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와 권리

l판도라l | 2023.01.29 03:02:29 댓글: 2 조회: 690 추천: 3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7458
엄마는 십여년전 구매한 본인의 집을 세주고 우리 집 근처의 아파트에 세들어 사신다. 사시는 곳이 엄마가 일하는 시장과 가까운데다가 우리 집과도 가까워서 가끔 애들을 돌봐줄 수 있기 때문에 몇년전부터 쭉 그 방법을 고집해오셨다. 세준 집의 집세를 받아서 절반은 집대출을 물고 나머지 절반은 임대한 집의 집세를 물었는데 임대한 집은 임대비가 비싼 위치에 있어서 아버지의 월급을 통채로 보태넣어서야 겨우 그 집세를 충당시킬수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세입자인 동시에 집주인의 2중역할을 지금껏 겸해오셨다.

몇년 전 엄마는 먼 친척 되는 조카에게 세를 주어서 집세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일 후로는 내가 그 집 임대관리를 인수해서 맡아오면서 지금까지 별다른 탈은 없었다.

재작년에 임대한 세입자가 몇달 살다가 에어컨이 낡았다고 모두 새 걸로 교체해달라는 요구를 제기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을 하니 만일 고장나면 교체해준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 몰래 에어컨 세대를 사다가 거실과 방안까지 몽땅 교체를 해주었다. 그 이유인즉 세입자가 매일 득달같이 문자가 오는 바람에 괜히 스트레스를 받으니 차라리 교체해주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년을 살 것처럼 굴던 세입자는 일년을 겨우 채우고 나가버렸고 이번에 우리는 부동산 중계소를 통해 집근처 상가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고 있는 호남성의 한 싱글 여자에게 집을 임대주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고 어느새 구정이 되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으로 다들 뒤숭숭한 설을 보내고 났을 때였다. 세입자 여자에게서 위챗문자가 왔다.

“설 잘 보내셨죠? 다름아니라 제 모멘트에 사진을 올렸는데 한번 봐주셨으면 해서요.”

그녀의 위챗 모멘트를 확인해보니 구정연휴와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상가가 일주일 늦게 오픈하여 가게 세입자들에게 피해가 가니 상가 업주들에게 가게세를 적당히 면제해주라는 상가 건물 관리업체의 창의서였다.

“그래서요? 가게와 집이 무슨 상관인가요?”라고 되묻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슨 뜻이죠?”
“2월달 집세를 좀 적게 받을수 없는가 해서 문자 보냈어요. 비상사태인만큼 다 같이 양보해서 버텨나가자구요.”

헛웃음이 나왔다. 2월달 집세를 적게 받으면 그만큼의 금액을 보태서 대출상환을 해야 하고 이쪽 집세를 내야 한다. 이번 비상사태가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에게 비상사태에 다 같이 양보를 한다는 게 왜 우리만 양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애초에 할 필요가 없어보였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였더니 난감한 기색을 보인다. 보나마나 엄마식 동정을 남발할 거 같아서 나는 구태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

“당신 생각엔 얼마를 적게 받았으면 좋겠어요?”
“글쎄요. 2월달은 제가 수입이 없으니 좀 사정을 봐서 어느정도 감면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수입이 많은 달엔 집세를 올려도 되는 걸까? 다시 질문을 제기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참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무역일을 하는 우리도 구정이 끼인 달과 비상사태에 일이 끊긴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은행에서 우리 대출을 감면해주지는 않잖아요? 사정을 봐드릴수는 있지만 그 기준을 먼저 얘기했으면 합니다. 서로 기준차이가 있을테니까요.”

구구절절 긴 문자를 보낸 이유는 그녀가 제기하는 금액이 그리 크지 않기를 바라는 얍삽한 마음에서였으리라. 그녀가 한참 있다가 문자 한줄을 보내왔다.

“500원이면 어떻겠어요? 어려운 시기인만큼 서로 인정을 베풀자구요.”

서로 인정을 베푼다라…500원을 제안해준 그녀에게 우리가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나는 끝내 오케이하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말았다.

이 일을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감면해달라는 게 반달 집세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반응이었다. 나는 펄쩍 뛰었다.

“반달이라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떡해요? 지금 아버지 월급을 제외하고는 엄마도 일이 끊겼잖아요. 매달 들아가야 할 돈도 많고 여기 집세도 물어야 하고 보험에 대출도 있구요.”

이렇게 일은 한단락 끝났지만 내 마음은 썩 개운하지 못했다. 나도 안다. 상가 가게세를 그대로 내야 하는 세입자 입장에서는 분명 속이 바질바질 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사업자로서 상가 가게를 임대할 때 안고 가야 하는 리스크가 아닌가. 우리도 한때는 원래 세입자가 두달 집세를 물지 않고 도망가는 바람에 그후 석달동안 집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 대출을 통채로 부담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집을 임대줄때의 리스크이자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 누군가에게 이 손해를 보상받을 생각은 아예 가지지 못했다. 만일 그녀의 방식대로라면 우리도 다음 세입자에게 집세를 올려야 했단 말인가? 세입자가 수입이 많아졌을 때는 언제 집주인에게 집세를 더 줬는가 말이다.

게다가 만일 이번 바이러스 사태때문에 상가에서 상가 가게세 절반을 면제해준다면 그녀로서는 너무 큰 피해를 줄일 수도 있지 않는가. 어쩌면 상가의 그런 호의가 그녀로 하여금 우리한테까지 요구를 제기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씁쓸한 마음마저 들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나오는 명대사이기도 하다. 살면서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례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내가 베푸는 호의를 상대방이 처음엔 고마워하다가 점차 익숙해지면 어느새 당연시되고 권리인 것마냥 누리게 되는 것 말이다. 착하면 바보가 된다는 말처럼…

언젠가 거지와 신사 유머를 본적이 있다. 한 신사가 거지에게 적선하는 액수가 점차 줄어갔는데, 거지가 말했다. “아니, 선생님. 재작년에는 만 원을 주시다가 작년에는 오천 원, 왜 올해는 천원만 주시는 겝니까?” 신사가 대답했다. “작년에 제가 결혼을 했고, 올해는 아이가 생겨서...” “아니, 그럼 제 돈으로 당신네 가족을 부양했단 얘깁니까?”하고 거지가 격분해서 말했다고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머로 지어낸 이야기이긴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 우리가 부딪치는 사람과 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몇년전 회사에 다닐때 소소한 부탁을 자주 하는 선배가 있었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인데 내게 맡기고 쩍하면 자리를 비웠다. 처음에는 별로 큰 일이 아니어서 대신 해줬는데 한번 두번 누적되자 습관이 되고 재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어느날 보고서 금액이 틀려 사장한테 야단을 맞게 되자 그 선배는 노기등등해서 내게 찾아왔다.

“너 이거 제대로 계산 안하고 올려보낸 거야? 너때문에 내가 지금 얼마나 깨졌는데…”

그 기세등등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 순간 미안하다고 말이 튀어나올뻔 한 바보같은 때가 내게도 있었다. 다행이도 나는 용케 상황판단을 했다.

“그거 선배 일 아니에요?”
“얘를 봐라. 한회사에 니 일 내 일이 어딨니? 이건 다 너를 키우자고 내가…”
“그러면 제가 사장님께 말씀드릴께요. 제가 틀리게 한거라고.”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야…”

그 선배는 얼굴이 붉어져서 제자리에 돌아갔지만, 연말 평가시스템에서 내게 몸을 사리고 제 앞 일만 한다는 평가를 주었다.

그 일로부터 나는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걸 권리로 여기는 사람은 그릇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선배가 진급을 하자 나는 미련없이 그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내 마음을 당연시하지 않는 비교적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만을 남겨두려고 애썼다.

그후 나는 주변의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힘들 땐 귀 기울여주고 용기를 주고자 했고 물질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있다면 덜어주려 노력했다. 그런데 살면서 정작 내가 힘들고 버거운 일이 생기자, 내가 잘해주었던 그 사람은 차갑게 나를 외면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자신이 만든 상황이었구나 하는 것을. 어쩌면 사람들은 내 호의를 고마워하지 않고 그저 당연한 것,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사실이 아프고 실망스럽지만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초에 내가 준 마음이 결코 보상이나 인정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앞으로 누구에게도 호의를 베풀지 않겠다며 삐딱해질 생각도 없었다. 다만 이제부터는 보다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작은 호의만 베풀며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이번 집세감면 사건에서 나는 나름 마지노선을 지키며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마음속으로 흡족해 하고 있었다.

몇일 안지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한창 들끓고 있는 부동산 임대협회 창의서를 발견했다. 광주시 모든 업주들에게 2월달의 한달 집세와 3,4월달의 두달 집세 절반을 면제해주자는 부동산 임대협회의 제안이었다. 다들 그 창의서를 집주인에게 보이며 도덕적인 속박을 씌워 인정을 베풀게끔 강요를 했고, 집주인들은 화를 내며 부당하다는 청원서를 내겠다고 입을 모았다. 어쩌면 우리 세입자도 그 창의서를 모멘트에 올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세입자의 위챗 모멘트를 클릭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복받을 거에요!” 모멘트에 간단히 씌여져있는 그녀의 한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착잡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보다 각박해진 세상살이속에서 나는 호의가 권리가 되지 않도록 늘 누군가의 호의를 감사히 여겼고 또 그것을 절대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부해왔었다. 또한 그렇게 굳게 믿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런 사람들중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세입자들처럼 창의서를 내보이며 한두달의 집세를 면제해달라는 요구를 제기할 대신 그녀는 내게 작은 호의를 베풀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호의를 권리로 안다고 지탄하면서 나는 과연 내 자신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댄 적이 있었던가?

신종 바이러스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사람들이 확산되는 공포에 온갖 추태를 보이는 이 혼잡한 시기에 그래도 그녀처럼 다른 사람의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 마음을 따뜻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많아서 그나마 버틸만한 세상이라고 새삼스럽게 내 자신을 위안해 본다.


2020년 연변녀성 3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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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75.♡.27) - 2023/01/31 00:27:14

코로나땜에 여태 겪어보지도 못햇던 기이한 일들을 많이 겪어보네요..우리 여기도 코로나 터지고 경제상황에 따라서 신청하면 렌트비 나중에 갚는것도 잇고 절반 내는것도 잇던데..난 한동안 일 쉬면서 실업수당 받으면서도 꼬박꼬박 렌트비 냇어요..앞집 아줌마가 왜 렌트비 내냐고 내지 말라고 선동하는것도 양심상 그렇게는 못하겟더라구요..그래서 그런지 다른 집 이사오면서 보증금은 하나도 안 빼고 고대로 다 돌려주더라구요..다른 집은 이사가면 청소비요 머요 하면서 몇백불씩 차감해서 돌려주엇다는데..ㅎㅎ

l판도라l (♡.109.♡.184) - 2023/01/31 09:57:39

그러니까요, 코로나로 참 많은 게 변했죠? 이 글을 쓸때까진 초기였는데 후에 결국 저 세입자는 매달 세를 미루고 안내다가 나중에 안좋게 끝나고 말았어요. 人性是经不起考验的。님은 정직하게 하신만큼 또 보상을 받으셨네요. 코로나로 생활은 변해도 인성은 그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이, 정말 목구멍이 포도청일 경우엔 사치에 불과한 욕심이 될수도 있더라구요. 이번 3년에 그걸 깨달았으니 그것 또한 보람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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