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무연한 풀밭에 서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덜 놀랍기는 했다. 다만 여기는 어딜까 하는 호기심이 머리를 쳐들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내 손에 있었고 신호도 감감이었다. 하긴 이런 들판에 무슨 신호가 있겠냐 싶었다. 한참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명비마마…”
멀리 뒤쪽에서 기마민족의 옷차림을 한 여인이 다가왔다.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명비라면 설마…하는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등뒤의 여인이 한번 더 불렀다.
“명비마마, 한에서 서찰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
몸을 홱 돌린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다오.”
서찰을 펼쳐보던 나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서찰의 내용인즉 한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흉노의 풍습에 따르라는 황제의 어명이 전달되어 있었다. 나는 와락 서찰을 구겨쥐었다.
“빌어먹을…”
“네?”
여인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쟈이갈이라고 합니다. 명비마마.”
“그래, 자갈.”
여인은 살짝 머리를 기웃했지만 굳이 나를 정정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호한야왕 장례는 다 끝났지?”
“네, 이미 즉위식 전에 다 끝낸 것이 아닙니까.”
다행이 자갈은 한의 말에 능숙했다. 이 또한 화번공주에 대한 호한야선우의 배려였을까? 하지만 명비-왕소군은 왜 한에 돌아가려고 했던 걸까.
자갈을 따라 장막으로 들어온 나는 문득 내 품에 와락 매달리는 한 어린 남자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도지아사 왕자님, 명비마마께서 피곤하시니 우린 장막밖에 나가 노는게 어떻습니까.”
다행이 자갈이 눈치빠르게 어린 아이를 내 품에서 떼어냈다. 나는 세살쯤 되어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보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왕소군이 한으로 되돌아가려는 건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자갈이 아이를 안고 나가고 얼마 안되어 다시 장막이 열렸다. 나는 흉노의 번잡한 머리 장신구들을 떼어내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한 남자가 버티고 서있었다.
“범…”
하마터면 범대부라고 부를뻔 했다. 눈앞의 남자는 태호에서 헤어진 범려의 얼굴을 완벽하게 닮아있었다. 다만 범려가 준일하고 단정한 선비의 모습이라면 눈앞의 이 남자는 건장하고 야생미 풍기는 초원의 영웅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누군지 모르니 일단 묵례로 인사할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찬데 어찌 또 종일 밖에 서계셨소.”
남자의 웅글진 목소리에 위엄이 묻어났다. 누구지? 다행이 장막안의 다른 시비들이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복주루왕님…”
“다들 나가있거라.”
“네.”
복주루약제…호한야선우의 아들이자 그뒤를 이른 선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바로 명비의 다음 남편일까. 흉노는 참 별란 풍습이 다 있다. 선우가 죽으면 그 처첩들은 왜 그 다음 선우의 자리를 잇는 형제나 이붓아들에게 시집가야 하는 건지.
어쩌면 명비가 한으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를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중원의 예의를 익힌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흉노의 혼인 풍습이었던 것이다.
“복주루.”
내가 입을 열자 그는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지금 내 이름을 직접 부르셨소? 중원의 예의를 그리 잘 아신다는 명비께서?”
“이럴땐 중원의 예의를 들먹이는 구나. 촌수로 따지면 넌 내 아들이야.”
차라리 왕에게 버릇없다는 이유로 내쳐질까? 그러면 한으로 돌아갈수 있지 않을까? 나는 왕소군의 평생 숙원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죽은 후의 무덤을 후세에서는 청종(青冢)이라고 한다. 얼마나 쓸쓸한 이름인가.
“그러니까 그렇게 이중잣대 대지 마. 중원의 예의를 배우고 중원의 말을 배우면서 왜 중원의 사람에게 풍습을 강요해?”
내 말에 복주루는 한참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휑하니 장막을 나섰다. 싸늘한 바람이 열린 장막문 안으로 불어들어오고 있었다.
……
“그 곱던 피부가 많이 거칠어지셨습니다.”
취침준비를 마친 후 자갈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명비마마께서 처음 오셨을때 저희는 어쩌면 저리 고운 얼굴색이 다 있을까 하고 감탄했었지요. 바람이 거칠어 마마의 얼굴이 생기를 잃어가는 것입니까.”
“바람도 거칠고 사람도 거칠구나.”
나는 입을 막고 몇번 기침을 했다.
“나갈때 문도 안닫고 나가다니…개념을 아주 밥말아드셨어.”
“누구 말씀이십니까.”
“있어. 성격이 아주 개떡같은 사람.”
성격이 범려 절반이라도 가봐. 왕소군이 이리 자기를 거부하겠냐 말이다. 저런 성격에 그에게 시집을 가는 여자가 있기나 할까? 나는 복주루를 향한 저주를 끝내고 잠자리에 누웠다.
잠결에 투덕거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시선안으로 빨간 화염이 날름거리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일까? 미처 정신도 차리기 전에 자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야…불!빨리 장막밖으로 피해요!”
불! 겨우 월나라에서 빠져나왔다 했더니 이젠 또 불에 타죽게 생겼나? 겉옷을 대충 걸치고 시비들의 부축을 받으며 허둥지둥 장막을 나섰다. 장막문도 이미 불붙고 있었다.
“바람에 불씨가 날렸나 봅니다.”
화염을 바라보며 자갈이 중얼거렸다. 물이 귀한 동네여서 그런지 사람들은 멍하니 불길만 바라볼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 했다. 문득 그때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이는?”
“네?”
“이도…지아사 말이다. 그 왕자.”
“아!!!”
자갈이 얼굴이 흙색이 되어 불길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잡아당겼다.
“미쳤냐? 그대로 들어가면 죽어.”
“왕자님이 안에 계십니다!왕자님이 잘못되면 어차피 저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려.”
나는 겉옷을 벗어 옆에 누군가가 가져온 물에 적셨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몸에 둘렀다. 자갈이 앞을 막아나섰다.
“비켜.”
“위험합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시간 지체되면 아이가 잘못돼. 썩 비켜!”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빠르게 내 겉옷을 채갔다. 그리고 미처 어쩔새 없이 한 그림자가 장막안으로 뛰어들었다.
잠시후 팔에 불이 붙은 그 그림자가 아이를 안고 다시 나타났다. 다들 달려들어 그 사람의 팔에 붙은 불을 꺼주었다. 아이는 질식한 듯 했으나 잠시후 바로 기침을 깇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복주…”
얼굴에 검뎅이가 발려져있는, 형형한 눈빛을 한 복주루가 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까 낮의 무례때문에 그럴까 생각하는 사이 그가 훌쩍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자기 장막으로 가버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곧바로 새 장막이 배정되었다. 밤새 소동이 있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얇은 옷에 찬바람까지 맞다보니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거워 견딜수 없었다. 기침에 이어 코가 꽉 메고 설상가상으로 몸 전체가 아파왔다. 심한 몸살이 온 것 같았다.
자갈의 권고에 따라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렴풋이 잠에 들었고 잠결에 누군가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얹어주는 감도 느꼈다. 자갈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여긴 어떻게…”
“그렇게도 한으로 돌아가고 싶소?”
“뭐?”
“잠꼬대를 하더군.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내가 돌아가고 싶은 건 한이 아니라 현대라고. 뭐 어쨌거나 복주루가 지난 밤과는 달리 꽤 온화한 기색이어서 나 또한 어렵사리 찾아온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면 한의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글쎄. 애초에 궁녀였으니 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맞겠지.”
“이도지아사는 어떡하고.”
“데려가야지.”
“말도 안될 소리.”
그래, 왠지 대화가 좀 풀린다 했더니 그 성격이 어딜 가겠어. 차라리 돌아가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렴. 왜 사람을 희망고문 하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여기 두고 가라고?”
“그래…”
“그러면 못갈줄 알아? 착각하지 마.”
“뭐라고?”
“아이 위해 모든거 희생하는 거. 나 그런거 안해. 니 피를 나눈 동생이니 어련히 잘 키워주겠지. 어제 불길속에 뛰어들어 구한 것처럼.”
“명비…”
“나같은 여자는 곁에 둬도 스트레스 받아 암이나 유발할테니 선심 좀 쓰렴. 꿈에서도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인데 밤중에 자다가 목에 칼을 겨눌수도 있는 거잖아.”
이쯤하면 협박이 먹히려나…그리 생각하는 순간 그의 눈에 웃음이 실렸다. 웃어? 자다가 목에 칼이 들어온다는 데 웃어? 뭔 사람이 저래?
“그것 참 재미있겠네. 잠을 같이 잘수 있다는 거지?”
“뭐? 너 지금 감히 네 엄마벌 되는 사람을 희롱해?”
“나이는 내가 이상이야.”
“나가.”
그래도 그가 꿈쩍하지 않자 나는 베개를 그에게 집어던졌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가 베개를 튕겨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은 움찔했지만 나는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말없이 몸을 돌려 장막밖으로 나간다. 뒤이어 들어오는 자갈에게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넌 아침부터 왜 자리를 비우는 거냐?”
“왕자님을 뵙고 오느라…”
그녀가 기가 죽어 대답하자 나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이는 어때.”
“연기를 많이 들이키셨나 봅니다. 아직 깨지 못했습니다.”
“그래.”
머리를 끄덕이고 내가 몸을 일으키자 자갈이 앞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해 앉았다.
“누워계시지 왜 일어나십니까.”
“아이를 가봐야겠다.”
“마마님의 건강도 유념하셔야지요. 누워계십시오.”
“막지 말거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자갈도 하는 수 없이 내게 털을 댄 모전외투를 가져다 걸쳐주었다. 장막을 나서자 찬바람이 얼굴을 덮쳤고 기침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어제밤 혼수상태에 있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저도 몰래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있는 장막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장막안에서 시비들이 뛰쳐나왔고 그들중 일부는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저들이 뭐라 하는 거냐?”
내가 고개를 돌려 묻자 자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왕자님이…왕자님이 위급하다 하십니다!”
……
몇일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아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나는 바로 잠자리를 아이의 장막으로 옮겨왔다. 명색이 엄마인 내가 화재 그날 내딴에는 감기라고 아이를 방치해두어서 아이의 병이 위중해졌다는 죄책감때문은 아니었다. 비몽사몽중의 아이는 그날아침 내가 자신을 보러 온 것을 아는지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무서…워요.”
아이는 혼미한 와중에서도 한의 말로 중얼거렸고 나는 아이의 반듯한 이마와 하얀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안무서워. 내가 여기 있잖니.”
복주루가 두어번 왔었고 의원들이 종일 장막을 지켰다. 다행이 몇일이 지나자 아이의 병세는 안정되었고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했다. 원래 좀 병약한데다가 연기가 폐에 들어가 일으킨 질식이라고 했다.
연몇일 고단했는지라 그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쟁그랑 소리가 들렸고 눈을 떠보니 복주루가 자갈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자갈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명비마마, 소인을 구해주시옵소서.”
“그 손 놔.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나는 벌떡 일어나서 복주루에게 소리를 질렀다.
“누굴 건드리려거든 이 장막을 나가. 내 눈 더럽히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지금…”
“그래, 복주루…너희 흉노가 아직은 개화되지 않은 민족임은 내 익히 알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이런 상황 피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뭐?”
“내 시비라도 먼저 건드리겠다 그거냐? 이 넓은 초원에 여인이 그렇게도 없어?”
복주루는 내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자갈의 손을 낚 어채더니 그녀의 옷 앞섶을 잡아챘다. 두드득 단추가 뜯겨나가고 자갈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그만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하늘이시어…이 남자를 어떻게 벌하여 주시옵소서.
한참 지나도 별다른 동정이 보이지 않아 나는 눈을 떴다. 언제 들어왔는지 의원들이 줄느런히 들어와 서있었고 복주루는 의원들에게 손에 든 무언가를 내밀었다.
“확인해봐. 여기에 무엇이 들었는지.”
의원 하나가 그것을 받아 냄새를 맡아보더니 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건…비상이라는 독입니다.”
“여긴 이런 독이 있을리 없다.”
복주루는 그때까지 옷앞섶을 가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있는 자갈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어서 말하거라. 이건 어디서 얻었느냐.”
“소…소인은…”
“발뺌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번이 세번째다. 첫째는 화재로 죽이려 하고, 두번째는 이불을 눌러 질식시켰고, 이번은 비상을 약에 타려 하였다. 어린 아이가 네게 무슨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누차 해하려 드느냐.”
복주루의 말에 자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더이상 자상하고 배려깊은 눈빛이 아니었다.
“왕자님은 죄가 없습니다…”
“…”
“죄가 있다면 하필 명비마마의 소생이 된 죄라고 할까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한의 명입니다. 왕자님을 죽여 명비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길을 끊으라는 어명입니다.”
“뭐???”
이번에는 내가 소스라쳐 놀랐다. 어쩐지 한의 말에 능숙하다 했는데 그런 자갈이 스파이라니…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들이었다.
“명비마마께서는 중원의 예의를 지켜 복주루왕에게 시집을 가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오매불망 한으로 돌아가려고 하잖습니까. 호한야왕과의 뉴대가 왕자님인데 그 연결고리를 끊어낸다면 재가를 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어렵게 맺은 화친이 3년만에 끊긴다면 한의 백성들은 또다시 도탄속에 빠질 것이고 폐하께서도 성심이 어지러울 것이니…”
“그렇다고 아이에게 손을 뻗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인 하나를 희생해서 평화를 구걸하고, 어린 아이의 목숨을 해치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하려 들다니…그 여인과 아이는 한의 백성이 아니더냐.”
나는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았고 복주루는 굳은 얼굴로 자갈에게 명했다.
“한에 이르거라. 명비께서 혼인하지 않는다 해도 이 복주루가 재위하는 한 흉노가 중원을 범할 일은 없을 것이니 더이상 무리한 술수는 쓰지 말도록 말이다.”
“그걸 뭘로 믿겠습니까.”
“뭐?”
“명비가 혼인을 하지 않으면 무슨 신분으로 여기에 머물러 있으리까. 고작 왕자님의 생모 신분으로요?”
“…”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흉노의 풍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흉노를 거스른 명비 또한 이곳에 발 붙이기 힘드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으로 돌아가면 흉노엔 더이상 한을 위해 힘써줄 사람이 없는 것인데…”
“명비를 인질로 두라는 말인가.”
“혼인하지 않으신다면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혼인…”
나는 쓸쓸하게 웃으며 병색이 완연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네?”
자갈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시선을 들어 복주루를 보았다.
“혼인하면 될 거 아니냐.”
“명비…”
“명비마마…”
복주루는 착잡한 눈빛이었고 자갈은 놀랍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정말입니까.”
“한낱 여인과 아이를 희생해서 자신들의 안일을 추구하는 게 중원의 예법이라면.”
나는 차디찬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난 단연히 이붓 아들에게 재가하는 흉노의 풍습을 따르겠다.”
“명비…”
“날자는 언제든지 오케이.”
말을 마친 나는 얼굴 한가득 의혹을 담은 사람들을 두고 장막밖으로 나와버렸다.
……
넓고 푸른 초원. 높은 하늘과 살찐 말들.
나는 병이 완쾌된 아이의 손을 잡고 푸른 들판을 거닐었다. 아이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가리켰다.
“어머니…저기 기러기…”
나는 고개를 들었고, 바로 그 순간 휘익 소리와 함께 기러기 한마리가 들판에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왔는지 복주루가 활을 들고 뒤에 서있었다.
“낙안(落雁)의 미모가 틀린 말이 아니군.”
복주루의 말에 나는 빙긋 웃었다.
“그 활은 감추고 그런 말을 하시지.”
“들켰나.”
그는 호탕하게 웃더니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 기러기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고싶어?”
“네, 형님.”
“형…”
복주루는 민망한 미소를 짓더니 시비들에게 아이를 데려가 놀라 명했다. 나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눈바램한 후 그와 나란히 들판을 거닐었다.
“빈 허울 혼인만 치른 것에 대해 억울하지 않아?”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는 한성제에게 소문이 가도록 성대한 혼인식을 치렀다. 다만 절대 그 이상으로 부부의 연을 맺지 않겠노라 그가 맹세했다.
“나 복주루는 절대 여인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아.”
어릴 때부터 아버지 호한야를 따라 중원을 자주 다녀온 그는 저돌적인 흉노의 남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다만 언젠가 당신의 마음이 내게 온다면, 거절하지 않고 환영할 생각이야.”
나는 혼례식에서 그가 한 말을 떠올리고 빙그레 웃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되겠군.”
“뭐가.”
“기러기 몇마리가 더 떨어져야 하는 건데.”
“그런데는요?”
“다 남쪽으로 날아가버렸어. 그대신 떨어진게 있지.”
“그게 뭐…”
“남자의 자존.”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난 당신이 좋아.”
“…”
“당신 마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해도 괜찮아. 내가 가면 되니까.”
“…”
예고없이 심장이 뛰었다. 이런 젠장…이럴때는 저돌적인 남자가 치명적이긴 하다. 나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어쩐지 손에 땀이 차는 듯 했다.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건 막지 않을 거지?”
나는 대답대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귀가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바보.”
다시 허리를 편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은은히 느껴지는 진동…잊고있었던 핸드폰 신호가 들어온다. 이 푸른 들판에서.
태호에서 범려와 작별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했었다. 핸드폰 카메라 앱이 작동하기 전에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후에 나 죽으면.”
나는 눈앞의 남자에게 최대한 아름답게 웃어보였다.
“내 무덤을 청종(青冢)이라 불러줘.”
그만큼 이 푸른 초원을 사랑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영문을 몰라하는 복주루의 얼굴을 보며 아스라이 미소를 그렸다.
……
다음호에 계속
하하하..어떻게 두번이나 다른 사람으로 환생하네요..이제 또 서시로 환생하는건가요?범려한테 가야죠..
사대미인의 이야기를 다 한번 봐야죠.^^ 담회에서 뵙시다.
잼나네요~ ㅎㅎ
넵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