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지치지 않는다

l판도라l | 2023.01.31 09:23:26 댓글: 2 조회: 571 추천: 2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8076
오가와 선생님이 인편에 책 한권을 부쳐주셨다.

중국생활 6년의 체험으로 일본에 돌아가 완성한 에세이집이였다.

“에세이집 한권을 출판했습니다.다 읽으면 꼭 소감을 메일로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갈피속에 끼운 메모지 한장에 선생님의 익숙한 붓글씨 두줄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몇줄 보다만채 책시렁에 얹어두고 나름 바쁜 일상에 허덕이다가,우연히 그 책을 다시 발견했을 때는 정확히 일년하고도 한달이 더 지난 시간이였다.

속으로 내 자신을 꾸짖으면서 책위에 덮인 먼지를 털고 책을 펼쳐들었지만,수년전의 일본어전공은 이미 가물가물한지 오래여서 하는수없이 사전을 옆에 펼쳐놓았다.


한구절한구절 천천히 내리읽느라니 마지막쯤에 이런 한마디가 눈에 띄였다.

“여기에 있는한 영혼은 지치지 않는다…”

나는 웃었다.어쩌면 선생님은,우리가 되돌이켜보기도 지긋지긋한 4년의 대학생활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한듯 싶었다.


대학때 초빙교수로 온 일본교수들중에 유일하게 여선생님이였던 홍일점 오가와 사찌코선생님…다른 교수님들은 일년이란 기한만 채우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학교를 떠났지만,오가와선생님은 4년이란 체류기간을 연장하면서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우리가 졸업한후에도 영하 30도좌우의 그 도시에 2년이나 더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는 북방 도시들중에서도 겨울이 길기로 유명한,하지에는 중국에서 해돋이를 제일 먼저 볼수 있는 도시였다.

오가와선생님은 6년동안 일년에 다섯달은 추워 떨면서 지내야 했으니 토탈 30개월을 혹독한 추위속에서 지내신 걸로 된다.

“스커트차림이 춥지 않으세요?”

살결이 얼어터지는 한겨울에도 피부색 스타킹에 블랙 스커트를 입고 나온 선생님에게 우리는 가끔 물었었다.

“일본여성은 직장에서 항상 스커트여야 해요.”

자부감 넘치게 대답하던 선생님은 어떻게 보면 일본의 봉건전통을 고집하는 한낱 평범한 안노인이기도 했다.

한번은 새학기가 되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일본에 가서 좋은 땅 한마지기를 사놓았어요.”
“집을 지으려구요?”
“아니요.앞으로 제가 묻힐 땅이에요.”

죽음을 얘기하면서도 차분하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불교신자인 선생님은 죽음을 논할 때에 항상 초연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이 세상에 귀신이 있다는걸 믿으세요?”
“믿어요.그이가 세상을 뜨고난후 그이가 평소에 자주 앉아있던 흔들의자가 가끔 연고없이 흔들렸어요.그때면 그이의 영혼이 내 옆을 지켜주고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외롭지 않았어요.”

담담한 몇마디였지만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우리쪽에서 눈시울을 붉혔던 적도 있다.

수업시간에는 요구가 엄격해서 한마디라도 틀리게 읽으면 꼭 몇번이고 같은 단어를 중복하게 하던 선생님…몇만자 되는 리포트를 다섯번씩 수정하게 해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의 미움을 샀던가…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고집하시던 완고불통 선생님이셨다.


졸업을 하고 선생님과 북경에서 두번 만난적이 있었다.

“선생님…글을 쓰려고 하는데 잘 안되여요.저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나봐요.”
“글쓰기를 좋아하는가요.”
“당연하죠.글을 쓰는 과정이 행복해요.”
“그럼 됐어요.최고의 재능이란,바로 그 일을 좋아하는 거에요.”

두번째로 선생님을 만났을 때에는 건강이 별로 안좋으신듯 싶었다.그리고 귀국 티켓 날자가 변경되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북경에 하루 체류해야 했던 상황이였다.

나는 불문곡직 우리 집으로 선생님을 안내했고,선생님은 끝까지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한밤중에 느닷없는 고열로 병원에 모셔가려고 했을 때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얼굴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조금만 조용히 있으면 나을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폐를 끼쳐서 너무 미안해요…”

이튿날 공항으로 출발하는 선생님을 바래던 나는,우연히 내 가방안에 들어있는 현금봉투를 보자 깜짝 놀라서 선생님을 막았다.

“선생님,이건 뭡니까.”
“어제 폐를 끼쳐서 미안했어요.”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합니다.전 받을수 없어요.”
“그러면…지금 쓰고있는 책이 출판되면 꼭 한권 부칠께요.겐상이 어디에 있던지…약속해요.”
“알겠습니다...”


후에 나는 북경을 떠나고 선생님과 연락이 끊겼다.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일상에 쪼들리고 지쳐서 그 누구와도 연락을 끊고 지냈던 날들…선생님은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인편을 통해 이 책을 보내왔는지…

“여기에 있는한 영혼은 지치지 않는다…”

영하 30도좌우의 자그마한 북방의 도시에서 오가와선생님의 삶의 동력은 과연 무엇이였을까…

선생님은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밝혔다.

“추운 날씨에 학생들은 내 스커트차림을 걱정해주었다.그들은 내가 남편의 사후를 이야기할 때 눈물을 머금었다.”
“어쩌면 추위와 고독에 견딜수 있은 이유가 바로 이런 아이들의 순진하고 따뜻한 마음때문이 아닐까…”
“그 마음은 나뭇가지가 얼어 부러지는 한랭한 이 도시의 [透冻赞歌]였다…”

나는 책을 덮었다.

우리의 평범한 관심 한마디,사소한 행동 하나에 감동했던 오가와선생님…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바로 그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때문이 아닐까.어쩌면 우리가 기억하기엔 지긋지긋한 그곳 대학생활이,선생님에겐 정말로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이였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책은…몇 년동안 까닭없는 허무감에 흔들리던 한 학생의 지친 영혼을 간단히 치유해주었다.

나는 메일을 열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선생님…보내주신 책을 감사히 읽어보았습니다…”


2018년 송화강 2기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2) 선물 (1명)
IP: ♡.109.♡.184
로즈박 (♡.175.♡.27) - 2023/01/31 13:15:44

어쩌면 그 선생님이 중국이랑 본인이 가르치셧던 중국학생들을 사랑햇을거 같애요..님의 글에서 착하고 여리신 선생님의 품성이 보이네요..
그리고 글 참 잘 쓰시네요..님의 글은 너무 편안하고 잘 읽혀져요..좋은 글 많이많이 써주세요...저 팬이 됏어요..ㅎㅎ자작글방에서 님의 글 자주 볼수 잇기를...오늘 포인트는 두번 다 써서 내일 드릴게요~^^

l판도라l (♡.109.♡.184) - 2023/01/31 13:40:37

졸업한지 20여년이 지나 이젠 저도 중년에 들어섰네요. 아직도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도 건강하게 잘 계실지…글 잘 읽히신다니 다행입니다^^포인트 선물까지 미리 감사드립니다. 글쓰는 작업이 혹독하고 외로운 과정임에도 이런 피드백들이 있어서 저도 행복한거 같아요.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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