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주술(제5회)

l판도라l | 2023.03.18 19:07:54 댓글: 1 조회: 721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51836
9.
“재발할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그동안 건강관리를 굉장히 잘해오셨는데요.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앞으로도 해마다 검진하시길 바랍니다.”

의사의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틀간 마음을 졸여오던 것이 의사의 말을 듣자 그제야 심장이 평온을 되찾는 모앙이다. 엄마도 환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이게 다 서서방 덕분이야. 그동안 신경 써준 것도 모자라 이렇게 병원까지 따라오고 말이야.”

엄마의 말에 의사가 힐끗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 아들이 아니라 사위였습니까.”
“아, 네.”

내가 민망한 어조로 대답하자 의사는 안경을 추스려 올렸다.

“이리 효도하는 사위가 있으니 어떤 병인들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

나는 서둘러 엄마의 팔을 잡고 병원 복도를 빠져나왔다. 의사의 말이 못내 가슴을 찔러왔다. 사위가 효도한다고? 딸도 이리 무심했는데 사위인들 어쩌랴 싶었다. 그리고 생일날 비싼 레스토랑 한번 가기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효도를 한단들…그래도 그와 몸이 바뀐 덕에 이런 방식으로나마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올수 있은 게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집으로 가니 그녀는 아들애를 픽업해서 학원 데려다 준다고 집을 비우고 있었다. 점심밥은 다 차려놓은 상태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엄마를 부축해 소파에 앉힌 후 따뜻한 차 한잔을 타서 차탁위에 놓았다. 이제 두시간만 지나면 엄마는 공항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다음 방문을 계획하고 계시겠지. 물론 무더운 여름철은 피해서 말이다.

나는 엄마 옆자리에 붙어앉아서 엄마 목의 스카프에 손을 올렸다. 엄마가 흠칫 하는 느낌으로 나를 보았다.

“제 앞에선 풀고 계십시오. 어머님.”

한껏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스카프를 풀었다. 얼굴선 옆에서 목 주변의 긴 상처자리가 유포하게 눈에 띄였다.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어머님.”
“뭐가.”
“이젠 지연이한테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요. 매번 이렇게 총망히 왔다 가시는 것이 번거롭지 않은가요.”
“지연인…”

엄마는 시선을 들어 잠시 허공의 그 무엇을 더듬었다.

“서서방도 알다싶이 보기엔 강해보이지만 마음은 한없이 연약한 애지.”
“…”
“그 아이는 뭐나 속으로 묻고 삭이기에 익숙해있어. 단단한 표면안에 여리고 민감한 마음을 감추고 있지. 내 일을 알면 그 아이는 겉으로는 덤덤해 있겠지만...”

엄마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뒷말을 이었다.

“속으로는 너무 괴로워 할거야. 그리고 밤잠 이루지 못할 거고. 끊임없이 자책할 거고. 날 안쓰러워 할 거고. 앞으로 살면서 무슨 고민이나 내게 털어놓지 못할 거고…”
“…”
“날 엄마로 보는 게 아니라 보호받을 대상으로 보게 될거야. 난 그게 싫거든. 난 내가 아직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연이한텐 더욱 더.”
“그거 아십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연인 어머님을 참 많이 닮았어요.”
“그래?”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대기도 하고, 믿어주기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들은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가끔은 부드럽고 연약하고 여성스럽고 사소한 것에 만족해도 되는데…그런 것에 서툰거죠.”
“난 그래도 서서방이 참 많이 의지가 됐잖아.”

엄마는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그리고 이번에 보니 지연이도 변화가 커. 걔가 언제 요리를 이렇게 잘했었나.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가 보이는 게 서서방 공로가 크지 싶어.”
“별말씀을요.”

나는 저도 모르게 엄마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지 않겠나. 날 닮아서 음식솜씨가 별로인 걸 서서방이 다 감안해서 참고 사는 거 나 다 알어. 그때 그 소꼬리찜은 결국 버렸다면서? 솜씨도 별로거니와 병원에서 대충 해서 보낸 게 뭐 맛있었겠나.”

엄마의 말에 나는 놀란 시선을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해 여름의 그 소꼬리찜은 분명 엄마의 음식솜씨였음을…입덧중이라 미처 알지 못했는지 아니면 엄마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내 미각을 마비시켰는지는 몰라도, 암튼 당시의 나로선 그것이 엄마가 해보낸 음식이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할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한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어머님…”
“만일 살면서 언젠가. 우리 지연이가 서서방과 같이 살기 힘들다고 고집을 부리면 말이야.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
“내게 연락을, 딱 한번 전화를 하라고 전해주는게 어떻겠나. 이 엄마 말을 한번 들으라고. 알겠나.”
“어머님의 말씀을요?”
“그래. 아무리 되돌이킬수 없다 판단이 내려져도, 마지막 관문인 셈 치고 내게 연락을 하라고 해줘. 부탁이네.”

엄마는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스카프를 날리며 공항으로 떠났다. 엄마가 갔다는 소리를 들은 그녀의 얼굴에 언뜻 안도의 빛이 스쳤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어.”
“새삼스레 뭘.”
“몇일동안 우리 엄마 구미에 맞게 음식 차려줘서 말이야.”
“아, 그거야…전에도 장모님은 내가 한 음식을 제일 맛있어 하셨…”

문득 그녀가 말을 끊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왜 어머님은 이번에 내가 한 요리를 드시고도 아무 말씀 안하셨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데?”
“지금 우린 몸이 바뀌었잖아. 나인 즉 당신인데 당신 딸 요리 솜씨를 모를까? 눈치백단 장모님이?”
“무슨 소리야? 내 요리실력이 어때서?”

내가 발끈했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네. 속도만 빠를뿐 아주 가끔 굽는 걸 태우고 국을 졸이긴 하지만.”
“이 싸람이 진짜!”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짱 하고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다. 순간 그녀가 아악 하더니 허리를 굽혔다. 나는 어쩔바를 몰라서 같이 허리를 굽히고 물었다.

“왜 그래? 아파? 내가 힘조절 못했나? 미안해…”
“가정폭력은…”

그녀는 얼굴을 험악하게 이그러뜨리고 말했다.

“명백한 이혼사유가 되는 거 알지?”
“아하…이 방법이 있었군.”

내가 손가락에 딱딱 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자 그녀는 짐짓 겁에 질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하려고?”
“힌트 줘서 고마워. 내가 왜 이생각을 못했을까.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네. 오늘부터 어디 한번…”
“사람 살려…”
“하하하…”

체인지 주술에 걸린지 열흘째 되는 밤이 우리 웃음소리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

우리 가족의 평화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한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습관을 가지자면 보통 한달의 시간이 걸리고 그 환경이 익숙한 공간일 경우에는 보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몸이 바뀐지 보름이 되는 날 우리는 이미 서로의 생활패턴을 완벽하게 마스트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기 버겁고 회사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내가 투정을 부렸고, 살림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아이 유치원과 학원 픽업에 지쳐 죽겠는데 학원 숙제는 왜 그리 많냐고 그녀가 하소연을 했다. 보름이 지난 후에는 특히 그녀의 불만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이가 옷을 안입겠다고 몇번이고 벗어버리는 걸 어떡해? 그런데 그게 내 탓인양 지나가는 할머니조차 머리를 흔들고 혀를 차면서 엄마라는 게 아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히지 않는다고 뭐라 잔소리 하더라구.”
“유치원 선생님이 곧 있게 되는 학부형회의에 엄마가 꼭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엄마들은 와서 현장 설비들 체크하고 회의공간 청소도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아니 왜 엄마들만 죽을거냐? 아빠들은 뭐하는데?”
“학원들 숙제 다 하면 11시가 되네. 애가 늦게 잘때는 좀 같이 놀아주는 게 어때? 빨래는 꼭 내가 해야 하냐? 주말에는 약속 만들지 말고 일찍 집으로 들어와줄래? 애가 공원 놀러가고 싶대잖아!”
“이제는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지?”

참다못해 이 한마디를 했더니 백마디가 되돌아왔다.

“난 그래도 당신이 잔소리할 일들은 하지 않았어. 당신은 뭐야? 양말은 꼭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어야 하겠어? 화장실 변기 뚜껑은 왜 항상 올리는 건데? 노트북은 안쓰면 정리해서 서류가방에 넣어둘수 없겠어? 정수기 물 바꿨으면 버튼 눌러서 열가동 켜줘야지.”

나는 그만 머리가 지긋지긋해났다. 모전자전이라고 시어머니가 그리 잔소리가 심한데 그 아들이 물려받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입었고 그녀는 확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또 어디 나가는데?”
“또?”
“어제도 나갔었잖아.”
“아, 어제는 한부장이 불러서…”
“그제는?”
“차대리가 지난번 일 풀자고 한잔 하자기에…”
“내일은 회식 있다면서.”
“어, 그래. 누구도 빠지면 안된다 해서…”

별로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그만 버럭하고 말았다.

“아니, 내가 나가면 또 어쨌다고 이모양이야? 난 전에 당신 나가면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쭉 말을 안했지. 2-3일동안.”
“그래도 사람 들들 볶는 것보단 낫잖아?”
“이게 그냥 사람 볶는 걸로 보여? 육아와 살림에 지친 넋두리로는 안보여?”
“내가 아침상을 차려달랬냐? 와이셔츠를 다려달랬냐? 다 그러고 살어. 애 둘씩 셋씩 있는 여자들도 살림에 육아에 남자 아침상까지 차려준다더라. 왜 혼자 고생한척 억울한 척해? 나만큼 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무슨 여자가…”

저도 모르게 전에 남편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몸이 바뀌면 사고방식마저 바뀌는가.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여자야?”
“하아…이렇게 불리할때엔 또 성별 인지를 한다 이거지?”

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린 후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어디 말해봐. 내가 뭘 어떻게 더 하면 좋겠어?”
“당신 그게 무슨 태도지? 이미 많은 것을 하고있다는 그 뉘앙스는 또 뭐고? 솔직히 당신 지금 기본도 안하고 있잖아.”
“기본? 누가 정한 기본인데? 그럼 당신은 당신 기본 하고있어?”
“난 다 했어!”
“그럼 됐네. 당신은 집안일 나는 바깥일, 뭐가 문제지?”
“뭐?”
“분공 확실하고, 각자 맡은 업무 잘하면 끝나는 일인데,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야?”
“정말 몰라서 물어?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우리는 끝이 없이 다투었다. 오히려 체인지 전보다 더 다투었다. 하도 다투니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몇일 밝은 미소를 되찾은 아이도 우리 눈치를 보느라 다시 암울한 기색이었다.

내가 약속을 만드는 일은 더 빈번해졌고 그럴수록 그녀의 불만도 점점 쌓여갔다. 솔직히 몸이 바뀐 직후에 조금 당황하긴 했어도 나는 오히려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역지사지를 직접 경험할수 있으니 앞으로는 서로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지낼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후유증으로 적응이라는 단계도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간과하고 말았다. 차츰 서로의 몸에 적응된 우리는 마치 태초에 태어날때부터 지금의 이 몸인 듯 완벽하게 배역에 몰입했다. 이러다가 성 정체성 혼란이 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매일 다툼을 일삼을수는 없어서 시간을 내어 그녀와 한번 대화해보기로 생각했다. 부부사이 한사람의 불만이 많아진다는것은 그 사람이 가정에 대한 희생이 더 많다는 걸 의미한다. 평소에 눈치껏 빨래도 널어주고 쓰레기통도 비워주었지만 육아와 살림의 주축이 되어 감당하는 것보다는 거리가 있었고 이것으로 그녀의 불만을 해소해주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하긴 나도 전에 그러지 않았던가.

주말을 앞두고 업무가 그리 많지 않은 날을 선택해 저녁을 같이 먹자고 그녀를 초대했다. 마침 아들애의 미술학원 시간이 그 시간대여서 간만에 오붓하게 둘이 저녁을 먹을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바라는 남편은 가끔은 이런 서프라이즈를 주는 거라고 했고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와이프는 남편의 그런 의사에 센스있게 따라주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암튼 그날 퇴근시간에 맞춰 그녀가 회사밑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업무 정리를 마치자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었다.


10.
“서과장, 한부장님께서 잠시 보자고 하던데?”

퇴근준비를 마친 차대리가 내 옆을 스쳐지나면서 문득 말했다. 저번 엘레베이터에서 내게 면박을 당한 후로 차대리는 톡방에서 농담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고 얼마전 둘이 호프집에서 한잔 나눈 후로부터 나에 대한 호칭도 서과장으로 바뀌어져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오늘?”
“그래. 뭔가 중요한 얘기라고 하더군. 아까 복도에서 그랬어.”

입이 가벼운 차대리를 통해 전한 일이라면 그리 은밀한 얘기는 아니고 사적인 얘기는 더욱 아닐텐데…하지만 지금 회사 밑에서 그녀가 기다릴텐데…나는 난감해졌다.

부랴부랴 부장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니 한부장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웃었다.

“성격도 급하네. 퇴근후에 보자고 했을텐데 바로 쳐들어온 걸 보면.”
“선약이 있어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다음날로 미룰수 없겠습니까.”
“서과장 장래가 달린 일인데도?”
“…”
“얼마 안걸려. 거기 앉아봐.”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가끔 시계를 보았다. 한부장이 한결 들뜬 표정으로 뭔가 얘기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한부장의 얘기가 한단락 마무리 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결정할 사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잘 고민하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문쪽으로 향하는데 한부장의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서과장 생각보다 냉혹하네.”

나는 문손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가요?”
“그래. 그번 출장에서 잘 알아들었어. 나도 그후로는 좋은 상사가 되어주려 하고있고. 서과장이랑 뭘 더 어째보겠다는 것도 아니야.”
“부장님.”
“아니, 내 말 들아봐.”

한부장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서글픈 빛을 띄었다.

“나 다음달 해외지사 발령나.”
“본부장으로 승진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본부장은 맞지. 해외본부.”
“…그렇군요.”
“그래서 고려해보라는 거야. 이쪽은 새로 부장이 오게 돼. 그러면 서과장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몰라.”
“…”
“잘 생각해보고 답줘. 선택은 오로지 본인 몫이니까. 난 내 최선을 다했어.”
“네.”
“당신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한 답을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고 답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머리를 숙여보인 후 문을 나서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승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장님…”

한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말대로 선택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5년전, 나는 이미 내 선택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있는 이 몸의 주인공-남편 서태훈의 선택은 어쩐지 내가 개입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위의 가방을 챙기면서 나는 컴퓨터앞에 두었던 폰을 확인했다. 그녀의 부재중 전화가 몇통이나 와있었다. 나는 회사를 나서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오래 기다렸지?...”

한부장이 하필 그때 불러서 좀 늦어졌노라고, 지금 당면한 선택이 있다고 부연설명을 덧붙이려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집에서 봐.”
“뭐? 회사밑 아니야? 예약한 식당이 회사 근처야.”
“안먹기로 했어. 집에서 봐.”
“아니, 그러는 게 어딨어? 당신 또 화났어?”
“화? 그래. 화났지. 원래도 준이 학원시간이 한시간 반밖에 안돼. 그 시간동안 식당 찾아 주문하고 밥먹고 그러면 한시간이 후딱 지나고. 그러면 또 준이 학원 픽업가야 해. 오늘 학원 원장하고 면담하기로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짧은 시간에 당신이랑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눌수 있다고.”
“하…”
“게다가 전화도 안받고 이십여분을 연락두절이야. 이상황에도 내가 당신이랑 밥먹고 싶겠어?”
“넌 왜 그렇게 너밖에 모르냐? 내가 이쪽에서 무슨 상황일지 생각은 안해? 내가 일부러 늦었어?”
“어쭈? 이젠 당신도 아닌 너야? 이여자가 막나가자는 거네.”
“이여자? 당신이야말로 지금 막나가는 거야. 난 막말은 안했어.”
“지금 그걸 따져서 날 이기자고? 대체 누가 먼저 잘못한 건데?”
“무슨 남자가 그리 밴댕이 소갈딱지야?”
“허허…이게 막말 안하는 거라고? 정말로 지성과 교양을 겸하신 분이시구려. 이런 분이랑은 더이상 말 안통하니 이만 전화 끊지.”

그녀의 빈정대는 소리에 나는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극에 달하니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폭발을 했다.

“말 안통한다고? 나야말로 당신이랑 대화하는 게 지쳤어. 이기주의 극치에 상대방 입장은 전혀 고려하려 들지도 않고 독단적이고 계산적이고 편협하고 옹졸하고 …아주 지긋지긋하다.”
“뭐…뭐라고?”

저쪽에서 내 거센 반응이 당황했는지 버벅거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힘주어 말들을 내뱉었다.

“그래, 지긋지긋하다. 그러니까 우리 이혼하자.”
“뭐? 이혼?”
“응, 이혼. 이혼해. 당신과 매일 이렇게 다투면 삶을 다 갉아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평화롭고 편안한 감정을 원해. 해볕 따사롭고 마음이 풍요로운 그런 날들을 원해. 매일 이렇게 서로 원망하고 불신을 쌓아가며 사는 게 당신은 질리지도 않아?”
“…”
“다들 결혼은 왜 하는 건데?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게 아니야?난 지금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아. 그런데 이 혼인 유지할 필요가 있겠어?”
“행복…하지가 않다고.”
“당신은 행복해? 매일 나랑 티각태각 싸우는 게 당신이라고 행복하겠냐고. 그러니까 왜 이런 생활 계속해야 하는 건데. 그냥 이혼하자, 우리.”
“그래서 차대리랑 시시콜콜 우리 얘기 했었나? 행복하지가 않아서?”

이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뜬금없이 등장한 차대리 얘기에 나는 멍해졌다. 수화기 저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든 내 시선 안으로 커피숍 창문가에 자리잡은 두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거리는 떠들썩하고 사람들은 총망히 자기 갈 길을 걸어간다. 그속에 선채로 나는 멍하니 커피숍쪽을 보았다. 차대리와 그녀였다. 우연히 그녀를 만난 것이 기분 좋은지 차대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실대고 있었다. 길거리의 네온사인들이 하나 둘, 켜지고 이 도시가 밤의 시작을 알릴 무렵, 수화기 저편에서 그녀, 아니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 이혼하자.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핸드폰을 쥔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인파로 붐비는 길거리를 마주하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있었다.

……

합의이혼은 의외로 절차가 간단했다.

부부 쌍방이 자녀부양과 재산분할의 모든 내용을 숙지하고 동의하기만 한다면 하루만에도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는 내가 가지기로 하고, 집도 내가 가지기로 했다. 남편은 잠시 휴가를 갔다가 다시 이 도시로 되돌아오든가 혹은 다른 도시로 발령요구를 제출할수도 있는데 이제 그런것쯤은 내게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라면 우리가 몸이 바뀐 상태에서 이혼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지금처럼 한집에서 산다면 어떻게라도 역할분담해서 맞춰갈수 있는데 이혼하고 각자 생활을 한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칫 나는 그 사람으로, 그 사람은 나로 평생을 살아갈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건 누구도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 이 빌어먹을 체인지 주술은 언제 풀릴 건지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아낼 시간도 없이 우리는 일상생활이 주는 사소한 불편과 삶의 스트레스를 못이겨 이혼을 결심하는 것이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따져볼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미 심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이를 위해 이혼은 하되 당분간은 한집에서 살도록 결정지었다. 그러니 그 당분간은 몸이 바뀌어있는 동안이라도 이해해도 되겠다.

이혼하러 가기 전날, 준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우리는 처음으로 평온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다.

“준이에겐 당분간 비밀로 하자. 애 성장에 영향을 줄 거 같아.”

내 말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미안했다.”
“…미안은 무슨.”
“나랑 결혼해서 행복하지 못했다는 말이 좀 아프게 와닿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아직은 내가 많이 부족하나보다.”

나는 문득 손을 들어 다음 말을 이어가려는 그녀를 제지시켰다.

“우리,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
“또 잘잘못을 따지며 다툼으로 이어질가봐 두렵다.”
“…”
“준이에게서 힌트를 받은 게 있어. 저번에 공원에 갔을 때, 놀이기구 그렇게 두려우면서 왜 타냐고 내가 물어봤거든.”
“…”
“준이가 하는 대답이, 당신이 그랬대. 두려워서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
“나도 지금 똑같은 맥락이야. 이혼을 참 어렵게 결심했고, 아쉬움도 커. 다들 그럴거야. 그렇게 아쉬우면서 왜 이혼을 하냐고.”
“…”
“내 대답도 그거야. 지금 안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았거든.”
“…”
“그러니까 내가 어렵게 낸 용기, 흔들지 말아줘. 다시 생각한다 해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거야. 우리는 몸까지 바뀌었어도 서로를 배려하지 못했고 끝까지 상대방 탓만 했어. 이건 방식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사람이 문제였지.”
“…”
“언젠가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혼자 내 삶의 모든 걸 감당하면서 아, 그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 그래도 큰 의지가 되었었구나…내가 그때는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하고 통탄의 눈물 흘리는 날이 오기를…”
“…”
“정말 그런 날이 오기를 나 간절히 바라고 있어. 그때는 내가 지금보단 많이 성장해 있을테니까. 그래서 더이상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고 그래서 불만도 없는 단단한 사람으로 되어있을 테니까.”
“…”
“그때가 되면 난 진정 행복해질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당신은, 충분히 단단한 사람이야.”

그녀가 나직히 입을 열었다.

“단단하고, 자존감 높은 사람이야. 당신 만나서 결혼하고 살아오면서 나는 행복했어.”
“그렇게 이쁘게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한데…”

내가 빙그레 웃자 그녀도 울적하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건, 나 혼자 행복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내 행복이 당신 불행을 기초로 한거라면 더욱 더.”
“아니 뭐 꼭…행복하지 않았다는 게 불행했다는 말은 아니고…”

내가 작게 궁시렁거렸고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나도 나름 노력하느라 했는데, 그게 당신 기대치에 못미쳤을수도 있고. 그래서 이번 체인지 나도 나쁘지 않았어. 집안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당신 말대로 내가 바라는 아내역할을 완벽하게 경험하고 싶었는데…”
“…”
“단,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어.”
“…”
“바로 사회구성원으로서 남자로서, 내 자존감이 이런 집안일에 조금씩 소실되는 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야. 그것이 불만으로 이어지고 다툼이 된거 같아.”
“종합해보면 그놈의 집안일이 문제네. 보통 주부들 노력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못받으니 말이야.”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수긍하듯 말했다. 그녀가 나지막히 웃었다.

“이번 체인지에서 내가 얻은 것이, 이젠 티비에서 주부들 프로그램이 나오면 폭풍공감을 하게 되고, 누가 주부들 하는 일 없다고 비하하는 댓글 보면 비추 엄청 누르게 되고. 정말 나 이러다 주부들 대변인 되는 건가. 전에는 왜 당신 힘든 걸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을까.”
“사실 이건 성별의 문제도 아니야. 요즘 맞벌이 부부도 많도 여자가 나가서 일하는 집도 많아. 하지만 매일 집에서 윤기도는 살림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바깥에서 도는 사람들은 알수가 없지. 거기에 육아까지 겹치면…나부터도 애를 재우는데 그리 몇시간씩 진이 빠진 다는 걸 우리 준이 태어나서야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부부 어느 한쪽이나 가족들, 주위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면 그 스트레스가 배로 되지. 우리 스스로 조율했어야 하는데 그 경험과 지혜가 부족했어.”
“뭐 이러고 경험 쌓는 거지. 이래야 다음 결혼생활 지금보다 잘할 거 아닌가.”
“…”
“어쩌면 우린 처음부터 잘못 만났는지도…당신은 한부장이 더 어울리고…아, 그렇지만 나는 차대리는 별로인데…”

분위기를 바꾸려고 짐짓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조용해졌다. 나는 뭔가 화제를 바꾸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정체모를 액체가 입가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젠장…살짝 짜거운 것을 보아하니 눈물이다. 아직도 명색이 남자인데 이혼한다고 눈물을 흘리다니…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그들먹히 차올랐다. 그다음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내 머리를 품속에 껴안았다…

이튿날, 민정국으로 가려고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우선 아이를 깨우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준이가 언제 일어났는지 침대에 앉아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준이는 얼굴에 배시시 웃음을 떠올리며 물었다.

“오늘은 왜 엄마가 날 깨워?”
“응,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뭐, 엄마?”

나는 후닥닥 나가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에 윤기도는 입술…그렇다, 내가 돌아왔다. 아니, 나로 돌아왔다.

발렌타인데이의 체인지 주술이 풀렸다.

……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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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243.♡.150) - 2023/03/19 03:32:57

어마나..드디여 자기 몸으로 돌아왓네요..설마 이혼은 안하겟죠..바뀐 몸으로 살아봣으니 서로의 입장을 잘 알거 같은데..제발 해피엔딩이엿으면 좋겟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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