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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 시간여행(제4회)완결

l판도라l | 2023.02.15 19:30:09 댓글: 2 조회: 570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2646
4.

반짝이는 장신구들과 호화로운 비단금침, 겹겹히 둘러싸인 금색 휘장안에서 나는 눈을 떴다. 이번은 어딘지 바로 감이 왔다. 그래, 차례대로 가자꾸나. 시간이 점점 현대에서 가까워 지는 것을 보니 돌아갈 일도 희망이 보이는 듯 하다. 힘내자, 힘.

“기침하셨습니까. 귀비마마.”

휘장밖에서 궁녀가 아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함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전의 세 여인에 비해 호의호식 하는군. 하긴 천하절색의 양귀비니까.

“여기가 어디냐?”
“마외역입니다. 귀비마마.”

헉…호의호식은 개뿔. 위기가 너무 빨리 닥쳤다. 어떡하지? 그제서야 덜컹거리는 느낌이 난다. 그래, 지금은 아마 안록산의 난,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피난을 가는 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덜컹거림은 분명 마차의 흔들림인 게 틀림없다.

잠자리를 더듬어봤더니 다행이 폰이 그대로 있다. 다만 밧데리가 소진했는지 화면이 먹통이다. 아아. 죽었다. 이젠 정말 위기다.

항상 내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위기대처 능력이 있는줄 알았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나는 내가 소유한 이런 능력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왔다고 항상 자부했었다.

하지만 나또한 안다. 이 세상 일은 안되는 것은 정말 안된다는 것도 말이다. 하면 된다라고 부르짖는 치기의 이십대도 아니고, 나로서는 막중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경험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해 그토록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휘장밖으로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자세히 들어보니 승상 양국충과 귀비 양옥환을 즉시 처결하지 않으면 더이상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는 역사 내용 그대로다. 물론 무기력한 현종도 역사 그대로의 수순을 밟겠지.

“마마…귀비마마…”

휘장밖의 궁녀가 울음섞인 소리로 부른다. 마차도 멈춰섰다. 나는 심호흡을 한후 옷차림을 정제하고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파랗고, 길옆의 들꽃은 소담하게 피어 아름답다.

“어명이옵니다…”

궁녀의 뒤에 내관이 서있었다. 목각으로 만든 차반에 받쳐서 들고온 흰 깁이 눈에 들어온다. 현종은 서로 마지막 얼굴을 보지 않는 쪽을 택했는가 보다.

그리 양귀비를 사랑한다 했으면서 결국은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던 황제…어쩌면 양귀비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군주란 다 그러한 것이니까. 어쩌면 이건 신분과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폐하께 마지막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시겠습니까.”

가급적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내관이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평소 귀비가 후하게 대해주었나 보다.

“하명하시옵소서. 귀비마마.”
“명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마지막 가는 길이니 술이라도 한잔 내려달라고 할수 없겠습니까.”

내관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은 후에 나는 폐인처럼 줄곧 술로 시간을 보냈다. 최근 이 카메라앱때문에 시간여행을 하고있으니 망정이지, 현대에 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고주망태가 되어 또 어느 단골 선술집에 널부러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온 내관의 손에 향긋한 향을 풍기는 백자병이 들려있었다. 나는 잔도 요구할 사이 없이 그것을 들어 목구멍안으로 들이부었다. 입가를 타고 내려온 술이 길옆의 들꽃위에 떨어졌다. 알콜을 들쓴 들꽃은 금세 시들어갔다.

“수화(羞花)의 전고가 이리 재조명 되는군요.”

언제 나타났는지 전립을 쓴 검은 옷차림의 한 남자가 홀연히 우리 옆에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도 내관과 궁녀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누구신가요?”
“저를 따라 가시지요. 귀비마마.”

그가 손을 내밀자 흰 깁이 날아와 내 목에 감겼다. 미처 억 소리도 낼 사이 없었다. 목이 조여왔고 숨이 막혔다. 눈물 한줄기가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젠 눈을 감으시지요. 귀비마마.”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들어다 보았다. 그제야 전립밑의 그의 얼굴이 눈안에 들어왔다. 범려, 복주루, 관우에 이어 네번째로 같은 얼굴을 보는 것이지만 이번만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것은 눈앞의 남자가 선연하지만 어쩐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눈빛을 하고있었기 때문이다.

“당신…누구야.”

입술 사이로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저는 황학이라 하옵니다. 귀비마마.”
“황학…도술가?”
“뜻밖이군요. 황궁에 깊숙히 계신 귀비께서 하찮은 제 이름을 다 아시다니…”

남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소매를 꽉 틀어잡았다. 생을 기약하는 본능적인 반항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럼, 이 깁 좀 치워.”
“네?”
“깁 치우라고. 폐하께서 널 보낸 거 아니야?”
“그건…”
“황학…내 기억대로라면 넌 폐하께서 보내서 귀비, 아니 날 구하게 되어있는 거야. 그런데 왜 목을 조르지? 연기도 정도껏 해야지.”

남자의 눈빛이 잠시 짙은 빛을 띄었다. 잠시후 깁을 틀어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이왕 연기를 하시려면…”

남자가 내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죽는 연기라도 하셔야지요.”
“…”
“눈 감으시지요. 귀비마마.”

내가 눈을 감자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서 폐하께 복명하게. 뒤마무리는 내가 할터이니.”
“네에…도사님.”

내관과 궁녀들에 물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후에야 부스스 눈을 떴다.

“갔어?”
“네.”
“가면 갔다고 알려줘야지. 숨막혀 죽을뻔 했잖아.”

벌떡 일어나서 옷자락을 털었다.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이젠 어디 가는 거지? 난리통에 어디가나 도적의 무리들일텐데. 이런 옷차림으로는 너무 눈에 띄여. 준비해둔 옷 있어?”
“참으로 신기합니다.”
“뭐?”
“슬프지 않으십니까? 마마.”

그제야 그의 흥미로운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나는 짐짓 슬픈 기색을 지어보였다. 죽다 살았으니 이정도 연기쯤이야.

“슬프지…그런데 만년 슬퍼해봐야 뭘해?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는데.”

그가 살짝 미간을 구겨서 나는 눈을 치떴다.

“왜 또?”
“아니…좀 직설적이셔서.”
“나처럼 생사의 고비 몇번 넘겨봐. 욕이 나오지 않나.”

그가 여전히 곤혹어린 표정을 하고있어서 나는 소매를 홱 저었다.

“암튼 됐고. 빨리 변장할 옷이나 줘.”

……

걷고 또 걸었다.

아마 남장차림을 한 내가 체력도 남자 같을 거라고 착각했는지,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면서 나는 보폭이 큰 그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나섰다.

“오늘은 여기서 묵습니다.”

작은 주점에 짐을 풀고 그가 말했다.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인지 우리는 줄곧 한방에 기거했다. 처음엔 좀 불편했으나 피란길에 그런 걸 따질 계제가 못되었다. 다행이 침상은 내가 차지했고 그는 차탁에 기대어 자기 일쑤였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오는 길에 내가 몇번이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래도 당현종이 어디다 피신할 곳을 정해놓고 그를 보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딱히 그것도 아닌 듯 했다.

“폐하께서 어디로 오라셔?”
“폐하께선 그저 귀비마마의 목숨을 구하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다음엔?”
“어디론가 멀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멀리가 어딘데? 이쯤 왔으면 안전하지 않아?”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일본?”

그가 괴이한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급히 말을 고쳤다.

“그러니까 왜국으로 간다는 얘기야?”
“…”
“말도 안돼.”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방안을 거닐었다.

“그러니까 그 야설이 정말이었단 말이지? 일본에서 양귀비의 후예가 있었다는 게. 아마 야마구치 모모에가 양귀비 후손이라고 했었지…”

입속말로 중얼거리는 나를 그는 여전히 기이한 눈빛으로 보았다. 아마도 눈앞의 양귀비가 여러 봉변을 겪어서 실성한 것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당현…그러니까 폐하께서 왜국으로 가라고 하셨어?”

드디어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는 차 한잔을 따라 내앞에 밀어놓았다.

“아닙니다.”
“그러면?”
“귀비마마의 안전을 위해서 도모하는 일입니다.”
“국경을 넘어야만 안전하다면 신라도 되잖아? 거기 지금 경덕왕이 집권할 건데. 조공 꾸준히 바쳐오고 당나라와 사이도 좋아.”
“신라는 혹시라도 당의 조대가 바뀔가봐 귀비마마를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분을 감추면?”
“조공을 바치러 수많은 사신들이 당나라로 오갔습니다. 연회석에서 귀비마마의 존안을 직접 뵌 분들도 있다지요. 신분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꼭 왜에 가야 해?”
“그렇습니다.”

나는 두손을 마주잡고 차탁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차물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나 배멀미 해.”
“그렇다고 날아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긴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또 한번 침묵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이부자리를 폈다.

“빨리 잠이나 자. 내일 또 부지런히 걸어야 하니까.”

등심지를 낮추었지만 그는 한참이나 더 앉아있었다. 나는 그 실루엣을 잠시 바라보다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먼길에 노곤했는지 잠도 참 빨리 왔다. 얼마 안지나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문득 잠결에 무엇인가 솔솔 창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감이 났다. 나는 눈을 떴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설마 말로만 듣던 그 몽혼약인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더니 차탁옆에서 좌선한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황학…황도사…”

입을 벌려 불렀지만 목구멍이 솜으로 틀어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힘껏 몸을 뒤척였다. 그바람에 품속에 간직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탕…

그 소리에 그가 바로 눈을 떴다. 그리고 번개같이 손을 휘둘렀다.

“윽…”

창밖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곧 부산히 움직이는 기척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빠르게 움직여 문가로 다가섰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그를 제지시켰다.

“그만…”
“괜찮으십니까.”
“움직여지지…않아.”
“한식경이 지나면 풀리실 겁니다. 아마 염탐을 온 도적인 것 같습니다. 가서 무리를 불러오기전에 잡아야 합니다.”
“넌…괜찮아? 연기에 취하지…않았어?”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잔 불빛 아래 항상 무심하던 그의 눈빛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이와중에도, 남 걱정을 하십니까.”
“그 도적 쫓지 말아.”
“…”
“난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어찌 주막에 도적이 뛰어들까. 이건 다 그 양…”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양국충 때문이지 저들의 잘못이 아니야. 잘못이라면 하필 이 시국에 휘둘리는 약한 백성으로 태어난 탓이겠지.”

그가 말없이 침상곁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어 내 베개옆에 놓았다. 나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문가로 나가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그가 걸음을 멈추자 나는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당신, 누구야?”

……

“처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어.”

나는 침상에 좌정하고 앉아 그를 추궁하듯 바라보았다. 약효과가 사라졌지만 온 몸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다행이 머리는 명석했다.

“황학, 황도사…”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은 역사에 고증된 인물이 아니고, 겨우 야사나 민간에 나올법한 인물을 설정했군. 차라리 백거이로 설정하는 게 훨씬 나았어.”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사실 처음에 너 스스로 황학이라고 했을때, 살짝 의심하긴 했어.”
“뭘 말입니까.”
“황학은, 현대 사람들이 지어낸 인물이야. 아마 그 영화 원작은 어느 일본작가가 썼었지?”
“…”
“게다가 도술가라고…어디 도술이나 한번 피워보시지. 한수 배우게. 당현종은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너한테 넘어갔겠지만.”

내가 시까스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너도 현대에서 왔잖아.”

내가 콕 짚어서 말하자 그는 고개를 돌려 덤덤히 나를 보았다.

“얼굴을 보니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그리 온건하고 흔들림 없기란 쉽지 않아. 처음부터 네게 현대 말들을 기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공 깊은 거 인정. ”

나는 손에 든 물건을 그에게 흔들어 보였다.

“특히 이 핸드폰을 보고도 일언반구도 묻지 않다니. 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지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하잖아.”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가 드디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호송하고, 당신은 안전한 지대에 가면 되니까.”
“어라, 귀비마마라는 호칭도 바꿨네. 그럼 인정하는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넌 내가 양귀비가 아니라는 걸, 언녕 알고있었지.”
“…”
“하필이면 핸드폰 밧데리가 다 나간 시점에 나타났어. 비록 황학이 라 하고 당현종의 지시를 받았다지만, 혹시 현대에서 나 데리러 온 건가?”
“…”
“얘기해. 널 보낸 사람은 대체 누구냐고.”

그가 아무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방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급히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딜 가? 나 좀 구해줘…”
“…”
“난, 이렇게 여기서 평생 보내고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그럼 왜 그랬습니까.”
“뭘…”

그가 묻는 말에 나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꼭 마치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는 게 산 목숨이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
“살면서 그보다 더 험한 일을 겪을수도 있어요. 고작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일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나는 그의 옷깃을 잡은 손을 놓고 둬걸음 물러섰다. 날카로운 비수의 단면에 스치기라도 한 듯 그 기억은 아직도 선득하고 아팠다. 그토록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었는데, 기어이 지금은 그 상처를 파헤쳐야 할 시점이 왔다.

“그 사람…그렇게 힘들어했는데…내가 미처 몰랐어.”
“…”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고…아무 문제가 없는줄 알고 매니저 대표라고 촬영일정 닥달하기나 하고. 여자친구로서 지켜주고 위로해주는 모든 역할을 못했어 난.”
“…”
“넌 죄책감이 사람을 얼마나…힘들게 하는지…알아?”
“죄책감…”

그는 조용히 내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마주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은 예지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범려에게 시기를 보아 손을 놓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표방하라 권유하던 당신의 큰 포부는 사내를 능가했습니다.”
“…”
“또한 한성제가 한낱 여인과 아이를 이용해서 평화를 구걸하냐고 준절히 꾸짓던 당신의 정의감은 복주르를 감복시켰지요.”
“…”
“초선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겠다면서 역사는 이런 사람을 잊지 말라고 하던 당신의 높은 기개는 관우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
“난리에 만난 도적을 쫓지 말라면서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당신의 바른 세계관은 나로 하여금 머리를 끄덕이게 했습니다.”
“…”
“하지만 지금 이건 뭡니까. 한낱 과거의 갇혀 죄책감에 허덕이고 자신의 삶을 그토록 허타이 굴다니요. 참으로 실망스럽군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좌절해서 살 거면 차라리 돌아가지 않는 게 어떻습니까.”
“뭐?”

그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말아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내 얼굴을 마주했다.

“역사에서 양귀비는 마외역에서 죽습니다.”
“…”
“그러나 세간에서는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는 설도 떠돌죠.”

내가 고개를 들자 그가 허리를 펴고 말했다.

“카메라앱 개발상입니다.”
“뭐가?”
“날 누가 보냈냐고 했잖습니까? 그게 카메라앱 개발상이라고요.”
“카메라앱…”
“어떤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새로 개발한 시간여행 패키지였어요.”

나는 눈을 깜빡였고 그는 다시 몸을 기울여 내 귀가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패키지…당신한테 아무 긍정적인 작용도 하지 못했다면 그냥 여기서 끝내는 것도 좋습니다.”
“끝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주지 않고 지난 시간에 갇혀 살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참에 일본으로 가서 조용히 사는 방법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나더러 돌아가지 말라고…”
“그래요. 솔직히 우린 전문 의뢰를 받고 이런 패키지를 개발하죠. 의욕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중에서 삶의 참뜻을 깨닫게 해주자는 게 우리 취지입니다. 과거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시간여행은 이제 곧 인류에게 상품으로 출시되고 보편화 될 것입니다. 물론 여행지에서 돌아오기 싫으면 그대로 눌러살아도 됩니다. 현실에서 그에 맞는 실종사건을 만들어 드릴테니까요. 과거에 갇혀 살든, 과거를 잊고 살든, 모든 것은 본인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저희는 그 선택을 존중해드릴 거구요.”
“…그런데 왜 하필 나는 고대로…”
“그건 시간 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죠. 앱 시스템을 확인했더니 당신이 이천여년전으로 설정했더군요. 그건 우리탓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일이 이렇게 된 바엔 그에 따른 일정을 짰을 뿐입니다.”
“아…”
“사대미인의 사연을 두루 겪다보면 분명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완연한 패착이었군요.”
“그런데 난 분명 이년전으로…”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시 시간 설정을 할때 폰터치를 잘못 한 것이 기억에 떠올랐던 것이다.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나는 급히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차가웠지만 입꼬리는 왠지 올라가있었다.

“조금 있다 여기에 스님 한분이 투숙할겁니다. 바로 그 저명한 쿠우카이(空海)의 스승이 되는 분이죠. 그분을 따라 배를 타면 일본으로 갈수 있어요. 난 나가서 그분과의 기연(机缘)을 만들어야 합니다. 돌아가지 않으려면 양귀비의 역사는 완성해줘야 하는거니까요.”

내가 잠자코 있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죠. 얘기해봐요. 왜 불렀습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앱, 문제가 많아.”
“문제요?”
“첫째, 시간여행중 폰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은 바람직해. 하지만 신호가 안터지는 곳이 많아서 앱을 잘 작동시키지 못해. 그리고 지금처럼 밧데리가 소진되면? 암튼 내가 되돌아가면 기획서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줄께.”
“…”
“둘째, 왜 하필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해? 현실의 자기 몸 그대로든가 혹은 자긴의 과거 시대로 되돌아갈수도 있잖아. 패키지의 다양성을 부각해봐.”
“그건…운명을 달리 만들버릴가봐요. 우리 시대엔 아직 그렇게 정해진 운명에 개입하도록 허락되진 않았습니다.”
“그건 어느 시대인데?”
“2119년.”
“뭐야? 한참 꼬맹이네?”

내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그는 아무 말없이 잠시 나를 주시했다.

“농담할 기분이 있는 걸 보니 아주 씩씩한 할머니군요. 걱정 붙들어매고 다음 일정 짜보겠습니다.”
“뭐? 할머니???”
“금방 당신이 꼬맹이라며.”
“내가 이번 여행에서 느낀건데…”

나는 앞으로 둬걸음 다가간 후 팔을 내밀어 그의 어깨에 둘렀다.

“백년 차이는 거의 동갑이야. 다들 몇백년 나이차 난다. 지어 범려하고는 이천오백년도 차이 났었다?”
“이 팔 좀 내려주시지? 동갑님.”
“그나저나 나 밧데리 없어서 그러는데…핸드폰 좀 빌릴수 없을까?”
“최신형 스마트폰을 쓸줄 아세요? 할머니?”
“이게 진짜! 동갑이야? 할머니야? 하나만 정해!”
“저기 스님 오십니다…빨리 가봐야 해요. 할머니.”
“뭐라고??”
“나더러 정하라면서 정하니까 또 이러시네.”

그가 투덜거리며 나간 다음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돌아갈수 있게 되었다. 난 더이상 과거의 시간속에 홀로 갇힌 외로운 시간여행자가 아니었다.

……

무사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일본, 아니 왜국에 도착한지도 한달이 지났을 때, 스님의 주선으로 묵게 된 사찰에서 나는 여전히 그와 티각태각 하는중이다.

“대체 언제 돌아갈수 있는 거지?”
“여기서 사는 게 아니었습니까?”
“난 분명 돌아가겠다고 얘기했다? 돌아가더라도 역사를 완성시켜줘야 한다고 니가 일본으로 끌고온 거고.”
“아, 그랬군요. 앱 초기화 설정을 다시 할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직은 테스트 기간이어서요.”

그는 태연자약했고 나는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럼 테스트 기간인데 날 실험용으로 했다는 거야? 정말 너무하네.”
“그래도 개발연구에 참여하게 해드렸는데 영광이지 않습니까? 무료 고대 체험기. 이거 누구에게나 다 차려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영광? 나 몇번이나 죽을뻔 한 건 어떡하고?”
“뭐가 그리 위험했다고. 항상 위기에서 구해드렸는데.”

그가 심드렁하게 웃자 나는 힘껏 발을 굴렀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건데…”
“내가 왜 모릅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제야 범려, 복주르, 관운장의 얼굴이 그와 겹쳐지는 이유를 나는 알수 있었다. 순식간에 씻은 듯 다른 분위기의 말투와 표정을 바꿀줄 아는 사람…그래서 그동안 나는 깜빡하고 그에게 속았는지도 모른다.

“너…설마…다…너, 너였어?”

나는 그를 가리키며 버벅거렸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담히 웃었다.

“세번이나 상대역을 해줬는데 이리 입을 싹 씼다니요. 너무하십니다.”
“와우 대박…내가 매니저 해봐서 아는데, 너 배우 할 생각 없니? 연기 대박인데?”
“사양할께요.”

그가 깔끔하게 거절하며 돌아섰고 나는 다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 얼굴에 이 키에…아깝다, 아까워. 정말 생각 없니? 생각 고치면 찾아와. 내가 명함…지금 명함이 없어서 그러는데 내 전화번호는…”
“사양한다니까요.”

그는 정색하며 대답한후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주시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
“누구에게 제일 마음이 움직이셨나요?”
“내가 언제? 누구?”
“범려, 복주루, 관운장…누가 당신 이상형인가 말입니다.”
“그게 궁금해?”
“글쎄요…딱히 궁금하다기보단…”

그가 말꼬리를 흐렸고 나는 그의 준수한 얼굴을 이윽토록 보았다. 눈앞의 이 사람이 그들에게 빙의해서 한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기다리겠소. 10년이든 20년이든, 혹은 내 평생의 시간이든…그대에게 모든 마음을 다 바쳐 속죄하리다. 그러니 이런 나를 따라 가시겠소?”

“당신 마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해도 괜찮아. 내가 가면 되니까.”

“관우는 우직하여 여인의 마음을 살줄 모릅니다. 어떻게 연모하는 사람의 환심을 사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내라도 기회를 한번 주고 싶거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속에 오롯이 내 모습이 비쳤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어.”
“뭐가요.”
“내게 했던 그 말들…진심이었어? 아님 연기였어?”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마주한 서로의 시선이 오래도록 하나로 얽혔다. 한참 후 취한 듯 홀린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깨뜨리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앱 문제점, 두번째까지 나열했는데 그뒤는 없습니까.”
“아 세번째.”

나는 머리를 돌려 사찰밖에 우거진 푸른 대나무들을 아스라이 바라보았다. 살면서 내 마음이 이토록 맑고 청정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하게도 약간의 설레임을 동반했다.

“과거의 시간을 통한 치유의 여행…참으로 고마운 패키지였어.”
“…”
“시대를 막론하고 내 자신의 삶이 그토록 소중하다는 걸, 그리고 과거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끔찍하든 간에 누군가에게 다시 소중한 존재가 될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마웠어. 후기 잘 써줄께.”
“문제점 제기한다면서요?”
“문제점 있지.”

나는 고개를 기울여 다시 그를 보았다. 차츰 내 눈앞이 흐려졌다.

“돌아가면 우리, 더이상 만날수 있을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밤빛처럼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열어둔 사찰 창문밖에는 싱그러운 여름향기가 만연하고 있었다.

……

에필로그.

세상에 제일 지지 말아야 하는 건 바로 마음의 빚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건 말빚이라는 걸 요즘들어 심심히 느끼는 중이다.

이년전, 내가 매니지먼트 하고있던 당대 유명배우이자 내 전남친은 촬영중 우발적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물을 정리하던중 나는 그가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고있었다는 일기장을 확인할수 있었다. 사고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고 그가 치밀하게 준비한 최후였다.

거의 이년을 폐인처럼 살았다. 쉬임없이 술을 찾고, 술에 취해서야 잠을 잘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 시간여행을 겪기전까지 내 삶은 피폐했었다.

시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그동안 보관했던 전남친의 유물을 다시 한번 정리하다가 일기장의 책갈피 속에서 우연히 한 종이장을 발견했다. 어떤 프로그램의 특별여행 개발테스트 의뢰였는데 여행자 신청명단에는 내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 내가 그 시간의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할가바 나름 준비한 그 사람의 마지막 이벤트였다.

“어떤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새로 개발한 시간여행 패키지였어요.”

나는 책갈피를 덮었다. 얼굴 한가득 눈물이 뒤덮여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과거를 잊길 바랐을까. 분명한 것은 내가 이 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시간여행에서 겪었던 사대미인의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에서도 이미 충분히 검증된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술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잠들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달후인 지금 나는 여전히 잠을 자지 못하고 타이핑을 하고있다. 시간여행에서 만난 미래의 그 남자가 문자로 빚독촉을 해왔기 때문이다.

“기획서 보냈습니까?”
“그래, 보내준다 보내줘. 온다고 해놓고 사람은 안보이고 기획서 재촉만 득달같네. 대체 내가 보고싶은 거야? 기획서가 보고싶은 거야?”

쓸데없이 배우할 생각 없냐고 그에게 전화번호를 불러준 게 화근이었다. 아마 미래에는 사람의 기억력도 현재보다 업그레이드 되는가 보다. 그토록 인류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 그가 나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내 이상형은 더이상 범려, 복주루, 관운장이 아니라 그처럼 집요하게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 알려줄 때가 왔다.

나는 진하게 우린 차 한잔을 마신후 긴 한숨을 내쉬고 메일 제목을 입력했다.

“22세기 시간여행 기획서”

……

연재 끝

2020년 송화강 3기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2) 선물 (1명)
IP: ♡.36.♡.68
로즈박 (♡.193.♡.204) - 2023/02/18 00:49:19

하하하..양귀비까지 중국당대의 최고미인들로 살아봣네요..전 굳이 세남자중에서 선택하라면 관우같은 사람을 선택하고싶습니다..저렇게 곧고 우직한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해줄거 같네요.ㅋㅋ
잠간이라도 옛날로 돌아갓수 잇는 시간여행이 잇다면 저도 해보고싶어요..과거 내가 잘못선택햇던 모든것들을 되돌려놓고싶어요..지나간거에 연연하진 않지만 가끔씩 돌이켜보면 후회같은게 밀려올때가 잇어서요..머 그럴수 없으니까 앞만 보고살아야겟죠..좋은 글 잘 봣어요..
오늘도 추천~~꾹꾹~~

l판도라l (♡.36.♡.68) - 2023/02/18 02:14:14

시간을 되돌릴수 있다면 과거의 어느 시간대로 가고 싶냐고 저도 간혹 스스로에게 물을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간다 해도 선택은 변하지 않겠죠? 그래서 다음 글은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내용으로 엮어봤습니다. 항상 읽어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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