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2-1

3학년2반 | 2022.02.05 07:35:18 댓글: 0 조회: 51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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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열차 살인사건(중) │
│김성종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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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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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도망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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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바다가 보이는 아파트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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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어둠 속으로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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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파리의 방랑자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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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로마의 여인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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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유괴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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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위조전문가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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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출국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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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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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구례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71년 현대문학 시 소설 추천 완료
1974년 한국일보 최후의 증인으로 장편소설 당선
작품으로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 <Z의 비밀>, <안개
속으로 지다>, <제5열>, <불타는 여인>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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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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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이 가방을 찾아가지고 출구를 빠져나왔을 때 밖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가 집을 떠난 것은 12월
30일이었고, 지금은 1월 1일이었다. 그러니까 이틀만에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갖은 고초를 다 겪고나서 실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음, 여기 공항이야. 지금 막 도착했어. 당신 몸은 어때?
괜찮아요.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일은 다 끝나셨어요?
음, 다 끝났어. 인하는 잘 있어?
네, 잘 있어요. 바다를 쳐다보면서 아빠만 찾았어요.
무슨 일 없었어? 나를 찾는 전화 오지 않았어?
아뇨. 아무 전화도 없었어요. 빨리 오세요.
알았어. 곧 들어갈께.
그는 미스터 Y한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대고 있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택시 정류장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택시를 기다리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잠겨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과 그의 가족들도
저 어둠 속으로 영원히 숨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은데다 택시는 띄엄띄엄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거의 30분 가까이나 기다려서야 겨우 차를 탈 수
있었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그는 미스터 Y를 너무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다 못해 그가 행동을 취한다면 공격
목표는 아무래도 우리 집이 될 것이다. 놈은 나의 아내와 아들을
노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택시가 너무 느리게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40분쯤 지났을 때 멀리 해운대의 불빛들이 보이면서 바다
냄새가 조금 열려 있는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창문을
더 밑으로 내린 다음 바다 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S아파트 못미쳐 백 미터쯤 되는 곳에서 택시를 내렸다.
이제 집에 들어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아파트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나무가지 사이로 파도가 허옇게 일어서는 보였다. 거리 위로는
모래를 실은 바닷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귓전을 때리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는 자기집이 있는 아파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파트 단지 맞은 편에 다달아 있었다.
길을 건너가는 것을 삼간 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거실의 커튼이 젖혀져 있었고, 창가에 아내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 곁에는 그의 아들이 붙어서 있었다.
그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길 건너편의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 뒤에
몸을 숨기고 서있는 그를 아직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 이상한 사나이들이
잠복해 있지 않나 해서였다. 10분 가까이 그렇게 서있었지만
이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미스터 Y가 아무리 판단이 빠른
놈이라해도 벌써 여기까지 손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경찰이 우리집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는 비로소 안심하고
길을 건너갔다.
남화는 핼쓱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녀도 동림도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웃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림은 애정 표현에
아주 서툴렀다.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아니고는 억지로
애정을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을 쑥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를 껴안는 대신 아들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 쇼파에
가서 앉으면서 아내의 손을 잡았다.
일찍 오고 싶었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어.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저는 무슨 사고나 생기지 않았나 해서
걱정했어요.
핏기 하나 없이 말라붙어 있는 아내의 입술을 보자 동림은
가슴이 미어져왔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유산까지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내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움직이면 안 되지 않아.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
식사 같은 건 내가 준비할께.
괜찮아요 조금씩 움직이는 건 괜찮아요.
당신 얼굴이 말이 아니야. 그 좋던 얼굴이...... 정말 말이
아니야.
그는 손을 들어 아내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자 그녀의 두
눈에 금방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 밑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당신 알고 계시죠?
뭘 말이야?
정말 모르세요? 제가 사고를 냈을 때 목격자가 있었다는거
말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이.......
그녀는 말끝을 흐리면서 두려운 눈빛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동림은 아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가만히 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화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뭐라고 얼른 대꾸할
수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는 더이상 숨긴다는 것이
무리임을 깨달았다. 아내는 이미 미스터 Y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알고 있었어. 당신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나 혼자 그자를 상대하려고 했었는데.......
악마 같은 사람이에요.
그놈한테서 전화가 왔었나? 아니면 그자를 만나보았나?
만나보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련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뭐라고?! 언제 만나보았다는 거야?!
그녀는 겁에 질려 더욱 떨어댔다. 그는 아내의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더이상 추궁하는 것을 삼가하고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당신이 서울 올라가시기 전전날...... 그러니까 28일 밤에
만났어요. 용서해주세요.
터져나오는 아내의 오열을 듣지 않으려는 듯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당신한테만은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저 혼자
모든 것을 맡아서 처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뒤늦게야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았어요...... 처음부터
당신한테 말씀드려야 했어요...... 어차피 당신이 알게될 텐데
어리석게도...... 큰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그녀가 울자 아이도 덩달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그 자를 만나서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말해 봐.
흐느끼는 아내를 달래려고 그는 아내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
그녀를 껴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품에 와락 안기면서 더욱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아이까지 덩달아 울어대는 바람에 집 안은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아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안에 말못할 사정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기가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래서 더이상 추궁하지 않고 가만히
아내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침묵을 지키자 남화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울음을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을 만나보셨나요?
만나지는 않았어. 전화로 통화만 했어.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셨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자는 당신을 만났다는 말을 나한테
하지 않았어. 그건...... 당신한테서 처음 듣는 말이야.
말씀드리겠어요. 그날 밤 그 사람을 만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겠어요.......
약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좀더 강해질 수 없을까 하고 그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들으셔야 해요. 어차피 알게될 거예요. 그걸 당신한테
숨기고...... 저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인하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 용서를 빌지 않고는 죽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아내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죽다니 그런 어리석은 말이 어딨어. 인하를 위해서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해. 그날 밤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건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있어. 당신이 용서해 달라면 용서해 주겠어.
나한테 당신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는지는
몰라도.......
남화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흰
봉투를 하나 집어들었다.
용서해 주세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그는 아내가 내미는 편지봉투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지?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차마 입으로는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아 오시면 드릴려고 글로 써놓았어요. 거절하지 말고 꼭
읽으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남화는 주방쪽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이윽고 주방 쪽에서 그녀의 억제된 흐느낌이 간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엄마의 우는 소리를 듣고 아이는 동림의 품에서
빠져나와 엄마를 부르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동림은 봉투를 탁자 위에 놓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가로등 불빛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는 바다 위로 불을 휘황하게 밝힌 큰 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 불빛들이 마치 조류를
타고 춤추듯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는 생각난 듯 탁자 쪽으로 돌아와 편지봉투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가지고 다시 창가로 다가가 검은 바다
쪽으로 한동안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두 장의 흰 종이는 파란색 볼펜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남화의 글씨는 하나하나 그린 듯 반듯하고 예뻤다.
거기에는 사고의 목격자를 만나게 된 경위와 차 속에서 그녀가
그에게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 그 내용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그것을 가까스로 읽고 난 동림은 마치 어떤 여자의
유서를 읽고 난 기분이었다.
아내가 그날 밤 그 사나이를 만나 무슨 일인가 있었다는
언질을 그에게 주었을 때 그는 그 무슨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글로 써놓은 내용을
읽고 난 지금은 그때의 기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는 납덩이처럼 굳어진 표정으로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발을 떼면 유리창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았다.
차츰 아내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가 끌어올랐다. 그것은
이윽고 그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뀌어갔다. 비로소 아내가
갑자기 유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내가 아들의 손을 잡은 채 거실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었다.
겁에 질린 나머지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돌아서버리면 그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아내를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아이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던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아내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그렇게 낯설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아내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다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더이상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마치 조그만 참새처럼 떨고만
있었다. 그녀는 더이상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까지도 두렵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림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것은 용서해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악마를 만나 어쩔 수 없이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것이었다. 그 충격으로 태아까지 유산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그는 아내를 위로해야 옳았다. 아내의 몸이 더럽혀졌다는
사실 따위에 집착한다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졸렬한 생각이다.
그는 아내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동림은 아내를 껴안았던 팔을 풀고 장식장 선반 위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먼저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그때까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입장이
못되었다.
먼저 전화기 쪽으로 움직인 사람은 그의 아들인 인하였다.
어린 아이는 수화기를 들어 귀에다 대더니 몇번 응응하고
나서 아빠...... 하고 그를 불렀다. 동림은 그쪽으로 다가가
아들로부터 수화기를 받아들였다.
여보세요.
황금의 초생달, 난 미스터 Y이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숨을 죽였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거기 있었군. 어떻게
된거지?
굳이 말해야 되겠어?
동림은 처음으로 반말로 말했다.
추동림, 배낭은 어떻게 했지?
네놈한테는 그것이 제일 중요하겠지. 배낭은 버렸어.
도자기도 물론 버렸고 말이야.
뭐라고? 어디다 버렸어?
쓰레기통 속에다 버렸어. 아마 지금쯤 누가 주워갔을걸.
추동림,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지. 미친 놈은 바로 너야.
역습을 받은 미스터 Y는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황금의 초생달, 뉴스를 듣고 네가 매독환자를 죽였다는걸
알았어. 넌 이제 살인범이고 네 마누라는 사람을 치어죽이고
뺑소니쳤어. 부부가 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중이란 말이야.
부부가 다 체포되면 아이는 누가 기르지?
네놈이 내 약점을 물고 늘어질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
배낭을 내놓기만 하면 모든 걸 불문에 붙이겠다. 오늘밤
중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까 그 사람 편으로 배낭을 보내.
배낭을 내줄 수는 없어. 내 아내를 농락하고 나를 협박한
댓가를 너도 똑같이 받아야 해. 네놈을 죽이고 싶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겠어.
남화는 자진해서 나한테 몸을 바친 거야. 그걸 하고 싶어서
발광하면서 말이야.
동림은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네놈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자식을 죽였어. 언젠가는
복수할 거다!
유산한 걸 가지고 그러나? 그건 순전히 네 마누라 탓이야. 네
마누라가 발정해서 날뛰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미스터 Y는 협상을 포기한 채 동림을 화나게 만들려고 갖은
모욕적인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동림이 화를 못이겨 실수를
범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동림은 침착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을 네놈한테 반드시 돌려주고
말테다.
배낭을 내놓으면 모든 건 없는 걸로 해주겠다. 만일 내놓지
않으면 경찰을 그쪽으로 보내주겠다. 선택해. 어느쪽이냐?
배낭을 내줄 수는 없어. 경찰에 연락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연락해.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해. 그렇게 되면 헤로인도 함께
경찰 손에 들어간다는 걸 말이야.
동림은 아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아내가 들어도 이젠 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아내도 알게 될 일이니까. 그는
혼자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태는 아내와 합심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같은 톤으로 전화에다 대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 나는 배낭에 숨겨져 있던 헤로인을
찾아냈어. 멜빵과 등판에 숨겨놓은 헤로인 말이야. 정확히 2kg의
헤로인을 찾아냈어. 싯가로 1천만 달라어치의 헤로인을 말이야.
천만 달러라면 우리 돈으로 90억 원이야. 나를 경찰에 고발하면
너는 90억 원을 잃게 돼. 그뿐만 아니야. 너는 헤로인을 잃은
책임을 지고 조직으로부터 제거 당하겠지. 너무나도 큰 실수를
했기 때문에 너는 자살하든가 아니면 조직의 손에 살해당하겠지.
그래도 나를 경찰에 고발할 텐가? 마음대로 해봐.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터져나오는
신음소리였다.
도자기는 엉터리였어. 감정해 봤더니 그건 싸구려였어. 그건
헤로인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어. 그래서 쓰레기통에 버렸지.
나를 경찰에 고발해서 네가 얻는 게 뭐지? 아마 얻는 건 하나도
없을걸. 오히려 잃는 게 많을걸. 헤로인과 너의 목숨 말이야.
선택은 너한테 달렸어. 내가 당한 만큼 그리고 내 아내가 당한
만큼 네놈도 고통을 겪어봐. 네놈은 사람을 잘못 봤어.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어.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이제부터
보여줄 테니 기다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역습을 당한 상대방은 당황한 나머지
미처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남화가 다가와 동림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가 떨고 있는
고스란히 전해졌다. 동림은 그녀를 가만히 밀어냈다. 이윽고
미스터 Y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건 인정한다. 네 말대로 너를
경찰에 고발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어.
마찬가지로 우리가 싸워서 이득이 되는 것도 없어. 네가
헤로인을 가지고 있는 동안 너는 항상 쫓기는 신세가 될 거야.
우리 조직은 국제조직이야. 전세계에 우리 조직원이 깔려 있기
떄문에 너는 아무데도 몸을 숨길 수가 없어. 우리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 헤로인을 찾아내고 말 거야. 가족을 데리고
도망다니겠다는 건 아니겠지.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
천만 달러라면 아주 훌륭히 은둔생활을 할 수 있어.
어리석은 소리하지 마. 너는 조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처분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많은 양은 조직을 통해서만
소화시킬 수 있는 거야.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나는 얼마든지 처분할 수
있어.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말란 말이야.
그러지 말고 협상하는 게 어때?
미스터 Y의 목소리가 애걸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협상? 어떻게 협상하자는 거지?
아까도 말했지만 헤로인을 돌려주면 모든 걸 없는 걸로
하겠어. 경찰에 고발하는 짓은 하지 않겠어. 그리고.......
그리고 또 뭐지?
필요하면 돈을 주겠어. 그동안 고통을 끼친데 대한 보상으로
말이야. 천만 원까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보내줄 수 있어.
돈을 주겠다고? 작작 웃겨. 솔직히 말해 나도 협상을 하고
싶어. 하지만 네놈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헤로인을 돌려주면 네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 말이야.
너같은 악질은 약속을 지킬리도 없고, 아마 죽을때까지 나와 내
아내를 괴롭힐 거야.
그렇지 않아.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테니까 제발 헤로인을
돌려줘. 부탁한다. 제발 돌려줘. 그건 너한테는 필요 없는거야.
미스터 Y는 애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림은 듣지 않았다.
헤로인이야말로 나한테 필요한 거야. 왜냐하면 이 헤로인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지. 헤로인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안전 할
수 있어.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그걸 가지고 있는 한 너는
위험하다는 걸 알아야 해! 너한테 그건 폭탄이나 다름없어! 너는
폭탄을 안고 다니는 거야! 바보 같은 짓하지 말고 그걸 내놔!
당분간 내줄 수 없어. 내가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말이야. 내가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가서 그걸 내줄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내가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줘. 그렇지 않으면 나하고는 영영 연락이
두절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574의 778×번으로 연락하면
되겠지?
그래. 그 번호로 연락하면 나하고는 언제라도 줄이 닿을 수
있어. 추동림, 제발 어리석은 짓하지 마. 헤로인을 돌려주면
현찰 2천만 원을 주겠다. 물론 모든 것은 백지로 돌리는 것으로
하고.
1억을 준다해도 지금 헤로인을 내줄 수는 없어. 내 안전을
위해서 말이야.
너는 지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너 자신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어.
애걸조로 나오던 상대방의 목소리가 도로 협박조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림은 흔들리지 않았다.
날 협박하지 마. 난 모든 걸 각오하고 있어.
만일 헤로인을 빨리 돌려주지 않으면 너는 물론 네 가족들을
몰살시킬 거야!
동림은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남화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어떻게 된 거냐고 그에게 묻고 있었다.
동림은 아내의 시선을 피해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린아들이 다가와 아빠 하고 부르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아들을 번쩍 안아들어 꼭 껴안았다.
아이도 무엇인가 느꼈던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국제 마약조직이라면 필요에 따라서는 어린아이라도 서슴없이
죽일 것이다.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더욱 힘주어
아들을 껴안았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것은 공포의 전화벨 소리였다. 전화벨이 한참 동안
울릴때까지도 그들은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제가 받을까요?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남화가 물었다. 동림은 아들을
아내에게 안겨주고 나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추동림, 너는 우리한테 선전포고를 했어! 우리 물건을
도둑질한 놈에 대해서는 우리는 가장 잔인한 보복을 한다. 너는
물론 너의 가족들도 마찬가지 보복을 당할 거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네가 뭐라든 헤로인을 돌려줄 수는 없어. 난 모든 것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
동림은 전화선을 연결하는 플러그를 벽에 부착되어 있는
콘센트에서 뽑아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남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동림은 아내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예요?
그놈한테서 온 전화야. 당신이 만났다는 그 목격자 말이야.
그 사람이 뭐라고 그래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해 줄께. 우리는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가지 않으면 안 돼.
그 말에 남화는 더욱 소스라치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집을 나가다니요?
시간이 없어.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필요한 것들만
가방에 대충 집어넣어! 피하지 않으면 안 돼! 놈들이 우리를
죽이러 온단 말이야!
기막힌 말이었다. 기막힌 나머지 남화는 말문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누가 죽이러 온다는 거예요?
그녀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었을 때 동림은 이미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야기하자면 길어. 지금 그런 이야기할 시간 없어. 빨리
짐을 챙기라구. 이 집에는 다시 못오게 될 거야.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동림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 허둥지둥 피난짐을 챙기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동림과 남화가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있는 동안 그들의 어린 아들만은 웬 영문인지도 모른 채
어질러진 집안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동림은 가능한 한 짐을 줄이려고 했기 때문에 트렁크 두개와
어깨에 걸 수 있는 여행가방 두 개를 채우는 것으로 준비를
끝냈다.
남화는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계속 눈물을 흘렸다. 짐을
모두 챙기고 났을 때 그녀는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가 자수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 아니예요. 집을 떠나
도망다니는 건 정말 싫어요. 이게 뭐예요?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거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 말하지 마. 자수하기에는 이미 모든 게 늦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추운 겨울에 도망다니기 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 게 낫겠어요. 전 자수할 테니까
인하를 잘 부탁해요.
닥쳐!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질렀다.
남화는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동림이 그녀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기는 결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까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림은 아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소리를 질러서.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 자수한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게 아니야. 그건
그거고...... 나도 사람을 죽였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야. 만일 우리 둘이 자수하면 이 아이는 누가 기르지?
그는 서글픈 표정으로 아들을 내려다보다가 거실 한 켠에 놓여
있는 새장 쪽으로 다가갔다.
눈처럼 하얀 털로 덮인 한 쌍의 문조는 놀란 듯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거실에 불을 환히 켜놓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놀란 것 같았다. 모이통 속에는 모이가 없었다.
물그릇도 바짝 말라 있었다. 그는 모이와 물을 넣어 주면서
새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생각했다.
남화는 계속되는 충격에 제대로 정신을 가누지 못한 채 멍하니
동림의 움직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동림은 먼저 트렁트 두개를 밑으로 운반했다. 그것들을 차에다
싣고 있는데 경비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경비실 밖으로 나와보지는 않았다.
동림이 다시 5층으로 올라갔을 때 그의 아내는 아들과 함께
현관에 나와 우두커니 서있었다. 여행가방 두개가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동림은 안으로 들어가 새장을 들고 나왔다. 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까지만이라도 새장을 가지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것을 보고 남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림은 마지막에
집을 나서면서 현관의 전등을 껐다. 집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그는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들 부부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다만 아이만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어디 가는 거야?
응, 쩌어기 놀러가는 거야.
쩌어기 어디?
쩌어기 눈 많이 오는데.......
아직까지 눈을 보지 못한 아이는 눈을 몹시 보고 싶어 했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이번 겨울에 아들을 데리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으로 놀러갈 생각이었었다.
새장은 차의 앞자리에 올려놓았다. 남화와 아이는 뒷자리에
앉았다.
경비실 앞에서 그는 차를 세웠다. 경비원이 창문을 열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어디 가십니까?
어디 좀 다녀올려구요. 며칠 걸릴 겁니다.
아, 그러세요. 다녀오십시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 주황색 G카는 시내 쪽으로 백 미터쯤
달려가다가 길 한켠에 가만히 섰다. 차폭등만 켜둔채 다른
불들을 모두 껐다. 엔진은 그대로 걸어두고 있었다.
시계는 9시 3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985년 1월 1일 밤이었다. 그는 일가족을 이끌고 도망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모래바람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왔다. 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 날카롭게 윙윙대고 있었다. 이 추운 밤에 나는 아내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야 한다. 아늑하고 따뜻한 곳,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이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런 곳이 어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곳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곳은 바다 건너 저쪽 멀고먼 나라에
있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고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디로 가지?
하고 물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아내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을 곧 후회했다. 그녀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내는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당황해 하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녀가 믿고 따를 수 있게 확고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길가에 차를 세워둔 채 갈 곳을 몰라 우물쭈물 하는 것은
그녀에게 불안감만 가중시켜주는 짓일 뿐이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선 급한 대로...... 오늘밤은 호텔에서 지내야겠어.
차도에는 차량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엑셀러레이터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차는 점점 속력을 내다가 속도계의 바늘이 80을 가리키자
더이상 속력을 내지 않았다. 그는 더 빠른 속도로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30분쯤 달려 주황색 G카는 어느 조그마한 호텔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동림은 잠든 아이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는
그대로 차 안에 두고 여행가방과 새장만 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숙박카드에는 가명을 적었다. 주소도 물론 틀리게 기입했다.
프런트에 앉아 있는 아가씨는 그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하지
않았다.
한실은 따뜻했다. 아이를 이불 위에 눕히고 나서 그는 남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실감이 안 나는지 그때까지도 얼빠진
표정이었다.
동림은 무거운 침묵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가방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방바닥에 쏟아
놓았다.
이게 뭔지 알아?
그는 쏟아져나온 헤로인 봉지들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헤로인이야. 헤로인이 뭔지 알아?
남화는 머리를 가로지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가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마약이야. 싯가로 쳐서 1천만 달러어치야. 1천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얼만지 알아? 90억 원이야.
그녀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보다가 그를 쳐다
보았다.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헤로인 봉지
하나를 손 안에 넣고 꼭 쥐어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당신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젠 어쩔 수
없이 당신도 알아야만 해. 그래야만 앞일에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는 턱밑에 손을 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부산에 내려온 노경감은 광복동 뒷골목에 있는 여관 방 두개를
빌어 그곳에다 임시로 거처를 정했다. 되도록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차편으로 먼저 출발했던 9명의 부하들과 합류한 것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그들이 그렇게 늦게 도착한 것은 고속도로에
쌓인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차가 속력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1명이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여관 방 안에 둘러앉아 회의를
가진 것은 10시가 지나서였다.
우리는 범인에 대해 몇 가지 아주 유리한 단서를 확보하고
있어요.
경감은 부하들을 둘러보고 나서 수첩을 펴들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범인한테는
인하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야. 그
아이가 부산에서 태어났다면, 그리고 출생신고가 되어 있다면
틀림없이 주민등록표만 찾아내면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
있으니까 우리는 그걸 찾아내야 해. 그렇다고 우리 인력으로
부산 시내 각 동회에 비치되어 있는 전 주민등록표를 뒤져
거기서 인하라는 이름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은 연휴이기 때문에 동직원들한테 협조를 구할 수도 없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각 파출소에 비치되어 있는 관할구역 주민들의
신상카드를 조사하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주민등록표를 뒤지는
것만큼이나 방대한 일이란 말이야. 우리가 일일이 찾아볼 수는
없고 각 파출소에 협조를 의뢰할 수밖에 없어. 각 파출소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카드를 점검해 주면 그것이 제일 빠른 방법일
거란 말이야. 현재 본부로부터 부산 시경에 지시가 내려와 있을
거야. 난 조금 있다가 시경에 가서 지시 사항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고 협조를 부탁 해야겠어.
파출소에 비치되어 있는 주민신상카드에 아이의 이름이 아직
올라 있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은 기록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거기에
대비해서 다른 방향에서 또 수사를 전개할 필요가 있어. 이건
두번째 사항인데...... 확인된 사실 가운데 범인의 부인이
쇼크를 받고 유산했다는 내용이 있어. 언제 유산했는지는 몰라도
최근에 유산했을 가능성이 많아. 자연유산의 경우 산부인과에
가서 태아를 끄집어내는 수술을 반드시 받아야 하지 않나?
경감은 오갑자와 조미혜 순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고, 미혜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태아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큰일나요.
그렇다면 산부인과 병원을 뒤지면 되겠군요?
불독처럼 생긴 이종창 형사가 물었다.
그래. 그런데 수사 범위를 압축할 필요가 있어. 낙태수술은
많지만 자연유산 때문에 수술을 받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거란 말이야. 그것만해도 범위가 상당히 압축되는 거야.
우선 12월 31일을 기점으로 해서 지난 2개월 동안 자연유산으로
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거야.
산부인과 병원을 샅샅이 뒤져야 되겠군요.
그야 물론이지. 여자 나이는 29세야. 그러니까 29세전후의
여자를 찾으면 돼.
29세라면...... 1957년도생이군요. 56, 57, 58년도생을
찾으면 되겠군요.
수사관들은 각자 수첩에다 필요한 사항들을 적어넣었다.
그렇게 되면 수사범위는 더욱 좁아지는 거야. 만일 그 범위
안에서 그 여자를 찾는데 실패하면 범위를 좀 넓게 잡아 지난
10월에 수술 받은 여자들까지 대상에 포함시키는 거야. 아니,
그럴 필요없이 처음부터 아예 지난 10월부터 12월까지 사이에
수술받은 여자들을 찾아내.
범인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했는데...... 그 점도 추적해 보는 게 어떨까요?
마반장이 퀭한 눈으로 경감을 쳐다보면서 의견을 제시했다.
나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어. 그건 세번째 사항이야. 그런데
이건 다른 것보다 힘이 많이 드는 일이야. 직접 걸어다니면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여기 부산 시내 지도가 있습니다.
어디서 준비했는지 마반장이 지도를 꺼내 방바닥에 폈다.
경감은 손가락으로 해안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해운대에서부터 다대포에 이르기까지 해안선이 아주 길어
해안을 따라 직접 걸으면서 바다를 굽어보는 아파트를 체크해야
할 거야. 인원도 많이 필요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야.
하지만 다행인 것은 부산에는 서울처럼 그렇게 아파트가 많지
않다는 점이야. 그리고 아파트는 집단 주거지역이기 때문에
거의가 경비실을 두고 있어. 일일이 집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경비실을 통하면 웬만한 것은 다 알아낼 수가 있어. 경비원은
주민들의 이름은 물론 신상에 대해서도 웬만큼은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만일 경비실을 두고 있지 않은 곳이면
반장이나 통장을 통해 알아보면 될 거야. 인하라는 세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고, 얼마 전에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여자를 집중적으로 찾아보도록 해.
인원이 부족한데요.
마반장이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경감은 벗어둔 코트를 들고 일어섰다.
지금 본부로 연락해서 10명을 더 내려 보내라고 해. 난 지금
시경에 가볼 테니까 마반장이 인원 배정을 해.
그는 박문호 형사의 어깨를 툭쳤다. 아침에 검문을 소홀히
함으로써 범인을 놓친데 대해 경감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당했던 그는 그때까지도 주눅이 든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경감이
어깨를 건드리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자넨 나하고 함께 가지.
박형사는 후다닥 뛰어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택시를 타고 시경을 향해 가는 동안 경감은 아침은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경감이 거기에 대해 무슨
말인가 할줄 알았던 박형사는 택시가 시경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담배 있나?
그것이 경감이 차속에서 박형사에게 던진 말의 전부였다.
동림은 자신과 아내가 완전히 벌겨벗겨진 채 밖에 동댕이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고독감을 느끼면서 떨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낸지
한참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서울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못한 채 계속
떨고만 있었다. 그는 아내를 껴안아주는 대신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상이야. 당신한테 더이상 해줄 말은 없어. 모든 것이
끝났다면 끝난 거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면 시작이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 인하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는 잠든 아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의 시선을 따라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어. 우리 때문에 말이야.
이제부터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그녀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헤로인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그놈한테 농락당하면서 그놈이 시키는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어. 그러다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어. 그런데 헤로인이 내 손에 들어 온 거야.
어마어마한 값이 나가는 헤로인이 말이야. 놈은 나를 운반책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것이 잘못되어 내 손에 들어온거야.
나는 생각 끝에 헤로인을 무기로 이용하기로 했어. 우리를
지키는 무기로 말이야. 내가 헤로인을 가지고 있는 한 놈은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거야. 경찰에 고발할 수도 없을 거고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요리할 수도 없게 됐어. 이제 입장은
거꾸로 된 셈이야. 내가 공세를 취할 수도 있게 됐어.
무서워요. 헤로인을 찾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텐데...... 무서워요.
안전하게 숨어 있으면 괜찮아.
끝까지 따라올 텐데요.
그녀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그건 각오하고 있어.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우리도 세우지
않으면 안 돼. 어차피 우리가 자수하지 않을 바에는......
우리는 한국에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됐어.
그녀의 얼굴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눈이 커지면서 더욱
검어지는 것 같았다.
놈은 나보고 협상하자는 거야. 하지만 그건 헤로인을 찾기
위한 술책이야. 놈은 일단 헤로인을 착고 나면 우리를
죽일때까지 괴롭힐 거야. 아니면 죽일지도 모르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놈이 협상에 따라 약속을 지킨다 해도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어. 왜냐하면 경찰 수사가 별도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야. 그놈이 고자질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경찰의 수사가 우리한테까지 미칠 거라고 나는 생각해. 경찰의
수사력을 결코 얕잡아봐서는 안 돼. 경찰이 영원히 우리를
못잡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자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젠가는 체포되든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도망다니지 않으면 안
돼.
그가 일어서자 남화도 따라 일어섰다. 그녀는 갑자기
발작적으로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어떡 하죠?
그녀가 그의 등에 얼굴을 비비면서 물었다.
우리는 지금 양쪽에 쫓기고 있어. 그걸 피할 수 있는 길은
한국을 떠나는 길밖에 없어. 한국을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버리는 거야. 영원히.......
그는 영원히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스위스의 산속마을 같은데 말이야.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외국으로 피하면 안전할 수 있나요?
헤로인을 처분하면 평생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어.
그는 자신있게 말하고 나서 자신이 웬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는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무슨 방법으로 한국을 빠져나간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한지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는 벗어놓은 코트를 입었다.
어딜 가실려구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그녀의 얼굴이 금방 흑빛이 되었다.
혼자 어떻게 있어요. 무서워요.
그녀는 떨면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무섭다는 생각을 가지면 끝이 없어. 당신은 이제부터 공포를
이겨내는 훈련을 쌓지않으면 안 돼.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어.
누가 와서 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어줘서는 안 돼.
그는 아내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이 밤중에 어디 가시는 거예요?
잠깐 볼 일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둬.
시간은 이미 자정이 지나 1월 2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차량 통행이 거의 끊긴 적막에 잠겨 있는 거리를 그는 빠른
속도로 달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면서
시속 80킬로 정도로 차를 몰아갔다.
30분쯤 지나 주황색 G카는 해운대 P호텔 옆을 지나쳤다.
이윽고 S아파트 앞도 그대로 지나친 G카는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아 달리다가 다시 또 오른쪽으로 꺾어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횟집들이 늘어서 있는 조그마한 공터에 조용히 멈춰섰다. 엔진을
끄고 나서 그는 한동안 차 속에 그대로 앉아 주위를 가만히
관찰했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있었다. 주위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윙윙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는 가만히 차에서 빠져나왔다. 네개의 차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다음 그의 집이 있는 S아파트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 시간에 아파트 경비원은 경비실의 불까지 끈 채 으례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기 마련이다. 두 명이 12시간씩 24시간
경비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지만 밤이 깊은 시간에는 사람인 이상
졸음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잠들기 일쑤이다. 그리고 주민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측은한 생각에 모른 체 하고 눈감아주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이른 동림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경비실을
들여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경비원은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의자
뒤로 상체를 잔뜩 젖힌 채 잠들어 있었다. 코고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밖에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살핀 다음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경비실 앞을
통과했다.
불꺼진 아파트는 마치 죽음의 집 같았다. 너무나 조용해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귀에 거슬렸다.
엘리베이터는 아래 층에 멈춰 있었다. 5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자기 집인 508호 옆에서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며
서있었다. 그러다가 문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다 꽂은 다음 왼쪽으로 돌렸다.
문에는 자물쇠가 두개 장치되어 있었다.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본래 있는 것 외에 또 한개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것은 본래
있는 것보다 위쪽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다른 열쇠를 위쪽
자물쇠 구멍에다 집어넣은 다음 왼쪽으로 가만히 돌렸다. 자물쇠
고리가 풀리는 소리가 찰칵하고 부드럽게 들려왔다.
마치 남의 집에 도둑질하러 침입하는 것처럼 극도의 긴장감에
싸여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 서서 다시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문을 닫고 아래쪽 자물쇠 한개만
잠가두었다. 웬만큼 솜씨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자물쇠는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집이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곳에서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구석구석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는 그 집에 몹시 정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 보였고 몸에
와닿는 느낌마저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어둠 속을 소리없이 움직였다.
방은 두개였다. 그가 서재로 쓰고 있는 방에 먼저 들어가
보았다. 거기서 한동안 서있다가 그곳을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칼이 쥐어져 있었다. 어떤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려고 그는 그곳에서도 한참 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주방은 거실 한쪽에 있었기 때문에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욕실문은 열려 있었다. 방 안에는 달빛이 흘러들고 있었지만
욕실 안은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다.
그 앞으로 다가서서 벽에 부착되어 있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과
동시에 반대쪽으로 또 눌렀다. 욕실 안에 불이 들어왔다 이내
도로 꺼졌다.
집 안에 침입자가 없음을 확인한 그는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앉은 채로 손을 뻗어 커튼을 조금 젖혔다. 창문으로
달빛이 흘러 들어왔다. 바다 위에도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달빛에 시계를 비춰봤다.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손님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들고 있던 칼을 탁자 위에 놓았다.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문득 비린내가
느껴졌다. 피비린내였다. 그것을 맡지 않으려고 그는 호흡을
정지했다. 소름이 쭉 끼쳐왔다. 그는 두 번 다시 그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냄새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로 그렇게 끌려갔는지 잘 알 수 없다.
정글 속을 한없이 끌려갔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한없이 라는 표현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밤새도록 끌려갔고, 그것은 날이 새어서도 계속되었다. 하루
낮을 꼬박 걸어갔고, 다시 밤이 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끌려가고 있었다.
먼동이 틀 때쯤에야 마침내 한 곳에 도착했는데 병영 같은
곳이었다. 주위에는 넓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중앙에는 여러
채의 막사가 지어져 있었다. 그 막사들은 공중에서 볼 수 없게
정글 속에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녹색 군복 차림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월맹 정규군들 같았다.
그는 구덩이 속에 쳐박혔다. 몇 사람이 그 속에 갇혀 있었다.
바닥은 물이 되어 질퍽거렸다. 먼저 갇혀 있던 사람들은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앉거나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기진한
모습들이었고, 입에서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더럽고 비참한 모습이라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슨 괴물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들은 모두 미군포로들이었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했지만 금발이 눈에 띄었고, 그 중에는 흑인
병사도 있었다. 그들은 새로 들어온 그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들은 이내 도로 절망적인 빛으로 변했다.
동림은 그들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비좁은 구덩이 속이 그가 들어옴으로써 더욱 좁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는 대나무로 엮은 문이 놓여 있었다. 그 대나무
틈새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구덩이 속은 오줌과 인분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동림은 그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았지만 미군 포로들은 그
냄새에 찌들대로 찌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체가 오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대나무를 밟는 소리가 저벅저벅 나더니 이윽고
쏴아하고 오줌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틈새로 보니 베트콩 한
명이 성기를 꺼내놓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틈새로 오줌이 흘러내리자 포로들은 그것을 피하려고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이내 그런 움직임도
멈추고, 그들은 다소곳이 앉아 위에서 흘러내리는 오줌을 잠자코
맞는 것이었다.
구덩이는 별로 깊지 않았기 때문에 앉거나 누워 있어야 했다.
자리가 비좁았기 때문에 한 사람 정도가 겨우 비스듬히 누울 수
있을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오물 냄새를
맡으며 흙탕물 속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지독한 고문이었다.
사람을 철저히 오물화시킴으로써 그 혼과 인격을 송두리째
빼버리면 다루기가 아주 쉬워진다. 그것이 고문의 첫째 관문인
셈이다. 처음에는 오물화되지 않으려고 모두가 발버둥치나 한낱
헛수고일 뿐이다.
주먹밥 덩이가 몇 개 밑으로 떨어졌을 때 동림은 인간이
오물도 될 수 있고 짐승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밥덩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때까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미국 포로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맹렬한
기세로 먹이를 향해 돌진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를
차지하려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밥덩이는 오물과
뒤섞여 차마 먹을 수없게 돼버렸는데도 그들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정신없이 먹어대는 것이었다.
동림은 구역질이 나서 거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뱃속에 있는 것을 토해낼 지경이었다.
밤중에 그는 끌려나갔다. 막사 안이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먼저 물세례를 받았다. 흙탕물과 오물이 대충
씻겨나가자 그제서야 그들은 그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뒤로
수갑이 채워진 다음 그는 맨바닥 위에 꿇어 앉혀졌다.
나무로 대강 짜맞춘 것 같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머리가 희끗한 사내 하나가 검은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너무 깡말라 피골이 상접해 보였는데 거기다 너무
조용해서 마치 귀신 같았다. 그 옆에는 그를 끌고왔던 정보원과
또 다른 두 명이 서있었다. 그들은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냥개 같았다.
동림은 정보원을 보자 다시 배창우 생각이 났다. 흰 창이 모두
드러날 정도로 크게 부릅떠진 창우의 두 눈과 그의 가슴팍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검을 내리찍는 정보원의 모습이 서로
겹치면서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 정보원의 이름은 타우타이라고 했다. 그것이
진짜이름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타우타이였다.
한국은 왜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 들었는가?
희끗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조용한 사나이가 물었다.
월남어 교육을 받은 동림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서툴지만 어느 정도 월남 말을 듣고 사용할 줄은 알고 있었다.
과거에 우리가 한국에 원수진 일이라도 있는가?
조용한 사나이가 또 물었다. 그는 대답을 듣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한테 협조하지 않겠나? 협조하면 너를 같은 동지로 대우
하겠다.
협조하겠다.
동림은 한시라도 빨리 구덩이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오물 속에 들어앉아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조금 있자 미군 포로 두 명이 끌려왔다. 한 명은 흑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백인이었다. 타우타이가 권총에 실탄을 한발
장전했다. 손목에 걸려 있는 수갑이 풀리는 것을 보고 동림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달았다. 타우타이가 그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자, 이것으로 너의 태도를 보여줘. 네가 진정으로
협조하겠다면 미군들을 쏠 수 있을 거다. 총알은 한개밖에 들어
있지 않아. 두 놈들 중 한 명을 골라 이마에다 한 방 먹여.
고르는 것은 네 자유야.
그는 자신의 손에 무기가 쥐어진 것이 신기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조용한 사나이는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는 조금도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명은 달랐다.
타우타이는 그의 관자놀이에다 권총을 들이대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은 뒤에서 그를 겨누고 있었다. 총구 두개가 등판을 찌르는
것을 느끼고 그는 희망을 포기하기로 했다.
5분 여유를 주겠다. 네가 미군을 죽이면 그때부터 너는
미군과 원수가 되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의 동지가 되는 거야.
자, 주저하지 말고 실행해.
타우타이의 부추김에 힘이라도 얻은 듯 그는 미군 포로들
쪽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동림은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백인도 흑인도 애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덩이 속에 함께 있던 포로들이었다. 올려다보는
눈빛들이 무척 맑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오물이나 다름
없었다. 오물이기에 눈빛이 더욱 맑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백인은 어려보였다.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떨며 울기 시작했다. 흑인은 그보다 좀더 나이들어
보였다. 그는 애절한 눈으로 동림을 올려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떨거나 울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아시안이다. 백인들은 우리들을 멸시하고 있어.
그들은 우리의 적이야.
조용한 사나이가 조용히 말했다.
소처럼 양순해 보이는 흑인의 두 눈과 두터운 입술을 향해
동림은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흐느끼고 있는 어린
백인 병사는 너무 측은해서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서있었다.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1분 남았다.
타우타이가 말했다.
동림은 권총을 든 손을 밑으로 내려뜨린 채 그대로 서있었다.
마침내 5분이 지나는 것과 동시에 뒤통수에 충격이 왔다. 뒤에
서있던 자가 개머리판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것이다.
그는 앞으로 쓰러지면서 잠깐 의식을 잃었다. 얼굴에 물이
부어지고 격렬한 고통이 가해지는 바람에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쓰러져 있는 그를 두 명이 번갈아가며 개머리판으로
짓이겨댔다. 얼굴과 가슴, 복부, 옆구리로 무수히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고통에 대해 점점 무디어지기 시작했을 때
타우타이가 바늘처럼 끝이 뾰족한 대나무를 집어들었다.
그것으로 그는 사정없이 동림의 발바닥을 찔렀다. 동림은 몸을
뒤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자, 미군을 쏴! 미군을 죽이면 넌 살 수 있어! 넌 영웅이
되는 거야! 자, 빨리 쏘란 말이야!
발톱 사이로 대바늘이 파고 들었다. 고통에 온 몸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앞에 놓인 권총을 집어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는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네 손으로 너를 죽여보지 그래. 말리지 않을 테니까
그 총으로 네 이마를 쏴봐.
타우타이가 그를 조롱했다.
그는 앞에 놓인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집어든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뜻이다.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 살아야 한다. 많은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난히도 영롱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안 돼요. 그걸
집으시면 안 돼요. 죽으시면 안 돼요. 그것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는 남화의 호소를 따르기로 했다.
죽고 싶지도 않으면서 죽여달라는 거냐?
머뭇거리는 그를 타우타이가 계속 조롱했다.
상상을 초월한 고문에 그는 몇번씩이나 기절하곤 했다. 고문을
받으면서 그는 자신이 급속도로 해체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혼과 인격이 송두리째 녹아버리고 자신이 오물로 전락했음을
알았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전기고문이었다.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운 다음 거기에 줄을 걸어 천장에 달아매면 어깨죽지가
빠져 달아나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한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뼈가 부러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본다. 바로 그 고문에다 전기고문을 추가로 더 가하는 것이다.
양쪽 발가락에다 전기코드가 연결되어 있는 단자를 부착시킨
다음 타우타이는 스위치에 손을 가져간다.
자,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 미군을 죽이든가 아니면 네
자신을 죽여.
안 돼. 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타우타이는 서슴없이 스위치를 올린다.
불빛이 번쩍하면서 푸른 연기가 솟아오른다. 동시에 천장에
매달린 몸뚱이가 격렬하게 요동친다. 목이 뒤틀리고 눈알이
튀어나온다. 비명이 터져나오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온다.
이윽고 머리가 밑으로 처지면서 그는 기절하고 만다.
지독한 놈이야.
다섯 번의 전기고문 끝에 타우타이는 안 되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조용한 사나이가 뭐라고 말하자 타우타이는 권총을 백인
포로에게 주면서 동림을 가리켰다.
자, 이걸로 저놈을 쏴라. 그럼 널 살려줄 테니까. 정면에서
머리를 쏘는 거야.
수갑을 풀어주자 어린 병사는 머뭇거리다가 권총을 받아들고
그때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동림에게 다가갔다.
동림은 가물거리는 의식에 매달린 채 가까이 다가서는 미군
포로를 내려다보았다. 동림의 얼굴이 미군의 머리보다 약간 위에
떠있었다.
정면에 머리를 쏴.
타우타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병사는 동림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
순간 동림은 그 미군 병사가 자신을 향해 틀림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침내 나는 죽는구나, 그것도 미군
병사의 손에 말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그
병사를 사살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만일 그 병사를
먼저 사살했다면 그토록 혹독한 고문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쯤은 좋은 음식을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이 그립지가
않았다.
나는 오물이 아니야.
그는 알아들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그의 머리를 향해
조준되어 있는 총구를 보았다. 그때 미군 병사가 눈을 감았다.
탕!
동림은 총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이마에 구멍이
뚫려 피가 흐르고 있으며 조금 후에는 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고, 숨이 끊어지는 시간이 꽤
길다는 느낌이 들었다.
웃음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타우타이가 재미있어
못견디겠다는 듯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다른 두 명도 웃고
있었다. 조용한 사나이만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알았어? 그건 공포였어.
타우타이의 말에 미군 포로는 당황한 표정이다가 다시 동림의
얼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하는 금속성 소리가 주위를
울렸을 뿐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한 발밖에 들어있지 않았어.
미군 병사는 멍청한 얼굴로 권총을 들고 있다가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는 아까 자리로 돌아가 무릎을 꿇었고, 베트콩 한
명이 그의 팔을 뒤로 돌려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타우타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동림을 쳐다보았다. 그는
총구로 동림의 턱을 치켜올렸다.
이제 알았지? 너는 미군을 죽이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지만
미군은 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어. 만일 진짜 총알이 들어
있었다면 네 머리통엔 벌써 구멍이 났을 거야. 그래도 미군의
목숨 대신 네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야? 이런 놈을 위해 네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야? 네가 그리스도야?
타우타이는 힐난하듯 물었다. 그래도 동림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의 얼굴에서 조롱기 어린 미소가 사라졌다.
마지막 기회다. 저 백인을 죽여. 저놈을 죽이면 너를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고 거부하면 내가 저놈하고 너를
사살하겠다. 1분 여유를 주겠다. 단 1분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타우타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동림은 눈을 감았다.
그는 잠들고 싶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조용한 사나이가
타우타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하는 것이 보였다. 타우타이는
더이상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냉소를 띠면서 백인 병사 앞으로 다가섰다. 미군
포로부터 처단할 모양이구나 하고 동림은 생각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어린 병사는 이마에 총구가 닿자 얼굴을 숙이면서
뒤로 물러 앉았다. 무릎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몸이
닿자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타우타이가 총구를 포로의 관자놀이에 갖다대는 것을 보고
동림은 다시 눈을 감았다. 거의 동시에 총소리가 울렸다. 화약
냄새가 났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리고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조용한 사나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린
병사가 옆으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질퍽하게 괴기
시작하는 검붉은 핏물 속에 그는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게도 영원히 잠속으로
빠져든 것 같았다.
동림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보다도 타우타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 일을 위해
그는 자신이 살아남는 일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타우타이는 여전히 냉소를 흘리면서 동림의 입속으로
총구를 쑤셔넣었다. 화약 냄새가 물씬 났다.
방아쇠를 당기면 네놈 얼굴은 날아가버려. 유언을 말해 봐.
동림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타우타이를 죽이지 못하고, 그리고 소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하기는 해도.
네놈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어. 두고두고 괴롭히다가
죽일거다.
베트콩은 그의 입에 처박고 있던 총구를 뽑아냈다.
동림은 공중에서 굴러 떨어졌고, 막사에서 나와 구덩이 쪽으로
개처럼 기어갔다.
미군은 거의 매일 한두 명씩 죽어나갔다. 사실 죽어나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물 속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 간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오물 속에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판이었는데 동림은 매일 밖으로 끌려나가 지독한 고문까지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고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고문이 끝나면 동림은
초죽음이 되어 혼자서 구덩이로 벌레처럼 기어가야만 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버티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그는 그들의 협조요구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협조란 한국군을 비난하고 그들의
투항을 권유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성명내용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왜 이역만리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어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들을 죽이고 우리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가?
고문을 시작할 때마다 타우타이는 언제나 책상 위에 성명서와
녹음기를 준비해 두고 동림이 성명서를 읽기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덩이 속에 함께
들어 있는 미군 포로들은 매일 밖으로 끌려나갔다가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는 그를 차츰 달리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찮은
한국군 졸병 정도로 여겼지만 그가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미군을 쏘지 않았으며, 적에게 협조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고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부터는 그를
경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지 말고 협조하라. 적에게
협조한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을 이해한다. 당신은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죽게될
것이다. 우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로들 가운데서
가장 계급이 높은 미군 대위가 보다 못해 그를 타일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된 그는 벌레처럼
기어다녔다.
그는 스스로를 오물 속을 기어다니는 구더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했다. 구더기한테는 사고능력이 없다.
희망도 절망도 없다. 오물 속을 끊임없이 꼬불꼬불 헤엄쳐다니는
능력밖에 없다. 이빨이 모두 부러져나갔기 때문에 그는 음식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고문이 통하지 않자 며칠 후 타우타이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는 미군 포로를 무릎꿇려놓고 만일 동림이 협조하지
않으면 포로를 사살하겠다고 권총으로 위협했다. 끌려나온
포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 부들부들 떨며 동림에게 협조하라고
애걸하기도 하고 소리치기도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타우타이는 지체하지 않고 동림을 원망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미군의 이마에다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고문을 모두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큰 고통을
동림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타우타이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그가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미군 포로는 하루에 한 명씩 그가
보는 앞에서 사살당했다. 타우타이는 미군 포로들을 충동질했다.
이놈이 우리한테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이 대신 죽는거다.
이놈을 그대로 두면 너희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결국 모두
사살당하고 말 거다.
미군 포로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림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에 외경의 빛 대신 살기가 나타났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먼저 자신들의 손으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데 생각이 일치한 것 같았다.
여러 명이 그를 죽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그는 누가 죽인다해도 손가락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미군 포로들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 동림을 살해하는 것은
타우타이가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동림을 더이상 살려
두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미군 포로들은 마침내 동림을 죽이기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그들을 대표해서 대위가 동림에게 말했다.
우리는 더이상 당신 때문에 개죽음을 당할 수 없다. 당신이
계속 그렇게 나가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당신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다. 만일 그게 싫다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당신을
잠재울 수밖에 없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지금 분명히 대답해 달라. 그들에게
협조하겠는가 아니면 우리 손에 죽겠는가?
그들에게 협조할 수 없다.
동림은 오물 속에 쓰러진 채 분명히 말했다.
포로들의 얼굴에 살기가 나타났다. 백인 병사 한 명이
올가미를 집어들었다.
용서해 줘.
그 백인 병사는 동림에게 용서를 빌면서 그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동림은 저항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나때문에 당신들이 죽는 게 아니다. 그들은 죽이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노려서 죽이는 것이 더 스릴이 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그들은 또다른 방법으로 당신들을
죽일 것이다.
올가미를 죄던 병사의 손이 머뭇거렸다. 포로들은 눈을
번득이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대위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흑인 병사가 백인 병사의 손에서 올가미를 벗겨내면서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말이 맞아. 맥은 그들이 시킨 대로 이 사람을 쐈지만
결국 그들한테 사살당했어. 이 사람은 맥을 쏘지 않았지만 맥은
이 사람을 쐈어. 나는 이 사람을 존경해.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살기가
사라지고 그대신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고 있는 숫자가 뚜렷이 보였다.
한대의 승용차가 아주 느린 속도로 굴러오다가 멈춰서면서
헤드라이트를 끄는 것이 보였다. 길 건너편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 아래였다.
차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밖으로 내려선다. 파카 차림에
털모자를 눌러쓴 사람이었다. 차도를 가로질러 건너온다. 어둠
속으로 들어오자 검은 그림자로 변한다. 경비실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마침내 경비실 앞으로 통과하여 단지 안으로 들어선다. 아파트
3동 건물 쪽으로 들어오다가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동림은 탁자 위에 놓아둔 칼을 집어들었다. 차는 길 건너편에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는 조용히 움직였다.
서두르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벽에 붙어섰다.
출입문 쪽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고 있자 얼마 후 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욕실이 달려 있기 때문에 거기에 서있으면 문에서 나는 조그마한
소리도 들을 수가 있었다. 철제 대문이라 조그마한 마찰이
있어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계속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맞추는 소리였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몹시
조심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5분 가까이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멎고
이번에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인기척이 났다.
동림은 숨을 죽였다. 침입자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참 후
다시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욕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욕실 앞을
가로막았다. 침입자는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 눈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동림은 욕실 출입구에 서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그는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일격에 비틀거리는 상대방을 향해 그는 번개처럼 두번
째 주먹을 날렸다. 뒤로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팍을 걷어찼다. 머리와 상체가 벽에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 번 급소라고 생각되는 부위를
걷어찼는데 사타구니 같았다. 아이구!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몸을 휘어 감으면서 그는 상대방이 거한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에 안겨오는 등판이 바위덩이 같았고 팔에
감긴 목이 흡사 나무둥치처럼 굵었다.
뒷걸음질로 거한을 욕실 안으로 끌어 들이는데 꽤나 힘이
들었다. 기습을 당한 거한은 저항할 힘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거한이기 때문에 그것도 잠시일 것이고, 그는 곧
회복하여 역습해 올 것이다.
동림은 먼저 대문을 잠갔다.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
불을 켰다. 거한은 그때까지도 몸을 뒤틀고 있었다. 거한일수록
공격을 가하기가 쉽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단칼에 해치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동림은 칼을 들고 거한을 내려다보았다.
거한은 욕실 바닥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메기처럼 큰
입에서는 계속 괴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털모자를
벗기자 운동 선수처럼 짧은 머리가 나왔다. 이마가 유난히 좁고
머리쪽이 뾰족한데 반해 턱 부위는 강인하고 넓적해 보였다.
그래서 얼굴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거한이 공포와 의혹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중키에 평범하게 생긴 이 사람의 어디에 과연 그렇게 무서운
힘이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림은 거한을
올라타고 피투성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넌 누구지? 왜 여기에 들어왔지?
그는 칼 끝을 목에다 갖다댔다. 조금 힘을 가하자 칼 끝에
피가 번져나왔다. 거한은 자신이 칼에 찔려 죽는다고 생각했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누가 시켜서 온 게 아닙니다...... 돈이 필요해서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겁니다...... 살려주십시오.
거짓말하지 마! 다 알고 있어! 배낭을 가지러온 거 다 알고
있단 말이야!
그는 칼 끝을 좀 더 밀어넣었다. 거한은 그것을 피하려고 목을
길게 뺐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피가 칼 끝에
번져나오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그래. 사실대로 자백하면 살려주겠다. 왜 여기에 들어왔지?
배, 배낭을 가져오라고 해서 들어온 겁니다.
나를 죽일 생각이었지?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우리 가족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나?
죽이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죽일 생각이었나?
도끼를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도끼는 어디 있지?
밖에 있습니다. 아까 싸우면서 떨어뜨렸습니다.
너한테 그런 지시를 내린 놈이 누구야?
염사장입니다.
염사장이 누구야?
모, 모르겠습니다.
동림은 칼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좀더 힘을 주었다.
칼 끝은 이제 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검붉은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말하겠습니다.
이 칼이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어. 염사장이 누구야?
그냥 염사장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그 자의 암호는?
미스터 Y입니다.
그자와 너와의 관계는?
거한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목을 뒤틀었다. 칼 끝이 조금
더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저는 염사장의 부하입니다. 그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가 조직의 책임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한국 쪽 지부책임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너의 조직은 국제적인 조직이란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조직의 이름은?
트라이어드라고 합니다.
트라이어드?
네, 3인조라는 뜻입니다.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저 같은 놈은 잘 모릅니다.
염사장은 어디에 살고 있지?
그건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점조직이고 전화로만 연락이
오기 때문에 어디서 살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한국쪽 지부에는 몇 명이나 있지?
그것도 비밀이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차 속에는 누가 있지?
염사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혼자인가?
네, 혼자 있습니다.
어떻게 연락하기로 되어 있지?
헤로인을 손에 넣으면 불을 두 번 깜박여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두 번을 반복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30분이 지날 때까지 신호가 없으면 실패한 걸로 알고 자기 혼자
먼저 가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너희 조직은 무슨 일을 주로 하고 있지?
마약밀매업입니다.
검붉은 피는 이제 거한의 목을 완전히 적신 다음 바닥까지
적셔놓고 있었다.
염사장이라는 자의 생김새를 말해 봐.
뚱뚱하고...... 코밑수염을 길렀지요...... 그리고 이마에
흉터가......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지다가 뚝 그쳤다. 더이상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동림은 칼 끝이 맞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칼이 상당한 깊이까지 들어가 있는 발견하고는 그는
적잖게 놀랐다. 칼을 뽑자 피가 더욱 많이 흘러내렸다. 목에서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거한의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입은 열려 있었다. 꼬르륵하는
소리도 점점 작아지다가 이윽고 잠잠해지고 말았다.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만일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죽이더라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죽어버린 것이다. 그는 당황하다가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하긴
가벼운 상처 정도에 거한이 입을 열 리는 만무한 것이다.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에 그는 사실대로 자백했던
것이다.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거한의 뺨을 철썩철썩 갈겨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을 끄고 욕실에서 나왔다.
길 맞은편에는 아까 보았던 그 승용차가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는 플래시를 찾아들고 창가로 다가섰다. 플래시를 두 번
깜박여 신호를 보냈다. 똑같은 신호를 다시 한 번 반복한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즉시 헤드라이트 불빛이 두번 깜박이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현관 쪽으로 나가다가 욕실 앞에서 멈추섰다. 실내등을
켜보았다. 거한의 말대로 등산용 도끼가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집어든 다음 도로 불을 껐다. 코트를
입고 그 주머니 속에 도끼를 감추고 나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경비원이 깨어났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지나치면서 보니 그는
여전히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곧장 길을 건너갔다. 그를
알아 보았는지 헤드라이트가 켜지면서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도끼를 빼들고 차쪽으로 미친 듯 뛰어갔다. 차가
앞으로 튕기듯 달려나갔다. 그가 좀더 빨랐다. 운전석에 접근한
순간 그는 도끼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내를 찍었다. 차창이
박살나는 소리와 차의 엔진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깼다. 도끼가
차창을 뚫고 들어가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어디엔가 부딪치는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져 왔다. 그러나 머리에 부딪친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에 부딪쳤다면 비명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차는 비틀거리면서 그래도 달려갔다. 동림은 계속 쫓아가면서
다시 한 번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은 뒷문 유리창을 뚫고
들어갔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더이상 비틀거리지도
않고 곧장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갔다.
그는 차도 가운데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차를 노려보다가
도끼를 힘껏 던져버린 다음 발길을 돌렸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거한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시체를 치우는 일이 큰 일이었다. 거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운반하기에도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시체를 집안에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날이 새기 전에, 경비원이 깨어나기
전에 시체를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욕실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피를 물로 깨끗이 씻어냈다.
칼에 찔린 목에서는 더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차를
우선 아파트 건물 입구에 바싹 갖다대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던 그는 멈칫했다. 경비실에 불이
켜져 있었고, 경비원이 기지개를 켜면서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창가에서 물러섰다. 시체를 치우기는
글렀다. 그대로 내버려두든지 아니면 다시 밤이 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시체가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무런 느낌도 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마비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만이 들 뿐이다. 사람을 또 한 명 죽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느낌이 일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를 살려줄 수도 있었다. 미스터
Y는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지금쯤 크게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을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주위를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전화벨은 한참 동안 울리다가 뚝그쳤다.
누가 전화를 걸어온 것일까?
5분쯤 지나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황금의 초생달...... 나는 미스터 Y이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꺼져들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 않았군.
동림은 분노에 떨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나는 죽지 않았어. 상처를 조금 입었을 뿐이야.
네놈을 얕본 게 후회된다.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게 한이 된다.
내 손으로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테니까 기다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지?
조금 있다가 경찰에 넘길 거야.
거짓말하지 마. 어떻게 경찰에 넘기겠다는 거야? 너는 경찰의
주목을 받으면 안 될 입장이야. 그 사람 어떻게 됐지? 안
돌아오는 걸 보니까 죽은 게 틀림없어. 네가 죽였지?
마음대로 상상해. 그놈은 우리 가족을 도끼로 몰살시키려고
들어온 놈이야. 물론 네놈의 지시를 받고 오긴 했지만 거기에
대응하는 내 행동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란 걸 알아둬.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다. 너는
헤로인을 가져갔고...... 우리 조직원을 두 명이나 죽였어.
그리고 나까지 죽이려고 했어. 도끼로 말이야. 명심해 둬. 너와
너의 가족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없애버릴 테니까. 하지만
헤로인만 돌려주면 모든 걸 없는 걸로 해주겠어. 그것만
돌려주면 너는 그전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어. 마지막 기회야.
헤로인을 돌려줘.
상대방은 고통을 참으며 가까스로 말하고 있었다.
줄 수 없어. 내가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내줄 수
없어.
죽일 놈!
신음소리와 함께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은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시체는 집 안에 당분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비상구가 있었고, 철문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자물쇠를 잠가놓은 게
아니라 쇠빗장을 가로질러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잡아빼기만
하면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녹이 슬대로 슬어 그것은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조금씩 잡아뺄 때마다 끼익끽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비상구 위에 켜져 있는 희미한 불빛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빗장을 가까스로 빼냈을 때는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문을 열자 녹슨 쇠가루 같은 것들이 우수수
날아왔다.
복도를 돌아보았다. 복도에는 괴괴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폭이 좁은 철재 비상계단이 곡예라도 하는 듯 지그재그를
이루며 아슬아슬하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난간을 붙잡고
밑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쯤에서 멈춰섰다. 비상구를 통해 시체를
빼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밑에까지 내려가 보았다. 계단
아래에 좁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통해 아파트 앞으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아파트 단지는 낮은 철책으로 경계가
지어져 있었고, 비상계단은 그 경계 안으로 내려와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으려면 철책을 넘어가는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철책 너머에는 차가 한 대 정도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 있었다. 골목에는 자질구레한
식당과 술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5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시체를 운반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새벽 잠이 없는
사람들이 어슬렁어슬렁 나올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긴
신정 연휴기간 동안에는 거의 마음놓고 늦잠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안 된다. 너무 늦었어.
그는 계단을 몇 개 더 올라가 철책 너머 골목을 살폈다.
골목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 계단을 내려온 그는 조심스럽게 철책을 넘어갔다.
이윽고 골목에 발을 디뎠다.
철책을 넘어오면서 보니 비상계단과 철책 사이의 폭이 1미터
남짓되는 것 같았다.
골목으로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바람을 피해
어느 식당의 처마 밑 코너에 바싹 붙어서서 아파트 비상계단을
올려다보았다. 10분쯤 그렇게 가만히 서있다가 골목을 빠져 나와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시체를 옮기려면 몇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남화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리고 앉아 깜빡 졸다가 아이의
갑작스런 울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불안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그녀와 아이만 있었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아이에게 다가가
덮칠 듯 껴안았다. 아이가 자다가 발작하듯 깨어나 울음을
터뜨린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을까.
아니면 그 나름대로 엄마 아빠를 통해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이의 울음소리는 엄마의 품 속에서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아이는 다시 잠이 들었다.
라디오에 부착된 디지틀 시계가 6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분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호텔을
나간 것은 자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리고 여섯 시간 가까이
지났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며 꼬박 밤을 지샜다. 마음 속은 공포를
지나 완전히 혼돈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제는 어떤 사태가
발생해도 더이상 놀랄 수 있는 감정이 모두 소모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좀더 계속되면 말라죽을
것 같았다.
6시20분이 되었을 때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벨소리가 두 번 더 들려온 뒤에야 문 앞으로
다가서며 떨리는 소리로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응, 나야.
그녀는 급히 문고리를 벗겨냈다. 그가 꽁꽁 얼어붙은 모습으로
들어섰다.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짓는 바람에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은 강한 의문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안 자고 있었군.
그가 냉랭한 모습으로 방 가운데 서서 말했다.
잘 수가 없었어요.
몸을 생각해서 많이 먹고 많이 자야 돼. 병들어 쓰러지면
우리는 패배하는 거야. 그런 놈들한테 질 수는 없어. 그들한테
이기려면 우선 몸부터 건강하지 않으면 안 돼.
그는 지금까지 밖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리에
누웠다.
그는 간단히 샤워만 하고 나왔다. 물기를 닦고 그녀 옆에
누우면서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궁금하겠지만 아무 것도 묻지 마. 내가 스스로 입을 열때까지
아무 것도 묻지 말아줘.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면
이야기해 주겠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이젠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고마워. 무섭고 고생이 되더라도 참아야 해. 안전한 데 숨어
있으면 무서울 게 없어.
그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 당분간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
있는 게 어떨까?
그 말에 그녀는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정은 충무에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하고 인하하고 둘이서만 가 있으라는 말씀인가요?
음, 그래. 아이때문에 아무래도 함께 다닌다는 게 무리고 또
위험 부담이 너무 많을 것 같아. 친정에 가있으면 안전할 거야.
당신은요?
내 걱정은 하지 마. 당신하고 아이만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면 나는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어. 자유롭게 말이야.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헤어지는 건 싫어요!
그녀는 완강한 어조로 말하면서 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마치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당신이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 어린애를 데리고
도망다닐 생각을 하니까 아이가 불쌍해서 그런 거야. 아이도
그렇고 당신한테도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남화는 깊이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동림이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정말 외국에 갈 건가요? 이러고도 외국에 갈 수
있나요?
갈 수 있을 거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갈 수 있을
거야. 그 길을 알아볼 테니까 그때까지만 친정에 가있어. 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말이야. 나도 당신하고 떨어져 있는 건
싫어.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아.
알겠어요. 그렇게 하겠어요.
고마워.
가게에 나가면 절대 안 돼. 필요한 건 전화로 지시를 해.
문을 닫아야 되겠지.
알겠어요. 가게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누구한테도 친정에 가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돼.
그들은 잠이 들었다가 9시가 조금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온 그들은 아침 식사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그 길로 바로 연안여객부두로 향했다.
부산-여수 사이를 운항하는 쾌속 승선표를 구입한 뒤 시간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대합실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아침을 때웠다.
바람이 자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는 잔잔했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바다 위로는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배가 연안부두를 출발한 지 30분쯤 되었을 때 동림은 욕실에
누워 있는 거한의 시체가 생각났다. 그러자 피비린내가
느껴졌고, 그는 구역질을 삼키려고 애쓰다가 급기야 토하고
말았다. 좌석에 비치되어 있는 비닐봉지 속에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면서 그는 수치심으로 몸둘 바를 몰랐다.
중년 남자가 파도도 별로 일지 않는 잔잔한 바다 위를 달리는
배 안에서 멀미를 일으켜 토한다는 것은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승객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어이없어 하는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남화였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을 닦아주었다.
피곤하신가 봐요. 충무에 가서 며칠 푹 쉬세요.
그럴 수 없어.
그는 나직히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출발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여객선은 충무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섬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섬들이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에 충무항은 그 어느 항구보다
잔잔하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배경으로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달리는 배들의 모습은 마치 한폭의 그림 같다. 만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 위로 겨울 햇볕이 포근하게 내려쬐고
있다. 충무에 올 때마다 동림은 언제나 포근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맛보곤 한다. 부두에 널려 있는 지저분한 것들도 모두
친근하게 느껴진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조그마한 배들 위로 갈매기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며 날고 있다. 그는 정신없이 갈매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을 안아올렸다.
그들 앞으로 택시가 굴러와 멎었다. 그가 머리를 흔들자
택시는 도로 달려갔다. 남화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집에 가지 않겠소.
여기까지 왔는데 어머님도 보시지 않구요?
마땅히 찾아 뵈야겠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인사드릴
수가 없어.
어머님은 이해심이 깊으신 분이에요. 모든 걸 이해하실
거에요.
그래도 싫어. 어머님한테는 사실대로 이야기해서는 안 돼.
남화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옛 집에서 손자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다.
남화도 동림의 기분을 이해하고는 더이상 집에 가자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동림이 아내와 아들을 집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는데 반해, 남화가 동림이 떠나는 것을 보겠다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는 바람에 노상에서 한동안 서성거리고 있었다. 결국
동림이 주장을 굽혔고, 그래서 남화와 어린 아이는 동림이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해 그곳에 남았다.
그들은 김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들어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곳에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부산행 배 시간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동림과 남화는 양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부두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남화는 걸어가면서도 남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동림은 그런 그녀를 애써 외면하면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남화는 이제 남편과 헤어지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같은
불안감을 밖으로 꺼내 표현하지는 않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보아두려고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딸만 넷을 둔 집안의 막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배를
여러 척 가진 선주로 충무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는데
그녀가 여고 3학년 때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막내딸인 남화까지
결혼하고 나자 혼자서 적적하게 집을 지키고 있다가 요즘에는
외손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었다. 외손들이라도 돌보게 되어 한결
적적함을 달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외손들은 남화의 세번째 언니인 남명(南明)이 낳은
자식들로 그녀가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아프리카 오지로
떠나면서 맡기고 간 자식들이었다. 남편이 아프리카 오지로
발령을 받자 그들 부부는 자식들을 데리고 가느냐 아니면
떼어놓고 가느냐 하는 문제로 몹시 고민했었다. 가는 데가 구미
선진국이라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데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오랜 가뭄으로 전국민이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는 빈국에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간다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 곳에 외국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
같은 것이 제대로 되어 있을리가 없었다. 의료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그곳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 아이들이 말라리아
같은 질병에 걸려 죽는다는 말을 듣고 그들 부부는 일단
아이들을 떼어놓고 가보기로 했다. 현지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하고 일단 그들 부부만 그곳으로
떠났는데, 현지에서의 그들의 보고는 아이들을 절대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은 외할머니가 맡아 기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남화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동림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괴어 있었다. 아이가 머리 위로
가까이 날아온 갈매기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동림은 멈춰서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 역시 뿌옇게 흐려 있었다.
잘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밖에 달리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가시면 언제 오실 거예요?
잘 모르겠어. 자주 전화 연락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이나
잘 돌보고 있어요.
그들은 부두의 시끄러운 소음 속을 통과하면서도 그 소음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하늘과 바다는 유난히도 파란 색조를 띠고 있었다.
그 파란 색조가 그들을 슬프게 하고 있었다.
남화는 아이의 손을 놓고 나서 동림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팔짱을 꼭 끼었다. 순간 격렬한 감정이 오고 갔다.
동림은 팔짱을 풀고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남화도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절대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뱃고동 소리, 갈매기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무수한 생활의 파편들, 파아란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
그리고 파아란 하늘......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마치 남의
나라에 온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던 것도 옛일처럼 생각되었다.
이윽고 그들은 부두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동림이 매표구로 다가가 배표를 사는 것을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출발 시간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
배는 여수에서 오는 배였다.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터미널 밖에 줄을 서있었다. 동림은
아들을 안고 맨 뒤로 다가섰다. 어린 아들도 무엇인가 느꼈던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남화는 돌아서서 쏟아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멀리 섬 앞을 흰 배가 물살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목이 잠기는 것을 느끼면서 아들의
귀에다 입을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인하야, 엄마하고 잘 있어. 아빠는 일이 있어 나중에 올께.
아이는 도리질을 하더니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주 서럽게
울면서 그의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아내의 어깨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동림은 그녀에게 차마 아들을 안겨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배가 와닿았고, 사람들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찰관이 주민등록증과 승선신고서를 대조하면서 한 사람씩
통과시키고 있었다.
동림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 아내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이는 소리내어 울고 그녀의 두 눈은 역시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동림은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는
뒤돌아 보면서 앞으로 다가가다가 다시 아내로부터 아들을
안아들고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몸 조심하세요.
마침내 더이상 따라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남화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곧 연락할께.
그는 아내의 젖은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녀에게 아이를
안겨주고 경찰관에게 주민등록증과 승선신고서, 그리곳 승선표를
보여주었다.
그가 제일 마지막으로 배에 올랐다. 내실로 들어가라는
승무원의 지시를 묵살한 채 그는 갑판에 서서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았다. 남화 역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뒤로 물러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달리기 시작했다.
남화는 동림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동림도 손을 높이
쳐들었다.
걱정하지 마!
그가 소리치는 것을 보면서 남화는 미친 듯 손을 흔들었다.
조금 후에 그의 외치는 소리는 엔진소리에 묻혀 더이상 들리지가
않았다.
몸조심하세요!
이번에는 그녀가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눈물 때문에 갑판에 서서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흐릿해 보였다. 배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손을 흔들며 서있다가 이윽고 섬에 가려 배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
│ 2.바다가 보이는 아파트 │
└────────────────────────────┘

수사가 시작된 것은 1월 2일 날이 밝으면서부터였다.
중앙으로부터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부산시의 전 경찰력이
수사에 총동원되었다.
각 파출소별로 인하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살짜리 사내 아이를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파출소에 비치되어 있는 관할구역 주민들의 신상카드를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서 거기서 인하라는 이름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일단 인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둔 부모들은 그 이름 하나
때문에 경찰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아야 했다.
부산 시내에 개업하고 있는 산부인과 병원들도 빠짐없이
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산부인과 병원들을 방문한 경찰은 지난
10월 이후 자연유산으로 수술을 받은 29세 전후의 여자를
찾았다.
각 병원에는 수술을 받았던 환자들의 차트가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찾고자하는 여자들의 숫자를 집계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 수는 놀랍게도 천 명이 훨씬
넘었다. 자연유산으로 수술을 받은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는
수사관들도 적잖게 놀랐다. 그 가운데 일차적으로 아파트에
주거지를 둔 여자들을 골라냈다. 차트에는 환자의 주소가 적혀
있었기 때문에 그 주소가 아파트인지 주택인지 가려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파트에 주소지를 둔 여자들의 숫자는 2백 86명이었다.
경찰은 2백 86명의 아파트를 일일이 방문하여 그 집에서 바다가
잘 보이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와는 별도로 일부 경찰 병력은 두 파트로 나뉘어
해운대와 다대포 양쪽에서 바다를 향해 서있는 아파트를 하나
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간과 인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경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수사를 전개해 나갔다.
노경감은 세 방향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오래지않아
어떤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이상하게도 이번 수사에는
시작할 때부터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해운대 쪽에서부터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를 체크해 오던
경찰이 S아파트에 나타난 것은 그늘 오전 11시 경이었다.
정복 차림의 순경 한 명과 사복은 아파트 단지 앞에서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고 나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경비실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실에는 나이 많은 경비원이 앉아 있었다. 해수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1년 넘게 경비실을 지켜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노느니 용돈이라도 벌어볼 생각으로 취직했던 것인데, 지금은
그가 받는 봉급이 집안의 주수입원이 되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는 위인이 정신 집중이 잘 안되고 주위의 사물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1년 넘게 S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면서도 주민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경비원은 그래도 주민들의 이름이며 직업같은 신상에 관한
것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늙은 경비원은 기침을 하다 말고 경비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돋보기 안경 너머로 쳐다보았다. 그가 젊은 경비원과
근무교대를 한 것은 아침 8시였다.
정복 경찰관이 먼저 아파트 주민에 대해 알아볼 것이 있어서
왔다고 운을 떼고 나자 사복이 경비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아파트에 서너 살 되는 아이들이 몇 명쯤 있나요?
경비원은 돋보기에 가려 흐려진 두 눈을 꿈벅이며 그들을
쳐다보다가
글쎄요. 이 아파트 단지에는 유난히도 애새끼들이 많지요.
젊은 부부들이 주로 살고 있으니까요.
하고 말했다.
사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인하라는 아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나요?
인하라고요? 성이 어떻게 되나요?
성은 잘 모릅니다. 이름이 인하라는 것만 알고 있고......
그리고 그 애 엄마가 얼마 전에 유산을 해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했을 겁니다.
경비원은 눈을 꿈벅이다가 고개를 슬그머니 내저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인하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사복은 몽타즈를 꺼냈다.
이렇게 생긴 사람 혹시 여기에 살고 있지 않나요? 인하라는
아이의 아버지인데.......
경비원은 몽타즈를 들여다보고 나서 흥미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사람은 여기에 없습니다.
관할 파출소에는 추동림에 관한 인적사항이 적힌 신상카드가
비치되어 있기는 했다. 그 카드에는 남화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그러나 인하에 관한 것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 카드는 인하가
태어나기 전에 작성된 것으로 그 후에는 한번도 변경되거나 새로
첨가된 사항이 없었다.
날이 저물었지만 그날의 수사 결과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났다.
노경감은 그날의 수사 결과를 종합검토해 보면서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내일의
결과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의 예감이 어쩌면 내일쯤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만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1월 3일 새벽 2시 조금 지나 추동림은 어제밤처럼 자기 집에
몰래 숨어들었다. 전 날 저녁 8시에 늙은 경비원과 교대한 젊은
경비원은 자정이 지나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코를 골며
잠들어버렸기 때문에 경비원 몰래 집에 스며드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집에 들어선 그는 욕실로 먼저 들어가보았다.
거한의 시체는 어제 누웠던 그대로 누워 있었고, 욕실 안에는
그때까지 피비린내가 남아 있었다.
그는 거한의 호주머니를 뒤져 소지품을 모두 꺼낸 다음
준비해온 비닐로 시체를 싸맸다. 그리고 나서 검정 천으로 다시
시체를 말았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시체를 싸매고 나서
튼튼한 줄로 필요한 부분을 묶기 시작했다. 시체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치 나무토막 같은 것을 묶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그것을 운반할 차례였다.
그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복도는 괴괴한 적막과 어둠에 싸여 있었다. 비상구 쪽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움직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경직된 거한의 시체를 비상구까지 메고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시체를 들어올리려다 말고 끌고 가기로
했다.
시체를 단단히 묶은 다음 복도로 끌어냈다. 줄을 잡아당기자
시체는 쉽게 끌려왔다. 복도 바닥에 시체가 끌리는 소리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조금씩 시체를
끌고갔다.
비상구를 막고 있는 출입문의 쇠빗장은 어젯밤 그가 빼놓았던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비상구 밖으로 시체를 끌어낸 다음 문을 다시
조심스럽게 닫았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비상계단 위로
몰아치고 있었다.
시체를 난간 모서리에 걸쳐놓고 줄을 쇠난간에 한 바퀴 돌려
감았다. 시체를 난간 밖으로 밀자 그것이 공중에 뜨면서
금방이라도 난간이 떨어져나갈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붙잡고 있는 줄을 조금씩 풀어주자 시체가 밑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체는 워낙 무거웠기 때문에 바람에 조금도
흔들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체가 철책 가까이 내려갔다고 생각되었을 때 줄을 풀어 주는
것을 멈추고 그것을 난간에 붙들어 맸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의깊게 뒷골목을 살폈다.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골목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구름때문에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시체는 철책보다 조금 아래 쪽에 내려가 있었다. 그러니까
줄을 끊으면 철책과 아파트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떨어지게끔 되어 있었다.
도로 비상계단을 되짚어 올라가 줄을 잡아당겼다.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가까스로 시체가 움직였다. 어느 정도 끌어
올린 다음 줄을 다시 난간에 고정시키고 나서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시체는 철책보다 조금 위쪽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수직낙하한다면 역시 철책 안쪽으로 떨어지게끔 되어 있었다.
그것이 골목에 떨어지게 하려면 철책 바깥 쪽에 매달리게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비상계단을 끝까지 내려간 그는 잠시 시체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천에 싸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는 그것은 시체라기보다
무슨 괴물 같았다. 그것은 발을 아래 쪽으로 하고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발목을 묶은 줄이 밑에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 줄 끝을 허리춤에 붙들어
맨 다음 철책을 넘어갔다.
골목에는 그의 차가 주차해 있었다.
허리춤에서 줄을 푼 다음 아파트 건물과 마주 보고 있는
식당의 처마 밑으로 다가갔다.
그 식당은 입구에 기둥을 세워 그 위에다 처마를 만들고
기와를 올려놓음으로써 한식당의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있는
집이었다.
그는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무 틈새를 더듬어 거기에다 줄을
걸었다.
줄을 천천히 힘주어 잡아당기면서 맞은 편을 보니 시체의 다리
부분이 처들리고 있었다. 더이상 당겨지지 않을 때까지 잡아
당긴 다음 줄을 기둥에 붙들어 맸다. 철책 쪽으로 다가서보니
시체는 공중에 비스듬히 고정된 채 바람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묵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체의 머리는 비상계단 쪽으로,
발은 식당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철책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지만 거의 철책 바깥 쪽에 매달려 있었다.
의도했던 대로 된 것을 보고 그는 만족했다.
다시 철책을 넘고들어가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줄을 고정시켜놓은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매놓은 줄을
풀었다. 줄을 조금씩 풀어주자 시체가 천천히 내려가다가 철책
위에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줄을 풀어주자 시체는 철책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계단을 내려와 다시 또 철책을 넘어갔다.
시체는 골목에 놓여 있었다. 식당 기둥에 매놓은 줄을 풀었다.
차를 시체 가까이 갖다댔다. 운전석에 앉아서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힌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한 대를 모두 태우고 나서야 밖으로 나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속에 거한의 시체가 들어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트렁크와 시체의 크기를 비교해 보고 나서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트렁크를 닫고 나서 운전석 뒤쪽 좌석의 문을 열었다. 앞으로
돌아가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나서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그것은 뒷좌석에 닿을 정도로 젖혀졌다.
시체 쪽으로 돌아와 머리 부분부터 뒷좌석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대각선으로 조수석을 향해 시체를 밀었다. 그 작업은
몹시 힘이 들었다. 시체가 어느 정도 들어가자 조수석으로
들어가 그것을 끌어당겼다.
시체의 머리가 끝에 닿을 때까지 집어넣은 다음 뒤로 돌아와
보니 다리 부분이 그대로 바깥에 남아 있었다.
무릎을 굽히면 그런 대로 모두 들어갈 것 같았다. 다리를
움켜잡고 무릎을 굽히려고 해보았지만 이미 경직될대로 경직되어
흡사 통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다리를 함께
묶어놓았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발목을 묶었던 줄을 풀었다. 천과 비닐을 벗겨낸
다음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힘껏 꺾어보았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무릎이 꺾어졌다.
두 다리의 무릎을 꺾어 시체를 차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고
났을 때는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온 주황색 G카는
차도에 들어서자 비로소 헤드라이트를 켜고 송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송정 쪽으로 커브를 도는 모퉁이에 경찰 페트롤카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서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는 방향을 돌릴 데도
없었다. 도망치면 오히려 위험할 것 같았다. 실내등을 꺼놓았기
때문에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지나쳐보기로 했다.
속력을 내지 않고 천천히 차를 몰아갔다. 운전석의 교통
경찰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커브를 돌아 달리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경찰 페트롤카는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1월 3일 날이 밝아왔다.
경찰이 두번째로 S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은 그날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경비실에는 늙은 경비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좋지 않은 눈길로, 안으로 들어서는 젊은 사나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두 명 다 사복차림의 형사들이었다. 그들의 눈빛과
움직임, 그리고 말투로 보건대 그들은 어제 왔던 경찰관들과는
달리 전문가들 같았다.
그들이 그곳에 나타난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여자 두 명이
자연유산으로 산부인과 병원에 출입한 적이 있는 데다가 마침
그녀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해운대 바다 쪽을 향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두 명의 여자들은 경찰이 병원을 뒤진
끝에 최종적으로 추려낸 286명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여자의 이름은 김기화라고 했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남화였다. 김기화의 주소는 1동 603호였고 남화의 주소는 3동
508호였다. 김기화는 27세로, 그녀가 자연유산으로 산부인과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것은 작년 10월 17일이었다.
남화라는 여자는 29세였다. 그리고 그녀가 산부인과 병원을
찾은 것은 작년 12월 31일이었다.
형사들은 먼저 1동 603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적사항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늙은 경비원은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경비실에 비치되어 있는 주민기록부에는 세대주의 이름과
직업만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주민기록부를 들여다보고 나서 1동
603호의 주인 이름은 이명식이며 직업은 공무원이라고 말했다.
그 집의 가족사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3동 508호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주민기록부에는 그 집 세대주의 이름이 추동림으로 되어 있었다.
직업란은 비어 있었다.
형사들은 먼저 1동 603호를 방문했다. 사전예고없이 불쑥
찾아간 것은 상대방이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젊은 부부가 몹시 당황해 하면서 형사들을 맞아들였다.
형사들은 먼저 그들이 이명식 김기화 부부임을 확인했다.
이명식은 자그마한 몸집에 병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세무공무원 이었다. 그에 비해 김기화는 몹시 뚱뚱해 보였다. 집
안에는 그들 두 사람 뿐이었다.
아이는 없습니까?
네,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결혼한 지 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 이유는 부인되는 사람이
자꾸만 자연유산을 하기 때문 이었다. 작년 10월 17일에
산부인과 병원에 간 것도 세번째 임신이 유산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지난 연말...... 그러니까 12월 31 일 밤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최원달 형사가 깐깐한 어조로 이명식을 향해 물었다.
지, 집에 있었습니다.
세무공무원은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대답했다.
그걸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네,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여러 명이 밤을
세웠으니까요.
그는 그날 밤 함께 밤을 지낸 사람들의 이름을 댔는데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다.
형사들은 이명식의 사진을 두 장 빌어가지고 그 집을 나왔다.
그들은 3동 508호로 향했다. 508호는 비어 있는지 아무리
차임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형사들은 옆집인 509호의
차임벨을 눌렀다. 젊은 부인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최형사는 508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집에 아무도 없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디서 오셨는가요?
경찰입니다.
의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던 그녀는 금방 정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혹시 이 집에 조그마한 남자 아이 없습니까? 한 서너 살되는
남자 아이 말입니다.
네, 있어요. 아들이 하나 있는 것 같아요.
그 아이 이름 혹시 모르십니까?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웃에 살아도 서로 오가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우린 이사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어요.
형사들은 다른 옆집인 507호를 찾아갔다.
그 집에서는 40대의 부인이 나왔다. 그녀 역시 508호에 서너살
되는 남자 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형사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려는데 510호의 문이
열리면서 아이들 두 명이 밖으로 나왔다. 한 아이는 여자 아이로
대여섯 살쯤 되어보였고 또 한 아이는 남자 아이로 서너 살쯤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세발 자전거를 끌고 나와 큰 아이가 앞에 타고 작은
아이는 뒤에 올라앉더니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형사들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자전거가
그들의 앞에까지 돌아왔을 때 말을 걸었다.
자전거를 아주 잘 타는구나. 네 동생이니?
여자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혹시 이 집에 사는 아이 아니?
최형사는 508호 앞으로 다가가 일부러 문을 두드려보였다.
여자 아이의 고개가 다시 끄덕거려졌다.
인하 말이에요? 인하 지금 없어요.
뭐? 뭐라고 했지? 그 애 이름이 뭐지?
어른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자 소녀의 표정도 굳어지기
시작했다.
인하예요. 내 동생하고 친구예요. 저는 누나구요.
자전거가 다시 움직였다. 형사들은 자전거를 따라 걸었다.
인하 어디 간지 모르니?
몰라요. 아까 놀러 갔는데 문이 안 열려요.
고맙다. 정말 고맙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소녀는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댔다.
흥분한 형사들은 다시 경비실로 가보았다.
3동 508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집을
비웠나요?
아무도 없다구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늙은 경비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508호 집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떠나는 걸 보지 못했나요?
못봤습니다.
노경감은 시경 상황실에 앉아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최원달
형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인하라는 아이를 찾았습니다!
최형사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경감은 심각한 표정으로 최형사의 보고를 대충 듣고 나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찾았습니까?
그와 함께 있던 박문호 형사가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 나 먼저 현장에 갈 테니까 열 명만 보내줘.
경감은 벌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박형사는 뒤따라가며
물었다.
어디로 보냅니까?
해운대 S아파트!
현장에 도착한 노경감은 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몇가지 지시를 내렸다.
동회에 가서 추동림이란 사람의 주민등록표를 가져와 봐.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경비원을 불러와요.
그 사이에 형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즉시 아파트 주위에
잠복했다.
20분쯤 지나서 동회에 갔던 형사들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누렇게 변색된 낡은 주민등록카드가 들려 있었다. 경감은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들고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세대주의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흑백
증명사진이었지만 얼굴모습은 뚜렷이 나와 있었다. 그것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있는 조금 연약해 보이는 중년 사나이의
얼굴이었다. 어딘가 바보스러운 데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얼굴이기도 했다. 살인범의 얼굴치고는 선량한 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진만 보고는 알 수 없다. 그는 몽타즈를
꺼내 사진과 대조해 보았다. 몽타즈와 사진은 서로 닮은
데보다도 다른 점이 더 많았다. 그러나 검은테의 안경을 끼고
있는 점이라든지 헤어스타일, 그리고 분위기 같은 것들이 비슷해
보였다. 경감은 직감적으로 이 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도 호텔의 문구멍을
통해 범인을 보기는 했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미행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범인이 등산모를 눌러쓴데다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분명히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진을 빨리 홍일란에게 보내서 확인시키죠. 팩시밀리로
보낼까요?
마반장은 경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카드에서 추동림의
사진을 떼어냈다.
그때 박문호 형사가 경비실 안으로 들어섰다.
박형사, 이 사진 확인해 봐.
마반장이 그에게 증명사진을 보였다. 범인을 직접 검문한 적이
있는 그는 그래도 수사관들 가운데 가장 가까이서 범인을 보았던
사람이었다.
이자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검문할 때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는데 아무튼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홍일란한테 보내서 확인시켜.
경감은 굳은 얼굴로 지시를 내리고 나서 경비실 안으로 들어선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젊은
경비원이었다.
그는 추동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추동림이 가족을 데리고 언제 집을 떠났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저께 밤이었습니다. 1월 1일 밤이었는데 그때가
아마 밤 9시가 지났을 겁니다. 차에다 짐을 싣고 떠나면서
추씨가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차 속을 얼핏 보니까
새장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잔뜩 짐을 싣고
가족들까지 데리고 어디 간다는 것이 어쩐지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살인범이 새장까지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 경감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나가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나요?
네, 짐을 그렇게 챙겨가지고 간 걸 보면 쉬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 차 가지고 있나요?
네, G카를 가지고 있습니다.
차 번호를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차 색깔은?
주황색입니다.
경감은 다시 주민등록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카드에는
추동림외에 두 사람의 기록이 더 있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의
기록이었다. 아내의 이름은 남화였고, 아들은 추인하였다.
인하의 나이는 세 살, 바로 그들이 찾던 아이였다.
추동림이라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 사람은 언제 봐도 집에 있었고, 부인이 대신 직장에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추씨는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를
산책하는게 일과였지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지요. 도대체
아무 하는 일없이 집에서 애나 보면서 빈둥거리는 것이 보기에
딱할 정도였지요.
찾아오는 사람은 많았나요?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부인 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나요?
시내에서 의상실을 한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이면 언제나 부인이 차를 몰고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남자는 운전을 못하나요?
남자도 운전을 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경감은 차주가 추동림 아니면 남화로 되어 있는 주황색 G카의
차량 번호를 알아내어 그 차를 수배하라고 지시했다. 차주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그 차의 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형사 두 명이, 한 명은 시경 교통과로, 다른 한 명은
차량등록소로 달려갔다.
한편 서울에서는 형사 한 명이 팩시밀리를 통해 들어온
추동림의 사진 복사물을 가지고 홍일란의 집으로 향했다.
홍일란은 그 사진을 보고 범인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형사는
즉시 부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날 오후 5시가 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주황색 G카의 차주는 추동림이었고, 차량 번호는 부산 1바
573×번이었다.
더이상의 확인은 이제 필요없었다.
경감은 치안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 후 추동림에 대한 수배 명령이 전국 경찰에
하달되었다. 거기에는 물론 부산 1바 573×번 주황색 G카에 대한
수배명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경감은 추동림이 이미 잠적했을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자세한 인적사항을 내일 중으로 알아내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추동림의 사진은 밤새 확대 복사되어 이튿날에는 전국 경찰에
배포되었다.
필요한 조처를 취하고 난 경감은 S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경비실에 그대로 잠복해 있었다.
자정이 조금 지나 추동림의 차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차는 시내의 어느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것을 순찰하던
순경이 발견한 것이다.
마반장을 포함한 형사 여섯 명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주차장을 지키는 경비원은 꽤 늙은 사람이었다. 의지할 데
없는 그는 주차장 한 켠에 판자로 설치해 놓은 경비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3일 아침 8시경에 그 주황색 G카가 들어
왔다고 했다. 그에게 추동림의 사진 복사물을 보이자 바로 그가
그 차를 몰고 왔던 사람이 틀림없다고 경비원은 증언했다.
그 사람이 무슨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아무 말도 없이 차만 세워놓고 가버렸습니다.
수사관은 플래시로 차 속을 비춰보았다. 차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가까운 여관에 방을 정한 형사들은 두 명씩 교대로 주차장을
지켰다.
1월 4일 날이 밝았지만 추동림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8시가 지나자 거리는 연휴를 끝낸 봉급생활자들의 출근하는
발걸음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놈은 차를 버리고 도주한 것 같습니다.
마반장은 9시가 지나 경감에게 보고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야.
놈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따라잡아야 해.
비록 한발 앞서 있긴 하지만 그 한발을 따라잡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마반장은 알고 있었다. 그는 부하
4명을 주차장에 남겨놓고 해운대 S아파트로 돌아갔다.
S아파트 3동 508호 출입문 앞에서는 열쇠 전문가가 형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물쇠를 열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었다. 꼬박
밤을 지샌 경감은 더이상 기다려 보았자 추동림이 집에 돌아올리
만무하다고 판단한 끝에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그 집에
들어가보기로 하고 열쇠 전문가를 불렀던 것이다.
자물쇠 장치는 두개였다. 전문가는 10분만에 그 두개를
열었다. 경감은 그 솜씨에 감탄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아파트의 실내는 어지러울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바삐 짐을 챙겨 빠져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경감은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액자 앞에서 한참 동안 서있었다.
그것은 일가족이 찍은 컬러사진이었다.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세 사람은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
있었고, 그들 뒤쪽 수평선 위에는 오륙도의 모습이 아련히
떠있었다.
추동림은 아들을 안고 있었고, 그의 아내 남화는 동림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대앉아 웃고 있었다.
상당한 미인인데요.
뒤에서 마반장이 말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에는 아주 화목한 가정 같은데.......
경감은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그들 일가의 모습이 아주 멋있다고 생각했다.
추동림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도저히 살인범이라고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저렇게 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 뒤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잔혹함이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사람은 역시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존재란 말이야.
그는 거실의 창가로 다가가서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하는 일없이
집에서 아이나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
이렇게 서서 얼마나 바다를 바라다 보았을까. 그가 집지키고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시내에 있는 의상실에 나간다고 했다.
혹시 그의 아내도 마약에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집에
들어앉아 지시만 내리고, 그의 아내는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남자보다 여자가 그런 일을 하기 안전하다.
혹시 의상실을 중심으로 그런 일을 한 게 아닐까? 그런 일을
하기에는 의상실이야말로 안성마춤이다. 경감은 홱 돌아서서
마반장을 바라보았다.
시내에 나가서 그 여자가 경영한다는 의상실을 찾아봐.
바닥이 좁으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혹시 거기가
아지트인지도 모르니까 주의해서 찾아야 할 거야.
부하들이 밖으로 나간 뒤 경감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거실의 한쪽 벽면은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상이 놓여 있는
방안에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전문분야의 책들이 아닌,
전분야에 걸친 교양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설류가 제일 많은 것 같았다.
흉악범이 그렇게 많은 책들 속에 파묻혀 지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범인은 지식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지식인--그런 인물은
상대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특별히 이상하다거나 수사에 도움이
될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형사 네 명을 데리고 의상실이 몰려 있는 광복동으로 나간
마반장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남화의상실을 찾을 수가 있었다.
두어군데 의상실에 들러 남화라는 이름을 대자 하나같이
남화의상실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수사관들이 남화의상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게 안에는 점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점원은 스물 한두 살 정도 되어보이는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였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치자 그녀는
놀라서 일어났다.
여기가 남화씨가 경영하는 의상실인가요?
네, 그런데요.
마반장은 추동림의 일가가 나와 있는 사진을 내보이면서
남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여자가 남화씨인가요?
네, 그래요.
여직원 이수희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화씨는 어디 갔나요?
몸이 편찮으셔서 나오시지 않으셨어요.
집에도 없던데...... 그 여자 지금 어디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남화가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치자 이수희는 금방이라도
울을을 터뜨릴 듯 글썽이면서 정말 자기는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아침에 전화가 왔었어요. 댁에 안 계시고 시골에 가 계신다고
하면서 당분간 못나오니까 가게를 잘 지키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밖에 다른 말은?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들은 가게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혹시 마약 같은 것이
숨겨져 있지 않나해서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수희한테도 마약 관계에 대해 한 마디라도
들어보려고 해보았지만 그녀는 정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두 시간에 걸친 질문공세에 그녀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그제서야 형사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곳에서 물러나왔다. 형사
두 명은 남화의상실을 잘 감시할 수 있는 카페 가로등으로
올라가 잠복했다.
이수희는 형사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문을 받았다.
남화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반드시 그녀가 있는 곳과 그곳의
전화번호를 알아둘 것, 경찰이 가게에 왔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 것.
그러나 그녀는 꼭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다.
남화로부터 다시 가게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날 오후
6시경이었다. 별일 없었느냐는 남화의 물음에 그녀는 딱
잡아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남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다그치자 그만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숨기지 말고 말해 봐. 무슨 일 있었어?
저기...... 누가 찾아왔었어요.
누가? 누가 찾아왔어?
경찰에서 왔었어요. 여러 명이 와서는 가게를 모두
뒤졌어요.
그녀는 울먹이며 이야기했다.
나를 찾았어?
네, 사장님을 찾기에 편찮으셔서 안 나오셨다고 했더니 집에
가봐도 없다고 하면서 사장님 계신 곳을 물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화가 다시 물어왔다.
나만 찾았어?
아니요. 선생님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어요. 사실 전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왔지요?
나도 모르겠어.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지 않았어?
물어봤지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가게는 왜 뒤졌지?
뭘 찾는 것 같았어요. 아마 마약 같은 것을 찾는 것
같았어요. 여기서 마약을 취급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어요. 그 바람에 손님도 받지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자기들이 여기에 찾아왔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요.
무서워서 혼났어요. 사모님 계신 데가 어디예요?
그건 말할 수 없어.
전화번호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만일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연락할 수 있게 말이에요.
┌────────────────────────────┐
│ 3.어둠 속으로 │
└────────────────────────────┘

열차가 섰다.
그는 눈을 뜨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플랫폼에 서있는
이정표에 대전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큰 글씨로 쓰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오후 8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가씨가 커피통을 들고 지나갔다.
그는 아가씨를 불러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청년이 석간신문을
잔뜩 들고 지나갔다. 그는 청년을 불러 석간신문 두 가지를
샀다.
종이컵에 들어 있는 커피의 감촉이 손바닥에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커피는 너무 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 따뜻함을 즐기면서
커피를 입 속으로 조금씩 흘려넣었다.
연휴로 3일 동안 쉬었던 신문은 4일자 지면에 많은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홍콩 마약밀수 살인사건 기사가
단연 톱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기사에는 수사진이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 부산으로 급파되었다는 내용도 실려 있었다.
그는 커피잔을 창가에 올려놓고 다시 한 번 그 기사를
읽어보았다. 읽고 나서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커피잔을
집어들면서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어떻게 부산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다. 열차가 움직였다.
미스터 Y가 경찰에 고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배제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비로소 홍일란의 집에 숨어 있다가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올 때 검문에 걸렸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검문
경찰관은 그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주소가 부산이냐고 물었었고,
그를 대신해서 홍일란이 부산에서 이사온 지 얼마 안 된다고
대답했다. 주민등록증을 돌려주고 난 그 경찰관은 차를
통과시키기 직전에 생각난 듯 그의 이름을 물었었다. 그때에도
홍일란이 얼른 김동민이라고 둘러대어 위기를 넘길 수가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돌려주고 난 뒤 나중에 가서야 이름을 물었다는
것은 경찰관이 주민등록증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고 건성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거기에 적혀 있는 추동림이란
이름은 보지 못한 것이다.
수사진이 부산에 급파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들은 부산에서 김동민이라는 이름을 찾고 있을까. 홍일란이
사실대로 경찰에 말하지 않았다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만일 홍일란이 그날 밤의 일을 경찰에 신고하고 그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모두 털어 놓았다면 경찰은 다른 방향에서
수사를 전개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통해 몇 가지
단서를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범인한테는 인하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살짜리 아들이
있으며, 그의 아내는 충격으로 얼마전에 유산한 적이 있고,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등의
단서가 그것이다. 그것을 근거로 경찰은 얼마든지 수사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동림은 홍일란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경험이 미숙한데서 온 실수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시의 마지막 불빛들이 어둠의 바다 속으로 드문드문
흘러가고 있었다.
열차는 10시 30분이 지나서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광장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세찼기 때문에 얼굴을 똑바로 쳐들고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코트깃 속에 얼굴을 묻은 채 빠르게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택시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그는 택시
타는 것을 포기하고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공중전화 부스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공중전화 부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장거리 자동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칸으로 들어가 동전을 집어넣고 아내가 있는
충무의 장모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아내가 그의 전화를 직접
받았다.
큰일 났어요!
그것이 아내의 첫 마디였다. 그녀는 속삭이는 소리로 재빨리
그렇게 말했다.
어머님 계셔?
그는 장모가 아내의 말을 듣고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어머님은 건넌방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경찰이 가게에 들러
저하고 당신을 찾았대요. 수희가 그러는데...... 가게를
쑥밭으로 만들고 갔나봐요. 수희한테 마약 관계를 캐물었대요.
집에도 갔었나봐요. 가게에 혹시 마약이 숨겨져 있지 않았나
해서 그렇게 뒤졌나봐요. 지금 어디 계세요?
여기 서울이야.
그는 전화를 끊고 싶었다.
더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지 않아요. 경찰이 알게 됐는데
더이상 도망다녀서 무슨 필요가 있어요. 우리 자수해요.
남화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찰은 나에 관한 것만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당신을 찾은
것은 나를 잡기 위해서 그런 거야.
아무튼 우리 자수해요. 잠도 잘 수 없고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지 마. 자수하자는 말은 하지 마. 지금 와서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어떡 해.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야. 우리가
자수하면 인하는 어떻게 되겠어.
어머님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꺼지는 것처럼 들려왔다.
만일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그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말해서 안 됐지만 장모님은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계시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 가능성이 많으신 분이란
말이야. 그런 분한테 어떻게 인하의 장래를 맡길 수가 있어.
건강이 좋으시다해도 노인한테 어린애를 맡긴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야. 인하한테도 물론 잔인한 짓이고. 당신이나 나나
일단 자수한다 해도 금방 석방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10년이
될 지 20년이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무기형을 받을 수도
있고 사형언도를 받을 수도 있어. 제발 자수하자는 말은 더이상
하지 마. 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알아보겠어.
경찰의 수배를 받게돼서 어렵긴 하겠지만 방법은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만일 경찰이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하죠?
경찰이 찾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야.
혹시 모르지 않아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놈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당신은
안전해. 그놈은 헤로인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이 당신을 찾아온다 해도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대라고 할 거야. 당신이 내가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해서 경찰이 당신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야.
당신이 주의해야 할 상대는 경찰이 아니라 미스터 Y일당이야.
하지만 놈들은 거기까지 찾아내지는 못할 거야.
갑자기 남화는 침묵했다. 그는 아내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가
인하는 잘 있어?
하고 물었다.
할머니하고 자고 있어요. 할머니를 유난히 따라요.
잘 있어.
몸 조심하세요.
그녀의 울먹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게된 이상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어렵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경찰의
감시망이 번득이고 있을 것이다. 만일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끝장이다. 그는 위조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하도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로 향했다.
을지로 1가에서 내려 지하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물품보관함
속에 헤로인이 들어 있는 가방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동안에는 언제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관함 속에 넣고 나자 마치 큰 짐을 벗고 난 기분이 들었다.
광장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밤 늦은 시간이라 행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벤치 여기저기에 오갈 데 없는 거지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새우잠을 자고 있다. 그들한테는 추위가 제일 무서울 것이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막으려고 어떤 노인은 종이 박스를 풀어
그것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깨가 구부러진 노인 한 사람이 쩔룩거리고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민다.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고, 조그마한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다. 말라죽은 나무가지
같은 손을 벌려 담배를 한 대 구걸한다. 동림은 반쯤 남아 있는
담배갑을 아예 노인에게 주어버린다. 노인이 불을 청한다.
동림은 라이터까지 그에게 주었다. 그에게는 또 한 갑의 담배와
한개의 라이터가 있었다. 노인은 맞은 편 그의 자리로 돌아가
자꾸만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동림은 서울 운동장 쪽으로 향해 지하도를 걸어갔다.
지하도 양켠에 자리잡고 있는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당장 잠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 숙박업소에나
들어가 방을 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싸구려 여관에
들어갔다가는 검문에 걸릴 것이다. 그는 형님댁을 생각했다가 곧
지워버렸다. 형을 만나지 않은 지는 벌써 수년이나 되었다. 형
내외는 불쑥 찾아온 그를 반겨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하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대로 계속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지하도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에 다시 앉았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걷다가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 택시를 잡았다.
서대문으로 갑시다.
어쩌면 내일쯤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게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차비를 치르고 다시
택시에서 내려 눈보라를 맞으며 찬바람을 가슴 깊숙이
들여마셨다.
다시 택시를 타려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경찰관 두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밤 늦은 시간이라 보도에는
그들만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동림은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구둣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들이 지나쳤다고
생각되어 돌아보는 순간 경찰관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동림은 당황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걸음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동림은 목덜미가 뻣뻣이 굳어지는 느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손으로 바람을 막으면서 라이터불을 켜는데
실례합니다.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제발 그대로 돌아가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뒤돌아보았다.
키가 큰 경찰관 한 명이 그에게 거수경례를 보냈다. 또 한
명은 그 옆에 바싹 붙어서 있었다. 그들은 방한모에 방한복
차림이었다. 방한모를 눌러쓰고 있는 모습들이 아주 비슷해
보여서 마치 쌍동이 같았다.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들은 M16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저 총 속에 실탄이 들어
있을까 하고 동림은 생각했다. 만일 실탄이 장전되어 있다면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은 검문에 불응하는 사람들
사살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동림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몸을 조금 흔들어 자신이 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주민등록증? 그런 거 없어요.
순찰 경관들은 젊어보였다. 그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런 거 없다니요? 주민등록증은 반드시 휴대하도록 되어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래? 난 그런 거 관심없어요.
그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주민등록증 있으면 보여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하고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주민등록증은 술집에 맡겨놨어.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다가 그중 한 명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이거 놔!
그는 경찰관의 손을 홱 뿌리쳤다.
가긴 어딜 가?
파출소까지 잠깐 갑시다. 거기 가서 신분이 확인되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웃기지 마!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들은 양쪽에서 그의 팔짱을
끼고 잡아끌었다.
그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들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이거 놔요! 갈테니까 이거 놓으란 말이야! 창피하게 팔은 왜
잡아끌어!
그가 순순히 응할 뜻을 보이자 그들은 그의 팔을 놓아주고
그의 양쪽 옆에 바짝 붙어서서 걸었다.
이쪽으로.
지하도 앞에 이르자 경찰관은 지하도로 내려가는 그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내려가자 그들은
뛰어내려가 그의 앞 길을 가로막았다.
도로 올라가요!
경찰관이 태도를 고쳐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림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계단에다 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들은 계단 아래로 한데
뒤엉켜 굴렀다. 그들이 일어나 계단을 올라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동림의 계산이었다.
동림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온 다음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서라! 서지 않으면 쏜다!
그가 백여 미터쯤 달려갔을 때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길 위에 쌓인 눈때문에
마음대로 뛸 수가 없어 안타까왔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외침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일정한
크기로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과의 간격은 좁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 정말 이런 생활은 싫다! 그는 달리면서 속으로
외쳤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아들을 데리고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를 거닐던
일이 아주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그 시절은 오기 힘들겠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말 테다.
틀림없이.
골목을 빠져나오자 큰 길이 나타났다. 큰 길을 가로질러 다시
골목 안으로 뛰어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열심히 뛰어갔다. 숨이 턱에 차서 더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려갔다.
더이상 달릴 수 없게 되자 그때부터는 걷기 시작했다. 될수록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누비다 카페를
발견하고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카페로 한쪽 테이블에 손님 한 팀이 앉아 있을 뿐
한산했다.
그는 스탠드 앞으로 가서 의자 위에 가만히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손님 기다리시나요?
여자 바텐더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꼬냑 한 잔 주시오.
경찰관들이 카페에 나타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오실 때 보니까 얼굴이 무척 창백하셨어요.
그녀가 스탠드 위에 술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밖에는 너무 추워요. 얼굴이 얼어붙어 버렸어요.
그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을 입 속으로 흘려넣기 전에
냄새부터 음미했다.
향내가 진하고 감미로왔다. 향내를 깊이 들여마시다가
혀끝으로 액체를 건드렸다.
입 안에 향내가 가득 들어왔다. 그는 아주 조금씩 향내를
마셨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바텐더가 말을 걸어왔다.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였지만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귀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다가 추워서 들른 거요.
자주 찾아주세요. 미스 박이라고 해요.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관들이 카페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창백하고 우울해 보여요.
바텐더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그말에
쓸쓸하게 웃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아니오.
30분이 지나 그는 꼬냑 한 잔을 또 청했다.
그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닦았다.
안경을 도로 끼고 화장실에 다녀와서남은 술을 마저 마신 다음
카페를 나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1월 5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차도로 나오니 택시가 어쩌다가 하나씩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은 여전히 바람을 타고 미친 듯 날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들은 몹시 조심스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보도에는
행인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밤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는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호텔은 특급은 아니지만 1류급은 되는 호텔이었다.
프런트맨은 그에게 증명을 제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름과 주소를 모두 엉터리로 적고 나서 요금을 지불하고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는 더블 침대가 놓여 있는 10층 방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관과는 달리 호텔에는 좀처럼 경찰이 투숙객들 방을 일일이
조사하는 법이 없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싼
호텔에 들었던 것이다.
자연 그의 시선은 전화통에 가서 머물렀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말을 듣겠지만 그래도 아내와
통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으려니 마치
심한 고문을 견뎌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2시가 지났을 때 그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속에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동안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그의 눈에 익은 그 얼굴이
아닌 낯선 얼굴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빨리 변해 버린데
대해 그는 자못 놀랐다. 그것은 끊임없이 쫓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얼굴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웃는 게 아니라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는 욕조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것과 함께 스탠드의 전등을 켜고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아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3시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불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는 한동안 뒤척이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떳을 때는 6시 5분전이었다.
호텔을 나와 청진동 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청진동
골목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바람은 차가왔다. 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어느 해장국집 문을 밀고 들어가니 서너 명의 손님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해장국을 열심히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 해장국을 시킨 다음 잠자코 앉아 있는데
신문배달 소년이 신문을 던져놓고 간다. 종업원 아가씨가 신문을
집어들고 카운터에 앉아있는 뚱뚱한 중년 남자에게 가져간다.
종업원이 해장국을 가져오자, 그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식사도 걸렀던 참이라 그는 몹시 배가 고파 있었다.
정신없이 국밥을 퍼먹다가 카운터 쪽을 힐끗 보니 뚱뚱한 사내가
신문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 그것을 한쪽으로 접어놓는다.
동림은 종업원에게 신문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신문을 펼쳐보던 그는 사회면에 실려 있는 큼직한 얼굴
사진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의 얼굴
사진이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숨을 죽인 채 한동안 그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카운터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뚱뚱한 사내는 막 안으로 들어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동림은 다시 자신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외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사진을 본
순간부터 외국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신문 기사에는 가족관계를 비롯해서 그의 신상에 관한 것들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에 대한 것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경찰과 기자들이 아직
밝혀 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맨 먼저 아내를 생각했다. 신문에 난 그의 사진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뒤이어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더이상 해장국을 먹을 수 없었다. 사진 옆에는 홍콩 마약
밀수 살인사건의 유력한 살인용의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신문을 접어 탁자 위에 놓으려다가 의자 위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의자를 탁자 밑으로 밀어넣었다.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신문에 실린 그의
사진은 안경을 끼고 찍은 것이었다. 안경만 벗어도 인상은
달라보인다. 그대신 그는 눈 앞에 안개가 낀 듯 침침해 보였다.
그는 심한 근시였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 새 어둠이 걷혀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는 택시를 잡아
타고 서대문 B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거기서 B아파트까지는 불과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는 제법 커보였다. 그 40대 여인은 202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구두닦이의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202동 805호에
살고 있다. 바로 그녀가 사진관에 가서 그의 사진을 찾아갔던
인물이다. 그는 그녀를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그녀를 미행했던
구두닦이의 말을 듣고 그녀의 특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서넛, 안경을 끼고 있고, 다리는 약간 절며,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이것이 그가 구두닦이 청년으로부터 얻어들었던 그
수수께끼 여인에 대한 특징이었다.
그녀는 왜 사진관에서 내 사진을 찾아갔을까? 물론 미스터 Y의
지시나 부탁을 받고 찾아갔겠지만 그걸 가져다가 무엇에 쓰려고
그랬을까? 미스터 Y는 나의 명함판 컬러사진 20장이 왜
필요했을까? 그가 알기로는 그 정도의 사진이 필요한 데는
여권을 발급받는 데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스터 Y는
내 여권을 만들기 위해 사진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 여권은 물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발급되는 것이 아닌 위조여권일 가능성이
크다. 놈은 나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외국으로 헤로인을 운반하려 했던 게 아닐까? 여기까지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 다음, 그러니까 위조여권과 다리를 약간 저는 그 40대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추리도 현재에는 통하지
않는다. 그 여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단지 사진만을 찾아다 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인물일까? 아니면 위조여권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일까?
그는 단지 안으로 들어가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나있는 길을
걸어갔다.
202동 앞을 지나갈 때는 그 앞에 주차해 있는 차들을 눈여겨
보았다. 눈앞이 흐릿했기 때문에 될수록 가까이 접근해서 차를
살폈다. 서울 마 541× --구두닦이 청년이 가르쳐 준 차번호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출근 준비를 하느라고 차를 닦고 얼어
붙은 엔진을 거느라고 법석이다.
그는 202동 앞을 그대로 멈춰 서지 않고 지나쳤다가 20분쯤
지나 다시 그쪽으로 가보았다.
서울 마 541×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 차는
국산차로서는 상당히 고급에 속하는 은색 중형차였다.
202동 건물은 꽤나 길어보였다. 단지 안을 돌아다니면서보니,
아파트 건물마다 경비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입구에만
경비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단 단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아파트에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202동 앞을 지나쳐 그 옆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놀이터 저쪽 켠에는 철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철책 너머는 바로 학교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에서는 그 일대의 주민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이른바 조기축구 회원들인 것
같았다.
그는 철책에 기대서서 202동 쪽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려서
그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경을 꺼내
끼었다. 미끄럼틀이 가로막고 있어서 저쪽에서 이쪽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 견딜 수
없이 추웠기 때문에 그는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렸을때
202동에서 안경을 낀 중년 여인이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가만
보니 다리를 조금 저는 것이 아무래도 그가 기다리고 있는 그
여인 같았다.
그녀는 허리를 죄는 보라빛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퍼머
상태였고, 몸치장은 꽤나 사치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뒤를
건장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그는 30대로 보였고, 누런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은빛 승용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건장한 연하의
남자는 그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두 남녀가 뭐가 우스운지 입을
벌리고 웃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안경을 벗고 급히 어린이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10시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단지 안을 지나가는 빈 택시가
많았다. 그는 늙은 남자가 운전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저 차를 좀 따라가 주십시오.
그는 공손하게 부탁했다.
미행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늙은 운전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은빛 승용차는 이미 202동 앞을 벗어나 단지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늙은 운전사는 그 차의 시야에 들어가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다.
은빛 승용차는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동림이 미터 요금의
배를 지불하겠다고 하자 운전사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미행을 시작한 지 40분쯤 지나 동림이 탄 택시는 P호텔을 조금
지나쳐 멈춰섰다. 동림은 약속대로 미터 요금의 배를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은빛 승용차는 P호텔 앞에 세워져 있었다. 차 속은 비어
있었다.
동림은 로비로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피숍으로 가보니 그들은 거기에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아침인데도 커피숍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동림은 구석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났을 때 한 남자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 절름발이 여인 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경을 벗은 상태에서는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동림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얼른 안경을 끼었다가 도로 벗었다. 불과 2,3초 사이였지만
그는 그 남자를 충분히 볼 수가 있었다. 30대 안팎으로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동림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다.
마침 여인의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전표를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여인과 등을 대고 앉았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될수록 상체를 바로 하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대로 남자 목소리가 좀 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아주 급합니다...... 일 주일 내로
해주십시오......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물론이지요...... 그만큼 생각해
드려야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염사장님은 너무 짜세요...... 제가 그렇게 성의껏
해드리는데도.......
여인이 갑자기 볼멘 소리로 대꾸하는데 뒤에 가서 말소리를
줄이는 바람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염사장이라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들었기 때문에 동림은 숨을 죽이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가 살해한 거한의 말에 따르면 염사장이 바로
미스터 Y라고 했다.
......사장님한테 전해 드리겠습니다...... 굉장히
바쁘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우리 관계야 바늘과 실 같은 관계 아닙니까...... 서로 공존
공생하는 거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자, 여기 필요한
서류 있습니다.......
여인이 체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모님께 걸고 있는 기대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닌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솔직한 심정이에요...... 언제까지고 이런 일만 할 수
없잖아요.
그들이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그들이 커피숍에서 나간 것을
확인하고 동림은 일어섰다.
로비로 나가면서 그는 어느 쪽을 미행할까 하고 망설였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마음이 결정되어 있었다.
절름발이 여인이 탄 차가 먼저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어서 호리호리한 청년이 모는 승용차가 움직였다. 동림은
재빨리 빈 택시를 집어탔다.
그런데 청년이 모는 자가용 승용차를 따라가기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택시가 속도를 줄이면서 도로 우측에
가서 섰다. 운전사가 펑크가 났다고 투덜거리면서 차에서
내렸다. 동림도 급히 밖으로 나와보니 오른쪽 앞바퀴가 찌그러져
있었다. 하필 고가도로 위였다.
동림은 손을 들어 차를 불렀지만 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달려갔다. 청년이 운전하는 차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손을 들고 서있었지만 그 앞에 서주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밑으로 빠지는 길이 있으니까 걸어가는 게
빠를 겁니다.
운전사가 바람 빠진 타이어를 빼내려고 기를 쓰면서 말했다.
동림도 차도 오른쪽에 붙어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먼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안과에 가서 눈에다 콘택트 렌즈를
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마치 몽유병자처럼
꿈속을 걸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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