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마켓

추리소설모음 6

3학년2반 | 2022.01.29 07:33:00 댓글: 0 조회: 14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806


여체의 단위에서 무너지는 사나이

- 모리무라 세이이찌 -


- 1 -


"내일은 몇 사람이나 나와요?"
토요일 밤당번이 돌아갈 ㄳ,식당과장인 오오노가 급사장인 마쓰바라 이사무에게
물었다.
"오늘 밤부터 내일 새벽 스탠바이가 셋,아침번이 넷 출근합니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오늘 밤 숙박하는 손님이 많아.그만한 사람만으로
괜찮을까?"
오오노는 불안스러운 표정이 되었다.숙박하는 손님의 수에 비례해서
아침 식사를 하는 손님의 수는 늘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괜찮을 겁니다.배선협회에서 몇 사람 도와주게 되어 있읍니다."
"그런가.내일은 난 쉬는 날이니까.잘 부탁하네."
오오노는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소심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 놓은 얼굴로
마쓰바라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두었다.

그 두 사람의 주고 받는 대화를 일부러 들으려고 하는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듣고 있었던 것은 대기조에 인계를 하고 있던 쓰네미 쇼오지이다.
언제나 의례히 그랬지만 마음 속으로부터 쓸쓸함과 텅 빈 것같은 공허함이 치밀어
오르게 하는 말이었다.
과장은 언제나 누구와 누가 출근하느냐고 물은 일은 절대로 없다.
'몇 사람이 나오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아니 호텔로서 필요한 것은 사람의 머리수이지
어느 개인이 아니었다.
쓰네미를 비롯하여 식당의 직원들은 특정된 개인으로서의 능력이나 인격이나 개성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것이 아니라,어떤 사람에게도 대용될 수 있는 `노동력의
단위`로서 머리 수를 세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다.하나의 사람으로서 다루어달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도 현실에 있어서는,쓰네미가 쉬더라도 다른 사람을 한 사람
그가 빠진 뒷자리에 앉히면 조금도 곤란하지 않다.그리고 결근한 사람이나
공휴로 쉬는 사람이 많을 때에는 그렇게 해서 인원 수를 조정하고 있다.
(쓰네미 쇼오지가 없으면 곤란해.내가 없으면 회사가 되지 않아.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그런 지위에 나를 놓아보고 싶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했으나,지금 현실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 호텔이라는 기업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아니 톱니바퀴라면 그래도 괜찮다.

한 개나 두 개쯤 빠져 버리거나 부러진다 해도 전체의 움직임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는 나사못이나 핀과 같은 것이었다.
하다못해 머리수가 아니라 이름에 의해 윗사람에게 요구되고 싶다는 것이
쓰네미의 보잘 것 없는 소망이었다.

쓰네미는 시부야에 새로이 생긴 <시부야 프라자호텔>에 식당 급사로
근무하고 있다.
도오꾜 서쪽 교외에 노선망을 갖는 어떤 사설철도가 자본을 내어서 건설한
지상 20층을 보유하고 있는,객실만도 1천개나 되는 맘모스호텔이다.
하루의 근무를 끝내고 시부야역의 어떤 낮은 지대를 향해 언덕길을 내려갈 때
근무시간과 계절에 의해 극히 드물지만,저녁 햇빛이 정면으로 비치는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게 되는 일이 있다.지평선이라야 수많은 빌딩이 그려내는
기하학적 무늬지만,저녁 햇빛으로 피로 물들은 것처럼 쑥쑥 솟아있는 빌딩이
만들어 놓은 하늘의 윤곽선은,대도회의 인공미와 자연미가 하나로 합쳐서 만들어낸
일종의 처참한 아름다움을 보는 눈에 호소하는 듯 했다.

그럴 때 쓰네미는 하루를 확실히 낭비한 사람의 공허함을 느꼈다.
하루의 근무를 끝내고 돌아간다는 충실감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오늘이라는 인생속에서 절대로 되풀이할 수 없는 귀중한 하루를 쓸데없이
낭비해 버린 사람의 허탈감 뿐이었다.
그는 곧잘 그 저녁해를 보면서 오늘 하루에 한 일을 돌이켜 보곤 한다.
몇 십통이나 되는 전화를 받고 몇 십명인가의 손님을 접대했다.그리고
종업원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며 세 번인지 네 번인지 화장실에 갔다.
다만 그것뿐이다.출근했다가 퇴근할 때까지의 사이에 아무것도
자신을 만들어낸 것이 없다.
(내 일에는 자신을 살찌게 하는 요소가 없다.)
그것은 급료가 싸다거나 노동 환경이 나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좀더 인생의
본질적인 것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쓰네미는 노동력의 한 단위로서가 아니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일거리가 있다면 급료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일거리를 찾아 호텔 업계를 오늘날까지 여러 해 동안 돌아다녔지만
끝내 자신이 찾는 것은 얻을 수 없었다.
얻을 수 없었던 것만이 아니다.그는 무기력해졌다.
이 업계에서는 구하는 것이 없다면 다른 분야로 옮겨서 찾아야겠다는 기력이
없어져 버렸다.요컨대 귀찮아지고 만 것이다.
다만 확실히 공허함만은 느꼈다.인생을 출혈하고 있는 자의 공허함이다.
저녁 해를 향해 집으로 돌아올 때 빨갛게 물들은 저녁 노을이
자기의 잃어버려진 하루의 출혈로 물들어 있는 것걋 생각되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 보는 저녁 해에는 아직도 구원이 있었다.어찌되었거나
이제부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자유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밤번근무를 하러 갈 때 저녁 해에 등을 보이고 걸어가면
자신을 죽이러 가는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최근의 구원으로서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길듯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그의 공허한 마음을 근본적으로 채워주지는 못했다.
(나의 이 가슴 밑바닥을 도려낸 것 같은 공허함을 채워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쓰네미는 떨어지는 저녁 해를 향해 이렇게 중얼거리는 일이 있었다.



- 2 -

"객실계 책임자에게 곧 내 방으로 오라고 말해 주어요!"
사장의 셋째 딸인 와끼무라 마스미에게서 신경질적인 내선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후 5시쯤이다.
떠나야 할 손님은 떠나고 대부분의 객실은 정돈이 끝나서 이제부터 저녁이라도
먹으러 갈까하는 참이었는데,심상치않은 목소리로 불리운 객실계원인
곤다 노부꼬는 -무슨 일이 있었구나-라고 직감하고 허둥지둥 마스미가 거실로
쓰고 있는 1521호실로 달려갔다.
마스미는 이 호텔을 처음 지은 사람이며 전철의 회장인 와끼무라 야스자에몬의 집을

다시 고쳐 짓는 중이어서,시끄럽고 귀찮다는 이유로 그녀만이 이 호텔에 방을 잡고
재학중인 어떤 명문 사립 여자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얼굴 생김새가 윤곽이 또렷해서 현대적인 미모를 지녔지만,남들이 소중하게
다루어주어 자란 사람은 성격이 교만하고 다른사람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이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이 호텔에 온 뒤에도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다는 것으로,종업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하인처럼 보이는 모양으로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한층 더 나쁜 것은,할아버지인 야스자에몬도 아버지인 세이다로도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하여 어린양을 하는대로 내버려두어 마음대로 하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스미는 응석받이이며 말괄량이인채로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종업원들은 화가 나지만 아무리 뭐라한대도,호텔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있는
와끼무라일족의 딸이기 때문에 마치 종기라도 건드리는 것처럼 조심조심 다룬다.
그것이 더욱 더 마스미를 멋대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달려온 곤다 노부꼬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가까스로 물었다.
"무슨 일이 다 뭐야! 도대체 이 방은 어떻게 된 거지?"
마스미는 자기의 어머니쯤은 됨직한 나이든 곤다 노부꼬에게 덤벼들듯이 말했다.
"예?"
"없어졌잖아! 내 반지 말야! 너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어?"
마스미는 발을 동동 구른다.자기가 이토록 화가 나 있는데,곤다 노부꼬가
맹한 얼굴로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것이 답답하고 속이 상했던 것이다.
"저어 매우 죄송합니다만,그 반지를 잃어버리셨다는 것은 언제 일입니까?"
한참만에야 사정을 이해한 곤다 노부꼬가 물었다.우수한 접객업자는
손님으로부터 불평이 쏟아져 나올때에는 우선 `언제 일인가`를 묻는 법이다.
잠자코 들어보면 거의 1년 전에 벌어졌던 싸움질이 다시 재연되는 수도 가끔 있다.
"지금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오늘 아침에 틀림없이 있었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잖아!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 주신 거란 말야.
2캐럿 짜리 그린 다이아몬드여서 백만엥이나 준거였어..... 그건."
곤다 노부꼬는 그 비싼 값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백만엥이라면 그녀가
1년을 벌어도 만져보기 힘들은 금액이다.그만한 돈을 모으려고 생각한다면
10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마스미의 말대로 그런 비싼 반지가 방을 비웠던 사이에
없어졌다면,그야말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어,아가씨."
곤다 노부꼬는 딱딱한 것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넣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대체로 어디에 놓아두시는 겁니까?"
"저 나잇테이블 위야.어제밤에 잘 때 그 위에 놓은 채,오늘 아침에는 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학교에 갔었지 뭐야."
"그랬는데 돌아와 보셨을 때 없어졌더란 말씀입니까?"
"그렇다니까."
"저어 혹시 아가씨께서 깜박 잘못 생각하시고 어디든 다른 곳에 놓으셨다든가,
잘 넣어 두셨든가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곤다 노부꼬는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는
이러한 사건은 대개 손님이 잘못 알았다거나,깜박 잊었다거나 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그리고 손님은 귀중한 물건일수록 더욱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허둥대기부터 하는 것이다.
"실례잖아!"
순식간에 마스미의 눈썹이 꼿꼿이 섰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아?"
"원 천만에요 아가씨,절대로 아닙니다. 혹시나 아가씨꼐서 잘못....."
"난 그렇게 잘못 생각하거나 하지 않아요.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요? 분명히 어젯밤
이 테이블 위에 놓았어. 좋아,당신이 내 말을 안 믿는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철저하게 찾아달라고 할테니까."
마스미는 기고만장하게 으름장을 놓았다.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말하겠다는 것은
그녀의 입버릇이다.
그러나 곤다 노부꼬는 그전에 어떻게든지 안에서 일을 수습하고 싶었다.백만엥이나
나가는 반지를 잃어버렸다면,상대가 마스미가 아니더라도 중대한 책임문제가 된다.
객실계 책임자인 자신의 지위에도 당연히 영향이 미친다.
"아뭏든 아가씨,지금 당장 저희들의 힘으로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찾아 보겠읍니다.
오늘 이 방을 청소한 것은 다나시 도끼꼬였으니까,우선 다나시를 불러다가 사정을
물어보겠읍니다."
"빨리 해요.난 이러한 불쾌한 사건에 오래 휘말려 있고 싶지 않아요."
마스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루 근무를 끝내고 돌아갈 차비를 하던 참인데,느닷없이 사장 따님의 불리어 간
다나시 도끼꼬는 처음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재작년에 지방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호텔이 개업하는 것과 동시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줄곧 마스미의 방이 있는 15층에 배속되어 있다.
그녀의 지망은 프론트의 안내계였었지만,그곳은 대학을 나오고 영어가 아주 능통한
사람들만이 차지하고 있어 빈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객실계로 돌려졌던 것이다.
방의 정비와 손님들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해주고 그들의 편리를 보살피는
매우 단조로운 일자리였지만,1년이나 2년 뒤에는 프론트로 갈 수 있을거라는
인사과의 말을 듣고 그날을 고대하며 근무하고 있다.
조촐하고 별로 두드러져 나타나지 않는 생김새지만 매우 다정하고 무던해 보인다.
다정한 성품이기 때문에,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짓눌리어 겁에 질려 버린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마스미의 의혹에 가장 나쁜 형태로 영향을 주었다.

마스미는 처음부터 도끼꼬를 범인이라는듯한 눈으로 보고있었다.
"너야? 내 방을 청소한 건?"
"네.. 네."
도끼꼬가 말을 더듬자,얼른
"몇 시쯤이었지?"
"11시쯤이었읍니다만."
"그 때 이 나잇테이블 위에 뭔가 없었어?"
"글쎄요....."
도끼꼬는 막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마스미나 곤다 노부꼬의 태도로 보아 테이블 위에 귀중한 물건이 있었던 듯 하나,
그것이 자기와 어떤 관계를 갖고있는지 아직도 잘 알수 없었다.
"숨기지 말고 정직하게 말해주어.나도 되도록이면 조용하게 끝내고 싶으니까."
"전 도무지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요."
도끼꼬는 마스미가 변죽을 울리는 듯한 말투로 조용히 끝내겠다고 말한 뜻을
알고있지 못했다.
"잘 생각해봐.생각해내려면 지금 해야 해."
마스미의 어조는 이미 도끼꼬를 범인으로 정해버린 것처럼 고압적이었다.
"다나시 양.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마음을 조이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곤다 노부꼬가 보다못해
말참견을 했다.그녀도 설마 도끼꼬가 훔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싯가
백만엥이나 한다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았을 경우의 여자의 순간적인 마음이
그럴수도 ? 하는 것을 생각했다.
곤다 노부꼬는 마음이 곱고 바지런히 말없이 일 잘하는 이 소녀를 퍽 귀여워 했다.
그 순간의 노부꼬의 생각은,손님의 물건에 손을 댄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순간적인 마음으로 저질러진 죄로 어린 소녀의 앞날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도끼꼬는 생리중이었는지도 모른다 - 는 것이였다.
백만엥이나 나가는 다이아몬드를 테이블 위에 팽개쳐 놓은 쪽에도 잘못은 있다.
마스미는 사장의 딸이지만 손님은 아니다.그녀가 쓰는 방도 회사용으로 되어있지,
객실은 아니다.서로의 신분에는 상당한 차이는 있지만,어찌되었거나 이 문제는
'집안안'사람들 사이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이제라도 물건을 돌려주면,용서 받을 가능성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곤다 노부꼬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도,이미 도끼꼬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던 증거였다.마스미의 의혹이 어느틈에 곤다 노부꼬에게 전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다른 날과 다름없이 침대를 정돈하고 바닥을
청소기로 청소했을 뿐입니다."
도끼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것 뿐이야?"
"정말 그랬을 뿐입니다.대체 그 테이블 위에 뭐가 있었나요?"
"다이아몬드 반지야.백만엥이나 나가는 비싼 것이야."
"옛?"
도끼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것을 오늘 아침 테이블에 놓은 채 학교에 갔었어.돌아와 보니까
그 반지가 없어졌지 뭐겠어."
"전..... 전."
"그 사이에 방에 들어온 것은 이 방을 청소한 너뿐이었어."
"전 그런..... 모릅니다.전 방에 놓아두신 물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대한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 도끼꼬는 겁에 질려 울먹거리면서도
자신의 결백함을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그렇다면 일이 우습게 되잖아.이 방에는 너 이외에 들어온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데 다이아몬드 반지는 감쪽같이 없어졌다,이건 마치 반지에
날개라도 돋힌 것 같잖아?"
"하지만..... 하지만 전 모릅니다."
"네가 정말로 모른다면 어째서 그렇게 벌벌 떨지?"
"전 그건..... 너무해요!"
"너무하다고? 너야말로 너무하구나.백만엥짜리 반지를 훔쳐 놓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치다니! 적반하장이라더니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잖아!"
"너무해요.정말 너무해요!"
마침내 도끼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가씨.아직 다나시 양이 한 짓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보기에 너무 딱해서 곤다 노부꼬가 이렇게 중재했다.
"그럼 누가 한 짓이라는 거지? 이 아이가 뻔해. 좋아,끝까지 시치미를 뗄
작정이라면 경찰에 고발할테니까.정말로 자기가 결백하다면..... 그렇군."
마스미는 야멸찬 웃음을 배시시 입가에 떠올리며,도끼꼬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보았다.오른손 약지에 인조보석인 듯한 반지를 끼고 있다.
접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근무중에는 장신구를 쓰지 않기로 되어 있었지만,
도끼꼬가 그 반지를 무척 애지중지 하는데다가 조촐하고 별로 눈에 띄지않게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곤다 노부꼬가 특히 탓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보기에 따라서는 잃어진 마스미의 반지와 비슷하기도 했다.
(흥! 가짜 반지를 끼고 있군.)
이렇게 비웃은 마스미는,언제나 가짜 모조품만 끼고 있으니까 진짜 다이아몬드를
보고 그만 정신이 없어져서 손을 내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끼꼬가 끼고 있는 가짜 보석반지를 보고있는 동안에,마스미의 의혹은 결정적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만일 네가 끝까지 결백하다고 잡아 뗀다면 그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을 잘라 봐.

반지를 훔쳤어도 낄 손가락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나는 너를
믿어 주겠어. 어때?"
절대로 손가락을 잘라 보일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한 마스미는 이제는 반지의 행방을

찾는 것보다,잡은 사냥감을 가지고 놀며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으로
기학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3 -

다나시 도끼꼬가 하숙하고 있는 아파트의 한 방에서 시체가 되어 발견된 것은
그런 일이 있은 뒤로 1주일 가량 지난 밤 10시경이었다.
발견한 것은 아파트의 관리인이다.
도끼꼬의 방은 2층 맨 끝에 있다.서로 이웃끼리도 교제가 없는 무관심족들이
살고 있었지만,도끼꼬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 같이 살아갔기 때문에 옆방의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날마다 나가는 시간이 매우 불규칙하기 때문에,처음에는 술집에 나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그러나 술집에 나가는 사람으로 치고는 옷차림이나 태도가 너무나
얌전했다.때로는 일반 회사에 근무는 사람들보다도 이른 시간에 나갔다.
남자가 이따금 찾아오는 낌새는 알 수 있었지만,언제나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드나들기 때문에 그 사나이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여기에 사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활에 바빠서,다른 사람의 사적인
생활에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는 없었다.
아파트는 썰렁한 느낌은 들었지만 번거롭지는 않았다.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도끼꼬는 거기에 있기로 한 모양이었다.
지방의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도오꾜로 올라와서 시부야의 호텔에 입사한
그녀는 처음 얼마동안은 호텔의 독신료에 들어가 있었는데,한 방에 네 명씩이나
함께 있는,사적인 생활이라곤 전혀 없는 생활에 진저리가 나서 이 아파트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관리인은 도끼꼬가 외출한 사이에 배달된 소포를 대신 맡아 두었었다.2,3일 전에
배달 되었는데,그만 이 일 저 일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었다.몇 번인가 이름을 불러도 방 안에 사람이 움직이는
낌새는 일어나지 않는다.소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잊었을 때는

몰라도 생각 난 이상 더 맡아 두기도 마음이 무거웠다.
관리인은 시험삼아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더니 어찌된 일인지 잠겨 있지 않았다.
(어린 처녀치고는 조심성도 없군.) 하면서 그래도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 본
관리인은 방안으로 들어 선 순간,잠자리 안에서 싸늘하게 죽어있는 도끼꼬를
발견했던 것이다.
관리인이 허둥지둥 방을 뛰쳐 나왔다.너무나도 당황하여 110번과 119번을 함께
불렀기 때문에 경찰과 구급차가 동시에 달려왔다.
물론 구급차는 시체를 싣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지만,경찰은 뚜렷하게 독물중독으로
죽은 증상이 나타나 있는 시체에 자살 타살 양면으로 신중히 검시하기 시작했다.
감식의 첫째 소견으로는 죽은 뒤 경과 된 시간은 약 20-25시간,죽은 원인은
청산화합물에 의한 중독이라는 것이다.
베게 맡에는 독물을 넣어서 마신 듯한 쥬우스병과 유리잔이 뒹굴고 있었다.
감식계에서는 물론 이런 물건들을 모두 증거물로 보존했다.
현장에는 사람이 찾아 갔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시체에는 뚜렷하게
특징이랄까 현저한 변화가 보였다.
죽은 사람의 오른손 약지가 그 손가락이 붙은 밑둥에서부터 예리한 칼로
싹둑 잘려 있었던 것이다.무엇때문에 손가락을 절단했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잘려진 절단구가 죽은 뒤에 만들어진 증상을 보이고 있는 점으로 보아,
검시하던 일행은 아연 긴장했다.
절단구에서 다소의 출혈은 있었지만,살아 있는 동안의 출혈로서는 적었다.
살았을 때에 상처를 입으면 반드시 그 부위의 혈관에서 피가 나오게 마련이다.
산 몸의 조직은 탄력이 있기 때문에 상처자리가 크게 벌어진다.그 밖에 뻘겋게
부어오르는 증상이 나타난다.
손가락을 잘랐을 때에는 그 절단구에 생활반응이 다소 확인되는 것인데 반하여,
이 시체에는 그 정도가 매우 약했다.
죽음에 임했을 때,다시 말해서 죽기 직전이나 또는 죽고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받은 상처에서는 약한 생활반응이 남는 수가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다가 시체 (또는 막 죽어가고 있는 몸)에서
손가락을 잘라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의혹을 결정적으로 만들어준 것은 잘라낸 손가락이 현장이나 그 주변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다만 흉기는 곧 발견되었다.부엌에 있던
고기를 써는 칼에 죽은 사람의 혈액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그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서 손가락을 잘라내어
그것을 가지고 간 것이다.
-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가 ? -
-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 -
당연히 죽은 사람의 사인에는 다른 사람에 의한 혐의를 가지게 되어,
살인 사건으로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더우기 해부한 결과 첫째 소견이 증명되었다.
시체에는 죽기 전후에 있어서의 정사나 난폭한 짓을 겪은 흔적은 없었다.다만
피해자는 임신 3개월의 몸이었다.
당연한 일로 수사본부는 죽은 사람에게 아기를 갖게 한 상대에게 의혹의 눈을
돌렸다.
수사의 손길은 피해자가 살고 있던 곳 주변에서부터 근무처였던 호텔까지 뻗쳤다.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을 꼭 닫고 사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이웃에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아파트에는 살의를 만들만한 소지를 찾아볼수 없었다.
근무하는 곳이라면 몇몇 인간관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 아기를 갖게한
상대도 숨어있을 것이 틀림없다.수사원은 다나시 도끼꼬의 직장에
끈질기고 빈틈없는 탐문수사를 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경찰은 매우 흥미있는 정보를 얻었다.흥미로운 것과 동시에 수사방침에
혼란을 가져올만한 정보이기도 했다.




- 4 -

"다나시 도끼꼬는 죽기 일주일쯤 전에 호텔사장의 딸인 와끼무라 마스미로부터
다이아몬드 반지를 훔쳤다는 혐의를 받았는데,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손가락을 잘라 보이라고 다구쳤다는 사실이 나타났어."
"그럼 역시 자살이었단 말인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되어 죽음으로 항의한 것인가?"
"그렇지만 그 손가락은 죽은 뒤에 잘라 낸 상황이었어."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면 죽기 전에 잘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구태여 죽을 필요까지도 없지 않은가? 손가락만 잘랐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항의가
되고도 남을텐데."
"게다가 그 손가락을 누가 현장에서 가져가 버렸단 말인가?"
"도끼꼬에게 아기를 갖게 한 사나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자신이 결백하다면
맨 먼저 나서서 수사에 협력해야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갖가지 의론이 튀어나올 뿐,도무지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아뭏든
새로 얻어진 정보에 의해 자살선도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자살이라고 가정한다면,누군가가 (임의로 X라고 한다) 도끼꼬가 죽은 뒤던가
또는 막 죽으려 하고 있을 때에 현장에 왔다가 손가락을 잘라 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손가락을 자른 이유로 다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도끼꼬가 자살하기 전에 본인에게 부탁을 받았다.그녀는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해도 도저히 자기자신은 자를 수가 없다.자살 그 자체는 독물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비교적 간단하게 할 수 있다.그러나 자기가 직접 제 손가락을 싹둑
잘라낼 수는 없었다.
둘째로는 X는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우연히 자살현장에 왔다.항의하기
위해 X의 독자적인 의사로 (아마도 동정하는 마음에서) 손가락을 잘랐다.
이상의 어떤 가정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수사본부의 맨 처음의 견해대로 타살일
것이다.
범인 X는 도끼꼬를 독살한 뒤,그것을 자살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이다.그 경우 X는 도끼꼬가 와끼무라 마스미에게서 반지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그 사건은 호텔 전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도끼꼬가 배속되어 있던 15층의
종업원들은 모두 알고있었다.

또 X가 도끼꼬에게 아기를 갖게 한 상대라면 가장 쉽게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손가락을 가지고 간 수수께끼가 알 수 없다.
손가락을 현장에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와끼무라 마스미에 대한 항의의 결과도
컸을 것이고,무엇보다도 자살로 보이기 쉽지 않은가?
생활반응의 정도에서 타살의 혐의를 갖게 되는 것은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그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수사방침에 자살선도 남겨놓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범인에게 그런 지식이 없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그렇다면 또 그런대로
손가락을 남겼을 것이다.
타살선을 생각해 보더라도 손가락을 가지고 갈 의미는 별로 생각할 수 없다.
항의에 대한 효과라는 점으로 생각하면,손가락이 현장에 있었던 편이 훨씬 박력이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만을 현장에서 없애버리고,와끼무라 마스미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오래도록 주기 위한 것인가?
'적당한 때를 보아 와끼무라 마스미에게 손가락을 소포로 보내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수사원 가운데에는 그런 의견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옛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손가락을 자른것만으로도,억울하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는다.
그 이상 손가락을 소포로 해서 보내준다는 발상은 복수할 의도가 있다고 할 지라도,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게다가 와끼무라 집안에 주의하여 마스미에게로 보내져 오는 우편물 (사건 직후
그녀는 호텔을 정리하고 자택으로 돌아와 있었다)들을 마스미의 양해를 얻어
모두 사전에 체크하게 했으나,수상한 물건은 아무것도 보내져 오지 않았다.
수사본부로서는 확실한 방침에 통일이 되지 못한 채,자살과 타살과의 양면수사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 5 -

사건은 미궁에 빠질 것 같은 양상이 짙었다.한 달 가량 지났는데도 도끼꼬의 주변에
수상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임신을 했으니까 사나이가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실제로 도끼꼬가
살던 아파트의 이웃 사람들도,그녀의 방에 사나이가 왔던 낌새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기미였을 뿐이다.사나이의 실체를 본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도끼고가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직장에서도 결코 자신의 마음을 여는 일이 없었다.
특별히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마음 속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아무도
그 안으로 들여놓지 않으려는 구석이 있었다.
마음이 고와서 동료들과도 탈 없이 사귀고 있었지만 일정한 선 이상으로는 접근하지

않는다.그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특히 친한 친구도 없었다.

"그 사람 비밀주의자예요."
"쉬는 날 아파트로 놀러가겠다고 해도,누추한 곳이라면서 언제나 거절하곤 했어요."

"겉으로는 아주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지만,마음 속에는 무언가 딱딱한 것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동료들이 도끼꼬에 대해 평한 말로도 알 수 있듯이,모든 일에 있어서 내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생활태도였기 때문에 그 사적인 생활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또 상대인 사나이도 어지간히 은밀하게 만나고 있었던 모양이다.그것은 즉
그로서도 도끼고와의 관계가 드러나서는 곤란했던 모양이었음을 말해주는 일이었다.

다나시 도끼꼬가 죽은 원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결정되지 않은 채 점차로 미궁으로

빠질 것 같은 양상이 짙어지는 데 따라,와끼무라 마스미도 사건에서 받은 쇼크가
점점 엷어져 갔다.
맨 처음 도끼꼬가 손가락 끊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고 밤에도 곧잘 가위에 눌려 괴로와했다.
(도끼꼬는 억울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죽은 것이다.바로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구태여 죽을 것 까지는 없었는데... 죽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
(내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거야.)
꿈속에서 도끼꼬가 입술사이로 피를 흘리면서 마스미를 노려본다.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그녀를 손짓해 부른다.
너무나도 무서워 소스라쳐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에 식은땀이 후즐근히 잠옷을
적시고 있었다.
한번 잠을 깨면 이번에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했다.
식욕을 잃고 잠을 이루지 못해,마스미는 알아볼 수 없을만큼 야위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달쯤 지나자 가까스로 회복되어 갔다.사건은 그런대로 교착되어
버린 모양이다.타살이라고 하게 되면,마스미의 심정은 훨씬 가벼워진다.
범인이 손가락을 자른 까닭은 알 수 없지만,다른 사람에게 살해된 책임까지
마스미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
(틀림없이 다나시 도끼꼬는 살해된 거야. 그럴 것이 틀림없다니까.)
(임신 3개월이라지 않아? 아직 스무살도 될까 말까한 어린 소녀인 주제에 아기를
갖다니.)
(그런 음란한 여자니까 살해된 거야.)
(도끼꼬가 죽은 것은 내 책임이 아니야.그야말로 자업자득이야.)
마스미는 자기에게 형편이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본래부터가 이기적인 성격이니까
대뜸 '그렇게 생각하자'며,그럴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해 버렸다.
잃었던 식욕과 불면증도 나았다.몸무게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만일 도끼꼬가 살해되었다면,역시 반지를 훔친것은 그녀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가락이 잘려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거야.)
마스미는 도끼꼬의 죽음에 대해 괴로와 한 것이,매우 손해를 본 것 같이 여겨졌다.
자신은 오히려 피해자인 것이다.도끼꼬가 죽음으로서 백만엥짜리 반지가
돌아온 것도 아니다.
- 우연히 도난사건과 도끼꼬의 죽음이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일어났기 때문에 두가지 사건에 인과관계가 있을거라고 지례짐작 했지만,
처음부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 라고 혼자서 단정을 내렸다.
마스미는 기운을 회복했다.그녀에게는 또 한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
반년쯤 전부터 알게 되어 줄곧 은밀하게 교제를 해 오던 연인과의 결혼을,
간신히 부모가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집안의 격이 어떻다느니,지체가 다르다느니 하면서 난색을 보이던
부모들이,마스미의 고집스러움과 할아버지인 야스자에몬의 '본인들이 좋다면
된 것 아닌가'하는 권력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로 허락을 내린 것이다.
부모의 허락만 내리고,그 뒤의 일은 막히는 것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도끼꼬의 사건도 흐지부지 애매하게 얼버무려지고 말았으므로,그녀가 대학을
졸업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게끔 되어 있었다.
그 날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이제는 이미 마스미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렵,시부야에 있는 프라자호텔 15층의 한 객실에서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후 6시쯤,막 도착한 손님의 방에서 전화가 걸려와,세면대가 막혀서 물이 빠지지
않는다는 투정을 했다.
우선 곤다 노부꼬가 상황을 보러 갔더니,욕실 안에 설비되어 있는 세면대의
배수구에 무언가가 막혔는지 물이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면 되겠지만,이런 상태로는 얼굴도 변변히 씻을 수 없잖소?"
하고 그 손님은 투덜거렸다.
곤다 노부꼬는 그 손님을 똑같은 종류의 다른 방으로 옮겨준 다음,기술부의
수도수리계원을 불렀다.
문제의 세면대는 유니트식 욕실 안에 설치된 것으로,배수 파이프는 도기로 된
세면기 밑의 벽장 모양으로 된 우묵한 속에 감추어져 있다.
수리계는 벽장 속을 드라이버나 렌치로 덜그럭거리면서 만지작거리더니 한참 만에,
"이러니 물이 흐를리가 없지."하고 머리카락이며 무언지 알 수 없는 더러운 오물이
엉킨 덩어리를 꺼냈다.
"무언지 처음에 걸린데에다가 머리카락이며 오물이 차례로 달라붙어 이런 덩어리가
된거라구."
수리계원은 곤다 노부꼬가 준비해 두었던 비닐천위에 그 오물덩어리를 던졌다.
비닐 위에 떨어진 순간,덩어리는 물컹하고 찌부러지면서 그 속에서 조그마한
금속같은 것이 떼구르르 굴러나왔다.
그 금속은 일순 빛을 받아 반짝하고 빛났다.
"뭐야 이건?"
"어머,뭘까?"
두사람은 동시에 이렇게 말하고 수리계원이 팔을 뻗혀 집어들었다.
"반지야.비싼 물건 같은데?"
수리계원은 그 물건을 곤다 노부꼬의 눈 앞에 바싹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반지!"
곤다 노부꼬는 숨을 크게 들여마셨다.그 방은 사장의 딸인 와끼무라 마스미가
한달쯤 전까지 거실로 쓰던 그 방이었음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런 것이 걸려 있었으니까 물이 막혀서 빠지지 않았던거야."
"저 좀 보여주어요."
곤다 노부꼬는 수리계원의 손에서 반지를 받아 들었다.
아직도 더러운 오물에 섞인채였지만,초록빛과 호박빛을 혼합한 듯한 매우 고상하고
우아한 빛을 뿜고 있었다.보석을 받치고 있는 대는 순금인 듯 했다.
"이건 사장 따님의 반지다!"
"뭐라구? 이게 그 하녀가 훔쳤다는 의심을 의심을 받고 죽었다는 그
반지란 말인가?"
소문은 이미 기술부의 수도수리계까지도 전해져 있었던 것이다.하기야 호텔종업원이

한사람 죽었으니까 사건을 완전히 덮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신문이나 라디오의
보도진들에게 새어나가는 것을 누른 것이 와끼무라 집안의 실력이었다.
곤다 노부꼬가 그 반지를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백만엥이나 나가는 비싼
반지를 만져보는 것도,눈으로 보는 것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마스미의 것인지 어떤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마스미의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었다.금빛 대에 <M.W>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와끼무라 마스미의 이름이 머릿글자와 우연히 부합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 오물이 쌓인 것으로 보면 한달쯤 전에 걸린 것이구먼."
곤다 노부꼬의 마음 속을 헤아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리계원이 말했다.
마스미는 한 달 전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약 반 년동안 이 방에서 살았던 것이다.
"저어,이런 일은 절대로 다른사람에게 말하면 안되요."
곤다 노부꼬는 우선,수리계원의 입부터 막았다.
다나시 도끼꼬의 죽음이 자살이었거나 타살이었든,어쨌던간에 반지를 훔친 것이
그녀는 아니었다.
마스미가 목욕을 하려고 했었는지,세면이라도 할 생각으로 세면대의 위에 무심히
놓았던 것이 세면대 안으로 굴러 떨어져서 배수파이프에 걸렸던 것이었다.
이렇게 된 형편에 만약 도끼꼬가 억울한 누명을 원망하여 자살했다면 큰일이
아니겠는가.그렇다가 신문기자라도 눈치를 챈다면,와끼무라 집안은 여지없이 비난을

받을 것이다.아니,한 무고한 종업원을 죽게 한 책임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찰이 알게 되어도 안된다.마스미에 대해서는 별로 호감을 갖고있지 않은
곤다 노부꼬였지만,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직장의 경영자의 명예라는 것을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사람들이 알게되면 큰일이니까."
"알고있어.나도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니까."
곤다 노부꼬의 정색한 모습에 눌린 것처럼 수리계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곤다 노부꼬가 내놓은 반지를 본 와끼무라 사장은 한 순간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아뭏든 마스미를 불러 반지를 보이자,
자신의 반지가 틀림없다는 말이었다.
"너 정말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구나.만일 이것을 세상사람들이 알게 되면,얼마나 큰

소동이 벌어지겠느냐?"
"아버지,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아버지와 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서로 마주보았다.
"다나시 도끼꼬가 죽은 원인은 아직도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자살의 가능성이 의연히 남아있다는 말이 되는거다.
이것 참 큰일 났구나."
와끼무라 세이다로도 그저 '큰일이다'를 연발할 뿐,명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찌 되었거나 와끼무라 일족의 맨 윗사람인,시부야 프라자호텔의 위대한 독재자인
야스자에몬에게 의논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얼굴빛이 변하며
"이 멍텅구리야!"하고 고함을 쳤다.
"너는 사장이면서도 그정도의 분별력도 없단 말이냐! 어쩌면 그다지도 어리석단
말이냐,너란 녀석은."
표면상으로는 일선에서 물러섰지만,의연히 경영의 실권을 쥐고있는 야스자에몬은
관자놀이에 핏줄을 곤두세우고 무섭게 성을 내고 있었다.
최근 다소 혈압이 높은 듯해서 애써 감정이 격하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그 제동도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세이다로에게는 아버지가 어째서 저렇게 성을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큰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제 새삼스럽게 성을 낸 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이다로의 그 아둔함이 아버지를 한층 더 성나게 하고있는 것이다.
"반지는 당장 '곤'뭐라던가 하는 그 객실계 책임자에게 돌려 주어라.
마스미의 것이 아니라고 하고 말이다."
가까스로 흥분을 의지력으로 누른 야스자에몬이 이렇게 명령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스미의 반지가 틀림없다고 본인도 말하고 있읍니다.
머릿글자까지도 새겨져 있읍니다."
"그러니까 너는 멍청하다는 것이다.같은 머리글자 쯤은 얼마든지 있어.아뭏든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거다.이 반지는 절대로 마스미의 것이 아니다.
마스미의 것이어서는 절대로 안된다.알겠느냐? 반지쯤은 몇개라도 대신되는 것을
살 수 있지만,이름이라는 것은 한번 땅에 떨어지게 되면 여간해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아,예."
세이다로는 그제서야 겨우 아버지의 뱃속을 알아차렸다.
"한사람의 종업원이 죽었다.경찰에서는 자살이라고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반지를 잃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뱃속으로는 마스미를

비난하고 있다.그런데 이 판국에 반지가 나와 봐라.죽은 종업원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만다.인권문제가 된다.그러니까 아니라고 하는 거다.
반지는 마스미의 것이 아니야.당장 이것을 발견한 종업원에게 돌려주어라."
"예,지금 곧 그렇게 하겠읍니다."
"다행히 아직 노조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이것을 기화로 노조도 만들어질지 모르는 일이다.과격한 지원단체라도 밖에서
들어와 흔들게 되어보란 말이다.아직도 개업한지 2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견디어 낼 것 같으냐? 그렇게 되면 잃게 되는 것은 이름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세이다로는 얼마나 자신이 사정에 어둡고 얼뜬 사람이었는가를
깨달았다.이 조그마한 반지는 야스자에몬이 인생의 나머지 정열을 모두 모아
만들어 낸 맘모스호텔의 명성과 경영을 뿌리째 위험하게 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6-

그로부터 한달 뒤인,일진이 매우 좋다는 날을 가려서 시부야 프라자호텔의
대연회장인 <전단실>에서 성대한 결혼피로연이 열렸다.
손님으로 와 있는 정계 재계의 요인들에 섞여 호텔의 수뇌진이 거의 다 참석했다.
그도 그럴것이 신부는 호텔의 창설자인 와끼무라 야스자에몬의 손녀이며
현재 사장의 셋째딸인 마스미였기 때문이다.
신부측 축하객들이 기라성처럼 호화로운 사람들인데 비해 신랑측은 보기에 매우
초라했다.신랑의 양친이나 그 친척들은 얼핏 보기에도 이런 으리으리한 장소에는
처음 온 사람들인것 처럼 겁먹은 태도로 불안해 보였으며 모두 햇볕에 그을은
소박한 얼굴이었다.신랑은 호텔의 식당에서 급사장으로 있던 마쓰바라 이사무였다.
그는 마스미의 자택을 다시 고쳐 짓는동안 호텔에서 반년쯤 살았던 신부가 날마다
식당에 올때마다 그녀의 식사를 돌보아주는 동안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들의 약혼이 발표되자 호텔의 모든 사원들은 일찌기 들어본 일도 없었던
큰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고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마쓰바라는 호텔의 직제 중에서도 밑의 쪽에 위치했다.물론 야스자에몬이나
세이다로는 그 이름도 존재도 알지 못했다.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노동력의 단위로
세어지던 그런 존재였다.
그 한 단위가 호텔의 경영자이자 이 나라 재계의 한쪽 기수라고도 할 만한
와끼무라 일족과 연결이 되었으니,주위 사람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큰것이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직속상사로서 마쓰마라를 턱짓으로 부려오던 식당과장인 오오노같은 사람은
아연실색했을 정도였다.안중에도 없었던 아랫사람이 한걸음에 자기를 훌쩍 뛰어넘어

경영자의 일족이 된 것이다.
이제부터 앞으로,여태까지 거만하게 부려온 앙갚음으로 어떤짓을 할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자신의 몸을 보전하기에 급급한 오오노는,약혼이 발표된 뒤로는 살아있는 것

같은 심정이 없어지고 말았다.
짖궂은 심통이었는지 마쓰바라는 오오노를 내빈으로 초대했다.내빈의 자리 맨 끝에
앉아서 오오노는 신랑 - 어제까지의 자신의 부하였던 - 마쓰바라의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모습을 보고,앞에 놓인 요리도 제대로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와끼무라 사장은 딸과 결혼했다하여 특별히 우대하거나 하지는 않겠다,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다루겠다고 말은 했지만 언젠가는 마쓰바라에게 와끼무라 일족의
한 사람으로 어울릴만한 지위가 주어질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특히 회장인 와끼무라 야스자에몬은 마스미를 맹목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다.이 손녀딸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것이다.

신부가 결혼의상을 갈아입는 것도 끝나고,잔치는 한층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저마다 한마디씩 축사도 끝났고,친구들의 차례가 돌아오자 겨우 딱딱한 분위기도 좀

누그러졌다.
물론 누그러졌다고 해도 신랑측의 친구는 거의 호텔의 사람들이니까 간부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한도가 있다.
누구나 다 한결같이 아무런 지장도 없을 정도의 신랑의 험담을 하고,그 험담으로
은근히 신랑을 추켜올리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부터 앞으로 신랑은 사장의 일족에 끼일 몸이 되는 것이다.함부로 말을 하여
미움이라도 사게되면 큰일이었다.특히 그의 아내인 마스미의 미움을 사게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샐러리맨의 이러한 연회석상에서의 말이 대개 하찮은 것은,언제나 상사에 대해
아부하는 마음과 자신의 몸을 보전하려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 신부에게는 그런것들이 감명으로 들리는 것이다.이야기와 여흥의
사이사이에 요리의 코오스가 진행된다.시중을 들고있는 것은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다.
연회인 경우에는 연회장 전문인 급사들이 있지만,오늘은 내빈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식당의 급사들도 모두와서 돕고 있었다.

생선요리의 차례가 끝나고 제4코오스인 고기요리의 차례로 들어갔다.
요리가 나온 뒤,고기국물이며 소오스를 서어비스했다.과연 이런 자리에는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 모두가 다 갖추어진 다음에야 먹기 시작한다.
그 한 순간 연회장 한 모퉁이에서 접시에 세게 무언가를 부딪친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일어났다.내빈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소리는 주빈석에서 일어났다.신부가 포오크에 고기토막을 찌른 채 식탁 위에
떨어뜨린 것이다.일단 접시 위에 떨어졌다가 식탁 위로 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는 매우 요란했으며,신부의 태도는 퍽 이상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눈이 위로 흡떠지고 입술이 푸들푸들
경련하고 있다.포오크를 떨어뜨린 채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으며,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뭔가?"
"무슨 일이야?"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나?"
내빈들 사이에 웅성웅성하는 공기가 파문처럼 퍼져갔다.
"왜 그래요?"
마쓰바라가 다정하게 신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직도 어디까지나 사장의 딸이며,자신의 아내로서의 실감이 나지않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나타난다.
"손가락이.... 손가락이...."
마스미가 열뜬 목소리로 숨가쁘게 말했다.
"손가락이 어떻게 되었읍니까?"
마쓰바라는 급사의 습성이 몸에 배어있었다.
무심결에 지금도 그 습성이 튀어나온 것이다.마스미가 떨어뜨린 포오크를
새로운 것과 바꾸어 줄 생각으로 옆자리에서 팔을 쭉 뻗쳤다.
포오크에 찔려있는 것은 고기토막이 아니었다.그것은 손가락 밑둥부터 절단된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꽥!"
하고 사람의 소리 같지도 않은 비명을 지르며,마쓰바라는 집었던 포오크를
내 던졌다.
그 바람에 포오크 끝에서 손가락이 빠져서 마스미의 하얀 공단옷 위로 날아갔다.
떨어진 순간 손가락에 묻었던,요리의 고기국물이 하얀 공단 옷감위에 시뻘겋게
흘렀다.
그것은 마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 처럼 보였다.마스미가 그 위에 격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무슨일이 일어났는가를 안 연회장은 수습할 수 없는 혼란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반지는 분명히 빼버렸을 텐데."
와들와들 떨면서 마쓰바라는 믿어지지 않는것을 보는 것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길이 연장된 곳에,내 던져진 손가락의 절단된 끝이 있었다.
고기국물에 범벅이 된 허연 손가락 밑둥에 반지가 끼어져 있고,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반지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쓰바라가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말을 똑똑히 알아들은 사람이 있다.
회장 안의 소란을 방관자와도 같은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고기요리를 서어비스하던 급사였다.
- 7 -

이 혼란된 소용돌이속에,다나시 도끼꼬를 살해한 용의로 마쓰바라 이사무의
체포영장을 손에 든 수사원 일행이 밀려 들어왔다.
마쓰바라는 쟁쟁한 내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연회석상에서 살인용의로 체포영장이 집행되었다.
수사본부로 인치된 마쓰바라는,처음에는 완강히 범행을 부인했지만 본부의
수사관들이 끈질기게 수집한 증거와,급사인 쓰네미 쇼오지의 증언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쓰바라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 다나시 도끼꼬와는 입사한 직후 회사의 숙사에서 베풀었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알게 되었다.
그 무렵은 아직은 결혼할 생각은 없었기 ㄳ문에,두 사람의 관계를 숨기고
장난삼아 교제해 왔다.회사는 종업원들 사이의 연애에 귀찮게 잔소리를 했고,
도끼꼬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부끄럽다고 하여 비밀스럽게 사귀는 편이
모든일에 형편이 좋았다.
그러나 그러는 중 도끼꼬가 점점 진지하게 나와,결혼을 조르게 되었다.
자신은 그녀와 결혼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특별히 싫은점도 없었고,
사귀어가는 동안에 정도 깊어졌다.그러다가 도끼꼬는 임신했다.
그런데 그 무렵,자신은 와끼무라 마스미와 알게되어,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마스미와는 너무나 지체가 다르기 때문에,처음에는 전혀 대상으로
삼지 않았었는데,마스미쪽에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도 야심이 생겼다.

마스미와 결혼하면 일생은 보장된다.
도끼꼬와는 하늘과 땅 사이다.이제는 머리 수 만으로 세게되는 생활에는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니다.
다른사람의 시중을 들기위해 식당 안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뛰어다니는
급식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그런 생활은 이제 질색이다.
나는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다.
노동력의 단위가 아니라 마쓰바라 이사무로서 다루어지는,인간의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끼꼬는 아기를 갖게 된 뒤로,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아직 그럴만한 시기가 아니니까 아기를 없애라고 해도,절대로 낳겠다고
고집을 부린다.결혼해 주지 않으면 호텔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이를 갈았다.
모처럼 미소를 보이려던 찬스를,이런 하찮은 계집애에게 걸려 잃어야 한단
말인가? 도끼꼬와 결혼한 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급료가 싸니까 결혼을 하더라도 얼마동안은 둘이 함께 벌어야만 한다.
한 단위의 노동력이 두 단위의 노동력이 될 뿐이다.
호텔 안에서 맞벌이를 하는 종업원이 저녁식사 값을 아끼기 위해서,
종업원에게 내 주는 급식을 마주앉아 나누어 먹는 광경을 곧잘 보게 되는데,
'도끼꼬와 결혼하면 저렇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마침 그런 때에 와끼무라 마스미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는데,도끼꼬가
의심을 받았다.마스미는 도끼꼬에게 결백한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손가락을 자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용하려고 했다.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을 괴로와하여 자살한
것으로 하면 어떨까? 어린 소녀가 백만엥이나 나가는 반지를 훔쳤다는 혐의를
쓴 것이다.이것은 훌륭한 자살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하여 전부터 잘 아는 금속 메키공장에서 몰래 훔친 청산가리를 쥬우스에
타서 도끼꼬에게 먹였다.아파트에 드나들 때만 주의하면 그녀와의 관계는
아무에게도 알려져있지 않으니까 내가 한 짓인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계획대로 도끼꼬가 '자살'을 해주어 달아나게 되었을 때,곤란한 일이
생겼다.그녀와 교제하기 시작했을 무렵,인조보석으로 된 반지를 사 주었다.
싼 물건이었지만 이름이 알려져있는 가게에서 샀기 때문에,그 가게를 통해
반지를 산 사람을 알아 보게 될 염려가 있었다.

그녀는 그 반지를 매우 소중하게 오른손 약지에 끼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빼어가지고 가는편이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뭏든 내 흔적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남겨서는 안된다.
그런데 반지를 빼려고 하자,마디에 걸려 도무지 빠지지 않는다.
사주었을 때,도끼꼬는 조금 작은듯 하다고 말했지만,그대로 끼고 있는 동안에
빠지지 않게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비눗물도 발라보고 기름도 발라보았지만 허사였다.
나는 초조했다.도끼꼬는 이미 죽어있다.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달아나야 한다.
궁리끝에 나는 손가락을 잘라낼 것을 생각했다.손가락을 자르면,'자살'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말겠지만,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손가락을 먼저 자른 것이 아니라 '자살'이 먼저 행해진 것이니까,반지를
그대로 남겨두면 증거가 되고만다.
부엌에 있던 식칼로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반지만을 뺀 다음,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는 단위에서 달아나고 싶었던 것이다. /

이렇게 말하고 마쓰바라는 어두운 시선을 들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도 현재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한 사람의
정열이 좌절된 눈이었다.
이것으로 도끼꼬의 손가락이 잘려진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러나 마쓰바라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잘라버린 손가락을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어째서 손가락을 현장에서 가지고 나갔는가?'하는 수수께끼가
남는다.

수사본부에서는 마쓰바라를 체포한 뒤,마스미의 요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급사인 쓰네미 쇼오지를 주거침입,시체유기 (시체의 일부분이라 할 지라도
엄연한 시체라고 간주된다),기물손괴의 용의로 체포했다.

쓰네미는 깨끗이 범행을 자백했다.그에 의하면,
/ 나는 다나시 도끼꼬씨가 살해되기 조금 전에,퇴근하는 시간이 우연히 같아져서
말을 조금 나누었읍니다.
가끔 찻집 같은데에서 가벼운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 점점 그녀가 좋아졌는데,
그녀에게는 따로 좋은사람이 있는 모양이어서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읍니다.그녀가 싸늘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저는 열을 올렸읍니다.

나는 어떻게든지 그녀에게 나의 참마음을 알게하려고,그 날밤 종업원 명부에서
확인한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 갔읍니다.그런데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기에
문을 밀어 보았더니 잠겨있지 않았읍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가만가만 방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이게 웬일입니까?
그녀가 손가락이 잘린 채로 죽어 있었읍니다.
깜짝 놀라 달아나려고 했는데,그때 그녀가 사장의 딸에게서 반지를 훔친
혐의를 쓰게 되어,손가락을 자르라고 했다는 소문을 들은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어쩌면 도끼꼬씨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게된 데에 항의하여 자살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읍니다.
나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손가락을 집어들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읍니다.
어떤 기회에 그 손가락을 도끼꼬씨의 복수를 위해 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손가락은 포르말린 속에 담가 두었읍니다.

그러는 중 15층의 객실계 책임자인 곤다 노부꼬로부터 와끼무라 마스미의 반지가
발견되었는데,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되돌려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맨 처음에 가지고 갔을 때에는 마스미가 확실히 자기의 것이라고 인정했는데
이상하다고,곤다는 분개하고 있었읍니다.
그 반지는 프론트의 유실물계에 보관하게 되었는데,사장으로부터 경찰에는
알리지 말고 회사에서 은밀하게 보관하라고 지시했답니다.

나는 그들의 연극을 알았읍니다.
반지가 마스미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도끼꼬씨를 억울하게 죽인것이 되니까,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좋다,그렇다면 반지를 반대로 이용하여 극적인 복수를 해주자'하고,그것을
도끼꼬씨의 손가락에 끼워,피로연때 마스미의 고기요리 속에 넣어 접대했던
것입니다.
반지는 프론트의 유실물계가 우연히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어서 나와는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이유를 이야기하여 잠시 빌었읍니다.
어찌되었거나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유실물이니까,반지를 어떤 용도로 일시
빌어쓰더라도 상사는 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효과는 정말로 극적이었읍니다.
이때 신랑인 마쓰바라가 '반지는 분명히 뺐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는데,
그것은 어떤 뜻일까요? /

이렇게 해서 미궁으로 빠지는가 하고 걱정되던 살인사건은 해결되었다.
쓰네미 쇼오지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마쓰바라의 중얼거림은,쓰네미가 도끼꼬의
손가락에 끼운 마스미의 반지를,마쓰바라가 사 주었던 인조석 반지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 중얼거림이 그의 유죄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었다.즉 범인 이외에는
도끼꼬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뺀 사실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이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한 형사에게 물었다.
"경찰은 어떻게 마쓰바라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냈읍니까? 마쓰바라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쓰네미를 체포한 것은,마쓰바라가 잡힌 뒤였지 않습니까?"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그렇게 되었읍니다."
형사는 이렇게 겸손한 말투로 계속했다.
"마쓰바라가 도끼꼬에게 가짜 보석 반지를 사 주었던 가게에서 도끼꼬가 죽은 뒤
퍽 오랜 날짜가 지났을 때,그녀에게로 편지가 왔더군요.
그 문면은 '분명히 지난 날 저희 가게에서 사주셨던 반지가 맞지않으신다는
말씀이기에 바꾸어드릴 생각이오니,현품을 가지시고 와 주십시요'하는
내용이었읍니다.
도끼꼬가 마쓰바라에게 받은 반지에 대해 보석상에 직접 문의했던 모양이었읍니다.

그 보석상으로 찾아가서 마쓰바라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어요."




- 8 -

시부야 프라자호텔의 식당과장 오오노는 그날 밤번이 돌아갈 때에,마쓰무라 대신
급사장이 된 후지야마에게 물었다.
"내일은 단체손님이 두 조 있는데,몇이나 나와요?"
후지야마가 나올 사람들의 머릿수를 대답하자 계속해서 묻는다.
"둘이 빠졌는데,빠진 숫자를 보충할 대책은 섰나?"
"예,다 되었읍니다.연회계에서 둘 지원나오기로 되어 있읍니다."
오오노는 그 대답에 만족한듯이
"그런가? 일손을 일단 뺏기게 되면 좀처럼 보충해주지 않아서 참 곤란해."
"별로 질은 좋지 않지만,임시 고용원이라면 곧 올겁니다."
"임시 고용원은 책임감이 없어서 그다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아."
"일손이 모자라니 하는 수 없지 않겠읍니까?"
"그것도 그래.아뭏든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머릿수만은 언제나 갖추어 놓도록
하라구."
"잘 알겠읍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면서,오랜 시간의 불규칙한 근무에 지칠대로 지친
급사들이 가까스로 일에서 해방되어 갱의실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노동력의 단위로서의
무표정한 얼굴들뿐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 끄다 남은 큰 샹들리에가 공허한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손님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으며,하루의 일을 끝낸 호텔은 몇 사람의
야근자를 남겨두고 거대한 폐성의 모습으로 돌아가려하고 있었다.




의자속의 사랑! 그것이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독백적인 마력을 갖는지
실제로 의자속에 들어와 체험하지 않고는 모를 겁니다.언제나 내 위에
편안히 몸을 던지는 부인을 받아 안고 무한한 행복감에 젖습니다.
부인에 대한 저의 열정은 날로 세게 타오릅니다.
부인 ! 그 부인이 바로 당신입니다.


인간 의자의 사나이

- 江戶川乳步 -

요시꼬는 아침마다 남편이 등청하는 것을 배웅하고 나면,그것은 대개 언제나
10시가 지나게 되지만,겨우 자기의 몸으로 돌아가 양관에 마련되어 있는
서재에 틀어박히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있었다.
그 서재는 남편과 함께 쓰게 되어 있었지만 남편보다는 거의 요시꼬가 차지하고
있었다.그 곳에서 그녀는 지금 K잡지의 올여름 특대호에 싣기 위한 장편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한창 진행중인 것이었다.
아름다운 규수작가로서 활약하고 있는 그녀는 요즈음에는 외무부의 고급관리인
남편의 의미가 희미하게 생각될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그녀에게는 거의 날마다 알지못하는 숭배자랄까 이른바 팬들로부터 여러 통의
편지가 배달되곤 했다.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서재로 들어가 책상앞에 앉아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러한 미지의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를 한 통씩 훑어보아야
만 했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다 판에 박은듯한 하찮은 말만 늘어놓은 것이었지만 그녀는
여자의 다정하고 상냥한 마음씨에서 어떠한 내용의 편지라도 자기에게 보내져
온 것은 아뭏든 한 번은 대충으로나마 읽어 보기로 하고 있었다.

간단한 것부터 먼저 읽기로 하여 두 통의 편지와 한 장의 엽서를 보고 나자
남은 것은 제법 부피가 두툼한 원고인듯한 편지봉투가 하나 남았다.
원고를 보낸다는 통지 같은 것은 받지 않았지만 이렇게 별안간 불쑥 원고를
보내오는 일은 이제까지도 곧잘 있는 일이었다.그것은 꼭 한 번만이라도
읽어주고 지도해주면 다시 없는 영광이겠다는 류의 편지가 곁들여진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길다랗게 늘어놓기만 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녀는 어떻든간에 표제만이라도 보아주는것이 정성껏 보내온 사람에 대한
의리일것 같아 겉봉을 뜯고 속에 든 종이 다발을 꺼냈다.
그것은 짐작했던대로 원고용지를 묶은 것이었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표제도 없고 서명도 없이 다짜고짜로 `부인`하고 부르는 말로 시작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그럼 역시 이것은 편지인가 ?` 이렇게 생각하고 무심코 두서너 줄
읽어내려가는 동안에 그녀는 거기에서 무언지 모르게 예사롭지 않은 묘하게
기분나쁜 것을 예감했다.그리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호기심이 그녀로 하여금
정신없이 다음을 읽게하는 것이었다.

부인.
부인께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나이가 별안간 이런 버릇없이 무례한 편지를
올리게 된 죄를 깊이 깊이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부인께선 사뭇 놀라시겠지만 저는 지금 부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제가 저질러온,세상에 더없이 신기한 죄악을 고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 개월 동안 완전히 인간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정말로 악마와 같은
생활을 계속해 왔읍니다.
물론 이 넓은 세상에 어느 한 사람 저의 소행을 없읍니다.만약 이러한 생활
속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저는 그래도 영원히 인간계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즈음 제 마음에 어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읍니다.그리고 아무래도
저의 죄많은 처지를 참회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었읍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는,여러가지로 미심쩍게 생각하실 점도
있겠읍니다만.
부디 어찌되었거나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 주십시오.
그러시면 어째서 제가 그런 심정이 되었는지 또 어째서 이 고백을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가운데서 특히 부인께 말씀드려야만 하는지 그러한 일들을 모조리
명백하게 알게 되실 것입니다.
막상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무엇부터 쓰기시작하면 되겠는지 너무나도 사람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괴기천만한 사실이기 때문에,이런 인간 세계에서 사용되는
편지라는 방법으로는 묘하게 낯간지러워 붓끝이 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망설이고 있기만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뭏든 간에 일의 발단부터 순서를 따라 차근차근 써나가기로 하겠읍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둘도 없이 추악하고 흉한 용모를 타고났읍니다.
이 사실은 부디 똑똑히 기억해 두어 주십시오.그렇지 않으면 만약 부인께서
이 버릇없는 소망을 들어 주시어 저를 만나주셨을 경우,그냥 아무 일도 없는
보통때에도 보기 흉한 제 얼굴이 오랜 세월동안 건강하지 못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만큼 참혹한 몰골이 되어있는 것을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이 부인께서 보시게 된다는 것은 저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저라는 사나이는 어쩌면 이다지도 죄많은 신세로 태어났는지 모르겠읍니다.
그토록 추한 용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슴 속에서는 남모르게 세상에 다시
없는 강렬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답니다.저는 도깨비같은 얼굴인데다가 극히
가난한 한 직인에 지나지 않은 저의 현실을 잊고,분수 없이 달콤하고 사치스러운
갖가지 [꿈]에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만일 좀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더라면 재력에 의해 여러가지 장난에 빠져
자신의 추한 용모에 대한 풀 길없는 괴로움을 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 저에게 좀 더 예술적인 재주가 주어졌었다면,이를테면
아름다운 시가를 읊어 이 세상의 따분함을 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기만한 저는 그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고 불쌍한 한 가구장이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일을 하여 그날 그날의 생계를 이어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읍니다.
저의 전문적인 일은 여러가지의 의자를 만드는 일이었읍니다.제가 만들은 의자는
아무리 까다로운 주문을 하는 사람이라도 꼭 마음에 든다고 하여
각 유명 가구점에서도 저에게는 특별히 기술을 인정해 주어서 일거리는 훌륭한
고급물건만을 돌려주곤 했읍니다.
그럼 고급물건은 등받이며 팔걸이의 조각에도 여러 가지로 어렵고 까다로운
주문이 따르게 마련이고,쿠숀의 상태,각부의 칫수 따위에 미묘한 기호가 있거나
해서,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는,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좀 상상할 수 없을만한
고심이 있읍니다.다만 그래도 고심하면 한 만큼 다 만들어 놓았을때의 기쁨이란
또한 크다고 하겠읍니다.
좀 건방진 말씀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만,그 심정은 예술가가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의자 하나가 완성되면 저는 먼저 자신이 그 의자에 앉아,앉아 있는 느낌이
어떠한가를 시험해 봅니다.그리고 이렇다 할 재미도 없이 따분한 직인생활에서도
그 때만은 뭐라고도 할 수 없는 우쭐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의자에는 어떤 고귀한 분이 또는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께서 앉으실 것인가.
이런 훌륭한 의자를 주문하실 만한 댁이니까 거기에는 틀림없이 이 의자에
어울리는 호화로운 방이 있겠지.벽에는 틀림없이 유명한 화가가 그린 유화가
걸렸을 것이고 천정에는 위대한 보석과도 같은 샹들리에가 늘어져 있을 것이다.
바닥에는 값 비싼 고급 융단이 깔려 있겠지.그리고 이 의자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눈부실 듯한 꽃이 감미로운 꽃향기를 풍기며 화사하게 피어 있을 것이다.
이런 망상에 잠기노라면 어쩐지 자기 자신이 그 훌륭한 방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아서 극히 짧은 한 순간이지만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즐거운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덧없는 망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갑니다.가난하고 못생긴 한 직인에
지나지 않은 제가,망상의 세계에서는 고귀한 지체높은 귀공자가 되어 제가 만든
훌륭한 의자에 의젓하게 걸터 앉아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한 옆에는 언제나
제 꿈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저의 연인이 방글방글 웃으면서 제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있읍니다.그뿐만이 아닙니다.저는 망상 속에서 그 여인과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소근소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저의 이 폭신한 보랏빛 꿈은,순식간에 이웃집 아주머니의
시끄러운 이야기 소리며 신경질적으로 악을 쓰며 울어대는 동네 어린아기
울음소리에 방해되어 제 앞에는 또다시 추한 현실이 그 잿빛 시체를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현실로 되돌아온 저는 거기에 꿈속의 귀공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불쌍하게도 못생긴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그리고 바로 조금 전
저를 보고 방글방글 웃어주던 그 아름다운 연인은...
그런 것이 대체 어디에 있겠읍니까.
그 부근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장난치고 있는 더럽게 생긴 아기보는 소녀조차도
저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 제가 만든 의자만이 지금 꾸던 꿈이 남기고 간 흔적인 것처럼 거기에
딸랑 남아 있읍니다.
그렇지만 그 의자도 머지 않아 어디인지도 모르는,저희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실려가고 마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저는 이렇게 하나 또 하나 의자를 만들어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떠분한 심정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그 어떻게도 형용할 수 없는 언짢은 아주 언짢은 마음은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점점 더 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기
시작했읍니다.
`이런 구더기의 생활같은 생활을 계속하는 거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
저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작업장에서 부지런히 끌을 놀리면서,또
못질을 하면서,또는 자극이 강한 도료를 휘저으면서 그런 똑같은 생각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만.죽어버릴 정도라면,그 정도의 결심을 할 수 있다면,좀 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이를테면.... `
그리고 저의 생각은 점점 무서운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이었읍니다.

마침 그 무렵 저는 일찌기 만들은 일이 없는,크나큰 가죽을 입힌 팔걸이 의자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읍니다.이 의자는 같은 Y시에서 외국 사람이 경영하는
어떤 호텔에 납품할 물건인데,원래는 그 경영주의 본국에서 사들여 올
예정이었던 것을 제가 고용되고 있는 상점이 특별히 운동하여 이 나라에도
외국의 유행품 못지 않게 만들어내는 의자 직인이 있다고 하여 간신히 주문을
받은 것이었읍니다.그런 만큼 저로서도 자는 것도 잊고 먹는 것도 모르고
그 의자를 제작하는데 정말로 온갖 혼을 모조리 쏟아 넣어 정신 없이 일했읍니다
그리하여 막상 완성된 의자를 보니까 저는 일찌기 맛보지 못한 만족감을
느꼈읍니다.그것은 제 입장으로서도 넋을 잃고 바라 볼 정도의 훌륭한 솜씨였던
것입니다.저는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네 개가 한 조로 되어있던 그 의자 가운데의

하나를 햇빛이 잘 드는 마루방으로 들어내다가 유유히 걸터 앉았읍니다.
어쩌면 이다지도 앉은 상태가 쾌적한지 정말로 신통할 지경이었읍니다.푹신하게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그렇다고 너무 물렁하지도 않은 알맞은 쿠숀의 탄력 상태.
일부러 물들이기가 싫어 회색이 고운 본바탕 그대로 씌운 무두질한 가죽의
산뜻한 감촉. 알맞은 경사를 유지하여 살그먼히 등을 받쳐주는 풍만한 등받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양쪽 팔걸이.
그러한 모든 것이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어,혼연히 [안락]이라는 말을 그대로
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읍니다.
저는 거기에 깊숙히 몸을 묻고 양손으로 동글동글한 팔걸이를 어루만지면서
황홀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읍니다.그러자 언제나 그런 때의 버릇으로서
걷잡을 수 없는 망상이 오색 무지개처럼 눈부신 색채를 갖고 차례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그것을 환상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대로의 광경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눈앞에 떠오르기 때문에

저는 혹시 미쳐버리기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슬그머니 무서워졌을 정도였
읍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제 머리속에 문득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읍니다.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것은 꿈처럼 황당무계하고 음침하게 기분나쁜 일이었읍니다.그러나 그 기분나쁜

느낌이 말할 수 없는 매력이 되어 저를 부추기는 것이엇읍니다.
처음에는 다만 제가 정성을 담아 만들은 훌륭한 의자를 내놓고 싶지않다,될 수만
있다면 그 의자와 함께 어디까지라도 따라가고 싶다,그러한 단순한 소망이었읍니
다.
그런데 그것이 황홀하게 망상의 날개를 펴고 있는 동안 어느틈엔지,그 무렵 제
머리속에 곰팡이처럼 피어있던 어떤 무서운 생각과 결부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친 짓을 했던 것입니다.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실제로 실행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저는 급히 서둘러 네 개의 의자 가운데서 가장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의자를
산산히 부셔버렸읍니다.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저의 묘한 계획을 실행하기에
형편이 좋도록 고쳐서 만들었읍니다.
그것은 아주 대형인 안락의자이므로 걸터앉는 부분은 바닥에 닿을락 말락한
데까지 가죽으로 싸여있고 그 밖에 등받이랑 팔걸이는 매우 두툼하게 만들어져
있어,그 내부에는 사람이 한 사람 숨어있다고 해도 결코 밖에서는 알 수 없을
만큼 큰 공통된 공동이 있는 것입니다.물론 거기에는 튼튼한 나무틀과 많은
스프링이 장치되어 있지만 저는 그런 것을 알맞게 세공하여 사람이 걸터앉는
부분에 무릎을 넣고,기대는 등받이 속에 목과 동체를 넣어 마치 의자와 같은
모양으로 앉으면 편안하게 그 속에 들어가 있을 정도의 여유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공을 하는것쯤은 문제없는 일이었으므로,충분히 솜씨있게 편리하도록
만들었읍니다.
이를테면 숨을 쉬거나 외부의 소리를 듣기 위해 가죽 일부에 겉으로 보아서는
조금도 알 수 없을만한 틈을 만들기도 하고,기대는 등받이 내부의 바로 머리옆의
공간에 작은 선반을 만들어 무엇이건 저장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 여기에
물통과 군대용 건빵을 가득 넣었읍니다. )
어떤 용도를 위해 큼직한 고무주머니를 비치하기도 하고 그밖에 여러가지 고안을
하여 먹을 것만 있으면 그 속에 2,3일은 계속 들어가 있어도 결코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었읍니다.말하자면 그 의자가 한 사람의 방이 된 것입니다.
저는 셔츠바람으로 밑바닥에 만들어 놓은 출입구의 뚜껑을 열고 의자 속에 완전히

들어가 버렸읍니다.그것은 실로 이상 야릇한 심정이었읍니다.캄캄하고 답답한,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읍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영락없는 무덤임에 틀림없읍니다.저는 의자 속에 들어감과
동시에 마치 도깨비감투라도 쓴 것처럼 이 인간세계에서 모습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니까요.
오래지 않아 상점에서 심부름 온 사람이 네 개의 팔걸이 의자를 인수하기 위해
커다란 짐수레를 가지고 왔읍니다. ( 저의 제자이자 직공인 사람이 - 저는 그
사나이와 단 둘이 살아왔읍니다 -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심부름꾼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아주 잘 들렸읍니다. )
수레에 실을 때 한 인부가 `이것은 유난히도 무겁군.`하고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의자 속에 앉아있는 저는,저도 모르는 사이에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읍니다만
대체로 팔걸이 의자 그 자체가 대단히 무겁기 때문에 별로 의심받지 않고 그대로
수레에 실려 덜컹덜컹하는 이상한 진동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읍니다.
매우 걱정했지만 결국 아무런 일도 없이,그날 오후에는 벌써 제가 들어 있는
팔걸이 의자는 호텔 한 방에 터억 자리잡고 있었읍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그것은 어떤 개인의 방이 아니라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편안히 신문도 읽고 담배도 피우는,여러 가지의 사람들이 잠시도 쉴새없이
드나드는 글쎄요,라운지라고나 할만한 그런 방이었읍니다.
벌써 이미 알아차리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의 이러한 기묘한 행위의 첫째
목적은 사람이 없는 때를 엿보아 의자속에서 빠져나와 호텔 안을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하려는 것입니다.
의자속에 사람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그런 어이없는 일을 누가 상상인들
하겠읍니까.
저는 그림자처럼 자유자재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뒤지고 돌아다닐 수가
있었읍니다.그리고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할 때에는 재빠르게 의자속의 은신처로
도망쳐 들어와 숨을 죽이고,그들의 얼빠진 수색이 진행되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구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인께서는 바닷가에 물결이 찰랑찰랑 부딪치는 부근에 [소라게]라는 일종의 게가
있는 것을 아실 줄 압니다.커다란 거미처럼 생긴 게인데,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 부근을 내노라하고 뻐기며 돌아다니지만,조금이라도 사람의 발소리가 나면
무서운 속도로 조개껍질 속으로 도망쳐 들어 갑니다.그리고 보기 흉하게
털투성이인 앞발을 조금만 내놓고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읍니다.

저는 꼭 그 [소라게]와 같은 것입니다.조개껍질 대신 의자라는 은신처를 갖고
있고,바닷가가 아닌 호텔 안을 내노라하고 뻐기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저의 이 엉뚱한 계획은 그것이 엉뚱한 만큼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보기좋게 성공했읍니다.호텔에 도착한지 사흘만에는 이미 흡족하게 일을 끝내고
있었을 정도였읍니다.
막상 도둑질을 하려는 그 때의 무서우면서도 즐거운 마음,용케 성공했을때의
뭐라고도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그리고 사람들이 저의 바로 코앞에서 저기로
도망쳤다,아니 여기로 달아났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우스꽝스러움.
그런 것들이 얼마나 이상한 매력을 갖고 저를 즐겁게 해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을 겨를이 없읍니다.
저는 거기서 그런 도둑질 따위보다는 열 배나 스무 배나 더 저를 기쁘게 해준
말할 수 없이 기괴한 쾌락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시 뒤로 되돌려 제 의자가 호텔의 라운지에 놓인 때부터 시작해야겠읍
니다.

의자가 도착하자 한 바탕 호텔의 주인들이 저마다 네 개의 의자에 앉아 상태가
어떤가를 둘러보더니 조금 뒤에는 쥐죽은듯이 조용해서 전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읍니다.
아마 방에는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도착하자 마자 곧 의자에서 나갈 생각
따위는 도저히 무서워서 할 수 없었읍니다.
저는 매우 오랬동안 (다만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만) 조그마한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귀에 모으고,가만히 주위의 상황을 엿보고 있었읍니다
.
한참이 지나자,(아마 복도쪽인가 봅니다.)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울려 왔읍니다.
그러더니 두어칸 저쪽까지 가까이 오자 방에 깔린 융단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변했는데,곧 이어 남자의 거칠은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깜짝 놀라는 사이에 서양 사람인듯한 큼직한 몸이 저의 무릎위에 털썩
떨어져 두어 번 튕겼읍니다.저의 넓적다리와 그 남자의 튼튼하고 큰 볼기는 얇은
가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따뜻함을 느낄 만큼이나 착 달라붙어 있읍니다.
폭 넓은 그의 어깨는 꼭 저의 가슴께에 기대었고 묵직한 양팔은 가죽을 사이에
두고 제 팔과 포개어졌읍니다.그리고 아마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양입니다.
남성적인 향기가 가죽의 틈 사이를 통해 풍겨옵니다.

부인,가령 부인께서 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시고 그 자리의 광경을 상상해 보십
시오.그것은 얼마나 이상한 감각인지 모릅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 캄캄한 의자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겨드랑이에서는
식은 땀을 철철 흘리면서 사고력이고 뭐고 다 잃어 버리고 다만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읍니다.

그 사나이를 시초로 하여 그날 하루 제 무릎위에는 여러 사람이 번갈아가며
앉았읍니다.그리고 아무도 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 그들이 부드럽고 푹신한 쿠숀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실은 저라는 사람의 피가

통하고 있는 육체라는 것을 -
조금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캄캄하고 꼼짝도 할 수 없는 가죽 속의 천지.그것이 얼마나 괴상하고 매력있는
세계인지.
거기서는 사람이라는 것이,평소에 눈으로 보고 있는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생물로
느껴집니다.그들은 목소리와 콧김과 발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그리고 몇몇
개의 오동통한 탄력이 있는 고기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하나하나를 그 용모대신 피부에 닿는 감촉으로 식별할 수 있읍니다.
어떤 사람은 디룩디룩 살이 쪄서 썩은 생선같은 감촉을 줍니다.그와는 정반대로
어떤 사람은 빼빼말라서 해골같은 감촉을 줍니다.그 밖에 등뼈가 굽은 상태,
견갑골의 벌어진 상태,팔의 길이,넓적다리의 굵기,또는 꽁무니뼈가 길고 짧은
상태 등 그러한 모든 점을 종합해 보면,아무리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도 어딘가
다른 점이 있읍니다.사람이라는 것은 용모며 지문 외에,이러한 몸 전체의 감촉에
의해서도 완전히 식별할 수가 있읍니다.
이성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읍니다.보통의 경우는 주로 용모의 아름다움
미움 따위에 의해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겠지만,이 의자속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않는 일인 것입니다.거기에는 발가벗은 알몸인 육체와 목소리의
상태와 냄새가 있을 뿐입니다.

부인.너무나도 노골적인 저의 표현을 부디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거기서 한 여성의 육체에 (그녀는 저의 의자에 걸터앉은 맨 첫번째의 여성이
었읍니다.) 강렬한 애착을 느꼈던 것입니다.
목소리로 상상하면 그녀는 아직 매우 젊고 싱싱한 이국의 처녀였읍니다.마침 그
때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그녀는 매우 기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으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상한 노래를 부르면서 마치 춤이라도 추는듯한 걸음걸이로
거기에 들어왔읍니다.
그리고 제가 숨어있는 팔걸이의자 앞에까지 왔는가 했더니 벼란간 풍만한
그러면서도 매우 부드러운 육체를 제 몸위에 던지는 것이었읍니다.게다가 그녀는
무엇이 우스운지 돌연 아하 아하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그물 속의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튀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거의 반시간쯤 그녀는 제 무릎 위에서 가끔 노래를 부르면서,그 노래에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구불 저리구불 무거운 몸을 놀리는 것이었읍니다.
이것은 실로 저에게는 전혀 예기하지 못했던 놀라 자빠질 큰 사건이었읍니다.
여자는 신성한 것,아니 오히려 무서운 것으로 알고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감히
못하던 저였읍니다.
그러한 제가 지금 보지도 못한 이국의 처녀와 같은 방에 같은 의자에,
그뿐만이 아닙니다.
얇은 가죽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살의 따뜻함을 느낄 정도로 밀착해 있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불안도 없이 온몸의 무게를 제 위에 맡기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허물없는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멋대로인 자세를 취하고
있읍니다.
저는 의자 속에서 그녀를 끌어안는 시늉을 할 수도 있읍니다.가죽 뒤에서 그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맞출 수도 있읍니다.그 외에 어떤 짓을 하던 자유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발견을 한 다음에는 저는 맨 처음의 목적이었던 도둑질 따위는 둘째로
미루고 오직 그 신기한 감촉의 세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읍니다.이것이야말로,이 의자속의 세계야말로 저에게 주어진 진짜
살 곳이 아니겠는가,하고 말입니다.저와 같은 못생기고 그리고 심약한 사나이는
밝은 광명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열등감을 느끼면서 부끄럽고 비참한 생활을
계속해 가는 것 밖에는 어쩔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일단 사는 세계를 바꾸어 이렇게 의자 안에서 거북한 것을 참기만 하면,
밝은 세계에서는 말을 붙여 보기는커녕 곁에 갈 수도 없었던 아름다운 사람에게
접근하여 그 목소리를 듣고 살을 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자속의 사랑!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도취될 만큼 강한 매력을 갖는지 실제로
의자속에 들어가 본 사람이 아니고는 모릅니다.그것은 다만 촉각과 청각과 그리고
얼마 되지않는 후각만의 사랑입눼.캄캄한 세계의 사랑입니다.결코 이 세상의 것은
아닙니다.이것이야말로 악마의 나라의 애욕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세게의 남의 눈에 띄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는 어떠한 이상한
모양의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말로 상상할 수도 없읍니다.
물론 처음의 예정으로는 도둑질할 목적만 이루면 즉시 호텔을 도망쳐 나올 생각이

었읍니다만,이 세상에 더없이 기괴한 기쁨에 정신없이 빠져버린 저는 도망을
치기는 커녕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의자속을 영원한 보금자리로 하여 그 생활을
계속할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밤마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주의에 주의를 다하여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고,또
남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당연히 위험은 없었읍니다만,그렇더라도
수 개월이라는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들키지 않고 의자 속에서
살았다는 것은 아무리 저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읍니다.
거의 하루 종일 몹시 거북한 장소에서 팔을 굽히고 무릎을 꺾고 있기 때문에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완전히 몸을 펴고 똑바로 설 수 없어,나중에는
요리장이며 화장실에 갔다가 오는데도 앉은뱅이처럼 기어서 갔을 정도였읍니다.
저라는 사나이는 정말로 미치광이입니다.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을 참으면서
까지도 신비로운 감촉의 세계를 버릴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그곳을 자기집처럼 생각하는지 계속
머무르는 사람도 있었지만,원래가 호텔이니까 쉴새 없이 손님이 드나듭니다.
따라서 나의 기묘한 사랑도 때에 따라 상대가 바뀌는 것을 어떻게도 할 수
없었읍니다.
그리고 그 여러가지로 이상한 연인들에 대한 기억은,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그 용모에 의한 것이 아닌,주로 몸의 모양에 의해 제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망아지처럼 재빠르고 강하며 늘씬하고 팽팽한 육체를 가졌고,
또 어떤 사람은 뱀처럼 요염하게 꾸불꾸불 자유롭게 움직이는 육체를 가졌으며,
또 어떤 사람은 고무공처럼 살이 토실토실하게 쪄서 윤기와 탄력이 풍부한
육체를 가졌으며,또 어떤 사람은 그리이스의 조각처럼 탄탄하게 힘이 세고
원만하게 발달된 육체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 밖에도 어떤 여자의 육체라도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의 특징이 있고 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옮겨가는 동안에 나는 또 그것과는 다른
이상한 경험도 맛보았읍니다.
그 하나는 어느 때인가 유럽의 어떤 강국의 대사가 (급사들의 소문 이야기로
알았읍니다만 ) 그 위대한 몸을 제 무릎 위에 올려 놓았던 일입니다.
그것은 정치가로서보다도 세계적인 시인으로서 한층 더 잘알려졌던 사람인데,
그런만큼 저는 그 위인의 살결을 알게 된 것이 가슴 벅차도록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그는 제 무릎 위에서 2,3명의 같은나라 사람들과 10분쯤
이야기를 하고는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읍니다.물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저로선 알 수 없었지만 제스츄어를 쓸때마다 뭉글뭉글 움직이는
보통사람보다도 따뜻하게 생각되는 육체의 간지러운듯한 감촉이 저에게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자극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문득 이런 일을 상상했읍니다.만약 이 가죽 뒤에서부터 예리한 칼로
그의 심장을 겨누어 콱 찌른다면 어떤 결과를 일으킬 것인가.물론 그것은 그에게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치명상을 줄 것이다.
그의 본국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고,우리 정치계는 그 때문에 어떤 소란이
일어날 것인가.
신문은 또 어떤 격정적인 기사를 실을 것인가.
그것은 우리나라와 그의 본국과의 외교관계에도 크나큰 영향을 줄 것이며,또 예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죽음은 세계적인 하나의 큰 손실일 것이다.
그러한 대사관이 저 자신의 손 하나를 놀림으로써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저는 이상하리만치 득의에 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또 하나는 유명한 어떤 나라의 땐서가 우리나라에 왔을때,우연히 그녀가
이 호텔에 머물어 꼭 한번뿐이었지만 제 의자에 앉았던 일입니다.
그 때도 저는 대사의 경우와 비슷한 감명을 받았읍니다만,그녀는 저에게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육체미의 감촉을 맛보게 해주었읍니다.
저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야비한 생각따위는 일으킬 겨를도 없이 다만 예술품을
대하는 때와 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를 찬미했읍니다.

그 밖에도 저는 아직도 여러가지의 신기하고 이상한,또는 기분나쁜 숱한 경험을
했읍니다만 그것들을 여기에 자세히 늘어놓는 것은 이 편지의 목적이 아니며,게다가
매우 길어지기도 했으므로 서둘러 가장 중요한 점에 관하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로
하겠읍니다.

제가 호텔에 온지 몇 개월인가 지난 뒤 제 신상에 한가지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호텔 경영자가 어떤 사정으로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어,호텔의 모든
비품이며 장치물을 그대로 어떤 일본인 회사에 양도한 것입니다.그러자 이를
인수한 회사는 종래의 호화로운 영업방침을 고쳐,좀 더 대중성있는 여관으로서
유리한 경영을 목표로 하게 되었읍니다.그 때문에 필요하지 않게 된 비품 따위는
어떤 큰 가구상에 위탁하여 경매하게 되었는데,그 경매 목록 가운데 제 의자도
끼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알자 한 때는 몹시 실망했읍니다.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다시
바깥 세상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까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읍니다.
물론 그 때에는 훔쳐 모은 돈이 상당한 금액이 되어 있었으므로,설사 세상에
다시 나온다해도 전처럼 비참한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외국인 호텔을 나왔다는 것은,한편으로는 크나큰
실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읍니다.
이것은,즉 저는 수개월 동안 그토록 여러 이성을 사랑했지만,상대가 모두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호감이 가는 육체를 지닌
사람이라도 정신적으로 묘한 불만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역시 우리는 같은나라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읍니까.저는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읍니다.
마침 그 때 제 의자가 경매에 나간 것입니다.이번에는 어쩌면 나와 같은
일본인이 사갈지도 모른다,그리고 일본인의 가정에 놓일런지도 모른다,
그것이 저의 새로운 희망이었읍니다.
저는 어찌 되었건간에 좀 더 의자속의 생활을 해 보기로 했읍니다.
가구상에서 2,3일 동안 매우 괴로움을 당했읍니다만,그래도 경매가 시작되자
다행스럽게도 제 의자는 살 사람이 빨리 나타났읍니다.쓰던 물건이었지만
충분히 남의 눈을 끌만큼 훌륭한 의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 사람은 Y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대도시에 사는 어떤 고급 관리였읍니다.
가구상에서 그 분의 댁까지 진동이 심한 트럭으로 운반되었을 때에는 저는 의자
속에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지만,그래도 그런 것은 이번 주인이 제가
바라던대로 일본인이었다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읍니다.
이 댁 주인인 그 관리는 매우 훌륭한 저택을 갖고 있었으며 제 의자는 그곳의
양관에 있는 넓은 서재에 놓여졌는데,저로서 퍽 만족스러웠던 것은 그 서재가
주인보다는 오히려 그 댁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께서 사용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동안 저는 언제나 거의 부인과 함께 있었읍니다.
부인께서 식사하시는 시간과 주무시는 시간을 빼놓고는,부인의 부드럽고
탄력있는 몸은 언제나 제 무릎 위에 있었읍니다.그것은 왜냐하면 부인께서는
그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어떤 저작에 몰두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그것은 여기에 귀찮도록 누누히 말씀드릴것 까지도
없을 것입니다.그녀는 제가 처음으로 접한 일본인이며,더우기 충분히 아름다운
육체를 지니고 있었읍니다.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꼈읍니다.거기에 비하면 호텔에서의
수많은 경험따위는 결코 사랑이라고 이름지을만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 증거로는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는데,그 부인에 대해서만은
저는 그저 저만이 아는 은밀한 애무를 즐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저의 존재를 알리려고 여러가지로 고심한 것으로도 명백할 것입니다.
저는 될 수만 있다면 부인 쪽에서도 의자속의 저를 의식해 주기를 바랐읍니다.
그리고 염치 좋은 이야기입니다만,저를 사랑해 주시기를 애타게 바랐읍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부인께 알릴 수 있겠읍니까?
만약 거기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드린다면,그녀는 틀림없이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주인 어른이나 하인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것입니다.그렇게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다 못쓰게 되어버릴 뿐만 아니라,저는 무시무시한 죄명을 쓰고 법률상의
형벌까지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다못해 부인께 제 의자가 세상에 더 없이 편안하게 느껴지게 하도록
애를 써서 그런 편안한 마음에 애착을 느끼시게 하려고 노력했읍니다.

예술가인 그녀는 틀림없이 보통사람 이상의 미묘한 감각을 갖추고 계실 것이
틀림없읍니다.
만약 그녀가 제 의자에 생명을 느껴준다면,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한
것입니다.

저는 그녀가 제 무릎위에 몸을 맡겼을 때에는 될 수 있는대로 푹신하게,그리고
다정하게 받도록 마음을 썼읍니다.그녀가 제 무릎위,아니 제 품에서 일에 지쳤을
때에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무릎을 살살 움직여 그녀의 몸의 위치를 바꾸도록
했읍니다.
그리고 그녀가 스르르 낮잠을 자려고 하는 경우에는 저는 정말 깨닫지 못할만큼
가만히 무릎을 흔들어 요람의 역활도 했읍니다.
그러한 제 마음의 보답이었는지,아니면 단순히 제 마음이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요즈음에는 부인이 어쩐지 제 의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녀는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길때와 같은,또는 처녀가 사랑하는
연인의 포옹에 응할때와도 같은 달콤한 상냥함을 갖고 제 의자에 포옥 파묻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무릎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태도까지도 매우 정겹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하여 저의 정열은 날로 거세게 타올랐읍니다.
그리고 마침내는,아아 부인! 끝내 저는 제 처지도 모르는,도리에 벗어난 소망을
안게 된 것입니다.
꼭 한번만이라도 저의 마음의 연인의 얼굴을 보고,그리고 말을 나눌 수 있다면,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부인,부인께선 물론 벌써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 저의 연인이라는 분은 아아! 지나친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요.
실은 그 분은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당신의 주인께서 그 Y시의 가구상에서 저를 사오신 뒤로,저는 당신께 미치지 못할
사랑을 바쳐온 불쌍한 사나이입니다.
부인,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입니다.꼭 한 번 저를 만나주실 수는 없으시겠읍니까.

그리고 꼭 한마디라도 이 불쌍한 못생긴 사나이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저는 결코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바라기에는 너무나도 못생겼고 형편없는 저입니다.부디 이 세상에서
더없이 불행한 사나이의 애절한 소망을 들어 주십시오.
저는 어젯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댁을 빠져나왔읍니다.직접 부인께 이런 부탁을
드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도 하고,또한 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당신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시간에는,저는 걱정이 되어 창백한 얼굴로

댁의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버릇없고 무례한 소망을 들어주신다면 부디 서재의 창틀 위에 놓여있는
패랭이꽃 화분위에 당신의 손수건을 올려놓아 주십시요.
그것을 승낙하신 신호로 알고,저는 의젓한 한 사람의 방문자로서 댁의 현관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상한 편지는 어떤 열렬히 기도하는 말로 맺어져 있었다.
요시꼬는 편지를 절반쯤까지 읽었을 때,이미 무서운 예감 때문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벌떡 일어나게 되자,그 기분나쁜 팔걸이의자가 놓여있는 서재에서

도망치듯 나와서,일본식 건물인 거실쪽으로 와 있었다.
편지의 뒷부분은 숫제 읽지 않고,찢어버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께름하게 걸려서 거실 작은 책상위에서 어떻든 끝까지 읽었다.
그녀의 예감은 역시 들어맞았다.
이것이 어쩜,얼마나 무서운 사실이란 말인가.그녀가 날마다 걸터앉아 있던
그 팔걸이의자 속에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남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럴수가!"
그녀는 등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오한을 느꼈다.그리고 언제까지나 멎을줄 모르고

몸이 떨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에 멍해져서,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도무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자를 조사해볼까?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는 설사 이미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그가 먹던 음식이며 그 밖에 그에게 부속된 더러운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저어,아씨마님.편지 왔읍니다."
깜짝놀라 뒤를 돌아보니,그것은 한 하녀가 지금 막 배달된듯한 편지 한통을 들고 온
것이었다.
요시꼬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아들고 겉봉을 뜯으려다가 문득 겉봉에 쓰여있는
글씨를 보자,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편지를 떨어뜨렸을 정도로 심한 놀라움에
넋을 잃었다.
거기에는 조금전의 그 기분나쁜 편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필적으로 그녀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참동안 그것을 뜯어볼까 말까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끝내 그것을 찢어,겁먹은 얼굴로 읽어내려 갔다.
편지는 극히 짤막한 것이었는데,거기에는 그녀를 또 한번 깜짝 놀라게 하는
기묘한 글귀가 적혀있었다.

- 별안간 편지를 올리게 된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요.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작품을 애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로 보내드린 것은 저의 보잘것 없는 창작입니다.부디 한번 보아주시고
비평을 해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이겠읍니다.
어떤 이유때문에 원고는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우체국에 보냈으니까
이미 다 보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읽으신 뒤에 소감이 어떠하셨는가요.만약 그 졸작이 다소나마 선생님께
감명을 드릴 수 있었다면,이렇게 기쁜일은 다시 없겠읍니다.
원고에는 일부러 빼놓았읍니다만,표제는 <인간의자>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었음을 깊히 헤아려 주십시요. -




6년 전에 일어난 일
( THE WAY IT'S SUPPOSED TO BE )

By - Elsin Ann Graffam


우리는 즐거웠다. 아주 어려서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지금 열
살이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둘은 아주 즐거웠다.
엄마는 아빠의 사진을 탁자 위에 놓아 두고 언제나 내게 아빠 이야기만 하였
다.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든가 어떤 식이었다든가 하고... 어쨌든 멋있는 사
람이며 대학에서는 축구 선수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엄
마랑 결혼했다. 또, 아빠가 우리를 위해 주식을 사놓아 아빠가 죽은 후에도
엄마가 일하러 안 다녀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세
살이었고, 아빠의 일을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해 내려고 한 적도 있지만 살
아 있는 것과 똑같으니까. 얼마는 가끔 <네 성적표가 모두 A라는 걸 알면 아
빠가 매우 기뻐하실 텐데...> 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탁자 위의 아
빠 사진이 나 때문에 정말 기뻐 웃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 웃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정말 웃고 있었다. 엄마더라 사람들이 <미망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뜻을 지난해까지 몰랐다. 사진 속의 아빠가 백발인 걸 보
면 아빠는 나이가 많은가 보다. 엄마는 흰 머리카락이 없고 젊고 또 미인이다.
금발머리가 탐스럽고 파랗고 큰 눈을 가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다.
나는 엄마를 놓치지 않을 거야. 다른 아이들은 모두, 크면 플로리다로 가서
보물을 찾는다거나 외국에 가서 괴물이 나오는 호수 속의 괴물을 찾겠다며 집
나갈 궁리를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친구들한테 말할 수는 없다. 한 번은 빌리에게 난 엄마
를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애는 피식 웃어 버렸다. 네 엄마같
이 멋진 엄마를 가진 애는 하나도 없다. 다른 애들의 엄마는 늘 무서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눈 사이에 주름이 몇 개씩이나 그어져 있지만, 우리 엄마는 절대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는다. 1년 전에 내가 그런 사실을 아빠 사진 앞에서 말
했더니 아빠는 <넌 착한 애로구나, 그렌.>하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은 모르지만 아빠는 틀림없이 알고 있다.
너트가 오기까지 무엇이든 잘되어 갔다. 그런데 작년 여름 밤 텔레비전 소리
에 잠이 깬 나는 소리를 좀 줄여 달라고 부탁하러 거실로 나갔다가 낯선 남자
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엄마는 날 보고 깜짝 놀랐다.
"왜요, 엄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을 리 있겠니?"
나는 나이가 많고 코가 큰 너트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아저씨 누구야?"
내가 묻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친구, 너트 씨야."
그런 다음 나는 침대로 돌아왔지만 잘 수가 없었다. 나 말고 엄마에게 친구가
있었다니 생각도 못해 보았다. 엄마가 저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말았으면 하고
그것만 원했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만났으며 몇 번이나 집에도 데리고 왔다.
엄마는 <그렌, 이리 온. 와서 아저씨에게 인사해야지.>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내가 열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두번 다시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러나 효력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엄마가 너트 씨와 외출했다며 근처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
주러 오셨다. 나는 두 사람이 없는 동안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슬퍼 죽어
버린다면 엄마는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나 난 죽지
않고, 엄마와 너트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언젠가 둘은 일주일 내내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엄마는 토요일 아침, 내게 이
별의 키스를 해주며 꼭 안아주었다. 저 보기 싫은 영감이 오기 시작하고부터 모
든 게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 희망은 엄마와 단둘이 지내는 것이다.
뭐가 어쨌든 간에 그것은 우리의 <당연한 모습>이니까.
"깜짝 놀랄 일을 가르쳐줄께."
일요일 밤, 둘이서 다시 돌아왔을 때 너트가 말했다.
"엄마와 아저씨는 어제 아침에 결혼했단다."
"그래, 그렌.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엄마가 아무 말 안 했단다. 우리는
앞으로 행복해질 거야."
우리라고? 그 우리는 나와 엄마가 아니라 엄마와 저 보기 싫은 늙은이겠지.
울다 지쳐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벌써 골백번 죽
었을 테니까. 엄마는 그 남자하고만 떠들고 내겐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나는
날이 갈수록 깊고 검은 구덩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깊고 시커먼 암흑으로.
아빠는 나보다 더 싫은 모양이다. 나는 가끔 난로 앞에 서서 아빠의 사진을 바
라보는데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사진 속의 아빠가 울고 계셨다. 액자에 끼여
있는 유리 위까지 눈물이 흘러넘쳐 탁자 위에 물이 괴여 있다.
그날 밤 내가 아빠랑 이야기를 할 때, 그 물방울이 넘쳐 카펫 위에 떨어졌다.
그때 마침 엄마가 들어와서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거 봐요!"
내가 말했다.
"엄마가 너트와 결혼해서 아빠가 울고 있어요. 자!"
엄마는 이상한지 나를 유심히 보더니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곧장 엄마와 너트
씨가 다투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큰소리를 내는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소파에 책을 내던지고 방을
둘러보았다. 없어졌다. 아빠의 사진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거다.
"엄마!" 나는 소리쳤다.
"어디다 두셨어요?" "그렌, 뭐 말이냐?"
엄마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아빠 사진이 없어요!"
"지금은 너트 씨가 내 아빠란다. 사진은 치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탁자에 이마를 부딪치며 너트는 내 아빠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아빠는 사진 속의 사람밖에 없어. 그 사람이 진짜 우리 아빠야!"
엄마가 말했다.
"그렌, 너도 이제 커서 알 거야. 여자는 남편이 필요해. 네 아빠는 6년 전에
돌아가셨지 않니? 그래서 엄마는 혼자야. 지금 엄마는 엄마를 사랑해 주는 사람
을 만났어. 그게 너트 씨가 엄마 남편이 된 이유야. 그러니 너도 엄마를 위해
빨리 적응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엄마의 두 눈 사이에는 흔히 얼굴을 찌푸릴 때 생기는 주름이 보였다.
그날 밤, 또 나를 돌봐줄 사람이 왔다. 엄마와 너트가 영화를 보러 간 것이다.
두 사람 다 집에 없으니 좋은 기회였다. 엄마 방에 들어가서 옷장 첫째 서랍을
열었더니 생각한 대로였다.
나는 사진을 꺼내어 바라보았다. 복도 불빛으로 아빠의 얼굴이 지금까지보다
더 생생하게 보였으며, 나를 응시하면서 내게 해야할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 나는 캄캄한 터널에서 빠져 나왔다. 모든 게 잘 되었다. 집
에 있는 것은 엄마와 나 둘뿐. 결국 우리는 <당연한 모습>이다. 경관이 몇 명
와서 시체를 운반한 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이 아이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아직 어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
니까요."
엄마는 머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고개를 흔들면서 경관에게 뭐하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난 그 뜻을 모르겠다.
"그 말은 바로 6년 전에도 들었어요!"


의사의 지시
( DOCTOR ORDERS )

BY - JOHN F. SUTER


아프다. 몸속이 아프다. 아니, 몸속은 아니야. 그렇지만 진짜 통증이 없는
부분도 뭔가 욱신욱신한 듯한 느낌, 고통과 피로감이 남아 있다. 시간과 공
간의 감각도 없어져, 느끼고 있는 것은 그것뿐인 듯싶다. 그래도 나는 조금
씩 건강해지고 있다. 조금씩. 그래 확실히 건강해졌어. 나는 좋아져야 해.
좋아질 것이다. 반드시 좋아진다.

"미스터 쇼. 부인은 이제 걱정 없습니다. 한때는 부인과 아기가 위험했습니
다만, 그래도 부인은 잘되었습니다. 물론 전보다 몸은 약해졌지만, 그것은
우리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알았습니다. 빨리 회복되도록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이제 눈을 뜨는 편이 좋겠다. 제프는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격리실
에 있는 것도 이제 괜찮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 비록 그 아이
가 살아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일로는 실컷 울었다. 제프에게 처음 그런
말을 듣고 난 후에... 그러나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
다. 나는 반드시 좋아진다.

"아기가 죽은 사실을 부인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네, 선생님. 처음에는 대단히 괴로웠던 모양입니다. 남자아이였다는 것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사실에는 기뻐했습니다. 결과는 그렇게 되었는데도..."

자, 세상에 되돌아왔다. 방안에는 햇빛이 가득, 꽃도 가득, 그런데 제프는?

"부인에게 아기가 벌써 매장되어 버린 사실을 말씀하셨습니까?"
"아뇨, 아직 안했습니다. 이제 말해도 괜찮다고 해주신다면, 오늘이라도 말
하겠습니다."
"부인이 못하게 하실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까, 미스터 쇼? 장례식을 치르
게 한 것... "
"제시는 분별력이 있는 편입니다, 선생님.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은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제프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그 아이 - 아기 - 가 나와
대면할 수 있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었더라면...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된 것일까? 제프는 어디에 있나? 함께 있고 싶다고 부탁해 두었건만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벌써 일하러 간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그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 난 그런 그가 좋다. 그러니까 그를 위해서 좋은 아이를 낳고
싶다.

"미스터 쇼, 그 일은 당신이 직접 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내가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부인도 사랑 받고 있는 사람한테서 듣는 쪽이 귀에 쉽게 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의사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때때로
있습니다."
"확실히 힘든 역할이군요."

아이는 제프를 닮았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못생긴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미인
도 아니다. 제프는 나의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을 정도로 핸섬하다. 그래서 그가
나의 돈을 결혼했다고 모두들 그런다. 그렇지만 그는 나의 원조를 받지 않았다.
자립심이 강하다. 스포츠용품 매장의 주임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는 자
신의 힘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만약 우리들이 편하게 살려고 하면 둘 다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를 위해서도 잘해내야 한다. 꼭 잘해내야 한다.

"미스터 쇼, 쉽다는가 어렵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됩니
다. 누군가가 당신 부인에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제일 적당합니다. 부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낳으려 하면 자신의 생명은 포기해야 합니다. 실수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꼭 아이를 낳으려 한다면 부인은 죽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납득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어
디 다른 곳에서 살도록 설득할 겁니다. 집에는 아이를 위해 마련해 놓은 방이
있습니다. 그 방을 보면 아내도 괴로워할 거니까요."

입원하기 전에 유언장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것도 거의 대부분 제프를 위한 내
용으로.. 정말 잘 됐어요.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또 필요없게 됐으니까. 남
편은 정말 나에게 잘해주었으니 나도 꼭 그에게...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로의 기색이 역력한 얼
굴에 미소를 지었다. 단정한 금발에 키가 큰 남자가 입구에 서 있다.
"제프,"
그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키스했다.
"제시."
겨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꽉 잡으며 이렇게 말했
다.
"제프, 나 여기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어요. 누구나 많든 적든 문제를 안고 살
아가고 있어요. 우리도 이번 일에 지지 맙시다. 나도 빨리 건강해지겠어요. 그
리고 다음 아기를 만들어요. 가능한한 빨리요. 네?"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 그대로 나왔던 것이다.
"물론이지, 여보. 물론이야."





은 퇴
( RETIREMENT )
BY - KENNETH J. McCAFFREY

마사가 물었다.
"조지, 당신은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죽였어요?"
서랍에서 꺼낸 흰 손수건을 차곡차곡 가방 속에다 챙겨 넣고 있는 조지
프랑켈을 바라보며 큼직한 가죽 의자 깊숙이 마사는 파묻혀 있었다.
얼굴을 들려고 하기는 커녕 조지는 짐 꾸리던 손놀림마저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시원스럽게 생긴 손으로 양말을 가방 가장자리로 밀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별걸 다 묻는군. 도대체 누가 그런 걸 헤아려 본단 말이오?"
몸을 일으킨 조지는 굳어진 등을 펴면서 말을 계속했다.
"18명쯤 될까? 아니, 20명일지도 모르지. 천천히 헤아려 보지 않고는 잘
모르겠는걸. 그런데 도대체 그런 건 왜 물어?"
"그냥 몇 사람쯤이나 될까 궁금해서요."
마사는 두툼한 잡지를 집어들고 건성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만두게 해줄 것 같아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가벼운 말투였다. 그라면 꼭 잘해낼 수 있을 거
라고 다짐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만두지 못하게 할 이유가 없지. 아무튼 이 직업도 다른 직업과 마찬가
지니까. 그자들이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나에게 돈을 주면서
죽이게 하는, 뭐 그런 간단한 일 아니겠어? 그러니까 사람을 시켜서 집을
칠하게 한다든지 자동차를 고치게 한다든지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자기
자신도 물론 할 수 있는 일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맡기면 더
훌륭히 일을 처리해 내기 때문에 말이지."
조지 프랑켈은 언제나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빈틈없이 처리해내고 있었다.
"일도 많이 했고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이만하면 은퇴할 때도 되었잖아?"
"아주 간단히 말해 버리는군요. 마치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들한테 괜히 그 말을 전하러 갈 필요까지 있을까요? 아무래도 제
생각엔 좀 그런데요."
여전히 얼굴을 들지 않고 마사가 잡지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관심을 가지고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흑백이나 칼라로 된 광고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조지가 가방을 잠갔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편이 뒷마무리도 깨끗하지. 또 받아야할 돈도 남아
있어."
조지는 마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단단히 조심도 해두고 있지."
"조심이라뇨?"
조지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마사 옆에 와서 의자 위로 몸을 구부렸다.
"자, 잘 들어 봐. 이제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도 있어.
어디 마땅한 시골이라도 있으면 토지라도 장만해서 주저앉는 거야. 당신만
좋다면 결혼해서 아이들을 줄줄이 낳으며 말이지."
마시는 얼굴을 들고 조지를 쳐다보았다.
"근사하군요. 하지만 저는 아이든 생각지도 않았어요."
두 사람은 함께 미소지었다.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지금은 우선 즐겨보잔 말야."
조지는 옷장으로 가더니 맨 아래쪽 서랍에서 총신이 짧은 38구경 권총을 집
어들었다. 탄창을 뽑아 놓고 아주 능숙한 솜씨로 빙그르르 돌리더니 겨드랑이
에 찬 홀스터에 끼웠다. 그리고 웃옷을 집어들어 깃에 붙여 있는 실밥을 떼내
고는 천천히 몸에 걸쳤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타이를 잠깐 만지작거렸다.
"자,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봐."
마사는 잡지를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조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떠나면 택시를 불러서 우리 짐을 센트럴 아메리칸 라인의 부두로 운반
시키는 거야."
조지는 성급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5분 후 지하실로 내려가서 뒷문으로 빠져나가. 그때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면 안 돼. 알겠지?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거야. 택시를 타지 말고, 파
인 스트리트에서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으로가. 그리고 블랙스톤 호텔에 방을
빌리는 거야."
"잠깐만,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예요?"
"아무 소리 말고 잘 들어 봐. 블랙스톤 호텔에 방을 잡은 다음 30분 후에 식
사를 주문해. 그리고 보이가 나간 다음 비상계단을 이용해 뒷골목으로 내려가
는 거야. 그린 애버뉴의 이 주소로 찾아가서 거기서 기다리면 되는 거야."
조지는 종이 한 장을 마사에게 주었다.
"모두 잘 알겠지?"
"알기야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납득이 가지 않아요. 저는 당신이 이젠 그만
두겠다고 그 사람들에게 말하러 가는 줄만 알았어요."
"미리 신경써 두는 것뿐이야. 별다른 뜻은 없이. 무슨 일이든지 운명에만 맡
겨 둘 순 없으니까. 그리고 만약 순순히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자들은
이미 내 행방까지 찾아낼 순 없을 거란 말야. 자, 그럼 키스해줘. 이젠 떠나
야겠으니... "
조지 앞으로 다가가서 마사는 굶주렸던 것처럼 입술을 겹쳤다. 늘씬한 마사의
몸을 조지는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으나, 마침내 거세게 떠밀었다.
"다녀올께. 방금 전에 얘기했던 것 잘 부탁해."
"조지!"
마사의 목소리에 조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잠깐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조심하세요, 네?"
애원하듯이 마사는 또 한번 불렀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조지는 곧장 나가
버렸다.

얘기는 뜻밖에도 아주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너무 부
드러워서 조지는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조지 프랑켈이 그만둘 결심을 하고 있
는 것을 보스도 이미 오래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보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땐 그만둘 자유가 있지. 나도
머잖아 이 일을 그만둘 작정이야."
끝으로 보스는 일어서서 돈을 꺼내려고 금고까지 걸음을 옮겼다. 보스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얘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조지는 그들과 악수를 나누며 곧 자기만큼 솜씨 좋은 친구나, 아니면 그애 가
까운 사격 명수가 발견될 거라는 식의 농담을 지껄여 보였다. 보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조지의 등을 툭툭 쳤다.
"발견된다고 해봤자 너의 반도 못 따를걸."
보스느 한층 더 껄껄거렸다.
자기 차에 올랐을 때, 조지 프랑켈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 였지만 그 자신
은 꿈에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조지는 차의 시동을 걸고 길 한가운데 차도로 달려갔다. 첫신호등에서 차를 멈
추고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두 사나이가 조지의 바로 뒤까지 차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조지가 예측하던 대로였다.
자, 이 몇 분 안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겁에 질려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권총을 써 먹을 때도 아니다. 이 번잡한 대도시의 거리... 모든 것이 무서우리
만큼 바쁘게 앞으로만 계속 나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잠깐 타이밍을 어긋나게
해서 그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만 된다. 문제는 타이밍 그 자체라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머리카락만큼의 오차가 생겨도 이 판국에서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한
다.
렉싱턴 애버뉴로 몰고 들어가서 조지는 천천히 달리고 있는 버스의 뒤꽁무니에
차를 붙였다. 뒤에서 오던 차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조지의 뒤를 쫓아왔다. 이
번에는 좌측에서 조지를 감시할 모양이었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서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고 차에서 내뿜는 가스 냄새로 기침까지 났다. 조지는 한순간 차에서
뛰어내려 달음질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스스로 끊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쉽게 붙잡혀 어리둥절해진 통행인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그자들의 차 속
에 처넣어지는 게 고작 이겠지. 이 대낮에 길 한가운데서 설마 권총을 쏘아대지
는 않겠지 하는 따위의 생각은 어리석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다섯 블록을 버스
뒤꽁무니에 달라붙은 채 조지는 차를 몰았다. 거리가 서서히 뒤로 스쳐간다. 38
번가, 39번가, 40번가... 신호에 걸려서 차의 물결은 또다시 멈추었다.
다음 모퉁이에 지하철 입구가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뛰어가긴 아직 거리가 멀
다. 걸리적거리는 통행인들이 너무나 많다. 조지는 주머니 속에 잔돈을 헤아려
보았다. 지하철에 뛰어들었을 때 귀중한 몇 초의 시간을 돈으로 벌 수 있을지 모
른다.
푸른빛으로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네거리를 건너서 모퉁
이까지 오자 조지는 갑자기 차를 세우고 재빨리 뛰어내렸다. 바로 뒤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이 한순간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으나, 조지가 차를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허겁지겁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지는 이미 보도를 달
리기 시작했고, 지하철 입구까지 30피트쯤 남았을 뿐이다. 조지는 재빨리 돌아다
보았다. 두 사내는 여전히 어물쩡대고 있었다. 이것으로 조지는 두 사내를 몇 초
동안이지만 앞설 수 있었다. 귀중한 몇 초였다.
조지는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다가오고 있는 지하철의 울림이 귓전에 다가왔
다. 조지에게 떠밀린 한 노파가 양파 보퉁이를 떨어뜨렸고, 젊은 남자 한 명이
조지의 팔을 붙잡더니 도대체 어디까지 갈 작정이냐며 소리를 쳤다. 그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조지는 몸을 솟구쳤다. 뒤에서 회전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아 있는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마침 전차가 미끄러져 들어왔지만,
문이 열리기까지 잠깐 동안의 시간이 안타깝게 길기만 했다. 전차에 오르자마자
조지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전차는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계단을 뛰어내려와
헐떡거리면서 차에 올라오는 손님들은 조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녀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문을 닫으려 하지 않는 차장에게 조지
는 속으로 마음껏 악담을 퍼부었다. 학생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두 단씩
뛰어 내려왔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으나 학생은 한 손으로 문을 떠받치고 억지로
올라탔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두 녀석은 겨우 계단을 내려와서 플랫폼에 우뚝
선 채 물끄러미 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지와 녀석들과의 거리는 이미 100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식은 죽 먹기다. 환하게 밝은 정거
장을 지나서 전차는 컴컴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린 애버뉴에서 조지가 지하철을 내렸을 때는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길모퉁이 집 현관 앞에서 어떤 여자가, 무언가 말다툼을 하는 세 아이에게 늦었
으니 이젠 그만 들어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밖에는 길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다음 모퉁이와 꼭 중간쯤 되는 갈색의 어두운 집 앞까지 와서 조지는 길가에 붙
어 있는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마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딱딱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지를 맞아들인 마사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어서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그래, 일은 잘됐나요?"
마사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아직 타고 있는 담배를 재털이에서 집어들었다.
"그자들도 좋아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날 붙잡아두려 하더군."
조지는 말했다.
"하지만 이쪽에는 단단한 계획을 짜두었으니... 스릴 넘치는 아슬아슬한 게임이
었지만 아무튼 성공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땠소?"
"당신 말대로 했죠."
"잘했어."
조지가 술병을 들고 한 잔 따랐다.
"당신도 마시겠소?"
"아니, 됐어요."
"이 방은 한 달 전에 빌려 두었지. 나의 일은 아무도 모르고, 또 이 방에 대해
서 아무도 아는 녀석이 없어. 이것도 내 계획의 일부라고나 할까."
"그자들도 단념하고 누구든 새 사람을 찾겠지."
"그래요."
마사는 말했다.
"돈도 듬뿍 주니까요. 그들 자신도 할 수 있겠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아
무래도 누군가를 고용하고 자기네들은 명령만 내리는 편이 더 좋은가보죠. 이런
얘기 새삼스럽게 당신에게 하다니 우습지 않아요? 당신이 여기로 곧장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만일을 위해 미행을 붙여둔다고 그들은 말하더군요."
권총을 꺼내 들고 마사는 한 방 쏘았다. 마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비틀거리는
조지의 몸이 낮게 흔들리고 계속해서 총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마사를 쳐다보며 조지의 몸은 천천히 방바
닥을 향해 가라앉기 시작했다. 쓰러진 조지의 몸을 두 다리 사이에 끼고 마사는
또 한 방을 뒤통수에다 쐈다.




회복
( 回復 )
- by 星新一 -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금방을 알 수 없었다. 눈이
무엇인가로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찾으셨군요."
젊은 여자의 친절한 목소리였다.
"여기는 어디죠? 당신은... "
"병원이에요. 저는 간호사구요. 당신은 입원하고 계세요."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곳에... "
"교통사고예요. 차를 운전하시다가 길 옆에 전신주에 충동했어요. 차는 불
타 버리고 선생님은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골절도 있었어요."
"그랬습니까? 그런데 이 눈은 어떻게 된 거죠? 볼 수 있게 되는 겁니까?"
"골절과 내장 상태를 진단하고 문제가 없으면 퇴원하게 되죠."
사정을 알고 나는 안심했다. 차차 생각이 났다. 나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운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나
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기쁨에 넘친 얼굴이... "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고 고귀하며 나를 진심으로 사
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었
다. 그는 몸소리처질 만큼 끔찍한 인물이었다. 그는 50세의 나이로서 정력적
으로 돈을 모으고 금전 만능을 믿고 있는, 키가 작고 뚱뚱한 데다가 입술이
두껍고,송충이 같은 눈썹에 상처자국마저 있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얼굴의 소
유자였다. 그녀도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어 나와 만날 때마다 하소연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가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예요.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아요. 나의 생활은 희망없는 지옥 그 자체예요."
"그녀석,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
"지금 상태로는 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못 견뎌 내가 먼저 죽
을 거예요. 나와 같이 도망가요. 어딘가 먼 곳으로 가서 둘이서 살아요."
"물론 그러고 싶어. 그러나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까? 그 사람은 당신에게
집착하고 있어. 사람을 고용해서 찾게 할 거야. 우리는 곧 발견되고... "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전화가 왔다.
"큰일났어요!"
그녀의 숨가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그이가 취해 돌아와서, 갑자기 쓰러져 움직이지 않아요. 빨리 와주세요."
그녀는 그 말만 계속했다.
나는 급히 차를 몰아 그녀의 집으로 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옆방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그녀의 남편이 쓰러져 있었다. 마치 바
닥에 엎드려 자는 돼지를 연상시켰다.
"죽었나?"
나는 몸을 숙여 손을 대보았다. 맥막이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어.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었을 거야. 빨리
의사를 부르면 살릴 수 있어."
"싫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이 다시 살아나면 끝없는 불행이 다시 시작
된다. 그것을 생각하면 절망감으로 반광란 상태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를 위해 뭔가 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남편 얼굴에 부드러운 베개를 얹
고 힘을 주었다. 한참 후 맥박을 재어보니 완전히 멈춰 있었다.
"죽었어."
내가 말했다. 공포도 반성도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야!"
그녀는 기뻐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당신이 죽였다고 의심받게 되지. 사고라고 해도 세상은
당신을 살인자 취급할 거야."
"어떻게 해야지? 도망가 버릴까?"
그녀도 냉정을 찾았다.
"그렇게 하면 더 의심을 받아."
"어떻하지?"
"시체를 어딘가에 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이상한 소문도 나지 않고, 사고처
럼 되어 버리거든."
"좋은 생각이에요.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그렇게 해요."
나도 그것이 그렇게 나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피도 흐
르지 않았고, 이곳에서 죽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둘이서 시체를 차에 옮겼다. 밤이 깊었기 때문에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빨리 돌아오세요. 무서워요."
"그건 안 돼. 당분간 만나는 것은 금물이야.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어. 당
신은 누가 묻더라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알았어요."
우리들은 손을 잡았다. 사랑의 전류가 강하게 흘렀다.
나는 차를 몰았다. 때때로 옆자리의 시체가 뭔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등
에 소름이 끼쳤다. 인전이 없는 곳에 차를 세우고 시체를 내렸다. 맥박을 다
시 한번 확인했다. 완전히 멈추어 있었다.
또 차를 운전했다. 완전히 끝났다고 하는 안도감과 함께 잠시 공포감이 느
껴졌다. 그것을 떨쳐 버리려고 차의 스피드를 더욱 올렸다.
이것으로 모두 잘된 거다. 두 사람의 장애물은 이제 없어졌다. 즐거움이 가
슴 가득 차왔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더욱 스피드를 올렸다. 그때 사고가 일
어났다. 나는 의식을 잃었고 지금에야 정신이 든 것이다. 죽은 남편의 저주
가 사고를 일으켰을까? 병실 침대 위에서 문득 그런 일을 생각했다.
며칠이 지났다. 나의 회복은 순조로와 간호사가 말했듯이 눈의 붕대가 제거
되었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전신이 붕대였다. 다리와 손은 깁스로 고정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골절이나 피부의 아픔도 차츰 사라지고 진통제의 양
도 줄어들었다. 담당의사도 회복이 빠르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체력이 회복
되는 것은 나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입원하고서 상당한 기일이 지났다. 이제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달라고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곧 와주었다.
"이런 상태인 줄은 몰랐어요. 알았으면 더 일찍 왔을 텐데... "
"그것보다 당신은? 의심받지 않았어?"
"무사히 끝났어요. 보험금도 받고, 재산상속도 끝났어요. 이제 남은 일은
당신과 사는 것뿐이에요."
"혹시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가끔 불안했어."
"그럴 리가 있겠어요?"
확실히 그럴 리는 없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범이라는 비밀이 있고, 그것이
두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맺어주고 있으니까. 그때 의사가 간호사와 같이 들어
왔다.
"붕대를 풀어야 합니다. 당신은 심한 화상을 입어 얼굴이 형편없었죠. 우리
들은 피부이식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때 얼굴 피부의 공급이 있었습니다.
길에서 죽은 남자로, 부인에게 연락했더니 금방 허락해 주었습니다."
의사는 내 머리에 감긴 붕대를 가위로 잘랐다. 드디어 붕대가 완전히 벗겨
졌다.
"이럴 수가... 설마 여기에 사용할 줄이야... "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거
울을 보았다. 그녀 남편의 흉칙하게 생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연인에게 바치는 시
( Copy Cat )
- by Jack Ritchie


잠시 쉬려고 무덤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손전등 빛이 나를 향해 비쳤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거친 목소리였다.
"묘를 타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일어서며 삽을 들었다.
"혼자서 힘들겠군."
같은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땅은 아직 부드러워요. 새 묘이기 때문에.... "
어느 틈에 왔을까? 지금은 달빛에 확실히 사람이 보였다. 두 명은 경관,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묘지 관리인이었다.
관리인이 입을 열었다.
"이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묘를 파내려고 했겠지만, 내가 개를 찾으러 왔
다가 발견하고 신고한 거죠."
그는 내가 팠던 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1피트 정도밖에 파지 못했군요. 관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당신은 무엇을 파낼 생각이오?"
경관 한 명이 물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묘비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시(詩)를 파내려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내가 말했다.
"나는 마서가 죽었을 때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죠. 그런 나의 실의, 사랑
을 읽은 깊은 슬픔을 시로 썼습니다. 사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쓴 가장
아름다운 시로, 마서에게 바치는 시입니다. 마서가 영안실에 있을 때 그 시
를 관 속에 넣은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파내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서의 미덕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자기 본위니까요.
나의 불멸의 작품을 이대로 묘에서 썩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녀의 미덕
, 숭고함, 아름다움을 모르게 되죠.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
경관은 동료를 잠시 보고 나를 향했다.
"그것이 어떻다는 거지? 본인이 직접 쓴 것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게 아닌
가?"
"공교롭게 나는 기억력이 나쁩니다."
경관은 흰 이를 보이며 웃었다.
"왜 손 안에 있을 때 복사해 두지 않았소? 당신은 그녀의 남편이오?"
"아닙니다. 멀리서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경관은 머리를 저었다.
"지금까지 이상한 사람을 많이 봤지만 자네는 금메달감이군. 때문에 점점
믿을 수 없네. 나는 자네를 흔히 있는 묘지 도둑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는 내 팔을 잡았다.
"잘 알겠네. 경찰서에 가서 지금 얘기를 다시 해주게."
경찰본부에 가서 한참 동안 기다린 후에 윌슨 경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는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을 의뢰하겠지만 우선 내가 몇 가지 묻
겠네. 자네는 시체 애호증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나?"
"네, 하지만 나는 시체 애호증은 아닙니다. 나에게 시체는 시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서의 혼입니다. 영혼입니다. 천국으로 불
려간 영혼입니다."
"그러나 자네의 시는 관 속에 있다는 말인가?"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몇 살인가?"
"서른한 살입니다."
"자네가 파던 묘의 임자, 칼슨 마서는 마흔여섯 살이네."
"나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숭배하는 것은 나이를 먹지 않는 그녀 내
면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는 또 보고서를 봤다.
"그녀는 기계공의 부인으로 약 2주간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죽었네.
신장병이었지.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었어."
"그녀의 존재는 남편 한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는 영원한 여성이었
습니다."
"그녀의 가족과 만난 적이 있나?"
"나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마서 이외는... "
나는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만난 것은 마음속에서 뿐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나?"
"먹고 살 만한 것은 있습니다."
"단지 시를 쓰고 있을 뿐이군. 출판된 책은 있나?"
"아직 없습니다. 편집자가 보는 눈이 없는 거죠. 내 시가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비출판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돈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건 아니겠지?"
"전혀 없습니다."
경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싶은 거지?"
"그렇습니다. 신인작가가 팬을 얻는 것은 아주 어려워요."
그는 웃었다.
"그래서 선전만 하면 유명하게 된다 그건가? 나쁜 평판이라도 상관하지 않
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자네 계획은 이미 알고 있네. 묘를 파는 도중에 잡히기를 바랬겠지. 잡힐
때까지 묘지에 있었을 거야. 그리고 흔히 하는 수법으로 신문기자를 불러모
아 얘기할 각본도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손바닥으로 땀을 닦았다.
"자네가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일부러 묘를 판 것도 알고 있어."
"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책상에서 종이를 들었다.
"자네의 서툰 얘기를 듣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백과사전을 찾아봤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나는 기침을 했다.
"아뇨."
"로세티는 19세기 영국의 시인이며 화가였네. 1862년 그의 처가 죽자 그는
몇 편의 시를 관에 넣어 묻었네. 몇 년 후 생각이 나서 묘를 파냈지. 그의
시는 1870년 로세티 시집으로 출판되었어. 자네가 하려고 한 짓은 이것이지?
로세티의 흉내를 내려고 했지? 묘지를 파헤친 죄로 자네 이름을 경찰에 기록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자네 생각대로 되는 거지. 개인 선전을 위한 연
극을 경찰이 도와줄 순 없어."
"경감님, 난 사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내 시집
을 당신에게 바칠 수 있다면... "
그의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나가! 다시 묘지 주위를 서성거리면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야."

내가 보스인 닉 힐리에게 모든 얘기를 하자 그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놈이 좋다. 책을 읽으면 때로는 도움이 되지."
보스는 금고에 가서 1만 달러를 꺼내어 내게 건네줬다.
"2년 정도 정신병원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기의자보다는 낫지."
보스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좋아, 약속대로 승격시켜 주지. 웨스트코스트에 가서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담당해 주게. 현재 담당자인 로페스는 심장이 아주 나쁘네."
보스는 내 얼굴에 담배연기를 뿜었다.
"조직을 위해 일해 주게. 묘한 생각을 하거나 자네 멋대로 일을 처리하면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자네가 찰리 리슨을 없앴듯이 누군가가 자네를 없앨
거야."

찰리 리슨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직을 배반한 친구였다. 그 정보
를 들은 보스는 나에게 그를 없애라고 명령했다. 바로 어제 아침 나는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했다.
"찰리 리슨을 잊지 말게. 그도 한때는 조직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었지.
그러나 결국 돈의 유혹에 넘어갔어. 자네도 잘못하면 그와 같은 꼴이 될 걸
세."
보스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는 빙긋 웃었다.
"그때는 본인의 묘를 파야겠죠?"
내 말에 보스는 크게 웃었다.
"자네는 영리하니까 잘할 거야. 묘지건은 아주 멋지게 처리했어. 물론 운도
따랐지만 말야."
윌슨 경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진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 경감은 자기 꾀에 자기
가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나도 보스처럼 큰소리로 웃고 싶었다. 경감을 위해서. 그리고 시를 위해서.
나는 묘지에서 경관에게 잡혔지만 임기웅변으로 위기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서라는 이름은 묘비를 보고 안 것이다. 물론 시 같은 것은 있
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찰리 리슨을 파묻고 있었다.



휘발유 1갤런
( A GALLON OF GAS )
- BY WILLIAM BRITTAIN

샤이 코틀이 일어나자, 그자 앉았던 의자는 두꺼운 판자로 된 마룻바닥을
거칠게 긁었다. 그는 방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철제 난로로 다가가서 나무
토막을 몇 개 집어넣었다. 춥고 폭풍이라도 불 것 같은 으스스한 밤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진눈깨비가 유리창에 부딪쳤다. 집 밖에 있는 사람들
에게는 끔찍한 밤이리라.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등유램프 빛으로 우편 주
문 카탈로그를 읽기 시작했는데, 난로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바람소리 때문에 누군가 현관 문을 두드리는 것을 그는 알지 못
했다. 두번째 두드리는 소리는 더 컸다. 샤이는 그때 두 페이지에 걸쳐 실
려 있는 사냥용 셔츠를 감탄하며 보고 있었다. 대체 오늘 같은 날 이런 보
잘것없는 것을 찾아오는 녀석은 누구일까? 그는 현관의 녹슨 빗장을 풀고
겨우 문을 열었다. 눈보라가 안으로 불어닥쳤다. 밖에는 회색 모자에 레인
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서 있었다. 번쩍번쩍했을 최신형의 그의 구두는 지
금은 젖은 진흙투성이 가죽에 불과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에 다
가가서 손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온 모양이군. 샤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독한 날씬 데요."
추위 때문에 이빨을 부딪히며 남자가 말했다.
"그렇군요."
샤이는 이렇게 대답하고 침묵을 지켰다. 이 사나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기 전까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나이를 젖은 코트를 벗었다.
"나는 존... "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존 데이스라고 합니다."
"나는 샤이 코틀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차에 휘발유가 떨어져서요. 8마일 떨어진 곳에서 바닥이 나버렸지 뭡니
까?"
데이스는 그가 온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겠습니다. 이 길로 온 것은 하늘의 도움이지요.
세다빌리지로 가는 길로 갔더라면 25마일이나 걸어야 됐을 겁니다. 아마도
거기 도착하기 전에 얼어 죽었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는 도중에 세다빌리지에 들렀으니까요. 그런데 휘발유
를... "
"여기에 휘발유가 있다고 생각하오?"
"밖에 급유기가 있는 걸 봤거든요."
"밤에 봐서 그렇군요. 모두 녹슨 고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7년 동안
휘발유를 취급했었죠. 그런데 주에서 다른 계곡 쪽으로 고속도로를 내는
바람에 그만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 길로 지나다니는 차는 일주
일에 겨우 한두 대밖에 없답니다. 더구나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고... "
데이스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보였다.
"몇 주일이 지나면 고속도로 순찰대가 여기에 와서 당신을 도와줄 거요."
샤이는 시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요. 지금 당장 휘발유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오
늘 밤에 말예요."
"오늘 밤 꼭 차를 움직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나요?"
샤이는 데이스를 주의깊게 보았다.
"집사람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대로 놔두면 얼어 죽을 거요."
"오, 그랬군요!"
샤이는 몇 초 동안 생각했다.
"2갤런이면 됩니다."
"여기를 떠나는 건 무리야.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럽고, 세다빌리지로 가
려면 25마일을 가야 해요."
"우리는 목적지로 가야 돼요."
"스티브스위니 쪽 길로 가면 작은 비행장이 있는데, 그곳이라면 휘발유
를 살 수 있겠지."
샤이는 시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물론 여기서 17마일이나 떨어져 있지만... "
데이스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샤이를 쳐다보았다.
"헬렌을 이곳으로 데려오겠소."
데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왕복 16마일을 걸어야 할 거요."
샤이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창문으로 다가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차까지 가는 데 아무렇지 않을 거요. 그러나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더구나 여자와 같이 말이오. 누구라도 얼어 죽을 거요."
"그럼 대체 어떡하면 좋죠?"
"에, 예를 들어... 예를 들어서 말이오. 뒤뜰에 1드럼의 휘발유가 있다고
합시다. 당신에게 조금 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오."
"휘발유가 있단 말입니까?"
데이스는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돈을 내고 사죠. 2갤런이면 충분하니까요."
데이스는 지갑을 꺼냈다.
"잠깐만, 젊은이!"
"네?"
"어디가 휘발유를 갖고 갈 생각이오? 설마 양복 주머니에 휘발유를 갖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통 같은 것을 빌릴 수도 없단 말입니까?"
"물건을 빌려주려고 가게를 열어 놓은 것은 아니니까."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통 하나를 꺼냈다.
"그러나 당신에게 휘발유 통을 팔 수도 있지."
데이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좋습니다, 아저씨. 한 통에 얼마입니까?"
"5달러."
"네? 너무 비싸군요. 휘발유 1갤런에 5달러라고 하면, 마치 여행자의 금
품을 뺏는 강도와 다를 게 없군요. 여기 있습니다."
데이시는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샤이에게 내밀었다. 샤이는 그 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5달러라는 것은 통 값이야. 휘발유 값은 포함
되어 있지 않아."
"5달러에 휘발유 값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구요? 세계 어떤 주유소에 가
도 그런... "
"물론 그렇지. 그러나 오늘 밤 당신이 갈 수 있는 주유소는?"
데이스는 눈송이가 유리 창틀에 쌓이는 창 밖을 바라보며 무기력한 분노
로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휘발유 값이 얼마 입니까?"
"사정을 봐드려서 1갤런에 50달러."
"50달러라니! 고속도로 강도라도 그러지는 않을 거요."
"휘발유 값은 계속 오르니까."
샤이는 조용히 말했다.
"농담하시는 건 아니겠죠?"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오."
데이스는 절망적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제기랄! 60달러밖에 안 되는군."
"그러면 1갤런밖에 살 수 없소. 통까지 사더라도 5달러 남는군. 난로 쬐
는 값은 안 받겠소."
샤이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답군요. 그러나 꼭 2갤런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2갤런을 살 돈이 없잖소? 당신 부인이 돈을 갖고 있다면 모르지
만... 지금쯤 몹시 떨고 있을 거요."
"그럼 이 시계를 드리겠습니다."
데이스는 손목시계를 풀었다.
"시계는 필요 없소. 시간이란 이곳에서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 내가 당신
이라면 다른 차가 지나갈 ㄳ까지 여기 머물면 되지. 방값은 잘해 주겠소.
하루건 일주일이건... "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샤이는 빈통을 들고 건물 뒤로 가서는 드럼통에 휘
발유를 채우기 시작했다. 샤이가 돌아왔을 때 데이스는 코트를 입고 있었
다.
"여기 돈이 있소. 잘 먹고 잘 사슈."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버릇없는 말이군."
샤이는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은 뒷 돈을 받아 주의 깊게 세기 시작했다.
"55달러 맞소. 당신과 거래하게 되어서 기쁘오. 휘발유를 배달해 주고 싶
지만 우리 트럭은 겨울에 사용하지 않아서... 두세 시간이면 이곳으로 돌
아올 수 있을 거요, 데이스 씨."
데이스는 저주의 소리를 퍼부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으로 나갔다. 바
람과 눈이 잠잠해진 한밤중이 되어서야 샤이는 자동차가 멎는 소리를 들었
다. 그는 문을 열고 날씬한 여자와 같이 차에서 내리는 데이스를 봤다. 여
자는 찬 공기에 대해 아무 보호도 될 것 같지 않은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실내로 들어온 그들은 난로 곁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입술은 추위로 새파
랗게 되어 있었다.
"우리 집사람 헬렌이오. 휘발유를 더 사기로 했소."
데이스가 소개했다.
"기꺼이 팔지요. 1갤런 더 사실 겁니까?"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헬렌이 말했다.
"좋소, 좋아. 다만 문제되는 것은 가격이 또 올랐다는거요. 1갤런에 65달
러요. 물론 통은 필요 없을 테니 그 값은 제외한 거요."
헬렌이 지갑을 얼었다.
"이거면 충분할 거예요.":
헬렌은 돈다발을 샤이 앞에 던졌다. 그것은 조그만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샤이는 그 다발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데이스는 샤이
의 놀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모두 돈이라니... "
"당신이 원하는 거죠?"
헬렌이 물었다.
"그렇소. 그런데 잠깐! 종이 끈에 뭐라고 씌어 있는데... "
샤이는 데이스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다빌리지 은행이라고 인쇄돼 있겠지, 늙은이?"
데이스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 차 트렁크에 그런 돈뭉치가 많이 있네. 우리가 세다빌리지에 들렀다
고 당신에게 말했을 텐데... 그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
"당신들, 은행을 털었군."
샤이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런데 왜 아까는 돈이 없다고 했소?"
그들을 비난하듯이 말했다.
"걸어오면서 그 돈을 갖고 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데이스 씨, 당신이 여기 온 것을 아무도 모르오.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겠
소."
"헬렌, 줄을 갖고 와 묶어 버려."
"제갈을 물릴까요?"
"소리치게 놔둬. 그가 말했듯이 당분간 이곳에 아무도 안 와. 우리가 떠나
기까지 시간도 충분히 있고... "
샤이는 의자에 꽁꽁 묶였다. 철사가 그의 손목을 파고들자, 도움 없이는
그것을 풀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다리도 의자 다리에 묶여 위치를 바꿀
수 없었다.
"필요한 만큼 휘발유를 가져가겠소."
데이스가 그를 내려다봤다. 샤이는 잠자코 있었다.
"당신이 말한 공항은 이번 일을 계획할 때부터 알고 있었소."
데이스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17마일 떨어져 있다는 것. 그곳에 있는 파일럿이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기로 했지."
"그러나 당신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휘발유가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
하지 못했어요."
헬렌이 책망했다.
"그래, 휘발유를 다 써 버렸지. 당신이 2갤런을 팔았다면 우리는 여기에
오지 않고 공항으로 갔을 거야. 그러나 당신의 탐욕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
지 오게 됐지. 뉴스를 들어 우리가 은행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아무것도 듣지 못했소. 라디오가 없으니까. 정말이오."
휘발유가 채워지자 헬렌이 밖으로 나갔다.
데이스가 다시 한번 샤이를 묶은 줄을 살펴보았다.
"데이스."
목쉰 소리로 샤이가 말했다.
"뭐요?"
"이곳은 언제나 눈이 내린 후 무시무시하게 추워진다네."
"그렇다고 들었소."
"기온이 상당히 내려가지. 저 난로의 불은 기껏해야 한 시간밖에 안 갈거
요."
"당신 말이 맞겠지."
"나는 얼어 죽을 거요, 데이스."
"헬렌이 추위 속에 떨고 있을 때 당신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어."
데이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최후의 미소
( THE LAST SMILE )

By - Henry Slesar
먼저 거칠고 교만한 태도가 없어졌다. 사형수용 독방 문이 쾅 닫히는 순간
핀레이는 기가 꺾였다. 그후로는 다만 불평을 하거나 비협조적이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은 독방 벽의 시멘트 블록과 같은 보호색을 띠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목사조차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변호사에게
도 적의를 품고, 간수에게 마음을 굳게 닫은 채 오직 자신 속에 갇혀 지냈다.
형 집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자면서도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스물한
살인 핀레이는 공범과 함께 늙은 점원을 잔혹하게 때려 죽인 것이다.
닷새째 되던 날 아침, 핀레이는 사형을 언도 받는 무서운 꿈을 꾸다가 잠이
깨었다. 꿈이 현실이라는 걸 알자 쇠창살에 몸을 부딪쳐 울부짖기 시작했다.
간수들이 독방 안으로 들어와 겨우 꽁꽁 묶었지만 핀레이는 미친 듯 소리칠
뿐이었다.
한 시간 뒤, 형무소의 담당목사가 와서 틀에 박힌 대사를 외웠다. 다 큰 아
이 같은 모습의 목사는 슬픈 표정을 한 땅땅한 은발의 사내였다. 그러나 그
대사에는 어딘지 애조 띤 구석이 있어 핀레이는 여느 때와 달리 귀를 기울였
다.
"이봐, 그처럼 난폭하게 굴지 말고 나를 좀 들어가게 해줘. 아주 중요한 일
이 있으니까."
목사가 말했다.
"중요하긴 뭐가 중요해? 이제 기도 따위는 넌더리가 난다."
핀레이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자, 날 들어가게 해줘."
목사는 애원하다시피 했다. 독방 안의 젊은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사를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목사가 들어오자마자
젊은이는 후회했다. 목사는 주머니에서 검고 작은 책을 꺼냈던 것이다.
"집어쳐! 그런 건 이제 됐어! 성서 같은 건 보기도 싫어!"
핀레이가 소리쳤다.
"자, 잠깐 여기를 보게. 이걸 보라구."
얼굴을 붉히면서 목사가 말했다.
핀레이는 마지못해 목사에게서 작고 두꺼운 책을 받아들었다. 독방 밖에는
복도의 불빛을 받고 서 있는 배불뚝이 간수의 옆얼굴이 보였다.
핀레이는 열린 페이지를 보았다. 묵시록. 책갈피에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고,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나를 믿어라.

핀레이는 힐끔 보고 나서 목사의 천사 같은 얼굴을 보았다. 어린이 같은 부드
러운 표정이었다.
"그럼 말씀을 전해주지. 시간이 없으니까."
목사는 쾌활하게 말했다.
핀레이가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쉿!"
목사는 통통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말씀을 전하는 대신 기도를 하자."
목사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영문을 모른 채 핀레이는 상대가 하는 대
로 하였다. 목사는 확신에 찬 단조로운 목소리로 구원과 속죄에 대한 기도를 외
웠다. 기도가 끝나자 목사는 방긋 웃고 방을 나갔다.
목사는 저녁때가 되어 다시 왔다. 이번에는 젊은이가 아무 망설임 없이 키 작은
목사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목사가 안으로 들어오자 핀레이는 쉰 목소리로 속
삭였다.
"목사님, 가르쳐주세요. 윌리의 부탁이지요? 윌리 팍스?"
"쉿! 세상 이야기는 그만두자."
목사는 불안한 듯 간수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월리가 분명해. 월리가 날 구해낼 거라고 생각했어."
핀레이는 토해내듯 말했다.
목사가 작은 책을 펼치자 핀레이는 빙긋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야기하세요. 듣고 있으니... "
"성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했네."
목사는 의미 있게 말했다.
"성서는 자신을, 친구를, 그리고 신을 믿으라고 했어. 알겠지?"
"이해해요."
핀레이가 말했다.
그날 밤, 핀레이는 형무소에 와서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에 목
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간수는 핀레이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목사가 오자 핀레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
목사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같이 읽어 봅시다."
목사는 긴 문장을 읽었다. 핀레이는 불안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참을 수 없어 폭발하려 했을 때, 목사는 작은 성서를 핀레이에게 주었다.
표지 안에 작은 메시지가 끼워져 있었다.

준비 완료.

목사는 죄수를 향해 미소짓고는 어깨를 토닥인 다음 간수를 불렀다.
핀레이의 사형집행일 아침에 변호사가 왔다. 늘 윗입술을 물고 있는 키 작은 남
자였다. 감형 소식을 가지고 온 게 아니라, 그저 의무적으로 온 것이었다. 변호
사는 처형을 기다리는 젊은이가 전과 달리 솔직해진 데에 깜짝 놀랐다.
오후에 형무소장이 와서 핀레이에게 점원을 살해한 공범을 밝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핀레이는 웃을 뿐 목사를 만나고 싶다고만 했다. 형무소장은 말
을 잊은 채 한숨을 쉬었다.
저녁 6시에 목사가 왔다.
"어떤 식으로 할 건가요?"
핀레이가 속삭였다.
"여길 부수고 나가든지, 아니면... "
"쉿!"
작은 남자가 훈계했다.
"신의 힘을 믿어야 해."
핀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같은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 10시 반, 간수 둘이 핀레이의 독방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바짓단에 칼
자국을 넣었다. 그 흉직한 의식은 핀레이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도
망칠 수 있다는 것이 다시 의심스러워졌다.
핀레이는 아우성치며 목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작은 남자는 급히 와서
신앙과 용기에 대해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말투로 이야기 했다. 목사는 이야기
하면서 접은 종이쪽지를 젊은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핀레이는 그것을 재빨리 침대 밑에 감추었다. 다시 혼자가 되자 핀레이는 그 종
이쪽지를 펼쳐 읽었다.

도망은 마지막 순간에.

남은 시간 동안, 핀레이는 그 종이쪽지를 갈가리 찢어 독방 마루에 뿌렸다.
11시 5분 전, 올 것이 왔다. 간수 둘이 핀레이의 양팔을 끼고 걸었고 형무소장이
뒤따라왔다. 목사는 녹색 철문이 있는 복도 끝까지 핀레이를 따라올 수 있었다.
기자와 참관인이 지켜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목사는 핀레이에게 몸을 기
대며 속삭였다.
"곧 윌리를 만날 수 있어."
핀레이는 윙크로 답하고 간수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꽁꽁 묶이면
서도 핀레이의 표정은 조용했다. 밧줄이 얼굴 앞에 내려왔을 때 핀레이는 미소지
었다.

처형이 끝나고 형무소장은 목사를 소장실로 불렀다.
"핀레이의 공범, 윌리 팍스 이야기는 들었나요? 오늘 오후 총에 맞아 죽었다던
데... "
"예, 들었습니다. 죽은 이의 영혼에 평안이 깃들기를!"
"핀레이가 그토록 침착했다는 게 이상하군요. 당신이 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몹
시 거칠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목사는 두 손을 다소곳하게 앞으로 모았다. 그 표정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희망을 갖게 했을 뿐입니다."





살인 중독증
( INSIDE OUT )
- by R.L Stevens


앞으로 침실에 사체를 두어야 한다. 마침내 거실이 가득 차버렸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드디어 올 날이 왔다는 건 충격이다. 이제
전혀 빈 공간이 없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네 줄로 사체가 쌓여 의자와 발을
딛을 작은 공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꽉 찼다. 텔리비젼까지 가지고 나와 버렸
다. 텔레비전을 치우다니 견딜 수 없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침실
까지 사체를 두어야 할 때를 가슴 답답하게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을 침대 발
치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실은 이제 꽉 찼다. 끝이다. 다
써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명에 따른다. 이대로 살인을 계속해 간다면
저 수녀원장이 주교에게 말했듯이, 사체는 당연히 침실로 날라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살인은 계속해야만 한다.
오늘 밤 관리인 브라운을 죽인다면 사체는 침실 구석의 옷장 옆에 두지 않
으면 안 된다. 처녀지의 개발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섹스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당연히 숨겨진 의미 따위도 없다. 상징도 아니다.
다만 살인이라는 순수하고 슬픈 일이다.
브라운은 쓰레기통을 로비에 굴러다니게 해서는 내 방을 소음으로 가득 채
운다. 그리고 계단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치우는 법이 없다. 나는 여러번
그자에게 이런 식으로가 아니라 저런 식으로 해달라고 부탁도 하지만 여전히
들어주지 않는다. 우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체한다. 듣지 못한 체, 달리
방법이 없는 체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3층에 갈색으로 변한 지저분한 귤껍질이 네 개나 떨어져 있는 것
을 보았다. 나 같은 성격의 소유자는 자신이 직접 뭔가 할 수도 없고 여기서
이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 먼저 사체를 처분하는 문제
가 있다. 그것을 전부 끄집어내는 건 정말 큰일이다.
어쨌든 브라운은, 아니 브라운의 사체는 오늘 밤 침실에서 자게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공의 살인이다. 나는 현실의 대량 살인마는 아니다. 나의 살
인은 상상의 살인으로, 일 년 간 내가 이 곤란한 현실 대응책에 빠져든 이래
상상의 사체가 천천히 우리 집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귀찮게 구는 판매
원, 사람을 안달하게 하는 통행인, 다른 사람의 건강을 신경 쓰지 않는 회사
동료. 나는 머릿속에서 복잡한 살인을 하고 몸으로는 그 사체를 이리 날라오
는 팬터마임을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들 사체 - 모두 곱게 죽은 모양이
다 - 를 여기에 두고 있다. 이 환상 덕에 난 겨우 이 끔찍한 도시 생활을 견
딜 수 있다. 마음을 초조하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추방하지 않고는 난 살
아가지 못한다. 물론 이 환상은 위험한 수단이어서, 어느새 난 위험한 선을
넘어 자신이 진짜 이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믿어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균형을 맞추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이 환상을 사실답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자질구레한 부수작업이 필요
하다. 거실에 있던 것 모두 - 의자와 발판만을 제외 하고 - 를 치워 버리기가
가슴 아팠지만 의지를 가지고 해냈다. 이러한 가정을 유효히 하자면 얼마간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손목이나 팔에 기술을 습득하는 오랜 각고의 노력
없이 바이올린을 켤 수는 없다. 성가신 서무처리 절차를 연구하지 않고는 현직
장의 정식사원이 되지 못한다. 상상의 사체를 책임 있게 처리하는 일 없이 상상
의 대량 살인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치형의 아파트 출입구에서 더러운 걸레로 내 차의 앞장을 닦는 저 게으른
놈. 놈은 내가 여섯 달 전에 죽여 주었지만 아직 저기 있다. 오늘 아침에도 약
간 열린 창으로 내가 15센트밖에 주지 않았다고 지독히 무례하게 군 저 남자.
그러나 놈의 걸레조작은 내 눈에 비치지 않아 무례함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웃
어줄 수 있다.
결국 이런 것이다.
<너 같은 놈은 벌써 존재하지도 않아, 반년 전 너를 죽이고 나서 현실세계 속
의 네 행동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걸레는 코딱지만한 얼
룩에 지나지 않고 너의 무례함은 노래다. 나는 그쪽 길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너의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늑골 사이에 예리한 칼을 꽂아 사체를 트렁크
에 담고 피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은 채 내 방으로 옮겨 온 거야. 사실 너는 트
리스와 내게 정신분열증의 징후가 있다고 떠든 의사 사이에 누워 있다. 너는 이
제 내 것이다. 알았어?>
아니, 알 리가 없다.
이 불쌍한 사내 - 웨이트리스와 의사 그리고 다른 놈들 모두 - 는 이 일의 의미
를 이해할 수가 없다.
두 시간쯤 전에 나는 브라운을 그의 방에서 죽였다. 놈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브라운, 난 이제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은 정말 무책임해. 귤껍질만이 아니야.
화장실 수도꼭지가 헛돌았을 때의 변명, 로비를 청소할 때의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디 그뿐인가? 무엇보다 날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그 방자한 태도야.
내가 간단한서비스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인정하려 들지 않아.
내 필요를 무시한 것은 인간성을 무시하는 거야.>
나는 비상시에 사용하는 정교한 22구경 피스톨로 그자의 관자놀이를 쏘았다. 사
체를 질질 끌어 문을 닫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는 하이든의 교향곡 101번 다장조가
흘러 나왔다. 그자에게 클래식 음악 감상의 취미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그자에 대한 생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 내 침대 발치에 누워 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깊은 숨을 들이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늘 회의중에 담당 여의사가 두 번이나 내 손을 쳐서 방심하고 있던 내 의심을
깨웠다. 아무래도 내가 지독한 노이로제에 걸려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회의중 내 주의력이 떨어진 것은, 그녀가 몇 주 전에 질식사당
하여 내 아파트 안에 죽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녀에게 설명한다는 말
인가!

왜 그런지 브라운의 사체는 묘한 냄새를 풍긴다. 이건 처음 있는 일이다. 내가
정돈을 하기 좋아한다는 건 자타가 인정하는 바인데, 자기 아파트 안에서 묘한 냄
새(물론 담배와 커피 이외에)가 난다는 것은 참지 못한다. 내가 날라와 쌓아둔 사
체는 모두 썩을 걱정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브라운의 시체는 다르다. 점점 냄새
가 지독해져서 어젯밤에는 잠들 수 없었을 정도다. 가정용 냄새 없애는 스프레이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밤 돌아와 보니 상태는 더 고약해졌다.
침실에 사체를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 거였는데 하고 후회도 해보았지만 달리 방도
가 없다. 여기 말고는 달리 방도 없고, 욕실에 두고 싶지가 않다. 역시 한계가 있
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잠시 참고 있는 사이에 익숙해지든
지 냄새가 없어지지 않을까?
브라운의 사체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 결국 냄새를 참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그런 일을 하고 싶지가 않다. 위험한 전례를 만들어 이제까지의 패
턴을 깨게 되기 때문이다. 사체를 처분해 버린다면 브라운의 죽음은 상징이 아니게
되고, 또 브라운을 그렇게 한다면 다른 시체들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 죽일 사람들의 사체까지도 말이다. 결국은 나의 이 사업
은 자멸의 위기에 처한다. 내가 한 일에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브라운을 불러 상상의 브라운의 사체를 같이 치우는 일도 생각해 보았
다. 그러나 그것도 그만두자. 재미있는 일이긴 하겠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할까, 이대로 둘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 며칠 그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이제 큰일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니, 브라운의 사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내일 아침 쓰레기 치우는 사람에게 가져가도록 하자,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걱
정은 나의 이제까지의 패턴이 깨졌다는 것, 그리고 또하나 소방수 같은 방식으로 끌
어내갈 때 기묘하게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사체 가운데
서는 정말 이상하게 진짜 같다.
상상의 죽음 속에서조차 이 남자는 - 바로 이 남자답게 - 내게 고민거리를 준다.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의 경관이 와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뒤에는 아파트 주인이 기웃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심문을 받는 동안, 기회를 봐서 경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려 두 사람을 죽여 버리자,
그래서 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다지 쉬울 것 같지가 않다.
거실에 계속 사체를 쌓아두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이 유일한 실책이다. 오래된
사체를 처분하고 대신 새것을 쌓아두는 게 좋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고 경관이 말했다.






그해 겨울의 불씨

양 귀자

한창 집값이 폭등하던 몇년 전에는 몇 사람만 모이면 모이면 집에 얽힌
기가 막힌 삶의 드라마들이 단연 인기였다. 어떤 이는 횡재를 하고 또 어
떤 이는 폭삭 망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몇번을 들어도 항상 새로운 경악
과 등골의 오싹함을 맛보여 주어서 소시민들의 모임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
곤 했었다.
그 때에 비해서 요즘에는 집값에 얽힌 묘기대행진 같은 경험담들이 많이
사그라진 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부동산으로 인간성 자체가 우롱당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에 너도 나도 합의를 하고 있는 처
지이고 막대한 물량공세로 실제 부동산 가격 하락의 기세가 상당 기간 이
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등골 오싹한 이야기들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런 세상이 오게 될 가능성도 아직까지는, 절망적이지
만, 없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한층 더 대담무쌍해진 묘기대행진들이 속출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몇 사람만 모이면 자신들이 당한
강도나, 절도 혹은 폭력에 관한 경험담들이 빠짐없이 등장해서 그나마 별
재미없는 삶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엊그제도 잘 아는 회사원 한 사람이 늦은 밤 귀가길에 속칭 아리랑치기
라는 수법으로 늘씬하게 얻어맞고 지갑까지 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섬ㄳ
했던 때가 있었다. 그 다음날에는 인근 동네의 꽤 잘사는 집에 대낮에 강
도가 들어서 파출부와 안주인을 인질로 행악을 부렸다는 소식이 들려와 우
리 동네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그런 등꼴 오싹한 이야기들은 그야
말로 무궁무진할 정도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
람의 목숨까지 앗아갈 각오를 하고 덤비는 이런 처절한 무용담이 언제까지
우리들을 위협할 지 그것을 생각하면 끝모를 절망에 빠지곤 한다.

그럴 때,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때, 나는 내
가 만난 한 사람을 떠 올렸다. 그 만남의 처음에서 끝까지를 차근차근 생
각하면 이 삶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 비로소
출구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말하자면 이 회상은 절망의 치유이
고 세상에 대한 애정의 회복법이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시간을 몇 년뒤로 돌려야만 한다. 이야기를 시
작하기에 앞서 미리 주인공의 신분까지 밝히자면 그 역시 도둑이라는 것이
다. 그러니까 나도 지금 내가 겪은 도둑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 놓겠다는
것이다. 하나만 더 사전적인 지식을 제공하기로 한다면, 그 도둑은 나에
게서 '불'을 훔쳐갔다. 그는 불도둑이었다.

지금은 도시가스를 때고 있지만, 몇 년전에 살던 그 집은 연탄 보일러로
난방을 하게 되어 있는 집이었다. 연탄을 집어 넣는 구멍이 세개, 그리고
한 구멍에 세장의 연탄을 집어 넣도록 되어 있는 보일러를 온전히 간수하
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어서 날씨가 차가워지면 나는 숫제 연탄 보일러
를 위해서 일상의 시간표를 다시 조정해야 했던 집이었다.
그토록이나 소중히 간수하는 연탄 보일러에 심상챦은 이상이 생기기 시
작한 것은 그해 연말, 그러니까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겨울의 어
느 날부터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일러실에 가 보면 분명히 세구멍에서
활활 타고 있어야 할 연탄불이 두개밖에 남지 않고 다른 하나에는 새 연탄
이 까맣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밑불이 시원챦아 미처 불이
붙지 못한 채 꺼져 버린 것인가 했었다. 그래서 다음날 저녁에는 부러 아
주 벌겋게 달아오른 밑불에다 새 연탄을 갈곤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른 처방도 여러 가지로 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나와보면 반드시 연탄불 하나가 사라져 있다는 것, 결국 나는 누군가 나의
불을 노리고 있다는 결론을 얻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독주택들이 흔히 그렇듯 연탄불 세개만으로는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엄
청난 외풍을 감당할 수 없어 따로 히터까지 쓰고 있는 이 한겨울에 연탄불
도둑이라니, 이건 좀 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오직 불을 꺼
뜨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아침 저녁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문안드리듯이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정성을 생각하면 약이 오르는 일이기도 했다.
하기야 내 집의 구조가 연탄불 도둑이 들기에는 안성맞춤이기는 했다. 안
채는 2층에 있으면서 보일러실은 뒷담 바로 옆, 한데나 마찬가지인 위치에
돌아앉아 자리잡고 있었다. 담장이라고 해야 어린이들이 뛰어넘을 수 있
는 높이이고, 이런 식의 허울뿐인 담장 너머는 잡초만 우거진 공터였으니
한번 길이 든 그 주인공이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아주 양심이 없는 도둑은 아닌 셈이었다. 멀쩡한 새연탄을 올때
마다 한장씩 놓아두고 가는 것을 보면 그런 대로 예의는 갖추고 있는 인물
이었다. 아침에 내려가서 보일러의 뚜껑 세개를 열어 볼때마다 나는 쓴웃
음을 지고는 했다. 나는 결국 그가 놓아두고 간 새 연탄에 매일밤 불이나
붙여주고 있는 꼴이었으니까. 사라진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고 남은
것은 침묵같은 새 연탄 한장, 나는 점차 불씨를 훔치는 주인공이 누구인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번씩이라면 행여 게으른 이웃 주부들 중의 하나라고 의심할 만
도 했다. 외출을 하거나 깜박 다른 일에 몰두하면 십중팔구 꺼트리기 쉬
운 것이 연탄이니까, 그러나 이렇게 매일 밤이라면 아무래도 살림하는 아
낙은 아니었다. 남들이 다 잠든 밤중에 연탄불을 훔치러 다닐 정성이 있
다면 차라리 자기 연탄 아궁이 간수하는 쪽이 훨씬 수월 할 테니까. 그렇
다면 대충 짐작이 가기도 했다.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늦은 밤이 되어야
셋방에 들어와 겨우 잠이나 자고 나가는 젊은 공원들이 많은 동네였으니
그들 중 누구의 짓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 증거로 신정연휴 사흘 동안은 우리집 보일러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연탄불 훔치는 일에도 신정연휴가 있는 것은 아닐테
고, 이 독한 한과에 사흘씩이나 냉방에서 잘 수 있는 무쇠인간도 없을 테
니, 그렇다면 그동안에는 연탄불따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는 따뜻하고 정겨
운 고향집에 설쇠러 갔다는 줄거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런 추측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연탄불이 그대로 건재해 있는 그 사흘동안
내 마음은 어지간히 불편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쩔 작정으로 연탄불을 훔
치러 안 오는 거야? 내일도 안 오면, 정말 가만 있지 않겠어. 차라리 활
활 타오르는 불을 빼가는 쪽이 더 견디기 쉽지. 누군가 불기 하나없는 얼
음 같은 방에서 자고 있다고 상상하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 지독해....
그렇게 신정연휴가 지나자마자, 그는 어김없이 한밤중에 우리집을 방문
하여 새해의 첫 연탄불을 가져갔다. 그가 다녀갔음을 확인하고 나니 이상
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그가 영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대견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럴 바엔 아예 그와 나 사이에 일종의 규칙같
은 것을 만들어 놓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도둑에게 게임의 룰을 설명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우선 하얀 종이에 화살표를 큼직
하게 그려서 어둠 속에서도 눈에 잘 뜨일 수 있게 빨갛게 색칠을 했다.
그리곤 그 표지판을 세개의 연탄 화덕 중의 하나인 맨 왼쪽 뚜껑 옆에 얌
전히 올려 놓았다. 한밤중이라 해도 조금만 유의해서 본 다면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만한 화살표였다. 내가 그 화살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별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불은 훔쳐가시되, 이왕이면 왼쪽 구멍의 불을 가져가 주시면
고마벴다. 뭐 그정도으 의사표시였다. 왼쪽 화덕은 온수를 위한 것이어서
밤중에는 그다지 절실한 편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나머지 두 개로도 얼
마든지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서로간에 별 피해는 없었을 것이
었다.
표지판을 붙여 놓은 그날 밤, 나는 일치감치 집안의 불을 끄고 어둠 속
에 숨죽여 앉아 있었다. 물론 현장에서 그를 붙잡아 곤욕을 안겨줄 생각
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나는 다만 화살표로 표시된 우리들의 암호가 제대
로 소용이 되고 있는 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우리의 불도둑이 말귀
를 잘 알아 듣는 사람인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거기다 운이 좋으면 내가
만든 불씨가 춥게 사는 누군가의 손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
이었다.
은밀한 기대와 약간의 흥분 속에서 나는 깊어가는 밤의 새밀한 기척들을
낱낱이 가려 듣고 있었다. 보통으로 들어 온 소리라 하더라도 밤중에는
뭔가 색다르게 느껴져 오는 법이었다. 특히 깊은 밤에는 더욱 그렇다.
밤중에는 유별나게 세상 속의 소리들이 증폭되는 탓일까, 고양이 발자국
소리도 땅을 울린다고 여겨진다. 하물며 쇠붙이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쯤
이야 잠들지 않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한테는 천둥치는 것과 다름아
니게 금방 전달되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틀림없었다. 나는 미리 열어 두었던
뒷문으로 조심스레 빠져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지 않더라도 난간에 몸을
기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면 벌건 연탄불이 담을 넘어가는 현장을 충분히
볼 수 있다고 나는 믿었었다. 그러나 뒷문에서 난간까지의 그 짧은 거리
를 가는 동안 내가 너무 신중했던 모양이었다. 꽤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아래를 굽어 보고 있었지만 내 눈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도 그는 나보다 한 발 앞서 이미 일을 끝낸 모양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서둘러 사라지는 그의 발자국 소리마저도 나는 놓쳐버리고 듣지 못하였다.
하기야 우리집 보일러실 드나든 경력이 그세 얼마인가, 불을 훔쳐내는 그
의 솜씨가 가히 수준급에 이른 것도 당연할 터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협조사항은 어김없이 지켜져 있었다. 나는 손전등까지
챙겨들고 기어이 보일러실로 내려가 그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
는 정확히 왼쪽 구멍의 연탄불을 가져감과 동시에 화살표가 그려진 우리들
의 표지판까지 가져 간 것을 보면 이 신호는 완벽하게 소통되었다고 이해
해도 좋았다. 당신이 제시한 게임의 규칙은 한번만 일러 ㄳ 충분하다, 나
는 절대 룰을 어기는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다, 우리의 불도둑은 화
살표를 가져감으로써 나한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그정도
의 의사표시도 해석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었던가.

이제는 후일담이다.
우리의 불도둑은 그 겨울 내내 한번도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가끔 보
일러실 방문을 거르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방문을 한 바에야 반드시
왼쪽 구멍에만 손을 대었다. 이제는 나도 아침마다 보일러실에 내려가 없
어진 불에 대해 이리저리 신경을 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불이 그대
로 있으면, 어젯밤에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었던 게지,
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불이 없어진 날에는,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나눠줄
수도 있는 이 삶이 고맙고 소중했다. 그렇게 우리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길을 어기지 않고 잘도 그 겨울을 지냈었다.
봄이 오자 당연히 한밤중 보일러실을 찾아드는 방문객의 발길도 멈추었
다. 그래도 한동안은 왼쪽 구멍의 연탄 화덕에 싱싱한 밑불을 챙기느라 신
경을 썼지만 그는 더이상 불을 훔치러 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리는 봄
과 함께 헤어졌고 다음 겨울에도 행여나 했지만 더 이상의 만남은 없었다.
그는 아마 우리 동네를 떠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다음 해에 그곳을 떠났다. 이제는 겨울이 와도 버튼
만 누르면 금세 온 집안이 후련해지는 가스 보일러를 때면서 가끔씩 이렇
게 중얼거리며 살고 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많이 좋았어....






피고측의 증언
By - Graham Greene (1904 ~ )

법원을 오래도록 출입해 왔던 고참 기자인 나로서도 이제껏 본일이 없는,
그것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극적인 재판이었다. 신문 지상에서는 '파커
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온 그 강력사건의 재판을 방청한 나로서는, 어쩌면
일생에 한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한 기묘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검사측이나 변호인 측에서 채택한 정황 증거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결정
적으로 달라질 만한 상황에서는 간혹 배심원들의 무거운 침묵이 법정의
분위기를 좌우하곤 한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불쑥
제기된 하나의 정황 증거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백팔십도 달라진 예가,
특히나 간혹씩은 결정적인 오심(誤審)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가 이제까
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누가 봐도 이번 사건은 그럴 만한 소지가 없는 경우였다. 피고가
살인을 저지른 상황을 그대로 목격한 증인이 있는 마당이니까 뭐 더 할
말이 필요하겠는가. 검사의 논고가 진행되는 동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무죄를 선고받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고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하지만 떡 벌어진 체격을 가진 남자 였다.
그는 특히나 언뜻 보기에도 튼튼한 하체 근육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어느
모로 봐서도 살인을 저지를 만큼 흉칙한 인상을 충분히 풍기고 있었다.
그러한 점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던지, 검사는 이례적으로 네 명이나 되는
현장 증인의 출석을 요구하고 있었다. 피고인은 노스웨드 거리에 있는 조
그만 빨간색 집에서 도망치는 것을 목격당했던 것이다. 그때의 시간은 대
략 새벽 두 시쯤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 시간, 노스웨드 거리 15번지에 살고 있는 사몬 부인은 마침 잠이 오
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그녀는 현관문에 달린
장식용 방울이 딸랑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이 밤중에 누구일
까 싶어서 창문쪽으로 다가간 사몬 부인은, 지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아담스'라는 사내가 파커 부인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던 것
이다. 그는 막 그 집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는데, 장갑을 낀 손에는 망치
가 들려져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근처의 수풀 속으로 던지는 것을 사몬 부인
은 분명히 보았다. 게다가 그 사내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직감
으로 언뜻 사몬 부인네 창쪽을 올려다 보았는데, 그 순간 불운하게도 그
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나고만 것이었다.
부인은 침착하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채찍을 높이 치켜든 조련사
앞에 선 동물의 그것처럼, 사내의 눈은 격렬한 공포의 빛을 띄고 있었다.
사내의 야수와 같은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는 네 명의 증인들은 하나같이
오래도록 겁에 질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헨리 마크듀라는 증인은 사건 당일 심야에 차를 급하게 몰고 가다가, 노
스웨드 거리 모퉁이에서 피고인 아담스를 칠 뻔했던 사람 이었다. 그는
무엇엔가 홀린 사람마냥 멍한 표정으로 길 한복판을 걷고 있더라는 것이
었다.
또 다른 증인은 윌리 노인이었는데, 파커 부인 집과는 이웃인 12번지에
살고 있는 그는 그날 밤 어디선가 의자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그는 저만치 서 있는
아담스의 등을 보았고, 이내 뒤돌아 선 그의 툭불거져 나온 눈을 보았다.
사내를 목격한 사람은 로렐 아베뉴에도 또 한 명이 있었다. 그러니 그
날 밤 사내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셈이다. 마치 멀건 대낮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나 진배가 없었던 것이다.
검사의 말은 자신에 차 있었다.
"피고측에서는 증인들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피고 아담스는, 사건이 일어난 2월 14일 새벽 두 시엔 집에 있었다고 주
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증인의 증언과 피고인의 불량스럽기 그지없
는 용모를 참작하신다면, 배심원 여러분들께서 그같은 터무니없는 주장
의 가능성을 인정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상황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교수형이 떨어질 일만 남았
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했던 경관과 부검을 한 의사가 나와 으레 그렇듯 판에
박힌 증거를 제출한 후, 첫번째 증인으로 사몬 부인이 불려 나왔다. 정
직하고 착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얼굴 생김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녀는, 일단 증인으로서는 퍽 적절한 사람으로 보였다.
검사가 천천히 말을 이끌어내자, 약간 스코틀랜드 말씨를 쓰는 그녀는
확고한 어투로 증언을 계속했다.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지도 않고, 붉은
색의 법원 옷차림의 판사와 속기사 앞에서 필요 이상의 거드름을 피우거
나 하지도 않았다.
"저는 그를 목격한 후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경찰에 전화를 했습니
다."
"그때 목격하신 그 남자가 지금 이 법정 안에 있습니까?"
검사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피고석에 앉아 있는 덩치 큰 사
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내는 짐승처럼 커다란 눈으로 무심히 부인쪽
을 마주보고만 있었다.
"예, 바로 저 사람입니다."
"확실합니까?"
"틀림없습니다."
정말이지 간단하게 마무리가 된 일이었다.
"사몬 부인, 대단히 감사합니다."
검사는 이 말을 끝으로 의기양양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변호사가
반대심문을 할 차례였는데, 나처럼 많은 살인사건을 취재해 본 경험이 있
는 기자라면 그가 어떤 식으로 반격을 해올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
이었다.
처음 어느 만큼까지는 나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사몬 부인, 당신의 중언에 한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시력은 좋으신 편입니까?"
"이제껏 안경을 껴본 적은 없습니다."
"연세가 쉰 다섯이시지요?"
"쉰 여섯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신이 목격하셨다는 남자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는 거지
요?"
"그렇습니다."
"그때가 새벽 두 시였는데요. 그렇다면 상당히 눈이 좋으신 편이로군요.
사몬 부인?"
"그건 아닙니다. 달이 훤하게 떠 있었던 데다가, 그 사람이 이쪽을 올려다
볼 때 마침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비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목격하신 남자가 바로 여기 있는 이 피고인이 틀림없다
고 자신할 수 있으신 겁니까?"
마지막에 던진 변호사의 그 질문이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나로선 알 도
리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같은 질문을 해봤자 부인의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닌가.
"예,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잘못 보거나 할 만큼 특징없는 얼굴
도 아니니까요."
그러자 변호사는 잠시 법정 안을 휘 둘러본 후 다시 물었다.
"사몬 부인,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법정 안을 둘러 봐 주시지 않으시겠습
까? ... 아니오, 피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스씨, 잠시 일어나 주
시기 바랍니다."
변호사의 말에 방청석 뒤쪽에서 한 사내가 일어섰다. 떡 벌어진 체격과 근
육질의 팔뚝, 툭 불거져나온 두 눈, 그리고 심지어는 꼭끼는 푸른색 셔츠와
넥타이까지도 똑같은, 그 사내는 피고인의 혐의자와 판에 박은 듯이 닮은
모습이었다. 그들 둘은 바로 쌍둥이 형제였던 것이다.
"자 이제 잘 생각해 주십시오, 사몬 부인, 파커 부인의 집 뜰에다 망치를
버린 사람이 바로 피고인과 동일 인물이라고 당신은 여전히 확신할 수 있으
십니까? 혹시 저기 있는 쌍둥이 동생의 짓이었다고 말하실 수도 있는 것 아
닙니까?"
부인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비교해 볼 뿐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피
고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는 짐승처럼 거대한 사내, 그리고 방청석 뒤
에 서 있는 그와 똑같은 모습의 또 다른 사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사몬
부인을 마주보고 있었고, 부인은 종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재판은 이미 결말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목격한 사내가 피고인
이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증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쌍둥이
동생에게도 알리바이는 있었다. 그도 그 시간에 아내와 함께 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피고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
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물론 살인을 저지른 것이 동생쪽이 아닌 쌍둥이 형
쪽이었다는 전제를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피고가 벌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를 지금의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기묘한 하루는 또 다른 결말
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사몬 부인을 따라 법정을 나온 나는, 몰려드는 인파들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물론, 보기 드문 재판의 주인공들인 쌍둥이 형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경찰이 나서서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역부
족이어서, 차도쪽을 통제하는 게 고작이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재판부는 그들 형제를 뒷문으로 나가도록 조치
를 했는데 형제쪽에서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는 형제 중의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정문을 나서다가,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나는 무죄가 된 거지?"
사고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2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
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상황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는데, 쌍둥이 중의 한
사람이 밀려드는 군중들에 의해 달려오는 버스 앞쪽으로 떠밀쳐졌다는 것이
었다.
사내는 생쥐같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뿐,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는 마
치 피살된 파커 부인마냥 두개골이 박살난 채 죽고 만 것이다.
그것이 신의 복수였을까? 만약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것을 알고 싶다.
남겨진 또 하나의 아담스는 시체 곁에서 일어나 사몬 부인쪽을 똑바로 쳐
다보았다. 그의 툭 불거진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고 있
는 그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여전히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
다.
만약 당신이 사몬 부인의 입장이었다면, 당신은 그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을 것인가?





바이러스...

서 영 덕

달수는 달려 가고 있었다. 마치 끝이 없는 터널 같은 곳에서 어둠을
헤치며 달려 가고 있었다. 달수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마치 금방 세수를
하고 난 사람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은 '내가
지금 왜 뛰는 것일까?'하는 물음이었다. ------'쫓기고 있나? 누가 날
쫓지? 내가 누굴 쫓아 가나? 아니면 그냥 뛰고 있는 건가? '
계속 뛰면서 생각해 보았지만 계속 물음표 뿐이었다.
"젠장...난 이게 한계야..."
뜀박질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그때 뒤에서 무엇인가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괴상한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
보았다. 그때 달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괴물이 큰입을 벌리며 달수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어..어...으악...."
달수는 눈을 떴다.
"꿈이었구나...소개팅하는날 재수없게..."
부시시 일어나 시계를 보니 6시 30분. 학교에 가야할 시간.
대강 씻고 대강 챙겨 들고 집을 나서며 배웅하는 어머니께 말했다.
"엄망..오늘 스쿨 버스표 사걸랑..전철 패스도.."
"넌 무슨 스쿨 버스표를 일주일에 스무장씩 쓰니? 패스도 그렇고."
"아이...왔다 갔다하면 많이 쓰게 돼요..빨리..시간 없어요."
"옛다. 그대신 이달 용돈은 더 없는줄 알아."
달수는 퍼런 배춧잎 두장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집을 나섰다.

'오늘 따라 수업이 왜 이리도 지루하다냐...'
달수는 이따가 저녁에 있을 소개팅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배 여학생을 졸라 복학한지 1년 만에 처음 하는 소개팅이어서 벌써
몇주일전부터 손꼽아 오지 않았던가.
'자금은 배춧잎 두장이면 충분하고...카페에서 나오면 어딜 가지?...'
'6시에 수원역 근처면 이 강의 끝나고도 3시간이나 남는데...당구장에서 시간
이나 때울까나..'
'으흐흐...떨린다...'
'저녁 식사는 칼로 썰어 먹어야지..아주 품위있게...'
달수는 교수님의 강의를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 보며 오늘의 작전을 생각
했다.
"자..오늘은 여기까지. 레포트는 다음주 월요일까지 제출토록."
교수님께서 나가시자 강의실은 이내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찼다.
"달수야. 뭐할 꺼냐?"
달수의 동기인 영태가 물었다.
"으응...도서관에나...가볼까..."
"너 참 안 좋은 버릇 생겼구나. 학생이 깡패냐? 도서관에 가게."
"아냐..오늘은 공부해야돼. 먼저 간다."
달수는 가방을 얼른 챙기며 강의실을 나왔다.
'영태 녀석 한테 걸렸다간 집에 못가지..소개팅은 고사하고...'
당구든 술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하는 영태의 성격을 잘 아는 달수는
오늘 만큼은 그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으로 가던 중 달수는 오늘 미팅의 주선자인 혜선이를 만났다.
"선배님 어디가요?"
"응..시간 때우러 도서관에.."
"아니, 도서관에서 달수선배 ㄳ기란 불가능한 일인줄 알았는데.. 좌우간 오늘
미팅 잘 하셔야 해요. 진희 그 애 좀 까다로와요. 상대방의 매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 사람의 모든것을 말해 준다고
믿거든요."
"걱정마라. 매너하면 이 달수아니냐."
"그리구...그애는 생각이 굉장히 보수적이예요. 아마 아주 친해지기 전에는
그애 지갑 꺼내는 걸 못 보실껄요. 전에 교회 오빠를 소개 시켜 줬다가 그
오빠가 현대 여성은 데이트 자금의 일부를 부담할 의무가 있다고 농담을
했더니 진희가 천원짜리 한장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고는 나가 버리더래요.
나중에 교회 오빠가 진희 좀 만나게 해달라고 우리집에 전화를 얼마나 했었
다고요.. 진희는 그렇게 한번 갈리면 끝이예요..자존심이 엄청세다고요 ..."
"뭔 애가 그리 도도하냐?"
"선배가 예쁜 애 소개해 달랬잖아요. 진희랑 명동 나가면 방송국 PD라느니
CF감독이라느니 하는 사람들이 막 쫓아 다닌다고요. 난 안중에도 없구."
"알았다. 이따가 늦지나 마라."
"네, 선배님도요....참 이거 보세요.."
혜선이가 왠 복사물을 내밀었다.
"이게 뭐꼬?"
"우리 써클 선배가 쓴 글인데 한번 읽어 봐요. 재미 있으니까."
"응...그래...잘 가라."
얼핏 제목을 보니 '컴퓨터 바이러스 어쩌구...'하는 것이었다.
'컴퓨터 바이러스 얘긴가? 난 컴퓨터 취미 없는데.. 에라..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달수는 복사지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 인지 식당안에는 식사하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고 삼삼
오오 모여앉아 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선배님,안녕하세요?"
옆을 쳐다보니 달수네 과 달걀(91학번) 여학생들이 네명 앉아 있었다.
"응,그래..수업 다 끝났니?"
"배고파요.선배님"
"야...밥 해결 됐다..."
"난 비빔밥..."
달수는 먹이 달라고 쫑알대는 새끼새들을 바라보는 어미새가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팅 자금이 날라 가는 구나. 천원 곱하기 4하면 4천원이고 내가 굶는다
치면 만육천원이 남는데...에이..그거면 되겠지..난 여자에 약한게 흠이야.'
달수는 재빨리 계산하고는,
"자..내꺼는 사지마."
달수는 후배 한명에게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었다.
잠시후 비빔밥을 가져온 후배들은 바쁘게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선배님.."
달수가 돌아 보니 새로운 날달걀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표정으로 달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으응...그래...수업 다 끝났니?"
"네..실험이 늦게 끝나서 이제 점심 먹으러 왔어요.."
"우리는 선배님이 사주셨다."
"뭐..앗! 이럴 수가... 선배님께서 차별하시지야 않겠지 뭐."
----- '이 녀석들은 내가 식권으로 보이나 보다...'
달수는 떨리는 손으로 5천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야..이거 타격이 큰데... 그래도 만천원이면 커피값하고 저녁식사
정도는...'달수가 이런 생각을 하며 흘깃 창밖을 바라보니 저 멀리 달걀
들이 단체로 굴러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애들아..나 먼저 갈께.. 바빠서 말야.."
달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 뒷문 쪽으로 황급히 걸었다.
"젠장..저 애처러운 눈길에 안 사줄수도 없고...아..난 너무 마음이 여려서
탈이야..."
달수는 혼자 씨부렁거리며 식당을 나왔다.
"이제 겨우 3신데...오늘 따라 교수님은 수업을 일찍 끝내 가지구...."
어딜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오락실로 마음을 굳히고는 교문을 나섰다.
뿅...뿅..ㄳㄳ..쾅.....
"에잇, 이 악의 무리들아. 정의의 총알을 받아라..에잇..얍.."
달수는 세상의 악은 혼자 쳐부수는 듯 전자 음향의 오묘한 조화 속에 묻혀
오락에 열중하고 있었다.
"선배님.안녕하세요?"
-----'읔..이건 또 뭐냐..'
옆을 보니 2학년 후배 녀석이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응..그래. 오락실엔 왠일이니?"
"지나다가 보니 선배님이 보여서요..에이..나이 생각 좀 하세요..애들 같이
오락이 뭐에요."
"아이다..니가 뭘 몰라서 그라능기다.. 이 전자 오락 속에는 철학과 꿈과
낭만과 최신 전자 공학이 어우러져 있단다."
그 순간 달수의 마지막 비행기가 악의 무리들에 의해 격추되었다.
"선배님..시간 있으시면 당구나 치러 가죠.."
"당구?"
달수는 전에도 이 녀석과 당구를 쳐서 7판을 계속 이긴 적이 있었다.
-----'그래..이 녀석이 그때의 복수를 할 모양인데... 시간도 많이 남는데
잘ㄳ구만..'
"그래 . 가자.."

5판 3선승제로 시작한 당구는 3승 1패의 성적으로 달수의 승리였다.
-----'흐흐흐..내가 비록 물 200이지만 80짜리 정도야..'
달수는 게임을 끝내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그랬더니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을줄 알았던 후배 녀석이 애처러운 표정
으로 달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어...선배님..제가 지금 차비도 없걸랑요.."
순간 달수는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차마 그런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으..응..뭐..그럴수도 있지..내가 내줄께..."
"아이고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 자식아! 너도 선배 되봐라.'
달수는 2시간분 육천원을 카운터에 지불했다.
-----'이제 남은 돈은 오천원....'
달수는 피가 마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집에 가세요?"
"아니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저어..그럼 죄송하지만 선배님 차비 좀..."
-----'으윽 정말 심한 녀석..'
"자..여기..천원이면 되겠지?"
"네..감사합니다...역시 선배님은 우리 과의 태양이시며..."
-----'고마해.고마해. 문딩이.....인간이 쯩이 안가...'
"응 그래 먼저 가라.."
달수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더 이상 학교 근처에서 얼쩡대다가는 나머지마저
위험해 질것 같았다. 빨리 버스를 타고 여기를 뜨는게 좋을것 같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당구계의 불문율을 깨다니...'
'후배들 만나기 전에 여기를 빨리 떠야해.'
버스가 오자 달수는 재빨리 올라 탔다.
'자..빨리 가자..빨리...이버스가 왜 이리도 출발을 안하냐..'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벌어 지고 있었다.
"선배님..지금 가세요?"
산적같이 생긴 동아리 후배 한명이 달수를 알아보며 인사했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수많은 후배들....
"오늘 제 생일이라 1학년들 끼리 모였어요.. 한잔 할껀데 선배님도 가실래요?"
"아니..난 약속이 있어서.."
"모두 탔니? 몇명이야?"
"이십 일명 승차 끝 !"
"선배님..이십 일명이래요."
"으응?...이십 일명 이라니?"
"에..그러니까 이십 일명이란 삼천 오백 칠십원이란 뜻이예요.."
산적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후배 한명이 칠십원을 보태서 드디어 달수에게는 독수리가 그려진 오백원 짜리
동전이 하나 달랑 남게 되었다.
달수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혜선이에게 자금 대출을 받으리라 생각하며 카페
문을 밀었다.
저 구석 자리에 보이는 혜선이와 최진실 동생같은 여학생이 보였다.
하얀 얼굴에 긴머리가 잘 어울리는 약간은 차가와 보이는 얼굴이었다.
달수는 심호흡을 한번하고 테이블로 다가가 인사를 하고 앉았다.
"이분은 우리과 복학생 아저..아니고 오빠고 이쪽은 내 친구 오진희."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두분 얘기 나누시고 난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이만.."
혜선이가 바쁜듯이 서로 소개만 시켜주더니 불쑥 자리에서 일어 섰다.
"혜..혜선아.."
"아이..복학생이 무슨 부끄러움을 그렇게 타요. 나 갈께..진희야. 이 오빠
괜찮은 사람이야. 안녕..오빠도 잘 해 봐요.."
"혜...."
'선아..'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혜선이는 어두운 카페 문쪽으로 사라져갔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정장차림의 웨이터가 혜선이가 물만 마시고 간것이 불만이라는 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전 오렌지 쥬스.."
"아..저도 같은 걸로.."
"저..선불인데요."
달수는 메뉴판을 슬쩍 쳐다 보았다.
'으익..오렌지 쥬스가 이천오백원....합이 오천 아냐?....'
달수는 목이 타 올라서 앞에 놓인 물을 쭉 들이켰다.
'에라..매도 먼저 맞는게 낫겠지..'
"저어..진희씨라고 하셨죠..초면에 대단히 실례입니다만,제가 오늘...급한일에
지출을 많이 해서요...저어..오늘 계산 좀 해주시겠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달수에게는 한시간쯤 되는것 같이 느껴진 30초였다.
"각자 계산 하자는 분은 봤어도 여자 쪽에서 전부 계산하라는 분은 처음 보네
요. 저도 이젠 현대 여성이 되기로 했어요. 각자 계산 해요. 자요..이천 오백원
...그리고 전 바쁜일이 갑자기 생겨서..."
혜선이의 친구는 탁자위에 이천 오백원을 올려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어..그게 아닌데....아닌데......"
"그쪽은 눈이 상당히 높으신가 봐요? 마음에 안들면 쥬스값도 아까우신가요?"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지..진희씨 !"
달수는 진희를 쫓아 나갔다.
"저 그게 아니고 ..."
"괜찮아요...즐거웠어요.안녕히 계세요."
"........."
달수는 뭐라고 한마디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는 긴머리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이거 떨어 뜨리셨는데요?"
"응?..."
어떤 꼬마가 달수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몇장의 복사지를 건네 주었다.
낮에 혜선이가 건네준 바이러스에 대한 글이었다.

==================================================================
............중략
3. 가공할 선배 바이러스의 증상
Computer Virus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선배 Virus'이다.
이 바이러스는 선배들의 지갑에 침투하여 순식간에 지갑을
100% 털어 먹어 버리며 사후 대책이 전혀 없이 오로지 지갑
비우기에만 관심이 있는 오리지날 전천후 무대책 무개념성
악성 Virus이다.
감염된 증상은 갑자기 듣지도 않는 과목의 책을 산다느니 전
철 패스를 분실했다느니 하는 핑계로 집안에서 돈을 타내는
빈도가 잦아지는 것이다.
4. 현재 유행하는 Virus들
① 89학번 Virus : 예전에는 악성 바이러스 였으나 노화되어
신종 Virus들에게 당해내지 못하고 있음.
② 90학번 Virus : 낮은 학번에게 당하고 높은 학번에게 보복
하는 복수형 Virus.
③ 91학번 Virus : 최신종 최악성 최첨단의 Virus.
피할길이 없으며 쪽수가 워낙 많아 학교 도
처에서 출몰하며 인정 사정 가리지 않는대-
-단한 Virus.
92학번 Virus가 나올 경우 복수형 Virus로의
전환이 예상됨.
④복학생 Virus : 구형 바이러스의 일종.
대부분 뜯기는 처지이나 후배를 뜯어 먹는
일부 몰지각한 종류가 있기도함.
⑤ 당구 Virus : 선배를 꼬셔서 당구를 치고 난후 이기면 그
만이고 질 경우에는 처량한 표정으로 당구비
를 내달라고 요구하는 철면피 Virus. 당구비
이후에는 주비(술값), 버스비로의 연계 작용
이 계속되는 무써운 Virus.
⑥ 변종91 Virus : 91학번 Virus의 변종이며 주로 목련하우스
에 나타나고 음식의 질,양을 따지지 않는
잡식성 Virus.
먹는 자리에는 특유의 후각기능을 발휘하여
어디에 숨어도 찾아옴.
⑦ School Bus Virus : 앉아 있을때는 실컷 졸다가 내릴때가 되
면 선배의 스쿨 버스표를 강탈하는 파렴치한
Virus.
⑧ 유인형 Virus : 써클실이나 학회실에 바람잡이 1-2명을 배
치시켜 놓고 선배를 식당이나 목련 하우스로
유인하여 미리 대기했던 인원이 마치 우연히
만난것처럼 가장하여 본색을 드러내는 유인형
Virus.
5.대표적 피해 사례
① 서모군은 유인형 바이러스에게 감염되어 12000원짜리 눈물에
젖은 부라보콘을 먹어본적이 있음.
② 김모군은 후배와의 당구 시합에서 5전 전승을 기록하고도 후
배의 애처러운 눈초리에 본인이 게임비를 냈음.(2000원 외상)
③ 최모군은 후배가 술산다는 말에 회까닥하여 따라갔다가 2,3,4
차 술값을 털린적이 있음.
④ 박모양은 후배들에게 점심값을 털린후 악성 바이러스로 전환
하여 다른 선배의 전철 패스비를 털어본적이 있음.
그외에도 무수한 눈물로 얼룩진 사연들이 있으나 눈물이 앞을 가
려 차마 다 수록치 못함을 아쉬워하며......

6.선배 바이러스의 예방과 대책
이 악성 Virus로부터 감염을 피할수 있는 방법은 괜히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후배들과 상면하지 않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 싼 음식을
먼저 시켜서 Virus로부터 일말의 동정심을 유발시켜야 한다. 그러
나 대부분의 Virus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 '선배 Virus'의 특징은 학번이 낮을수록 식후 디져트까지
털어 먹는 무개념성,무책임성을 보이고 있으며,학번이 높을수록
고도의 지능화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악성 바이러스에게는
Vaccine프로그램이 통할수가 없으며 학번이 높은 Virus가 학번이
낮은 Virus에게 털리기도 하는 비인간성..앗! 실수! 비 Virus성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지속적인 품종 개발과 스스로 깨우치는 Fuzzy이론을 도입한
인공 지능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인한 피해는 대상이 조교를 포함
하고있어 교수님들이 이 바이러스의 목표가 될날도 멀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악성 바이러스는 신종 악성 바이러스에게
당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다는것을 바이러스들은 기억하라.


달수는 집에 오는 전철안에서 이 글을 읽고 중얼거렸다.
"젠장...누가 썼는지 구구절절이 뼈에 사무치는 구만...."
달수는 지갑을 꺼내 보았다.
텅 비어버린 지갑이 어제밤 꿈속에 나온 괴물의 벌린 입처럼 보였다.

-------------------------------------------------------------------------
꿈 판단
( Interpretation of a Dream , 1951 )
- by John Collier (영국, 1901 ~ 1980)

젊은이 한 명이 유명한 정신과 병원에 찾아왔다.
"선생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제가 여기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누구라도 나를 구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젊은이는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자, 어쨌든 무슨 일인지 얘기하십시오."
의사는 잠시 두 손을 들어, 상대를 안심시키려고 웃음을 보였다. 젊은이는
갑자기 의자에 앉아 밝은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찰스 로티퍼입니다. 이 빌딩 제일 위층에 있는 회계사무소에 근
무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28세로 지금 약혼중인데, 약혼자는 천사처럼 아름
다운 여자로 멋진 금발 미인입니다. 이런 것을 일부러 말하는 것은 내 얘기
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금은 돈의 상징입니다. 당신은 돈에 대해서 보유적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어느 사무소에 일하고 있습니다만 급료 가
운데 상당액을 저금하고 있습니까?"
"네,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액수지만 저금하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신은 약혼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2,3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의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질문하시면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 우리들 관계는 숨겨야 할 것은 --
적어도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숨겨야 할 것은 --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사
람 사이는 완전히 조화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말할 때 그 태도가 지나치다
는 것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고쳐야 할 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적어두겠습니다."
의사는 메모지에 쓰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얘기를 꺼냈냐고
물으시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단지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 여자인지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나는 지금부터 38일 전 밤에 어떤 꿈을 꾸었
습니다.
"38일 전에?"
의사는 그 숫자를 썼다.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어렸을 때, 당시 38세의 여성으로 마음에 강
한 인상을 받은 유모나 여선생, 또는 친척 여자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 빌딩은 39층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젊은이를 날카롭게 보았다.
"그러면 이 빌딩의 형태나 높이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제일 높은 층에 있는 우리 사무실 창밖을 떨어지는 꿈
을 꾼 것입니다."
"추락하는 그 순간, 당신의 기분은 어땠습니까?"
의사는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냉정했습니다. 보통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음은 아주 빨리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경
치는 훌륭했습니다. 그때 눈을 떴습니다."
"그러면 그런 단순하고 흔히 있는 꿈이 아직까지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
다는 말입니까?"
의사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다음날 밤도, 나는 또 같은 꿈을, 아니 그 계속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두 손을 크게 벌리고 돌장식 옆을 지나 떨어진
것입니다. 역시 우리 회사가 빌리고 있는 층의 창문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세무과의 돈 스트레이커가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
고 나를 보았습니다. 돈 스트레이커의 얼굴에는 아주 깜짝 놀란 표정이 떠올랐
습니다. 그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꼭 창문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
습니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에 비하면 그의 동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렸
습니다. '저 남자는 느리군'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이미 그가 있던
창문 앞을 지났기 때문에 그 층과 다음 층과의 경계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또 잠을 깬 것입니다."
"흠, 전날 밤 꿈의 계속을 다음날 밤에 꾼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밤에는 그 층과 다음 층과의 경계 지
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꿈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한쪽 다
리를 조금 들고 누운 자세로."
"좋습니다. 좋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재떨이가
떨어질 뻔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메이지의 버릇이 나왔는 지도 모릅니다. 메이지는 약혼자의 이름입니다. 그
녀는 자기가 한 일을 얘기할 때 언제나 그 흉내를 내보입니다. 실연해 보이는
거지요. 우리들이 약혼한 것은 그녀가 72번가의 얼어붙은 도로에서 어떤 자세
로 미끄러졌는지 나에게 얘기한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했듯이 나는 다
음 층 바깥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떨어지면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뉴저지의 산들은 경치가 훌륭했습니다. 높이 날고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나
를 향해 날아오면서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만 곧 몸을 돌
려 날아가 버렸습니다. 바로 아래 거리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검은 자갈처
럼 흩어져 있는 모자의 무리가 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갑자기 그들 자갈의 한
두개가 하얀색으로 보였는데, 나는 내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것을 알았습니
다."
"잠깐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상당히 생각할 여유를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본인이 떨어지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선생님, 그것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내가 본 최후의 꿈 -- 어젯밤 꾼
꿈이 그 문제에 어떤 광명을 던져 줄지도 모르지만, 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나는 떨어지면서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물론 추락의 속
도는 갈수록 빨라졌지만, 그것에 맞추어서 나의 생각도 빠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습
니다. 예를 들면 17층과 16층 사이에는, 민주주의와 세계의 위기를 생각했습
니다.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
"잠깐, 지금은 얘기를 경험한 것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15층에서 나는 우연히 창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어쨌든 사무실 안이니까요. 그래서 선생님, 나는 다
음날 완전히 호기심 때문에 이 건물 15층에 있는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어
느 연극 중개업자의 사무실이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보십시오. 내 꿈이 올
바른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 진정하십시오. 이 건물에 있는 회사 이름은 1층 게시판에 모두 나와 있
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것들을 무의실 속에 기억하고 있다가 그것을 꿈
속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전보다도 더 아래를 쳐다보았습니다. 물론 통과하는 각층의 창
문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아래를 보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아
래의 검은 자갈 같은 모자의 무리 사이에 상당히 많은 하얀 반점들이 여기저
기 보였습니다. 이윽고 그것이 모자와 얼굴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
다. 나는 2대의 택시가 충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래의 혼란된 소용돌이
속에서 누군가 여자의 비명이 들렸을 때, 나는 그 부인에게 마음의 동정을 느
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옆에서 누워 있었지만, 그대로 떨어지면 최후의 순
간에 최초에 지면에 부딪칠 게 틀림없는 몸의 부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
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 이런식으로 --- 아래로 향했습니다. 몸에 소름
이 돋는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거기서 이번에는 두 다리를 아래로 했지요. 그
러자 갑자기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또 머리를 아
래로 했습니다. 그것으로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실연해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메이지의 버릇이 그만."
"자, 앉아서 계속 얘기하십시오."
"그런데, 어젯밤."
젊은이는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마침 38일째의 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층에 도달했겠군요. 왜냐하면 이 사무실은 2층에 있기 때문입니
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 창밖을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힐끗 창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확실
히."
"로티퍼씨."
의사는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자주 환자들의 꿈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선생님의 환자는 아니었습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선생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마저 몰랐습니다. 오늘 아침, 여기가 누구의
사무실인가 보러 올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선생님, 사실을 말하면 나는
선생님이 연극 중개인이 아닌 것을 알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왜 아직까지 놀라고 있습니까?"
의사는 점잖게 물었다.
"왜냐고요? 당신은 당신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꿈속에서 말입니다.
젊은 여자가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젊은 금발 여자입니다. 선생
님, 그 여자는 당신의 무릎 위에 앉아 당신 목에 두 팔을 감고 있었습니다. 나
는 그 여자도 연극 중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금발로, 마치
메이지의 머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녀는 바로 메이지! 나의 약혼자 메이지였습
니다."
정신과 의사는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바보 같군요. 그리고 당신도, 완전히 마음이 정지됐군요."
"하지만 역시 오늘 아침, 사무실에 나오니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과 이 눈으
로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는 불가항력적인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는 꼭 자신의 경솔한 행위가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을 알고, 부끄러운
생각을 했겠지요. 당신 약혼자는 나의 환자는 아닙니다. 때문에 그녀가 이 방
에서 그런 '감정전이'적인 행동을 보일 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직업에
서 독자의 윤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진료실 안에서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이 얘기하신 것은 희귀몽이라고 하는 비
교적 단순한 신경증으로 --- 시간을 갖고 치료하지 않으면 낫지 않습니다. 1
주일에 3,4회 오시면 1,2년 안에 꼭 회복될 겁니다."
"그러나 선생님."
젊은이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나는 이제 곧 지면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꿈속의 일입니다."
의사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세요. 예를 들어 지면에 떨어져도 그것만은 잊어버
려서는 안 됩니다. 자, 사무실에 돌아가서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가능한
한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꿈에서 본 선생님과 똑같습니다.
그 진주 넥타이 핀까지 똑같습니다."
"이것은"
머리를 흔들면서 의사가 말했다.
"어느 부인에게서 받은 선물인데, 그 부인도 언제나 추락하는 꿈을 꾸었습니
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청년의 뒤쪽 문을 열었다. 젊은이는 우울하게 머리를
흔들면서 돌아갔다. 의사는 책상을 향하고 의자에 앉아, 새 환자에게 어느 정
도 지불능력이 있나를 생각하면서 언제나 정신과 의사가 하듯이 양 손가락 끝
을 모았다. 그의 명상은 잠시 후 문에 머리를 들이민 여비서 때문에 중단되었
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예약한 2시 30분입니다만."
"들어오시도록."
의사는 새 환자를 맞으려고 일어섰다. 손님은 누군가에게 머리 위에 표백제
를 뒤집어쓴 것 같은, 마치 들쥐처럼 생긴 얼굴을 한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상당히 흥분한 것 같았다.
"저 선생님, 여기에 전화하지 않고는 찾아올 수 없었어요.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찾아 여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밖의 문에 걸려 있는 이름을 보았습
니다. 선생님, 꿈속에서, 꿈속에서 말입니다."
"차분히 얘기를 듣도록 합시다."
의사는 손님에게 의자를 권했다. 하지만 젊은 의자는 의사의 책상 끝에 조금
몸을 얹고 말했다.
"선생님은 꿈속에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난다고 생각할는지 어떤지 모르겠지
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꿈입니다. 나는 이곳으로 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건물에도 현재 이곳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선생님의 이름이 걸려 있
었습니다. 내가 오늘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찾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조
사해 보니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보려 했습니다. 그것은
어쨌든 지금도 말했듯이, 나는 이 사무실을 방문하는 꿈을 꿀 ㄳ도 마침 이런
식으로 책상 위에 앉아서, 선생님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
물론 꿈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떤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어떻게 말해서
할지 모를 감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갑자기 선생님이 나의 아버지 같은,
형제와 같은, 또 옛날에 알고 있던 허만 메이어즈라는 소년과 같은 기분이 들
었습니다. 나는 지금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 어떤
남자와 약혼 중입니다. 아, 무서운 일이에요."
"아, 잠깐."
의사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은 신경증적 충동으로 행동하는 것을 생각하는군요?"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의 파티의
인기 스타로 만들어주죠. 하지만 선생님, 그때 나는 왠지 모르는 이런식으로
바깥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앗, 그 사람! 지금 확실히 그 사람이었어요. 찰
스예요. 떨어질 ㄳ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우리들을 보고 있었어요."




크리스마스엔 돌아온다
( Back for Chistmas )
by - John Collier


"박사님, 크리스마스는 꼭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싱클레어 소령이 말했다. 때는 오후. 카펜터 가(家)의 응접실은 박사 부처
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꼭 돌아오겠어요. 제가 약속하죠."
부인이 말했다.
"그건 좀 어려울 거요. 나도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카펜터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강의 계약은 석 달뿐이잖나."
휴이트 씨가 말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아나."
박사의 말에, 부인은 일동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크리스마스엔 꼭 돌아오겠어요. 제 말을 믿으셔도 좋아
요."
그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다. 박사 자신까지도 그 말이 믿어질 지경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만찬회든 야유회든, 심지어는 무슨 위원회나 회합까지도,
박사의 출석 여부는 모두 부인이 대신 약속을 해 왔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반
드시 실행되었던 것이다.
작별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부인의 요령 있는 여행 계획에는 누구나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배가 떠나는 것은 다음날이지만, 부인과 남편은 그날
저녁으로 차를 타고 사우샘프턴으로 간다. 기차를 안 타니 떠들썩하게 나와
전송할 일도 없고, 뱃시간에 늦을까 봐 초조할 일도 없다. 분명히 박사는 극
진한 내조의 덕을 입고 있었다. 미국에 가서도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특히
부인인 허미언이 매사를 돌봐 줄 것임에랴. 부인도 멋진 시간을 보낼 것이다.
웅장한 고층 건물도 구경하게 될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틀림없이 박사를 데리고 돌아올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래요.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겠어요. 제 말을 믿으셔도 좋아요."
어떤 유혹도 뿌리칠 것이다. 체류 기간 연장(延長)이란 있을 수 없다. 제아
무리 미국의 초특급 병원에서 요직(要職)을 준다고 해도 거절이다. 조국의
진료소가 그를 필요로 하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크리스마스까지는 돌
아와야 한다.
"걱정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이는 크리스마스엔 꼭 돌아와
요."
카펜터 부인은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는 손님에게 소리쳤다.
당분간 집을 비우기 위한 마지막 마무리도 빈틈없이 처리되었다. 하녀들은
이내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침맞게 읍내로 나
가는 오후 버스에 올랐다.
이제는 이렇다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사 틀림없나 살펴보고 문을 잠그
면 되는 것이다. 부인은 박사에게 말했다.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갈색 트위드 양복이예요. 지금 입은 옷은 트
렁크에 넣기 전에 잊지 말고 주머니를 모두 비워야 해요. 나머지는 모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기나 해요."
박사는 이층으로 올라가 입은 옷을 벗었다. 그러나 갈색 트위드 양복 대신
옷장 안쪽에서 낡고 더러운 목욕 가운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한두 가지 준비
를 끝내자 이층 난간 너머로 몸을 숙여 아내를 불렀다.
"여보! 지금 바빠?"
"아네요, 다 끝났어요."
"그럼 좀 올라와 봐요. 이상한 게 있어."
부인은 곧 올라왔다. 그리고 남편을 보자 소리쳤다.
"아니 이이 좀 봐! 그 더러운 걸 입고 뭘 하는 거예요? 옜날에 태워 버리라고
했잖아요."
"대체 누가 목욕통 하수구에 금목걸이를 떨어뜨렸을까?"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도 그런 걸 안 하고 왔는데."
"그럼 이게 왜 여기 있지? 이 회중 전등으로 잘 비춰 봐요. 속에서 반짝거리
는 게 보일 테니."
"하녀 중에 누가 도금한 팔찌라도 떨어뜨린 모양이죠. 그밖엔 그럴 사람이 없
어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회중 전등을 받아들고는 허리를 굽혀 하수구를 들여다보았
다. 박사는 짤막한 쇠파이프를 들어 그 뒤통수를 맹렬한 기세로 두세 번 정확
하게 때리고는, 쓰러진 몸을 무릎째 들어올려 욕조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가운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자, 타월로 싸놓은 도구들을 세면기에 쏟
아넣었다. 바닥에 신문지를 몇 장 깔고는 다시 한번 희생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물론 죽어 있었다. 흡사 재주넘기라도 한 듯이 몸을 반으로 접은 채
욕조 한 켠에 무참하게 쳐박혀 있었다. 그는 선 채로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전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윽고 너무도 많은 피가 흘렀음을 깨닫고
는 비로소 머릿속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시체를 밀고 당겨서 욕조안에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는 옷을 모조
리 벗겼다. 좁은 통 속에서 하기에는 무척 힘든 일이었으나 가까스로 끝내고는
물을 틀었다. 물이 욕조로 쏟아지더니 이내 물줄기가 가늘어지며 뚝 끊어졌다.
욕조에 조금 찼던 물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하수구로 빠져 나갔다.
"이런! 탱크 꼭지를 잠궈 놨구나."
이렇게 되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박사는 급히 타월로 손을 닦고는, 타월의
마른 귀퉁이로 욕실 손잡이를 감싸 문을 열었다. 타월을 던지고는 맨발로 아래
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고양이처럼 재빠른 동작이었다. 지하실 문은 계단 밑 홀
구석에 있었다. 물탱크 꼭지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얼마전에 그곳을
뒤지며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때 아내에게는, 포도주를 담아둘 통을 찾는다
는 핑계를 댔었다. 그는 지하실 문을 밀어 열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물탱
크 꼭지를 찾아 물을 튼 순간 문이 닫히며 실내가 칠흙처럼 어두워졌다. 그는
축축하고 더러운 벽을 더듬으며 계단 있는 데로 갔다. 막 층계를 오르려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그에게는 벨 소리가 단순한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쇠꼬챙이가 천천히 뱃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 아픔은 머릿속까지 치솟아올라 마침내 폭발했다. 그
는 지하실 바닥의 석탄 더미에 몸을 던지고 소리쳤다.
"끝장이다. 다 끝난 거야."
이윽고 숨을 헐떡이며 중얼댔다.
"멍청한 것들! 누구도 멋대로 이 집안에 들어올 수는 없어. 안 되지. 절대로
안 돼."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다시 벨이 울렸을 때는 아무런 고통 없이 그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놔두면 저러다 그냥 가겠지."
그는 중얼거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어깨가 권투 선수
처럼 움츠러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놔 두는 거야. 될 대로 되라지."
현관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허버트!"
"허미언!"
윌링포드 부부였다.
빌어먹을! 꼭 끼어든단 말야. 사람을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아. 이쪽은 발가벗
은 데다 피투성이에 석탄재까지 묻었는데! 끝장이다! 다 끝났어!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허버트!"
"허미언!"
"대체 어디 갔을까?"
"차는 저기 있는데."
"잠깐 미세스 리들한테 갔을지도 몰라요."
"꼭 만나야 돼."
"어쩜 가게에 갔을지도 모르겠네. 깜빡 잊고 못 산 게 있어서."
"허미언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가만! 들어봐요! 저기 누가 목욕하는 소리
같은데. 소리쳐 불러 볼까? 문을 쾅쾅 두드리면 어때?"
"쉬! 눈치없게 굴지 말아요."
"소리치는 거야 뭐 어때."
"여보,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립시다. 허미언 얘기로는 일곱시까지는 출발하
지 않는댔으니까. 저녁은 가는 도중 샐리스버리에서 먹는댔어요."
"그럴까? 좋아. 아무튼 이 친구하고 이별주를 꼭 하긴 해야돼. 안 그러면
섭섭해 할 거야."
"어서 가요. 여섯 시 반까진 돌아올 수 있어요."
그들이 돌아 나가고 현관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는 생각
했다. --- 여섯 시 반이면 할 수 있어.
그는 홀을 질러가서 현관문을 감그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세면대에 담아
놨던 도구를 꺼내어 할 일을 끝냈다. 다시 목욕 가운을 걸치고는, 타월과 신
문지로 깨끗하게 싼 꾸러미들을 하나 하나 지하실로 날랐다. 이것들을 그는
지하실 한구석에 파놓은 좁다랗고 깊숙한 구덩이 속에 차곡차곡 집어 넣었다.
삽으로 흙은 파 넣은 구덩이를 메운 다음, 그 위에 석탄재를 가득 뿌려 놓고
는, 만사 예정대로라고 스스로 만족하며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욕실을 구
석구석 닦아 내고 온몸을 말끔히 씻고는, 아내의 옷가지와 자기 목욕 가운을
소각로(燒却爐)에 넣어 불살라 버렸다.
한두 가지 끝마무리를 하자 만사 완료였다. 시간은 겨우 여섯시 십오 분이
었다. 월링포드네는 노상 늦으니까 이제는 차에 올라 떠나면 그만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게 유감이었지만 큰길을 피해 샛길로 가면 될
것이고, 혼자 가는 모습이 혹시 눈에 띄더라도 사람들은 뭔가 일이 생겨 아
내가 먼저 출발했으리라고 여기고는 이내 그런 일은 잊어 버릴 터였다.
그래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마을을 빠져 나와 마침내 땅거미 지는 국도
를 나왔을 때는 그도 기뻤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거리감이
통 안 잡히고 운동 신경이 비정상이라 할 만큼 둔했다. 그래도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날이 완전히 저물자 언덕길 꼭대기에 차를 세우고 생각에 잠겼다.
별빛이 휘황했다. 눈 아래 펼쳐진 벌판 저 멀리로 드문드문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그는 희열감에 온몸을 떨었다. 앞으로의 일은 매사 지극히 간단했다.
매리언은 시카고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그가 홀아비라
고 믿고 있었다. 강의야 말 한마디면 뒤로 미룰 수 있을 테고, 미국의 어느
외딴 신흥 도시로 가서 개업의로 입신만 하면 그는 영원히 안전할 터였다.
여행 가방 속에는 물론 아내의 옷가지가 들어 있지만 그거야 선실 창밖으로
던져 버리면 된다. 고맙게도 그녀는 편지를 언제나 타이프로 쳤다. 필적 따
위의 사소한 것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경치게도 현대적인 여자였지. 하나부터 열까지 능률적이었어. 매사를 빈틈
없이 꾸려 가다 보니 자기 죽음까지도 깨끗이 뒤처리 한 셈이지 뭐야. 망할
것!"
그러나 흥분할 때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대신 편지를 쓰는 거야. 횟수를 차츰 줄여 나가다가 이번에는 내 이
름으로 편지를 보내는 거지 --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사정이
통 여의치 않아서... 1년 동안 안보이고 그것이 2년, 3년이 되면 사람들도
잊어 버릴 테지. 뭣하면 1년에 한두 번쯤 혼자 와 이것저것 손 좀 보면 되
고... 누워서 떡먹기야. 크리스마스엔 돌아온다고! 오긴 뭘 와!"
그는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뉴욕에 와서 살며 그는 마침내 자유를,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다. 이제 그는
안전했다.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때 그 순간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벨
소리와 문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하실에서 보낸
그 몇 분간을 .. 이제는 매리언을 만날 기대로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호텔 로비를 느긋하게 걷노라니 보이가 미소를 띠고 다가와 편지 몇 통을
내밀었다. 영국에서 온 첫 편지들이었다. 이까짓게 뭐 문제될거 있나? 마누
라의 직선적인 스타일로 따라락 몇 줄 쳐서는 꼬부랑 글씨로 사인해 보내면
되는 거지. 강의는 첫날부터 대성공이고, 남편은 미국에 홀딱 반해 있지만
크리스마스엔 꼭 데리고 가겠다고 모두에게 알리는 거야. 나중엔 좀 어리둥
절하겠지만.
그는 편지들은 훑어 보았다. 대개가 아내 앞으로 온 것으로, 싱클레어 부부,
윌링포드 부부, 교구 목사, 그리고 홀트앤 선스라는 건축 및 실내 장식 회사
로부터 온 것이다.
사람들이 곁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라운지에 선 채로 편지를 뜯어 여기
저기 읽어 가며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박사 부부가 크리스마스에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허미언의 말을 굳게 믿는 것이다.
"당신들 큰 실수를 한 거야."
박사는 중얼거렸다. 미국에 와서 새로 배운 말이었다. 건축업자의 편지는 맨
나중에 뜯었다. 보나마나 청구서 같은 걸 테지..."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보내 드린 견적서에 대한 부인의 승인서 및 자택 현관 열쇠 정히
수령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하시려는 부인의 뜻을 받들어 그때까지 필히 공사를
완료할 것을 다시금 확약드리오니, 부디 염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금주내
로 직원을 보내어 공사를 착수 하겠습니다.
가내 화평하시기를 빌며....

충실한 일꾼
홀트앤 선스 드림

<건적서>
지하실 포도주 저장실 건조를 위한 바닥 개량 공사.
일급 장비, 최고의 기술진이 동원되며, 굴착(堀鑿), 건조(建造),
내장(內裝) 모두 도면(圖面)과 같음.
대금 18파운드.









최선책
( The Best Policy )
by - Perentz Mornard

어느 날 아침, 전국 농민은행장인 바이유 씨는 비서 필리벨을 불렀다.
"여보게 필리벨 군, 페르피냥 지점에 있는 프로리오라는 사나이는 어떤 인
물인가?"
"프로리오 말입니까? ... 그 사람은 출납계원입니다만 지금은 임시로 지점
장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르나르 지점장이 죽은 뒤 아직 후임이 결정되지
않아서요. 당분간 프로리오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되어 있습니다. 페르피냥
지점은 그다지 바쁘지 않으니까요."
바이유 씨는 책상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 사람이 아무래도 공금에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야. 페르피냥 지점에서
이런 편지가 날아왔네. 발신인의 이름은 없지만, 그래도... "
그는 필리벨에게, 상당히 흐트러진 필적으로 씌여진, 그다지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노트 한 장을 내밀었다.

전국 농민은행 행장 귀하

우리들 농민은 땀 흘려 번 돈을 귀하의 은행인 페르피냥 지점에 맡기고 있
습니다만, 어느 날 아침 잠이 깨어 보니 은행은 파산하고, 우리들의 예금이
고스란히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해 두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출납계의 프로리오 씨가 과거 수차에 걸쳐 공금을 착복하고 있는
것을 귀하께서는 모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착복한 돈은 이제는 상
당한 금액에 이르렀을 것이고, 파리의 높은 분들이 그 일을 알게 될 무렵에
는 때가 너무 늦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필리벨 군. 내일 페르피냥 지점에 회계 감사관을 파견해 주게. 다만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하게나. 그 프로리오라는 친구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 투서가 근거 없는 중상일 수도 있네."
페르피냥의 임시 지점장 대리 프로리오는 몹시 당황한 태도로 파리에서 온
감사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부를 조사하신다고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월말도 아닌데요? 아무런 예
고도 없니? 이건 전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감사관은 눈앞에서 격분하고 있는 작은 사나이에게 동정을 느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로리오 씨. 어느 지점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벼
락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은행장의 일시적 기분인 걸요. 뭐 그냥 형식적인
조사니까 삼십 분 정도면 끝날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문이 날 텐데요. 특히 이런 시골에서는 말입니다.
제가 뭔가 떳떳치 못한 짓을 했을 거라는 평판이 나겠지요. 제 체면은 완전
히 손상됩니다!"
프로리오는 울먹인느 소리로 말했다.
"감사는 비밀리에 하겠습니다."
감사관은 다소 짜증이 나서 말했다.
"대리께서만 잠자코 있으면 되는 일이잖습니까. 이제 장부를 보여 주십시
오."
이틀 후 필리벨이 행장실로 들어왔다.
"페르피냥 지점에 다녀 온 조사원의 보곱니다. 장부는 정확했고 한푼도 부
족하지 않았답니다."
"됐어. 정말이지 익명으로 편지를 쓰는 이 따위 비열한 무리를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수고했네, 자네."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은행장은 같은 용건으로 다시 비서를 불렀
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긴데..."
그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또 페르피냥 지점에 관한 익명의 편지가 날아왔네. 발신인 말로는 회계
감사에 실수가 있다는 거야. 아무래도 프로리오는 공범자가 훔친 돈을 번제
할 때까지 적당히 얼버무리려 시간을 벌고 있었던 모양이야. 좀 더 철저히
조사할 걸 그랬네."
"다시 한 번 감사를 시켜야 하나요?"
필리벨은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은행장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별로 내키지 않아. 그러나 예금주에 대한 의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우리들이 두번이나 경고 편지를 받은 것이 알려
지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스캔들이 되겠지. 그러니 다시 한 번 감사관을 보
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번에야말로 면밀하게 조사해 줘야겠네. 이 건을
속히 결말짓고 싶어."
그날 안에 은행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세 사람의 감사관이 페르피냥으로 출
발했다. 이번에는 프로리오도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한 사람이 그를 감시
하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이 네 시간여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했다. 그러나
부족액은 발견되지 않았고, 장부의 기입도 완벽했다.
"다른 지점도 이와 같이 정확하게 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 주임은 의기 소침한 프로리오를 향해 칭찬을 한 다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필리벨이 행장실로 들어와 알렸다.
"페르피냥 지점의 프로리오 대리가 오셨습니다."
바이유 씨는 평소의 습관을 깨고 일부러 의자에서 일어나, 양팔을 활짝 펴
고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러나 프로리오는 굳은 표정으로 머리 숙여 절을 했
을 뿐이다.
"사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뭐야, 사표?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프로리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행장님께서는 두 차례나 제 장부를 조사시킬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항간에서는 그 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다행히 제가 정직한 사람
이라는 것은 증명되었으나, 그 소문이 좋지 못한 인상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점에서 두 번이나 감사관이 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
가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젠 저도 젊지 않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습니다."
바이유 씨는 크게 감동했다.
"내가 책임지고 자네 결백을 증명해 주겠네. 잠깐 기다려 주게.. 야, 그렇
군. 지점장 자리가 아직 비어 있는 상태지. 그 자리를 맡아 주면 어떻겠나?
그렇게 되면 이제는 누구도 자네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을 걸세. 게다가 사실
상 봉급도 오르게 될 테고... "
"설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
프로리오는 말이 막혀 우물거렸다.
"물론 진심이야. 은행으로서도 자네 같은 양심적인 직원이 있다는 건 행운
이라네."

페르피냥의 자택으로 돌아온 피엘 프로리오는, 아내가 꺼내준 편안한 슬리
퍼를 신으며 유쾌한 듯 큰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해냈다! 아무리 정직하고 열심히 일해도 그 소문이 상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애써 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내 올바른 근무 태도가 본점에
있는 높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몇 년이고 일개 출납
계원으로 눌러앉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제야 겨우 인정받게 됐군요!"
미세스 프로리오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존경의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정말 멋져요, 당신의 그 편지 아이디어는... "







절묘한 변호
( An Ingenious Defense )

by - 작자 미상

( 이 이야기는 제임스 그랜트의 <재판관과 변호인>이라는 책에 실린 사건
중의 하나다. )

고등 변호사 보온 씨는 차머스포드에서 열리는 순회 법정에 가는 도중,
마차 안에서 사람 좋고 지적으로 보이는 합승객을 만났다. 보온 씨는 우
연히 만난 사람과 잠시 유쾌한 잡담을 주고받는 것을 썩 좋아했으므로,
얼마 안 가 그 승객 또한 차머스포드 순회 법정에 가는 길임을 알아냈다.
재판은 다음날 열릴 예정이었다.
"배심원으로 가시는 거겠지요?"
보온 씨가 물었다.
"아니오, 배심원이 아니랍니다."
말 상대가 된 승객이 대답했다.
"그럼 증인으로 가신다고 했어야 옳았겠군요."
"아닙니다. 증인이라면 마음이 편하겠지만요."
"알겠습니다. 선생께서는 가슴 아픈 사건을 담당한 검찰관이시군요. 하지
만 그런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니 어쩔 수가 없지요."
"선생의 추측은 또 빗나갔습니다. 저는 재판을 받는 친척을 위해 돈을 내
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셨군요! 돈을 내야 한다는 건 확실히 유쾌한 일은 못되지요."
"생활이 빠듯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뭐 대단한 금액은 아니겠지요."
"금액이 많고 적음은 아시다시피 지불하는 쪽의 수입이나 재산 상태에 따라
다르잖습니까."
"하긴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지불해야 할 금액이 500파운드랍니다. 저처럼 한정된 재원 밖에 없는 사람
에겐 큰 액수지요."
"그렇지만 나중에 돌려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 그게 아주 애매하답니다. 제 친적은 여관
주인입니다만, 그 양반 영업이 잘되기 나름이거든요."
"호오, 말씀대로 과연 애매한 경우군요."
고등 변호사 보온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께서 모든 사실을 아시게 되면 또 한 번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무언가 특별한 사정이 있군요?"
"있고말고요."
상대는 신음인지 한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토했다.
"사건 내용은 비밀입니까?"
보온 씨의 호기심은 바야흐로 심상치 않은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얘기를 지루하게 여기시지 않는다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지요."
"부디 들려 주십시오. 꼭 듣고 싶군요."
학식이 풍부한 신사 보온 씨의 청에 따라 승객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6주일쯤 전 일입니다. 런던의 한 성실한 곡물 상인이 차머스포드로 가는
도중, 마차 안에서 낯선 승객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
기는 곡물을 매입하러 차머스포드에 가는 길이라고 하자, 그들도 같은 용무로
그곳에 간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곡물 매입 건이 화제가 되었지요. 그러다가
그중 한 사람이, '우리 세 사람이 구입하는 곡물량을 미리 서로 알아 두는 편
이 좋겠다. 서로 협력해서 사게 되면 값이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 우
리 모두에게 유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그 말에 대찬성이라
며 덧붙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 온 겁니다. - '세 사람 중 누군가가 다른
두 사람을 따돌리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각자 가진 돈을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 주인에게 맡기자.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와서 돈을 찾기 전에는 한푼도
건네 주지 말도록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두자.'는 거였지요. 두번째 사나이의
제안에 첫번째 사나이가 덧붙이기를, '만약에 여관 주인이 그 특별 약속을 위
반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변상하도록 하자.' 고 했습니다.
런던 곡물 상인은 그 여관 주인이 의심할 여지없이 성실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석에서 그 제안에 동의했지요. 그 여관 주인이 아까 말씀드린 제
친척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차머스포드에 도착하자 여관 주인에게 각자 250
파운드씩, 모두 합쳐 750파운드를 맡겼던 겁니다. 앞서 합의한 조건으로 말
입니다."
"흐음,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군요.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돈을 맡기고 다짐을 한 후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1분도 못
되어 그들 두 사람 중 하나가 - 여관 주인과 교섭할 때도 대표적이었고 주로
모든 일을 결정한 사람이, 급히 되돌아 와서는 '오늘은 급히 매입을 끝내는
편이 좋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므로, 두 사람의 부탁을 받고 돈을 가지
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친척되시는 여관 주인은 그 사람에게 전액을 건네 주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사자에게나 제게는 재난이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보온 씨는 열심히 물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과 런던 곡물 상인이 돌아오더니 각자 맡긴 돈
을 요구한 겁니다."
"물론 주인은 돈은 모두 첫번째 사나이에게 주었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사나이와 런던 곡물 상인 두 사람이 여관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는 말이군요?"
"말씀대롭니다. 그런데 제 친척은 '세 사람이 함께 오지 않는한 누구에게도
돈을 내주지 말라.'는 약속을 어긴 이상 변호해봤자 소용없다면서, 이번 사건
을 변호인 없이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기꾼 중 한 명과 - 모든
경위로 보아 마차에서 만난 두 낯선 사내는 한패로 사기꾼들입니다만, 아무튼
그중 한 명과 런던 상인에게 돈을 배상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선생이 그 돈을 지불하시려는 거군요."
"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실은 저는 변호사입니다만, 그 가엾은 여관 주인을 위해 무료로 이 사건의
변호를 맡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상대는 그의 친절한 제안에 무한한 사의를 표하면서도, 변호사의 시도가 헛
수고로 끝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저 보고만 계시면 됩니다. 친척되시는 여관 주인과 함께 오늘 저녁 여덟
시에 제 숙소로 와 주십시오. 내일 있을 재판에 관해 의논해야 하니까요."

다음날 법정에서, 가엾은 여관 주인은 사태가 어떤 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
게 되는지는 모르는 채, 보온 씨의 조언대로 스스로 자기 변호를 했다. 한동
안 만사가 검찰측에 유리하게 진척되었으므로, 법정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불운한 여관 주인을 동정은 했지만, 불리한 판정이 내려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찰측 주장이 끝나자 보온 변호사가 일어나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
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은 증거로서 제시된 모든 진술을 들으셨습니다. 피고
가 세 사람의 관계자로부터 문제의 돈을, 다만 그 일부라도,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주면 안 된다는, 참으로 분명한 부탁을 받
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증인들에 의해서 입증된 것을 여
러분께서는 보셨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제게 본건의 변호를 의뢰한 사람은
문제의 돈에 해당하는 금액을 이미 준비해 놓고 있으며, 약속대로 그 세 사람
전원이 함께 나타나 요구하면 언제라도 내어 드릴 생각입니다. 따라서, 행방
을 감춘 사람과 다른 두 사람이 모두 함께 법정에 출두하기를 기다리고 있습
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세 사람 모두 각자의 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검찰측은 깜짝 놀랐다. 판결은 물론 피고에게 유리하게 내려졌다. 말할 것도
없이 돈을 가로채 간 사나이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따라서 여관 주
인은 총액 750파운드 중 단 1파운드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성실한 런던 곡물 상인의 손해액까지 배상해 줄 수 있었더라면 한결 공평했
을지 모르나, 런던 상인쯤 되면 귀중한 경험을 쌓는 대가로 얼마 정도 값을
치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전화 번호 이야기
( The Episode of the Telephone Number )
by - Charles Einstein


'두뇌'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넬슨 홀리스터는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았다.
"보아하니 내가 온 게 별로 달갑지 않은 것 같군."
"천만에. 친구가 찾아온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 안 그런가, 경사?"
살인과의 윕샌드 경감이 말했다. 부관인 베이츠 경사는 희미하게 웃음지
었다. 세 사람은 경감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두뇌'가 말했다.
"자네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자네들보다 머리가 좋아. 자네들은 추
리라는 과학을 사용하지. 나는 이해라는 과학을 사용한다네. 그게 내가
남달리 뛰어난 사립 탐정이 된 이유지."
"마지막 말은 인정하지."
윕샌드가 말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추리와 이해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군."
"대학 강의실 칠판에 숫자가 잔뜩 씌어 있는 걸 보았다고 하세."
'두뇌'가 말했다.
"그 교실에서 무슨 강의를 했을 것 같은가?"
경감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수학이겠지."
"자넨 수학이라고 추리하네, 좋아. 한데 수학을 이해하나?"
"아니."
"그게 차이라구."
'두뇌'가 말했다.
"추리와 이해의 차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 나는 우리의 이웃인
남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일이있지. 그 나라의 부통령
이 본인을 위해 열린 기념식 석상에서 암살을 당했거든. 경찰은 엉뚱한 사
람을 체포했네. 암살이 행해진 시간에 현장에 있는 인물이야. 경찰은 범인
의 탈출을 절대 불가능하다고 보았거든."
"그래서?"
"나는 그저 지적해 주었다네. 죽은 공직자는 젊은 시절 한때 서커스 단원
이었다는 점을 말이야 -- 줄타기 선수였지."
"그래서? 시체가 줄을 타고 도망이라도 갔단 말인가?"
"농담 말게. 그 사람의 서커스 시절 동료 중에는 언젠가는 그를 죽이겠다
고 벼른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인간 대포알이었어. 그 친구가
범인이었지."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걸."
윕샌드 경감은 말했다.
"인간 대포알이 부통령을 살해했다고 치세. 탈출 수단이 없다는데 그럼
어떻게 탈출했나?"
"대포를 이용해서지."
'두뇌'는 하품을 했다.
"기념 행사 일정에는 스물 한 개의 대포가 축포를 터뜨리기로 되어 있었거
든."
"이제 그만 나가 주시죠."
베이츠 경사가 '두뇌'에게 말했다.
"천만에."
'두뇌'는 유쾌하게 말했다.
"자네들이 사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는 걸 알지. 도와 주러 온 거야."
"무슨 사건인데?"
경감이 말했다.
"필립스 살해 사건."
"그건 골치 아플 게 없어. 알다시피 피해자는 찢어진 종이 조각을 틀어쥔
채 죽어 있었네. 종이에는 흘려 쓴 글씨로 조카네집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
어. 노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죽으면 모든 유산을 물려받을 친구지. 복잡할
게 하나도 없네. 그 단서 하나면...
'두뇌'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 보게. 자넨 추리를 해도 이해는 못하는 거야."
"무슨 뜻이지?"
"죽어 가는 사람이 범인으로 조카를 지목하고 싶다면, 왜 하필 전화 번호를
적었겠나? 이름을 쓰는 게 빠르지."
윕샌드 경감을 어정쩡하게 팔을 뻗어 파이프를 찾았다.
"그래 그 전제(前題)를 받아들인다 치세.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있나?"
"난 그저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이야. 필립스는 전화 번호를 적어야 할 이유
가 있었다고 말이지."
"그렇지만 결국 조카의 이름을 적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윕샌드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조카네 전화 번호였거든. 거기에 대체 무슨 차이가..."
"그 번호가 잘못 쓴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나?"
"전 지금 통신 강좌로 회계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1년 안에 이 일에서 손
을 땔 겁니다. 도대체가 시끄러워서... "
베이츠 경사가 말했다.
"보라구."
'두뇌'가 느긋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추리하려고 애쓰지만 나는 이해하려고 한단 말일세."
"그럼 자넨 뭘 이해했다는 거지?"
윕샌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사람, 아니 죽어 가는 사람이라고 어쩌다 번호를 잘못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얘기지. 산 사람도 늘상 틀리지 않나."
"그러므로?"
윕샌드의 음성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범인은 아주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란 거지. 조카의 전화 번
호와 비슷한 번호를 쓰는 사람을 찾게. 하지만 아주 흔한 이름이어야 해.
존 존스라든가 봅 스미스 같은... 그자가 범인일세."
"그건 왜 그렇지?"
윕샌드 경감은 떨리는 손으로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왜냐 하면 그게 바로 피해자가 전화 번호를 적은 까닭이기 ㄳ문이야."
'두뇌'가 말했다.
"존스나 스미스 같은 이름을 썼다면 그게 무슨 단서가 되겠나? 피해자는
죽어 가면서도 범행과 범인을 연결시킬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저 종이 조각에 존스라고 써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래서 확실한 길을 택한 거야. 유감스럽게도 틀린 번호를 쓰
기는 했지만."
'두뇌'는 너그럽게 웃음지었다.
"반장님, 그만 모시고 나갈까요?"
베이츠 경사가 물었다.
"반장님...?"
"놔두게."
경감을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는 '두뇌'에게 말했다.
"이 말은 하고 싶지 않네만... 조카는 벌써 고백했다네."
'두뇌'는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난 이 사건에서 손을 떼겠네. 도대체 조언을 해줘도 들을 생각
을 안 하니... 하지만 재수사를 하는 게 좋을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조카
는 누군가를 감싸고 있네. 이름이 존스라던가 뭐 그런 사람을."
"조카 이름이 존스야."
윕샌드 경감이 말했다.








의심
( A Case of Suspicion )
by - Ed Wallace


그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아, 차가운 마룻바닥을 발로 더듬어 슬리퍼를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화 벨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불을
켜고 전화 있는 데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닥터 벤슨입니다."
11월의 바람이 자그마한 하얀 집을 맴돌며 겨울이 오는 소리를 알리고 있었
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는 테이블로 가서 잠시 시계를 노려보았다. 머릿속에
서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새벽 두 시. 그의 가슴또한 이 끔찍한 시간에 대해 투덜대고 있었다. 애들
이란 어째서 항상 이런 어정쩡한 시간에 태어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이었다. 그는 작은 손가방 두 개를 챙겨 들었다. 하나는 마을 사람도 익히
아는 약가방이고, 하나는 길쭉한 부인과용 가방으로 사람들이 '아기 가방'이
라고 부르는 것이다.
벤슨 의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담배갑을 오버 주머
니에 넣었다. 문을 열고 몸을 숙은 채 뜰을 가로질러 차고로 뛰어갔다. 얼굴
을 때리는 바람결이 외과 수술용 칼날처럼 섬뜩했다.
차는 시동부터 잘 안 걸렸고 집 앞 골목길을 빠져 나갈 때까지 여섯 번은
쿨룩거렸으나, 이윽고 그래스 스트리트를 돌아 큰 길로 나오자 한결 부드럽
게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벤슨 의사가 찾아가는 오트 솔리 부인은 이미 애가 한다스 가량이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알기로는 한번도 좋은 날씨에 애를 낳은 적이 없었
고, 그나마 낮에 낳은 적도 없었다. 벤슨은 시골 의사였지만 아직은 젊었기
에, 아버지인 '벤슨 노선생'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애 하나 낳을 때마다 치
료비를 2,3년은 늦게 갚는 솔리 영감을 곱게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솔리네 농장까지는 먼 길이었다. 그러므로 헤드라이트 불빛 바로 앞에서
시골길을 혼자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을 때, 의사는 기다리던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속도를 늦추고, 조그만 꾸러미를 옆
구리에 낀 채 마구 부는 바람 속을 어렵사리 걸어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 곁에 다다르자 벤슨은 차를 세우고 사내더러 타라고 했다. 사내는 차
에 올랐다.
"멀리 가십니까?"
의사가 물었다.
"디트로이트까지니까 한참 가야지요."
사내가 말했다. 조금 여윈 편으로, 작고 검은 눈에는 바람 때문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담배 한 대 주시겠습니까?"
닥터 벤슨은 오버 단추를 끄르다가 담배를 오버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 생
각났다. 그가 담배갑을 꺼내 주니, 길손을 자기 주머니를 뒤져 성냥을 찾았
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사내는 잠시 담배갑을 쥐고 있더니 물었다.
"나중에 피우게 한 대 더 뽑아도 되겠습니까?"
그리고는 의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담배갑을 흔들어 한개비를 뽑았다.
벤슨은 자기 주머니를 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제가 주머니에 넣어 드리죠."
작은 사내가 말했다. 벤슨은 담배갑을 받으려고 재빨리 손을 내렸으나 담
배가 이미 주머니에 들어와 있을을 알고는 좀 언짢았다.
조금 있다가 벤슨이 물었다.
"디트로이트에 가신다고요?"
"자동차 공장에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요."
"정비사이신가요?"
"그런 셈이지요. 전쟁이 끝난 뒤로는 트럭을 몰았으니까요. 하지만 한 달
쯤 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전쟁중엔 군에 계셨습니까?"
"네, 의무대에 있었습니다. 최전방이었지요. 4년 동안 엠블란스를 몰았습니
다."
"그러세요? 저도 의사랍니다. 벤슨이라고 하지요."
"어쩐지, 약냄새가 난다 했죠."
사내는 웃더니, 이윽고 좀더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저는 에반스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몰아 달렸다. 길손은 몸을 뒤척이더니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내가 몸을 숙였을 때 벤슨은 비로소 그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작고 고양이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그는 또한 사내의 빰에 난 길고 깊숙한 흉터를 눈여겨보았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듯 벌겋고 선명한 흉터였다. 그걸 보자 미세스 솔리 생각이 나서, 그
는 시계를 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어 더듬어
보고는 시계가 거기 없음을 깨달았다.
닥터 벤슨은 매우 천천히, 매우 조심스럽게 의사 밑으로 손을 뻗어, 항상
가지고 다니는 권총을 잡았다. 천천히 총을 뽑아서는 어둠 속에서 세워 들었
다. 재빨리 차를 세우고느 총구를 에반스의 옆구리에 들이대며 성난 음성으
로 말했다.
"그 시계 내 주머니에 넣어."
길손은 겁에 질려 펄쩍 뛰며 얼른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꺼져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이거...난 선생이..."
벤슨은 귄총을 사내의 옆구리에 더욱 깊숙이 박으며 냉랭하게 되풀이 했다.
"시계를 내 주머니에 넣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에반스는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시계를 꺼내서는, 떨리는 손으로 의사의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의사는 총을 쥐지 않은 손으로 시계를 빼앗아 주머니
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사내를 차 밖으로 쫓아냈다.
"이 밤중에 집을 나온 건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야. 그래도 난 틈
을 내서 당신을 도우려 했어."
그는 화가 나서 쏘아붙이고는 냅다 차를 출발시켰다. 바람결에 꽝 하고 문
이 닫혔다. 그는 권총을 다시 의자 밑 권총집에 꽂아 넣고는 서둘러 차를 몰
았다.
산길을 타고 올라 솔리네 농장으로 가는 것은 걱정했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
았다. 게다가 오트 솔리는 나이든 일꾼 중 한 사람을 보내 랜턴을 들려 길
아래쪽까지 마중나가도록 했으므로, 그의 도움으로 낡은 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 마침내 자그마한 농가(農家)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었다.
그동안 숱한 어린애를 세상에 내보낼 솔리 영감의 경험이 명백히 부인에게
큰 도움이 된 듯, 부인은 이미 별 고생 없이 몸을 푼 뒤여서, 벤슨 의사와
그가 들고 간 길쭉한 가방 속에 기구들은 별로 도울 일이 없었다. 아무튼 모
든 일이 끝나자 벤슨은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다가 웬 녀석을 태워 주었는데 그놈이 절 털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는 조금쯤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솔리 노인에게 말했다.
"제 시계를 훔쳤다고요. 하지만 제가 권총을 옆구리에 들이대니까 도리없이
돌려 주더군요."
젊은 의사의 입에서 그처럼 스릴 있는 이야기가 나오자 오트 솔리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 친구가 시계를 돌려 줬다니 다행이로군. 아니면 우리 애기가 몇 시에
나왔는지도 모를 뻔했으니 말일세. 한데 애는 몇 시에 나온 건가?"
벤슨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애가 태어난 지 한 삼십 분 정도 됐으니까, 지금 시간을 보면..."
그는 램프가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는 손에 든 시계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유리에 금이 가고 위쪽
이 부서져 있었다. 그는 시계를 뒤집어 등잔불 가까이 대고는, 뒷면에 새겨
진 다 닳은 글씨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의무대 토마스 에반스 일등병님께.
1943년 11월 3일 밤 이탈리아 전선에서,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 주신
용기에 감사 드리며.

간호사 네스빗
존스
윈게이트 드림.


-




등산길의 죽음
( Death on a Mountain )
by - Peter Harris


그들은 탁구대를 치웠다. 토요일이었지만 그날 저녁은 댄스 파티도 열지
않기로 했다.
자기가 그런 게 아니라고 지배인은 경감에게 말했다. 바로 그날 아침 존슨
부인이 계곡에서 시체로 발견된만큼, 손님들은 다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텔 분위기를 이해하실 겁니다."
지배인은 말했다.
"존슨 부처는 이곳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되지만, 부인은 손님들간에 인
기가 썩 좋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좋았다고 할 수 있지요."
"무슨 말이오?"
경감이 물었다.
"그건... "
지배인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부인은 매력이 있었고, 남자 손님 중 한두 분은 부인에게 다소 지나친 관
심을 쏟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가장 무도회에서 조금 말썽이 생긴 겁니다.
... 존슨 부인은 '타히티 섬의 아가씨'로 분장했지요. 지금은 떠났지만 그
때는 젊은 손님이 한 분 묵고 있었는데, 그 양반은 '에드워드 왕조(王朝)
시대의 협잡꾼'으로 차려 입고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두 분은 거의 저녁 내
내 한데 어울려 춤을 추었는데, 카우보이는 그게 마음에 안들었던 겁니다."
"카우보이라니?"
"내 정신 좀 봐... 부인의 남편 말입니다. 그 분은 카우보이 복장을 했거
든요. 별로 애써 꾸밀 필요도 없었지요. 평소에도 산을 오를 때면 늘 카우
보이 모자에 화려한 줄무니 셔츠 차림이었으니까요. 그저 사슴 가죽 바지와
로프 하나만 빌리면 되었지요. 그것으로 대상(大賞)을 탔습니다. 언제나 단
순한 아이디어가 승리하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한바탕 했나요?"
경감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포크 댄스 타임 때 카우보이가 협잡꾼의 콧잔등에 한 방 놓
겠다고 으르렁댔지요. 결국 제가 나서서 점잖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
다만."
"그럼 존슨 부인은 좀 바람기가 있었던 거군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지배인은 점잖게 말했다.
"그분이 제 아내였더라면 제 마음이 늘 편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남편되는 양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방에 계십니다. 사고가 난 후로 방을 나오신 적이 없지요. 이만저만 충격
을 받은 게 아닐 테니까요."
존슨이 경감에게 한 이야기로는, 사건 전날 그들 부부는 샌드위치를 싸 가
지고 일찌감치 출발했다고 한다. 둘다 산을 타는 일에는 서툴렀으므로 위험
한 길은 피했으나, 그래도 코스 중 일부는 좁다란 길로 한쪽이 급경사가 져
있어서 발밑을 조심해야 했다.
"나는 도중에 앉아서 부츠에 박힌 돌을 뺐습니다. 아내는 몇미터 앞서가고
있었는데, 해가 지기 전에 꼭 산꼭대기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어야겠다고 소
리치더군요. 그때가 네 시가 넘었지요. 절벽 일부가 튀어나와 시야를 가렸
기 때문에, 아내는 길 가장자리로 바짝 다가서야 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경감이 물었다.
"정신을 차려 뜻밖의 사고만 조심하면 위험할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심
하라고 했지요. 이윽고 찰칵 하고 셔터를 누르느 소리가 나고, 아내는 '됐
어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신발 끈을 매고 있었으니까요. 아내는 아마 발을 헛디뎠던 모양입니다. 비
명을 듣고 내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아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
지요.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카메라도 함께 떨어졌겠군요."
"아닙니다."
존슨은 열띤 어조로 말했다.
"그건 내가 갖고 있습니다. 아내가 중심을 잡으려다 놓쳤는지 길에 떨어져
있더군요. 필름을 현상해 보시면 사고 당신 아내가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두분 다 사진을 잘 찍으시나요?"
경감이 물었다.
"아니오. 별로 찍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셔터를 누를 때는 해를 등져야 한
다는 것 말고는 사진의 '사'자도 모릅니다. 찍을 때마다 필름을 감아 줘야
한다는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그는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을 열었따.
"이겁니다."
구식의 싸구려 카메라였다. 그저 4~5미터 앞에서 친철들 사진이나 찍는다면
모를까, 몇 킬로 떨어진 산의 정취(情趣)를 담기에는 어림도 없는 물건이었
다. 이런 것으로 원경(遠景)을 찍으려는 사람은 오로지 낙척주의자 밖에 없
다는 것을, 그 자신 사진을 꽤 다루어 본 경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
찌하랴, 휴양지는 그와 같은 낙천가들로 가득 찬 것을... 카메라 뒷쭉에 붉
은 파인더에 6이라는 숫자가 나타나 있었다.
"필름을 감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경감이 말했다.
"6번 필름이 부인이 떨어지기 직전에 찍으신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조사가 끝나면 원판은 돌려주시겠지요? 제게는 소중한 추억
이라서요."
"사고 현장까지 함께 가 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
"언제든 좋습니다."
"오늘 오후로 하지요. 그 운명의 시간과 같은 시각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
도록 말입니다."
경감은 부관인 경사에게 필름을 주어 보내고는, 점심 식사 후 존슨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족히 두 시간을 걷고 나자 경감은 이런 일에는 훈련이 부
족했음을 절감했다.
"이 부근입니다."
문득 존슨이 말했다.
"아내는 저기 서서 사진을 찍었지요. 저는 여기 앉아 신발끈을 매고 있었
고요."
경감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곡까지는 먼 거리였다.
해는 어느덧 저물기 시작하여 두 사람의 길다린 그림자가 길 위에 그로테
스크하게 뻗어 있었다.
"사진을 찍은 당신 부인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었나요?"
경감이 물었다. 존슨은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해를 등지고요."
그들은 호텔로 돌아왔다. 경감은 발에 생긴 물집을 의식하며 다소 절룩거
렸지만, 존슨은 자신 있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서갔다. 경가는 이미 현상
된 사진을 들고 돌아와 있었다. 경감은 지배인실에서 사진을 검토했다.

삼십 분 뒤 그는 존슨의 방문을 노크했다. 홀아비는 보따리를 꾸리고 있었
다.
"떠나실 건가요?"
경감이 물었다.
"상관없으시다면... 여긴 이제 너무 울적해서요."
"부인과는 얼마나 심하게 타투셨나요?"
경감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다투다뇨?"
"부인이 다른 손님과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지 않으셨던가요?"
"아, 그거요?"
존슨이 말했다.
"가장 무도회 때 있었던 일을 갖고 그러시나 본데.. 뭐 별일 아니었습니
다. 제가 질투로 잠시 이성을 잃었었지요."
"혹시 부인께 남자들을 쫓아다니는 습성이 있어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된 건 아닙니까? 잘은 모르지만 무언가 부인을 죽일 이유가 있었겠지
요."
"말씀 삼가하십시오."
존슨은 화를 냈다.
"경찰이라고 무고한 사람에게 함부로 죄를 씌우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사정
을 다 설명했고, 당신은 증거로 필름까지 갖고 있지 않소? 카메라도 거짓말
을 합니까?"
"이 경우엔 분명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감이 대꾸했다.
"깜짝 놀랄 진실을 말해 주었으니까요... 당신은 사진에 대해서는 잘 모른
다고 했는데, 옳은 말씀입니다. 워낙 아는 게 없다보니 아마추어들이 흔히
떨어지는 함정에 당신도 빠져 들었지요 --- 눈앞의 경치를 찍다가 자기 그
림자까지 찍었단 말입니다. 부인이 찍었다는 그 사진에 말이오. 흔히 있는
일이지요. 특히 늦은 오후 해가 낮을 때는 말입니다."
"그건 분명 아내의 그림자일 거요!"
존슨은 소리쳤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부인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었다면 말입니다."
경감이 말했다.
"한데 그 모자는 계곡에 떨어져 있지 않았단 말입니다."





공중전화
( Public Telephone )
by - Flyfox ( 1970 ~ )


처음부터 모든게 잘못 되었다. 그 되먹지 못한 사장 녀석이 그를 해고 시
키지만 않았어도 모든 것이 잘 되었을 것이다. 그는 퇴직금 한푼 받지 못하
고 해고 당했으며, 덕분에 여자 한테까지 버림 받았다. 한달전에 어떤 재수
없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읽고 한참 웃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 꼴
이라는 생각이 드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별수가 있으려구.
빌리 윌리암스는 월가의 증권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사실 잘못은 그
에게 있었다. 그가 회사에서 맡은 일은 홍수 처럼 밀려 들어오는 증권 정보
의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하여, 각 부서에 정보를 원활하게 전달해 주는 역
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데이터를 경쟁 회사에 팔아 먹거나 고객들에게 손
해가 가도록 교묘하게 함정을 놓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금을 2년 동안이나
챙겨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운이 나쁘게도 사장이 심어놓은 첩자에
게 들키고 만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었다.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겠네. 그러니, 조용이 이 회사에서 사라져 주
길 바라네."
'나쁜자식 같으니라구, 그렇다고 퇴직금을 한푼도 안주다니! 그동안 녀석
을 위해서 내가 해 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빌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로라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어머, 그렇다면 직장을 완전히 잃은거에요?"
"그래."
"오, 빌리..."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뜸을 드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새 직장을 얻기 전까지 결혼은 연기해야겠어요."
목소리는 동정이 깃들여 있었지만, 꺼지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
역시 사장 녀석과 다를바가 없었다.
"직장을 얻지 못 할 것 같아."
이것이 두번째 이유다.
"...!?"
"사장 녀석이 다른 증권 회사에, 나를 채용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나봐.
내가 회사의 극비 정보를 많이알고 있으니까 겁이 난거지. 두고보라구, 언젠
가는 녀석을 파멸 시키고 말거야."
"빌리.."
그녀가 부드럽게 불렀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빌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무슨 말을 지껄여 될
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말을 끝 맺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할 수없다는거지? 너도 사장 녀석하고 똑같군 그래. 하
지만 두고봐,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줄 알아? 너도 마찬가지야,
나중에 나에게 돌아와도 소용없어!"
그리고 끝이었다.
그녀가 뒤에서 뭐라고 변명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영원히 작별을 하고 그는 맨하탄의 어느 술집에서 흑발에 키가 180
은 됨 직한 체리라는 여자를 만났다.
"이름이 체리라구? 설마 처녀는 아니겠지?"
"그런 말은 백 번도 넘게 들었어요. 그럴 때 마다 부모님이 원망 스럽다니
까요."
"부모님들이 카톨릭 신자라도 되나보군."
"어머나, 그것을 맞춘 사람은 당신 뿐이에요!"
이렇게 그녀와 만난 뒤 몇 잔을 더 걸치고 그녀를 아파트로 끌어 드릴 수
가 있었다.
그런데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어둑한 슬럼가로 빠져 들게되었다. 표지판은
온통 엉망이었고 가로등조차 대부분이 꺼져 있었다. 여자가 불안한 듯이 말
했다.
"여긴 브롱크스잖아요?"
"그래? 난 잘 모르겠는걸?"
"빨리 빠져 나가요. 이런 곳은 질색이에요."
빌리는 차를 몰아 사우스 브롱크스 지역을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엉망인
표지판과 어두운 거리, 그리고 온통 락카로 도배 되다시피 한 건물 때문에
나가는 길을 찾아 내기가 힘들어 졌다. 마치 미궁속을 해매고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그녀의 기억과 자신의 직감만을 의존하며 길을 찾았다. 술기운이 약
간 있었기 때문에 불량배들의 습격에 대한 공포감은 별로 없었지만 체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리
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뒷 유리에 뭔가 퍽하고 와 부
딪쳤다.
뒤를 돌아다 보니 두서너명의 흑인 깡패가 돌맹이들 던지면서 뭐라고 욕지
거리를 내 뱉고 있었다.
"제기랄, 미친놈들이야!"
악셀을 밟았다. 다행히 깡패들의 소굴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브
롱크스이 미로 안에서 헛돌고 있었다. 그가 다음 블록에서 우회전을 했을 때
갑자기 중절모를 쓴 사내가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급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긴 했지만 차는 한참을 더 미끌어져 나가 사내를 그대로 들이 받았다. 중
절모는 저만치 떨어져 나가고 사내는 5미터 정도 튕겨 나갔다.
체리가 비명을 질렀는데, 빌리는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괜찮을 것이
라는 말로 그녀를 안심 시켰다.
"빨리 도망가요."
체리는 계속 말했다.
"아무도 모를 거에요. 여기서 사람 죽는것은 다반사에요. 아무도 본 사람
이 없으니까 모를 거에요."
그녀는 침착했다.
"그래."
그는 침을 꾸울꺽 삼키고 꺼진 시동을 다시 걸려고 했지만, 차는 피식 거
리기만 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차 시도해 보다 밖으로 나가 본네트를
열고 내부를 보았으나, 어디가 고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을 크게 뜨고 처참하게 죽어있는 사내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사내의 중절
모는 2미터 지점에 있었다. 그는 쥐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뭔가를 감추기
위해서 변장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온 빌리는 시동을 걸어 보았다. 역시 안되기는 마찬
가지였다.
"저기, 공중 전화가 있어요. 도움을 청해요."
"누구한테? 나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
"내가 알아요."
그녀가 백에서 수첩을 꺼내 전화 번호를 보여 주었다. 맥거번이라는 사내
의 전화 번호가 보였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빌리가 말렸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전화를 걸께."
"당신은 맥거번을 모르잖아요."
"네 이름을 대면 알겠지. 여기서 누가 오지 않나 지키고 있어. 금방 갔다
올께."
빌리는 모든 것을 사장 녀석과 로라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놈들 때문에 내가 이런 액땜을 하는거야.'
이런 저런 잡념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의 발걸음은 전화 박스
앞에서 멈추어 섰다.
전화박스는 거리의 지저분함과 대조적으로 깨끗했다. 유리는 새것처럼 번
들거렸고, 박스를 형성하고 있는 금속들은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어 이것이
브롱크스의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곳에 전화박스가 있
는 것도 이상하고...
하지만 그 의혹은 잠깐 뿐이었다.
그는 동전을 집어 넣고 버튼을 눌렀다.
"기다렸소."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그에게 "기다렸소."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전화번호를 잘못 돌린 것 같군요."
그가 끊으려고 하자, 상대는 다급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조용히! 당신은 제대로 건거요. 자, 마음 편히 하고 당신이 원하던 일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그가 우물쭈물 하자 수화기 속의 사내가 다그쳤다.
"빨리 말하시오! 앞으로 20분 후면, 페트롤카가 이곳을 순찰하게 되어 있
소. 자, 빨리!"
빌리는 상대의 다급한 말투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때문에 그의 신분을
확인해야 된다는 생각을 까마득히 잊었다.
"난, 난 사람을 치었어요. 당신이 도와 주어야겠어요."
"겨우 그것 뿐이오?"
"겨우라니오! 난 사람을 죽였단 말이에요!"
"간단한 문제군. 잠깐 기다리시오."
그리고 나서 20초 뒤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친 장소는?"
"여기서 50미터 정도 돼요."
"더러운 장소에서 사람을 치었군."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지껄였다.
"그리고, 또 난 차가 고장났어요. 차를 놓고 가면 경찰이 나를 추적하게
될 텐데..."
"알겠소. 당신은 내가 시키는 데로만 하시오. 우선 여기서 1블럭 떨어진
곳으로 가면 둥근 모자를 쓰고 있는 흑인이 밖에 나와 있을 것이오. 그에게
열쇠를 달라고 하면, 그가 차 키와 차가 있는 장소를 알려 줄 것이오. 몇가
지 사항만 지켜준다면 당신은 안전할 것이오. 우선 차에 당신의 지문을 남기
지 마시오. 차를 타고 당신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 아무 곳이나 상관없소.
사람의 눈에 띄지않는 곳에다 차를 버리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시오. 당
신은 그렇게 하기만 하면 뒷 처리는 우리가 다 할거요."
상대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빌리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풀어 놓았다.
"잠깐, 이런 일 말고도 다른 일도 해 주나요?"
"몰론이요, 돈만 준다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
"죄송합니다, 내가 실언을 한 것 같군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가 보군. 걱정 말고 말해 봐요."
눈이 번쩍 떠지는 기분이었다.
"아, 아니오, 그냥 해 본 소리에요."
"말해 보시오, 비밀은 보장하겠소. 그리고 당신이 지불한 돈에 비해 우리
가 해야할 일은 너무 간단하오. 10만 불에 차에 치어죽은 사람 시체를 처리
해야 하는 일이라니..."
"10만 불이라구요?"라는 말이 입 밖에 튀어 나올뻔 했다. 그는 간신이 의
문을 삼켰다.
빌리는 차분히 사장 녀석과 로라에 대한 얘기를 했다. 전화 속의 인물은
그의 말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둘을 처치하면 된단 말이군. 그것이 다요?"
"그렇습니다..."
"좋소. 이제야 10만 불 값어치를 우리가 할 수 있게 되겠군. 아무튼 당신
은 내가 시킨 데로 흑인을 만나시오. 나머지 처리는 우리가 다 할테니까."
"예, 예, 알겠어요."
전화는 끊겼다.
기분이 이상해 졌다. 체리는 어째서 이런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의문을 갖은 채 체리에게로 돌아갔다.

일주일 뒤에 빌리는 사장 녀석과 로라가 누군가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얘
기를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은 뜻 밖이었다. 무심코 한 말이긴 했지만, 그는
맥거번이라는 사내의 대답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사건을 그들
이 처리해 주었다는 것은 충분히 믿고도 남았지만 사람까지 죽인다는 것
은...
그는 체리에게 전화 속의 인물에 -- 맥거번 -- 대해서 묻고 싶었다. 그러
나 자신이 살인을 청부 했다는 얘기가 나올까봐 말하는 것을 꺼려 했다. 하
지만 정말로 전화 속의 인물이 맥거번일까하는 의문은 가시지를 않았다.
몇 일 동안 그는 그 문제로 고심했다. 간접적이나마 그는 사람을 세명이나
죽였다. 차에 치어 죽은 사내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 전화 속의 인물은?
궁금증은 끝도 없이 펼쳐져, 온갖 괴상한 상상을 낳았다. 전화의 인물은
맥거번이 맞을 지도 모른다. 체리는 살인 청부업자들과 내통하고 있었던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청부업자라면 체리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을리가 없
다. 또 그들은 사장과 로라의 암살 의뢰를 쾌히 승락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니, 그들은 10만 불 어쩌구 하는 얘기를 한 것 같은데, 10만 불이라니...
이런저런 생각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체리는 그를 다시 찾지 않았지만, 그
바아로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빌리는 전화의 인물
에 대해서 체리에게 꼭 물어볼 생각으로 그 바아를 찾아갔다.
빌리는 바텐더에게 체리가 왔느냐고 물었다. 바텐더는 곧 있으면 올 것이
라며 그에게 버본을 따라 주었다.
바텐은 정직하게 말했던 것이다. 잠시후 체리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날 찾아 오셨나요?"
"그래."
빌리는 긴장했다.
"전화를 해주시지..."
"번호를 잊었어."
"섭섭하네요."
그녀가 가장한 표정으로 괜히 섭섭한 척 한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얘기를 꺼냈다.
"...사실 궁금한게 있어서..."
체리의 눈빛이 금방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맥거번이라는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겨우 그 얘기 하는데 그렇게 긴장을 해요?"
체리는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자 빌리는 수치
심이 끓어 올랐다.
"사촌인데 작은 탐정 사무소를 갖고 있어요. 뭐 그렇게 유명한 탐정은 아
니지만요. 사람을 죽이는 일 빼고 뭐든지 다해요. 죽은사람 처리하는 일은
맥거번이 제일 잘하는 일 중에 하나일 거에요.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죽이는 일 빼고 뭐든지 다 한다구?"
"당신은 맥거번이 무슨 살인청부업자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망서렸다. 그 얘기를 꺼내야할까? 그녀에게 "그에게 살인을 청부 했
어. 그리고 그게 현실로 나타났지."라고 말을 해야할까? 결국 그는 입을 다
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화 속의 인물은 맥거번
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뭐하는 작자란 말인가!
그날밤 그는 체리의 은근한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성공했
다. 아침에 배달된 조간 신문이 펼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탁자 위에 놓여 있
었다. 생각하기도 싫다. 그 문제는 모두 끝난 것이다. 원수들은 다 사라졌
고, 그는 이제 평온을 되찾아도 되는 것이다. 악당들의 최후에 통쾌함을 느
껴야 된단 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문을 펼쳤다.
해드 라인은 케니 밀라노에 대한 기사로 장식 되어 있었다. 케니 밀라노는
뉴욕에서 가장 세력이 큰 토스깐찌오 가(家)의 변호사이다. 안토니오 토스깐
찌오는 케니가 자신을 배신하고, 빈센트 바라콘터노에게 조직 내의 정보를
팔아 먹었다고 생각하고, 밀라노를 살해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에 케니
밀라노는 자신과 부인, 그리고 자식들의 보호를 위해서 결국 정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법무부와 FBI는 그에게 새로운 신분과 직업 그리고 신변을 보호
해 준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법정서 진술할 것을 요구 하였고, 케니는 그것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부인이 자동차 안에서 폭발물이 터져 중상을 입
게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부인은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기는 했으나, 두 명의
자식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경찰은 자식들의 죽음이 케니를 노리고 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사건 규명
에 나섰으나, 이렇다할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토스깐찌오를 구속할 수가 없
었다. 케니는 그것으로 정부 요원의 보호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
일 후인 12월 7일에 케니 밀라노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경찰은 부인에게서 케니 밀라노가 토스깐찌오에게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그 방법을 강구하려
고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행방불명된 케니의 모습은 11일에 브룩클린 교 아래서 발견 되었다. 큰 삽
자루에 쌓여 있었는데 아마도 큰 돌맹이에 묶여 강에 버린 듯 했다. 다행스
럽게도 돌맹이를 묶은 줄이 끊어져 그의 모습이 강 위에 떠오르게 된 것이
다.
검시 결과 그의 사인이 규명되었다. 그는 차에 치어 큰 골절상과 뇌진탕을
일으켜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그는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케니 밀라노가 행방 불
명된 날은 12월 7일. 바로 그가 중절모의 사내를 차로친 그 날이다. 희안하
게도 몇 개의 조각을 남겨둔 지그소 퍼즐처럼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 갔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친 사람은 케니 밀라노였다. 그의 부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토스깐찌오에게 복수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어
떤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했을까. 그 공중전화. 확실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만 의뢰인과 청부업자간의 연결을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전화의 인물이 맥거번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 이 시점에서 그가 전화 속
의 인물을 만난 것은 거의 우연의 일치라고 밖에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정리해 보자면, 케니 밀라노는 토스깐찌오에게 복수하고자 살인청부업자를
찾았을 것이다. 청부업자들은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의뢰인에게 청부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계약금은 지불되어 있어야 한다 -- 그래서 그들
이 빌리에게 10만 불에 대해 얘기를 했던 것이다 -- 그 의문의 청부업자들은
계약금을 받은 후 -- 짐작컨데 은행의 금고나 온라인 입금으로 했을 것이다
-- 그에게 공중전화의 위치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밀라노는 브롱크
스의 공중전화를 찾아왔고, 어처구니 없게도 그의 차에 치어 죽고 만 것이
다.
그리고 빌리, 그가 케니 밀라노의 대리 역할을 하고 만 것이다.
모든 의문이 풀렸다. 빌리는 터무니 없는 이 사건에 다만 웃음 밖에는 나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 일 후, 빌리 윌리암스는 의문의 자객에게 습격을 받는다. 그
는 소음기가 장착된 총으로 복부와 가슴에 두 발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자
객이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를 들으며 숨져 갔다. 목소리는 예전에 공중전화
박스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추천 (0) 선물 (0명)
IP: ♡.99.♡.87
22,93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1-31
0
127
3학년2반
2022-01-31
0
120
3학년2반
2022-01-31
0
181
3학년2반
2022-01-30
0
127
3학년2반
2022-01-30
0
108
3학년2반
2022-01-30
0
184
3학년2반
2022-01-30
0
200
3학년2반
2022-01-30
0
237
3학년2반
2022-01-29
0
322
3학년2반
2022-01-29
0
214
3학년2반
2022-01-29
0
146
3학년2반
2022-01-29
0
98
3학년2반
2022-01-29
0
95
3학년2반
2022-01-27
0
131
3학년2반
2022-01-27
0
110
3학년2반
2022-01-27
0
200
3학년2반
2022-01-27
0
274
3학년2반
2022-01-27
0
162
3학년2반
2022-01-26
0
169
3학년2반
2022-01-26
0
98
3학년2반
2022-01-26
0
97
3학년2반
2022-01-26
0
85
3학년2반
2022-01-26
0
78
3학년2반
2022-01-25
0
122
3학년2반
2022-01-25
0
84
3학년2반
2022-01-25
0
77
3학년2반
2022-01-25
0
94
3학년2반
2022-01-25
0
74
3학년2반
2022-01-24
0
91
3학년2반
2022-01-24
0
8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