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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의 무리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 너희들은 “자아Ich ” 운운하고는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너의 신체와 그 신체의 커다란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
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이 그린 대표작의 제목이다. 그는 30대 후반에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과 증권 중개인이라는 직업을 모두 버리고 떠났다. 이 작품은 그가 말년에 살았던 타히티섬의 풍경을 보여 주지만, 제목에서 헤아려 볼 수 있듯이 그는 이 그림에 인간의 삶의 모습 전부를 담으려고 했다.
제목의 세 가지 질문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누
구인가?’이다. 삶의 모든 문제는 진정한 ‘나’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누
구인가?’라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진정한 나를 아는 것이다.
정신이 나인가, 신체가 나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는 《파이돈》에서 영혼은 신적이고 불멸의 존재이며 지성으로 알 수 있고, 육체는 인간적이고 죽게 되어 있으며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육체는 단지 영혼의 감옥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육체는 영혼을 혼란에 빠뜨려 참다운 진리와 지혜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영혼이 떠나자마자 파괴되어 해체되고 천하고 악에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혼은 순수하고 항상 존재하고 죽지 않으며 귀하고 선한 것이다.
이렇듯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이성 중심의 이원론을 주장했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는 이분법적 플라톤의 사상은 신과 인간, 천상의 세계와 이 세상을 나눈 중세 기독교 사상으로 이어졌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실체로 규정한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어떻게 바라볼까? 니체는 영혼과 육체 중 어느 것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할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영혼이 단지 신체에 깃들어 있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지만 정신은 작은 이성이며 단지 신체의 작은 도구이고 놀잇감이라는 것이다. 즉 진정한 나는 바로 신체이다. 니체는 육체를 경멸하고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플라톤주의자나 기독교인 같은 이원론자를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어서 ‘자아Ich’와 ‘자기das Selbst’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 안에는 자아를 지배하는 더 위대한 존재가 있다. 그 이름은 ‘자기’이며 몸이라는 거대한 이성이다. 니체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배후에 신체가 있고 그 신체 안에 바로 자기가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의 ‘진정한 나’는 신체이고 자기이며 커다란 이성이다. 따라서 다음 등식이 성립한다.
‘진정한 나=신체=자기=커다란 이성’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에 대하여
니체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는 문제는 후대의 정신 분석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 심리학의 거장 칼 구스타프 융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최후의 자서전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에서 호기심에 이끌려 맨 먼저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는 니체의 작품에 무척 열광하여 곧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그는 이 작품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아주 강렬한 체험이었다고 고백한다. 융은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고, 이제는 자신의 제2의 인격이라고 말한다.
융은 인간의 정신을 ‘의식’,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이라는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했다. 또한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는 니체에게 영향을 받아서 의식의 주체 역할을 하는 자아와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는 전인격으로 자기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왜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사람도 있을까?’
‘왜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실패만 하는 사람도 있을까?’
‘왜 달콤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 파탄으로 이혼하는 사람도 있을까?’
‘왜 평생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한 사람도 있을까?’
‘왜 평생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있을까?’
이러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성공자와 실패자, 부자와 빈자,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등으로 나뉜다. 이처럼 세상에 단지 두 부류만이 존재하는 이유는 니체의 비유대로 말하면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인 자기에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빙산’에 빗댄다. 의식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다. 무의식은 수면 아래의 거대한 빙산 덩어리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의식을 자신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의식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면 그 안에서 거대한 무의식의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Ⅲ》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 스스로가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니다.”
무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두운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토끼의 껍질이 일곱이라면 인간은 일흔 번 곱하기 일곱 번씩이나 껍질을 벗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인간은 아무리 자신을 파헤쳐도 자신의 본질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진정한 자아의 근본을 이해해야 한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Ⅲ》에서 다음 질문에 대한 대상을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대상들을 통해 진정으로 내가 누
구인지 알게 된다고 한다.
‘너는 이제까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끌어당겼는가?’
‘무엇이 너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가?’
중년이 된 우리는 늘 같은 문제점을 안고 살아간다. 청춘 시절과 마찬가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곳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좌절감을 맛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표류한다. 니체가 말한 질문들의 대상을 각각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 ‘목표’, ‘행복’이다. 니체의 말처럼 나 스스로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40여 년을 살아온 많은 이의 인생이 그렇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영혼을 강력하게 끌어당길 만큼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청사진을 가져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사랑하라
우리는 니체가 말한 신체, 즉 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40대 이후부터는 남녀 할 것 없이 갱년기와 함께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험난한 세월을 버텼으니 몸과 마음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는 건 당연하다. 앞으로도 5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큰 병에 걸리지 않고 잘 버틸 자신이 있는가? 항상 질병에 시달렸던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건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 음식 섭취, 기후와 장소의 선택,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소개한다.
• 든든한 식사가 너무 양이 적은 식사보다 소화가 더 잘된다.
• 누구든 자기 위의 크기를 알고 있다. 오래 질질 끄는 식사를 피하라.
• 간식도 먹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마라.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 차는 아침에만 견딜 만하다. 조금만 마시되 강하게 마셔라.
•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마라.
•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탄생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마라.
• 건조한 공기와 맑은 하늘이 있는 장소와 기후를 선택하라.
• 모든 독서는 나의 휴식에 속한다.
• 많은 것을 보지도, 듣지도, 자기에게 다가서도록 내버려 두지도 마라.
니체는 평생 건강과 병의 경계을 오갔다. 니체에게 병은 삶을 절망에 빠뜨릴 정도로 고통 그 자체였다. 병에 걸리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병에 걸려 아파할 때 니체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병에 걸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만약 지금 병에 걸려 몸이 아프거나 건강이 나빠졌다면, 다시 건강해질 시간이다. 우리는 누구나 몸 안에 병과 고통을 이길 힘을 간직하고 있다. 니체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제는 건강 상태가 약간씩 나빠지고 좋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가장 행복했고, ‘나로의 귀환’을 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병과 고통은 삶을 비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건강한 나를 찾아가기 위한 극복의 대상으로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쉽다. 누구나 이 땅에 ‘몸’이라는 옷을 입고 태어난다. 비록 플라톤은 몸을 영혼이 갇혀 있는 감옥이라고 표현했지만,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처음 받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또한 죽을 때까지 입어야 할 마지막 옷이다. 따라서 스스로 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오늘부터는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 대신에 좋아할 만한 부분을 찾자. 패스트푸드를 삼가고 건강한 음식을 먹자. 또한 주말마다 숲이 우거진 산으로 가서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기운을 내뱉고 깨끗한 공기와 긍정적인 기운을 들이마시자. 가장 중요한 관계는 자기 몸과의 관계다. 몸이 아프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삶이 절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번 삶의 여행을 위해 영혼이 선택한 몸을
더욱 사랑하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