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18회)
다시 재연해 봐야겠어.
조금 늦은 저녁, 정원에 좀 나가 산책해 볼까 싶어서 1층으로 내려왔다가 다이닝 룸에 조명이 켜진 걸 발견하고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혹시 이 여자는 하루 종일 굶은 채로 있었던 걸까?
정말 맛있게 생선을 통째로 다 씹어삼킬 기세로 가시를 쪽쪽 빨고 있는 채이를 보며 참 희한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을 그릇째로 드링킹하고 반찬들을 청소기처럼 거의 다 흡입을 하고 있었다.
한채이가 원래 저렇게 잘 먹었나?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나갔다.
그래, 5년이나 지났지만 생생하게 기억에 떠올랐다. 이 여자는 먹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처럼 맛있다고 느껴지는 음식이면 목숨을 걸고 먹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녀가 상체를 의자에 기댄 채 귀엽게 솟아오른 배를 어루만지는 걸 마지막으로 유하는 머리를 저으며 별채 밖으로 나갔다.
집주인 밥을 고용인이 다 처먹고 난리네. 그것도 너무나 맛있게.
배어 나오는 웃음은 참지 못했다.
길지 않은 산책이 끝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운지는 꽤 되었다. 잠이 안 왔다. 그놈의 불면증.
정말 가지가지도 하지. 잠도 안 와, 밥도 목구멍에 안 들어가, 그러고도 살아 있는 자신이 대단했다. 몸을 뒤적거리다 그래도 물은 마셔야겠다 싶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밥을 다 먹었으면 조명은 꺼야지. 아무리 여기가 전기 요금을 납부 못 할 정도로 가난한 집은 아니지만 누구도 없는 다이닝 룸에 여태껏 조명이 켜져 있다는 건 에너지 낭비…,
혼자 쯧 하며 다이닝 룸에 가까이 다가가니 유리창으로 통해 그 안에 또 한채이가 있는 걸 발견했다.
1층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또 1층에 다이닝 룸만 있는 것도 아닌데 오늘 두 번이나 여기서 한채이를 보다니, 아이러니했다.
잘그랑-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컵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며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움직이려는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
일단 실내화도 안 신고 맨발로 서 있는 저 여자를 사고 현장에서 안전하게 빼와야 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서 있는 자세가 왠지 이상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예감이 들 찰나,
[한채이!]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 파편들 위로 한채이는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실내화가 벗겨지도록 뛰어갔고 이 여자가 내 몸에 힘없이 쓰러지는 순간의 충격과 절대 바닥에 쓰러지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잡다가 내 무릎을 바닥에 찧고 말았다.
살을 파고드는 유리 파편들이 따가웠다. 그러나 그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이 여자의 몸은 왜 이렇게도 뜨거운지 그게 먼저 신경 쓰였다.
하아, 지독한 몸살이었다. 주치의를 불렀다. 발바닥과 무릎에 박힌 유리 파편을 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한채이 너한테 제대로 스타트도 하지 않았는데. 나약하게 쓰러지면 안 되지. 너한테는 지옥이 될, 이제 나한테는 재미있을 날들의 시작인데. 넌 이렇게 쉽게 쓰러지면 안 되지.
주치의가 그녀에게 링거를 꽂아주고 약도 주고 나서 내 몸에 박힌 파편을 빼달라고 했다. 미리 유리 파편이 꽂혔단 얘기를 해서 여러 장비들을 챙겨온 주치의는 무릎에 깊은 상처는 몇 바늘 꿰매주고 돌아갔다.
동이 트고 아침이 되어서는 홍 여사한테 메이드와 함께 주방을 치워달라고 했다. 홍 여사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얘기는 해주어야 할 거 같아서 내가 부주의로 컵을 떨구고 다쳤다고 했다.
홍 여사는 메이드와 함께 묵묵히 그 모든 걸 다 치우고 본채로 돌아갔다. 채이가 아프단 건 다이닝 룸을 치워달라고 할 때 미리 얘기해 주었다. 몸살로 누워있다고.
아프면서도 조용하는 법이 없지. 이 여자는.
덥다, 춥다를 시전하더니 목이 마르다고 물을 내놓으라고 앓는 소리를 내는데 듣고도 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이 여자가 정신이 말짱할 때 더 큰 대미지를 주려고 하는 거니까 참았다.
더워하면 에어컨을 틀어주고 추워하면 껐다. 근데도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아니면 얇은 여름 이불이 추운 건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두꺼운 이불을 찾아 덮어주었다.
[고마워, 수호 오빠.]
동그랗게 폭 패어 들어가는 보조개를 보여주고, 살살 웃으면서 눈도 안 뜬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을 듣고 그 방에서 나와버렸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두꺼운 이불이라 또 더워 미쳐할 건데. 주삿바늘도 뽑을 때 된 거 같고.
홍 여사한테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한채이 역시 고용인으로 들어온 이상 그들한테 부탁하기엔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나 방에 다시 들어가 보니 한채이가 덥다고 발로 차버린 건지 이불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놀랍게도 커다란 눈을 뜨고 있길래 정신이 드는 줄 알았더니 물을 달라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눈을 감아버린 한채이.
사주에도 없을 병간호를 제대로 했다.
저녁이 거의 다 되어가자 홍 여사한테 기력을 보충할 죽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죽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홍 여사는 알고 있겠지. 누구를 먹이려고 하는지.
홍 여사는 이 저택에서 일을 한 지 10년은 넘은 사람이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적인지 아우인지 알 수가 없어서 거리를 두면서도, 이 집에서 가장 익숙한 사람 중의 한 명이라 그녀한테 그나마 얘기를 하곤 했다.
홍 여사에 의해 전복을 잔뜩 넣은 맛깔스러운 죽이 금방 별채로 들어왔다. 홍 여사는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되었는지 반찬을 접시에 옮겼고 전복죽은 대접 두 개에 나누었다. 난 입맛은 여전히 없었으니 홍 여사가 가고 나서 두개로 나누어져 있던 죽을 대접 하나에 모아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한채이가 절로 깨어났다. 무슨 일인지도 몰라 어리둥절한 그녀를 보니 하루 종일 나를 시중을 들게 하고 부려먹은 자체를 모르는 거 같다.
그래,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괜히 미안한답시고 너른 이 공간에서 나랑 안 마주치려고 숨바꼭질이라도 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제 앞에 앉아 빤히 쳐다보는데도 이 여자는 그렇게 입맛이 도는지 내가 안중에도 없는 듯 허겁지겁 전복죽을 먹기 시작했다. 하긴, 밥심으로 사는 네가 하루 종일 아파서 먹은 거라곤 물 밖에 없었으니.
문득, 너무 맛있게 먹는 이 여자를 보고 있으니 나도 한 입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더 있으면 정말 이 여자의 밥그릇을 빼앗을지 모르니까. 차라리 홍 여사 보고 죽이 남은 게 있나 물어보는 게 덜 창피하게 느껴졌다.
다사다난한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밤잠을 일찍 드는 거 같더니 아침 일찍이도 기상한 이 여자는 혼자 뒤뜰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지. 그나마 몸 상태가 좋아 보여서, 딱 하루만 지독하게 아프고 다 나은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날 아침 유하는 회사에 갈 일이 생겼다. 미국 지사에서 팩스로 보내온 서류에 문제가 있었다. 본사에 직접 가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 한채이가
정말 괜찮아진 건지 직접 물어볼 기회도 없이 나와 버렸다.
한채이가 저보고 마시라고 준 딸기우유를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한채이는 정말 자신을 다 잊은 건지,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한채이는 그것밖에 안 되는 여자였을까.
유하는 궁금한 게 많았다.
너한테 정말 묻고 싶어. 될 수만 있다면.
유하는 오후 늦게야 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 메이드들이 본채 테라스에서 커튼을 비롯한 여러 대형 빨래들을 걷는 걸 보고는 오늘이 대청소를 하는 날이라는 걸 알았다.
그 작은 키로 커다란 커튼을 낑낑대며 돌돌 말아 안으로 들어가는 채이의 모습도 보였다.
미운 이 여자를 보니 가슴 안쪽이 저려왔다.
저런 일을 하라고 데리고 온 건 아닌데, 어제까지 몸살로 정신을 못 차리던 여자라서 아주 살짝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걱정은 금방 저버렸다.
기운이 넘치니까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웃어댄 거겠지.
한채이가 아프든 말든, 죽지만 않으면 될 거 아냐. 죽으면 너무 쉬우니까. 죽지만 않으면 어떤 식으로 힘들던 그건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하루 종일 목을 쪼이던 타이를 거칠게 풀어 젖히며 유하는 계단을 밟았다.
…
복도의 끝방에서 여전히 사진을 손에 꼭 쥔 채이가 혼자 중얼거리기에 바빴다.
“아저씨, 저에게 힘을 주세요. 여기서 무사히 3 개월을 버티고 나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물론 저의 사명을 잊으면 안 되겠지만…,
사실 전 그가 원하는 대로 도울 수가 없어요. 전 전무님이 찾는 한채이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저를 무조건 미워하지는 마세요. 전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돈은 필요하지, 언니는 살려야지.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전무님 밖에 없었어요. 제 주변에 전무님보다 돈 많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건 정말이에요.
나쁜 마음은 절대 안 먹습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왜냐면 저는 내년에 곧 결혼할 남자친구가 있거든요. 한마디로 저는 예. 비. 신. 부라는 거죠. 그러니 아드님 곁에 돈 없고 백 없는 여자가 죽은 한채이인 척 들러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저 3 개월만 지나면 이 저택? 아니, 전무님 앞? 평생 안 나타납니다. 약속~~~“
우아 아암~~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며 약지까지 꺼내들어 사진 속의 강진욱과 약속을 걸던 채이의 두 눈꺼풀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졌다.
저 이제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채이는 사진을 손에 꼭 쥔 채, 그대로 꿈나라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네?]
커다란 두 눈망울이 여지없이 흔들렸다.
[여기 앉으라고.]
유하는 느른한 어투였지만 흔들림 없었고 건조했다. 강유하는 혼자 식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왜 앉으라고 하는 거지? 채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져갔다.
아침 일찍 본채에 가서 주방 일을 돕고 온 채이가 홍 여사가 오늘도 정성껏 준비해 준 반찬을 접시에 곱게 덜어놓고 있었다. 그때 유하가 다이닝 룸에 들어왔다. 매일 똑같은 자리이기도 하고 반찬이 준비되어 있는 그 앞 의자에 가서 앉은 유하가 아침 반찬을 훑다가 자연스레 채이의 얼굴에 시선이 갔다.
한채이가 여기서 한 번도 화장을 하는 걸 못 봤었는데 아치형의 눈썹을 그렸고 워낙에도 긴 속눈썹을 더 돋보이게 마스카라를 했다. 입술엔, 진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옅은 색상의 립스틱을 발랐다.
”어디 가?“
유하는 오늘 채이가 쉬는 날이란 걸 잊고 있었다.
“저 오늘 쉬는 날이라서요. 내일 아침 일찍 올게요.”
채이가 유하의 앞에 마지막 반찬을 살짝 밀어놓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저 때문에 다쳤다면서요. 어때요? 많이 다쳤어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채이가 미간에 힘을 주며 유하를 살폈다.
"괜찮아."
짧디짧게 툭 뱉은 유하의 답에 채이는 더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아버렸다.
채이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조용히 나가려고 했다.
나가려던 채이를 불러 세운 건 유하였다.
”같이 먹자.“
”네?“
채이의 고개가 돌아갔고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놀라서 벌어져있었다.
”여기 앉으라고.”
채이의 눈동자가 허공에 잠깐 머물렀다. 그냥 나가기엔 그의 태도가 강경해 보여서 채이는 어색한 자세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저…, 어차피 나가야 하고 저는 밖에서 먹을 거라…”
”한채이.“
채이 말을 무심히 끊은 유하가 그녀를 응시하며 불렀다.
“내가 찾으려는 기억이 무엇인지 알아?“
”네.“
”뭔데?“
”중요한 서류를 어디에 두었는지 잊었다고…”
어리둥절한 채이를 앞에 두고 유하가 크게 웃었다.
“그래,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겠지.”
“그럼 다른 이유도 있는 거예요?”
무방비하게 한껏 빛을 내는 그녀의 눈동자를 오롯이 담았던 유하가 고개를 딴 데로 돌려버렸다.
“내가 너를 왜 그렇게 좋아했었는지 궁금했어. 머릿속에 너랑 즐거웠던 날들이 넘치는데 지금의 너는 그걸 잊은 거 같아서 마음이 아프고.“
하던 말을 멈춘 유하가 다시 채이에게 고개를 틀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침부터 절절한 말을 뱉는 유하에 채이는 건조한 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유하에게 미안하지만 채이는 동명이인인 다른 여자라서 그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채이의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에 유하가 피식 웃으며 입매를 올렸다.
”맞아. 많이 흘렀지. 그래서 너한테 딱 한 가지만 바래. 옛날에 우리가 좋았던 그 순간들을 다시 재연해 봐야겠어. 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생각보다 잊었던 기억을 금방 찾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넌 여기서 3 개월을 버틸 필요도 없을 거야.“
기분이 이상해진 채이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을 때였다.
식탁 위로 커다란 몸이 불쑥 다가오며 채이의 하얀 목덜미를 그러쥔 채 저에게로 당겼다.
이채가 돈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