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3-2

3학년2반 | 2022.02.05 07:55:51 댓글: 0 조회: 490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684
┌────────────────────────────┐
│ 3.반격 │
└────────────────────────────┘

그곳에서는 시테섬이 자리잡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 잘
보였다.
시체가 발견된 곳은 노트르담 성당이 마주 보이는 강 건너
쪽이었다.
시체는 자루 속에 넣어진 채 얼어붙은 강 속에 반쯤 처박혀
있었다. 강을 따라 달리고 잇는 위쪽 차도에서 내던져지는
바람에 얼어붙은 수면이 깨어지면서 거기에 처박힌 것 같았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인 관광객이었다. 자루 속에
넣어진 채 반쯤 강 속에 들어가 있는데다 그 위에 눈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었는데
용케도 그 미국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해서 자루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안에는
벌것벗은 여자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시체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손발도
묶여 있었다. 목에도 줄이 칭칭 감겨 있었는데 젊은 동양계
여인이었다. 신원을 밝힐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1월 16일 파리 경시청은 한 건의 실종신고를
접수한 바 있었다. 실종자는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에 거주하고
있는 오유린이라는 한국인 유학생이었고, 신고자는 그녀가
하숙하고 있는 집주인인 러시아 출신의 노파였다.
그 노파가 유린의 방을 노크한 것은 지난 13일 저녁때였다.
응답이 없자 그녀는 아래층으로 도로 내려왔다가 이튿날 아침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려보았다. 응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방을 비우지 않는 그녀가 웬일일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피치 못할 일로 외박했거니 여기고 그냥
돌아섰다.
그 다음 날도 유린의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함께 하숙하고 있는 유무화라는 아가씨도 며칠 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16일 오후 노파는 마침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강제로 다락방 문을 열었다.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침대 시트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고 노파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허둥지둥
내려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녀가더니 얼마 후에 사복 차림의
형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노파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다음
방안을 살피고 나서 돌아갔다.
세느강에서 건져올려진 피살체의 사망 시간은 13일 밤 9시에서
12시 사이로 밝혀졌다. 사망 원인은 질식사였다. 실종 신고가
들어온 한국인 유학생의 실종일과 피살체의 사망일이 같은
날짜인 점, 양쪽이 모두 젊은 동양계 여자라는 점에 경찰은
주목했다. 노파는 시체를 한 번 확인해 달라는 경찰의 말에
처음에는 펄쩍 뛰었다가 그 집에 하숙하고 있는 일본인 청년이
함께 동행해 주겠다는 말에 비로소 경찰을 따라나섰다.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곳까지 따라들어간 그들은 피살체를 보고
오유린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같은 하숙생인 유무화가 며칠째 종적을 감추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녀를 찾아나섰다.
밀라노행 열차는 오후 6시 15분에 출발했다.
동림과 무화는 제네바역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다가 출발 10분 전에 밀라노행 국제열차에 올랐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온 그들은 이제 이탈리아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열차는 한쪽에 통로가 나 있었고, 그 통로를 따라 방이
잇대어 붙어 있었다.
그들은 일등 칸에 들어가 앉았다. 방안에는 세 명씩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서로 마주보며 놓여 있었다.
그들은 창가에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그 방안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화는 일어나
출입문 쪽에 커튼을 쳤다. 문도 안으로 걸어 잠갔다. 이제 통로
쪽에서는 방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다. 스팀이 들어와
방안은 따뜻했다.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바깥 풍경은 어둠 속에
잠겨버리고 불빛들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열심히 담배만 피워댔다. 무화는 남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남자는 한사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어둠 속의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아마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이마에는 두 줄의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그를 정말 죽일 건가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죽이면 정말 인하를 돌려줄까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다는 뜻인지 아이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게 그들의 약속을 믿고 있어요.
도대체 나보고 어쩌자는 거요?
그가 화를 바람에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앉았다.
그녀는 몸을 움츠린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더이상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매우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응하지 않아 안타까왔다.
국제열차는 어둠을 가르며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국경역인 도모도소라역에 도착하자 이탈리아 관헌들이 차에
올라탔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고, 달리는 차 속에서 이탈리아
관헌들은 패스포트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노크소리에 커튼을 젖히고 문을 열어주자 두 명의 사복 차림의
사나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이탈리아 관헌임을
증명하는 마크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아가씨는 한국인이고 당신은 일본인란 말인가?
작달막하게 생긴 그가 패스포트를 들여다보고 나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래요.
무화가 영어로 대답했다.
두 사람 어떤 사이인가요?
우린 결혼할 사이예요.
그녀가 동림의 팔짱을 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잿빛머리의 늙은 일본 남자와 젊은 한국인 처녀의 결합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패스포트를 돌려주고 나서 밖으로
사라졌다. 무화는 아까처럼 출입문을 잠그고 문에 커튼을 쳤다.
보세요. 알프스의 눈이에요.
그녀가 그의 곁에 붙어앉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백설의 알프스는 신비스럽고 장엄해 보였다. 열차는
알프스 산맥을 숨가쁘게 넘어가고 있었다.
아주 조용하게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와 그녀의
상체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내어 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리를 죽이느라고 무진애를 써야 했다. 그는 눈물에
흥건히 젖은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두 사람의
얼굴이 포개지면서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으면서도 남자 쪽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사람 죽이지 말아요.
그녀가 울먹이는 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그는
그녀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그럼 내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당신의
친구는......?
무슨 수가 있을 거예요.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방법은 없어.
그가 내빝듯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선생님은 모두 죽기를 바라시는 거에요?
그렇지는 않아.
그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의 지혜를 빌리고 싶어.
정말이세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더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나한테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지혜가 없어요. 내
아들도 못 구하고 있는 처지야.
그녀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그는 힘을
느꼈다.
저한테 특별한 지혜는 없어요.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다고
보고 싶지는 않아요. 틀림없이 방법은 있어요. 용기와 지혜만
있다면 그 방법을 실천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서도 그는 신선한 힘을 느꼈다. 그런 힘을
느끼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건에 휩쓸리고부터는 절망적인
기분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뭐지?
황표 그 사람을 우리 쪽에 끌어들이면 어때요?
그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을 죽일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저들에게 대항하자는 거예요. 그 사람도 우리도 모두 막다른
골목까지 와있어요.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뭉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절박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해하고 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잖아요. 그리고 세 사람이 뭉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에요.
열차는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이웨이를 따라 달리고 있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멀리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그 사람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그 사람은
도망자이지만 우리는 도망자가 아니요. 그런 사람한테 무얼
기대한다는 거지?
그 사람은 조직에 대해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우리보다도 조직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녀의 말은 옳은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그
자신보다도 판단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그는 차츰 경이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조직을 돈을 가지고 도망중인가 봐요. 아주
많은 돈인가 봐요. 그 돈을 미끼로 쓸 수 있을 거에요.
그 사람이 협조해 줄까?
그 사람도 현재 막판에 몰려 있어요. 그 사람하고 며칠 함께
지내면서 느낀 건데...... 그 사람 돈만 많이 가지고 있다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요. 그 돈때문에 더욱 그러는 것
같아요. 돈에 짓눌려 어쩔줄 모르는 사람 처음 봤어요.
도망치는데도 지쳤나봐요. 저보고 죽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한국에 몹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지금
도피 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 건
불안을 잊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아요. 제가 그 사람을 잘 설득해
보겠어요.
불빛이 갑자기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더이상 그녀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라노에서 로마행 열차로 바꿔타야 했다.
밤늦은 시각인데도 밀라노 역은 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 10분
전 11시였다.
그들은 긴 여행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온 것만큼이나 더 가야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 명의 감시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시야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자들을 묵살해
버리기로 했기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로마행 열차는 23시 50분에 있었다. 로마까지는 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행이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역 구내에 있는 스낵코너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잠깐 기다리세요. 파리에 전화를 걸고 오겠어요.
그녀의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미처 막지
못했다. 홀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수배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전화를 걸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전화국은 대합실 한쪽에 있었다. 무화가 전화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검은 장미가 어느 새 다가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거긴 뭐하러 들어가기? 어디다 전화걸려고 그러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두 사나이가 그녀를 위협적인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거 놔요!
무화는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경찰에 전화거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너무 다정하게 굴지 마. 저 남자하고 말이야.
그녀가 스낵코너 쪽을 턱으로 가리켯다.
무화는 거기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밀고
전화국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국 안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생제르멩 데 프레 거리에 있는 러시아계 노파의
집에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혹시 그 하숙집에 오유린에 대한
소식이 들어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녀가 그 시간에
그곳에다 전화를 신청했다는 것은 매우 잘한 짓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적절한 때에 전화를 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5분쯤 기다리고 있자 전화국 직원이 그녀를 가리키며 8번
박스로 들어가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그녀가 8번 박스로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자 러시아 노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화가 이름을 대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노파가 너무 빠른
어조로 많은 것을 지껄여댔기 때문에 무화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번쯤 듣고 나서야
그녀는 오유린이 살해되었으며 경찰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빨리 와! 빨리 오란 말이야!
노파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 무화는 노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어디서 죽었다는 거예요? 좀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끔찍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세느강에 빠져 죽었어! 경찰이
그러는데 목졸라 죽였대! 자루 속에 넣어가지고 강가에다
던졌어! 여기 경찰이 기다리고 있어! 전화 바꿔줄 테니까
기다려!
마드모아젤...... 파리 경시청의.......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화는 그만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동림은 무화가 창백한 얼굴로 허겁지겁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숙집에 전화걸었는데...... 유린이.......
무화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떨면서 더듬거렸다.
동림은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유린이 죽었대요.
그녀는 가까스로 그 말을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이상한 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울지 않는 게 좋겠어. 태연히 침착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돼요.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그녀는 울음을 몇번씩이나 삼켰다.
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야.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야.
목졸려 죽었대요. 세느강에서 시체를 건져 올렸대요. 경찰이
나를 찾고 있어요.
도망가요. 그 아가씨가 죽은 이상 그들의 지시에 따를 필요가
없잖아.
싫어요!
그녀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그들의 지시에 따르지도 않을
거구요.
경찰에 신고할 거요?
아뇨!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하고 함께 행동하기로 했잖아요.
나는 당신의 목숨까지 책임질 수 없어요.
언제 제 목숨까지 책임져달라고 했나요.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녀의 손 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자 그는 그녀의 한쪽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아무리 악마들이라고 해도 연약한 여자를 그렇게
죽이다니...... 세느강에 버려져 있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몸을 떨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침착해요. 놈들이 눈치를 채면 위험하니까 침착하게
행동해요.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슬퍼해요.
그의 냉담한 말에 그녀는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면서 몸을
도사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인하도 이미 죽었을지 몰라요. 저자들이 인질까지도 무참히
죽인다는 거 이제 증명됐잖아요.
그 말에 그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쳐다보는 그 눈에 물기가 번지는 것 같더니 이윽고 그는
고개를 돌려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경련이 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 잔인한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진정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인하는......
살아있을 거예요.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엉뚱한 행동을
취할까봐 적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봐요. 당신 갈 데로 가요. 당신이 나하고 함께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안 돼요. 저들이 감시하고 있어서 안 돼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제발 도망쳐요. 우리가 함께 행동해야 할
이유는 없어졌어요. 내 아들이 주겅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지시에 따르면서 기다릴 거요. 더이상 나와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위험해요. 제발 가줘요.
그럴 수 없어요. 난 가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은 제
도움없이는 안 돼요. 그들의 지시대로 따르면 안 돼요. 그들의
지시대로 따른 결과가 결국은 유린의 죽음으로 나타났어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결국 인하도 죽어요. 인하를 살리고
싶으면 그들과 싸워야 해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그들과 대항할
수 있어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두눈은
얼어붙은 듯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선생님만 허락하신다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더이상 경련이 일지
않고 있었다.
황씨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보겠어요.
그것은 그녀가 두번째로 하는 말이었다. 열차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올 때도 그녀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 사람을 죽인다 해서 인하를 찾으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듯 빛나기
시작했다.
1월 18일 아침 파리.
한국 시간 1월 17일 저녁 9시에 출발한 서울발 파리행 KAL기는
정시보다 15분 늦은 파리 시간 18일 아침 8시 40분경에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눈은 그쳐 있었고 곳곳에서는 제설작업이 한창이었다.
노경감과 마형사는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 쪽으로 향했다.
경감은 초행길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두리번거리지 않았지만
마형사는 파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에 아득 찬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따라왔다.
출구 저쪽에서 한 사나이가 경감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쳐들어보였다.
살레 부장이었다. 경감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출구를
빠져나간 그는 살레 부장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마형사도
살레 부장과는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반갑게 인사했다. 살레
부장은 그들에게 브리앙 차장을 소개했다.
조금 후 그들은 브리앙 차장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전화를 받고 브리앙 차장이 발신처를 찾아갔는데 교외에 있는
레소레 호텔에 투숙한 손님이 건 전화로 확인됐습니다. 신원도
확인됐는데 바로 찾고 계신 김명기라는 자였습니다.
살레 부장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하고 브리앙 차장이 말했다.
어디로 도주했나요?
살레 부장은 두손을 벌려보였다.
모릅니다. 갈만한 도주로를 차단하고 검색을 벌였지만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공항과 항만, 그리고 국경역에서도 검색을
실시하고 있지만 아직 걸려들지 않고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이미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잇으니까 어디에 숨어 있지 않는
한 수사망에 걸려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 여권을 가지고
오래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겁니다.
만일 그가 다른 여권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되면 문제가 달라지지요. 다른 여권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나요?
경찰이 추적하고 있는 걸 알면 그 여권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싲요. 김명기라는 이름으로 된 여권도 실은 위조여권입니다.
적어도 두개 이상의 위조여권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위조여권의 인적사항을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경감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인물은 어떤 인물입니까? 본명은 뭡니까?
트라이어드에서의 위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경감은 그 물음에 답하기가 몹시 난처했다. 살레 부장은
추동림이 국제 마약조직인 트라이어드의 대원인 줄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물음을 회피할 수도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려면 긴 설명이 필요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는 매우 불행한
사나이입니다. 본명은 추동림이라고 합니다.
시내로 통하는 고속도로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그래서
차들은 몹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같은 날 아침 로마.
밀라노를 출발한 열차는 아홉 시간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로마역 구내로 천천히 들어섰다. 플랫폼에 서있는 전자시계가
아침 8시 5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림과 무화는 따로따로 열차에서 내려 한 사람은 역광장을
가로질러 가고 한 사람은 택시를 타고 포폴로 광장으로 향했다.
동림은 광장을 가로질러 간 다음 길을 건너가려다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금테안경의 동양인이 열심히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여자와 잿빛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화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동림은 길을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을 건너자 그는 재빨리 지하도로 내려갔다. 트렁크가
움직이는데 많은 장애가 되었다. 동양인이 허덕거리면서 뒤따라
왔다. 동림은 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왜 이러는 거야?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동양인이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면서 영어로 물었다.
다리운동을 좀 하는 거요.
허튼 수작하지 마. 그런 짓하면 재미 없어. 여긴 내 구역이나
다름없어. 로마에는 내 부하들이 쫙 깔려 있어. 신호만 하면
달려올 거야. 잠자코 내 뒤를 따라와.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
내가 지정한 호텔에 들어가 있어.
지하도에서 벗어난 동양인은 다시 길을 건너 돌이 깔린 좁은
길로 들어갔다. 그 뒤를 동림은 10여 미터쯤 떨어져서 따라갔다.
이윽고 동양인은 제노바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삼류호텔로
들어갔다. 동림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그 동양인은
프런트맨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잇엇다. 이탈리아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했다.
동양인이 벨맨에게 뭐라고 말하자 벨맨이 동림의 트렁크를
받아들고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동양인은 따라오지 않았다.
10분쯤 지나자 동양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서 빼지 않았다. 그 속에 권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동림과 거리를 유지하고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경계가 심해졌다고 동림은 생각했다.
조금 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동양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동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나서 그가 말했다.
내 부하 네 명이 이리로 올 거야. 그들이 너를 보호해
줄거니까 안심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해.
동림은 그들의 손길을 벗어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기가 될만한 것이
없을까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수첩을 펴놓고 무엇인가
부지런히 적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동양인이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동림이 대꾸하지 않고 계속
끄적거리고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유서를 쓰고 있는 거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동림은 영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어.
동양인이 빈정거렸다.
나한테는 가족이 있으니까. 당신은 신사니까 이 유서를 내
가족들한테 전해줄 수 있겠지.
동림은 수첩에서 유서를 적은 페이지를 찢어냈다.
이걸 꼭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동양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오른손에는 종이쪽지와 함께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동양인은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였다. 종이를 손에서 놓는 것과 동시에
동림은 만년필 끝으로 상대방의 왼쪽 눈을 힘껏 찔렀다.
날카로운 펜끝은 사정없이 눈알을 파고 들었다.
으악!
동양인은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왼쪽 눈을 움켜쥐었다.
그의 비명은 너무도 처절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동양인은
눈을 감싸쥔 채 의자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동림은 동양인이 고통에 못이겨 몸부림치는 것을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미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동양인은 그 고통
속에서도 코트 주머니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동림은 구두 끝으로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동양인은 몸을
우그리면서 경련했다.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른 쪽
눈도 찔러버릴 테다.
누, 누구 말이야?
그가 헐떡거리면서 물었다.
동림은 허리를 굽혀 만년필 끝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그것은 사정없이 목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이 만년필이 다 들어가기 전에 말해. 나를 한국에서 이곳으로
보낸 그자는 어디 있지. 미스터 Y라는 암호를 가진 그 한국놈
말이야. 그놈은 틀림없이 유럽에 와있어. 그렇지? 그놈이 있는
곳을 말해 봐!
펜 끝이 목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검붉은 피가 잉크에 배어
흘러나왔다.
내...... 내일...... 레오나르도 공항에.......
동양인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똑똑히 말해 봐! 알아들을 수 있게 똑똑히 말해 봐!
동림은 더 깊이 만년필을 찔러넣었다.
내일...... 3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해...... 아직 오지 않았어...... 내일 오후 3시.......
누가 어디서 온다는 거야?
그 사람이 한국에서.......
무슨 비행기야?
JAL기.......
틀림없나?
틀림없어...... 그만...... 살려줘요...... 제발.......
동림은 상대의 코트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빼냈다.
그자의 진짜 이름은 뭐지?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뱅커로 통하고 있습니다.
제발 살려줘요.......
살려주고 말고.
동림은 만년필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동양인은 몸부림치다가 차츰 움직임이 둔해져 갔다.
동림은 잠시도 그곳에서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짐을 들고
급히 방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데
프런트맨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가십니까?
동림은 트렁크를 흔들어보이며 히히하고 웃었다.
서두르면 더욱 의심을 살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호텔을 빠져나왔다. 마침 호텔 앞에는 빈 택시가 서있었다. 그는
택시에 올라탔다.
갑시다. 트레비 분수가 있는 쪽으로!
택시가 출발하자 호텔 안에서 벨맨이 한 명 뛰쳐 나왔다. 그는
멀리 사라져가는 택시를 향해 주먹을 흔들며 뭐라고 소리쳐댔다.
빈 택시라도 있었으면 그것을 집어타고 뒤쫓아갈 기세였지만 빈
택시가 나타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벨맨은 포기하고 도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벨맨인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프런트맨의 눈짓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프런트맨이 눈짓을 보내자 그는 즉시 5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505호실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주먹으로 방문을 쾅쾅
두르리자 안에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때 옆방에서
미국인 노부부가 나와 겁에 질린 얼굴로 505호에서 비명소리가
여러 번 났었다고 말해 주었다.
벨맨이 아래 층으로 내려왔을 때 잿빛머리의 그 동양계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런트맨이 노인이 택시를 타고 떠났다고
일러주었다. 벨맨이 밖으로 뛰여나갔을 때 그 노인이 탄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차량의 홍수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벨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프런트맨은 505호 실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빨리 올라가봐!
그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벨맨에게 말했다.
두 명의 벨맨이 마스터 키를 들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마스터키로 505호실 문을 열었을 때 동양인은 방문
앞에까지 기어와 있었다. 그가 기어온 곳의 카핏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프런트맨은 그 동양계 노인이 타고간 택시 번호를 외고
있었다.
노인을 트레비 분수 앞에 내려주고 골목을 빠져나온 젊은 택시
운전사는 무전기의 신호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차를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그의
택시 번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들고 거기에
응답했다.
제노바 호텔 앞에서 태운 손님, 지금 함께 있나?
아니다. 조금 전에 트레비 분수 앞에 내려주었다.
그 사람은 살인자다! 빨리 가봐!
나보고 그 사람을 잡으라는 거야?
아무튼 가봐! 그 사람이 거기에 있으면 미행할 수 있는
데까지 미행해 봐!
미행해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경찰이 보이면 즉각 체포하라고 말해줘.
운전사는 방향을 돌려 다시 트레비 분수 쪽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그 동양계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분수 주위에는 관광객들로 들끓고 있었다.
운전사는 무전으로 그 살인자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만년필에 참혹하게 찔린 동양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레오나르도...... 라는 한 마디였다.
경찰은 그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떤 행동을 취하기가
너무 막연했다.
트레비 분수에서 택시를 내린 동림은 다른 택시로 바꾸어 타고
역으로 향했다.
역 대합실 한쪽 구석에 한 시간쯤 앉아 있자 유무화의 모습이
보였다.
겨우 빠져나왔어요.
무화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미행은 없소?
미행을 따돌리느라고 이렇게 늦었어요.
황가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어요.
테베레 호텔에 예약은 돼 있었소?
네, 609호실에 투숙했어요.
그녀는 테베레 호텔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쪽지를 그에게
주었다.
그들은 어디에 투숙했소?
바로 옆방에 들었어요. 610호실에 투숙했어요. 몰래 빠져
나왔는데 그 외국인이 저를 발견하고 쫓아왔어요. 상관하지 않고
도망쳐 왔어요. 그쪽은 어떻게 됐어요?
그자는 지금쯤 아마 죽었을 거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해치웠어요. 만년필로.......
그들은 역 대합실을 나와 한참 걸어가다가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그들은 점심 식사를 시켰다.
그자한테서 들었는데...... 내일 오후 3시에 내 아들을
납치한 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할 거라고 했소.
JAL기편으로.......
사실일까요?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떻게 확인하죠?
그 검은 옷 입은 여자의 입을 열게하면 돼요.
그들은 피자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 외국인이 항상 붙어 있어서 쉽지 않을걸요.
그자를 유인해 내어 따로 떨어져 있게 하든가 그자를 먼저
없애버리든가 해야겠어요.
그녀는 동림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황가한테서 연락이 오면 그를 설득시키는데
시간이 또 필요할 거요.
어떻게 그 동양인을 죽였는지 말씀해 주세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듣고 싶어요.
그녀는 포크를 놓고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를
쏘아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가 그 동양인을 어떻게 죽였는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에 대해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야기가
별로 무섭지가 않았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그가 조금도 무섭게
생각되지 않앗다. 무섭게 생각되기는 커녕 오히려 해야할 일을
당연히 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윽고 그가 이야기를 모두 끝냈을 때 그의 결단력과 담대함에
그녀는 크게 감동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그처럼 선량하게 생긴
사람의 어디에 과연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는 잔인함과
용기가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소.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상대가 누구이든...... 정당한 일이 될 수
없어요......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한 일 아니예요?
그녀가 그의 행위를 두둔하려고 하자 그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지금까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사람을 적잖게 죽여왔어요. 월남전
때부터...... 사람을 죽이게 됐어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왜 나한테는 그 어쩔 수 없는 이유라는 것이 자꾸만
생기는 걸까요? 그게 내 운명일까요? 내가 내 과거를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기는 처음이오. 내 아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결코 자랑할 일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그에게 그의 과거를 들려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그의 과거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왠지
그녀에게만은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간, 파리.
네 명의 사나이들은 샹젤리제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막 점심 식사를 들고 있었다.
살레 부장과 브리앙 차장은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고 있었지만 노경감과 마형사는 벌써부터 양식에
질려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있었다.
설렁탕 생각이 간절한데요.
마형사의 중얼거림에 경감은 포크를 집어들었다.
먹어둬. 차츰 나아질 거야.
그들이 한국말로 자기끼리 대화를 나누자 살레 부장이 무슨
말인가 싶어 그들을 쳐다보았다. 브리앙 차장은 열심히 고기를
썰고 있었다.
참, 한국 유학생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더군요.
살레 부장이 생각난 듯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브리앙이 식사하다 말고 의자 위에 코트와 함께 놓아둔
르몽드지를 집어 여기저기 뒤적이더니 그것을 경감에게
내밀었다.
여깁니다. 한국에서 유학온 여학생인데 자루 속에 넣어져
세느강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경감은 신문을 받아들고 거기에 실린 젊은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낀 그 얼굴은 몹시 연약해 보였다.
쯧쯧......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와서 살해되다니, 정말
안 됐는데요.
마형사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같은 동포로서
볼 때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불어를 모르닌 내용을 알 수 있나. 영어로 번역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경감의 요청에 브리앙 차장은 그 기사를 영어로 바꾸어 재빨리
읽기 시작했다. 그는 불어 못지 않게 영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납치되어 살해된 모양입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 브리앙이 말했다.
마형사는 수사관의 본능으로, 피살된 오유린의 인적사항과
행방을 감춘 유무화의 인적사항을 수첩에다 적어넣었다. 한국
아가씨들이 한 명은 참혹하게 살해되었고 또 한 명은 행방을
감추었는데 같은 한국인으로서, 더구나 수사관의 입장에서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브리앙이 그 신문기사를 오려서 마형사에게
주었다.
우리 한국 유학생이 피살됐다니까 왠지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군요.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경감이 살레 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자 살레는 충분히
이핼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같은 국민이 피살됐는데 당연한 일이죠.
필요하다면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감은 굳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고 그 정도로 인사해
두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브리앙이 잠자코 밖으로 나가더니 다른
신문을 하나 사들고 돌아왔다. 르 휘가로지였다. 그 신문에도
한국 유학생 피살사건이 실려 있었는데 르몽드지에 실린 것보다
좀더 크고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피살자 외에 또
한 명의 한국 여성, 그러니까 유무화의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프랑스 경찰은 오유린의 피살을 전후해서 행방을 감춘 유무화를
찾고 있는데 그녀가 로마에서 하숙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어온
것을 포착, 인터폴과 이탈리아 경찰에 그녀를 수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 너무 불쌍한데요.
마형사가 오유린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하자 경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로마지역 인터폴 책임자인 눈치오 부장은 3시경에 심복인
카르딜레의 보고를 받았다.
제네바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피살자가 수배중인
트라이어드 간부 같다고 해서 병원 가봤습니다. 피살자는 병원에
운반되는 도중에 숨이 끊어졌는데 가보니까 수배중인 중국인
왕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끔직하게 살해된 것은 처음
봅니다. 범인은 만년필 하나로 왕을 해치웠습니다. 왼쪽 눈에
만년필에 찔린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목에 만년필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만년필 하나가 다 들어갈 때까지 그것을 목에 밀어
넣었더군요. 만년필로 해치운 것을 보면 범인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왕의 권총 케이스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인이 권총을 빼내간 것 같습니다.
눈치오 부장은 몇 올밖에 남지 않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범인은 도망쳤나?
네, 신원은 밝혀지지 않고 늙은 동양인 남자라는 것만
밝혀졌습니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지금 몽타즈를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갑자기 동양인들이 말썽을 부리고 있지? 잡아다가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다 집어넣으면 알맞을 것들이 말이야.
눈치오 부장은 동양인을 몹시 싫어했다. 흑인보다도 더
싫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을 제일 혐오하고 있었다.
트라이어드 간부가 살해됐으니 우리가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군.
네, 그렇습니다.
국제 마약조직인 트라이어드 간부가 살해됐으니 자연 수사가
국제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책상 위에는 다른 동양인들에 대한 수배
의뢰서가 도착되어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김명기라는 한국인에 대한 수배의뢰서였고, 다른 하나
역시 유무화라는 한국인 아가씨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제 트라이어드 간부인 왕가의 피살사건이
겹치게 된 것이다.
한국인 김명기와 유무화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부하들에게
수배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한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기 다른 사건의 관련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에 대한 수배를 의뢰해온 사람은 파리지역 책임자인
살레 부장이었다. 그는 살레 부장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데데하고 무례한 데가 있는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감정을
공적인 일에까지 끌여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눈치오 부장의
생각이었다.
이번에 피살된 중국인 왕가는 오래 전부터 1급 수배리스트에
올라 있는 마약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조직을 확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는
마약 외에 네 건의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눈치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국인 김명기에 대한
수배의뢰서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팩시밀리로 전송되어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김명기라는 인물의 사진과 함께 그가 중요한
마약사범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눈치오 부장은 이윽고 파리의 인터폴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그는 급하다고 말했다. 살레 부장은
외출중이었다. 급히 연락해줄 것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은지
10분쯤지나 살레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배중인 한국인 김명기가 혹시 트라이어드계 아닌가요?
눈치오는 설명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살레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고
네, 트라이어드계라기보다 거기에 관련이 되어 있지요. 하고
말했다.
내 직감이 맞군요.
눈치오는 살찐 턱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 아침 중국인 왕평이 살해됐습니다.
그래요?
살레 부장의 놀라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눈치오는 말을
이었다.
네, 만년필로 참혹하게 살해됐습니다.
만년필로요?!
왕평에 대해서는 살레 부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오래전부터 그 악한을 추적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범인은 도주했는데...... 동양인으로 밝혀졌습니다. 목격자가
있어서 지금 몽타즈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 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몽타즈가 작성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럴 게 아니라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로마에 직접 오시겠다는 겁니까?
네,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눈치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살레 부장이 당장 로마로 오겠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가 그렇게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꽤나 다급한
사정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파리 놈들이 이리로 오겠다는 거야. 서두르는 것이 뭐가 있는
모양이야.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
부장의 카르딜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생각난 듯
말했다.
왕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데 레오나르도라는
말이었답니다.
레오나르도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가리킨 말 같습니다.
공항에 누가 도착한다는 거야 아니면 떠난다는 거야?
시간은?
그런 건 말하지 않았답니다.
눈치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리에서 거구를 일으켰다.
그것만 가지고는 너무 막연해. 하지만 공항에 인원을 배치할
필요는 있겠지.
검은 장미는 초조해졌다. 왕으로부터 연락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정 연락처로 되어 있는 곳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무화가 도주한 바람에 문제는 심각해져 있었다.
왕에게 그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하는데 갑자기 그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잿빛머리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제시할 줄 모르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로보트 같은 인간이었다. 로마의 여인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더욱 가슴이 답답해왔다.
저 방에 가있어!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저 방에 가
있어!
그녀가 소리치자 사냥개가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밀로
610호실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가 아무리 모욕을 줘도 모욕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심지어 따귀를 갈겨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사냥개였다.
이년 잡히기만 해봐라.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말테야!
로마의 여인이 성난 암캐처럼 방안을 빙빙 돌아가고 있는데
옆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날쌔게
옆방으로 뛰어들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사냥개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쳐다보았다.
나...... 무화예요.
유무화의 목소리에 그녀는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어디 있지?
로마의 여인은 숨을 죽이고 물었다.
그건 알 필요없어요.
뭐라고? 너 지금 죽으려고 환장했니?
죽긴 왜 죽어. 난 살 거야.
그러지 말고 빨리 와. 지금이라도 오면 용서해줄 테니까 빨리
와. 유린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와.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어.
황가한테서 온 전화일 거야. 일부러 받지 않았어.
무서워서 못가겠어요. 그 남자를 보면 난 질식할 것 같아요.
무서울 것 없어. 이제라도 오면 용서해 주겠어. 빨리 와서
황가의 전화를 받아.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당신 같은 악마의 말을 믿느니
차라리 멀리 도망가겠어요.
그러면 오유린은 어떻게 되지? 유린을 죽게 내버려둘
셈이야?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지금까지는 그애 때문에 내가
곤혹을 치렀지만 이젠 그렇제 하지 못하겠어. 유린이 죽건 살건
난 모르겠어.
그래? 알았어. 그렇다면 좋아. 그렇다고 해서 네가 안전할 줄
아니? 넌 어디를 가든 우리 손을 벗어날 수 없어.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세계 전역에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넌 알아야 해. 오유린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될 거야.
너때문에.......
악마!
외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로마의 여인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협박이 더이상 먹혀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로부터 두 번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은 내 마음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무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왜 이해할 수 없어. 난 누구보다도 무화의 현재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이해해.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이짓을 하는 줄 알아? 전혀 그렇지
않아. 나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나도 하루 빨리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죽지 못해 이짓을
하고 있는 거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는 수
밖에 없어. 그러다가 기회를 봐서 탈출하는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무화를 아끼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무화도 당장은 괴롭겠지만 우선 시키는 대로 하는게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거야. 그것이 유린을 살릴 수 있고 무화도
구할 수 있는 길이야. 이 조직은 정말 무서운 조직이야. 단순한
범죄조직이 아니야. 같은 한국인으로서 무화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내 말대로 해.
그녀는 협박 대신 무화를 회유했다. 그것이 먹혀 들어갔는지
무화는 아까처럼 반발하지 않고 수그러든 태도를 보였다.
잘 알아들었어요.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 외국인을 내보내세요. 내 눈에 뜨지 않게 해줘요.
사실은 그 사람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에요.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한 난 거기 안 들어갈 거예요.
알았어. 당장 내보내겠어.
내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요.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지?
난 지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있어요.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멀리 보내버려요. 리스본쯤에 보내버려요.
알았어. 보내지.
내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어요. 그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거기에 가지
않겠어요.
로마의 여인은 무화가 이상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그 이상한 요구에 대해 곰곰 따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여유도 없었고, 어떻게 하든 무화를
빨리 돌아오게 하는데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화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지?
그 사람을 공항으로 보내세요. 그 사람을 여기서 만나서 그
사람이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물론 그 사람을
만나야겠지요. 하지만 그 기회를 이용해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공항에서 그 사람이 나를 해치든가
납치하려고 하면 나는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할 거예요.
공항에는 경찰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즉시 체포되고 말
거에요.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아야 해요.
지금 누구하고 있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야?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남자 친구예요. 그 친구가
공항에서 나를 지켜줄 거예요.
황금의 초생달은 어디 있지?
몰라요. 나보다도 당신들이 더 잘 알 거 아니예요?
알았어. 공항으로 보내겠어.
그리고 또 있어요.
또 뭐지?
그 남자를 보내고 나서 다른 남자를 끌여들여서는 안 돼.
당신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난 당신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나혼자 있을 테니까 빨리 와줘.
앞으로 나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문하지 말아요.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시는 협조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절대 건드리지 않겠어. 그대신 나도 요구조건이
있어.
뭐예요?
그 남자 친구를 여기에 데리고 오면 안 돼.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그 외국인을 빨리
공항으로 보내줘요.
통화를 끝내고 그녀는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잿빛머리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잿빛머리 사나이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모자와 코트를 들고 있어섰다.
압델, 비행기를 타는 척하다가 빠져나와야해. 공항에서
그애를 해칠 생각은 하지 마. 잘못하다가는 경찰에 체포되니까
그 애가 시키는 대로 해. 빠져나오는 대로 빨리 달려와 줘.
압델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는
밖으로 나갔다.
그때 무화는 동림과 함께 테베레 호텔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포폴로 호텔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호텔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맞은편 테베레 호텔의 정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윽고 잿빛머리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화는
재빨리 망원경을 동림에게 넘겼다. 동림은 망원경을 눈에다
갖다댔다. 잿빛머리 사나이가 막 택시에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망원경을 눈에서 거두었다.
떠났소.
제가 먼저 나가겠어요. 10분 후에 나오세요.
무화는 거침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동림은 그녀가 광장을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10분 후에 방을 나섰다.
호텔 밖으로 나온 그는 중절모를 푹 눌러쓴 다음 코트 주머니
속에 두 손을 깊이 찔러넣었다. 그는 광장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건물의 테라스 밑으로 해서 빙 둘러갔다. 될수록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이윽고 테베레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무화가 로비 라운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동림도 라운지로 가서 모자를 벗고
무화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라운지에는 별로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있자 호텔
앞에 대형 관광버스가 와닿더니 한떼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그 바람에 호텔 로비와
라운지에는 금방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프런트 계원들과
벨맨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무화와 동림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609호실과 610호실을 가로막고 있는 벽에는 필요할 때 두 방을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문이 달려 있었다. 로마의 여인은
610호 실에 들어가자마자 두 방을 통할 수 있게 그 문에
장치되어 있는 자물쇠를 열어놓았었다.
609호실 열쇠는 프런트에 있었다. 그것은 무화가 외출하면서
거기에 맡겨두었었다. 그녀는 프런트 계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 열쇠를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로마의 여인은 노크소리에 긴장했다. 노크소리는 609호실
문에서 나고 있었다. 610호실에 있던 그녀는 옆방과 통해 있는
문을 지나 609호실로 급히 들어갔다. 계속해서 노크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문으로 가만히 다가가서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놀랍게도 문 앞에는 무화가 서있었다. 지금 공항에
있어야 할 그녀가 방문 앞에 서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곰곰 따지고 있기에는 그녀는 너무
초조하고 다급했다. 문 앞에는 무화 혼자 서있는 것 같았다.
그녀 혼자라면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활짝 열지 않고 쇠줄 고리를 걸어놓은 상태에서 조금만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밖을 살펴보았다. 복도에는 무화 혼자
서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공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문고리를 벗기면서 물었다.
안에 들어가서 말하겠어. 비켜요.
무화가 거세게 문을 밀어젖히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었을 때 무화 뒤에
황금의 초생달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미처 행동을
취하기 전에 동림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정통으로
얼굴을 맞은 그녀는 한 바퀴 뒤로 구른 다음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동림이 그녀의 복부를 세게 걷어차는
바람에 그녀는 무릎을 꺾으며 엎어졌다.
그놈은 죽었어. 동양인 말이야. 내가 죽였어.
그녀는 황금의 초생달이 나직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동림은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해서 틀어놓았다.
유린이 죽었어! 유린을 살려내! 이 악마! 네년이 죽였지?
유린을 살려내란 말이야! 불쌍한 유린을 살려내!
무화가 갑자기 여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로마의
여인은 공포에 사로잡힌 눈으로 무화를 쳐다보았다.
세느강에서 시체가 발견됐어! 너희들이 유린을 죽여 강에다
버린거야! 천벌을 받아 마땅한 것들!
무화가 분노에 차서 저주를 퍼붓자 여인은 뒤쪽으로 몸을
끌고갔다. 그러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난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남자들이 그런 거야. 난
몰라.
동림은 무화를 밀어내고 여인을 옆방으로 끌고갔ㅁ다. 그리고
무화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 그는 그 방의 라디오를 또
크게 틀어놓았다.
바른대로 말해줘. 내 아들을 납치한 놈...... 나를 여기에
보낸 놈...... 나를 여기에 보낸 놈......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동림은 여인으로부터 떨어지면서 물었다.
난 몰라!
그녀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새 재크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이제 다 틀렸어! 당신은 죽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아!
우리한테 반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가르쳐 주겠어!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올 거야.
로마의 여인은 칼로 그를 위협하면서 말했다.
동림은 잠자코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걸 버려! 버리지 않으면 쏠 거야.
로마의 여인은 그를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카핏
위로 던졌다. 동림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권총 끝으로 그녀의
복부를 힘껏 찔렀다. 그녀는 짧게 신음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그놈은 어디 있지? 동양인이 죽기 전에 나한테 자백했어.
대답이 일치하지 않으면 넌 살아날 수 없어. 말해봐. 그놈은
어디 있어? 이속에 숨어 있나?
그는 더욱 세게 그녀의 복부를 찔렀다.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입을 벌렸다.
그놈이 로마에 온다는 말을 들었어. 언제 어떻게 오지?
몰라요. 정말 몰라요. 전 아무 것도 몰라요.
무화는 옆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옆방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안에서는 라디오 소리 외에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20분쯤 지났을 때 문이 열리고 동림이 허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극도로 지치고 피로한 모습이었다.
알아냈어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녀가
옆방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그는 그녀를 가로막으면서 문을
닫았다.
보면 안 돼...... 안 돼.......
그 여자...... 어떻게 됐어요?
그는 고개를 흔들다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면서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틈에 무화는 방문을 열고 옆방을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방바닥 위에 엎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목이 부러졌다.
하고 뒤에서 동림이 말했다. 그는 욕실 안에서 무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화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다가 가만히 방문을
닫았다.
동림은 휴지로 입을 닦고 나서 욕실에서 나왔다.
그 여자는 죽기 전에야 겨우 입을 열었어요.
잘 하셨다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는 무화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동양인 남자가 말한 게 맞아요. 그 여자도 그렇게
말했어요. 내일 오후 3시에 그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어요. 그자의 암호는 뱅커이고 이쪽에서 마중나갈
사람의 암호는 블랙 로즈...... 검은 장미 그 여자가 나가기로
돼있어요.
그가 차츰 허탈감에서 벗어나고 잇는 것이 무화의 눈에 뚜렷이
보였다.
그 여자가 죽었는데 어떡 하죠?
다행히 놈은 그 여자의 얼굴을 몰라요.
그럼 어떻게 만나죠?
미스터 Y라고 쓴 푯말을 들고 출구에 서있으면 그자가 접근할
거라고 했어요. 그자가 접근하면 암호로 확인하면 돼요. 무화,
당신이 블랙 로즈를 맡아봐요.
제가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결심한 듯
알았어요. 제가 한 번 해보겠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하고 말했다.
그 다음 스케줄은 이제부터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그때 방안의 전화벨이 울렸다. 무화가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머, 사장님!
음, 나야. 약속대로 와주었군.
그것은 황가의 목소리였다.
아침에 왔는걸요.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걸었더니 받질 않더군. 어디 갔다
왔지?
거리가 너무 좋아서 마냥 돌아다니다 왔어요.
그래 지금 혼자 있나?
혼자서 사낭님을 기다리지 누구와 함께 기다리겠어요?
혹시 수상한 사람이 미행했다거나 주위에 어슬렁거리지
않았어?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사장님, 빨리 만나요. 뵙고
싶어요.
그렇게 나를 보고 싶나?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잖아요.
지금 그리 가지.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저기.......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당황해서
동림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한테서 온 전화예요. 10분 안에 이리로 온대요.
어떡하죠?
차라리 잘 됐는지도 몰라요. 그를 설득시키려면 시체를 보여
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 안에 공항에 나갔던 외국인 돌아오면 어떡 하죠?
그 자의 이름은 압델이요. 공항에 갔다 오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거요. 그 안에 어떤 결정을 봐야겠지.
동림은 욕실로 숨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마침내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무화는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 다음 문을 열었다.
눈 앞에는 황씨가 서있었다. 불안과 반가움이 엇갈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 차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이 그만 일그러지고
말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휘둘러보던 그는 비로소 안심이 가는지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안 돼요. 이러지 말아요.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그는 코트를 벗고 그녀를 다시
껴안으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이래?
그는 굶주린 야수처럼 그녀에게 덤벼들어 어거지로 그녀의
입을 덮쳤다. 그때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이 와 닿았다.
그 아가씨를 풀어줘.
뒤에서 들려오는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황가가 소스라치게
놀라 무화를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꼼짝 마! 손을 들고 의자에 가서 앉아!
그는 자기를 겨누고 있는 총구와 낯선 남자를 보았다. 총을
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의 빛이 서려 있었다.
황가는 절망적인 눈으로 무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자 다리가 후들거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손을 쳐들고 의자에 가서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술이 말라붙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권총을 든
사나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황표씨, 우리는 초면인데 나는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야.
금방이라도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나올 것만 같아 그는 무서운
나머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화! 이럴 수가 있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무화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그럼 일당이란 말이야?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거에요. 죽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여기 이분은 살인전문가예요.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의자 밑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면서 두 손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살려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를 죽이면 돈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돈은 얼마나 남았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5백만 달러 넘게 남아 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돈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꼴보기 싫으니까 일어나 앉아.
황가는 심하게 경련하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표씨, 내 말을 잘 들어요.
갑자기 동림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황가는 숨을 죽이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은 유무화씨야. 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난 당신을 죽였을 거야.
황가는 무슨 말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요. 그걸 알려면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겠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무화씨가 할 거요. 하짐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길게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을 설득시킬 시간도 없어요. 무화씨의 말을 듣고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시오.
동림의 무화를 돌아보자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우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면서 요령있게 이야기해 나갔다. 유린이 납치된 이야기를
말할 때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마침내 유린이 세느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그 울음은 백 마디의 말보다도 훨씬 큰 효과를
황가에게 안겨준 것 같았다.
그 놈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들입니다. 하고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동양인을 살해한 부분에 대해서 동림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황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왕평이라는 자로 로마 지역 책임자입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을 관할하고 있는 아주 잔인한 놈입니다.
그자와 그자를 돕고 있는 한국 출신 여자가 이 지역에서 가장
악명이 높습니다.
그 여자의 암호가 뭐요?
블랙 로즈라고 합니다.
그 여자도 내가 제거했소.
동림이 너무 간단히 말했기 때문에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저 방에 들어가봐요. 거기에 그 여자가 누워 있으니까.
황가가 의혹에 찬 얼굴로 옆방으로 건너갔을 때 동림은 굳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황가가 도망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황가는 창백하게 질려서 돌아왔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는 신뢰와 복종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블랙 로즈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림은 더이상 권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황가 역시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동림은 그에게 다가가 담배를
권한 다음 거기에 불까지 붙여주었다.
나는...... 내 아들만 찾을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어요...... 그애만 찾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내 자신도 버릴 수
있어요...... 더이상 버릴 것도 없지만.......
선생님은 너무 희생이 커요.
무화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동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나보다 무화씨의 희생이 너무 커요. 무화씨는 순전히 나를
위해서 지금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예요. 무화씨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아마 황씨 당신까지 죽였을
거고, 결국은 아이도 찾지 못한 채 개죽음 당하고 말았을거요.
무화씨는 용기있고...... 천사 같은 여자요.
정말 그렇군요. 무화양은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두 분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도망다니는데
지쳤습니다. 더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맞서 싸우겠습니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고 동지까지
얻었으니까요.
황가가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
│ 4.유인 │
└────────────────────────────┘

파리 지역 인터폴 책임자인 살레 부장은 비행기편으로 로마로
날아왔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 그는 로마지역 인터폴 책임자인
눈치오 부장의 사무실에 나타났는데 혼자 온 게 아니라 마치
조직의 보스처럼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섰다.
살레 부장의 직속 부하인 브리앙 차장과 여형사 바넥은
눈누치오 부장도 안면이 있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꾀죄죄하게 생긴 다른 두 사람은 처음 보는 동양인들이었다.
동양인을 싫어하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살레 부장으로부터 그 동양인들이 헤로인
2킬로그램의 행방을 쫓아 한국에서 날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적잖게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게 왕평을 살해한 동양인의 몽타즈입니다.
눈치오는 살레 앞에 조금 전에 완성된 몽타즈를 내놓았다.
만년필 하나로 왕평을 살해한 자의 모습치고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렇군요.
하고 살레도 동감을 표시했다.
경감은 뚫어지게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마형사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늙은 얼굴이긴 하지만 어쩐지 추동림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경감은 주머니 속에서 추동림의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몽타즈와 나란히 놓았다.
이 얼굴을 변장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보니까 비슷한데요.
살레와 눈치오는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앙이 몽타즈를 한
장 꺼냈다. 그것은 파리 교외에 있는 레소레 호텔에 투숙했던
김명기라는 한국인의 몽타즈였다.
수사관들은 서로 다른 두 몽타즈와 한 장의 사진을 앞에 놓고
거기서 연관성을 찾으려고 한 동안 숨을 죽인 채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치오는 몽타즈 전문가를 불러들였다.
그는 탁자 위에 늘어놓은 것들을 들여다보더니
이건 동일 인물입니다.
하고 단정했다. 그는 사진을 가리키면서 덧붙여 말했다.
이 몽타즈들은 이 얼굴을 변장시킨 거군요.
살레 부장이 노경감을 쳐다보았다. 경감의 큰 코가
씰룩거렸다.
어떻게 보십니까?
동일 인물이 틀림없다면...... 그는 로마에서 신분을
바꾼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늙은 사람으로 분장했다면
김명기라는 여권으로는 안 될 겁니다. 거기에 맞는 여권을
사용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경감은 속으로 동림의 위장술에 적잖게
놀랐다.
그렇다면 수사가 어려워지겠군요?
살레가 물었다.
그렇죠. 새 위조여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으니까요.
그자는 매우 기민한 데가 있는 모양이지요?
눈치오가 눈을 꿈벅이며 물었다.
경찰이 바짝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는 파리 비상망을 벗어날 때 이미 새 인물로 변장한 것
같습니다.
눈치오가 답답하다는 듯 상체를 움직였다.
그자가 파리는 벗어났겠지만 로마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로마를 벗어났다 해도 이탈리아에서는 쉽게 탈출할 수
없을 겁니다. 로마 경찰은 신고를 접수하고 즉시 로마 일원을
봉쇄했습니다. 신고도 사건발생 직후에 접수했습니다. 그자의
신분을 모르지만 이 몽타즈는 꽤 정확한 겁니다. 호텔 직원들과
그자를 트레비 분수까지 태워다준 택시 운전사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작성한 거니까요. 모든 숙박업소와 레스토랑, 카페에까지
이 몽타즈를 배부해 놓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는 로마 시내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말하고 나서 눈치오는 잠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조직간의 마약을 둘러싼 싸움
아닌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경감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을 때 눈치오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카르딜레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고 나더니 눈치오의 귀에다 대고
이탈리아 말로 재빨리 뭐라고 속삭였다. 눈치오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이윽고 카르딜레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카르딜레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피살자가 죽은 왕평의 일당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테베레 호텔에 도착했을 때 609호실은 로마 경찰 수사
요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피살체는 그때까지 치워지지 않고 현장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두 방을 가로 막고 있는 사잇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사체는
610호실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목이 부러졌습니다.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 사나이가 말했다. 이탈리아 말을
눈치오가 영어로 통역해 주었다. 그는 얼굴을 볼 수 있게 시체를
바로 눕혔다.
이 여자도 수배리스트에 올라 있던 인물입니다. 한국
출신으로...... 블랙 로즈라는 암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출신이라는 말에 노경감과 마형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한국 여자가 어떻게 하다가 유럽에까지 와서 마약범죄자가 되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까. 그것은 자존심 상하고 우울한
일이었다.
이 여자라면 나도 기억이 납니다. 블랙 로즈...... 기억이
납니다. 하고 살레 부장이 말했다.
그런데 이 방 주인은 이 여자가 아닙니다. 숙박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니까 유무화라는 한국 여자가 투숙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피살자가 얻은 방은 이 방이 아니라 이
옆방입니다.
노경감과 살레 부장은 약속이나 한 듯 쳐다보았다.
유무화라면 피살된 오유린의 친구 아닙니까?
마형사가 흥분해서 물었다.
수배의뢰를 받은 바로 그 아가씨입니다.
눈치오가 살레 부장을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파리의 한국 유학생 유무화는 이로써 두 건의 살인사건에
관련이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그 아가씨 짓일까요?
살레가 눈치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목을 부러뜨린 걸 봐서는 공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자
힘으로는 저렇게 죽일 수가 없습니다.
눈치오의 말에 살레와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범이 혹시 추동림이 아닐까요?
마형사가 경감만 알아들을 수 있게 한국말로 물었다. 경감은
거기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 같은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날짜에 로마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우선 그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또 하나는 그들이 트라이어드 대원
살해사건에 관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오유린의 죽음과 유무화가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
수사관들의 놀라움은 자연 클 수밖에 없었다.
유무화와 추동림이 함께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얼마 후에 사실로 드러났다. 테베레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포폴로 광장 일대의 숙박업소와 레스토랑, 술집들을 이잡듯이
뒤지던 이탈리아 경찰이 마침내 포폴로 호텔에서 두 사람이
투숙한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호텔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테베레 호텔과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두
동양인 남녀가 투숙한 방은 407호실로 숙박카드에는 유무화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경찰이 제노바 호텔에서 왕평을 살해하고 도주한 늙은 동양인
남자의 몽타즈를 보여주자 포폴로 호텔의 프런트 계원은 금방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여기에 나타난 것은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젊은
동양인 아가씨하고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 남자는 로비에 서
있었고 그 아가씨가 여기 와서 방값을 치르고 숙박카드를
적었습니다. 하루만 숙박하겠다고 했는데 가진 짐도 없었습니다.
3시경에 함께 나가더니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은 407호실에 들어가보았다. 방안은 텅비어 있었고,
그들이 남긴 것이라고는 재떨이에 들어 있는 몇 개의
담배꽁초뿐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테베레 호텔을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노경감의 말에 유럽의 수사관들은 같은 생각이라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인들은 왜 트라이어드 대원들을 살해했을까요?
그런 질문을 던진 사람은 뜻밖에도 살레 부장의 부하이자
애인인 바넥이었다. 그 물음에 간부들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직내의 암투이겠지. 싯가 1천만 달러어치의 헤로인이라면
목숨을 내걸고 덤벼들만 하지 않을까요?
눈치오의 심복인 카르딜레가 말했다.
마형사가 경감을 쳐다보았다. 사실을 털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조직내의 암투는 아닐 겁니다. 황금의 초생달은 트라이어드
소속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가능한 한 생포해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그들을 사살해서는 안
됩니다.
눈치오의 얼굴에 의혹의 빛과 함께 불쾌감이 나타났다. 모두가
의아한 듯 한국에서 온 수사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와서 사건에 휘말리고 있는
겁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소박한
가장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경감은 영어로
추동림이 어떻게 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울한 기분에
접어들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 있는 셈이지요.
마침내 그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실내는 물을 끼얹은 듯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불쌍해요.
침묵을 깨고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여형사 바넥이었다. 그녀는
감동어린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요. 얼마나
용기있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에요. 아들을 찾으려는 그 집념은
정말 눈물겨워요. 그 사람을 체포할 게 아니라 그가 아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그건 박애주의자나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라 말한 사람은 눈치오 부장이었다. 그는 입가에
냉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한테 관심이 있는 것은 2킬로그램이나 되는
헤로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를 체포해서 그걸 회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살해한 살인범을 잡아야 합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은 로마에서 하루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은 헤로인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자명해집니다. 초점을
흐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한국에서 납치됐으니까 한국
경찰이 알아서 해결할 일입니다.
그의 말은 매우 냉정하면서도 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바넥
외에 거기에 이의를 달고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레는
바넥을 지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는 잠자코 담배만 뻑뻑 빨아댔다.
유무화라는 아가씨한테도 말못할 사정이 있습니까?
눈치오가 경감을 쳐다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그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파리에 와서 그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아가씨는 필요에 따라서는 사살해도 되겠군요.
진정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농담치고는 너무 심하고
모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경감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오가 다시 말했다.
왕평이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가리킨 말이 아닌가 생각하고 공항에 특별히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를 내렸어요. 사건 직후부터 우리
요원들을 공항에 투입시켜 특히 동양인 남자를 주의해서
체크하도록 일렀습니다.
단지 그 말뿐이었나요? 좀더 구체적인 말은 없었나요?
살레가 물었다.
그 말뿐이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너무 막연하군요. 하지만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유무화라는 아가씨의 사진도 복사해서
공항에 배포해 두도록 하죠.
눈치오는 살레가 내놓은 유무화의 사진을 집어들고 힐끗
보더니 그것을 카르딜레에게 넘겼다.
1월 19일 오후 3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도쿄발 로마행 JAL 415편기는 예정대로 오후 3시 정각에 그
거대한 보잉 747기체를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의 활주로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긴 여행에 지친 모습의 승객들이 출구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승객들 가운데는 유난히 동양인들, 특히 일본인들이
많았다.
공항 구내의 여기저기에서는 사복차림의 이탈리아 경찰 수사
요원들이 날카롭게 눈들을 굴리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은 사람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출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출구 앞에는 마중나온 사람들이 많이
몰려 서있었는데, 그 중에는 이름을 쓴 푯말을 높이 치켜들고
서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 푯말 가운데에는 Mr.
Y 라고 쓴 것도 보였다.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푯말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그것을 아래 위로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Mr. Y라고 쓴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10대 소녀였다.
그녀 곁에는 같은 금발머리의 젊은 청년이 붙어 서있었다.
그들은 등에 작은 배낭을 지고 있었고, 차림새가 매우 초라해
보였지만 젊은이들답게 표정만은 밝아보였다. 그들은 연인
사이인 듯 허리를 껴안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푯말을
아래위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한국인에 특별히 주의하고 있었다. 현재 두 건의
살인사건에 모두 한국인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출입국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수사진이 관심을 두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3시에 도착한 일본 항공 415편기에서 내린 승객들 가운데
한국인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뚱뚱한
남자였다. 그들은 동행이 아닌 듯 따로따로 행동했다.
그들이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즉시 그들의 뒤에는 이탈리아
형사들이 몰래 따라붙었다.
뚱뚱한 한국인 중년 남자는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면서 출구를
빠져나왔다. 다른 손에는 슈트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머리통을 덮고 있었고, 갈색 빛깔이 도는
안경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출구를 빠져나오면서 그는 아래
위로 흔들리고 있는 푯말들을 열심히 살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Mr. Y라고 쓴 푯말에 머물렀다. 그가 다가서자 금발의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영어로 말을 걸었다.
미스터 Y인가요?
한국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걸어갔다. 젊은이들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한국인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대합실 구석 쪽으로 걸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의혹에 찬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누구지?
미스터 Y가 틀림없나요?
금발의 소녀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영어로 묻는다.
그래. 난 미스터 Y야.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지?
그녀는 잠자코 그에게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누가 전해 주랬어요.
누가?
몰라요.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내젓고 나서는 홱 돌아서서
청년의 팔짱을 끼고 가버렸다. 편지봉투는 봉해져 있었다.
한국인은 봉투를 뜯어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꺼내보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뱅커에게. 사정이 있어 대신 사람을 보냈습니다. 편지를 읽은
즉시 택시를 타고 밀라노 거리와 팔레르모 거리가 교차하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팔레르모라고 하는 카페가 있으니,
거기서 5시 정각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블랙 로즈로부터.
편지 내용은 한글로 적혀 있었다. 한국인은 화가 났는지
그것을 구겨쥐었다. 그는 대합실 안에서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서성거리다가 구겨쥔 편지를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
나서 대합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택시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노란 색
택시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트렁크를 뒷자리에 올려놓고 나서
앞자리에 올라 앉았다. 그리고 운전사에게 능숙한 영어로
목적지를 말했다. 운전사는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회색 피아트에서 한 사람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동양계의 남자였다.
주차장을 급히 빠져나온 그는 공중전화 부스 속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 황인데...... 뱅커가 나타났어. 방금 택시를 타고
출발했어. 변장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어. 동행은 없고 혼자였어.
여긴 경비가 삼엄해. 미행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 확인해 보겠어.
회색 피아트는 어느 새 그의 뒤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차는 렌트카였다. 운전사가 딸린 차였기 때문에 비싸게
돈을 주고 빈 것이었다. 중년의 운전사는 과묵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고객의 요구에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차를
몰아주었다.
차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에는 노란 색의 택시를 쫓는
미행 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접어들자 노란 색 택시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가는 차가 다른 차들과 뚜렷이 분간되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녹색의 소형 피아트였다. 그것은 분명히 미행 차였다.
녹색의 피아트 안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세 명 모두
남자였다. 따라잡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미행만 하는
것으로 보아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다.
40분쯤 지나 노란 색 택시는 밀라노 거리와 팔레르모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을 지나 멈춰섰다.
택시에서 내린 뚱뚱한 한국인은 손목시계를 먼저
들여다보았다. 4시 30분 조금 전이었다. 5시까지는 아직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모퉁이에 서서 교차로 주위에 포진해 있는
건물들을 휘둘러보았다. 카페 팔레르모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 팔레르모는 길 건너에 자리잡고 있었다.
금발의 젊은 남녀는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거친 인상의
이탈리아 수사관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공항 빌딩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경비실에 연행되어 와있었다.
돈 한푼도 없이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단 말이지?
뚱뚱한 몸집의 수사관이 두개의 여권을 뒤적이며 물었다.
그것들은 미국 여권이었다.
무전여행한 지 1년이 넘었는 걸요. 그게 뭐 잘못됐나요?
청년이 상체를 흔들며 반항적으로 말했다.
좋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아까 그 사람...... Mr. Y라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한테 뭘 주었지? 숨기지 말고 말해봐.
편지를 전해 줬는데요.
모르겠는데요. 부탁을 받고 전해 주기만 했기 때문에 무슨
편지인지는 모릅니다.
누구한테 부탁받은 거야?
그들은 경찰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그런 부탁을 해온 사람은 어느 젊은 동양인
아가씨였다. 그녀는 Mr. Y라고 쓴 푯말을 들고 공항에 나가 오후
3시에 도착하는 도쿄발 로마행 JAL기 승객들 가운데서 Mr. Y라는
사람을 찾은 다음 그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댓가로 1백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들은 두말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혹시 그 여자, 이렇게 생기지 않았나?
그들 앞에 사진 한 장이 디밀어졌다.
네, 바로 이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틀림없습니다!
수사관은 즉시 인터폴 책임자인 눈치오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후사정을 이야기한 다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한국인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 이대휘,
여권번호 100976×, 남자, 1938년 9월 5일생, 발행지는 서울,
신장 173센티...... 지금 미행 중이니까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체포할까요, 아니면.......
체포하면 안 돼. 일당을 모두 체포해야 하니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체포하면 안 돼. 인원을 더 보강시키고, 지금 있는 곳을
알려줘. 내가 나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금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눈치오 부장은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출동준비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손님들은 무슨 말인가 하고 눈치오 부장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이탈리아인은 일어서서 그러지 않아도 튀어나온 배를 더욱
앞으로 내밀었다.
왕평이 죽으면서 레오나르도라고 한 말뜻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3시에 도착한 도쿄발 로마행 JAL기에서 내린 승객
가운데 이대휘라는 한국인이 있었는데 유무화가 그 사람과
접선을 시도한 것이 포착됐습니다. 지금 우리요원이 이대휘라는
자를 미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고 받은 내용을 손님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왕평이 죽으면서 한 말은 오늘 오후 3시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그 인물이 도착한다는 말이었군요.
살레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눈치오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꾸했다.
죽으면서 유언으로 남길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브리앙 차장이었다.
이번 사건에 한국인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공항에다 출입국하는 사람들 가운데 동양인들, 그중에서 특히
한국인들을 주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일단
미행할 수 있는 데까지 미행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이대휘라는 인물도 걸려들지 않았을 겁니다.
눈치오 부장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리더니 수화기가 눈치오 부장에게 넘겨졌다.
한국인 수사관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눈치오 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빠른 이탈리아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Mr. Y는 밀라노 거리와 팔레르모 거리의 교차 구역에서
택시를 내려 지금 카페 팔레르모에 들어갔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심복 카르딜레의 목소리에 눈치오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단단히 지켜! 틀림없이 그 여자와 만날 거야!
눈치오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출동해야겠습니다. Mr. Y가 지금 팔레르모라는 카페에
있습니다.
그는이대휘를 Mr. Y라고 불렀다. 이대휘라는 이름보다는 Mr.
Y라고 부르는 것이 간단해서 좋은 모양이었다.
Mr. Y는 카페 팔레르모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앞에 커피잔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몹시 피곤했지만 그보다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Mr.Y!
바텐이 수화기를 쳐들어보이며 손님들을 향해 큰 소리로
불었다. Mr. Y는 재빨리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블랙로즈예요. 당신의 암호를 말해 보세요.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뱅커.......
그는 화가 나서 말했다.
반가와요. 오시느라고 수고 많았어요.
왜 나타나지는 않고 전화만 해대는 거지?
그는 볼멘 소리로 물었다.
미안해요. 그럴 이유가 있어서요. 미행이 있으니까 빨리
피하세요. 만나려고 했지만 미행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누가 미행하는 거지?
경찰일 거예요.
경찰이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지?
지금 그럴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어요. 내다보시면 알
거예요. 녹색의 승용차가 보일 거예요. 그게 미행 차예요. 빨리
피하세요.
어디로 피하지?
그는 당황해서 물었다.
알아서 하세요. 한 시간 후, 아니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가 좋겠어요. 에제트라 광장으로 가세요. 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요. 택시 운전사한테 말하면 다 알아요. 그 광장에
가면 베르나르도라는 카페가 있어요. 지금이 4시 45분. 늦어도
7시까지는 그리로 오세요. 거기서 만나기로 해요. 7시까지
오시지 않으면 경찰에 체포된 걸로 알고 포기하겠어요. 에제트라
광장의 베르나르도 카페예요.
뱅커는 몹시 당황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의 미행을 당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코너를 막 돌아선
곳에 녹색의 소형 승용차가 한 대 주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막 한 남자가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젊은 남자였다.
건널목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길을 건너오려는 것 같았다.
뱅커는 당황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트렁크와 슈트케이스를 들고 카운터 쪽으로 가면서 실내를
살폈다. 뒷문은 없는 것 같았다. 뒷문이 있다 해도 이미 경찰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문을 통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짐을 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가 놓여 있는 칸으로 들어가 안으로 문을 잠근 다음 먼저
머리에 쓰고 있는 가발을 벗었다. 안경도 벗었다. 코트를 벗고
대신 밤색 세무점퍼를 트렁크에서 꺼내 입었다. 콧수염을 뗄
때는 고통으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가장 중요한 것들만 품
속에 간직하고 트렁크도 슈트케이스도 모두 버렸다.
밖으로 나오자 얼굴이 쭈글쭈글한 남자가 중얼거리면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이 취한 것 같았다. 그가
지퍼를 올리면서 뱅커를 쳐다보았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다. 뱅커는 10달러짜리 다섯 장을 꺼내 펴보이면서 낡은
털모자를 가리켰다.
그걸 팔아라.
늙은 이탈리아 남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영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아는 것 같았다. 눈을
꿈벅거리면서 털모자를 천천히 벗는다.
고맙다.
뱅커는 모자를 낚아챈 다음 달러를 늙은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급히 화장실을 나왔다.
아까 녹색의 승용차에서 내렸던 사나이는 카페 출입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마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뱅커가 밖으로 나가자 그 사나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뱅커는
그의 시선을 묵살하고 그대로 걸어가다가 굴러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쳐들었다. 택시를 타면서 보니 그 사나이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한산하던 카페 팔레르모는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뒤늦게 카페에 도착한 눈치오 부장 일행은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 한국인이 정말 그렇게 변장하고 도망칠 줄은 몰랐습니다.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카르딜레가 창백한 얼굴로 변명하듯 말하자 눈치오는 그를
흘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닥쳐! 눈앞에 지나가는데 멍청히 보고만 있었다는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 말이야!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떠드는 거야?!
카르딜레는 모욕감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탈리아 경찰이 한방 먹었군요.
마형사의 속삭이는 말에 노경감은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뱅커는 한 번 더 변장했다. 자신이 수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망칠 때의 모습으로 거리를 나돌아 다닌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7시 10분 전에 그는 다소 안정된 모습으로 에제트라 광장에
있는 카페 베르나르도에 들어섰다. 그는 검은 옷차림이었다.
머리에는 검정색 캡을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빈 자리에 앉아 맥주를 한 병 시켰다. 돌아다니면서
살폈는데 미행은 더이상 없는 것 같았다. 이대휘라는 이름으로
된 한국 여권은 앞으로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분으로
가지고 온 또 하나의 위조여권이 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것은 일본 여권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처음부터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두어 군데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모두 불통이었다. 결국 불안한 대로나마 암호명 블랙
로즈에게 모든 것을 의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차들이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광장의 분수대에서는 물이
뿜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Mr. Y를 찾는 전화가 있었다. 그는
재빨리 가서 전화를 받았다.
블랙 로즈예요. 당신은?
뱅커.......
그는 화가 치미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미행은 없었나요?
없어.
용케 빠져나왔군요. 난 체포될 줄 알았는데.......
체포되기를 바랐나?
아뇨. 그랬다면 왜 제가 전화했겠어요.
왜 나타나지 않고 전화질만 해대는 거지? 빨리 만나야 할 거
아니야?
그는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블랙 로즈인가 뭔가를
만나면 따귀를 한대 갈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0분 안에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어떻게 알아보죠?
검정색 코트에다 검정색 캡을 쓰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알겠어요. 저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을 거예요.
여자는 냉정하게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뱅커는 초조하게 출입구 쪽을 바라보면서 10분을 기다렸다.
10분이 지났을 때 동양계의 젊은 여자의 모습이 카페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그는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쏘아보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구면인 듯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는 웃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블랙 로즈예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푸르스름한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자주색의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멋지고 세련된
모습의 아가씨였다.
난 뱅커야.
그는 어깨를 웅크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몸집에 비해
목소리는 유난히 작았다. 그는 첫 마디부터 반말이었다. 그 말투
속에는 난폭함이 배어 있었다.
지금 상황이 몹시 나빠져 있어요. 왕이 살해되고.......
왕이 살해됐다구?
그녀는 신문을 꺼내보였다. 이탈리아 신문이기 때문에 내용은
읽을 수 없었지만 왕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피살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을 본
것은 3년 전 홍콩에서였다. 그는 왕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해봤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누가 죽였지?
이탈리아 경찰이 사살했어요. 몇 사람이 체포되고......
아무튼 쑥밭이 됐어요.
그랬었군. 그래서 전화를 안 받는군. 언제 죽었지?
어제 피살됐어요. 그래서 조심하고 있는 거예요. 저도 상당히
위험한 처지예요. 나와서는 안 되는데 나온 거예요. 경찰이 쫙
깔렸어요. 공항에서부터 미행당한 건 그때문이에요.
이탈리아 경찰이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지?
체포된 누군가가 불었겠지요. 아니면 왕이 죽으면서 입을
열었을지도 모르죠.
뱅커는 비로소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은 무사히 인수했지?
네, 전량 인수했어요.
황가 놈은 어떻게 됐지?
뱅커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그자가 말썽이에요. 로마에서 만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지금 밀라노에 있어요.
밀라노에?
어젯밤 밀라노로 떠났어요. 열차로 밀라노까지는 9시간
걸려요.
밀라노 어디에 있지?
소렌토라는 호텔에 묵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 또 옮길지
몰라요. 그자는 몹시 조심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그자의 동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지?
뱅커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자의 보디가드겸 가이드를 맡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포섭했어요. 그 사람의 약점을 잡고 있기 때문에 꼼짝없이 우리
지시를 따르고 있어요.
그 사람 이름이 뭐지?
박동주라고 해요. 원래는 화가인데 지금은 그림을 포기하고
한국인들을 상대로 관광 안내를 맡고 있대요. 보헤미안 같은
사람이죠. 그 사람의 애인을 우리가 인질로 삼고 있으니까
꼼짝없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게 돼있어요.
황금의 초생달은 어떻게 됐지?
그는 경찰에 체포됐어요. 그 사람한테는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게 좋을 거예요.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치 상대방을
탐색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 남자는 자나깨나 자기 자식 이야기만 했어요. 부정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어요. 그 사람 아들은 어떻게
됐나요?
그건 알 필요없어.
그는 뚫어질 듯 그녀를 응시했다. 블랙 로즈는 거기에 대해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이제 황가를 처리할 사람은 뱅커 당신밖에 없어요.
위험하지만 적극 협조해 드리겠어요. 어떡 하실 거예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글라스를 내려다보았다. 글라스에는
맥주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마저 마시고
나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라노행 열차는 몇 시에 있지?
9시 25분에 있어요. 그 다음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있어요.
로마를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거에요. 저도 곧 떠날 거예요.
로마에는 더이상 있을 수 없어요. 전 경찰력이 동원된 것
같아요.
밀라노에 가겠어. 그자를 잡아 돈을 회수해야 해. 나와 함께
가도록 해. 침대칸은 있겠지?
네, 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린 함께 행동하면 안 돼요. 난
수배받고 있기 때문에 저하고 함께 행동하면 당신까지 위험하게
돼요. 함께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밀라노에서 만나기로
해요.
당황한 기색으로 말하는 그녀를 그는 지그시 쏘아보았다.
나도 수배받고 있는 신세야. 이건 명령이야. 나하고 함께
밀라노에 가는 거야.
블랙 로즈는 곤혹스러운 표정이다가 이내 경심한 듯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럼 있다가 9시 정각에 테르미나역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해요. 전화국 쪽에서 만나요. 침대칸 두 장을
사두세요.
지금부터 함께 행동하는 거야.
안 돼요!
이번에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로마를 떠나려면 준비할 게 많아요. 맨 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손을 뻗어 뱅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그는 더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카페 밖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 맥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안 돼! 그건 안 돼요! 위험해요!
무화의 이야기를 듣고 난 동림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왔다.
황가도 고래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무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만일 제가 함께 가지 않으면 뱅커는 나를 의심할 거예요.
이미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물론 위험한 줄은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어요.
그녀의 용기에 남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다. 동림의
반대를 그녀의 다음 말이 막았다.
뱅커한테 인하에 대해서 물었지만 한 마디로 묵살당하고
말았어요. 저를 노려보면서 거기에 대해서 알필요 없다고
말했어요. 밀라노까지는 9시간 걸리니까 그 동안에 인하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겠어요. 아주 좋은 기회예요.
동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더이상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경찰이
쫓아올 테니까요.
그녀가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말을 받아
황가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난 안전해요. 난 아직 경찰 수사망에
노출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 특히 당신은 더 위험해요.
황가가 턱으로 동림을 가리켰다. 동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화를 바라보았다.
무화씨가 더 위험해요. 난 아직 이용할 수 있는 새 여권이
있지만 무화씨는 다른 여권이 없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여권으로는 검문에 걸리고 말겁니다. 경찰은 이미 테베레
호텔에서 무화씨의 인적사항을 알아냈을 겁니다. 새 신분증이
없이는 밀라노에 닿기도 전에 체포될지 모릅니다. 새 신분증을
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기 전에는 로마를 빠져나가기가
힘들 겁니다.
저한텐 새 신분증이 없어요. 하지만 갈 수 있을 거예요.
불가능해요.
황가가 말했다. 그는 일어섰다.
새 신분증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없으니까.
황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고 나서 10분쯤
기다리고 있자 전화벨이 울렸다. 황가는 냉큼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위조여권이 하나 필요해요. 20대에서 30대의
동양계 여자한테 어울리는 여권이 필요해요.
그는 영어로 말했다.
언제까지 필요해요?
지금 당장! 30분 이내로 필요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상대방이 말했다.
가능한지 한 번 알아보겠어요. 기다려요.
전화를 끊고 10분쯤 기다리니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조금 전의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기 때문에 정교하게 만들어줄 수가
없대요.
만들어줘야 해요. 정교하지 않아도 돼요.
오랫동안 사용할 게 아닌가요?
그렇소. 로마를 빠져나가는데 필요해서 그래요.
그런데 비싸요. 급하게 주문하는 것일수록 비싸요.
얼마?
2천은 줘야해요.
알았어요. 빨리 좀 해줘요.
그리고 1천이 더 필요해요. 그건 구전이에요.
모두해서 3천이란 말이지? 제기랄.......
20분쯤 지나 그들이 은신해 있는 아파트로 두 명의 이탈리아
인들이 찾아왔다.
두 명 다 남자였는데 한 명은 젊은이였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어깨가 꾸부정한 노인이었다. 전문가는 그 노인
같았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별로 눈여겨보지도
않은 채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그가 꺼내놓은 여권은 일본 여자의 여권이었다. 그것은 진짜
여권으로 주인이 잃어버렸던가 아니면 주인으로부터 훔쳐냈던가
그런 것인 듯했다.
이탈리아 늙은이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무화를 쳐다보더니
이치조 하루미.......
하고 중얼거렸다. 듣기에 거북한 쉰 목소리였다.
이치조 하루미(日條春生)는 일본 여자의 여권에 기입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무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여권을 내놓았다. 그러자 늙은이는 그런 건 필요치 않다는 듯
그것들을 밀어내고는 봉투 속에서 한 주먹이나 되는 사진을
꺼냈다. 그것은 동양계 여인들만 찍은 명함판 사진이었다. 그는
역시 전문가다왔다.
그는 무화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그 사진들 가운데서
그녀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긴 것을 골라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것은 그녀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가 안경을 끼고 있는 점이었다. 거기에 대비한 듯
이탈리아의 위조전문가는 가방 속에서 안경을 하나 꺼내
무화에게 주었다. 무화가 그것을 끼자
5백 달러.
하고 그가 말했다.
돈은 줄 테니까 빨리 만들어줘요!
황가가 화가 나서 말했다.
늙은이는 하루미의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을 떼어내고 무화와
비슷하게 생긴 사진을 대신 붙였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철인을
꺼내 그것으로 사진을 꾹 눌렀다. 다음에 그는 하루미의
출생연도에 손질을 가했다. 1934라는 숫자를 1954로 고쳤다.
작업에 걸린 시간은 10분이었다. 그가 완성된 위조여권을
밀어내자 탁자 위에 1백 달러짜리 지폐 35장이 놓였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위조여부를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늙은이의 말을 젊은이가 영어로 통역해 주었다.
이윽고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세 사람은 서둘러 출발준비를
했다.
무화는 푸른색의 코트를 뒤집어 입었다. 코트의 안쪽은
분홍색이었다. 그것은 뒤집어서 입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동림은 황가의 코트를 빌어 있었다.
테르미나역 대합실의 전자시게가 9시 20분을 가리켰을 때
동양계의 한 젊은 여인이 대합실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그녀는
누구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안느 바넥은 그녀가 요정처럼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동양계의 그녀는 분홍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인터폴의 안느 바넥입니다. 패스포트를 좀 보여주실까요?
바넥은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말했다. 동양계의 여인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바넥이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하자 그제서야 웃으며 백 속에서 패스포트를 꺼냈다.
아, 일본인이군요. 이치조 하루미......
바넥은 그녀의 이름을 힘들게 발음하고 나서 그것을 그녀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어디 가시는가요?
피렌체.......
그녀가 나가고나자 브리앙 차장이 웃으며 다가왔다.
저 여자, 예쁘죠?
바넥이 그녀의 뒷모습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경찰이 아니라면 따라가 보겠어요. 어디로 가나요?
피렌체에 간대요.
피렌체...... 피렌체.......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조금 후 브리앙은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플랫폼
쪽으로 슬금슬금 가보았다.
그녀가 플랫폼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열차 안으로 사라졌다. 브리앙은 움직이기 시작하는
열차를 아쉬운 듯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무화가 열차에 올랐을 때 그는 통로에 서서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온 몸이 움츠려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그는 잠자코 침대칸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그녀를 밀어넣었다.
그 침대칸은 실내가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는 것이 특실 쯤
되는 것 같았다. 한쪽에는 더블 베드가 놓여 있었고, 소파와
탁자도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꽃병도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쓰러지지 않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검붉은 장미
한송이가 꽂혀 있었다. 무화는 그 꽃이 핏빛 같다고 생각했다.
뱅커는 안으로 문을 잠그고 나서 그녀를 벽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왜 늦었지? 9시까지 온다고 해놓고 왜 늦었지?
그의 두 눈은 의혹에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무화는 의외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사실은...... 안 나오려고 했어요. 역에 경찰이 깔려 있을 것
같아서 겁이 났어요.
그건 사실이야. 네가 경찰에 검문당하는 거 봤어. 그런데
어떻게 통과했지?
급히 위조여권을 만들었어요. 일본 여권이에요.
어디 봐.
무화는 백 속에서 여권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거칠게 그것을 낚아채서는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비로소 의혹의 빛이 스러지는 것을 보고 무화는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꽉 움켜잡은 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밀라노까지는 아홉 시간 걸린다고 했지?
그래요.
그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홉 시간 동안 우리는 한 방에서 같이 지내는 거야. 아주
좋은 기회야. 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의 얼굴이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무화는 몸을
움츠렸다.
몰라요.
그러면 가르쳐주지.
그는 그녀를 그대로 침대 쪽으로 밀고가 그 위에 쓰러뜨렸다.
어떻게나 힘이 센지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하는 게 더 재미있지.
그가 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대머리였고, 오른쪽 이마에는
흉한 상처자리가 나있었다.
술 한 잔 주세요. 맨 정신으로는 기분이 안 나요. 시간도
많은데 급할 건 없잖아요.
그는 멈칫하다가 벽에 고정되어 있는 찬장 속에서 조그마한
술병을 꺼냈다.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무화는 침대에서 일어나 코트를
벗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이윽고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창가에 마주보고 앉았다.
열차는 어느 새 로마 시내를 벗어나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들판 위로 불빛이 드문드문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건배!
하고 그가 말했다. 무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상대방의 잔에다 갖다댔다. 잔 속의 누런 위스키액이 흔들렸다.
그녀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 예쁘구나.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소름이
끼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예뻐. 너 같은 애를 그대로 둘 수야 없지. 블랙 로즈,
옷을 벗어.
조금만 기다려요.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안 됐잖아요.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난 급해. 참을 수 없단 말이야. 우린 서로 몸을 섞음으로써
일체가 되는 거야. 그건 우리 조직의 규약이야. 몸을 요구하면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잖아. 거절하면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더이상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앉은 채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가 창문에 커튼을 쳤다. 그도 나머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자 그녀는 더이상 벗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죠?
그래. 나머지는 내가 벗겨주지.
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그들은 남은 술을 들이켰다.
한 잔 더 해요.
무화가 담배를 피워물며 말했다.
사내가 손을 뻗어 찬장에서 술 한 병을 또 꺼냈다. 이번에는
브랜디였다. 그는 똑같이 잔에 술을 따랐다.
무화는 그를 취하게 하고 싶었지만 마음 먹은 대로 쉽게 될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무척 조심하고 있었고, 잠시도 경계를
늦추는 것 같지가 않았다.
브랜디를 모두 마시고 나자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것이 무섭게 발기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가와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는 그녀를 침대 쪽으로 밀었다. 그녀가 침대 위로 쓰러지자
그녀의 몸에서 천조각들을 걷어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의 그것이 밀려들어 왔을 때 몹시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처음 남자와 관계했을 때 느꼈던 그
고통과 흡사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육체와 마음의 고통을
참았다.
그는 아주 강력한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점점 몸의 움직임을
빨리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네가 저항하기를 바랬어. 그래야 재미있는데 말이야.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열차의 진동과 남자가
가해오는 힘으로 해서 그녀의 몸뚱이는 물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자들을
해치웠어. 물론 이런 식의 화간이 아니었지.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상대는 부산 해운대 달맞이에서 해치운 여자였다.
그 여자는 유부녀였고 임신하고 있었지.
그 여자, 누구예요?
황금의 초생달...... 그놈의 여편네야.
무화의 몸이 더 굳어졌다. 그러나 남자의 힘에 의해 그녀의
몸은 이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육체가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고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하체는 어느 새 남자가 가해오는 충격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 어땠어요?
아주 멋진 여자였어. 차 속에서 해치웠어. 나를 잊지 못할
거야. 그때문에 유산까지 했어.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잔인하군요. 임신한 여자를 강간하다니.......
그게 내 본질이야.
이상한 취미이군요. 아이를 납치하는 것도 취미인가요?
그 방법밖에 없었어.
이제 끝났으니까 아이는 돌려줘야 하지 않아요?
네가 그런 데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어.
그가 갑자기 격렬하게 몸음 부딪쳐왔기 때문에 그녀는 더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는데, 그때문에 몸이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열차가 천천히 속력을 줄이다가 멈춰섰다. 그러나 그들은
떨어지지 않고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한순간 한순간을 완전히 살아야 해.
사내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넌 아주 근사한 계집이구나. 당분간 내가 데리고 다녀야겠다.
유럽에 있는 동안 말이야. 외국 계집들은 보기는 시원하게
뻗었는데 어쩐지 맞지가 않아. 한국 남자한테는 역시 한국
계집이 최고야.
사내는 그 짓을 하면서도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땀으로 끈적거리고 있었다.
가만 있지 말고 몸을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무화는 하는 수없이 하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마침내 괴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사내가 더이상
무섭지 않았다.
황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돈을 찾든 못찾든 죽여야지. 가장 잔인하게 죽일 거야.
조직의 돈을 횡령한 놈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 거야.
돈을 찾으면 그 기념으로 너를 데리고 호화판 여행을 해야겠어.
너는 데리고 다니기에는 아주 그만인 아가씨야.
고마워요.
그는 끝날줄을 모르고 있었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그녀를 범하곤 했다. 지칠대로 지친 무화는 빨리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악착스러움을
받아들이는데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열차가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그가 마침내 그녀로부터 몸을
떼었다. 그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무화는 재빨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면서
어디 가는 거지? 하고 물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어요.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커튼을 조금
제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 위를 오가고 있었다. 역사는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뚱보가 먹을 것이 잔뜩
실린 손수레를 밀고가면서 바리톤 목소리로 뭐라고 크게 외치고
있었다.
빨리 갔다와.
그가 커튼을 내리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크를 해. 네 개씩 네 번을 계속해서 두드려. 그렇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을 거야.
그는 그녀가 보라는 듯 다리에서 단도를 뽑아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녀의 뒤에서 문이 찰칵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칫하고 섰다. 복도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보고 서있던 한 노신사가 갑자기 그녀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지금 그자한테 가도 되겠어요?
동림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어느 틈에 깨끗한 노신사로 변해 있었다. 그의 몸에는
회색의 코트 대신 밤색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코밑에 달고 있는
콧수염은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잿빛머리도 깨끗이
빗질되어 있었다.
안 돼요. 몹시 경계하고 있어요. 안으로 문을 잠갔어요.
지금은 안 돼요.
그녀는 완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가 분노를 억누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또 들어갈 건가요?
그럼요.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위험하면 들어가지 말아요.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위험하지 않아요.
그녀의 두 눈은 결의에 차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싫었다.
뭘 좀 알아냈나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인하 이야기는 좀처럼 꺼내지
않아요. 기다려보세요. 어떻게든 알아보겠어요.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뱅커가 들어 있는 방으로부터 뒤쪽으로 네 번째 침대칸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황가는 이미
앞차로 떠나고 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동림은 그녀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물었다. 무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계획대로만
하세요.
그놈이 가만 있진 않을 텐데.......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말하지 말아요. 아무 말씀도 하시지 말아요. 저는 이미
각오했던 일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는 중얼거리면서 안타까움과 분노가 엇갈리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왔다.
그만 둬요. 그 방에 들어가지 말아요. 내가 들어가볼 테니까
당신은 여기 있어요.
안 돼요.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안으로 문을 잠가놨기 때문에
들어갈 수도 없어요. 기회를 보면서 계획대로 밀고나가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아요. 그렇게 되면 인하를 찾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 모두가 위험하게 돼요.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조금만
참으세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고 심장의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감정을 억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곧 그에게서
떨어져나와 밖으로 나왔다.
전 꼭 해내고 말 거예요.
그녀는 문을 닫으면서 동림에게 속삭였다.
열차는 이미 피렌체역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들렀다 방으로 들어가자 뱅커가 탐색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무 일 없었나?
아뇨. 없었어요.
혹시 이상한 놈 보지 못했어?
아뇨. 주정뱅이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아서 좀
난처했을 뿐 아무 일 없었어요.
그는 나폭하게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아 끌어당겼다.
아, 안 돼요! 더이상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는 아까보다 더 무서운 힘으로 그녀를 압박해 왔다.
열차는 광활한 평야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달빛에 아득히
지평선이 보이고 있었다. 북상함에 따라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평원뿐이었다. 군락을 이루지 않고 평원 여기
저기에 드문드문 서있는 집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불빛들은 사람이
밝힌 것 같지 않게 이상한 신비감으로 다가왔다가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탁자 위에는
가족 사진이 한 장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지난
가을에 찍은 컬러사진이었다. 가을이어서 그런지 바다 색깔이
유난히도 파래 보였다.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웃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밝고 건강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그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위에 노란색의 블라우스를, 밑에는 코발트색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인하는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입과 코에는 온통
허연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놈은 입을 벌린 채 웃고
있었다. 놈은 멜빵이 달린 청바지 위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자락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가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도 뚫어지게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바다에 가족들과 다시는 설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해운대의 푸른
바다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면서도 그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진에 나타난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꿈에서나 본 듯한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내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아이가 더 보고 싶었다.
그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그의 변장한 모습이
비쳐보였다. 그것은 아주 낯선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 모습은
어느새 그가 까맣게 잊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과거의 한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는 차가운 창문에 얼굴을 대면서
눈을 감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과거가 바로 곁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969년 겨울을 동림이 파리에서 보냈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고, 한국이 아닌
파리에서 겨울을 났던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월남전에서 포로가 되었던 그는 아무튼 초인적인 힘으로
정글을 탈출해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것도 부상한 흑인
병사까지 데리고.
아군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는 지옥에서 온 악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군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려고 몰려들어 어떻게 해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악마다. 나 같은 악마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악마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고 미화된 쪽으로
기사화되었다.
특히 그와 함께 살아돌아온 흑인병사 토미가 그들이 함께 살아
돌아오게 된 경위를 낱낱이 털어놓았기 때문에 성조지를 비롯한
미국 쪽 신문에는 동림이 월남전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기사화되었다.
확실히 그가 살아온 이야기는 초인적이고도 영웅적인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영웅시했고, 그에게는
양쪽으로부터 최고의 훈장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이 달갑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져 갔다.
얼마 후 그의 심신이 군복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고 황폐해졌다고 판단한 군의관은 그의 제대를
상신했고, 며칠 후 그는 현지에서 제대특명을 받았다. 부상한
토미도 현지에서 제대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두 사람 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려했다. 불안과 환락이 교차하는
사이공 거리를 하는 일없이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과거의 고통을 빨리 잊을 수 있고 그 악몽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술과 여자와 마약뿐이었다. 부패와 범죄가
난무하고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이공 뒷골목에서 술과
여자와 마약을 구하기란 너무도 쉬웠다. 사실 널려 있는 것이 그
세 가지였다. 그것들은 달러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었다. 패배와 위기의식이 고조될수록 사람들을 쾌락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동림과 토미도 그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토미는 동림이 하는 대로 무턱대고 따라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는 동림을 너무 좋아했고, 그를 생명의
은인이자 영웅으로 생각했고, 그런 나머지 그를 존경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변해버렸다. 그들의
몸에서는 퇴폐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들의 얼굴은 악마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술과 여자와 마약에 탐닉했다. 동림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서서히 괴롭히며 죽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토미는 동림의 그런 마음까지 헤아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개처럼 그를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달러가 필요했다. 그것은 공짜로 생기는 게 아니었다. 그만한
댓가를 지불해야만 생기는 것이었다. 일자리도 없는 자들이
손쉽게 돈을 만질 수 있는 길이란 따로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범죄 세계에 쉽게 빠져들어갔다.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란 사람을 죽여준다거나
마약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
일을 해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주로 토미가 했다. 동림이
지시를 내리면 토미가 즉각 상대방을 해치우곤 했다. 동림이
계획을 짜고 지시를 내리면 토미는 그것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죽이 맞았고 훌륭한 팀웍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무자비하고 능숙하게 사람을 해치운다는
점에서 사이공 암흑가에 공포의 외인부대로 알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주문이 밀려드는 바람에 골라가면서 일을 해야만
했다.
청부없으로해서 꽤 돈을 벌었지만 그들은 그 돈을
모아둔다거나 하지 않고 생기는 대로 모두 써버렸다. 물쓰듯이
돈을 뿌리니 자연 그들 주위에는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은 악마같이 되어갔다. 여자에 탐닉하고
마약을 복용하고 술에 찌들게 되니 자연 육체는 쇠약해져 가고
정신은 분열증세를 보이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에게는 체포령이 내렸다. 월남 수사기관은
다섯건의 살인 혐의와 마약밀매 혐의로 그들을 수배했다.
계엄령하이기 때문에 발견 즉시 사살해도 좋다는 특명이 내려져
있었다.
그들은 마약 조직의 도움으로 월남을 탈출하여 유럽으로
도주했다. 그들은 파리로 잠입하여 파리의 지붕 밑에
은신하였다.
동림은 그때 월남 아가씨를 한 명 데리고 갔는데 그녀는 그의
아이를 뱃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버리기에는 측은했기 때문에 그대로 데리고 살았다.
그는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아이에게 기대를 걸었다.
파리에 와서도 그들은 사이공에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전처럼 자유롭지가 못했다. 어느 새 그들은 조직의
하수인으로 전락돼 있었고, 그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있었다.
토미는 열심이었다. 그러나 동림은 그전과 달리 그럴 수가
없었다. 월남 아가씨는 배를 동여매고 어느 프랑스 가정에
가정부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이루어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역시
그를 닮은 아들을 보고 싶었고, 그 아들과 딩굴며 놀고 싶었다.
그는 조직의 일에 점점 소극적이 되어가는 대신 가정이란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고 토미는 그가 변했다고 생각했고, 그를 더이상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동림에게 누군가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토미는 그를 걱정했다. 그리고
이틀 후 그가 외출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니 그 월남인
아가씨가 목이 졸린 채 죽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토미는 조직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대신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미는 걱정하다가 동림이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하고 두 번
다시 그를 찾지 않았다.
아무도 먹을 것을 갖다주지 않자 동림은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거지 노릇으로 연명했다. 장발에 누더기 옷을 걸친 그는
철두철미하게 거지가 되어 파리에서의 첫번째 겨울을 지냈다.
봄이 되자 그는 세느강의 다리 밑으로 가서 집시들과
합류했다. 거기서 그는 많은 소박한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사람을 다치지 않고 물건을 훔치는 갖가지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거리로 실습을 나가 전철 속에서 최초의
소매치기에 성공했을 때 그는 실로 오랫만에 큰 희열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는 점점 소생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의 4년은 집시들과 그렇게 어울려 지내는데
소비되었고, 그는 그 동안 훌륭한 솜씨를 가진 소매치기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영역은 파리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전지역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그동안 그는 남화에게 틈틈이 유럽의 아름다운 풍물이 담겨져
있는 엽서를 보냈다. 엽서에는 자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밝히지 않은 채 유럽의 풍물에 대해서만 적었다. 물론 발신처는
밝히지 않았다.
1975년 여름 그는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다음 이듬해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했으므로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했다. 공사판에 나가 등짐을
져나르기도 했고, 택시를 운전하기도 했고, 인쇄소 직공이
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그래도 제일 적성에 맞는
것은 외판 관계의 일이었다. 그는 도서목록을 들고 서적
외판원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생활비가 얼마쯤
모이면 배낭을 지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도시가 싫었고, 산의 거대한 침묵에 매료되어 산
속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틈만나면 배낭을 지고
산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에도 그는 남화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편지에 자신의 주소를 처음으로 밝힌 것은 79년 가을이었다.
그해 겨울이 되기 전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한
아름다운 처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자기가 바로 남화라고
말했다. 동림은 그때 비로소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의 머리속에 남아 있는 남화는 국민학교 6학년의 어린
소녀였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그녀는 어느 새 성숙한
처녀로 자라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배창우의 유품을 꺼내주었다. 유품이라야
배창우의 유서와 인식표, 그리고 남지의 사진이 전부였다.
그것들을 보고 나서 그녀는 언니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어요. 하고 말했다.
첫번째의 만남은 그들 사이를 운명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남화는 주말이면 동림을 따라 산에 갔다. 그들은 산 속에
텐트를 치고 캠핑 생활을 하면서 그들 사이의 벽을 하나씩
허물어나갔다. 이듬해 여름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한달 후 그들은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다.
동림은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열차는 막 어느 역을
출발하고 있었다. 플랫폼에 서있는 이정표에 BOLOGNA 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코트를 걸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피스톨의 손잡이를 가만히 힘주어 잡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것은 중국인한테서
빼앗은 것이었다. 탄창에는 여섯 발이 들어있었다.
그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무화가 들어 있는 침대칸 옆에 멈추어
섰다. 문 앞에 서서 방 안의 동정을 엿들어려고 했지만 쇠바퀴가
철로 위를 구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킨
다음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킨 다음 돌아섰다.
그는 복도에 한 시간쯤 서서 그자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화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내 역시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무화의 몸을 탐닉했다.
무화는 하룻밤 사이 열차 속에서 악마 같은 사내한테 철저히
유린당한 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한 남자한테 그렇게 완벽하게
유린당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 하룻밤은 1년 동안만큼이나 길었고, 그녀는 1년 동안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유린당했다고 해서 억울한 느낌이 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육체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
누가 그 육체를 밟고 지나가더라도 그녀는 그 고통을 말없이
참고 견뎌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가치있는 일을 위해
육신을 내던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육신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끝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는 그런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이번
사건에 휩쓸리게 되면서, 특히 추동림을 알게 되면서부터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동림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할 행동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품고 있었다.
1월 20일 오전 6시 29분 밀라노 역.
지난 밤 9시 25분 로마를 출발한 열차는 예정 시간보다 4분
늦은 6시 29분에 밀라노 역 플랫폼으로 천천히 굴러들어가
멈춰섰다. 9시간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이른 새벽녘이었기 때문에 밖은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역구내와 그 주위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코트를 다 입고 난 사내는 무화의 허리를 휘어감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거예요.
그녀는 사내의 품에 안기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사내는 이제 안심하고 무화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9시간
동안의 여행에서 무화는 그의 가슴에 그녀를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는 신뢰감을 안겨주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황가가 밀라노의 소렌토라는 호텔에 숨어 있으며, 그의
곁에는 보디가드겸 가이드역을 맡고 있는 박동주라는 한국인
남자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박이 그들 쪽에 포섭되어
있다는 무화의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렌토 호텔로 바로 쳐들어갈 수는 없어요. 그러다가는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요. 몬테나폴리오네 거리에 있는
밀라노 호텔에 들어가 있으면 박이 연락을 주겠다고 했어요.
기다리고 있으면 연락이 올 거예요. 밀라노 호텔에 하루미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해두겠다고 했어요.
역 구내를 빠져나오면서 지껄이는 무화의 말을 뱅커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들이 역 광장으로 막 들어섰을 때 두 명의 사나이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사복의 밀라노 경관들이었다.
패스포트좀 보실까요?
그들은 똑같이 일본국 발생의 위조여권을 꺼냈다.
뱅커의 여권을 들여다보던 깡마른 이탈리아인이 눈을 치켜뜨며
영어로 물었다.
가네마루 쇼케이씨, 밀라노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관광여행차 왔습니다.
뱅커는 느린 어조로 침착하게 말했다.
깡마른 사내의 눈이 이번에는 무화의 여권을 더듬었다.
이치조 하루미씨도 관광여행 중이십니까?
네, 그래요.
무화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분은 어떤 관계이십니까?
콧수염을 기른 경찰관이 물었다.
부부예요. 아직 정식으로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우린
부부예요. 도쿄에 돌아가는 대로 식을 올릴거예요.
무화는 뱅커의 팔짱을 끼면서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밀라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몬테나폴리오네 거리에 가시면 마음에 드는 쇼핑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거기에 갈 거예요.
무화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정말 멋지게 위기를 넘겼어. 하루미, 어디서 그런 연기를
배웠지?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뱅커가 대견스럽다는 듯
말하자 무화는
제가 연극배우 출신이란 거 모르세요?
하고 우쭐해서 대꾸했다. 그러자 뱅커는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우리를 찾고 있는 게 분명해. 밀라노에도 비상망이
퍼져 있으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가능한 한 빨리
이탈리아를 떠나야겠어.
그들은 택시를 타고 몬테나폴리오네 거리로 향했다.
신분증이 있으니까 당분간 안심해도 되잖아요.
그렇지가 않아. 위조여권에 너무 기대를 걸지 않는 게 좋아.
5분쯤 지나 그들은 호텔 밀라노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호텔 밀라노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뱅커는 무화와 함께 프런트로 다가가 잠자코 그녀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프런트에는 하루미라는 이름으로
방이 예약되어 있었다.
그들은 열쇠를 받아들고 15층으로 올라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지? 빨리 놈을 처치해야 할 텐데.......
방으로 들어가자 뱅커가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곧 연락이 올 거예요. 박동주도 황가의 눈치를 살펴야 하니까
행동이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그의 입장을 생각해 주어야 할
거예요. 전화가 올 때까지 좀 쉬세요.
난 쉴 수가 없어.
무화는 담배를 피워물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어둠은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희뿌옇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 밑으로 시가지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운하와 그 위에 걸쳐
있는 다리, 그리고 날카롭게 솟아있는 성당의 첨탑들이 보였다.
밀라노는 그녀에게 초행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으로 밀라노에
네 번째 오는 길이었다.
눈치오 부장의 사무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실내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전화통 쪽으로 쏠렸다. 실내에
무겁게 드리워 있던 침묵이 전화벨 소리에 일순 깨지면서
사람들의 굳어 있던 자세가 풀렸다.
눈치오 부장은 몇 올밖에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그의 심복인 카르딜레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동양계의 젊은 여자한테 위조여권을 만들어주었다는 정보를
잡았습니다. 어제 저녁 때 만들어준 모양입니다.
카르딜레는 정보요원들을 동원하여 위조전문가들의 움직임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야?
프로파치랍니다.
그놈의 늙은이! 이번에 잡으면 죽을 때까지 처박아 둘 거야!
빨리 그 늙은이를 잡아와!
시내 전역에 수배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알았어.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고 나서 눈치오 부장은 망할 놈의
늙은이! 하고 중얼거렸다.
프로파치는 위조전문가 중에서도 거물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때문에 그는 생애의 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지금은
너무 늙은 나머지 전성기때의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한물간 늙은이로 고객들의 외면을 당하고 있는
신세였다. 그러다보니 돈이 되는 것이면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위조해 주고 있었다.
눈치오 부장은 손님들의 긴장된 얼굴들을 훑어보고 나서 방금
보고받는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프로파치라는 늙은이는 위조 패스포트를 능히
급조해주고도 남을 인물입니다. 늙어서 솜씨가 무뎌지긴 했지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만들어주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과 접촉한 그 동양계 여자가 유무화일 거라는 확증이
있습니까?
노경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눈치오는 곁눈질로
멸시하듯이 그를 흘겨보았다.
확증은 없지만 그 여자가 틀림없을 겁니다. 이잡듯이 뒤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걸려들지 않은 것이 틀림없이 프로파치가
만들어준 새 여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두 명도 마찬가지이겠군요?
그야 물론이죠.
만일 그들이 새 패스포트를 마련했다면 이미 로마를
벗어났겠군요?
노경감이 동의를 구하듯 살레 부장을 쳐다보자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 새에 이미 이탈리아를 벗어났는지도 모르죠.
프로파치만 잡으면 추적할 수 있어요.
눈치오는 성난 황소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경감은 둥근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파일을 당겨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동양계인들의 이름으로, 컴퓨터 단말기를
통해 뽑아낸 것이었다.
어제부터 경찰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양계인들에 대한 검문을
대대적으로 실실하고 있었다.
검문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비록 수배대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그들의 이름과 성별, 국적 그리고 그들을
검문한 장소, 시간 등을 기록해 두었다.
그 기록은 즉시 컴퓨터에 입력되어 로마에 있는 컴퓨터센터에
집결되었고, 눈치오 부장의 데스크에도 거의 같은 시간에 그
명단이 도착되고 있었다. 그런 기록을 남기는 것은 범인들이 새
위조여권을 사용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다.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만큼 그 명단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중에는 중복되는 이름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로마에서 검문을 받았다가 몇 시간 후 다른 도시에서 또 검문을
받았을 경우 그의 이름은 중복되어 기록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노경감은 무수한 동양계인들의 이름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일본세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단
가운데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단연 많았던 것이다. 명단은 알파벳
순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경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과 테르미나 역에서 체크된
이름들에 주목했다. 로마를 빠져나가려면 아무래도 그 두 곳을
거쳐나갈 가능성이 제일 많기 때문이었다. 두 곳에서 체크된
이름은 자그만치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 이름만 보고 위조 여부를 가려낸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름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치 눈 앞에 개미 새끼들이
기어가는 것 같았다. 이름을 바꿨다면 모습도 다르게 고쳤을
것이다.
갑자기 코 고는 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그쪽을 쳐다보았다. 마형사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입을 헤벌린 채 자고 있었다. 몹시 피곤한지 그는 맹렬히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살레 부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치오 부장은 달랐다. 그는 어이없는 표정이다가 이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황한 노경감이 마형사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일어나! 일어나! 여기서 자면 어떡 하나.
그러나 마형사는 얼른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코고는 것을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코를
골아대는 것이었다. 경감이 어쩔줄 모르면서 거칠게 흔들어대자
그제서야 마형사는 고개를 바로하고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도착해서 별로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시차도 있고해서 몹시
피곤한 겁니다.
호텔에 가서 좀 주무시죠.
살레 부장이 그래도 마형사를 두둔하는 식으로 말해 주었기
때문에 경감은 당혹감을 조금 면할 수가 있었다. 그는 딱하다는
듯 마형사를 쳐다보면서 나직히 말했다.
여기가 자네 집 안방인 줄 아나. 코는 왜 그렇게 골아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마형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저 이탈리아 돼지가 인상을 쓰니까
하는 말이지.
문이 열리더니 여직원이 새로운 명단을 들고 들어왔다. 경찰이
보내온 명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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