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김성종 - 미로의 저쪽 1

3학년2반 | 2022.02.06 07:41:42 댓글: 0 조회: 88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831
미로의 저쪽 / 김성종

- 차 례 -
1 악몽의 밤
2 로댕의 집
3 접근
4 첫번째 얼굴
5 비밀의 집
6 유인



1 악몽의 밤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삭풍이 휩쓸고 간 뒤끝에 남아 있는 긴 여운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와 함께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람에 창문이 흔들흔들했다.
그녀는 식은땀에 젖어 있는 몸을 남편 쪽으로 돌렸다. 남편의 넓은 품속을 파고들면서 비로소 남편과 자신이 벌거벗은 알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의 유희가 끝나면 그들은 언제나 알몸인 채로 잠이 든다. 너무 격렬하기 때문에 그것이 끝나면 나른한 나머지 잠옷 따위를 찾아 입기가 귀찮은 것이다.
그렇게 버릇이 든 지 6개월, 신혼의 단꿈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그녀는 오히려 그 행복이 깨어질까봐 두렵기조차 했다.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이따금씩 들려오는 소리처럼 두려움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알몸으로 잠드는 밤이 그녀에게는 제일 행복한 밤이다. 성의 유희가 안겨주는 나른함에 푹 젖어 고이 잠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밤은 다르다. 깊이 잠들지 못한 악몽에 눈을 뜬 것이다. 그것은 이런 꿈이었다.
그녀는 회사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벽시계가 열두 점을 쳤을 때 밖에서 남편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몹시 애처롭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하얀 눈 위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편이었다. 들어오지 않고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고 하자, 그는 자기는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당신 얼굴을 보러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달려가 남편을 잡으려고 하자 그는 뒷걸음질치면서 자기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가까이 다가서서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본 그녀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얼굴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았을 때는 남편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부르며 뒤쫓아갔지만 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의 모습이 어둠 저쪽으로 사라졌을 때 거기에는 남편의 슬피 우는 울음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지금 그녀 곁에 누워 코까지 골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더욱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눈도 코도 입도 다 있다. 손이 밑으로 내려가다가 하복부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윽고 그녀의 섬세한 손은 남편의 가장 귀중한 부분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말랑말랑하던 그것은 그녀의 섬세한 손놀림에 서서히 일어서면서 단단히 굳어져 갔다.
그녀는 손 안에 그것을 가득 쥐면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믿음이자 사랑이었으며 또한 희망이기도 했다. 우리 남편은 이렇게 든든하게 솟구치고 있지 않은가! 악몽 따위에 식은땀을 흘리다니, 나도 참!
얼마 후 그녀는 남편의 그것을 움켜쥔 채 다시 잠이 들었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아기처럼 잠들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은 강렬한 불빛 때문이었다.
처음 그녀는 너무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게 웬 불빛일까 하고 생각했다.
두 개의 플래시 불빛이 하나는 그녀의 남편을, 다른 하나는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남편은 곤한 잠에 떨어져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때 이불이 휙 젖혀졌다.
"누구예요?"
그녀는 놀라 소리치며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발이 튀어나와 우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짓밟았다.
"쉿! 조용히! 그대로 있어."
남자의 쉰 목소리가 흡사 바위 덩어리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위압적인 그 목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혼미했다.
강렬한 불빛이 만들어낸 두터운 장벽에 가려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그녀는 거기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야. 짓밟히고 있는 어깨에 고통이 느껴졌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맨발도 양말 신은 발도 아니었다. 투박스런 농구화발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야. 그녀는 다시 자신에게 확인시켰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강도'라는 말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등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벌레는 지금까지 선택된 인간에게만 달라붙는 줄 알았었는데, 그래서 남의 일처럼 여겨왔던 것인데, 그 놈이 마침내 자신에게도 마수를 뻗어온 것이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르르 떨었다.
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납덩이처럼 무거워 떨어지지가 않았다.
"일어나!"
한 명이 남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남편은 몸을 뒤틀면서 깨날 듯하다가 심호흡을 하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새끼, 일어나라니까!"
다른 한 명이 이번에는 얼굴을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남편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눈을 몇 번 끔벅거리다가 후다닥 일어나 앉았다. 멍한 표정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코밑을 적시고 있는 피가 마치 코밑 수염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풍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멍한 표정은 잠깐 동안에 불과했다. 그는 재빨리 사태를 간파했고 이내 도전적인 표정을 지었다.
"누, 누구요?"
"보면 몰라!"
그가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슴으로 발길이 날아왔다. 그는 가슴을 싸쥐면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안 돼요!"
그녀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발을 밀어내면서 소리질렀다. 그러자 칼날이 빛을 뿜으며 다가왔다.
"조용히 하라니까!"
쉰 목소리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침착했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고 위압적이었다.
"조용히 하는 거야. 알았지?"
찰칵 하고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볼 만하군."
쉰 목소리가 말했다.
일행은 모두 네 명이었다.
모두가 눈만 나오는 검은 털모자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었다. 옷차림도, 신고 있는 농구화도 검은색 일색이었다. 손에 끼고 있는 가죽장갑도 검은색이었다. 하나같이 긴 재크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단잠을 깨워 미안해. 반항하지 않겠다면 일어나 앉아도 좋아."
쉰 목소리가 말했다. 말투나 태도로 보아 리더인 듯했다.
젊은 부부는 일어나 앉았다.
여자가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대고 있는 데 반해 남자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검은 사나이를 하나하나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골격이 굵고 건장한 데다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몸이 사나이다워 보였다.
얼굴은 강인하고 투지에 불타는 인상이었다. 짙은 눈썹 밑에서 두 눈이 표범처럼 빛나고 있었다.
"손을 묶어."
쉰 목소리가 턱으로 벌거벗은 남자를 가리켰다.
"여자도 묶을까요?"
검은 사나이의 한 명이 준비해 온 끈을 늘어뜨리면서 물었다. 그러자 여자의 남편이 냉큼 받아 말했다.
"요구대로 다 들어줄 테니 내 아내한테는 손대지 마시오. 내 아내는 임신 중이오. 놀라게 하지 마시오."
리더는 젊은 부부를 번갈아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묶지 않아도 좋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끈을 들고 있던 사나이가 벌거벗은 남자 뒤로 돌아갔다.
사나이는 작업을 신속 정확하게 하기 위해 가죽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남자의 팔을 뒤로 꺾은 다음 노란색 나일론 끈으로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여자의 남편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의 눈은 남편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작업이 끝나갈 때쯤에는 검은 사나이의 손놀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나이가 일을 끝내고 먼저 오른손을 장갑 속에 집어넣었다. 다음에 왼손을 쳐들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불과 수 초 사이였지만 그녀는 그 사나이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요구하는 게 뭐요?"
남자가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돈!"
"돈이라면 저기 있으니 가져가시오."
남자는 장롱을 가리켜 보였다.
"당신이 가서 가져와."
쉰 목소리는 손가락으로 여자를 지적했다.
여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벗어 놓은 옷가지를 집어들었다.
"안 돼! 옷을 입어서는 안 돼! 그대로가 좋아. 자, 빨리 가져와!"
그녀는 남편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아내를 안심시켰다.
"겁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안 돼요, 그건......."
아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빨리 주라니까."
남편은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장롱 쪽으로 다가갔다.
검은 사나이들은 그녀의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의 피부는 눈부실 정도로 희고 깨끗했다. 임신 초기인지 눈에 띄게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미끈하게 뻗었으면서도 육체의 모든 부분이 고르게 발달되어 있어 풍만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장롱문을 열고 안에서 빨간 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돈다발을 집어냈다.
"그것뿐인가?"
"그것뿐이오."
남편이 대답했다.
검은 사나이 한 명이 그녀의 손에서 돈다발을 채갔다.
"모두 얼마야?"
"2백만원입니다."
"있는 대로 다 내놔."
"없습니다. 그게 전붑니다."
남편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사장이 뭐 이래? 돈이 없으면 다른 것이라도 내놔."
"없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군. 샅샅이 뒤져!"
한 명이 부부를 감시하고 나머지 세 명이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문갑 속에서 패물이 나왔다.
결혼 패물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여자의 검은 눈에는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집은 검은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그 집은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컸다. 대지도 넓어 2백여 평이나 되었다.
검은 사나이들은 방방을 뒤져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챙겼다. 더 이상 챙길 것이 없자 그제서야 그들은 안방에 집합했다.
"이 집을 훔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거 싯가로 얼마나 되지?"
"모르겠소. 훔칠 수 있으면 훔치시오."
남편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꽤 뻣뻣하게 나오는군."
"일이 끝났으면 돌아가시오."
"아직 시간은 많아.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어. 겨울 밤이 긴 줄 모르나?"
"그만 했으면 됐지 뭐가 또 필요하다는 거요?"
남편은 점점 드세게 나오고 있었다.
"꼭 필요한 게 있지. 우리한테는 여자가 필요해."
"뭐라고?"
남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이 날아왔다.
"안 되겠어, 이 새끼. 무릎을 꿇어!"
그는 손이 뒤로 묶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목에 겨누어진 칼날에 눌려 그는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조용히 있는 거야. 알았어?"
그들은 재빨리 그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세 명이 그를 방에서 끌어내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일을 치르는 동안 남편을 감시했다.
안방에는 이제 여자와 남자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불로 몸을 감싸면서 상대방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그는 리더로 보이는 쉰 목소리의 사나이였다. 그가 첫번째 주자로 그녀의 몸을 탐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겨 몸을 웅크렸다.
검은 사나이는 물들인 군용 파커를 벗었다.
"이리 와."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이불로 몸을 감싸면서 더욱 웅크릴 뿐이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재빨리 기도하면서 하느님이 반드시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리 오라니까!"
사나이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래도 여자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 이불을 홱 걷어치웠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움켜잡더니 방 가운데로 힘껏 잡아끌었다.
"안 돼요! 살려 주세요!"
그녀는 방 가운데로 나뒹굴면서 소리쳤다.
"아, 안 돼요! 사람 살려요!"
여자는 발버둥치면서 남자를 필시적으로 밀어냈다.
"조용히 하라니까!"
사나이는 주먹으로 그녀의 턱을 힘껏 후려쳤다. 일격에 그녀는 사지를 쭉 뻗으면서 기절해 버렸다.
잠시 후 첫번째로 여자를 맡았던 사나이가 들어오고 두번째 사나이가 대신 나갔다. 그것을 보고 남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뿐 그는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신한 아내가 지금 놈들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내를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내를 구해야 한다. 아내는 지금 임신 중이 아닌가?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그는 자신을 선뜻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지? 자, 일어나라. 두 손은 묶였지만 다리는 아직 자유스럽다. 머리로 한 놈을 들이받고 나머지 놈들은 발로 상대하는 거다. 결국은 내가 쓰러지겠지만 해볼 때까지 해보는 거다.
그 사이에 아내는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자, 일어서라. 일어서서 제일 가까이에 서 있는 저 놈의 가슴을 들이받아라!
그러나 그는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별로 어렵지 않게 야욕을 채운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아내를 겁탈당한 기분이 어때?"
쉰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언젠가는 복수를 하고 말 테다. 네놈들을 찾아내서 모두 죽이고 말 거야!"
남편은 이를 갈며 말했다.
"후후...... 웃기는군. 매우 웃기는군.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지."
"내 아내를 어떻게 했지?"
"죽지는 않았어. 잠시 기절했을 뿐이야."
"너희들은 잘못 들어왔어.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잘못 건드렸다구? 그래도 사내 값을 하겠다고 뻣뻣하게 나오는군."
그때 그는 뒤로 묶여 있던 두 손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힘을 주어 한쪽 손을 가까스로 빼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손은 쉽게 빠졌다.
이제 두 손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농구화발이 올라와 그의 얼굴에 닿는 순간 그는 그 발을 움켜잡으면서 이마로 상대방의 얼굴을 힘껏 받았다. 예기치 않은 습격에 상대방은 보기 좋게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것을 본 세 명의 사나이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무기가 없는 그는 되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손에 닿는 것을 집어든다는 것이 베개를 집어들었다. 칼을 겨누며 가까이 다가오는 놈을 향해 그것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쓰러져 있는 놈에게 달려들어 칼을 뺏으려고 했다. 칼을 들고 있는 손목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끌어쥐었다.
그때 어깨에 예리한 아픔이 왔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손을 쥐고 있던 가면이 머리에서 빠져나왔다.
가면이 벗겨진 사나이는 당황했다. 그는 대머리였다. 집주인은 눈을 크게 뜨고 대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2격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가 재빨리 뒤로 얼굴을 젖히는 바람에 칼끝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친 자국에서 금방 피가 솟았다.
"살려 두면 안 돼! 죽여!"
대머리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자 검은 사나이들은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칼을 손으로 막으면서 소리질렀다. 그것은 이웃집에 도움을 청하는 절박한 외침이었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나이들을 더욱 날뛰게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근육질이 강철같은 남자라고 하지만 맨손으로 날카로운 칼끝을 막아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사나이들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무력하게 몸부림만 쳐댈 뿐이었다.
칼끝이 얼굴에 사선을 긋는 순간 그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 틈을 이용해 이번에는 날카로운 칼끝이 등판을 뚫고 들어와 심장을 건드렸다.
그는 무릎을 꺾으면서 마지막 힘을 짜내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월아!"
하고 외쳤다.
그 외침이 너무 컸던지 아니면 삭풍 때문인지 창문이 유난히도 덜컹거렸다.
그것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이윽고 그의 몸은 마치 거목처럼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얼굴이 방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방안을 울렸다.
그녀는 남편이 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그래서 일어나 남편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물가물 흔들리는 의식을 붙들고 남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남편의 외치는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고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남편의 그 외마디 외침은 마치 악몽 속에서 들었던 울음처럼 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벌써 다섯 시야! 서둘러!"
검은 사나이들은 명령에 따라 급히 떠날 채비들을 했다.
"증거를 남기면 안 돼! 조그만 거라도 모두 챙겨!"
그들은 피로 얼룩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방안에서 무엇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다급해져 있었다.
"빠트린 거 없나 살펴봐!"
"없습니다!"
대머리는 시체를 턱으로 가리켰다.
"칼을 뽑아야 할 거 아니야! 바보 같으니!"
한 명이 시체 위에 허리를 굽히고 등에 박혀 있는 칼을 뽑아냈다.
방안은 숨막힐 정도로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숨이 완전히 끊어졌는지 살펴봐. 살아나면 큰일이다."
두 명이 양쪽에서 맥을 짚어보았다.
"끊어졌습니다!"
"됐어. 자, 출발!"
"여자는 어떻게 하지요?"
"내버려 둬. 내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니까. 빨리 나가!"
세 명이 먼저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머리는 마지막으로 뒤따라 나가려다가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멈칫하면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죽은 남자의 왼손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보았다. 오른손은 펴져 있었다. 그런데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그것은 마치 주먹 안에 무슨 귀중한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던져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대머리는 몸을 돌려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먼저 한 손을 뻗어 그 주먹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주먹은 돌처럼 단단히 뭉쳐져 있어서 쉽게 풀리지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양쪽으로 힘껏 벌려보았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먹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혼신의 힘을 다해 거기에 매달렸다. 그래도 풀리지 않자 발로 그것을 짓밟아댔다. 주먹 안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 너무 걸린 것 같았다. 그는 끝내 주먹을 풀지 못한 채 일어섰다. 아무래도 마음이 켕기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옆방을 지나다가 잠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밖에는 먼저 나간 사나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복면을 벗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누군가가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골목에 세워둔 승용차에 올랐다. 잠시 후 차는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가 차도 쪽으로 움직였다.
눈이 덮인 새벽 거리는 차량의 통행이 거의 없어 아주 조용했다. 어둠은 아직 걷히지 않고 있었다. 차 속의 사나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10분쯤 지나 먼저 한 사나이가 차에서 내렸다.
다시 10분쯤 지나 차는 또 한 사나이를 내려주고 출발했다.
세번째 사나이는 도심의 광장 부근에서 내렸다.
차 속에 혼자 남은 대머리는 잠시 광장을 바라보다가 교통 법규를 무시한 채 광장을 가로질러 차를 몰았다.
광장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고 나서 그는 차를 세웠다. 엔진을 걸어둔 채 차에서 내린 그는 차도 옆에 서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전화통이 놓여 있는 선반 위에는 구토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거기에다 침을 뱉고 나서 오른손의 가죽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다이얼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즉시 신호가 떨어졌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대머리는 쉰 목소리를 냈다.
"율리시즈......."
재빠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끝냈습니다."
"실수는 없겠지?"
"그 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뭐라고?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 자가 제 얼굴을 봤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바보 같으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끄러워지겠군."
"뒤탈 없이 해놨습니다. 강도 살인으로 알 겁니다."
"자신할 수 없어. 강도와 강도 살인은 달라.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이 집요하게 달라붙는단 말이야. 여자는 어떻게 했지?"
"좀 건드렸습니다."
"혼자서?"
"아닙니다. 넷이 모두......."
"그리고?"
"기절했기에 내버려 두고 왔습니다."
"여자는 얼굴을 보지 못했나?"
"네, 여자는 제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왕 그렇게 된 김에 여자까지 해치워 버릴 걸 그랬어......."
"......."
"현장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란 말이야."
"그 여자는 우리를 모릅니다. 모두 복면을 했기 때문에......."
"하지만 목소리까지 바꾼 건 아니잖아. 발자국도 있을 테고...... 그밖에 많을 테지."
대머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그 여자를 해치우죠."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 지금쯤 경찰이 쫙 깔렸을 텐데 그 속에 뛰어들겠다는 거야! 바보 같으니!"
"그럼, 어떡하죠?"
"좀 기다렸다가 경찰 수사가 느슨해질 때쯤 해치워."
"그때 가서 해치워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경찰에 모든 걸 불었을 텐데요."
"이거 봐, 왜 그렇게 멍청하지? 그 여자는 유일한 목격자야. 아무리 경찰에 말했다고 하지만 사실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 거야. 정확한 것은 그 여자의 머리 속에 있어. 일테면 목소리 같은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 여자가 받은 인상 같은 것도 말이야. 그 여자는 말로 표현해 내지 못한 것들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너희들을 찾아나설지도 몰라. 직접 말이야."
"알겠습니다. 기회를 봐서 처치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 거야. 그리고 나서......."
"알겠습니다."
대머리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구토물 위에 다시 침을 뱉었다.
오월(吳月)은 벽에 몸을 의지하면서 옆방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방에 들어선 그녀는 외마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두 눈을 부릅뜬 채 허덕거리다가 도로 기절해 버렸다.
그녀가 다시 깨어난 것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서였다. 그녀는 비틀비틀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젖혔다. 창문을 통해 눈부신 햇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시야는 온통 흰 빛이었다. 간밤에 눈이 많이 내린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집은 야산을 배경으로 가장 높은 지대에 외롭게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결혼 전에 전망이 좋다고 그곳에다 집을 지은 것이었다. 밀집된 주택지대는 거기서 50미터쯤 떨어진 아래쪽에 있었다.
전화벨 소리가 그쳤다. 받지를 않자 포기한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방안에서 전화기가 제대로 놓여 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두려운 듯 가만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굵은 남자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여보세요......."
"......."
"거기 유동림(柳東林) 씨 댁 아닙니까?"
"......."
"여보세요, 들리지 않습니까?"
"......."
"무슨 전화가 이래. 귀가 먹었나. 여보세요! 여보세요!"
"......."
"에이, 빌어먹을!"
전화가 철컥 하고 끊겼다. 남편을 찾는 전화였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비로소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벌거벗은 몸으로 난자당해 숨져 있는 남편을 낯설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아이가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이.
그녀는 비로소 자신도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부끄럽지도 않았고, 그래서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구석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시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난방 장치가 잘 돼 있고 거기다 햇빛까지 들고 있어서 방안은 따뜻하다 못해 덥기까지 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서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투성이 시체를 무슨 물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 전화가 울리고 대문 쪽에서 차임벨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녀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앉아 있은 지 두 시간은 흘렀으리라.
그녀는 갑자기 시체 쪽으로 기어가 남편의 주먹 쥔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큰 눈이 어린애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때쯤 시체의 경직 상태는 풀려 있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 주먹을 쥐고 힘을 가하자 그것은 힘없이 벌어졌다. 그와 함께 손 안에 들어 있던 것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무엇인가 분명히 움켜쥐고 죽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왼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손가락 굵기의 조그만 성냥갑이었다. 어떻게나 꽉 움켜쥐었던지 그것은 반으로 접혀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마치 무슨 벌레라도 집어드는 것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녀는 그것을 바로 펴서 안에 든 것을 뽑아보았다.
성냥개비가 세 개 들어 있었다. 세 개 다 부러져 있었다. 그것을 도로 집어넣고 디자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앞면은 빨간색이었고 뒷면은 검정색이었다. 앞면에는 조그맣게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이 검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상호가 적혀 있었다. 스낵바 '로댕의 집'-. 전화번호도 있었다.
그때 차임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녀는 흠칫 놀라 일어섰다.
그녀는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 급히 아무거나 걸쳤다.
성냥갑을 바지 속에 깊이 찔러넣고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대문은 계단을 내려간 아래쪽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내려다보였다.
밖에는 가정부와 순경이 서 있었다.
가정부는 중년 여인으로 매일 시간제로 와서 일해 주고 있었다. 집이 커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더구나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시간제로 가정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차임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한 가정부가 파출소로 달려가 순경을 데리고 온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여주인 오월은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차임벨 소리가 계속 집안을 울렸지만 그녀는 꼼짝 않고 창가에 그린 듯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화가 난 순경이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문 열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거요! 문 좀 열라구요! 문!"
순경은 손짓까지 해 보였다. 그러나 여주인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 여자, 주인 맞아요?"
순경이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가정부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처녀 같은데?"
"새댁이에요."
"그럼 왜 문을 열지 않지?"
"글쎄요. 참 이상하네요. 저렇게 보고 있으면서 왜 문을 열지 않지."
그녀는 추위에 얼어붙은 두 손을 비비면서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가만 있어, 이럴 게 아니라......."
젊고 성미 급한 순경은 대문을 벗어나 조금 위로 올라가더니 담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2 로댕의 집
그녀는 눈을 뜨기 싫어 그대로 감고 있었다. 어머니와 의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기는 어떻게 됐나요?"
"유산입니다. 당분간 몸조리를 해야겠습니다. 정신착란 증세도 있는 것 같군요."
어머니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경찰입니다. 질문 좀 해도 될까요?"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안 됩니다. 안정을 해야 되니까요."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그럽니다."
"물어봐야 제대로 대답도 못 할 겁니다. 하여간 지금은 안 됩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어머니의 흐느낌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제발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도 이렇게 울고 있지 않은데....... 그녀는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손을 잡아주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럴 수가...... 어떤 놈들이 우리 딸을...... 어떤 놈들이 우리 사위를......."
월은 눈을 떴다. 어머니의 투박스런 손이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면서,
"아가, 정신이 드니?"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 쪽에 서 있던 사나이 두 명이 침대 쪽으로 다가섰다.
"경찰입니다."
한 사나이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코가 크고 눈썹이 짙은 남자였다. 이마가 유난히도 튀어나와 있었다. 눈은 길게 찢어져서 사나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괴로우시겠지만 몇 가지 답변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
그녀는 형사를 보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부군을 해쳤는지 알고 계십니까?"
"......."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가 부군을 해쳤는지 알고 계십니까?"
형사는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건 형사는 키가 컸다. 반대로 또 한 형사는 키가 작았다. 둘이 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얘야, 아는 대로 대답 좀 하려무나."
그녀의 어머니가 형사들을 거들어 말했다. 그러나 딸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괴로우시겠지만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
형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부군은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살해했나요?"
"......."
"범인은 몇 명이었나요?"
"......."
"범인의 얼굴을 알고 계십니까?"
"......."
"놈들은 몇 시에 들어왔나요?"
"......."
"놈들은 왜 부군을 살해했나요?"
"......."
"놈들은 아주머니한테도 손을 댔나요?"
"......."
듣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발끈했다.
"오죽해야 유산을 했겠소. 그 놈들을 잡아서 오장육부를......."
"임신 중이었나요?"
"......."
형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합니다. 그렇지만 냉정히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대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그만큼 범인을 빨리 체포할 수 있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아 버렸다.
형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물러나지 않고 더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말라붙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형사들에게는 질긴 데가 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질긴 데가 있다. 그렇지만 당사자들로서는 괴로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병실로 그녀를 찾아온 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물러가지 않고 거기서 기다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무엇이라도 먹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식음을 전폐한 듯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오빠였다. 그는 누이를 부둥켜안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놈이, 어떤 놈이 이랬어? 어떤 놈이 이랬느냐고?"
흔들어대는데도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떤 놈이 이랬는지 말해 봐! 당장 가서 죽여 버릴 테다! 말해 봐! 말해 보라구!"
그는 침까지 튀기며 부르짖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그리고 가만히 오빠를 바라보다가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어머니, 누가 이랬나요? 어떤 놈이 이랬나요?"
그는 눈물을 짓고 있는 어머니를 붙잡고 흔들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당신들은 뭐요?"
그는 충혈된 눈으로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경찰입니다."
키 큰 형사가 말했다.
"경찰이라구? 경찰은 뭐하는 거야? 왜 범인을 빨리 잡아내지 못해? 범인을 빨리 잡아내란 말이야!"
그는 취해 있었다. 형사들과 비슷한 연배로 생김새며 차림새가 거칠어 보였다. 형사들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실내 분위기를 한동안 시끄럽게 만들다가 간호사들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아드님이십니까?"
형사가 넌지시 물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하나 있는 것이......."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아드님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직업도 없어요."
문이 열리더니 이번에는 중년 여인이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죽은 남자의 누나였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리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동생...... 불쌍하다...... 우리 동생...... 니가 어떻게 자수성가했는데...... 죽다니 웬 말이냐...... 세상에 이리도 원통한 일이 어디 있다냐......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고...... 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불쌍한 것...... 어려서 부모 잃고 갖은 고생 다 하다가 이제사 성공해서 먹고 살 만해지니까...... 이게 웬 날벼락이냐......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곁에서 듣고 있던 오월의 어머니가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래, 내 딸이 살아 있어서 괴롭다는 건가? 이 애도 유산까지 하고 죽었다 살아난 거나 마찬가지여. 이렇게 됐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딸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오월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그녀의 시누이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떴다. 그리고 언제 울었느냐 싶게 표독스런 표정을 지었다.
"말하시오. 할 말 있으면 하라구요. 왜 말하다가 그쳐요? 이렇게 됐으니까 할 말 있으면 다 합시다."
딸의 어머니는 딸의 눈치를 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시누이가 말을 계속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애가 결혼만 잘 했어도 이렇게 일찍 죽지는 않았다구요."
"뭐라고? 괘씸한....... 아무리 몰상식하기로 다 죽어가는 애 앞에서 위로는 못해 줄망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애가 서방을 죽였다는 거야?"
"그 애가 내 말만 들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구요. 마누라 잘못 얻으면 다 제명에 못 살아요. 마누라한테 잡아먹힌다구요."
"우리 애가 제 서방을 잡아먹었단 말이야? 이 무식한 것 같으니!"
두 여자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때 오월이 손을 쳐들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여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오월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녀와 유동림의 결혼을 누구보다도 반대했던 사람은 동림의 누나였다.
유동림의 누나는 고생스럽게 자수성가한 유일한 남동생이 가난한 집안 출신의 별볼일 없는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 데 대해 처음부터 기를 쓰고 반대했었다. 그녀는 동생이 모든 점에서 부족함이 없는 처녀와 결혼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었다. 그를 위해 적당한 처녀까지 물색해 두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헌신적으로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온 그녀로서는 그것은 당연한 기대일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가 집요한 것처럼 그녀 역시 동생을 통해 그것을 획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의 남동생은 누나의 간절한 소망을 묵살하고 보잘 것 없는 처녀와 결혼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비록 함께 살고 있지는 않지만 올케가 눈의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이 신혼 6개월만에 비명에 숨진 것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올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동생이 죽은 것은 순전히 올케 탓이라고 볼 만큼 그녀가 저주스러웠던 것이다.
사흘 뒤 장례식이 있었다.
그날 따라 진눈깨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장지는 서울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어느 공원 묘지였다.
오월은 여러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장지까지 따라갔다. 그때까지 병실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실성한 사람처럼 따라 나섰던 것이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유동림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유독 그녀만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초점 없는 시선이 진눈깨비 날리는 허공을 더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에 충분했다. 누구보다도 비탄에 젖어 몸부림쳐야 할 그녀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멍하니 서 있으니 속마음을 알 바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지독한 여자도 있을까. 그녀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 옆에 다가서서 소매를 끌어당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급기야 그녀의 시누이가 분통을 터트렸다.
"세상 천지에 제 서방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여자도 다 있네. 그럴려면 여긴 뭐하러 왔지. 하긴 제 서방 잡아먹은 여편네가 눈물이 나올라구."
그 말이 그치자 월은 시누이 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두 눈이 똑바로 시누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서슬이 시퍼랬기 때문에 모두가 긴장해서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시누이 앞에 다가선 그녀는 갑자기 오른손을 쳐들어 날쌔게 상대방의 뺨을 후려쳤다. 어떻게 세게 후려쳤던지 철썩하는 소리가 주위를 울렸고, 느닷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중년 부인은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월은 싸늘한 눈으로 시누이를 노려보다가 휙 돌아서서 자동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저럴 수가......."
사람들은 망연자실해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 중 시누이의 악다구니가 제일 힘차고 줄기찼다. 그녀는 눈밭에 주저앉은 채 땅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너 이년, 이리 와라아! 이년, 이리 와라아! 동림이가 살아 있다면 나한테 이러지는 못할 거다. 니가 나를 때렸어? 엉? 아이고, 원통한거! 지 남편 잡아먹었으니 무슨 짓 못할까만...... 그렇다고 이 나를 때려? 세상 천지에 손위 시누이를 때리는 년이 어디 있어! 서방도 죽었겠다. 이제 막판이다 이 말이지? 좋다! 좋아! 너 죽고 나 죽어보자! 너 이년! 가지 말고 이리 와라! 이리 오란 말이다!"
그녀는 버선발로 월의 뒤를 쫓아갔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따랐다. 월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있었다.
"너 이년! 그 차에서 내려어! 그게 내 동생 차지, 어찌 니 차냐? 내려어! 내리라고!"
그녀는 차문을 열고 운전석 옆자리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열 개를 갈퀴처럼 세워 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차가 앞으로 튀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기세로 보아 월이 미친 듯이 차를 몰아댈 것 같았다. 그녀는 머리칼을 쥐어뜯기면서도 운전대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때 숲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오른손을 들어 차를 막았다. 막 질주해 오던 차는 그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급정거했다. 그는 얼굴빛 하나 흐트리지 않고 차 옆으로 돌더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중년 부인을 끌어냈다.
강제로 차에 끌려 내린 부인은 한 움큼이나 뜯어낸 머리칼을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그 낯선 남자에게 대들었다.
"당신은 뭐요? 당신이 뭔데 상관이오?"
"병원에서부터 당신이 난폭하게 구는 걸 봤어요. 그만하면 됐을 텐데...... 너무 하지 않아요?"
남자는 침착하게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뭐야? 당신 뭐야?"
뒤따라 온 그녀의 남편이 삿대질하며 물었다. 낯선 남자는 주머니에서 증명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경찰이오. 아주머니 말이 이 여자가 남편을 잡아먹었다면서요? 그렇다면 연행해서 조사를 해야지요. 이 여자는 내가 데리고 가겠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닥쳐요."
형사의 위압적인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형사는 앞자리에 올라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갑시다."
하고 말했다.
차는 퉁기듯 앞으로 달려나갔다. 소복 차림의 여인이 머리를 산발한 채 운전하는 모습은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지에 덮인 하얀 눈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차도는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그래서 모든 차들은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월은 미친 듯이 차를 몰아대고 있었다. 형사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매더니 오히려,
"맘대로 달려보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산뜻한 베이지색 피아트는 길을 따라 그대로 질주했다. 목적지도 없이 그대로 달려가기만 했다.
얼마 후 차는 국도를 벗어나 아스팔트가 되어 있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속력을 줄이지 않은 탓으로 차가 마구 튀었다.
한참 그렇게 달리다가 차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와 함께 속력이 뚝 떨어졌다.
"이거 안 됐군요. 펑크가 난 모양인데......."
형사는 곁눈질로 여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운전대를 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를 오른쪽으로 붙이세요. 다른 차에 방해되지 않게......."
형사는 차에서 내렸다.
월은 형사가 시킨 대로 차를 길 오른편에 붙여 놓았다. 그는 트렁크를 열고 스페어 타이어를 꺼냈다.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추운데 차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나 여자는 밖에 서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주 능숙하게 일했다. 재크로 차체 뒤를 들어올리고 나서 호일복스로 나사를 풀어 펑크난 타이어를 빼내고 대신 새 타이어를 갈아끼웠다.
맨손으로 했기 때문에 손이 몹시 더러워졌다.
그는 눈을 한 움큼 집어 그것을 두 손 안에 넣고 썩썩 비볐다. 그리고 손을 털고 나서 여자를 돌아보았다.
"타시죠. 이번에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월은 잠자코 뒷자리에 올라탔다.
형사는 문을 닫아주고 나서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
그는 마을 가게에서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머리와 옷은 진눈깨비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차 안으로 들어온 그는 엔진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차 안은 금방 훈훈해졌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크고 투명한 눈빛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는 시선을 피했다.
"한 잔 하시면 따뜻해질 겁니다."
그는 종이잔에 술을 반쯤 따라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여인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냘픈 손을 살며시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것을 쭉 들이켰다.
그는 오징어를 찢어 내밀었다. 여인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올 모양이죠."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술을 들이켰다. 여인이 취해서 입을 열었으면 하고 그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여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수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입을 열어볼 생각이었다.
여인은 권하는 대로 술을 마셨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 여인의 그같은 얼굴이 유난히도 아름답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남편의 시신을 이제 막 묻고 나서 술 마시는 젊은 아내-. 남들은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겠지만 그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입이 얼어붙었을까.
술병이 비었다. 형사는 오징어 다리를 씹으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눈깨비의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부인께서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우리는 수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나는 상관한테 무능한 놈이라고 욕까지 먹었지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인의 말을 듣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여인은 말이 없었다.
"도와주십시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초동 수사에 실패했으니 수사는 매우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 바로 말씀을 해 주셨다면 쉽게 해결됐을지도 모르는데......."
"......."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 못 하시는 겁니까?"
그는 좀 큰소리로 물었다. 여자가 도리질하는 것이 백미러로 보였다.
"그렇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는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려 하고 있었다.
그는 작동 버튼을 눌렀다. 자동차 엔진과 히터도 껐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여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가냘픈 목소리였다.
"몇 시쯤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자정이 지난 새벽녘이었을 거예요. 불빛에 눈을 떴어요. 모두 네 명이었어요. 모두 남자였어요.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칼을......."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복면을 했던가요?"
"눈만 나오는 검은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모두가 검은색이었어요. 모자도...... 옷도, 신발도 모두 검은색이었어요."
목소리가 끊어질 듯 사뭇 떨리고 있었다.
"그 놈들...... 목적이 무엇이었나요?"
"강도였어요."
"무엇을 강탈해 갔나요?"
"돈 2백만원하고...... 패물을 모두 가져갔어요. 결혼 패물이었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가져갔어요."
"부군께서 반항을 하신 모양이죠?"
그 대목에서 그녀는 침묵했다. 그녀의 뺨 위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형사는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물건을 강탈했으면 됐지 왜 사람까지 죽였을까요? 부군께서 심하게 반항하신 모양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강도라고 하지만 쓸데없이 사람을 죽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모르신다는 겁니까? 현장에 없었어요?"
"서로 다른 방에 있었어요. 그들이 그이를 옆방으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차례대로 저를......."
그녀의 말은 여기서 끊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을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저는 기절해 있었어요. 그이의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저는 깨어날 수 없었어요. 제가 깨어났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어요."
"언제 깨어나셨나요?"
"몇 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어나 보니까 햇빛이 방안에 비쳐들고 있었어요."
그녀는 꼭 쥐고 있던 오른손 주먹을 가만히 폈다. 손바닥 위에 구겨진 성냥갑이 놓여 있었다. '로댕의 집'의 성냥갑이었다. 그것이 무슨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형사에게 주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도로 손 안에 꼬옥 움켜쥐었다.
"그들의 특징 같은 것을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건 모르겠어요.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면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무슨 특징 같은 것은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요?"
"모르겠어요.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매우 쉬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뭡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머리를 저었다.
"한 가지라도 숨기시면 안 됩니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별것 아닌 사소한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녀는 새끼손가락이 없는 범인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였다. 남편을 결박하던 범인은 분명히 왼쪽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그것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거기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에 부군께서 누구한테 협박을 받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없었나요?"
"없었어요. 그이는 고생을 했기 때문에 남의 어려운 사정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어요."
"혹시 범인들이 남편을 알고 있지 않던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이번 사건은 강도를 위장한 살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요. 수사를 혼란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왜?...... 왜 그이가 죽어야 하지요?"
감정이 북받치는지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우리 경찰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범인들의 발자국뿐이었습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그이는 성실한 분이었어요. 그런 분이 죽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는 누가 살아야 하나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형사의 귀에는 절규하는 것처럼 들렸다.
진눈깨비가 차창에 달라붙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졌다. 차 안은 밀폐된 공간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가 마침내 몸을 떨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형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뒷문을 열고 그녀의 옆자리에 다가앉았다.
"부인, 고정하십시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힘없이 그쪽으로 무너져 왔다. 형사는 얼떨결에 그녀의 상체를 감싸안았다.
"그만 고정하십시오."
형사의 품에 안긴 그녀는 마치 어린애처럼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오열했다. 형사는 더 이상 고정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실컷 울게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비통하게 울었다. 하도 비통하게 우는 바람에 형사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가슴을 축축이 적셔주고 있었다.
한참 정신 없이 울고 난 그녀는 마음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자기가 형사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을 알고 그녀는 얼른 몸을 빼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형사는 차에서 내려 뒤로 돌아갔다. 트렁크에서 걸레를 꺼내 앞으로 돌아가 유리창에 엉겨붙은 진눈깨비를 닦았다.
차 안으로 들어와 엔진을 걸고 히터를 튼 다음 차를 돌려 앞으로 나갔다. 차도로 나오자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그는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여기가 말했다.
"저 테이프를 넣어주세요."
그는 여자가 가리키는 테이프를 집어 홈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외국여자 가수의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리사 산니아가 부르는 '안개 낀 밤의 데이트'였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조용하고 느린 노래였다.
형사는 누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독과 우수가 서린 듯한 그 목소리에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 달리는 동안 그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별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진눈깨비가 얼어붙는 바람에 노면은 몹시 미끄러웠고, 그래서 집에까지 도착하는 데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나 걸렸다. 집 앞에서 헤어질 때 형사는 그녀에게 명함 한 장을 내주었다.
"앞으로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혹시 급히 연락할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전화해 주십시오."
오월은 형사가 사라질 때까지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살인과(殺人課)의 장완수(張完秀) 형사였다.
그녀는 대문으로 다가가서 차임벨을 눌렀다.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그밖의 몇 사람이 오래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지금 경찰에서 오는 거니?"
그녀의 오빠가 벌건 얼굴로 들여다보듯이 하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오빠는 차를 차고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가 앉자 모든 사람들이 둘러싸고 앉았다. 그들은 생각나는 대로 제각기 질문을 던져 왔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형사가 너를 왜 연행해 간 거야?"
그녀의 오빠 종삼(種三)은 제법 흥분해서 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그녀의 보호자연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너를 의심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자리를 펴 주면서 좀 쉬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그녀의 오빠는 집요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를 싫어했다.
종삼은 그녀와 네 살 차이인 서른둘이었다. 그는 결혼이랄 것도 없이 일찍부터 여자를 데리고 살아 그 나이에 자식을 넷이나 두고 있었다. 그런데 위인이 성실하지 못하고 덤벙대는 데다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심이 강해서 주위로부터 신망을 잃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그 역시 한 밑천 잡으려고 사기를 쳤다가 걸려들어 1년동안 옥살이를 겪기도 했다. 가장이 이러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아예 남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벌써부터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고 있었다.
종삼은 누이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자 얼씨구나 하고 매제에게 달라붙었다. 사람 좋은 매제는 처남을 자기 회사의 요직에 앉히려고 했다. 그것을 알고 오월은 극구 만류했다.
아무리 오빠라고 하지만 회사를 망쳐먹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림은 그녀의 말에 따라 처남을 채용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종삼은 분개했다. 그는 누이집으로 달려와 방바닥을 두드리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녀는 남편 보기가 민망했지만 끝내 오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종삼은 걸핏하면 술에 취해 누이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곤 했다. 동림은 참다 못해 어느 날 처남에게 대들었다. 서열로 따지면 그가 손아래였지만 나이는 처남보다 여섯이나 위였다. 그날 그들은 대판 싸웠다. 사람 좋은 동림이 화를 내니 무서웠다. 종삼은 끝내 슬슬 도망치다시피 누이집을 나왔고 그 다음부터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그러던 차 동림이 죽은 것이다.
종삼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누이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하고 싸운 게 마음에 걸린다. 너한테도 볼 면목이 없고...... 내 성질이 못 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라."
그녀는 오빠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의 말은 벌레처럼 그녀의 귀를 후벼들고 있었다.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했을 텐데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만...... 어서 일어나서 그 사람이 하던 일을 정리해야 되지 않겠니?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내 생각은 이렇다. 넌 여자니까 아무래도 그런 일을 처리하기에는 너무 무리야. 잘못 하다가는 남자들한테 먹힐지도 몰라. 남자들이란 모두가 도둑놈들이니까 말이야. 돈 많은 청상과부를 남자들이 가만 놔둘 리 없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돈을 울궈내든가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들 거다. 우리는 거기에 대비해야 해. 그렇게 생각지 않니?"
그녀는 이불 속에서 성냥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제발 오빠가 그만 나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늘어붙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대로 집에 앉아 있고 모든 일은 내가 처리했으면 한다. 이건 사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네 오빠로서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넌 그대로 잠자코 있어. 내가 잘 처리해 줄게. 제일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할 문제는 회사를 그대로 우리가 경영을 하느냐 아니면 처분을 하느냐 하는 건데....... 그야 물어볼 것도 없이 우리가 경영을 해야겠지. 유서방이 피땀 흘려 세운 회산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회사를 그만둘 수야 없지. 그건 고인에게도 욕되는 일이야. 아무리 어렵더라도 회사는 우리 손으로 운영해 나가야 해."
오월은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불 속에는 6개월 간의 달콤했던 신혼의 꿈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남편의 체취를 맡으려는 듯 얼굴로 이불 속을 헤집었다.
"너는 나를 어찌 볼지 모르지만......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야. 이젠 나도 나이를 먹은 만큼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하여간 믿고 맡겨도 좋을 거야. 이럴 때야말로 서로 피를 나눈 형제간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모든 건 나한테 맡겨. 매제 이상으로 잘해 낼 테니까."
이게 어째서 그이의 손 안에 들어 있었을까?
그녀는 성냥갑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그이는 왜 이것을 움켜쥐고 죽었을까? 이것이 그이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꼭 쥐고 숨을 거둔 게 아닐까?
만일 이것이 남편의 것이라면 그이가 스낵바 '로댕의 집'에 갔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남편은 술담배를 전혀 못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다.
혹시 사업상의 일로 그곳에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담배도 안 피우면서 성냥을 왜 가지고 다닐까.
아니야. 이것은 남편의 것이 아니야. 범인들이 떨어트린 거야. 놈들 중의 하나가 담배를 피우려고 꺼냈다가 방바닥에 그대로 털어트리고 간 거야. 그것을 남편이 주웠을 것이다.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집어 챙긴 것이다. 비록 자기가 죽더라도 범인들을 잡아서 복수해 달라는 뜻으로.
그녀는 성냥갑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여보, 복수해 드릴게요. 반드시 찾아서 복수해 드릴게요. 그들이 어디를 가든 쫓아가서 찾아내고 말 거예요. 찾아서 기필코 복수하고 말 거예요. 그들은 당신과 우리 아기를 살해한 놈들이에요. 저는 당신을 바로 뒤따라 가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악에 굴복해서 일가족이 모두 죽을 수는 없다고 말이에요. 악을 뿌리 뽑은 뒤에 죽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보,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녀가 마음 속으로나마 남편을 여보라고 불러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터지려는 울음을 집어삼켰다.
오빠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또 하나 문제되는 것은 시가 쪽 사람들을 어떻게 막아내느냐 하는 거야. 오늘 보니까 시누이 되는 여자 보통이 아니더라. 너를 잡아먹으려고 하더라. 자기 동생이 결혼을 잘못해서 죽었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방정맞은 말이 어디 있니? 성질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더라만 너를 봐서 참았다. 네가 그 여자 귀싸대기를 후려친 건 백 번 잘한 일이야. 정말 내 속이 다 시원했다. 헌데 내가 보기에는 그 여자가 동생 유산을 너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것 같지가 않아. 자기 동생이 너와 오랫동안 결혼 생활한 것도 아니고 겨우 6개월 살다가 죽었는데 동생 재산을 고스란히
네가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거든. 그렇다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더욱 그럴 거란 말이야. 너한테 자식만 하나 있더라도 그 여자의 입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오월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오빠를 쏘아보았다.
"제발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제발 나가 주세요."
그녀는 외치듯이 말했다.
종삼은 누이의 기세에 눌려 머뭇거리다 일어섰다. 그는 물러가면서도 아쉬운 듯 한마디 했다.
"모두 너를 위해서 한 말이야. 잘 생각해서 해."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경찰 수사팀은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단서 하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놓고 조사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들은 활기를 잃고 침몰했다. 남은 것은 허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위에서는 독촉이 성화같았지만 그렇다고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사본부는 사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파출소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날 따라 모두가 밖에 나가는 것을 기피하고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밖에 나가 보았자.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안에서만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은 미궁으로 빠질 것 같은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에 동의를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부인도 하려 들지 않았다.
말을 꺼냈던 사람은 동의를 구하는 듯 다시 한마디 했다.
"완전 범죄야. 내가 보기에는 그래."
역시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기에 동의한다는 빛이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장완수는 창가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밖은 눈이 오려는지 잔뜩 흐려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잠시 초점을 잃고 방황했다. 그는 아까부터 하나의 얼굴을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 얼굴은 남편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는 한 아름다운 청상과부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참 곤란한 일이었다.
살인과 전담 형사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감상적인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터였다. 살벌한 세계에서 오랫동안 몸담아 오다 보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비정한 사나이로 변해 있었고, 그래서 특히 여자에 대해서 둔감하리만치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그가 서른여덟의 나이에 여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데에는 다분히 그러한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위처럼 냉담한 그의 가슴에 느닷없이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소년처럼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왜 이러지. 그는 조소하듯 픽 하고 웃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은 장례식이 있던 날 차 안에서 그 청상과부를 껴안고 나서부터였다.
그때 그는 소복 차림으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가 너무 딱해 보였기 때문에 단지 위로해 줄 생각으로 뒷자리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면 그는 그녀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으로 몸을 던져 왔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독특한 체취에 깜빡 취해 버렸던 것이다. 몸을 떨며 오열하는 여인에게서 풍겨오던 그 진한 체취는 그때 이후 그를 떠나지 않고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냉소로 그것을 지우려 해 보았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다. 내가 감기를 앓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감기라면 독감이다.
그는 문득 그 젊은 여인이 보고 싶어졌다.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를 보고 싶다는 것은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는 끌리듯이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어느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의 뒤를 키 작은 형사가 따라왔다.
그들은 한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키 작은 형사는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장형사보다 여덟 살 아래인 갓 서른으로 좀 뚱뚱한 편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답답해서 그냥 나왔어."
그들은 땅을 내려다보면서 걸어갔다.
"또 눈이 내리는데요."
"음......."
"모두가 일손을 놓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미궁으로 빠지는 거 아닙니까?"
"개소리 하지 말라고 해!"
그는 상대방이 놀랄 정도로 벌컥 화를 냈다.
"완전 범죄란 이쪽이 손을 놓을 때 가능한 거야. 어느 한계에 이르면 모두가 손을 놓아 버리지. 그것이 고빈데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단 말이야."
"무슨 꼬투리라도 있어야 시작할 거 아닙니까?"
키 작은 형사는 힘든 상대를 만났다는 듯이 말했다.
"꼬투리가 절로 굴러오는 줄 알아? 찾으러 다니지 않으면 절대 손에 들어오지 않아. 자넨 말이야, 나 따라다니려면 고생깨나 할 거야. 각오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단단히 애먹을걸. 따라다니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아."
그들은 멈춰서서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준배(黃俊培)는 선배 형사를 처음 보았을 때 목석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두 달 전이었는데 지금도 그런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형사는 상의하는 법도 없이 거의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 일하게 된 후배 형사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상대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자기 혼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탈길 아래에 도착했다. 그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맨 위쪽에 검은 벽돌로 지은 2층 집이 있었다. 그 집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들은 비탈길 아래에 서서 그 집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하얀 소복차림의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떨어져 있어서 얼굴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남편을 잃은 그 젊은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녀의 모습은 꽃무늬가 있는 짙은 갈색 커튼에 반쯤 가려 있었다.
"그 여자가 서 있는데요."
장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서 있는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미인이에요"
황형사는 결혼한 몸이었다.
"앞으로 저 여자 어떻게 될까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장형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말 안 됐어요. 약간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던데요. 정신착란 비슷한가 봐요."
장형사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유일한 목격자니까 뭔가 나올 법도 한데 안 나오거든요."
앰뷸런스가 한 대 그들 옆을 지나 비탈길을 올라갔다. 그들은 걸음을 빨리 했다. 앰뷸런스는 검은 벽돌집 앞에 서 있었다.
그 집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럴 수가......."
장형사는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Y정신병원인데요."
황형사가 앰뷸런스에 적힌 병원 이름을 보면서 말했다.
"증상이 심한 모양인데요."
그때 사람들이 집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오월의 모습이 보이자 장형사는 뒤로 물러섰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 간호사가 옆에서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그녀는 무섭게 말라 있었다. 그녀는 소복 차림이었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있었다.
장형사를 발견하자 그녀는 뚫어지게 그를 쏘아보았다. 완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은 차에 오르기 전 잠시 주춤거렸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차에 올랐다. 딸의 옷자락을 붙들고 통곡하는 어머니를 간호사가 떼어놓았다.
"입원해야 할 정도인가요?"
장형사는 오월의 오빠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에 통 잠을 안 자요. 그리고 헛소리만 자꾸 하고 말입니다. 밤에는 문을 열어놓고 밤새 남편을 기다려요. 할 수 없이......."
종삼은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다.
"보호자 되시는 분 한 분만 타십시오."
남자 간호사가 말했다.
종삼이 차에 오르자 장형사도 뒤따라 차에 올랐다. 황형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형사는 그가 차에 오르려는 것을 막았다.
"자넨 따라오지 않아도 돼."
"한 분은 내리십시오."
남자 간호사가 퉁명스럽게 장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갑시다."
장형사는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그것을 보고 간호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출발했다. 차가 달리는 동안 오월은 줄곧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시내를 벗어났을 때 눈발은 어느새 미친 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고 있는 오월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천진스러웠다. 그녀는 갑자기 어린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장형사는 아무 말 없이 줄곧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한 번 돌아봐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녀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1시간 30분쯤 지나 앰뷸런스는 숲속으로 난 조그만 길로 들어섰다.
Y정신병원은 숲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간단한 수속을 끝낸 다음 오월은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젊은 의사는 보호자로부터 대충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쇼크로 그러는 수가 있지요. 심장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런 쇼크를 감당해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연약한 사람은 십중팔구 자신을 지탱해 내기가 힘들지요."
의사는 환자의 눈과 입을 들여다보고 몸에다 청진기를 갖다 댔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멀거니 앉아 있었다.
"초점이 틀려 있군."
의사는 백지와 볼펜을 꺼내 놓았다.
"이름과 주소를 써 봐요."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걸 읽어 봐요."
의사는 신문을 펴놓고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역시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데리고 가요."
의사가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간호사는 환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얼마나 입원해 있어야 되나요?"
장형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쇼크를 먹은 거니까 장기간 치료는 필요 없을 겁니다. 경과를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 먹지를 않아 몸이 쇠약해져 있으니까 몸을 건강히 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장형사는 급히 환자 뒤를 따랐다.
어둠침침한 복도를 따라 잠자코 걸어가던 오월은 복도의 막다른 곳에 이르자 갑자기 뒤로 돌아서면서 간호사를 뿌리쳤다.
"싫어!"
그녀는 소리쳤다. 철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간호사가 뛰어나왔다. 두 명의 간호사는 양쪽에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환자들이 우우 하고 시위를 했다.
그것은 심히 억눌린 듯한 음울한 소리였다.
"아우슈비츠...... 싫어요! 죽기 싫어요!"
오월은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맹렬히 몸부림쳤다. 남자 간호사들은 난폭하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마침내 그녀는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철문이 쾅하고 닫혔다.
"내보내 줘요! 싫어요! 싫어요!"
문 저쪽에서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는 차츰 멀어지다가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장형사는 한동안 그곳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오종삼은 어느새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장형사는 자신이 왜 거기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귀에는 오월의 울부짖는 소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우슈비츠 - 그녀는 그곳을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병원을 따라온 것을 후회했다. 그녀에 대해 관심이 지나친 것 같았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는 관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담당 의사를 찾았다.
"언제부터 면회할 수 있나요?"
"면회는 일주일 정도 지나서 하십시오."
"잘 좀 부탁합니다. 불쌍한 여자니까......."
의사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1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장형사는 오월을 찾아갔다.
오월은 독방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녀는 푸른 환자복 차림에 머리를 뒤로 묶고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침대 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장형사를 보자 그녀는 당황하는 표정이다가 얼른 그를 외면했다.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장형사는 창가에 기대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범인들을 잡았나요?"
그녀가 갑자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기 때문에 그는 깜짝 놀랐다.
"아직 못 잡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단서가 하나도 없어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범인은 네 명이에요. 모두 검은 옷 차림이었어요."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밖에......."
"한 사람은 목소리가 몹시 쉬어 있었어요."
"네, 그전에 말씀해 주셨지요. 그보다 부인께서 얼른......."
"그들은 두 사람을 죽였어요. 그 분과 우리의 아기까지...... 나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들을 찾아야 해요. 찾아내서 이리로 데려와 줘요. 얼굴을 좀 보고 싶어요."
"그들을 찾으려면 부인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저는 협조해 드릴 일이 없어요. 미안하지만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어요."
장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은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인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겁니다. 벌써 보름이나 지났는데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다음의 그녀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는 순식간에 옷을 모두 벗어 버렸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저를 가지고 싶으시죠? 자, 가지세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이미 임자도 없고 버린 몸이에요. 자, 가지세요."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는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이오? 옷을 입어요."
"옷을 입으라고요? 제가 필요하지 않으시나요?"
그녀는 젓가슴을 두 손으로 받쳐 들면서 허리를 들었다.
"저를 가지세요. 그 대신 목숨만 살려 주세요. 목숨만 살려 주면 모든 걸 다 드리겠어요."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더니 그의 한 손을 잡아 손 등에 입을 맞추었다.
"저를 가스실로 보내지 말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살려만 주시면 당신을 잘 모시겠어요."
"여긴 수용소가 아니에요. 나는 독일군이 아니오."
"살려 주세요."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자, 이리 와요."
그는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침대 위에 누워 그를 안을 듯이 두 팔을 벌렸다.
"당신도 이리 오세요. 최고로 서비스해 드릴게요."
그는 그녀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대로 누워 있어요. 일어나면 안 돼요."
"안아줘요."
그녀는 여전히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굽혀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더니 그의 입에 맹렬히 입을 맞추었다. 한참 그러고 난 후,
"저를 살려 주시는 거죠?"
하고 물었다.
"물론......."
그는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안심해도 돼요. 나는 당신 편이니까."
"그럼 우리 함께 도망쳐요. 저기 스위스로 도망쳐서 살아요, 네?"
"그럴까."
"저는 당신 아이를 낳을 거예요. 당신을 닮은 아들을....... 참, 당신 이름이 뭐죠?"
"나는 장완수요. 그때 명함을 주었을 텐데......."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때렸다.
"나가요! 악마! 나가라구요!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그녀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그녀는 젖가슴을 드러낸 채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이 사람이 나를 강간하려고 했어요! 데리고 나가요."
"나가시죠."
간호사의 말에 그는 밖으로 나왔다.
"가끔 저렇게 발작을 하죠. 우리도 오해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면회는 그에게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그녀를 찾아갔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녀의 병세는 호전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입원한 지 보름쯤 지나자 발작 증세가 없어지고 점점 안정되는 기미를 보여 갔다. 그리고 그를 알아보고부터는 그의 면회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까지 보였다.
그는 왜 자신이 그녀에게 그렇게 극진한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를 극진히 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스스로에게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오월은 자신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을 알고부터는 거의 매일 밤을 눈물로 지냈다. 그런 일이 얼마쯤 지나고부터는 눈물을 거두고 하루 빨리 완쾌되어 퇴원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입원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는 그녀는 거의 완쾌되어 있었다.
2월 하순 그녀가 퇴원을 며칠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오후 장형사는 서른번째 면회를 왔다. 며칠째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던 터라 날씨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장형사가 오월을 데리고 잔디밭으로 나왔다. 잔디밭 한쪽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벤치 쪽으로 걸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장형사는 서투른 솜씨로 사과를 깎아주자 그녀는 잠자코 받아 먹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남들이 보기에는 스스럼없는 부부 사이처럼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형사는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대해 오월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 결혼하시게 됐나요?"
그녀의 하얀 손에 들려 있던 사과 조각이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평범한 만남이었어요."
그는 아차했다. 공연히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후회했지만 그녀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제가 공연한 것을 물었군요. 미안합니다.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말씀드리겠어요. 전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전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듣겠습니다."
병원 입구로 검은색의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 보기에도 그것은 낡은 차였다. 아마 면회를 온 것 같았다.
"우리가 만난 건 10년 전이었어요. 저는 그때 열여덟이었고 그 분은 스물여덟이었어요. 열 살 차이였지요. 그 분은 S대 건축과 4학년생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기 때문에 나이가 그렇게 많았어요. 그 분을 알게 된 건 그 분이 우리집에 가정교사로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그 분은 제 가정교사로 들어온 거예요. 그때 저는 여고 3학년이었는데 학교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게 된 거예요."
낡은 승용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남자였다.
장형사는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월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분은 부모를 일찍 여읜 고아로서 누님과 함께 어렵게 성장했어요. 물론 두뇌도 명석했고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저는 제가 그 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분은 애써 그런 감정을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뒤늦게 오월의 부모는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고 가정교사를 불러 어린 여학생을 가르치지는 않고 그런 못된 짓을 하느냐고 준열히 꾸짖은 다음 그를 내쫓았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들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오히려 그전보다도 더 뜨겁게 지속되었다.
그렇게 첫사랑에 빠졌으면서도 그녀는 다음 해에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고, 한편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1년 후 그녀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급 공무원이었다. 위인이 성실해서 30년 가까이 오로지 공직 생활에만 몸바쳐 오는 동안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해 공무원으로서 비교적 성공한 경우에 속했는데, 말년에 마가 끼었던지 업자로부터 향응을 받고 얼떨결에 뇌물까지 받아 먹은 것이 탄로나 하루 아침에 직위를 박탈당하고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몇 달 후 풀려나오기는 했지만 그 충격이 몹시 컸던지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내리막길이었어요. 공무원 집안이니 모아 놓은 재산은 있을 리 없고 퇴직금 한 푼 못 받았으니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어요.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했어요.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했으니까요."
한 사나이가 차 안으로 도로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병동 쪽으로 움직였다. 그 사나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갔다. 차 안에 들어가 앉은 사나이는 대머리였다.
"그 분은 자기한테 의논도 하지 않고 제가 학업을 포기하고 취직한 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냈어요. 그때 그 분은 1년간 외국에 나가 있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뒤늦게 제 사정을 알게 된 거지요."
사나이가 마침내 병동 앞으로 걸어갔다.
장형사는 눈을 돌려 맞은편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오월은 완전히 완쾌된 듯이 보였다.
"그 분은 다음 학기에 제 등록금을 대줬어요. 그리고 우리집 생계비도 매달 대줬어요. 제가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어요. 저는 한 남자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고 집요할 수 있는가를 바로 그 분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그 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지요. 바꾼 정도가 아니라 너무 감동해서 울기까지 하셨어요."
그 사나이는 바바리코트 속에 두 손을 찌르고 있었다.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것이 어쩐지 불량해 보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이 뾰족한 것이 표독스런 인상이었다. 껌을 씹어대고 있었다.
총무과 여직원은 그 사나이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네? 뭐라고 하셨죠?"
하고 되물었다.
"면회 왔다구요."
사나이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누구 면회 오셨나요?"
"오월이오."
"네?"
"오월이란 여자 말이오."
"아까 누가 면회 온 것 같던데......."
"누가 면회 왔어요?"
안경 너머에서 사나이의 눈이 번득였다.
"글쎄 지금 담당자가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여직원은 그 사나이가 좀 두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담당자는 어디 갔어?"
사나이는 껌을 짝짝 씹으며 물었다.
"식사하러 갔어요."
"병실은 어디지?"
여직원은 사나이의 반말 지껄이에 은근히 불쾌했다.
"어떻게 되시죠?"
"오빠요, 오빠."
사나이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담당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뭐라고?"
사나이는 눈을 부라렸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얼른 면회하고 지금 공항에 나가야 해요. 담당자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까 잠깐 얼굴만 좀 보고 갑시다."
여직원이 여기서 조그만 더 버텼다면 그와 같은 불행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사나이가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처럼 눈을 부라리며 면회를 요구하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내전화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오월 씨 면회예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나이를 올려다보았다.
"2층으로 올라가세요."
사나이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2층을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쇠창살로 된 저쪽에 남자 간호사가 앉아 있었다.
"오월 씨 면회 오셨나요?"
사나이는 말없이 끄덕였다.
"가만 있자, 아까 어떤 분이 데리고 나간 것 같은데......."
둔하게 생긴 간호사는 일어서면서 기지개를 폈다.
"누가 데리고 나갔어요?"
"항상 오시는 분이 있어요. 아저씨라고 하는 분인데...... 잠깐 기다려 보세요. 방에 있는지 가보고 오지요."
간호사는 오월의 방으로 가보았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조그마한 방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각 방들은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여유가 있는 환자들이 들어 있는 독방들이었다.
남자 간호사는 철문에 뚫려 있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환자가 방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 간호사는 환자의 얼굴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돌아왔다. 그리고 면회인에게 말했다.
"나간 줄 알았는데 안에 있습니다. 209호실입니다."
창살문이 열리자 사나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209호실 앞에 이르자 그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여자가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창가에 서 있었다. 머리는 산발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복도를 휘 둘러본 다음 주머니에서 면장갑을 꺼내 재빨리 두 손에 끼었다. 왼쪽 손가락은 네 개뿐이었다.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그는 철문 손잡이를 가만히 비틀었다.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환자는 꼼짝도 않고 서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잠시 주저했다.
만일 여자가 뒤돌아보았다면 그는 틈을 주지 않고 그녀를 공격했을 것이다.
문을 닫고 그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는 칼, 다른 하나는 넥타이. 칼은 다급하게 대처해야 할 때 필요한 무기였다. 그것은 단번에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그 대신 피를 흘리게 하기 때문에 좀 지저분하다. 손이나 옷에 묻기라도 하면 더욱 꼴사납다.
넥타이는 시간이 좀 걸린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칼에 비하면 깨끗하다. 그는 턱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목에 감겨 있는 넥타이를 천천히 잡아 뽑았다.
여자의 뒤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넥타이를 풀리지 않게 양 손에 단단히 감았다. 바싹 다가섰다. 여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서려는 순간 넥타이로 그녀의 가냘픈 목을 휘어감았다.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틀려고 했다. 그러나 바싹 뒤로 당겨졌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높이 울려퍼지기 전에 막히고 말았다.
긴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고 두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여자가 무릎을 꺾자 그녀를 끌고 뒷걸음질쳤다.
장형사와 오월은 벤치에서 일어나 잔디밭 위를 나란히 걸었다.
오월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고 그는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분 덕분에 저는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 분의 일을 돕게 됐어요. 그 분은 그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조그만 사업을 하나 시작했어요. 남의 밑에서 월급받는 생활이라는 것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그 분이 따로 나와 독립을 한 거예요. 저는 그 분의 재질과 실천력 그리고 의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발벗고 나서서 그 분을 도왔어요. 그 분인 벌인 일은 역시 건설업이었어요. 그 분은 자기가 배운 지식을 온통 거기에다 쏟아넣었어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정말 피눈물나게 일했어요."
그들은 돌아서서 연못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가끔씩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희고 긴 목이 눈부시게 드러나곤 했다.
"그 분은 처음 은행 돈을 끌어다가 연립 주택을 하나 지었는데 그게 단기간에 매진되었어요. 값도 싸고 좀 특색있게 지었기 때문이었어요. 스타트가 좋았기 때문에 다음에는 좀더 크게 일을 벌일 수가 있었어요. 두번째도 역시 성공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그 분의 사업은 제대로 자리잡히기 시작했어요. 사무실도 커지고 직원도 늘어났어요. 사업 규모도 놀라울 정도로 신장되어 갔어요. 그 분은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 전에는 결혼식을 올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도 그 분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기다릴 수가 있었어요. 우리는 8년이라는 긴 연애 기간을
거쳤지만 그때까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었어요. 그 분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 분의 인내심은 대단한 것이었어요. 그 분은 결혼할 때까지 저에게 손 하나 대지 않았어요."
아까 차에서 내려 병동 안으로 들어갔던 사나이가 밖으로 나왔다. 면회 온 사람치고는 유난히도 빨리 나오는 것 같았다. 환자를 면회 온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장형사는 생각했다. 사나이는 꽤 서두르는 것 같았다. 사나이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오르자 차는 급히 출발했다.
"그 분은 사업을 시작한 지 수 년 안에 많은 돈을 벌었어요. 그것은 전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운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그 분의 피땀의 결정이었어요. 그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어요. 그 분은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손수 설계하고 지었어요. 그리고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 분은 정말 멋지고...... 의연하고...... 자기 의지대로 사는 분이었어요."
그들은 다시 벤치에 앉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장형사는 위로의 말을 한다는 것이 너무 형식적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도......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구요. 저는 기독교 신자예요. 그래서 저는 수없이 하늘에 물었어요. 왜 저와 상의도 없이 그 분을 데려갔느냐고 말이에요. 그러나 하늘에서는 대답이 없었어요."
미풍이 그녀의 머리칼을 날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었다.
"저는 시누이의 말에 화를 내고 따귀를 때리기까지 했어요.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시누이의 말이 옳았던 것 같아요. 그 분은 저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비명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건 잘못된 억지 생각입니다."
장형사는 그녀를 들여다보듯이 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분이 누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비명에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 분의 누님은 그 분을 다른 여자와 결혼시키려고 몹시 애를 썼어요. 그러나 그 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그 분은 오로지 저밖에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누님 말씀을 들으라고 하면 그 분은 몹시 화를 냈어요. 그 분은 저와 결혼했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저도 함께 따라갔어야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그 분한테 부끄러워요."
"그 분은 부인께서 열심히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쳐갔다.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제가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저는 잘 알고 있어요. 병원에서 나가는 길로 그 일에 착수하겠어요."
"무슨 일인가요?"
그들은 병동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차 아시게 되겠지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돌아가세요. 그 동안 면회 와 주신 것 정말 감사해요. 이제는 오시지 않아도 돼요. 저 혼자 충분히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어요."
장형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부축하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들이 2층의 창살문 앞에 이르렀을 때 남자 간호사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간호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밖에서 이제 들어오시는 건가요?"
"네......."
그녀가 가만히 대답했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장형사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까 어떤 남자가 오월 씨를 만나러 왔었는데요."
"그래서?"
"조금 전에 떠났어요. 오월 씨 방에 가서 만나보고 떠난 줄 알았는데요. 못 만나셨나요?"
"아니오. 이 분밖에 만난 사람이 없어요."
오월은 장형사를 가리켜 보았다.
남자 간호사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참 이상하네."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남자 간호사는 더듬거리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장형사는 오월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오월과 간호사가 따라갔다. 병실로 들어선 장형사는 방안에 벌어져 있는 광경에 주춤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다가 돌아서서 소리쳤다.
"안 돼! 들어오면 안 돼!"
그러나 오월은 이미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 그리고 빨리 의사를 불러!"
장형사는 악을 썼다. 간호사가 오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장형사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목에 넥타이가 감긴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혀를 빼물고 있었다. 맥을 짚어보았지만 이미 끊어져 있었다.
조금 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신분을 밝힌 다음 의사 한 사람과 원장을 남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질식사했습니다."
의사가 시체의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내면서 말했다.
"넥타이는 거기에 놔두시오.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검증이 끝날 때까지는 시체를 치워서도 안 됩니다."
"우리 병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거 정말 큰일인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원장은 두 손을 비비면서 울상을 지었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그리고 보호자한테는 세 시간 후에 연락하십시오. 경찰 조사가 끝난 뒤에 말입니다."
장형사는 그들을 데리고 원장실로 갔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장실이 제일 나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월과 범인을 들여 보냈던 남자 간호사도 불러들였다.
그는 먼저 수사본부에 전화를 건 다음 남자 간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죽은 여자는 누구지?"
"201호실 환자입니다. 이름은 이길자라고......."
"그 환자는 입원한 지 두 달쯤 됩니다."
원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헌데 그 여자가 어째서 209호실에서 죽었지? 오부인의 방에서 말이야?"
그는 턱으로 오월을 가리켰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오월이 대신했다.
"그 여자는 저하고 친했어요. 그래서 제 방에 잘 놀러 오곤 했어요."
그녀는 떨고 있었다.
장형사는 모처럼 회복된 그녀가 도로 병이 날까봐 몹시 걱정되었다.
"제가 밖에 있는 동안 제 방에 놀러 왔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에요."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좋은 여자였는데...... 저 대신 죽은 게 분명해요."
하고 말했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형사는 원장에게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을 어디 안전한 곳으로 모시도록 하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도 접근시켜서는 안 됩니다."
"경비원을 세우겠습니다."
원장은 직원을 불러 몇 가지 필요한 지시 사항을 알린 다음 오월을 데려가게 했다.
조금 후에 범인과 처음 대면했던 총무과 여직원도 원장실로 불려왔다. 그녀는 범인을 통과시키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로써 범인을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은 간호사까지 합해 두 사람인 셈이었다.
장형사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곧 범인이 낡은 승용차를 타고 왔던 자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자들이야!'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범인은 두 명이었다. 대머리는 차 안에 남아 있었고 베이지색 바바리 차림의 사나이는 병동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들이 급히 병원을 떠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을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고 무심코 보았던 것을 그는 몹시 후회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그는 수사본부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차를 급히 수배해 줘요. 검은색 낡은 승용차인데 차종은 브리사 같기도 하고 제미니 같기도 하고......? 아니, 포니가 맞을 거요. 범행 차량이니까 만일 서울로 갔다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테니까 검문 검색을 철저히 해줘요. 그밖에 다른 도로에도 비상을 걸어줘요. 어디로 빠졌는지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 범인은 두 명인데 한 명은 대머리에 검정 가죽 점퍼 차림이고...... 또 한 명은 베이지색 바바리 차림이고...... 나이는 35세 정도......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표독스런 인상......."
"대머리의 인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긴장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대머리의 인상은 몰라요."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구겨진 담뱃갑에 하나 남아 있는 담배를 꺼냈다. 담배는 구겨져 있었다. 그것을 편 다음 지포라이터로 불을 켜서 담배에 붙였다.
"그 남자가 분명히 오월 씨를 찾았었나?"
그는 남자 간호사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틀림없이 오월 씨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209호실 쪽으로 가서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안에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를 오월 씨로 봤단 말이지?"
원장이 안경 너머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물었다. 남자 간호사는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네, 안에 사람이 있기에 209호실 환자인 줄 알았습니다. 201호실 환자가 거기에 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얼굴만 봤더라도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시끄러! 바보 같으니!"
원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정복 경찰관들과 사복 차림의 수사관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기자들도 몰려왔다.
기자들을 보자 원장은 벌떡 일어나서 그들을 억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안 돼! 당신들은 들어오면 안 돼! 나가요! 나가!"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 병원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지만 기자들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둘 리 만무했다. 그들은 원장을 밀어붙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냄새를 맡았지?"
장형사는 비밀 유지가 실패로 끝난 것을 개탄했다.
"갑자기 몰려들 가니까 눈치를 채고 따라온 겁니다."
그의 파트너인 황형사가 말했다.
"한 시간도 비밀이 유지 안 되니 해먹을 수가 있나."
장은 황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범인들이 오부인을 노리고 있어. 여기까지 찾아와서 죽이려고 한 거야. 대신 억울하게 다른 여자가 죽었지만 실패한 것을 알면 놈들은 다시 오부인을 노릴 거란 말이야."
"오부인 남편을 죽인 놈들인가요?"
"그 놈들밖에 더 있겠어."
"왜 그 놈들이 오부인을 노리죠?"
장은 답답한 듯이 황을 바라보았다.
"난들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앞으로 우리가 밝혀내야 할 일이야. 그건 그렇고 기자들이 오부인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해줘. 따돌릴 수 있으면 따돌려. 너무 쇼크가 커서 병이 재발할지도 몰라. 기회를 봐서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겠어. 하여간 기막히게 운이 좋은 여자야. 두 번씩이나 목숨을 건진 걸 보면......."
"부인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숨겨 뒀어.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 차를 준비시켜 줘. 정문 쪽에다 대기시켜."
그는 오월이 들어 있는 방으로 가면서 왜 범인들은 그녀를 남편과 함께 죽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병원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발자국 소리가 꽤나 요란스러웠다.
그는 병실로 통하는 2층 출입문을 잠그게 했다.
"아무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요. 비상구를 열어 둬요."
병원 직원들에게 그렇게 이른 다음 그는 방으로 들어왔다.
오월은 침대가에 떨며 앉아 있었다. 그를 보자 그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이제 마음을 놓아요."
장이 옆으로 다가앉으며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는 발작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잡으며 상체를 기대 왔다.
"무서워요."
그녀는 참새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장은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젠 괜찮아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장형사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그럽시다. 여기엔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요."
"집으로 데려다 줘요."
"집은 안 좋을 텐데. 범인들이 노릴 테니까 말이오."
"그래도 집으로 가겠어요."
"그럼 우선 집에 가 있다가 안전한 방도를 생각해 봅시다."
장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2층 출입구 쪽에서는 기자들이 문을 열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들은 비상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숲을 가로질러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 앞에는 경찰 패트롤카가 대기하고 있었다.
황형사가 뒷문을 열어주자 오월은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녀는 환자복 차림 그대로였다.
장은 오월과 함께 뒷자리에 앉고 황은 운전석 옆자리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자 장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그녀의 손은 뜨거웠다.
"그 분을 죽인 사람들이 분명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놀랍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아요."
장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왜, 왜 그러죠? 저는 알 수가 없어요-. 왜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저는 누구한테 죽을 죄를 진 적이 없어요. 원한을 살 만한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저를......."
"그만...... 그만해요."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그 분을 죽였으면 됐지, 왜 저까지....... 그 분을 죽인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죠."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아마 오해일 겁니다."
장은 겨우 그렇게 말했다.
"오해라구요?"
"네, 놈들은 뭐가 오해를 하고......."
"아니에요. 그들은 저를 죽여야 한다는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왔어요."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는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황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배 차량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월은 엄중히 경호되었다. 신문이 두번째 사건을 첫번째 사건과 결부시켜 대서특필했다.
두 명의 사나이가 명동의 어느 다방에 앉아 신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틀리지 않아?"
대머리가 눈을 치뜨면서 물었다.
"아니, 이럴 수가......."
광대뼈가 튀어나온 젊은 사내가 낮게 신음을 토했다.
"엉뚱한 여자를 죽였어."
"이럴 수가......."
젊은 사나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바보 같으니...... 확인도 하지 않고 죽였나?"
"그 여자인 줄 알았습니다. 생긴 것도 비슷하게 생겼기에 그만......."
"바보 같은 자식...... 실수를 하다니......."
대머리는 상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해치우겠습니다."
젊은 사나이는 주눅들어 말했다.
"보고하지 않으면 안 돼. 이미 알고 있을 거란 말이야."
대머리는 일어나서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공중전화는 박스 속에 설치되어 있어서 누가 엿들을 염려가 없었다.
"병신 같은 놈들......."
기다렸다는 듯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상대는 신문을 보고 이미 사태를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머리는 전화통에다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닥쳐! 더 이상 할 말이 있나?"
"어, 없습니다."
"너희들은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더욱 시끄럽게 만들어 놓았어. 여러 가지로 시끄럽게 만들었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런 실수는 용서 못해. 이젠 그 여자를 제거하기가 아주 어려워졌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그렇습니다."
"경찰이 감싸고 돌 거란 말이야."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제거하겠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
"다음에는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했다면 실수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할 수 있어?"
"네, 자신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실수하지 말고 꼭 해치워."
"반드시 해치우겠습니다."
"경찰의 감시가 심할 테니까 조심해."
"알겠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머리는 이마에 번진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3월 중순.
따뜻한 봄기운이 온누리에 퍼지는가 싶더니 그날은 아침부터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기 시작했다.
동림건설(東林建設)은 강남의 신시가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동림은 생전에 매우 의욕적이어서 회사를 설립한 지 몇 년도 안되어 5층짜리 빌딩을 지어놓았다.
그 빌딩은 겉면에 백색 타일을 입혀 놓았기 때문에 산뜻한 인상이었다. 1층과 2층은 은행에 세를 내주었고 그 위층은 모두 건설회사가 사용하고 있었다.
국내 건설업은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다. 도산하는 업체가 수두룩할 정도로 계속 불황의 늪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림건설만은 놀랍게도 예외에 속했다. 특출한 아이디어와 판매 전략 그리고 전사원의 일치된 단결력과 노력으로 계속 신장세를 보여오고 있었다.
동림건설은 불황기에 오히려 그 불황을 역이용해서 일어선 셈이었다. 그 모든 것이 사장인 유동림의 수완과 지혜 때문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그 사장이 갑자기 비명에 죽은 것이다. 동림의 사원들은 당황했고 회사는 흔들렸다. 보스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장의 부인이 어떤 결단을 내려줄 것을 기대했으나 젊은 미망인은 정신병원에 출입하는 등 충격과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죽은 사장의 누나 되는 여자가 나타나 자신이 회사 운영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이미 복안을 세워놓고 있는 듯했다.
그런 선언이 있은 지 이틀 후 그녀는 자기 남편을 데리고 와서는 회사 간부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이 분이 앞으로 사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변두리에서 조그만 양복점을 경영하는 사람으로 건설업에 대해서는 건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사장이랍시고 들어앉겠다니 기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회사 간부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법적인 상속자가 지명하는 사장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왔다. 그들이 말하는 법적인 상속자란 작고한 사장의 부인인 오월이었다.
그들은 회사 설립 때부터 동림과 동고동락한 충신들이었다. 따라서 아무한테나 회사 운영을 호락호락하게 맡길 사람들이 아니었다. 동림의 누나와 그 남편은 길길이 뛰었지만 그들은 듣지를 않았다. 그들에게 어떠한 회유와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림의 부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림건설의 전무인 김문호(金文鎬)는 유동림의 대학 후배로 정의감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창의력과 추진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보스를 도와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솜씨가 있는 사람이었다.
상무 정석환(鄭錫煥)은 유동림이 첫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매우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대인 관계에 뛰어나 밖에서 일거리를 물어오는 데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유동림은 따로 회사를 세우면서 그를 데려왔던 것이다.
유동림, 김문호, 정석환, 이들 세 사람은 신흥 건설 업계에서 알아주는 삼총사였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은 두 사람은 슬픔에 젖어 거의 일손을 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날 회사에 출근한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서 회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든 오늘 중으로 오부인을 만나러 가서 어떤 결정을 봐야 할 것 같아. 저 방에 그 사람들이 계속 눌러 있게 할 수는 없지 않아."
저 방이란 사장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란 유동림의 누이 부부를 뜻했다.
김전무의 말에 정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각개 격파라고 하면 좀 우습지만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설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더러는 흔들리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군. 지금 바로 오부인을 찾아봅시다."
정상무는 머뭇거렸다.
"그저께 제가 찾아갔을 때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두번째 사건이 있고부터는 더욱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습니다."
"찾아가 봐도 별수 없다는 건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지 않소?"
"일단 전화를 해 보고 가도록 하죠."
정상무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버튼을 눌렀다.
"네."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계시면 좀 부탁하겠습니다."
"거기 어디죠?"
묻는 기세가 꽤나 거칠고 급한 느낌이었다.
"동림건설입니다."
"전화 거시는 분은 누구시죠?"
"정상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경찰입니다. 한데 오부인은 지금 없습니다."
"어디 가셨나요?"
"우리도 지금 찾고 있는 중입니다. 갑자기 없어졌어요."
"아니, 그럴 수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침에 보니까 없어졌습니다. 이건 비밀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혹시 회사로 연락이 오거든 알려 주십시오. 그 여자는 매우 위험합니다. 왜 위험한지 알고 계시죠?"
"네 네, 알고 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정상무의 표정이 납빛으로 변해 있었다.
"왜 그래요?"
"사모님은 안 계십니다. 경찰이 전화를 받았는데 사모님이 갑자기 행방불명됐답니다."
김전무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행방불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침에 보니까 없어졌답니다."
"아니, 그럼 경찰은 뭘 했지? 경찰이 경호하고 있었지 않았나?"
"네, 두번째 사건 이후부터는 경찰이 쭉 붙어 있었지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경찰 몰래 납치당했다는 건가, 아니면 몰래 빠져나갔다는 건가?"
"그것까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화 걸어보죠."
정상무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버튼을 눌렀다. 아까의 그 거친 목소리가 응답했다.
정상무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전화 걸었던 사람입니다. 궁금해서 말입니다. 범인들이 납치해 갔는지, 아니면 혼자서 말도 없이 나가신 건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우리도 지금 그걸 조사 중입니다. 지금 바쁘니까 쓸데없는 전화는 삼가해 주십시오."
철컥 하고 전화가 끊겼다. 정상무는 맥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경찰도 그걸 조사 중이랍니다."
"큰일났군.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어쩌면 좋지?"
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한참만에 김전무가 먼저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거기에 가봅시다."
정상무도 따라 일어섰다.
그들이 막 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삐익 하고 신호가 왔다. 김전무는 나가려다 말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무님, 3번 전ㅎ니다."
교환 아가씨가 말했다.
"누구래?"
김전무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떤 여자분이 누구라고 하지 않고 급한 용무라고 하면서 전무님을 찾습니다."
김전무는 3번 버튼을 누른 다음,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하고 말했다.
"저...... 저......."
머뭇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저기...... 김문호 씨 되시는가요?"
"네, 그렇습니다. 누구신가요?"
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금방이라도 수화기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바쁘실 텐데 미안합니다. 저, 오월이에요."
여자의 목소리는 거의 꺼져들고 있었다.
"네?"
김전무는 미처 상대를 못 알아보고 있었다.
"저, 오월이에요. 유동림 씨의......."
여자가 다시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김전무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비로소 멈칫했다.
"아아......."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얼른 알아뵙지를 못해서......."
"지금 바쁘신가요?"
"아, 아닙니다."
"좀 뵙고 싶은데......."
"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댁으로 전화를 걸었더랬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
"P호텔에 있어요."
"혼자 계신가요?"
"네, 혼자 있어요."
"혼자 계시면 위험합니다. 경찰이 지금 찾고 있습니다. 경찰에 말씀 안 하시고 나오셨나요?"
"경찰의 보호를 받기는 싫어요."
작으면서도 조그만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김전무는 멈칫했다.
"심정을 알겠습니다. 혼자 밖에 나와 계시면......."
"지금 바로 정상무와 함께 여기로 와 주세요. 20층 15호실이에요.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리고 저와 만난다는 거, 외부에는 비밀로 해주세요."
"경찰도 말입니까?'
"물론이에요."
"아, 알았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모님이오."
"지금 어디 계신답니까?"
정상무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P호텔에 있어요. 지금 바로 만나자는데 갑시다. 경찰에는 어떻게 할까?"
"사모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경찰은 물론 누구한테도 자기 만나는 걸 비밀로 하래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일단 만나보고 나서 손을 쓰든지 하지요."
그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와 승용차에 올랐다. 두 사람 다 몹시 긴장해 있었다.
"몰래 빠져나온 모양이군요?"
정상무가 운전사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그런가 봐요."
"왜 그랬죠?"
"몰라요. 가서 알아봐야지."
"혹시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30분쯤 지나 그들은 P호텔에 도착했다. 김전무가 먼저 구내전화로 2015호실에 확인 전화를 걸어보았다.
"올라오세요."
아까보다는 훨씬 냉담한 목소리가 응답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5호실 앞에 이르자 그들은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상무가 벨을 눌렀다.
"들어오세요."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들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월은 옆모습만 보인 채 서 있었다. 짙은 감색 코트 차림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것을 벗어 들면서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얼핏 미소를 짓기는 했는데 따뜻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느낌이었다.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그녀가 자리를 권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안락의자가 두 개 있었다.
정상무는 화장대 앞에 놓여 있는 딱딱한 나무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오월과 김전무는 안락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한 잔씩 드시죠.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면 칵테일을......."
남자들은 커피를 택했다. 그녀는 구내전화로 커피 석 잔을 주문했다.
"담배를 피우세요."
그녀가 먼저 백 속에서 담뱃갑을 꺼내면서 말했다. 남자들이 너무 굳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그녀가 담배를 꺼내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변화였다.
그들이 알기에 그녀는 담배를 피울 줄을 몰랐다. 그녀는 얌전하고 수줍음 많은 여자였다. 단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담배를 뽑아듦으로써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이미지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김전무는 급히 라이터불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후우 하고 내뿜었다.
남자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혹시나 해서 그녀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했다. 정신적으로 혹시 이상 상태가 아닌가 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느 구석에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세련되고, 침착했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모습으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왜 혼자 말씀도 없이 나오셨습니까? 집에서는 지금 소동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집에는 전화를 걸어서 안심시키겠어요. 우리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어서 잠시 나온 것뿐이에요. 과거를 잊고...... 전 좀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혼자 이렇게 나와 계시면 위험합니다. 범인들이 잡힐 때까지는 답답하시겠지만 보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웨이터가 커피를 날라왔다. 그들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웨이터가 커피를 따르고 나가자 그들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범인들은 언제 잡힐지 몰라요.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하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상대를 막았다.
"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마세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에 김전무와 정상무는 멈칫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어요. 두 분을 이렇게 부른 건 회사건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였어요. 그게 가장 시급한 일 아닌가요?"
"네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세를 가다듬고 자기들보다 어린 여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시간에 오월의 집에서는 장형사가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는 지난밤 황형사에게 오월을 부탁하고 자신은 수배 차량을 찾으러 돌아다녔었다.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와 보니 오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황형사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내가 그렇게 잘 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 여자가 사라진 것도 몰랐어? 멍텅구리 같으니! 그래 가지고 형사는 무슨 형사야! 어젯밤 뭐했어? 베개 끌어안고 꿈꿨나? 말해 봐! 뭐했느냐 말이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장형사 앞에서 황은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리 선배 형사라고 하지만 이렇게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심한 모욕감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자신의 실수가 컸기 때문에 고스란히 당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장형사의 성미가 불 같아서 잘못 응수하다가는 금방 손찌검이라도 날아들 것만 같았다.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든 사이에 그만......."
"그게 이유라고 말하는 거야? 그 여자가 납치돼서 해라도 당하면 누가 책임지지?"
"납치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닥쳐! 이 바보야! 너 같은 것하고는 함께 일할 수 없으니까 가라고.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그러나 황형사도 어지간히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었다.
오월의 어머니는 딸이 말없이 사라져 버리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황에게 실컷 분통을 터트리고 난 장은 다소 분이 풀려 사태를 곰곰이 따져 보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끌려나간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아무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납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점이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일은 아니었다.
왜 그녀는 몰래 집을 빠져나갔을까?
그는 그 의문부터 해결해야 했다. 집안을 조사해 본 결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여행가방까지 들고 나간 것이 밝혀졌다. 그것으로 보아 그녀는 쉽게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어디로 여행을 떠난 것일까? 만일 여행을 떠났다면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짓을 감행했을까? 범인들이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혹시 정신 이상으로 나간 게 아닐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섯 대째의 담배를 피우고 나서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오월씨의 수배를 부탁합니다. 그 여자가 간밤에 행방불명됐습니다. 사진은 여기에 많이 있으니까 적당한 것을 복사해서 전국 경찰에 돌리도록 해 주십시오. 나이는 28세, 얼굴은 계란형, 아주 미인입니다. 키는 1백 65정도...... 감색 코트를 입었고 밤색 가죽 가방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헤어스타일은 긴 생머리...... 각 병원과 시체 안치실에도 수배를 부탁합니다. 긴급 1호를 발동해 주십시오. 발견 즉시 엄중한 경호하에 신병을 확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그는 다시 담배를 뽑아 물었다.
오월은 남편에게 충실했던 두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담담하면서도 확연한 어조로 이야기해 나갔다.
"그 분은 돌아가셨지만 그 분의 유지는 그대로 살아 있어요. 저는 그 분의 유지를 그대로 따를 생각이에요. 그 분의 유지는 회사를 그대로 살리라는 거였어요. 그것은 그 분이 영혼의 목소리로 제게 들려준 말이었어요."
남자들은 두 손을 모아쥐고 고개를 숙였다. 감동어린 표정들이었다.
"그 분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회사를 집어치울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 분이 안 계신다고 해서 회사가 흔들려야 할 까닭도 없어요. 그 분이 안 계시면 제가 하는 거예요."
"옳은 말씀입니다."
김전무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뒤를 이어 정상무가 입을 열었다.
"사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희들은 그 동안 매우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안 드렸지만 앞으로 회사를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모님께서 그런 결심이라니 정말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이제 자신감이 솟아오릅니다."
"동림건설은 두 분 어깨에 달려 있어요. 저는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결심은 서 있어요. 두 분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는 충분히 회사를 이끌어나갈 수 있어요."
"사장님이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당분간 실질적인 회사 운영을 두 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 대신 언제든지 제가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제반 서류를 꾸며 두세요."
그것은 회사의 대표로서 자신이 최종적인 감시와 결재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금 회사에 문제되는 것은 없나요?"
"한 가지 있습니다."
김전무가 조심스럽게 말머리를 꺼냈다.
"뭔가요?"
오월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돌아가신 사장님의 누님 되시는 분이 그 남편 되는 분을 내세워 회사 운영에 개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숫제 두 분이 사장실에 들어앉아 계십니다. 일체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유동림 씨의 법적인 상속자는 바로 저예요. 허락 없이는 아무도 회사일에 간섭할 수 없어요."
"네,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 응하지 않았습니다. 사모님께서 내일부터라도 직접 회사에 나와주신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만......."
"저는 당분간 회사에 나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그 대신 시간 나는 대로 전화 연락을 드리든가 두 분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만나든가 하겠어요. 제가 회사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두 분께서 책임지고 회사를 이끌어나가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두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제가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법적인 절차를 밟아주세요."
망설임도 없는 당당한 말에 남자들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네, 즉시 절차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제 도장과 인감이 있어요."
그녀는 백 속에서 도장과 인감을 꺼내 놓았다. 그녀의 당돌하고 치밀한 준비에 그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쁘실 텐데 그만들 돌아가 보세요."
"저기...... 저희들과 함께 가시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김전무가 엉거주춤하며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들 가세요. 제 걱정은 마시고, 저는 볼일이 좀 있어요."
"가능하면 기다려서라도 댁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돌아가 주세요. 제 일은 상관하지 마시고."
"사모님, 댁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사람을 하나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무겁게 말했다.
"제발 저를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제 개인적인 일에는 상관하지 마세요. 더 이상 그러시면 저 화내겠어요."
남자들은 마침내 조용히 일어섰다. 그녀는 앉은 채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이 나가고 난 뒤에도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앉아 있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의 그 도도하고 냉랭하던 태도는 간 곳 없이 연약하고 가냘픈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사이드 테이블 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다음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수화기를 집어든다. 거친 남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이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급하게 부른다.
"저예요."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아, 부인!"
그것은 신음이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
"그러지 않아도 걱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보다도 어머니께서 상심하고 계십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니, 왜요? 지금 혼자 계십니까?"
"네, 혼자 있어요."
"무슨 일로 말도 없이 혼자 나가셨습니까?"
"이유는 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걱정하실 것 같아 전화 건 거예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니, 도대체 그렇게 혼자 나돌아다닐 입장이십니까?"
장형사는 언성을 높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이유나 좀 압시다. 지금 전국 경찰에 부인을 찾으라는 수배령이 내렸습니다. 부인이 그렇게 무책임한 짓을 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많은 인력을 낭비하게 된 겁니다. 지금 바로 집으로 들어오십시오."
"당분간 집에는 들어갈 수 없어요. 저를 찾으려고 공연히 수고하실 필요는 없어요."
상대는 분통이 터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혼자서 여행을 좀 하고 싶어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 나하고 함께 여행합시다."
"싫어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지금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범인들이 노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 왜 그러십니까?"
"혼자 여행을 하고 싶어요. 집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갇혀 있으니까 정말 미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얼마든지 돌아다니십시오. 그 대신 나와 함께 다닙시다. 남들이 눈치채지 않게 멀리 떨어져서 따라다니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거 쇠귀에 경 읽기군. 이쪽의 성의를 조금이라도 받아줘야 할 거 아니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정 그렇다면 부인을 체포할 수밖에 없어요. 부인은 몇 발짝 못 가서 붙잡히고 말 겁니다.
"......."
"내 말 듣지 않다가 부인은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장이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바꿔 주세요."
"잠깐 기다려요."
몹시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잠시 후 그녀의 어머니가 나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기부터 했다.
"왜 말없이 나갔니? 지금 어디 있니? 니가 어쩌자고 에미속을 이렇게 썩이니? 장형사님 말대로 아무 말 말고 지금 당장 들어와라. 니가 안 들어오면 이 에미는 죽는다. 에미 죽는 꼴 보겠니?"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를 달래지도 못한 채 그녀는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머리 속에 암기하고 있는 전화번호를 마침내 불러냈다.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아주 천천히 돌렸다. 555-1299 - 신호가 걸리지가 않는다. 다시 한 번 다이얼을 돌렸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기다렸다가 세번째 걸었다. 이번에는 다이얼을 조금 빨리 돌렸다. 삑삑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5분 기다렸다가 다시 걸어보았다. 역시 신호가 걸리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똑같은 짓을 열 번 반복했다. 그런 다음 114를 돌렸다. 곧 안내가 나왔다.
"아무리 다이얼을 돌려도 신호가 걸리지 않아서 그러는데......."
"몇 번인가요?"
"555-1299입니다."
"555국은 없어요."
안내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아 잠깐, 그럼 국이 바뀐 걸까요?"
"그런 국은 없어요."
"그럼 지방 전화번호일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디다 알아보면 알 수 있을까요?"
"시외전화 안내에 알아보세요."
"시외전화 안내는 몇 번인가요?"
대답이 없다.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그녀는 집요했다. 이번에는 호텔의 교환을 불렀다.
"매우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무슨 부탁인데요?"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사례하겠어요."
"무슨 일인데요?"
교환 아가씨가 잔뜩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전화번호를 하나 알고 있는데 그 번호가 어느 지방 것인지 그걸 알고 싶어서 그래요. 서울 전화번호는 아니에요."
"어느 지방 것인지도 모르고 번호만 알고 계시다는 말인가요?"
"네, 그래요?"
"몇 번인데요?"
"555국에 1299예요."
"555국은 서울에 없어요. 지방 전화번호인 모양이에요. 잠깐 기다리세요."
오월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기다렸다.
10분쯤 기다렸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잽싸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신호가 가요. 부산이에요."
교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곧 신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아주 멀리서 여자가 응답해 왔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거기 혹시...... '로댕의 집'이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네, 그런데요."
"지금도 영업하나요?"
"그럼요. 헌데 무슨 일로 그러시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절로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이마에 밴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교환한테서 온 전화였다.
5분쯤 지나 교환 아가씨는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오월은 그녀에게 사례금으로 10만원을 지불했다.
호텔을 나온 오월은 먼저 미장원을 찾아갔다. 머리를 짧게 커트한 다음 디스코 스타일로 달달 볶았다. 속눈썹을 길게 붙이고 화장을 짙게 했다. 손톱에 매니큐어까지 바른 다음 미장원을 나왔다.
미장원 가까이에 기성복 판매장이 있었다. 그곳에 잠깐 들러 코트를 바꿔 입었다.
새 코트는 보라색이었다. 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끼었다. 일부러 껌을 짝짝 씹으며 걸었다.
그녀는 비행장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비행기를 이용하면 신원이 탄로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역으로 나가 오후 1시에 출발하는 새마을 열차표를 샀다.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대합실 입구에 서서 비를 피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주위를 주의깊게 살피니 여기저기서 검문 검색이 실시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젊은 여자만을 상대로 조사하고 있었다.
방금 막 한 여자에 대한 조사를 끝낸 사나이 두 명이 그녀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돌아섰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사나이들은 대합실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은 오물이 그대로 쌓여 있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수세식이 고장 나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연달아 세 대나 피워대었다.
한참 후 대합실로 나오니 그 사나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1시 15분 전에 개찰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보스톤백을 왼손에 들었다. 그리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열차는 1시 정각에 출발했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 앉아 뒤로 밀려가는 서울 시가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드디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이-.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녀는 2시께에 식당차로 가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오랜만의 식사였다.
남편이 죽은 후 지금까지 그녀는 식사다운 식사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기운을 차려야 한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그녀는 고기를 꼭꼭 씹어먹었다. 식사에 곁들여 맥주까지 한 병 시켜 마셨다.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그녀는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술을 마시자 긴장이 일시에 풀리면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곧장 잠에 떨어졌다.
열차가 대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 번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종착역에 닿았을 때야 눈을 떴다.
역 광장으로 나오니 6시였다.
과거에 두어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초행길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한동안 분수대 부근에서 머뭇거렸다.
부슬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가 달려와서 우산을 사라고 졸랐다. 그녀는 비닐 우산을 사서 펴들었다. 아이가 시커먼 손으로 잔돈을 내밀었다.
"괜찮아. 너 가져."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직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는 대합실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공중전화 박스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10분쯤 차례를 기다리고 나서 그녀는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동전 두 개를 집어넣고 암기하고 있는 전화번호를 돌렸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금방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로댕의 집'이죠?"
"네, 그런데요."
여자가 대답했다.
"스낵바이지요?"
"네, 그래요. 왜 그러죠?"
"아, 다름이 아니고...... 거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위치를 몰라서 그래요."
"아주 찾기 쉬워요. 남포동 골목에 있는데......."
상대방은 아주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10분 후 그녀는 광복동 입구에서 택시를 내렸다.
남포동으로 가기 전에 그녀는 먼저 D호텔로 들어가서 방을 하나 얻었다. 체크인하면서 방값을 선불했다.
종업원이 여자 혼자 투숙하자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7시가 되자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그녀는 호텔을 나와 남포동 쪽으로 걸어갔다.
빗발이 아까보다 굵어 있었다.
남포동 골목에는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남부 지방 특유의 흥청거림이 있는 듯했다. 쇼윈도에는 상품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직 '로댕의 집'만 찾았다.
'로댕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아래층 입구에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몸을 돌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2층 입구에 로댕의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의 모조 조각상이 시커먼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는 그들을 묵살한 채 스탠드 한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누구 기다리세요?"
여자 바텐더가 그녀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뇨."
그녀는 능숙하게 담배를 뽑아들며 말했다.
"한 잔 하시겠어요?"
"칵테일 한 잔 주세요. 부드럽게 해 주세요."
실내를 둘러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스낵바 치고는 내부가 매우 넓었다. 테이블도 몇 개 있었고 룸까지 딸려 있었다.
실내 장식은 세련되고 호화로워 보였다. 음악은 조용했다. 손님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는데 젊은 샐러리맨들 같았다. 두 명의 여자 바텐더가 스탠드를 맡고 있었고 따로 웨이터 두 명이 또 있었다.
"어떻게 혼자 이렇게 와서 술을 드세요?"
그녀가 잔을 반쯤 비웠을 때 바텐더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인상이 고운 여자였다.
"비가 오고...... 일찍 들어가기는 싫고......."
오월은 미소를 지었다.
"미스 홍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바텐더가 자기 소개를 했다. 오월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다음에 오실 때는 함께 오세요."
"함께 올 사람이 생기면......."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손님이 그녀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바텐더가 다시 물었다.
"댁이 어디세요?"
"여기서 가까워요. 아파트에서 자취하고 있어요."
"어머, 그러세요. 나도 자취하고 있는데...... 고향이 여기가 아니신가 보죠?"
"서울이에요."
"어머, 저도 서울인데......."
바텐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겠어요."
오월은 좋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그때 옆에서 힐끗거리던 남자가 끼여들었다.
"의형제를 맺었으면 축하를 해야지. 자, 내가 한 잔 사지."
사나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오월을 들여다보듯 하면서 그녀 앞에 잔을 탁 놓았다.
오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양하겠어요."
"호의를 무시하다니...... 자, 한 잔만......."
머리숱이 적고 살이 몹시 찐 사나이였다. 나이는 마흔 안팎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 김사장님......."
바텐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내는 잔을 치우려고 하지 않았다. 억지를 부림으로써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을 능사로 아는 사람 같았다.
오월은 바텐더에게 술값을 지불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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