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9~10

나단비 | 2024.04.02 18:41:16 댓글: 0 조회: 5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310
9
(길버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발췌)




서머사이드의 한 숙녀로부터 내일 저녁 초대를 받았어. 믿지 못하겠지만, 길버트, 그 숙녀의 이름은 바로 미네르바 톰갤런이야. 내가 디킨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고 말하고 싶겠지?
내 사랑, 그대 성이 블라이드인 것에 만족하는지? 만일 톰갤런이란 성을 가졌다면 난 그대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야. 세상에, 앤 톰갤런이라니! 안 돼.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서머사이드에서는 최고의 영예야. 톰갤런 저택에서 초대를 받은 것 말이야. 이 저택은 달리 이름이 없어. 톰갤런 저택에 느릅나무 저택이니, 밤나무 집이니, 농원이니 하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톰갤런 가문은 예전에는 귀족이었어. 프링글 집안은 이 집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미스 미네르바 단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대. 여섯 세대에 걸쳐 내려오던 톰갤런 집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라는 거야. 미스 미네르바는 퀸스 거리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 살아. 커다란 굴뚝이 있고, 녹색 덧문이 달린 집인데, 개인 저택에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는 집은 이 시내에서는 그 집 하나뿐이야. 네 가족은 살 수 있을 만큼 넓은 집인데 지금은 미스 미네르바하고 요리사와 가정부만 살고 있어. 집은 잘 가꾸어진 집 같지만 어쩐지 난 그 집을 지날 때마다 이 세상에서 잊힌 곳이라는 느낌이 자주 들었어.
미스 미네르바는 영국국교회 교회에 가는 일 말고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 그래서 나도 미스 미네르바를 이삼 주 전에 처음 만났어. 자기 아버지가 보던 귀중한 책들을 학교에 정식으로 기증하려고 직원과 이사회 회의에 참석했을 때였지. 정말로 미네르바 톰갤런다운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어. 키가 크고 마른 몸에 흰 얼굴은 좁고 길고 코와 입도 길고 얇아. 이렇게 묘사를 하고 보니 그리 괜찮은 외모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미스 미네르바는 위엄 있고 귀족적인 분위기가 나는 꽤 잘생긴 할머니야. 옷도 좀 구식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중후하면서도 우아하게 입었더라고. 레베카 듀의 말로는 젊었을 때는 상당히 미인이었다고 해. 지금도 그분의 커다란 검은 눈은 불꽃처럼 빛이 나면서도 어두운 열망 같은 게 보였어. 말솜씨도 유창해서 증정식 연설을 그렇게 즐기는 이는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다 들었어.
미스 미네르바는 내게 특별히 잘해주었고 어제 함께 만찬을 하고 싶다는 정식 초대장을 보내주었어. 레베카 듀에게 그 말을 하니까 내가 마치버킹엄 궁전에서 초대를 받기라도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라고.
“톰갤런 저택에 초대를 받다니 굉장한 영광이에요.”
레베카 듀는 놀랍다는 듯 말했어.
“지금까지 미스 미네르바가 교장 선생을 초대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하기야 지금까지는 모두 남자 교장이었으니까 초대하기도 좀 그랬겠지만. 글쎄, 그 사람이 너무 수다를 떨어 미스 셜리의 숨통을 조이지나 말아야 할 텐데. 톰갤런 집안사람들은 모두 말이 많아요. 그리고 또 앞에 나서기도 좋아하죠. 사람들은 미스 미네르바가 그렇게 집 안에만 처박혀 지내는 이유가 이제는 나이를 먹어 전처럼 모든 일에 앞장설 수 없는데다 다른 사람 밑에 서는 것이 싫어서라고 하죠. 그나저나 뭘 입고 갈 거죠, 미스 셜리? 그크림빛실크 드레스에 검은 벨벳 나비 장식이 달린 옷을 입어요. 아주 우아하잖아요.”

“조용한 저녁 외출인데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했지.
“미스 미네르바는 그런 옷차림을 좋아할 것 같은데요. 톰갤런네 사람들은 손님이 훌륭한 차림을 하고 오는 것을 좋아해요. 미스 미네르바의 할아버지는 언젠가 그 집 무도회에 초대되어온 여자가 가장 좋은 드레스를 입고 오지 않았다고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는 소문이 있어요. 톰갤런네에올 때는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면서요.”
“그러거나 말거나 난 녹색 보일 드레스를 입고 갈 거예요. 톰갤런 망령들도 그걸로 만족해야 해요.”
내가 지난주에 한 일을 고백해야겠어, 길버트. 남의 일에 너무 나서고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수 없었어. 내년이면 나는 서머사이드를 떠나야 하는데 엘리자베스를 그 두 인정머리 없는 할머니들 손에 내맡겨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거든. 그 두 할머니의 좁은 소견은 해가 갈수록 더 편협해지는 것 같아. 그런 음침한 집에 내버려둔다면 엘리자베스가 소녀 시절을 어떻게 보내겠어?
“무섭지 않은 할머니와 같이 살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도 엘리자베스는 내게 그렇게 물었어.
그래서 난 엘리자베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어. 파리에 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주소를몰랐는데 레베카 듀가 그 사람 회사 이름을 알고 있더라고. 난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정중하게 편지를 썼어. 하지만 무조건 엘리자베스를 데려가야 한다고 했지.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아빠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지, 캠벨 부인이 얼마나 이 아이를 혹독하고 엄격하게 다루는지도 얘기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난 평생 편지를 써야 했다는 후회 속에 살게 될 것 같았거든.
내가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된 이유는 어느 날 엘리자베스가 내게 하느님께 편지를 썼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야. 하느님께 아버지를 데려다달라고, 자기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터에 멈추어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 편지를 읽었대. 미스 프라우티가 여기 미망인들 바느질을 해주러 왔다가 엘리자베스가 아주 이상한 짓을 하더라는 얘기를 해주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
“하늘에 대고 이야기를 하지 않나 엘리자베스가 점점 더 이상하게 되어가요.” 하더라고.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더니 다 이야기를 해주었어.
“저는 하느님이 기도를 하는 사람보다는 기도 내용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기도를 아주 오래 했어요. 하지만 하느님한테 기도하는 사람이 아주 많겠죠?”
엘리자베스가 물었어.
바로 그날 밤 내가 아이 아빠에게 편지를 쓴 거야.
이 편지를 마치기 전에더스티 밀러이야기를 해야 해. 얼마 전에 케이트 아주머니가 이 고양이에게 새 집을 찾아주어야겠다고 말을 했어. 레베카 듀가 너무 투덜대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지난주 어느 날 저녁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더스티 밀러가 보이지 않았어. 채티 아주머니께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 고양이를 ‘윈디 포플러’와는 반대편인 서머사이드 저 끝에 사는에드먼즈부인 집으로 보내버렸대.더스티 밀러는 아주 좋은 친구였는데 가버려서 너무 섭섭해. 하지만 적어도 레베카 듀만큼은 행복해하겠지.
그날 레베카 듀는 깔개 짜는 것을 도우러 시골 친척집에 가고 없었어. 해가 저물어 돌아왔을 때도 레베카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지. 자야 할 시간이 되어 뒤 베란다에서더스티 밀러를 부르니까그제야케이트 아주머니가 조용히 말해주었어.

“이제는더스티 밀러를 부르지 않아도 돼, 레베카. 여기에 없으니까. 우리가더스티 밀러를 위해 다른 집을 구해줬거든. 이제는더스티 밀러때문에 애먹지 않아도 돼.”
만일 레베카 듀가 창백하게 질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거야.
“여기 없다니요?더스티 밀러한데 집을 구해줬다고요?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람! 여기가 그 고양이 집 아니었어요?”
“에드먼즈부인에게 줘버렸어. 그 부인 딸이 시집간 뒤로 아주 쓸쓸해해서 고양이라도 친구 삼으라고.”
레베카 듀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아버렸어. 몹시 화가 난 듯 보였지.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아요.”
이렇게 말을 했는데 정말로 그래 보였어. 레베카 듀의 두 눈이 분노로 그렇게 이글거리는 건 처음 봤거든.
“이달 말에 나가겠어요, 맥콤버 아주머니. 허락만 하신다면 더 빨리 나갔으면 해요.”
“레베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뭔지 모르겠군. 레베카는더스티 밀러를 싫어했잖아. 바로 지난주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케이트 아주머니는 몹시 당황해서 말했지.
“그래요. 내 탓을 해도 좋아요! 내 기분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요! 가엾은 고양이! 내가 그 고양이를 돌봐주고 응석도 받아주고, 밤이 되면 집 안으로 들여오고는 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없는 동안에 쫓아내다니. 그것도 제인에드먼즈에게. 그 사람은더스티 밀러가 아무리 먹고 싶어 해도 간 한 조각 사줄 사람이 아니라고요! 내게는 오직 하나뿐인 부엌 친구였는데!”
레베카는 가슴이 쓰라린 듯 말했어.
“하지만 레베카, 언제나 그 고양이가 지겹다면서?”
“네, 계속 말씀하세요, 뭐든지요! 나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고요. 나는 그 고양이를 아주 어린 새끼였을 때부터 길렀어요. 내가 그 고양이를 돌보고 버릇도 들였다고요. 그런데 이렇게 돼버렸으니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었지요. 그 제인에드먼즈가더스티 밀러와 놀아줄 착한 고양이를 갖고 있대요? 그 사람이 나처럼 고양이가 밖에서 얼어 죽을까 봐 몇 시간이고 밖에 나가 고양이를 불러댈까요? 그럴 리가 없다고요. 글쎄, 내가 바라는 건요, 맥콤버 아주머니, 날씨가 영하 10도도 더 내려간 추운 밤이면 양심의 가책으로 아주머니 마음이 괴롭지나 않았으면 하는 거네요. 나는 한숨도 못 잘 테지만, 그런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레베카, 레베카가 단지 그런 마음으로…….”
“맥콤버 아주머니, 나는 벌레도 아니고 현관에 놓인 흙받기도 아니에요. 그래요, 이 일은 내게 교훈이 되겠죠. 귀중한 교훈이었어요! 두 번 다시 어떤 동물에게도 마음을 주거나 하지는 않겠어요. 아주머니가 정정당당하게 한 일이라면……. 그런데 내가 없는 동안에, 이런 식으로 나를 기습하다니! 이런 비겁한 일은 들은 적이 없어요. 하지만 내가 어디 내 기분을 생각해 달라고 할 만한 입장이나 되나요?”
“레베카, 원한다면 우리가더스티 밀러를 다시 데려오면 돼.더스티 밀러를 되찾아 오고 싶다면 되찾아올 수 있다고.”
케이트 아주머니가 절망적으로 외쳤어.
“그러면 그렇다고 어째서 더 빨리 말하지 않았죠? 하지만 안 될 거라고요. 제인에드먼즈가 꽉 붙들고 내놓지 않을걸요.”

레베카 듀가 따졌어.
“내 생각엔 돌려줄 거야. 그럼 만일더스티 밀러가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나간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레베카?”
케이트 아주머니는 또다시 형편없이 진 꼴이 되었어.
“생각해보겠어요.”
레베카 듀는 엄청나게 양보라도 하듯 말했어.
다음 날 채티 아주머니가 뚜껑 달린 바구니에더스티 밀러를 넣어 집으로 데려왔어. 레베카 듀가더스티 밀러를 안고 부엌으로 가서 문을 닫아버리자 채티 아주머니와 케이트 아주머니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걸 내가 보았지. 나는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챘어. 이건 분명 제인에드먼즈와 합세하여 꾸며낸 미망인들의 교묘한 책략이었을 거야.
그 뒤로는 레베카도 더스티 밀러 일로 불평하지 않아. 잘 시간이 되어 더스티 밀러를 부를 때도 그 목소리에 승리의 울림이 담겨 있어. 마치 더스티 밀러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것과 자기가 또 한 번 미망인들을 이겼다는 것을 온 서머사이드가 알아주기 바라는 듯 말이야.




10





음침하고 바람이 거센 어느 3월 저녁 무렵, 구름도 바쁜 일이 있는 듯 총총거리며 지나던 날, 앤은 널찍하고 얕은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계단마다 묵직한 돌 항아리들과 아주 근엄한 표정의 사자상이 저택 현관문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언제나 어두워진 뒤에 이 집을 지나면서 보면 어두컴컴한 불이 한두 개 창문에서 흘러나올 뿐 어둡고 음침해 보이던 집이 지금은 미스 미네르바가 마치 온 서머사이드 사람들을 초대하기라도 한 듯 온통 불을 밝혀놓아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자기를 환영하는 불빛에 너무 감동스러워 앤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앤은 녹색 보일 드레스만으로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현관으로 앤을 맞아들인 미스 미네르바도 그렇게 생각한 듯 얼굴과 목소리에 따뜻한 환영의 마음이 넘쳐흘렀다. 미스 미네르바는 위엄 있어 보이는 검은색 벨벳 옷을 입고 잿빛 구불구불한 머리에는 다이아몬드 장식 빗을 꽂았으며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톰갤런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카메오 브로치를 달았다. 전체적으로 좀 유행에 뒤떨어져 보이는 옷차림이었으나 미스 미네르바가 입으니 시대를 초월한 왕족 의상처럼 품위가 느껴졌다.
“톰갤런 저택에 잘 오셨어요. 셜리 선생을 오늘 밤 우리 집 손님으로 모시게 되어 아주 영광이에요.”

미스 미네르바가 앤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비쩍 마른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옛날에는 톰 갤런 저택이 항상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북적거렸지요. 우리는 근사한 파티를 많이 열어 우리 집을 찾은 명사들을 즐겁게 해주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도 변했죠. 난 그런 떠들썩한 파티를 좋아하지 않아요. 톰갤런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우리 집안은 저주를 받았어요.”
미스 미네르바가 앤을 빛바랜 붉은 벨벳 카펫이 깔린 커다란 층계 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미스 미네르바가 어찌나 비밀스럽고 음산한 어조로 말을 하는지 앤의 몸이 다 떨려왔다. 톰갤런 집안의 저주라니! 소설 제목으로 아주 그만인걸!
“이 층계는 우리 증조할아버지 톰갤런이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은 곳이에요. 이 집을 새로 지어 축하 파티를 하던 날 밤이었죠. 이 집은 바로 그렇게 인간의 피로 신성해졌답니다. 떨어진 곳이 바로 저기예요.”
미스 미네르바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복도에 깔린 호랑이 가죽 깔개를 극적으로 가리켜서 앤의 눈에 톰갤런 노인이 거기에 죽어 누워 있는 장면이 거의 눈에 잡힐 듯 그려졌다. 앤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조그맣게 “오!” 하는 소리만 냈다.
미스 미네르바는 복도를 지나 앤을 안내했다. 복도에는 빛은 바랬지만 아름다운 초상화와 그림 들이 걸렸고, 저 끝에는 그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보였다. 이어 들어간 널따란 손님방 역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천장이 높은 방에는 커다란 침대 천장이 달린 호두나무침대가 놓였고 아름다운 실크 이불이 펼쳐져 있어 앤은 그 위에 코트와 모자를 벗어놓는 게 굉장히 무례한 일로 느껴졌다.
“셜리 선생 머리는 굉장히 아름답군요.”
미스 미네르바가 감탄하며 말했다.
“나는 빨간 머리를 좋아해요. 우리 리디어 고모님도 빨간 머리를 가졌죠. 톰갤런 집안에서 유일한 빨간 머리였어요. 어느 날 밤 북쪽 방에서 머리를 빗고 있을 때 고모님 몸에 촛불이 옮겨 붙어 불꽃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며 복도를 뛰어다녔죠. 그것도 우리 집안에 내린 저주 중 하나였어요.”
“그래서 고모님은 어떻게…….”
“아니요. 불에 타 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아름다움은 잃었죠. 고모님은 아주 아름답고 허영심이 강한 분이었는데, 그 후로는 죽을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죽을 때 아무도 자기의 흉터 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관 뚜껑을 완전히 닫아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그 의자에 좀 앉으세요. 아주 편안한 의자예요. 우리 언니가 그 의자에서 뇌졸중을 당해 앉은 채 죽었죠. 남편이 죽은 뒤 딸과 함께 이 집으로 돌아와 살았던 언닌데, 언니 딸도 저 부엌에서 끓는 물 냄비에 끔찍한 화상을 입었어요. 아이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다니 너무 비극적이잖아요?”
“어머나, 어쩌면…….”
“하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이에요. 우리 일라이저 고모는, 살아 있었다면 내 고모가 되었겠죠, 6살 때 갑자기 사라져버렸는걸요. 그 고모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정말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찾아봤지만 허사였대요. 그 고모의 엄마가 되는 우리 양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가 데려와 키우고 있던 고아 조카아이에게 몹시 심하게 굴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무더운 여름날에 저 층계머리에 있는 벽장에다 아이를 가두어두었던 적도 있대요. 나중에 아이를 꺼내주려고 가보았더니 글쎄 아이가 죽어 있더라는 거예요. 그 후 그 할머니 자식이 없어졌을 때 그 고아의 귀신이 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우리 집안에 내린 저주 탓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그런 저주를…….”
“셜리 선생의 발등은 참 높군요. 나도 발등이 높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발밑으로 물이 흐르게 할 수도 있겠다고요. 귀족이라는 증거죠.”
미스 미네르바는 벨벳 스커트 밑으로 한 발을 살짝 내밀어 분명 아름다운 발을 확인시켜주었다.
“네, 그렇군요…….”
“식사 전에 저택 안을 좀 구경시켜줄까요? 전에는 이 집이 서머사이드의 자랑거리였어요. 지금이야 모두 구식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게 몇 가지는 있을 거예요. 계단 맨 위에 걸린 칼은 영국 육군 장교였던 우리 고조부님 거예요. 군인으로 공을 세운 대가로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있는 토지를 하사받았죠. 그 고조부님은 이 집에서 살지 않았지만 고조모님은 몇 주 만이라도 이 집에서 사셨어요. 고조모님도 아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뒤로 얼마 살지 못했지만요.”
미스 미네르바는 커다란 저택 여기저기로 인정사정없이 앤을 끌고 다녔다. 커다랗고 네모난 모든 방들과 무도실, 온실, 당구실, 세 개나 되는 거실,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침실, 그리고 크다 못해 거대한 다락방까지 다 가보았다. 어느 방이나 모두 호화롭지만 음침했다.
“저 초상화는 로널드 숙부와 루벤 숙부예요.”
미스 미네르바는 벽난로 양쪽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듯 보이는 두 인물을 가리켰다.
“두 분은 쌍둥이인데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를 몹시 미워했어요. 온 저택 안에 두 사람 싸움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죠. 그 때문에 두 분의 어머니는 일생을 참 비참하게 보내야 했어요. 그리고 바로 이 방에서 최후의 싸움이 벌어졌죠. 천둥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둘이 싸우다 루벤 숙부가 벼락에 맞아 죽어버렸으니까요. 로널드 숙부님은 언제까지고 그 충격을 잊을 수 없어 그날부터 얼빠진 사람이 되어버렸대요. 로널드 숙모님은…….”
미스 미네르바는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덧붙였다.
“결혼반지를 삼켜버렸어요.”
“어쩌면 그런 일이…….”
“당시 로널드 숙부님은 어쩜 그렇게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며 숙모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대요. 곧 토하는 약이라도 먹었더라면…… 하지만 반지는 그 뒤로 다시는 볼 수 없었죠. 그 일로 숙모님의 삶은 엉망이 되었어요. 결혼반지가 없어서 늘 결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거든요.”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운…….”
“네, 그래요. 우리 에밀리아 숙모예요. 정확히 우리 숙모는 아니죠. 알렉산더 숙부님의 부인이죠. 얼굴이 무척 숭고해 보인다고 칭송이 자자했지만 자기 남편을 버섯 스튜로 독살해버린 사람이에요. 독버섯이죠. 우리는 늘 사고인 척했지만, 집안에 살인이 일어났다면 큰 망신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았어요. 물론 이 숙모는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어요. 숙모는 아주 명랑한 젊은 아가씨였고 삼촌 쪽은 너무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두 분 관계가 12월과 5월 같았다고나 할까요. 그렇다고 그게 독버섯 같은 것을 써도 될 만한 이유는 아니죠. 그 뒤로 얼마 안 되어 숙모도 목숨을 잃었어요. 두 사람이 함께 샬럿타운에 묻혀 있죠. 톰갤런 집안사람은 모두 샬럿타운에 묻혀요. 이것은 루이즈 숙모예요. 아편을 마셔버렸어요. 의사가 토하게 해서 숙모의 목숨을 구했지만 또다시 그런 짓을 할까 봐 모두들 노심초사했어요. 그 후에 루이즈 숙모는 그럴듯하게 폐렴으로 죽어서 우리 모두 마음을 놓았죠. 그렇다고는 해도 이 숙모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도 없어요. 그 남편이라는 사람이 숙모의 엉덩이를 때렸거든요.”
“엉덩이를 때리다니…….”
“그래요. 신사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아내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죠. 차라리 두들겨 패서 쓰러지게 했을지언정 엉덩이만은 때려선 안 되죠. 절대로! 만일 내 엉덩이를 때리려는 남자가 있다면 어디 한번 보고 싶어요.”
미스 미네르바는 결연히 말했다.
앤 역시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앤의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해도 미스 미네르바 톰갤런의 엉덩이를 때리는 남편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 방은 무도실이에요. 물론 지금은 쓰지 않아요. 하지만 전에는 여기서 늘 무도회를 열었죠. 톰갤런 가문의 무도회라면 유명했어요. 온 섬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저 샹들리에는 아버지가 5백 달러를 주고 샀어요. 어느 날 밤 여기서 한창 춤을 추고 있을 때 내 고모할머니가 되는 페이선스가 그만 쓰러져 죽었죠. 저기 저 구석쪽이에요. 고모할머니는 자기를 실망시킨 남자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던 중이었어요. 난 도대체 여자들이 왜 남자 때문에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아요. 내게는 남자들이 아주 하찮은 피조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거든요.”

미스 미네르바는 매부리코에 얼굴 양옆에 뻣뻣한 구레나룻이 나 있는 아버지 사진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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