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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 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책, 인간, 음악의 가치와 관련된 우리의 첫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걸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춤출 수 있는가?”
《즐거운 학문》
1879년 5월 2일, 니체는 바젤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6월 14일에 연금을 받으며 퇴직한다. 니체는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가 방랑길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점점 나빠진 건강이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니체는 건강 관리에 소홀했다. 그는 휴식을 취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하는 바람에 반복적인 편두통과 탈진에 시달렸고,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구 통증이 계속되었다. 그는 질병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홀로 지내야만 했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외로움이었다. 결혼 상대자를 계속 찾았지만 결국 독신으로 살 자신의 운명에 낙담했다. 니체에게 재산이라고는 원고와 몇 권의 책이 든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뿐이었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장소를 찾아 끊임없이 어딘가를 여행했다. 그는 스위스, 제노바, 니스, 베네치아, 토리노 등의 호텔 방과 하숙방에서 살았다.
1879년은 니체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니체는 그해에만 118일이나 질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죽음을 직면하고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를 깨뜨리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에서 인생의 여정을 걷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며 여행자를 여러 단계로 구분한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할 때 남들에게 관찰당하는 대상에 불과한 사람이다. 니체는 그를 순전히 수동적인 인간으로 눈먼 자라고 말한다.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을 내면화하여 삶에 적용하는 창조자이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과거에 익숙해진 자신과 관련한 전부를 버린다는 것이다. 그 여행의 이유나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니체는 실제 삶에서도 가족도 친구도 동반자도 없는 여행객으로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혼자였다. 그는 고독을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고독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니체는 왜 고독한 여행이 필요했던 것일까?
길을 걸으며 깨달은 삶
니체는 온전히 혼자 산과 바닷가에서 길을 걸으며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만, 산이나 바닷가에서 걷고 뛰고 춤추면서 사색했다. 니체는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10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위해 호모 비아토르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결별과 새로운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리고, 지치고 상처 입었다 할지라도 계속 걸어가야만 했다.
자신을 억누르던 기존의 관습과 가치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고독밖에 없다는 사실을 니체는 깨달았다. 니체의 방랑길은 그의 사상이 태어난 발자취이다. 그는 여름에는 알프스 산맥 고산 지대의 한 마을인 스위스의 질스 마리아에 머물렀다. 그러다 추운 겨울이 오면 기차를 타고 따뜻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휴양지로 떠났다. 특히 스위스의 질바플라나의 호숫가는 그가 영원 회귀 사상을 처음으로 생각해 냈던 피라미드 모양의 수를레이 바위가 있는 곳이다.
창조자의 길을 가기 위한 고독의 길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자가 되기 위한 길을 가려고 한다면, 무리에서 벗어나 고독이 주는 고통을 감당할 만한 권리와 힘이 있는지 보여 달라고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이웃 사람들에게로 간다. 그리고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부여하며 타인 지향적 삶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무리 지어 살 때 더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고독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내면의 나와 만나기 위해서는 ‘무리 본능’에서 벗어나 고독한 길을 가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묻는다.
“형제여, 그대는 고독 속으로 들어서려 하는가? 그대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홀로가 된 창조자는 많은 사람에게 시달릴 수 있다고 말한다. 창조자의 길은 고통과 고난의 길이다. 때가 되면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으로 고독에 지치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창조자로서의 긍지와 용기는 사라지고 자신의 비천함을 너무나도 가까이에서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고독한 자를 죽이려는 감정들로 인해 시련을 당할 수도 있다. 시기와 질투심으로 가득 찬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자가 마주칠 수 있는 적 가운데 가장 고약한 적은 외부의 누군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라고 말한다. 창조자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창조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경멸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파멸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너는 너 자신의 불길로 너 자신을 태워 버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먼저 재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새롭게 되길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고독한 15분이 주는 강력한 청량감
니체는 자신의 가장 내적인 샘에서 솟아나는 가장 강한 청량제를 마시기 위한 15분의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다. 고독은 우리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감정과 내밀한 접촉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에서 자신과 자연 속에서 가장 깊이 반성하는 15분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수많은 싫증, 우울, 권태의 대가로서―이 모든 것은 친구, 책, 의무, 정열이 없는 고독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자신과 자연 속에 가장 깊이 반성하는 그 15분의 시간을 얻게 된다. 권태에 대해서 철저히 보루를 쌓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보루를 쌓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내적인 샘에서 솟아나는 가장 강한 청량제를 결코 마실 수 없을 것이다.”
날마다 잠깐이라도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 보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항상 침묵하고 있다. 어느 날 침묵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올 때, 우리는 자신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다. 니체는 이웃을 피하고 가장 멀리 있는 자, 즉 초인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는 초인으로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고독을 즐기지 않고서는 결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주변에 아무것도 두지 않은 채 내 안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여라.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의식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행하라. 혼자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비로소 고독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힘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공기가 필요하다. 나무들이 성장해서 울창한 숲을 이루려면 맑은 공기가 필요하듯, 니체가 제시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초인이 되려면 고독은 꼭 필요하다.
혼자라는 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뜻이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혼자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