尼采和莊子如是说4-11~12 (끝)

나단비 | 2024.06.11 19:06:43 댓글: 2 조회: 215 추천: 1
분류교양서적 https://life.moyiza.kr/fiction/4575997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11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그려라
Nietzsche
나의 형제들이여! 가슴을 활짝 펴라. 그대들의 발도 높이 올려라! 훌륭한 무용가여! 제발 슬픈 곡과 모든 천민의 슬픔을 잊어버려라! 산의 동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게 배워라.
바람은 자기의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춘다.
당나귀에게도 날개를 주고, 암사자의 젖을 짤 수 있는 이 훌륭하고 자유분방한 정신은 가상하다. 모든 자유로운 정신들의 영혼을 찬미하라! 스스로를 초월해서 웃는 것을 배워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莊子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꾼은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벌목을 하지 않았다. 장자가 말한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 타고난 수명을 누리는구나." 장자가 산에서 내려와 옛 친구 집을 찾자, 옛 친구는 기뻐하며 하인에게 거위를 잡도록 한다. 하인이 주인에게 묻는다. "거위 가운데 하나는 잘 울고 다른 하나는 울지를 못합니다. 어느 놈을 잡을까요?" 주인이 말한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이튿날 제자가 장자에게 묻는다. "어제 보았던 산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 살아남았는데,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 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쪽에 머무시겠습니까?"
「산목」
니체는 허무주의를 역사의 문제로 바라봤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다 보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던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판명되는 그 순간 허무주의는 시작된다. 과거의 전통사회에서 최고의 가치가 신이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자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자기가 의지할 만한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통찰! 이것이 허무주의에 관한 근본적 사유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일부분의 이익만을 뒷받침하고 있는 '하나의 가치'에 불과한 것이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절대적 진리'로 선전되는 것을 해채했다. 이제 남는 것은 개개인이 저마다 추구하는 각자 나름의 가치들이다. 절대적 진리를 없앤 자리에 각자의 다양한 가치들을 메우기, 이것이 니체의 허무주의 사유의 핵심이다. 각자 나름의 진리란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그리고 자기를 더욱 확장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다. 니체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인간형에 대해 고대 그리스의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끌어들여 설명했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란 생성과 생명의 기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주체와 객체가, 인간과 자연이, 외면과 내면이 융합하는 도취의 경험이다. 도취는 우리의 내적 에너지가 우리가 지각한 것을 변형시키는 상태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내적 에너지는 사랑하게 된 상대를 그전과는 다르게 더욱 생생하고 더욱 강렬하게 지각하도록 한다.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식중심의 '작은 이성'이 아니라, '큰 이성'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삶 자체를 예술 작품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했다. 허무주의 시대에서 나의 삶을 규정짓던 절대적 진리는 더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자기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진리를 새롭게 규정하고 그에 따라 자기 주도적인 삶을 조각해 나간다. 이런 방식은 예술가가가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를 끌어들여 비유하자면, 나라는 존재는 작품이 나오길 기다리는 도화지이자 화가이다. 예술가이자 예술작품인 나는 거칠 것 없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그려나간다.
장자의 아포리즘인 '거위 이야기'에서도, 거칠 것 없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그려나가려는 자기 주도적인 인간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장자에 의하면, '쓸모없음'과 '쓸모있음'의 중간에 놓이더라도 재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모든 시비를 뛰어넘어 자연의 대도 大道에서 놀아야 한다.
장자에게 중도는 텅 비어 있는 상태와 관련이 있다. 이 텅 빈 상태는 이쪽과 저쪽의 지평으로 마음대로 도약할 수 있는 중간지대이고 열린 공간이며 이쪽과 저쪽의 특성이 다 들어 있는 공간이다.
장자의 중도는 단지 어떤 것과 어떤 것 간의 평균치가 아니다. 예를 들어 흐르는 냇물 양쪽에 둑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서 냇물은 중간 지평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냇물의 흐름은 엄청나게 빨라 양쪽 둑을 무너뜨리며 흐른다. 이것은 상반된 양쪽의 가치가 이 중간 지평에서 모두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 사상에서 중도의 세계란 그 안에 최대한의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의 점'(아르키메데스가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장소만 주어진다면 지구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과 같은 지층이다.
우리가 단편적인 가치들에 매몰돼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는 도그마에 빠질 때, 우리의 외부환경에 대한 대응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곧 중독의 위험성이기도 하다. 악함이란 단지 도덕적인 결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중독을 뜻한다. 도덕적 선함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 또한 오히려 악함이 될 수가 있다. 무엇에 빠지는 것, 즉 중독이란 그것이 알코올 중독이든 이상주의 중독이든 모두 나쁜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중도란 그 자체가 진리로 표방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무용함과 유용함은 상황에 따른 판단을 요구한다. 위 이야기에서 장자와 제자가 먹은 거위는 울지 못하는 거위였기 때문에 요리 재료로 쓰였다. 이 거위는 자연의 본성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다. 자연의 본성이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정해진 보편적인 규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자연스러운 성정을 의미한다. 개가 짖는 것이 개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정이듯 거위 또한 우는 것이 자연적 성정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있고자 하는 방식대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이다.
12
모든 지류를 품에 안은 거대한 강이 돼라
Nietzsche
위대함이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강물도 스스로 커지거나 풍부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만은 지류를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크고 풍부하게 만든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莊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면서 타인을 그 의견에 따르게끔 하는데 마음을 쓰면서, 그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 하나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것을 조삼 朝三이라고 한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마."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낸다. 이번에는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그렇다면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 주마."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기뻐한다. 이처럼 이름과 실질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 작용한다. 이는 목전의 이익에 마음을 뺏겨 시비의 가치판단을 하므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 聖人은 시비의 대립을 조화시켜, 천균 千鈞, 자연의 균형, 만물제동의 원리 에서 쉰다. 이를 양행 兩行이라고 한다.
「제물론」
사람들은 각자 나름댈 자기만의 설득력을 갖춘 관점을 갖고 있는데, 이를 모두 용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와 장자의 생각이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공포와 분열의 조장은 개인의 힘과 실존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켰다.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온 종교, 애국, 인종, 부, 계급으로부터 기인하는 우월감은 극소수의 손아귀에 완전히 길들여진 수많은 사람을 낳았다.
우리는 타인과 비교했을 때 무언가 더 특출난 것이 있도록 훈련 받아왔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더 똑똑한, 더 멍청한, 더 늙은, 더 어린, 더 부자인, 더 가난한, 이런 식으로 스스로와 비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그들이 당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당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본질적인 것과 당신에게 본질적인 것은 실제로 하나라는 사실을 느끼기도 한다.
개인과 타자가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의 내면에서 각각의 이질적인 정신 요소들이 잘 공존해야만 한다. 만약 자기 내면이 옹졸한 생각에 젖어 있다면 이것은 타자에게 투사되어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니체와 장자 사상에는 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개인 혹은 개인이 모인 작은 공동체와 국가의 긴장이 첨예하게 반영되어 있다.
니체와 장자에게 '규정되지 않은 본능'과 '규정을 기준 삼아 내리는 판단'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한 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규정으로 내린 판단은 편견으로 이어지기 쉽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지니게 한다. 이런 편견들은 무의식적으로 끌어올린 '규정되지 않은 본능'으로 해체시켜야 한다. 편견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현실을 반영해 다시 만든 '새로운 규정적 판단'이 자리한다. 이런 순환 관계는 계속 진행된다. 이것은 안정과 불안정 사이의 교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체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다양한 가치를 내면에 품을 수 있는 심리적 영역(니체의 아포리즘에서 말한 '강물')이 그만큼 넓어진다.
'분열과 정복'은 현대 사회의 좌우명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자신을 만물과 분리해 인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과 자연의 관계, 개인에 내재된 힘의 진실을 인식하면 희망은 있다. 니체와 장자의 아포리즘은 계속 그 희망을 말한다. 모든 가치를 끌어안을 수 있는, 폭넓은 내면 세계가 지닌 힘 말이다.
​​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6/24 05:00:19

악함이란 단지 도덕적인 결핍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무엇에빠져 헤여나오지 못하는
중독을 뜻한다.도덕적 선함에 지나치게 빠지는것 또한 오히려 악함이 될수잇다.

무용함과 유용함은 상황에따른 판단을 요구한다.장자에 의하면 무용함과 유용함의 중
간에 놓이더라도 재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그러므로 단편적인 가치들에
매몰돼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현상을 해석하지말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그려
나가려는 자기주도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야한다.

나단비 (♡.252.♡.103) - 2024/06/24 10:19:56

자기 내면세상을 넓히고 진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행복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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