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2 (셋째 해)

나단비 | 2024.04.01 17:17:55 댓글: 2 조회: 55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053
셋째 해


1



도깨비 길, 윈디 포플러
9월 8일

내 사랑 길버트에게,

여름은 가버렸어. 이번 여름에는 5월 마지막 주 딱 한 주밖에는 널 볼 수 없었지. 이제 나는 서머사이드 중등학교에서의 세 번째 해이자 마지막 해를 보내려고 ‘윈디 포플러’로 돌아왔어. 캐서린과 나는 함께 ‘초록 지붕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캐서린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아. 2학년을 새로 맡게 된 선생은 아주 성격이 밝은 사람이야. 통통한 장밋빛 얼굴로 꼭 강아지처럼 친근하게 굴지.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파란 눈이 빛나기는 하지만 별 생각이나 깊이가 없어 보이거든. 난 그 선생이 좋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 선생한테서는 더 이상 발견할 게 없으니까. 캐서린한테서는 날마다 새로 발견할 게 무지 많았잖아. 일단 그 보호막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윈디 포플러’에는 별로 달라진 일이 없어. 아니, 있다. 그 늙은 붉은 소가 영원히 자기 안식처로 돌아가 버렸어. 지난 월요일 저녁 먹을 때 레베카 듀가 슬픈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알려줬어. 미망인들은 새로 소를 사들이는 일이 번거롭다고 그냥 우유와 크림을 체리 씨 집에서사 먹기로 결정했어. 이 말은 곧 우유를 받으러 나오는 엘리자베스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캠벨 부인이 엘리자베스가 원할 때마다 여기와도 된다고 허락해주었으니까 예전이랑 그리 달라질 일은 없어.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화가 일고 있어. 케이트 아주머니가 아주 슬픈 표정으로 내게 말을 해주었는데, 적당한 집을 찾는 대로 더스티 밀러를 다른 집으로 보낼 거래. 내가 안 된다고 하자 자기들도 슬프지만 이 집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래. 레베카가 여름 내내 그 고양이 때문에 얼마나 불평을 해댔는지 레베카 듀를 만족시킬 다른 방법이 도무지 없대. 불쌍한더스티 밀러! 참 착하고 돌아다니기도 잘하고 가르랑거리기도 잘하던 놈이었는데!
내일 토요일에는 레이몬드네 쌍둥이를 돌봐주기로 했어. 레이몬드 부인은 샬럿타운에 사는 친척 장례식에 가야 한대. 레이몬드 부인은 작년 겨울에 이사 온 미망인이야. 레베카 듀와 ‘윈디 포플러’ 미망인들은(정말이지 서머사이드에는 미망인이 참 많기도 하지.)이 부인이 서머사이드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래. 좀 과한 면이 있대나. 하지만 이 미망인은 캐서린과 내가 연극 클럽 활동을 해 나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어. 남에게 좋은 일을 베풀면 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법이지.
여덟 살 난 제럴드와 제럴딘은 천사처럼 착하고 예쁘게 생긴 쌍둥이지만 내가 그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했다니까 레베카 듀는 평소 버릇대로 입을 비죽거렸어.
“하지만 난 아이들을 사랑해요, 레베카.”
“아이들이라고요? 그래요, 아이들 좋죠. 하지만 그 애들은 아주 끔찍한 말썽꾸러기들이에요, 미스 셜리. 레이몬드 부인은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벌주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고요. 자기는 아이들이 자연적인 삶을 살도록 해줄 거라고 결심했다더군요. 그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사람들을 골탕 먹인다고요. 내가 그 집 이웃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어요. 어느 날 오후에 목사님 부인이 그 집을 방문했을 때도 레이몬드 부인은 설탕 파이처럼 나긋나긋하게 목사님 부인을 대했대요. 하지만 막 집을 나서는데 층계에서 커다란 양파가 소나기처럼 굴러떨어졌대요. 그 양파 중 하나가 목사님 부인의 모자를 쳐서 떨어 뜨려버렸는데도 레이몬드 부인이 고작 한 말이라고는 ‘아이들은 꼭 특별히 얌전히 굴어주었으면 할 때 더 짓궂게 굴어요.’ 하는 게 다였대요. 아이들이 그렇게 제멋대로인 게 무슨 자랑이나 되는 듯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면서 ‘이 아이들이 알다시피 미국에서 왔거든요.’ 하더래요. 그 한 마디면 모두 설명이 된다는 듯이요.”

‘레베카 듀도 린드 아주머니처럼 모든 것을 ‘양키’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해.’
앤은 생각했다.



2





앤은 토요일 오전에 레이몬드 부인과 그 유명한 쌍둥이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구불구불한 시골길가에 서 있는 작고 낡았지만 예쁜 집이었다. 부인은 벌써 외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장례식에 가기에는 좀 화려한 옷차림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다. 특히 윤기 흐르는 풍성한 갈색 머리칼 위에 쓴 꽃장식이 달린 모자가 그랬다. 하지만 부인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물려받은 여덟 살배기 쌍둥이 둘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 예쁜 얼굴에 어린 표정은 마치 천사 같았고, 흰 피부는 분홍빛이 감돌았으며 커다란 눈은 청자처럼 파랬고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연한 금발머리가 후광처럼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앤을 소개하자 무척이나 귀엽게 생긋 웃었다. 부인은 아이들에게 일렀다.
“친절하게도 셜리 선생님이 엄마가 엘라 숙모님 장례식에 가고 없는동안 너희를 돌보아주려고 오셨어. 너희들, 얌전히 있어야 해. 셜리 선생님을 조금도 귀찮게 하면 안 돼. 알겠니, 우리 착한 아이들?”
착한 아이들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더 착해 보이고 천사 같은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 부인은 문까지 앤을 데리고 나와 말했다.

“저 아이들은 내가 가진 전부예요. 아마 내가 저 애들을 좀 응석받이로 키웠는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는 걸 나도 알아요. 항상 자기 아이는 어찌 길러야 할지 모르면서 남의 집 아이는 어찌 길러야 할지 눈에 훤히 보이는 법이잖아요. 그런 사실을눈치채셨나요, 선생님? 하지만 나는 아이들은 사랑해주는 것이 엉덩이를 때려주는 것보다 더 교육적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저 아이들을 돌보자면 무척 힘들 거예요, 선생님. 아이들은 장난이나 치는 것 같지만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죠.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언젠가는 저 길 위쪽에 사는 미스 프라우티에게 아이들을 맡긴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 가엾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그분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물론 아이들이 그분을 좀 놀리기도 했죠. 왜 아이들이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분은 온 동네방네 우리 아이들이 몹시 짓궂다는 소문을 퍼트려 복수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 애들이 선생님은 아주 좋아할 것 같아요. 아주 천사처럼 굴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좀 활발하긴 해요. 아이들이란 원래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풀죽은 아이는 보기에도 딱하잖아요. 나는 아이들을 자연적으로 키우고 싶어요. 너무 점잖기만 한 아이들은 자연스럽지 못하잖아요. 아이들이 욕조에서 배를 띄우거나 연못에 들어가지는 못하게 해주세요.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요. 아이들 아빠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거든요.”
레이몬드 부인의 커다란 푸른 눈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 같았으나 부인은 씩씩하게 눈물을 억눌렀다.
“좀 싸우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이란 밤낮으로 싸우면서 크는 것 아니겠어요? 저 아이들은 정말로 서로를 위해요. 다른 집 아이가 덤비기라도 하는 날엔…… 어느 한 아이만은 장례식에 데려가도 좋은데, 둘이 떨어지려고 하지 않거든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둘이 떨어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장례식에 가서 쌍둥이를 돌보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몬드 부인. 제럴드와 제럴딘 그리고 저는 즐거운 하루를 보낼 거예요.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거든요.”
앤은 상냥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난 선생님을 보자마자 아이들을 몹시 사랑하는 분이란 걸 알아보았다고요. 그런 건 금방 알아보는 법이잖아요, 그렇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선 뭔가가 느껴지거든요. 미스 프라우티는 아이들을 싫어했어요. 아이들에게서 나쁜 점만 찾아냈죠. 내 사랑하는 아이들을 아이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손에 맡기고 가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나도 오늘 하루를 아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 우리도 장례식에 데려가줘.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재밌는 데는 못 가봤잖아.”
제럴드가 2층 창문에서 갑자기 고개를 쏙 내밀고 말했다.
“어머나, 저 애들이 목욕탕에 있어요! 제발, 선생님, 어서 가서 저 아이들을 꺼내주세요. 제럴드 아가야, 엄마가 너희 둘을 장례식에 모두 데려갈 수는 없다는 걸 알잖니. 오, 선생님, 저 애가 또 응접실 바닥에 깔아놓은 코요테 가죽을 두르고 있어요. 앞 다리를 목에 묶고요. 저걸 망칠 거예요. 당장 저것을 내려놓도록 해주세요. 난 얼른 서둘러야 해요. 이러다 기차를 놓치겠어요.”
레이몬드 부인이 비극적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몸을 획 둘려 나가버렸고 앤은 창문 밖으로 오빠를 내던질 기세인 천사 같은 제럴딘을 붙들려고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셜리 선생님, 제럴드가 나한테 혀를 내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제럴딘이 아주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면 어디가 아프니?”
앤이 웃으며 물었다.
“오빠가 동생한테 혀를 내밀면 못 쓰죠.”
제럴딘이 제럴드를 한껏 노려보았지만 제럴드는 거기에 이자까지 보태서 제럴딘을 더 한껏 쏘아보았다.
“내 혀는 내 거야. 내가 내밀고 싶으면 내 마음대로 내미는 거지, 네가 뭔데 하라 마라야, 안 그래요, 셜리 선생님?”
앤은 그 질문은 무시해버렸다.
“쌍둥이들아, 이제 점심때까지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뜰로 나가 놀이를 하는 게 어때? 내가 이야기도 해줄게. 그리고 제럴드, 그 코요테 가죽은 바닥에 도로 깔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난 이리놀이를 하고 싶은걸요.”
제럴드가 말했다.
“오빠가 이리놀이를 하고 싶대요.”
제럴딘이 갑자기 오빠 편을 들며 소리쳤다.
“우리는 이리놀이를 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둘이 함께 외쳤다.
현관에서 벨 소리가 나는 바람에 앤은 곤경에서 벗어났다.

“누구인지 가보자.”
제럴딘이 큰 소리로 말했다. 둘은 층계로 달려가 난간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 앤보다 먼저 현관에 닿았다. 그 바람에 코요테 가죽은 바닥으로 흘러내려 버렸다.
“우리 집에서는 행상인한테 물건을 사지 않아요.”
제럴드는 문 앞에 서 있는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안 계시니?”
방문객이 물었다.
“없어요. 엄마는 엘라 아주머니 장례식에 갔어요. 셜리 선생님이 우리를 돌봐주고 있어요. 봐요, 층계를 내려오잖아요. 셜리 선생님이 아줌마를 내쫓아 버릴걸요.”
앤은 누가 와 있는지 알고는 정말로 그 사람을 쫓아버리고 싶었다. 미스 파밀러 드레이크는 서머사이드에서 그리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판 사원인데 어찌나 강매를 하는지 뭔가를 사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방문이라고 은근히 말을 돌려서 하든, 대놓고 하든 전혀 안하무인으로 온 천하가 자기 손아귀 안에 있는 양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학교 선생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백과사전을 주문받고 있다고 했다. 앤은 자기는 백과사전이 필요 없고, 학교에 이미 좋은 것이 있다고 거절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스 파밀러는 고집스레 우기면서 앤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10년이나 된 낡은 것이잖아요. 잠깐 이통나무 벤치에 좀 앉아요, 셜리 선생님. 제가 갖고 있는 견본을 보여 드릴게요.”
“죄송하지만 난 이럴 시간이 없어요. 미스 드레이크. 아이들을 돌봐야 해서요.”
“잠깐이면 돼요. 난 전부터 셜리 선생님을 방문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여기서 선생님을 만나다니요. 얘들아, 너희들은 저리로 가서 놀아라. 셜리 선생님과 나는 이 멋진 책을 좀 살펴보아야 하니까.”
“엄마는 우리를 돌보라고 셜리 선생님을 데려왔어요.”
제럴딘이 고수머리를 우쭐하게 획 젖히며 말했다. 하지만 제럴드가 제럴딘의 등을 잡아당겨 안으로 끌어 들이고는 문을 꽝 닫아버렸다.
“있잖아요, 셜리 선생님. 이 백과사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요. 이 아름다운 종이 좀 보세요. 한번 만져 봐요. 그림도 정말 멋지지 않아요? 시장에 나와 있는 다른 백과사전은 그림이 이 책의 반도 되지 않아요. 인쇄도 정말 훌륭하게 되었다고요. 장님도 읽을 수 있을 정도지요. 이게 전부 80달러예요. 지금 8달러만 내고 80달러를 다 낼 때까지 한 달에 8달러씩만 내면 돼요.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어요. 지금은 홍보기간이라 이렇게 주는 거예요. 내년이면 120달러를 받아요.”
“하지만 난 백과사전이 필요 없어요, 미스 드레이크.”
앤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물론 백과사전은 필요해요. 백과사전이야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하죠. 국민 백과사전이라고요. 내가 이 국민 백과사전을 알게 되기 전까지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살았다고요! 아니 산 게 아니지요. 그냥 연명을 한 거죠. 이 화식조 그림 좀 보세요, 셜리 선생님. 전에 화식조를 실제로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미스 드레이크, 나는…….”
“조건이 좀 나쁘다고 생각하면 학교선생인 만큼 특별히 편의를봐 드릴수 있어요. 8달러 대신 6달러씩 내세요. 이런 조건을 거부할 수는 없죠, 셜리 선생님?”
앤은 정말로 거의 거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문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집을 나서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이 끔찍한 여자를 보내버리려는 것이라면 한 달에 6달러가 가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 쌍둥이는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이 몹시 불안했다. 욕조에서 보트를 띄우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면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가 연못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나 않은지?
앤은 이 곤경을 빠져나오고자 한 번 더 사력을 다해보았다.
“제가 생각을 좀 해보겠어요, 미스 드레이크. 그리고 살 결심이 서면 연락을 할게요.”
“이런 기회는 다시없어요!”
미스 드레이크가 얼른 만년필을 꺼내들며 말했다.
“선생님은 이 국민 백과사전을 사셔야 해요. 그러니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서명을 하세요. 자꾸 일을 미루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가격도 언제 오를지 모른다고요. 그럼 120달러나 주고 사야 해요. 자, 여기요, 여기 서명을 하세요, 셜리 선생님.”
앤의 손에 강제로 만년필이 쥐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스 드레이크는 피마저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비명 소리를 질렀다. 앤은 벤치 옆의 무성한 화초 속에 만년필을 떨어뜨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게 미스 드레이크? 모자도 없고 안경도 없고 거의 머리도 없는 저 해괴망측한 사람이? 모자와 안경과 가발은 미스 드레이크 머리에서 벗겨져 공중으로 떠올라 욕실 창문으로 가고 있는 참이었다. 욕실 창문에는 두 개의 금발 머리가 쏙 나와 있었다. 제럴드는 낚싯대를 들었고, 끝에 낚싯바늘을 단 실이 두 가닥 묶여 있었다. 어떤 마술을 써서 저 물건을 세 개나 한꺼번에 낚아올렸는지는 제럴드만이 아는 일이었다. 아마 순전히 행운에 지나지 않은 일인지도 몰랐다.
앤은 득달같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 층계를 달려 올라갔다. 하지만 앤이 욕실로 갔을 때 쌍둥이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제럴드가 떨어뜨려 놓은 낚싯대만 보였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격노한 미스 드레이크가 만년필을 포함해 자기 물건을 모조리 쓸어 모아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미스 드레이크가 주문을 받아 내지 못하고 집을 나서긴 생전 처음이다.
앤은 뒤 베란다에서 천사 같은 얼굴로 사과를 먹고 있는 쌍둥이를 찾아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런 짓을 했는데 야단도 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갈 수도 없었지만, 제럴드가 앤을 곤경에서 구해낸 것도 틀림없었고 더군다나 미스 드레이크는 좀 혼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너 지금 커다란 벌레를 먹었어! 내가 그 벌레가 네 목으로 넘어가는 걸 봤다고.”
제럴드가 외쳤다.
제럴딘이 당장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 구역질을 했다, 몹시 심하게. 금세 또 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럴딘이 좀 나아지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앤은 그냥 가볍게 타이르기만 하고 제럴드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뭐 미스 드레이크에게 평생 영향을 남길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도 이 일에는 침묵을 지킬 테니까.
“제럴드, 네가 한 짓이 신사다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앤은 상냥하게 타일렀다.
“아뇨! 그래도 재미있었는걸요. 나, 낚시질 잘하죠?”
점심식사는 아주 훌륭했다. 레이몬드 부인이 떠나기 전에 준비해놓고 간 음식들은 아주 맛있었다. 아이의 훈육 면에서는 어떤 결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인은 요리 솜씨만큼은 훌륭했다. 제럴드와 제럴딘은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싸움도 하지 않았고 식사 예절도 여느 집 아이들과 비교해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점심을 다 먹고 나자 앤은 그릇을 씻어 제럴딘에게 닦게 하고 제럴드에게는 조심스럽게 그릇선반에 올려놓도록 했다. 시킨 일을 둘 다 아주 솜씨 있게 잘해서 앤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명한 교육과 약간의 엄격함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추천 (0) 선물 (0명)
IP: ♡.62.♡.242
달나라가자 (♡.116.♡.252) - 2024/04/01 21:38:23

단비님 요기 있었구낭~~
바빠도 자게에 가끔 글 올려요 ㅋㅋㅋ
안 보이면 궁금하고 보고싶어요~~

나단비 (♡.62.♡.242) - 2024/04/01 23:47:24

꼬리 잡혔네요 ㅋㅋ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알겠어요 종종 뵈러 갈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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