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 불새 밤에 죽다 1

3학년2반 | 2022.02.16 07:52:05 댓글: 0 조회: 637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213
불새 밤에 죽다

지은이 : 이상우
출판사 : 초록배

일. 여류명사 김을숙
김광준한테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첫발이었다. 구년만에 밟은 조국의 땅이었다. 광준은 입
국 수속을 마치고 김포공항 광장에 나서며 우선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른 봄이라 아직은 쌀
쌀한 날씨지만 하늘은 사파이어처럼 투명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 광준은 콜택시를 타고앉아
수첩에 적힌 주소를 꺼내 보았다. 방배동에 있는 유지 아파트 삼단지 갑시다. 광준은 주소를
일러주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눈을 지그시감았다. 조국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심 누나한테 귀국 일자를 알리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예고 없이 현
관문을 덜컥 열고 들어서며, 누나 광준이가 왔습니다. 하고 그 감격의 첫 대면을 가지고 싶
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범벅된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누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손님
몇동으로 모실까요.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입구를 들어서며 운전사가 물었다. 십사동인데
요. 콜택시는 십사동 입구에 섰다. 광준은 차에서 내려 천천히 아파트로 들어섰다. 십일층
삼호. 광준은 다시 수첩의 주소를 확인하고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가 뒤에서 퉁명스럽게 불렀다. "저 말입니까?" 광준이 질질 끌던 여행용 대형 가방을 든
채 돌아섰다. "누굴 찾아오셨는지요." 금테를 두른 모자에 늙수그레하고 새까맣게 탄 얼굴을
한 경비원이 물었다. "저, 미국서 왔는데요. 십일층 삼호실에 누님이 살고 계셔서..."
"아, 예. 김을숙 여사를 찾아오셨구먼요." 경비원은 그 검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반가운
척했다. "엘리베이터는 이쪽입니다." 경비원은 뛰다시피해서 광준의 대형 백을 엘리베이터
앞까지옮겨 주었다. 광준은 과연 듣던 대로 서울의 여류명사라고 생각했다. 경비원까지도 누
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갑자기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다는 데 내심 흐뭇했다. 십일층에 도착
한 광준은 벨을 눌렀다.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떤 엄청난
일을 기대하는 듯한묘한 기대감에 찼다. 누님이 뛰어나오면 먼져 무어라고 말을 건넬까 하
고 잠깐 생각했다.처음 서울에 올라와 양말 짜는 공장에 다니며 단칸방에서 남매가 고생하
던 시절의 누나얼굴이 떠올랐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얌전하고 예쁘던 단말머리 소녀시절. 그
러나 지금은 삼십대로접어든 한국 여류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을 의젓한누님.
한참을 기다려도 벨 소리엔 응답이 없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지 만 워낙 바쁜 사람이라 어딜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광준은 다시 벨을 눌렀다.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광
준은 무심코 현관문을 잡아당겨 보았다. 뜻밖에도 육중한 철제 현관문이 덕컥 열렸다. 광준
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셨다.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광준은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의식하며 거실로 올라섰다. "누님! "광준이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아
무런 대답이 없었다. "누이 을숙누나!" 광준이 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아무 기척이 없
다. 광준이 기실 소파께로 좀더 들어 갔다. 소파에는 누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뒤로 보이는 소파에는 여자의 머리만이 보였다.
누님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잠이라도 든 것일까?
광준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소파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누나!' 하고 불렀다. 그러나 소파에 앉은 여인의 머리는 꼼짝도하지 않았
다. 광준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앞으로 돌아가 소파에 앉은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을숙 누나다. 그러나 첫눈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누나! " 광준이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누나는 멀뚱하게 눈을 뜬 채
고개를 옆으로 축 늘어뜨렸다. "누이 " 광준은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보라빛 홈웨
어 위에 피가 번져 있었다. 머리에 상처가 나고, 거기서 귀 뒤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보였
다. 김을숙 여사는 분명히 죽어 있었다.
"누나! 이게 어찌된 거야? 누나! 나 광준이야! 광준이가 왔어, 누이 "
아무리 울부짖고 흔들어도 김을숙 여사는 꼼짝도 안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구년 동안 이를 악물고 고생도 외로움도 참으면서 오직 혈
육이 라곤 하나뿐인 누님을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앉았다.
누님이 조국에서 부쳐주는 학비를 쪼개고 쪼개쓰면서 구년만에 석사학위 그리고 전자공학
박사학위까지 기어이 따내고 달려온 광준인데...
누님의 대견스러워하고 감격해 하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아 온것같은 광준의 지난 세월이 눈
사태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광준은 벌떡 일어섰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준은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헬로우" 그러나 전화는 먹통이었다. 광준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엘리베
이터를 기다리지도 않고 비상계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맨 아래층 경비실까지 와서 소리쳤다.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이..." 그러나 경비실은 잠겨 있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광준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무 곳이나 무작정 뛰었다. 공중전화를 찾으려고 했으나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광준은 차들이 모두 속도위반을 하다시피 질주해 대는 큰길까지 뛰어
나왔다. 건너편 모통이에 파출소가 보였다.
광준은 질주하는 차 틈을 헤치고 길을 건너 파출소로 뛰어갔누가 봤다면 죽으려고 환장
한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달리던 차동차들이 삑빡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를 했다.
광준은 파출소에 뛰어들며 숨이 턱까지 찬 채 소리쳤다. "누님이 죽었어요. 누님이."
광준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고 있던 경찰관 두 명이 광준을 따라 나섰다.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남은 한 경찰관은 본서에 신고를 하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씨
름을 했다. 아파트 현관에 도착한 경찰관은 곧 경비원의 제지를 받았다.
"위에 살인사건이 났어요. 당신은 여기서 드나드는 사람을 좀 기록해 놓으시오."
경찰관이 경비원에게 대강 설명을 한 뒤 지시를 하다시피 했다. "저 젊은이가 조금 전에 미
친 듯이 뛰어나가길래 무슨 일이 있었는가 했지요." 경비원이 사색이 된 채 광준을 가리키
며 말했다. "아니 당신은 아까 여기 없었지 않아요."
광준이 경비원에게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말씀을. 당신이 문을 두드리다가 밖
으로 뛰어나갔지 않아요. 내가 뒤따라가며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경비원은 어이없다는 투였다.
광준은 당황해서 뒤에서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 라고 생각했다.
두 경찰관과 광준은 십일충 삼호실로 급히 올라갔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소파에 앉은 채로 죽어 있던 누님 김
을숙의 시체가 없어진 것이다. 이 방 저 방을 다 뒤져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광준은 꼭 도깨비한테 홀린 것만 같았다.
이방 저방과 시체가 있었다는 소파를 자세히 살펴본 경찰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광준을
쳐다봤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그동안에 시체가 어디로 갔단말입니까?"
광준은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삼십여 분이 지난 뒤 이번에는 본서에서 강력계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수사를 지휘하러 온 듯한 추경감은 경찰관 두 사람으로부터 경위를
듣고 난 뒤, 먼저 아파트의 출입구를 봉쇄한다는 지시를 했다. 그것은 이미 두 경관이 조처
를 해 활은 일이다. 그리고 광준을 소파에 앉히고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우선 여권을 좀 보여 주실까요?"
추경감은 아주 부드럽게 광준 앞에 손을 내밀었다. 작은 눈에 눈 가장자리는 주름투성이의
꾀죄죄한 모습이 경감이라는 직책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그러나 늘
입가에 미소를 띤 그의 모습은 사람 좋은 복덕방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오늘 처음 서울에 둘아왔군요." 광준의 얘기를 대강 듣고 난 추경감이 다시 물었다.
"이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 몇 시쯤이었습니까?" 추경감이 여권을 돌려주며 물었다.
"오후 세시쯤 됐을겁니다. 열두시 십팔분에 비행장에 도착한 다음,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곧장
택시를 타고 왔으니까요." "왜 미리 누님한테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누님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요. 우리는 구년만에 만나는 것이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공항에서 누님 집으로 전화 같은 것을 걸지 않았습니까?"
진화를 걸 것 같으면 미국서 떠나기 전에 걸었죠." "예. 그렇겠군요."
추경감은 뭔가를 계속 수첩에 적어 넣으면서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열초가 지난 뒤
다시 물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 얼마든지 말씀드리지요. 누님은 눈을 뜬 채 소파에 축 늘어져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
왼쪽에서 가늘게 피가 흘러내려 홈웨어 위에까지 묻어 있었습니다."
"그때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까?"
"글쎄요. 제가 큰소리로 여러번 불러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긴 했습니다만... " "사람이 있다
고 느끼진 않았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혹시 현관에서 신발 같은 것은 못 보셨습니
까?" "그걸 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렇겠군요. 누님은 이 집에 혼자 살고 있었습니까?"
"예. 누님은 아직 독신이었거든요. 저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가족 얘기가 아니고 가정부라든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고 하다가 먼저 광준에게 권했다.
"전 못 피웁니다."
광준이 사양하자, 추경감은 호주머니에서 지퍼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애를 썼다. 그러
나 기름이 떨어졌는지 좀체 불이켜지지 않는다. 곁에 있던 강형사가 불을 켜댔다.
"경감님, 그 고물 라이터는 이제 제발 버리십시오." 강형사가 빈정거렸다.
"참 강형사. 경비원을 좀 오라고 해." 추경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라이터를 다시 호주머
니에 집어넣고 광준을 쳐다봤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처음 누른 뒤 들어와서 김을숙 여사의
시체를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글쎄요. 한 삼십초, 아니 일이분쯤 걸렸을 겁니다." 그때 얼굴 까만 경비원이 질린 표정으
로 들어섰다. "경비원은 모두 몇 병입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예, 모두 열두 명이 있는데
요." "교대는 어떻게 하고 있죠?" 이번에 강형사가 물었다.
"예, 이 아파트는 모두 이교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섯 명 이 당번 근무를 하는 셈이군요. 여기 아파트가 16동까지 있는데 여섯 명이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이지요?" 추경감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이 아파트 전체 말입
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십사동만 말씀드린 건데요." "그래요? 그럼 동별로 경비
조직이 다르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 제삼단지는 모두 동별로 자추제 관리를
하기때문에 다른 동은 모릅니다." "자추제?"
"예. 거 왜 한동 안에 사는 사람들이 돈을 거둬서 저희들한테 월급을 주고 하는..." "응. 자
치제란 말이군. 그럼 이 십사동은 출입구가 몇군데 있습니까?" 추경감이 새담배에 불을 붙
이며 물었다. "세군데가 있습니다. 한군데에 두명씩 열두시간 근무를 합니다." "그럼 다른 출
입구에서 이쪽 아파트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천백삼호실은 제가 지키
고 있는 에이출입구로만 올라올 수가 있습니다. 비출입구나 씨출입구는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키고 있는 입구의 엘리베이터나 비상계단을 통하지 않으면 이 방은 올
수가 없다는 얘기군"
"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곱시부터 쭈욱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조금전에 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겠군." 추경감이 광준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입죠. 저
가방을 제가 엘리베이터까지 들어다 드렸는데요." "그럼 나가는 것도 보았겠군." "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불러도 뒤돌아 보지않고 막 뛰어나가던 걸요" 추경감은 잠깐 생각하다가 다
시 물었다.
"그 뒤에 이 아파트에서 누가 나가는 것을 못 보았나요?" "예 구백삼호 아주머니와 그집 꼬
마만 나갔습니다. " "구백삼호실" 추경감이 강형사의 얼굴을 보았다. "구층 삼호입니다. 그
집이 오늘 이사를 하고 있거든요." 경비원이 대답했다. "그러면 이삿짐 같은 걸 들고 나갔습
니까?" "아뇨 이삿짐을 들고 어떻게 엘리베이터로 나갑니까? 그건 콘도레로 달아서 내려보
내지요." 경비원은 곤돌라를 콘도레라고 했다. "그건 언제 사용했지?" 추경감이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조금 전 이삿짐 센터 인부 세명이 와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요."
추경감이 강형사한테 눈짓을 했다. 강형사가 재ㅐ빨리 뛰어나갔다. "알았어요. 나가 보세요.
누구누구가 출입하는지 잘 적어놓으세요." 경비원이 절을 꾸벅하고 돌아섰다. "잠깐만" 추경
감이 다시 불렀다. "저말입니까?" 경비원이 다시 돌아섰다. "여기 김을숙씨 집에 김을 숙씨
혼자 살고 있었습니까?" "아뇨, 살림도 하고 비서 노릇도 하는 미스곽이 있는데요."
"미스곽?" "예. 우리가 미스 오리라고 하죠. 곽정자라는 아가씨예요." "미스 오리?"
추경감이 입가에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예. 그 성이 곽씨라서 곽곽하는 게 꼭 오
리 울음소리 같기도하구요. 또 천씨는 그 아가씨 엉덩이가 커서 오리 엉덩이 같다고해 서...
" '후후후... "추경감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헤헤헤. 일러바치친 마셔요. 제가 혼나요." 경비원도 따라 웃었다. "천씨란 누구요?"
추경감이 물었다. "저 하고 짝인데 오늘 근무여요." "경비원이란 말이죠? 그런데 왜 안 보입
니까?" "예. 저 삼백육호 아주머니 심부름을 갔어요. 시골서 부쳐온 고추랑 쌀을 찾으러
화물역에 갔습죠." "아니 경비원이 그런 일도 해요?"
"예. 저희들은 그보다 더 어려운 심부름도 합니다." "됐어요. 나가 보세요."
경비원이 다시 절을 꾸벽하고 나가려고 했다. "미스곽이란 아가씨를 못 오셨습니까?"
그때 추경감이 다시 경비원의 뒷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침 나절에 김여사 심부름 간다면서 나갔어요.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
경비원이 돌아서서 대답하고는 다시 절을 꾸벅하고 나갔다.
그동안에 감식차가 도착하고, 여기저기서 무슨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수사경관들이 애를 썼다. 광준도 그들을 따라 이 방 저방을 훑어보았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거실이 장식돼 있고 이 구석
저 구석마다 골동품 장이며, 절구통, 삼태기 같은 옛날의 농촌가재가 멋있게 배치되어 있었
다. 탁자 대신으로 쓰고 있는 궤짝이며 장식대 대신 놓인 골동품 삼충장 위에 감사패와 같
은 것이잔뜩 놓여 있었다. 침실엔 널찍한 침대가 놓여 있고 호화스런 커튼이 뉘엿한 햇볕에
반사되고 있었다. 서재에는 이천여 권은 됨직한 책이 꽉 차, 들어가는 사람에게 중압감을 주
고 있었다. 부엌은 맡끔히 손질돼 있고. 미스곽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방도 깨끗이
정돈되 있었다.
광준은 이 구석 저 구석을 보면서 누님의 깔끔하고 정결한 성미를 느끼고도 남았다. 아니
금방이라도 방그레 옷으며 어디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구백삼호실에 뛰어갔던 강형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시체를 이곳에서 빼돌리려면 가장 적당한 방법이 뮈야?"
추경감이 다급하게 물었다. "장은 아직 옮기지 않았구요. 자질구레한 이삿짐이나 침대 같
은 것은 벌써 한 차 싣고 갔던데요," 강형사가 실망한 얼굴로 추경감의 얼굴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몇 시쯤인데..." "글쎄 확실한 시 간은 모르겠는데, 두 시나 세 시쯤일거라는
데요." "그래서... "
추경감이 벌떡 일어섰다.
"이사간 집으로 사람이 갔습니다만, 그 이삿짐 틈에 시체가 끼어 나감직하지는 않습니다."
'그 집 주인이나 식구들에 대해서 단단히 알아봐. 그리고 이삿짐 센터서 왔다는 그 인부 세
명도..."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헛수고인것 같군요." "헛 수고 ?"
추경감이 혼자 싱긋 웃었다. 조소 같은 것이었다.
"그보다, 범인이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범인이 이곳에 들어 왔다면 사람을 죽인 뒤
에 어디론가 나갔을 것 아닙니까? 경비실에 있는 그 경비원을 붙들고 이것저것 자세히 캐물
어봤읍니다만 낯선 사람은 아무도 드나든 적 이 없대요. 오늘 이곳에서 밖으로 나간 사람들
은 거의 없어요. 낮 열한 시쯤 이 집의 미스곽이 나간 이후를 집중적으로 체크해 봤는데. 지
금 이사중인 구백삼호실의 아주머니와 어린이들 그리고 인부 세 명이 들어온 것, 그 외 여
기 김광준 씨가 온 것 말고는 출입자가 전혀 없답니 다."
"미스곽이 나가기 전까지는 김을숙 씨가 살아 있었다는 얘기아냐. 그렇다면 범인은 그 이
전에 이 아파트에 숨어 들어와 있다가 김여사를 죽이고 도망쳤다는 얘긴데..."
'도망을 못 치고 이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이 에이출입구 내에 있는 아파트는 모두
몇 가구인가?" 추경감이 파출소에서 나와 있는 경관을 보고 물었다.
"예. 모두 사십가구입니다. 한 층에 네가구씩이죠." "이곳이 십일층인데?"
강형사가 계산이 안 맞는다는 투다.
"아아 녜. 다른 데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만 여긴 사층이란게 없습니다. 삼층 다음에 오층이
지요." "사십 가구라... " 추경감이 난감한 표정이다.
"그런데 여섯 가구는 사람이 부재중이라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홉 가구는 아직 분양이
안 끝나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지 금 사람이 살고 있는 가구는 스물다섯
가구뿐입니다."
"그러면 우선 스물다섯 가구를 모조리 수색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강형사가 제안했다.
"범인은 아직 이 아파트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범인이
김을숙씨를 쇠뭉치 같은 걸로 머리를 때려 살해하자마자, 김광석 씨가 이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게. 범 인은 우선 방안 어디에 몸을 숨겼다가 광준 씨가 도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시체를 둘러매고 뛰어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지"
"그령다면 경비실에서 아무도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지가 헬리콥터를 타고 간 것도
아닐 테고..."
강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미스곽이라는 그 아가씨가 무슨 관련이..."
김광준이 의견을 내놓았다.
"글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조. 하지만 미스곽이 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때 곽정자가 뛰어들어왔다. 놀라서 온통 사색이 되었다.
"우리 회장님이... 우리 회장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미스곽은 울음 섞인 고함을 지르면서 거실로 올라섰다. 현관에서 대강 얘기를 들은 모양이
다.
"우리 회장님은 어디 계셔요?"
미스곽은 아무나 붙들고 소리소리쳤다.
광준은 천천히 미스곽의 어깨를 잡아 소파에 앉혔다.
"미스곽 진정해요. 난 미국서 온 회장님의 동생입니다. 앉아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미스곽은 벌떡 일어나 광준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회장이란 김을숙 여사가 운영하고 있는 민속 보존 협의회 회장직을 말하는 것이다. 열
개 이상의 감투를 쓰고 있지만, 김을숙 여사가 가장 힘을 쏟고 있는 민속보존 협의회의 회
장 직함을 불러주기를 김을숙 씨 자신이 원하고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고 했다. "곽정자 씨! 진정해요. 그리고 우리가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해 줘요."
추경감이 미스곽과 마주앉으며 말했다. 놀라고 슬퍼하고 당황해 하는 미스곽의 얼굴을 보면
서, 추경감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곧 물음이 터질 것 같은 동정심에 가득 찬 표정이다.
"미스곽이 이 집에서 나간 것은 몇 시쯤이었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열두 시 십 분 전쯤이었어요." "어디에 갔다 왔습니까?"
"회장님 심부름을 갔다 왔어요. 협의회 사무실에 있다가 왔어요."
"오늘은 일요일인데..."
추경감은 곧 자신이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지만 물을 건 다 물었다. '
마음씨 좋은 복덕방 아저씨 같은 추경감이고, 남의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때론 눈물까지 보
이는 가련한 성품의 추경감이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할 일은 다 해낸다.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여대생들이 거기 오지로 했었어요. 우리 협의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민속 자료에 관한 파일을 학생들이 열람한다고 해서 그 일을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세상에 이 무슨 청천벽력 입니까?"
"곽정자 씨는 회장님 집안 일만 보는 줄 알았는데요?"
강형사가 물었다. 그렇죠, 저는 주로 집에 있습니다만 회장님이 관여하는 여러단체에 심
부름도 다니고 일도 돕고, 때론 원고를 쓰시는 일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곽정자 씨가 집을 나갈 때 누가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회장님은
소파에 앉아서 텔리비전을 보고계셨어요." 그렇다면 열한시 오십분 이후부터 김광준이 집에
도착한 세시경 사이에 김을숙은 피살된 것이 확실하다.
그동안이라면 이 아파트에 드나든 사람이 없으니 아직 시체와 범인이 이 아파트 안에 있다
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파트 주민 중에 범인이 있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강형사는 두어 사람 더 데리고 아파트 수색을 해보게. 주민들한테 실례 안 되게 정중하게
수색해야 돼. 영장도 없이 하는 일이니까 신중히 집주인의 양해를 얻어서 하라구. 그리고 그
이삿짐 옮기는 인부 세 명의 소명을 확보해 놓도록." 추경감이 지시했다.
강형사가 정복 경관 한 사람과 사복 경관 한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김을숙 씨가 사는 옆집부터 방문을 시작했다.
십일층의 세 가구에서는 아무런 용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강형사 일행은 십층으로 내려갔다. 십층의 두 가구는 아직
입주자가 없고 한 가구는 문을 잠근 채 다 외출하고 없었다. 남은 한 가구에는 신흔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잠옷 바람으로 일요일을 즐기고 있던 두 부부가 화들짝 놀라 뛰어나왔다. 그
집에서도 아무런 용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구층에서 이사를 가는 구백삼호실 째고 한 집은 비어 있었고. 두 집은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었다. 강형사는 그러나 끈질기고 정중하게 한 집 한 집을 조사해 나갔다.
오층까지 가는 동안 이렇다 할 수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집 저집 집안을 뒤져보는
동안 뜻밖에도 호화스런 가구며 집안 치장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불경기니 어쩌니 하면서
도 회사 사장이니 이사니 하는 사람들의 집들은 모두가 가난한 공무원인 강형사의 집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골프채 두서너채씩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
오층 오백일호실에 왔을 때 강형사는 잠깐 주춤했다. 이 집은 사십대 초반쯤 된 부부와
어린 여학생. 중학 일학년쯤 됨직한 여학생과 세 식구 그리고 가정부 등 네 명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일요일이라 모두 집에 있었다. 주인은 명동에서 조그만 오파상을 경영하는 사장이
었다. 강형사가 이곳저즛을 세밀히 둘러보고 부엌 쪽을 힐끗 보았을때 두 남녀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분들은 누구시죠?" 강형사가 물었다.
"아. 네. 저 부부는 바로 위층에 사시는 내외예요. 육백일호실이 "그런데 여기는..."
이 집 주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위층 쓰레기통이 막혀 내려가지 않는다고
보러 왔어요. 이 아파트는 쓰레기통이 맨 위층에서 지하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가끔중간에서
막히는 수가 있어요. 아파트를 지을 때 워낙 쓰레기 통로를 좁게 만들어 가끔 막한답니다."
주부는 자세하게 묻지 않는 것까지 설명을 했다.
쓰레기통 문을 열고 플래시로 살피고 있는 위층 부부는 이쪽의 주고 받는 말을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 아내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입은 것으로 보아 집안청소를 하다 내려
온 것 같았다. 남편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쓰레기통이란 말을 듣자 강형사는 머리에 얼른 스치는 게 있어 열려진 문으로 쓰레기통
을 들여다봤다. '그렇다. 시체를 쓰레기통에 넣어 지하실 쓰레기 창고로 떨어뜨릴 수도 있
는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
다. 쓰레기통의 통로는 건장한 여자의 시체가 통과할 만큼 넓지 모했다. "그러나 시체를
토막내서..." 강형사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후다닥 지하실로 뛰어내려갔다. 쓰레기가 떨어져
쌓여있는 곳까지 뛰어가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강형사는 감식반을
시켜 혈흔 같은 것을 찾아보리라고 생각하고 올라왔다. 아파트내의 스물다섯가구를 다 샅샅
이 조사해봤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거참 귀신 곡할 노릇인데요. 그놈이 홍길동이나 수
퍼맨이 아닌이상...' 강형사는 투덜거리며 천백삼호실로 되돌아왔다. "누님의 시체를 본 것이
틀림없습니까?" 강형사가 이번에는 광준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거짓말
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광준도 질세라 대들었다. "꼭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오랜 여행때문에 피곤하다든지 해서
태평양을 건너 비행기를 타고 오자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시차에 시달리기도 하고..." 강형
사가 말을 얼버무렸다. "여보시오 내가 허깨비를 봤다는 말입니까?" 광준은 더욱 화가 치밀
었다. "제가 허깨비를 봤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님의 시체를 잘못 보았다면 얼마나 좋
겠습니까. 나는 이 넓은 천지에 혈육이라곤 딱 누님 한 분뿐이랍니다. 그 누님이 피투성이
가 된 시체였는데, 그걸을 내가 잘못 봤다는 말입니까?"
광준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제가 허깨비를 봤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님의 시체를 잘
못 보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이 넒은 천지에 혈육이라곤 딱 누님 한 분뿐이랍니다.
그 누님이 피투성이가 된 시체였는데, 그것을 내가 잘못 봤다는 말입니까?" 광준이 악을 쓰
다시피 내뱉었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추경감이 두사람의 싸움을 말렸다.
그때 감식반이 초동수사가 끝났다고 보고했다. "그럼 일단 여기서 철수하도록 하지. 아파
트 현관통제도 해제하도록 하고...' 추경감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곽정자씨는 같이 서까지
좀 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추경감이 말하자 미스곽은 눈물을 닦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섰다.
텅빈아파트 천백삼호실에 어둠이 깃들었다. 노루꼬리만큼해가 길어졌다고는 하나 봄날의
해는 쉬어둠을 몰고왔다. 김광준은 불토켜지않고 낮에 누나가 쓰러져있던 소파에 그냥 주저
앉아 넋을 잃고 있었다. 지나온 삼십년의 세월이 허망하기 이를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광
준이 다섯살때로 기억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누나 손을 잡고 마을
을 떠나던 생각이 문득 났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 만 동네 사람들한테 눈총을 받으며 고향인 탈무골을 떠나던 기억
이 어렴풋이 났다. 달구지에 헌 가재를 싣고 아버지는 말없이 소를 재촉했고 어머니는 명주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채 질금질금 눈물을 뿌리며 탈무재 고개를 넘었다. 광준은 네 살위인
누나 을숙의 꽁꽁 언손을 꼭 잡고 눈 비탈길을 넘었다. 꽁꽁 언강 너머로 탈무골을 몇 번이
나 뒤돌아보며 재를 넘었다. 무엇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정든 고향을 떠나 정치 없는 타향으
로 일가가 몽땅 떠났는지 광준은 아직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이 팔을 동동 걷고 집에 물려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아버지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비겁자 모양으로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어머니는 집 모퉁이에 돌아서서 울기만 하
던 기억이 어슴푸레했다. 광준은 철이 든 뒤에도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누나한테 물어
본 적이 없다. 조그만 읍에 나와 살던 아버지는 매일 술타령 만 하다가 끝내는 위장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갖은 고생을 하며 집 안을 이어갔다. 떡 행
상도 하고 양품 행상도했다.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광준의 집을 계속 쫓아다녔다.
광준이 초등학교 이학년이고 누나 을숙이 오학년이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는 행
상 나갔다가 기차 건널목에서 기차에 치어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고아나 다름없는 남매
는 굶다시피하면서 이곳저곳을 헤매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서울까지 올라와 누나가
조그만 양말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광준은 구두닦이 껌팔이를 하면서 야간 학교에
다녔다. 누나도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친다고 새벽 세시네시가 되도록 공부를 했다.
광준은 하루 종일 양말 공장에서 시달리다가 들어와 죽 두사발을 끓여 끼니를 때우고는
또 책과 씨름하는 누나를 볼 때마다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 같은 것이 치솟아 올랐다. 세상
누구에게도 아닌 모든 사람한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광준이 그때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비치고 있을 때 경찰서 에 갔던 미스
곽이 돌아왔다. "불은 왜 켜지 않았어요?" 미스곽이 벽에 걸린 스위치를 눌렀다. 휘황한 불
빛이 거실을 찬란하게 비쳤다. 텅 비고 싸늘한 거실 벽에 걸려 있는 하회탈춤에 나오는 탈
들이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나는 광준이 라고 합니다. 낮에 수선 틈에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광준은 예의 바른 초
등학교 아동처 럼 자리 에서 일어나 공손히 미스곽에게 인사를 했다. "회장님께서 늘 말씀
하셨어요. 전 곽정자라고 불러 주세요. 김선생님이 지난 겨울에 기어이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회장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미스곽의 태도는 낮과는 완연히 달랐다.
"경찰서에서 김선생님 저녁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으시더군요."
미스곽은 수화기를 무심코 내려보다가 말했다.
"어머나, 전화가 먹통이네요. 누가 스위치를 뽑았어요."
미스곽이 빠져 있는 전화 스위치를 꽂으며 말했다.
광준은 낮에 경찰서에 신고를 하려고 전화를 들었을 때 통하지 않던 이유을 알았다.
"그놈이 전화기 스위치를 뽑아 놓았었군요."
광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놈이 라뇨?"
미스곽이 눈이 등그레져서 물었다.
"범인 말입니다. 누나를 죽인..."
광준은 더 말을 계속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녁을 드셔야죠. 제가 곧 마련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미스곽이 부엌으로 들어가고 채 삼십 분도 안 되어 밥을 차렸다.
"저녁 좀 드셔요. 갑자기 밥을 짓느라 찬이 별로 없습니다만..."
미스곽이 손을 씻고 나오며 약간 웃어 보였다.
광준은 이 판국에 웃음기를 띠는 미스곽이 괘씸하다고 생각했지만, 웃는 모습은 그리 밉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맞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얄팍한 입술, 선명한 눈썹, 그리고 발그레하고 폭 파인 볼우
물이 있는 뺨, 가느다란 체구에비해 오리 궁둥이라고 하던 볼륨 있는 히프, 퍽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드시죠."
괌준은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래 경찰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광준이 맞은편에 앉지도 않고 엉거주춤 서있는 미스곽을 보고 말을 걸었다.
"회장님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어떤 점을..."
"회장님이 관여하는 단체가 어디 어디냐, 최근 자주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 이 아파트 안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둥... 어디 회장님이 관여하시는 사업이 한두 가지라야지요."
"대개 어떤 단체에 관여를 했습니까."
광준은 미국서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누나가 문화단체나 여성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류명
사라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 인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걸 편지에 늘 써 보내지 않았던가요? 신문이나 잡지도 안 보셨어요?"
"예. 공부만 하느라고 어디 고국의 신문이나 갑지를 볼 틈이 있어야조. 거기선 구하기도 어
렵구요."
"하긴 그럴 거예요."
광준은 미스곽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닌 아주 친숙한 사람처럼 갑자기 느껴졌다. 아니
친숙한 사람이 아니라, 이성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혈육을 나눈 누나가 살해된 집에서 그런 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스
스로 되뇌었다.
'회장님이 가장 신경을 쓰시는 것은 민속 보존 협의회랍니다.
그 외에도 여성 지위 향상 위원회 의장, 불우 여성 재기 협회 이사장, 여성 민속원 부원장,
청하 양로원 이사장 등을 맡고 있지만... "
"그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란 어떤 단체입니까?"
"우리나라의 지방에 숨어 있는 민속들을 재발견하고, 사라져가는 민속 기능 보유자를 후원
도 하고 하는 기관이죠."
"그럼 자금이 필요할 텐데요."
"물론이죠. 거상물산의 장회장 말씀을 못 들으셨어요?"
미스곽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더없이 귀엽고 천진스럽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장회장이 라뇨?"
"거상그룹의 총수이신 장통석 회장님 말입니다. 그분이 민속문화 보존 협의회의 스폰서인
셈입니다. 기금을 서슴없이 내놓고 후원해 주지요. 자기는 돈을 벌어 우리 김회장 같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돕는게 의무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얘, 그랬었군요.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뿐이 아니고 우리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에서 만드는 민속
공예품을 해외에 내다 파는 일도 하고 있어요. 그 이익금은 몽땅 우리 협의회에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아주 수출이 잘 되나봐요. "
미스곽은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가끔 장회장님 이 직접 우리 회장님을 찾아와 격려도 하고 하나봐요. "
"집에도 가끔 왔습니까?"
광준은 누나가 독신이란 걸 얼른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그질문이 너무 어색하다고 생각
하고 곧 얼버무렸다.
"뭐 딴 의미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누나가 시집을 가지 않은 것도 광준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아녜요. 장회장님은 한 번도 여기 오시는 것을 못 봤어요. 제가 나가고 없는 달도 그런 일
은 없었던 것 같아요."
미스곽도 단호하게 말했다. 광준은 공연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 했다.
"그래서 경찰서는 어떻게 한대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스곽이 말을 흐렸다.
"그래서요...?"
"그 사람들은 김선생님의 말씀이 어쩐지...,."
"어쩐지 뭡니까? 믿기 어렵다고 얘기하던가요?"
"믿기 어렵다기보다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그런투였어요."
'뭐라구요? 미스곽이 알다시피 나는 미국에서 오늘 구년만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누님은 가족이라곤 아니 피붇이 라고는 나외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무슨 가정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는겁니까?"
광준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다. 미스곽한테 화를
낼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들은 회장님 이 피살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김선생님 혼자뿐이라는데 의심을 가지
는 것 같아요. 더구나 경비실에
신고 않고 파출소까지 왔다는 것을..."
"그거야 그때...,"
"알고 있어요. 경비실에 경비원이 있었는데 급한 김에 없다고
생각하고 뛰어나간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되었더군요."
광준은 힘 없이 두어 숟가락 밥을 떠 넣다가 수저를 놓아 버렸다.
"입맛이 없는 거군요. 커피라도..."
"예. 너무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후에 미스곽이 커피 두 잔을 끓여가지고 나왔다.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에 사람이 많습니까?"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열서 너 사람 있어요. 사무국장인
남궁선생과 여사무원, 운전기사 등."
"운전기사는 어디에 갔습니까?"
"예. 일요일은 쉬어요. 일요일에 볼일이 있으면 회장님이 직접 운전을 하시거든요."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럼 이 집엔 늘 미스곽과 누님 두 분만이 계셨군요."
"그런 셈이죠. 전 원래 광주가 고향이랍니다. 지방 대학 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민속에
흥미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김회장님을 만났죠. 우리들은 이곳저곳 벽지를 함
께다녔어요. 그러다가 회장님의 친동생처럼 되어버린 거조."
시골엔 부모님이 계십니까?"
"예. 농사를 짓고 계셔요."
"미스곽은 누가 누님을 살해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그걸 알면 당장 뛰어가 칼로 가슴을 짠러 죽이고 말 걸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무엇 때문에 누님을 죽이고 시체를 감추었다고 짐작되는 점이 혹시..."
"글쎄...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전혀 짐작도 못하겠어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에요.
그처럼 자상하고 마음 착하고 아는 것 많은 우리 회장님 이 누구하고 원수를 지 거나 미움
을 산 일은 전혀 없거든오."
"아까 말씀드린 남궁이라는 사무국장인가 하는 사람은 어떤사람입니까?"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멋내기를 좋아하고 깔끔하고 언변 좋기로
이름나 있죠. 사업 수완이나 처세도 아주 매끈한 편이에요. 회장님과는 오년 동안 같이 일했
죠."
"지금 이 집에서 뭐 없어진 것은 혹시 없습니까?"
"예. 낮에 형사들이 캐물어서 조사해 봤습니다만 아무것도 없어진 것이 없는 것 같아요. 회
장님의 핸드백이나 예금통장 같은것도 그대로 있고요. 여기 널려 있는 문화재들도 돈으로
친다면수월찮은 값인데 모두 그대로예요."
"잘 알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주무시지요."
"참 내 정신 좀 봐. 미국서 오시느라고 퍽 피곤하시겠어요. 그럼 이만 들어가쉬세요. 방은
회장님이 쓰던 방을쓰시면 될 것같아요. "
미스곽이 안방에 들어가 자리를 봐주고 나갔다
광준은 누님이 자던 침대에 누웠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낮에 본 누님의 처참한 모습이 뇌리에
서 영영 사라지지가 않았다.
광준은 거의 뜬눈으로 귀국 후의 첫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거의 꼭두새벽에 추경감과 강형사가 찾아왔다.
"이거 아침 일찍부터 죄송합니다. 같은 아파트의 몇 사람한테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다가..."
추경감이 장황하게 변명을 했다.
"괜찮습니다. 어서들 오십시오."
"귀국 첫날밤인데 잠이나 설치지 않으셨는지..."
강형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경 속에 무슨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 뭔가를 좀 알아냈
습니까?"
광준이 추경감이 내뿜는 담배 연기를 피하며 말했다.
"오리무중입니다. 우선 범인이 무엇을 노렸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시체를 감추어
야 할 이유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추경감이 대답했다.
"그 구백삼호실인가 하는 집의 이삿짐은 어떻게 됐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그것도 전혀 의심가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사간 집까지 쫓아가 짐을 샅샅이 검사했습니다
만 아무 곳에서도 혈흔 하나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혈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집
소파나 거실에서도 혈액 반응 같은 것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선생님은 분명히 누님
이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고 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집안 아무 곳에서도
낯선 지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아파트 구석구석 어디에도
범인이나 시체를 숨진 곳은 없었습니다."
"그럼 경감님은 아직도 제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뒤 아무런 연락도 이유
도 없이 누님이 집에 돌아오지않는 것은 무슨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광준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뿐입니까? 미스곽이 집을 나갈 땐 분명히 누님이 이 집에 있었다고 했는데, 경비실에선
그 이후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무엇으로 설명을 하려고 합니
까? 당신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내 말을 장난으로 듣고 있는 겁니까?"
광준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아니 꼭 헛것을 보았다고 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건 김을숙
여사가 어제 열두 시 이후지금까지
근 이십시간 동안 실종상태에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삼 일 더 기다려보고 돌아오지 않으면 실종으로 처리하여..."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광준이 고함을 버럭 질러버렸다. 추경감이 깜짝 놀라 팔을 치켜들어 팔뚝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김광준
의 주먹이라도 막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방향으로도 우린 짚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만 실례했습니다."
"실례 많이 하십시오."
광준이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광준은 경찰을 믿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국에 돌아와서는 엠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로 돼 있었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루고 누
님의 일부터 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광준은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미스곽을 앞세워 우선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횐가 뭔가
하는 사무실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다. 김을숙 여사의 신변을 캐자면 그것이 가장 빠른 길 같았기
때문이다.
광준은 인사동 골목 안에 있는 협의회 사무실을 찾아가면서
옆에서 걷는 곽정자의 수수한 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보통
여자보다는 뛰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아흡시가 채 안되었는데도 사무실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나와 있었다. 사무실은 광준이 생
각했던 것보다는 꽤 넓었다.
"김선생님. 인사 나누세요, 이분이 여기 사무국장님이신..."
미스곽이 활달해 보이는 삼십대 남자를 소개했다.
"남궁현이라고 합니다. 회장님께서 늘 말씀하셔서 초면이 아
닌 것 같습니다."
남궁현은 서글서글한 생김새와 걸맞게 말씨도 시원시원했다.
남궁은 광준으로부터 대강 얘기를 듣고 크게 낭패한 얼굴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군요.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
습니까?"
남궁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회장님의 방을 잠깐 둘러볼까요?"
광준은 미스곽을 앞세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실용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응접 소
파에는 풀을 먹인 것처럼 새하얗고 풋풋한 시트가 깔려 정갈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회장님이 무슨 약속 같은 걸 한 일이 없습니까?"
광준이 회장 책상에 놓인 탁상일기를 흘깃흘깃 보면서 남궁현이나 미스곽 두 사람에게 다
묻는 형식으로 말을 던졌다.
"왜 없겠습니까? 잡지사며 신문사서 좌담회에 나와 달라는 부탁이 줄을 잇다시피했구요, 강
연회에 나갈 일도 오늘만 해도 한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다녀올 일이 금요일에 있습
니다."
남궁현이 대답했다.
"지방에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부산에 불구 여성 수용소가 처음 생겨 준공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
"누님이 직접 운영하는 겁니까?"
"아님니다. 거상그룹의 장통석 회장님이 세우신 겁니다."
"그럼 장통석씨도 같이 갑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그때였다. 누가 화장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열리고 이십대로 보
이는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응, 미스터박 무슨 일이야?"
남궁현이 물었다.
회장님 댁에 모시러 갔더니 아무도 없었어요."
"괜찮아, 회장님이 딴 볼일이 있어서 어딜 가셨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남궁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다시피했다.
미스터 박이라는 청년은 얌전히 문을 닫았다.
"회장님 운전사랍니다."
남궁현이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그래 경찰에서는 무어라고들 합니까?"
"글쎄, 그들은 내 말을 잘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삼 일 기다려 보고 누님이 나타나지 않
으면 실종으로 처리할 생각인가봐요. "
광준이 힘없이 말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남궁이 언성을 높였다.
"당분간 이 사건은 보안을 유지해 주세요. 협의회에도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게좋겠습니
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안다면 시끄러울 겁니다."
광준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째 그런 신통한 생각을 다했다 하고 생각했
다. 광준은 거기서 차한잔을 마신 뒤 김을숙의 차를 타고 거상그룹으로 향했다. 미스곽은 협
의회 사무실에 그냥 남겨 두었다. 그리고 김회장의 일정이며 메모 같은 것을 세밀히 챙겨
아파트에가져다 놓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거상그룹으로 향했다. 광준은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 장통석 회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처음엔 비서실에서 예약이 없다고 딱 갑아땠으나 김을숙씨의
중요한 전갈을 가져왔다고 하자 금방 안내를 해주었다.
장통석은 재벌그룹의 총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김새라고 광준은 생각했다.
조그맣고 볼모양 없는 깡마른 체구에 걸맞지 않게 폭삭 늙어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눈만은
반들반들 빛이 나 보였다. 어떻게 보면 총기롭게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표독스럽게도 보였
다.
"김회장이 보냈다고 ? 그래 무슨 일인가?"
장통석은 앉으란 말도 않고 서류를 뒤지며 광준을 홀것 보았다.
"저... 지는 김회장의 동생인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광준이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장통석은 안경을 벗어 들고 광준을 쳐다봤다.
"동생이라니? 그럼 미국에 있는 친동생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제 돌아왔습니다."
"그래? 자 여기 좀 앉게."
그때야 장회장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 소과로 걸어오며
김광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 웬일로 여기까지..."
장통석이 벨을 놀러 비서에게 차를 시킨 뒤 광준을 쳐다봤다.
"누님께서 어제 둘아가셨습니다."
광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라고? 아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장통석의 작은 눈이 둥그레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이
광준은 어제 일어났던 일을 대강 얘기했다. 눈썹 하나 꼼짝많고 얘기를 다 듣고 난 장통석
은 거머쥔 주먹에 힘을 불끈 쥐었다. 눈에서 는 불이 튀는 것 같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죽일 놈 같으니? 그래 그게 어떤 놈이야 도대체."
"그놈이 누군지 알기만 한다면야 제가 이렇게 장회장님을 찾아뵈었겠습니까? 장회장님은 혹
시 짐작 가시는 일이 있는가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내가 그놈이 누군지 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혹시 평소에 짐작 가시는 일이라도 있으시면... 금전 관계로
해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었나는지... 본인이 죽고 없기 때문에 너무 막연합니다."
"아니 경찰은 무얼 한다고 하던가?"
"경찰은 제 얘기를 잘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손을 써서 범인을 잡는 데 힘쓰도록 해보지 그러나 내가 자네한데 도움을 줄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네. 자네도 들었겠지만 김여사가 하는 일이 하도 대견스러워서
내가 좀도와주고 있었을 뿐이야. 김여사의 활동 자금에 보탬이 될까 해서 만드는 민속품을
해외에 내다 팔아 주기도 하고... 그 이상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네."
"누님과 함께 부산 준공식에 가시기로 했다던데요."
"그렇군. 이거 낭패로군. 나 혼자라도 갈 수밖에 없네."
"누님이 죽었다는 것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내가 더 부탁하고 싶은 말일세."
광준은 더 얘기해봤자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상그룹을 나서면서 광준은 뭔가 석연찮은 것을 느꼈다. 장통석의 태도가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특이 한 생김새나 냉철한 눈동자로 봐서 보통 사람이 해
석 할수 없는 범상한 데가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무당의 예언
해가 뉘엿해서 광준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민속 협의회 남궁현 국장 그리고 협의회의 경리를 맡고 있는
조민희 양, 민속 문화재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공장인 한국 민예사 책임자 주인성 전무 등이
응접세트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고 미스곽은 부엌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남궁현이 주인성 전부와 조민희 양을 광준에게 소개했다.
주인성이란 사람은 삼십대 중반쯤 된 사람으로 전형적인 월급장이 같은 인상이었다.
약간 웃어 보이는 입술 사이로 제멋대로 난 이빨이 내다보였다.
"처음 뵙겠어요. 아니 낮에 사무실에서 잠깐 뵈었죠. 조민희라고 해요."
협의회의 경리를 맡고 있다는 조민희가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예,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광준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진한 초록색의 원피스
위에 받쳐진 얼굴엔 옅은 화장지가 남아 있었다. 목걸이 끝에 매달린 하회 탈춤에 나오는
조그만 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목걸이가 퍽 어울립니다."
광준은 이렇게 말해 놓고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저희 공장에서 만든 것인데 외국서도 인기가 있어 수출이 잘됩니다."
주인성이 설명했다.
"공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협의회 사무실 뒤에 있습니다. 공장은 한이백평 정도되고,
주로 주부들이 부업으로 나와서 일을 하고 있죠. 한 6십명 정도
됩니다. 제품은 모두 거상그룹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주인성 이 또박또박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광준에게 설명했다.
"김선생님 무슨 차를 드시겠어요?"
미스곽이 부억에서 나와 광준한테 물었다.
"거피 한 잔 주십시오."
"예."
미스곽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께서 그런 변을 당하시다니요. 우리나라의 큰 손
실입니다. 우리 회장님처럼 민족의식이 선명한 분은 아마 이 나라에서 찾기 힘들 겁니다. 우
리의전통 문화에 대해 회장님처럼 애정을 쏟는 분은 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
었습니다."
남궁현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까?"
주인성이 물었다.
"낮에 경찰서의 강형사가 왔다 갔어요."
미스곽이 차를 돌려 놓으며 대답했다.
"왜 왔답니까?"
광준이 물었다.
"아직도 김회장한테서 연락이 없었느냐고 하더군요."
뭐 라구요?"
"그이는 아직도 김선생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같았어요."
광준은 참으로 암담한 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사건의 해결을 경찰에 맡길 수만은 없다는
처음의 생각이 더욱 옳았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나만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받는군."
광준이 혼잣말처럼 내뱉자 일행은 모두 민망한 표정이 옛다.
"저, 회장님이 하시던 일 중 중요한 결재는 김 선생께서 당분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만..."
주인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 냈다.
"매일 지출되는 돈도 있고 수표도 끊어야 하고..."
"제가 뭐가 뭔지를 알아야 손을 대지요. 그리고 누님이 하던
일을 제가 꼭 맡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지 않습니다."
광준이 주인성의 말을 가로막았다.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여러 가지로 잘 생각해 주십시오. 김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식구가 백
명에 가깝습니다."
남궁현이 조용히 말했다.
"하여간 지 금까지 하던 일은 남궁국장님 이나 주전무님께서 잘운영해 주십시오, 저는 누님
의 동생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 일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저의 전공과도 전혀 다르고
국내 사정도 잘 모릅니다."
광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행이 모두 돌아간 뒤 미스곽과 단둘이 남게 되자 곽정자는
장부며 서류뭉치며 통장 같은 것을 한아름 들고 나왔다.
"그게 다 뭡니까?"
광준의 눈이 둥그레지자 미스곽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회장님에 관해 좀 구체적으로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차근차근 살펴보시면 혹시 무슨 단서 라도..."
"어디서 그게 다 나왔습니까?"
"회장님의 방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협의회 사무실서도 몇 가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건 회장님의 핸드백입니다."
하얀 진주 같은 구슬이 잔뜩 박힌 노블하게 보이는 끈이 짧은
핸드백을 가리켰다.
"어디 같이 좀 살펴보기로 합시다."
광준은 먼저 핸드백을 열어 보았다.
화장품 따위며 신분증. 휴지 수첩, 저금 통장 등이 나왔다.
광준은 먼저 수첩을 집어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전화번호가 꽉 적혀 있었다. 주로 문화계
의 인사들과 잡지사 전화번호, 신문, 방송국 전화번호 그리고 전혀 알 수 없는 상호의 전화
번호.
그 중에는 거상그룹의 비서실, 경리과 등의 전화번호도 있었다.
요정 이름과도 비슷한 전화번호 하나를 발견했다. 수정궁이라는
이름이 었다.
"수정궁이 뭔지 혹시 아심니까?"
미스곽에게 물었다.
"수정궁요? 예, 그건 요정이에요."
"요정 이 라구요?"
"예. 외국 손님들이 오면 접대하지 위해 가끔 들르는 곳이에요. 우리 민속가구로 온통 꾸며
진 그런 곳이에요."
광준은 그럴 수도 있으리 라고 생각했다. 광준은 통장을 넘겨보았다. 보통예금 통장이 세 개
나 있었다. 광준은 무심코 넘기다가 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됐다.
"이 통장은 누님이 개인적으로 쓰는 겁니까?"
그래요. 공적으로 쓰는 것은 가지고 다니시지 않아요."
"그런데 하루에도 여러 차례 돈을 꺼내 쓴 흔적이 있는데 왜그랬을까요?"
광준은 하루 사이에 이백만 원,일백만 원, 다시 오백만 원, 또일백만 원 등 여러 차례 돈을
껴낸 흔적을 보았다. 그것도 하루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계속해서 돈을 꺼냈다 집어 넣었다 한기록이 나와 있었다.
"무슨 일때문에 이 통장은 이렇게 돈의 출납이 심할까요?"
광준이 통장을 미스곽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내용은 전혀 모르겠는데요. 써야 할 돈은 거의
제가 지불하거나 협의회의 남궁국장이 처리해 왔습니다. 이건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어디 긴히 쓸 일이 있었겠죠."
미스곽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건 무엇입니까?"
서류뭉치 속에서 광준은 설계도의 청사진 비슷한 것을 펼쳤다. 그것은 투시도였다. 강과 조
그만 다리가 보이고 오십여 채의 주택이 서 있는 어떤 마을의 자세한 스케치 투시도였다.
위에는 조그맣게 탈무골 무속촌이라 씌어 있었다.
"탈무골이라니? 이건 우리 고향 마을이 아닙니까?"
광준은 눈이 둥그레진 채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어릴 때 누나를 따라 피라미를 잡으러 다니던 탈무강이 선명히 보였다. 비가 조금만 와도
넘치던 돌다리도 있고 뒷동산 중턱의 무당집도 있었다. 거다란 두 그루 정자나무 밀에 동그
마니 혼자 서있는 무당집이 어린 광준에게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항상 얌전하게 머리를
빗어 올리고 하얀 고무신에 박꽃 같은 하얀
한복을 입고 다니던 무당 아주머니가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일 년에 몇 차례씩 굿을 올릴 때
는 울긋불긋한 장수옷에 쩔렁쩔렁 소리가 나는 칼을 들고 꼭지가 높이 솔은 관을 쓰고 춤을
출 때는 꼭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던 무당 아주머니. 눈을 크게 부라리며 입을 쩍 벌리고
누워 있는 삶은 돼지대가리와 그 무당 아주머나의 무령소리는 언제나 광준에게 무거운 공포
와 신비를 안겨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무당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그때만은 무당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권력 있는 지배자로 둔갑
해 있었다. 광준과 을숙은 밤새워 벌어지는 이 굿판을 몰래 훔쳐보려고 오들오들 떨면서 정
자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오누이는 손을 꼭 쥔 채 그 춤추는 모습을 바라 보며 무서움을
즐겼다.
"맞았어요. 이건 탈무골 지도랍니다. 얼마 전에도 회장님 모시고 다녀왔는데요."
한참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광준을 보고 미스곽이 일러 주었다.
"여기가 무당집이구요. 여기 이 탈무강은 거의 메말라 버렸어요. 미스곽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위로 왔다갔다 하는 미스곽의 손이 퍽 곱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아니, 미스곽이 이곳에 가봤단 말입니까?"
"가봤다뿐입니까? 탈무골이라면 돌멩이 하나까지 모조리 욀지경입니다. 경부 고속도로로 가
다가 김천에서 내려 동쪽으로 삼십이킬로니까 꼭 팔십 리군요."
미스곽이 방긋 웃어 보였다. 뺨의 보조개가 귀여웠다.
"며칠 전에도 회장님 모시고 다녀왔다니까요."
"무슨 일로 갔습니까?"
"여기 씌어 있지요? 무속 민속촌으로 꾸미기 위해서예요. 회장님이 그 사업을 성사시키려고
몇 년이나 애를 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무속 민속촌?"
"예. 정확히 말하면 무격 민속촌이란 게 옳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무당의 마을이 탈무골이래요. 특히 탈무골은 옛날부터 무당이 대를
이어가며 이 마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있는 백순조라는 무당할머니는 제이십팔대라고 하던데요. 하여간
이 마을 사람들은 영혼이 모두 이무당한테 묶여 있다고 보면 옳아요. 선사시대, 즉 부권 사
회 이전의 모권 사회 때의 여성 지배 관습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고 어떤 학자는 말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회장님께서는 유사 이전 제정 일치 사회 때의 사회 개념이 살아 있는 단
면이라고 논문을 쓰기도 했어요. 하여간 탈무골이란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특수한 마을인
것만은 틀림 없어요. 회장님은 이곳을 무속마을로 지정 받아 보존하려고 했어요. 그 일 때문
에 거상그룹 장회장님과도 여 러 번 상의를 했고 문공부 장관도 여러번 만났댔어요"
"그래서 지정을 받았습니까?"
"아뇨, 아직. 그것도 여러 가지 뒷받침이 없으면 안되나봐요.
우선 마을을 지 할 사단법인 같은 재단이 있어야 하고, 돈도 꽤 들고... 또 그곳 주민들을
어떻게 하느냐는 등 복잡한 문제가 많은가 봐요."
광준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그곳이 정신사적 세계나 민속학적 가치가 어느 정도 있는지
는 모르지 만 누나가 늘 그리던 고향 마을에 애착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
다.
"참,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었어요."
미스곽이 갑자기 생각난 듯 생기가 돌았다.
"저번에 회장님을 모시고 갔을 때 마침 천도굿이 열리고 있었어요. 천도굿이란 죽은 사람미
좋은 곳에 가라고 올리는 굿이죠. 그때 백순조 무당이 구경하고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아니
회장님을 가리켰다고 생각해요. 좌우간 우리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부정한 새가 타지에
서 날아왔구나. 부정한 새여 죽어라.
만월이 되기 사흘전 새는 죽는다. 저 부정 한 새는 죽는다. 어쩌구 했요. 마치 회장님을 몹
쓸 사람이나 보듯이 저주스럽 게 말하더군요. 공연히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어요."
미스곽은 그때가 몸서리쳐진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부정한 새?"
"그때가 언제죠?"
'한 열흘쯤 됐어요."
"오늘이 음력 며칠입니까?"
미스곽이 발딱 일어나 달력을 짚어 보았다.
"이월 십삼일인데요."
""그럼 오늘이 만월이 되는 보름의 이틀 전이군요."
"그러고 보면 이세기 사흘 전... 어마나!"
미스곽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광준과 정자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잊었다. 텔레비전의 정지화면과도같은 절대 정적의 시간이 잠
깐 흘렀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김선생님."
미스곽이 거의 사색이 되었다.
"거 참으로 묘한 주술이군요. 무당의 예언대로 된 셉이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우연의 일치
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덮어놓고 지껄여 댄 예언이 맞는 수도 있거든요."
광준은 미스곽의 불안한 마음을 씻어 주려고 말은 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만약 그 백
순조 무당의 저주가 어떤 초능력적인 힘이 있었거나 아니면 죽음을 예견하고 한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더 앞으로 나가 생각하면 무슨 음모를 꾸며 놓고 예언할 수도 있는 것
이다.
"전 꼭 그렇게만은 생각지 않아요. 예언가나 무격들은 현대사회에서 분석되지 않는 신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유리겔라 같은 집력 이라든지... 이십팔대를 이어온 세습 무당
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 무슨 신비 한 힘 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스곽은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잘 준비나 하지요."
광준이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자꾸 얘기하다가는 자기도 그 어떤 신비한 힘에 빨려들 것
같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받아 뒀어요."
미스곽이 일어서며 말했다.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듯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 말을
하고는 미스곽도 멋제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은 주무시기 전에 늘 샤워를 하셨거든요."
"저는 그냥 자겠습니다."
광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님이 쓰던 침실로 들어갔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모로
발을 늘어뜨리고 누웠다.
누나의 죽음 뒤 엔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음모가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낮에 만났던 사람
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려 봤다.
재벌 총수의 인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볼품 없는 왜소한
장통석 거상그룹 회장. 그러나 눈빛만은 무언가 해낼 것처럼 유난히 반짝이던 사나이. 그 작
달막하고 야윈 체구가 집념으로 똘똘 뭉쳐진 것만 같았다.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무언가가 풍긴다고 생각했다.
남궁현이라는 사나이. 연극 배우라도 함직한 서글서글한 행동. 큰 키에 비교적 호남 스타일
의 삼십대였다. 여자들한테 꽤 인기가 있을 그런 사나이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무슨 일을
꾸미자면 꾸밀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민예 회사 전부인 주인성. 깐깐하고 빈틈없는 듯한 인상의 사나이다. 얼굴은 특징적인데가
거의 없지만 그 전체가 하나의 특징적인 프로필이다. 또박또박한 말씨. 경리사원 출신 같은
얌전하고 바른 예절을 지녔다.
조민희. 첫인상은 전형적인 오피스걸이다. 열은 화장이 그의 쪽빠진 뾰족한 턱을 잘 거버하
고 있었다. 그리고 새하얀 살결이
형광등 밑에서는 납인형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녀대로 풍기는
강한 개성이 있었다.
그리고 짧은 머리에 무뚝뚝하고 성실해 보이는 운전수 박기사.
광준은 깍지를 끼고 눕혔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거실 곁에 있는 욕실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어머나"
앗차! 이런 실수가...
거기는 미스곽이 발가벗은 채 샤워를 하고 있다가 기겁을 했다.
미끈하고 눈부신 뭄매였다. 물에 젖어 더욱 윤기가 흐르는 머리 밑으로 화장이 지워진 순박
한 얼굴. 갸름하고 놀라움으로 긴장된 긴 목. 유연하고 반월형으로 축 늘어지다시피한 매력
적인 어깨.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기하학적 인 두 개의 젖무덤. 그 끝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열은 핑크빛의 젖꼭지 창고의 곱게 흐른
곡선처럼 적당히 파인 허리선. 그 밑으로 대리석처럼 쭉 뻗은 두개의 다리.
미스곽은 두 손으로 얼른 가슴을 감싸며 옆으로 돌아섰다.
"이거 시... 시... 실레했습니다,"
잠깐 동안 멍청 했던 광준은 황급히 욕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불과 일, 이초 사이에 뇌리에 찍힌 미스곽의 놀랍고 육감적인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
다.
광준은 허겁지겁 침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 소년처럼
어쩔 줄을 물랐다.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그러나 방금 눈앞에 전개되었던 황홀한
모습이 눈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고혹적이고 매끈한 정자의 살결이 자꾸 움직이는 것 같았다.
미스오리 라는 별명 이 붇을 정도의 볼륨 있는 히프가 숨이 막히게 얼굴 앞에 콱 다가서는
것 같았다.
광준은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끈적끈적한 욕망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누님의 비참한 최후를 본 것이 엊그젠데... 아직 누가 누님의
시체를 훔쳐서 달아났는지도 모르는데... 누님의 복수는 커녕 원통한 죽음의 원인도 알지
못하는데..."
광준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누님을 죽인 범인은 내 손으로 꼭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뭣 때문에 착한 우리 누님
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꼭 캐내고 말겠다. 누님의 시신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이튿날 아침 식당에 앉은 광준은 더없이 겸연쩍어졌다. 공연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
다. 미스곽도 어색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회장님이 누구한테 형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이 정자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자 씨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광준은 말해 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이때까지 미스곽이라고
만 불렀는데 왜 갑자기 정자 씨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무심결에 그렇게 불렀지 만 따지고
보면 그 호칭 이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고 스스로 생각했다. 미스곽이 란 보통 사무적인 남녀관계 혹은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 자연스럽게 호칭되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나 정자 씨는 그런 관계가
아닌 보다 인간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호칭이라고 광준은 스스로 해석했다. 어젯밤의 조그마
한 욕실 사건이 호칭을 무의식중에 바꿔 놓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통장 말인데요. 왜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그렇게 돈을 찾아갔을까요? 더구나 저를 시키
지도 않고 혼자서 말입니다."
미스곽이 찻잔을 광준 앞에 밀어 놓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좀 빗나간 게 아닐까요, 만약 누구한테 협박을 답해서 돈을 줄 판이면
한꺼번에 찾지 그렇게 여러 차례 은행에서 돈을 꺼낼 턱이 없구요. 더구나 돈을 빼낸 것만
이 아니라
집어넣기도 했거든요."
광준이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열심히 수저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도 그렇군요. 그럼 저도 모르는 무슨 사업을 벌였거나 아니면... 참 알 수가 없군요."
"그것이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조. 하여간 놀라운
사실은 탈무골 무당의 예언입니다. 정자씨는 왜 그 얘기를 어젯밤에야 들려 주었습니까?"
"언제 김선생님하고 조용히 얘기할 틈이 있었나요. 더구나 저는 그런 하찮은 얘기는 귓전으
로 흘려듣고 있었어요.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러나 그 예언의 날짠가 꼭 맞는다는 데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미스곽의 얼굴에 다시 공포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았다.
광준은 그날 낮 경 찰서로 찾아갔다. 그러나 추경감이나 강형사는 경찰서에서 벌써 시경 강
력계로 철수해 버린 뒤였다.
광준은 다시 시경으로 추경감을 만나러 갔다.
"이거 김광준 씨 아닙니까? 밖이 몹시 춥지요."
추경감이 의자를 권했다.
"예 기온은 어제보다 높아졌다는데 더 추운 것 같군요."
"아직 붐이라고 하지만 바람이 불어서 체감 온도가 더 낮은 것
같아요. 겨울이 다시 오나 할 정도지요."
추경감의 눈 가장자리가 더욱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그가 웃을 때의 특징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오늘 여기까지..."
"범인에 대한 것은 좀 알아보셨습니까?"
광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글쎄 그게 하루 이틀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어디서 누님이 전화 같은 것을 걸어온일은 없습니까?"
"예? 아니 죽은 사람도 전화를 겁니까?"
광준은 눈이 둥그레졌다.
"꼭 죽었다고 단정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솔직 하게 말해 광준 씨가 보신 그 환상은..."
"환상이 라구요! "
광준이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화는 내지 마십시오. 김회장님은 집에 돌아오지 못할 급한 사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민속자료에 너무 집착하시는 분이 라 또 어느 특수한 마을을 발견하고 조사에 열중
할지도 모르구요."
"아니 경감님!"
"예. 다 압니다. 하지만 사횰 동안 집에 안 돌아왔다고 해서
가출이나 실종으로 수배를 하기는 좀 뭣하고..."
광준은 기가 박했다.
"그게 아니에요, 경감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듣고 있습니다."
추경감은 여전히 능글능글한 표정이다.
"누님은 그날 죽게 된다고 누가 예언을 했습니다."
"예? 예언을 했다구요?"
"그렇습니다. 제 말 좀 들어 보시고 판단하십시오."
광준은 어젯밤에 미스곽한테서 들은 탈무골 무당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광준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동안
추경감은 빙그레 웃으며 들어 주었다. 도무지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거짓말 같습니까?"
광준은 하도 화가 나서 볼멘 소리로 되물었다.
"천만에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 수사에 참고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김선생,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지 마시고
좀 느긋하게 기다려 봅시다."
추경감은 여전히 능글능글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광준은 더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섰다.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부탁 드리지만 김선생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 같
으니 며칠 푹 쉬는게 좋을것 같군요."
추경감의 말이 화가 잔뜩 난 광준에겐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광준은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삭이느라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왔다.
광준이 민속 문화 보존 협의회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남궁국장은 어느 젊은 기자에게 시달리
고 있는 형편이었다.
옆에서 얘기하는 걸 얼핏 들어봤더니 김을숙 회장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실종이라뇨?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야 합니까? 더구나 피살설이란 더 말
도 안 됩니다.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궁현은 광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더 큰소리로 말했다. 마치 광준이 빨리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라는 투였다.
"글쎄 출장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출장간 곳과 무슨 일로 갔는지를 좀 얘기해 달라는
것 아님니까?"
젊은이도 꽤 집요하게 따지는 것 같았다.
"아! 마침 회장님의 계씨되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직접 말씀
드려 보시죠."
남궁현은 광준이 사태를 짐작하게끔 큰소리로 떠든 뒤 응원을
요청하는 투로 말했다.
"김선생님 인사 나누십시오. 서울 매일신문 사회부의 임기자
입니다. 글쎄 김회장에 관해 터무니없는 루머를 어디서 듣고 오신 모양인데요"
남궁현이 임기자를 광준에게 소개했다.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김을숙 여사는 제 누님이니까 저하고
망씀을 나누실까요."
광준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옆에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임 철 기자입니다."
임 기자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쿨이 갸름하고 유순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오
똑한 콧날이나 빛나는 눈동자. 만만확은 사람임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조민희가 차를 가져왔다. 어젯밤에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있었으나 오늘은 진한 회색 원피
스 위에 갈색의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퍽 세련되어 보였다.
"누님의 신상에 관해서라면 아는 대로 말씀드릴 테니 물어 보십시오."
광준은 단단히 각오를 하고 말했다.
"예. 조금 전에 시경에 들렀다가 추경감이라는 사람이 누구하고 전화하는 내용을 얼핏 들었
는데. 김을숙씨 피살이니 실종사건이나 하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김을숙 씨라면 우리
민속문화계의 명사이신 김회장이 얼른 떠올라서 왔습니다."
"아. 그렇게 되셨군요. 하지만 임기자님, 전화번호부를 한번
넘겨 보십시오.김을숙이란 이름이 수없이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김을숙이 어디 누님 한
분뿐입니까?"
"그럴 수도 물론 있습니다. 동명이인이 수배가 되는지 피살이
되는지 실종이 되는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추경감이란 사람한테 내용을 물어 보셨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능구렁인데 순순히 얘기할 것 같습니까? 지방서 에서 어떤 여자에 관해 물
어 온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누님은 지금 지방에 출장중입니다. 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무슨 학술조사의 자문을 좀 해주느라고 늦는다고 했습니다."
"그 지방이란 곳이 어딥니까?"
"지리산 근방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학술조사단이 철수할때까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광준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내심 놀랐다. 또 한편으로 왜 누님 피살 사건을 쪽 세상에 숨기기만 해야 하느냐고
스스로 자문자답도 해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사건을 밝힐 때까지는 세상에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행여 생전의 깨끗한 김을숙이란 이름에 티끌만한 먼지가 묻을까
두려워 했다.
또한 누님이 여기저기 벌여 놓은 사업이 혼란에 빠질우려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학술조사란 것은 무슨 문화재를 발굴하는 작업입니까?"
임 기자는 금방 광준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그것도 저는 잘 모릅니다. 제 전공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전공은 실례지만 무엇입니까?"
"반도체 입니다."
이때 남궁현이 끼어들었다.
"김선생님은 미국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며칠 전에 오셨습니 다."
"예, 그러셨군요."
임 기자는 완전히 속야 넘어간 것 같았다. 더구나 김광준이
박사학위를 받고 며칠 전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자 김을숙에 대해 캐는 것은 완전히 단념한
것 같았다.
"그 문화재 학술조사 작업 이 끝나면 저한테 좀 연락해 주실수 없습니까? 발표하기 전에 말
입니다."
임기자는 이제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야 알려 드려야지요. 하지만 그건 저희 협의회서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단순히 지방 강연을 나가셨다가 조사단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뿐
입니다. 하지만 임기자님께 도움 될게 있으면 꼭 전화를 드리지요."
남궁현이 금방 거짓말을 꾸며 댔다.
"이거 실례 많았습니다."
임기자가 일어서서 예의 바르게 절을 한 뒤 사무실을 나갔다.
광준과 남궁현 그리고 조민화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선생님 참 거짓말 잘하시더군요."
조민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임기응변이라고 하는 거야."
남궁현이 조민회를 나무라듯 말했다.
"어쨌건 김선생님이 말씀을 잘해 주었습니다. 나한테 어떻게
나 캐묻고 물러서 지 않는지 흔났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신문에라도 보도된다면 우리 협의
회는 물론 공장이나 다른 협회도 쑥밭이 되고 맙니다."
남궁현이 아찔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삼. 수정궁의 비밀
광준은 김을숙 회장의 수첩에 적혀 있는 수정궁이란 곳을 찾기로 했다. 특별히 수정궁을
가 보기로 한 것은 수상하다고 느낀점이 있기때문이다.
궁의 위치가사직공원 근방인데다 김을숙이 거래한 통장이 사직동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우
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지명이 같았고, 김을숙의 집이나 사무실과는 동떨어진 은행에 통장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하루 사이에 몇 차례나 돈을 넣었다 찾았
다 한 점이 이상했다.
"어서 옵쇼. 예약을 하시려고요? 어느 여행사서 오셨죠?" 광준이 들어서자 웨이터인 듯한
사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을 지레짐작으로 해댔다. 외국 관광객이 꽤나 단체로 드나드는 모
양이 었다.
광준은 미국의 교포사회에서도 조국을 비난할 때 가끔 듣던
기생파티 같은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집 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저 어..."
광준이 머뭇거리지 사내는 재빨리,
"이쪽 사무실로 들어옵쇼. 지배인을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하고 정원 모퉁이로 안내했다. 꽤 널찍한 정원에 사철나무며
향나무가 손질이 잘 돼 있었다. 여기저기에 돌로 깎은 장식물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고 청사초롱을 본뜬 옥외등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적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으나, 광준의
눈에는 어쩐지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잗은 것 같았다.
"제가 지배인 박입니다."
이런 집에 어울리지 않게 사무실같이 차려진 조그만 방에 지배인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예, 저는 김광준이라고 합니다. 잠깐 좀 여쭤볼 것이 있어서... "
광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배인의 낯빛이 갑자지 바뀌는 것 같았다.
"세무서에서 나오셨군요."
"세무서요? 아, 아닙니다."
광준이 당황해 하자,
"아아, 기관에 계시는 분이군요. 앉으십시오. 요즘 영 파리를
날리는 판이라 전 또 세무서에서 나오셨나 하고... 허허."
지배인은 멋적은 듯이 웃었다. 광준은 더욱 당황해 하며,
"그것도 아닙니다. 전 김을숙 여사의 동생입니다. 김회장님
말입니 다."
엉겁결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예? 김회장님 동생이라구요?"
지배인은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예, 그렇습니다. 누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물어 보다뇨? "
"붜 별 것은 아니군요. 누님에 대한 전기 같은 것을 제가 쓰고있는데요. 쑥스러워 누님께 직
접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요. 저는 소설가입니다."
광준은 그렇게 둘러대놓고도 내심 거짓말을 잘 둘러대는가 하고 놀랐다.
"그러세요? 그런데 뭘 물어보실 게 있는지요."
지배인은 완전히 석연찮은 표정이다.
"누님이 여길 자주 들르셨습니까?"
"자주라기보다 가끔 손님들을 모시고 왔죠."
"어떤 손님들이었습니까?"
"그야 뭐 여러 층이조. 사업하시는 분이라든가 예술가라든가
아무튼 명사들이 워낙 우리 집을 애용하니깐요."
"장통석 화장도 자주 옵니까?"
"장회장님요? 거상그룹 말씀이죠. 물론 자주 오십니다."
"누님하고 같이 오십니까?"
"김회장님하고요? 글쎄 그런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요."
쉽게 뭔가를 얘기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광준은 이것저것 몇마디 더 물어보았으나 형식적인
대답밖에는 하지 않았다.
광준은 별 소득도 없이 그 집을 엉거주충 물러났다. 정원을
내려오다가 뜻밖의 사내를 만났다.
"김광준 씨 안녕하십니까? 여긴 웬일이십니까?"
싱글싱글 웃음을 띠며 말을 건 사람은 강형사였다.
"아니, 강형사님이 여길 웬일이십니까?"
강형사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저를 미행했군요?"
"미행하다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냥 여길 지나가다가
광준씨가 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웬일인가 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쇼."
광준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 뭘 좀 알아냈습니까? 누님 소식이라도 들었나요?"
강형사는 여전히 능글맞게 수작을 걸었다.
"죽은 사람이 무슨 소식을 전합니까?"
"여긴 김을숙 여사의 단골집이 아닙니까? 혹시..."
"들어가서 물어보십시오. 실례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강형사가 광준의 뒤에 대고 말을 던지다시피 했다.
광준은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우선 남의 뒤를 슬슬 밟아다니는게 아무리 직업이라고 하지
만 밉살스럽게만 보였다.
광준은 수정궁을 나와 은행 사직동 지점 에도 들러봤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비탈걸을 내려오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광준이 미국에 있을 때 가끔 편지를 주고받던 동창생
하나가 생각났다.
한규빈. 그는 광준과 같은 계통인 반도체를 공부하다가 지금은 거상그룹의 주력 기업인 거
상전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석이라면 장통석 회장에 대해 뭔가 좀 알지 모튼다. 이삼 년
전 그가 뉴욕에 있을 때 한규빈은 장회장의 아들과 함께 그곳에 잠시 있은 적이 있었다. 장
회장의 아들이 뉴욕의 무슨 음악회에 왔을 때 한규빈이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왔던 것이 기
억났다. 회장 아들의 보호자 역할까지 했다면 그 집 사정 에 대해 뭔가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광준은 자꾸 마음 한구석에 누님과 장회장과의 사이를 떠올리곤 하는 것이 불유쾌하다고 생
각하면서도, 그 결백 관계를 밝혀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광준은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전화번호부에서 거상전자를
찾아내고 여 러 차례 전화를 건 끝에 한규빈과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짜식아 왔으면 형님부터 찾을 일이지 뭐하고 자빠졌냐? 거기
가 어디냐?"
한규빈은 몹시도 반가워했다.
"좌우간 좀 만나줬으면 좋겠어. 좀 상의 할 일도 있고 말이야."
두 사람은 저녁 무렵 시청 옆 호텔 거피숍에서 만났다. 한규번이 반가워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인정이 많아 학교 시절에도 남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던 친구였다.
광준은 누님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커피숍에서 두어 시간이나 소비한 뒤 다시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학교는 언제부터 나가기로 했냐? 교수님?"
소주 몇 잔을 마시자 한규빈은 기분이 조금 오른 모양이다.
그보다도 말이야. 실은, 나 너한테 부탁이 좀 있어서..."
광준은 말문을 열었다.
"짜식아 너와 나 사인데 부탁이 뭐냐 부탁이. 뭐든지 말해. 나들이 줄테니. 단 한 가지 마누
라를 빌려 달라는 것만 빼놓고..."
그는 말끝마다 짜식아를 연발했지만 광준에게는 듣기 싫기 보다는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했
다.
"너희 회사 장통적 회장 말이야."
"음. 그 도요또미 말이지"
"도요또미 라니?"
"장회장 별명이야. 그 왜 임진란을 일으켜 우리 민족을 못 살게 한 도요또미 히데요시란 놈
있잖아. 우리 회장님의 풍채가 꼭 그놈 같다고 해서 붇은 별명 이야.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눈만 반들반들하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나봐."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누가 봤냐?"
"수염 삼천 척에 퉁방울눈의 관운장은 누가 봐서 아는 일이니? 짜식아."
"그건 그렇고, 장통석인지 도요또민지 하는 그 회장 말이야."
"짜식아 회장님은 좋은 분이야,"
"그래 그 회장님에 관해서 좀 알고 싶어."
"뭘 알고 싶단 말이야?"
"뮈 든지"
"뮈든지? 하하하, 웃기네."
"예를 들면 사생활이라든지 하루 일과라든지 자주 다니는 요정이라든지 또..."
"또 뭐냐?"
"여자 관계라든가..."
"짜식아 하필 도요또미의 그런 것을 알아서 뭘 하려고 그래.
너 혹시 돈 내라고 협막편지 보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예끼!"
"하하하. 짜식아 농담이야. 무슨 일 때문에 알고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유는 묻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내일 자세히 리포트를 만들어 교수님
께 제출할 테니 그건 염려 말고 술이나 마셔 짜식아. 참 별놈 다 보겠어. 전자공학 박사님이
남의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다니..."
한규빈은 이렇게 활달하고 마음씨 좋은 친구였다.
광준이 열두 시가 가까워서 집에 들어갔을 때 미스곽은 자지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자씨 미안합니다."
"아무 연락도 없으시기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서울지리도 잘 모르실 텐데..."
미스곽은 진심인 것 같았다.
"저녁 진지 드세요."
"예."
광준은 아무 말도 않고 식 당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미스곽이 금방 찌개를 가스불에
데워다 놓고 마주 앉았다.
"정자씨도 저녁 전입니까?"
"예. 오시면 같이 먹으려고요."
"저런! 그러실 것 없었는데요."
광준은 정자가 다시 한 번 오래 전부터 알아온 친근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장가를 들면 아
내가 이런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준은 정자를 보던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어쩐지 어색했다. 서툰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자는 광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에 핑크빛 물이 들었다.
광준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려 밥을 먹는 둥 마는 통하고 누
님 방으로 건너갔다.
"목욕 안하세요?"
"목욕?"
광준이 뒤둘아서서 반문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동시에 두 사람은 얼굴이 홍당무
가 됐다.
전날 밤 욕실에서 벌거벗은 채 마주친 것이 동시에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스곽은 아무말 않고 돌아서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이튿날 아침.
미스곽이 광준이 자는 방문을 급히 두들겼다.
"광준씨! 광준씨!"
광준이 잠이 덜 깬 채 누워 있다가 주심주섬 옷을 입고 문을
땄다.
"광준씨."
미스곽은 몹시 당황한 표정이다. 손에는 편지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이것 좀 보셔요. 어제 온 것인데 깜박 잊고 있다가 아침에 뜯어 봤더니... 글쎄..."
편지를 건네주는 정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광준이 재빨리 읽어 내려갔다.
" 곽정자 앞
깜찍하고 악한 참새는 저주를 받았다. 신령님이 하시는 일을
참견했기 때문에 너는 이월 둘째 인날 인시에 죽으리라"
편지는 간단히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붓이나 연필로 쓴 것이
아니라 타자로 쳐져 있었다.
광준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광준은 불안에 떠는 정자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천천히 앉혔다.
광준은 이 순간에 자기가 퍽 어른스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염려 마십시오. 누가 장난을 한 것일 겁니다."
"장난이 아녜요. 이건 틀림없이 그 탈무골 무당할멈의 저주에
"탈무골 무당..."
"예. 틀림없어요. 회장님도 그 무당할멈이 잡아갔어요."
"그런 허무맹랑한 저주를 믿지 마십시오. 그건 미신입니다.
제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광준은 그렇게 위로는 하면서도 내심 섬뜩한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누님 김을숙 여사도
그 무당이 죽는 날을 예언했다고하지 않는가? 최첨단 과학인 반도체 박사가 이런 황당무계
한 주술 앞에 가로놓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냉정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무슨 무당할멈이 타이프 라이터를 씁니까? 이건 못된 놈의
장난이니 놀라지 마십시오! 편지 봉투는 어디 있습니까?"
미스곽이 편지 봉투를 내놓았다. 편지 봉투는 특별한 특징이
없었다. 하얀 긴 봉투에 옆으로 이 곳 주소가 타이핑되 있고 곽정자 앞이라고 찍혀 있었다.
흔히 백화점 같은 데서 안내문을 넣어서 '번지내 투입' 하고
보내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발신인 주소나 이름은 없었고,
회현동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회현동? 광준은 거상그룹
본사가 회현동에 있다는 것이 얼른 머리에 떠올랐다. 며칠전 거상그룹의 장회장을 만나러
같 때 건너편에 있는 우체국 간판을
보았던 것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인날이라는 것이 뭡니까?"
광준이 정자를 보고 물었다. 정자는 국학 전공이니까 잘 알것 같았다. 광준은 불안한 눈및을
하고 있는 정자를 건네다보았다. 의지하고 싶은. 호소하는 듯한 가련한 눈빛이었다.
"인날이란 일진이에요."
"일진이 뭡니까?"
광준은 어릴 때 어른들한테 듣던 소리 같았다. 미스곽은 다소 불안한 그림자가 옅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학생한테 여선생님이 하듯 설명했다.
"인이란 한자로 호랑이를 뜻하지요. 여기선 십이간지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음력으
로 세월이다 시간을
해아릴때 육갑이라고도 하는 이 간지를 썼어요. 매년 매년, 매일 매일, 매시 매시를 간지로
표시했답니다. 간지 중 간이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열 자가 있고
지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열둘이 있지요. 이 열둘이 숫자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
다. 달력을 가지고 오지요."
미스곽이 안방으로 들어가 하루가 한 장씩 된 달력을 가지고왔다.
"이월 둘째 인날이란 이 날이에요." 정자가 가리킨 달력은 음력으로 이월 십팔일이었다. 한
자로 무인이라고 씌어 있고 호랑이의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음력 이월 십오일입니다.""사흘뒤군요, 그럼 인시란 몇 시입니까?"
광준은 제법 심각하게 물었다. "자시가 밤 열두시를 말합니다. 한 지는 두시간 간격이니까
새벽 세시나 네시께를 말하는 거죠."
"그럼 다시 해석하면 음력 이월 십팔일 새벽 네시께란 말이군요."
광준이 신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셈이에요. 어쩌면 좋아요." 미스곽이 다시 불안해 했
다. "광준씨, 나 오늘부터 혼자 있지 않을래요." "그러면?"
"광준씨도 아무데도 가지 마세요. 집에 꼭 붙어 있어요. 어디든지 가면 따라 나설래요. 나
정말이에요." 미스곽의 말은 정말인 것 같았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걱정 말아요. 문을 꼭 잠그고 있으면 허요. 여기가 십일층인데
누가 어떻게 들어온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런 시렁뱅이의 허황한 장난을 설마 지성인인 정
자씨가 믿는 건 아니겠지요."
"광준씬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제가 당사자라도 마찬가집니다. 아니 전 저 보다 정자씨 걱정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는
그런 냉혈동물은 아닙니다."
"그 말씀 정말이에요?"
광준은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너무 속이 내다보이는 것 같아 겸연쩍었다.
"믿어두 돼요?"
"그럼. 믿으셔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푹 놓으세요.
내일 우리 그 탈무골이란 델 좀 가 봅시다."
"탈무골엘 가요?" "예. 아무래도 거기 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그것은 사실이 었다. 광준은 아무래도 그 백순조 무당이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그때 열려 있는 문으로 두 남녀가 들어 왔다. 남궁 사무국장과
미스조였다. 조민회의 열은 보라색이 그의 얌전한 인상과 잘 어울렸다.
"안녕들 하셨어요?" 조민희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인사했다.
미스곽은 재빨리 그 문제의 편지를 응접세트 서랍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어서 오세요." "무슨 소식이 좀 있었습니까?" 남궁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 긴 다리
를 포개 올리며 말했다. "아직... "
그 경찰관이란 사람들은 뭘하고 있다고 하던가요? 나원. 추경감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입니
다. 그게 무슨 경찰관이에요? 쪽 배추쟁이 같이 생긴 데다 영락없는 촌놈입디다."
남궁현이 늘어 놓았다. "추경감을 언제 봤습니까?" 광준이 물었다.
"어제 우리 협의회 사무실에 왔더군요." "거긴 왜요?" "글쎄 누가 압니까? 수산가 뭔가를 하
고 다닌답시고 왔던데... 아이구 그 주제에 무슨 수삽니까? 회장님 방에 들어가서
한바퀴 헹 둘러보고 어디서 전화 온 것 없느냐, 장회장과는 어떤 사이다, 장회장과의 금전거
래는 어떻게 돼 있느냐, 매일 몇시에 여기 나오느냐, 자주 다니는 곳은 어디냐 뭐 이런 상식
중에도 상식적인 것만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하도 심통이 나서 그래 가지고 범 인이 잡히
겠느냐고 따졌더니, 스스로 가출한건지
사고가 났는지 오르는데 무슨 범인이냐고 하더군요. 나원참!"
남궁현은 연방 담배불을 부졌다 다시 피웠다 하며 떠들었다.
조민희는 고개만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경감을 믿고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되겠고 회장님 원수는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혹시 짐작가는 데라도?" "그런 짐작가는 데가 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남궁 국
장님은 혹시 수정궁이란 델 아십니까?" 광준이 묻자 남궁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수정궁이 라뇨?" "사직동에 있는..." "아아 예. 알죠. 언젠가 회장님이 외국 손님들이 왔을
때 모시고 갔었죠. 그건 왜 묻습니까?"
광준은 남궁현이 뜻밖에도 당황해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뭔가를 숨기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출근길에 들른 것은 회장님 건도 있지만, 경리관계를 좀 보고
드리려고 ... 미스조 그것..." 조민희가 핸드백에서 수첩 같은 것을 꺼냈다.
'협의회나 민예사의 돈 관계는 제가 맡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건 남궁 국장이
나 주인성 전무께서 처리해 주셔요. 전 그런 건 전혀 모릅니다." 광준이 손을 내저었다. 조
민희가 수첩을 꺼내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목걸이 끝에 달린 하회탈의 이
미테이션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래도 회장님을 대리해서..." "전 그런 자격 없습니다. 제
발..."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보고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조민희가 수첩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날 저녁 호텔 커피숍에서 광준은 한규빈을 다시 만났다.
"짜식아, 이건 극비 리포트다. 메모한 것이니까 나중에 보고, 내 얘기부터 들어봐."
한규빈이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타이핑된 종이 두어 장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장통석 회장의
재산이며 신상에 관한 메모였다. 가족, 주소, 경력, 출입하는 골프장, 요정, 그런 거였다. 그
중에는 삼송리에 있는 별장도 있었다."너 장가부터 들어라 짜샤." "뚱딴지 같이..."
"뚱딴지가 아냐. 회장님 딸 중에 막내가 있는데..." "야, 야 그런 얘기는 집어 치워라."
"짜식아, 보통 재벌접 막내딸 하면 얼른 생각나는 도도한 그런여자 아냐." "그래도 그건 싫
어." "얼씨구. 얘기 듣지도 않고?" "들을 것도 없어. 그 얘긴 그만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
자." "짜식. 고집은 여전하구나. 아니면 숨겨 논 여자라도 있니?" 숨겨논 여자? 그 말에 광
준은 엉뚱하게도 아파트에 있는 곽정자의 얼굴이 떠올라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있다 있어." "정말이야?" "정말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지" 둘은 근처 일식집
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한규빈은 장통석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설명했
다. 체구는 작고 볼품없지만 사람은 당차고 야무지다는것. 기억력이 비상해서, 특히 숫자
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해서 휘하 사장이나 경리 담당 이사들이 늘 깨진다는 이야기. 보기는
매섭지만 인정이 두터워 말단 직원의 불행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회사에선 인기기 좋
다는 것. 사교술이 능하고 영어, 일어, 불어를 잘 구사해 상담에 능하다는 것. 바쁜 틈틈이
요즘은 아라비아어까지 배워 중동 고객과 인사 정도는 나눈다는 얘기. 딸이 여섯에 아들이
하나인데 지금 미국서 바이올린 공부를 하고 있고 딸 다섯은 출가하고 막내딸은 어느 고아
원의 보모 노릇을 자청해서 하고 있다는 얘기. 나무랄데 없는 가장이고 그룹 총수지 만 여
자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삼송리에 있는 별장에는 가끔 어떤 삼십대인지 이십대후반인지
하는 미인과 자주 가서 밤을 세운다는 얘기 등이었다.
광준은 여러 얘기 중에 여자를 좋아해서 삼송리 별장에 자주 데리고 간다는 여인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 여인은 어떤 여자야?" "그건 아무도 몰라. 극비사항이니까. 내가 언젠가 급
한 심부름이 있어 한 번 별장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얼핏 본 일이 있긴있어. 굉장한 미인
이라고 생각했지" "누군지 신분은 모르고 ?' "짜식아, 그걸 어떻게 아니. 재벌 영감 따라다
니며 아양떠는년이 다 그렇고 그렇지 무슨 볼일 있겠니?" "그 별장에 한 번 가볼 수 없
어?"
"야, 너 이상하구나. 그건 캐서 뭘 할려고 그러니?" 한규빈이 처음으로 광준에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담에 얘기해 줄께. 그 별장에 꼭 좀 데려다 줘." 광준이 단단히 결심
했다고 생각하자 한규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 사정은 네가 얘기할때까지 묻지 않기로 하겠어. 반도체 박사가 남의 스캔들을
캐겠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는 안가지만 그렇게 하지 짜아식." "지금 가보자 그럼"
광준은 어쩐지 더 이상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님이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을 얻
기 전에는 일 초도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광준 자신 속
의 또 하나의 광준한테 통쾌하게 복수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좋아, 가자. 짜식. 광준이답지 않게 성미가 급해졌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나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나는 인정해. 마침
외국서 급히 들어온 상담이 있어 보고할 게 있었어. 내일 아침
비서실로 보내도 되지만 멍청한 척하고 급할 것 같아 왔다고 하면돼."
"그럼 장통석 회장이 지금 별장에 있다는 말이야?"
"짜식 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갔다가 있든 없든 왜 왔냐고하면 사실을 대야 하지 않아.
너 운전할 줄 알지?"
"알지만 노클러치 차가 아니면... 더구나 서울은 길을 몰라..."
"그럼 됐어 짜식아. 넌 운전사로 따라가는 거야."
두 사람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통하고 삼송리로 갔다. 차는
한규빈이 자기차를 몰고 갔다. 입구에 가서와 나올 때만 광준이 운전하기로 했다. 광준은 차
를 타고 가면서도 괴로웠다. 공연한 생각을 해가지고 돌아가신 누님한테 죄를 짓는다고 생
각했다. 김을숙 여사가 천하에 둘도없는 착하고 인정많고 정결한 지성인인 김을숙 여사가
광준의 이런 불순한 생각을 안다면 비록 영혼이나마 얼마나 섭섭해 할 것인가? 별장에는 별
장지기 노부부만이 있고 장회장은 없었다. 광준은 혼자 일단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 밤중에 한 부장님이 웬일이십니까?"
6십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별장지기 마누라가 놀라는 표정이다. "회장님이 혹시 여기 계신
가 해서 심부름 좀 왔었어요. 좀 들어가서 쉬었다 가도 됩니까?" 한규빈이 물었다. "물론입
죠. 저녁은 드셨나요?" "예. 걱정 마십쇼." "그럼 커피나 한잔 대접합죠." 광준은 한규빈을
따라 별장 거실로 들어섰다. 휘황한 샹들리에가 켜지자 넓은 거실이 눈에 꽉 차왔다. 벽에
걸린 커다란 동양화는 뜻밖에도 미녀군도였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물가에서 노닐
고 있는 보기드문 소재의 동양화였다. 그옆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고 호화로운 소파며
탁자가 가지런히 갖춰져 있었다. 소파 뒤에는 하회 탈춤의 모형이 한 줄로 주욱 걸려 있었
다. 광준은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딱 멎는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오면서 행여나 하고 걱
정하던 현실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커피 좀 드시죠." 그때 찻잔을 들고 들어온 별장지기
할머니에게 광준이 다짜고짜 물었다. "저기 저 귀신 같은 탈바가지는 뭐하는 것입니까?" 할
머니는 살기까지 띤 광준의 갑작스런 질문에 주춤했다.
"저 벽 장식품 말입니다. 저걸 뭐라고 하는지요."
광준은 당혹해 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읽자 얼른 태도를 바꿨다. "아아 저것 말씀입니까? 저
거 탈이란 거죠. 거 왜 광대들 춤출 때 덮어 쓰고 덩더쿵 덩더쿵 하는 것 있잖아요."
"예 그렇군요. 회장님이 퍽 좋아하시나 보죠?"
"짜식 저건 우리 계열사인 거상물산에서 외국에 수출하는 민예품 이미테이션이야." 한규빈
이 거들었다. "아이구 부장님. 아녜요, 저건 진짜래요. 이미태긴가 뭔가 하는 가짜가 아녜
요."할머니가 손을 저으며 나섰다. "진짜라구요?" 한규빈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회장
님 자주 모시고 오는 아가씨가 구해온 진짜라던 대요." "아가씨?" "예. 왜 가끔 오셔서 주무
시고 가는 아가씬지, 여산지." 할머니가 말을 얼버무리며 한규빈한테 눈짓을 했다. 아가씬지
여산짖? 광준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민속품을 구해다 주는 여사? 회장과 가끔
장자리를 같이 하는 민속연구가인 삼십대인지 이십대인지 하는 여사? 광준은 얼굴이 하얘진
채 털썩 주저앉았다. 광준은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광준씨, 하루종일 무서워서 혼났어요." 미스곽이 투정 비슷하게 말했다. 광준은 그 말에 대
꾸도 앉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정자씨는 장통석 회장의 별장을 알지요?" "별장요? 그게
어디있는데요?" "모르면 그만둬요." 광준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팔깍
지를 하고 드러누워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 여자는 누님이 아닐 수도 있다. 민속품에 취미를
가진 여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설사 누님이라고 해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누님의 죽음은
장회장과 무슨 관계사 있을지도 모른다. 치정살인? 미스곽한테 보낸 그 살인 예고장은 또
무엇인가? 그것이 왜 장통석 회장의 사무실 앞 우체국에서 부쳐졌는가? 광준은 영 잠을 이
루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광준은 까칠한 입맛 때문에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미
스곽이 걱정어린 눈으로 건너다봤다. 어제보다 불안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음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듯 검은 그림자가 얼굴 어디엔가 남아있었다. 광준이
막 집을 나서려는데 추경감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일찍부터 어디를 가시려고?" 추경
감은 여전히 눈가에 웃음을 새기며 거실로 들어섰다. 그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를 피워무는 바람에 광준은 하는 수 없이 따라 앉았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습니까?" "소
식이라뇨? 그건 경찰에서 저한테 전해줘야 할 일 아닙니까? 추경감님은 누님이 실종되었다
고 하시던데 지금쯤 편지나 전화가 있었어어야 할 것 아닙니까?" "허허허, 너무 신경 세우
지 마시고 천천히 얘기좀 나눕시다." "나는 경감님과 할 얘기가 별로 없는데요." "그렇습니
까? 그럼 곽정자 양하고 얘기를 좀 할까요?" 커피잔을 들고 나오는 미스곽을 보고 말했다.
"저한테요?" 미스곽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평소와는 달랐다. 자
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속에 싸여 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깜짝 놀라는 그런 상태
였다. "거기좀 앉아요." 미스곽이 보조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팽팽하고 볼륨있는 젖가슴이
두근거리는 모습이 광준의 눈에 들어왔다. 애처로워 보였다. "혹시 수정궁이라는 요정을 아
십니까." 추경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회장님이 손님 접대하러 몇 번 가신 일이
있어요. 저도 따라갔고요." "민속 보존 협의회 사람들은 그곳에 자주 갑니까?" "그건 잘 모
르겠는데요. 그 집은 워낙 고급집이 돼놔서 음식값이 비싸요. 그래서 웬만한 월급쟁이는 다
닐 수가 없는 데에요." "그렇습니까? 그럼 남궁현씨라든지 조민희 양이라든지, 주인성씨 같
은 분은 가본 일이 없습니까?" "그건 잘모르겠는데요. 회장님이 드나드는 곳이니까 심부름
정도하 하지 않았겠어요?" "그 집 여주인인 문마담을 혹시 아십니까?" "그것도 모르겠는데
요. 우리 회장님이 돌아가신 것하고 수정궁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돌아가셨다고 단
정하지 마십니오." 그때 광준이 끼어들었다. "경감님, 아직도 누님이 피살된 것을 믿지 않으
십니까?" "증거가 없지 않소." "제가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가?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가. 왜 제 말을 그렇게 믿지 않으십니까?" 광준이 이번엔 사정조로 말했다. "
글쎄 그건 좀더 두고 보기로 하죠." "두고 보면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광준은 퉁명스럽
게 쏘아붙여 버렸다. "살인사건은 제쳐두고 남의 요정 비밀이나 캐러 다니시는군요. 어제는
강형산지 깡형산지 하는 사람이 제 뒤를 졸졸따라 수정궁까지 오더니, 오늘은 경감님까지
요정 취재를 하고 다니시는군요. 남의 사생활을 너무 그렇게 캐지 마십시오. 수정궁과 누님
의 피살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하하하, 강형사가 광준씨를 단단히 화나게 했군요. 그
사람 눈치없이 미행하다 들키긴 또 왜 들켜?" "뭣 때문에 저를 미행하는 겁니까? 그건 인권
에 관한사항 아닙니까?" "화내지 마십시요. 강형사가 김선생님을 미행했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지요. 하지만 미행한 게 아닐 겁니다. 수정궁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
겠지요. 그 인권 어쩌구 하는 얘기는 다시는 하지 맙시다. 제 모가지 떨어져요." 추경감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은 잡지 않고 수정궁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십니
까?" "아, 예, 그건 이번 사건, 글ㅆ 사건인지 모르지만, 누님의 실종과는 별..." "실종이 아니
라 살인이오." 광준이 추경감의 말을 토막내 버렸다. "예, 하여튼 사건과는 별로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것에서 한가한 명사님이나 사장님이 모여서 도박을 자주 한다는 제보가 있어서
좀 알아본 것뿐입니다." "도박이라구요? 예. 규모가 억대니 어쩌니 하는 투서가 있어서 출입
하는 사람을 좀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요. 김을숙 여사같은 훌륭한 인격자
가 그렇 일에 발을 들여놓았겠습니까. 아무렴 말도 안되지요."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캐묻
는 겁니까?" "우리 경찰수사에는 참고인 진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수사에 도움될 이
삭이나 주울까 하구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요." "그런 이삭을 주우려면 우범 지대나 교도소
에나 가보시지요. 우리 집안에는 그런 치사하고 붑도덕하고 더러운 이삭은 없습니다." "하하
하 이해합니다. 광준씨가 왜 화를 내고 계시는 지도 잘 압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
건..." "볼일 다 보셨으면 일어서시죠. 저는 딴 볼일이 있어 좀 나가야겠는데요." 광준이 노
골적으로 추경감을 쫓아내려고 했다. 광준은 도박이라는 말을 듣자 누님의 사직동 통장 생
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렇다. 도박을했는지도 모른다. 돈을 잃으니까 가까운 은행에서 얘금
을 계속 찾아왔을 것이다. 그럴수가... 김을숙 누나가 그런 더러운 일을 했다니... 그렇다면
어젯밤에 알게 된 장통석 회장의 별장에 간 것도 누님이 틀림없을지 모른다. 겉으로는 여류
명사입네, 지성인입네, 민속 연구가 입네, 독신자입네 하고 뒤로는 재벌그룹의 총수와 밤마
다 육체의 향연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요정 뒷방에서 눈이 빨개진 체 도박판이나 벌이고
뀉. 세상이 이런 여자가 있단 말인가? 아니야,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을 것이다. 광준의 생
각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추경감은 광준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아무말 않고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추경감이 나가자 광준은 미스곽을 소파에 마주 앉혔다. 그리고 간절
한 눈 빛으로 말을 건넸다. "정자씨 솔직하게 말해줘요." "무엇을 말입니까?" "누님에 관해
서 입니다." "회장님에 관해서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어요." "장통석 회장과 누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관계라뇨? 불결해요. 회장님처럼 품위 있는 분한테 그런 말은 쓰지 마세요."
미스곽이 뽀루퉁해졌다. "회장님과 장회장님은 두분다 세상이 알아주는 인격자예요. 우리 회
장님의 높은 뜻을 이해하고 협조해 주신 여러 저명 인사중의 한 분이예여. 회장님이 우리
전통 민속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그 고결한 뜻을 밀어주기 위해 노력해 주신 분이예요.
그 이상의 관계는 아무것도 없어요. 외국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스캔들 같은 그런 것은
애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예요. 김선생님이 외국에 오래 계시다 오셨지만 사고방식이
거기까지 미치고 있다는데 실망했어요." "아니 제가 뭐 어떻다고 했습니까? 제가 말한 관걔
라는 것은 무슨 별다른 뜻이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뭡니까?" "주의 사람한테
오해받을 일 같은 것이나 없었나 해서입니다." "광준씨는 누님의 인격을 믿지 않는단 말씀
인가요?" "천만에, 그럴리가 있습니까?" "지금 그 경감인가 곶감인가 하는 사람도 말입니다.
우리 회장님을 무슨 도박꾼처럼 생각하나봐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말도 나왔으니 말인데 혹시 협의회 직원 중에..." "그런건 전 몰라요. 우리 회장님만은
그런분이 아녜요." "그럼 다른 사람, 협의회나 민예사 사람 중에다른 사람얘길 좀 자세시 해
줄 수 없나요? 거기 드나든 적은 없나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긴 남궁현 국장
은 가끔간다고 했습니다만..." "남궁 국장이?" "예. 몇 년전에 도박사건으로 좀 시끄러운일
이 있었어요." "그 얘길 좀 자세히 해줄 수 없나요?" "저도 잘 모르지만 그분은 한때 사람들
의 입에 오르내렸어요. 바람둥이라는니, 모험가라느니, 페미니스트라느니, 뭐 그런 얘기였죠.
사람이 워낙 훤칠하게 생긱고 활달하고 낙천주의자니까 그런 소리를 듣게도 된거죠. 그러나
속은 착한 사람이에요. 회장님이 얼마나 신임하시는 분인데요." "그런데 몇 년전 도박사건이
란 뭡니까?" "그것도 나중에 본인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친구가 노름을 하는
줄 모르고 자꾸 졸라대니까 여지저기서 돈을 꿔다 댔다나요. 그것이 잘못 전해져 남궁 국장
이 노름을 하다가 빚투성이가 됐다고들 했으니까요. 그분이 놀기 좋아하지만 그런분은 아니
에요." "남궁 국장은 결혼을 했습니까?" "물론이죠. 큰애가 사립 초등학교에 지난 해 입학했
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때 빚은 어떻게 해결됐습니까?" "회장님과 장회장님이 해결해 드린
걸로 알고 있어요. 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액수가 얼마나 됐는데요?" "잘모르겠어요. 몇천
만원이란 얘기도 있었고 억대란 얘기도 있었고..." "억대라뇨? 그 엄청난 돈을 누님과 장회
장님이 해결했단 말입니까?" "뭐 엄청난 액수는 아닐 거예요. 남궁 국장 자신도 딱하다는
친구한테 속은 일이고, 또 그 돈 때문에 우리 민속 보존협의회가씨끄러워지는 걸 회장님이
싫어했거든요." "장회장은 무슨관계가 있었나요?" "그 돈이란게 장회장님 회사에서 물건값으
로 민예사에 끊어준 수표였거든요. 그러니까 장회장님도씨끄러워지는 걸 좋아할리 있겠습니
까? 더구나 우리 회장님의 명예에 혹시 누라도 끼칠까봐 그런거겠죠 뭐." 그러나 광준은 그
얘기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인격자고 돈이 많다고 하는 장회장이라
도 사업가는 역시 사업가인데, 선뜻 남의 일에 돈을 내주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렇
다면 남궁현과 장회장과 김을숙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협의회 사무실에 좀 들었다 오겠습니다. 오후에 우리 탈무골에나 갑시다." 광준
은 후다닥 일어나 인사동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협의회 사무실에는 문은 열려 있는데 아무
도 없었다. 직원들이 모두 출근한 뒤 아침 커피를 마시러 다방에 나간 것같았다. 다방에 모
여 상사나 헐뜯든가 남의 얘기나 하는게 틀림없다고 광준은 생각했다. 광준이 무심코 회장
실 문을 열었을ㄸ 거기 앉아있던 두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남궁현 국장과 조민희가 소파에
마주앉아 무슨장부 같은걸 펴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민희가 더 놀라 장부며 전표를 주
섬주섬 챙겼다. "김선생님이 일찍 웬일이십니까? 어서오세요." 두사랍은 마치 무슨 못된 짓
이나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멋적어했다. "그냥 지나다가 들렀습니다. 계속하세요. 제가 방해
가 된것이나 아닌지요." "상관없습니다. 어제 경리장부를 좀 맞춰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후에 천천히 해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이 안계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
좀 앉으십시오. 커피나 한잔하시지요." 남궁현이 눈짓하자, 조민희가 재빠르게 장부며 전표
를 챙겨들고 사무실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커피 두잔을 조민희가 들고 들어왔다. 커피잔이
란게 어릴 때 시골서쓰던 간장종지같은 것이었다. "이런 커피잔도 있군요." 광준이 커피잔을
받쳐들며 말했다. "예, 그게 그래보여도 백자입니다. 이조때부터 있었다는 이천에 있는 청엽
요에서 구워낸 것입니다. 이조백자의 빛깔을 가장 가갑게 재현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죠." "예 꽤 비싸겠군요." 광준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소파에 앉았다. "남궁 국장님과 좀
나눌 얘기가 있는데요." 광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하자 조민희가 얼른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말씀이신지요?" 남궁현은 그답지 않게 약간 긴장한 얼굴이다. "예산 얘
기입니다만, 고깝게 생각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요." "고깝게 생각하다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김선생이 누구신데요" 남궁현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에 화
톳장 같은데 손을 좀 댔다고 하시던데요." "예?" 남궁현은 전기에 감전된 듯 찔끔해 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그런 터무니 없는 얘기를 하던가요? 내 아무래도 고년이 그런 소리 할
줄 알았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주제에 남 흉이나 보다니."
남궁현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 같았다. "고년이라뇨?" "아, 고년이 누굽니까. 곽정자
고년이지요." "너무 사람을 헐뜯지 마세요. 그 얘긴 미스곽한테 들은게 아닙니다." "미스곽한
테 안 들었다고요?" "예. 그 얘기는 장통석 회장한테 들었어요." 광준은 어디서 그런 엉뚱한
거짓말이 나왔다 하고 자기를 의심했다. 이제 능청구렁이가 돼가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장회장님이 제가 노름꾼이라고 그러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노름에 관련돼서..."
"아, 그 얘기 말씀이군요." 남궁현이 다소 안심하는듯 줄줄 얘기하지 시작했다.
"내 친구 녀석이 한 놈 있었는데, 아니 제 친구일 뿐 아니라 미스조의 전 직장 상사지요. 미
스조는 전에 무역회사의 경리로 있은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 총무부장으로 있던 녀석인데
그 녀석한테 속아서 여기저기서 돈을 꿔 줬지요. 녀석이 무슨 정수기 만드는 회사를 차린
다고 허풍을 떠는 바람에 그대로 믿고 돈을 꿔줬지요. 처음엔 조민희 양이 먼저 곗돈 탄 것
을 빌려 줬었거든요. 그런데 그 돈은 안 주고 밑천이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하기에 미
스조의 돈을 건져 줄 양으로 밀어줬지요.
헌데 이 녀석이 공장차리는게 다뭡니까. 놀음에 미쳐서 여기저기 사방서 돈을 꿔다 댔지
뭡니까. 자기 회사 공금도 갖다 쓰고 말입니다. 친구하나 밀어주다가 큰 망신당할 뻔했습니
다." "액수가 얼마나 됐나요?" 광준은 남궁현이 거짓말을 해댄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한 삼천만 원 되지요. 그런데 이건 처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그중에 이천백만 원은 조양
이 협의회 공금을가져다 댄 것이었어요. 어쩝니까. 제가 덮어써야죠 뭐. 이건 비밀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모른 척해 주십쇼." "알겠습니다." 광준은 남궁현이 어쩐지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회장님도 그길 모르셨나요?" "회장님은 순전히 제가 한 것으로만 알고 있
었죠. 조양이 한짓으로 안다면 큰일 나죠." "그건 왜요?" "생각해 보십쇼. 저야 회장님이 곱
게 봐줘서 사무국장까지 지내고 있는 터이지만..." "알겠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다 메꿔 주
셨나요?" "그런 셈이지요."
"그런 셈이라니?" "회장님이 장통석 회장과 상의해서 거상그룹수표로 막았으니까요."
"장통석씨는 왜 누님께 그렇게 인심을 썼습니까? 그 사람도 지독한 노랭이 사업가라고 하던
데..." "아무리 노랭이라도 우리 회장님 같은 홀륭한 분의 곤경이야 그냥 보고 넘기실 분이
아닙니다." "장통석씨가 아무 조건 없이 삼천만 원을 메꿔줬단 말이죠?" "예. 물론입니다. 우
리 회장님 일이라면 삼억도 쾌히 내놓았을 겝니다." "누님과 장통석씨는 그 정도로가까웠나
요?" "물론입니다."
남궁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광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곧 말을 얼버 부렸다. "뭐 특별한 이
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업가로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밀어주겠다는 뜻이죠."
"장통석씨는 여자를 좋아한다면서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좀 좋지 않은 의미로 말입니다."
광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돈 있으면 사내로서 다 해볼만한 일 중의 하나죠."
남궁현은 빙그레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고친다. "그러나 우리 김을숙 회장님과는 절대로 불
미한 관계가 아니 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광준은 남궁현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수정궁에 자주 갑니까?" "예?" "수정궁 말입니다. 사직동에 있는..."
"아아 예. 뭐 자주 간다기보다..." 언변좋은 남궁현이 이 대목에서도 말을 더듬었다.
"그럼 이만가 보겠습니다." 광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착잡한 심정으로 일어섰다.
누님과 장톰석, 남궁현과 조민희, 그리고 남궁현과 곽정자, 그 사이에 뭔가 숨겨진 일이 있
는 것만 같았다. 광준은 자기가 너무 오버 쎈스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석연찮은
무엇을 지울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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