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탄-3. 금융위기1997~1999

감사마음 | 2021.11.21 17:05:43 댓글: 0 조회: 1757 추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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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탄-3. 금융위기1997~1999

태국에서 시작된 1997 금융위기가 동남아를 휩쓸고 드디여 1998년엔 한국까지 강타하였다.

회사에 근무를 하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엔 통역이거나 관광가이드를 했었는데 하루 수입이 회사근무하는 봉급보다 훨씬 많이 나올 때도 있어서 회사를 그만둘려고 우왕좌왕 때였다. 마침 구조 조정을 하면서 회사의 노사 분쟁으로 생산도 판매 파업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노동신문 기자들이 들락대고 전혀 히트 아이스크림을 내놓은 회사 같지 않게 온종일 회의만 하는것이였다. 지겨운 날이 이어지자 이건 아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 두게 되였다.

휴식일에 한국의 회장님의 통역을 하게 되였는데 한국에 요청을 해서 생산 현장에 가서 제품을 공부 하고 중국 수출시 아웃터 서비스 센타에서 일을 보기로 하였다.

남들은 8만원을 중개비를 브로커한테 주고 한국으로 가는데 나는 1997 4월말 벗꽃이 활짝 한국 회사의 경비로 한국에 가게 되였다.

일주일간 오토바이 엔징을 터득하고 나니 회장님은 나한테 600만원을 쥐여 주면서 선조 할아버지 고향도 한번 가보고 다녀 보라고 하였다. 한국 모텔은 하루에 2만원쯤 하였고 15천원에 1박하는데도 있었다.

혹시나 한국에서 일을 할수 있을가? 여기 저기 친척들한테 찾아 다녔다. 당시엔 한국돈 1만원이면 중국돈 105 할때였다. 한국에서 한달에 한화 100만원씩 벌때였다. 친척이 수원에 있는 삼성 전관이라고 하는 전자 회사에서 근무하기에 가봤더니 제일 싫어하는 플라스틱 냄새와 용접 한시의 냄새가 코를 찔러서 이건 아니구나 하고 단념하게 되였다.

친척이 머무는 숙소는 다른 남자들도 많았는데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머지 않는 단란 주점에 다녀오고는 하는데 들어가 앉으면 1인당 20만원 내라고 해서 봉급을 내여주는 날엔 단란 주점이 만원이였다.

친척 집에서 다들 자고 한밤중인데 술에 취한 조선족 남자 한명이 문을 급하게 두드려서 다들 일어나보니 취해서 흙이 되였고 식칼 찾아서 들고는 단란주점에 가서 돈을 도로 앗아오자고 요청 하는 것이였다. 말로는 돈지갑을 꺼내니 빼앗아 갔다고 한다. 다들 그만두라 하고 집으로 데려다 주고 말았다. 아무래 주점에서 돈을 쓰고나니 아까웠나 보다.

나는 이러한 환경이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되여 회장이 돈으로 서울, 부산, 경주, 진주, 대전 등지역을 배낭메고 다녀왔다. 고양시에서 열리는 박람회에도 가봤는데 광고만 멋들어지게 하고 꽃은 옮겨 심어 놓은 것이여서 볼것도 없는데 입장료 7천원내고 사람들은 질척이는 길을 무리쳐서 걸어 다니는 것이였다. 같이 동행한 한사람이 같이 여라문명의 입장표를 거두어 들이 더니만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5천원씩 팔아버리는 것이였다. 표를 파는 매표소 옆에서…. 여자 직원이 눈이 휘둥그레해서 쳐다보는것이 인상에 남았다.

낚시터에도 여러차례 가봤는데 낚시군들이 자그마한 휴식터에 모여서 한담을 하는것이였다. 잡은 송어로 회를 주었는데 한잔 하고 낚시를 하는것이였다. 72세되는 할아버지가 혼다 3000cc짜리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는데 나와 악수를 한번 한것이 손에 향수 냄새가 며칠 가도록 지워 지지를 않았다. 젋게 산다는 스타일이라고 다들 혀를 끌끌 찼다.

낚시터엔 조선족 여자 두세명이 이쁘기도 하고 키도 훨씬 크고 인물 체격이 멋졌는데 같이 사장님이 말하길, 옆방에서 매춘 한다고 했다. 낚시대를 불궈놓고 없는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 간거라고 하였다.

아주 굉장히 지구촌 교회에 가봤는데 일요일날 모두 정장을 챙겨입고 하나님 만나러 간다고 화장도 하고 미소 짓는 마음으로 가는것이였다. 가서도 목사님은 친절하고 수백명을 상대로 설교하는데 귀에 들어오는 말로 하는것이였다.

후엔 작은 교회에도 가봤는데 이건 보온도 안되는 자재로 벽을 만들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졸음을 깨우려고 목사님이 화들짝 놀라게 소리쳐서 다들 잠에서 깨기도 하였다.

한국에 있는 동안 평생 첨으로 술에 취한적이 있었다.

회장님과 사장님 서너명이서 한국식으로 돌려 가면서 술잔을 비우고나서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는거 그대로 따라 마시다가 나는 물같은 한국술 하면서 두병정도 굽내고 말았다. 그리고 저녘엔 사장님 집에서 묵으라고 하면서 회장님이 차를 친히 몰고서 부근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인들 집에 들어가보게 되였다. 들어 가기 전에 카스맥주 24개에 우황청심환 2통을 가지고 사장님 노부모한테 드렸다. 어린애 둘은 무릎 굻고 인사 올리는데 아주 난감하여 나는 어쩔바를 몰랐다.

사장님은 사모님은 한국 공수부대 일원이였다고 한다. 아주 통쾌하고 말을 하였는데 중국에 대해서 아주 많은것을 물어보았다. 어느덧 가지고 카스맥주 24개를 셋이서 모두 마셔버리고 사모님이 냉장고에서 비닐병에 들어있는 유리컵에 거의 넘쳐나게 부어서 석잔 가져왔는데 마침 목이 칼칼 하던 차에 나는 가져 오자 마자 완샷해 버렸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마지막에 냄새가 - 올러오는 것이였다. 사장님이 옆에서 그렇게 마시면 안돼!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한국 40도짜리를 3~4냥정도 마셔버린것이다. 그전엔 나는 비닐병에 들어 있는건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인젠 쉬여야 한다고 어린애방을 내주기에 들어 갔는데 화장실로 가야 해서 문고리를 돌려서 문을 열면 몸이 뒤로 향해서 나가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나가면 문이 닫혀 버려서 나가지를 못하고 아예 쫄딱 망신 당하고 말았다. 사우나탕에 가서 하루종일 취해서 깨지를 않으니 사장님이 병원에 데려가서 정맥주사를 놓아주었다.

후에 모태주를 사들고 가서 노부모님한테 사죄하고 어린애들한테도 선물도 사주고 했지만 아직도 미안한 감이 든다.

그후부터 나는 한국 술은 맥주와 과일주만 마시고 소주와 기타 백주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약속대로 귀국을 했는데 한국 회장님의 약속은 지켜지지를 않았다. 중국 현지에 사무처를 설립 하는것도 보류가 되여서 나는 그만 일이 없어졌다.

와중에 중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을 만나서 같이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동업하기로 하였다.

수많은 아이템들을 개발하여 한국에서 중국으로 판매 시도 했는데 모두 시기 상조여서 실패로 끝났다.

아이스화장품, 여름철에 면에 뿌리면 얼음이 생겨서 얼굴에 맛사지 하면 날씨가 더워서 화끈한 얼굴을 진정해주는 화장품, 위생허가가 나오지를 않아서 그만두었다.

머리칼 염색제. 싰으면 바로 없어지는 것이였는데 필요한 때에 염색을 하고 평소엔 염생하지 않고 다니는 학생들에 필요했다.

안경유리. 수입하여 판매 적게 되였다.

상수도 라인 필터. 수도꼭지에 달아서 사용하고 필터를 파는것이였다. 상해 사람들은 필터 교환시 200원씩 한다고 하니 교환하지 않고 기계를 버리였다.

발광 전광판. 그당시 네온싸인으로 광고를 했었는데 우리 제품은 전기를 통과하면 하얗게 등으로 변하는 것이여서 엷어서 기둥에 둥그렇게 발라도 되는 것이였다.

그후 한국 땡물건인 모나미 볼펜과 비비안 스타킹 등을 대거 수입을 해서 팔았었다.

즈음에 나는 한국으로 옷걸이를 컨테이너 수출하여 이익이 남게 되였다. 또한 항주에서 실크를 한국으로 수출하는 건도 성사 시켰고 샤먼에서 대리석과 화강석을 수출 하는 것도 성사 시켰다.

자금도 생기고 모든것이 정상인가 싶었는데 한건의 무역으로 조그이나마 모은 돈을 모두 날려 먹었다.

비비안 스타킹은 아주 인기가 있었다. 상해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스타킹이 조금만 긁히면 바로 흘러 버려서 귀잖았는데 한국에서 수입한 스타킹은 구멍만 조금 보일뿐 흘러 내리지 않아서 선호 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대량 수입하여 중국 시장에 백여만장 풀었다. IMF시대가 거의 마무리 되면서 드디여 한국에서 더는 저렴한 땡물건이 없다고 하여 나의 브랜드로 주문제작을 하게 되였다.

한국 스타킹이 탄력이 좋으니 괜잖겠지 하고 한국 파트너는 원가 절감으로 나의 동의도 없이 비비안 스타킹보다 길이를 10센치 줄여서 생산해서 20만장 보내온 것이였다. 머리가 깨질정도로 화나고 답답했다. 나는 원래의 31 가격으로 도매로 넘길수 밖에 없었다. 컨네이너에 그만 적자를 많이 봐서 도저히 회사를 경영 없었다. 직원을 내보내고 사무실 물리고 정리를 하니 4만원이 남았다. 고까짓거 했는데 생각밖에 심한 스트레스가 닥쳐 왔다. 회사에 출근하려고 하니 3000~4000원정도 월급으로 빚을 물기는 기딱 차였다.

돈이란 있을때 비축금으로 두어야 한다. 없을땐 단돈 1000원도 구하기 힘들다.

아주 곤경에 처했을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기도 하고 자전거 타고 포스코 프라자를 짓는 현장도 가보고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옛날 통역을 했었던 현지 상해 사람이 상해TV방송국에 가서 드라마 번역을 해보라고 했다. 그분의 소개로 찾아가니 22 짜리 한국 드라마를 번역 해달라고 하였다. 먼저 사랑이 뭐길래드라마 한부 주면서 이걸 먼저 번역해 오면 번역감독이 보고서 오케이 하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순조롭게 통과되여 드라마를 번역하여 번역비 14500 받게 되였다. 번역하는 과정에 고생은 이루다 말할수 없다. 한부에 글자가 5000~7000자가 되고 어색함이 없이 순통하게 번역함과 동시에 입을 벌리는 시간과 말을 끝내는 시간도 맞추어야 했다.

한국 고유의 말은 번역이 어려웠다. 예를 들면: 장씨인 사위를 만나서 장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악센트가 대장군의 장군으로 부르면 옆에 사람들 폭소를 터뜨리는데 중국어로 번역하면 하나도 우습지 않은 것이였다.

후에 알고보니 내가 중국에서 두번째로 한국 드라마를 번역했었다. 드라마에는 신현준과 김희선이 나오는데 20여개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면서 젊은층에서 반응이 좋았다. 나의 이름이 드라마 마지막 번역 인원에 제일 처음으로 나왔었다.

어려운 시기를 조금씩 넘기고 ~ 들떳던 마음이 가라 앉기 시작했다.

실력은 이만큼밖에 안되는데 너무 서두르고 들떳구만. 쉽게 들어온 돈이니 쉽게 나가는거라고 그누가 말했던가? 맞는거구만

사실 그후에도 둥둥 들뜬 마음때문에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때문이랄까?

롤러코스트를 타는것처럼 하늘까지 날아 갔다가 쾅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였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야기를 듣고는 오히려 부러워 했다 파라만장한 인생을 사는구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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