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19~20

나단비 | 2024.02.12 19:28:19 댓글: 0 조회: 5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801
19
발표회, 큰 실수, 그리고 고백





2월 어느 날 저녁, 동쪽 방에서 앤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 내려와 물었다.
“마릴라 아주머니, 저 나가서 잠깐만 다이애나를 만나고 와도 될까요?”
“벌써 어두워졌는데 어디를 또 헤매고 다니겠다는 거야?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이애나와반 시간이나 눈을 맞으면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잖니. 그런데 또 다이애나를 보러 나가야겠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릴라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저를 보고 싶어 해요. 굉장히 중요한 할 말이 있대요.”
앤이 간청했다.
“다이애나가 할 말이 있다는걸 네가 어떻게 알아?”
“창문에서 저한테 신호를 보냈거든요. 우리는 촛불과 판지로 신호를 보내는 법을 만들었어요. 창틀에 촛불을 놓고, 판지를 오락가락하면서 불빛을 보내는 거예요. 많이 번쩍거리면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에요. 제가 생각해낸 거예요, 마릴라 아주머니.”
“당연히 그랬겠지. 그렇게 신호를 보내다 틀림없이 커튼을 태워 먹을 거다.”
마릴라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래서우리는 매우 조심하고 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무척 재미있기도해요.촛불이 두 번 번쩍이면, ‘너, 있니?’란 뜻이고, 세 번은 ‘응.’, 네 번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다섯 번은 ‘가능한 한빨리 와, 굉장히 중요한 할 말이 있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방금 다이애나가 신호를 다섯 번 보냈어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에요.”
“그럼 더 이상 죽을 지경일 필요 없다. 갔다 와, 하지만 10분 안에갔다 와야 한다. 꼭이야.”
마릴라가 말했다.
앤은 마릴라의 말을 잊지 않고제시간안에 돌아오긴 했지만 다이애나와 그 중요한 얘기를 10분 만에 끝내고 돌아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간에 볼일을 마치긴 했다.
“마릴라 아주머니, 내일이 다이애나의 생일이래요. 그래서 다이애나 엄마가 내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저를 데려와밤새워놀아도 된다고 하셨대요. 그리고 뉴브리지에서도 다이애나의 사촌들이 내일 밤에 열리는 토론회 클럽 발표회에 가려고 큰 썰매를 타고 온대요. 다이애나와 저도 그 발표회에 데리고 갈 거라고 했어요. 아주머니가 허락을 해주셔야 하지만. 허락해주실 거죠, 마릴라 아주머니? 오, 전 정말로 흥분돼요.”
“제발 진정해라. 넌 못 갈 테니까. 집에 와서 네 침대에 서 자는 게좋아.그리고 그 클럽 발표회란 것도 쓸데없는 짓이야. 어린아이들이 들락거릴 곳이 아니다.”
“토론 클럽은 정말 괜찮은 모임이에요.”
앤이 말했다.
“토론 클럽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발표회장 부근을어슬렁대고밤을 남의 집에서 보내지 말라는 거지. 어린아이들에게는 좋을 게 없어. 배리 부인이 다이애나에게 가라고 허락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아주 특별한 경우잖아요.”
앤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통사정을 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다이애나 생일이고요. 생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프리시 앤드루스는 <만종이여, 오늘 밤엔 울리지 마소서>23)를 암송할 거래요. 아주 도덕적인 시예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 시를 들으면 저한테도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또 합창단이 찬송가만큼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네 곡이나 부를 거래요. 그리고 오, 마릴라 아주머니, 목사님도 참석하실 거래요. 정말이에요. 목사님이 연설을 하실 거래요. 설교하고 거의 비슷할 거예요. 제발, 가면 안 돼요, 마릴라 아주머니?”
“내가 한 말 듣지 못했니? 당장 신발을 벗고 네 방으로 올라가라. 벌써 8시가 넘었다.”
“하나만 더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상자 속에 숨겨둔 마지막 카드라도 꺼내듯 말했다.
“배리 아주머니가 다이애나에게 저와 손님방에서 자도 된다고 하셨대요. 아주머니의 어린 앤이 손님방에서 지내는 영광을 생각해보세요.”

“그런 영광 없이도 잘살 수 있다. 잠이나 자거라, 앤. 더 이상은 한마디도 하지 말고.”
앤이 눈물로 뺨을 적시며 다락방에 올라가자,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깊이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매슈가 눈을 뜨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릴라, 앤을 가게 허락해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안 돼요. 누가 저 아이를 키우죠? 오라버니예요, 아니면 저예요?”
마릴라가 쏘아붙였다.
“그건 너지.”
매슈가 인정했다.
“그렇다면 방해하지 마세요.”
“난 방해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방해라고 할 순 없잖니.내 의견은 네가 앤을 보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라버니는 앤이 원하면 달나라에도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마릴라가 비아냥거리듯 대꾸했다.
“다이애나네 집에서 하룻밤 자는 거라면 나도 보내줄 수 있어요. 그걸로 끝난다면요. 하지만 발표회에 가는 건 허락할 수 없어요. 거기에 가면 틀림없이 감기에 걸릴 거고, 머릿속을 쓸데없는 생각과 흥분으로 꽉 채워올 거라고요.보나 마나일주일은 들떠서 정신없이 지낼 게 뻔해요. 난 앤의 성격을 잘 알고, 또 어떤 게 앤에게 좋은지도 오라버니보다 더 잘 알아요.”
“앤을 보내줘라.”
매슈가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매슈는 입씨름에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자기 의견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마릴라는 허탈감에 사로잡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앤이 부엌에서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매슈가 헛간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마릴라에게 말했다.
“앤을 보내주어라, 마릴라.”
한순간 마릴라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결국 굴복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보내줄게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원하는데.”
앤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행주를 든 채로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마릴라 아주머니, 그 축복의 말을 다시 한 번 해주세요.”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건 매슈 아저씨의 생각이지 내 뜻은 아니야. 남의 집에서 자거나, 더운 홀에서 한밤중에 밖으로 나오다가 혹여 폐렴에 걸려도 나를 원망하지 말고 매슈 아저씨를 원망해라. 앤 셜리, 기름기 있는 물을 바닥에다 흘리고 있잖아. 너처럼덜렁거리는아이는 첨 봤다.”
“네, 저도 알아요, 전 아주머니에게 큰 골칫덩이예요.”
앤이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전 허구한 날 실수만 하죠. 하지만 실수할 만한 일인데도 제가 저지르지 않은 실수들을 생각해주세요. 학교 가기 전에 모래를 가져다가 얼룩진 데를 닦아 없앨게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제 머릿속은 그 발표회에 갈 생각뿐이에요. 지금껏 발표회에 가본 적이 없거든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발표회 이야기를 하면 저만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었어요. 제 기분이 어떤지를 아주머니는 이해하시지 못했지만 매슈 아저씨는알아주셨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은 그날 너무 흥분해 있어서 학교에서도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철자 맞추기에서도 길버트 블라이드에게 졌고, 암산은 특히 뒤처져버렸다. 하지만 발표회와 손님방을 생각한 때문인지 앤은 전보다 별로 창피하지 않았다. 앤과 다이애나는 온종일 그 얘기만 했다. 필립스 선생님이 조금만 더 엄격했더라면 그들은 그날 분명 야단을 많이 맞았을 것이다.
앤이 만일 발표회에 갈 수 없었다면 학교에서 할 이야기도 없고, 참을 수 없이 우울한 기분에 빠졌으리라. 에이번리의 토론 클럽은겨우내2주마다 모임을 가졌고, 입장료를 받지 않는 작은 발표회를 여러 번 가졌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크게 치르면서 도서관을 도우려고 입장료도 10센트씩 받기로 했다. 에이번리의 젊은이들이 몇 주 동안 연습을 했고 자기 언니나 오빠들이 참가할 예정이므로 어린 학생들도 관심이 아주 많았다. 아홉 살 이상이 된 학생들은 참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캐리 슬론은 아버지가 마릴라처럼 어린여자아이들이 밤에 열리는 발표회에 나다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갈 수가 없었다. 캐리 슬론은 오후 내내 문법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삶이 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자 앤은 본격적으로 흥분하기 시작해서, 발표회가 시작돼 완전히 환희에 빠질 때까지 흥분은 점점 고조됐다. 다이애나와 앤은 ‘완벽하게 우아한’ 차를 마신 후에 다이애나의 2층 방으로 올라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앤의 앞머리를 유행에 맞춰 부풀린 모양으로 꾸며주었고, 앤은 다이애나의 머리 리본을 앤만의 솜씨로 특별하게 묶어주었다. 뒷머리를 빗는데 여섯 번도 넘게 갖은 모양을 다 내보았다. 마침내 준비를 마친 두 소녀의 볼은 붉고, 눈은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앤은 다이애나의 예쁜 모피 모자와 멋진 코트를 자기가 입고 있는 아무런 무늬도 없고 볼품도 없는 옷과 비교하면서 약간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검정 모자에 딱 달라붙는 소매가 달린, 집에서 만든 회색 코트라는 현실을 자기가 가진 상상력으로 이겨볼 수 있다고위로로 삼았다.
뉴브리지에서 다이애나의 사촌 머리 씨네 사람들이 도착했다. 밀집이 깔린 큰 썰매 안에 모피 덮개를 덮고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공회당까지 가는 동안 앤은 몹시 즐거웠다. 썰매가 달릴 때 눈이 쌓여 공단처럼 부드러워진 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양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세인트로렌스 만의 눈 덮인 언덕과 짙푸른 바다는 진주와 사파이어로 만든 커다란 그릇에서 포도주와 불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썰매에 매달린 종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숲 속 요정들이 떠들며 웃는 소리 같았다.
“오, 다이애나, 이 모든 게 아름다운 꿈처럼 느껴지지 않니? 내가 평소랑 똑같아 보이니? 평소와는 너무 다른 기분이어서 내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났을 것 같아.”
앤이 모피 코트 아래로 장갑을 낀 다이애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너 오늘 굉장히 예뻐. 멋져.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빛이야.”
사촌한테서 방금 칭찬을 받은 다이애나가 자기도 누군가에게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의 프로그램은 짜릿한 ‘감동’의 연속이었다.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앤이 다이애나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 감동은 순서가 진행되어 갈수록 더욱 커졌다고 한다. 분홍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프리시 앤드루스가 그 희고 부드러운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머리에는 진짜 카네이션을 꽂은 채(소문에 따르면 이 카네이션은 필립스 선생님이 프리시를 위해 시내로 나가 구해온 것이라고 했다.)‘한 줄기의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사다리를 타고 무대로 올라갔을 때’24) 앤은 그 분위기에 흠뻑 빠져 흥분감에 온몸이 떨렸다. 합창대가 <정다운 데이지꽃 저 너머로>를 노래할 때 앤은 천장에 천사가 그려진 것처럼 천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샘 슬론이 ‘소커리는 어떻게 암탉이 알을 품도록 했을까’25)라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자세히 설명했을 때는 앤이 너무 재미있게 웃어서 옆에 있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웃었다. 그러나 에이번리에서조차 이미 케케묵은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 웃은 게 아니라 앤이 너무 웃어 따라 웃은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필립스 선생님이 한 마디를 끝낼 때마다 프리시 앤드루스 쪽을 바라보면서 마르크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시체를 앞에 두고 한 연설을 비장한 어조로 읊었을 때 앤은 로마 시민 한 사람이라도 앞장선다면 자기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날의 프로그램 중에서 딱 한 프로그램만은 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길버트 블라이드가 <라인 강 변의 빙겐>26)을 암송하기 시작했을 때 앤은 로다 머리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집어 들고, 길버트가 암송을 끝낼 때까지 그 책을 읽었다. 길버트가 암송을 끝내자 다이애나는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지만 앤은 똑바로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11시에야 그들은 집에 돌아왔다. 그들은 마음껏 즐겼지만 아직 남은 시간 동안 이야기하며 더 큰 즐거움을 나누었다. 모두가 잠들었는지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 앤과 다이애나는 손님방과 연결된 길고 좁은 응접실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손님방 문은 열려 있었다. 응접실은 따뜻했고, 벽난로에서 타다 남은 깜부기불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여기서 옷을 갈아입자. 분위기도 좋고 따뜻하잖아.”
다이애나가 말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지 않았니?”
앤이 아직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대에서 암송을 하면 정말 멋질 것 같아. 우리도 그런 요청을 받을 수 있을까, 다이애나?”
“그럼, 물론이지,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야. 항상 큰 학생들에게만 암송해주길 바라지만, 길버트 블라이드는 자주 암송해. 우리보다 겨우 두 살밖에 많지 않은데. 그런데 앤, 넌 어떻게 길버트가 암송할 때 듣지도 않는 척을 할 수가 있니? 길버트가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이는 아닙니다.’ 하는 구절을 읊을 때 너를 뚫어지게 쳐다보던데.”
“다이애나, 너는 내 단짝 친구지만, 내게 그 애를 말하는 건 허락할 수 없어.”
앤이 의연하게 말했다.
“잘 준비가 됐어? 달려가서 누가 침대에 먼저 도착하나 볼까?”
다이애나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얀 잠옷을 입은 두 소녀는 긴 응접실을 지나 손님방으로 들어가 거의 동시에 침대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뭔가가 그들아래서 꿈틀했고, 누군가 이불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어이쿠!”
앤과 다이애나는 정신없이 침대에서 뛰어내려 방 밖으로 나왔다. 미친 듯이 뛰쳐나와 부들부들 떨면서위층으로살금살금 걸어 올라갔다.
“대체 누구였어? 그게 뭐였어?”
앤은 춥고 무섭기도 해서 이를 덜덜 떨었다.
“조제핀고모할머니야. 어떻게 거기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조제핀고모할머니였어. 할머니가 화를 많이 내실 텐데. 큰일 났다.정말 큰일이야. 그래도 너무 재미있지 않았니?”
다이애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조제핀고모할머니가 누군데?”
“아빠의 고모님이고 샬럿타운에 사셔.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으셔. 아마 일흔 몇 살쯤 되셨을걸.조제핀할머니도 한때 어린 소녀였을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할머니가 오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이야. 굉장히 까다롭고 깔끔하신 분이라 이 일로 무척 잔소리를 하실 거야. 어쨌든 우리는 미니 메이 방에서 자야겠다. 미니는 발길질이 무척 심한데.”
조제핀배리는 이튿날 이른 아침 식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배리 부인은 두 소녀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젯밤에 재미있게 지냈니?조제핀고모할머니가 오셔서 너희에게 손님방에선 못 자니 2층에서 자라고 말해주려고, 너희가 돌아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지만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너희가 고모할머니를 방해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신중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식탁 너머로 앤과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앤은, 배리네 집에서 어떤 소동이 벌어졌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날 늦게 마릴라의 심부름으로 린드 부인 집에 갔다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너와 다이애나가 어젯밤에조제핀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할 뻔했다며?”
린드 부인의 말투는 진지했지만 눈빛은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렸다.
“배리 부인이 카모디 가는 길에 나한테 들렀는데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이더라.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조제핀할머니가 크게 화를 내신 모양이야. 내 알기에 그 할머니 성격이 보통이 아니시거든. 다이애나에게는 말도 하지 않으신단다.”
“다이애나 잘못이 아닌데.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제가 누가 먼저 침대까지 가는지 시합하자고 했거든요.”
앤이 후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그랬을 줄 알았지!”
자기 추측이 맞은 것이 기쁜 듯이 환히 웃으며 린드 부인이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해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여튼 그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진 모양이다.조제핀할머니는 한 달쯤 머물려고 이번에 왔는데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다면서, 내일이 일요일인데도 당장에 돌아가겠다고 하셨단다. 아마 그들이 붙들지 않았다면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오늘 당장가셨을 거야. 다이애나의 음악레슨비 3개월분을 내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이젠 그런 왈가닥에게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더라. 오늘 아침에 배리네 가족이 큰 홍역을 치렀을 거다. 배리 부부도 상심이 클 테고. 그 할머니가 부자여서, 잘 보이고 싶었을 텐데. 물론 배리 부인이 나한테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사람 본심을 잘 알거든. 워낙에 사람은 그런 거다.”
“저는 정말 불행을 부르는 애인가 봐요. 툭하면 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소중한 친구들, 제 심장의 피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들까지 궁지에 빠뜨리잖아요. 대체 저는 왜 그럴까요, 린드 아주머니?”
“그건 네가 너무 조심성이 없고 충동적이라서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뭔가를 말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봐라.”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은걸요. 뭔가 아주 재미있는 게 머릿속에 떠오르면 곧바로 해야 해요. 생각해보겠다고 멈추면 망쳐버리고 말잖아요. 린드 아주머니는 그런 적 없으세요?”
“없었다.”
린드 부인은 현명한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앤, 너는 무엇보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는 격언부터 실천해야겠어. 특히 손님방 침대 앞에서는.”
린드 부인은 그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하게 웃었지만 앤은 수심에 잠긴 모습이었다. 앤은 그런 상황에서 웃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심각하게만 느껴졌다. 앤은 린드 부인 집을 나와, 얼어붙은 밭을 지나‘비탈길 과수원집’으로 향했다. 다이애나가 부엌문으로 나와 앤을 맞아주었다.

“조제핀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화 많이 나셨니?”
앤이 속삭였다.
“응, 그야말로 난리였어. 어찌나 야단을 치시던지. 나처럼 천방지축인 애는 보지를 못했다면서 우리 엄마 아빠에게 나를 그렇게 키웠으니 창피한 줄을 알라고 호통을 치셨어. 당장 가시겠다고 하시지만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우리 아빠와 엄마는 걱정이 많아.”
다이애나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닫혀 있는거실문을 어깨너머로 불안스레 힐끔거렸다.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그랬니.”
앤이 말했다.
“내가 그런 고자질을 할 것 같아?”
다이애나가 나무라듯 말했다.
“난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앤 셜리, 게다가 나도 잘못한 거잖아.”
“그럼 내가 고모할머니에게 직접 말씀드릴게.”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이애나가 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앤 셜리, 절대 그러지 마.조제핀고모할머니가 너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더 이상 겁주지 마, 나도 이미 겁에 질려 있다고.”
앤이 간청을 했다.

“차라리 기관포 총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게 더 낫겠지만 난 해야만 해, 다이애나. 내가 잘못한 거라고 고백해야 해. 다행히도 난 여러 번 고백을 해봤어.”
“여하튼 고모할머니는 방에 계셔.”
다이애나가 말했다.
“네가 꼭 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고백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을 거라고.”
용기를 낸 앤은 사자 굴로 걸어 들어갔다. 마음을 굳게 먹고 거실까지 다가가 살며시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하는 매서운 소리가 들렸다.
빼빼 마른조제핀배리는 난롯가에 꼿꼿이 앉아 화가 난 듯한 모습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지 금테 안경 너머의 두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다이애나일 거라 생각하고 의자를 돌려 앉았다. 하지만 필사적인 용기와 끝없는 두려움에 휩싸인 눈망울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아이를 보고조제핀배리는 인사도 생략해버린 채 물었다.
“너는 누구니?”
“‘초록 지붕 집’의 앤이라고 합니다.”
앤은 자기만의 아주 특징적인 제스처인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고백하러 왔어요.”
“뭘 고백해?”

“어젯밤 할머니가 계신 침대에 뛰어오른 것은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렇게 하자고 했거든요. 다이애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어요. 다이애나는 정말 얌전한 아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이애나를 야단치시는 건 사리에 맞지 않아요.”
“사리에 맞지않는다고?내 생각엔 다이애나도 같이 뛰어들었는데. 점잖은 집에서 그런 짓을 했는데!”
“하지만 저희는재미 삼아그런 거예요. 저희를 용서해주세요. 잘못했다고 이렇게 빌고 있잖아요. 다이애나를 용서해주시고 다이애나가 음악 레슨을 받게 해주세요. 다이애나는 음악 레슨을 무척 받고 싶어 했어요. 그렇게 기대하던 걸 하지 못하면 어떤 기분인지 제가 잘 알거든요. 할머니가 누구한테든 화풀이를 하고 싶다면 저한테 하세요. 전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일을 많이 겪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거든요. 다이애나보다는 더 잘 참아낼 수 있어요.”
앤이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때쯤조제핀할머니의 눈에서 노기가 많이 누그러지고,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반짝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말투는 엄했다.
“재미로 그랬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어렸을 때여자아이들은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와서 곤히 자고 있는데 다 큰 계집애들이 침대에 뛰어들어 잠이 깼다면 어떤 기분일지 너희는 짐작도 못 할 거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상상할 수는 있어요.”
앤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척 황당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에게도 이유가 있었어요. 할머니에게도 상상력이 있지 않으세요? 그럼 저희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저희는 침대에 누가 있을 거라고는꿈에도몰랐어요. 저희도 할머니 때문에 놀라서 죽을 뻔했다고요. 정말 오금이 떨렸어요. 게다가 원래 약속대로 저희는 손님방에서 자지도 못했어요. 할머니는 손님방에서 많이 주무셔봤을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가 그런 영광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어린 고아였다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보세요.”
이쯤에서조제핀배리는 노기를 완전히 풀고 웃기도 했다. 그 웃음소리에 부엌에서 불안에 떨며 기다리던 다이애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상상력이 약간 녹슨 것 같구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조제핀배리가 말했다.
“용서를 바라는 네 요구가 내 고집보다 세구나. 그래, 모든 것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이제 여기 앉아서 네 이야기를 좀 해보거라.”
“죄송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재미있는 분 같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영혼처럼 느껴져서 제 얘기를 해드리고 싶지만, 전 집에 가봐야 해요. 마릴라 커스버트 아주머니는 저를 맡아 올바로 키워주시고 정말 친절하신 분이에요. 아주머니는 최선을 다하지만 제가 종종 실망을 시키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침대로뛰어들었다고 마릴라 아주머니를 욕하지는 마세요. 하지만 제가 돌아가기 전에 다이애나를 용서해주시고 에이번리에 처음 예정대로 머물 거라고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어요.”

“네가 가끔 와서 내게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면 나도 그렇게 하마.”
조제핀배리가 대답했다.
그날 저녁,조제핀배리는 다이애나에게 은팔찌를 선물로 주었고 배리 부부에게 여행 가방을 다시 풀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앤이라는 애와 좀 더 친해져 보려고 여기 머물기로 했다. 나를 즐겁게 해주었거든. 이 나이가 되니까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잖니.”
조제핀배리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릴라는 매슈에게 “제가 그렇게 될 거라고 했죠.”라고 말했다.
조제핀배리는 한 달 이상을 머물렀고, 앤이 기분을 맞춰준 덕분에 기분 좋게 지냈다. 그리고 앤은조제핀할머니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조제핀배리가 돌아갈 때 말했다.
“앤, 시내에 나오거든 꼭 우리 집에 들러라. 너를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손님방에 자게 해주마.”
“조제핀할머니도 마음이 통하는 영혼이에요. 겉만 보면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이에요. 매슈 아저씨처럼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함께 지내보면 아주머니도 그렇게 느끼실 거예요. 마음이 통하는 영혼이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드문 게 아니더라고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어 정말 기뻐요.”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23) <Curfew must not ring tonight>: 종교적인 도덕성을 담고 있는 19세기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로 미국 시인 로즈 하트위크 소프(Rose Hartwick Thorpe, 1850~1939)의 1882년 작.
24) 프리시가 암송할 시 <종이여, 오늘 밤 울리지 마소서>의 내용에 한 청년이 만종이 울림과 동시에 처형당할 운명에 처해 있어, 이 청년의 연인이 종이 울리는 것을 막으려고한 줄기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종탑을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 시의 장면을 이용한 묘사이다.
25) 독일에서 이민 온 농부 소커리가 썼다는 작품으로 암탉이 알을 품도록 보금자리에 앉히려고 하지만 실패만 연발하는 어수룩한 모습을 독일어 뉘앙스를 풍기는 영어로 재미있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26) <Bingen on the Rhine>: 스코틀랜드의 작가 캐롤라인 엘리자베스 노톤(Caroline E. Norton, 1808~1877)의,라인 강 변을 함께 거닐었던 여인을 생각하며 죽어가는 병사의 이야기를 쓴 시.

20
지나친 상상력





초록 지붕 집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 아름답지만 변덕스럽고 느릿하게 다가오는 캐나다의 봄은 4월과 5월을 달콤하고 상쾌하며 쌀쌀한 날들로 수놓으며, 분홍빛 석양 속에서 부활과 생성의 기적을 일으켰다. ‘연인의 오솔길’의 단풍나무들도 빨간 새순이 돋았고, ‘드리아드의 샘’ 근처에서 풀고사리들이 앙증맞게 꼬불거리며 올라왔다. 사일러스 슬론 씨 집 뒤로 황량한 들판 너머에는 산사나무가 꽃망울을 맺으며 분홍색과 흰색을 띤 예쁜 별 모양의 꽃이 갈색 이파리 아래도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에는 누구 가릴 것 없이 모든 학생이 산사나무 꽃을 주웠고, 해 질 녘이면 꽃을 한 아름씩 안거나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산사나무 꽃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요. 다이애나는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산사나무 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리고 다이애나는 그들이 산사나무가 뭔지 모르며 아쉬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엔 그래서 그들이 더 슬플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비극’이 아니겠어요? 산사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서 아쉬워하지도 못한다면 말이에요. 제가 산사나무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세요? 작년 여름에 죽은 꽃들의 영혼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그 꽃들의 천국이고요. 오늘 우리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오래된 우물 옆에서, 이끼가 낀 넒은 공터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너무 낭만적인 곳이었어요. 그런데 찰리 슬론이 아티 길리스에게 그 우물을 뛰어넘을 수 있으면 넘어보라고 했어요. 아티는 지는 걸 싫어해서 정말로 우물을 뛰어넘었어요. 요즘 학교에서는 누구도 도전을 피할 수 없어요. 도전 놀이가 아주 유행이에요.
필립스 선생님은 산사나무 꽃을 주워서 모두 프리시 앤드루스에게 주었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프리시에게 ‘어여쁜 사람에게 아름다운 꽃을’27)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제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틀림없이 어떤 책에서 따온 말일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에게도 상상력이 조금은 있다는 증거예요. 저에게도 누군가 산사나무 꽃을 주었지만 쌀쌀맞게 거절해버렸죠. 그 애 이름은 말해줄 수 없어요. 그 이름을 절대 제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맹세했거든요. 우리는 산사나무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모자에 씌웠어요. 집으로 돌아올 때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화환을 쓰고 둘씩 짝을 지어 줄을 맞춰 걸으면서, ‘언덕 위의 우리 집’을 불렀어요. 너무 짜릿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사일러스 슬론 씨네 식구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지켜보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한결같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어요. 우리는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어요.”
앤이 말했다.
“당연히 그렇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으니!”
그것이 마릴라의 반응이었다.
산사나무 꽃이 지고 제비꽃이 피면서‘제비꽃 골짜기’는 보랏빛으로 변했다. 앤은 학교로 가는 길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성지라도 걷듯 감격에 어린 눈빛을 띠고 조심스레 발길을 뗐다.

“여기를 지날 때면 길…… 아니, 누가 우리 반에서일 등을 하든 상관없을 것 같아. 하지만 학교에 도착하면 기분이 완전히 달라져서 여느 때와 똑같이 신경이 쓰인다니까. 내 속에는 각각 다른 앤이 여럿 들어 있나 봐. 그래서 내가 이처럼 골칫덩이 같다는생각마저든다니까. 내가 유일한 앤이라면 훨씬 편안하겠지만 그만큼 재미도 없을 거야.”
앤이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6월의 어느 날 저녁, 과수원에는 다시 분홍빛 꽃들이 피었고‘반짝이는 호수’가 시작되는 습지에서는 개구리들이 은방울 굴리듯 달콤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클로버 들판과 전나무 숲에서 나오는 향기가 온 천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앤은 아까부터 다락방 창가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씨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진 지 오래여서, 앤은 눈을 크게 뜬 채 몽상에 빠져들어통꽃 송이를 매달고 있는 ‘눈꽃 여왕’의 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작은 방은 실제로는 변한 게 없었다. 벽은 여전히 하얀색이었고, 바늘꽂이도 여전히 단단했으며, 노랗고 딱딱한 의자도 예전과 다름없이 똑바로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선한 생동감이 흐르고 구석구석 활기가 넘쳐났다. 여학생의 책과 옷과 리본이 달라졌고, 금이 가기는 했지만 사과꽃들이 가득 꽂힌 파란 꽃병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꾸는 꿈이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눈에는 보이는 형태를 띠고, 무지개와 달빛을 띤 얇은 막으로 썰렁하던 방을 아름답게 꾸며놓은 듯했다. 곧 마릴라가 앤이 학교에서 쓰는 앞치마를 다림질해서 갖고 들어왔다. 앞치마를 의자에 걸쳐 놓고 의자에 앉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오후에 다시 두통에 시달렸기때문이었다.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 마릴라의 표현대로라면 ‘지치고 지쳐 녹초가 된 상태’였다. 앤이 투명한 눈으로 걱정스럽게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제가 아주머니를 대신해서 두통을 앓을 수만 있다면. 저는 아주머니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즐겁게 참아낼 수 있어요.”
“그래도 네가 네 몫을 해서 그런대로 쉴 수 있었다. 이젠 일도 제법 잘하고 예전보다 실수도 줄었잖니. 물론 매슈 아저씨의 손수건까지 풀을 먹일 필요는 없었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파이를 오븐에 데워서 뜨거워지면 꺼내지, 타서 바삭바삭해질 때까지는 두지 않는단다. 하지만 네 방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
마릴라가 말했다. 마릴라는 두통을 앓고 나면 언제나 조금은 냉소적으로 변했다.
“오, 죄송해요.”
앤이 후회스럽다는 듯 말했다.
“파이를 오븐에 넣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점심 식탁에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본능적 느낌이 있기는 했어요. 오늘 아침에 아주머니가 저한테 일을 시킬 때는 어떤 상상도 하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어요. 파이를 오븐에 넣을 때까지는 잘했는데, 그때부터 제가 마법에 걸려 외로운 탑에 갇힌 공주가 되고 잘생긴 기사가 흑마를 타고 와서 저를 구해주는 상상의 유혹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버렸어요. 그래서 파이는 잊고 말았던 거예요. 그리고 손수건에 풀을 먹인 것도 전 몰랐어요. 다림질을 하면서는 다이애나와 제가 개울에서 새로 찾아낸 섬에 어떤 이름을 붙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정말 매혹적인 섬이에요, 마릴라 아주머니. 단풍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개울이 그 주변을 감돌아요. 여하튼 그 섬을 ‘빅토리아 섬’이라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그 섬을 여왕 폐하의 생일에 찾아냈거든요. 다이애나와 저는 아주 충성심이 강하거든요. 하지만 파이와 손수건은 정말 죄송해요. 오늘이 기념일이라 특별히 착한 앤이 되고 싶었는데. 작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모르겠다.특별히 생각나는 일은 없는데.”
“아, 참, 마릴라 아주머니. 오늘이 제가‘초록 지붕 집’에 온 날이에요. 전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제 삶의 전환점이었거든요. 물론 아주머니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날은 아니겠지만요. 제가 여기 산 지 벌써 일 년이 됐고, 너무 행복했어요. 물론 힘든 일을 겪긴 했지만 그런 건 잊고 사는 거잖아요. 아주머니는 저를 데리고 온 걸 후회하시나요?”
“아니다, 후회라니.”
앤이‘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었나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는 마릴라가 말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아. 앤, 공부를 끝냈으면 배리 부인 댁에 달려가서 다이애나의 앞치마 본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오겠니?”
“어…… 지금은 너무 어두운데요.”
앤이 외쳤다.
“너무 어둡다고? 이제 막 해가 졌는데. 게다가 어두워진 후에도 넌허구한 날 나갔잖니?”
“아침 일찍 다녀올게요.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서 다녀올게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애원하듯 말했다.

“도대체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앤 셜리? 오늘 저녁에 새 앞치마의 본을 떠놓으려고 하는 건데. 당장 다녀오는 게 낫지 않겠니?”
“그럼 큰길로 돌아서 다녀와야 해요.”
앤이 마지못해 모자를 집으며 말했다.
“큰길로 돌아가면 30분이나 걸리잖아! 혼이 나야 제대로 할 거니?”
“‘유령의 숲’을 지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안타깝게 외쳤다.
마릴라가 어리둥절해서 앤을 바라보았다.
“‘유령의 숲’이라니!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도대체‘유령의 숲’은 또 뭐냐?”
“개울 건너편에 있는 가문비나무 숲이요.”
앤이 속삭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유령의 숲’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든?”
“아무도요, 그냥 다이애나와 제가 그 숲에서 유령이 나온다고 상상한 거예요. 여기 주변의 모든 곳이 너무…… 너무 평범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재미로 지어냈어요. 4월부터 그렇게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유령이 나오는 숲이면 아주 낭만적이잖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가문비나무 숲이 언제나 어두컴컴해서 그곳으로 정한 거예요. 그리고 아주 가슴 아픈 것들을 상상해냈어요. 밤마다 이맘때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두 손을 꼭 쥐고 개울가를 걸으면서 통곡을 하는 거예요. 또 가족 중 누군가 죽으면 그 여자가 나타나요. 그리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작은 아이의 유령이‘한가로운 황야’의 한구석에서 튀어나와요. 그 아이의 유령이 우리 뒤로 살금살금 다가와서 차디찬 손을 우리 머리에 올려놓는 거예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 않아요? 또 목이 잘린 남자가 오솔길을 서성대고, 해골바가지가 나뭇가지 사이로 우리를 노려봐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어둠이 내린 후에는 세상이 뭘 준다고 해도‘유령의 숲’을 지나가지 않을 거예요. 틀림없이 하얀 것이 나무 뒤에서 불쑥 나와 저를 붙잡을 거란 말이에요.”
앤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딴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릴라가 쏘아붙였다.
“앤 셜리, 네가 지어낸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정말로 믿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믿는 건 아니에요. 적어도 대낮에는 믿지 않아요. 하지만 어두워진 다음에는 정말 기분이 달라져요. 유령이 걸어 다니는 때잖아요.”
앤이 말을 우물거렸다.
“앤, 유령 따위는 없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유령은 정말 있어요. 유령을 봤다는 사람들도 제가 안다고요.”
앤이 울먹였다.
“모두가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찰리 슬론 말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이 넘은 어느 날 밤 젖소들을 몰고 집으로 다시 오시는 걸 할머니가 보셨대요. 찰리 슬론 할머니는 아주 신앙심이 깊은 분이라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니라는 것 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그리고 토머스 아주머니의 아버지도 어느 날 밤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목이 잘리고 가죽이 벗겨져 한쪽만 대롱대롱 매달린 양한테 쫓겨서 집에 오셨대요. 그 양이 죽은 동생의 영혼이고 그게 자기가 9일 안에 죽게 될 거라는 경고로 생각하셨대요. 물론 9일 안에는 아니지만, 2년 후에 돌아가셨대요. 그러니까 그 경고가 맞았던 거예요, 또 루비 길리스는…….”
마릴라가 단호하게 앤의 말을 가로막았다.
“앤 셜리, 그런 얘긴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 난 네 상상이란 것이 늘 걱정이었다. 그런데 계속 이런 얘기나 지어낸다면 이제부터는 상상을 아예 못 하게 하겠다. 당장 배리 부인 댁에 다녀와라. 또 저 가문비 숲으로 다녀와야 한다. 너한테 이건 훈련이고, 경고다. 그리고 앞으로‘유령의 숲’이니 뭐니 그런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도 마라.”
앤은 울면서 빌고 싶었다. 공포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 실제로 울면서 빌기도 했다. 상상이 너무 지나쳐서, 어둠이 내린 후의 가문비나무 숲은 앤에게 정말로 무시무시한 곳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릴라는 매정했다. 오히려 두려움에 질린 앤을 샘이 있는 곳까지 데려가, 앤에게 곧바로 다리를 건너어두운숲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구슬프게 우는 여인이나 목이 잘린 남자가 출몰한다는 어두운 숲으로.
“오, 마릴라 아주머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으세요? 흰옷 입은 유령이 저를 잡아 멀리 데려가면 어쩌시려고요?”
앤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런가 어디 두고 보자. 너도 항상 내 말이 맞는 다는 걸 잘 알잖니. 쓸데없이 유령을 상상하는 네 버릇을 현장에서 고쳐주려는 거다. 자, 빨리 가라.”
마릴라가 무정하게 대답했다.
앤은 달음질치듯 빨리 걸었다. 넘어질 듯 휘청대며 다리를 건넜고, 후들후들 떨면서 그 너머 무시무시하고 어두운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다. 앤은 그때의 경험을 결코 잊지 못했고, 자부심을 가졌던 무한한 상상력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웠다. 상상 속의 요괴들이 음침한 곳 여기저기 숨어서 차갑고 뼈만 앙상한 손을 뻗으며, 자신들을 존재하게 한 이 겁에 질린 조그만 소녀에게 덤벼들었다. 골짜기에서 갈색 들판을 넘어 불어오는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 조각이 앤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고, 굵은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흐느낌에 앤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앤의 머리 위를 번개처럼스쳐 가는박쥐의 날개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괴물의 날개처럼 느껴졌다. 윌리엄 벨 씨의 밭에서부터는 하얀 유령의 무리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앤은 쏜살같이 달렸다. 다이애나 집의 부엌문에 도착했을때쯤에는앞치마 본을 빌려달라는 말은커녕 숨만 헐떡거려야 했다. 마침 다이애나가 집에 없어 꾸물거릴 핑계가 없었다. 그러니 곧장 그 끔찍한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앤은 하얀 유령을 보는 것보다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눈을 꼭 감고 그 길을 지나왔다. 간신히 통나무 다리를 더듬더듬 건넌 후에야 아직은 덜덜 떨면서도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봐라, 아무것도 널 잡아가지 않았지?”
마릴라가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물었다.
“오, 마, 마릴라 아주머니, 이제부터 평, 평범한 것에 만족하며 살 거예요.”
앤이 덜덜 떨며 말했다.




27)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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