여!"

프레야 교단을 끌어들이는 군사력 돌려 막기 방법.
최후의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현은 부푼 기대를 안고 캠코더를 가방에 넣었다.

"제주도라... 꿈의 섬이지. 최고의 휴양지! 내가 제주도를 갈 일이 다 생기다니."

안현도가 직접 전화를 해서 설명했다.
제주도에 새로 문을 연 도장이 있는데, 그곳에 하루 일정으로 가서 보고 오라는 부탁이었다.
이현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방학 때 뭘 촬영해야 될지 걱정이었는데 제주도를 촬영하면 되겠군."

제주도라면 남들에 비해서 그리 꿀리지 않으리라.
맑고 푸른 자연환경, 한라산에서는 말들이 뛰어놀고, 파도치는 해안가에서도 촬영할 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출세를 하고 봐야 해. 제주도가 아무나 갈 수 있는 섬도 아니고 말이야. 일단 여권부터
챙기고......"

이현은 가방에 여권도 넣었다.
안현도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에는 반드시 여권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진과 서류들을 작성해서 제출하니 도장의
해외 업무팀에서 알아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
평소라면 돌다리도 두들겨 본다고 약간은 의심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었지만, 공짜 제주도 여행이라는 생각에 추호
도 의혹을 품지 못했다.
비행기값, 숙박비, 식대 일체 무료!

"오빠, 잘 다녀와."
"집 잘 보고 있어. 기념품 꼭 사 올게."

이현은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면서 인천국제공항으로 나섰다.
공항 청사에는 제복을 입은 여승무원들이 보이고, 짐 가방을 꾸린 외국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과연......"

이현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최종범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왔느냐."
"예, 사형. 일찍 오셨군요."
"출국 수속을 해야 되지 않느냐."
"출국 수속요?"

이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출국이라면 대한민국을 떠난다는 소리 아니던가.

"제주도에 가는데 출국 수속도 같이해야 되는 건가요?"

최종범은 얼른 둘러댔다.

"비행기를 타려면 꼭 해야 되는 거다."

비행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현은 대충 넘어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행기를 탈 때에는 꼭 무슨 수속을 했던 것 같다.

"그런 것이군요. 역시 버스랑은 좀 다르네요. 교통 카드로 그냥 타면 안 되나 봐요."
"이건 비행기니까."

이현과 최종범은 작은 가방 하나씩만 들고 와서 짐이 많지 않았다.
간단한 탑승 수속을 마치고 나서 이현이 티켓을 보니 이집트의 카이로행이었다.

"사형!"
"왜?"
"이 비행기 카이로로 가는데요?"

이현도 이집트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대충 들어 본 기억이 났다.

"그럼 이거 동남아시아 가는 비행기인 거 아닌가요?"
"......"

옆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무식한 놈.'
'이집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나?'

최종범은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제야, 우린 제주도 가는 거잖냐."
"그렇죠."
"이 비행기, 제주도 들렀다 가는 거야. 원래 직행이 더 비싸잖아."
"그런 거였군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버스처럼 중간에 들렀다 가는 거네요."

탑승 게이트 근처에 있던 손님들은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항공 이집트 직행 비행기가 왜 제주도를 들렀다 간단 말인가!
하지만 최종범의 위압감 가득한 눈빛과 거친 외모에, 진실을 말할 만용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이현은 카이로행 비행기에 탔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난 이후에 여승무원들은 자리를 돌아다니면서 식사와 음료수들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최종범과 이현의 자리는 그냥 지나쳤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두 사람 다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고 중앙아시아를 지나서 카이로로 향하고 있었다.



카이로 공항.
한국도 뜨거운 여름이 되었지만, 이집트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무덥고 텁텁한 공기, 작열하는 햇볕으로 인해서 등과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공항에는 들려오는 한국어라고는 흔적도 찾기 힘들었고, 온통 터번을 둘러쓴 이집트인들만 돌아다닌다.
이곳이 제주도가 아님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사형! 우리 잘못 온 거 같은데요."

이현의 눈초리는 깊은 의구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깊이 잠들었따고 해도 제주도에서 미처 내리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또한 이집트에서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입국 수속을 할 때부터 어딘가 많이 이상했던 것이다.
최종범이 말했다.

"우리 도장에는 전통이 있다. 일정한 수준이 되면... 진짜 세계를 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
"......"
"너를 위해서 일부러 오래전부터 계획한 여행이란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었다.
하지만 최종범의 설명에 화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체력만을 위하여 검술을 배우는 건 아니다. 검을 휘두를 때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검을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되는 해외 여행!
여행은, 떠나기 전에 고민도 하고 갈등도 많지만 막상 떠나고 난 후에는 후회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것은 해외여행이었다.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를 볼 기회가 생길 줄이야.
이현이 확인을 받기 위해서 질문했다.

"이거... 다 공짜죠?"
"물론이지. 무료란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현!
귀찮고 짜증이 나도, 공짜라는데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공짜니까 마음 편히 즐기면 된다. 크하하하하! 남들은 돈 주고도 못 즐기는 여행이거든!"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됩니까?"
"이번에는 헬리콥터를 타야지."

카이로 공항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헬리콥터를 타고 다시 이동했다.
돌과 벽돌로 지은 이집트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지나서 건조한 공기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하라 사막에 도착했
다.
북아프리카.
최종범과 이현을 위해서 사륜구동 지프차가 두 대 준비되어 있었다.
천장이 천막처럼 가죽으로 덮여서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개방형 구조의 지프차였다.

"사제야."
"예, 사형."
"운전할 줄 아냐?"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토바이 운전은 조금 해 봤지만......"

자동차 운전면허증도 물론 없었다. 중국집 배달을 하면서 오토바이를 타 본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뭐, 상관없다. 여기에는 교통경찰도 없고, 어디 부딪칠 곳도 없으니까."

최종범이 자동차 키를 던졌다.

"시동부터 걸어 봐."

이현은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거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자동차의 엔진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면서 시동이 걸렸다.
사륜구동의, 사막 횡단이 가능한 오프로드 랠리카!
허술해 보이는 외관이었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지프차였던 것이다.
운전석의 뒷자리는 식수와 음식, 기름통과 텐트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프리카를 돌면서 나누어 줄 책과 의
약품이 들어 있는 흰색 상자도 쌓여 있었다.

"그럼 달려 보자!"

최종범도 시동을 걸고 먼저 사막으로 달려 나갔다.
자동차의 바퀴가 돌면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쳐나간다.

"저도 갑니다!"

이현도 브레이크를 깊게 밟았다.
정확하게 미동도 하지 않는 자동차!

"액셀러레이터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던가?"

이현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오른쪽의 액셀을 밟았다. 그러자 튕겨 나가듯이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초보 운전자에게는 환상적인 장소였다.
차선을 지킬 필요도 없으며, 원하면 어디에든 주차할 수 있다.
모래 언덕을 넘고, 사막의 전갈을 지나고, 작은 오아시스들이 이정표였다.
모래가 뒤섞인 건조한 바람을 뚫고 두 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전진했다.



타아앙!
두두두두두.
총을 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부족들!
이현과 최종범이 타고 있는 지프차를 나란히 따라왔다.
이현이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사형, 이들이 누구죠?"
-도적단이거나 민병대쯤 되겠지.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까요?"
-괜찮다. 이쪽에도 우리 도장의 인맥이 조금 있거든. 차에 걸어 놓은 깃발이 있으니 함부로 못 덤벼
들 거야.

이현의 자동차에도 붉은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올라와 있었다.
최종범의 말대로 총을 든 기마병들은 가까이 따라올 뿐 공격하지는 않고 철수했다.
두 대의 지프차는 사막을 따라서 낙타를 타고 짐을 나르는 상단과 여행자들을 지나쳤다.
이현은 차에 타면서부터 캠코더를 틀어 놓고 있었다.
첫 번째 마을에는 흙과 지푸라기로 지어진 집들이 있었고, 깡마른 아이들을 만났다.
검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최종범과 이현은 마을의 의사를 만나서 의약품과 책을 전달했다.

"여기... 좋은 일에 써 주세요."
"......"

의사는 고마워하면서 약상자를 받았다.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들이 돌 조각과 나무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로 걸어 주었다.
이현이 천막을 나오면서 물었다.

"이런 일은 언제부터 했던 거죠?"
"15년 전 스승님이 아프리카 도보 여행을 하신 이후부터 매년 하고 있지."
"약상자 1개가 몇 명 정도를 구할 수 있을까요?"
"600명 정도쯤?"
"그렇게나 많이요?"
"여기에는 의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한국이라면 아무것도 아닐 병에 걸려서 죽는 아이들이 많거
든."

금방 마을의 작은 병원 천막이 있는 곳에 아이들이 줄을 섰다.
의사가 주사를 접종해 줄 때마다 아이들은 고마워하면서 돌아갔다.
옆 마을, 그리고 그 옆 마을의 아이들도 와서 접종을 하고 돌아갔다.
두 번째 마을, 세 번째 마을.
약상자를 나눠 주러 마을로 들어갈 때마다 환대를 받았다.
외부인들이 많이 오지 않는 사막, 그들은 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해서인지 오랜 옛날부터 높은 절벽 근처에 살고 있었
다.

"사형, 사막인데 땅이 단단한데요."
"원래 여기는 바위 지형이었는데 깨져서 사막처럼 되었다는구나. 사하라 사막 중에 완전히 모래가 되
어 버린 지역은 전체 넓이에 비하면 얼마 안 되지."

최종범은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았다.
사하라 사막은 모래들로 한없이 이어졌을 거라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땅은 모래가 깔려 있기는 했지만
걸어도 발목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고, 자갈과 돌이 널려 있었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와 얼마 안 되는 수풀들 그리고 빌딩 크기의 바위들이 많아 가까운 곳도 멀리 돌아가야 했다.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는 아프리카 방문!
사막을 돌아다닌 지 사흘 되는 날부터는 접근하는 무장 민병대들과도 익숙해져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지평선을 보면서 달리고, 언덕을 자동차로 넘을 때는 몸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밤에는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두꺼운 속옷을 몇 겹이나 입어야 했다.
이현은 버너를 켜고 냄비에 물을 넣어서 끓였다.
밤하늘의 은하수 아래 사막에서 마시는 부드러운 커피 한 잔!

"역시 설탕은 세 스푼이야."

이현이 커다란 전파수신기를 달고 있는 라디오를 틀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진행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이어 음악이 흐른다.
이현도 한국에서 몇 번 들었던 정효린의 노래 <눈빛 대화>가 영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개>





사막을 지나서 남쪽으로, 강과 초원이 있는 지대로 접어들었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로 국경을 넘어갈 때에는 꽤 비싼 입국 수수료를 내고 통과해야 했다.
사막의 경계를 확실히 넘었음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이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동물들이 물을 마셨다.
임팔라, 얼룩말, 치타, 자칼, 리추에, 버펄로, 벨벳원숭이 등 동물의 왕국에서나 봤던 동물들이 있었다.
하늘에는 여러 색을 가지고 있는 새들과 물오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최종범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조금 큰 동물원이라고 생각하면 돼."

동물에 대한 메마른 감성!
이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 그놈이 그놈이죠."

전봇대에 앉아 있는 참새나 몸이 분홍빛을 띠는 홍학이나 차이점을 두지 않는 동물 평등정신.
강철로 보강되어 있는 지프차는 동물들의 습격에 대해서도 안전하게 되어 있었지만 뒤집어질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
해야 했다.
이현과 최종범은 차를 몰고 길도 없는 험로를 달렸다.
동물들은 그야말로 질릴 정도로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처럼 철망에 갇혀 있는 온순한 동물들이 아니라, 사방을 경계하면서 풀을 뜯어 먹는 초식동물들.
기린은 목을 길게 빼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위험한 맹수가 다가오지 않는지 경계를 한다.
배고픈 사자들은 어슬렁거리면서 먹이를 찾았다.
강물 속에는 악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밤에는 잠도 차 안에서 잤다.
쿠우웅! 쿠우웅! 쿵! 쿵! 쿵! 쿵!
키야아아아!
동물들이 우는 괴성과 뛰어다니는 진동으로 인해서 여간 소란스러운게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야생의 밤은 위험한 면
도 있었다.
초원의 아프리카 마을에서도 책과 의약품 전달은 계속되었다. 초원 지역의 대도시에서 미리 보급품을 준비해 놓고
다른 곳으로 전해 주는 것이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도 있었찌만 이현의 마음은 착잡했다.
동물들이 있고 자연이 있는 아름다운 곳에서 사람들은 병과 뿌리 깊은 가난으로 너무나도 힘겹게 살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세계 최대의 빈민가가 있고, 굶주리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사는 신발 한 켤레로 아프리카에서는 10명의 아이들 목숨을 구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했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반성하자. 더 열심히 노가다를 하면서 살아야지.'

불평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와 함께 미래에 대한 의욕을 다졌다.
삶과 자연 그리고 운명, 꿈.
아프리카의 자연을 접하면서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는 병들고 굶주려서 죽어 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앞서 나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꿈이 무언지 알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 버린다.
여행!
다른 곳에 가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에, 어디든 떠나고 나면 후회하지 않는 것.



열나흘에 걸친 아프리카 횡단.
마지막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 목적지인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현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벗자 모래가 우수수 쏟아졌다. 머리카락과 몸도 먼지로 엉망이었다.

"사형, 여기가 어딥니까?"
"아프리카 한복판이지."

아프리카 한복판에 고층 빌딩과 상점들이 있었다.
손님들이 많거나 경제가 활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다국적기업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의약품 나누어 주는 일은 끝났으니 오늘 하루는 자유 시간이다. 뭐부터 하고 싶냐."
"몸부터 좀 씻어야겠습니다."

이현과 최종범은 호텔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흑인들이 서성이고 있는 골목도 들어가 보고, 슬럼가에도 방문했다.
아프리카에 놀러 온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을 볼 수 있었다.
치안이 그리 좋지는 않았기에 조심해야 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최종범과 이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들이 주렁주렁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와 옷에 붙어 있는 장식품들은, 사막 부족의 용사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
이다.
그다음 날에는 다시 비행기를 탔다.
일반적인 비행기가 아니라 군용수송기처럼 생긴 비행기였다.
아프리카를 지나서 다시 유럽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바다를 건넌 후였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죠?"

이현이 물었을 때에, 최종범은 등에 낙하산 배낭을 메고 있었다.

"여기야."
"네?"
"남자라면 스카이다이빙 한 번은 해 봐야 되지 않겠냐?"

이현은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럽의 집들이 작은 점들로 보이고, 도로는 줄을 그어 놓은 것처럼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높았다.

"스카이다이빙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냥 하다 보면 익숙해져."

뛰어내리기 전에 프랑스인 교관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다행히 그도 도장에서 검술을 배웠던 사람이라서 짤막하게나마 한국어로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오픈!"

비행기의 격납고 문이 열리고, 몰아치는 바람으로 인해서 몸 전체가 흔들린다.
최종범이 고함을 질렀다.

"나 먼저 간다!"

격납고의 문을 통해서 뛰어내린 최종범이 아찔한 대지를 향해서 떨어지는 게 보인다.
이현도 힘껏 달려서 비행기 격납고를 통과했다.
그 순간.
푸른 하늘의 중심에 있었다.
바람에 몸이 날아가는 듯한 느낌으로 지상을 향해서 내려 간다.
천공의 도시 라비아스에서 떨어질 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체험!
몸이 하늘을 날면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프랑스 파리의 특급 호텔.
이현과 최종범은 펜트하우스에 숙박했다.
남자 둘이 펜트하우스에 숙박을 하니 벨보이부터, 호텔 직원들의 눈빛이 썩 좋지는 않았다.
동성애자가 많은 유럽이었던 만큼, 한국에서는 거의 받을 일이 없는 오해를 얻어야 했다.

"술이다!"

프랑스 호텔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기라도 한 듯이 객실에는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최종범은 배낭을 던져 두고 비치되어 있는 고급 와인을 손날로 쳐서 열었다.
코르크 마개를 빙빙 돌려서 여는 것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와인도 컵에 따라서 숭늉 들이켜듯이 시원하게 마셨다.

"캬, 시원하다! 그런데 여기 보드카나 위스키 말고 소주는 없나?"

와인 냉장고에 있는 술들을 마시면서 소주를 그리워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

"술은 소주가 최고죠."
"암! 술맛은 어릴 때 가장 솔직하지. 어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와인 마시는 거 봤어? 자고로 소주가
최고야."

와인의 그윽한 향과 풍미를 느낄 필요는 없었따.
그냥 떫은 맛!
깡소주를 즐겨 마시던 최종범에게 와인은 입맛에 맞지 않았다.

"비싸기만 하고 잘 취하지도 않아. 진짜 최악의 술이지."

세계 와인 애호가들을 서글프게 만드는 표현!
요리와 함께하는 깊은 맛보다는, 친구들과 동료들과 삼겹살에 소주를 나누며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훨씬 좋은 최종범
이었다.

"라면 국물에 소주 한 병 마셨으면 좋겠군."

이현과 최종범은 에펠탑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간단히 와인을 두 컵씩만 마셨다. 두 사람 모두 술을 그리 즐기는 성
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 너머로 파리의 센 강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보였다.
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는 파리.
머물고 있는 호텔도 로비부터 조각상이 있고, 밝고 부드럽게 채색한 명화들이 복도마다 걸려 있을 정도였다. 와인이
들어 있는 통에서마저도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최종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야, 기분도 꿀꿀하고 텔레비전도 볼 게 없는데 밤 여행 어떠냐. 프랑스의 밤은 어떤지 돌아다녀
봐야지."
"좋습니다."
"낙하산 챙겨라."
"예."

텔레비전 방송을 틀어도 유럽이나 미국의 방송만 나왔다.
특급 호텔인 만큼 중국과 일본 방송도 나오기는 했지만, 한국의 버라이어티 오락 프로들은 방송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현은 낙하산 가방을 메면서 캠코더도 작동시켰다.
모든 기록들을 캠코더를 통해서 녹화하고 있었던 것!

"후후후."

최종범이 캠코더 앞에서 음흉한 웃음을 짓더니 테라스로 걸어갔다.

"특급 호텔이라더니 놀 것도 없네. 가자, 사제."

엘리베이터 이용은 필요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테라스 너머로 뛰어내려 버린 최종범. 투신자살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파리의 밤하늘 여행의 일부였다.

"어떤 여행 패키지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그런 건가."

이현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테라스의 난간에 올라가서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낙하산을 펼치고 유유히 파리의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머물고 있는 호텔이 매우 높은 편이었기에 낙하를 하면서 파리의 경관을 조금은 살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지상!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기에 낙하산을 조종하면서 먼저 도착한 최종범이 있는 장소 근처로 내렸다.
행인들이 갑자기 공중에서 떨어진 그들을 둘러싸고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미녀들이 신기한지 다가오기도 했다.
그녀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물었다.

"Tu es d'ou(어디서 왔어요)?"

최종범은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했다. 물론 영어도 할 줄 모른다.
이현을 향해서 눈짓으로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그도 마찬가지였다.

"......!"

비행기에서 낙하를 할 때보다도 얼어붙은 표정.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교까지 들어가면서, 기초적인 영어 실력 정도는 있었다.
프랑스 여자들이 하는 말이 눈치로는 이해가 갔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외국어 울렁증!
이현은 외면하기로 했다.

"사형, 핫도그나 먹으러 가죠."

최종범은 곤경에 빠져 있다가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럴까. 그게 낫겠지?"

둘은 깔끔하게 프랑스 미녀를 무시하고 핫도그 가게로 향했다.
짝짝짝!
뒤늦게 구경하던 행인들이 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멋진 모습을 보여 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파리에서의 하루는 평범한 관광객처럼 보냈다.
콩코르드 광장, 베르사유 궁전, 뤽상부르 정원,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명소들을 배경으로 최종범이 먼저 팔뚝의 근육을 드러내며 자세를 잡았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이번엔 네가 가서 서."
"예."
"됐다. 이제 가자."

전형적인 사진 찍는 여행!
다른 여행객들이나 프랑스인들에게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어서 각각 독사진 한 장씩만
찍었다.
파리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성과 거리에서 핫도그를 사먹기에 바빴다.

"역시 핫도그는 파리에서 먹어야 제맛이야."
"맛있기는 한데요. 저녁에는 돈가스나 먹어 볼까요?"
"돈가스도 역시 파리지."

저녁에도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안내인을 통해 독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도장의 관계자를 통해서 최신형 오토바이를 임대했다.

"독일에 왔으면 아우토반 정도는 달려 봐야지."

오토바이로 아우토반을 질주!

"여기도 고속도로 휴게소는 있겠죠? 우동이랑 삶은 감자는 꼭 먹어 줘야 되는데."

네덜란드에 가서는 모터보트를 타면서 속도를 즐기고, 잠수복을 입고 바닷속에도 들어갔다.
해저를 탐험하면서 물고기들을 구경한다.
영국에 건너가서는 축구도 관람했다. 한국인 여행객들이나 유학생들이 많아서 한국어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영국의 해변가 크로이드 베이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려는지 강한 바람이 불었다.

"딱 좋은 날씨에 왔군."
"이런 날씨가 좋은 건가요?"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어서 금방이라도 빗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천둥 번개가 치더라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날씨였다.

"그럼, 제대로 맞춰 온 거야. 스승님이 다른 건 몰라도 서핑은 꼭 해 보라고 하시더구나."

최종범과 이현은 서핑복으로 갈아입었다.
해변가에는 파도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폭풍을 몰아쳐 올 때가 될수록 파도가 높아진다.
갑작스럽게 부는 이번 폭풍은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규모였다. 파도도 그에 걸맞게 크고 높게 해변가를 강타하
고 있었다.
최종범이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다로 걸어가며 물었다.

"서핑은 해 본 적 없지?"
"예."
"나도 처음인데, 편하게 놀아 보자. 고작해야 물놀이인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면 되겠지."

바다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최종범과 이현은 그들이 하는 행동과 자세들을 꼼꼼하게 머릿속에 기억해 두며 걸어갔다.
서핑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걸어가는 동양인 두 사람은 시선을 끌었다.
서핑복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저항을 줄여 주는 복장이었다. 그나마도 상체는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따.
근육질의 상체,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이 필요한 부분만 잘 발달되어 있었다.
동양인이었지만 최종범의 몸매는 영국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먼저 간다."

최종범이 서핑 보드를 배 아래에 깔고 헤엄을 치며 먼바다로 나아갔다. 하지만 파도가 치면 감당하지 못하고 형편없
이 나동그라졌다.
용기를 내기에는 절대 무리인 광경이었지만 이현도 뒤를 따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수영법.
동네 뒷산에 사는 강아지도 할 줄 안다는 개헤엄!
보드를 몸 아래 깔고 팔다리를 맹렬히 움직였다.

"역시 개헤엄은 영국에서도 통하는군!"

심한 바람과 조금씩 떨어지는 빗물 그리고 파도로 몸은 출렁거렸다. 몇 미터나 되는 파도가 몸을 덮칠 때마다 보드
가 통째로 뒤집어져서 짠 소금물을 먹어야 했다.
실제로 바다에 들어가니 파도의 압박감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겨우 보드를 찾아서 붙잡으면 저 멀리에 있던
파도가 어느새 다가와서 다시 덮쳤다.
파도가 칠 때마다 몇 미터씩 무참하게 나동그라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젠장."

이현은 화가 솟구쳤다.

"폭풍 치는 날 동네 저수지에서 목욕도 했던 나인데!"

어릴 때 돈을 들이지 않고 놀 수 있는 유희가 몇 개나 되었겠는가.
도랑에서 가재나 개구리를 잡으면서 어릴 때를 보내다가, 좀 더 나이를 먹은 후에는 큰물로 옮겼다.
근처 저수지!
매년 3명에서 5명까지 익사자가 발견된다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 그 저수지에서 맨손으로 물고기도 잡았던 이현인데 겨우 영국 바다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해운대에 10만 명도 넘게 모여서 해수욕을 즐기는 나라야! 이까짓 영국 바다쯤이야."

기네스북에도 올랐다는 해운대의 정기!
이현은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파도가 점점 커지고 거세지면서 보드 타기는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해안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파도라는 게 어디서 감히... 나 최종범이야!"

최종범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파도나 타며 가볍게 즐기자던 서핑ㅇ, 이제는 죽기 살기가 된 것이다.
바닷물과 땀에 젖어서 번들거리는 상체의 근육들. 서핑 보드를 힘으로 잡아서 누르고 날듯이 뛰어오른다.
파도에 부딪쳐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실패 속에서 이현은 원리를 깨달았다.

'혼란 속에서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는 안 돼.'

큰 파도가 밀려올 때, 보드에서 균형을 잡고 잠깐 선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다. 힘으로 버티려고 하면 반드시 뒤집어
졌다.

'파도가 밀어 올리는 힘에 맡기고... 그걸 타는 건가?'

파도가 몸을 뒤집어 놓기 전에 솟아오르고 밀어내는 부력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여기가 와이번의 등이라고 생각하면......'

이현의 감각들이 살아났다.
계곡의 틈을 빠르게 나는 와이번처럼, 파도도 규칙성이 있었다.
자연에 버티려고 하면 성공할 수 없다.
적응하는 거이다.
좌우로 흔들리고, 솟구치는 와이번의 등에 앉아서 비행을 했던 게 며칠이던가.
와이번의 등 위에서 전투도 했었다.
이현은 몸과 서핑 보드가 파도와 함께 떠올랐을 때, 재빨리 서서 균형을 잡았다.
벽처럼 솟아오른 파도에 보드와 함께 서 있었다.

"끼야하하하하하아아하아하아하!"

이현이 커다랗게 웃었다.
드디어 파도를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

"나는 저수지의 폭풍을 정복한 사람이다!"

이현은 신이 나서 괴성을 지르기를 반복했다. 완전하게 몰입한 것이다.
최종범도 천부적인 운동신경과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훈련으로 이미 파도를 타고 있었다.
영국의 폭풍우에서 파도를 타는 사나이들!
해변가에서는 영국인 여자가 캠코더를 들고 그 광경을 찍고 있었다.
이현이 파도를 타기 전에 손직과 발짓으로 부탁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밤이 되었을 무렵에는 해변가의 상점들에서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영국 핫도그도 괜찮네."
"소시지가 맛있네요."

이현과 최종범은 실컷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유럽에 왔으면 스키 정도는 타 봐야지."

둘은 알프스 산맥에 올라서 스키도 탔다.
정식으로 문을 연 스키장의 코스도 아니고, 눈이 깔려 있는 장소에서의 무모한 도전!
밑으로 내려오고 나니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한참을 해매야 했다.
러시아에서는 붉은광장을 방문했다.

"광장이 참 넓네."
"얘들은 땅이 남아도니까요."

역사적인 명소에 대한 짤막한 감상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중국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잠깐 구경을 하고, 비행기로 한국으로 귀환한다는 계획이었다.

"달걀도 사고... 김밥은 어디 없나?"

기차 여행에 절대 빠뜨릴 수 없는 필수품인 삶은 달걀도 준비했다.
침대칸까지 있는 기차는 광활한 대지를 달렸다.
얼어붙은 동토와 들판, 산들을 지나서 철로가 한없이 이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뜨린다.
창밖을 보는 이현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만나 본 사람들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맑았다. 뜨거운 햇볕과 모래바람, 동
물들이 있는 세상이다.
유럽의 문화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작품들도 대단했다. 조각품이나 그림 들은 시대를 거슬러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좁은 동네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이현에게 세계를 본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 넓은 땅.'

대한민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국토를 가진 러시아. 경제 활황으로 도시 인근의 부동산 가격이 꽤 오르고 있었다.

'땅 투기하면 대박일 텐데......!'





<아르펜의 건축물>





이현은 23일 만에 유럽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동생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간 듯 집에 없었고, 방이나 거실은 매일 청소를 한 듯이 깨끗했다.
이현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놀면 되는데 굳이 피곤하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매 휴가철마다 외국으로 향하는 관광객들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데 휴양은 무슨 휴양인가!
아침에 밥 먹고, 점심에 탕수육 시켜 먹고, 저녁에는 통닭 시켜 먹고 선풍기 틀어 놓고 자면 그게 최고의 여름휴가
였다.

"으으... 그래도 이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지."

살짝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았다.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을 돌아다녔으니 철혈 체력이라고 해도 피곤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
하지만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이 그를 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름방학이라는 황금기!
다른 경쟁자들이 레벨을 올리고 스킬 숙련도를 쌓는 동안 그는 완벽하게 쉬었던 것이다.
벌어 놓은 돈이 상당량 있다고는 하지만, 한 달의 가계부를 적자로 기록하는 일은 유서를 쓰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기분이었다.

"모라타나 베르사 대륙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고......"

23일이라는 날짜는 로열 로드에서 상당히 긴 시간이다.
네 배나 되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92일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으니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에서도 내내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모라타가 멀쩡할지나 모르겠군. 설마 폐허만 남은 것은 아니겠지."

이현은 짐 가방부터 열었다. 그러자 와르르 쏟아지는 기념품들.
유럽을 다녀왔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물품들이었다.

베르시안 호텔
힐튼 호텔
파리 유스호스텔

숙박업소의 수건들, 칫솔, 치약, 비누, 샴푸!
비행기에서는 담요도 몇 벌 챙겨서, 가방 안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다른 1개의 대형 가방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 산, 여동생에게 줄 옷과 지갑, 목걸이 등이 들어 있었다.
유럽에서의 바가지요금을 감수하고서라도, 혼자서 집에 있을 여동생을 위해서 산 것이다.
이현은 물건을 구입했을 때의 실랑이를 잊지 못했다.

"90유로? 노, 노, 노, 노. 40유로. 플리즈."
"노 셀. 굿바이."
"40유로. 40유로. 40유로!"

명품 상점에서 거침없이 깎아 내는 가격.
이현은, 설명할 수는 없어도 물건의 재질을 알 수는 있었다. 유럽의 높은 인건비를 감안하더라도 완전한 바가지였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가격인 40유로를 고집하다가, 아프리카에서 구한 예쁜 돌멩이를 주면서 52유로에 살 수 있었다.

"완전 도둑놈들."

외국 여행객들이라고 더 비싸게 받아먹으려는 게 확실하다.
물건에 흠이 있더라도 반품이나 AS도 안 되는 마당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불을 마치고 나서 그들을 향해서 불쾌하게 인사했다.

"곤니찌와!"

이것이야말로 한국 여행객의 자부심!
여동생의 선물뿐만 아니라 정효린과 오동만, 최지훈 등에게 줄 것도 샀다.

"딱히 줄 건 없고, 이런 거면 괜찮겠지."

유럽 명품 브랜드의 티셔츠들!
물론 유럽에서 구매한 게 아니라, 중국의 시장에서 산 물건들이었다.
한국 돈으로 전부 해서 80만 원 달라고 하는 것을 깎아서 6만 원에 샀다.
일단 열다섯 배를 후려쳐 보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뒤에 흥정으로 가격을 합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에서의 길거리 쇼핑의 참맛!
이현은 물품들을 대충 정리한 뒤에 일단 텔레비전부터 켰다.
때마침 베르사 대륙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을 시간이었다.
로열 로드를 하지 못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오주완 씨, 하벤 왕국과 칼라모르 왕국의 전면전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연전연승을 거두던 칼라모르 왕국의 기사 콜드림이 드디어 진격을 멈추었다는 소식입니
다. 시스타인 요새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하면서 노예군과 투항한 적 병사까지 합쳐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가졌지만, 보급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벤 왕국과 칼라모르 왕국의 전쟁은 이현이 풀어 놓은 콜드림에 의해서 벌어진 국가 간의 전면전이었다.
하벤 왕국의 영토가 심각하게 잠식당하면서 일반 유저들도 검을 들고 나섰다.
중앙 대륙의 유저 숫자는 엄청나게 많다. 공성전에서는 큰 전력이 되었지만, 기사 전력이 뛰어난 칼라모르 왕국을
물리 칠 수는 없었다.
헤르메스 길드를 비롯하여 다른 대형 명문 길드들이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벤 왕국의 성주들과 유저들의 피해가 극심한 와중에도 헤르메스 길드는 사냥터들을 빼앗고 길드원을 모집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겁을 먹고 몸을 사린다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실리를 택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욕은 바드레이가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길드장인 라페이가 먹었다.
바드레이가 헤르메스 길드뿐만 아니라 다른 명문 길드까지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비밀인 것이다.
바드레이는 로열 로드에서 여러 길드들을 창설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느라 뒤처진 적도 있지만, 길드들이 안정권에 접
어든 이후로 길드 연합의 총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헤르메스 길드. 하벤 왕국을 대표하는 길드로서 무책임한 거 아니야?"
"헤르메스 길드만 욕할 게 아니야. 다른 길드들도 똑같은 놈들이잖아."

하벤 왕국의 다른 명문 길드들까지 같은 선택을 해서 비난의 분산 효과까지 있었다.
칼라모르 왕국이 하벤 왕국의 영토를 심각하게 점령하고, 군대가 날로 강해지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함께 싸워서 키운 하벤 왕국을 이렇게 적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

바드레이는 직속 친위대와 함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따. 헤르메스 길드장 라페이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탈해서 독단적으로 저지르는 일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렸다.
바드레이와 친위대는 전면전이 아닌 칼라모르 왕국군의 후방에 등장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비밀 부대 그리고 친위대로 식량과 보급마차들을 습격하는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공적을 세우
고, 약탈한 식량들을 인근 마을에 나누어 주는 동영상들이 명예의 전당에 연속으로 올라왔다.
하벤 왕국의 유저들은 동영상이 등록될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환호했다.

"진짜 바드레이밖에 없어."
"하벤 왕국의 수호신!"

동영상에 달린 댓글의 개수가 수십만 개에 이를 정도였다.
방송사들의 취재 경쟁까지 따라붙으면서, 그렇잖아도 베르사 대륙의 최강자였던 바드레이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단순히 검술과 레벨이 높은 강한 유저가 아니라, 베르사 대륙 전체에 걸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위드가 오크 카리취로 변신해서 불사의 군단과 싸울 때, 그리고 본 드래곤을 사냥했을 때처럼 방송을 통해서 힘을
과시했다.
인근 왕국의 명문 길드들도 최상위권 랭커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배 아파하면서 그의 활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칼라모르 왕국군의 보급선은 유지하기 버거울 정도로 길어졌고, 원래는 하벤 왕국 내에 속해 있던 땅에서의 습격이
라서 방비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콜드림과 칼라모르 왕국군은 시스타인 요새까지의 퇴각을 택했다.
국가 간 전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바드레이와 친위대의 평가가 더욱 높아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오히려 그런 바드레이에게 징벌을 내렸다.

헤르메스 길드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바드레이와 그의 동료들에게 200일간 대외 활동을 금지한
는 벌을 내린다.

헤르메스 길드의 대표 라페이의 징벌은 하벤 왕국 유저들의 엄청난 공분을 자아냈다.
헤르메스 길드의 홈페이지는 당장에 욕설과 비난으로 가득 찼고, 바드레이에 대한 징벌을 취소하라는 시위까지 벌어
질 정도였다.
반면에 베르사 대륙 최강의 유저 바드레이에 대한 동경심과 평가는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우트라는 유저가 고위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혼자서 찾아냈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모험을 하고 싶
다고 공개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체이스 왕국으로 가 보세요."
"벨벳과 사향의 시세가 폭등하고 있다는 급한 소식입니다. 상인 분들의 발이 빨라져야 되겠는데요. 이
미 벨벳을 사놓으신 분들은 지금쯤 아주 행복하시겠죠?"
"혜민 씨, 재봉사가 벨벳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어머, 그게 가능해요?"
"초급 6레벨을 넘으면 특정 재료들을 조합해서 원단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직물이나 모직물, 벨벳
등을 만들 수 있으니 상인들은 재료들을 가지고 재봉사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베르사 대륙의 각종 소식들이 알려지고 있었다.
유저들이 많아지고 왕국들이 발전하면서 뉴스거리들도 다양했다.
따로 로열 로드의 뉴스 전문 방송까지 문을 열 정도인 것이다.

"북부에 있는 유저 분들은 가급적 최대한 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오주완 씨, 북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북부 각 마을들의 긴장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중앙 대륙에서 용병들이 대규모로 북
쪽으로 향하고 있고, 병사들도 모집되고 있다고 합니다."

신혜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목표가 어디일까요?"
"모라타밖에 없을 겁니다."
"모라타라면 전쟁의 신 위드가 다스리는 지역인데요."
"북부의 교역과 모험의 중심지이니까요. 영주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모라타를 노린다고 볼 수밖에
없죠. 화면으로 직접 보시죠."

방송 화면은 북부의 마을들을 비췄다.
1,000명, 2,000명 단위의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고, 대장간에서는 찍어 내듯이 병장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10명이 넘는 대장장이들이 연합해서 공성추 등의 대형 무기를 제작하는 것도 보였다.
영주와 기사들의 명령에 따라 군사훈련이 실시되는 일은, 나름 장엄하다면 장엄한 광경이었다.
북부의 거대도시로 성장하려 하는 모라타를 그냥 놔둘 세력은 없는 것이다.
이현은 텔레비전을 껐다.

"내 모라타를 노리다니!"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텔레비전을 켜 놓고 화를 낼 수는 없다.
전기세는 아껴야 될 것이 아닌가!
쉽게 고장 나는 리모컨을 던진다거나 벽을 주먹으로 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내 밥그릇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비싼 값에 팔아먹어야 하는 모라타를 공짜로 넘겨줄 수는 없으니까.
개도 밥 먹을 때 건드리면 성격이 더러워진다.
온순하고 귀엽게 생긴 치와와라고 해도, 주인이 상습적으로 밥그릇 가지고 장난치면 성질을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현이 숟가락도 올리기 전에 밥그릇을 뺏겠다는 게 아닌가!

"나처럼 선량한 사람의 등을 치려고 하다니... 역시 세상은 착하게만 살면 손해를 보기 마련이라니까."



위드는 영주성으로 돌아와서 창가에 섰다.
중앙 광장 부근에는 상인들이 빼곡하고, 멀리 프레야 여신상이 있는 호수 근처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살기 좋은 지역이라는 소문이 돌아 초보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어린 송아지들이 길가에 한가롭게 드러누워 있는 모습들도 보인다. 위드가 없는 동안에 누렁이가 새끼를 많이 쳐 놓
은 모양이었다.

"내 피땀이 들어간 마을이야."

위드가 만든 조각품과 막대한 액수의 자금 투자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빠른 개발은 어려웠으리라.
멀리에는 인부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서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도 보였다.
파보가 총지휘하는 랜드 마크 건물.
모라타 예술 회관!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처럼 활력에 차 있는 광경이었다.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방대한 면적의 정원에 꽃과 나무도 심고 있는 중이었다.
자랑거리가 될 만한 위대한 건물들까지 지어지고 있으니 영주라면 모라타를 보면서 뿌듯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 영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가 떠오르는군."

위드가 맨 처음 영주 자리에 올랐을 때는 맨밥에 물을 말아 먹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어나고 북부로의 모험 열풍이 불었다. 자장면이나 짬뽕밥 수준이 되었다.
유저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탕수육, 깐풍기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지금은 멋진 코스 요리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숟가락도 올리기 아까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모라타!
위드의 밥그릇에 대한 애착은 기사들의 소속감이나, 국가에 바치는 병사들의 충성심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내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하다니......"

위드가 지금껏 모아 놓은 돈은 39만 골드나 되었다.
사냥과 킹 히드라, 이무기 고기를 바가지 씌워 팔고, 퀘스트를 공유해 주면서 자린고비처럼 모은 돈이었다. 남들처
럼 비싼 요리와 술을 즐기거나, 외모를 꾸미기 위해서 귀금속을 산 적도 없다.
그렇게 모아 놓은 목돈을 투자하기로 했다.

"내정 모드!"

-화면이 영주의 내정 모드로 전환됩니다.

모라타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현재 있는 장소가 영주성이었으니 즉시 사용할 수 있었다.

『군사력 : 51 경제력 : 989
문화 : 1,512 기술력 : 338
도시 발전도 : 121
위생 : 41 치안 : 65%
부패 : 3
소유 자금 : 518,642

모라타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시기다.
도로를 새로 만들거나 수로를 확대하는 데에도 지속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화와 경제 발전, 기술력 증강에
상당수의 자금이 운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꽤 많은 여유 자금이 쌓여 있는 셈이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패도 생겼지만 근면한 주민들의 특성 덕에 아직 심한 편은 아니다.

"수입 내역 확인."

『매달 모라타 총수입(단위 : 골드)
주민들에 대한 세금 : 12,166
주택 세금 : 958
상점에서의 물품 판매에 따른 세금 : 22,889

상인들의 교역세 : 57,901
상인과 용병들의 통행세 : 3,051
자리 임대료 : 6,373

광산에서의 흑자 : 9,230
상점들의 흑자 : 49,749
식량 판매 수익 : 35,461

북부의 주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다른 마을에서도 여러 종류의 주민들이 이주하고
있습니다.
낮은 세율로 인해서 이주민들이 납부하는 세금이 많지 않습니다.
기술자들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직업을 가지지 않고 놀고 있는 주민이 2만 명이 넘습니다.
주택들은 광장 부근과 외곽 지역의 별장들을 제외하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특
히 판자촌에서는 주택 세금이 매우 낮습니다.
상점에서 싸구려 물품들의 구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품의 제작과 진열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점에는 밤늦게까지도 구
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상인들은 낮은 교역세를 내고 있습니다.
중앙 대륙에서 상단을 이끌고 온 교역상들의 비율이 절대적입니다.
낮은 품질의 저렴한 물건들을 가져오지만, 한 번의 운송 때마다 많은 물품들이 거래됩니
다. 모라타의 특산품인 섬유와 직물은 높은 가격에 구입하고 있습니다.
상인들이 거래한 상품들은 북부의 다른 지역으로 팔려 나가기도 합니다.
상인과 용병 들이 모라타에 매우 자주 찾아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광장에서 장사를 할 때 임대료를 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고 하지만,
광장의 자리가 비좁은 편입니다.
광산에서 질 좋은 철광석들이 채굴되고 있습니다. 구리와 은도 채굴되어서 인근 대장간에
서 가져갑니다.
채굴하는 양이 부족하고, 더 많은 광산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술집과 여관의 사업이 활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기 상점, 방어구 상점, 대장간에서도 밀려드는 손님들을 간신히 받고 있습니다.

모라타의 경제는 늘어나는 유저들로 인해서 건실한 편이었다.
위드는 소유한 돈을 2골드만 남기고 모조리 투자했다.

띠링!

『모라타 지방의 대규모 투자
모라타의 백작이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합니다.
2개월간 생산력 45% 증가.
마을의 영역 확장.
인구 증가 속도가 향상됨.

모라타의 자금은 이제 90만 골드도 넘게 늘었다.

"먼저 광산 개발과 농지 확대부터 해야겠군."

32만 골드를 전격적으로 투입!
농업 지역을 무한 확대하고 인근 산의 광산들을 개발하기로 했다.

-황무지를 개간합니다.
-아르펜 제국의 지식을 알고 있는 덕분에 개간 능력이 13% 확대되었습니다.
-황소들을 구입해서 농업에 사용합니다.
-3개의 폐광에 기술자와 인부 들을 파견합니다.
-모라타 인근의 산에 조사단을 보냅니다.

프레야 여신의 축복이 있는 모라타였으니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3개월이면 식량 생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에도 농사만큼 유용한 게 없다.

"경제력이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

곡식 생산량과 광물 생산이 늘어나면 그만큼 월수입도 증가한다.
위드는 다른 전략 게임을 할 때도 압도적인 돈을 버는 것을 선호했다.

"뭘 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안 되니까."

무조건 많은 돈과 자원!
영주 개인의 사치나 과시를 위한 유흥 시설의 개설보다는 최대한 아껴서 기반 시설에 투자했다.
모라타의 주민이 늘어나고 수준 높은 유저들이 많이 올수록, 벌어들이는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
다.
마을 주민들이 내는 퀘스트도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민들도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면서 경제활동에 전념한다.
유저들은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도 많지만, 베르사 대륙의 주민들은 항상 돈을 벌거나 사냥을 한다. 주민들이 가지
고 있는 돈이나 아이템, 정보 등에 따라서 퀘스트의 수준과 보상도 달라지는 것이다.
부유한 주민들이 많아질수록 경제에도 활력이 생기고 퀘스트도 다양해진다.
다행히 북부의 주민들은 유랑민들이 많아서 사냥터나 퀘스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폭이 넓었다. 니플하임 제국
이 몰락하면서 여러 유물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다행히 퀘스트의 질이나 양은 훌륭한 수준이었다.
성이나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는 주민들의 성장까지도 고려해야 되었다.

"마법사의 탑도 만들어야지."

마법사의 탑 가격은 무려 10만 골드!
지난번에는 돈이 없어서 짓지 못했지만 이제는 건설할 수 있었다.

"북부는 그래도 중앙 대륙보다는 추운 편이니까 빙계 마법사의 탑을 지어야겠군."

추울수록 빙계 마법사들이 우대를 받는다.
위드는 마땅한 자리를 몰색해 보려고 했다.
마법사의 탑은 굉장히 아름답다. 도시의 미관을 위해서라도 위치를 잘 선정할 필요가 있었다.
모라타의 광장 부근에는 집들과 상업 건물들이 많다. 프레야 여신상 주변이 신도시처럼 구획정리도 잘되어 있고 빈
땅도 많았다.

"여기에 지으면 되겠군."

위드의 내정 모드에 프레야 여신상과 이무기, 킹 히드라 조각상을 관람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유저들이 보인다.
위드는 프레야 여신상 인근에 마법사의 탑을 건설했다.
얼음의 탑!
거꾸로 된 고드름처럼 생긴 탑이 20여 미티 정도의 높이로 세워졌다.

"영주다!"
"모라타의 영주가 돌아왔다!"

마법사의 탑이 완성되었다면서 환호하는 주민들과 유저들이 보였다.
실종된 줄만 알았던 모라타 영주의 귀환인 것이다.
전쟁의 신 위드, 그에 대한 주민들과 유저들의 존경심은 절대적이었다.

"마법사의 탑에는 다음에 좀 더 투자를 하도록 하고."

모라타에서는 아직 초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제한적이었다.
마법사의 탑을 만들었으니 마법사의 직업도 이제는 선택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령술사를 바라는 유저들도 많은 편이었다.
몸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들에게 정령술사는 꽤 인기 있는 직업이다.
초보자들이 선뜻 모라타를 택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직업 선택이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
정령술사 길드는 화돌이와 흙꾼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정령의 집 건설!"

위드가 보고 있는 화면에 정령들이 등장했다.
수십여 개의 인기 있는 정령들!
오만하게 생긴 정령들이 의기양양하게 약간씩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통과. 통과......."

위드는 그 정령들은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구석에서 쓸쓸하고 외롭게 땅을 긁고 있는 흙꾼이와, 불장난을 하면서
궁상을 떨고 있는 화돌이를 발견했다.

"이 두 녀석의 집을 짓겠다."

-정령의 특성에 따라 건축 비용은 최소 2만 골드부터 시작됩니다.
얼마의 예산을 투입하시겠습니까?

"2만 골드."

-화돌이의 정령의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흙꾼이의 정령의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조각술로 형체를 만들어 준 정령들이 편하게 쉬고 놀 수 있는 공간 창설!
정령의 특성에 따라서 집도 정해졌다.
화돌이의 집은 화재가 난 것처럼 불타오르고 있었고, 흙꾼이의 집은 마치 황토방처럼 아늑한 분위기였다.

『정령의 집
정령술사들이 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장소.
정령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많은 장난감... 들이 있어야 하지만 최소한의 원가
절감으로 인해서 삭막함이 감도는 장소이다.
많은 정령들이 모여서 계약자를 기다리고 있다.

화돌이와 흙꾼이의 집은 넓은 사육장처럼 놀이 기구나 장난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정령의 집치고는
매우 검소하게 지었기 때문이다.

"정령술사 길드 건설!"

정령술사 길드도 개설.
8만 골드의 비용이 들었지만 앞으로 모라타에서 시작하는 초보자들은 정령술사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일반적인 정령술사들은 친화력에 따라서 바람의 정령이나 물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 하지만 근처에 정령의
집이 있다면 직접 보고 계약을 맺기가 훨씬 쉬웠다.

"착한 녀석들이니까 계약을 많이 맺을 수 있을 거야."

다른 정령들은 성격이 까다로웠다.
툭하면 정령술사를 무시하거나, 변덕이 심하고, 명령 수행을 거부한다. 쓸데없는 활동으로 인하여 마나의 소모도 심
한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정령술사들의 불만 1위가, 정령들의 비위 맞춰주기가 지친다는 이야기이겠는가.
하지만 화돌이나 흙꾼이는 명령 수행에 있어서는 철저했다.
시키면 한다.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건실한 정령들인 것이다.
어디에서도 이런 정령들은 찾을 수 없으리라.

"다 창조주인 내가 잘 가르친 덕분이지."

아직 다른 정령들보다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덜하더라도, 매우 유용한 정령들이 될 것은 틀림없다.

오는 계약은 거부하지 않는다.
손님을 왕처럼 대하라.

휘하의 정령들이 계약을 맺고 자주 소환되면 위드에게도 혜택이 생긴다.
정령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면 그들이 지상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강성해진다.
화돌이나 흙꾼이와는 무한한 친밀도를 가지고 있으니 마나만 허용된다면 정령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것.
정령들은 창조주인 위드를 향해 알아서 봉사하고, 보호하려고 할 것이었다.

"일단 당장 필요한 투자들은 했고......"

이제 남은 것은 특별한 건물들!
아르펜 제국의 황궁은 당연히 짓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돈과 귀금속도 없지만, 겨우 먹고살려고 하는데 사치의 극을 달리는 황궁을 지어서 파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르펜의 특수 곡물 창고 건설."

-곡물 창고의 건설이 이루어집니다.
방대한 양의 곡식을 상하지 않게 저장할 수 있습니다.
식료품 가격 변동이 줄어들고, 경제 발전과 출생률 증가 등에 기여합니다.
경제력이 7 올랐습니다.
모라타 외의 굶주리는 주민들의 이주를 촉발합니다.

정령의 집 근처에 대형 곡물 창고까지 세워졌다.
마천루처럼 우뚝 솟아 있는 석재 건물이었다.
모라타의 흑색 거성보다도 훨씬 높고 큰 건물.
영주의 창고에 있는 석재의 95%를 투입해서 지은 장대한 곡물 창고였다.

"이건 무슨 건물이야?"
"뭐지?"

정령술사 길드와 정령의 집이 막 만들어져 사람들이 근처에 몰려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모라타에도 이제부터는 정령
술사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다들 상기된 얼굴이었다.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많이 생기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기다렸다가 정령술사로 전직할 걸 그랬어!"

정령의 집에도 방문객들이 많았다.
화돌이와 흙꾼이는 독특한 생김새로 인해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콧대 높은 정령들에 비해서 착하기도 했다.

"절대 충성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손님."
"땅에 묻어 줘야 할 몬스터가 생각나시면 언제든 34번 흙꾼이를 찾아 주세요."

정령의 집에 방문한 유저들을 상대로 호객 행위를 하는 정령들!
정령의 집에서 나오고 나니 어느새 아르펜 제국의 대형 곡물 창고가 세워져 있었다.

"아르펜 제국의 곡물 창고?"
"아르펜 제국이라면 어디지? 내부에 곡식이 가득 채워져 있네. 판매도 하잖아."

베르사 대륙에서는 처음 보는 건물 양식이었다.
식료품들을 대량으로 사고팔 뿐만 아니라 창고에 저장할 수 있는 식료품의 양도 엄청났다.

"영주가 위드니까 만들 수 있는 건물인가?"
"이거 캡처해서 게시판에 올리자!"
"모라타에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난리가 날 거야."

모라타는 이미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름다운 도시다. 명예의 전당에도 여행기가 자주 올라오고, 모라타
를 배경으로 찍은 커플의 사진들이 인터넷상에 많이 퍼져 있을 정도였다.
이 장대한 규모의 곡물 창고의 등장도 다른 영주들에게나 유저들에게 심심찮은 화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요정의 신비한 연못 건설."

-영주성의 지하에 요정의 연못을 짓습니다.
말썽쟁이 요정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건축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어느새 위드가 접속을 종료할 시간이었다.
여동생이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1시간도 남지 않은 것이다.

"준비해 놓은 것들을 차리려면 서둘러 나가야겠군."



집에 돌아오는 이혜연의 눈에 골목에서부터 촛불이 하나씩 밝혀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가 돌아왔구나."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미안한 마음에 벌인, 여동생을 위한 이벤트였다.
이혜연은 촛불이 켜진 길을 걷다가, 하나씩 촛불을 끄고 신문지로 싸서 가방에 담았다.
양초들을 그대로 놔두기에는 아까웠고, 화려한 이벤트보다는 현실적인 부분들에서 감동을 주는 편이 훨씬 좋다는 것
을 아는 그녀였다.

'이런 거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미안할 게 없으니까.'

이혜연이 학교에 가지 않고 어긋나던 시절이 있었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살 충동을 느꼈고, 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
학교에서 소문은 아주 금방 퍼진다.
친구들의 벌레 보는 듯한 눈빛도 한없이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나중에 사채업자들의 빚을 청산하고 겨우 한숨 돌리고 살만해졌을 때였다.
그녀가 다시 학교에 나가기로 한 날, 이현이 일찍 어딘가로 향했다.

'어딜 가지?'

이혜연은 가방을 등에 멘 채로 몰래 뒤를 따라갔다.
이현이 간 곳은 그녀의 담임선생님 집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허리를 숙여 가면서 용서를 구하는 이현의 모습.
정작 자신은 공부할 돈이 아깝다고 학교를 자퇴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여동생을 위해서 애원하고 있었다.
이현이 동생을 봐 달라고 사정하면서 울었을 때를 그녀는 잊지 못했다.
여동생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건 이현의 지극한 정성이었다.
그런 진심을 보았기에,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동생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는 음악 소리도 들렸다.
근사한 분위기의 재즈가 아니라, 여성 그룹의 댄스 음악!

너무 예뻐. 귀여워. 깜찍해
짧은 치마를 입어 주면 좋겠니?
소매가 없는 옷은 네 앞에서만 입을게
난 네 영원한 여자 친구야

솔로들의 기분을 대변해 주는 듯한 노래!
음악과 함께 작은 마당의 파라솔에는 조촐한 요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현이 유럽 여행을 하면서 먹었던 음식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을 골라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해 놓은
것이었다.
파스타에 막걸리!
한국의 서정적인 맛과 이탈리아 요리의 정수가 들어간 조합이었다.





<풀죽신교의 창설>





이현은 그다음 날부터 방학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로열 로드를 개시할 수 있었다.
여동생의 아침 식사와 도시락을 싸 놓고 나면 완전한 자유시간이었다.
유럽 여행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할 수 있도록, 집중해서 로열 로드에 빠져들 수 있다.
물론 여동생은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라 최지훈과 같이 있었다.
그 점이 심히 불만이었지만 오빠가 참견할 수 없는 여동생의 인생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좋아하는 남자 정도는 만나도 돼. 그럴 권리가 있어."

먼저 도서관에 출입하는 동네 꼬마들을 매수했다.

"두 사람이 중간에 어딘가로 빠져나가거나 하면 연락해.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
보거나 하면 즉시 알려 줘야 된다."

또랑또랑한 눈만 빛내고 있는 어린아이들.
요즘 아이들도 영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현의 적당한 협박에 의해 수고비 1,000원에 스파이가 되어야 했다.

"내 부탁 무시하면... 이 동네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거야. 우철 초등학교 6학년의 신상기 알지?"
"허억!"

핏기 없이 하얗게 탈색되는 어린아이들의 표정!

"그 애들한테 너희 이름 쫙 뿌린다."

초등학교 일진의 이름을 팔아먹는 치사한 수법이었다.
신상기는 안현도의 도장에 막 가입한 초등부 학생이었는데, 미리 핫도그를 사 주면서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밑밥을
깔아 놓은 것이다.
도서관 인근의 숙박업소나 DVD방, 노래방 등에도 두 사람의 사진들을 쫙 깔았다.

"둘이 들어오면 즉시 전화 주세요."

현상금 50만 원.
이렇게 조치를 해 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최지훈의 휴대폰에 문자를 보냈다.

'섣부른 수작 부리면 죽인다. 죽여 버린다. 반드시 끝까지 추적해서 죽인다.'

이렇게 해 놓고서야 이현은 편안히 로열 로드에 접속할 수 있었다.

"여동생의 인생이니까. 정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군!"



아르펜 제국 곡물 창고에 대한 소식은 모라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르펜 제국의 건물들, 베르사 대륙의 역사서에서도 유일하게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건물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전신 위드가 언제 아르펜 제국의 퀘스트를 했던 거야?"
"통곡의 강 퀘스트가 다소 밋밋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위장이었어. 진짜는 아르펜 제국 퀘스트였
어."
"킹 히드라와 이무기를 소환할 때부터 알아봤지. 보통 배포로 할 수 있는 일이야? 정상인이라면 1마리
만 만나더라도 완전히 얼어붙어 버릴 수밖에 없는 몬스터인데... 혼자서 그냥 다 사냥할 수 있는 여유
가 되니까 소환했던 걸 거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소문들!
위드가 아르펜 제국의 특수 곡물 창고를 지은 것으로 인한 파장은 대단했다. 어디를 가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방송사의 생중계에서도 갑작스럽게 화제가 바뀔 정도였다.
아르펜 제국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그 누구의 호기심이라도 자아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인 것이다.
전설의 달빛 조각사.
위드가 게이하르 폰 아르펜 황제의 대를 잇는 후예라는 사실까지 공개된다면 이 베르사 대륙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
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더 많은 사람이 경계하게 될 것이다.
조각술의 비기, 혹은 다른 직업의 비기를 터득한 건 위드뿐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최고 수준의 유저들 사이에는 남들이 모르는 직업의 비밀들도 알려져 있다고 봐야 된다.

"그런데 왜 특수 곡물 창고밖에 짓지 않은 걸까?"
"엄청난 돈이 들억서가 아닐까? 아니면 퀘스트로 얻은 정보가 이 건물밖에 없을지도 몰라."

유저들이 추측을 하며 떠들고 있었다.
석재 소모량이 매우 많은 편이기는 했지만, 다른 건물을 지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위드는 다시 내정 모드를 발동했다.

"선구자들의 계단 건설."

-현자들이 앉아서 학문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도시의 지적인 수준을 높입니다.
마법사들의 지혜를 영구적으로 5 증가시킵니다.
학자 길드의 탄생을 촉발합니다.
기술력과 문화가 3씩 올랐습니다.

광장에서 통곡의 강으로 향하는 이동 포탈 앞에 널찍한 계단이 생겼다.
모라타에는 현자들이 없었으므로 노인들이 와서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었다.

"천문 관측소 건설."

-정밀하게 건설된 석조 건물.
밤하늘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기후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릴 수 있으며 마법의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최초로 발견한 별자리들은 행운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모라타로 향하는 불길한 기운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습니다.
기술력이 8 올랐습니다.

석재는 드디어 완전히 고갈!
아르펜 제국의 건물에는 대개 대량의 석재가 소모된다.
이제 나무로 지을 수 있는 건물들만 건설해야 했다.

"아르펜 상인 회관 건설."

-상인들을 위한 편의 시설입니다.
교역로와 다른 지역의 물품 가격 정보를 모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을 대상으로 특별한 음식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품 거래를 활발하게 만듭니다.

"가죽 제품 전시장 걸설."

-가죽으로 만든 물건들을 거래할 수 있는 특별 전시장입니다.
일반 가정에서 만든 가죽 제품이나 소량의 가죽을 거래할 수 있습니다.
숙달된 재봉사들의 숫자를 늘려 주며, 관련 산업을 발전시킵니다.
재봉이 발달된 모라타의 특성에 따라 경제력이 10. 기술력이 15 올랐습니다.

"아르펜의 소형 계단식 정원 건설, 낮잠을 잘 수 있는 과일나무 그늘 개설, 산책길 개설, 중급 마차
대여소 개설."

도시 내에 500골드 이하의 쉼터들을 집중적으로 건설.
다른 어떤 지역에도 없는 아르펜 제국의 건물들이 모라타를 훨씬 풍요롭고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액세사리 상점 개설, 소형 극장 개설, 보석 세공소 개설, 가구 제작소 개설, 목재소 개설, 조미료 상
점 개설, 포도주 양조장 개설, 닭 사육장 개설, 양 사육장 개설."

모라타의 유저들을 상대로 하는 돈벌이 건물들도 잊지 않았다.

"돈이란 돌도 돌아서 결국 나에게 와야 되는 거야."

각종 편의 시설들을 지어서 모라타 유저들의 돈을 뜯어 낸다.
포도주 양조장을 세워 놓으면 술집이나 여관에 좋은 품질의 포도주를 공급하는 게 가능하다.
닭이나 양도 키워서 공급할 수 있었다.
농사나 광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영주도 있지만 이런 사업체들이 중요한 수입원이 되기도 했다.
물론 적자를 낼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러웠지만, 모라타의 유저들이 이만큼 늘어난 이상 운영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
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광장이 조금 좁은 것 같은데......"

모라타에 사람들이 유입되고 건물들이 세워지면서부터 광장이 많이 협소한 느낌이 들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상인들과 유저들이 좌판을 벌이고, 퀘스트와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도 날로 늘어난다.
모라타에서 새로 시작하는 유저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상점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이번에 모라타를 더 크게 확장해야겠어."

위드는 도시의 외곽,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장소에 4개의 광장을 짓기로 했다.

"와이번 광장 건설, 빙룡 광장 건설, 빛의 광장 건설, 황소 광장 건설."

4만 골드를 들여서 번듯한 분수가 있는 광장들을 지었다.
바닥은 흙을 고르고 자갈을 깐 정도에 불과했지만 정말 넓은 공간이었다.
로자임 왕국의 수도인 세라보그 성에 비교해도 훨씬 넓은 수준이었다.
프레야 여신상을 중심으로 하여, 5개의 광장이 다이아몬드형으로 둘러싸는 형태였다.

"서로 연결되는 길을 만들도록 하고......"

길을 건설하도록 지시하고, 상업 건물들과 주택가의 위치도 지정했다.
도시가 지금보다 무려 5배나 커지더라도 끄떡없을 정도의 규모!
하늘에서 보면 5개의 광장이 여신상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공 호수까지 있는 여신상 부근이 이른바 땅값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여의도였다.

"여기는 모조리 영주의 땅이니까 나중에 분양을 해서 팔아먹어야지."



각 방송사에서는 취재기자들을 북부로 파견했다.
하벤 왕국과 칼라모르 왕국의 전쟁도 소강상태였고, 데이몬드의 부활의 군단은 웬일인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모라타를 중심으로 전운이 들끓고 있는 북부야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위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될 거야. 혼자서 여러 길드들과 싸운다는 자체가 무모한 짓
이니까."
"아닐걸. 북부의 여러 길드들이 과연 진정으로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었다고는
해도 결속력이 단단하지는 못할 거야."

대형 퀘스트를 주로 하던 위드에게 맞서는 도전자들의 등장.
방송사에서 북부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인터넷의 여론도 북북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다가올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모든 상황이 방송으로 생중계가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전쟁의 신 위드가 지휘하는 군대를 본다는 기대감에, 그리고 각 길드들이 연합을 이루어서 대공세를 취하는 장관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CTS미디어에서는 발 빠른 여성 모험가 네일을 트리반 마을로 보내서 인터뷰를 했다.
트리반 마을은 훈련받고 있는 병사들오 인해서 전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스티렌 길드에서도 모라타를 침공하실 겁니까?"
"물론입니다."

길드 마스터 스티렌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병사들의 훈련도는 나날이 높아지고, 중앙 대륙에서 구입한 무기와 방어구의 보급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막대한 자금을 풀어서 용병 유저들과 다크 게이머들도 영입하는 중이었다.
CTS미디어에서 생중계하는 인터뷰는 최소한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을 것이고, 뉴스를 통해서 수천만 명까
지도 알게 되리라.
북부의 유저들 그리고 모라타를 노리는 다른 길드 마스터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선전의 시간이었다.

"전쟁 준비는 어느 정도나 이루어졌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병사들의 무장은 대충 끝났고, 중앙 대륙에서 섭외한 대장장이들로 공성 병기들도 만들고 있습니다.
프레야 교단의 보호만 끝나면 모라타로 쳐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스티렌 길드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트리반 마을을 지배하는 스티렌 길드뿐만이 아니라, 북부의 거의 모든 길드들이 모라타를 차지하기 위해서 군대를
확장하는 중이다.
북부의 길드들은 총인원 10만 명 이상의 압도적인 군대를 만들어서 모라타를 점령할 작정이었다.



페일이 활을 정비하고, 수르카는 장갑을 끼었다. 제피는 낚싯대를 휘두르면서 줄이 잘 늘어나는지를 점검했다.
그들도 모라타에서 사냥을 하면서 주위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큰 전쟁이 되겠군요."

페일이 평온하게 말했다.
궁수에게 어쩌면 전쟁이란 가장 크게 활약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전사처럼 정면 대결만 고집하다가 쓰러질 일은 없
을 테니까.
몬스터들의 침입에도 페일과 일행은 많은 활약을 했다.
성벽을 뛰어다니면서 화살을 쏘고, 중형 몬스터의 등에 떨어져서 머리를 노리기도 한다.
페일의 전투 경험이나 관록도 만만치는 않은 수준이 되었다.
화령은 드레스와 액세서리들을 착용했다.

"멋진 무대가 될 것 같아요!"

로뮤나도 한마디 했다.

"이번에 마법으로 싹 쓸어버려야지!"

공성전이 벌어지면 돈을 받고 용병으로 참전할 수 있다. 죽으면 레벨이 하락하고 아이템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승리하기만 하면 많은 것을 얻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페일과 일행은 그런 차원을 떠나서 모라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위드와는 동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운 싸움이라도 함께한다면 겁나지 않았다.

"다인 님도 싸우실 겁니까?"
"물론이죠. 위드 님과는 친... 구인데요."
"그런데 마판 님은 어디에 있죠?"

이리엔이 물었을 때에, 메이런은 어깨만 으쓱했다.

"몰라요. 통곡의 강 쪽으로 무역을 하고 나신 이후로 한동안 보이지 않으시던데요."

상인 마판이 모라타에 차려 놓은 상점들은 잘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디로 간 것인지, 전혀 종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드에게 남아 있는 돈은 고작 26만 골드!
다른 길드와 영주들이 모라타를 침략하겠다고 하니 방어시설을 갖추고 군대를 모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착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내 밥그릇을 건드리다니......"

위드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원하지 않는 지출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구, 군사훈련소 개설."

모라타 외곽 지역에 7만 골드를 들여서 전문적인 군사훈련소를 만들었다. 보병과 궁병, 창병 등을 편성하고, 집단
진형을 가르칠 수 있는 훈련소였다.
병사들의 훈련도와 레벨을 어느 정도 높여 줄 수 있다.
기병들을 뽑기 위해서는 기병 훈련장과 말 사육소를 따로 지어야 한다.
물론 20만 골드가 넘는 엄청난 비용은 필수!

"크흐흑."

위드는 영주의 방에서 홀로 쓰라린 속을 달랬다.
로열 로드를 하면서 조각사로 전직한 이후로 가장 서럽고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병사들을 8,000명 징병하라."

-8,000명의 병사들을 징병합니다.
한창 일할 시기에 청년들을 강제로 징병하여 주민들의 불만도가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징병된 병사들의 사기는 낮습니다.
징병에는 1인당 10골드가 소모됩니다. 그리고 매달 3골드씩의 월급이 소모됩니다.

"후욱후욱."

위드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연속적인 괴로움과 고통!

"도, 돈이 마구 나가고 있어."

병사들은 유지하는 데에도 정말 많은 돈이 들었다.
병사 1인당 월급 3골드였고, 마법사는 월급이 최소한 600골드나 되었다.
기병들은 따로 말을 사 주고 갑옷을 입히는 데에만 3,000골드는 든다.
중급 정도의 기병대로 무장하려고 하면 1인당 1만 골드도 넘는 지출이 필요했다.
군사훈련소를 만드는 데에만 7만 골드, 그에 더해 징병에 8만 골드!
돈을 주고 병사들을 고용하는 모병 방식을 취했다면 주민들의 불만도가 오르지 않겠지만, 그러려면 병사 일인당 모
집 비용이 100골드 이상 들었다.
돈을 모으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
비행기에서 낙하를 할 때보다도 더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말을 충심으로 따르는 병사들을 늘리고 기사들을 양성하는 걸 보람으로 느끼는 영주들도 있다고 한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늘어날수록 영주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지게 되니 일리는 있는 말이다.
하지만 위드에게는 그저 돈벌레들을 늘렸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영주님이 병사들을 모집하신다."
"어서 가자. 모라타를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

내정 모드에서는 모라타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건장한 남자 주민들이 자원해서 훈련소로 달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주민들의 충성도가 상당히 높았기에 징병은 매우 빠르게 종료되었다.
하지만 위드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병장기를 보급받지도 못하고 훈련도 오래 받지 않은 일반 병사들은 수성용으로 머릿수를 채워 주는 역할
정도에 불과했다.
전쟁이 벌어져서 불리해지면 매우 빠르게 사기가 하락해 버린다.
물론 뛰어난 지휘관이 있다거나 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면 그럭저럭 싸우지만, 8,000명의 병사들로 달라질
것은 별로 없었다.
여기서 예상치 못했던 추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페로이 마을에서 중장갑 보병 훈련을 받은 160명의 주민들이 병사로 지원을 했습니다.
-트리반 마을의 궁수 197명이 전향하려 합니다. 이들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숙달된 사냥꾼 출신 351명이 모라타가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자원해서 레인저가 되겠다고
합니다.

군사훈련소를 만들어서 대규모 모병을 하니, 추가적으로 입대를 하겠다는 병사들만 자그마치 2,680명!
스스로 착취를 선택한 갸륵한 인생들이었다.
통닭을 먹고 싶은데, 털을 뽑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라이터를 들고 눈앞에 나타난 닭을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
가!

"역시 내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위드는 그들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두 모라타의 병사가 되는 것을 허가한다."

-모라타의 병사가 총 10,680이 늘어났습니다.
평균 레벨 : 17.
훈련도 : 12%.
신입 병사들의 훈련도나 레벨은 전투 경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막 소집된 신병들은 집에서 대충 꺼내 입은 것 같은 구질구질한 가죽 옷에 창 하나를 들고 있는 수준으로 훈련소에
서 창술을 배웠다.
다른 마을 출신들은 훨씬 훈련 상태가 좋았지만, 소수씩 모여서 제멋대로 행동하느라 군기는 엉망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나 훈련도, 레벨, 무기 숙련도 등 모든 부분에서 낮았다.
프레야 교단이 모라타를 보호해 주기로 한 남은 시간은 고작 36일!

"이런 병사들로는 마음이 놓이지가 않는데......"

수성전임을 감안한다면 3배의 병력까지도 버틸 수 있다지만 위드는 안심이 안 됐다.
다른 길드들에는 고레벨 유저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모집한 지 얼마 안 된 병사들은 허수아비나 다를 바가 없다.
성벽에서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를 들고 수성을 하더라도 적들의 마법 공격에 의해 초토화될 수도 있다.
무기도 갑옷도 형편없는 병사들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프레야 교단만큼 든든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콜 데스 나이트 반 호크!"

시커먼 연기와 함께 데스 나이트가 소환되었다.

"불렀는가, 주인."
"네 후배 좀 불러와야겠다."
"후배?"
"콜드림 말이다. 콜드림에게, 칼라모르 왕국에 내가 기여한 공헌도를 전부 바칠 테니 기사단을 데리고
여기로 오라고 해."

칼라모르 왕국 최고의 기사 콜드림은 하벤 왕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무적의 기사였다. 뱀파이어 왕국에서 콜
드림을 해방시키면서 획득한 국가 공적치가 23,000이나 됐다.

"콜드림을 싸우게 하고, 그 전에도 훈련 교관으로 하면 병사들의 성장이 좀 더 빨라지겠지."

일석이조의 효과로 콜드림에게 병사들의 훈련을 맡길 생각까지 했다.

"와일이를 타고 당장 다녀와라."
"즉시 떠나겠다."

위드는 내정 모드로 여러 건물들을 지은 김에 영주성의 다른 직위도 임명했다.

"세금을 거두는 핵심 부서인 재무청에는 금인이를 대표로 하도록 하고......"

비싸고 품격이 느껴지는 금인이 외에 다른 조각 생명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조세1차장에는 와일이, 조세2차장에는 와둘이, 조사국에는 와삼이, 감찰국에는 와오이. 특별징세국에는 와육이와 와
칠이를 임명했다.

"군사청에는 빙룡이를 넣어야겠다. 불사조와 함께 협력해서 하라고 하면 되겠지."

상업청에는 누렁이. 도시미화청에는 프리나를 임명했다.
권력 분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
모라타의 핵심 직책에는 철저히 자기 부하들만을 중용하는 인사였다.



모라타에는 유난히 길드들이 적은 편이었다.
초보자들도 적은 돈으로 판잣집에서 길드 사무소를 임대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시도조차 드물었다.
어두운 모라타의 이른 새벽!
거리를 돌아다니는 유저들이 있었다.
멀리서 빛의 탑이 마지막 남은 달빛을 은은하게 뿌리고 있었다.
모라타의 새벽은 해가 뜨기 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소르반, 거의 다 와 가고 있지?"
"그래, 후터. 조금만 가면 돼."

소르반과 후터는 토끼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초보자였다. 그나마도 아껴 입느라 여러 부위를 꿰맨 흔적이 남아 있
다.
모라타의 장점은 재봉 기술이 극히 발달해서 초보자들이 입는 방어구들의 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는 것이다. 모
라타의 재봉 장인들이 만든 옷들은 고가에 거래되며, 대대로 물려 쓰곤 했다.

"정말 아무도 안 따라오는 거겠지?"

후터는 불안한 듯이 걸음을 멈추고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 돌아봐. 우리가 확인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이야?"
"판잣집들을 봐."

대충 지어진 것 같은 판잣집의 창문들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창문 안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동자들!
누군가 몰래 소르반과 후터를 따라온다면 절대 발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시자가 수백 명도 더 되는 것이다.
소르반이 작게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오늘의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돼. 만약에 한마디라도 잘못 입을 놀리는 순간에는... 너나 나
나 모라타에서는 끝이야."

꿀꺽.
후터의 목울대에서 긴장감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장소는 물론이고, 모임 자체에 대해서도 절대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래. 만약에 우리가 말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게 되면 더 이상 어떤 퀘스트나 파티에도 참여하지 못하
게 될 거야."
"모라타에서는 정말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군."
"모라타만이 아니야. 그들의 세력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어. 북부는 물론이고 베르사 대륙 어디에서
도 버틸 수 없게 되겠지. 최악의 경우 로열 로드를 접어야 할지도 몰라!"

후터는 이미 로열 로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후였다.
하루라도 로열 로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입 직장인으로서 연수와 인턴 과정을 거치느라 남들보다 빨리 시작을 못 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정말 굉장한 단체로군. 그 풀......"
"쉿! 성소가 아닌 곳에서 함부로 그 이름을 꺼내선 안 돼."
"아차!"

후터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소르반과 후터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는 언덕에 밀집한 판잣집 중의 한 장소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판잣집이었지만, 실제로 내부로 들어가게 되면 엄청나게 넓은 지하 광장이 나온다.
스팽커의 던전!
모라타에서 판잣집이 조성되던 자리에 원래는 던전이 있었다.
대규모의 던전이었는데, 발견자들은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나서 특정 단체에 헌납했다.
던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단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취익."

경비하는 유저들이 내는 콧소리에 소르반과 후터는 더 크게 답했다.

"취이이이이익!"
"췍!"
"들어가시오."

어느새 소르반과 후터의 뒤로도 사람들이 많이 밀려 있었다. 미로 같은 판자촌에서 다른 길로도 꾸역꾸역 사람들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그럼......"

소르반과 후터는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집회의 장소로 쓰이는 던전 내부에는 벌써 2만 명도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모라타에서 매우 많은 유저들이 비밀리에 동참하고 있다는 증거다.
벽마다 횃불들이 밝혀져서 뜨거운 열기를 퍼트렸다.

"겨기 그분이 사냥한 이무기의 고기가 있습니다."
"오오, 이무기!"
"그분에게서 받은 잔돈입니다."
"잔돈. 잔돈!"

광신교의 무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 초보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고레벨 유저들도 상당수
였다.
마법의 대륙에서부터 위드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그 무엇도 부숴 버릴 만큼 파괴적이다. 거대 길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불가능하리라던
퀘스트들을 완수하는 모습에 광범위한 지지자들이 생겨났다.
마법의 대륙에서부터 쌓아 온 위드의 명성과 모라타의 살기 좋음이 고레벨 유저들도 속속 끌어들였다. 그리고 지하
단체까지 결성하게 만든 것이다.
구석에서는 무료로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후루룩 마셔 버리면 금방 끝날 것 같지만 감로수처럼 아껴 먹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마시고 있는 음식의 정체는 풀죽이었다.
소르반과 후터가 가입하려는 단체의 이름은 바로 풀죽신교였던 것이다.
현재 회원 수만 32만.
북부 최대의 단체라고 할 수 있는 풀죽신교를 창설한 것은 레몬이라는 유저였다.
로자임 왕국에서 세례를 받은 성녀 레몬. 그녀는 피라미드 제작에 사용된 석재를 나르면서 풀죽을 처음 접했다.

"아, 시원해."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뛰어난 요리는 아니었지만 초보자 시절에 먹어 본 음식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노역을 감당하
느라 배가 고팠고 체력도 떨어져 있었다.
이럴 때에 마시는 소화가 잘되는 풀죽은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그녀는 석재를 서른아홉 번이나 운반했고, 결국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 감동적인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때 쌓은 명성 덕분에 로자임 왕국에서 퀘스트를 받기도 수월했고, 초보를 벗어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레몬은 그 후 여행과 사냥을 하다가 모라타에 도착했다.
위드는 그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업주, 위드가 그보다 나은 점은 마지막 잠재력까지 이끌어서 쓰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끈한 보상!
프레야 여신상의 대공사가 진행되면서 풀죽은 모라타에도 들불처럼 퍼지게 되었다.

초보 시절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반드시 눈물 어린 풀죽을 마셔 봐야 한다.
사냥 후에 마시는 풀죽 한 사발.

초보자들은 풀죽과 함께 시련의 시간을 감내했다.
풀죽의 장점은, 재료도 거의 필요하지 않고 간단하게나마 포만감을 때울 수 있다는 점이다.
모라타에 고급 식당들이 없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설탕과 인삼, 적당한 양의 고기 등으로 점점 개량된 풀죽은 그
대로 먹어도 충분히 맛이 있었다.
초보자 시절에는 누구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위드의 지휘 아래에 이루어졌던 공사에 참여한 초보자들은 끈끈한 유대 관계로 뭉쳤다.
로자임 왕국에서 고생했던 레몬과 다른 유저들은 배고픈 이들에게 무료로 풀죽을 나누어 주면서 풀죽신교를 창설했
다.
판자촌과 풀죽이 모라타의 초보자들의 힘겨움을 달래 주고 있을 때였다.
영주인 조각사 위드의 정체가 전쟁의 신 위드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고레벨 유저들도 모라타에 와서
풀죽신교에 몸을 의탁했다. 거대 길드의 텃세나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신 위드는 자유와 힘을 상징했다.
풀죽신교는 모라타에서 가장 빠르게 세력을 늘렸다.
레벨이 50도 되지 않는 초보자 31만 2천 명과 고레벨 유저 8,000여 명!
모라타에서 시작해서 퀘스트를 위해 인근 지역으로 떠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풀죽신교의 특징이라면 맹목적으로 위드를 믿고 지지한다는 점이었다.

"그럼 잠시 카리취의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오오오!"

비밀 집회의 분위기는 더욱 열광적으로 변해 갔다.
허가를 받지 않은 음성적인 집회였지만 축제나 다름없었다.
중급 요리사까지 죽을 쑤는 일에 참여를 해서, 나누어 주는 죽의 맛도 좋았다.
한쪽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춤을 추고 있기도 했다.

"죽순죽이 나왔다."
"여기서는 둘이 먹다가 같이 죽는다는 독버섯죽을 나누어 준다!"

죽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풀죽회원들.
완전 초보들이 많았지만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밖에서는 해가 뜨려고 할 무렵이었다.
중앙에서 행사를 진행하던 유저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두꺼운 로브를 머리에 눌러쓴 채로 완벽하게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북부의 많은 세력들이 여기 모라타를 노리고 있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집회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초보자들의 눈에 어린 것은 적대감과 분노!

"그들은 막대한 돈으로 용병들을 구입하면서 모라타를 점령하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들이 모라타를
점령하거나 말거나 우리에게는 알 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라타를 차지하면
당장 세금부터 올리게 될 것입니다."

투자한 비용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
더더구나 어느 한 길드나 세력이 모라타를 차지한다고 해도 전쟁이 끝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욕심을 버리지 않은
길드들이 계속 공격을 한다면 모라타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초보자들이라고 해도 눈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러한 상황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의 터전인 판자촌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토끼 1마리 사냥에도 허가를 받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막아야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모라타를 지킵시다!"
"우와아아아아!"

초보자들이 목검과 녹슨 검을 휘두르며 함성을 질렀다.

"더 많은 사람들을 우리 풀죽신교에 가입시킵시다. 우리는 자유와 힘, 정의를 믿습니다. 모라타를 수
호할 것입니다."

이른바 초보자들의 대란이라고 불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시작점이었다.
로브를 둘러쓰고 선동을 하던 사내가 음모의 눈빛을 빛냈다.

'역시... 위드 님께 배웠던 수법은 확실하게 먹혀.'

풀죽과 선동!
행사를 진행하던 유저의 정체는 바로 마판이었다.
위드가 모라타의 모직 원단 생산 공장의 독점 판매권을 넘겨주기로 하고 풀죽신교에 일찌감치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낸다.
위드는 이미 물밑에서 전쟁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흠."
"에헴."
"에취!"

각양각색의 헛기침을 하면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검치 들. 그들은 오크 숙녀들과 단체로 미팅을 하고 있었다.
세에취가 어렵게 만들어 준 자리였다.

"이쪽은 메르취."
"멜취라고 부르세요, 취익!"
"검삼치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하에취예요, 취췻."
"참 예쁜 이름이군요. 저는 검칠치입니다."

검치 들은 오크들과 미팅을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기에 바빴다.
검치 들에 대한 소문이 상당히 호의적으로 퍼져 있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오크 암컷들 덕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미팅 자리에 나온 검치 들에게 갑자기 검사백삼십치의 귓속말이 전해졌다.

-위드가 다스리는 모라타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는데요.

대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검삼치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위드가 우리 몰래 공성전을 하려고 하나 봅니다.
-공성전? 그렇게 재미있는 걸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독차지를 해?
-그러게요. 텔레비전 중계도 한다는데, 완전히 자기 혼자 떠 보려는 흑심을 품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
까?
-텔레비전 중계까지 해?

검삼치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물러가야 될 것 같습니다."
"취이익, 그게 무슨... 제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췻!"
"아닙니다. 막내가 싸움에 휘말린 것 같아서요. 나중에 연락드려도 될까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따는 불구경, 그리고 싸움 구경.
직접 참여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

"취췻, 꼭 귓속말 주세요."

오크들과 미팅을 하던 검치 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모였다.

"막내가 텔레비전에 또 나와요?"
"본 드래곤을 잡을 때 벌써 텔레비전에 나와 놓고는, 양심도 없이 우리도 모르게 하고 혼자만 또 나오
겠다는 거 아닙니까?"

검삼치가 군침을 다셨다.

"공성전이라니 나도 해 본 적이 없는 건데. 정말 끝내주겠지?"
"저는 무사 수행 도중에 해 봤습니다."
"어땠는데?"
"끝내줍니다. 최고였습니다. 영화처럼,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베어 버리는 거죠."
"크으."
"그리고 모라타는 여기보다 훨씬 좋다던데요."
"어떤 면에서?"
"거기는 남자 반, 여자 반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아?"

아무래도 외모가 돼지를 많이 닮은 탓에, 여성 유저들은 오크를 그다지 선호하여 택하지 않았다.
반면 모라타에 있는 초보 유저들은, 당연히 여성의 비율이 절반 정도는 되었다.
검오십구치가 말했다.

"본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검십육치 사형도 여자 친구가 생겼잖습니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지."

검치 들 중에서는 첫 번째로 여자 친구가 생긴 대사건이었다. 검치 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핵심 계기가 된 일.

"그게 다 여성 유저를 지키면서 본 드래곤과 싸웠더니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검삼치가 무릎을 쳤다. 기가 막힌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희망이 있구나. 가자!"
"공성전을 위하여!"

유로키나 산맥과 로자임 왕국에서 활동하던 검치 들. 그들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말을 타고 모라타로 향했다.
검치 들의 제자들도 뒤를 따르고, 오크들까지 함께 이동했다.





<위드의 노래>





-프레야 교단의 모라타에 대한 보호가 종료되었습니다.

스티렌 길드와 푸렌 길드, 드레인 길드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평원으로 나왔다.
북부의 멀리 있는 다른 마을들에서는 이미 유저들과 군대가 출발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북부동맹군.
총인원 12만 8천 명의 거대한 군세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 중에서 9만 명 이상은 유저가 아닌 NPC 부대였다.
북부의 유랑민에게 훈련을 시키고, 검과 활, 방패 등을 들게 해서 전쟁에 참여시킨 것이다.
콰르르르르.
공성 무기만 40개를 앞세우고, 북부동맹군의 진격이 개시되었다.

"모라타로 가자. 모라타를 우리의 것으로 하자."
"약탈을 허용한다. 먼저 가지는 사람이 주인이다."
"기름진 모라타의 땅을 가지고 싶은가. 검을 들어라!"

길드 마스터들은 자신들의 군대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무래도 이런 큰 규모의 전쟁에서 NPC 병사들의 사기는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기 때문이다.
북부동맹군은 모라타와는 불과 8시간 정도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KMC미디어, CTS미디어, 신규로 등장한 CHN방송국에서는 이번 전쟁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인터넷 사이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도 관련 글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전신 위드가 보여 주는 전쟁입니다, 여러분!
-완전 기다렸어요.
-족발 시켜 놓고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신 위드.
그 거대한 명성 때문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긴장과 흥분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위드가 보여 주는 싸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북부동맹군의 전력이 너무 대단하지 않나요? 중앙 대륙에서도 저런 규모의 싸움은 흔하지 않잖아요.
-위드니까 이 정도 규모의 싸움은 되어야겠죠?
-솔직히 모라타의 패배를 예상합니다. 모라타의 병사는 겨우 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라는데, 수성전
이라고 해도 못 버틸걸요.
-마법의 대륙에서 독불장군이었을 때와 로열 로드의 대규모 전쟁은 차원이 다릅니다. 무조건 북부동맹
군의 승리예요.
-위드가 전쟁 경험이 없다고요? 푸훗, 오크들과 다크 엘프 부대 지휘하던 동영상이나 보고 오세요.
-경험이 많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건 아닙니다. 군대나 세력이 있어야죠. 이게 마법의 대륙인 줄 아십
니까? 길드들에는 위드도 안 될 겁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론은 팽팽하게 맞섰다.
위드의 명성을 생각하면 패배를 떠올리기 어렵다.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 등이 그만큼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위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크나 다크 엘프 들을 지휘하여서 그렇게 큰 전쟁을 한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방송사에서는 압도적으로 북부동맹군의 승리를 전망했다.

"모라타의 병사들은 대부분 얼마 전에 급조된 것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군대의 숫자와 질에서 상대
가 되지 않습니다."
"전쟁에선 규모가 중요한데요, 이번 싸움에서는 위드가 최초로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동안에 진행자들이나, 고레벨 유저들이 포함된 참석자들은 불리한 전망만 쏟아 냈다.
하지만 실제로 북부동맹군에 참여한 유저들의 부담도 만만치 않게 컸다.
전쟁의 신 위드!
베르사 대륙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 위드와의 싸움이었다.
퀘스트에서 보여 준 각종 모습들이나, 그가 부하로 부리는 아이스 드래곤, 와이번, 피닉스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
한 대상이 없다.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스티렌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위드다. 위드 한 사람만 잡으면 된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이긴다.
우리의 전력이 모라타보다 몇 배는 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니 신경 쓰지 마라. 금방 무
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우와아아!"
"위드의 부하들이 무서운가? 대형 몬스터일 뿐이다! 여기에는 대형 몬스터를 사냥한 경험이 많은 길드
들이 수두룩하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만 사냥하면 된다. 대형 몬스터를 잡기만 하면 전리품을 얻고 영
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격하는 북부동맹군!
모라타의 빛의 탑과 여신상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빠르게 걸으면 불과 30분 정도의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



모라타의 군대 11,867명은 활로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칼라모르 왕국 기사들에 의해 훈련을 받은 그들의 눈에서는 정광이 뿜어 나왔다.

"저기다. 공격을 준비해라!"
"와아아!"

북부동맹군은 다른 곳을 노리지 않고 정확하게 성벽을 향해 공격 준비를 갖췄다. 위드와 모라타 군대만 잡으면 끝이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성 무기들을 착착 세우고, 서서히 다가왔다.
상대가 위드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경계도 하지 않았으리라.
성벽이 발석기 등의 사정거리에 거의 가까워졌다.

"발석기를 쏘기만 하면 된다.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우리의 승리다!"

그렇게 북부동맹군의 기세가 한창 오르고 있을 때였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말들이 질주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진격 나팔 소리가 울렸다.
뿌우우우우우우우!
성문을 뛰쳐나오는 칼라모르 왕국 기사단의 돌격!
선두에는 콜드림이 있었다.

"이, 이게 뭐냐."
"들고 잇는 깃발과 방패의 문양이... 칼라모르 왕국 기사단이다!"

하벤 왕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방송에서 자주 보았던 칼라모르 왕국 기사단.
개개인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레벨은 최소 350에서 450 사이!
연령대에 따라, 그리고 사나운 몬스터를 때려잡았거나 하는 특수한 경우에 따라 기사들도 유명한 정도나 레벨에 차
이가 있었다.
1,000기의 기사들이 돌격을 개시하자 선두 진열이 공성무기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성 무기를 다루는 것은 모두 유저들이었다.
어느 한 길드의 소속이었다면 혼란이 덜했겠지만 유저들은 여러 길드로 나뉘어 있었다. 어느 한 길드에서 먼저 도망
을 치자,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너도나도 서둘러 달아났다.

"피하자!"
"자비를 모르는 칼라모르의 기사단들이다!"

북부동맹군의 본진에서는 마법을 사용하고 화살을 쐈다.

"뜨거운 화염이여, 적을 불태워라. 파이어 블래스터!"
"트리플 샷!"
"체인 라이트닝!"

갑작스러운 돌격을 막기 위해서 무작위로 퍼부어진 공격이었다.

"산개!"

콜드림의 지휘가 떨어지자 기사단은 50기씩 무리를 나누었다.
마법 공격의 절반 정도는 빠르게 쇄도하는 기사단의 속도를 미처 가늠하지 못하여 한참 뒤쪽으로 떨어졌다.
크콰콰쾅!
벼락이 치고, 대지가 흔들리며, 화염이 치솟았다.
북부동맹군의 마법사들이 놀란 마너지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서 아껴 놨던 마법을 마구 사용했기 때문!
청석을 깔아 놓은 도로가 파괴되고 지면이 깊게 파일 정도의 위력이었다.
마법이 중첩되면서 폭발했던 지역을 뚫고 칼라모르의 기사들은 계속 달렸다.
150여 기 정도의 기사들이 더 이상 돌진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하벤 왕국과도 자웅을 겨루었던 칼라모르
왕국 최고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기사들이 입고 있는 막강한 풀 플레이트 아머가 마법 공격의 대부분을 흡수해 버렸고, 방패를 앞세워서 돌파해 버렸
다.
더구나 위드는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무력하게 쓰러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프레야 여신에게 할 수 있는 기원!
여신의 축복을 칼라모르의 기사들에게 해 주었던 것이다.
말과 함께 쓰러졌던 150여 기의 기사들 중에서도 130명 정도는 금방 다시 일어났다.

"돌격!"

콜드림의 명령이 떨어졌다.
다시 마법 공격을 준비할 시간은 없었기에, 전장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칼라모르 왕국 기사든이 들이닥치는 것은 순
식간이었다.

"크아악! 살려 줘!"
"어서 피하자."

칼라모르의 기사들은 저항할 수 없는 속도로 적진을 파고들었다.
중장갑 기사들이 대규모 전투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위용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선두가 처참하게 유린되고 있을 때였다.
북부동맹군의 마법사들은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워터 스톰."
"트리플 그래비티!"
"인시너레이트!"

아군이 밀집한 지역을 대상으로 마법들이 사용되었다.
마법사들의 입장에서는 칼라모르의 기사들을 잡기 위해 같은 길드원이 아닌 장소라면 망설이지 않고 마법을 쓰는 것
이었다.
마법사들이 전쟁을 좋아하는 이유가, 적들이 밀집한 곳에 마법을 날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칼라모르의 기사들만 잡을 수 있다면 오르게 될 경험치와 명성 때문에 마법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대규모 마법이 북부동맹군의 선두를 무참히 타격했다.

"미친 마법사들!"
"그만해!"

그러나 마법사들은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아군이 마법의 파편에 맞아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군을 살해하셨습니다.
악명이 350 늘어납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엄청나게 오르고 있는 레벨!
북부동맹군에 소속된 유저들의 전반적인 수준으 ㄴ레벨 250에서 300대 초반 사이였따.
칼라모르의 기사가 죽건 다른 길드의 유저가 죽건, 관심사가 아니었다.

"영겁의 수호."

칼라모르의 기사들은 얼마 죽지도 않았다.
무기와 방어구에 저장된 보호 마법을 발동시킨 덕분이었다.
50기씩 흩어진 기사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진한다.
기동력을 바탕으로 북부동맹군 유저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기사 1명을 잡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유저들이 죽어야
만 했다.
차라리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유저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기사들이 다가오기만 하면 마
법 공격이 연달아서 작렬을 하니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여러 길드에 각자 배속된 마법사들이라서 통솔이 어려워 마법 공격을 중단시키기도 힘들었다.

"일단 물러나라!"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야!"

비명과 고성이 오가는 전장에서 북부동맹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휘 체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마법사들의 눈먼 공격에 맞지 않기 위해서 도망치느라 아비규환이었다.
칼라모르 왕국 기사들은 먼지와 화염을 뚫고 돌진하는 전장의 사신이었다.
하지만 북부동맹군도 군대를 추스를 수 있는 약간의 시간만 만든다면 상황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기사들이 지치거
나 돌격이 끝났을 때, 모라타 성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노려서 반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라타 성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군대가 등장했다.

"진격! 진격! 진격하라!"
"가자! 모라타를 우리의 손으로 지키자!"

가죽 옷에, 낡은 철검을 들고 있는 무리.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초보자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명문 길드의 탄압과 폭정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었다.
모라타, 그리고 나아가서는 북부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격문을 띄웠다.

거칠고 험한 베르사 대륙을 모험하려고 하는 여행자여!
나는 보스급 꽃사슴 1마리 사냥하기 힘든 초보자다. 넓은 평원을 지나서 작은 토굴이라도 발견하면,
혹시 던전이 아닐까 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초보 유저다.
난 중앙 대륙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사냥터에서는 한 번도 사냥해 본 적이 없다.
명문 길드의 영역에서 우리 같은 초보들은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사냥터에 들어갈 때도 돈을 내야 한다. 갑자기 사냥터의 입장료가 오르는 부당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다.
단검 하나, 횃불 하나 사려고 해도 세금이 물품 가격의 50%, 심하면 70%도 내야 한다.
우리도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우리가 대륙을 여행하는 목적은 각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싸워야 될 때다.
내가 가진 것은 가죽 갑옷에 검 1개뿐이지만, 보리 빵을 아껴 먹으면서 지금 북부로 걸어가리라.

사연이 담긴 격문들이 몇 주 전부터 초보자들의 커뮤니티에 올랐다.
돈을 벌기 위해서 토끼 가죽 벗기느라 낑낑대는 경험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초보자들이라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
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글들이 초보자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여기에 어떤 소문까지 같이 흘러나왔다.

-모라타에서는 초보자들에게 풀죽을 무제한으로 지급!
-영주 위드가 비밀리에 후원하고 있는 단체다.
-피라미드, 빛의 탑, 여신상 등을 만든 영주는 우리 초보자들을 착취하지도 않고 일거리도 자주 준다.

모라타에는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4주 전부터 초보자들의 규모가 엄청나게 늘었다.
하루에 몇만 명씩 급증할 정도였고, 허수아비가 있는 수련장은 미어터질 정도가 되었다.

"우리도 싸울 수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나자!"

전투를 앞두고 모라타의 시내에 독한 분위기가 흘렀다.
모라타의 주민들도 영주에 대한 충성심이 최상이라서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초보자들의 가죽 옷을 무료로 수선해 주고, 음식도 싸서 가져다주었다.
수련장에서 집요하게 허수아비만 때리면서 강해진 유저들. 검치 들은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검술 강의도 했다.
수련장에서 일주일, 이 주일 이상을 버틴 유저는 십분의 일도 안 됐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
다.

"가자!"
"우리가 싸울 시간이다."

모라타의 성문을 통해서 쏟아지는 초보자들의 군대!
1만, 2만, 3만......
10만을 넘고, 20만도 가뿐히 돌파했다.
그러고도 성문을 통해서 나오는 숫자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베르사 대륙의 초보자들이 모라타로 모였다.
중앙 대륙에서 먼 길을 걸어온 유저도 있었으며, 모라타에서 캐릭터를 만들고 기다리기도 했다.
모라타 성에서 그들은 갑갑함을 참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형 컨테이너에 가득 담긴 콩나물 머리들을 연상시키는 초보자들!
초보자들의 대군이 칼라모르 왕국 기사단의 뒤를 이어서 북부동맹군을 공격했다.
마판이 어느새 달려와서 발석기 위에 올라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인삼죽 부대 전면 돌파! 대추죽 부대가 측면에서 지원한다. 죽순죽! 망설이지 마라. 너희가 죽더라도
120만 풀죽회원들이 뒤를 따를 것이다."

풀죽신교의 32죽부대가 전면 공세를 퍼부었다.
초보자들의 검에 담긴 공격은 보잘것없었다. 갑옷을 긁어 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유저가 아닌 북부동맹군에 포함
된 일반 병사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레벨이 30에서 50에 이르는 초보자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덤비고 있
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레벨도 딱히 높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초보자들의 상대가 되었다.

"내가 가슴을 베었다!"
"다리를 쳐라."
"도끼로 머리만 노려!"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죽어 가는 초보자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이 맑은 눈이었다.
북부동맨군의 유저들도 심히 당황했다.
초보자들이라면 발톱의 때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레벨 차이가 심하게 나면 100명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1명을 죽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2명, 3명을 상대해야 했다.
잔뜩 몰려 있는 탓에 피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칼라모르의 기사들만 하더라도, 일반 병사들을 제외하면 북부동맹군 전력의 절반 정도라고 해야 된다.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싸워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판에 초보자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풀죽! 풀죽! 풀죽!"
"침입자들을 죽여라."
"우리의 목숨은 아깝지 않다. 저들을 하나라도 죽여서 떨어지는 아이템을 얻기만 하면 이득이다!"

초보자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광란의 돌격!
하늘 높은 곳에서 보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북부동맨군이 달콤한 케이크 덩어리라면, 개미 떼가 온통 뒤덮고 몰
려 들고 있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대형 컨테이너에 가득 담긴 콩나물이 엎어졌다!

"화살을 쏴라!"

초보 궁수들의 화살도 성직자나 마법사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었다.
다른 유저들도 경황이 없어 지켜 주지 못해, 방어력이 약한 이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파이어 볼!"
"아이스 볼트."
"파이어 볼!"

초보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
모라타의 성벽에서 일어난 마법사들은 북부동맹군 진영을 향하여 무자비한 마법 공격을 했다. 마법사들은 초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있었다.
그런 마법 공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초보 정령사까지 대규모로 등장했다.

"충직한 화돌이여, 저들을 무찔러라."
"흙꾼아, 일어서라. 흔들어라!"

화돌이들이 불의 비를 내리게 하고, 검과 갑옷에 달라붙어서 공격력과 방어력, 내구력을 낮췄다.
궁수들의 화살통도 불태웠다.
대지가 흔들거려서 싸움에도 지장이 많았고, 작은 균열들이 발생해서 북부동맹군의 유저들을 집어삼켰다.
물론 흙을 뚫고 다시 튀어나올 수는 있었지만 체력의 소모가 상당히 컸다.
더군다나 흙꾼이는 굉장히 말을 잘 듣는 땅의 정령이었다.
갑자기 대지가 늪처럼 변하거나, 흙으로 된 손이 나타나서 발목을 잡는 등의 활약을 했다.
북부동맹군 유저들은 욕을 퍼부으면서 싸우고 있었다.

"이 건방진 초보들이!"
"쓰레기들이다. 모두 베어 버려!"
"너희가 모인다고 해서 뭐라도 된 것 같냐?"

레벨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기에 초보자들은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초보자 60명이 죽더라도 북부동맹군
유저 1~2명을 잡기가 어려웠다.
일부 전장에서는 북부동맹군의 유저들이 파죽지세로 뚫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모라타에 초보 유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 대륙에서 명문 길드의 텃세를 지켜보다 못해서 떠나왔던 자들!
북부에서는 높은 레벨로 분류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함께 싸웠다.
초보자들이 대거 결집하면서 그들도 함께 싸워야 되겠다는 의식이 생겼다. 초보자들이 육탄 돌격을 하면서 방패막이
가 되어 주니 기회이기도 했다.
모라타에 있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함께 싸우기로 함으로써, 북부동맹군 유저들의 발을 묶어 놓았다.
검치 들도 초보자들의 틈에 섞였다.

"왜 이렇게 허점이 많아?"

검사백오십칠치는 초보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적이 보일 때마다 공격했다.
빈틈이 보일 때마다 정확하게 찌르는 검술!

-치명적인 일격이 터졌습니다!

북부동맹군 유저가 화를 내며 검을 휘둘렀지만 검사백오십칠치에게는 닿지도 않았다.

"검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되겠다."

-치명적인 일격이 터졌습니다!

페일 일행도 함께 움직였다.

"아저씨, 안녕?"

화령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가면 유저들의 눈이 커졌다.
보라색 드레스 아래 늘씬하게 드러난 각선미는 아찔한 매력 그 자체였다.

"부비부비!"

화령이 매혹의 춤을 추면서 지나가면 유저들의 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억울했다.
몸이 마비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심하게 화가 났다. 부비부비라고 해 놓고는 스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화령이 남기고 간 희미한 꽃향기를 맡으면서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페일과 메이런은 적진을 헤집으면서 화살을 쏘았다.

"포이즌 애로우."

독화살로 저격을 하는 실력.
움직이면서 화살을 쏘는데도 백발백중의 명중률이었다.
메이런은 오늘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서 일부러 방송 프로그램 진행에서도 빠졌다.

-여기는 KMC미디어의 모라타 전쟁 프로그램입니다. 신혜민 씨!

캡슐에 연결시켜 놓은 설비들을 통해 그녀가 보고 듣는 것들을 방송국에 중계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메이런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메이런 씨. 지금 화면을 전송해 주실 수 있을까요?

메이런은 활시위를 당기면서 대답했다.

"물론이죠!"

방송국에서는 그녀의 허락을 받고 캡슐로부터 전송되는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KMC미디어의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아리따운 여자 레인저가 활시위를 당기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의 촉 끝이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철퇴를 휘두르던 거구의 유저의 이마에 적중했다.
거구의 유저는 이미 생명력이 많이 손실된 상태였던지, 그대로 회색빛으로 변했다.

"스물아홉! 방금 보셨죠?"
-지금 전투에 참여 중이신 건가요?
"네. 모라타를 지키는 쪽에 가담해서 싸우고 있어요."

메이런이 새로운 화살을 겨냥했을 때, 그곳에 화염의 폭풍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로뮤나가 긴 주문을 외워서 마법
을 성공시킨 것이다.
잠시 후, 메이런이 있는 쪽 머리 위에 시커먼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지지지직 - 콰과광!
낙뢰가 떨어지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전방을 훑어보았다.
마법사의 로브를 입은 유저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공격이 성공했는지를 보고 있었다.
메이런이 연속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쏘아진 화살들이 마법사의 상체에 연달아서 박혔다.

"서른! 이번에는 마법사였네요."

가쁜 숨을 쉬면서 전투에 참여하는 메이런의 움직임에 스튜디오에서는 화색이 돌았다.
모라타 전쟁은 여러 방송국이 동시에 생중계하고 있었다.
다른 방송국과의 시청률 승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혼전에서 검치 들은 북부동맹군의 유저들 중 워리어나 팰러딘처럼 방어력이 좋은 사람들만 우선해서 사냥했다.
일대일로도 상대하기 불가능한 보스급 몬스터 칼라모르 기사들에 검치 들까지 모두 가세!
북부동맹군 유저들은 경황이 없어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길드 채팅 창이 폭주할 정도였는데, 점점 대답이 없는 유저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칼라모르 왕국 기사들은 1기, 1기가 가히 보스급 몬스터라고 할 수 있어, 전장에서 대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레벨 50도 안 되는 초보자들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적은 처음이다.
초보자들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암살자들처럼 활동하는 상대 유저들 때문에 목숨을 잃곤 했다.
심지어는 레벨 1의 초보자들까지 겁 없이 덤볐다.

"모라타 군대 출진!"

모라타의 병사들도 전쟁에 뛰어들었다.
화살을 주로 쏘면서 원거리에서 북부동맹군을 요격하는데에 치중했다. 아직까지 적은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둥, 둥, 둥, 둥, 뿌아아아아아!
모라타의 성에서부터 음악 소리가 들렸다. 바드들의 연주가 한꺼번에 개시된 것이다.
바드들의 연주는 아군의 지친 체력을 보조해 주고 사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모라타에서 공연과 퀘스트로 먹고사는 바드들에게 영주의 입김은 강하다.

'전력을 다해서 연주하라!'

바드들이 북을 두들기고 뿔피리를 불었다.
연주는 시작되자마자 급격히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거대한 무언가가 등장할 것 같은 느낌!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그들이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커다란 포효 소리.
북부동맹군의 일반 병사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래곤 피어는 약한 생명체들을 죽음으로 몰 수도 있다.
북부동맹군의 유저들도 몸이 저릿저릿하고, 신체에 약간씩 이상이 발생했다.

"뭐야?"
"뭐가 나타난 거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성처럼 거대한 빙룡이 유유자적 날아다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무 큰 몸집으로 인하여 민첩함이 떨어지고, 체력이 금방 줄어들고, 힘이 약하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시각적인 충격
과 위압감은 최상이었다.

"아이스 드래곤!"
"전쟁의 신 위드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스 드래곤이 나타났다!"

빙룡의 머리 위에는 위드가 앉아 있었다.
와이번들이 주위를 호위하듯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고, 불사조까지 너울거리면서 뒤를 따라온다.

"위드다!"
"전쟁의 신 위드가 강림했다!"

싸움에 참여한 유저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위드의 카리스마로 인하여 북부동맹군 병사들이 갑자기 괴로움을 토로했다.

"저렇게 유명한 모험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본 드래곤도 잡은 위드야. 우리로서는 이기지 못할 거야."

위드의 어마어마한 명성과 투지 덕분에 병사들이 싸울 의욕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추락하는 적의 사기야말로 전장에서 명성이 작용하는 위력이었다.
위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멋진 사냥터로군."

수만 명과의 전쟁!
전쟁에서 이긴 영주는 명성과 칭호를 얻을 수 있지만 위드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큰 명성을 얻어서 받게 될 퀘스트라니, 도대체 얼마나 위험할 것인가.
안 그래도 S급 퀘스트에 허덕이고 있는 판에, 퀘스트들이 줄줄이 밀리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위드는 북부동맹군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에 군침을 흘렸다.
아이템 경매 사이트의 판매 가격으로 75만 원, 90만 원, 106만 원, 290만 원, 더 높은 가격으로는 천만 원이 넘어가
는 검과 갑옷을 장비하고 있는 유저들이 많다.

"좋아, 좋아. 훌륭해!"

칼라모르 기사들로 정신을 쏙 빼 놓고, 초보자들을 대거 동원해서 몰아치듯이 단시간에 싸웠다.
북부동맹군은 지칠 대로 지쳤고, 생명력도 많이 줄어들었다.
가장 경계해야 되는 마법사들의 마나도 바닥이라서 슬슬 수확만 하면 되는 것이다.

"클클클클."

위드가 간악한 웃음을 지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전쟁의 초반부터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기다려 왔다.
그럼에도 당당했다.

"보이는 족족 죽여서 아이템을 얻으리라."

다크 게이머에게는 1년에 하루 있을까 말까 한 특별 상여금 지급의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박이 땅에 널려 있었다.
언제 이렇게 합법적으로 전투를 해서 장비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
위드는 목청을 가다듬고 준비를 했다.
바드들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리라.
진정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환희의 노래를!
연주가 격렬해질 때, 위드가 빙룡의 머리 위에 서서 사자후를 연속해서 터트렸다.

전장에 음악이 흐른다
따라라랑 띵띵띵
나는 죽음의 순간을 노래하네

여기까지는 가사를 미리 연습해 놨던 부분이다.
위드의 눈길이 지상을 향했다.

네필드의 투구를 가지고 있는 전사여
죽을 때가 되었다
파호만의 창을 가지고 있는 기사여
많이 지쳐 있는가?
이만 쉬게 해 주지
제베의 앞치마
요리사에게는 매우 좋은 물건이라네
내가 가지고 싶구나!

고급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여
나 위드가 너희와 싸운다

지상을 보며 즉흥적으로 견적을 뽑아내어 쓸 만한 아이템들만 집어내는 라이브!
레벨이 300대에서도 중반이 넘는 이들만 샅샅이 훑었다.
보다 효과적인 수확을 위해 어젯밤 모라타의 두 존재에게 미리 생명을 부여해 놓았다.
킹 히드라와 블랙 이무기.
모라타에 작용하는 조각품의 효과가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조각품에 생명 부여 스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위드의 예술 스탯이 늘어난 만큼 레벨이 429, 441이나 되는 초대형 몬스터들이 탄생했다.
위드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난폭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새 생명체들이었다.





<모라타 방어전>





킹 히드라와 블랙 이무기는 불만이 쌓이고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조각품 출신으로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은 지긋지긋했다.
생명을 갖게 된 이후로도 전투의 시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참고만 있으라고 하니 미칠 노릇.

'다 잡아먹어야 되는데.'
'진정한 드래곤이 되기 위해서는 이놈들을 다 쓸어버려야 해. 하지만 주인의 명령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군.'

킹 히드라는 종족 특유의 잔인함과 흉포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북부동맹군이 근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킹 히드라의 커다란 눈동자들이 뒤룩뒤룩 굴렀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어야 되는데.'
'일곱 번째 머리, 넌 왜 말이 없냐.'
'너,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난다.'

굶주린 킹 히드라의 머리에서 굵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강한 산성 침은 여신상 부근에 만들어진 호수로 섞여 들어가서 물고기들을 떼죽음시킬 정도.
북부동맹군은 전투에 정신이 팔려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킹 히드라의 몸통은 몇 번이나 슬금슬금 미동을 보였다.
위드가 등장하자, 마침내 킹 히드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아!"

킹 히드라가 호수의 물을 첨벙첨벙 걸어서 건너오더니 북부동맹군의 유저들을 잡아먹었다.
9개의 머리가 큰 입을 벌리고 유저들을 집어삼켰다.

"간식이다. 맛있는 간식이다. 별미다."

오도독 소리를 내면서 씹히는 유저들!
블랙 이무기는 화염구를 소환하며 우아하게 공격 준비를 했다.
공중에서 대형 마법들을 퍼부을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엠비뉴 교단과 맞서 싸웠던 킹 히드라, 블랙 이무기와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그들을 추억하면서 조각했지만 레벨도 훨씬 낮았고, 블랙 이무기와 킹 히드라의 피부는 전에 비해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다.
미숙한 마법, 무한하지 않은 생명력, 덜한 독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있었지만, 북부동맹군의 유저들에게는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냉정함이 없었다.

"피해라!"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불안감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킹 히드라의 머리들이 유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블랙 이무기가 소환한 화염구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싸우려고 하지 않고 도망치려고만 하니 킹 히드라가 짧은 순간에 수십 명을 먹어치웠다.
블랙 이무기가 떨어뜨린 화염구에 의해서 땅이 크게 파이고, 100명도 넘는 유저들이 몰살을 당했다.
화염 파편들이 주변으로 넓게 퍼졌다.
방어 마법을 펼쳐야 하는 마법사들도 자신들이 살기에 급급했고, 견제를 해야 되는 궁수들도 불리하다는 생각에 화
살을 아끼고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북부동맹군 중에서 공성전의 경험이 있는 유저들은 2할도 되지 않았다.
경험이 있더라도 전투에서는 순간순간 당활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더군다나 지금은 예측 가능한 정상적인
전력끼리의 싸움이 아니었다.
공포 그리고 불안감, 믿을 수 없는 동료들로 인하여 북부동맹군이 와해되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호전적인 길드들로부터 위드를 향한 마법 공격이 개시되었다.

"버스트 파이어!"
"프로스트 서클!"
"선더 스톰!"

지상에서 시전된 마법 공격들.
기사들은 전력을 다해서, 지니고 있던 창을 위드를 향해 던졌다.
궁수들은 화살을 쏘았다.
목표는 위드!
전쟁의 신이 나선 만큼, 위드를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전투의 승패가 어느 쪽으로 되든 상관없다.'
'위드만 죽이면 나도 그만큼 유명해질 수 있어.'

레벨 300이 넘는 유저들, 북부동맹군에서 핵심적인 전력인 유저들이 위드를 향한 공격을 개시했다.
아예 위드만을 노리고 마나를 아끼고, 전투가 불리해져도 두 손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유저도 상당수였다.

"카아아아아아."

헌신적인 불사조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위드의 앞으로 날아왔다.
37개나 되는 마법과 물리적인 공격들이, 날개를 펼친 채로 가로막는 불사조에게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적중되었다.

-버스트 파이어가 흡수되었습니다.
-프로스크 서클에 의하여 생명력이 4,269 소실됩니다.
-선더 스톰이 불사조의 신체를 마비시키지 못했습니다. 생명력이 3,210 사라졌습니다.

물과 얼음을 매개체로 한 마법들이 불사조의 생명력을 갉아먹었지만, 불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에 의해 화염 마법은
역으로 흡수해 버렸다.
창과 화살 들도 그대로 몸에 꽂혔다.
공중에서 마법과 물리적인 공격을 당해 이리저리 밀리고 휘청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불사조!

"키에에에에!"

불사조가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했다.
엄청난 레벨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속된 타격으로 인해 충격이 가중되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연속 공격이 치명적인 일격들이나 다름없었다.
총생명력의 24% 가량이 사라질 정도의 피해였다.
위드는 곧바로 비난했다.

"이런 무식한 놈!"
"키에에엑?"
"역시 새들은 다 똑같아. 도무지 머리를 쓸 줄은 모르니!"

극악한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할 무렵, 괜히 찔리고 있는 빙룡이나 와이번들!
불사조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대신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 나서길 잘했다.'
'역시 주인 혼자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야 돼.'
'후배가 고생하는군!'

일단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이기주의를 퍼트리고 있는 조각 생명체 군단!
위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불사조마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른 조각 생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조각 생명체들을 모두 잃어버리면 전력의 큰 손실이다. 조각품에 생명 부여를 다시 하려면
걸작이나 명작을 만들어야 되고, 레벨도 10개 이상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 전에 와이번이나 빙룡 등에게 정도 많이 들어 있었다.

"죽지 마라, 너희."

위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딘가 촉촉하고 다정하게 들렸다.
감격의 눈물이 흐르려는지, 빙룡의 얼어붙은 눈동자에서도 언뜻 물기가 보이려고 할 때였다.

"아직 본전도 못 뽑았는데."
"......"
"한 20년은 더 부려먹어야 되는데 벌써 죽으면 내가 손해잖아, 안 그래? 이런 위험한 행동 하기 전에,
그동안 먹은 밥값은 해 줘야 될 거 아냐."

밥값을 다하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다시 마법 공격을 준비하자. 위드는 아직 하늘에 있다."
"한꺼번에 공격하자!"

전장에서의 잠깐의 여유는 적에게 기회를 준다.
이미 패색이 짙은 북부동맹군이었지만, 많은 유저들이 위드를 죽일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들었다.

"불사조, 빙룡. 시작이다. 막내들에게 지지 마라."

이미 킹 히드라와 블랙 이무기는 위드의 안위에는 상관도 하지 않고 주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새로 만든 조각품들이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레벨 300이 넘는 유저들이 상당히 많은 전장에서는 위험하기도 하
다.
칼라모르의 기사들이나 검치 들이 전공을 세우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공격을 개의치 않고 킹 히드라와 블랙 이무기
만 공격한다면 의외로 쉽게 죽일 수도 있는 것.

"키야아아아아."

불사조가 길게 울면서 먼저 전장의 중심으로 날아갔따. 그리고 녀석이 지나간 곳에서부터 화염의 비가 떨어지기 시
작했다.
불사조가 가지고 있는 권능, 플레임 레인!
지상에 떨어진 화염의 비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몸을 불태우고 주변으로 급속히 옮겨붙었다.
개별 공격력은 한정되어 있지만 화염으로 휩쓰는 범위는 엄청나게 넓었다.
지상은 불바다나 다름없었다.
물론 마법사들이 물과 관련된 마법을 쓰고, 성직자들이 화염을 제거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더욱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날뛰는 화돌이에, 워낙 넓은 범위에 화염의 비가 떨어지고 있었기에 북부동맹군
전체로 보면 막대한 피해가 쌓이는 중이었다.

"와이번들은 알아서 싸워라. 크게 욕심을 내지는 말고!"
"알았다, 주인."

와이번들은 약한 편이라서 레벨 300대 초반 정도의 마법사 10명 정도만 모여 전력을 다해 각개격파한다면 금방 제거
할 수도 있다.
급강하에, 회전을 하면서 피할 수도 있지만, 눈먼 마법들에 맞아서 지상으로 추락하고 나면 생명을 보전할 수 없는
노릇.
다행히 마법사들은 다른 직업보다 레벨을 올리고 마력을 늘리기가 훨씬 어렵다.
북부동맹군에는 그 정도 되는 마법사들이 500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마나도 소모해서 지친 상태라는 점이 조
금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금인이, 네가 와이번들을 책임져라."
"알았다, 주인."
"날개도 빌려 줄 테니까 확실히 사냥해야 된다."

와이번들을 호위하며 함께 싸울 수 있도록 금인이에게 날개도 빌려 주었다.
아까운 금덩어리인 금인이가 지상에 떨어져서 잔해 하나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은 원치 않기도 했던 것.

"빙룡, 너도 놀지 말고 잘 싸워. 와이번들 잘 챙겨 주고."
"와이번들은 내게 맡겨라."

위드는 빙룡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전장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자들이 소리쳤다.
어떻게든 전쟁의 신을 죽이고 싶은 이들!

"위드가 떨어졌다."
"저쪽이다!"

검사, 성기사, 전사, 워리어, 권사, 도둑, 암살자. 근접전이 가능한 여러 직업들이 위드가 떨어진 곳으로 불바다를
헤치고 달려왔다.
위드는 땅에 추락하면서 북부동맹군 소속 드워프를 밟았다.

"어떤 놈이야!"

항의하는 드워프!
위드의 무게가 실려서 생명력에 엄청난 피해를 보고, 혼란 상태까지 당한 것.
옆에 있던 다른 북부동맹군 유저들은 위드를 보면서 크게 경악하고 있었다.

"조각 검술!"

위드는 검으로 가볍게 드워프의 생명을 취했다.
회색빛으로 변하기도 전에 땅을 한 바퀴 구르면서 왼손을 저었다.
착!
무언가 잡히는 느낌이 들자마자 주머니에 넣는 솜씨!

'챙겼다!'

어떤 물건인지 메시지 창을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담을 넘어 남의 집 금고를 털고 나서 돈다발이 얼마인지, 보석은 진품인지 아닌지 감정할 수는 없는 것.
주변에 적들이 널려 있었다.

"대신관의 축복!"

프레야 교단 대신관의 반지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축복했다. 검 갈기, 방어구 닦기 등의 스킬도 꼼꼼히 빠뜨리지 않
고 미리 써 두었다.
축복의 제한 시간은 단 20분.

"헤라임 걸술."

검을 멈추지 않고 전진하면서 사용하는 연속 기술!
영웅의 탑 4층에서 얻은 고대 검술이다.
연속 공격의 횟수가 증가할 때마다 힘과 민첩이 늘어나서 공격력이 증대된다.
위드는 미친 듯이 달렸다.

'정면의 적은 싸구려 갑옷을 입고 있다. 검도 싸구려야. 장비로 추정 가능한 레벨은 최대 210 정도.'

잔챙이들은 바로 지나쳤다.

'네로이드 전사장의 투구를 쓰고 있군. 다른 물건들은 볼품없지만. 레벨은 250 정도. 갑옷이 많이 구
겨지고 내구력이 떨어진 것을 보니 생명력도 크게 상해 있다. 투구가 떨어질 확률은 높지 않겠어.'

위드는 달리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서 검을 찔렀다.
푸욱!
갑옷의 이음새를 정확히 관통하는 검.

-2차 연속 공격이 성공하였습니다.
힘이 40% 늘어납니다.

대장장이 스킬을 익힌 게 도움이 되었다.
갑옷이라고 해서 모든 위치가 동일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음새나 얇은 부분, 그리고 중점적으로 내구력
이 저하된 부분은 더 쉽게 뚫을 수 있다.
장비를 보고 그 사람의 레벨이나 전반적인 수준을 파악하는 것은 위드의 취미 생활의 일부였다.
다크 게이머 연합의 아이템 정보 게시판, 경매 사이트 등을 통해서 줄줄이 꿰고 있는 아이템들!
위드는 회색빛으로 변하는 유저를 스쳐 지나면서 찔렀던 검을 회수하지 않고 내려칠 준비를 했다.
그다음의 유저는 점찍어 둔 자가 있었다.
궁수!
활을 든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푸른색 화살을 쏘는 매직 보우!

-3차 연속 공격이 성공하였습니다.
민첩이 추가로 40% 늘어납니다.

위드의 헤라임 검술은 최대 8단 공격까지 가능했다.
공격이 성공을 거둘 때마다 더 엄청난 힘과 속도가 더해진다.
로열 로드에서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스탯 힘을 올리면 근육이 낼 수 있는 최대치와 약간의 지구력이 늘어난다. 스탯 민첩을 올리면 근육이 내는 속도와
반응성, 정확도 등이 향상된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게 되고, 100미터를 달릴 때도 훨씬 빨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힘 스탯이 100이면 무조건 100의 공격력이 되지는 않는다.
최대 공격력은 맞지만, 여러 변수가 있었다.
제대로 힘을 사용했는지!
검을 휘두를 때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면 공격력도 당연히 발휘되지 못한다.
미끄러지거나, 상대의 무기를 피하는 등의 행동을 하느라 힘을 쓰지 않았으면 공격력도 약해졌다.
체중이 실리지 못해도 마찬가지였다.
체중이 전혀 실리지 않은 공격은 힘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큰 피해를 주지 못한다.
공격력은 체중에도 비례하기 때문에,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오크나 바바리안 들이 상대적으로 근접전에서는 훨씬 강
한 편이었다.
다만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힘과 민첩이 그만큼 더 많이 필요했다. 민첩이 웬만큼 높지 않으면 몸이 둔해진다.
그리고 몸무게와 덩치는 비례할 수밖에 없으니, 전투 시에 그만큼 빈틈도 커질 수밖에 없다.
빙룡은 막대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허점도 많고, 몸을 유지하는 데 힘도 많이 든다. 체력도 금방 지치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드워프들은 몸무게가 얼마 안 나가기에 전투 시에는 잘 맞지 않아서 좋다. 하지만 힘이 세더라도 부족한 공
격력을 보완하기 위하여 도끼나 망치 등 중병기들을 이용했다.
위드는 헤라임 검술로 네 번의 공격을 더하면서 3명을 더 죽였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기사!
파호만의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묵색 창은 탄력이 대단하고, 꿰뚫는 힘이 강하다.
검과 창을 동시에 쓰는 기사들에게는 매우 비싸게 팔리는 아이템!
정확하게 찍어 놓은 상대를 남겨 놓은 것이다.

"내 창!"

위드는 헤라임 검술의 최종 공격을 기사에게 했다.
기사는 전광석화처럼 동료들을 격파하고 그에게 달려와서 당황해서 창을 들어 막으려고 했다.
막강한 검이 일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위드의 손목이 뒤틀렸다.
어깨에서부터 들어간 탄력이 팔꿈치와 손목을 타고 흐르더니 검의 각도를 미묘하게 변경했다.

'파호만의 창이 깨지기라도 하면 안 돼!'

아이템을 아끼는 정신!
헤라임 검술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강해진다.
마지막 여덟 번째의 공격은 3~4배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된다.
한계 내구력을 초과하는 공격을 방어하다 보면 무기나 방어구가 깨지는 경우도 흔히 있다.
더구나 위드는 전력을 다해서 뛰어왔고, 몸무게를 가득 실어서 전진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헤라임 검술은 힘만이 아니라 민첩성도 동시에 향상시킨다.
이 상황에서도 높은 민첩성 덕에, 검의 방향을 뒤틀어서 완전히 바깥쪽으로 공격 범위를 바꾸어 놓았다.

"살았다!"

파호만의 창을 가진 기사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공격이 중간에 바뀐 것만을 확인한 매우 짧은 순간이라, 크게 빈틈을 드러낸 위드를 향해 창을 찌를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체중과 힘, 달려드는 속도까지 있었기에 공격 방향을 바꾸느라 크게 무리를 한 위드는 난관에 빠질 상황.
하지만 검에 모든 무게를 싣고, 자연스럽게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헤라임 검술의 마지막은 취소된 게 아니었다.
기사의 생명력과 방어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한 바퀴를 돌아서 더 강해졌을 뿐!
콰아아앙!
한 바퀴를 돌아 나온 검이 기사의 옆구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비명도 없이 회색빛으로 변하며 죽어 버린 기사!
샤샤샥.
위드의 손이 그 자리를 스치고 지나간 후에 남은 것은 없었다.
1쿠퍼도 확실히 쓸어 가는 정확한 손놀림.

"우으으......"
"진짜 위드다!"

근처의 유저들은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 중에서는 파호만의 창을 가지고 있던 기사가 가장 강한 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쉴 겨를도 없었다.
위드를 향해서 근접 전투가 가능한 거의 모든 직업들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은 다른 동료들을 밟으면서까지 달려왔다.
말이 좋아서 연합이지 조직력은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위드는 다시 목표를 정했다.

'공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반지. 마나 회복 속성이 걸려 있는 반지다.'

옵션까지 파악하는 재주!
아이템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전장에서도 유별나게 비싼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적들을 놓칠 수 없다.

"콜 데스 나이트 반 호크!"

데스 나이트의 소환.
위드와 함께 무수히 많은 사냥을 한 반 호크는 나오자마자 덤비는 기사나 적들과 싸움을 개시했다.

"이쪽은 내가 맡겠다, 주인."
"헤라임 검술!"

전력을 다해서 공격하기에 중간에 취소되거나 머뭇거리기만 하면 중단되는 검술의 재사용!
위드는 전진하면서 적들을 차례로 베었다.
북부동맹군의 한복판이었으니 주변이 온통 적이었다.

"위드는 내 몫이다!"
"내 검을 받아라. 라이트닝 소드!"

공격 기술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덤비는 적들!
위드를 향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는 유저들은 레벨이 최소 200대 후반이거나 300대였다.
지쳐 있거나 생명력에 큰 손실을 입고 있지 않다면 한두번으로 죽일 수 없는 자들이다.
헤라임 검술을 다 쓰고도 5명을 죽이는 게 고작이었따.
한 번이라도 당한 이상, 어느 정도 대비를 하는 것이다.

"조각 파괴술! 이 모든 것들이 힘이 되어라!"

-조각 파괴술을 사용하셨습니다.
걸작 조각상이 파괴된 고통! 슬픔!
예술 스탯이 5 영구적으로 사라집니다. 명성이 100 줄어듭니다.
예술 스탯이 일 대 사의 비율로 하루 동안 힘으로 전환됩니다.

전신의 근육에서 끓어오르는 힘!
명작이나 대작은 너무 크고 아까워서 감히 파괴할 엄두가 쉽게 나지 않는다. 걸작도 아까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쓸
때는 써야 했다.

"15연환 참격!"

위드는 기합 소리를 내지르면서 덤비는 적들을 베었다.
증가된 힘으로 정확하게 치명상을 입히는 부위들만 공략!
원거리 공격 스킬들을 사용하는 적이나, 방어를 돌보지 않고 덤비는 암살자나 도둑으로 인해서 상당히 난처하기는
했다.
하지만 암살자나 도둑 들도 동료들에 의해서 길이 막혀서 공격하기 편한 건 아니었다.
위드는 적들의 사이로 뛰어들면서 스물다섯 이상을 베었다.
그때, 제법 강해 보이는 기사들만 열 명이 넘게 달려왔다.
위드라고 해도 간과할 수 없는 이들!

'레벨이 340은 되겠군.'

북부동맹군에서는 핵심 전력이라고 봐야 했다.
헤라임 검술의 3회의 공격은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주변의 유저들을 상대로, 그다음부터는 기사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휘둘렀다.
검이 쉬지 않고 적들을 향해 움직였다.

-4차 연속 공격이 성공하였습니다.
힘이 추가로 40% 늘어납니다.

꽈과광!
기사의 갑옷의 어깨 부위에 검이 틀어박히면서 굉음이 터져 나온다.
맞은 기사도 놀라서 무릎을 꿇을 정도의 위력.
체력도 생명력도 멀쩡하던 그가 거의 초주검이 되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갑옷과 방패 등이 완전한 그가, 이렇게 막강한 한 번의 공격에 빈사 상태로 저항조차 못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은 처
음 있는 일이었다.

-5차 연속 공격이 성공하였습니다.
적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적의 투지를 저하시킵니다.
민첩이 추가로 40% 늘어납니다.
-6차 연속 공격이 성공하였습니다.
힘이 추가로 50% 늘어납니다.
15%의 공격력으로 충격파에 의한 2차 범위 타격이 이루어집니다.
-7차 연속 공격이 성공하였습니다.
민첩이 추가로 30% 늘어납니다.
힘이 추가로 20% 늘어납니다.
마나 1,500을 사용하여 원거리 공격이 이루어집니다.

기사들에게 한 대씩!
1명의 기사를 거의 죽이고, 3명의 기사들을 사망시켰다.
마지막 여덟 번째의 공격은 덤벼드는 기사들을 향해 한꺼번에 뿌려졌다.

"엄청난 스킬이다. 막아! 아니, 피해!"

기사들이 놀란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재빨리 피한 기사도 있지만, 범위 공격에 휩쓸려서 나뒹굴기도 했다.
위드의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던 약한 유저들까지 떼죽음을 초래!
원거리 공격 검술은 마나의 소모가 심하고 체력도 빠르게 닳아서 거의 쓰지 않는 기술이었다. 일점 공격술이나 기본
스킬만으로도 훨씬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스킬 숙련도를 올리면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나를 아낄 틈이 없다.
조각 파괴술로 인하여 공격력은 굉장해졌지만 생명력의 최대치나 체력, 방어력 등은 여전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이
거나 위드를 노리는 다른 직업들에게 포위당하면 매우 불리해질 수 있었다.

"다소 과격한 사냥도 필요하지!"

위드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그다음 적들을 탐색하기 위하여 주위를 훑어보았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 손과 다리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죽은 이들의 아이템을 접수!

"우으으......"
"말도 안 돼. 레벨이 도대체 얼마이기에."

기가 질려 있는 유저들!
하지만 그 뒤로는 100여 개의 마법 공격들과 화살들이 한꺼번에 쇄도하고 있는 게 보였다.
위드가 헤라임 검술로 기사들을 베어 버리기 전부터 마법을 준비하고, 화살을 시위에 재워 놓고 쏘았던 것이리라.
위드가 싸움에 뛰어들자마자 살아남은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마나를 모아서 마법을 시전했다.
공격 마법이 피할 공간도 없이 사방을 무차별로 덮치고 있었다.
빛의 날개가 있다면 하늘로 솟구치기라도 했을 테지만 금인이에게 빌려 준 후였다.
어딜 가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금인이는 훨씬 안전해졌겠지만 대신 위드가 공격에 노출되었다.

"실전에서 전투용으로 써 본 적은 없는 기술인데... 달빛 조각술!"

위드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고급 조각술을 익히고 나서 습득한 비장의 스킬.
빛을 다루는 조각술!
이것도 마나의 소모가 필요하지만, 몸 전체에 빛을 둘러서 방어용으로 쓰거나 공격을 할 수 있다.
츠츄츄츄!
위드가 원하는 곳마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다양한 색상의 빛들이 쏘아졌다.
조각을 하는 것처럼, 더없이 아름다운 빛깔들.
각종 마법들과 화살들의 방향을 미세하게 바꾸어 내고 튕겨 냈다.
달빛 조각술의 스킬 레벨이 아직은 낮기 때문에 매우 적은 영향만을 줄 수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위드도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대부분의 마법에 적중당하고 나면 뼈도 못 추릴 것은 틀림없는 사실.
죽더라도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힘에 의하여 되살아날 수 있따. 안식의 동판. 언데드를 강화하는 그 권능이 발휘될
때가 진정한 진면목을 보여 줄 순간이다.
하지만 죽게 되면 바로 되살아나기에 장비를 떨어뜨리지 않더라도 레벨과 스킬 숙련도가 하락하리라.
아직 높지 않은 달빛 조각술, 그리고 정말 올리기 힘든 조각술이나 다른 생산 스킬! 위드가 익힌 수많은 스킬들의
숙련도가 저하될 것은 분명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껄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리라.
달빛 조각술로 최대한 몸을 감쌌다. 죽은 다음에 되살아 날 때는 마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눈 질끈 감기!"

위드는 맷집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눈도 감았다.

"내가 지키겠다, 주인."

달려온 데스 나이트 반 호크가 방패를 들고 앞을 막았다. 그리고 마법이 그 일대를 뒤덮었다.





<종전 협상>





땅이 뒤집어지는 연쇄 폭발과, 얼음 기둥이 생성되고 무너지기를 반복!
연기와 먼지가 걷히고 난 후의 광경은 북부동맹군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초토화되어 버린 그 땅에 위드와 데스 나이트가 서 있었다.
오직 그들이 서 있는 지역만이 멀쩡했다.
달빛 조각술 덕분에 마법의 공격 각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그 덕분에 위드를 맞히지 못하고 마법들이 중간에 서로
부딪쳐서 폭발했다.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들로 인해 파괴력이 상당히 상쇄되었다.
궁수들의 화살 공격도 마법의 여파에 의해서 위력을 많이 잃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폭발의 영향권에 휘말린 위드와 데스 나이트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멧집과 인내력, 방어 스킬, 방어구 그리고 달빛 조각술의 보호!
데스 나이트와 함께 막으면서 폭발의 피해를 나누어 받았다.
특히 고대의 방패 내구도는 무려 25나 떨어져 있었다.
수리도 불가능한 최고의 유니크 방어구라고 할 수 있는 고대의 방패 덕분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탈로크의 갑옷 등의 내구도도 심하게 하락해서 너덜너덜 했지만,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내 고대의 방패를......"

애지중지하면서 아껴서 썼던 고대의 방패!
내구도가 25나 하락해서 이제 남아 있는 내구도가 261밖에 되지 않았다.
떨어졌을 중고 가격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위드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차라리 나를 죽일 일이지!"

레벨은 다시 올릴 수 있고 숙련도도 채울 수 있지만, 줄어든 고대의 방패 내구력은 올라가지 않는다.
위드의 생명력은 33%, 마나는 46% 가량 남아 있었다.
통곡이라도 하고 싶지만 본전에 대한 생각 때문에 멈추지 않았다.
마법 폭발로 인해서 주변에는 살아남은 유저들이 없었다.

'눈먼 아이템들이......'

위드는 뒤집힌 땅을 뛰어넘어서 북부동맹군을 습격했다. 물론 죽은 유저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챙기는 것도 잊
지 않았다.

"헤라임 검술!"

모든 것을 동원해서 싸우고 있는 순간이었다.
위드가 전장의 주인공이었다.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오직 그를 죽이려고 하는 전장에서 싸우는 기분!
데스 나이트도 활개를 치면서 활동했다.
마법사들의 공격이나 궁수들의 화살이 몇 번 더 날아왔지만 처음처럼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위드 님께, 모라타에 대항한 자들을 죽여라."
"칼라모르의 기사들이여, 돌격!"

북부동맹군의 진영에서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을 막을 만한 고레벨 유저들은 모두 위드를 향해 달려나간 후에 싸우다가 죽거나 마법 공격에 위해서 사망한 후
다. 그중에는 지휘관급도 상당수라서 북부동맹군 전체에 구멍이 뚫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여 버려!"
"우리 초보들을 괴롭히는 놈들이라니."

검치 들도 초보자들의 틈에서 벗어나서 적진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킹 히드라와 이무기, 빙룡과 불사조의 대대적인 습격에 와이번들도 쏠쏠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모두가 위드에게 관심을 쏟는 사이에 북부동맹군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위드가 의도했던 바이기도 했다.
한 번의 죽음을 미끼로 내걸어서 크게 이긴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조차 다시 살아나서 인도자의 권능으로 강화되어 아이템을 습득하는 게 작전이었다.

"쳐라!"
"모두 죽이자!"

한번 무너진 균형의 추는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마지막 여력까지 잃어버린 북부동맹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연이은 마법 공격과 동료들에 대한 불신으로 그나마 있던 전의마저 사라졌다.

"졌습니다. 살려 주세요!"
"우리의 패배입니다."
"모라타에 전쟁을 선포한 것을 사과할게요."

버티고 있던 북부동맹군 유저들도 무기를 거두고 항복의 뜻을 밝혔다.
특히 위드가 노래로 지목했던 이들이 사색이 되어서 먼저 항복을 했다.
북부동맹군의 병사들도 차례로 무기를 내리고, 공성전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갑작스럽게 끝나는 듯했다.
초보자들이 녹슨 검과 나무 방패를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이겼다!"
"모라타의 승리다. 만세!"

위드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을 선포해 놓고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아느냐!"

마나를 한껏 끌어모아 사자후를 터트렸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면 안 되었다.
모라타의 병사들을 모집하면서 썼던 돈과 경제적인 손실은 어찌하란 말인가.
물론 전쟁에서 패배한 측에서는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 몸값으로 상당한 배상금을 내놓게 되겠지만, 위드에게 흡족한
액수는 아니었다.
현금과 즉시 맞바꿀 수 있는 아이템들을 착용하고 있는 유저들이 한가득이다.
초보자들과 칼라모르 기사, 검치, 페일 일행 등이 활약해서 3만 명 정도를 줄였지만, 지치고 약해진 유저들이 넘쳐
난다.
땅바닥에 경험치와 현금이 두둑하게 쌓여 있는 셈!
여기서 그냥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 불우 이웃 돕기에 전액을 기부한 다음 날 아침과 같은 일이 아닌가!

"우와아아아아!"
"우리가 승리했다!"
"북부동맹군이 패배를 선언했다!"

하지만 초보자들에게는 위드의 흑심 가득 찬 사자후도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거만한 쇼로만 보이는지 그저 기쁨을
나눌 뿐이었다.
위드가 다시 사자후를 터트렸다

"감히 모라타를 침범한 적들을 죽이자! 1명도 살아 돌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

초보자들을 선동해야 했다. 그들 없이 칼라모르의 기사들이나 조각 생명체, 모라타 병사들로만 싸우려면 피해가 크
다. 초보자들이 북부동맹군 유저들의 숫자를 그리 줄이지는 못했지만 난전을 유도하고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혼란 속에서 검치 들은 암살자나 다름없이 활동하면서 쉽게 적들을 베어 버릴 수 있었고, 칼라모르의 기사들의 돌격
은 상상 이상이었다.
멋모르는 초보자들이 만세만 외치고 있을 때에 눈치 빠른 북부동맹군의 유저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쟁의 신 위드가 가지고 있는 악명을 감안한다면 외치는 소리가 북부동맹군의 전멸을 원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
이다.
북부동맹군 유저들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위드 만세!"
"과연 모라타의 백작이십니다.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다시는 모라타로 쳐들어오지 않겠습니다."
"전쟁의 신 위드에게 패배해서 영광입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북부동맹군 유저들은 누구도 싸울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방송국들은 흥미롭게 모라타의 전쟁을 방송했다.

"북부동맹군이 모라타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하승태 씨, 섣부르지만 전쟁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전혀 섣부르지 않습니다. 저도 북부동맹군이 12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는데요,
이 전쟁은 해보나마나 북부동맹군의 승리입니다. 북부에 있는 대다수의 길드들이 성공적으로 연합을
한 것 같습니다."

CHN방송국에서는 딱 잘라서 북부동맹군의 승리를 점쳤다.

"북부동맹군의 규모가 놀랍습니다. 모라타를 점령하기 위해서 군사비 지출을 아끼지 않았던 여러 길드
마스터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공성 무기들이 많군요. 시청자 여러분은 오늘 내로 모라타가 불타는 장면을 보실 수도 있을 것 같습
니다."
"전쟁의 신 위드의 불패 신화도 여기서 끝인가요?"
"아쉽지만 그렇게 되겠네요."

CTS미디어에서도 노골적으로 모라타의 패배를 전망했다.
북부동맹군이 승리하면서 위드가 쓰디쓴 패배를 겪을 거라고 말하는 편이 시청률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KMC미디어에서만 중립을 취하는 수준이었다.

"북부동맹군이 상상외로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지만 이것은 그만큼 위드의 명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
는 것 같습니다."
"오주완 씨, 무슨 말씀이시죠? 위드가 있기 때문에 북부동맹군도 저 정도의 규모를 만들 수 있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이해관계가 다른 길드들이 어느 한 대상을 공격하기 위해 저렇게 뭉칠 수 있다는 자체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될까요?"
"북부동맹군의 당연한 우세로 보이겠지만, 전쟁은 정작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위드가 이 전쟁을 이길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지금 시점에서 꼭 그렇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전쟁의 신 위드가 지금까지 퀘스트에서 보였던
모습들을 되짚어 보자면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을 리가 없겠죠."

오주완은 신중하게 지켜보는 편이었다.
모라타의 승리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KMC미디어에서 위드의 존재는 시청률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장부터
위드의 열성적인 팬이었으니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험담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나타났을 때에 방송국의 진행자들은 얼이 빠졌다.
한 왕국의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이곳에 왜 등장한단 말인가!

"설마하니 위드가 데려온 걸까요? 위드의 발이 넓다고는 했지만 칼라모르 왕국까지 뻗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선두에는 콜드림입니다. 콜드림이 직접 칼라모르의 기사들을 지휘하고 돌격하고 있습니다앗!"
"콜드림과 위드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방송국의 진행자들이 급히 목청을 높였다.
메이런 외에는 콜드림이 위드에 의해서 해방된 것을 몰랐기에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칼라모르의 기사들은, 전쟁에서 기사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위력을 떨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철퇴와 대검을 휘두르는 무자비한 공격에 전광석화 같은 기동력, 악귀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 죽지도 않는다.
기사에 대한 꿈이 생기고, 기사 지망생들까지도 대폭 늘어나게 만들 정도였던 것이다.
칼라모르 기사들의 돌격으로 충격에 휩싸인 것은 북부동맹군의 유저들이 더 심했다.
공포란 아는 만큼 생긴다.
칼라모르의 기사들이 전쟁에서 발휘하는 파괴력을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봤던 유저들은 그 대상이 자신들이라는 사실
에 경악했다.
뿔피리 소리와, 실제로 매우 빠른 속도로 돌격하는 칼라모르의 기사들.
당황스러움에 도망치거나 과잉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이 기사들을 잡는다면서 마법을 퍼부어 자멸을 자초하고, 모라타 성에서는 초보자들이 대거 밀려왔다.
레벨 300 정도의 고레벨 유저라면 초보자들은 100명이라도 간단하게 죽일 수 있었다. 체력만 뒤따른다면 지쳐서 쓰
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살육할 수 있다.
스킬을 사용하거나 칼질을 두세 번만 해도 초보자들은 죽었지만, 시야가 협소해져서 자기 주변이 아닌 곳은 신경을
쓰기 어려워졌다.
혼전에서 칼라모르의 기사들은 빛을 발하고, 검치 들은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이들도 간단히 없앤다.
북부동맹군 유저들은 이미 스스로 유리하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들은 초보자들 때문에 발이 묶여 있는데, 모라타의 중간 레벨, 고레벨 유저들은 마음껏 활개를 치고 있었던 것이
다.
전장 자체가 난전으로 변하면서 경험과 개인의 전투 능력이 중요해졌다.
초보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나더라도 얼마의 유저들이 남아서 싸울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그리고 등장한 위드와 빙룡, 불사조, 와이번, 킹 히드라, 블랙 이무기!
전쟁의 신 위드가 싸움을 벌이기 전에 노래를 부른다는 건 매우 유명한 사실이었다.
오크 카리취의 전투를 그들도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았지 않던가.

'진짜 전쟁이 이제 시작된다.'
'전신 위드의 참전이다.'

노래에 나온 아이템을 착용한 유저들은 북부동맹군에서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유저들!
정확하게 그들을 집어내며 노래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위드의 가공할 움직임과, 마법 공격의 충격!
마법 폭발 속에서 살아남는 광경은 위압감 그 자체였다.
북부동맹군은 싸울 의욕이 사라지다 못해서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늘리지 않기 위해 서둘러 항복을 했다.
북부동맹군이 여러 세력과 길드의 연합이 아니라 1명에 의해서 지휘되는 군대였다면 더 효율적으로 끝까지 버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여러 길드의 연합이라는 점으로 인해서, 한 길드가 먼저 항복을 하자 전체가 함께 쓰러지고 만
것이다.

"......"
"뭐죠, 전쟁이 어떻게 된 거죠?"
"모라타의 승리입니다."

진행자들도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중간에 말수가 줄어들 정도였다.
정리를 해야 되지만, 모라타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초보자들을 보면서 기가 차서 설명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게시물도 폭주 현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자신이 방금 작성한 글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페이지를 20개 이상 넘겨야 되었다.

-전쟁의 신은 오늘도 패배하지 않았군요.
-칼라모르의 기사들 덕이 절반은 되죠.
-그 기사들을 데려온 것도 능력입니다.
-북부가 아직은 베르사 대륙에서 주류 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부나 동부도 중앙 대륙에 비하
면 힘이 많이 약한데 북부는 거론할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오늘의 전쟁을 보니 북부에도 많은 발전
가능성이 있겠군요.
-어떻게 하면 모라타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가 될 수 있죠? 지난번에 방송에 나왔을 때만 해도 모
라타는 그저 그런 시골 마을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방송을 빼먹지 말고 꾸준히 보세요.
-요즘에 방송 자주 안 보신 것 같군요. 모라타는 일주일이 다르게 바뀝니다.
-제가 모라타에서 시작한 유저인데요. 문화와 예술, 모험, 종교, 상업이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프레야
교단도 있어서 무지 편합니다. 북부라고 해도 크게 모자란 것 없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라타에 꼭
한번 와 보세요.
-위드는 영주로서도 꽤 뛰어난 자질을 갖춘 것 같습니다. 북부에 유저들이 모여든다고 해도 저렇게 빨
리 발전시킬 줄은 몰랐는데요. 조각품에 건물들도 엄청 많고, 무슨 예술 회관 건물인가요? 그거 완공
되면 엄청나겠더군요.
-족발 다 먹었습니다. 역시 위드! 저를 전혀 실망시키지 않아요. 그가 싸우는 걸 못 봐서 조금 아쉽지
만 또 기회가 있겠죠?
-저는 친구들이랑 같이 북부로 떠납니다. 이참에 모라타도 직접 가 보고 북부 구경이라도 해 보려고요.
-위에 분, 저랑 같이 가요.



전쟁이 끝나는 순간 위드의 메시지 창이 따갑게 울렸다.

-적들이 항복했습니다.
-모라타 주민들의 충성도가 3 올랐습니다.
군사적인 힘을 과시하면서 인근 지역에 정치적인 영향력이 15 늘어납니다.
좀도둑들이 사라지고, 도적 떼의 침입이 감소합니다.
치안이 13% 오릅니다.
모라타 내에 일시적으로 소비가 활성화됩니다. 주민들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고
쓸 것입니다.
모라타에서 주민들의 자발적인 승전 기념 축제가 개시됩니다.
-조각사 길드에서 전쟁 승리를 위한 기념품을 제작합니다. 비용 5,000 골드 소모 예정.
바드 길드에서 전쟁에 대한 공연과 시, 음악을 만드는 대회를 개최합니다. 상금 규모 4,500 골드.
-베르사 대륙에서 모라타의 지역 명성이 75 오릅니다.
현재의 지역 명성 : 469.
지역 명성은 소속된 국가나, 다스리는 영주의 명성이 높을수록 유리합니다.
전쟁의 승리와 패배, 생산물, 교역량, 퀘스트 수행의 빈도, 영주의 원정 퀘스트, 주민들의 규모 등
지역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매우 많습니다.
지역 명성이 높으면 모라타 출신 유저들이 퀘스트 수행 시에 얻을 수 있는 명성의 획득치가 조금 더
증가합니다. 상인들이 먼 지역의 교역소에 물품을 판매할 때에도 모라타의 물건을 조금 더 우대해
줄 것입니다.
-지역 명성의 증가로 새로운 특산품이 등록되었습니다.
-모라타의 섬유와 직물 외에도, 프레야 교단의 축복과 비옥한 땅이 만들어 낸 농산물들이 특산품이
되었습니다.
-숙련된 양조 기술자들이 갖춰진다면 와인이 추가로 특산품으로 유명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모라타에는 우량한 송아지들이 많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다면 가축 중에서 소가
특산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트리반 마을 주민 89명이 모라타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트리반 마을의 주민들은 모라타가 이룩한 엄청난 문화에 푹 빠져 있습니다.
-노로마 마을의 주민 85명이 귀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들은 치안이 안정적인 모라타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큰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야 여신을 믿는 북부의 주민들 3,600명이 여신상 주변에서 살기 위해 이사를 시작합니다.
-기술자들의 이주!
북부 마을들의 기술자들은 자식 교육을 위하여 모라타에 오고 싶어 합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큰 모라타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에코반 마을의 주민들이 영주에게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모라타처럼 훌륭하게 영지를 다스리지 못하는 무능한 영주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상태가 지속되느니 차라리 모라타의 영주가 와서 에코반 마을을 다스려 주기를 바랍
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각 마을 주민들의 대규모 저항!
문화에 의한 종속 상태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하자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포로 상태로 붙잡혀 있으면서도 영주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창고 관리인이 열쇠를 들고 도주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모라타로 이주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 영주들은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조금 남은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외부에 입단속을 철저하게 했다
하지만 북부의 영주들끼리는 서로 같은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는 처지였다.

"트리반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다더군."
"케아트 마을도 멀쩡하지는 않아. 수확할 농부들이 모두 도망쳐 버렸다고 해."
"그럼 농사는?"
"빈스터 길드원들이 곡괭이를 들고 직접 고구마를 캐야겠지."
"자네 마을은?"
"우리? 죽지 못해서 살 지경이야. 문화나 예술, 이딴 것들이 이렇게 위력을 발휘할 줄이야 누가 알았
겠는가?"

중앙 대륙에서는 문화로 인한 소요 사태가 이 정도로 심하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각 성들과 마을들이 대체적으로 기초적인 문화 수준은 이루고 있었고, 인접 왕국 간에는 적개심이 있어서 괜찮았다.
예술가들의 도시 로디움조차도 자유 도시로서, 외딴 섬처럼 별도로 존재했다.
모라타처럼 특출하게 문화가 뛰어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영주들은 문화의 의미나 주민들의 만족도, 예술에 대해서 무감각했다.
하지만 북부의 영주들은 예술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지자마자 이렇게 많이 빼앗기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거야말로 문화 침략이 아니고 뭐겠나?"
"창칼보다 무서운 게 펜이라더니......"

전쟁의 뒤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드와 길드의 마스터들, 영주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종전 협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을 끝내는 데 따른 배상금을 책정하는 자리.
북부동맹군 측에서는 수많은 포로들로 인해서 곤혹스러웠다.
적어도 7만이 포로로 잡혔다.
일반 병사들은 제외하더라도 유저들만 1만 4천 명은 되었다.
전쟁 배상금을 책정하는 데에 크게 불리한 입장이었다.
스티렌이 먼저 말문을 꺼냈다.

"모라타의 영주님, 훌륭하게 모라타를 다스리는 부분은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저도 마법의 대륙 시절
부터 1명의 유저로서 위드 님을 존경했습니다."

초보자들과 포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벽 위에서 이루어지는 종전 협상이었다.
마법으로 소리를 증폭해서 그들의 대화를 모라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방송국의 취재도 이루어져
서 생방송 중이었다.
정치와 모략이 판을 치는 자리.
추후 위드가 아니더라도 다른 유저들이 명예의 전당 등에도 동영상을 등록해서 꾸준히 보게 될 테니 매끄러운 언변
이 필요했다.
더구나 북부동맹군은 불리한 처지에서 배상금을 협의해야 한다.
스티렌의 아부에도 불구하고 위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인가?'

아부는 상대방의 취향과 성격, 기분을 잘 파악해서 해야 된다. 가려운 부위를 긁어 주는 것처럼 시원하고, 너무 과
한 칭찬에 부담스러워서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아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협상을 개시하면서 품격 떨어지는 틀에 박힌 아부들은 식상함만 줄 뿐이었다.

"몬스터들이 널려 있는 북부의 모라타에 위드 님이 듬직하게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을들이 모라타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까?"
"......"

스티렌은 문화와 예술로 인한 손실을 언급하고 있었다.

"많은 돈을 들여서 투자를 해도 모라타로 이주를 해 버리니 우리로서는 굉장한 손해를 보면서 살았습
니다."

북부동맹의 영주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말에 공감의 뜻을 밝혔다.
돈을 들여서 투자한 인재들이 야반도주를 하였을 때의 안타까움을 모두가 겪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타를 침공한 것은, 더 이상은 그러한 피해를 당하면서 살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입
니다. 이번 전쟁의 패배로 인해서도 우리 마을의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너그
럽게 종전 협정에 서명을 해 주시지요. 다시는 모라타를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스티렌은 말을 마치고 나서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전쟁의 신 위드의 악명이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마법의 대륙에서는, 던전에서 말다툼을
벌이며 싸우던 커플도 위드만 등장하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도망칠 정도였다.
위드는 동정이나 자비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에 띄는 대로 죽이고 빼앗고 불태워 버리는, 역사적으로 악랄한 유저!
위드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할 말은 그게 전부냐는 태도였지만, 실제로는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내가 갖지 못한 아이템들... 잃어버린 보신이보다도 더 아쉽구나. 과연 오늘 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지.'

위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평생 이 쓰라린 기억을 감당하고 살아야 되겠지. 매일매일 이 순간이 떠오르겠지. 노인이 되어서 재
활용 쓰레기를 분리하면서도 오늘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괴로워할 거야.'

마판이 위드를 대신해서 나섰다.

"북부동맹군 여러분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모라타의 입장에서, 전쟁에서 패배한 쪽의 사정을
모두 봐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낼 돈이 없습니다."
"아무 배상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종전 협상을 끝내자는 말씀 아닙니까?"
"......"
"종전 협상을 여기서 끝내시겠습니까?"

마판이 강하게 나왔다.
종전 협상이 파국으로 끝나면, 항복한 포로들은 재판을 받게 된다.
물론 판정은 위드 본인이나 그가 직접 임명한 사람들이 내릴 것이다.
전쟁 과정에서 모라타의 병사느 유저를 죽였던 사람이라면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처벌을 면하고 싶다면 보석금을 내야 하는데, 만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차라리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종전 협상으로 무사히 끝내지 않는다면 소속 유저와 병사들은 영주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쪽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아픈 현실이었다.

"북부는 위드 님의 기여로 인해서 탄생한 곳입니다. 본 드래곤을 사냥해서 기후를 따뜻하게 만들고,
모라타를 통해서 모험과 개척을 시작하셨지 않습니까? 위드 님의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북부의 마을들
은 참았어야 하는데 프레야 교단의 보호가 끝나자마자 한꺼번에 몰려들었다는 것은, 모라타를 차지하
고 싶은 탐욕에 눈이 멀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판은 냉정하게 북부동맹군의 영주들을 질타하고 있었다.
힘없는 상인에게는 최고의 쾌감을 안겨 주는 순간이었다.
전쟁 배상금을 뜯어내면 70%는 승리한 쪽의 유저들과 병사들이 나누어 갖는다. 나머지 30%는 영주의 창고로 들어가
서 도시 발전에 쓰이게 된다.
모라타의 이득은 마판에게도 바람직한 것이라서 적극적으로 뜯어낼 태세였다.
마판이 단호하게 요구했다.

"유저 1인당 900골드, 그리고 병사들은 200골드의 배상금을 내십시오."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막대한 액수를 내라는 건 과한 요구입니다!"

북부동맹군 영주들은 펄쩍 뛰면서도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목숨값이었으니 합리적인 수준의 요구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종전 협상에서 내야 되는 돈은 고스란히 소속 영주의 호주머니에서 나가는데 그만한 돈이 없다는 점!
중앙 대륙의 전쟁에서는 한 번의 싸움에도 몇천만 골드가 오고 가기도 했지만, 북부의 영주들은 대체로 가난한 편이
었다. 중앙 대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길드들이 이주해 와서 전 재산을 마을에 투자했으니 여유 자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절반으로 깎아 주더라도 내지 못할 겁니다."

북부동맹군이 모은 12만 명의 군대는 중앙 대륙에서도 흔한 규모가 아니다.
반드시 이기리라고 생각했던 전쟁에서 패배를 하고, 또 보기 드문 막대한 인원이 포로로 잡혔으니 영주들도 난처하
기 짝이 없었다.
포로들로부터 몸값을 거두어서 납부하는 방법도 있지만, 전쟁으로 이끌었던 영주들로서는 요구할 형편이 안 되기도
했다.

"그래도 1인당 900골드씩은 내야지요. 지금까지 베르사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의 선례를 보자면 굉장히
합리적인 금액입니다."

마판은 영주들의 반발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낼 돈이 없다는 데에야 어찌할 수 없이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려야 했다.
위드는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선이자를 70%쯤 떼고 신용도에 따라서 할부로 납부를 하게 시키면... 반값으로 낮춰 주더라도 매달
이득이 만만치는 않을 텐데. 그리고 연체 이자를 대폭 올리는 수법으로......'

북부동맹군 영주들과 마판이 서로 곤란해하고 있을 때 위드가 상황 정리에 나섰다.

"배상금은 없는 것으로 합니다."
"네?"

마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휘둥그렇게 뜨인 두 눈동자는 진심으로 놀랐음을 드러냈다.
위드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절대로 믿기지가 않았던 탓이다.
북부동맹군의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전쟁 배상금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위드는 계산을 끝냈다.

'달라고 해도 줄 수도 없는 처지이고, 대출도 곤란해.'

북부 마을들의 영주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뻔했다.
투자 비용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자라도 제대로 낼 리가 만무하다.
무리한 액수를 달라고 하면, 지금은 어찌 넘어가더라도 언젠가 다시 뭉쳐서 2차 모라타 전쟁을 터트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모라타에서는 칼라모르의 기사들을 다시 쓰지도 못하지만, 다음 전쟁에 이겨도 이득이 없다.
그렇게 막다른 길까지 몰리게 되면 미래가 어두운 북부의 영주들이 마을을 처분하고 떠날 수도 있다.
위드가 보기에 북부동맹군의 영주들은 허울만 좋을 뿐 악성 채무자로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배상금은 없고, 포로들은 즉시 해방해 줍니다."
"정말이십니까?"

스티렌이 지금 농담하냐는 듯이 물었다.
이렇게 유리한 처지에서 위드가 자비를 베푼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 까닭이었다.

"더불어서 약속합니다. 모라타는 다른 마을을 침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위드의 입장에선 거지들이나 다를 것 없는 마을들을 차지해서 영역을 확장해 봐야 이득이 없었다.
모라타는 백작령으로, 영토가 작지 않다.
각 영지들의 영토는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영지들 사이에 남아도는 땅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문화가 확장됨에 따라서 경계도 넓어져서 아쉬울 것도 없었던 것이다.

"상업적인 교류도 제안합니다."
"네?"
"모라타에는 초보자들이 굉장히 많이 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북부동맹군의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겪어 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앞으로 초보자들은 무기와 방어구, 잡화를 포함해서 대량의 자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북부동맹군의 영주들에게는 부럽고, 배가 아프고, 무서운 부분이었다.
모라타를 좋아하는 초보자들이 성장을 함에 따라서 다시는 넘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갈수록 강성해지는 모라타를 보면서 눈치를 살펴야 하리라.

"그런데요?"
"초보자들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조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광산이나 논밭에서
거두어들이는 것들을 모라타에 와서 파시면 됩니다. 사냥에서 획득한 물품들도, 초보자들에게 유용하
다면 판매하셔도 됩니다."

상업의 허가와 세율 책정 등은 전적으로 영주의 권리다.
초보자들이 만들어 낼 거대한 시장을 북부의 영주들에게 개방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려운 협상을 이끌어야 해서 부담이 컸던 스티렌이 환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이런 제안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저희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
"중앙 대륙은 상당히 멉니다. 상인들의 마차가 다니기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물품들의 가격도 훨씬
비싸집니다. 상인들도 이문을 남겨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요. 우리 북부의 가장 큰 문제는 초보 유저
들이 쓸 만한 무기들이 중앙 대륙의 몇 배의 가격으로 팔린다는 겁니다. 이런 일은 옳지 않습니다."

북부의 영주들이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공감합니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마을마다 상단을 만들어서 모라타에서 장사를 한다면 북부 전체의 이권이 훨씬 커질 것이다.

"우리의 발전된 문화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압니다."
"......"

영주들에게는 서러움 자체였다.
문화를 따라잡지도 못하지만, 갈수록 주민들이 줄어들고 있으니 답을 찾기 힘든 문제였다.

"모라타에 영주 직속의 문화 사절단을 만들어서, 요청을 하는 마을에는 파견을 해 주겠습니다. 문화
사절단이 공연을 하면 여러분의 마을 주민들의 이탈도 감소할 것입니다."

공연을 하면 일시적으로 문화 수치가 크게 올라가고 주민들의 불만도 잦아든다.
사실 모라타 입장에서는 이제 남아도는 바드들이나 댄서들은 골칫덩이였다. 허구한 날 북 치고 하프를 두들기면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서 돈을 벌어 오겠다는 계획!
호움 마을의 영주가 물었다.

"하지만 모라타의 문화를 사절단으로 따라잡지는 못할텐데요? 근본적인 해답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위드가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하느냐는 듯한 사나운 눈빛이었다.
가벼운 태도의 변화였지만 회의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에는 충분했다.
자꾸 베풀어 주면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잊어버린다.
협박이란 이런 식으로 하는 것.
그러나 입에서는 여전히 호의적인 말이 나왔다.

"모라타에서 화가나 조각사를 고용할 수 있겠죠. 모라타에는 특히 솜씨 좋은 조각사들이 꽤 많습니다.
만들어진 조각품이나 그림 들도 있으니 사 가면 될 겁니다."

예술품의 수출까지 노리는 위드!
빛의 탑이나 여신상 같은 것은 팔아먹을 생각이 없지만, 도시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예술품들에도 활로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예술가들의 무덤, 로디움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위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보 유저들은 앞으로도 모라타에 많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성장해서 어디로 갈지는 누구
도 모릅니다."
"......"
"모라타가 지금은 넓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좁게 느껴지겠죠. 퀘스트와 한적한 사냥터를 위해서라도 여
러분의 마을에 더 자주 방문하게 될 겁니다. 모라타를 보면 알겠지만, 작은 마을이 발전하는 것은 금
방입니다."

위드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영주가 먼저 투자하고, 나쁜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여러분의 마을을 좋아할 것이고, 또
많은 초보자들이 여러분의 마을에서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잡화점을 세우고, 광장에서 장사를 하
고, 갓 시작한 초보자가 분수에서 수통에 물을 채우는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전쟁으로 인해서 초보자들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이 위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부의 영주들도 덩달아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성벽 아래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아아!"
"전쟁의 신 위드가 최고다!"
"위드 만세!"

초보자들과, 목숨을 구원받은 북부동맹군 유저들의 환호 소리!
모라타를 침범한 적들까지 품는 위드의 넓은 아량에 대한 찬사였다.
마판뿐만 아니라, 성벽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일 일행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위드가 빛의 탑을 만들면서 예술성을 보여 주었을 때만큼이나 달라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전혀 위드 님 같지 않은데요."
"자선사업가들이나 할 만한 말 아니에요?"
"어디가 심하게 아프신 건가? 길 가다가 넘어져서 조각품에 머리가 깨졌다든가......?"

마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듯한 태도에, 위드의 정신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다.
위드의 본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방송국의 취재나, 전쟁의 승리로 들떠서 다른 태도를 보일 사람도 아니었다.
제피만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에서 굉장한 수익을 거두셨군.'

초보자들을 아끼는 영주!
북부 전체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 대영주!
그런데 정작 계산을 해 보면 위드가 손해 본 것은 없고, 앞으로 무궁무진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북부의 마을들은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면서 이득을 얻겠지만 모라타는 세금 수입이 몇 배로 늘어난다.
중앙 대륙에서 가져오는 적은 물량의 교역이 아니라, 북부의 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중소 상인들이 설 자리도 생겼
다.
북부의 마을들은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문화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주민들의 감소 현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근의 광산에서 자원을 캐고, 기술을 발전시켜서 좋은 품질의 물건을 판매하는 편이 당분간 마을의 성장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
평화가 정착되면 북부의 발전은 가속화되리라.
지속적인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모라타 외에는 불안하다는 평가가 생겨 버리면 초보자들의 유입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북부 마을들이 특산품들도 개발하게 되면 상인들의 성장과 교역 규모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부의 상업 중심인 모라타에는 굉장한 이득이었다.
덤으로 초보자들이 좋은 장비로 빨리 성장할수록 소비하는 규모도 훨씬 커지고 납부하는 세금도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예술품 판매에다 전쟁 방지 작용까지!"

각 마을들의 경제는 당분간은 모라타에 종속된다.
문화 성장을 위해 상당한 양의 예술품을 꾸준하게 수입해야 했다.
그럼에도 상품을 판매하고, 이득을 얻고, 투자를 할 수 있으니 북부 영주들에게도 나쁜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모라타가 다른 길드나 세력에 넘어가면 교역에서 큰 손해를 보게 되니,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모라타의 편에
서야 했다.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니 각 마을들 간의 국지전은 벌어지더라도 모라타를 향한 2차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
다.
제피는 위드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 같았다.
북부동맹군은 명백히 적이었다.
적들을 증오하지 않고 복잡하지만 합리적인 판단까지 내릴 수 있다니.

"전략이나 행정, 정책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야. 역시 무서운 눈치와 잔머리야!"

착취를 할 때와 베푸는 척하면서 거두어들일 때를 정확히 구분한다.
위드의 돈에 대한 집중력과 결정은 어긋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신선한 풀죽입니다."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가 벌어지는 모라타!
초보자들이 환희에 들떠 있었다.
위드도 마찬가지로 즐거웠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시청률이 폭발하고 있어요. 전쟁 영상의 생방송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시청률이에요!

메이런의 귓속말이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KMC미디어를 비롯해서, 군소 방송국들까지 합치면 총 12개의 방송국들이 모라타 전쟁을 방송했다.
그들은 위드나 침공한 쪽 모두에게 광고비의 일정 비율을 중계권료로 지급한다.
돈, 현찰이 들어오는 것이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야."

위드는 호의를 베풀어서 전쟁에 참여한 이들에게 풀죽과 풀 술을 무제한으로 하사했다. 영주의 곳간을 열어서 모라
타의 주민들과 유저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르펜의 특수 곡물 창고에 저장된 풀죽과 풀 술을 무료로 방출합니다.
-모라타의 축제에 5만 골드를 사용합니다.

영주의 푸짐한 배려였다.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지금은 써야 된다.
거리에는 멧돼지나 사슴의 바비큐들이 구워지고, 풀 술이 담긴 나무통이 가득 쌓였다.

"마음껏 마셔라!"

풀과 잡다한 열매들을 섞어서 만든 새로운 특허 아이템!
나무껍질을 넣어서 쓴맛을 더하고, 상추와 복분자도 넣어서 영양가를 더했다.
위드는 약초학을 바탕으로 중급 요리사답게 끊임없이 술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새로운 술 제
조 비법으로 풀 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술이 돈이야.'

술만큼 유통기한 길고, 보관 편하고, 잘 팔리는 상품도 흔하지 않다.
베르사 대륙에서 술만 전문적으로 빚는 직업이 각광을 받을 정도였다.
술뿐만 아니라 음식의 제조법도, 마법 스크롤만큼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맛과 영양가가 좋은 제조법을 만들어 내면 그 음식의 가치를 인전받아서 숙련도와 명성 등을 올릴 수도 있었다.
위드가 새롭게 만든 풀 술은 저렴한 재료들을 모아서 최대한의 영양과 맛을 추구하는 것!

"풀 술이다!"
"맛있는데?"

초보자들은 풀 술의 맛에 놀라워했다.
비싼 명주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없는 돈에 마시기는 좋은 술이었다.

"건배!"
"모라타를 위하여, 우리 초록모자 모임을 위하여!"
"진성초등학교 49회 동문회 여러분, 우리가 해냈습니다."

초보자들이 밝게 웃으면서 행복해했다.
도처에서 축제와 행사가 벌어지고, 반면 사냥을 하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는 유저도 상당수 있었다.
전쟁을 경험하면서 무력함을 크게 느꼈다.
강해지기 위해서 도시 밖에서 사냥을 개시하는 초보자들.
위드에게는 긍정적인 현상이었다.

"저들이 다 나의 세금 줄이 되어 주겠지."

세금은 많이 거둘수록 좋다.
모라타의 유저들이 많아질수록 여러모로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검치 들도 광장에서 거나하게 바가지에 풀 술을 따라서 마시고 있었다.
살아남은 북부동맹군의 유저들도 전부 철수하지 않고 모라타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있을 때였다.
위드가 영주성에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영주의 권한을 발동시켰다.

"이틀간 도시 세율 2% 증가!"

띠링!

-이틀 동안 임시 세율을 적용합니다.
상점에서 판매되는 물품의 세율이 5%에서 7%로 바뀌게 됩니다.

축제는 성수기라고 할 수 있다.
물건들이 많이 사고팔리고, 흥청망청 먹고 소모하는 시기.
적당한 세금 인상으로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주에게 따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

공짜 풀죽과 풀 술을 지급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세상에 진정한 공짜란 없는 법!





<조각품의 역사>





중앙 대륙의 영주들은 위드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마법의 대륙에서 조금 명성을 날렸다고 해서 로열 로드에서도 함부로 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야."
"전쟁의 신 위드? 중앙 대륙에 있었다면 일개 군단만 파견해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을 군소 영지 영주
에 불과한 주제에 말이지."
"잔재주에 불과한 퀘스트나 하면서 까부는 게 불쾌하군."

중앙 대륙의 영주들은 스스로를 피의 역사를 쓰면서 버텨왔다고 생각했다.
로열 로드의 초창기부터 남들보다 두각을 드러내고, 유저들을 포섭해서 세력을 키웠으며,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며
살아남았다.
영주들이 거느린 군대는 정예병만 8만이 넘는 경우도 많았다. 소속된 영토 내에서 활동하는 유저들의 숫자도 엄청났
다.

"모라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위드에 대한 반감과 질투!
퀘스트나 전쟁에서 유저들을 열광시키는 모습이나 그가 쌓은 명성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다수의 초보자들이 모라타를 근거지로 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조각품이 살아서 움직이다니... 조각품을 만들면 그것과 비슷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는 건가? 퀘스
트이거나 조각술에 뭔가 감춰졌던 비밀이 있었던 거야."
"어쨌든 북부는 슬슬 영양가 높은 노른자위 땅이 되고 있어. 중앙 대륙이 안정화에 이르기만 하면 모
라타를 점령해 버려야겠군!"

단단히 벼르고 있는 영주들이 많았다.
하지만 헤르메스 길드의 바드레이만큼 이번 전쟁의 결과를 기다렸던 사람도 없었다.
바드레이는 일부러 텔레비전도 안 봤다.
평소처럼 사냥에 충실하면서 위드의 처참한 몰락의 소식을 기다렸다.
정보 담당 스티어가 북부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타 전쟁 소식을 들은 바드레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위드가 승리를 했다라."
"예. 모라타의 피해도 크지 않습니다. 북부동맹군이 여러모로 무능했고, 단합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라타의 전력이 그렇게 컸나?"

바드레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되물었다.
각 방송국마다 전쟁 며칠 전부터 양측의 전력을 분석하는 보도를 했다. 모라타에 대해서 듣기로는 분명 북부동맹군
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위드가 대활약을 펼쳤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활약을 펼쳤습니다."
"......"
"모라타의 유저들 대부분을 전쟁에 가담시키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 힘이나 능수능란한 전술, 칼라
모르의 기사들을 부리는 것 등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장면들입니다. 인터넷 게시판이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바드레이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북부에서 벌어진 사소한 일 따위가 헤르메스 길드의 총수이며 하벤 왕국의 최고 권력자를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는
듯이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위드가 지휘한 전쟁에서 북부동맹군이 항복을 했다라......!'

바드레이의 기분을 망쳐 놓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썩은 단검 팝니다. 배추도 잘 잘리고 몬스터 사냥에는 최고예요."
"구부러진 철검 팔아요. 목검밖에 없는 분들, 이참에 든든한 검 하나 장만해 보세요. 싸게 드릴게요."
"생명을 지켜 줄 가죽 갑옷 팝니다. 가슴 부위는 찢겨서 없지만요, 다른 부분은 비교적 멀쩡해요."

적게는 몇 쿠퍼, 비싸도 5골드를 잘 넘지 않는 초보자들끼리의 거래!
와이번 광장, 빙룡 광장, 빛의 광장, 황소 광장에는 유저들로 북적거렸다.
미리 4개나 되는 광장을 더 만들었을 때에는 인적도 뜸하고 황량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모라타 전쟁으로 인하여 초보자들이 대대적으로 늘었다. 방송 후에는 로열 로드가 막 문을 열었을 때의 초창
기처럼 초보자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보리 빵 3개 남는데, 팔아요."
"그거 팔고 뭐 먹고 살려고 그래요?"
"무기부터 장만하고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요."
"쯧쯧, 마을에서 물이라도 많이 드세요. 물로라도 배를 채우면 포만감이 잘 안 떨어져요."
"고맙습니다."

찬 바람이 지나고 난 후의 봄의 대지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모라타였다.
초보 상인들은 특산품을 1~2개라도 사서 운송하고 있다.
파보가 짓는 예술 회관의 건설 현장에는 수만 명의 초보자들이 달라붙어서 전광석화처럼 일을 해치운다.
위드는 방학 기간 동안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조각품 복원도 마쳐야 되고, 사냥으로 레벨도 올려야 돼. 지금처럼 마음 놓고 집중할 시간이 겨울방
학이 아니고는 없을 거야."

여행을 다녀와서 가뜩이나 짧아져 버린 여름방학!

"스탯 창!"

『캐릭터 이름 : 위드 성향 : 도전적임
레벨 : 368 직업 : 전설의 달빛 조각사!
칭호 : 이무기를 사냥한 지휘관
명성 : 29,726
생명력 : 31,360 마나 : 14,405
힘 : 1,315 민첩 : 1,005
체력 : 159 지혜 : 189
지력 : 184 투지 : 479
지구력 : 210 인내력 : 695
예술 : 1,621 카리스마 : 360
통솔력 : 672 행운 : 215
신앙 : 135+435 매력 : 210+30
맷집 : 419
정신력 : 25 용기 : 95
공격력 : 5,329 방어력 : 1,761
마법 저항 불 : 27% 물 : 31%
대지 : 35% 흑마법 : 50%

+모든 스탯에 20개의 포인트가 추가됩니다.
+예술에 추가로 80개의 포인트가 부여됩니다.
+달이 뜨는 밤에는 30%의 능력치의 향상이 있습니다.
+아이템과 특화됨.
+모든 생산 스킬을 마스터의 경지까지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아이템 제조와 제련의 스킬에
우대 적용. 최고급 스킬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이하거나 예술적 가치가 높은 조각품을 만들면 명성이 상승합니다.
+조각품과 생산 스킬, 전투 경험, 퀘스트로 인하여 전 스탯이 113 증가합니다.
조각품과 생산 스킬만으로 전 스탯을 100개 이상 증가시키면 대장인의 칭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착용하고 있는 바하란의 팔찌로 인하여 전 스탯이 15 증가합니다.

위드의 레벨은 조각품에 생명을 부여한 탓에 다시 368이었다.
레벨을 올릴 때마다 힘과 민첩에만 모든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고, 나머지는 퀘스트와 장비, 조각품으로 알차게 올린
스탯들이다.
스탯 창만 해도 노가다의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 있었다.
로열 로드의 홈페이지를 보면 자기의 스탯을 자랑하는 게시판이 있다. 그중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스탯 창이
었다.

"빙룡이나 금인이, 이무기나 킹 히드라는 물론이고 와이번보다도 낮은 레벨이야."

퀘스트를 하다 보면 레벨이 잘 오르지 않는 단점이 있다.
퀘스트의 성공에 매달리느라 준비를 해야 했으니 사냥에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레벨이 너무 낮아서는 강해질 수 없다.
공성전을 준비하면서도 병사들을 키우느라 전투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 스킬 숙련도도 올리지 못했다.

"텔레비전을 보면 레벨 420대의 유저들도 꽤 될 거라는데...... 이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지, 먼저
옥새부터 복원해 보자."

위드는 영주성의 골방에 들어갔다.

"조각품은 마음이야 진정한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어."

조각 복원술을 위해서는 부수고 고치는 일을 반복해야 된다.
예쁘고, 화려하고, 귀한 조각상을 만들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깨뜨리고 다시 복원을 하면서 노가다처럼 느껴
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노가다란, 노가다를 하면서도 하는지를 몰라야 돼."

감정의 이입을 위한 조각품 선정에 고뇌의 시간 3초!

"이놈들이면 되겠군."

위드는 돈 귀신 조각품 7마리부터 만들었다.
이마에 돈을 달라고 쓰여 있고, 뻔뻔한 표정으로 돈을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손바닥을 내밀었다.
얄밉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험악한 표정까지 지었다.
옆구리에는 일수 가방까지 들고 있는 영락없는 돈 귀신들!
표현과 묘사를 어찌나 세밀하게 했는지 걸작 조각품이 나왔다고 칭찬마저 자자할 정도였다.
위드는 완성된 조각품을 잠시도 바라볼 수 없었다.

"이야합!"

콱콱! 와장창! 퍼석!
조각품들을 밟고 던지고, 망치로 때려 부쉈다.
이단 날아 차기에 눈찌르기, 관절꺾기, 목 비틀기까지 이어지는 연속기!

"이놈의 돈 귀신들!"

원한과 증오를 담아서 행하는 보복 행위였다.

-조각품을 훼손하셨습니다.
명성이 5 하락합니다.

위드는 다시 깨진 조각품들을 이어 붙이고, 완전히 파괴된 것들은 새로 만들었다.
방금 만든 조각품이라서 기억에 남아 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얄미운 인상의 돈 귀신들이 금방 복구되었다.

"이 지긋지긋한 돈 귀신들!"

만들고 부수고의 반복!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조각 복원술의 스킬 레벨이 중급이 되었습니다. 조각품의 내구력이나 광택이 더욱 좋아집니다.
기억력이 좋아져서 지식이 20 오릅니다.

걸작 조각품으로 하는 수련이라서 초급은 무난하게 넘었다.
복원술이 중급이 되었을 때에는 돈 귀신이 슬슬 질려 왔다.

"더 참신한 조각품이 필요해. 내 증오와 열정을 더욱 끌어 올려 줄 수 있는 걸로!"

이번에는 돈 먹는 하마 조각상을 제작했다. 누렁이만큼 큰 몸집의 하마가, 바닥에 떨어진 1쿠퍼짜리 동전들을 주워
먹으려고 하는 끔찍한 순간을 조각한 것이다.
돈을 먹으려고 하는 하마의 탐욕스러운 표정과 뱃살의 출렁거림까지 표현된 걸작!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면서 1,400이 넘는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았다.

"죽어라!"

위드는 하마를 불로 태우고, 인두로 지지고, 거꾸로 매달았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행했던 온갖 잔혹 행위가 돈 먹는 하마에게 저질러졌다.
누렁이는 암소들과 뒹굴고 나서, 주인의 곁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돌아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와이번과 금인이,
빙룡이는 영주성의 창문에서 위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추위에 강한 빙룡이의 몸체까지 덜덜덜 떨고 있었다.

"주인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
"우리가 하마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조각 생명체의 충성도 최절정!
위드는 돈 먹는 하마를 고치면서 조각 복원술을 중급 7레벨까지 달성했다.
나흘에 걸친 노가다의 결실. 학교에 가거나 다른 잡다한 일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로열 로드에만 투자한 덕분이었다

"이제 아르펜 제국의 옥새를 복원할 때야."

위드는 옥새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부서지지 않도록 고급 천으로 잘 싸 놓은 귀한 조각품이었다.
오래 시간을 끌지 않고, 익숙할 때에 바로 해치우려는 것이다.

"일단 이 조각품을 복원해야 되는데......"

스킬은 올랐지만, 사실 조각품을 많이 복원해 본 건 아니라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

"게이하르 황제가 만들었떤 장면을 조각품의 추억으로 보지 않았다면 시도하기도 어려웠겠지."

기억에 남는 조각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금을 바르고 옥을 이어 붙이기로 했다.
가지고 있던 전리품 중 고대 금화들을 녹인 후에 복원에 쓰기 위해서 준비했다.

"조각 복원술!"

스킬을 사용하면서 금을 찍어 바른다.
원래의 형태로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파아아앗!
묵은 때가 제거되고, 황금빛 드래곤의 닳고 없어진 부분들에 복구의 손질이 가해졌다.
세월의 흔적으로 깨지고 균열이 간 부분도 보수했다.

"밑바닥도 고쳐야 되겠군."

대륙의 지배자를 상징하는 옥새였지만 도장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다.
위드는 마법으로 만든 접착제를 이용해서 도장을 찍으면 아르펜이라는 글귀가 나오도록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손질을
했다.
조각 복원술이라는 스킬에 의존하고는 있었지만, 아르펜 제국의 옥새는 오래된 골동품이라서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
럼 위태로웠다.
그래도 조각 복원술 덕분에 고치는 와중에 옥새가 깨지거나 균열이 심해지지는 않았고, 예전의 자태를 점점 되찾을
수 있었다.
황금빛 드래곤을 잡고 찍는, 권위로 가득한 도장의 재현!
해어지고 다 찢어진 청바지를 새것처럼 고쳐 놓은 수준이었다.

-조각품을 복원하셨습니다.
조각 복원술의 스킬 숙련도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오래된 조각품을 복원하여 예술 스탯을 3 얻었습니다.

오래된 골동품치고는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무언가 엄청난 조각품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성공인가?"

위드는 옥새를 보면서 찜찜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김치 없이 밥을 먹는 것처럼 뭔가 결정적인 부분이 빠져 있
었다.

"감정!"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 : 내구도 24/30.
베르사 대륙의 역사와 함께했던 귀한 옥새.
실력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조각사가 만들었다.
믿음직스러운 조각사가 복원을 했지만, 세월의 한계로 인해 예전의 수준으로는
돌아오지는 않았다.
예술적 가치 : 43,100.
옵션 : 기품 +95.
카리스마 +55.
병사들의 충성심과 사기의 최대치를 20% 증가시킴.
소유자의 육체에 해로운 모든 마법들에 대한 저항력 55%.
귀족들과 기사들을 주눅 들게 만들 수 있음.

"복원이 완전히 되지는 않았군."

옥새의 부족한 부분만 채워 넣느라, 조각품의 느낌을 되살리는 데에 무감각했을지도 모른다.
오래되고 파손이 심한 조각품을 완전하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게이하르 황제의 입장을 헤아려야 했다.
아예 다시 만드는 것처럼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예술품을 고장 난 자전거 고치듯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황금 드래곤은 제국의 권위와 통치력을 상징한다. 게이하르 황제가 막 만들었을 때 이 옥새는 밝은
빛을 뿌렸지."

작업을 재개하면서 위드의 손놀림은 더욱 신중하고 느려졌다.

"황금 드래곤을 통째로 다시 만든다고 생각해야 해. 완전히 예전과 똑같은 형태로, 그리고 제국의 찬
란함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

조각술은 재질에 굉장히 민감하다.
거친 암석을 바탕으로 조각을 하면 투박한 자연미가 생기고,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들은 재질이 매끄럽다
작품에서는 조각한 물체에 대해 표현상으로 결정적인 차이를 줄 수 있었다.
황금은 무르고 약한 성질 탓에 조각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재료였다. 가격도 비싸서, 완성된 조각품에 금칠을 하는
정도로 타협을 보는 경우도 많다.
완성된 황금 조각품은 귀금속 특유의 광채와 재질 덕에 더없이 아름답지만 흔히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게이하르 황제가 제국의 상징을 황금으로 만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

입체로 표현하는 모든 게 조각품이라면, 필연적으로 빛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대체로 건축에 쓰이는 조각품들은 많은 빛을 받아들일수록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바위를 이용해 동
물이나 사람을 조각해 놓은 일반적인 조각품들은 너무 밝은 곳보다는 실내에 놔두는 편이 낫다.
조각품에 빛이 어디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이 되기도 한다.
밝음과 어둠까지 감안해서 만드는 것이 훌륭한 조각사, 빛을 터득한 조각사인 것이다.
황금빛 드래곤은 태양 같은 권위를 가진 빛을 지배하는 조각품이었다.

"빛의 조각술. 황제의 권위를 만천하에 뿌리는 조각품이다!"

황금빛 드래곤도 역시 빛의 조각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위드도 빛의 조각술을 사용하면서 옥새를 복원해야 했다. 조각품의 고유한 빛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손
놀림이 더욱 느려졌다.
손길이 닿는 부위마다 역사 속에 사라졌던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듯이 황금빛 드래곤이 빛무리를 뿌려 낸다.
찬란한 아르펜 제국의 영광, 황금빛 드래곤의 부활.
위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복원했다.

띠링!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를 복원하셨습니다.
아르펜 제국의 옥새!
전 대륙의 지배자를 상징하던 물건이 긴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옥새를 복원함으로 인해서 조각술 스킬 숙련도가 3% 상승하셨습니다.
조각 복원술 스킬이 중급 8레벨이 되었습니다.
손재주 스킬 숙련도가 9% 상승하셨습니다.
예술 스탯이 37개 올랐습니다.

『대륙의 지배자의 도장 : 내구도 38/60.
베르사 대륙의 지배자가 가지고 있던 옥새.
조각술의 정점에 선 자가 만들었다.
옥새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서 오래된 것들을 추억할 수 있을 듯하다.
예술적 가치 : 49,400.
옵션 : 명성 +3,000.
기품 +105.
명예 +60.
카리스마 +70.
황제의 권위 사용 가능.
병사들의 충성심과 사기의 최대치를 25% 증가시킴.
소유자의 육체에 해로운 모든 마법들에 대한 저항력 60%.
귀족들과 기사들을 주눅 들게 만들 수 있음.
기억력 좋은 황금새가 찾아옴.

-역사적 보물을 소유함으로써 스탯이 생성됩니다.
스탯 기품이 생성되었습니다.

『기품 : 왕족이나 귀족, 기사 들이 가지는 품위입니다.
귀족 사회에서 기품은 대단히 중요하며, 주민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세금 납부에 대한 불만을 줄여 줍니다.
레벨업이 될 때마다 스탯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현명하게
처리하거나 국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때에도 오릅니다. 보물과 예술품을
많이 보유하거나, 성과 별장을 건축해도 올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스탯을 얻었지만, 위드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힘과 민첩에만 모든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는 방식을 그대로 유
지할 작정이었다.
기품 스탯은 옥새를 제외하고도 여러 무기나 방어구에 적용되고 있어서 딱히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기품도 식후경이지. 먹고살 만해진 다음에야 기품 같은데 관심이 생기는 거야."

그리고 다시 위드의 눈에 황제의 도장에 간직되어 있는 영상이 흘러들었다.



번성한 아르펜 제국!
대리석으로 된 아름다운 신전들이 세워져 있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
조각품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들이 일을 하면서 인간들의 업무를 분담해 주었다.
창을 들고 있는 조류가 군사가 되어서 몬스터를 퇴치했고, 큰 짐승들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들은 나태하고 게을러졌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고 늙어서도 노세."
"여기 술 가져와, 술!"

아르펜 제국의 수도에서는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 인간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게이하르 폰 아르펜 황제의 통치가 너무도 훌륭하다 보니 벌어지게 된 일!
인간들의 삶이 편해지면서 검술과 마법, 학문이 퇴보하게 되었다. 조각 생명체들은 날로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비
참하게 부려지고 있었다.
게이하르 폰 아르펜 황제는 슬픈 결단을 내렸다.

"내가 만든 생명체들이여!"

아르펜 제국의 전역에 있던 조각 생명체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너희에게는 인간들의 말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없다.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말고 스스로의 자유를
가져라!"

조각 생명체들에 대한 해방 선언!
게이하르 황제가 죽고 난 이후로, 조각 생명체들은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았다.
국경을 지키던 조류는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조인족들의 국가.
천공의 도시 라비아스에서 봤던 조인족들의 선조가 놀랍게도 조각 생명체였던 것!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크나 트롤, 오우거처럼 흔한 몬스터가 아니라, 정글이나 깊은 숲에서 살아가는 기기묘묘한 생김새와 색채를 가진
아름다운 몬스터들. 그들의 선조들 상당수가 조각 생명체 출신이었다.
인간을 피해서 사는 조각 생명체들이 정글이나 동굴 속에서 마주쳤다.

"너 출신이 어디야."
"훗. 게이하르 황제께서 35세에 만들었거든."
"까불지 마. 난 25세에 제작되었어."
"선배님,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해병대 기수를 능가하는 엄격한 선후배 체제!
조각 생명체들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베르사 대륙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게이하르 황제가 만든 조각 생명체들의 일부는 몬스터로 불렸다. 영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인간
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들과의 분쟁도 벌어지게 되면서 멸망하거나 혹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인간들 중에서는 몬스터를 만든 게이하르 황제를 원망하는 소리가 자연히 커지게 되었다.
베르사 대륙을 통일한 영광스러운 아르펜 제국도 조각 생명체들이 떠나가고 나니 빠르게 몰락했다.
그 후로 게이하르 황제와 조각술이 매도당하고, 역사서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엄청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대부분의 조각 생명체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깊은 동
굴이나 바다, 하늘에서는 인간들을 피해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었다.



위드는 두 번째로 나온 영상을 보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조각 생명체들이 몬스터의 원조라니......"

몬스터의 일부에 국한되었을 뿐이지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조각술이 엄청난 지탄을 받을 것은 분명한 일!
조각사에 대한 경계심이 커질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만 하더라도 조각사에 대한 인식은 좋은 조각품을 만드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위드는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굳이 알려질 필요는 없는 사건이군."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론 역사 속에 묻어 둬야 할 진실도 있는 법.
게이하르 황제가 수많은 조각 생명체들을 만들었고, 그들 일부가 자유를 얻어 몬스터화했다고 해도 사실 끔찍해할
만한 일은 아니다.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야. 이게 알려지지만 않으면 되니까."

우유를 다 마시고 나서 유통기한이 스무 날이나 지난 것을 봤을 때에도 위드는 웃었다.

"괜찮아. 알고 먹는 것보단 낫잖아."

사약도 모르고 먹으면 한약!
남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조각사가 비난받을 일은 없다. 다른 조각사가 이 사실을 알더라도 역시 입을 다물 것이다
이거야말로 동업자 정신!
음머어어어어.
어느새 영주의 방으로 들어왔던 누렁이가 가늘고 길게 울었다.
목격한 소가 있었지만 입막음은 쉬웠다.

"정력 보강을 위한 약초 두 뿌리 줄게."

고마움에 금세 머리를 비벼 대는 누렁이였다.
주인을 닮아서 뇌물이나 보상에 약했던 것이다.
위드는 생각보다 베르사 대륙에 조각술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고 내심 많이 놀랐다.

"조각술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알게 되는 배경들이 굉장하군."

간단한 조각술 퀘스트들이야 스킬의 숙련도를 올려 주고 돈과 같은 약간의 보상 정도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난이도가 높고 모험이 필요한 퀘스트들을 진행하다 보면 조각술이 베르사 대륙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조각술 스킬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인류의 역사에도 조각술은 많은 기여를 하였다.
원시시대에는 사냥감을 조각하여 용기를 북돋기도 했고, 선대로부터 사냥법을 전수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제작했다.
조각술은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것들의 근본이 되었다.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베르사 대륙에서 이 정도의 위치라는 게 새삼 놀라운 것 만은 아니었다.





<유령선>





"조각품에 생명 부여 스킬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 추억을 보고 나서 게이하르 황제가 남겨
놓았을지도 모를 유산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겠지. 감정!"

위드는 옥새에 조각품의 추억 스킬을 다시 사용했다. 그러자 니플하임 제국의 과거도 볼 수 있었다.
게이하르 황제가 만든 아르펜 제국의 옥새는 전란을 거쳐서 니플하임 제국으로 넘어갔다.
기사의 제국.
충직하고 명예를 아는 기사들은 척박한 북부에서 인간의 영토를 넓혔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융성했던 니플하임 제국에 대규모의 몬스터 침입이 일어났다.
위드는 수도 모드레드의 성벽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침공한 몬스터 군단을 볼 수 있었다.
본 드래곤을 비롯한 수많은 몬스터들의 군단이 인간들이 지은 집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학살한다.
여기까지는 베르사 대륙의 역사서에 나온 내용 그대로였다.
그런데 수도 모드레드에 대한 마법 공격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황궁으로 퍼부어지는 대형 화염 덩어리들!
황궁 기사들은 불타오르는 궁성을 빠져나왔다.
센데임 계곡에서 마녀 세르비안의 구슬을 사용하면서 최후의 항전을 했지만, 몬스터들을 이기지 못했다.

띠링!

『니플하임 제국의 대리인(2)
아르펜 제국은 게이하르 황제의 서거 이후 후손들과 신하들에 의해 사분오열되었다.
베르사 대륙의 지배자를 잠시 동안 상징했던 이 인장은 황태자 누미르의 수중에 들어
갔지만, 분열과 전쟁이 거듭되면서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
니플하임 제국은 마지막으로 이 옥새를 입수하여 200년 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전란을 피하지 못했다.
본 드래곤을 비롯한 많은 몬스터들의 침공에 의하여 수도가 불타고 황족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침입 외에 진정한 니플하임 제국의 멸망의 이유에 대해서 자세
히 아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게이하르 황제가 직접 생명을 부여한 황금새는 제국의 멸망을 또렷하게 기억
하고 있을 것이다.
황금새의 뒤를 쫓아서 제국을 멸망시킨 자들에 대한 복수를 하라.
난이도 : S
퀘스트 제한 : 총 3단계 퀘스트의 두 번째.
고급 조각술을 습득한 조각사 한정.

S급 난이도의 두 번째 단계 퀘스트!

-낭만 시대 니플하임 제국 건물 양식들을 감상하셨습니다.
조각사로서 새로운 건물들을 관찰하게 됨으로써 소유하고 있는 마을과 성, 지역 등에 낭만 시대의
건물들을 지을 수 있습니다.
낭만 시대의 건물들은 예술적 가치에 치증되면, 귀족들의 문화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기사들의 탄생을 촉진시키고 정치적인 영도력을 확장합니다.
특수 건물들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구구구구구.
니플하임 제국의 과거를 보는 동안 황금새가 등장했다.
찬란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새.
게이하르 황제가 남겨 놓은 조각 생명체!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약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사파이어로 만든 것 같은 푸른빛 눈동자와, 하얀 잔털이 있는 배는 백금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마에는 작은 왕관까
지 쓰고 있었는데 무려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장식품!
황금빛 동체가 움직일 때마다 선명한 아름다움을 몰고 다닌다.
조각사로서는 새로운 경지를 본 것에 대한 감탄이 나올 법한 작품이었다.

"꿀꺽."

위드는 군침을 삼켰다.
황금새를 잡아다가 팔기만 하면 그 돈이!

'몽땅 해체해서 귀금속 가게에 나눠 팔아도 돈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유니크 아이템을 본 것 같은 탐욕적인 눈빛.

"역시 게이하르 황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 보석이나 황금을 좋아하는 취향이 딱 좋군!"

위드는 납치를 실행에 옮기기 전에 잠시 주저했다.

'게이하르 황제가 만든 조각 생명체야.'

직업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에 대한 의리는 아침마다 나오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다. 단지 꺼림칙한 부분
이 있었다.

"황금새 정보 창!"

-조각 생명체를 관찰합니다.
자세한 정보의 확인은 불가능합니다.

『이름 : 세노리아 루세로니 성향 : 자연
종족 : 조류
레벨 : 519 직업 : 맑은 울음 소리를 내는 추적자
칭호 : 똑똑한 새
명성 : 60
게이하르 황제에 의해 탄생한 생명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아르펜 제국의 옥새를 따라다닌다.
살이 통통한 지렁이를 좋아한다.

+새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굉장히 빠름.
+검을 비롯한 각종 무기들을 이빨로 끊을 수 있다.
+적에게 해독이 불가능한 독을 토해 냄.
+확인되지 않음.
+확인되지 않음.

앵무새 정도로 작고 귀여운 몸집이었지만 레벨은 엠비뉴 교단을 쓸어버리던 킹 히드라 수준이었다.

'안 건드리기를 잘했군.'

위드는 입맛만 다셨다.
황금새가 탐이 나지만 길들일 수도 없었다.
조각 생명체들은 생명을 부여한 사람은 부모처럼 따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와이번이나 금인이
를 그렇게 오래 방치해 두었는데도 다른 주인을 만들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구구구.
황금새가 위드를 향해 길게 울더니 영주성의 창문 밖으로 날아올랐다. 니플하임 제국을 멸망시킨 적에게 안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위드는 와이번을 타고 황금새의 뒤를 쫓았다.
북동쪽 방향으로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날아가는 황금새!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서 위드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더니 점점 속도를 올렸다.
불사조와 빙룡, 이무기도 뒤를 따라서 날아왔다.
산맥과 숲을 단숨에 넘고, 공중으로 이동하는 것이기에 편했다. 지상으로 달리거나 마차를 이용했다면 훨씬 어려운
경로를 거쳤으리라.
황금새가 이틀을 꼬박 날아서 도착한 곳은 결국 북동쪽 방향에 있는 해안가!
콰르르르릉, 콰과과광!
시커멓게 먹구름이 쳐져 있는 하늘은 폭우가 쏟아지면서 바다와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천둥 벼락이 칠 때마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이 끝이야?"

위드의 물음에 황금새가 맑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구구구.

"더 가야 되는 거 아니고?"

꾸꾸.

"여기까지밖에 몰라?"

구구구.

"혹시... 니플하임 제국을 무너뜨린 원흉이 여기서 배를 탔어?"

구구구.
눈치로 때려 맞히는 위드!
S급 난이도의 연계 퀘스트를 하면서, 1단계에서 엠비뉴 교단의 대사제인 페이로드와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렇
기 때문에 퀘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든가 배경 지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위드는 할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많이 본 경험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죽일 놈, 살릴 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하루의 피로가 사라졌다.
드라마를 보면서 터득한 추리력!

"본 드래곤과 싸울 때도 엠비뉴 교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지. 그리고 통곡의 강에서도 괜히 있지
는 않았을 거야. 관련이 있겠지!"

위드는 대충 엠비뉴 교단의 정체에 대해서 눈치를 챘다.
베르사 대륙을 좀먹으려고 하는 악의 무리.
굵직한 퀘스트에는 빠짐없이 연관되어 있는 파멸의 교단이다.
위드도 엠비뉴 교단에 대해서는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관 페이로드가 아이템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스스로를 희생해 가면서 죽었기 때문이다.
유니크급 아이템 하나만 떨어뜨려 주었더라도 은인, 성자, 바람직한 사제로 기억되었을 게 분명했다.

"인색한 놈. 최악의 흉물. 더러운 놈."

위드는 잠시 욕을 퍼부어 주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엠비뉴 교단이 개입했다는 건 일단 분명하고... 몬스터의 침입도 그냥 일어나지는 않았을걸. 다른
조력자도 있었겠지."

몬스터를 부릴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드라마에서도 주연이 있다면 조연이 있어야 된다.
악역과 피해자, 음모, 다툼!
니플하임 제국은 피해자였다.
엠비뉴 교단과 다른 조연들에 의해서 몰락한 제국.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니플하임 제국이 재건되려면 그 악역들을 쓸어버려야 했다.

"완벽해. 완벽한 스토리야!"

위드는 스스로의 추리에 감탄했다.
엠비뉴 교단 혼자서 저지른 일이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았다.
악역 혼자 다 하는 드라마는 식상하고, 재미도 없다.
악역이 여럿일수록 스케일이 크고 훌륭한 드라마였으니까!

"인형 눈알처럼 착착 꿰어 맞춰지는군."

바닷가에 앉아서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폭풍은 사그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위드는 베르사 대륙의 지리에 대한 게시판에서 이와 비슷한 정보를 봤던 것 같았다.

수도자의 도시 : 동료가 없다면 절대 들어가지 말 것. 탐험자 레벨 376.
트리반의 안개 호수 지역 : 노랫소리의 유혹에 호수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요정들을 사냥할 수 있음.
탐험자 레벨 312.
헤즈막의 부엉이 둥지 : 자살을 하고 싶다면 추천. 겨우 도망쳤음. 탐험자 레벨 389.
포코의 동굴 : 여기로 오세요. 좋습니다. 깔끔하게 죽습니다. 부엉이 둥지 갔다가 여기 들어갔는데
난도질당해서 죽었습니다. 레벨도 하락했음. 탐험 후 레벨 388.

북부를 모험한 다크 게이머들의 목숨값으로 완성된 자료들.
탐험자의 짤막한 기록이었찌만, 다음번 방문자들에게 기초적인 도움 정도는 됐다.

북부의 북북동쪽에 있는 해안가 : 비바람과 함께 벼락이 심하게 쳐서 바다로 접근이 불가능. 부근 일
대의 기후가 매우 안 좋습니다. 퀘스트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위
험해 보임. 바다에서 몬스터들도 다수 발견. 탐험자 레벨 379.

게시판에서 봤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면 천둥 벼락이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바다라......"

파도가 높고 거세기는 했지만 이대로라면 배를 만들어서 타고 가야 될 것 같았다.
폭풍이 없더라도, 와이번을 타고 망망대해 위에서 탐색과 추적을 벌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와이번들도 휴식을 취
해야 했고, 적대적인 공중 몬스터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배를 만드는 기술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잡캐 중의 잡캐라고 할 수 있는 위드에게도 조선 기술은 없었다.
연관성이 있는 대장장이 스킬이 중급 5레벨이라서 목재들을 짜는 데에 도움은 되겠지만, 큰 배를 만들기에는 무리였
던 것.

"조선 스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모라타로 돌아가야 되나?"

모라타에 해양 길드를 만들고 스킬을 배우는 것도 낭비가 심한 일이다.
중앙 대륙에서 스킬을 배워 온다고 해도 폭풍을 헤치고 지나갈 정도의 선박이라면 조선 스킬이 중급은 되어야 한다.

"배를 1척 사 올 수밖에 없다는 건데......"

위드의 골치가 아파 왔다.
갑판에 와이번들을 태울 수 있을 정도의 배는 매우 비싸다.
돈을 아끼기 위해 속도가 빠른 배를 사지 않는다고 해도, 중앙 대륙에서 여기까지 끌고 와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선원이며 항해사 등도 모두 고용해야 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곤란함을 겪고 있을 무렵, 시력이 좋은 와삼이가 말했다.

"주인, 바다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지금 이동하고 있다."
"바다에?"

위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폭풍이 치는 바다를 주시했다.
와이번의 말대로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무언가가 북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높은 파도가 치는데도 상관없다는 듯이 고요하게 이동하고 있는 범선!
돛은 걸레처럼 찢겨 있고, 아예 중간부터 부러진 돛대도 보였다. 선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다.
비바람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낡고 오래된 중형 범선이었다.

"저런 상태로도 항해가 가능한가?"

위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송에서 무역용 배들을 타고 다니는 상인들을 본 적 있다. 상품을 적재해야 하기 때문에 선박은 항상 최고의 상태
를 유지하도록 관리한다.
저렇게 파손이 심하고 낡은 배로 폭풍을 뚫고 다닌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와이번이 더 관찰해 보고 나서 말했다.

"주인, 저 배의 갑판에 언데드들이 타고 있다."
"언데드라면......"

위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다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배는 유령선이었던 것이다.

"무임승차를 할 수 있겠군!"



위드는 조각칼을 꺼냈다.
서걱서걱.
바위를 깎으면서 조각을 했다.

"깡마른 몸에 로브, 그리고 이마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지."

스켈레톤들과는 상당히 많이 싸워 보았다. 실제로 일으켜 보기도 했으니 구조나 생김새가 익숙했다.
하지만 스켈레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 필요했다.
유로키나 산맥에서 싸웠던 리치 샤이어를 조각하고 있는 위드!
단순 무식하고 과격하던 카리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필요했다.

"좀 더 작고 왜소한 골격으로. 타락하고 음험한 마법사,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는 야비함까지 가진 리치여야 해."

위드는 불평을 쏟아 냈다.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군. 선하게만 살아온 나로서는 조각하기 힘든 대상이 너무 많아."

조각칼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리치의 모습이 점점 드러난다.
손가락 뼈 마디마디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 간교한 음모를 꾸밀 것 같은 해골의 얄팍한 뒤통수!
텅 빈 동공은 위아래로 좁았다.
째진 눈의 특징까지 조각하면서 리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복원해 냈다.
리치 샤이어와 매우 흡사한 생김새. 하지만 간교함이 주는 느낌은 훨씬 배가되어 있었다.
비열하게 썩은 이빨을 보이며 웃을 것 같은 해골 머리!

"아니야. 부족해. 굉장히 오랜 시간을 살았던 리치니까 뼈에 폼 나는 균열 정도는 있어야 어울리지."

보기 좋게 갈라져서 금이 간 해골.
구멍 난 자국도 만들어 주었다.

"훨씬 똑똑해 보이는군."

이마에는 쿠르소에서 퀘스트의 대가로 획득한 광산에서 캐낸 루비를 박았다.
조금 있어 보이는 해골, 리치의 탄생!

띠링!

-만드신 조각품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리치 샤... 아니야. 음."

위드는 심사숙고해서 이름을 지었다.

"바다에서 강할 것 같은 이름으로... 카리취에 꿀리지 않는 훌륭한 이름을 지어야 돼."

오크 카리취의 강력한 카리스마!
위드는 스스로 카리취라는 이름을 매우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성과 품위가 있어야 한다.

"일단 조각품의 이름은 애꾸눈 리치!"

-만드신 조각품은 애꾸눈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름을 그대로 하시겠습니까?

위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 바다에서는 무조건 애꾸눈이야."

『걸작! 애꾸눈 리치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암흑에 영혼을 판 리치 마법사!
숨이 막힐 정도로 놀라운 조각상을 만들었던 조각사의 새로운 작품이다.
과거 베르사 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던 리치 샤이어를 그대로 닮았다.
혐오스러운 리치를 조각한 것으로, 예술품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어렵다.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재능이 충만한 조각사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되는 작품.
예술적 가치 : 269.
특수 옵션 : 애꾸눈 리치 조각상을 바로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11% 증가한다.
지식과 지혜 20 상승.
민첩 10 증가.
힘 75 감소.
마법 발현 속도를 5% 빠르게 함.
언데드들에 대한 지배력이 3% 증가함.
다른 조각품과 중복 족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걸작의 숫자 : 86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12 올랐습니다.
-투지가 1 상승하셨습니다.
-지식이 2 상승하셨습니다.

"성공이군!

걸작 조각품의 탄생!
위드의 용무는 조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각술의 비술을 쓸 시간인 것이다.

"조각 변신술!"

-조각 변신술을 사용합니다.

위드의 키가 아주 약간 작아지고, 머리카락이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대머리가 되고 몸은 앙상하게 마르더
니 살점들이 떨어져 나갔다.
해골, 그것도 리치로 변신한 위드!

-몸의 형태가 바뀌면서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의 상당수가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스릴이나 신성력이 들어간 장비들을 모두 입으실 수 없습니다.
종족이나 형태에 따라 필요한 장비를 새로 구하십시오.
-조각 변신술의 영향으로 지식과 지혜가 매우 높게 증가합니다.
힘과 민첩이 많이 감소하고, 예술 스탯이 삼분의 일로 줄어듭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대폭 늘어납니다.
체력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조각품에 대한 이해 스킬이 고급 3 레벨이라서 완전한 리치로의 변신은 되지 않았습니다.
리치 전용의 생명력 흡수와 마나 흡수의 효율을 20% 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햇빛을 보면
생명력과 마나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성력이 더욱 치명적으로 나쁘게 적용됩니다.
조각 변신술이 풀릴 때까지 유효합니다.

장비들을 바꾸는 것도 간단했다.
리치가 되고 난 이후에는 성자의 지팡이가 타락한 성자의 지팡이로 변혔다.
흑마법, 그리고 언데드를 위한 전용 아이템!
오른쪽 뼈 팔에는 성자의 지팡이를, 왼쪽 뼈 팔에는 네크로맨서의 마법서를 들었다.

"킬킬킬."

위드는 까맣게 썩은 이빨로 웃었다.
턱을 달그락대면서 웃는 파렴치한 리치의 꼴!
엠비뉴 교단의 마법사가 착용했던 로브를 입고 뱀파이어의 망토를 둘렀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성물인 안식의 동판, 언데드를 특별하게 강화해 주는 아이템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내구도가 3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드는 검은색 천으로 한쪽 눈을 가리며 말했다.

"이름은 플런더럴이라고 해야겠어."

약탈자라는 이름!
위드가 리치로 변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줄여서 더럴이라고 하면 매우 좋군. 왠지 더럽고 치사하다는 느낌이, 제대로 해적이야!"

음머어어어어,
와일이의 등에 타고 와서 이 모든 행각을 지켜보고 있던 누렁이가 길게 울었다.
차마 주인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서글픈 울음.
와일이가 날개로 감싸 주었다.

"괜찮아. 알고 보면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는 사람이야."

음머, 음머어어어.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바닷가로 걸어가니 비바람이 몰아쳤다. 앙상한 해골에 불과한 몸에 빗물이 튀었다.
로브와 망토가 빗물에 젖었지만 언데드, 그것도 리치로 변한 이상 감기나 피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위드는 타락한 성자의 지팡이를 내밀었다.

"패스트 워터 워크."

물 위로 걸을 수 있는 마법!
네크로맨서의 마법서에 적혀 있는 몇 개 안 되는 기초 마법이었다.
파도 위를 걸어서 전진하는 해골의 모습.
몸이 가벼워서 마나 소모도 얼마 안 되었다.

"스탯 창."

『캐릭터 이름 : 위드 성향 : 언데드
레벨 : 368 직업 : 리치
생명력 : 113,480 마나 : 197,964
힘 : 185 민첩 : 361
체력 : 무한
지혜 : 1,463 지력 : 1,128
투지 : 479 지구력 : 무한
인내력 : 695 맷집 : 419
통솔력 : 672 죄의식 : 388
매력 : 210
*생명력 흡수, 마나 흡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데드 지휘 능력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신성 마법에 최악의 취약성을 보입니다.
*걸작 조각품으로 인하여 3%의 추가적인 스탯을 얻었습니다.

위드의 마나는 충분히 많았다.

"바다에서 지쳐서 죽을 일은 없겠군."

황금새는 길을 인도해 주지 않고 와이번들과 함께 해안가에 남았다.
귀하게 자란 황금새에게 비바람과 천둥 벼락을 뚫고 날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
위드는 유령선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100년쯤은 된 것 같은 오래된 선체. 선원 유령들이 키를 두세 바퀴씩 제멋대로 돌리고, 있지도 않은
돛을 조절하고 있다.

우리는 크레이라의 선원들
아침저녁으로 럼주를 마시지
술에 취해 있으면 고향이 그립지 않아
말썽 많은 선장은 무인도에 던져 버리세

선원들의 노랫소리도 들렸다.
파도 소리와 매우 잘 어울리는 남자들의 목소리였다.
유령선은 크게 출렁이면서도, 배치고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반 선박과는 다르게, 유령선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몬스터라는 소문도 있었다.
위드가 선체로 다가가자 사다리가 떨어졌다. 망루에서부터 접근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드는 밧줄을 잡고 선체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조각했던 애꾸눈 리치상의 결정적인 오류를 알아차렸다.

"저는 부선장 니크입니다. 리치 마법사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부선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선원 유령!
언데드들은 리치를 지극히 존경하고 따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라, 그의 왼쪽 팔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선장의 왼쪽 팔에는 대신 쇠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애꾸눈과 더불어 외팔이야말로 해적의 영원한 로망이었다.



모라타에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기 직전이었다.
파보가 주민들과 초보자들과 함께 건설한 예술 회관!
2,000평도 더 되는 넓은 정원에는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모라타의 조각사들이 영주에게 헌납한 예술품들이다.
꽃과 나무 들도 높은 곳에서 보면 자신들의 색채로 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다. 푸른 아이스 드래곤에 앉아 있는 위드
의 모습이다.
벽에는 모라타의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벽화로 남았다.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기에, 지금의 모습이 나중에는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란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드디어 완성이다."

파보는 설레는 마음으로 현판을 달았다.

위드의 예술 회관

대략 2년 전부터 지금도 살아 있음.
아마 몇 번은 죽었음.
모라타의 영주.
베르사 대륙의 조각술계에 신기원을 새김.
모두가 외면하던 조각술, 엄청난 노가다로 스킬 숙련도를
향상시키고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프레야 여신상을 비롯하여 빛의 탑, 루의 신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
통곡의 강에서 원혼들을 위로하는 조각품들을 세움.
베르사 대륙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조각술이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움.
이 예술 회관은 건축가 파보가 친구들과, 위드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서 헌납함.

설명까지 쓰여 있는 현판을 다는 순간, 파보의 건축 레벨이 2단계나 높아졌다. 모라타의 공헌도나 주민들과의 친밀
도, 명성 등도 상승했다.
도시에도 긍정적인 현상이 생겼다.

-모라타의 문화 발전도가 오릅니다.
예술 발전 속도가 3% 증가합니다.
문화적인 경계가 더욱 팽창합니다.
지역 명성이 15 오르고, 예술 회관이 대표적 건물로 지정됩니다.
-모라타 주민들의 예술과 지식 전반에 대한 열기를 높입니다. 마법사와 예술가의 탄생
확률을 높입니다.

건축물로 소속 마을을 발전시킨다.

"드디어......"

파보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아직 예술 회관의 문은 굳게 닫아 놓았다.
위드의 이름을 붙이지 않은 조각품, 미완의 전설적인 조각품이 공개되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직 문을 열 때가 아니었다.
리튼 왕국에 사람을 보내서 만돌과 그의 아내를 초대한 이후에야 예술 회관의 문이 열리게 되리라.

"나도 건축가로서 어느 정도 베풀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파보는 그의 친구인 화가 가스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공사비를 올려 받기 위해서 꼼수를 쓰거나, 불필요한 옵션들을 팔아먹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 나
도 보통의 건축가이니 말일세. 그런데 겨우 1쿠퍼를 받기 위해서 이렇게 공을 들여서 예술품을 만드
나? 조각사들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렵군."

가스톤이 말없이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화가인 그로서도 초상화를 좀 더 예쁘게 그려서 팁을 바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위드가 특별한 거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라네."
"그렇지.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치졸한 궁수 페일인가?"
"사제복 입고 못된 짓만 한다는 이리엔?"
"어린아이를 통째로 구웠다는 나쁜 마법사 로뮤나가 아닌가!"

토둠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악명으로 인해 페일과 동료들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나빴다.

"이까짓 일을 맡겼는데 무슨 보상을 200골드나 달라고 하는가? 원래의 약속은 그랬지만 30골드만 받아
주게."
"의뢰를 이렇게 빨리 끝내다니 믿을 수가 없구만. 분명히 어떤 속임수를 쓴 것이겠지? 파단의 홀을 주
기로 했지만 마음이 바뀌어서 안 주겠네!"

그래도 악독한 주민들에게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퀘스트를 하면서 명성을 복구하고 친밀도를 올린 후에, 이제는 난
이도가 제법 높은 의뢰도 할 수 있었다.
페일과 일행이 무기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이리엔이 밝게 웃었다.

"손님들이 많이 늘어났군요. 장사가 잘되니 좋으시겠어요."
"몬스터와 싸울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지. 북부에도 어린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무슨 일로 왔나?"
"맡기실 일이 있을까 해서 왔어요."

모라타에는 무기점도 다섯 곳으로 늘었다.
매달 들어오는 세금 수입의 일정 비율을 자동으로 재투자하면서 세 곳이 증가했고, 두 곳은 상인들이 직적 세웠다.
무기의 공급까지 함께하면 이문이 상당히 크다.
마판도 많은 무기들을 공급하면서 욕심을 낸 분야이지만, 지속적으로 무기류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손을 떼었다.
대장간까지 함께 운영하면서 원료를 구해 와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큰 상단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페일 일행이 방문한 무기점은, 가장 먼저 모라타에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우리 모라타를 지켜 준 은인들에게는 항상 부탁할 일이 있지. 요즘에 무기들이 많이 부족한데......"

무기점 상점 주인의 말에 페일과 다른 일행은 가만히 서서 듣기만 했다.

'별다른 퀘스트는 없나 보구나.'

무기 조달 퀘스트는 사냥을 통해서 얻거나 혹은 구입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 초보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무기가 필요하다는 의뢰가 끊이지 않았다. 고블린 등을 사냥해서 얻은 무기라도 수
량만 맞춰서 납품하면 되고, 광장에서 웃돈을 얹어 주고 유저들로부터 구입해서 무기점 주인에게 줄 수도 있었다.
명성을 위해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흔한 의뢰였다.

"예전 니플하임 제국 시절에는 굉장히 유명한 무기 장인의 가문이 있었는데 말이야."
"네?"
"기사들의 무구를 모두 그 가문에서 만들었지."

고급 퀘스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무기점 주인의 설명.
이리엔의 눈이 반짝였다.

"주인 오빠, 그 가문의 이름이 뭐예요?"

순진하던 이리엔이었지만, 퀘스트를 위해서는 조금의 애교와 관심이 감초처럼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비테오르 가문이었지. 제국이 몰락하면서 그 이름을 다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후손이라도 어
디 남아 있지 않을까? 비테오르 가문이 있다면 무기의 물량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띠링!

『명장의 가문
기사들의 검을 전문적으로 제작했던 니플하임 제국의 장인 가문인 비테오르 가문에
대해 수소문을 해 보고 살아 있는 자손을 무기점 주인에게 데려와라.
난이도 : B
퀘스트 제한 : 비테오르 가문의 후예들이 사망하면 실패.

드디어 페일 일행에게도 난이도 B급의 의뢰가 떴다.
보통 유저들에 비하면 빠른 진전이었다.
위드를 따라서도 퀘스트를 하고, 모라타 방어전에 참여하면서 주민들과의 친밀도가 높아진 덕분이었다.
페일과 로뮤나, 이리엔, 메이런 등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할까?'
'하자.'
'실패하더라도 재미있을 것 같아.'

메이런은 특히 어려운 난이도의 퀘스트를 직접 할 수 있다는 데에 몸이 달아 있었다.
페일이 대표로 말했다.

"그들을 저희가 찾아와도 될까요?"
"그래 주겠나? 하지만 원래 제국의 수도였던 모드레드 근처는 지금은 몬스터들의 천국이라는 소문이
있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가게나.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내 의뢰라면 서로 들어주려고 하지
않을까?"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페일과 일행은 모두 '명장의 가문' 퀘스트를 받았다.
이 퀘스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도 해 줄 수 있는 의뢰였다.

"우리끼리는 조금 불안한데......"
"위드 님을 데려갈까요?"

니플하임 제국의 수도였던 모드레드라면 사냥터로는 충분할 것이라는 계산.
명성이 높은 위드라면 여러 다른 퀘스트들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리엔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위드 님은 3개의 퀘스트를 다 하고 계실 거예요."

S급 난이도의 연계 퀘스트, 마탈로스트 교단의 퀘스트 그리고 로자임 왕국의 시녀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퀘스트까지
마탈로스트 교단의 퀘스트는 다른 이들이 대신하고 있었고, 거의 끝부분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럼 검치 오빠들을 꼬여요."

수르카의 말에 반대의 뜻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검치들이 같다면 든든하기 짝이 없다.
설득은 화령이 맡았다.

"같이 퀘스트 하실래요?"

검치와 검둘치는 유로키나 산맥에서 연애를 하는 중이라서 검삼치가 대표였다.
검삼치는 모라타에 있는 초보자들을 놔두고 먼 길을 떠나는 게 마땅치 않았다. 풋풋한 초보자들을 보면서 작은 도움
이라도 주고, 수련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맛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바쁘......"
"이효정 아시죠?"
"탤런트?"

이효정은 최근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을 맡아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선한 인상에 귀엽고 씩씩하기까지 해
서 남자들이 싫어할 수 없는 배우였다.

"저랑 친구인데 직업이 바드예요. 효정이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랑 같이 사냥을 하러 갈 수 있다니......"
"바쁘지 않으세요?"
"꼭 같이 가겠다."

세계적인 인지도나 외모, 음반 판매에 이르기까지 화령에게는 비교도 안 된다. 하지만 검치 들에게 화령은 엄청 예
쁜 여자일 뿐, 가수라는 사실도 말을 하고 나서야 알 정도로 음악에는 무관심했다.
그런데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이효정이라니!
오로지 여자 배우를 보기 위해서 검치 들은 의기투합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모라타에서 일단 모인 그들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모드레드로 출발했다.
마판도 교역용 마차들을 끌고 합류해 있었다.
상인들은 레벨이 오를 때마다 살이 찐다. 넉넉한 체격이야말로 고레벨 상인이라는 증명이나 다름이 없다.
마판의 뱃살도 많이 늘어서, 뒤뚱거리면서 뛰어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 위드 님한테 들렀다 가지 않을래요?"

모라타를 나오자 화령이 갑자기 제안을 했다.

"모드레드에 가도 사냥을 할 거잖아요. 위드 님 있는 곳에 잠깐 들러 봐요."
"그럴까요?"

다른 일행도 위드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
그들은 위드가 있다는 해안가까지 이동했다.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며칠 야영은 했지만 무난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드가 와이번을 보내서 길을 안내해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폭풍이 치는 해안가!
빙룡과 불사조, 늦게 달려온 킹 히드라, 이무기, 와이번들이 숲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저들이 거의 없었기에 대놓고 사냥을 했다. 하지만 위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화령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위드 님은 어디에 계시죠?"

페일은 궁수라서 시력이 매우 좋은 편이다. 먼 거리에 있는 것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저도 못 찾겠는데, 어디에 있는지 귓속말이라도 보내 볼까요?"

그때였다.
넘실거리는 파도, 폭풍이 치고 있는 바닷가에서 선박들이 다가온다.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보이는 7척의 중형 범선!
메이런이 소리쳤다.

"배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활짝 펼쳐진 찢어진 돛, 갑판이나 선체에는 커다란 구멍들이 뚫려 있다.
파도를 뚫고 해안가로 다가오는 유령선들.
갑판에는 유령 선원들과 칼잡이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뱃머리 부분에는 애꾸눈 리치 위드, 아니 더럴이 서 있었다.
유령 함대의 함장!
바람이 불 때마다 망토가 찢어질 듯이 펄럭인다.
그리고 리치의 어깨에는 황금새가 앉아서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캡틴 더럴>





유령선의 방문자였던 위드가 어렵지 않게 부선장을 누르고 새로운 선장이 될 수 있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부선장과의 가벼운 검술 대결로 충분했다.

-유령선 마리아스호의 선장이 되셨습니다.
-네미비아해를 누비는 유령선의 선장에 취임했습니다.
-특별한 경험으로 통솔력이 7 오릅니다.
카리스마가 14 오릅니다.

"원래 선장은 어디에 있나?"

위드가 턱뼈를 달그락대면서 물었을 때, 니크의 대답이 일품이었다.

"80년쯤 전에 무인도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마 굶어 죽었을 겁니다. 킬킬킬!"

선장이 되고 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유령선의 무수히 많은 퀘스트!

보물을 찾아라
다른 배를 습격하라
큰 바다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배
돌고래 사냥

위드는 안타깝게도 퀘스트를 3개 모두 받은 상태라서 진행할 수 없었다.
전투나 퀘스트를 통해서 유령선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유령선 정보 확인."

『유령선 마리아스
트리어 항구에서 페세이다 가문의 의뢰를 받아 조선 장인 타르넨이 만듦.
중형 범선으로, 물자의 교역을 위해서 만들어진 상선.
바다에 나선 이후로 매년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음.
재앙과 불운을 상징하는 배가 되어 7년째 되는 해 선주가 팔아 버림.
범죄자들과 해적 출신 선원들이 밀무역을 위한 배로 사용하다가 9년째 되는 해의
여름에 폭풍에 휘말려 가라앉음.
바다에서 죽은 선원들의 안식처가 되었음.
속도 3-5.
선원수 35명. 모두 죽어 있음.
대포 42문. 고장 39문.
적재 공간 36/298.
선체 내구도 350/1,390.
돛 0/6.
바람 -49. 파도 -27
메인 돛을 비롯한 모든 돛이 제대로 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해초들이 엉켜 있어서 속도가 느립니다.
선체에 치명적인 구멍이 나 있고, 목재가 뒤틀려 있습니다. 하지만 유령선의
상황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다의 불운을 몰고 다닙니다.

위드는 근처의 바다에서 6척의 유령선을 더 지배 아래에 두었다.
인간에게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유령선이었지만 언데드였기에 어렵지 않게 유령 함대의 함장까지 될 수 있었다.
조각 변신술,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힘 등을 가지고 있는 위드가 아니라면 아직 다른 유저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 일 것이다.

"약탈을 하고 싶나?"
"우오오오오."
"빼앗고 싶다면 나를 따르라!"
"캡틴 플런더럴 만세!"
"나를 더럴이라고 불러도 된다."
"더럴, 더럴, 더럴!"

유령 선원들은 위드의 카리스마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조타나 돛을 조종하는 기술은 없었기에 부함장에게 맡겨야 했다.
그러고 나서 페일 일행과 검치 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해안가로 돌아온 것이다.
해골이 애꾸눈을 하고, 멀쩡한 뼈가 있는 왼쪽 팔에는 갈고리까지 부착한 채!
마판이 부담스럽게 눈을 빛냈다.

"역시 위드 님!"

교역으로만 돈을 벌려고 했던 아둔한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또다시 새로운 도전 과제를 던져 준다.
유령선들을 이끌고 다니는 해적 선장 더럴!

"위드 님에게 더 열심히 배워야겠군."

페일이나 이리엔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해적이라... 어울려. 완전히 천직이야.'
'동료라고 어디 가서 밝히기가 가끔 부끄러울 때가......'

검치 들은 부러워했다.

"네가 유령선의 선장이라니... 크게 출세했구나."
"해적 더럴이라. 성공했군."

바다를 누리는 해적의 꿈. 일반 배도 아닌 유령선이라 더욱 환상적이다.



위드가 유령선을 끌고 다시 바다로 나갈 때에는 페일 일행이나 검치 들이 모두 배에 탔다.
퀘스트를 조금 미루더라도 이쪽이 훨씬 더 재밌게 느껴졌던 것.
다인도 배에 타면서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서로 가볍게 인사만 했을 뿐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다인은 그저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바라고, 위드는 그녀가 알은척을 해 주지 않아서 섭섭함을 느꼈던 것이다.
출항을 하고 바다로 나서니 거짓말처럼 날이 맑아졌다.
갈매기들과 돌고래들이 따라다니고, 부함장이 키를 돌릴 때마다 배가 방향을 틀었다.
유령선과 유령 선원들이 있으니 비싼 요트도 부럽지 않다.
제피는 낚싯대를 꺼냈다.

"바다낚시라... 고래라도 1마리 낚을 수 있으려나."

낚시꾼답게 자리를 잡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위드도 낚시 스킬이라도 올리기 위해서 옆에서 작업에 동참했다.

"물고기를 낚으면 매운탕이라도 해 먹어야겠군."
"위드 형님, 유령선은 선원들을 먹이지 않아도 되니 좋겠어요."
"사기를 유지하려면 술은 마시게 해 줘야 되더군."

검치 들은 갑판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바다로 뛰어들어서 수영을 하면서 따라왔다.
유령선은 그리 빠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놀이였다.

"검백이십칠치야, 수영하니 시원하냐?"
"개운합니다!"
"좀 더 스릴 있게 해 봐."
"그럴까요?"

칼로 옆구리를 그으면서 자해!
피를 흘리면서 수영을 하자 식인 상어들이 쫓아왔다.

"재밌겠군."

그 모습을 보고 검치 들이 바다에 풍덩거리면서 뛰어들었다.
파도에 직각으로 서 있는 상어의 지느러미들을 보면서 수영하는 기분!
뒤쳐지면 상어 밥이 될 뿐이었다.

"무슨 이런 사람들이 다 있지?"

화령의 친구인 벨로트는 당혹스러웠다.
해적을 꿈꾸는 리치에, 대책 없는 남자들과 함께 타고 있는 것은 다 쓰러져 가는 유령선이라니.

"아가씨, 몸에 좋은 우유입니다."

다리 한쪽이 없는 유령 선원이 다가와서 3년은 된 것 같은 썩은 우유를 내민다.
베르사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기는 힘든 모험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화령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금방 적응될 거야."
"응?"
"이렇게 놀면 의외로 재밌어."

화령도 일광욕을 즐긴다면서 갑판에 드러누웠다.
댄서의 화려한 드레스도 벗고, 가벼운 속옷에 짧은 앞치마를 덧입은 정도였다.

"아, 저도 살 좀 태우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네."

메이런이나 수르카, 이리엔, 로뮤나도 옆자리에 누웠다.
여기에서는 남자들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유령 선원들은 제각각 맡은 임무를 하느라 바쁘고, 검치들은 수줍어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색해진 수련생들 몇 명은 객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사냥이나 해 볼까?"

유령선 객실 탐험!
원래 바다에 돌아다니는 유령선은 인간들이 탄 배를 습격한다.
난파나 조난을 당한 배들에게 서서히 접근하는 유령선이란 숨이 막힐 정도의 공포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객실에도 포획한 몬스터들이나 함정들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위드나 검치 들과 있으면 딱히 걱정되거나 심각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불쌍하게 여겨질 뿐!

"술이다!"
"진탕 마셔 보자. 회에 럼주라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검치 들 몇몇은 이미 선창 아래까지 내려가서 유령 선원들이 아껴 놨던 럼주까지 꺼내 마시고 있었다.
고위급 언데드인 리치, 그리고 위드의 카리스마와 지배력이 엄청나서 유령 선원들은 불만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선원들은 충성도가 낮아져서 선장을 무인도에 버리거나 바다에 빠뜨리기 전까지는 말을 잘 들었다.
위드는 낚시를 하다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부선장."
"예, 함장님."

지금은 유령 함대를 이끌고 있었기에 니크는 깍듯하게 위드를 함장이라고 불렀다.

"이 부근에 다른 배는 없나?"

선박 운송은 보통 강이나 바다에서 이루어지는데, 북부의 바다에는 교역 물자를 실은 선박들이 없었다.
눈에 띄는 배들은 기껏해야 작은 어선들 정도!
레벨이 20도 되지 않는 어부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잡템까지 털어 봐야 구멍 난 그물과 물고기 몇 마리밖에는 안 나올 테니까.

"지도상으로 여기서 조금만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네리아 해가 나오기는 하죠. 그곳에는 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드가 해도를 펼쳤다.
유령선의 선장실에 걸려 있던 오래전의 바다 지도를 이미 챙겨 두었던 것이다.
각 도시의 현재 발전 상태나 항구의 시설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형은 파악할 수 있었다.
북동쪽에 있는 큰 바다의 이름이, 플라네티스해.
네리아해는 중앙 대륙 쪽으로 넓고 깊게 이어져 있는 안쪽 바다였다.
유럽의 지중해처럼 바다가 중앙 대륙에 있는 여러 왕국의 국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네리아해에는 교역선들과 상선, 해적선들이 득시글득시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리라.

"사냥감이 많겠군."
"그렇습니다."
"해적이라... 후후후."

위드가 급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해골의 턱뼈가 빠질 정도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네리아해로 가자."
"알겠습니다, 함장님!"

유령 선원들이 수신호를 보내면서 유령선들이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살을 가르면서 몰려다니는 유령선.
위드는 근처의 섬에서 나흘간 정박했다.
무인도에도 많은 짐승들과 사냥감, 바다 괴물들이 있었다.
물과 음식을 보충하고 대장장이 스킬을 이용해서 대포를 수리했다.
나무를 캐서 선체도 손보고, 사냥감들의 가죽을 이용해서 바람을 잘 받을 수 있는 돛을 달았다.
조각술 스킬을 활용해서 애꾸눈에 외팔, 외다리의 해적 선수상까지 만들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 허수아비 해적 같은 몰골이었지만 배의 형상을 고려하면 더없이 잘 어울렸다.

"유령선 정보 확인."

『유령선 마리아스
트리어 항구에서 페세이다 가문의 의뢰를 받아 조선 장인 타르넨이 만듦.
중형 범선으로, 물자의 교역을 위해서 만들어진 상선.
바다에 나선 이후로 매년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음.
재앙과 불운을 상징하는 배가 되어 7년째 되는 해 선주가 팔아 버림.
범죄자들과 해적 출신 선원들이 밀무역을 위한 배로 사용하다가 9년째 되는 해의 여
름에 폭풍에 의해 가라앉음.
바다에서 죽은 선원들의 안식처가 되었음.
속도 11-19.
선원수 35명. 모두 죽어 있음.
대포 42문. 고장 6문.
적재 공간 66/298.
선체 내구도 965/1,390.
돛 6/6.
바람 -16. 파도 6.
선체의 뒤틀림이 남아 있어서, 최고 속도로 올릴 경우 키가 제멋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바다의 불운을 몰고 다닙니다.
선수상의 효과로 인해 모든 해상국들과의 적대도가 +20이 됩니다.
해적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운항 중에 부상이 발생할 활률을 조금 줄여 줍니다.

마리아스호뿐만이 아니라 안달레아호, 스피너호 등 함대 전체에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조선 장인들만 손볼 수 있는 용골 등을 제외하고 수리할 수 있는 부분은 전부 고친 후에 네리아해로 들어갔다.
수르카와 메이런, 이리엔, 페일의 조용한 대화.

"그런데 우리 퀘스트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유령선을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는 것도 재밌잖아요."
"토둠에서처럼 또 악명만 잔뜩 쌓이는 건 아니겠죠?"
"어쩌면 그럴지도......"

잘못 사귄 친구 때문에 온갖 퀘스트에 다 끼어들게 되는 그들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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