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섭 - 5시간300분 3

3학년2반 | 2022.02.15 07:38:44 댓글: 0 조회: 672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953

두개의 현장검증
범인이 2인 이상일 것으로 생각하며 핏자국을 보고 있던 최찬일은 피가 땅에 떨어진 형태를 그대로 백지에 옮겼다. 그가 범인이 복수 이상일 것으로 판단한 것은 이 핏자국 때문이었다,
핏방울은 떨어진 높이에 따라 그 모양이 서로 다르다. 가령 핏방울이 3인치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지면 그냥 동그랗게 나타난다. 그러나 15인치나 50인 치가 넘으면 핏방울의 둘레는 톱날 같은 이빨 모양을 나타낸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뛰어가면 느낌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아스팔트의 핏자국으로 보아서는 #1의 형태(동그란 형태)와 #4의 형태(느낌표의 모양)밖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칼을 맞으며 움직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자면 누군가가 뒤에서 진남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고 앞에서 칼로 찔렀다는 것을 입증한다. 범인은 적어도 두 명 내지 세 명은 있어야 가능하다. 그 인원이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서 그를 피습했고 또 진남포는 왜 소리 지르거나 구원을 청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범인들은 어디로 도주했을까.
아무리 부근을 뒤져 봐도 사람이 몰려 있었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또 있었다. 그것은 범인들이 진남포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했나 하는 점이었다.
만일 그를 죽이겠다고 생각했으면 충분히 죽여 버릴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날씨는 짙은 안개가 끼여 시야를 가리고 있었고 상대는 여러 명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칼을 가지고 있었고 진남포는 맨 손이었다.
지금까지의 현장 검증으로 보아 범인들은 진남포에게 상처만 입히고 되돌려보낸 셈이 된다. 그렇다면 범인과 진남포는 서로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이란 말인가. 결코 우발적인 피습이 아님은 핏자국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의 자세한 내막은 오직 진남포만이 알고 있는데 오히려 진남포측에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고 있다. 왜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있을까.
최찬일은 범인이 두 명 이상일 것이라는 추측과 칼에 찔린 후 곧바로 아파트로 돌아왔을 상황을 머리로 그려보면서 의문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택시 머리에 별표가 그려져 있는 회사를 찾아야 했다.
택시 회사를 수배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택시 회사라는 것이 너무나 영세해서 다섯 대나 여섯 대만 소유하고 있어도 회사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는 시계를 들어다보았다. 바늘은 벌써 세 시를 넘기고 있었다.
저녁 6시에는 수사에 관한 종합 회의가 열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택시 회사를 찾는 일을 뒤로 미루고 곧바로 갈매기 주점을 찾아갔다. 주모가 한가롭게 앉았다가는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이구, 이 양반 또 왔네, 어서 오슈. 뭐 이 근처에 애인이라도 있남.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들게."
"안녕하쇼. 순대 생각이 나서 또 왔죠. 순대 한 접시하고 소주 반 병만."
"에게게, 누구 코에다 묻히려고 반 병이야 반 병이."
"아녜요. 근무 시간이라 지금은... 아주머니가 잡숴 준다면 병으로 사죠."
"이 양반 이러다 정들겠어."
주모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순대와 소주를 차려왔다.
"그래 배우 찔렀다는 거 어떻게 됐수. 잡혔수. 에이 무서워. 세상 참..."
"잡혔으면 내가 또 왔겠수. 근데 아줌마. 자, 우선 한잔 먼저 드시고."
최찬일은 주모의 비위를 한껏 맞춰 주며 질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참, 이 양반 오늘 올 때 가수한명 데려온다더니 왜 혼자 왔수 섭섭하게"
"아줌마두 참. 내가 가수를 데려오면 나한테 신경을 쓰겠어요. 질투나게. 난 밑지는 장사는 안 해요."
"어이구, 이 양반 좀 봐. 남자는 그저 그놈이 그놈이라니까."
이번엔 주모가 소줏잔을 내밀었다.
"근데 아줌마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이거 앉자마자 술맛 달아나겠네. 그래 물어볼 게 뭐예요?"
"엊그제 자동차 봤다는 거 말이에요. 꼭지에 붙은 표시가 별표라고 했죠."
"예, 맞아요. 틀림없이 별표예요."
"그리고 차에서 내린 사람이 한 사람이라고 했죠."
"미쳤수? 내가 거짓말하게 분명히 한 사람이었어요."
"그 후에 무슨 소리 못 들었습니까? 가령 사람 발자국 소리라든가 아니면 비명 소리 아니면 자동차 소리 같은 거..."
"그런 건 못 들었는데. 보다시피 우리 가게 문닫는다고 해야 앎은 철판 하난데. 사람이 뛰어가거나 자동차가 지나갔다면 그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지."
"가게 문닫고 바로 주무셨나요?"
"웬걸요. 내 팔자에 가게 문닫는다고 바로 잠자리 들 수 있나요. 찬거리 준비하고 쌀 앉히고 순대거리 썰어놓고 한 시간 이상은 꾸물거려야... 아니 그런데 그런 건 왜 자꾸 물어요. 이 양반 방송국 있다는 거 아무래두 공갈 같애. 진짜 방송국 사람이에요? 혹 경찰 아니우."
"아, 나참. 아니라니까. 그런데 내가 형사라면 이렇게 묻겠소? 공식적으로 대하지. 아무 생각 말고 쇠주나 한잔 더 합시다. 가야 할 시간 됐으니... 그런데 아까 말한 거 틀림없죠?"
"틀림없다니까. 원 의심두."
"자, 그럼."
최찬일이 막 일어서려는데 주모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나 저나 단골이 하나 줄었으니 어쩐담. 안 되려니까, 참."
"단골이 줄다뇨. 난 또 올 텐데."
"아따 누가 댁 얘기한 줄 아시우? 그 배우 말이에요. 다쳤다는 배우."
"그 배우가 여기 단골이었습니까?"
"뭐 단골이라고까지 할수야 없지만 자주는 들렀죠. 근데 요즈음 통 우울해 보이더라니. 웬만하면 농담 한두 마디는 꼭 하고 가는 사람인데"
진남포. 그는 평소 많은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 갈매기 주점에 들러 한 잔씩 마시고 들어가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는 왠지 우울해 보이고 말수도 퍽 적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고가 나기 직전부터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주변, 그만이 아는 변화. 그것의 요인은 무엇일까.
최찬일이 현장 검증을 마치고 본부로 돌아오자 회의가 바로 시작되었다. 박문호를 중심으로 최찬일, 성기준을 맡고 있는 김형사와 최찬일을 돕고 있는 이 형사, 마포서에서 차출된 임 형사 등이 회의탁자에 둘러앉았다. 회의가 시작될 무렵에서야 최 형사의 지시를 받고 별도로 활동하던 진 형사가 헐레벌떡 쫓아 들어왔다.
"이제 다 모였군. 오늘 상황들 보고해."
박문호가 최찬일을 돌아보았다. 임무의 비중으로 보아 순서는 당연히 그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최찬일이 수첩을 꺼내며 얼굴을 긴장시켰다.
"먼저 안마시술소에서 얻은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남포는 그가 피습당하기 전 날 안마소에 들러 동생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때 이 대화를 들은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동생이 오빠인 진남포에게 '오빠에게 미안하다'는 투의 말을 되풀이했고 진남포는 '애송이 같은 자식 죽여 버리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남포는 동생에 관계된 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고 또 동생은 오빠에게 무엇인가 피해를 준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진남포는 동생에게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 진남포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진남포는 가슴에 대여섯 번 찢긴 칼자국이 있는데 순서를 보아서는 먼저 가슴을 베이고 다음 옆구리를 당한 것 같습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출혈은 좀 있었지만 칼이 위험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 위험하진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진남포가 피를 많이 흘렸다는 말을 듣고 그가 아스팔트에서 습격당했을 때 흘린 핏방울 생각이 나서 다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핏자국은 그대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는데 핏방울의 형태로 보아 범인은 두 사람 이상이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피는 지상에서 약 15인치 정도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칼에 찔린 후 곧장 아파트로 달려간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점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첫째, 진남포가 힘이 장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왜 이 사람이 저항을 하거나 소리질러 구원을 청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범인은 진남포를 꿇어앉게 하고 칼로 그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핏방울이 떨어진 흔적으로 보아 15인치를 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가 어제 갔다온 '갈매기 주점'의 주모에 의하면 최근 진남포가 몹시 우울해 있었다는 점입니다.이상입니다."
최찬일이 보고를 마치자 메모를 하던 문호가 이상한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고생했구먼, 이 보고 말야. 내일 한 시까지 서면으로 정리해서 올려. 다음 택시 회사는 어떻게 됐지?"
문호가 이 형사를 바라보자 이 형사가 머리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택시 머리에 별표가 달린 회사는 여덟 군데도 넘었는데 겨우 다섯 군데만 돌았습니다. 그나마 비번자들이 많아 다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할 수 없지. 내일 또 만나기로 하고 다음 김 형사는, 추운데 혼났지?"
"저는 일단 S-TV에 들러서 중요 간부의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성기준의 집 앞에서 종일 진을 치고 있었는데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김 형사는 다리가 아픈지 계속 두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김 형사뿐만 아니라 모두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적은 수사비를 아껴 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부하들이 딱하게 보였다.
오늘 부산 가기 전 회식이나 시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져 보니 출장비 외에 약간의 여유 돈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돌입한 수사 첫날 무슨 큰 수확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 최선을 다해 뛰었다고 판단했다. 미국이나 영국 아니 가까운 일본만 해도 수사 조건이 우리 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현대화되어있다. 장비에서부터 인원, 수사비까지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나 우리 나라 실정으로는 일인삼역까지 해내야 한다.
그래도 우리 나라 수사 요원들은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민활하게 움직이고 있고 또 그만큼 해내고 있었다. 우리 민족 특유의 끈기와 승부욕이 이를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문호는 이 점이 자랑스러웠다.
문호는 내년 에 미국에 교육받기 위해 출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수 훈련까지 받고 FBI식 수사 방법도 배우게 되어 있었다. 욕심 같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요원과 함께 가서 견문과 지식을 넓히고 싶었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못하는게 못내 아쉬웠다.
성기준의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진 형사의 보고 내용도 별다른 점은 없었다. 종일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려 보았지만 별달리 출입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 수사 중 최찬일이 가장 많은 성과를 올린 셈이었지만 그러나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한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는 기대할 수 없었다.
문호는 최찬일에게 오만 원을 건네 주었다.
"오늘 고생들 했으니 어디 가서 저녁들이나 먹고 퇴근해. 난 좀더 있다가 퇴근할 테니까. 그리고 오늘 밤 9시 45분 특급 열차로 부산에 갔다가 내일 오후에 올 거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면 잘들 좀 챙기라구. 내려가서 수시로 전화할 테니까.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내가 부산에 갔다와야 마무리가 지어질 것 같아. 너무 마음 조이지들 말라구. 제까짓게 뛰어봤자지. 꼭 잡힌다는 신념들 잊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자, 오늘은 이것으로 끝을 내자구."
요원들을 돌려보내고 난 문호는 이 사건이 의외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또 미묘한 상황이 겹쳐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강진 피살과 진남포의 피습 사건의 연결성 문제였다. 탤런트이며 가수인 이화영 증발 사건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의외로 싱겁게 끝난 셈이지만 이번의 두 커다란 사건은아무래도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부산에서는 김만호와 성기준이 깊은 관계로 밀착되어 있음을 냄새 맡고 수사를 착수한 것이 틀림없고 또 진남포의 동생이 부산에서 죽었다는게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문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두 사건을 연결시켜주는 '끈'이 좀체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강진과 진남포 두 사람이 같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평소 진남포가 고강진에게 죽어지내며 왔다는 점. 고강진이 진남포에게 함부로 대해 진남포의 자존심에 여러번 상처를 입혔다는 둘만의 감정 문제가 짙게 깔려 있기는 해도 이 두 사람을 동시에 공격할 제 3의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점이었다.
고강진이 이성구 제작 담당 이사에게 진남포와 같이 공연할 수 없다고 버틴 점이나 어린 고강진이 진남포에게 잔심부름을 시켰다는 둘만의 관계 외에는 어떤 인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강진은 새로운 작품을 맡을 때마다 한두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하니 꼭 그것을 문제 삼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진남포의 뒤에는 자살한 여동생이 있고 진남포 자신에게는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뻔한 피습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도 머리를 아프게 하려니와 범행 현장, 두 사건의 범행 현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꾸의 증발 방법, 성기준의 이상한 진술, 김만호의 클로즈업 그리고 진남포의 갑작스러운 피습과 동생의 자살이 한데 얽혀 풀어지지가 않았다.
방법은 민형규의 의견대로 하나하나 풀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호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후 7시 30분이나 되었다. 열차 시간까지는 그래도 두 시간이나 남았다.
문호는 천천히 일어나며 스케줄을 짜보았다. 두 시간의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문호는 진남포가 입원한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야근 담당 의사와 간호원 몇이 2층 카운터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문호가 카운터를 지나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간호원이 저지했다.
"저 선생님, 어디 가세요?"
"저요? 706호 병실에 가는데요."
문호가 간호원을 보며 대답하자 간호원이 문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면회는 지금 안 되는데요. 내일 오세요."
하고는 돌아앉는다.
"나, 형 되는 사람입니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간호원이 뒤따라오지는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한 마디하고 만 것이다. 문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진남포는 침대의 등을 15도 정도의 각도로 높이고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호가 옆으로 바짝 다가서자 비로소 자기의 방문객임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창백하고 여위어 보였다.
"진남포 씨죠? "
"네."
"좀 어떻습니까? 아픈 데는 없습니까?"
"..."
"아직 치료중인데 미안합니다. 특수반 박문호 형삽니다."
문호가 신분을 밝히며 의자로 다가앉았다. 얼굴에 미소까지 띠었다. 이때까지 평화스럽게 누워 있던 진남포가 갑자기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대화의 실마리가 풀리는지 문호는 잘 알고 있었다.
부하가 몇 번이나 다녀갔지만 어느 누구도 정보나 상황을 얻어오지 못했다. 문호는 진남포의 이마를 짚어보며,
"열은 별로 없군요. 사실 제가 여기 온 것은 진남포씨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문호가 손을 떼지 않고 귀에다 속삭이듯 말하자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박영숙! 당신의 동생 문제로 온 겁니다."
단 한 마디에 진남포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가 통증이 심하게 오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처음의 위치대로 다시 누웠다.
"영숙이, 영숙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거 말하지 마세요."
"동생이 걱정되십니까? 소식이 궁금하죠."
"영숙이... 걔... 불쌍한 애예요."
"몸은 좀 어떻습니까? 의사는 뭐라고 그러구요. 빨리 일어나셔야죠."
"가슴에 칼로 그은 자리는 괜찮은데, 옆구리가 움직이면 쑤셔요. 한 2주는 더 지나야 완치되겠답니다."
"방송국에선 누가 왔다갔습니까?"
"네, 지 실장님하고 동료 탤런트들이 왔다갔구요. PD도 왔다갔어요. 그보담도 영숙이가..."
"동생은 별일 없습니다, 오빠가 입원하고 있는걸 알고 있지만 오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
"그런데 오빠한테 미안하다고 그랬다는데. 동생이 진남포 씨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요?"
"..."
"조금이라도 좋으니 대답하십시오. 동생하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진남포의 동생 박영숙.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그것을 밝힐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만일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면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호는 동생의 이야기를 꼬투리로 피습 상황을 알아보려고 있는 지혜를 다 짜며 접근해 갔다. 동생의 얘기가 나오자 마음이 흔들리는지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다. 그는 문호에게 담배를 얻어 깊게깊게 빨아들였다.
"영숙이 정말 별일 없죠?"
"네, 그런 걱정 마시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십시오. 진남포 씨를 습격한 사람은 누구며 또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모르겠습니다. 정말.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뭐가 뭔지."
"아는 얼굴은 없었습니까?"
"기억이 잘... 아무튼 아는 얼굴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라."
"왜 소리 지르거나 맞붙어 싸우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럴 정신도 없었어요."
"뒤에서 누가 붙잡은 사람은 없었습니까?"
"뒤에서요? 그런 것도 같고... 아무튼 너무 갑자기 당해서."
"당할 때 어떻게 당했습니까? 그때 상황을 좀..."
"제가 바람을 쏘이려고 아파트를 나와서 빈 공터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서 옆구리를 찌르기에 그만 엎어졌죠. 그런데 칼로 다시 가슴을 마구..."
그는 갑자기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침대살을 움켜잡았다. 문호가 벌떡 일어나 부축해 주었다.
"이거 불편하신데 실례가 너무 많군요.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고 가겠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마음에 집히는 일이라도. 사실은 영숙 씨 하고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영숙이가 선생님한테요? 선생님은 뭔가 거짓말 하시는 것 같은 데요. 영숙이는 내가 왜 입원하고 있는지를 모를 텐데요. 선생님 정말 영숙이 별일 없죠. 정말 영숙이 만난 거죠. 개 이리로 좀 오라고 해주세요. 그러면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영숙이 영숙이만 있으면 다 말씀 드릴께요. 으흐흐..."
그는 말끝도 맺지 못하고 동생을 보내달라며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문호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입원하게 된 사유를 동생이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왜 동생이 있으면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문호에게 확실한 것은 지금 진남포의 동생, 죽은 박영숙을 이곳에 데리고 올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동생은 내일이라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이 밤중에 데려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내일 오라고 할까요?"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까 동생 때문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사실 영숙씨는 오빠가 입원하고 있는 것에 몹시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자꾸 죽고 싶다고 하고 있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
"동생과 무슨 일이 있는지 말씀해 주실수 있습니까?"
"동생 좀 잘 보살펴 주세요. 정말 불쌍한 애예요. 걔는..."
진남포는 시트를 뒤집어쓰고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분이나 앉아 있었다. 웬일인지 마음에 구름이 낀 것처럼 무거웠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만 없어 다시 카운터로 나왔다. 의사는 보이지 않고 간호원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
"저 간호원 아가씨."
"네? 무슨 일이시죠."
"706호 진남포씨 말입니다."
"..."
"진남포 씨 병력 카드나 기타 질문에 답하실 만한분안 계십니까?"
"뭐 때문에 그러시죠. 지금 야근 담당 과장님이 계시기는 한데."
문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미안합니다. 오늘 꼭 좀 뵙고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서요."
"네, 경찰이시군요. 그러시다면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간호원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2충에 가시면 박용규 박사님이 계실 거예요. 가서 만나보세요"
"감사합니다."
문호는 간호원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순식간에 2층에서 멈춰섰다. 사무실에는 간호원들이 카드를 정리하고 있었고 박용규 박사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신문을 보고 앉아 있었다.
"저 박용규 박사님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아 조금 전에 전화받았습니다. 앉으시죠."
"이거 밤중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오나가나 죄송하다는 말에 바쁜 날이 되어 버렸다. 범인 수사하는 데도 여기 가서 '죄송' 저기 가서 '죄송' 이 짓도 못해 먹을 짓이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뭐 여쭤 보실 말씀이라도."
"배우 진남포 말입니다. 피습당해서 상처를 입었다는데 상태가 좀 어떤지. 또 상처 부위는 어떤지 좀 알고 싶습니다."
"아, 그 조역 배우라는 사람 말이죠. 내가 회진하고 왔습니다만 전혀 말이 없는 사람이더군요. 에... 또."
그는 캐비닛에서 무엇인가를 한참이나 뒤적이더니 카드를 한 장 뽑아냈다.
"진남포. 혈액형은 AB형이구요. 상처는 오른쪽 배 방향으로 약 15cm, 10cm, 20cm, 8cm가량의 칼자국이 있구요. 옆구리를 찔렸군요. 옆구리는 그리 깊이 찔리지는 않았는데 옆으로 약 4cm가량 찢어졌습니다. 출혈이 많았던 것은 이때문이었지요. 다행히 본인이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고 또 헝겊으로 틀어막아 위험한 고비는 넘긴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의식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회복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실이나 뽑고 사후 관리만 잘 하면 곧 퇴원할수 있을 겁니다. 자, 이 그림을 보시죠."

박용규 박사는 상처 부위를 그련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림으로 보아 상처는 몹시 심하게 보였다.
"상처로 보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그은 자국이 분명합니다. 여러 번 그은 것으로 보아 순식간에 당한 것 같습니다."
"순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에, 대략 이런 경우 먼저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고 다음 이 상처를 감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순간 옆구리를 찍은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래요? 그럼 진남포는 엉겁결에 당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그는 옆구리를 먼저 당한 것 같다고 하던대."
"환자야 뭐 압니까? 그럴 땐 정신 하나 없어요, 죽을 경우가 돼도. 가령 옆구리가 찢어져 창자가 밖으로 나와도 이것을 움켜쥐고 5, 6m는 뛰다가 죽는 게 사람이니까요. 그럴 땐 아픈 것도 모릅니다."
문호는 상처를 그린 그림을 다시 자기 노트에 섬세하게 옮겨 그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거 혼자서 상처 입힌 것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글쎄요. 이 칼자국으로 보아 습격해서 칼질을 한 사람은 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제 추측입니다만 가령 한 사람이 뒤에서 붙잡고 앞에서..."
"아니죠. 만약 두 사람 중 하나가 뒤에서 불잡고 앞에서 한사람이 그었다면 옆구리 상처가 이렇게 옆으로 찢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깊게 푹 찔렀다가 확 빼 버릴 테니까요. 피습자가 칼로 가슴을 긋고 진남포가 허리를 굽히니까 그때 찔렀다고 보아야죠. 구부린 힘에 칼이 옆으로 빠진 거죠. 상처가 깊지도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살아있다는 게 범인이 하나라는 증거가 됩니다. 둘이라면 이 상처의 양상으로 보아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이 가슴의 상처는 깊이가 어떻습니까? 사람이 힘을 못 쓸 정도로 치명적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4번의 상처 중 최초의 칼자국이 좀더 깊었으면 심장에 상처가 나서 치명타가 됐을 텐데 다행히 그곳은 피해갔습니다. 이 정도 상처야 애들 싸움에서도 종종 일어나죠. 상대는 힘이 약한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5번 옆구리 상처는 힘있는 사람의 솜씨가 아니에요."
"거 참, 이상하네."
"네?"
"아, 아닙니다."
문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박용규 박사에게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허겁지겁 병원문을 나섰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택시를 집어타고 서울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문호가 이상하다고 한 것을 의사가 알 리 없었다. 칼을 든 피습자가 힘이 약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은 타당했다. 그러나 힘이 강한 진남포가 비록 칼을 가졌다고는 하나 힘없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자비하게 무너진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미 최찬일 형사가 지적한 대로 같은 의문만이 계속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경비원의 진술에 의하면 피를 흘리며 돌아온 진남포가 '어떤 놈이, 어떤 놈이' 했다고 하니 그 피습자 신원을 진남포는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또 칼이 몸을 다섯 번이나 찢도록 진남포는 아무런 방비도 못했다는 결론이다.
피습당한 상처의 순서가 뒤바뀌어 옆구리부터 찔렸다고 해도 전체적인 상황은 납득되지 않았다. 옆구리를 찔렸으니 허리를 굽혔을 테고 허리를 굽혔으니 가슴은 보호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칼로 긋는단 말인가.
또 가슴을 먼저 당했다면 옆구리를 찌르기 전에 도망하거나 피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찬일이 조사한 핏방울 흔적에 의하면 옆구리를 먼저 찔리고 그래서 주저앉으면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핏자국에 톱니가 생기지 않았다는 추리를 할수 있었다.
정말 피습당한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도 순서가 맞질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사이에 차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때문인지 어깨들을 움츠리며 체온으로라도 추위를 이기려는 듯 어깨들을 부비며 옹기종기 서 있었다.
형규가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이미 침대 열차의 03-03과 03-15의 좌석을 예매해 놓았으므로 개찰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왜 늦었어, 한참 기다렸는데."
형규가 문호의 어깨를 툭치며 짜증을 냈다.
"진남포 면회 좀 하고 왔어. 거기도 골치 아픈 일 뿐이야."
"자, 문호 부산갈 때까지 딴생각은 하지 말자구. 지금부터 범행 방법을 복습해 보는 거야. 범인이 사람인 바에야 무슨 트릭을 써도 썼지. 제가 무슨 의도의 마법사라고 펑 하고 사라져, 사라지긴. 안 그래? 자 꼼꼼히 생각해 보자구."
"허긴 그래. 그런데..."
이때 장내에 방송이 들려 왔다.
"경부선 21시 45분 특급 열차를 기다리는 분께 알립니다. 지금부터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 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부선 21시 45분 열차를 기다리시는 분은 이제 곧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 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형규가 문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병원에서의 알수 없는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문호는 무표정하게 표를 꺼내어 손가락에 끼우고는 일렬로 서 있는 대열로 끼어들었다.

이미 답사를 통하여 낯익은 03-03 좌석과 03-15 좌석을 하나씩 차지했다.
"내일 다시 올라올 텐데 웬 짐이야."
"어? 이거, 별거 아냐."
둘은 마주 보이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승무원이 다가와 표를 회수한다.
"부산까지 가시는군요. 부산 도착 10분 전에 표를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이 돌아서서 다음 칸 사람에게로 갔다.
"이거 정말 불편하군. 이게 어디 침대차야 닭장이지. 구라파 여행했을 때 침대차를 타 보았는데 이건 숫제 호텔이더라고. 침대 한 칸이 작은 방만 했으니까. 이거야 원..."
형규가 구라파 취재갔을 때 이용했던 침대차를 머리에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야, 우리 나라 실정에 이것도 과분하지 뭘 투덜거려. 환자 승객이나 노인 승객에겐 아주 편리하겠어."
"허긴, 이 정도면 됐어. 또 아무리 걸려도 서울서 부산까지 5시간 30분 이상은 걸리지 않으니까."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덜컹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시작이야."
형규가 찡긋하고 신호를 보냈다. 03-15에 타고 있던 형규가 커튼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호가 담배를 빼어 물고 03-15의 커튼을 열었다.
"형규 담뱃불 좀 빌려 줘."
"자-"
형규가 라이터에 불을 켜며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시선이 자연히 문호의 눈으로 옮겨졌다.
"어때?"
"이거 의식적으로 해서 그런지 눈이 자꾸 자네 눈으로만 가는구만.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얼굴을 안 볼 수 없지. 아무리 어두워도 횐자위 검은자위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닌데... 아주 또렷이 보이잖아."
"됐어. 아무리 시력이 나빠도 이 상황에서 눈동자를 못 알아본다는 건 말도 안돼. 분명히 식별할 수 있어."
"그럼, 다음."
문호는 다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커튼을 닫았다. 형규가 복도로 나서서 문호의 침대 앞으로 다가섰다. 문호가 커튼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형규가 복도 끝에서 걸어오며 커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역시 얼굴은 확실하게 보여 눈동자가 확실하게 보이거든. 그 정도면 이빨 빠진 거까지 알아볼 수 있겠는데."
"지금 몇 시지? 22시 40분. 조금 있으면 천안 도착 시간이야. 좀 쉬자구"
둘은 각기 자기 침대로 돌아가 누워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실험으로 보아 눈에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 얼굴을 볼 때는 상대방의 눈부터 보게 된다. 그런데 검은자위를 흰자위로 보거나 흰자위를 검은자위로 볼수는 없다. 누군가 한편은 거짓말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성기준, 그는 왜 애꾸가 아니라고 했으며 성기준을 불러내린 김만호는 어떤 인물일까? 얼마쯤 지났을까
덜컹하며 차가 멈추는 진동이 울려 왔고 이에 정신이 번쩍들은 형규는 커튼을 살짝 쳐들고 문호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에서 담배 연기가 하늘거리며 빠져나왔다. 머리를 커튼 속으로 집어넣고 속으로 다섯을 세기 전에 열차는 천안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때, 이때까지는 별일 없었지?"
"자, 그럼 지금이 23시 40분쯤 됐다고 생각하고 십분후에 내 자리로 다시 들어와 봐."
문호는 형규에게 각본대로 다시 자기의 침대를 확인하라고 일러놓고 커튼을 닫아 놓은 후 승강구 쪽으로 나가 출입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의 등을 덥썩 움켜쥐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문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호의 각본대로 하자면 형규는 앞으로 10분 후 문호를 찾게 되어 있었다. 문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디론가 숨고 형규가 이를 찾기로 했던 것이다.
만일 형규가 문호를 찾지 못하면 문호가 숨어 있는 곳이 범인이 있던 자리가 되고 만일 어딘가 숨을 곳이 없어 찾아낸다면 모든 공범 혐의는 성기준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기준이 공범이 아니라는 가정과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는 전제하에 시작되는 게임이었다.
약 5, 6분이 지나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참다 못한 형규가 벌떡 일어나 문호의 침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훑어보았으나 문호도 승무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3호차 승강구로 가보았으나 승강구에도 없었다. 형규는 땀이 촉촉히 배어오는 손바닥을 의식하고 있었다. 오늘 따라 3호차에는 손님도 별로 많지 않았다. 비어있는 침대를 일일이 조사해 보고 승강구까지 조사해 보았다. 승강구의 출입문도 안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밖에서 매달려 있을 방법이 없었다.
끝내 문호의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형규는 조심스럽게 2호차로 옳겨 갔다. 그때 2호차 첫번째 칸, 즉 화장실 맞은 편 작은 방에서 문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형규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거기서 문호는 승무원과 무엇인가 시비가 벌어진 듯 얼굴이 벌개서서 있었고 승무원은 승무원대로 얼굴을 붉히며 따지듯 덤비고 있었다.
"이봐요. 글쎄 당신이 형산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 말이오. 처음 탈때부터 복도에서 수상하게 왔다갔다 해서 제가 신경을 좀 많이 쓴 줄 아세요. 손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도 못하고."
형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허기야 조용히 정숙을 지켜 숙면하는 승객에게 방해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침대차에 올라타자마자 현장 검증한다고 설쳐댔으니 승무원이 수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처음부터 신분과 목적을 밝혔으면 협조가 잘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될수록 누설시키지 않고 둘의 힘으로 풀어 보자는 의도였기 때문에 의외의 부작용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문호와 승무윈은 서로 사과하고 돌아왔다.
"제길. 어떻게나 빡빡하게 구는지 신경질 나서 혼났네."
"자, 잊어버려. 그건 그렇고 어디 숨을 만한 곳은 없었어?"
"없어, 화장실밖에는... 만일 숨을 만한 곳이 또 한 군데 있었다면 아까 내가 있던 승무원실 뿐인데 거긴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정말 성기준의 개입이?"
"달리는 해석할 도리가 없어. 부산에 내려가는 즉시 김만호 신상을 조사하고 조사가 끝나면 성기준을 나꿔채는 거야. 더 이상 우물쭈물 할 수가 없어."
문호는 입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형규가 잠시 바라보다가는 격려를 했다.
"자자, 그만하고. 문호 우리 말야 처음부터 검토하자구. 아무래도 뭔가에 속고 있는 것 같아."
"맞아 우린 지금 뭔가에 속고 있어. 이거 어디 자존심 상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꼭 길가에서 눈뜨고 네다바이당한 기분이란 말야. 에이참..."
"그건 그렇고 아까 낮에 갔다가 만난 윤 의사말야 그 이빨..."
"응, 참. 그 이빨 사건도 있지."
문호가 '이빨' 사건을 상기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강진을 죽인 놈은 뒤에서 목을 눌러 죽인 게 분명해. 형규 자네 입 좀 열어 봐."
"이거 왜 이래. 자, 아."
형규가 입을 좌 벌리고 문호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됐어. 이제 내 설명 좀 들어봐. 보통 정상의 사람들은 왼쪽 송곳니에서 오른쪽 송곳니까지의 길이가 약 6cm정도 되거든. 고강진의 목에서 발견된 이빨 상처의 길이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물린 이빨의 끝이 이상하단 말야. 보통 성인들의 이빨 끝은 넓적넓적 하거든. 그런데 고강진의 목에서 나타난 이빨 자국은 그게 아냐. 마치 송곳니만으로 물어 버린 듯 상처가 묘하단 말야. 듬성듬성 자국이 나 있고. 끝이 뾰족하고... 도대체 무슨 상천지 모르겠어."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뭔지..."
"형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기록 좀 해보자고. 그리고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구. 한꺼번에 풀어가려면 힘들어."
둘은 눈을 부릅뜨며 불빛이 흐린 실내에서 하나하나 메모를 시작했다.

1. 범인이 달리는 열차 내에서 증발한 점
2. 김만호와 성기준이 갑자기 밀착되어 있는 점
3. 진남포의 피습과 고강진 피살의 연관성
4. 진남포 동생이 자살한 이유
5. 고강진 목에서 발견된 이상한 이빨 자국
6. (서울 방향? 혹은 부산 방향?) 범인(고강진 살해범)이 도망친 방향

얼핏 보아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이만큼이나 많았다. 어느것 하나 만만히 대들 것도 없었다, 아직은 수사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지만 내일 부산에 도착하면 어느 정도 실마리는 풀리리라. 문호가 기록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동안 형규도 형규대로 자기 수첩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골똘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조금 전 문호와 시비가 붙었던 승무원이 찾아왔다.
"아까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시던 살인 사건 때문에 저희들도 여간 신경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안한 건 오히려 저희들이죠. 사전에 말씀 드렸어야 하는 건데. 그만 저희들 사정대로 움직이다 보니 오해가 생겼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둘은 좀전의 태도와는 달리 금세 친숙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담배까지 주고받으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놈의 차에서 그런 사고가 생겨서... 그런데 도대체 범인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형사 분들께서 고생하시니까 금세 체포되겠지만."
"글쎄요. 저회들도 그 문제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길입니다. 부산가는 길에 보다 철저히 현장 검증을 하려고 이 침대차를 탄 거죠. 정말 이 침대차엔 사람이 깜쪽같이 숨을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저회들도 이번 사건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비어 있는 침대나 화장실 외에는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차 구조야 저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죠."
승무원은 어느 구석에도 사람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 없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승무원뿐만 아니라 문호 자신이 생각해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문호와 형규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마주쳤다.
둘의 생각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결국 범인은 성기준이 감추어 준게 분명해, 성기준의 심리전에 당한 거야'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는데요. 천안에 도착할 때와 대전에 도착하기 전 승무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네, 그게 그러니까. 천안에 도착할 때는 별로 하는 게 없습니다. 열차표를 미리 회수하기 때문에 천안에 내릴 승객이 있는지 없는지는 금세 확인이 되죠. 만일 하차 승객이 없으면 저희들도 쉽니다."
승무원의 말을 듣지 않아도 상황은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빨리 부산에 도착해서 수사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이때 승무원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구, 이거 늦을 뻔했네. 대전 내릴 분들 표 나눠줘야 하거든요. 자 그럼 수고들 하십시오."
승무원이 돌아가고 둘은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승무원이 대전에서 하차할 승객에게 표를 나누어 주고 난 얼마 후 덜컹 하고 열차가 멈추어섰다. 대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둘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00시 05분이었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둘은 그만 침대에 누워버렸다.







신부의 증언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아침 일곱 시가 훨씬 지난 뒤였다.
교환에게 모닝 콜을 부탁하고 침대에서 그냥 잠에 떨어졌던 것이다.
3층 객실 창문에는 동아 호텔 간판이 투사되어 빛나게 보이고 있었다.
"형규, 안 일어날 거야?"
"야, 조금만 더 자자구. 이거 피곤해서 미치겠구나야."
"게으르긴... 어서 일어나."
문호가 형규를 애써 깨워 샤워실로 보내고 룸 서비스에 부탁하여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15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낮에 뛰어다닐 수가 있을것 같아 둘은 부산역에 있는 동아 호텔에 투숙했던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형규가 한결 가볍고 상쾌해 보였다.
"자, 오늘 계획을 짜 보자구. 어때 같이 뛰는 것보다 각자 뛰는 게"
문호가 수첩을 뒤적이며 형규에게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형규는 이미 샤워를 하며 생각을 굳혀 논 터였다.
"좋지, 난 말야. 생각이 따로 있으니까. 에, 내가 오후 다섯 시까지 로얄 호텔 커피숍에 가 있을 테니까 그리로 연락하라구. 문호는 오늘 어떻게 뛰겠어."
"난 아무래도 시경에 들러서 김만호 쪽으로 뛰어야겠어. 자넨 진남포 쪽을 알아보는 게 좋을 텐데."
"좋아, 각자 뛰자구."
둘은 호텔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다. 한국 제일의 항구 도시이며 역사 깊은 도시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서울에 비교할 만한 도시는 되지 못했다. 차량의 숫자며 건물의 밀도가 훨씬 미치지 못했다.
부산 공원 앞길에서 둘은 헤어졌다. 오후 다섯 시에 로얄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문호는 곧바로 시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곽영근 형사 과장. 그는 경찰 대학에서 같이 강사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매우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문호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다. 사무실엔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여덟시 삼십 분은 되어야 출근한다고 했다. 문호는 다시 거리로 나와 근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첩을 꺼내 메모를 보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구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만호를 만나 성기준의 현재 소재지를 파악하는 일이었고 다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일이었다.
만약 둘 중에 하나라도 고강진과 손이 닿는 부분이 있기만 하면 막바로 성기준을 연행하여 공범 여부를 밝힐 작정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벌써 출근할 시간이 다 되었다. 다시 시경으로 들어가자 곽 과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새벽에 도착하셨겠군요.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별말씀 다 하십니다. 혼자 온 게 아니라서 별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같이 오신 분은."
"아, Q신문 사회부 민형규 차장입니다. 지금 다른 곳에서 취재하고 있죠."
"민형규 기자라면 지난번 소위 '덫' 사건으로 유명해졌던 그 기자..."
곽 과장도 민형규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네, 저하고는 대학 동창이죠. 이번 사건에 몹시 구미가 당기는모양입니다. 또 따라나섰죠. 하여튼 참 비상한 친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침 식사는 "
"여기서 유명한 북어국으로 때웠습니다. 아주 시원하게 먹었습니다."
"하하, 부산 오시니까 생선 냄새밖엔 나는 게 없죠?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한 이십여 분 회의 좀 하고 나오겠습니다."
이곳 부산도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사는 대도시답게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뱃사람과 이곳 적선지대의 여성 관계로 심심치 않게 사건이 터지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문형동 디스코 홀 집단 싸움이며 화재 사건이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경제면은 봉제 하청업자들의 불황으로 부도업체가 늘어간다는 기사도 보였다. 문호는 몇장 더 뒤지다가 진남포의 동생이 해운대에서 자살한 기사를 찾아냈다. 85년부터 공해 지역에 하루 1천kg의 분노를 버리기로 했다는 커다란 기사 밑에 1단 20행 정도의 크기로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동백섬 바위 틈에서 변사체 발견.'

남부 경찰서는 지난 1일 오전 동백섬 바위 틈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28, 29세 가량의 장님 여인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바위의 평면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원을 조사중이다.

문호는 기사를 오려 수첩에 꽂아 넣었다. 잠시 후 곽 과장이 회의를 마치고 나와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거 미안해서."
"원 별말씀을 전보도 잘 받았고 또 여러 가지로 협조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쪽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군요."
곽 과장은 캐비닛을 열어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한참 뒤적이더니 노란 화일로 묶은 서류를 뽑아 냈다.
"에, 요약해서 말씀 드리자면... 먼저 김만호 회장부터 설명해야겠군요. 여기 서면이라는 곳은 공장 지대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에 대진 무역상사라고 있는데 생산 제품은 고무류, 염색업, 섬유류 등입니다. 이곳 회장이 바로 김만호 씨죠. 부산 지역에선 입김이 센 편입니다. 부산 토박이로 대대로 갑부였고 또 재산 관리도 잘해서 아주 알뜰하게 꾸려가고 있죠. 그런데 이분이 지난 30일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어떤 충격을 받고 쓰러진 것 같다고 합니다만... 여하튼 가족들이 병원으로 옮기고 손을 써서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 그날 저녁 병원에서 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분상 경찰에서는 극비에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곽 과장은 김만호의 실종 사건과 소각된 서류에서 발견된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편지의 내용이 송전되자 저는 그만 깜짝 놀랐죠.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오시라고 연락 드린 거구요."
"놀라운 사실이 어떤 거죠? 곽 과장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곽 과장의머리에서 감감히 떠올랐다가는 또 안개처럼 사라지던 성기준이라는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지금 성기준이란 사람을 가장 유력한 공범으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사건이 너무 미묘해서 한 마디로 단정하긴 어렵지만..."
"그렇다면 사건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군요. 사실 김만호는 고강진의 아버지였습니다."
"네? 김만호가 고강진의?"
"맞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조금 전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김 회장이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하던 것은 고강진의 피살이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사무실에서 태우다 만 종이는 고강진이 김회장에게 즉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서신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지금 대답을 안하고 있지만 끝까지 버티지야 못하겠죠."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고강진을 죽인 것은 김만호의 사주를 받은 성기준, 그리고 사건 자체는 성기준이 뒤에서 조종하고...
김만호와 성기준의 합작품인데 범인은 행방을 모르겠고..."
"지금 상황으로서는 별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군요."
"그건 논리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거죠?"
"네 ?"
"아,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김만호와 성기준을 만나기로 하죠."
"둘 다 김 회장 자택에 있습니다. 똑똑한 형사들을 붙여놓았습니다. 움직이는 대로 보고하라구요."
둘은 곽 과장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올라탔다. 곽 과장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곽 과장이 상대할 사람은 적어도 대진 물산의 김만호 회장이었다. 섣불리 건드릴 만한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으나 문호의 지원으로 다소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무엇이 겁나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같은 동향보다는 처음 보는 사람이 다루기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다. 둘, 즉 김만호와 성기준은 이번 고강진 피살 사건에 깊숙이 간여되어 있음을 알수 있었다.
문제는 직접적인 단서를 잡는 데 있었다. 직접적인 단서를 잡기 위해서는 두 사람을 유도 심문하여 자백시키고 증거물을 내놓도록 만드는 길밖엔 없었다.
차는 경찰서를 빠져나와 시청을 돌아 태종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약 10달쯤 달리자 태종대가 마주 보이는 어느 커다란 저택이 나타났다. 차는 그 자택 앞에 멈춰섰다. 대리석 기둥에 김만호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곽 과장과 문호가 내리자 작업복 인부가 경례를 딱붙였다.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형사들이었다.
"별일 없었나?"
"네, 사뭇 조용했습니다."
"수고했어. 오늘은 이만 철수해."
부하들을 돌려보내고 곽 과장은 대문 밑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비디오 장치가 되어 있는지 문은 아무 저항 없이 스스로 열렸다.
정문에서 현관까지는 돌계단으로 되어 있었고 돌계단 좌우로는 잔디밭으로 되어 있었다. 정원에는 상록수와 꽃나무들이 겨울 채비를 한 채 가득히 심어져 있었고 정원 구석에는 풀장까지 있었다.
현관 건물에서 40대의 잘생긴 남자가 나왔다. 곽 과장이 문호의 귀에다 대고 그가 김만호의 맏아들임을 알려 주었다.
"이거 매일 고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침부터 실례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곽 과장이 오시는 걸 아시고 지금 응접실로 나와 계십니다."
"서울서 오신 성기준 씨는..."
"지금 같이 계십니다. 오늘쯤은 곽 과장님이 한번쯤 더 오실 거라고 아침부터 말씀하고 계셨죠. 자 아무튼 안으로 들어갑시다."
곽 과장과 문호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문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응접실은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응접실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궁궐을 방불케 했다. 말로만 듣던 이태리제 소파와 휘황한 샹들리에, 각종 골동품들이 질서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응접실 옆으로 홈 바아가 있는데 알 수 없는 각국의 양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는 남해
바다와 태종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소파에는 김 회장 혼자 앉아 있었다, 성기준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김 회장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요 며칠 사이에 얼굴이 몹시 수척해 있었다. 그러나 거만한 말투나 몸짓은 평소의 태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에게 아직도 무슨 일이 남았소?"
문호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몸을 추스리자 곽 과장이 옆구리 찌르며 말렸다.
"저 회장님 어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지금 호적에 올라 있는 아드님 외에..."
"아아, 또 그 얘기요. 그건 어제 말씀 드리지 않았소. 아니 호적에도 없는 아들을 대라니, 세상에. 여보 내가 벌써 육십을 훨씬 지났는데 그래 지금 내가 바람이라도 피울 나이라고 생각하오. 허참."
"..."
"무슨 다른 용건이 있어 온 거 아니오? 자 차나 들고 얘기합시다."
가정부가 쟁반에 따뜻한 차를 끓여 왔다. 커피도 흔한 국산차도 아니었다, 문호나 곽 과장으로서는 일찍 맛보지 못한 그런 향기로운 차였다.
"차맛이 괜찮죠? 북구라파 사람들이 겨울에 많이 마시는 차랍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문호는 자꾸만 주위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나타나야 할 성기준이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써 태연하려 했지만 끓어오르는 조바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저, 회장님 전화 좀 써도 괜찮을까요?"
문호가 김 회장을 바라보자 파이프로 테이블 위의 전화를 가리켰다. 사용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문호는 서울 수사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김만호가 듣도록 큰 소리로 부하를 불렀다.
"아, 나 반장이야. 누구? 최 형사. 음, 별일 없지. 지금부터 서울역, 강남 터미널, 김포 공항 국내선을 봉쇄해서 성기준. 아, 성 박사 그 사람 말야 눈에 띄는 대로 연행해. 괜찮아, 걱정 말고. 내가 책임질 거니까."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만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지며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아니, 여보쇼. 성 박사가 뭐 어쨌다는 거요."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저희들 판단은 따로 있습니다."
"무슨 판단이요, 도대체."
"공범이요, 공범. 죽은 당신 아들 고강진 살인 사건 공범을 얘기하는 겁니다."
"뭐라구요? 고강진. 걔가 어째서 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 과장이 말을 막고 나섰다.
"김 회장님이 더이상 버티시면 저희들도 무례하게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시작해서 조용히 끝나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아니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끝내자니, 뭘 끝내자는 거요. 전화 걸어요. 당신네 국장하고 직접 통화 좀 합시다."
"국장님이요? 직접 거시죠. 걸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문호가 테이블 위의 수화기를 들어 김 회장에게 건네 주었다, 김 회장은 처음 보는 젊은 형사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경찰 국장과는 평소 친분도 두터웠고 또 경찰서 과장쯤 평소 우습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사건으로 만나고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더구나 고강진이 자기의 아들임을 알고 온 것이 확실해지자 그만 기가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뿐인가 공범으로 몰리게 된 성기준을 서울로 빼돌리고 난 직후여서 더욱 그랬다.
성기준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며 버텼지만 자기의 입장을 생각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둘이 들이닥친 것을 알았을 때 바로 뒷문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좋소, 사과합니다. 그러나 용건만은 분명히 합시다."
"네, 더욱 좋습니다. 저희들도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깐요."
"여보, 젊은 형사. 고강진이라는 배우가 어떻게 내..."
문호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끄고는 김 회장을 노려보았다.
"회장님, 담배 연기는 사라져도 냄새는 오래 남습니다, 성기준 씨가 여기서 사라졌다고 제가 놓칠 것 같습니까? 제 별명이 사냥개입니다.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시죠. 성기준 씨 체포는 시간 문젭니다. 국장을 부르신다고요? 국장 아니라 내무부 장관을 불러도 내 소관은 아무도 간섭 못합니다. 이 박문호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십니까? 그리고 회장님은 고강진을 아드님이 아니라고
우기시는 데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을 가지고 왜 고집을 피우십니까. 꼭 성기준 씨 같이 말입니다. 성기준 씨가 뭐랬는지 아십니까. 다른 범인 목격자는 다 애꾸라고 하는데 본인만 애꾸가 아니라고 고집 피웠습니다. 두 눈이 말짱하다는 거죠. 그 고집 참 기묘한 공통점입니다. 자, 그러지 마시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합시다."
문호는 일어나서 소파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다시 담뱃불을 붙였다. 김 회장이 결심하고 고백할 시간적 여유를 주겠다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김 회장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소파에 기댄 채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렇게 십 분이나 흘렀다. 잠시 후 눈을 뜨며 몸을 뒤척이더니 무엇을 결심했는지 손으로 탁자를 탁 치며 말을 꺼냈다.
"자, 말하죠. 고강진, 걔는 내 아들입니다. 틀림없는..."
"그런데 왜 죽였습니까?"
소파를 돌며 걷던 문호가 딱 멈추어 서서는 김 회장을 노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신네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소. 그러나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는 했어도 죽인 일은 없소. 그건 당신네들이 잘못 짚은 거라 이겁니다. 좀더 알아보시오."
문호는 김만호의 이런 소리에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았다. 정식으로 그를 옭아맬 작정이었다.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며
"회장님, 저 좀 보시죠."
하며 단호한 어투로 지시하자,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허리를 일으키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회장님 모든 행위나 사고에는 논리적인 것만이 통용됩니다. 말장난이나 발뺌이나 궤변 같은 것은 이 시대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희들이 회장님을 의심하는 것도 뚜렷한 물적 증거가 없으니 말장난으로 그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드리는 제 말이 논리에서 벗어나거나 지나친 추측이라고 판단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그러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테니까요. 저희들은 몇 가지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 첫째가 죽은 고강진이 회장님 바로 김만호 당신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다행히 그 점은 회장님이 긍정 하셨으니까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회장님은 최근까지 죽은 고강진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강진은 자기의 친아버지가 김만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자기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그런 문제는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연예인으로 정상을 달리게 되자 문제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선 연예부 기사들이 가십 (gossip)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고강진의 생부가 누구냐' 별별 억측이 다 나돌았죠. 고강진 자신도 까막득히 잊었던 아버지 문제를 점차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겠죠. 시달리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를 해주었을테구요. S-TV에서 조사한 바로는 고강진 어머니는 젊은 시절 한때나마 연극 배우였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회장님은 돈의 힘으로 한동안 동거 생활을 했거나 아니면 엔조이 정도로 관계를 맺었겠죠. 그러나 그 여인은 당신에게 잊혀버릴 여인이 되었고 회장님은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의 생활비를 주어가며..."
"아니, 잠깐..."
김 회장이 문호의 말을 갑자기 중단시켰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거의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틀린 점은 지적을 하고 넘어갑시다. 오해받기는 싫으니까요. 고강진 어머니가 내게서 떠날 때는 내게서 소식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그후 그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난 물질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난 끝내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고 또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강진이 불쑥 나타났죠. 자기의 어머니 사진과 함께. 당신이 몹시 당황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갑니다. 왜냐하면 고강진의 요구가 너무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요구 조건이란 자기를 김만호 당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달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거였죠. 그런데 문제는 회장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적에 아들 하나 더 오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겁니다. 회장님은 차기 국회에 진출하겠다고 공언하셨죠. 자칫 루머가 퍼지면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제일 두려워했던 점은 바로 그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큰 문제는 가정 내부에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소위 당신네들이 얘기하는 딴따라가 같은 호적에 형제로 입적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리라는 것을 예측했겠죠. 그러나 사실은 '엉뚱한 사람이 아들로 입적되어 재산 상속의 몫이 적어져 반대할 것이다'라는 진실한 반대가 큰 벽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을테구요. 또 아버지의 권위 문제도 있고, 회장님이 주저하며 시간을 끌자 이번에는 고강진이 계속 압력을 넣는 편지를 띄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결심을 굳히셨죠. 처음부터 낳지 않은 셈치자 까짓거 없애 버리자 이렇게 생각한 거죠."
김 회장이 파이프로 테이블 위의 유리를 딱 때렸다. 유리가 우지끈 하고 깨어져 버렸다. 벌떡 일어나며 문호를 노려보았다.
"뭐라구요? 아니 그런 비약이 어디 있습니까?"
"회장님 조금만 참고 더 들어보세요.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비약적인 상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 논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회장님은 궁지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과 사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재산이니까요. 그래서 힘세고 담력 있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구성하신 치밀한 연극에 투입시켰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범인이 어떤 방법으로 열차를 탈출해 나갔는지 그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도 곧 알게 됩니다, 회장님도 신문을 보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건장한 남자라면 신장이 평균 170cm이상 몸무게 70kg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덩치 큰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기막힌 연극에 조연으로 등장한 또 한 사람의 배우가 있었으니까요. 그게 바로 성기준 씨 아닙니까?"
말을 잠깐 멈춘 문호가 잔에 남아 있는 차로 목을 적시며 김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 때 응접실과 딸린 방문이 열리며 그의 장남이라는 사람이 흥분된 얼굴로 나타났다.
"여보 당신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요? 고강진이 우리 아버지 아들. 그럼 내 동생이란 말이오? 그리고 성 선생님이 살인 공범자라구요. 당신 경찰이라고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
"그만 그만. 네가 왜 나서는 게야. 물러가 있어, 어서. 그리고 어디 그 재미있는 영화 구경 좀 더 하자구. 넌 나가 있으라는데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어, 서있길..."
김 회장이 아들에게 소리 지르자 꿈쩍하고 놀라더니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갔다. 김 회장이 빙긋이 웃음을 띠어 보이며 다시 얘기를 계속하라는 듯 파이프를 꺼덕이며 눈을 감는다.
"회장님은 성기준씨와 범인을 불러다 치밀한 계획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범인은 고강진의 별장에서 목졸라 살해한 다음 대형 백에다 시체를 집어넣고 미리 예약된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성기준씨는 맞은편 침대차에 승차했구요. 열차가 대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성기준은 범인을 불러내어 화장실에 숨도록 지시하고 뒤따라 자신도 화장실로 들어갔죠. 그리고 승무원이 복도에 어슬렁거릴 무렵 화장실에서 나오는 겁니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승무원이나 범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고강진시체가 발견되어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승강구로 나왔다가 열차가 대전 도착을 위해 속도를 줄일 때 뛰어내리는 거죠. 그 길만이 그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당신 이제 보니 참 재미있는 청년이구만. 그래 증거는?"
"증거요? 증거야말로 참으로 재미있는 게 있죠. 성기준 씨는 수사에 혼선을 빚기 위해 스스로 범인 목격자임을 자청하고 나선 겁니다. 그리고는 범인은 애꾸가 아니다. 자기와는 대화도 나누고 담뱃불도 빌려갔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스스로 포박당할 끈을 제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가 범인이 애꾸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잘못 볼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관심 없이 흘려 버릴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문제는 그가 애꾸다 아니다 하는 게 아니라 범인은 성기준 씨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 범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김 회장의 얼굴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분명히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 표정을 놓칠 문호가 아니었다. 힐끗 쳐다보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김 회장은 다시 입술을 지그시 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성 박사가 범인에게 담뱃불을 주었다는 얘기는 범인과 성 박사 두 사람만이 나눈 대화일 텐데 당신은 무슨 증거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허위 진술이라는 겁니까?"
"말씀 드리죠. 범인이 성기준 씨게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말했을 때는 열차가 막 출발한 직후라고 했습니다. 그 후 천안에 도착할 때까지 그 앞을 지나간 사람은 사건 당시 목격자로 나섰던 바바리를 입은 여인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 여자도 범인 얼굴을 보고 스산한 무서움이 들어 되돌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리는 말씀의 초점은 열차가 천안을 막 출발할 무렵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바바리 여인이 열차가 출발하는 진동에 잠이 깨어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까 범인의 침대에서 담배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그 하나는 범인은 그 때까지 침대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얘기구요, 또 하나는 그가 성기준 씨에게 담뱃불을 빌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아직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조금 전 범인은 성기준 씨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범인은 담배만 가지고 있었고 라이터나 성냥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죠."
"그렇구만... 그래서요."
"그런데 열차가 천안에서 출발할 때는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이겁니다."
"그 때도 누구에게선가 빌리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사건 당일 범인 목격자는 자진해서 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담뱃불을 빌려 주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객관적인 증거도 있었습니다, 열차가 천안에 도착할 무렵이면 승객은 물론이고 승무원까지도 깊은 수면에 빠지거나 푹 쉬는 시간입니다. 승무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서울서 천안까지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침대차로 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조사에서 밝혀지기도 했지만요. 그 시간에 담배가 피우고 싶었어도 라이터나 성냥이 없으면 포기했거나 승무원에게 빌렸어야 하는데 승무원 누구도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음--"
김 회장은 눈을 감은 채 깊은 신음을 뱉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 회장님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고강진이 회장님의 아드님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
"극히 소수의 사람이죠? 김 회장님이 젊어서부터 가까이 했던...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사이. 이번 사건 때문에 김 회장님이 자주 불러내리며 의견을 나누었던... 성기준 그 사람 아닙니까?"
회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까 봐 회장님은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증거를 말씀 드릴까요. 회장님은 범인 증발 연극 외에 자신이 증발하는 연극을 또 한 번 연출했습니다. 그 중요한 목적은 고강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사진 등을 병원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가지고 있던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게 큰 부담이 갔죠. 고강진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순간적인 쇼크로 입원은 했지만 마음은 거기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인멸, 증거 인멸 그 목표를 위해서 식구들을 병원으로 소집하게 했고 집안이 비어 있는 틈을 이용하여 탈출한 거죠. 회장님은 모든 것을 소각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경찰에서는 그 증거물들을 고스란히 입수해
냈습니다."
"뭐라구, 증거물을... 그건 내가 태워 버렸는데."
"하하 이제서 고백을 하시는군요. 회장님은 경찰과 가족들 그리고 직원들이 들이닥치자 미처 다 타지 못한 종이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회장님이 과학 수사가 어디까지 온 줄 아십니까? 잿더미 속에서도 글씨는 판독이 됩니다. 저희들은 그걸 입수한 겁니다."
"아-- 아-- "
김 회장이 머리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가족들이 쫓아나와 부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도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난... 난 걔를 죽이지 않았어. 난 걔가 죽었기 때문에 쇼크를 당한 거야. 정말이야. 성기준, 그 사람이 부질없는 짓을 한 모양이군."
문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의사를 부르고 난리를 피웠다. 누군가 돌아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문호의 귀를 스쳤다.
"쳇, 왜 재산 분배는 안하는지 모르겠어."
큰아들의 부인 즉 김만호의 큰며느리였다. 순간 문호는 부산의 대재벌 김만호의 회장의 대진 물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김 회장은 의식을 회복했다. 누운 채 그는 곽 과장과 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박문호라고 했죠? 당신... 논리에 빈틈은 없었소. 모든게 당신네들이 수사한 그대로이고, 내가 고강진 애비라고 말을 했지만 이를 믿기에는 너무 문제가 많았소. 그 여자는 내게서 잠깐 머물다 말없이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저했던 건 그런 이유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이는 들었어도 나도 야망이 있는 사람이외다. 재산은 애들한테 나누어 주고 정계에서 남은 여생이나 바치려고 했던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내 아들이라고 찾아온 녀석을 내가 왜? 어떻게 죽일수 있습니까?"
그의 말은 진실로 가득 차 보였다. 액면 그대로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사건의 배우는 김만호가 아닌 성기준일지도 모를다는 의혹이 떠올랐다. 그리고 김만호가 고강진을 아들로 인정하지 못하는 심정도 이해는 갔다. 문호는 혈액형 조사로 부자 확인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호가 이 사건이 발생한 처음부터 성기준을 공범자로 보았을 때는 방송국측과의 관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김만호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사정은 급회전하여 부산으로 무대가 옮겨졌다.
김만호와 성기준 그리고 고강진으로 이어지는 끊을 수 없는 튼튼한 끈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호가 고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 즉 진남포의 피습과 박영숙의 자살 사건. 이쪽, 즉 김만호의 방향에도 진남포가 낄 만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남포와 고강진 사건은 어떤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도무지 헤아려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문제는 사건 배후의 실제 인물이 성기준인가 김만호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초점이었다. 김만호의 태도로 보아서는 범행에 직접 간여하지 않은 듯한 예감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모두가 성기준이 진두 지휘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호의 가슴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찌꺼기가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성기준의 너무나도 떳떳한 행동 때문일까?
시간이 얼만가 지난 후에서야 주치의가 도착했다. 오는 즉시 혈압부터 재 보았다. 위험 수위까지 올라 있다고 했다. 체온은 별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김 회장에게 절대 안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회장님 특실을 마련해 드릴 테니 입원을 하시죠. 아무래도 안정하기에는 집보다는 병원이 훨씬 유리하니까요. 면회도 엄격히 통제하시고 또 잡념을 깨끗이 잊으셔야 합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아냐 아냐, 일이 너무 커졌어. 잘못하다가는 큰 오해받게 생겼어. 오해로 끝날 일 같으면 별것 아닌데 잘못하면 치명상을 입게 돼. 한 이삼 일은 지나봐야 알겠어. 이거 요새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진정제나 한 알 주고 돌아가라구.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호흡은 좀 어떻습니까?"
"호흡도 힘들지만 머리가 몹시 아프군."
"혈압 증세라 그렇습니다. 주사를 한 대 놔 드리죠. 좀 가라앉을 겁니다."
의사가 간호원에게 주사를 놓도록 지시하는 동안 문호는 주치의를 데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서울 특별 수사반 박문호 형삽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 네, 그런데 회장님 주변에 무슨..."
"뭐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혹시 회장님 혈액형을 아시는지."
"아다마다겠습니까. 제가 10여 년 이상을 보살펴 드리고 있는데. 회장님은 O형입니다."
"혹시 N, MN, M으로 구분하는 것도 해놓으셨는지."
"물론입니다. 회장님은 MN형입니다."
"역시 생각대로군. O형에 MN이라... 그러면 꼭 맞아떨어지는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그냥 혼자말로... 그런데 회장님 최근 다른 증세를 호소하신 일은 없었습니까?"
"뭐 별달리... 엊그제 졸도 사건 외에는."
"감사합니다."
문호와 주치의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김 회장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의사와 간호원이 돌아가고 가족들을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세 명만이 남았다.
"회장님 한 마디만 더하고 물러가겠습니다 고강진은 O형이고 또 다른 구분으로 N형임이 밝혀졌습니다. 또 고강진 어머니도 O형에 MN형임이 밝혀졌구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과학적 근거에 따르면 가령 김 회장님이 고강진이 아버지일 수 있는 혈액은 조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저희들 조사와 주치의 답변은 정확하게 일치되었습니다. 회장님의 혈액은 O형에 MN 형이면 고강진의 아버지로 믿어도 좋다는 거죠. 그런데 회장님 피는 O에 MN형입니다. 즉 고강진은 회장님의 아들이란 뜻이죠."
"..."
"어떻게 할까요? 저희들은 돌아가겠지만 성기준 씨에 대해서 하실 말씀은..."
"없어요. 아무 것도."
"그럼 필요할 때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문호와 곽 과장은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자, 점심 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어디 가서 식사나 합시다. 어디로 갈까요?"
곽 과장이 문호에게 식사를 제의해 왔다.
"부산이야 제가 어떻게 압니까. 곽 과장님이 안내하십시오. 저야 생선에 불고기, 뭐 먹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까요. 하하."
"좋습니다, 불고기라면 해운대가 좋고 생선회라면 자갈치쪽이 좋은데... 자 불고기로 합시다. 해운대집 괜찮거든요. 어이 기사! 해운대 갈비집으로 몰아."
문호와 곽 과장을 태운 승용차는 다시 도심으로 들어와 부산역을 지나고 지하철 공사가 한참인 해운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회장을..."
문호가 곽 과장에게 질문했다.
"글쎄요.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을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자기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해도 그는 성공한 사람이고 쌓아놓은 명예가 있는데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할까요. 더구나 아버지라고 찾아온 사람을... 문제는 성기준 씨는 어떻게 등장하느냐 무슨 역할을 맡았느냐 이게 문제죠."
"저도 지금 그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진남포 사건입니다. 그의 동생이 자살했죠. 또 목격자에 따르면 범인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구요. 진남포 자신은 좀체로 입을 열지 않고... 지금 Q 신문 민 기자가 나름대로 취재를 하고는 있지만 진남포측이야 피해자니까 무슨 기대를 걸 수는 없지만 요는 고강진 사건과 진남포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과연 두 사건이 같은 성질의 사건이냐 별개의 사건이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기묘하게 얽힌 사건. 지금까지 문호가 겪은 사건 중 이렇게 기묘하게 얽힌 사건도 흔하지는 않았다. 사건들은 언제나 문호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왔고 그 때마다 문호도 한치의 양보 없이 도전에 대응해 왔었다. 때로는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쫓다가 세월만 보낸 사건도 있었고 또 어떤 사건은 순식간에 경쾌하게 마무리 지은 사건도 있었다.
또 어떤 사건은 범인이 제발로 걸어오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러한 미묘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문호의 마음은 일면 무겁고 초조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일면에는 사건 추적과 해결이 재미있기도 했다. 지능범 담당 형사의 특수 체질이라고나 할까. 열차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범인, 김만호의 출현, 고강진과의 새로운 관계 노출, 성기준의 알 수 없는 행동, 진남포 피습 현장의 미스터리... 하나하나가 얽힌 실처럼 복잡했지만 어딘가 숨어 있는 실마리를 찾으면 또 사건은 일사천리로 풀려가기도 했다.
수사의 즐거움은 바로 이런데 있었다.
이때 과장이 한 마디 불쑥 내던졌고 이 말에 문호는 가슴이 섬찍했다.
"박문호 씨, 만일 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성기준이 공범이 아닌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이 말은 문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추리해 온 바에 의하면 그는 갈 데 없는 공범이어야 했다. 그러나 곽 과장의 말대로 만일 그가 이번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나.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그 문제만 머리에 떠오르면 그만 마음이 흐트러져 버렸다.
상황 증거만으로는 사건해결이 되지 않는다. 직접 증거. 그게 있어야 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전혀 증거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성기준 씨가 범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 부산에 가는 길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수사는 모두 백지가 되는 것이다. 고강진이 죽던 날 증발한 이화영도 어이없이 끝나 버렸다.
그런데 만일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도 두렵게 생각해 왔던 성기준 공범 가능성이 깨어져 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은 물론 수사 방향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앞이 캄캄할 뿐이다.
박문호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곽 과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말입니다. 성기준이 공범이 아니라면 수사 방향은 어디로 잡힐까요? 오늘 김만호 회장을 만나고 나서는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군요."
"글쎄요. 사태가 그쪽으로 기울어진다면... 글쎄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해수욕장과 비치 호텔을 옆으로 끼고 돌아 이 곳 신생 도시인 해운대로 들어섰다. 5, 6년 전만 해도 이런 건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내 못지 않게 크고 깨끗한 건물들이 꽉꽉 들어차 있고 보지 못하던 호텔과 여관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해운대 갈비집은 해운대의 끝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계절적으로도 관광객이 없는 때라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곽 과장은 문호를 따뜻한 방으로 안내했다.
"저 때문에 폐가 많습니다."
"원 별말씀을. 부산에 오셨으니 제가 모셔야죠. 만일 제가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못 본 척하실 작정입니까?"
둘은 허허거리며 웃고 오랜 만에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주문했다.
"곽 과장님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서울에 전화 좀 걸고오겠습니다."
"거 참, 박문호 씨 어지간하군요. 아, 식사나 하고 일을 보시든지... 자 자, 천천히 들고 소화나 되거든 시작합시다."
곽 과장의 만류에 엉거주춤 서 있던 문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울서 천지 개벽할 일이 생겨도 부산 해운대 갈비나 뜯고 놀랍시다. 요샌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둘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식사가 날라져 오고 반주용 맥주가 몇 병 따라왔다. 둘은 마음을 푸근하게 풀어놓고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식사가 어지간히 끝나자 문호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화 한 번 걸어야겠습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문호는 곽 과장에게는 미안했지만 자꾸만 이상한 예감이 들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문호가 전화를 걸러 나간 사이 곽 과장은 문호의 예리한 판단과 부지런한 성격, 그리고 유창한 화술에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대학강의 시절 알기는 했지만 막상 수사 업무에 부딪치고 보니 일에 임하는 태도나 머리 회전에는 그만 혀가 내둘러지고 말았다. 사람이 겉보기와 속이 똑같구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호가 헐레벌떡 숨가쁘게 뛰어들어왔다.
"곽 과장님 일이 또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채 말도 제대로 못하는 문호를 보고 곽 과장이 벌떡 일어났다.
"뭐가 말입니까?"
"성기준을 체포하려고 수사망을 펼쳐놓고 사무실에서 상황 점검을 하던 부하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답니다. 약 한 시간 되었다는데 그 사람은 그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신부랍니다. 바로 범인을 목격했던 장본이기도 하죠. 이분이 오늘 신문 기사를 읽고 경찰측의 추리에 구멍이 나 있다면서 나를 만나보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 말대로 대전 도착하기 전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걸 자기가 증명해야겠다구요. 절대 아니랍니다. 성기준의 공범혐의는 순식간에 깨지고 우리는 수사 방향을 잃게 된 것입니다."
문호는 창백한 얼굴로 곽 과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몇 시죠?"
"세 시 반입니다."
"서울 가서 신부님을 만나보아야겠습니다. 아무튼 빨리 올라가야겠는데요. 조금 있으면 민 기자와 약속 시간입니다. 만나는 대로 즉시 올라가야 합니다."
문호는 말을 마치자 식탁 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 물러앉았다.






추억의 섬


이른 아침 부산 공원에서 문호와 헤어진 형규는 곧바로 자갈치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장 입구에는 '해안 정비 지도소'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작은 초소가 있었다. 그 안에서 특별히 업무를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초소 안에는 50쯤 되어 보이는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 하나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말씀 좀 묻겠는데요."
"누굴 찾으시죠?"
"아니 그런게 아니구요. 뭣 좀 알아볼게 있어서요. 저 시간 있으시면 제가 커피나 한 잔 살까요?"
형규는 해안 경비 지도소에 있는 다방으로 사람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다방 안은 스피커를 통해 '돌아와요 부산항에...'하는 유행가가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방이 깨끗하진 않았어도 퍽 관록이 있어 보였다.
"여기가 송원 다방이라고 꽤 역사가 깊은 다방이죠. 아, 나 김창호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거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서울에 있는 Q신문사에서 왔습니다. 뭣 좀 취재할 게 있어서요."
"아 그러셨군요. 첫눈에 깔끔하더라니... 그런데 뭘 알아보시게."
"여기 자갈치 시장에서 아주 오래 일한 사람을 소개받고 싶습니다. 혹 그런 분 아시면... 아주 여기서 잔뼈가 굵은 그런 사람으로 말입니다."
"오래 일한 사람이요? 아 여기야 태반이 오래된 사람이죠. 대대로 해먹는 집안도 있는데요. 허기야 나도 여기서 잔뼈가 굵었으니까요."
나이는 들었어도 뼈마디나 얼굴 근육이 매우 강인해 보였다.
바닷가 사람다운 용모가 역력하게 보였다.
"젊어서는 배도 많이 탔는데 손을 한쪽 다쳐서... 이렇게 의수를 했죠. 그러고는 더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잡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 동네야 제 손바닥이나 다름없으니까. 뭐 물어보실 게 있으면 물어 보십시오."
형규는 그에게 커피와 담배를 시켜 주고 부드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박진식이라면 잘 모르실테죠... 왜 영화 배우도 하고 요샌 가끔 텔레비젼에도 나오는 진남포라고..."
"아, 진남포. 알죠 알다마답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 골목에서 자란 사람인데요."
"저 혹시 진남포 학교 시절 친구나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만 한 사람 없을까요?"
"에, 또 보자... 그러니까 덕쇠라고 있죠. 네 덕쇠요. 지금 이 자갈치 시장 이층에서 횟집을 경영하고 있는데... 그 참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세월도 많이 흘렀군요. 그게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그분 만날 수 있을까요?"
둘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자갈치 시장으로 들어섰다. 생선 비린내가 코를 확 찔렀다. 그러나 그 냄새는 역겹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다내음의 특유한 싱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자갈치 시장의 아래층은 각종 어패물이 판매되고 있었다. 어패물 판매소에 있는 층계를 타고 2층으로 오르자 이번에는 찌개, 김치 같은 냄새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큰고 작은 횟집, 식당이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규가 안내된 곳은 '송도 횟집'이라고 붉은 천에 횐 글씨를 써서 매달아 놓은 식당이었다.
"아줌마, 아저씨 어디 가셨어요?"
"요 아래 물건하러 갔는데 금세 올 거예요. 그런데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허허허, 뭐, 그럴 때도 있죠."
김창호라는 사람은 이곳 주인 여자와 잘 알고 있는 듯 인사를 나누었다.
"저 여기 말이죠. 회 2인분하고 매운탕 백반, 그리고 소주 한 병만 주세요."
형규는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담배를 꺼내 막 불을 붙이려는데 건장한 남자 하나가 양손에 무엇인가를 잔뜩 들고 올라왔다, 김씨가 말하던 진남포의 친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구, 김씨 웬일이십니까? 아침부터 해장하십니까?"
"응. 장사 잘 돼?"
"뭐 매일 그렇죠."
"이봐 덕쇠 자네 찾아오신 분이야."
덕쇠라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형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저 서울 Q신문사 기잡니다."
"아 그러세요. 저 덕쇠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그저 덕쇠라고 통하죠. 이거 장사를 하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 잠시 시간이 좀 있으신지."
"시간이야 뭐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형규는 식사를 마치고 소줏잔을 권하며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저 제가 부산에 내려온 것은 다름아니라... 에, 있죠. 진식이라고. 박진식."
"진식이요? 진식이..."
"거 왜 영화 배우하던 진남포말입니다."
"아, 예 진식이 알죠. 국민 학교를 같이 다녔구 중학교 중퇴할 때까지 한집에서 살았죠. 학교 그만두고도 쭉 생활을 같이 했었습니다. 아참 엊그제 신문 보니까 다쳤다고 하는 것 같은데..."
"진식이요? 참 고생 많이 했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홀짝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시고는 부두의 뱃머리 위로 날으는 갈매기를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진남포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들려 주었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진식이가 이곳 부산으로 전학 온 것은 국민 학교 3학년 때였다. 6.25직후였으니까 부산도 한참 어수선할 무렵이었다.
피난민들은 서서히 고향을 찾아 흩어지고 일부는 그대로 남아 정착을 모색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님 여동생과 함께 부산에 내려온 진식이는 부산 영도 국민 학교에 전입하여 덕쇠와 한반에 배치되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덕쇠도 학교에서 힘께나 쓰는 골목대장인 편에 속하게 되었는데 진식이의 출현으로 세력 판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진식이가 전학 온지 삼일만에 도전장을 보낸 덕쇠가 싸움한번 변변히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3학년짜리 진식이는 4학년 5학년짜리까지 건듯하면 두들겨 팼다.
또한 이런 진식이는 가정 환경은 엉망이었다. 조금은 기형으로 생긴데다 장님이기까지 한 여동생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나 아버지는 특별한 벌이가 없어 이곳저곳 떠돌며 푼돈을 벌어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얼굴이 좀 기형으로 생긴 것은 진식이도 마찬가지였으나 싸움 잘하고 성격 좋은 진식이는 그래도 주변 꼬마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진식이는 비교적 착한 편이었지만한번 격해지면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런 성격이었다. 끼니를 굶어도 티를 안 내고 가까운 친구가 어디서 얻어맞고 오면 끝까지 따라다니며 복수를 해주는 그런 의리파 사내였다.
그러한 진식이에게 결정적 불행이 닥쳐온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저기 피부병이 돋고 머리털이 빠지며 시름시름 앓던 그의 아버지가 죽어 버린 후였다. 장례고 뭐고 할 것 없이 바닷가에 아버지를 내버리고 돌아온 진식이는 학교를 때려치고 돈벌이에 나섰다.
돈벌이래야 목판에 미제 껌이나 드롭프스, 아까다마, 카멜 같은 양담배를 담아 거리를 돌아다니며 파는 것이었다. 악발이로 통하는 진식이는 그렇게 점점 자랐다. 자라면서 유달리 크고 굳은 뼈대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뼈대가 영글어가면서 그는 남포동과 자갈치 시장에서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어깨들의 졸개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부산역을 중심으로 서면, 해운대 일대를 주름잡는 깡패 클럽 '파도'파와 남포동, 자갈치 시장 그리고 영도 다리 부근을 장악하고 있는 '자갈치'파가 있었는데 두 깡패 클럽은 부산역의 장악을 위해 적지 않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산역을 장악 한 '자갈치'파는 부산역의 지휘권을 일부를 진남포에게 맡겼다. 진남포는 단신으로 '파도'파의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우두머리 '쌍칼'을 해치웠던 것이다. 당시 이들은 시장 확보를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대결을 벌여 왔는데 그중 가장 큰 노른자위가 '부산역'이었다. 이 부산역의 탈환을 위해 '자갈치'파에서는 '파도' 파의 본거지인 해운대로 진식이를 밀파했다. 정탐의 임무를 맡고 뛰어든 진식이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파도'의 두목 쌍칼을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인근에 있는 트럭을 훔쳐 쌍칼을 싣고 개선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진식이는 경찰에 체포돼 6개월을 살고 나왔다.
그러나 남포동과 충무동 자갈치 시장, 부산역 일대에서의 그의 입김은 거의 절대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6개월을 감방에서 보낸 대가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해운대 일대에까지 미쳐갔다.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늘 쫓기듯 했고 불안은 옆에서 떠나 본 일이 없었다.
치안이 회복되고 사회 질서가 잡혀가면서 깡패 조직도 서서히 붕괴되어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런 거친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마저 죽고 부산에서는 장님 동생과 단 둘이만 남게 되었다.
별다른 피붙이가 없는 진식이는 동생 하나만은 목숨처럼 끔찍이도 사랑했다. 얼굴이 기형인데다가 눈까지 멀어 버린 동생을 데리고 시간만 나면 동백섬으로 데리고 나갔다. 바닷바람도 쏘여 주고 예쁜 옷들도 사주었다,
어려서부터 그가 싸움을 잘하는 데는 선천적으로 힘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장님 동생을 놀려 주는 아이들에게 참지 못하고 덤벼들었던 이유도 있었다. 진식이는 노래도 잘했다.
따뜻한 날이면 동생을 데리고 바닷가로 나가 당시 유행했던 '잘있거라 부산항' '대전발 0시 50분' '목포의 눈물' 등을 불러 주었고 동생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진식이는 오로지 동생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동생이 왜 장님이 되었는지 왜 얼굴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타고 날 때부터 불행하게 태어난 동생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주먹 세계와 동생만을 위해 살아온 그에게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가 닥쳐왔다.
변화의 시초는 그에게 커다란 좌절을 주었지만 결과는 인생을 변하게 할 만큼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소위 '부산 남포 시장 대화재'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남포동 시장의 소위세금 '권리금'이 잘 걷히질 않아 시장 번영회 사람들과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는데 하필 그 날 밤 시장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시장 번영회 사람들은 방화 주범이 진식이라고 진정서를 올렸다.
시장 사람들과 싸우고 돌아온 진식이는 마음이 울적해 동생을 데리고 해운대 동백섬에 데려가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보니 시장에 큰 불이 나 있었고 다음날 새벽 시장 방화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연행된지 사흘 만에 혐의에서 풀려났다. 화재는 어느 가게에서 실화하여 발생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진식이는 자기를 고발한 시장 번영회 사람들과 다시 싸움이 붙었고 이때 액션 배우 물색차 부산에 내려왔던 영화사 사장이며 감독인 최두관 씨에게 발탁되었던 것이다. 부산 건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진식이는 이름의 첫자인 '진'자와 남포동의 두 이름을 따서 '진남포'라는 예명을 만들고 영화계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영화계에 데뷔해서도 한동안은 날렸죠. 여기도 가끔은 내려왔구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전혀 소식이 없었어요. 그러더니 요즈음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글쎄 다쳤다는 기사가... 참 재미있는 친구였는데... 한때는 나도 같이 어울려 지내기도 했죠. 진식이가 서울로 올라가고 나도 그 동네에서 아주 발 씻고 새생활을 시작했습죠. 장가두 들고... 허허허 이렇게 돈벌이가 되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사는 재미가 납니다."
"참 잘하셨어요. 그래 진남포는 요즈음 전혀 부산에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고 또 전에도 부산에 오면 들렀기 때문에 만일 부산에 드나들었다면 한 번도 안 찾아올 리가 없죠. 본 지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무슨 별다른 성격 같은 건 없었습니까?"
"지금 말씀 드린 그대롭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동생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대들고요. 또 한번 흥분하면 이성을 잃는 포악함이 있죠. 그러나 본디 심성은 참 착해요. 또 보기보담 머리가 아주 좋아요. 언제 알았느냐 하면요... 에, 해운대 '파도'파 하고 싸울 때 알았어요. 귀신같이 작전을 짜는데 개들 진식이 작전 때문에 꼼짝 못했어요. 공부는 못해도 머리 하나는 참 비상해요."
소줏잔을 치우고 일어나며 형규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그들은 진남포가 회복되면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형규는 풋풋한 비린내가 나는 자갈치 시장을 뒤로 하고 남포동으로 들어섰다.
옛날에 몇 번인가 와 본 기억은 있지만 그동안 이곳도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옛날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남포동에는 영화관 여섯 개가 집결해 있었고 크고 작은 수퍼마켓과 식당들이 거리를 흥청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형규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서울 명동이 감상적인 낭만을 주는 거리라면 부산은 바로 이 남포동이 그런 거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이곳 부산을 추억의 거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 거리를 주름잡던 진남포, 그리고 천형의 불구인 여동생 박영숙, 두 남매의 불행한 과거가 깔려 있는 남포동 거리, 그러나 거대한 빌딩과 환락의 거리, 즐겁게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두 남매가 걸어온 불행한 발자국을 기억도 하지 못하는 듯 행복하게만 보였다.
이리저리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던 형규는 문득 박영숙이 떠오르자그가 시체로 발견되었던 동백섬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살의 상황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 곳을 취재하자면 먼저 남부 경찰서를 방문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판단이 서자 지체하지 않고 빈 영업용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 아저씨. 남부 경찰서로 갑시다'하고 방향을 정해 주자 택시는 남포동을 빠져 대한 통운 건물과 부산역을 지나 송정동을 향해 달렸다.
군데군데 파헤쳐진 지하철 공사장으로 막히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더니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추어섰다. 새로 지은 듯 깨끗하고 큰 건물이었다. 남부 경찰서의 현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형사과로 찾아갔다.
형사과 사무실에는 네 명의 형사가 앉아 있었고 이들 중 두 명은 젊은 여인과 남자를 취조하고 있었다. 책상 맨 끝에 앉아 있는 사복을 입은 형사에게 다가갔다.
"말씀 좀 여쭤 보려는데요?"
"어디서 오셨죠?"
형규는 아무 말 없이 수첩을 꺼내 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자기의 신분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신분증을 보여 주고 받아 보는데 익숙한 형사과 사람들이 한눈에 척 알아보고 일어났다.
"아, Q신문에서 오셨군요. 요샌 지방 주재 기자들이 없어서. 기자 분들 본 지도 꽤 오래 됐는데요. 자, 앉으시죠. 그런데 무슨 일로..."
형규의 신분을 확인한 형사가 의자를 당겨 주며 앉으라고 권하고 형규는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꺼내 권했다.
"취재 좀 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혹 기억이 나실는지? 왜 요전 해운대 동백섬에서 발견된 여자 장님 시체 건 말인데요?"
"아, 그건 제가 알고 있습..."
말을 하려다 갑자기 멈춘 형사가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가 약 5, 6분 후에 들어왔다.
"저, 저의 계장님께서 좀 뵙자는데요."
담당 형사는 상대가 기자인 만큼 윗사람에게 보고를 하고 오는 것 같았다. 조금 후 키가 작고 단단하게 보이는 40대 초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 말씀들었습니다. 앉으시죠."
일어서려는 형규에게 의자를 권하고 따라 앉으며 사환 아이에게 커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Q신문에 계시다고요. 좋은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런 지방에까지..."
"감사합니다. 사건 취재 좀 할 게 있어서요. 왜 엊그제 탤런트 고강진이 경부선 열차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을 따라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에, 다름아니라 어저께 밤에 동백섬에서 발견된 여자 장님 시체 말입니다, 좀 자세히 알아 보려구요."
"아, 그 장님 시체 말이군요. 그 시체는 인근 주민이 발견했습니다. 어제 아침 운동삼아 동백섬에 올라갔던 주민이 시체를 발견하고 해운대 바다 파출소에 신고했죠. 파출소에서는 관할 경찰서인 저희들에게 보고했구요. 보고에 의하면 사망 추정 시간은 새벽 두 시경 같다 하구요. 위액에서 다량의 수면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합니다. 약병이 있으니 자살은 틀림없답니다. 담배 성냥갑, 약간의 돈과 지갑 하나가 소지품의 전부였습니다. 서울 무슨 안마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는데 거 누구더라... 무슨 배우 동생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 시체를 시립 병원에 보관시켜 놓았습니다."
"그 외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뭐,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이 밝혀진 건 없구요... 처음엔 저희들도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 장소가 좀 험했습니다. 바위가 가파르고 거칠어서요. 그래서 타살체가 아닌가 하고 긴장하고 있는데 밤중에 그곳으로 가는 장님 여자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비치 호텔을 찾아가는 안마사로 알았답니다."
형규도 그의 자살설에는 이의가 없었다. 문제는 그가 타살이냐 자살이냐가 아니고 무슨 이유로 이 험한 바위까지 와서 죽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가 죽은 이유를 알면 진남포가 왜 피습당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고강진과도 무슨 연결이 있을 것만 같았다. 진남포를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진남포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어쨌든 진남포의 여동생 즉 여자 장님 안마사 박영숙의 죽음은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었다.
핸드백에서 나온 소지품 이외에는 이렇다 한 것이 없으니 경찰측에서도 그저 염세자살 정도로만 처리해 버렸고 그 이상 무엇을 밝혀낼 수도 없었다, 형규는 형사 계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남부 경찰서를 나왔다. 경찰서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는 301번 버스가 서있었다. 해운대 해수욕장행 버스였다.
뛰어가서 차를 타자 이내 부르릉하며 떠났다. 차에는 안내양이 없었다. 운전 기사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운전 기사가 자꾸만 돌아보았다. '왜 이러지'하고 앉아 있는데 드디어 기사가 한마디 던져 왔다.
"손님, 왜 차비 안 내세요?"
"네?"
기사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며 다시 차를 몰았다.
"차비, 왜 안 내느냐구요?"
"아, 네. 얼마죠?"
"350원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형규가 주머니를 뒤져 지불했다.
'제길 촌놈 만드네' 주위 사람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자 창 밖만 내다보고 앉아 있었다.
눈에 익은 비치 호텔이 보이고 호텔을 지나 두 정거장을 더 달린 후 차는 멈추어섰다. 거리를 빠져나와 해운대 바닷가로 나왔다.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바닷바람이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서있는 조망대와 MBC 공개홀 건물들이 쓸쓸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바닷가에는 신혼인 듯한 젊은 커플들이 겨울 바다를 거닐며 즐기기도 했다. 웬일인지 마음이 아주 평화로웠다. 철썩이는 바닷소리와 끼웃거리는 바다물결 소리까지 마음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살고 죽는 문제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순간이나마 겨울 바다와 마주서서 밀려왔다 가는 파도를 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게 했다. 형규는 자기가 좋아하는 J 시인의 '바다'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나의 바다에는
지난 겨울 죽은 갈매기
살아 끼웃거리고
가슴 차 오르는
파도에 어깨 떨며 익사하는
섬 하나 묻혀갑니다.
타오르는 노을 보며
천천히 죽음을 연습하는
나의 바다에는
파도처럼 살고 죽는
의미들로 가슴 충만합니다.

진남포 여동생이 죽은 곳은 비치 호텔과 인접한 동백섬 바위 덩어리가 뒤엉켜 있는 곳이었다. 파도가 간헐적으로 바위를 할퀴고는 물러갔다, 제일 크고 둥글며 사람 두엇이 놀기에 적합한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이 곳이 장님 여인 박영숙이 자살한 곳이었다. 그의 불행한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얼마나 많은 신혼 부부들이 이 바위에 와서 젊음과 환희를 만끽했을까. 그러나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겨울밤 더듬거리며 이곳까지 찾아와 애절한 생애를 매듭지은 장님 여인, 스스로 불행한 생애와 싸우며 살아오다가 마침내 이 곳에 와서 바위와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두어들인 여인, 누구라도 죽는 것은 슬프다.
나이 서른이 가까워지도록 남자와 몸 한번 섞어 보지도 못하고 거울을 보며 화장 한번 못해 본 이 불행한 여인의 운명에는 형규도 가슴 뭉클한 아픔이 솟아올랐다. 이 여인을 찾게 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아 이 곳까지 와서 숨을 거두게 했는가...
경찰관과는 별도로 이 사건에 매달린 형규는 어떻든 이번 사건을 심층으로 취재해서 밝혀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바위숲을 나온 형규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간은 아직 14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걸렀는데도 시장기는 돌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나와 비치 호텔 커피숍으로 되돌아왔다.
쓸쓸하기는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커피숍 흘에는 외국인 팀 두엇과 그리고 한복으로 정장한 여인과 말쑥한 차림의 젊은이, 한눈에 보아도 신혼 부부인 듯한 커플 몇몇만이 있을 뿐이다.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에는 푸른 남해 바다의 절경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가 도착되는 동안 서울 본사로 전화를 걸었다.
"나 민형규요. 사회부 좀 대 주세요."
DDD전화는 막바로 교환을 불러냈고 교환의 목소리는 언제나 다름없이 카랑카랑 울려 왔다.
"예, 사회부입니다."
"아, 나 민 차장이야. 별일 없는가?"
"네, 민 선배님. 고생 많죠...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한동안 잠잠하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민 선배님. 아침에 누가 찾아왔었어요. 일찍 왔다갔어요. 열 시쯤..."
"열 시쯤? 누군데."
"신부님이었어요."
"신부님? 아니 문화부로 가실 분이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아닙니다. 민형규 씨 누구냐고 묻던데요. 이번 고강진 사건 때문에 왔다는 거예요."
"고강진? 신부가?... 아, 한 분께서 범인을 목격했다던 그 사람. 그런데 그분이 왜 날 찾지?"
"그래서 제가 여쭤 봤어요. 지금 민형규 씨는 부산 출장이라고요. 하실 말씀 있으면 제게 하라고요. 그랬더니 신문 기사를 읽고 찾아왔다는 거예요. 신문 기사와는 맞지 않는 게 있다구요."
"뭔데? 뭐가 안 맞는다는 거지?"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겠는데 왜 거 화장실 사건 있죠."
"응, 화장실에 범인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던 거."
"예, 바로 그 문제랍니다. 마침 사건 현장에 자기가 있었고 또 목격자로 진술까지 했다던데요."
"맞아, 그 사람 그런데 뭐라고 하던가? 아, 잠깐 메모 좀 하고."
형규는 어깨를 움츠려 턱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꽂고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그래서, 말해."
"서울 오시면 자세히 말씀 드리겠지만 수사하느라고 법석을 떨때 이 신부님이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전 도착하기 직전에는 화장실에 아무도 없었다는 거죠. 신부님이 연락처까지 적어놓고 가셨어요."
"뭐야, 어쨌다고?..."
"..."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그러나 사정은 통화처럼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연 사흘 동안 마지막 기대를 걸고 뛰어온 목표물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신부가 자기발로 말하고 갈 때는 그 나름대로 생각도 많이 했을 것이다. 경찰이나 신문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고강진 피살체가 열차에서 발견된 후 오늘이 삼 일째, 모든 희망은 성기준이 공범이며 그가 진범을 화장실에 은닉시켜 준 것으로 사건을 좁혀왔고 또 성기준은 김만호와 밀착되어 그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사건으로 보고 이곳 부산까지 내려오지 않았는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올 때 일부러 침대차를 이용하여 조사해 보았지만 범죄 수사의 일인자인 문호나 형규 자신도 화장실 도피 방법 외에는 범인이 증발할 가능성을 전혀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정말 마술사란 말인가. 연기와 함께 사라진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커피를 마실 생각도, 일어나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도 무엇하나 머리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혼돈이 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디까지 어떻게 무엇을...
어지럽게 머리 속을 헤매이는 의문들이 머리를 확확 조이며 올 뿐이었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형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써늘한 초겨울 바람이 여전히 맵게 불어 대고 있었다.
해운대 해수욕장 망루가 있는 활 모양의 긴 방파제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약 10분을 걷자 마음이 약간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계를 들어다 보았다. 세 시 삼십 분이었다.
-- 자, 형규 힘내라고 힘을 좀더 침착하게 여유를 가지고 말야.지금 넌 무엇인가에 속고 있어. 차분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처해 알았지 -- 독백처럼 자신을 타이르며 발길을 해운대 시가지로 옮겼다. 비로소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운대 갈비집,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신발을 벗던 형규가 깜짝 놀랐다. 낯익은 구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이 구두 주인 어느 방에 있지?"
"네, 별실에 계시는데요."
"나, 그리로 좀 안내해."
종업원의 뒤를 따르며 이 시간에 문호가 왜 여기에 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형규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던 문호가 벌떡 일어나 반겨 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부산 바닥에 점심 식사할 데라곤 여기밖에 없는 모양이지... 자, 잘 왔어. 앉아!"
"이봐, 자넨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이분은?"
"아, 인사하시죠. 좀전에 말씀드렸던 Q신문 민형규 씨입니다. 이쪽은 부산 시경 곽영근 형사 과장님이시고..."
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합석했다. 식탁이 치워지고 새로 상을 보았다. 형규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사건의 새로운 전개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둘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서로 자기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서서히 마음을 정리하며 꺼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형규가 식사를 하는 동안 문호는 소파에 앉아 서울과의 전화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형규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섰다.
"자, 어디가서 커피나 한 잔 할까?" 형규가 구두끈을 조이며 말했다.
"그래? 난 지금 바로 서울에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나도 서울가는 게 급해질 일이 생겼어, 그렇지만 꼭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
"좋아, 그럼 나가자구."
곽 과장이 세 명의 식대를 지불하고 두 사람을 극동 호텔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극동 호텔 커피숍은 호텔의 좌측 끝 해변과 마주한 위치에 있어 시원한 바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홀 중앙에 자리잡은 세 사람은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형규가 담배를 꺼내며 천천히 말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문호, 아주 중요한 소식이 들어왔는데 절대 놀라지마. 아직 완벽한 정보라고 장담은 못하니까 말야."
"정보? 새로운? 부산에서 취재한 거야?"
"아냐, 부산엔 아무것도 없었어. 우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성기준 공범 혐의가 깨질 것 같아."
형규가 말의 서두를 꺼내며 문호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나 전혀 동요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형규측에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늘 김만호 씨 집에 간다고 했었지. 그래 성기준 씨도 만났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던 문호가 형규를 바라본다.
"성긴준 씨는 김만호 씨 댁에 없었어. 나도 성기준 씨에게는 끝까지 희망을 걸었었지. 그런데 자네가 한 말은 뭐야. 성기준 씨한테 공범 혐의가 없다는데..."
"사건 현장에 있던 신부가 신문사에 왔다갔다는 거야. 내 기사를읽고..."
"야, 알겠어, 그 신부님은 내 사무실에도 왔다갔어... 그럼 뭐 다 알고 있는 얘기구만.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문호가 수첩을 꺼내 여기저기 훑어보고 있었다.
"성기준 수배는 계속하라고 지시했어. 아직 포기할 수는 없어. 신부라고 해서 수사권 밖으로 세워놓을 수는 없단 말야. 내가 왜 그 말을 하느냐 하면 말야... 에... 아까 문득 생각이 났는데 그 신부말야 내가 처음 목격자 진술을 받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범인이 짐을 끌고 열차에 올라온 후 짐을 침대에 밀어 넣고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애꾸는 아닌 것 같았다'는 거야. 그러더니 나중에는 '글쎄 자기가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죠' 하고 얼버무려 버렸다구. 분명한 태도가 아니었어. 올라가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이 신부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
"그럴까?"
형규는 이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이걸 한 번 생각해 봐."
문호는 조금 전 형규가 식사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했던 가정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호는 일단 신부도 공범의 일원이라는 가정 상황을 설정했다.
그의 논리는 아주 적절해서 곽 과장이나 형규도 그저 고개나 끄덕이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최초, 범인은 성냥이나 라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작은 단서라도 남기는 게 불리하고 주머니에 무엇을 넣는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기준과 무엇을 의논하기 위해서는 구실을 만들어 그의 침대로 들어가야 했다. 그 구실을 담뱃불 빌리는 것으로 만들었다. 둘은 담뱃불을 나누며 무엇인가 정보를 교환했을 것이다, 여기서 제 2의 공범자 신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열차가 천안을 출발하기 전에 범인에게 불붙은 담배를 넘겨주었다. 목사나 승려와는 달리 신부는 술, 담배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설혹 누군가의 눈에 뜨이더라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은 천안에서 한 대의 담배를 더 피울 기회가 생겼다.
술은 마실 수 없으니 담배라도 피워서 마음이 진정하길 바랬을 것이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시체를 끌고 가는데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열차는 순조롭게 대전에 도착했다.
범인이 제일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 다음 성기준이 화장실로 들어가 시간을 지체하다가 승무원이 표를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시간을 맞추어 복도로 나왔다. 시체가 발견되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서 이번엔 신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만일 누군가 화장실을 조사하려고 하면 자기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어 일을 간단히 끝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범인을 숨기기 위해 이중 트릭을 쓴 셈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경찰에서 범인이 숨어 화장실에 있을 가능성을 추리해서 성기준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제 3자인 자기가 나타나서 '내가 그 후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진술을 하면 성기준은 궁지에서 빠져나오고 사건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범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완전 범죄'를 가능케 했다, 범인이 탈출한 시기와 방법은 이렇게 추리된다. 즉 대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시체는 발견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시체에 정신이 없을 동안 신부의 엄호를 받으며 살그머니 화장실을 빠져나와 출입 승강구로 갔다.
열차 내에서는 소동이 일어나고열차는 역에 도착하기 위해 서행을 했다. 이때 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끝난 셈이 된다. 대전에 열차가 정차했을 때는 이미 범인은 대전역에서 멀리 사라진 후가 될것이다.

"애꾸를 애꾸가 아니라고 증언한 사람은 성기준과 신부였거든. 그리고 신부는 담배를 피워도 어색하지 않고..., 결국 범인을 은닉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벽을 쌓아놓는 거야. 공범을 한 열차에 두 사람이나 태웠다면 이건 틀림없이 배후가 있어 큰 배후가... 무엇보다 빨리 신부를 알아봐야 돼. 형규, 어떻게 생각해?"
"글쎄, 자네의 논리에 빈틈은 없어 신부의 신원이 애매하거나 공범 가능성의 소지가 있다면 그 논리는 틀림없겠지."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날, 그러니까 11윌 30일 신부는 대구에 간다고 했거든. 그의 주민등록증상 본적은 대구직할시였어. 주소도 대구로 되어 있고 그런 사람이 다시 서울에 올라와 신문사로, 경찰서로 쫓아다니며 범인 은닉의 가능성을 깨뜨리는 논리를 알려 주며 다니는 게 어색하지 않아? 나도 경찰 밥을 먹고 있지만 경찰서나 신문사에 찾아다닌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더구나 이런 살인 사건으로 말야."
"..."
"..."
형규와 곽 과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신부와 성기준이 공범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완강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의 조직적이고 빈틈 없는 논리에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또 범인이 사라진 미스터리를 성립시키자면 이 두 겹의 트릭과 배후 인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전화 두어 군데 걸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뚜벅뚜벅 걸어 전화기 앞으로 갔다.
"아, 나 박문호야. 최찬일 좀 바꿔."
"네, 접니다. 부산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잘 되어 가는지요."
"음, 여긴 잘 풀려가고 있어. 그것보다 우선 급한 지시할 테니까 차질 없도록 하라구. 첫째 성기준을 어떤 방법으로든 연행해 오고, 또 신부 말야 낮에 왔다갔다고 하던... 응, 그 신부 신원 파악 빨리 하고 소재를 알아 놔. 확실하게 알았지. 그리고 나 오늘밤이라도 올라갈 거야. 사정이 달라졌어, 그럼 내일 만나자고."
문호는 수화기를 놓고 또 어딘가 전화를 걸어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번째 전화가 끝나자 형규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또 전화를 걸고는 돌아왔다.
"일단 성기준을 연행하라고 했어. 그리고 신부 신원 확인을 하라고 했고, 그 다음 김 회장 집에 전화 걸었지. 김 회장은 종교가 없는데 부인이 천주교 신자야. 또 애들은 절에 다니고... 여하튼 종교 하나는 엉망이더군... 마지막으로 대전 경찰서에도 걸었어. 만일 범인이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뛰어내렸다면 반드시 어깨나 팔 한 쪽쯤은 부러졌을 거야. 인근 병원이나 접골원을 샅샅이 뒤지라고 했어. 꼭 나타날 거야."
문호의 말을 듣고 있던 형규는 수첩을 꺼내 지금까지 취한 그의 조치를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 적어놓은 분량은 다른 어느 사건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노트 어디를 뒤져 봐도 범인의 근거나 사건 해결 방법은 눈에 띄질 않았다.
“곽 과장님, 서울행 열차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서울 가는 거야 십 분마다 한 대씩 있죠. 지금이 네 시 사십 분."
"자, 그럼 일어납시다. 서울 올라가면서 좀더 생각이나 해보게."
문호가 일어서며 곽 과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원 별말씀을 제 차로 부산역까지 모셔다 드리죠. 큰 힘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하여 일행을 차에 태웠다.
세 명은 극동 호텔을 나와 다시 부산역으로 돌아왔다. 열차는 10분마다 연이어 있었으나 특급 열차는 2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곽 과장은 돌아가고 두 사람은 2층 그릴로 올라갔다.
"도대체 어떻게 돼 돌아가는 거야?"
형규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어떤 놈이든 잡혀만 봐라. 이번엔 곱게 안 보낼 테니. 에이, 이거야 원 이렇게 일이 꼬여서야... 그래, 오늘 뭐 좋은 거 취재 좀 했어?"
"응, 진남포 어릴 때 생활을 알아봤지. 그 친구도 참 어지간히 불행한 친구더군."
"불행? 어떻게?"
"부모가 다 이상한 병으로 죽었어. 어려서 말야. 동생 하나 있는 건 그나마 장님에다 기형아이고. 왜 진남포도 약간 기형아잖아. 그런데 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니 거지처럼 살아온 거지, 다행히 진남포가 주먹이 세고 담력이 강해서 뒷골목 생활을 시작했고 그래서 생활에는 좀 여유가 생겼지, 영화계에 데뷔해서도 젊은 시절은 좀 괜찮았나 봐, 액션 배우로. 그런데 지금은 단역이나 맡아하고 동생은 안마사로 생계를 꾸려가는데 이번 사고가 터진 거야. 겨우 자리 잡으려는 판국에 말야... 불행이 꽁무니에서 안 떨어지나 봐."
"형규 어떻게 생각해?"
"뭘?"
"고강진 사건과 진남포 사건, 아무래도 별개 사건이 아닐까?"
"..."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건은 우연의 일치 같애. 고강진 사건에는 김만호, 성기준 그리고 가짜인지도 모를 신부 이렇게 셋이 얽혀 있는 게 분명해. 그런데 이 틈에 진남포가 끼어들 자리가 없단 말야. 내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긴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진남포 고향과 김만호가 한 고향이라는 것, 그리고 성기준이 부산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 진남포 동생이 부산에까지 내려와서 자살한 점... 이게 묘하단 말야."
"아, 문호 내가 말해 준다는 게 그만 깜박했는페 진남포 동생 말야. 불행했던 어린 시절 오빠인 진남포가 늘 동백섬에 데리고 와서 놀았나봐, 오빠 생각을 하며 자살한 게 틀림없어. 문제는 왜 죽었느냐 하는 거지. 이번 진남포 사건은 본인들만 알고 있는 거 같애. 피습 당한 이유나 상황도 진남포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있잖아. 거기다가 또 얼마나 동생 걱정을 하고 있어? 이건 말할 수 없는 깊은 사연이 숨어 있다는 뜻이야."
갑자기 그럴 안이 썰렁해지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열차 시간이 다 되었는지 여기저기서 일어서며 그릴을 빠져나갔다.
둘도 일어나서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청년 하나가 다가와 그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 문호와 형규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청년을바라보았다.

한편 문호와 곽 과장이 한바탕 설치고 돌아간 김 회장 집은 갑자기 미묘한 분위기에 횝싸이게 되었다. 세 사람이 응접실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가족들은 다른 방으로 쫓겨가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탤런트 고강진이 김만호의 아들이니 그가 피살당한 것이 성기준과 김만호의 조종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얼핏얼핏 들었고, 참다 못한 큰아들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 항의까지 했지만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의 제지로 이나마 항의도 좌절됐고 가족들의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측이 밝힌 아버지의 추문에 대한 분노와 고강진이 과연 자기들의 동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잠시 집안이 시끄러워진 것이다. 김 회장은 아예 소파에 몸을 파묻고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버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덤벼든 것이 막내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재산에만 욕심을 내는 형들과는 달리 사교 모임이나 취미 생활을 더 존중히 해서 귀공자로 널리 알려진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 어떻게 된 건지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죠. 저희들 보고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하라시는 겁니까?"
"뭘, 자꾸 말하라는 거야. 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아버지 뒤에서 그는 집요하게 대들었다.
"이건 우리 가문에 대한 문젭니다. 전 잘 모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처신해 오셨는지 또 어떤 사고 방식으로 살아오셨는지. 그러나 지금까지 저는 아버지를 존경해 왔고 우리 집안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전 지금 다녀간 사람들과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젠 모든 것을 충분히 알아들을 나이는 되었습니다.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도 가족의 일원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고강진이 아버지의 아들이 맞습니까? 또 그가 죽은 게 아버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까?"
"..."
김 회장은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한 생애를 통해서 커다란 실수는 누구에게나 한두번쯤 있게 마련이다. 그 실수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갈라지기도 한다.
김만호 자신은 지금까지의 사회생활에서 비교적 실수 없이 잘 처리해 왔으며 작은 실수라도 두 번 다시 거듭되는 일이 없었다.
사업도 교묘한 수단을 부리거나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착취해서 성장시키는 비굴한 방법은 쓰지 않았다. 성실하고 끈질기게 버티어 몇 번인가의 위기에서 빠져나와 오늘의 대기업을 성장시켜 놓은 것이다, 굳이 실수가 있었다면 뒤늦게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은 또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그는 김 회장에게서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간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생활 기반이 잡히고 수입은 많고 어쩐지 인생이 자꾸만 초조해지는 그런 40대 후반, 지금 시대 같으면 한참 정력적으로 일할 그런 나이라고도 생각되어지겠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가 못했다.
여인이 말없이 떠나가고 난 후 한동안은 찾아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불쑥 사진 한 장 들고 찾아온게 바로 고강진이었다.
처음 그가 찾아왔을 때는 '신인 영화 배우가 왜 날 찾지' 하는 의아심으로 맞아 들였는데 그가 꺼내놓은 사진을 보고 그만 심장이 멎는 충격을 받은것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그가 바로 말없이 떠난 옛날의 그 여인이었던 것이다. 여인의 팔에 안겨 고추를 드러내놓고 방긋이 웃는 아이가 장본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건달의 그렇고 그런 소행으로 오해도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차차 의심을 풀었던 것이다. 그 후로 두어 번 더 찾아왔고 편지도 보내왔다. 어머니의 소재를 물어도 말도 없었다. 무조건 호적에 입적시켜 달라는 고집뿐이었다.
김 회장은 때아닌 사태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이번엔 그 아들이라는 고강진이 피살당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일이 없었는데 급기야 경찰이 개입되고 그의 피살 혐의가 본인에게로 접근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에게는 이렇다저렇다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속으로만 고민하고 있었다.
"얘 진구야, 죽은 고강진 사건은 나와는 아무 관계 없어. 그러니 애비를 믿고 물러가 있어. 내가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래."
"아버지, 확실하죠. 확실하다고 말씀해 주시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공연히 오해받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뭐라구?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거야. 오해는 그 사람들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풀어지게 마련이야. 그러면 다 끝나는 거지. 지금 네가 나서서 뭘 어쩔 거야."
"아버지, 이건 집안과 회사의 명예에 관한 문젭니다."
김 회장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마당에 서있는 승용차의 시동 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고 잠시 후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집을 뛰쳐나온 진구는 시경 곽영근 과장 사무실로 찾아갔으나 좀체로 돌아오질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그가 시경을 나와 부산 중심가의 코스모스 호텔 바아를 찾아갔다. 바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진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벌떡 일어났다. 김진구, 그가 부산의 대재벌 김만호의 아들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구가 구석에 앉아 술을 주문했고 엉거주춤 서있던 몇 사람이 그 주변으로 몰려 왔다.
"아이구, 공자님께서 무슨 일로 대낮에 여기까지...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안색이..."
"아, 괜찮아, 자 다들 앉지. 오늘은 내가 한 잔 살게."
"아이구, 그럼... 이게..."
그들은 진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어이, 여기 위스키 로얄 두 병 하고 안주 좀 가져오라구... 어때 요즈음 나이트 클럽 신장 준비는?"
그중 가장 뚱뚱해 보이는 사람이 이 곳 나이트 클럽 지배인이었다. 이 나이트 클럽은 금년 크리스마스 때 신장 개업을 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라운지를 재보수하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며 개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말도 맙쇼, 일자는 얼마 안 남았는데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엉망진창? 왜..."
"아 ! 이 부산 바닥에 우리만큼 시선을 해놓은 데가 또 있나요. 일본 관광객 유치하려구. 국제 규모의 시설을 설치해 놓고 적어도 개업식만은 멋지게 한 판 벌일 계획이었는데..."
이때 웨이터가 양주와 안주를 들고 왔다. 진구는 서슴없이 따라마시고는 일일이 한 잔씩 권했다, 모두들 황송한 듯 두 손으로 받아 마셨다.
"그런데?"
"아, 그런데 쇼 스케줄이 펑크가 났지 뭡니까?"
"스케줄에 펑크가 나?"
"네, 뭐냐 하면요. 이번 개업 기념 공연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의 스타를 교섭했거든요. 서울에서 뛰면 더 많은 개런티를 받을수 있을텐데 왜 부산에까지 내려가느냐고 완강히 거절하는 걸 서울보다 더 좋은 조건이다. 지방 예술도 도와 달라 하는 고집으로 겨우겨우 교섭을 끝냈죠. 아 그런데 이게 그만 뒈져 버렸잖아요."
"뒈져? 누군데... 혹시?"
"아, 거 왜 있잖아요. 고강진이라는 탤런트 말입니다, 요즈음 한창 인기 끌고 있는... 계약금을 4백만 원이나 주고 예약을 해왔는데 글쎄. 이거 참..."
"고강진? 그 사람을 불렀다고?"
"네, 하필이면 그 자식을 불러가지고... 아 거기다가 이번 개업쇼에 고강진을 무대에 올린다는 소문이 나니까 왜 태종대 입구에 새로 지은 호텔 있잖아요. 스타(Star)호텔이라구요, 이번엔 거기서 또 손을 댄 거예요. 우리가 주기로 한 개런티의 곱을 주겠다고요. 그 호텔은 이번 크리스마스 때 개관식을 겸해서 나이트 클럽도 개업하겠다는 거였죠. 그 나이트 클럽은 호텔에서 직영하기 때문에 거액을 투자한 거예요. '부르버드' 나이트 클럽. 뭐 시설은 우리보다 나을게 없지만 워낙 물량 지원이 대단해서 경쟁이 붙은 거예요. 우리두 외형이야 호텔 직영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 사장님이 뒤로 권리금을 내고 따로 경영하고 있거든요. 교통부에선 호텔 부대 시설 중 특히 나이트 클럽은 호텔에서 직영해야 된다는 걸 법적으로 명시해 놓았지만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러니 재정적 뒷받침이 스타 호텔을 못 따라 가는 거죠. 사장님이 서울에 열 번도 더 올라갔습니다, 다른데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우리하고 계약한 거니까 다른 데는 출연하지 말라고요. 스타에서는 또 거기대로 '모든 책임을 자기들이 다 질테니 걱정말고 계약하자, 계약금 위자료를 다 물어 주겠다. 그러니 부르버드 무대에만 서 달라'고 했죠. 조건도 크리스마스와 송년 이틀만 서 주면 우리의 세 곱을 주겠다고... 어휴 말도 마세요. 사장님 입이 다 부르트고 우리도 서울에서 아주 진을 치고 며칠씩 보냈죠. 개똥 참외도 먼저 맡은 게 임자라고 겨우 겨우 결정해서 포스터까지 붙여놓고 서울 일간지에다 광고를 때렸는데 이번엔 스타에서 아우성이었죠. '어디 이번 개업쇼 곱게 치루나 보자' 하고 벼르더라구요. 그러면 뭐 합니까? 부르버드나 우리나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으니 말입니다... 개새끼들 스타 호텔 놈들 지랄을 해댔으니 재수 옴붙었지 뭡니까... 그 새끼들 심지어는 협박까지 해왔어요. '어디 무대 곱게 올리나 보자' 하구요."
이 말을 듣던 진구가 말도 끝나기 전에 벌떡 일어났다.
"뭐? 부르버드에서?"
"네, 아이 그런데 왜?"
"여기 술값 내 앞으로 올려 놔."
어리둥절하는 주위 사람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코스모스 호텔을 뛰쳐나간 진구는 스타 호텔에 들러 총지배인을 만나보고 다시 경찰서에 들렀다. 비로소 돌아온 곽 과장을 만났다.
그러나 고강진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서 내려온 형사는 서울로올라가기 위해 부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그릴까지 찾아 온 것이었다.

"저, 박 형사님 얘기 좀 합시다."
"자, 우선 앉으시죠... 무슨 일로."
"무슨 일이건 뭐건 당신들 그럴 수 있소? 해도 너무하지 않소."
"무슨...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자 흥분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흥분? 내가 흥분하지 않게 됐습니까? 나 원 세상에 아니 천하에 김만호를 뭘로 보고 이러십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굽니까?"
진구는 문호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비로소 형규가 있음을 의식했는지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분요? 괜찮습니다. 서울 Q신문에서 오신 기자입니다."
"기자? 나 박 형사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좀 피해 주시겠습니까?"
형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차 출발 시간은 이제 불과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형규가 시계를 보며 문호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귓속말로 형규에게 무엇인가 말해 주었다.
열차표는 얼마든지 환불 받을 수 있고 또 고속버스 편도 시간은 충분하니 서두르지 말자는 의견이었다. 문호는 진구의 말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형규를 기다리게 하고 다시 진구와 마주 앉았다.
"박 형사님, 당신이 돌아간 뒤에 제가 아버님께 정식으로 여쭤 보았습니다. 과연 고강진이 아버지의 사생아냐, 또 고강진 피살 사건에 아버지가 관여되어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고강진과의 혈연 관계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적어도 피살 사건과는 절대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혐의 받을 놈들은 빠지고 말입니다."
"진짜 혐의?"
"네, 진짜 말입니다."
"진짜 혐의가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까? 누굴 모함하거나 쓸데없이 곤경에 빠지게 만들면 곤란합니다."
"좋소, 그 보담도 아버지 건에 관해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네들이 왜 아버지를 뒤쫓고 있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 드리죠. 첫째 이유는 고강진의 진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 즉 김만호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점이구요. 둘째, 고강진이 자기의 아버지 즉 김만호 씨에게 자기 호적을 입적시켜 달라는 편지를 여러번 보냈고 또 협박까지 한 사실이 밝혀졌구요. 다음 가장 강력한 공범자로 몰리고 있는 성기준 씨가 김만호 씨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맺어져 있다는 사실, 이 때문에 저희들이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고강진과 아버지는 진짜..."
"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선 고강진이 보낸 각종 편지를 소각하려다 실패한 사실이 있구요. 또 고강진, 그의 어머니, 김만호 씨의 혈액형을 조사한 결과 틀림없는 아버지로 판명되었구요. 마지막으로 더 큰 이유는 김만호 씨가 이 사실들을 인정하고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
"자, 그럼 말씀하시죠.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뭡니까?"
"아무튼 너무 흥분해서 미안합니다."
진구는 담배를 한 대 피워물며 코스모스 호텔과 스타 호텔의 부르버드 나이트 클럽 관계와 그 알력을 말하며 고강진 피살 사건은 스타 호텔측의 장난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비약해서 생각할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홀히 넘기지는 않겠습니다. 이번 두 호텔 사건은 곽영근 과장에게 의뢰하겠습니다."
김만호의 인격이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서 쫓아온 김진구의 당연한 정보 제공이었다, 또 그것은 그럴 듯한 발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타 호텔이 아무리 개관 기념식이 중하고 또 배우 하나를 놓쳤다고 해서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만일 피해를 입히겠다면 고강진측보다는 코스모스 호텔에 상처를 입히는 게 상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말 소홀히 넘어 갈 문제도 아니었다. 김진구, 김만호의 가장 똑똑한 막내아들 그를 설득시켜 마음을 진정시킨 문호는 진구의 권유대로 그의 차를 이용해서 고속 터미널로 방향을 돌렸다.
옛날에는 시민 회관 근처에 있던 것이 서면 끝으로 장소를 옮겨 무척 오랜 시간을 달린 후에야 도착되었다.
"박 형사님, 아버님에게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조사를 받아야죠. 그러나 좀더 신중히 다뤄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문호와 형규는 진구의 말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졌다. 어린 나이에 무척 당돌하고 또 생각이 깊은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문호는 곽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두 호텔 간의 알력을 자세히 파악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훈훈한 스팀이 차내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차가 터미널을 출발하면서 둘은 깊은 잠에 빠졌다.
이때가 18시 정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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