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49회) 그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
그날 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계속 달려드는 하정을 떼어낸 건 권기혁이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간 그나마 참고 있던 이성이 깨질 거 같았으니.
“윤하정 씨. 그만 가시죠.”
하정을 일으켜 세우며 기혁이도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어.”
휘청거리는 하정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안 가. 대표님이랑 같이 있을 거야.”
꼬꾸라질 가봐 양어깨를 꽉 잡았고 입을 삐쭉 거리는 하정을 마주한 기혁은 그녀를 들여다보다 올라간 입매와 함께 헛웃음을 쳤다.
“그런 위험한 발언은 남자 앞에서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커다란 등을 돌려 그녀를 가볍게 업었다.
“저를 꽉 잡아요. 떨어지지 않게.”
그러자 하정은 금세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등에 찰싹 붙었다. 머리는 기혁의 어깨에 기댔고 옅은 숨이 그의 목덜미를 들쑥날쑥 간지럽혔다.
그러다 벌떡 고개를 쳐들며 움직이는 하정 때문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하기도 하면서.
”꼭 잡아요. 떨어지면 병원 가야 됩니다.“
“떨어지면 다쳐요?”
“다치죠.”
술을 못 깬 하정은 마치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기혁이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다치면 병원에 데려다줄 거예요?“
유치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네. 다친다면 저 때문도 있을 거니깐요.“
”진짜요?“
”네.“
술김에 하는 소리를 무시해도 될 법한데 기혁은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좋은 사람이네.“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나온 그 한마디에 기혁은 픽 하고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번쩍 쳐들었던 머리가 또다시 기혁의 어깨에 닿았다.
”대표님.“
”네.“
”저 대표님 좋아해요.“
”…“
갑작스러운 고백으로 기혁은 처음으로 대꾸를 안 했다.
”좋아한다니깐요? 대표님을요.“
대답할 때까지 말할 참인지 하정은 또 한 번 각인을 시켜주었다.
”대표님? 대표님??“
”네. 압니다.“
”와!“
하정의 감탄사가 들렸다.
”왜 그럽니까?“
”어떻게 알지? 내가 대표님을 좋아한다는 거요.“
”허,“
그의 너털웃음이 들렸다.
”비밀이었거든요. 저만의 비밀. 상대방이 아는 게 두렵기도 하고.“
그러기엔 너무 티를 많이 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혁은 고주망태인 하정에게 질문을 했다.
”왜 두려워요?“
”저 어릴 때 좀 아팠어요. 제가 부모님의 죽은 아들한테 질투가 나서 집에 방화도 했었어요. 저 누군가를 좋아하고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무서워져요. 대표님도 저한테서 떨어져야 해요. 다칠 수 있거든요.“
아주 가볍게,
그저 남의 이야기를 하 듯 흘러버린 하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하정 씨가 안 무서워요.“
기혁의 차분한 한마디가 하정의 귀에 쏙 들어왔다.
”제가 안 무섭다고요?“
”네.“
”진짜요?“
”네.“
누구도 없는 이 작은 골목길에 무궁무진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오는 하정과 진지하게 답을 하는 기혁이만 있었다.
아까까지 보이던 택시는 정작 잡으려고 하니 없다. 그렇게 하정을 업은 채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요. 날 안 무서워하다니…. 그분들은 내가 참 많이 무서웠을 거예요. 근데도 놓아주지 못했던 건 내가 미성년자라서겠죠. 교육자 집안이라 차마 내칠 수는 없었나 봐요. 그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준 거 보면 괜찮은 분들이에요. 책임감 하나는 진짜 대단한 거죠.“
”많이 힘들었겠어요.“
”네. 그분들이 많이 힘들어했죠.“
”아니, 하정 씨가 힘들었겠어요.“
”…“
이번엔 어쩌다가 하정이가 조용했다.
그대로 자나 싶어서 그냥 걷던 기혁이가 조용한 동네를 훑어보다가 입을 천천히 떼었다.
“저는 윤하정 씨 당신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잠이 든 하정이가 그의 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중얼거리며 대꾸했다.
“저도… 좋아해요.”
…
“가자.”
화장실을 다녀온 정연이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하정을 향해 말했다.
“윤하정?”
꿈쩍을 안 하는 하정을 향해 한 번 더 불렀다.
넋이 나간 하정이가 드디어 정연의 부름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정연아.”
시선은 정연에게 맞춰졌다.
“대표님…”
그 사람이 하정의 입에 올라오자 정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표님이 날 좋아한다고 했었어.“
“어?”
혼이 나간 듯한 무표정에 뱉는 하정의 말에 정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하정아.”
그래서 물었다. 잘못 들었기를 바라면서.
”분명히 그랬어.“
하정의 표정이 밝아지며 정연의 앞에 성큼 다가갔다.
”여기서 술 마신 날 나한테 분명히 그랬다고.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그랬었어.“
신나서 얘기하는 하정의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정연은 웃을 수가 없었다.
“나 대표님 보고 싶어. 봐야 할 거 같아. 정연아.”
들뜬 하정이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고 있었다.
“맞다. 나 대표님 번호가 없지. 이 실장님한테 물어봐야겠다. 대표님 번호 알려달라고.“
꾹꾹 버튼을 누르는 하정의 손을 막은 건 정연이었다.
해맑은 하정이가 마주한 정연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있었다.
또 저 표정이다. 왜인지 요즘 정연의 저 표정이 자주 등장을 한다.
뭐랄까,
측은하게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 마.”
낮은 음성이 하정의 귓속을 찌르 듯이 스며들어왔다.
“뭐?”
“대표님한테 연락을 하지 말라고.”
“왜?”
궁금했다. 그리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있는 자신을 권대표랑 엮어주겠다고 홍콩까지 데리고 간 건 정연이었다.
근데,
왜 저런 얼굴을 하고서 그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는지.
“미안해. 하정아. 너를 홍콩으로 데려간 건 내 실수였어.”
정연의 표정이 한없이 슬퍼 보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라 내가 실수를 했어.”
“지금은 뭘 알고 있는데?”
불안하다. 그러나 이 답답한 가슴은 왠지 정연이가 입을 열기만 하면 풀릴 거 같았다.
“그게….”
역시나 정연은 망설이며 말을 아끼려고 한다.
“안 알려줄 거면 그냥 대표님을 찾아갈 거야.”
하정이가 정연의 손에 쥐어져있는 제 폰을 뺏고는 가게 앞을 벗어나려고 했다.
“대표님은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대.”
등 뒤에서 급하게 뱉는 정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정은 뒤돌아서지 않았다.
“… 알아.”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닐 거야. 네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어.”
정연의 애타는 말을 들은 하정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서 정연과 마주했다.
“결혼을 한 게 아니잖아. 좋아하는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가 있어.”
확고한 목소리, 단호한 눈빛.
정연이가 읽어낸 하정의 표정은 기어이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아있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대표님은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 그냥 네가 그 사람이랑 하도 많이 닮아서 잠깐 관심이 생겼을 뿐일 거야.”
“뭐?”
정연이의 어두운 얼굴에서 강렬한 부정의 뜻이 흩어져 나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연은 며칠째 이상했다.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정연이가 자신만 모르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안다.
“그게… 그냥 서울이 어때? 잘 생기고 키도 큰 데다 제일 중요한 건 널 엄청 좋아하잖아. 걔 눈에 너밖에 없어. 그리고 나이도 어리고!”
하…
말도 안 되게 이 상황에 정연은 서울을 입에 올렸다. 잇새로 한숨이 빠져나왔다.
“오정연. 너 대체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
”응?“
내리깐 음성에 하정의 눈빛은 날 섰다.
정연은 쭈볏거리면서 말을 아끼려고 들었다.
그날,
이한의 차 안에서 들었던 그 말은 직접 들은 정연이도 믿기 힘들었으니까.
[정연 씨.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표님이 하정 씨를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좋아하는 게 아니래요?]
뜸을 들이다 하는 이한의 그 얘기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권기혁 대표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루머는 꽤 많아서 너무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상대가 하정의 쌍둥이 언니라는 건 진짜 말이 안 된다 생각을 했다.
하정이랑 똑같은 그 얼굴을 보고 왔다는 이한의 말도 잠깐 의심을 했다.
[대표님이 저한테 일단 강은서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안 할 수가 없어서 하는 거예요.]
이한은 정연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조용히 있어주길 바랐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안 하게.
그러나 이한은 나와 하정은 어느 정도의 친
구인지 잘 모르는 거 같다.
14살 그때,
내 생일 파티에 참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하정이가 방화를 하고 한동안 심리치료를 받았다는 건 나중에야 하정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학교에선 거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몇 개월 후 갑자기 이사를 가버렸으니 하정에 대해 궁금해도 찾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우린 다시 만날 운명이었을까,
얼마 안 가 우리 역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동네 슈퍼에서 익숙한 그 얼굴을 다시 마주했을 땐 꿈을 꾸는 거 같았다.
[어?? 오정연!]
[윤하정?]
그렇게 우린 다시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정이랑 친했지만 하정에 대해서 아는 게 사실 별로 없었다. 엄마 아빠가 바쁘셔서 파티를 안 한다고 했었고 제 가정사를 그리 세세히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하정은 나한테 참았던 비밀이라도 터뜨리 듯 다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알았다.
반 친구들 누구나 흔하게 하는 생일파티는 왜 하정한테만 단 한 번도 없었는지.
위로해 주는 것밖에 바꿀 수 있는 현실은 없었다.
우린 어렸고, 여렸으니까.
[친부모님은 기억이 안 나?]
어느 한 번 놀이터에서 하정이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저을 뿐 하정은 말이 없었다.
괜히 예민한 문제를 꺼낸 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려는데 하정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를 버린 사람들 알고 싶지 않아. 난 지금 나를 키워주신 그분들이 내 전부야. 난 그분들 사랑해.]
하정이가 그리 사랑받고 싶어 하던 그분들이 만일 친부모님이었다면 하정은 그렇게 목매지는 않았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얼마나 불안했을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분들이 저를 언제라도 내칠 가봐 얼마나 방황을 했을까 싶었다.
‘널 잃어버린 게 아니었을까’ 라는 위로에 하정은 그냥 웃었더랬지.
그런 쓸데없는 거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이란 틀이 중요했던 하정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니…
마땅히 기뻐야 할 상황은 맞는 건데,
[그럼 대표님은 처음부터 하정이가 그 사람 동생이라는 걸 알면서 만난 거예요?]
[… 네. 눈여겨보다가 관심이 생긴 건 맞는 거 같은데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 하정 씨 언니인데 잠깐 생긴 관심 따위는 떨쳐내겠죠. 문제는 하정 씨가 그 마음을 쉽게 접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권기혁이 제 쌍둥이 언니인 강은서와 그런 사이라는 걸 아는 순간, 하정이가 그 사실을 알 게 된다면 어떨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친자매가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뻐할지, 아니면 권기혁과의 짧았던 관심들은 제 언니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그냥 덤덤하게 지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며칠 내내 말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다가 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접은 후에 그 사실들을 알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하정은 갑자기 권기혁이 자신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었다면서 그한테 가려고 한다.
기대에 부푼 저 밝은 모습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지만 정연은 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은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하정아.”
정연이가 머릿속을 정리하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는 하정을 불렀다.
“대표님이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
하정의 미간이 좁혀지고 두 눈이 가늘어져갔다.
“누군데?”
하정은 그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내가 알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적어도 내 주위에는.
“강은서라고,”
정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아야만 했다.
“네가 모르고 있던 너의 쌍둥이 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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