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미로의 저쪽 4

3학년2반 | 2022.02.06 07:59:04 댓글: 0 조회: 573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838





제2권

- 차 례 -
7 눈은 눈으로
8 다가오는 그림자
9 성형수술
10 이상한 형사
11 잠입
12 미로(迷路)의 끝




7 눈은 눈으로
장완수 형사는 분을 참지 못해 탁자를 후려쳤다.
"도대체 왜 이제야 이것이 밝혀졌지? 그 여자가 본명으로 비행기를 탄 게 언젠데 이제야 밝혀졌지?"
"그렇지 않아도 공항 경비를 맡았던 책임자를 문책할 생각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장형사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자기보다 지위가 높다해도 상관하지 않고 욕설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본명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그걸 체크하지 못하다니,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미안하게 됐소.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지 어쩌겠소."
"그럴 수도 있다 이 말이지요?"
그는 기가 막혀 그 말을 한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상대방은 머리숱이 적고 비쩍 마른 얼굴에 무거워 보이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몹시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곳은 장형사의 근무처가 아니었다. 모르는 얼굴들만 있는 지방경찰국 안이었다.
그에게 오월이 서울로 날랐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아침 9시께였다.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그녀는 이미 전날 하오 7시 비행기에 탑승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탑승자 명단에는 엄연히 '오월'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본명으로 버젓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은 것이다. 그녀가 수사망을 교묘히 피해 탑승했다기보다 수사망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장형사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즉시 황형사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11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오른 그는 줄곧 줄담배만 피워댔다. 황형사가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코대답도 하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예감이 무엇인가 곧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끔찍한 사건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왜 서울로 돌아갔을까. 본명까지 드러내고 비행기를 탄 것을 보면 복수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서울에 도착한 그는 먼저 오월의 집과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전화도 없었다.
그는 어젯저녁 이후 서울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조사해 보았다. 두 건의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아들이 술에 취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강간 살인 사건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는 무엇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정오 조금 지나 귀가 번쩍 뜨이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R호텔에서 남자 한 명이 피살체로 발견되었다는 보고였다.
"바로 이거다!"
그는 속으로 외치면서 뛰쳐 일어났다. 그 살인 사건 보고를 받는 순간 가슴을 찌르는 육감 같은 것이 있었다.
R호텔 2516호실은 어느새 수사 요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기자들까지 몰려들어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장형사와 황형사는 방안으로 뛰어들다 말고 잠시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계속 터지는 플래시 불빛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꼭 남대문 시장 같군."
장완수는 중얼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그는 사람들을 밀어젖히고 욕실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오늘 점심은 다 먹었군."
수사관 한 명이 넌더리를 치면서 뒤로 물러섰다. 장형사는 욕조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이건 화려한데......."
시뻘건 핏물을 보면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소름끼치는 전율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왔다.
온 몸이 테이프로 칭칭 감긴 시체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시체는 시뻘건 핏물 속에 잠겨 있었다. 여러 군데 자상이 있었는데 특히 목은 반쯤 잘려나가 있었다.
"면도칼 같은 예리한 칼로 난자당한 것 같습니다."
검시의가 목 부위를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조금 부패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 시간이 상당히 지난 것 같습니다."
"언제쯤 죽은 것 같아요?"
"아마...... 하루쯤 지난 것 같습니다."
"스물네 시간 말인가요?"
장은 검시의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네, 그쯤 지났을 겁니다."
검시의는 확실한 말을 피하고 있었다. 몸의 크기로 보아 죽은 사나이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 듯했다.
"네, 틀림없습니다. 저 사람은 방주인이 아닙니다. 이 방을 얻은 사람은 젊은 여자였습니다. 숙박계에 분명히 여자로 되어 있습니다."
방에서 호텔 직원이 하는 말소리가 욕실까지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장은 방으로 나갔다. 관할 경찰서 형사들이 호텔 직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호텔 직원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한 명은 지배인이었고 다른 두 명은 프런트맨과 웨이터였다.
장형사는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숙박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2516호실 카드였는데 남녀 구분란의 여자 쪽에 분명히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이름도 '김민자'라는 여자 이름이었다. 나이는 26세. 주소는 서울 종로구 K동 231번지. 주민등록 넘버까지 적혀 있었다. 투숙 날짜는 이틀 전인 5월 7일 하오 9시였다.
"어제 아침에 하루 더 묵겠다고 하면서 요금을 선불했습니다."
프런트맨이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이 여자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지?"
카드를 흔들면서 수사관이 물었다.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실은 기억력이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닌데......."
"여자가 미인이었나?"
"네,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있군. 동행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여자 혼자 투숙할 경우 신경이 좀 가기 마련입니다."
말을 마친 다음 지배인은 턱으로 웨이터를 가리켰다.
"이 친구가 어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답니다."
형사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슨 이상한 소리?"
그들은 일제히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웨이터는 쭈볏쭈볏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낮에 이 방 앞을 지나는데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 비명 소리?"
"네, 남자 목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벨을 눌렀습니다."
웨이터는 말 한마디 해 놓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것이 성미 급한 형사들의 역정을 불러일으켰다.
"눈치 보지 말고 빨리빨리 이야기해, 임마!"
"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웨이터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벨을 눌렀더니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은 열지 않고 안에서 왜 그러느냐고 하기에 비명 소리가 나서 왔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무 일 아니라고 했습니다. 장난으로 그런 거라고 하기에 저는 별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손님들한테 폐가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르고 돌아섰습니다."
"그때가 몇 시쯤이었지?"
"점심 때였으니까 12시 좀 지나서였을 겁니다."
"그럼 12시 지나서 죽었군."
"도대체 여자 혼자서 그럴 수가 있을까?"
"공범이 있겠지."
그때 탁자 위의 맥주를 검사하던 감식반원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맥주에 마취제가 섞여 있는데요."
"그러면 그렇지."
장형사는 황형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건 매우 강력한 마취제입니다. 다섯 시간 정도 효력이 지속되는 겁니다. 어떤 맥주에는 마취제가 없습니다."
"그건 여자가 마셨겠지."
장형사가 중얼거렸다.
"남자에게 술을 권해서 마취시킨 다음 몸에 테이프를 감았다. 그리고 나서 욕실로 끌고 가서 살해했다 이건가?"
관할 경찰서 형사 우두머리가 장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의 부하들이 동의했다.
"마취를 시켰다면 여자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지. 여자 혼자였기 때문에 마취를 시켰을지도 모르지. 지문은 어떻게 됐어?"
"끝났습니다."
"빨리빨리 넘겨!"
장은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더블 침대는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감식반원이 무엇인가 집어들면서 미소짓고 있었다. 가만 보니 음모였다.
"이건 여자 거야. 이건 남자 거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플래스틱 용기 속에 집어넣었다.
"관계를 하고 나서 남자를 죽인 모양이지."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여간 어떤 년인지는 모르지만 독종이야. 남자를 저런 식으로 죽이다니 말이야."
"여자가 독을 품으면 독사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저렇게 힘들여 죽였지? 마취시킨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될 텐데 뭣 하러 테이프로 몸을 감은 다음 힘들게 욕실로 끌고가 죽였지?"
"바로 죽이기가 아까웠던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 뭔가 알아내려고 그랬을 겁니다. 물 속에 집어넣고 고문을 가하면서 자백시킨 겁니다."
장형사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자 형사들이 모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로 아는 처지라 그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꺼리는 눈치들이 역력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어?"
형사 우두머리가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없습니다."
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헌데 여긴 어쩐 일이지?"
"그냥 와본 겁니다. 맡고 있는 사건이 풀리지 않아 한 번 와 본 겁니다."
"맡고 있는 게 뭐지?"
"지난 1월에 일어난 살인 사건입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분데 여자는 강간당하고 남자는 살해되었지요."
"아, 그 사건 말이군."
상대는 뭔가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 뒤에 거기에 관련된 살인 사건이 또 하나 있었지?"
"네, 범인들이 살해된 남자의 부인을 병원까지 찾아가 죽이려다가 엉뚱한 사람을 죽였지요."
"그 사건하고 이 사건하고 무슨 연관성이 있나?"
"아,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 생각하는 바라는 게 뭐지?"
장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가만히 말했다.
"살해된 사람이 범인들 중 한 명일지도 모릅니다."
"뭐, 뭐라고?"
상대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렇지? 그게 확실한가?"
"확실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죠."
"피살자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이름이 뭐지?"
"저도 그건 모릅니다. 범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테이프를 풀어봐."
지시를 받은 형사들은 다시 욕실로 들어가 시체를 욕조에서 끌어냈다. 그들은 테이프를 풀어내는 데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테이프를 모두 풀어내자 알몸이 나왔다. 손발을 가는 철사로 칭칭 동여맨 것을 보고 수사관들은 혀를 내둘렀다.
"지독하군."
"장사라도 풀지 못하겠는데......."
그들은 각자 한마디씩 했다.
"본 적이 있나?"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하고 장형사는 대답했다.
"벗어놓은 옷에도 신원을 밝힐 만한 게 없어."
형사 반장은 피살자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문으로 밝혀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고 말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는데요."
감식반원이 피살자의 왼손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장형사는 그 손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지문 채취가 끝나고 호텔 직원들이 욕실로 들어왔다.
"이 사람 본 적이 없는지 자세히 살펴봐요."
지시대로 그들은 찬찬히 시체를 살폈다.
"이 사람...... 바로 옆방 손님인데요!"
웨이터가 갑자기 소리쳤기 때문에 모두 깜짝 놀랐다.
"옆방이라니, 어느 방 말이야?"
"15호실입니다!"
"분명한가?"
"네, 분명합니다. 팁을 후하게 받았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제 투숙했지?"
"그저께...... 그러니까 7일 밤에 투숙했습니다."
"이 방 여자하고 비슷하게 투숙했군."
"그러고 보니까 그렇습니다."
"혼자 투숙했나?"
"네, 혼자였습니다."
"15호실 숙박 카드를 빨리 가져와 봐! 15호실 문을 열어!"
그들은 우르르 옆방으로 몰려갔다.
문 앞에서 벨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얼마 후 웨이터가 비상 열쇠를 가지고 와 문을 땄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숙박 카드에 적혀 있는 2515호실 투숙객의 이름은 나진호(羅珍浩)였다. 나이는 40세. 주소는 부산 동래구 S동 178번지. 투숙 일자와 시간은 5월 7일 하오 9시로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호텔에, 그것도 나란히 붙은 방에 투숙했다는 건 무얼 의미하지?"
"이제 생각나는데...... 여자는 그날 밤 프런트에 와서는 16호실을 달라고 했습니다. 꼭 그 방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프런트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여자가 나진호를 미행해서 16호실에 투숙했다는 건가?"
장형사는 그렇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김민渼?누구고 나진호는 누구야? 두 사람의 정체는 뭐야?"
형사 반장이 의혹에 찬 눈길로 장형사를 쏘아보았다.
"지문 조회가 끝나면 밝혀질 겁니다. 김민자와 나진호는 가명일 겁니다."
"어째서?"
"하여간 조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장형사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프런트맨을 가만히 잡아끌었다. 프런트맨이 그를 따라 복도로 나오자 그는 오월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
"16호실 손님...... 혹시 이 여자가 아니었나요?"
프런트맨은 시력이 나쁜지 사진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비슷한 정도로는 안 돼. 웨이터를 다른 사람들 눈치채지 않게 불러와 봐요."
잠시 후 웨이터가 복도로 나왔다. 장형사는 잠자코 오월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웨이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16호실 손님 아닌가?"
"글쎄요.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지를 않아서."
장은 사진을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황형사를 데리고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5월 7일 오월이 신분을 노출시키면서까지 비행기를 탄 것은 범인을 미행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야. 김해 공항에서 7시 비행기를 탔으니까 김포에 닿은 것이 8시, 그 한 시간 뒤인 9시께에 두 사람은 똑같이 이 호텔에 투숙한 거야. 물론 범인이 호텔에 투숙하는 것을 보고 오월도 뒤따라 투숙했겠지."
"그게 오월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어. 하지만 내 말이 맞을 거야. 자네는 지금 공항으로 가서 5월 7일 오월이 탔던 비행기에 탑승했던 손님들의 명단을 알아 와.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 돼."
"그건 뭐하려구요?"
"그 속에 범인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황형사와 헤어진 장형사는 그 길로 16호실에 투숙했다가 행방을 감춘 김민자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주소지가 종로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K동의 231번지는 공교롭게도 어느 초등학교였다. 혹시나 해서 교무실에 들어가 김민자를 찾았지만 그런 사람은 있지도 않았다.
그는 학교 정문에서 아까 호텔에서 보았던 형사들을 만났다. 그는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가짜야."
그래도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이 수사관의 버릇인지라 그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황형사는 이미 수사본부에 들어와 있었다.
장은 탑승자 명단을 훑어보았다. 모두 1백 87명이었는데 거기에 나진호라는 이름은 없었다.
"나진호가 있을 리가 없지. 가짜일 테니까."
그의 말대로 피살자의 주소지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부산의 주소 역시 가짜였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문을 조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피살자의 지문은 직접 채취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 하나만 찾아내면 되었다. 그러나 16호실에 투숙했던 여자 손님의 지문은 16호실에서 채취한 8개의 지문을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8개의 지문 중 이것이 바로 그 여자의 지문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감식반원들은 밤새워 작업을 계속했다.
날이 밝자 각 조간 신문에는 R호텔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어느쪽의 신원도 밝혀지지 않은 보도였지만 여자가 살인범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매우 쇼킹한 사건으로 다루어져 있었다.
신문을 받아 본 사람들은 건장한 남자가 테이프에 칭칭 감긴 채 욕조 속에 죽어 있었다는 사실에 한결같이 전율을 느꼈다.
더구나 그것이 여자에 의해 자행된 살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그날 저녁 마침내 지문의 주인공이 밝혀졌다.
R호텔 2515호실에 투숙했다가 16호실에서 살해된 남자의 이름은 김명환이었다. 주소는 부산으로 되어 있었고 폭력과 밀수 전과 3범이었다. 복역 기간은 모두 합쳐 8년이나 되었다.
2516호실에서 채취한 8개의 지문 가운데는 예상했던 대로 오월의 지문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맥주병과 잔에 가장 많이 찍혀 있는 지문이었다.
이로써 오월이 복수극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수사본부에서는 장시간 회의가 열렸다. 수사진을 강화하고 수사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신속한 공조 체제를 수립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오월이란 여자도 똑같이 살인범으로 취급해야 해. 그 여자가 동정을 받을 여지는 이제 없어졌어. 그 여자는 앞으로 적어도 세 명을 더 살해할 계획인 만큼 하루 빨리 체포하지 않으면 안 돼. 동정은 금물이야."
"그 여자를 체포하는 것보다 그 여자가 복수하려는 나머지 놈들을 우리가 빨리 체포하는 것이 살인을 예방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장완수 형사의 말이었다. 그는 수사력이 오월의 체포에 집중되려고 하는 데 대해 심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여자를 체포하는 일도 중요하고 급해. 그 여자는 지금 면도칼을 가지고 다녀. 먹이를 찾아다니고 있단 말이야. 언제 어디서 이런 끔찍한 살인 사건이 또 일어날지 몰라. 그런 줄 알면서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수사본부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런 놈들은 죽어 쌉니다."
장완수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수사본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적잖게 놀란 표정들이었다.
"자네, 방금 그 말 진정이야?"
"네, 진정입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잘잘못을 가리자는 게 아니야.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자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어. 사건이 일어날 줄 뻔히 알면서 그대로 방치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계속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만 골치 아프게 돼."
수사본부장은 공개 수사를 명령했다. 장은 거기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왔다.
"자네, 정 그렇다면 그만둬. 이 일에서 손을 떼란 말이야!"
수사본부장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손을 떼지는 않겠습니다."
장형사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무리 상관이지만 그는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공개 수사를 하면 그 여자를 빨리 잡을 수가 있어!"
"공개 수사를 하면 그 여자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어째서?"
"그 놈들이 그 여자를 노리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자기들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그 여자를 역습할 겁니다. 그 여자는 놈들의 적수가 못 됩니다."
"적수가 못 되긴! 전문가 이상이야!"
수사 간부 하나가 소리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 여자는 다만 복수심에 불타 있을 뿐입니다. 누구라도 그런 일을 당하면 복수심에 불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당하기 전에 우리가 빨리 손을 써서 그 여자를 붙잡아 놓으면 되는 거야."
본부장이 말했다.
"공개 수사를 한다 해도 그 여자가 빨리 잡힌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떻든 공개 수사를 하는 거야."
본부장은 딱 잘라 말했다.
장형사는 자기 주장을 침묵으로 고수했다. 그는 자신이 오월에 대해 유독 동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복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희생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리고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는 절망을 느꼈다.
"오월이라는 여자가 노리고 있는 상대는 네 명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살해됐습니다. 우리는 살해된 자의 신원밖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범인들의 신원을 밝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당 중 한 명의 신원을 알아낸 이상 나머지 범인들의 신원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장형사는 감정을 누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김명환이라는 자는 밀수 전과가 있습니다. 일당 모두 그 방면의 전과자들인지도 모릅니다. 그 방향으로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그 방향으로 조사해 보도록 하지."
수사본부장은 아까와는 달리 순순히 그의 말을 인정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련해 보이는 늙은 수사관이 끼여들었다.
"뭐가 말이오?"
"만일 밀수 전과자들이 일당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밀수 관계로 사고가 나야 할 텐데 이번 사건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살해된 유동림은 건설회사 사장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까 그렇군."
"문제를 너무 확대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괜한 인력 낭비니까요. 우리가 처음 보았듯이 유동림은 단순 강도에 의해 살해됐을 겁니다."
"단순 강도가 아닙니다. 밀수 전문가가, 그것도 네 명씩이나 돈 몇푼 강탈하려고 침입했을 리 없습니다. 더구나 그 집에 엄청난 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밀수 전문가들이라면 큰 돈이 굴러들어오는 밀수를 하지 째째하게 강도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놈들이 그 집에 들어가 유동림을 죽였지? 놈들은 2백만원을 강탈해 갔어."
"네, 그건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놈들의 진정한 목적이 뭐야?"
"그거야 아직 알 수 없죠. 아마 오부인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동림이 밀수 조직과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그가 밀수 조직에 의해 살해됐다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유동림에 대해서도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건 자네가 알아봐."
부산 D동 고급 주택가.
망원경으로 건너편 집을 살피고 있던 신승우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저것 봐!"
그는 망원경을 눈에 댄 채 낮게 소리쳤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조민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승우를 바라보았다.
"글래머가 지나가나?"
"빨리 와 보라니까! 경찰이야!"
민기는 후다닥 뛰어 일어났다. 그는 승우를 밀어내고 삼각대 위에 고정되어 있는 망원경에 눈을 가져갔다.
"어? 저건 뭐야? 경찰이 포위하고 있지 않아?"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고 있는 새벽이었다. 새벽 으스름을 뚫고 제복의 사나이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맞은편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줄잡아 30여 명은 될 것 같았다.
조금 있자 경찰 패트롤카가 나타났다. 모두 3대였다. 차에서 사복의 사나이들이 내렸다.
그들은 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한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즉시 조립식 사다리가 담벽에 세워졌다.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다.
사나이들은 다투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민기는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승우는 휴대용 망원경을 집어들었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는데......."
"일망타진할 모양이야."
민기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악당들이 분명해. 그러니까 경찰이 이렇게 몰려온 거야."
"도로 나오는데......."
"아무도 없는 모양이지."
"밤새에 샜나?"
사복의 사나이들은 들어갈 때와는 달리 맥빠진 모습으로 나오고 있었다.
"재빠른 놈들이군."
"하지만 우리 손을 벗어날 수는 없어."
민기의 말에 승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오부인은 그 놈들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 감시만 하고 있지?"
"그 속을 누가 알 수 있어야지."
"정말 모를 일이야."
"부인한테 전화를 걸어 줘야지."
"요새는 부인 보기가 힘들어졌어."
"이상한 여자야."
민기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아가다는 금방 나왔다.
"민깁니다. 너무 일찍 전화 걸었나요?"
"아뇨, 괜찮아요. 난 자지 않았어요."
"급한 사정이라 전화 걸었습니다."
"말해 봐요."
"경찰이 그 집을 포위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조용하던 그녀의 어조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집안은 비어 있는지 그대로 나왔습니다."
"아무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단 말이에요?"
"네, 우리가 감시하던 놈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내뺀 모양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이젠 필요 없으니까 그 집에서 철수하세요. 아파트에 돌아가 있으세요."
"승우도 말입니까?"
"네, 함께 있어도 좋아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예요?"
"그 놈들은 경찰이 쫓고 있는 놈들인데 부인께선 왜 놈들을 경찰에 넘기지 않습니까?"
"또 그 질문이군."
"우리는 놈들에 대해 이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놈들이 도망치긴 했지만 우리는 놈들이 잘 나가는 곳도 파악해 두었습니다. 경찰에 신고만 하면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습니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아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바람에 민기는 움찔 하고 놀랐다. 그러나 그도 만만치가 않았다.
"범인들을 알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은 위법입니다! 그건 불의나 마찬가집니다!"
"그런 걸 따지라고 학생들을 고용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내 말 들어요. 나한테 고용된 이상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다른 짓은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네, 좋습니다. 정 그렇다면 저도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아서 하세요."
전화는 냉정하게 끊어졌다.
"뭐라고 그래?"
"안 된다는 거야."
민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째서 그러지?"
"수수께끼 같은 여자야."
민기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만두는 거야?"
승우가 당황해서 물었다.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어. 여긴 그만두고 아파트로 철수하라는 거야."
그 동안 벌여 놓은 짐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승우는 용달차를 부르러 갔다.
얼마 후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났어!"
그는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이거 보라구!"
그는 민기 앞에 신문을 집어던졌다. 민기는 승우가 가리키는 신문 사회면을 들여다보았다.
<서울 R호텔에 엽기적 살인 사건>이라는 제호가 사회면 상단을 크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피살자와 살인 용의자의 사진이 동시에 게재되어 있었다. 피살자는 남자였고 용의자는 여자였는데 여자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앗!"하고 낮게 부르짖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아가다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아가다 그녀였다.
"피살자의 사진을 잘 보라구. 바로 우리가 감시하던 제1호야"
피살자의 사진은 약간 흐리게 나와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 사나이였다.
"우리는 완전히 당한 거야."
승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신문만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아가다의 본명이 밝혀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오월(吳月)이었다. 표현은 유력한 용의자라고 했지만 경찰은 그녀를 거의 진범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신문은 이번 사건을 원한에 사무친 처절한 복수극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것이 한 여자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복수극을 벌이게 된 원인은 따로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신혼 6개월만에 이와 같은 참극을 겪었으니 누구인들 원한에 사무치지 않겠는가. 본인의 말을 듣지 못해 아직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경찰의 수사 결과와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오부인은 뼈에 사무친 원한을 복수의 칼로 풀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네 명이나 되는 흉포한 범인들을 상대로 복수극을 벌였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 대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원한에 사무쳤으면 여자 혼자서 범인들을 찾아 나섰을까. 놀라운 것은 그녀가 마침내 범인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계획대로 그 중 한 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난 넉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범인들을 추적했다. 그리하여 경찰이 단서도 못 잡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범인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을 유인하여 살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경찰은 그녀가 남은 세 명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제거하기 전에는 결코 경찰에 자수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야기는 더 계속되고 있었다. 담당 기자는 매우 흥미있게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오부인은 과연 그녀가 계획한 복수극을 완벽하게 끝낼 수가 있을까. 이것은 도덕이나 법률적인 차원을 넘어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와 닿는 관심거리이다. 경찰은 지금 오부인의 남편을 죽인 범인들 못지 않게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 전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녀가 저지를지 모르는, 예상되는 제2, 제3의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경찰의 이같은 우려는 현실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한 감이 있다. 왜냐하면 사건이 이렇게 공개된 이상 범인들은 오부인이 자기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거기에 대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부인의 계획은 좌절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여자 혼자서 흉포한 남자 셋을 당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첫번째로 살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증언 등으로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더 우려되는 것은 그녀가 범인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예상보다도 그녀 자신이 남편처럼 살해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범인들은 자기들에게 접근해 오는 오부인을 노리고 있다가 살해할 것이 뻔하다. 그들에게는 그녀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범인들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사태가 어떻게 발전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여기서 바
라고 싶은 것은 더 이상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부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눈은 눈으로' 식의 복수는 결과적으로 비극의 되풀이일 뿐이다.
이미 오부인은 한 사람을 살해했다. 상대가 누구이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죄악이다.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것은 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녀의 복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녀가 지혜를 발휘하여 원시적 충동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법의 심판에 맡겨 주기를 갈구한다.>
민기는 신문을 떨어트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신문을 집어들고 오부인의 사진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승우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민기는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녀의 살인을 도와준 거야. 만일 그녀가 체포되면 우리도 체포돼. 살인 공모로 말이지. 넌 고시 공부 하니까 잘 알겠지."
"......."
담배를 피워무는 민기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그 여자한테 이용당한 거야. 철저히 이용당한 거야. 그 여자는 돈 몇 푼 주고 우리를 이용한 거야."
"......."
민기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승우는 더욱 열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를 살인에 끌어들이다니 아주 나쁜 여자야.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우리를 이용하다니 정말 악랄한 여자야. 용서할 수 없어!"
승우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보고 비로소 민기의 표정이 움직였다.
"어디다 전화 거는 거야?"
그는 의외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한테 전화 거는 거야. 당장 만나서 경찰서로 끌고 가야 해!"
"그만둬!"
민기는 고함을 질렀다. 그 서슬에 승우는 다이얼을 돌리다 말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왜 그래?"
그는 놀라서 물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민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짓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에 가담했는데 가만 있으란 말이야? 살인 공모가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라?"
"알고 있어."
"우리는 이제 망했어."
승우는 방안을 빙빙 돌았다.
"너무 엄살 떨지 마."
민기는 냉담하게 말했다. 승우는 눈을 부릅떴다.
"내가 지금 엄살 떠는 거야?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는 살인을 공모했단 말이야!"
"그래서 경찰에 자수하겠다는 거야?"
그 질문에 승우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수하지는 않겠지."
"자수 안 해도 우리는 체포될 거야. 우리가 혐의를 벗는 길은 우리 손으로 그 여자를 경찰에 넘기는 거야."
"웃기는군. 그런 짓을 어떻게 할 수 있어. 그건 배신 행위야."
"배신? 어째서 그게 배신이란 말이야? 그 여자가 우리를 이용했는데 어째서 배신이란 말이야? 배신을 당한 쪽은 오히려 우리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그는 아주 어른스럽게 말했다. 승우가 반박하고 나오는 것을 그는 손을 저어 막았다.
"오부인은 우리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배신한 것도 아니야."
"그럼 뭐야?"
"우리를 고용한 것에 불과해. 좋게 해석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도운 거야. 우리가 그 여자를 도왔다면 그 여자도 경제적으로 우리를 도와줬어. 그러니까 피장파장이야. 우리가 자수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 여자를 도왔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그 여자가 체포되면 모든 게 밝혀져."
"천만에, 난 그렇게 보지 않아. 오부인은 우리를 다치게 할 여자가 아니야.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야."
"흥, 반해도 단단히 반했구나!"
민기는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그 여자의 행위를 충분히 이해해."
"법학도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법학도이기 전에 나도 인간이야."
"그래서?"
그들은 팽팽히 맞섰다. 어떤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맞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법이 만능은 아니야. 오늘날에 와서 법은 인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비인간화되었다. 나는 법을 가지고 그 여자의 행위를 따지고 싶지 않아. 이건 법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로맨티스트 같은 말을 하는구나."
"어떻게 해석해도 좋아. 난 내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녀의 복수 행위는 아주 당연한 거야. 나라도 법에 호소하기 전에 복수를 생각했을 거야. 그런 입장이라면 말이야."
"눈은 눈으로라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지?"
"나는 일반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한 여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인다는 건 죄악이야."
"그런 인간들은 쓰레기야. 쓰레기는 치워야 해! 깨끗이!"
그의 격렬한 어조에 승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같았다.
"너 이제 보니까 돌았구나. 돌아도 단단히 돌았어."
"천만에! 난 아주 정상이야!"
"법학도가 법을 무시하는 말을 하다니 정말 이상하구나."
"법을 공부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지. 나는 때때로 법을 무시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곤 해. 법의 비인간성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 말이야."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승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민기는 중얼거렸다.
"나는 당장 그만두겠어."
승우는 잘라 말했다.
"알아서 해. 이렇게 된 이상 권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이건 분명히 해야 해."
"뭔데?"
"오부인을 경찰에 고발하진 마. 오부인을 그대로 내버려 둬."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헛말을 한 줄 알아?"
승우는 한참 생각해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부탁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
"고맙다."
"난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이상할 것 하나도 없어. 나는 다만 그 여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야."
"적당히 해 둬."
"자, 우선 짐이나 옮겨 놓고 봐야지."
한 시간 후 그들은 그곳을 떠나 아파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파트에 그대로 눌러 있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였다.
오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10시쯤이었다.
승우가 먼저 전화를 받아 민기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이사 끝냈나요?"
"네, 끝냈습니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만나야겠어요."
"저도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럼 잘 됐군요. 이쪽으로 올래요?"
"거기가 어딥니까?"
"과히 멀지 않은 곳이에요."
반 시간 후 민기는 승우와 함께 오월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들어섰다. 그는 혼자 그녀를 만나 담판을 짓고 싶었는데 승우가 부득불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바람에 함께 오게 된 것이었다.
오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화려한 색상의 홈웨어를 입고 그들을 조용히 맞아들이는 그녀를 보고 민기는 약간 당황했다.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여자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커피를 내왔다. 그들은 소파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신문 보셨습니까?"
승우가 참다 못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지 않은 채 끄덕였다.
"네, 봤어요."
"놀라셨겠습니다."
"아뇨,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두 대학생도 담배를 집어들었다.
"신문에 난 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이에요."
너무 쉽게 인정하는 바람에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승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인은 우리를 이용했습니다!"
그는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민기는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 공범자가 되었습니다!"
승우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설명해 보십시오! 가만 있지 말고!"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녀가 희미하게 대답했다.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스쳐갔다.
"이건 미안할 정도가 아니에요! 미안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그녀의 어조가 갑자기 냉랭해지고 있었다.
홍안의 미소년 같은 승우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다.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어요!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모르겠다 이 말인가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
"부인의 원한이나 복수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그건 부인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그런데 개인적인 일에 우리를 끌어들이다니, 당신의 복수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켜도 좋다 이 말인가요?"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창백해져 있었다.
"그렇게까지 생각지 않았다구요? 그럼 어떻게 생각했다는 건가요?"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에요."
"아르바이트라구요? 기막힌 말씀을 하시는군요."
승우는 동의를 구하듯 민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승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이 체포되면 우리도 체포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살인 공범으로 말입니다. 살인 공범이 얼마나 큰 죄인 줄이나 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학생한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결코 없을 거예요."
"어째서 없을 거라는 겁니까? 공범 관계가 분명한데 어째서 괜찮다는 겁니까?"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은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체포되더라도 나는 학생들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거예요."
"안심해도 됩니까?"
"네, 안심하세요."
"그것도 문제긴 문제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인을 도와줬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모르고 한 짓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죽어야 할 인간들이에요! 살려둘 필요가 없는 무리들이에요!"
그녀가 갑자기 소리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그들이 나한테 한 짓을 아세요? 그들은 내 남편을 죽이고 내 뱃속에 있는 아이도 죽이고......."
그녀는 머리를 흔들다가 급기야 흑흑 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방안은 한동안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로 차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가 눈물을 닦았다. 자기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에 심한 반발을 느낀 것 같았다.
"법에 호소해서 복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싫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이 손으로 직접 그 놈들을 죽일 거예요."
"복수는 좋은 게 아닙니다. 나쁜 겁니다."
승우가 설득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둬."
그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민기가 친구를 제지했다. 그는 오부인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말에 그녀가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민기는 말을 계속했다.
"저는 충분히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인의 행동도 말입니다. 그런데 신문에 난 것들이 모두 사실입니까?"
"사실이에요."
"정말 나머지 놈들을 죽이실 겁니까?"
"네, 죽일 거예요."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처음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부인을 노리고 있는데도 말인가요?"
"상관하지 않아요."
"부인은 놈들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는 아주 포악한 놈들입니다."
"알고 있어요."
"부인이 오히려 당하게 됩니다."
"각오하고 있어요."
그녀의 결심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이 단호한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부인을 경찰에 넘긴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복수가 지체될 뿐이에요. 수십 년이 걸려서라도 그들을 죽일 거예요."
그녀는 뚫어질 듯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는 두 학생이 나를 경찰에 넘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말했다.
청년들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무서운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깨고 민기가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부인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요. 나도 더 이상 도움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 동안 수고가 많았어요. 여러분들에게 드릴 보수는 은행에 입금시켜 놓았으니까 아무 때나 찾아 쓰세요. 그리고 아파트는 그대로 이용해도 좋아요. 전화도 물론 그대로 쓰세요. 아파트 세는 1년치를 지불했으니까 이제 매달 내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호의니까 받아주세요."
민기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술을 사오겠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소주병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마시죠!"
세 사람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승우는 처음에는 망설이는 눈치이다가 술잔을 받아들었다.
오월은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안주도 먹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그들 사이에 대화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겨 술들을 마셨다.
"부인께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술기가 오르자 민기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묘하게 입술을 틀면서 웃었다.
"정말 그 자를 그런 식으로 살해한 게 부인이십니까?"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자!"
승우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그녀는 싸늘하게 웃기만 했다.
"당신은 살인자입니다!"
하고 승우가 또 소리쳤다.
그때는 오월도 가만 있지 않았다.
"누구나 살인자가 될 수 있어요."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살인자는 달라요."
"종이 한 장 차이에요."
그 다음부터 그녀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승우가 술김에 잔인할 정도로 추궁해 들어갔지만 상대해 주지를 않았다.
그녀는 폭음했다. 민기는 그녀가 폭음하는 것을 말리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승우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야, 가자! 살인자하고 술을 마시다니, 우리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어!"
"살인자, 살인자 하지 마."
민기는 승우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오월이 손에서 술잔을 떨어트렸다. 술이 엎질러졌는데도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살인자니까 살인자라고 하지."
"다시 한 번 그 따위 소리 하면 가만 안 둔다!"
"살인자!"
"비겁한 자식!"
민기의 주먹이 승우의 턱을 후려쳤다. 승우는 벌렁 쓰러졌다가 잽싸게 일어났다.
그리고 민기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민기는 그 주먹을 피하면서 이번에는 상대의 코빼기를 후려갈겼다. 몸집이 작은 승우는 민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코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그를 민기가 다시 때리려고 하자 그때까지 가만 있던 오월이,
"제발 그만둬요!"
하고 소리쳤다.
민기는 주먹을 거두고 승우의 코피를 닦아주려고 했다. 승우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둘이서 잘들 해 봐."
하고 빈정거렸다.
그는 잽싸게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방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오월은 몸을 가눌 수 없는지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부인."
민기가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부인, 방에 가서 누우십시오. 여기서 주무시면 감기 걸립니다."
"난 살인자야."
오월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민기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가까이 내려다보았다.
"부인은 살인자가 아닙니다."
"난 살인자야."
"살인자는 그 놈들입니다. 부인,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등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운 여자가 어떻게 그런 건장한 남자를 살해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시트를 덮어주고 돌아서려는데 그때까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지 말아요! 무서워요!"
민기는 몹시 당황했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팔을 풀려고 하자 그녀는 더 힘있게 그의 목에 매달렸다.
"가지 말아요."
"부인, 이러지 마십시오."
두 사람의 얼굴이 포개졌다.
"가지 말아요!"
"가야 합니다."
말과는 달리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오월의 입술을 자신의 입 속에 집어넣고 빨았다. 오월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응해 왔다.
그는 거의 정신 없이 그녀의 몸을 더듬어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아니 오히려 그가 쉽게 옷을 벗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벌거숭이로 뒤엉켰다.
"부인, 이래서는 안 됩니다."
민기는 문득 팔을 풀고 말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는 슬픔이 담긴 깊은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리고 얼굴을 침대에 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민기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옷을 입으려다 말고 그는 도로 침대 위로 올라가 오부인을 끌어안았다. 오부인은 몸을 활짝 열어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민기의 얼굴에 마구 비벼대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살을 섞는 순간 흐느낌은 사라지고 그 대신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상한 교합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관계였다. 너무 술에 취했던 탓일까. 관계는 순식간에 끝났다. 그는 오부인의 몸 위에서 내려오면서 심한 후회와 수치심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한참 있다가 민기는 물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관계할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가능해요."
이상하게도 그는 오부인의 품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치 그는 흡수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편안한 자세로 다시 누웠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하고 조그만 손이었다. 이런 손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였을까. 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직도 그 자들을 죽이고 싶은가요?"
그녀는 대답 대신 끄덕였다.
"그만둘 수 없습니까?"
"안 돼요."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복수는 충분합니다."
"충분하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8 다가오는 그림자
파도에 배가 흔들렸다.
그것은 벌겋게 녹이 슨 철선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낡을 대로 낡아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배였다.
선실은 어두워 불이 켜져 있었다. 불 밑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세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그들은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가운데 바닥에는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그년이 우리를 역습한 거야."
매부리코의 사나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년을 죽이지 못한 게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왔어. 어떡하지?"
그는 대답을 강요하는 눈길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그년이 어떻게 작두를 유인해서 살해했는지 그게 궁금해. 그년이 어떻게 작두를 알아냈을까?"
"......."
"어떻게 찾아냈지?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그년이 작두를 정확히 집어서 죽인 걸 보면 나머지 우리들의 정체까지도 파악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를 알아냈느냐 이거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이 신문을 보라구. 그년은 정확히 우리 셋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어. 그것도 혼자서 말야."
"작두는 모르고 당했지만 우리는 당하지 않습니다. 남자 셋이 여자 하나 못 당해내겠습니까."
"그렇게 얕잡아보면 안 돼. 작두를 유인해서 살해한 수법을 보라구. 아주 무서운 계집이야."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죠. 먹이를 던져서 유인한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죠."
"걸려들까?"
"그러니까 교묘하게 해야죠."
"어떻게?"
매부리코는 네모진 얼굴의 가무잡잡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년이 우리들의 얼굴을 알고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우리 셋 중의 한 사람에게 접근해 올 겁니다. 우리 각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접근해 오는 여자를 관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인 것이 확실하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년이 접근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겠군."
"네, 기다리고 있어야죠."
"도대체 그 여자는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작두가 불었다면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작두를 그런 식으로 죽인 걸 보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알고 있을까?"
깡마른 얼굴의 사나이가 물었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네모진 얼굴이 말했다.
"그럼 어떡하지?"
"어떡하긴...... 접근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거야. 그년 혼자서 접근해 오는 것은 겁나지 않아. 만일 그년이 경찰의 협조를 구할까봐 그게 걱정이지."
"경찰의 협조를 구하지는 않을 거야. 자기 손으로 직접 우리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니까. 경찰은 오히려 방해가 될 거야."
이것은 매부리코의 말이었다.
"경찰은 지금 그년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럴 테지."
"그년이 잡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제거해야 해. 그러려면 여기에 처박혀 있지 말고 그년을 찾아나서야 해. 우리가 눈에 띄면 접근해 올 거란 말이야."
"네, 맞습니다. 헌데 어디 가서 그년을 찾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바보 같으니!"
"저는 어떡하죠?"
그때까지 가만 있던 여자가 물었다.
"넌 그 여자의 표적이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하지만 그년을 체포하는데 네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언제나 이곳을 중심으로 행동해."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배 안에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비밀리에 설치된 전화였다.
매부리코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고 나서 말했다.
"플레이보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오월을 보았다는 거야."
"어디서 말입니까?"
"지난 3월에 그 여자가 '로댕의 집'에 나타났었대. 그리고 자기한테 접근해서 돈 많은 여자로 행세하더라는 거야. 플레이보이는 그 여자하고 육체 관계까지 가졌다는 거야. 그런데 그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거야.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사건이 터져서 생각해 보니까 오월이 자기한테 접근한 이유를 알겠다는 거야. 그녀는 새끼손가락이 잘린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했대. 죽은 작두도 손가락이 하나 없거든. 그러니까 그 여자는 손가락이 없는 사람을 찾아다닌 거야. 그리고 작두가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자 살해한 거야."
"이제 그 여자가 부산에서 활동했었다는 게 명백해졌습니다. 우리의 움직임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조심하되 상대가 안심할 수 있도록 허점을 보이라구.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거야."
"그년은 지금 부산에 내려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한 그년도 여기에 있을 거야."
"그까짓 여자 하나를 두고 뭘 그러세요. 너무 신경과민들인 것 같아요."
젊은 여자가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남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부둣가에는 횟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2층 창가에 앉아 철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놈들이 새로운 아지트로 사용하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민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월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있었다.
"놈들이 계속 드나들고 있습니다."
"저 배는 움직이지 않나요?"
"알아보았더니 벌써 6개월째 저기에 저렇게 묶여 있답니다. 너무 낡아서 수리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모양입니다."
조민기가 떠나지 않고 그대로 그녀 곁에 있어 준 것은 그녀로서는 여간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자진해서 계속 일하겠다고 했다. 오히려 그녀 쪽에서 사양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누가 나오고 있는데요."
"여자가 나오고 있어요."
그녀는 여자의 얼굴에다 초점을 맞추었다.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데가 있는 여자였다. 복수의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인물이었다.
조금 있자 큰 키에 깡마른 인상의 사나이가 나왔다.
"경비를 보던 자입니다."
"내버려 둬요."
그녀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얼마 후 네모진 얼굴의 가무잡잡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저 자를 미행해요. 저 자들도 경계하고 있을 테니까 조심해요."
민기는 즉시 뛰쳐나갔다.
30분쯤 지나자 마지막 사나이가 나타났다. 대머리에 매부리코를 가진 사나이였다.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악마 중의 악마로서 4인조의 우두머리였다.
바로 그가 남편의 살해를 지휘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간교하기 짝이 없는 자인 만큼 이쪽에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놓고 있을 것이다.
면도날은 뱃머리에서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부두로 내려왔다. 거기서도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관찰하더니 선글라스를 꺼내 끼고 길을 건너왔다.
오월은 계산을 치르고 재빨리 횟집을 나왔다. 그녀는 품위 있는 노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잿빛이었고 흰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에 걸고 있는 모조 진주 목걸이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길가에 늘어서 있는 어물가게들을 기웃거리면서 앞으로 움직였다. 누가 보아도 시장 보러 나온 사람 같았다.
면도날이 지하도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쪽으로 가는 대신 육교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육교 위로 올라가 지하도 쪽을 바라보았다. 면도날이 지하도에서 막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갑자기 뒤를 홱 돌아본다. 미행을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급히 육교를 내려갔다. 아무래도 계속 미행하다가는 눈에 띌 것 같았다. 비록 변장을 했지만 같은 사람이 자주 보이면 일단은 의심할 것이다.
육교를 내려서자 구두닦이 소년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열두서넛 되어 보이는, 까맣게 생긴 소년이었다.
오월은 소년을 길 한편으로 불러세웠다.
"너...... 내 심부름 하나 해 줄래?"
그녀는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보자 소년의 까만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네, 좋아요. 무슨 일인데요?"
"아주 간단한 일이야. 들어주면 만원 줄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년을 데리고 면도날이 사라진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얼마쯤 걸어가자 면도날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저 사람...... 대머리에 뚱뚱한 사람 보이지?"
"네, 보여요."
"그 사람이 어디 들어가는지 알아봐. 절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돼."
"모르게 따라가라 이 말씀이죠?"
"그래, 모르게 따라가야 해."
"알았어요. 그런 건 문제 없어요."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녀는 소년에게 윙크한 다음 제과점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소년이 웃으며 들어왔다.
"다방으로 들어갔어요."
"어느 다방?"
"저쪽으로 쭉 가다가 왼쪽으로 돌아가면 '민들레'라는 다방이 있어요. 2층 다방이에요."
"옛다, 수고했다."
그녀는 약속대로 소년에게 만원을 주었다.
"너무 많은데요."
"괜찮아. 받아둬. 누구한테 이런 심부름 했다고 말하지 마. 이건 비밀이야. 알았어?"
"네, 알았어요."
소년은 빵 세 개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소년의 이름은 김도근인데 얼굴이 까맣다고 해서 깜둥이란 별명으로 많이 통하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열셋. 고아원을 뛰쳐나와 구두닦이 심부름을 하기 시작한 것은 6개월쯤 전이었다. 구두를 날라다 주는 것이 주로 그가 하는 일인데, 그렇게 하면 세 끼 식사에 일당 천원씩을 준다고 했다. 세 끼 식사라야 거의 자장면으로 때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또 부탁하세요. 저는 언제나 극장 옆에 있으니까요."
"그래, 수고했다."
소년과 헤어진 그녀는 민들레 다방을 찾아갔다. 모퉁이에 들어서자 소년의 말대로 '민들레'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녀는 입구로 다가갔다. 좁은 계단이 2층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녀는 심히 망설여졌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다방 안은 넓었다. 남자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모두가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면도날을 찾았다.
그는 중간 자리에 앉아 다방 마담과 잡담하고 있었다. 둘이서 하고 있는 수작으로 보아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했다. 면도날의 시선이 오월 쪽으로 흘렀다.
그녀는 웃으며 카운터로 다가섰다. 카운터 아가씨가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엉터리 전화였다.
"순이니! 난데 미화 언니 돌아왔니! 영감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어? 웬일이지? 집 잘 봐라. 난 좀 늦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영감님 돌아오시면 차를 좀 보내. 백화점 앞으로 보내. 그리고 참, 저녁에는 다른 거 할 것 없고 된장 찌개나 맛있게 끓여."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녀는 정면을 피해 면도날의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지가 차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나이 들어 보이는 레지였다.
"우유를 한 잔 주세요. 그리고 아가씨도 한 잔 들어요."
레지에게 차를 권한 것은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위장 전술이었다.
레지와 차를 마시면서 보니 면도날은 이쪽에는 이제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마담과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오월은 아무 필요도 없는 질문을 던졌고 거기에 대해 레지는 곧잘 대답해 주었다.
그녀의 이름 박은자였다. 박은자는 다방 레지 생활이 10년이 넘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의 꿈은 결혼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이 결혼하는 것은 글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모님은 뭘 하세요?"
그녀는 오월의 변장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하고 있어요."
"무슨 사업인데요?"
"슈퍼마켓을 경영하고 있는데, 요새는 불황이라 장사가 잘 안 되네요."
그녀는 능청을 떨었다.
레지는 관심을 보이며 여러 가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오월은 거짓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친밀해졌다. 하긴 한쪽에서 의도적으로 친밀하게 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저 여자가 마담인가?"
그녀는 면도날과 히히덕거리고 있는 여자를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네, 얼굴 마담이에요."
"예쁘게 생겼는데......."
그 말에 레지는 입술을 삐쭉했다.
"예쁘기는요. 얼굴 마담치고 저만큼 예쁘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미인형인데."
"얼굴 예쁘면 뭘 해요. 속이 고와야지."
"속이 안 고운 모양이지."
"얼마나 지랄 같다고요."
그녀는 눈까지 흘기며 말했다.
"저 남자하고는 아주 친한 모양이지?"
"저 대머리만 오면 좋아서 죽어요. 꼴 보기 싫어 죽겠어요. 둘 다 꼴 보기 싫어요."
"저 남자는 여기 단골인가보지?"
오월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춰 물었다.
"네, 요즘 부쩍 여길 찾아오고 있어요."
"뭐하는 사람인데?"
"배를 가지고 있나봐요. 사장이래요. 요새는 사장도 하도 많으니까요."
"하긴 그래. 사장보다 사장 아닌 사람이 더 적지."
더 이상 물으면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 오월은 그 사나이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그 자가 그 다방에 자주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 면도날은 다방을 나갔다.
오월은 그 사나이를 미행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머리가 사라진 지 10분쯤 지나 그녀도 다방을 나왔다.
'킬리만자로'에 가 있자, 민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자는 지금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곳으로 오월은 갔다.
그곳은 송도에 있는 어느 횟집이었다.
조민기는 그 횟집에 방 하나를 얻어 술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주말이라 그 횟집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바로 저 끝에 있는 방에 여자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어떤 여자와 함께 들어갔어요?"
"처음 보는 여잡니다. 다방에서 만나 가지고 곧장 이곳으로 왔습니다."
오월과 조민기는 그곳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네모진 얼굴의 사나이는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젊은 여자가 옆에서 그를 부축했다.
횟집을 나온 그들은 곧장 그 옆에 있는 호텔에 들어갔다.
오월은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 '킬리만자로'에는 놀랍게도 신승우가 나와 주었다. 그는 오월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전처럼 부인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거절하지만 않으신다면......."
오월은 사실 손이 부족했다. 그러나 민기처럼 헌신적이 아니고는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학생이 희생될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저야 뭐 정보만 수집해서 알려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과는 달리 그는 매우 대범하게 나왔다.
곁에서 듣고 있던 민기가 그를 거들고 나왔다.
"우리는 어제 이 문제를 놓고 약속을 했습니다. 함께 행동하기로 말입니다. 진퇴를 함께 하기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결정을 했나요?"
"함께 부인의 일을 도와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승우가 덧붙여 말했다.
오월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고 나서 결정을 내렸다.
"도와준다니까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어요. 좋아요.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에요. 이제부터 자기가 맡아야 할 사람을 정하겠어요. 민기 씨는 한상필을 맡으세요. 그리고 승우 씨는 엄창근을 맡도록 하세요. 대머리는 내가 맡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들의 행동을 감시만 하면 돼요. 그리고 매일 결과를 나한테 보고해 주면 돼요. 미행을 보다 안전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서 써도 돼요. 여러분들은 감시만 하는 거예요. 그 이상의 행동은 안 돼요. 그들은 내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함정을 파놓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러분들이 희생되는 걸 원치 않아요."
"한 가지 문제되는 건 저희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는 감시를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것은 민기의 말이었다.
"그 문제는 기술껏 하세요. 학교에 다녀와서 남은 시간에 감시를 해도 되고, 아니면 공백을 다른 사람으로 메우든지 해도 돼요. 그건 맘대로 하세요. 다른 사람을 쓸 경우 경비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가 만일 따로 사람을 쓸 경우 부인한테 그 사람을 소개시키고 허락을 맡아야 합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 사람을 나한테 소개시키지는 말아요. 여러 사람한테 내 얼굴이 알려지는 건 싫으니까요."
오월은 매일 민들레 다방으로 나갔다. 면도날이 거의 매일 그 다방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방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중간 연락은 민혜련(살쾡이)이 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수시로 다방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오월과도 목례를 나눌 정도까지 되었다.
다방은 겨우 현상 유지 정도 되는 성싶었다.
오월이 다방을 경영하고자 하는 뜻을 비치자 다방 주인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다방을 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다방 주인은 50대의 부인이었다.
"조건부로 하지요."
"조건부라니요?"
다방 여주인은 그녀의 말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임시로 제가 운영해 보고 나서 괜찮으면 인수를 하겠습니다."
"안 팔면 안 팔지 그런 짓은 안 해요."
여주인을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월은 웃음을 잃지 않고 이야기했다.
"손해는 끼쳐 드리지 않겠어요. 한 달 사용료를 충분히 내겠어요."
여주인의 표정이 금방 환해졌다.
"그렇다면 좋아요. 한 달 사용료를 얼마를 내겠수?"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여주인은 실 같은 눈을 깜빡거리고 나서 말했다.
"많이 받을 수는 없고...... 한 달에 내 손에 떨어지는 것만 받지요."
몇 번 말이 오간 끝에 관리비·인건비·비품 사용비·기타 비용까지 합쳐 5백만원에 흥정이 끝났다.
다방 주인측으로서는 톡톡히 받아낸 셈이었지만 오월은 어리석은 체하고 그 자리에서 돈을 모두 지불했다.
그때부터 1개월 동안 다방 주인은 오월이 된 셈이었다.
다음날 오월은 면도날과 정식으로 인사했다.
"잘 부탁합니다."
오월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면도날은 날카롭게 그녀를 훑어보면서,
"새 주인이라고?"
하고 물었다.
"네, 미숙한 점이 많겠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것 할 것 같지 않은데......."
그 자의 관찰력에는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오월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네, 다방은 처음이에요."
"이야기 들으니까 슈퍼마켓을 경영하신다고 하던데......."
오월은 뜨끔했다. 벌써 자신에 대한 것이 면도날의 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네, 일을 벌여 놓았는데 계속 목돈만 들어가지 장사가 안 돼요.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돈 좀 있던 거 다 까먹고 이젠 빚을 내야 할 판이에요."
면도날은 그녀의 말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듯했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불황이라 모든 일이 다 그렇지요."
그는 대단한 추남이었다. 머리 윗부분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완전한 대머리였고 거기다 유태인처럼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다. 길게 찢어진 두 눈은 위로 날카롭게 치켜올라가 있었다.
살찐 얼굴에는 번들번들 개기름이 흐르고 있었다. 거구에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이 자가 나를 알아보면서도 모른 체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월은 주의 깊게 상대를 관찰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세요?"
"나야 뭐 뱃놈이지."
그는 시거를 즐겨 피우고 있었다.
"마도로스야말로 남자 중의 남자예요. 마도로스에겐 낭만이 있어요. 다른 직업의 남자들에겐 낭만이 사라진 지 오랜데......."
그녀의 이 말은 상당히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면도날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지금 몇 살이오?"
"어머나, 여자 나이를 물어보는 법이 어딨어요. 여자 나이를 알고 싶으면 자기부터 먼저 말해야지요."
"난 마흔다섯, 몇 살이오?"
"그럼 내 동생밖에 안 돼요."
오월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면도날은 바싹 호기심이 이는 것 같았다.
"몇 살인데 그래요?"
"선생님보다 한 살 더 많아요."
"마흔여섯?"
그녀는 끄덕였다. 면도날은 매부리코를 어루만졌다.
"이거 내가 당했는데...... 그런데 50도 안 됐으면서 왜 그렇게 흰 머리가 많아요?"
"고민이 많아서 그래요."
"고민? 무슨 고민?"
"여자가 혼자 살려니까 고민이 많지요."
다음날 면도날은 여느 때보다 두 시간쯤 일찍 나타났다. 그리고 예상했던 질문을 던져왔다.
"곱게 생겼는데 왜 혼자 사는지요?"
"영감이 병들어 죽었어요. 벌써 10년이 넘은 걸요."
면도날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10년 넘게 혼자 살아온 거요?"
"애들 커 가는 거 보면서 살아온 거지요."
"애들은 몇인데?"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딸은 작년에 시집 보냈어요. 벌써 외손자를 본 걸요."
"빠르군요. 아들은 그럼......."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애는 대학에 다니고 막내는 고등학생이에요. 애들 커 가는 걸 보면 정말 무서워요."
오월은 쓸쓸하게 미소했다.
"고생 고생...... 말도 못 하게 많이 했어요."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재혼하면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애들이 있으니까 재혼도 맘대로 못 하겠어요."
"고생한 여자치고는 손이 너무 고운데요."
오월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아차 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고생한다고 해서 손으로 고생하나요. 머리로 고생하지요."
그녀는 두 손을 탁자 밑으로 내렸다.
"40대 여인의 손치고는 정말 고운 손이오. 한 번 만져보고 싶도록 말이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는 그녀를 쏘아본다.
오월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린다.
"나하고 데이트 한 번 합시다."
마침내 그가 은근한 수작을 벌여왔다.
"글쎄......."
"조용한 시간에 내가 식사 한 번 대접하지."
"이 나이에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예요?"
"이 나이라니? 이 나이가 얼마나 좋을 때인데 그런 말을 하지? 마담은 아직 이 나이의 재미를 모르는 모양이구먼. 내가 가르쳐 주지."
"네, 가르쳐 주세요."
이 자가 눈치를 채고 나를 유인하는 게 아닐까. 나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유인해서 죽이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이쪽이 홀몸인 것을 알아낸 면도날은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님이 없을 때 찾아와서는 한참 동안 그녀를 불러 앉혀 놓고 수작을 벌이는 것이었다. 자연 음담패설을 늘어놓게 되고 집적거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는 그녀를 마담이라 불렀다. 마담, 마담 하면서 엉덩이를 쓰다듬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손을 잡는 것은 보통이었고 젖가슴을 재빨리 만진다거나 허벅지를 더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데이트 신청은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오월은 그가 달아오르도록 교묘하게 빠져나가곤 했다.
하루는 그가 거나하게 취해서 다방에 나타났다. 밤 늦은 시간이었다.
"마담, 이러기야?"
그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어머나, 술을 많이 드셨네요."
"나 술 취하지 않았다고, 오늘은 마담을 납치해야겠어."
"어머나, 영광이네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었다.
"농담이 아니라구."
"그러다가 사모님이라도 아시게 되면 어떡하죠?"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저같이 늙은 거 무슨 매력이 있다구 그러세요?"
"아니야, 매력이 넘치고 있어."
"그러다가 괜히 저한테 상처 주시는 거 아니에요?"
"상처? 자기가 숫처녀인가?"
"마음은 숫처녀 같아요."
"잔말 말고 나가자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월은 하는 수 없이 끌려나갔다.
"제가 술 한 잔 사겠어요. 저도 취하고 싶어요."
"좋아, 한 잔 하러 가자고."
그들은 어느 살롱으로 들어갔다. 홀은 은밀하게 꾸며져 있어서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모를 것 같았다. 양주 한 병을 시켜 놓고 문을 걸어 잠갔다.
"오늘 밤 술내기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면도날은 껄껄껄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인데. 자, 건배."
그들은 건배했다.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
면도날이 소리쳤다.
'너의 죽음을 위해서!'
오월은 속으로 외쳤다. 그녀는 주는 대로 마셨다. 그리고 잔을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금방금방 잔이 비어 돌아오자 그는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꿀리는 건 싫었던지 자제하지 않고 받아넘겼다.
그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과부가 많이 굶주렸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장 민감한 부분만을 골라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오월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아득히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독한 술이라 걷잡을 수 없이 취기가 올랐다.
"정말 근사한데......."
면도날은 그녀의 젖가슴을 꺼내 놓고 노려보다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피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물어 뜯었다.
"딸까지 시집 보낸 여자의 젖가슴이 어찌 이렇게 탐스럽지? 당신은 늙지 않는 여자인 모양이지?"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젊은이 이상으로 정력적이에요."
그녀는 그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그는 기분이 너무 좋은지 흐흐흐 하고 웃었다. 사내의 손이 스커트를 젖히고 안으로 깊숙이 밀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바지 지퍼도 내렸다. 그는 오월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의 그것을 만지게 했다.
오월은 자신이 먼저 취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갔다. 목구멍에다 손가락을 집어넣고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룸으로 돌아오자 그가 다시 그 짓을 하려고 했다. 그때 웨이터가 면도날에게 전화가 왔다고 일렀다.
그가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그녀는 백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하얀 분말을 그의 술잔에다 탔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비틀거리고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나가 봐야겠어. 미안하게 됐는데, 마담."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녀가 항의했지만 그는 허둥지둥 사라졌다.
6월의 첫번째 일요일.
조민기는 아침부터 한상필(족제비)을 감시했다.
그는 9시 조금 지나 배에서 나왔다. 배에서 내려 두어 번 하품을 길게 하더니 길을 건너 식당으로 들어갔다.
민기는 승우와 담배를 나누어 피우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부둣가에 서 있었다.
"부인은 이번에도 정말 손을 댈까?"
승우가 물었다.
"손을 댈 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것은 그 여자에게 있어서 일종의 신앙 같은 것이 되어 버렸어."
족제비가 식당에서 나오자 그들의 대화는 끊어졌다. 민기는 승우와 헤어져 족제비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족제비는 누런 점퍼에 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른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를 돌아보곤 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민기는 혼비백산했다. 족제비는 광복동 쪽으로 통하는 육교 계단을 밟았다.
민기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묻혔다. 족제비는 육교 위에서 한참 동안 자기가 걸어온 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육교를 내려갔다. 민기는 지하도로 뛰어들었다.
지하도에서 나오자 족제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면서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그때 족제비는 낚시점에 있었다. 그는 가게 안에서 쇼윈도를 통해 민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도 얼핏 본 얼굴이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 비로소 미행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얼굴이 검은 그 사나이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면서 젊은 청년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낚시점 주인이 그의 뒤로 다가서며 물었다.
"아, 낚시 도구를 좀 사려구요. 지금 바로 낚시 갈 수 있게 장비를 갖춰 주십시오."
"장비가 하나도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이 장비를 갖추는 동안 그는 다시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찌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끝이 날카롭게 생긴 낚시용 칼을 하나 골라냈다. 그는 빨간 낚시용 모자를 머리에 쓰고 낚시 장비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조민기는 사내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면서 막 발길을 돌리려다가 그를 발견했다. 그는 아차싶어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모습이 그 동안 완전히 노출되어 사나이의 시야에 박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볼 때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그는 다시 미행을 시작했다.
족제비는 택시를 탔다. 민기도 택시를 잡았다. 50미터쯤 간격을 두고 뒤를 쫓아갔다. 앞선 택시는 해운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해운대에서 민기는 택시를 바꾸어 탔다.
한상필은 백미러를 통해 청년이 택시를 바꾸어 타는 것을 보았다.
두 대의 택시는 해운대를 지나 송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쪽으로 갑시다."
족제비는 운전사에게 갑자기 왼쪽 방향을 가리켰다. 화살표와 함께 '청사포'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청사포까지는 꼬불꼬불한 비탈길을 한참 동안 내려가야 했다.
청사포는 조그만 어촌이었는데 근년에 들어 횟집이 많이 들어서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물 때문에 싱싱한 횟감을 바라는 손님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마을 앞에는 방파제가 있었고 낚시꾼들이 게딱지처럼 거기에 붙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보니 고기가 꽤 잡히는 모양이었다.
족제비가 택시에서 내려 방파제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민기는 얼른 횟집으로 뛰어들었다. 2층에 방을 하나 잡고 앉아 할 수 없이 술과 회를 주문했다. 2층 창문을 통해 방파제가 훤히 내다보였다. 민기는 망원경을 꺼내 초점을 맞추었다. 그 자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자는 담배를 피우며 유유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다는 파아란 남빛이었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는 유난히 흰빛이었고, 수면 위로 쏟아져내리는 햇빛은 너무 눈이 부셔서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나의 대상을 오래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지루한 일이었다. 한 시간 정도는 그런 대로 참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실로 고역스러웠다.
그는 졸음이 왔다.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방파제에 앉아 있었다.
민기는 망원경을 내렸다. 낚시하러 왔으니 저녁 때까지는 앉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잠깐 동안 눈을 붙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안심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도로 일어나 망원경을 집어들고 다시 방파제를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는 그 자리에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민기는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그는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배가 몹시 짓눌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만 있어! 소리치면 죽인다!"
"악!"
민기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목을 짓누르고 있는 바람에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이건 악몽이야. 그러나 악몽은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얼굴이 검은 그 사나이였다.
그는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더욱 소름이 끼쳐 왔다. 숨이 넘어갈 듯하자 사나이는 손을 풀고 대신 목에다 칼을 들이댔다.
"알지?"
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를 미행했지?"
"무, 무슨 말입니까? 미행이라니요? 난 그런 적 없습니다!"
"뒈지고 싶나, 이 새끼가!"
칼 잡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으으윽......."
민기는 턱을 뒤로 잔뜩 젖히면서 신음했다. 칼날이 목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왜 나를 미행했어?"
"......."
이러다가는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우선 목숨을 건지는 것이 급했다.
"누, 누가 시켜서 미행했습니다."
"누가? 이름을 대!"
"경찰이 시켰습니다. 형사가 부탁을 하길래......."
"거짓말 마!"
목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이기 위해 그 남자는 피묻은 칼을 민기의 눈앞에 들이댔다.
민기는 자기 목이 잘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나는 죽는가 보다. 정말 여기서 나의 인생은 끝나는 것일까. 너무 억울하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이왕 죽을 바에는 한 번 저항이라도 해보고 죽자.
"오월이란 여자가 시켰지?"
"그런 여자는 모릅니다."
"이 새끼가!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귀를 잘라 버릴 테다!"
정말로 그는 민기의 한쪽 귀를 움켜잡았다.
"잠깐! 말하겠습니다!"
상대가 주춤하는 순간 민기는 엉덩이를 획 옆으로 빼면서 사내를 밀어버렸다. 사내는 옆으로 쓰러지면서 벽에다 쿵 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내보다 민기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맥주병을 집어들었다. 사내도 일어났다.
"죽여 버릴 테다!"
사내가 칼을 겨누며 다가왔다. 문을 가로막고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자, 덤벼라!"
민기도 지지 않고 외쳤다. 그는 맥주병으로 벽을 후려쳤다. 깨진 맥주병은 칼보다 더 무서운 흉기로 보였다. 그러나 사내는 그 방면의 전문가였고 민기는 애송이 대학생에 불과했다.
벌써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아차 하는 순간 날카로운 칼 끝이 민기의 왼팔을 찔렀다. 민기는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사내가 다시 공격해 오는 순간 그는 기회를 잡아 맥주병을 휘둘렀다. 그것이 상대의 얼굴 한쪽을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사내는 얼굴을 감싸쥐면서 뒤로 물러섰다.
사내가 얼굴을 감싸쥔 손을 내렸을 때 그의 오른쪽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병 끝이 눈을 찌른 모양이었다. 한쪽 눈이 안 보이게 된 사내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칼을 앞으로 한 채 그 자리에서 서 있기만 했다.
반대로 민기는 공격적이 되었다. 그는 깨진 맥주병으로 사내를 위협하면서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데도 사내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민기의 왼팔은 피에 젖어 있었다. 의아해 하는 주인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재빨리 횟집을 빠져나와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가 모퉁이를 꺾어들 때 뒤돌아보니 사내가 막 횟집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민기는 서면 쪽으로 가다가 택시에서 내려 길가에 보이는 외과 의원으로 뛰어들어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어지러웠다. 상처는 깊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한 시간 후 그는 붕대를 잔뜩 쳐감은 팔을 목에다 고정시킨 채 병원문을 나섰다. 아파트로 돌아와 누워 있으려니 저녁 때 오월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강 이야기를 듣고 난 오월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고 민기는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별것 아닙니다."
뒤늦게 달려온 승우는 한동안 핏기 잃은 얼굴로 앉아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니까 살아났지 나 같으면 죽었을 거야."
민기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도 마. 나도 꼭 죽는 줄만 알았어. 이왕 죽을 바에는 한 번 싸워나보자는 생각으로 용을 쓴 건데 그게 먹혀 들어간 거야. 무서워서 그대로 떨고만 있었다면 지금쯤 아마......."
"정말 이만하길 다행이에요."
오월은 상처난 팔을 어루만지며 몹시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렇게 다치고 보니까 더욱 투쟁심이 일어나는데요."
민기는 되도록 충격을 덜 주려고 그런 말을 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오월은 생각을 달리 한 것 같았다.
"이제 이 일은 그만두고 학업에나 전념해요. 두 분 다 그렇게 하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민기는 펄쩍 뛰었다.
"이만한 것은 이미 각오하고 시작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만한 일에 그만두면 어떻게 그 놈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민기 씨는 얼굴이 팔려서 안 돼요."
"아무리 얼굴이 팔렸다고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상처를 입고 보니까 더욱 화가 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 부인께서 뭐라고 해도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저두요!"
승우도 덩달아 소리쳤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결의에 차 있는 것 같았다.
오월은 머리를 저었다.
"우리는 아주 불리하게 됐어요. 단기간에 일을 끝내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들은 내가 사람을 사서 미행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격투까지 벌어졌고 민기 씨는 얼굴이 알려졌어요. 따라서 이제부터는 달리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어요. 그들은 더욱 경계를 할 테고, 어쩌면 종적을 감추어 버릴지도 몰라요. 두 분은 이 일에서 손을 떼세요."
침묵이 찾아왔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녀는 민기나 승우가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계속 자기를 도와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럴수록 그들이 위험에 직면할 기회는 많아지는 것이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한참 만에 민기가 풀이 죽어 말했다.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에요. 난 현실적인 걸 따지는 거예요. 이건 처음부터 여러분들이 맡기에는 벅찬 일이었어요."
"벅찬 일은 아닙니다. 남자가 해볼 만한 일입니다."
하고 민기가 말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상처를 크게 입었다면 복수를 하려고 민기 씨를 찾아다닐지도 몰라요. 그들은 악당들이니까요."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해보는 거지요."
"우리는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어요."
"있습니다. 옳은 것에 대한 신념과 악에 대한 증오가 우리들에게는 있습니다. 그건 가장 큰 무기입니다! 더 이상 큰 무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혼났으면서도 민기는 전보다 더욱 투쟁적이 되어 있었다. 오월이 아무리 만류해도 그는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부인을 혼자 두고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오월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월은 민기의 그 뜨거운 시선을 받을 수가 없어 승우 쪽을 바라보았다.
승우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민기와는 사뭇 달랐지만 일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저는 아직 놈들에게 얼굴이 팔리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놈들을 감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둘이서 기술적으로 감시할 테니까 그 점은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실수는 하지 않을 겁니다."
대학생들은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월은 심히 난처했다. 그들의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괴로웠다.
"아르바이트가 끝났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거예요."
"이걸 단순히 아르바이트로만 생각했다면 우리는 벌써 그만 두었을 겁니다. 우리가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승우가 발끈해서 따지듯 대들었다.
오월은 그들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좋아요. 여러분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세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들은 내 일을 도우는 거지 내 일을 전적으로 맡아 달라는 건 아니에요. 다시 말해 여러분들이 일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돼요. 행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줘요. 복수는 나의 복수이지 여러분들의 복수가 아니에요. 나는 이것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내 손으로 직접 복수하고 싶어요."
"말씀하시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자들을 미워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원한에 사무쳐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경험도 없거니와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알겠어요. 민기 씨는 팔이 나을 때까지 당분간 쉬세요. 승우씨는 그대로 그 자에 대한 감시를 계속하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상당한 놈도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병에 눈을 찔렸으니까 아마 지금쯤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고 민기가 말했다.
오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해요. 그들은 더 이상 미행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대일의 미행은 지양해야 돼요. 보다 교묘하게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안 돼요. 사람을 사도록 하세요."
"필요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은 못 해도 돼요. 몸조심해야 해요."
오월은 청년들에게 몸조심을 당부한 후 그들과 헤어져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입은 것은 아니지만 조민기가 겪은 위기는 최초의 실수로서 그것은 그녀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와 함께 회의가 찾아왔지만 계획을 포기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9 성형수술
한 사내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뛰어들자 안과 의원 간호원은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아이구, 내 눈...... 아이구, 내 눈......."
사내는 오른쪽 눈을 감싸쥐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법석을 떨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처가 깊긴 깊은 모양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죠?"
의사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깨진 유리병에 찔렸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고통에 못이겨 몸을 뒤틀어댔다.
"자, 조용히 하고...... 어디 좀 봅시다."
의사는 상처입은 눈에 라이트를 비쳤다.
"돈은 얼마든지 좋으니까 눈을 살려 주시오!"
그 말에 의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된다는 겁니까?"
사내는 한쪽 눈으로 의사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렵게 됐습니다. 시신경이 모두 찢어졌습니다.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동공이 파괴되어 어렵게 됐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세 군데를 거쳐서 여기 온 겁니다! 여기가 권위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나이 많은 의사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글쎄......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지금 보니까 유리 조각이 많이 박혀 있는데 그것만이라도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딜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이구...... 내 눈...... 아이구...... 내 눈...... 이 씨팔 놈...... 붙잡기만 해 봐라...... 눈깔을 뽑아 버릴 테니까...... 아이구...... 내 눈...... 아이구...... 아이구......."
사내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었지만 의사의 표정은 냉담하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사내는 한참 후 유리 조각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 드러누웠다.
유리를 제거한 후 의사는 거기에다 두껍게 가제를 붙였다. 그리고 그를 입원실로 옮겼다.
일당이 나타난 것은 수술이 끝나고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입원실로 들어선 두 사나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야?"
면도날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아이구...... 아이구...... 저 병신 다 됐습니다...... 아이구...... 아이구......."
환자는 몸부림치며 하소연했다.
"이거 봐, 그러지 말고 이야기를 해.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 보란 말이야!"
"당했습니다. 당해......."
"당하다니, 누구한테?"
"그, 그년한테 당했습니다."
"뭐라고? 그년이 눈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야!"
"그년한테 직접 당한 게 아니고 그년이 보낸 놈한테 당했습니다."
"어떻게 당했어?"
"깨진 유리병에 찔렸습니다."
환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별로 말이 없었다. 주로 면도날과 환자가 말을 주고 받았고 그는 묵묵히 듣는 편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찔렸어? 내가 그렇게 주의하라고 했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당한 거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제 눈이 문젭니다. 이 눈이 못 쓰게 됐답니다."
환자는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수술해도 안 되나?"
면도날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투로 물었다.
"안 된답니다. 그래서 유리 조각만 제거했습니다. 저는 애꾸눈이 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력이 나쁜데 이 눈 하나 가지고 보자니 미치겠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지 그래."
"다른 데도 가봤습니다. 세 군데나 가봤는데 상처가 깊어서 재생이 불가능하답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뭔데?"
"저를 찌른 놈을 찾아내서 그 놈 눈알을 빼내 가지고 저한테다 박는 겁니다."
환자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증오에 사무친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놈을 어디서 찾아낸다?"
"오월이란 년만 잡으면 그 놈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 그년을 잡는 게 문제지. 어떻게 당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해 봐."
"청사포로 낚시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시내에서 어떤 놈이 저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학생 같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놈을 청사포로 유인했던 겁니다. 놈은 횟집에 앉아서 나를 감시......."
환자가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그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면도날의 얼굴에는 진땀이 솟고 있었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월이 보낸 놈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아?"
이야기를 듣고 난 면도날이 물었다.
"네, 그 놈은 형사의 부탁을 받고 미행했다고 했습니다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형사가 직접 미행하지 왜 그 놈한테 부탁했겠습니까. 그 놈은 틀림없이 오월이 보낸 놈입니다."
"그렇다면 그년이 사람을 사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죠. 그년은 우리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직접 미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사서 시킨 게 분명합니다."
"시내에서부터 미행했다면 우리 아지트도 알고 있겠군?"
"그야 물론이죠."
"이거 큰일인데......."
면도날의 얼굴에 불안의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만일 형사들이라면 벌써 우리 아지트를 급습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감시만 한 겁니다. 아이구, 눈이야, 아이구, 눈이야."
"이러다간 안 되겠는데......."
면도날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년을 빨리 잡지 않으면 우리가 오히려 당할지 모릅니다."
"그년을 잡을 때까지 당분간 헤어져 있는 게 좋겠습니다."
거미같이 생긴 사나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음, 그게 좋겠어. 함께 몰려 있다가는 떼죽음을 당할지 모르겠어."
"저는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거미가 말했다.
"나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여기 일은 해결됐으니까 올라가도 괜찮겠지."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여기 남아서 그 연놈을 잡고야 말겠습니다. 여기를 모두 떠나면 그 연놈은 누가 잡습니까?"
"우리가 여기를 떠나면 그년도 여기를 떠나겠지. 그러다 보면 꼬리가 밟힐 거야. 그때 가서 작살내는 거야."
면도날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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