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김성종 - 미로의 저쪽 3

3학년2반 | 2022.02.06 07:50:39 댓글: 0 조회: 57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836

5 비밀의 집
그들은 그 집을 '비밀의 집'이라고 불렀다.
'비밀의 집'에 대한 감시가 시작된 것은 하루 뒤였다. 오월은 그 집 건너편에 있는 일식집을 통째로 빌렸다. 집이 너무 낡은 데다 재수 없는 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세를 얻어들려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주인은 그 동안 집 관리를 위해 가난한 젊은 내외에게 집을 빌려주었는데 마침 그 내외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어 어차피 집이 비게 되었다는 거였다. 주인은 아주 헐값에라도 집을 팔았으면 했지만 월은 생각 끝에 월세로 빌리기로 했다.
집이 워낙 낡은 데다 목조로 되어 있어 발을 옮길 때마다 금방이라도 꺼져 내릴 듯 삐걱거렸다. 관리가 엉망이었던지 구석구석이 먼지와 거미줄투성이였다.
그녀는 '비밀의 집'이 잘 내려다보이는 2층에다 필요한 준비를 갖추었다. 먼저 화려한 꽃무늬의 커튼을 창문에다 치고 장방형의 탁자를 창가에 붙여 놓았다. 의자는 몇 시간이라도 버틸 수 있는 푹신한 것을 준비했다. 카메라는 '비밀의 집' 쪽을 향해 고정시켜 놓았다. 망원경도 언제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다 준비해 두었다. 고성능 최신 무비 카메라도 구입했다. 침대도 들여놓고 인스턴트 식품도 쌓아 놓았다. 조명장치도 새롭게 했다.
그녀가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조민기는 동직원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동직원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민기는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늘어붙어 졸라댔다. 만일 그대로 물러설 경우 '비밀의 집'에 어떤 귀띔이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한사코 그 직원을 물고 늘어졌다.
그의 요구라는 것은 모종의 부정에 가담해 달라는 것이 아닌,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비밀의 집'의 주민등록표를 한 번만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상대가 처음과는 달리 망설이는 것을 보고 민기는 10만원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주민등록표를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직원은 펄쩍 뛰다가 차츰 수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돈을 받지 않았다. 당신의 얼굴을 보니 나쁜 일을 하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성의를 봐서 해 주겠으니 그렇게 알아라.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음날 복사물 두 통을 민기에게 건네주었다. 5년 동안 근무해 온 그는 매우 창백한 표정이었다.
민기가 복사물 두 통을 가지고 나타나자 아가다는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사진까지 복사되어 나왔기 때문에 '비밀의 집'의 구성 인원을 알아보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 집의 구성 인원은 단 두 명이었다. 호주겸 세대주의 이름은 김명환(金明煥)이었다. 그는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바로 그 인물이었다.
또 한 사람은 민혜련(閔惠蓮)이라는 이름으로 그 미모의 여자 사진이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부부 사이였다. 양동팔이라는 이름을 기대했던 아가다는 다소 실망했지만 김명환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인물 카드를 작성했다. 김명환에게는 번호 1이 부여되었다. 민혜련에게는 2번을 붙였다.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대머리 사나이에게는 넘버 3을 붙였다. 그들의 인상을 상세히 적었다.
1번과 2번의 경우에는 복사된 주민등록표에 기본적인 신원 사항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기입해 두었다. 1은 39세였다. 학력은 대졸이었고 직업은 무역업이었다. 2는 28세, 역시 대졸이고 직업은 없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가다와 민기는 '비밀의 집'을 감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손이 모자랐다. 두 사람만으로는 완전한 감시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민기는 어디까지나 학생인 만큼 아가다처럼 전적으로 일에 매달릴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아가다는 생각 끝에 인원을 한 사람 더 늘려야겠다고 말했다. 민기는 절친한 친구인 신승우를 추천했다. 그는 신승우야말로 절대 믿을 만한 친구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가다가 신승우를 만났을 때 그는 조그마하면서도 당차 보이는 홍안의 미소년 같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기뻐하면서 함께 일할 것을 약속했다. 아가다는 큰 원군을 만난 기분이었다.
민기와 둘이만 있게 되었을 때 승우는 그에게 계화가 다른 남학생과 데이트를 시작한 것 같다고 일러 주었다. 그 동안 너무 바빴기 때문에 민기는 거의 계화를 만나지 못했는데 드디어 그녀가 반기를 든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기는 가슴이 울컥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요절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꾹 참았다. 남자가 어떤 놈이냐고 묻지도 않고 묵묵히 다른 데만 바라보았다. 그는 언젠가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자가 없으면 못 살아. 단 하루라도 남자하고 데이트하지 않으면 산 것 같지가 않아. 난 지금까지 그냥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 남자하고 데이트를 하고 그 남자가 집에까지 바래다 주어야 집에 들어갔다구.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었고 그것을 솔직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승우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민기는 갑자기 말이 없어지는 대신 전보다 더 일에 열심히 매달렸다.
감시는 24시간 계속되었다. 두 청년은 아가다의 지시에 잘 따라주었다. 그녀는 학생들이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시간을 적당히 배분해서 감시에 임하게 했다.
그 집에는 2층에 방이 두 개, 아래층에 방이 세 개 있었다. 다섯 개의 방에는 모두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그들은 2층의 방 두 개만 사용했다. 남자들은 감시용 방을 함께 사용했고, 아가다는 그 옆방을 이용했다. 비번일 때 그녀는 대개 외출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그 방에서 계획을 검토하거나 잠을 자곤 했다.
살해된 조그만 일본인에 대한 기사는 신문에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아마도 신원 미상의 변사체로 처리된 것 같았다.
아가다는 '비밀의 집'에 대한 감시 결과를 꼬박꼬박 적어나갔다.
1과 2는 주민등록표에는 부부 사이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감시했지만 그들의 자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나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 집에는 가정부로 보이는 여자도 없었다. 여자라고는 2번뿐이었다.
'비밀의 집'은 언제나 커튼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1번은 출입이 일정하지가 않았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기도 하고 늦은 오후에 외출했다가 이내 돌아오기도 했다. 주민등록표에는 39세로 나와 있었지만 그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였다. 자세히 관찰한 결과 일부러 그렇게 변장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변장의 명수인지 머리카락이 잿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없던 콧수염이 달라붙어 있기도 했다. 여러 가지 안경으로 인상을 교묘하게 바꾸기도 했다. 변장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는 가끔 정원을 어슬렁거리다가 벤치에 앉아 있거나 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은 역기를 들어올리곤 했다. 정원에서 불고기 파티를 가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변장하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시팀은 1의 변장과 본래의 모습을 망원 렌즈로 포착해서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2는 변장하지 않았다. 주민등록표에는 민혜련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전화를 빌린 한애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함께 외출하는 법 없이 언제나 혼자서 나가곤 했다. 그녀 역시 출입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그녀는 외출시에는 언제나 자기 전용차를 이용했다.
3은 가발로 대머리를 가릴 때가 있었다. 그는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그곳의 동거인이었다. 1이 그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보아 그는 상위에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그의 태도로 보아 그는 그 집의 사실상의 주인인 듯했다. 그는 외출할 때 거의 1과 동행했다. 변장하지 않은 때의 그의 모습은 40대 중반이었다. 살찐 얼굴에 코는 매부리코였고 두 눈은 날카롭게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구였다. 놈은 시거를 즐겨 피우고 있었다.
그들 외에 그 집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경비원이었다. 그들 역시 대머리에게 절대 복종하고 있었다. 단순히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고 같은 일당인 듯했다.
아가다는 운전사에게 번호 4를 붙였다. 경비원은 5번이었다. 그들은 30대의 비슷한 나이들이었다. 4는 중키에 피부가 검었고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5는 키가 컸고 강파르게 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집을 지켰다.
며칠째 감시했지만 그들이 그 집에서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신승우가 '비밀의 집'에 잠입해 보자고 제의했다. 감시만 계속하는 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조민기도 승우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왔다. 그러나 아가다는 그들의 제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감시 닷새째 되는 날 밤 10시경 '비밀의 집'에 방문객이 있었다. 방문객은 모두 세 명이었다. 모두가 남자들이었는데 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상은 잡히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나 그들은 그곳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오월은 하루쯤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집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틀림없이 수배망에 걸릴 것 같아 열차를 이용했다.
서울에는 하오 1시에 도착했다. 역에서 그녀는 택시를 대절해 자신이 입원한 적이 있는 Y정신병원으로 달렸다. 1시간 30분쯤 후에 택시는 Y정신병원 정문을 들어섰다.
환자와 병원 관계자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반색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혼자서 다시 입원하러 왔느냐는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상태가 좋지 않아 약을 좀 타러 왔다고 대답했다.
담당 의사는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매우 친절하게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녀는 약국에 가서 약을 탄 다음 총무과로 들어갔다. 모두가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안에 들어온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누군가를 찾았다. 그러나 찾는 인물이 없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 미스 권 말이군요."
여직원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만뒀어요. 그 사건 때문에 물러났어요."
미스 권이라는 아가씨는 살인범을 면회 온 사람인 줄 알고 통과시켜 주었던 여직원이었던 것이다. 비록 모르고 그랬다 해도 환자가 살해된 이상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2층에 있던 박기술 씨도 그만뒀어요."
"그래요?"
월은 짐짓 놀라는 체했다.
박기술은 사건이 일어나던 날 2층 출구를 지키던 남자 간호사였다. 그는 오월을 죽이러 온 범인을 안으로 들여보낸 장본인이었다.
파면당한 두 사람은 한편으로는 범인을 목격한 중요한 증인들이기도 했다.
월은 여직원을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그리고 차를 사주면서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꺼내 놓았다.
"별 것 아니니까 받아줘요."
"이게 뭐예요?"
여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월에게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선물을 주는 데야 마다할 리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포장지를 뜯었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예쁜 목걸이였다. 백화점에서 사려면 몇 만원 이상은 주어야 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싸구려니까 부담 갖지 말고 가져요."
"고마워요."
그녀는 왜 선물을 주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목걸이를 챙겨 넣었다.
월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자신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몄다.
"미스 권하고 박기술 씨는 결국 나 때문에 직장을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대로 모른 체한다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난 두 사람이 병원을 그만둔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일찍 와 봤을 텐데. 정말 두 사람한테 미안하군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언니가 미안하게 생각할 건 없어요. 이런 말 해서 안 됐지만 두 사람이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거 아니에요? 하마터면 언니가 당할 뻔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않아요. 단지 실수였지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잖아요. 아무래도 두 사람을 만나 인사라도 해야겠어요. 그런데 참, 난 두 사람 주소를 모르는데 어떡하지?"
"꼭 만나고 싶으세요?"
"응,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주소를 좀 알 수 없을까?"
"알 수 있어요. 총무과에 아는 사람들도 있고 인사 카드가 아직 있을 거예요. 잠깐 기다리세요."
그녀는 10분도 못 되어 두 사람의 주소를 알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녀가 내주는 메모지에는 다행히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미스 권이라는 아가씨는 주소가 수원에 있었고 박기술은 서울이었다.
월은 먼저 수원으로 미스권을 찾아갔다.
수원 시내로 들어가 전화를 걸어보니 그녀는 회사에 나갔다는 거였다. 아마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병원에서 함께 근무한 친구라고 속이고 캐물으니 미스 권은 병원에서 나온 즉시 서울에 있는 모회사에 취직되어 수원 집에서 전철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직장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즉시 서울로 향했다. 오월의 전화를 받자 미스 권은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어머나, 어떻게 여기를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병원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가슴 아파서 혼났어요. 그래서 인사라도 하려고......."
"아, 아니에요. 차라리 나오기 잘했어요. 병원보다 여기가 백 번 더 좋아요."
"그래도 미안한 건 마찬가지예요."
"아니,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저녁 살 게 우리 만나요."
"오늘 저녁은 약속이 있어요."
상대는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럼 잠깐 차라도 해요. 잠깐이면 돼요. 오래 붙잡지는 않을게요."
붙잡고 늘어지자 상대는 마지못해 잠깐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월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월은 박기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떤 젊은 여자가 받았는데 박은 집에 없다고 했다. 박의 여동생 되는 여자였다.
"급한 일로 그러는데 지금 좀 연락할 수 없을까요?"
"연락할 수 없어요."
아침에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갔다고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언제쯤 들어오시나요?"
"잘 모르겠어요. 일정하지 않아요. 늦게 들어올 때도 있고 일찍 들어올 때도 있고 아예 며칠씩 안 들어올 때도 있어요. 실례지만 누구시라고 할까요?"
"저기...... 오월이라고 해요. 다시 전화할 테니까 들어오시면 나가지 말고 기다리시라고 전해 주세요."
월은 미스 권을 위해 목걸이 시계를 하나 샀다. 약속 장소에 약속시간보다 10분 전에 나가 앉아 기다렸다. 미스 권은 5분 지나서 나타났다. 그녀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월과 마주앉았다.
"바쁜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똑똑하고 영리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월은 선물을 꺼내 놓았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벽을 무너트리면서 선물을 받아들었다.
월은 차를 마시고 난 뒤 백 속에서 한 줌의 사진을 꺼내 놓았다. 손바닥 크기로 찍은 컬러 사진들이었다.
"수고스럽지만 이 사진들을 좀 봐 줄래요?"
"이게 무슨 사진이죠?"
그녀는 놀란 눈으로 월을 쳐다보았다.
"묻지 말고 그냥 한 번만 봐 줘요."
부드럽던 월의 얼굴이 엄숙하게 굳어져 있었다.
미스 권은 더 묻지 않고 사진을 한 장씩 집어들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를 월은 숨을 죽인 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앗!"
갑자기 미스 권이 낮게 부르짖으면서 보고 있던 사진을 떨어트렸다. 얼굴이 파랗게 굳어 있었다. 두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그래요?"
월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탁자 밑으로 굴러떨어진 사진을 집어들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왼쪽 새끼손가락이 없는 사나이의 사진이었다.
"바로......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 놈이에요!"
"그 사람이라니, 누구 말하는 거예요?"
월은 숨가쁘게 물었다. 미스 권은 소름이 끼치는지 어깨를 추스렸다.
"바로 그 살인범이에요? 그날 왔던 그 놈이에요!"
"틀림없어요?"
"틀림없어요! 나하고 말다툼까지 했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이 사진 어디서 났죠?"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월은 나머지 사진들을 끝까지 마저 보라고 일렀다.
권미경은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사진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몇 장의 사진들을 추려냈다. 그것들은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나이를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틀림없어요! 이 놈이 맞아요!"
사진을 다 보고 난 권미경은 흥분해서 말했다.
"다른 얼굴은 본 적이 없나요?"
"없어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에요."
"이 사람하고 함께 온 공범이 있어요. 두 명이 왔었어요."
"2층에 올라간 건 이 사람 혼자였어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마침내 월은 표적 제1호를 찾아낸 셈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범인이었다. 남편을 죽이고 뱃속의 아기까지 죽이고 행복한 가정을 파탄에 빠트리고 그녀의 인생을 짓밟아 버린 네 명 중의 한 명을 찾아낸 것이다!
권미경과 헤어져 다방을 나온 그녀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대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흥분하지 말자. 흥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자신을 자꾸만 타일렀다. 흥분하면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냉정해야 한다. 냉정해야만 실패 없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확인할 수 있는 한 몇 번이고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박기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박기술은 아직 집에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한 시간마다 그의 집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밤 11시에 겨우 그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잔뜩 취해 있었다. 오월이라고 하자 그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웬일입니까? 이렇게 밤 늦게......."
"지금 좀 만나뵐 수 없을까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이 여자가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지 전화로 말씀하시면......."
"아이, 안 돼요. 전화로는 안 되는 일이에요. 제가 한 잔 살게 나오세요."
"그, 그럴까요."
우유부단하고 여자에 약한 노총각인지라 별수 없이 응했다. 얼마 후 그들은 어는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다. 박기술은 덩치가 크고 미련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술을 좋아하는 그는 월이 권하는 대로 마다 않고 술을 마셨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 월은 용건을 끄집어냈다.
"이거 한 번 봐 주실래요?"
"그게 뭡니까?"
왜 그 시간에 불려나와 술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잊은 채 분위기에 젖어 있던 그는 월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 속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사진이지요?"
"여러 사람 사진이에요. 한 번 봐 주세요."
"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불빛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여기서는 어두워서 안 되겠어요. 화장실에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거칠게 주저앉는 바람에 술병이 굴러 떨어졌다. 월은 술병을 집어올렸다.
"이, 이거 어디서 났죠?"
그는 거칠게 숨을 내뿜으며 몇 장의 사진을 펴보았다. 동일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나머지 다른 사진들은 봉투 속에 들어가 있었다.
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쏘아보기만 했다.
"이, 이거 바로 그, 그 놈입니다!"
"그 놈이라니요!"
"오월 씨를 죽이려다가 잘못해서 이길자를 죽인 놈 말입니다!"
권미경이 골라낸 사진을 그도 똑같이 골라내 놓고 있었다.
"분명한가요?"
그녀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
"내가 왜 거짓말하겠어요. 그 놈이 분명해요! 2층에 올라왔던 놈이 분명해요! 이 사진들 어디서 났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박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사진을 한 장 호주머니 속에 넣으려고 했다.
"안 돼요!"
그녀는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챘다.
"그 사진 뭐하려고 그러지요?"
박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월은 사진들을 모두 담아 백 속에 집어넣었다.
"왜 그런 사진들을 가지고 다니지요?"
"못 본 걸로 해 주세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요?"
"이 사진 봤다는 말 아무한테도 하지 마세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찰한테두요?"
"네, 누구한테도 비밀로 해 주세요."
그녀는 박이 입을 다물어줄 것이라고는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죠?"
박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월은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그럼 이 사진은 어디서 났죠? 찍은 건가요?"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사진을 빨리 경찰에 갖다 줘서 그 살인범을 체포하게 해야 해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어서려는 그를 월이 제지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대로 있으세요."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거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왜 상관할 일이 아닙니까? 흉악한 살인범인데요. 현상금까지 걸려 있지 않은가요?"
"난 그런 거 모르겠어요."
"그러지 말고 그 사진 한 장만 이리 주세요."
"안 돼요."
"그 사진들을 가지고 뭐할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박도 따라 일어섰다.
"가겠어요. 고마웠어요."
"아니,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그녀는 테이블 사이를 빠져 출입구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박이 뒤따라가며 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처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아침 장완수 형사는 박기술의 전화를 받았다. 장형사는 Y정신병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목격자인 박기술을 몇 시간 동안 붙들고 앉아 꼬치꼬치 캐물었기 때문에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저기......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걸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는 박의 전화가 별로 달갑지가 않았다. 그런데 박의 다음 말이 그를 놀라게 했다.
"지난밤에 오월 씨를 만났는데요...... 그 여자가......."
"뭐, 뭐라고? 누구를 만났다고?"
"오, 오월 씨를 만났는데요......."
"정말이야?"
장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박은 멈칫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지금 그 여자 어디 있어?"
"모, 모릅니다. 어젯밤에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범인 사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잠깐! 지금 어디서 전화 거는 거야?"
"집에서 거는 겁니다."
"이리 나와. 만나서 이야기하자구."
박의 전화는 그를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그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파트너인 황준배 형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따라와."
그는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 뒤를 장형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따라갔다.
"무슨 일입니까?"
"박기술이 오월을 만났대. 중요한 이야기가 있나봐. 자식한테서 전화가 왔어."
그 말을 듣고 황형사는 장형사가 흥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그들은 매일같이 상부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아온 터였다. 범인을 쫓지 못하고 죽치고 앉아 있으니 욕을 들을 만도 했다. 수사본부 요원들은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주눅까지 들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월의 행방마저 묘연해져 버려 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박기술을 만나자 장형사는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재촉했다. 그가 하도 험상궂게 나오는 바람에 박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가 이야기를 다 마칠 때까지 장과 황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장형사는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후려쳤다.
"이럴 수가......."
"뭐 제가 잘못한 거 있습니까?"
박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잘못한 건 없어. 다만 신고가 늦은 것이 애석해. 즉시 신고해 주었으면 오부인을 만나는 건데......."
"집에 가면 만나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여자는 집에 없어요.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애를 먹고 있어요."
황형사가 장형사 대신 말했다.
"그런 줄 알았어야죠. 알았으면 붙잡아 두는 건데......."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사진이 분명히 범인 사진이었나?"
장형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박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틀림없습니다. 전 그 사진을 보자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그 놈 사진은 모두 다섯 장이었는데 다섯 장 모두 다른 모습을 찍은 것이었죠. 하지만 그 놈이란 것을 금방 알아봤죠."
"그 사진을 어디서 입수했다고 하던가?"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서 물어보았죠. 하지만 대답을 해야죠. 그런 건 알 필요 없다고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저는 사진 한 장을 얻어서 경찰에 갖다 주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 여자가 펄쩍 뛰는 바람에 그만뒀지요. 그런 사진이 생기면 재빨리 경찰에 갖다 줄 것이지 왜 자기가 들고 다니면서 그러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요. 아무리 한이 맺혔다 해도 여자 혼자서 범인을 잡을 수도 없는 거고......."
"다섯 장 외에 나머지 다른 사진들은?"
"모르는 얼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여자 사진도 들어 있었습니다."
"사진은 모두 몇 장이었나?"
"글쎄요. 한 열댓 장 정도 되는 것 같던데...... 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몇 사람을 찍은 사진이었나?"
"여러 사람이었습니다."
"몇 명?"
"글쎄요. 한 일곱여덟 명 되는 것 같던데요."
박의 관찰력은 매우 엉성한 것이었다. 황형사는 그의 미련스러움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말이 갑자기 의심스러워졌다.
"오부인은 어디 간다고 하면서 갔나?"
"그런 말 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망치듯 가버렸습니다. 사진을 봤다는 말은 누구한테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그 여자 정상이었나?"
"네, 이상한 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물쭈물하자 장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뭐야?"
"어쩐지 좀 무서운 데가 있었습니다. 여자한테서 그런 걸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장형사는 다음에 권미경을 만나러 갔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한테도 오월이 찾아왔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진술은 박기술의 말과 대체로 일치했다. 그녀는 오월이 가지고 있던 사진들 중에서 이길자를 살해한 범인의 사진 다섯 장을 골라냈다고 말했다.
"틀림없는 범인이었어요."
그녀는 박보다 관찰력이 뛰어났다.
"사진은 모두 스물세 장이었어요. 다섯 명을 찍은 컬러 사진들이었어요. 다섯 명 중 네 명은 남자들이었고 한 명만 여자였어요. 제가 아는 얼굴은 살인범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르는 얼굴들이었어요."
그녀는 숫자를 정확히 대고 있었다.
"혹시 그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요?"
"모르겠어요."
장형사 일행은 Y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오월은 거기에 먼저 들러 박기술과 권미경의 주소를 알아냈음이 밝혀졌다. 장형사는 허탈과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긴장감은 무엇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데......."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황형사는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부인이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믿어지지 않습니다. 여자 혼자서......."
"사실로 나타났어. 그 여자가 종적을 감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 여자는 지금 목표를 향해 치밀하게 접근해 가고 있는 중이야."
"범인을 노리고 있는 걸까요?"
"물론이지."
"사진을 어떻게 입수했을까요?"
"범인들한테 가까이 접근한 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들 몰래 사진을 찍은 거야. 그렇지만 그녀는 범인을 본 적이 없어. 그 여자 집에 범인들이 침입했을 때 놈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 얼굴을 알 리가 없지. 그래서 그 여자는 사진을 들고 확인하러 다닌 거야. 권미경과 박기술이 범인의 얼굴을 보았거든. 오부인은 지금까지 범인을 찾아다녔던 게 분명해."
"무서운 여자군요."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라도 그럴 수가 있어. 나는 그 여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
"그 여자는 어쩔 셈인가요?"
"직접 자기 손으로 복수할 계획인 것 같아. 우리한테 맡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피를 보려고 하는 것 같아."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어. 아무리 연약한 여자라고 하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상대는 한 명이 아닙니다."
"열 명이라도 상대할 거야. 오부인에게는 무서운 게 없어."
"그대로 방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여자를 빨리 잡아야 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그런데 어디 가서 그 여자를 잡는다?"
장형사는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여자를 추적하면 범인들을 잡을 수 있겠는데요."
"가능한 일이지. 헌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 여자를 찾아내더라도 붙잡지 말고 미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음...... 찾아낼 수만 있다면......."
장형사는 머리를 쥐어짰다. 아까부터 하나의 실마리가 아슴푸레하게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잡히지가 않았던 것이다.
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그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손뼉을 마주쳤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좀 힘들겠지만 말이야."
"무슨 방법입니까?"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스물세 장의 컬러 사진들 말이야. 그 사진들을 현상한 곳을 찾는 거야. 분명히 어디선가 돈을 주고 현상했을 거란 말이야."
"DP점까지 포함시킨다면 전국에 수천수만 군데나 될 텐데 그걸 일일이 다 어떻게 조사하죠?"
"그래도 해야 해. 그것이 그녀를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녀의 사진을 내보이면서 찾아다니면 반드시 반응을 보이는 곳이 있을 거야. 내 생각에는 대도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두고 봐야지."
모든 것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전국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비상 전화벨이 한동안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수만 명의 경찰이 거의 동시에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개미떼처럼 움직였다.
명령이 떨어진 지 하루도 못 돼 부산 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DP점을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장형사와 황형사는 급히 비행기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DP점은 도심을 벗어난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수사 요원들을 보고 젊은 주인은 몹시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이렇게 생긴 여자가 분명히 여기 왔었나요?"
장형사는 월의 사진을 내보이며 물었다.
"네, 틀림없습니다. 우리애 엄마도 봤는데요."
만삭의 부인이 뒤에서 나와 자기도 틀림없이 봤다고 증언했다.
"어떻게 생긴 사진을 뽑아주었나요?"
"상체를 스냅으로 찍은 컬러 사진들이었습니다. 모두 다섯 명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여자였습니다. 망원 렌즈로 잡은 사진 같았습니다."
"사진은 모두 몇 장이었나요?"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4월 18일자 페이지의 한 곳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적혀 있습니다. 모두 스물세 장이었습니다."
장형사는 주인이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고 확인했다.
"그 여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요."
"아는 거야 별로 없지요. 그전부터 아는 사이도 아니고 단지 사진을 뽑아 달라고 온 손님이었으니까요. 인상을 말한다면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미인이었습니다."
주인은 자기 아내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아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무슨 말을 했나요?"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진만 찾아 가지고 갔으니까요."
"동행이 있었나요?"
"아니요. 혼자였습니다."
그때 주인 아내가 한마디 했다.
"이 근방에 사는 여자 같아요."
장형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일전에 슈퍼에서 한 번 봤거든요."
"언제, 어느 슈퍼에서 말인가요?"
"사흘 전인가 나흘 전에 요 위에 있는 한일슈퍼에서요."
한일슈퍼는 큰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는데 부근 주택가의 주민들까지 그곳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장형사와 황형사는 그곳에 잠복했다. 그곳을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에 수사망이 펴진 가운데 수사 요원들은 가가호호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요소요소에서 임검이 실시되고 있었고 감시의 눈들이 쉴 사이없이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장형사와 황형사는 잠시도 슈퍼마켓을 떠나지 않고 감시했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지루하다 못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타난다는 보장만 있으면 기다리는 보람은 있다. 그러나 그런 보장도 없이 그들은 막연히 오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슈퍼마켓은 초저녁에 제일 붐빈다. 낮에는 별로 손님이 없어 한가롭다.
장형사는 정육점 코너 안에 피묻은 가운을 입은 채 앉아 있었고 황형사는 슈퍼마켓 경비원 복장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장형사가 정육점 코너를 지키게 된 것은 그곳의 주인이 오월의 얼굴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중년의 여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몇 번 여기 온 여자예요. 그전에는 못 본 여잔데 아마 새로 이사온 모양이에요. 미인이고 고기를 많이 사가서 인상에 남아요."
"고기를 많이 사간다고요? 무슨 고기를 얼마나 사갑니까?"
장형사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면서 물었다.
"한 번씩 올 때마다 쇠고기만 서너 근씩 사가요."
"며칠에 한 번씩 오던가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와요."
"고기만 사가는가요?"
"아뇨. 다른 찬거리도 사가요."
"마지막으로 고기를 사간 게 언제였습니까?"
"그저께 저녁 때 왔었어요."
"언제나 혼자였나요?"
"네, 혼자 오곤 했어요."
"이 여자 틀림없습니까?"
그는 오월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퉁겨보였다.
"네, 틀림없어요. 화장을 짙게 했지만 틀림없이 이 여자예요."
장형사는 속이 타는 듯 담배를 뻑뻑 소리나게 빨았다. 혼자라면 굳이 슈퍼마켓을 들락거리며 찬거리를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틀 사흘거리로 쇠고기를 서너 근씩이나 사갈 필요는 더더구나 없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한가롭게 앉아 손수 밥을 지어먹을 입장이 아니다. 그녀와 같은 입장이라면 식당에서 밥을 사먹어야 옳은 것이다. 방을 얻어 자취를 한다고 치자. 아무리 쇠고기를 좋아한다고 여자 혼자 그렇게 많은 고기를 먹어치울 수 있을까.
이상한 일이다. 만일 그녀가 고기를 사간 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두 명 이상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함께 있는 것일까. 누구이길래 그녀는 그들에게 고기를 사먹이는 것일까.
그는 아무래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남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여자들이라면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굳이 시장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남자들일까. 이 시점에서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남자들과 접촉할 리는 없다.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남자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들은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 남자들이 아닐까.
그녀에게 지원 세력이 생긴 것일까. 그녀에게 지원 세력이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녀는 지금 범인들을 뒤쫓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너무 벅찬 것이다.
경찰 수사력으로도 추적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데 여자 혼자서 어떻게 그들을 쫓는단 말인가.
뒤쫓아가 만난다 하자. 도대체 그녀 혼자서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을 쓰기도 전에 그녀는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튼 그녀는 현재 범인들에게 바싹 접근해 있다. 그들의 사진까지 찍은 걸 보면 그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가능한 일일까.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가 그녀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월은 경양식집 '킬리만자로' 앞에 섰다. 골목 입구에서 점퍼 차림의 두 사나이가 어느 젊은 여자를 세워 놓고 신분증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킬리만자로'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전화를 걸었다. 민기가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어요?"
"네, 별일 없습니다."
"골목을 한 번 돌아봐요. 이따가 '킬리만자로'에서 만나요."
그녀는 자신이 너무 신경과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조그만 창문을 통해 골목 입구에 서 있는 두 사나이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들은 젊은 여자마다 조사하고 있었다.
형사들인 것 같았다. 형사들이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젊은 여자들을 조사하는 걸까.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그녀는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꺼내 보일 수는 없었다.
민기가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심상치 않은데요. 경찰이 쫙 깔렸어요."
하고 말했다.
"주로 여자들을 조사하고 있는데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형사들은 임검을 하면서 사진 대조를 하고 있었다.
"나가시면 곤란하겠습니다."
민기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월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민기는 그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살펴보고 올 테니까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민기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쯤 후 그는 돌아왔다.
"이젠 나가셔도 됩니다."
월은 민기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형사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재빨리 걸어갔다.
"만일 경찰이 묻거든 우리 오누이처럼 행동해요."
그녀는 민기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누님."
민기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들이 커브진 골목을 돌았을 때 저만큼 떨어진 곳에 남자 두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역시 형사 같았다. 그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월은 안 되겠다 싶었다. 사진을 대조하면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변장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이쪽으로 가요!"
그녀는 날카롭게 말하여 옆길로 들어섰다.
뒤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월과 민기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호각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월은 원래 뛰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다급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뛰었다. 발이 빠른 민기가 그녀를 뒤에 떨어트리고 앞에 뛰어가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호각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헤어져요!"
그녀는 민기의 손을 놓고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황형사는 마침 화장실에 가고 없었고 장형사는 정육점 코너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녀는 정육점 앞으로 다가섰다. 고기를 진열해 놓은 쇼윈도 저쪽에 한 사내가 앉아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 본 듯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돌아섰다.
그리고 미심쩍어 다시 한 번 사내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장완수 형사였다. 이럴 수가! 그가 여기까지 오다니!
슈퍼마켓을 재빨리 빠져나온 그녀는 복도 끝에서 남자 두 사람이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나가면 그들과 마주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남자 화장실 안에서 황형사가 나왔다.
월은 문을 닫아 걸고 땀을 닦았다. 마치 자신이 쫓기고 있는 범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그녀는 범법 행위가 될 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경찰을 두려워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경찰이 자신의 계획을 탐지하고 그것을 저지하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경찰에 붙잡힌다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감시함으로써 피의 복수를 미리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노크 소리가 났다. 그녀도 노크했다. 그녀는 그대로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한참 지나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다시 노크했다.
밖에서 여자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각오하고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여자 셋이 문 앞에 서 있다가 그녀를 보고 눈을 흘겼다.
"미안합니다."
그녀는 다소곳이 화장실을 나왔다. 화장실 밖에 유모차가 하나 서 있었다. 유모차 속에는 갓난아기가 들어 있었다. 아기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두 사나이가 막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얼른 숙였다. 엉겁결에 유모차에 손이 갔다. 유모차가 굴러갔다. 그녀는 아기를 보고 웃었다. 아기도 그녀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두 사나이는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재빠르지."
"정말이야."
"화장실 한 번 가보지."
그들은 유모차를 피해 양쪽으로 갈라졌다. 유모차가 지나가자 그들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월은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모차를 밀고 얼마쯤 가다가 마주 오는 택시를 보고 손을 들었다.
형사 두 명은 화장실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얼굴이 부은 듯한 젊은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어머! 아기가 어디 갔지?"
그녀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기가 없어졌습니까?"
형사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네, 유모차에 태워 여기다 세워뒀는데......."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멀리 못 갔을 겁니다."
형사들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를 울리는 요란스러운 구둣발 소리에 장형사와 황형사도 뛰어나왔다.
먼저 뛰어나온 형사들은 저만큼 떨어진 곳에 유모차만 덩그라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길 모퉁이로 사라지는 택시의 뒷좌석에 젊은 여자가 하나 앉아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바로 저 여자야!"
형사 한 명은 택시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고 다른 한 명은 아무 차라도 잡아타려고 거기서 기다렸다. 그러나 하필 그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장형사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월이 그물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데 대해 이상하게도 애석하기보다는 오히려 통쾌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유모차의 주인은 하마터면 아기를 유괴당할 뻔했다면서 아기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택시를 쫓아가던 형사가 땀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오월을 미꾸라지 같은 여자라고 말했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여자는 처음 보는데요. 남의 유모차를 밀고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기가 막혀서....... 잡기만 하면 작살을 내버려야지."
"그 여자는 범죄인이 아니야."
장형사는 월을 옹호하듯 말했다. 상대방은 발끈했다.
"수배 인물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 여자는 죄지은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우리한테 그 여자를 체포할 권한은 없어요. 단지 빨리 찾아내어 감시하자는 것뿐이지......."
"그럼 미쳤다고 이 짓 하는 겁니까?"
"그래도 그 여자를 찾아내야 해요."
장형사와 황형사는 슈퍼마켓을 떠났다. 더 이상 그곳에 잠복해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형사는 오월과 함께 도망치다가 사라졌다는 젊은 청년을 생각했다. 황형사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이렇게 물었다.
"그 청년은 누구죠?"
"글쎄, 만나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내 생각에는 그 여자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데, 확실한 거야 알 수 없지."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은 상당히 심각하게 돼 가는 거 아닙니까?"
"낙관할 수만은 없지. 더구나 그 여자한테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있어. 잔돈푼이 아니고 거금이야. 남편이 남긴 유산이지. 그리고 회사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어. 따라서 그 여자는 돈의 힘으로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어. 돈으로 그런 일 하나 못 하겠어?"
"그렇다면 그 청년은 고용된 사람일까요?"
황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확실히 단언할 수야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지.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사람을 고용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차를 타려고도 하지 않은 채 내처 걸어갔다. 오후 4시 10분 전이었다.
"이번에 기회가 좋았는데...... 정말 애석한데요."
"그 여자가 도망친 게 애석하다는 건가?"
"네, 붙잡았다 놓친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렇게 됐으니 그 여자는 더욱 조심할 거고 우리는 더욱 고생만 할 거고....... 이번에 잡았어야 하는 건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난 그렇지가 않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 본심 같아서는 그 여자가 복수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어. 범인들을 모두 찾아내어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황형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형사를 쳐다보았다. 장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친 김에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겠다는 듯이,
"그런데 나는 그 여자의 일을 방해하고 있어. 왜냐하면 경찰이기 때문에....... 법은 어떤 형태의 복수도 금지하고 있어. 복수하고 싶으면 법에 호소하라는 거지. 하지만 당한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그렇게 이성적이지가 못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감정은 감정으로 남아 있어. 그 여자는 복수를 자기가 해야 할 의무로 알고 있어.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생존 이유이기도 해. 만일 복수의 기회를 박탈당하면 그녀는 자살해 버릴지도 몰라. 자기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그 여자를 설득시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주면 될 거 아닙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오부인은 너무 충격이 컸어. 여러 놈한테 윤간을 당하고, 그녀 앞에서 남편은 살해당했어. 그뿐이 아니야. 뱃속의 아기도 죽고 말았어.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느낀 게 무엇이었겠어?"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질주하는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녀가 우리와는 정반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 눈에 희게 보이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검게 보이고 있어. 그래서 그녀는 자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가 있는 거야. 나는 경찰이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워."
6 유인
대낮인데도 커튼으로 빛을 차단했기 때문에 방안은 어두웠다. 한 사내가 불을 켰다. 그들은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다. 남자가 네 명, 여자가 한 명이었다.
대머리에 매부리코를 가진 사내가 시거에 불을 붙였다. 방안은 금방 향기로 가득 찼다.
"의견들을 말해 봐."
매부리코가 말했다. 살찐 얼굴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아무래도 이 근방 공기가 이상합니다. 형사들이 쫙 깔려서 가가호호를 뒤지고 있습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내가 말했다.
"네, 정말 이상해요. 여기도 얼마 전에 다녀갔어요."
눈빛이 유난히 검은 여자의 말이었다. 그녀는 코발트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팔짱을 끼고 있기 때문인지 젖가슴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안에 들어와서 조사를 했단 말이야?"
"아뇨, 그렇지 않고 누구누구 사느냐고 묻고 저를 유심히 관찰하다 갔어요. 여자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대조하는 걸 보니까 어떤 여자를 찾는 것 같았어요."
"어떤 여자?"
"모르겠어요. 사진 들고 있는 걸 얼핏 봤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함정일지 모릅니다."
하고 네모진 얼굴의 사내가 말했다. 언제나 운전대를 잡는 사내로 피부가 검은 것이 특징이었다.
"함정이라니?"
매부리코가 시거를 문 채 물었다.
"여자를 찾는 건 가짜고 목적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확증을 잡을 때까지 상대를 안심시키고 나서 갑자기 들이치는 게 그들의 수법이니까요.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 수 없지."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깡마른 사내가 말했다. 그는 항상 집을 지키던 경비원이었다.
"그럼 옮길 준비를 해. 오늘 중으로 장소를 물색해서 표가 안 나게 옮겨. 만일 적당한 장소가 없으면 급한 대로 호텔을 하나 잡아. 일단 여기를 뜨는 게 좋겠어. 그리고 너는......."
매부리코는 턱으로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내를 가리켰다.
"서울에 좀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새끼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종로 쪽이 아직 결재를 해주지 않고 있는데 이번에 가서 받아내. 만일 해주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줘."
"알겠습니다. 모두 얼마인가요?"
"한 장이야."
한 장은 1억을 말한다. 그만큼 그들이 말하는 단위는 컸다. 매부리코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5월 초에 물건이 온다고 모두 통고해 줘.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물량이 배나 많으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명동 쪽에 배신자가 나타났는데 어떤 놈인지 알아봐. 처벌은 내가 갈 때까지 보류해 줘."
"알아 놓겠습니다."
"그리고 오월에 대해서도 알아봐. 기회를 만들어 제거해 버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어. 아무래도 보스가 일본에 가든가 아니면 일본에서 사람이 오든가 할 텐데 그때는 거들어줘야 하니까 말이야."
광대뼈는 이상하다는 듯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우리와 일본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어. 서로가 필요에 의해서 만나는 거니까 사람 하나를 죽였다고 해서 그 놈들이 우리와 손을 끊지는 않을 거야.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이라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광대뼈가 일어섰다.
잠시 후 그는 집을 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제1호가 집을 나왔습니다."
"미행해요. 그리고 즉시즉시 연락해 줘요."
"제가 미행하겠습니다."
조민기는 전화를 끊고 승우를 바라보았다.
"가 봐."
승우가 창밖을 감시하면서 말했다. 민기는 밖으로 뛰어나왔다. 5시 20분께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앞서 간 차를 뒤따랐다. 40분쯤 지나 민기는 공항에서 택시를 내렸다.
제1호가 매표소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민기는 접근했다.
"7시 서울행."
1호가 웅얼웅얼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약하셨나요?"
창구 저쪽에서 여직원이 상냥하게 물었다.
"그래."
그는 반말로 대답했다. 여직원의 안색이 변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실까요?"
"김명환......."
그가 표를 사들고 돌아서자 민기는 즉시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아가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아가다는 출발 20분 전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검사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민기는 아가다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저기...... 저 사람...... 007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 노란 옷 입은 여자 뒤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표를 꺼내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까지 따라가실 겁니까?"
민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이제 가보세요."
"언제 오실 겁니까?"
"모르겠어요."
민기는 검사대 앞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불안한 것은 오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검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밖에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붙잡혀도 하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무사히 검사대를 통과했다. 아마 수사망에 구멍이 난 모양이었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며 대기실로 들어섰다. 제1호가 의자 위에 모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멀리 떨어진 뒤쪽에 앉아 1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뒤가 켕기는지 1호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후 아나운스먼트가 있었고 사람들은 출구 쪽으로 움직였다.
오월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갔다. 1호를 지나쳐 출구를 얼른 빠져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트랩을 올라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일부러 뒤쪽 자리를 택했다. 자리에 앉아 1호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1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중간 자리에 앉았다.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떻게나 노려보았는지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예정보다 5분 늦게 비행기는 이륙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닿을 때까지 그녀는 그로부터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비행기는 8시에 김포에 닿았다.
1호는 택시를 잡았다. 그녀도 뒤따라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미리 운전사에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운전사는 그녀의 요구대로 눈치채이지 않도록 1호 택시를 미행해 갔다.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1호는 시청 부근에서 택시를 내렸다. 길에는 사람들이 넘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미행하기도 좋았다.
1호는 얼마쯤 걸어가다가 R호텔로 들어갔다. 그는 곧장 프런트로 다가가 숙박 절차를 밟았다.
그것을 보고 월은 당황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몰아쉰 다음 프런트로 다가갔다.
"2515호실입니다."
프런트맨이 열쇠를 올려놓으며 1호에게 말했다.
"25층?"
1호가 물었다.
"네, 25층 15호실입니다."
"너무 높은데......?"
"거기밖에 방이 없습니다."
"......."
1호는 열쇠를 집어들고 돌아섰다. 월은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1호가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로비에 앉아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그에게 접근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10분쯤 후 그녀는 프런트로 다가가 방을 하나 달라고 했다.
"25층 16호실을 주세요."
"꼭 그 방이어야 합니까?"
프런트맨이 물었다.
"네...... 그 방이 필요해요."
남자는 카드를 내밀었다. 월은 주소와 이름을 모두 틀리게 적었다. 요금을 치른 다음 열쇠를 받아들고 25층으로 올라갔다.
15호실 앞을 지나면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6호실로 들어갔다. 방안은 넓었고 더블베드가 한켠에 놓여 있었다. 특급 호텔이라 방이 고급스러웠다.
그녀는 방문에 기대 앉아 옆방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한참 앉아 있자 옆방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냉큼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1호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섰다. 월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사내가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녀는 남자의 시선을 묵살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는 남자가 먼저 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내는 자기가 신사임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의외로 상냥하게 나왔다.
"타시죠."
제스처를 쓰면서 그녀에게 먼저 타기를 권했다. 그녀는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가 뒤따라 들어왔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안에는 단 두 사람만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뱀처럼 몸에 와 감기는 것을 느끼면서 월은 그린 듯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금 시험해 보고 있었다. 짙은 화장에 가발, 그리고 엷은 색깔이 든 플라스틱테 안경이 그녀의 모습을 딴판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 자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접근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몸매에 자신이 있었다.
한편 사내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의 뛰어난 미모에 그는 적잖게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눈은 재빨리 여자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있었다. 근사한 년인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하체가 보기에 좋았다. 크고 탄력이 있어서 바지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얼른 종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콜걸이 아닌가 했었다. 그러나 그런 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애인하고 재미보고 돌아가는 것일까. 오피스걸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처녀 같기도 하고 부인 같기도 한데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다.
"광화문이 어디쯤 있습니까?"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여기서 가까워요."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문이 열렸다. 그녀가 먼저 내렸다.
"어느 쪽인가요?"
남자가 다시 물었다.
"저쪽이에요."
그녀는 남자를 힐끗 한 번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전율했다. 그러나 사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열쇠를 맡긴 다음 함께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저도 광화문 쪽에 가는 길이에요."
그녀는 미끼를 던졌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아,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호텔을 나온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광화문도 모르세요?"
"네, 서울에 살지 않아서......."
사내는 능청을 떨었다.
"그럼 어디 사세요?"
"도쿄에 살고 있습니다."
"아, 그럼 재일교포세요?"
"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도착한 길입니다."
"그러세요. 그럼 서울 지리를 잘 모르시겠네요."
그들은 지하도로 내려갔다.
"네, 모릅니다."
"재일교포치고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집에서는 철저히 한국말만 쓰니까요."
"애국심이 대단하시군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속으로 망설여졌다. 이 자가 혹시 나를 알아보고 유인하는 게 아닐까. 유인당하는 체하면서 유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 뭐라고 단정 내릴 수는 없다.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 그렇지 않고는 접근하는게 불가능하니까.
"K호텔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 가면 있어요. 거기 가시는 거예요?"
"네, 누굴 만나기로 해서......."
"저기가 광화문이에요. 저 일대가 광화문이에요. 그리고 K호텔은 저거예요."
"감사합니다. 바쁘시지 않으면 차라도 한 잔......."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그들은 K호텔 앞에 이르렀다. 사내가 그녀를 가로막다시피 하면서 말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차라도 한 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죠."
"같은 호텔에 묵고 있으니까 만날 기회가 있겠죠 뭐."
"실례지만 몇 호실에 계십니까? 같은 층인 것 같던데......."
월은 망설이다가 마지못하는 체하면서 말했다.
"25층 16호실이에요."
"그렇다면 바로 옆방이군요!"
그가 반색을 했다.
그녀는 조금도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17호실에 계신가요?"
"아뇨, 15호실에 있습니다. 이따 전화 걸어도 되겠습니까?"
"안 돼요."
그녀는 미소지며 머리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리고 급히 걸어갔다.
사내는 그녀의 팽팽한 둔부를 노려보면서 오늘밤 어떻게든지 저걸 품에 안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근사한 년이다. 그는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K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밤은 일을 위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푹 쉬고 나서 내일 해도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일식당에 들어가 혼자서 호화판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면서 그 근사한 여자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 거리에 널려 있는 게 여자다. 그러나 돈 주고 산 여자는 매력이 없다. 끝나면 역겨운 느낌이 든다. 여자는 많지만 근사하게 생긴 여자는 흔치가 않다. 흔치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드물다. 그런데 그 여자는 무엇하는 여자일까. 여자 혼자 호텔에 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남자가 있겠지. 어떤 자식이 그 근사한 년을 데리고 호텔에 들었을까.
남자가 지키고 있으면 그녀를 넘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전화를 걸어도 되겠느냐고 하자 말은 안 된다고 하면서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히 의미 있는 미소였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부리나케 R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로비에 비치된 전화로 2516호실을 불렀다. 한참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아직 그녀가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도 외출 중인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월은 그때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가 눈치를 못 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있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저녁을 든든히 먹어 두었다. 준비는 되어 있었다. 기회만 오면 해치울 생각이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 십자가가 보였다. 그것은 공중에 붉은 빛으로 떠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교회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밝은 불빛 아래 몇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가만히 들어갔다. 그리고 긴 나무의자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사건 후에는 한 번도 교회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정면의 대형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의 품을 떠나겠습니다."
"......."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
"나는 그들을 죽일 겁니다!"
"......."
"왜 당신은 아무 대답도 없으십니까!"
"......."
그녀는 머리를 들어 십자가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그들을 벌하지 않으면 내가 벌하겠습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도망치듯 교회를 빠져나왔다.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전화통을 노려보았다. 벨이 여섯번째 울렸을 때 그녀는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아, 여보세요!"
남자 목소리였다. 옆방 사내의 목소리임을 그녀는 단번에 알았다. 예상했던 대로 걸려든 것이다.
"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아, 계시는군요. 15호실입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지금 뭘 하십니까?"
"샤워 중이에요."
그것은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와 함께 계십니까?"
"......."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침묵은 확실히 남자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아니면 혼자 계십니까?"
"왜 그런 건 물으세요?"
"아니, 그저 한 번 물어본 겁니다. 혼자 계십니까?"
"......."
그 질문에 대해 그녀는 또 침묵을 지켰다. 그것으로써 상대는 그녀가 혼자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나도 혼잔데...... 우리 맥주나 한 잔 하는 게 어떻습니까?"
수화기를 통해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럴 수 없어요."
"혼자시라면 이리 나오세요. 여기 나이트클럽입니다. 인사도 할겸 제가 술 한 잔 살 테니까 이리 나오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절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사내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그러시지 말고 한 잔 살 기회를 주십시오.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내일 커피나 한 잔 사주세요."
"내일은 제가 일찍 어디 가야 합니다. 재일동포를 이렇게 푸대접하시깁니까?"
"어머, 푸대접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잠깐 나오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이, 옷 다 벗었는데...... 화장도 지우고 엉망이에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이, 어떡하지."
그녀는 어느새 끌려가는 자세로 변해 있었다.
"빨리 나오세요."
찰칵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월은 허공을 노려보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빛을 받아 두 눈이 무섭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녀는 방안에 비치되어 있는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와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맥주가 여섯 병, 캔사이다가 다섯 개, 캔쥬스가 다섯 개, 캔콜라가 네 개였다. 캔은 마개를 따서 모두 변기에 쏟아부었다. 빈 통들은 탁자 위아래에 늘어놓았다. 그것이 끝나자 이번에는 오프너로 맥주병 마개들을 하나하나 땄다. 네 개만 따고 나머지 두 개는 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백 속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하얀 분말을 마개를 딴 병 속에 하나씩 쏟아부었다. 네 개의 병 속에 모두 털어넣은 다음 마개를 다시 끼었다.
표시가 나지 않게 오프너로 찌그러진 부분을 두드려 폈다. 약을 넣지 않은 병은 거기에 붙어 있는 상표를 조금 찢어놓음으로써 알아볼 수 있게 표시를 해 두었다. 여섯 개의 맥주병은 다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옷을 입고 머리를 대강 매만진 다음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못박힌 듯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서 있다가 방을 나왔다. 실수하면 안 된다고 몇번이나 다짐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내려갔다.
나이트클럽은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귀를 찢는 것 같은 디스코 리듬과 환상적인 사이키 조명, 자욱한 담배 연기, 코를 찌르는 술 냄새,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의 방자한 말소리 등이 한꺼번에 부딪쳐 왔다.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손을 번쩍 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사나이였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갔다.
사내는 기다리다 지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늦게라도 나타나 줘서 기쁜 모양이었다.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한다.
탁자 위에 널려 있는 맥주병들로 보아 이미 꽤나 마신 것 같았다.
"나오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
그녀는 사내가 내미는 잔을 받아들었다.
"술 잘하십니까?"
"못해요. 한 잔만 마시면 빨개요."
"그게 좋지요."
예의바른 말씨에 그녀는 약간 당혹감을 느낀다. 이 자는 언제쯤 가면을 벗을까. 지금 봐서는 살인자 같지가 않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자꾸 물어서 미안합니다만...... 혼자이신가요?"
살피듯이 하고 묻는다. 그녀는 살포시 웃었다.
"혼자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는 듯 여자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쳐다보세요?"
월은 생글거리며 물었다.
"여자 혼자서 호텔에 투숙한 게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여자 혼자서 호텔에 투숙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뭐."
그녀는 곱게 눈까지 흘긴다.
"아, 그게 아니고...... 여자 혼자 호텔에 드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람 나름이죠. 뭐."
"조금 특이한 데가 있는 아가씨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전 좀 별난 데가 있어요."
그녀가 가볍게 퉁기자 사내는 빙그레 웃었다. 그가 왼손으로 잔을 집어들었다. 월의 시선이 잠깐 그 손 위에 머물렀다가 피해 갔다. 네 개의 손가락, 마지막 새끼손가락이 없다.
벌써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자꾸만 눈에 와 박힌다. 가만 보니 그는 왼손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왼손잡이인 것 같았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이 없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 별난 여자를 좋아합니다. 평범한 여자보다는......."
"나도 별난 남자를 좋아해요."
월은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 본 듯한데요."
"어머, 그래요!"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서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얼굴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내는 그녀를 요모조모 살피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쿄서 봤나요?"
그녀는 놀리듯 물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고......."
"난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흔해 빠진 얼굴이라 그런 모양이죠."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술이나 드세요."
그녀는 처음으로 사내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어서 이 자를 취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를 알아보면 큰일이다.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어 놓으면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지.
"어디 살아요?"
말투가 점점 점잖은 티를 벗어나고 있었다.
"서울이오."
"서울에 살면서 호텔에는 왜? 더구나 여자가 왜?"
"묻지 말아요."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이유가 있으니까 호텔에 혼자 들어왔죠."
"무슨 이윤가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남자가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난 듣고 싶은데......."
"싫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결혼은?"
"마치 심문하는 것 같군요."
"궁금해서 물은 거요.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거지."
"흥, 내가 결혼한 여자처럼 보여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미혼이에요."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는 꽤나 술을 마시는데 쉬 취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러고 있지 말고 우리도 나가서 한 번 흔듭시다."
그가 허리춤을 죄면서 몸을 일으켰다.
"난 추고 싶지 않아요."
"그러지 말고 일어나요."
그는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더니 잡아끌었다. 아파서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손아귀 힘이 무척이나 억세었다. 그는 절대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플로어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일단 리듬에 몸을 싣자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멋지게 추기 시작했다. 춤에 있어서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사내도 춤솜씨가 뛰어났다.
그들은 연속해서 쉬지 않고 추다가 디스코 리듬이 끝나고 조용한 블루스곡이 흘러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끌어안았다.
"아주 잘 추는데...... 놀랐어."
"거기도 아주 잘 추던데요."
"몇 살이지?"
"숙녀 나이를 묻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가, 그럼 이름은?"
"먼저 말해 봐요."
"내 이름은 김용범......."
"일본 이름은 뭐예요?"
"일본 이름은 없어."
그는 반발로 말했다.
"한국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여기다 지사를 설치하려고 왔지."
"무슨 지사예요?"
"전화 회사...... 난 지사장으로 내정되어 있어."
"그럼 앞으로 한국에서 살겠네요."
"그렇지."
"어머나, 축하해요."
"우리 자주 만나."
사내의 억센 팔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죄었다. 그녀는 숨이 찼다.
"아이, 사람들이 봐요. 여기서 이러지 말아요."
"냄새가 아주 좋아."
그는 그녀의 머리에다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결혼했어요?"
"아아니, 아직 미혼이야."
나한테 기대를 걸어도 좋다. 남자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죽고 싶어."
갑자기 그녀가 뚱딴지 같은 말을 했다.
"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의 가슴이 격하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가슴에 비수를 꽂고 싶다.
깊이 깊이.
"내가 살고 싶게 해 줄까?"
"싫어요."
그녀는 토할 것만 같았다.
사내의 냄새가 역겨웠다. 사내의 한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만졌다.
"인생은 요리하기 나름이야. 요리하기에 따라서 맛있기도 하고 맛이 없기도 하지. 왜 살고 싶지 않지? 무슨 심각한 일이 있었나? 그래서 호텔에 혼자 투숙한 건가? 혹시 호텔에서 투신 자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네, 맞아요. 그런데 용기가 없어서 못 하고 있어요."
그녀는 눈을 뜨고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여 줄까?"
"네, 그래요."
"공짜로는 안 되지."
그들은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두 팔을 올려 사내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누구를 사랑해 봤어요?"
"그럼......."
"죽도록 사랑해 봤어요?"
"물론......."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남자를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젠 만날 수가 없어요."
"왜?"
"헤어졌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흐느낌으로 변했다.
사내는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맹수가 먹이를 놓고 어디서부터 먹을까 하고 살피는 것처럼.
"사랑하는데 왜 헤어졌지?"
"그 사람은 유부남이에요. 아내와 자식이 있어요."
"알 만하군. 그래서 호텔에 혼자 든 거군."
그녀는 끄덕였다.
"벌써 사흘 됐어요."
"이 호텔에 든 지?"
"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집에서는 나를 찾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 남자를 뺏으면 될 거 아니야?"
"그럴 수 없어요. 그도 그걸 바라지 않아요. 부인이 우리 관계를 알았어요. 현장을 들켰어요. 난 머리채를 잡혀 길거리로 끌려나왔어요. 사람들이 재미있게 구경하더군요."
그녀는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데 스스로도 자못 놀랐다.
"고발하지 않았니? 간통죄로 고발하면 영락없이 교도소에 가게 될 텐데......."
"그 여자가 파출소로 끌고 가는데 간신히 도망쳤어요. 그 분이 아내를 밀쳐내고 나를 구해 준 거예요. 그 분이 화가 나서 아내를 때리는 걸 보면서 나는 도망쳐 왔어요. 그 길로 이 호텔에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연락하지 않았나?"
"다녀갔어요.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어요. 그 분 아내는 죽으려고 약을 먹었어요. 다행히 목숨을 건져 지금 병원에 있대요."
"죄를 많이 지었군."
"네, 그래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는 정말 서로 죽도록 사랑했어요. 헤어질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함께 울었어요. 난...... 그 분이 우는 거 처음 봤어요. 그 분이 가고 난 뒤...... 몇 번이나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사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는 그녀의 귓가에다 뜨거운 입김을 쏟았다.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춤도 출 수 있고 좋지 않아.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네, 그래요. 지금은 죽지 않은 거......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분 만나 춤도 추고......."
"다 잊어."
목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을수록 좋은 거야. 내가 오늘밤 깨끗이 잊게 해 줄게."
"제발 잊고 싶어요."
사내는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넣었다. 그녀 역시 피하지 않고 하체를 앞으로 밀었다.
"내 방에 가지."
"그건 안 돼요."
"왜?"
"내 마음이 아직 정리가 안 됐어요."
"그런 거 따질 게 뭐 있어. 난 미치겠어."
"그러지 말고 내 방에 가서 술이나 마셔요. 여긴 너무 시끄러워 어지러워요."
남자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좋아! 가자구!"
그들은 나이트클럽을 나와 25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사내는 그녀를 품속에 안고 처음으로 키스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치를 보이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쪽이 오히려 살해당하고 만다.
그녀의 방으로 그들은 들어섰다.
사내는 다급해졌다. 미친 듯이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더니 옷을 벗기려 들었다. 워낙 손길이 거칠었기 때문에 거절하다가는 옷을 모두 찢어발길 것 같았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을 보니 이미 야수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밀려가다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는 그녀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 아무데나 집어던졌다. 아, 이 자에게 몸을 줘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마지막 남은 팬티를 움켜쥐면서 속으로 절규했다.
"놓지 못해?"
사내도 팬티를 움켜잡았다.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강제로 이러는 건 싫어요."
사내는 야릇한 미소를 띠면서 표독스런 인상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광대뼈가 더욱 튀어나오고 눈동자가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강제로 당하는 게 좋은 거야."
그 말과 동시에 그는 팬티를 홱 잡아당겼다. 팬티는 종이 조각처럼 찢겨져 날아갔다.
"아, 안 돼요! 이러면 싫어요!"
그녀는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그러나 사내는 더욱 잔혹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 있어!"
무자비하게 무릎으로 허벅지를 짓누르는 바람에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다리를 벌렸다.
"재일교포라고 해서 신사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아니군요."
"이 마당에 신사가 어디 있어. 신사고 나발이고......."
태세를 갖추고 나자 그는 맹수처럼 덮쳐 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지만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겁게 짓눌러 오기만 했다.
"취했군요."
"취했지만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난 아직 취하지 않았어요."
"하고 나서 마셔."
"지금 마실래요.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어떻게 해요."
그녀는 막 진입해 들어오는 그를 피해 엉덩이를 돌려 뺐다. 그는 허억 하고 숨을 내뿜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가만 있지 못해!"
"누구한테 명령이세요."
"이게......."
다음의 그의 행동은 오월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오른손 주먹으로 그녀의 턱을 후려쳤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아!"
턱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그녀는 축 늘어졌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왔다.
"말 안 들으면 알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목을 짓누른다. 계속 저항하면 정말 목을 눌러 죽일 것 같았다.
그녀는 저항을 포기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진작 이럴 것이지."
"이건 강간이에요."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강간처럼 좋은 게 어딨어. 나는 강간을 즐기는 편이야. 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싶어해."
그가 마침내 헤집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증오감에 몸을 떨었다. 그것을 사내는 그녀가 흥분해서 그러는 줄 알고 그것 보라는 듯 흐흐흐 하고 웃었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이런 치욕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이런 것이야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는 생명 없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사내가 적극적으로 응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거기에 결코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내는 혼자 흥분해서 몸부림치다가 제풀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대로 욕심을 채웠는지 그는 만족한 한숨을 내쉬면서 담배를 피워 문다.
"점수를 매기면 90점은 되겠다."
"무슨 뜻이에요?"
"모르면 가만 있어."
"알고 싶어요."
"섹시한 점에서 말이야."
"난 가만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90이야. 움직여 줬으면 만점이겠어."
"정말이에요?"
"음, 흡수력이 굉장해."
"그 분도 그런 말을 했어요."
"정말 좋은 무기를 가졌어. 한 번 붙어본 남자는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겠어."
"왜 말이 그렇게 저속해요?"
"그런 말을 하는데 고상한 말을 쓰라는 말인가? 난 그렇지가 못해. 당분간 너는 내 애인이 돼 줘야겠어."
"흥,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하는 거야.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 하지 마.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 내 곁에 있어야 해. 알았어?"
"......."
그녀는 일부러 침묵을 지켰다.
"알았느냐 말이야?"
"생각해 보구요. 아, 목 말라."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냉장고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면서,
"취하면 나도 기분낼 수 있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맥주병을 모두 꺼내 탁자 위에 갖다놓았다. 탁자 앞에 앉아 오프너로 맥주병 마개를 땄다. 상표가 찢어진 것이었다. 컵에 맥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나도 목이 칼칼한데......."
사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잔 드세요. 시원하니까."
그녀는 새 병마개를 땄다. 그것은 상표가 찢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사내가 탁자 앞에 와서 앉았다.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벌거벗은 몸으로 마주 앉았다. 그녀는 요염한 눈길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벌써 오르나?"
사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면서 새 병의 맥주를 잔에다 따랐다. 그녀는 그 병을 사내 쪽에 내려놓은 다음 거품이 이는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드세요."
사내가 잔을 받았다.
그녀는 다리를 포겠다. 그리고 상체를 뒤로 젖히고 상대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거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저 놈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면서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젖무덤을 싸안았다.
"술 잘하세요?"
일부러 술잔에 관심을 두도록 그렇게 물었다.
사내는 오른손으로 남근을 주무르고 왼손으로 술잔을 든 채 말했다.
"맥주 같은 거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지. 이게 어디 술인가."
그러면서 그는 단숨에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월은 숨을 죽이고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사내는 잔을 탁자 위에 탁 놓고,
"어, 시원하다."
하고 말했다.
월은 재빨리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오늘밤은 잘 생각 하지 마."
"네, 좋아요."
그녀는 요염하게 웃었다.
"우리 두 사람만의 파티를 여는 거야. 섹스 파티를......."
"네, 좋아요. 얼마든지......."
"이제야 솔직하게 나오는군."
남자는 두 잔째 술을 기분좋게 들이켰다.
"자, 한 잔 들어."
잔이 그녀 앞으로 건너왔다. 그녀는 냉큼 병을 들어 잔을 반쯤 채웠다. 그것을 재빨리 마신 다음 도로 잔을 건넸다.
사내는 세 잔째 술을 두 번에 다 마셨다. 상체를 소파에 묻더니 눈을 꿈벅거린다. 눈꺼풀이 무겁게 움직인다.
"취하세요?"
그녀는 조롱기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아니, 취하긴......."
그는 네 잔째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술맛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하면서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순간 그녀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오줌 냄새 같은 게 나."
"오줌 냄새요?"
"어떤 놈이 맥주에다 오줌을 쌌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럴라구요."
그녀는 그의 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내 코가 이상해졌나."
그는 코를 벌름거리더니 다시 잔을 집어들었는데 눈은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술 못 하는 남자를 보면 쪼다 같아요. 남자라면 술, 담배는 어느 정도 해야 해요."
"그렇지."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 마시는 모습이 아주 멋져요."
그 말에 그는 기분이 좋은지 벌쭉 웃었다.
월은 다섯번째 잔을 채우고 나서 일어섰다. 욕실에 들어가 5분쯤 있다가 나와 보니 술은 그대로 있었고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녀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무시는 거예요?"
무릎을 흔들자 그는 눈을 조금 뜨다가 도로 감아 버렸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한쪽으로 꺾어졌다. 상체도 기울어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저주와 증오의 빛이 번득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내 쪽으로 다가가 의자를 뒤로 밀어 넘어트렸다. 사내 몸뚱이가 의자와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내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치우고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백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이발용 면도칼이었다. 날이 시퍼런 빛을 뿜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면도칼을 쥐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발로 그것을 꽉 밟고 비벼댔다. 사내가 끙 하고 몸을 틀었다.
그녀는 긴장하면서 면도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목을 겨누고 내리칠 듯 하다가 그녀는 칼을 도로 내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일 수는 없어! 공범들을 알아낸 다음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야 해!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격렬하게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결코 울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도 다짐했는데도 또 울음이 터졌다.
그녀는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아침에 사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의 팔에다 주사를 놓았다. 강력한 마취제로 여섯 시간 정도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9시가 되자 그녀는 외출 채비를 하고 방을 나왔다. 방문 손잡이에는 'No Disturb'(깨우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을 걸어놓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프런트에 하루 더 묵겠다고 숙박료를 선불했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아침 식사를 억지로 먹은 다음 남대문 시장으로 나갔다.
먼저 쇼핑백을 하나 구입했다. 다음에는 접착력이 강한 미제 테이프를 샀다. 천으로 된 테이프로 폭이 5센티미터쯤 된 대형이었다. 한 덩이의 길이가 100미터였는데 그것을 두 덩이나 샀다. 마지막으로 가늘고 질긴 철사를 구입했다.
호텔방으로 돌아오니 12시 5분 전이었다.
제1호는 카펫 바닥에 그대로 나뒹굴어져 있었다. 누가 방안에 침입한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일에 착수했다. 먼저 사내를 욕실로 끌고 갔다. 몹시 무거워 여간해서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다리를 힘껏 잡아당기자 겨우 조금 당겨왔다. 그렇게라도 움직여 주니 다행이었다. 가까스로 욕실에 처넣었을 때는 숨이 턱에 차고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얼굴을 씻고 나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철사로 두 발목을 묶었다. 엎어놓고 뒤로 묶었다. 가냘픈 여자의 손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악에 받쳐 정신없이 하다보니 남자 이상으로 단단히 손발을 묶어 놓았다.
그 일을 끝내자 마지막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가장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녀는 발목에서부터 테이프를 감아 나갔다. 단단히 죄면서 감아 나갔다. 사내의 몸은 서서히 흰색으로 변해 갔다. 하체를 완전히 감고 상체로 올라갔다. 통째로 감아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허리, 가슴, 목으로 올라갔다. 목만은 숨이 막힐까봐 약간 여유를 주고 감았다.
마지막으로 머리통이 남았다. 눈, 귀, 코, 입을 남겨두고 모두 하얗게 발랐다.
마침내 1호 사나이는 괴이한 형태로 변했다.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아닌 괴물 같았다.
테이프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 번 감았다. 두번째부터는 감기가 쉬웠다. 사내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더 이상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 번 감았다. 네 번 감고 나자 테이프가 모두 떨어졌다.
죽을 힘을 다해 사내를 욕조 속으로 처넣는 데 성공했다. 그를 천장을 보게끔 반듯이 눕혔다.
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사내는 3시가 조금 지나 눈을 떴다. 눈만 번득일 뿐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상하다.
"아, 아니......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몸을 뒤틀어대며 사내가 묻는다.
"목소리를 낮춰!"
그녀는 면도칼을 눈앞에 갖다 댔다.
"네놈을 만나려고 내가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 줄 알아."
그녀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일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답답해서 미치겠어. 이거 좀 풀어줘. 뭘로 이렇게 동여맸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네가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이걸 풀 수는 없어."
"이걸 풀어! 이게 무슨 짓이야!"
사내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누군지 아직 모르겠어?"
사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우리는 어제 만나지 않았어? 나에게 강간당했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오월이라는 여자를 알고 있어?"
"뭐, 뭐라고?"
목소리가 드디어 떨리고 있었다.
"오월...... 그래도 몰라?"
"몰라. 그런 이름은 처음이야."
"내가 바로 오월이야. 네놈이 죽이려다 실패한 오월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그런 이름 몰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 쉽게 자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녀는 샤워기를 내렸다. 그것을 왼손에 들고 물을 틀었다. 샤워기를 놈의 입에다 갖다 댔다.
"사, 사람 살려!"
사내는 악을 쓰면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샤워기를 입 속에 틀어넣는 바람에 목이 막혀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그녀는 샤워기를 입에서 뽑아냈다. 그러나 물은 잠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물이 욕조를 채우기 시작했다.
사내는 입을 벌리고 헐떡거렸다. 물에 입술이 불어터져 있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하지 않으면 네놈은 물에 빠져 죽을 거다."
그녀는 다시 샤워기를 얼굴에 가져갔다.
"아악! 그만! 그만! 마, 말하겠습니다! 제발 그만!"
그녀는 샤워기를 거두었다.
"말해 봐. 오월이란 여자를 아나 모르나?"
"아, 압니다."
"그 여자가 누구지?"
"부인입니다."
"누구의 부인이었지?"
"유, 유동림의 부인이었습니다."
"유동림은 어떻게 됐지?"
"모, 모릅니다."
다시 얼굴에 물이 부어졌다.
"주, 죽었습니다."
사내는 쥐어짜듯 말했다.
"어떻게 죽었지?"
뜨거운 물이 어느새 그의 몸 위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 물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자, 말해 봐. 바른 대로 말하는 거야. 바른 대로......."
"살해됐습니다."
"어떻게?"
"칼에 찔렸습니다."
"네가 찔렀지?"
"아, 아닙니다! 나는 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찔렀습니다"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나 보지? 이건 장난이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그녀는 손을 뻗어 사내의 얼굴을 짓눌렀다. 뜨거운 물 속에 잠기자 사내는 입으로 물을 뿜으며 숨이 막혀 헐떡거렸다.
"제가 찔렀습니다! 넷이 모두 찔렀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말해 봐."
그녀는 저주스러운 나머지 말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때 나는 네놈들에게 윤간당하고 기절해 있었어. 그 사이에 너희들은 그 사람을 살해했어. 그렇지?"
"네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묶은 것을 풀고 갑자기 달려들었기 때문에 당황해서 찌른 겁니다."
"그때 나는 임신 중이었어. 그러나 아기는 죽었어. 너희들이 죽인 거야. 결국 너희들은 나의 남편과 뱃 속의 아기까지 죽인 거야. 그리고 나를 파멸시키고....... 신혼 6개월의 가정을 파멸시킨 네놈들을 찾아 나는 집을 나왔어. 내가 죽든가 너희들이 죽든가 둘 중의 하나야."
"죽을 죄를 졌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사내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하는 것을 그녀의 다음 말이 막았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병원으로 나를 죽이러 왔었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죽음을 앞에 둔 사내는 목숨을 건져 보려고 발버둥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월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왜 나를 죽이려고 했지?"
"뒤탈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현장을 목격했고 목소리까지 들었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대신 엉뚱한 사람을 죽였어. 그때 나를 죽였더라면 너희들은 더 오래 악당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명령이 그렇게 내려져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명령?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구야?"
월은 나직이 전율하며 물었다.
"두목이 내렸습니다."
"두목? 그 자의 이름은?"
"모릅니다. 아무도 두목의 이름을 모릅니다."
"알고 있는 것은 뭐야?"
"암호뿐입니다."
"암호가 뭐야?"
"죽음의 키스......."
"뭐라고?"
"죽음의 키스입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금방 드러나. 만일 하나라도 거짓말일 경우에는 네놈의 눈을 뽑아 버릴 거야."
"저, 정말입니다. 거짓말 할 리가 있습니까?"
그녀는 사내의 입 속에 물에 적신 수건을 틀어넣었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사내의 옷을 뒤져 수첩을 꺼냈다. 자신의 백 속에서 사진과 소형녹음기를 꺼냈다.
그녀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 입에 틀어막은 수건을 꺼냈다. 사내는 질식 일보 직전이었던지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며,
"제발...... 제발."
하고 중얼거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기력이 떨어진 듯했다.
그녀는 녹음기를 틀었다.
"두목의 얼굴은?"
"모릅니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연락을 취하지?"
"반장을 통해서 연락합니다. 반장은 연락처를 알고 있습니다."
"반장의 이름과 연락처를 대봐."
"이름은 이준구...... 전화번호는 457국에 3662입니다."
"그 전화번호는 부산에 있는 너희들 아지트 전화번호야?"
"네, 그렇습니다."
"반장은 어떻게 생겼지?"
"뚱뚱하고 머리가 벗겨졌습니다."
월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 잔가?"
"네네, 그렇습니다."
"이 자는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나?"
"가담한 정도가 아니라 그날 밤 총지휘했습니다."
"이 자는?"
그녀는 다른 사진 한 장을 보였다. 그것 역시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한상필입니다."
"같은 일당인가?"
"그, 그렇습니다....... 제발 물을 좀 빼 주십시오. 숨이 막혀 죽겠습니다."
"그대로 있어. 이 자도 내 남편을 죽이는 데 가담했나?"
"네, 그렇습니다."
그 자는 4번 사나이로 운전을 맡고 있던 자였다. 중키에 피부가 검고 얼굴이 네모진 것이 특징이었다.
월은 5번 사나이의 사진을 집어들었다. 경비를 서던 사나이였다.
"이 자의 이름은?"
"엄창근입니다."
"이 자도 그날 밤 우리 집에 왔었나?"
"네, 같은 공범입니다."
그는 그녀가 일일이 그들의 사진을 찍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란 듯했다.
"그 사진들은 모두 어디서 났지요?"
"내가 찍은 거야. 이 여자의 이름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여자 사진을 들이댔다.
"민혜련입니다. 우리 조직의 일원입니다."
"내 남편을 죽이는 데 가담했나?"
"가담하진 않았습니다. 남자 네 명만 가담했습니다. 그 여자는 아닙니다."
"너의 진짜 이름은 뭐지?"
"김명환입니다."
"양동팔이라는 이름은?"
"가명입니다."
"배광식을 알지? 일명 손대식 말이야?"
그는 월이 부산에서 처음 만난 사내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조직원입니다."
"반장의 암호는 뭐지?"
"면도날입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모든 걸 다 털어놓겠습니다."
"먼저 사실대로 털어놔. 그러면 살려줄 수도 있어."
"사실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사내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었다. 오월은 사내의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했다.
보 스...... 죽음의 키스
이준구...... 면도날
김명환...... 작두
한상필...... 족제비
엄창근...... 거미
민혜련...... 살쾡이
손대식...... 플레이 보이
그밖에 열 명이 더 있었다. 그들에게도 물론 이름 외에 암호로 보이는 표현들이 붙여져 있었다.
각자의 연락 전화도 적혀 있었다. 김명환은 각자의 암호들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월이 수첩을 들여다보며 묻자 그는 하나도 틀리지 않고 대답했다.
"너와 손대식은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어. 손이란 자는 없어진 지 얼마 안 됐어. 왜 손가락이 없어졌지?"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실수하면 손가락을 자릅니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습니다."
"도대체 무슨 조직이지?"
"네, 밀수 조직입니다."
"밀수 조직?"
"네, 밀수 조직입니다."
"조직 이름이 뭐지?'
"흑풍(黑風)입니다."
"검은 바람이란 뜻인가?"
"네......."
"밀수 조직이 왜 남편을 살해했지? 왜 우리집을 침입해서 그 분을 살해했지?"
"그,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라니? 무슨 이유?"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면도칼을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금방이라도 눈을 도려낼 것만 같았다.
사내는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흔들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말해! 빨리!"
"당신의 남편인 유동림은 밀수 운반책이었습니다."
"뭐라고?"
그녀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해서 물었다.
"당신의 남편은 밀수 운반책이었습니다."
그녀는 뚫어질 듯이 그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나를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놀리다니요!"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녀는 면도칼을 입 가까이 들이댔다. 입을 찢을 듯이.
"저는...... 사실대로 말하라고 해서 사실대로 말한 겁니다. 이러시면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라니까!"
그녀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당신의 남편 유동림은 밀수 운반책이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그럴 수가 없어! 그 분은 건설회사 사장이었어!"
"네, 건설회사 사장이었지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밀수 운반책이기도 했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사, 사실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녀는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 조직원은 아니었지만 우리 조직에 고용된 밀수 운반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야?"
그녀의 얼굴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런데 유동림이 그 일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유능한 운반책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수단과 배짱도 대단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꼭 필요했던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 그 분이 뭐가 아쉬워서 그 짓을 했겠어?"
"돈이 아쉬워서 한 게 아니죠. 처음에는 돈 때문에 했지만 나중에는 조직의 강요에 못 이겨 한 것이지요. 일단 우리와 손을 잡으면 손을 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우리가 허락하지 않은 이상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와 거래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지시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혼을 내주기 위해 댁에 침입했던 겁니다. 그가 저항만 하지 않았던들 우리도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가 저항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반장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반장이 쓰고 있던 복면을 벗겨냈지요. 반장은 얼굴이 드러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혼내 주더라도 절대 우리가 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지요. 단지 그가 짐작으로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주었으면 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반장의 얼굴까지 보고 말았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를 죽인 겁니다. 하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사내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시끄러! 이 개 같은 놈!"
그녀는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1분쯤 눌렀다가 떼자 그는 몸서리를 치며 울음을 그쳤다.
"내가 살아 나가기만 해봐라. 네년을 갈가리 찢어죽일 테다! 찍어죽이고 말 테다."
사내는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그녀는 그의 입 속에 물수건을 틀어넣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제발 죽여 보시지. 남자가 왜 이렇게 무력하실까? 자, 일어나서 나를 죽여봐, 이 놈아!"
사내는 아무 소리도 못 지른 채 눈알만 굴렸다.
"소리지르면 더 깊이 찔러넣을 거야. 그렇게 되면 넌 질식해. 소리지를 거야, 안 지를 거야?"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입에서 수건을 뽑아냈다. 사내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 남편이 언제부터 밀수에 가담했지?"
그녀는 남편에 대한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만일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남편의 겉만 알아온 셈이다. 그녀는 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몇 년 전부터였습니다. 동림건설을 세우기 전 대지건설에 있을 때인데 그때부터 가담했습니다. 대지건설은 명색만 건설회사이지 사실은 밀수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습니다. 우리가 차린 회사였지요. 해외건설 수주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출입국이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점을 십분 이용했던 겁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나마 실적을 위해 건설을 안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었고 주업은 밀수였습니다. 부인의 남편은 멋 모르고 회사에 들어와 일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밀수에 가담하게 되었지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
미 늦은 뒤였지요. 발을 빼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지요. 갖은 협박과 설득으로 그는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는 운반책으로 뻔질나게 해외 나들이를 했지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때는 결혼 전이었지만 그녀는 유동림이 유난히도 외국에 자주 나간다고 생각했었다. 회사 일 때문이겠거니 하고 해석했지만 지금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가서 그 사람은 아주 열성적으로 일했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돈이나 벌자고 생각한 거지요. 사실은 한 번씩 성공할 때마다 막대한 돈이 굴러들어오곤 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그는 수 년 내에 거액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동림건설을 차린 거지요. 그는 자기 사업체를 갖게 되고 그것이 잘 되자 밀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연한 결과지요. 그가 우리와 손을 끊으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협조할 것을 강요하자 그도 만만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전과 달랐습니다. 만일 더 이상 강요
하면 우리 조직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를 혼내 주기 위해서......."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하지?"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런 상태에서는 증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저를 풀어주면 증거를 보이겠습니다."
"그 증거란 게 어디 있는데?"
"반장한테 증거물이 있습니다."
"어떤 증거물인데?"
"지출 명세서입니다. 유동림에게 운반 수당으로 지불한 돈의 액수를 적어 놓은 명세서입니다. 그 장부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부인 남편의 암호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
"네, 밀수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암호였지요. 그렇지만 그림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 외에는. 수사기관에서도 그림자를 검거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끝까지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했으니까요. 그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게 나돌았을 뿐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일에 있어서만은 그는 아주 능란한 솜씨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그 분을 모욕하지 마!"
그녀는 증오에 차서 소리쳤다.
"모욕하는 게 아닙니다."
사내도 안간힘을 다해 소리질렀다.
"누가 뭐래도 그 분은 내 남편이었어!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어! 그게 사실 이었다 해도 그 분은 너희들의 마수를 벗어나려고 하다가 살해됐어! 너희들은 악마야! 악마!"
"......."
"그 분은 뭐래도 내 남편이었어! 내 사랑하는 남편이었어! 우리는 오랫동안 사랑하다가 결혼한 거야! 그런데 결혼 6개월 만에 너희들이 우리의 사랑과 가정을 짓밟아 버린 거야! 악마 같은 것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사내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 할 말을 잊고 있었다.
한참 후 그녀는 좀 진정이 되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 조직에 대해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
"우리 조직은 가장 강력한 조직입니다. 지금까지 국내에는 수개 조직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모두 없애고 하나로 통일한 겁니다. 조직원 수가 몇 명인지는 잘 모르지만 대략 100여 명이 10개 반으로 나뉘어 활약하고 있습니다. 면도날이 이끄는 반은 보스의 직속 기구로 기획과 감찰을 맡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보스의 명령이 잘 집행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반이지요. 회사로 말하면 비서실 같은 곳입니다."
"가장 악랄한 놈들만 모여 있군."
"밀수 조직인 만큼 엄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반은 어떻게 연락하지? 또 그들의 명단은 어디 있지?"
"저는 모릅니다. 보스와 반장만이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 없어."
"정말입니다. 그건 극비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모릅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을 비하시킴으로써 위기를 벗어나 보려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부산에 몰려 있는 거지? 그 집에서 무엇들을 하고 있는 거지?"
"이번에 50억대의 밀수품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부산 쪽에서 반란자가 생겼습니다.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내려간 겁니다."
"해결되었나?"
"아직 안 됐습니다."
"그 집은 그럼 너희들의 아지트인가?"
"네, 부산 쪽 아지트입니다."
"일본인은 왜 죽였지?"
"그것까지 알고 있군요."
"너희들 일거일동은 전부 체크되고 있어."
"이렇게 된 이상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 일본 놈은 우리의 중요 거래선이었습니다. 그 놈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놈이었지요. 그런데 놈이 이번 거래에서 우리와 손을 끊고 다른 자와 거래하겠다는 거였습니다. 그 놈이 올 때마다 우리는 살쾡이를 안겨주고 극진히 접대했습니다. 놈은 살쾡이에게 반해서 그 여자를 일본에 데리고 가 살림을 차리겠다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습니다. 살쾡이가 거부하자 놈은 그것을 이유로 우리와 손을 끊고 다른 놈하고 거래를 트려고 했습니다. 그 다른 놈이란 우리 조직을 배반한 놈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측
에 질질 끌려왔습니다. 이 기회에 대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단호한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놈을 죽인 겁니다."
이제 알아볼 것은 거의 다 알아보았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 목적을 실행하는 데 주저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욕조 속에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죽은 호수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자 사내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는지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는 살려달라고 무수히 애걸했다. 그녀가 조금도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자 그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당황한 그녀는 그의 입 속에 물수건을 틀어막고 재갈을 물렸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그녀는 문을 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웨이텁니다. 무슨 일 없습니까?"
"없는데요."
"비명 소리가 들리기에 왔습니다."
"아무 일 없어요. 장난으로 그런 거예요."
"다른 손님들한테 폐가 되지 않도록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내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욕조 밖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다가 그녀가 다가서자 머리로 그녀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그녀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녀가 잠시 넋을 뺀 채 사내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가 면도칼을 집어들고 달려들었다. 사내가 멈칫하는 사이 면도칼이 번쩍하고 빛을 뿜었다. 동시에 피가 솟구쳤다.
입이 틀어막힌 사내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다시 욕조 속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면서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욕조 속의 물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녀는 숨이 턱에 차서 시체를 내려다보다 면도칼을 손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무릎을 꺾으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욕조의 모서리에 이마를 댄 채 그녀는 한동안 정신없이 울었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한 데서 온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허탈과 공포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자신이 마침내 살해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몹시 놀라고 있었다.
한참 후 울음을 그친 그녀는 다시 한 번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욕조 속의 물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그 속에 잠겨 있는 시체는 더욱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체는 천정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변기 위에 허리를 굽히고 토하기 시작했다. 토하고 나자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냉정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온통 지문투성이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는 그것들을 일일이 찾아내 닦아낸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것을 닦을 필요성을 그녀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 그녀는 호텔방을 나왔다. 서두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곱빼기로 마셨다.
공포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언젠가는 체포되어 처벌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은 세 명을 제거할 때까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 일이 끝나면 아무 때나 체포되어도 상관없다. 체포되기 전에 자수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나서 커피숍을 나왔다. 프런트 데스크에는 들르지 않았다. 대낮이었다. 호텔방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 정오까지 방을 얻었으니까 그때까지 시체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꽃가게에 들렀다. 흰 백합을 한 아름 산 다음 택시를 잡아탔다.
한 시간쯤 지나 그녀는 공원 묘지로 들어섰다.
젊은 묘지 관리인이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남편의 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봉분 위에는 잔디가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묘 앞에 놓여 있는 화병 속에는 말라 비틀어진 꽃나무 가지 몇 개가 초라하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가져온 백합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격렬하게 가냘픈 어깨를 떨면서 흐느껴 울었다.
한참 정신없이 그렇게 울고 있는데,
"그만 고정하십시오."
하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점퍼 차림의 젊은 사내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관리실에 있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관리인이 그녀를 알아보고 있었다.
"부인 되시지요?"
"......."
그녀는 끄덕였다.
"장례 때 오시고 처음 오시는 거지요?"
"......."
그녀는 부끄러운 얼굴을 숙였다.
"물을 갈아드리지요."
관리인이 화병을 집어들었다.
"그 꽃은 누가 갖다 꽂은 건가요?"
"어느 형사가 가져온 겁니다. 장 모라는 형사인데......."
그녀는 멈칫하고 관리인을 쳐다보았다.
"언제 그 분이 오셨나요?"
"한 열흘 정도 됩니다. 그전에도 한 번 왔었지요. 부인을 찾고 있더군요. 부인이 여기 오시면 즉시 자기한테 연락해 달라고 했습니다만......."
"연락했나요?"
"아니오, 아직 안 했습니다."
관리인이 화병의 물을 갈아올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관리인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그 분한테 연락할 건가요?"
"네, 경찰의 부탁인데 안 들어주기가 곤란하군요. 연락하면 안 되나요?"
"......."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그것을 보고 관리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요?"
"아뇨."
그녀는 화병에 백합을 꽂은 다음 두 번 절하고 돌아섰다. 관리인은 멀리까지 따라나왔다.
그녀가 만원짜리 두 장을 집어주자 그는 사양하다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녀가 대절한 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관리인은 천천히 관리실로 돌아왔다. 낡은 책상 위에는 전화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망설이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관리인은 서랍을 열고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이윽고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떨어지면서 남자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들려왔다.
"저기...... 장완수 형사님 좀 부탁합니다."
"장형사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안 계십니다. 지방 출장 갔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는가요?"
"모릅니다. 거기 어딥니까?"
"동산 공원 묘지입니다."
"공원 묘지라구요? 무슨 일로 그럽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돌아오시면 전화 왔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관리인은 수화기를 얼른 내려놓고 일어섰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월은 서울역에서 택시를 내렸다.
부산행 침대칸 표를 한 장 구입한 다음 시내로 들어갔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공원 묘지에서부터 줄곧 뇌리에 따라다니는 얼굴이 있었다. 눈매가 사납게 찢어진 그 키 큰 형사였다. 짙은 눈썹에 큼직한 코를 가진 그 형사가 집요하게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기분이 착잡했다.
내가 드디어 범인들 중의 한 명을 살해한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까지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아니면 비극을 막기 위해 나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살인범 오월을 뒤쫓게 되겠지.
그녀는 가발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잿빛 가발을 고르자 주인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젊은 아가씨가 그런 걸 고르세요?"
"연극 공연에 사용할 거예요."
"아, 연극 배우신가 보죠?"
월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연극이에요?"
중년 부인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세일즈맨의 죽음이에요."
"어머나, 그거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거 어디서 해요?"
"부산에서 공연할 거예요."
"어머, 그래요? 그거 누구 작품이에요?"
"아서 밀러......."
그녀는 값을 깎지 않고 그대로 지불했다. 다음에 그녀는 백화점에 들러 노부인에 어울리는 옷을 한 벌 샀다. 베이지색 바탕에 검은 점이 촘촘히 뿌려진 투피스였다. 그런 복장에 어울리게 굽 낮은 검정 구두도 구입했다. 핸드백과 안경을 바꾸고 모조 진주 목걸이도 하나 샀다.
마지막으로 호텔에 들렀다. 호텔방에서 그녀는 정성들여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갔다.
두 시간 후 그녀는 품위 있는 노부인의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걸음걸이까지 느렸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에 어울리게 고급 식당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시켰다.
그로부터 1시간 30분 후 그녀는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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