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주술(제2회)

l판도라l | 2023.03.01 11:42:16 댓글: 1 조회: 689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6582
3.
그, 아니 그녀의 여인으로서의 첫 적응기가 생리대를 구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줄은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해서 슈퍼에 갔다온 그녀에게 나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백 줘봐.”

그녀가 넘겨주는 쇼핑백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잔뜩 미간을 구겼다.

“이건 순면이 아니라서 피부 트러블이 생겨. 앞으로도 이 브랜드 사면 안돼. 가서 바꿔오는 게...”
“됐어. 암거나 쓰지머. 내 몸이냐?”

그녀의 심드렁한 말에 뭐라 대꾸하려다가 나는 그만 단념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네시네? 준이 하원할 시간이야. 빨리 가.”
“조금 늦는다고 뭐 덧나냐? 그리고 왜 내가 가?”
“다른 애들이 다 가고 혼자 남으면 울거든. 준이가 좀 섬세하잖아. 그리고 준인 항상 엄마가 와주길 바랬단 말이야.”

궁시렁거리는 그녀를 등 떠밀어 보낸후 나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찌부둥한 몸이 씻으면 좀 개운해질 것 같아서였다. 다행이 10년을 마주한 몸이어서 그런지 내 몸이 아니더라도 큰 위화감은 없었다. 몸집이 커서 씻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고 바디워시가 좀 많이 든다는것 외에 말이다. 샤워를 할때 배쪽에 뭔가 상처자리 같은 것이 만져졌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울로 비춰보려다가 문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나는 급히 샤워를 끝내고 면도까지 마무리했다. 습기가 가셔지자 거울속에는 여전히 멀끔함을 유지한 얼굴이 나타났고 나는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 추리대로 그의 몸은 평소의 생활기능을 기억해서 면도기를 쓰는 일에도 그리 품이 먹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화장실을 나서는 나를 향해 문에 들어선 준이가 꾸벅 배꼽인사를 해왔다. 나는 저도 몰래 팔을 벌렸다.

“이리 온.”

아이가 쭈볏거리며 내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이를 들어올려 품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평소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자세였지만 왠지 아이는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 준이 오늘 유치원에서 뭐했어?”
“오늘 그림 그렸어요. 선생님이 준이한테 화냈어요.”
“선생님이 왜 화내?”
“준이가 잘 그리지 못해서요.”
“뭘 그려야 하는 건데?”
“아빠.”

나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뒤따라 들어온 그녀가 멍하니 서서 우리 모습을 보고있었다.

“왜 잘 그리지 못했어?”
“아빠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아요.”

나는 아이 얼굴을 들어올려 나를 바라보게 했다.

“잘 기억해놔. 이게 아빠 얼굴이야.”
“우와, 우리 아빠 잘생겼다.”

어린 아이의 말이었지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할수 없었다. 그녀가 그런 나를 보더니 피씩 웃었다.

“날 칭찬하는 말인데 착각하지 말지?”
“어쨌든, 지금은 이게 나니까.”

우리 사이의 알쑹달쑹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채 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며 열심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빠,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과 달라요?”
“내가 뭐가 다른데?”
“다른 아빠들은 어린이집 오는데 아빠는 잘 안오잖아요.”
“그건, 아빠가 일해야 하기때문이란다.”
“엄마도 일을 하는데요?”
“그…그건 엄마와 아빠가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됐어. 준이 손씻고 놀고있어. 좀있다 밥먹자.”

다행이 그녀가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내 추측대로 우리 서로의 몸은 생활과 살림에 대한 모든 기능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아직 적응기간이 필요했는지 그녀가 밥상을 차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솜씨가 잰 내 몸의 기능에 남편 원래의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레시피까지 추가하면 요리실력이 훨씬 업그레이드 되겠는데 아마 그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아들애가 좋아하는 물고기 요리가 올라온 밥상을 마주하고 우리는 단란하게 모여앉았다.

“차리느라 고생했어.”

내가 건네는 말에 그녀는 잠시 움찔하더니 말없이 수저들을 상에 내려놓았다. 습관적으로 물고기의 뼈를 발라서 밥술위에 놓고 아이에게 건네주자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눈짓으로 아이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아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왜? 싫어?”
“엄마가 주는 게 좋아요.”
“뭐?”
“아빠가 주는 건 가시가 있어요.”
“어디?”

아무리 보았지만 내 눈에는 물고기 가시가 보이지 않았다. 밥을 한입 입에 넣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냈다.

“이리 줘. 가시가 여기 있잖아.”
“그럼, 밥도 당신이 먹여줄래?”

그녀가 나를 힘껏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그녀가 묵묵히 물고기 가시를 가려내자 고개를 숙이고 혼자 가만히 웃었다.

식사를 마친후 아이는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목욕을 하는데 엄마와 함께 하겠다고 울어제꼈고 숙제도 엄마가 알려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거의 할일이 없어져서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애가 잠을 들기까지 시달리던 그녀가 드디어 녹초가 된 모습으로 소파옆에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새벽 한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많이 힘들어? 배고픈데 뭐 좀 요기하고 잘까?”
“힘든데 먹을 생각이나 있겠어?”

그녀가 맥없이 대꾸하며 소파에 앉자 나는 정색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전에는 애 재우고나서도 항상 당신 뭐 먹고싶다면 해줬잖아. 내가.”
“그건…”
“김치볶음밥 먹고싶어. 돼지고기 가늘게 썰어넣은 거. 좀 맵게 고추가루 팍팍 추가해서 볶아내면 더 좋고.”

주문을 마치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녀가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맥없이 주방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나는 괜히 웃음집이 흔들거렸다. 어쩌면 이런 영혼 체인지를 겪을수 있어서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

나의 희열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튿날 그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부스스 눈을 뜨고 물었다.

“아, 왜?”
“빨리 일어나 씻고 오늘부터 출근해. 그러기로 했잖아.”
“아, 오분만 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하지만 등뒤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서 나는 금세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 될 거 아니야.”

세수를 하고 정장을 갖춰입었다. 넥타이가 목을 조이는 찌뿌둥한 기분에 그녀가 차린 아침상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남자들이 넥타이를 왜 매는지 모르겠어. 이게 얼마나 조이고 불편해? ”
“나도 여자들이 왜 이걸 입는지 모르겠다. 넥타이보다 더 불편한 걸.”

그녀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원래 내것이었던 그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저렴한 브래지어가 가슴을 압박하는 느낌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아침 안먹을테니까 앞으로도 차리지 마.”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길에 나섰다. 오늘따라 차는 왜 이리 붐비며 사람들은 왜 다들 이리 일찍 나오는지…간만에 잡은 핸들이 자꾸 손에서 미끌어지려 한다. 이와중에 접촉사고라도 나면 벌점은 오로지 남편의 몫이 되겠지.

회사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도 보이고 신입인지 낯선 얼굴들도 몇 보였다. 다행이 그녀가 전날저녁 미리 준비를 해주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인사를 할수 있었다.

“차대리, 안녕? 홍과장 머리 새로 짤랐네? 미스 조 좋은 아침이야.”

곧바로 그녀가 알려준 내 테이블로 다가갔다. 마케팅부 서태훈과장이라는 명찰이 테이블위에 반듯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잠시 테이블앞에 섰다. 내가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지금 적어도 차장쯤은 되어있을 텐데…

“어이 서씨. 어제는 좋았나?”

누군가 옆을 지나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입사동기 차대리였다. 그러고보니 그도 아직 대리에 머물러 있었군.

“어제? 뭘?”
“발렌타인데이날 무슨 좋은 일이 있었기에 어제 일어나지도 못했나? 응? 월차까지 낼 정도로?”

차대리가 이죽거렸다. 십년이 지나도 그의 이런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다.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 평소 이런 행동때문에 경박해보이는 이유를 그 스스로는 알까.

“그만해.”
“왜? 우리 형수님의 미모가 웬만하셔야지? 그때 자네가 아니었다면 어제 월차 낸 건 나였을텐데 말이여.”

얼굴 한가득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차대리를 보느라니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여졌다. 이 반응은 본연의 나 자신일까 아니면 내가 쓰고있는 지금 이 몸의 반응일까? 나는 낮게 목소리를 깔고 이사이로 내뱉었다.

“그만하라고 했지.”
“알았어…원 사람이 무슨 농담을 못해요. 그리 목소리 깔 건 없어. 서씨 그러니까 승진을 못하는 거야. 사람이 그리 융통성 없이 꼿꼿해서는…”

바람처럼 멀어지는 차대리의 뒷통수에서 시선을 거두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일도 시작하기전에 내선 전화가 울렸다.

“네, 마케팅부 서태훈입니다.”
“서과장 한번 올라와봐.”

뭐지? 냉랭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렇다. 지금쯤은 아마 부장으로 승진했을 당년의 한차장, 나의 대학선배가 된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부장 사무실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눈가에 주름살이 살짝 잡히긴 했지만 여전히 도도함과 럭셔리함을 잃지 않은 한차장, 아니 한부장이 건조한 시선을 들어 나를 본다. 대학때 그녀는 우리 학과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고 그래서 그녀의 지성과 미모는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듯 했다.

“서과장 내일 스케쥴이 어떻게 돼?”
“네?”
“이틀 출장 다녀와야겠는데, 괜찮겠어?”

물론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나는 그만 주저하고 말았다. 상사가 시키는 일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이 직장의 생리이긴 하나 지금 상황에서 출장을 갔다가 갑자기 몸이 돌아오는 현상이 생기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부장 그녀는 나의 망설임을 다른 의미로 착각한 듯 했다.

“역시, 무리겠지?”
“…?”
“그 일 아직도 제대로 안풀었어? 지연씨랑?”

한부장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네? 풀다니요?”
“지연씨가 오해하고 있잖아. 서과장과 나 사이를.”

그게 어떻게 오해가 되냐고 되물을뻔 할 충동을 나는 간신히 억누르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아, 하긴…오해가 아닐수도 있지. 여자들 감이란 원래 뛰어난 거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한부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펜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시선을 모니터 쪽으로 돌렸다.

“됐어. 나가봐. 출장은 나 혼자 갈께. 이번 시즌 부품 제조공장 업체 리스트 좀 뽑아줘.”
“어딥니까.”

한부장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고정되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디로 출장가야 합니까. 티켓 예매하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녀가 어정쩡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였다.

“공장쪽 상대하신다면 부장님 혼자 가시기엔 무리인 거 같아서요.”


4.
“미쳤어? 당신이 왜 출장가?”

그녀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차피 상사가 시키는 일 거부할수도 없는 거잖아.”
“애초에 한부장과 같이 한번 출장갔다 왔다고 당신이 보름동안 나랑 말 한마디 안했어. 그때의 트라우마가 아직 가셔지지도 않았는데 또 출장? ”
“그러니까, 출장이 어떤 상황인지 한번 가보겠다고. 당신이 그걸 왜 막아? 뭐 찔리는 데라도 있어?”

내 말에 그녀는 노기가 꽉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이 왜 또 그렇게 돼? 맘대로 해! 출장 가든 여행을 가든!”
“티켓도 다 예매했어.”

내 대꾸에 그녀는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내일 엄마 온다고 했어. 어떡할거야?”
“엄마? 어느 엄마?”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전같으면 서로의 태도를 보아 바로 눈치를 챘겠지만 지금 몸이 바뀐 상황으로서는 그녀가 말하는 엄마가 누구의 엄마인지 나는 잠시 헛갈렸다.

“어느 엄마긴. 내 엄마, 당신 시어머니.”
“아…정리해보자. 그러니까 고향에 어머님…아니, 여름에 금방 다녀가지 않으셨어? 왜 또 오신대?”
“손자 보고싶어 온다는데 뭘 어떡해.”
“좀 막지 그랬어. 지금 이상황에 오면 어떻게 해?”
“어디 막아서 될 일이야? 그 고집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는 확 짜증이 솟구쳐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후 캐리어를 찾아내고 옷들을 와락와락 쑤셔넣었다. 그녀가 그런 나를 보더니 피씩 하고 웃었다.

“그건 당신 원피스인데?”
“이런 젠장…”

아직도 내 사유는 내가 맡은 역할에 그리 충실하지는 못한가 보다. 짐속에서 꽃무늬 돋힌 원피스를 빼고 남자 셔츠와 바지들을 넣었다. 캐리어 지퍼를 닫은 후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전에도 어머님 오면 내가 픽업하고 여기저기 모시고 다녔어. 며느리 할 일이 그거 아니야?”
“…?”
“그 말 전에 당신이 한 말이었어. 며느리가 그런 걸 해야 한다고.”
“내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출장가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진 않아. 당신이 공항픽업해. 이틀이면 내가 오니까.”
“나더러 엄마하고 이틀이나 코 맞대고 지내라고???”
“뭐 어때? 이참에 모자간의 정이나 돈둑히 하고 좋지.”

그녀가 쏘아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무시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날은 별 탈 없이 지냈다. 아들애가 그녀의 엄격한 훈육을 못견뎌 자기전에 쿨쩍거린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느새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보느라니 애초에 나는 남자로, 남편은 여자로 태어난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부터 회사에 들려 노트북과 서류들을 챙긴후 공항으로 향했다. 인파에 묻힌 한부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다란 모자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몸에 딱 달라붙는 샤넬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회사 고위관리직이 아니라 잘나가는 연예인처럼 보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서과장 그게 뭐야? 그런 차림으로 공장 돌아보려고? 더울텐데?”

나는 목을 조인 넥타이를 조금 느슨히 했다. 남방 도시라 더운 날씨가 벌써 시작된 것 같았다. 우리가 가는 곳은 열대 기후에 속하는지라 더 더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한부장 앞에서 반팔에 반바지를 입기는 더욱 싫었다. 나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 하나를 끌렀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앞장서서 게이트로 향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할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다만 비행도중 그녀가 나의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았을 뿐이다. 다행이 남편과 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썼고 커버 색상만 살짝 달랐을 뿐이어서 별로 큰 의심은 사지 않은 듯 싶었다. 평소 핑크나 레드로 폰케이스를 정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남편과 몸이 바뀐후 제일 골때리는 것은 서로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차라리 핸드폰을 바꿔서 사용하자고 했다가 강력하게 거부당했다. 대체 무슨 비밀이 그리 많기에…

“차대리는 왜 그 모양이야?”

비행기에서 내려 업체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한부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톡방 못봤어? 좀 자제하라고 해.”

아…한부장이 바로 옆에 있기때문에 나는 폰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리만 끄덕이고 말았다. 잠시후 한부장이 차창밖을 바라보는 틈을 타서 나는 가만히 폰을 꺼내 지금쯤 엄마를 픽업하느라 공항에 나가있을 그녀에게 급히 문자를 날렸다.

“긴급상황.”

다행이 그녀에게서 바로 회답이 왔다.

“무슨 일?”
“차대리가 오늘 톡방에서 뭐라고 했어?”
“기다려.”

잠시후 그녀에게서 문자 한통이 다시 날아왔다. 단체톡방의 캡쳐 내용이었다. 특이한 것은 없고 나와 한부장이 출장간 것에 대한 시시껄렁한 농담이었다. 한부장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연씨야?”
“아…네.”
“출장온 것 갖고 뭐라 그래?”
“아닙니다.”
“지연씨도 너무한다. 대체 그번 일 집에 가서 어떻게 번졌기에 그렇게 규제가 들어온 거야? 두사람 진짜 잘 살고있는 거 맞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지? 그리고 우리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왜 한부장이 궁금해야 하는 건지? 내 시선에서 뭔가 날카로운 것이 느껴졌는지 한부장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긴, 다 서과장 개인사이긴 하지만…그런 걸로 회사일 영향주지는 말있으면 해서 하는 얘기야.”
“걱정 마십시오. 공과 사는 구분합니다.”
“그래, 너무 구분해서 탈이지.”

역시 알쏭달쏭한 말을 남겨놓고 한부장은 차에서 내려 건물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오리무중에 빠져 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

……

그번의 미팅은 쉽지 않았다.

우선은 단가 조절을 위한 미팅이었는데 공장쪽 태도가 썩 여의치 않았다. 부품 단가가 올라가면 제품 성본도 따라서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소비자들의 원성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현재 시국에 우리같은 전자기기 업체가 살아남자면 부단히 업그레이드 되는 성능과 불변의 단가만이 정답이었다. 시장 시세와 경쟁업체 단가를 세밀하게 잘 알고있는 내(아니고 남편)가 미팅에 참가하는 것은 회사로서는 적당한 업무 배치였는데 문제는 지금의 서태훈은 그 서태훈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전에 그녀가 자료들을 철저하게 준비해준 덕에 미팅 진행에는 별로 막힘이 없었다. 전에도 이 회사에 근무한 나의 경력 또한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다만 평소에는 구경하기 조련치 않은 한부장의 애교섞인 눈웃음에도 부품 단가를 지난해 단가의 10%정도 인상하겠다는 공장 책임자 태도는 전혀 변함 없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중간중간 울리는 내 문자알림 소리가 미팅에 훼방작용을 했다. 진동으로 해두긴 했지만 서로 긴박한 상황에 맞닥뜨릴수 있기때문에 문자는 항상 확인하기로 그녀와 약속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의 상황은 더할나위 없이 긴박했다.

“엄마 픽업했어. 그런데 다퉜어. 지금 서로 말도 안하는 중이야.”
“왜 다퉜는데?”
“픽업하고 택시 예약하는데 뻐스 타고 가자는 거야. 짐도 있는데 택시 부르겠다 하니까 돈 낭비 한다고 아주 나를 살림살이 잘 못하는 사람 취급 하더라. 그래서 욱해서 뭐라 해놨지.”
“뭐라 했는데?”
“살림살이 보태주는 것도 아니면 내생활 터치 말라고 했지.”

나는 그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느님 맙소사!

공장 책임자가 나를 의아한 눈길로 보았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흔든 후 자세를 바로 하고 가만히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참았어야지!”
“어떻게 참냐?”
“나는 항상 참아왔어. 하고싶은 말 다 하면 어떻게 인간관계가 유지돼? 고부사이는 제일 복잡하고 까다로운 인간관계야.”
“그럼 엄마는 왜 하고싶은 말 안참는 건데?”
“그건…”
“일방적으로 참는 게 어딨냐? 그리고 참지 말고 소통을 해야지. 아니면 어떻게 서로의 생각을 알수 있겠어?”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한부장이 나를 쳐다보았다.

“서과장 무슨 일 있어?”
“아, 아닙니다.”

나는 다시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공장 책임자를 건너다 보았다.

“죄송하지만 어디까지 얘기했죠?”
“그러니까 부품 단가를 하향 조절한다는 건 절대 안되는 일이라는 겁니다. 아시다싶이 인건비도 올랐고 제조 설비들도 가격이…”
“그건 그쪽 사정이죠.”
“네?”

공장 책임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곁에 있던 한부장도 저게 미쳤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왜 이 공장쪽 사정까지 헤아려야 하는 겁니까. 구정 직후여서 공장 인원 변동이 생기는 건 해마다 있는 일이고 인건비는 다른 업체도 똑같이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단가 조절을 꼭 하시겠다는 건, 저희와 합작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참지 말고 소통을 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어떻게 서로의 생각을 알수 있겠는가. 우연히 그녀와의 문자에서 얻어낸 수확을 나는 바로 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서과장 왜 이래?”

한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건 담판 끝내자는 거야?”
“시간낭비 하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공장이 이 한곳도 아니고.”
“대책이 있어?”
“이제부터 강구하면 되죠. 이 도시에 있는 해당 공장 리스트는 뽑아왔습니다.”
“그러다 헛탕 치면?”
“뭐, 그때 다시 와서 재협상 해보죠머. 설마 문밖으로 내쫓겠습니까.”

내 대답이 하도 뻔뻔스러운지 한부장은 한참이나 나를 보았다. 나는 주섬주섬 노트북과 자료들을 챙겨넣었다.

“그럼 시간이 급해서 이만…”
“혹시 다른 업체와 연락중이시라면 잘 알아보십시오. 이 단가에는 다 합작하지 않을 겁니다.”
“그거야 부딪쳐보면 알 일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공장 책임자는 어정쩡해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가볍게 둬번 흔들어주고 나는 앞장서서 회의실을 나왔다. 한부장이 급히 따라나왔다.

“정말 가는 거야?”
“네.”
“아까 다른 업체랑 진짜 연락해봤어?”
“이제부터 해보려구요.”
“서과장 답지 않네. 보통 서과장은 매번 신중하게 적어도 두개이상 대안이 있어야 액션을 취하잖아.”
“전에는 그랬었죠. 하지만 일에는 변수가 따르는 법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계획 외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요.”
“그래도…”
“일단은 따라오십시오. 오후엔 저와 함께 이곳 관광지 유람이나 가시죠.”

나는 한부장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공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어쩌면 서로의 소통의 방식이 꼭 대화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

다음회에 계속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1) 선물 (1명)
IP: ♡.36.♡.68
로즈박 (♡.193.♡.224) - 2023/03/02 03:15:29

한국드라마 시크릿가든인가 생각나네요..ㅎㅎ거기서도 서로 몸이 바뀌여가지고 그러든데..어우..현실에서 만약 이렇다면 좀 끔찍하긴 하겟네요..어쨋든 주어진 삶에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겟어요..오늘도 잘 보고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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