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20회) 맛있네.
소은은 채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에서 사용하던 딸기 패턴의 이불을 바리바리 싸는 걸 보고 거기엔 이불도 없냐고 잔소리를 했다.
하남동 저택 채이 방에 있는 이불은 당연히 안 좋아서가 아니었다. 시원하면서도 몸에 사르르 녹는 느낌으로 채이가 덮었던 이불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그러나 낯선 곳이라서 그런가, 잠을 잘 자는 채이인데도 자꾸 밤잠이 불안했다. 애착이 강한 이 딸기 패턴의 이불을 챙겨가면 왠지 그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일 가지, 왜 오늘 이 늦은 밤에 꼭 가려고 하는데?”
“아, 그게…”
소은이 집 아래까지 나오면서 채이를 걱정했다. 혹시 배운 집안, 있는 집안이라고 쉬는 날도 제대로 못 쉬게 하며 마음 약한 채이한테 갑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그, 있잖아. 변호사님이 아침 일찍 지방으로 출장 가셔야 한다고 해서, 내가 아침 준비를 해야 하거든.“
”응? 주방 이모 계신다며.“
”응. 계시는데…. 너무 빠른 시간대라고 나보고 준비하라네.“
소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질이 맞네. 채이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그냥 막 부려먹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채이야. 넌 청소담당 아니었어? 그 외 다른 업무를, 그것도 쉬어야 하는 시간까지 반납하면서 하라고 하면 그건 이상한 거야. 네가 할 일이 아니잖아.“
소은이 화가 나 언성을 높이자 채이가 얼른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언니, 걱정 마. 나 어디에 가서 막 당하고 살지는 않아. 그리고 이럴 때는 수당을 더 쳐준다고 해서 하는 거야.”
거짓말을 했다.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질 테지만 돌이킬 수도, 이제 와서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3개월을 견디면 2억이란 거액의 빚이 변제된다. 너무나 혹 하는 조건이었다. 3개월에 2억은 한 달에 7천만에 육박하는 큰돈이다. 그렇게 큰돈이 걸렸는데 3개월 내내 휴일이 없다고 해도 채이는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바닥에 닿도록 굽혀야 했다.
“걱정하지 마. 언니.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나 이제 어린애 아니잖아.”
채이는 걱정 가득 서린 얼굴을 한 소은과 짧은 작별 인사를 하고 마침 도착한 콜택시에 얼른 올라탔다.
이미 11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 채이도 원래는 내일 아침 일찍 하남동으로 들어가려 했다. 별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던 채이에게 유하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언제 와?]
채이는 다이닝 룸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놓고 저를 별일 없는 듯이 대하는 유하가 조금 괘씸했다.
[내일 아침이요.]
퉁명스레 뱉은 말투에서 ’나 아직 화났다.‘를 분명하게 표출했다.
[흠,]
뭔가 고민하는 듯한 그의 반응에 채이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건가?
[오늘 밤 돌아와야겠는데? 아니면 내일 아주 일찍 와야 해서.]
느긋하게 흘린 유하의 음성이 채이 귓가를 스쳤다.
[왜요?]
[아침 일찍 지방에 가야 하는 일정이 있어. 아침밥을 꼭 먹고 가고 싶은데.]
[몇 시에 출발해요?]
제법 난처한 표정의 유하에 채이도 덩달아 기분이 묘했다.
[4시?]
허공에 눈동자를 굴리던 유하가 기다란 손가락 네 개를 채이 앞에 펼쳤다.
[간단하게 먹고 갈 거라 여사님을 깨우긴 좀 그래서. 네가 차려주면 안 될까?]
또 그런 표정이었다.
너 아니면 안 될 거 같다는 식의 가련한 표정과 또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든 적이 전혀 없는 오만함의 경계라고 해야 할까, 내가 이렇게까지 너를 필요로 하는데 내 부탁을 거절하기라도 할 거야? 2억이라는 거액의 빚을 변제해주는데?라고 채근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수호를 단박에 거절해야 했다. 서운해하는 눈치를 보았음에도 채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은한테 얘기한 거랑 똑같이 아침 일찍 출장을 나가는 고용주의 밥을 차려야 한다고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근데, 아침에 어떤 걸 드시고 싶으세요?]
그의 요구에 응한 채이가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던 유하에게 물었다.
[뭐 하고 싶은데?]
느른한 눈동자가 채이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장난하지 말고요.]
채이가 큼, 하고 경고를 날리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유하가 잠시 고민하는 거 같더니 입술을 떼었다.
[오므라이스.]
태연한 자세와 옅게 올라간 입매가 조화를 이루며 유하는 그 모든 게 여유로웠다.
***
“으으~~~”
알람 소리에 달콤한 잠에서 깬 채이가 여전히 졸린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빼꼼 쳐든 눈꺼풀 아래로 밤새 꼭 끌어안고 잤던 애착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채이가 좋아하는 딸기 패턴이 가득 박힌 얇은 이불이었다. 자기 볼에 보들보들한 이불을 마구 비비던 채이가 유하의 아침밥을 준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꼼지락거리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인기척이 있나 귀를 기울였다. 집안이 워낙 커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강유하는 아직 꿈나라에 있는 건지 2층 쪽은 조용했다.
깨워 줄 필요는 없는 거겠지?
한 번 더 2층을 흘깃 쳐다보던 채이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본채에서 만든 음식을 챙겨와서 접시에 옮기고 나면 설거지는 채이가 했던지라 별채 주방에 뭐가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던 그녀였다. 냉장고에는 생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오므라이스를…,
“어?”
기대를 안 하고 열었던 냉장고 문이었지만 채이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잠깐 굳었다.
“이게 다 뭐야~?”
혼자 중얼거리며 가득 찬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분명히 어제 아침 나갈 때까지만 해도 생수밖에 없던 냉장고였는데.
일단 오므라이스에 필요한 달걀을 포함한 여러 재료들이 대충 눈으로 보였다.
이러면 양념들도 있는 걸까?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보았다.
“와,”
역시 채이 생각한 것과 같았다. 재료 외에 각종 양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근데….“
감탄사를 남발하던 채이가 우뚝 얼굴 표정을 굳혔다.
내가 한 오므라이스를 한 번 먹겠다고 이렇게 준비를 했다고? 자세히 훑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번 해 먹자고 그러기엔 냉장고 안에 별의별 게 다 있었는데.
머리를 갸우뚱하던 채이가 텅텅 비어 있던 이 드넓은 주방에 또 뭐가 더 채워졌는지 빌트인 장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았다.
“어? 쌀이다.”
주방에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던 주방에 이것저것 채워진 것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떴다.
채이는 이 집에서 처음 보는 심플한 앞치마를 자연스레 두르고 본격적으로 요리하기에 나섰다.
오므라이스에 들어가는 밥은 고슬고슬해야 해서 평소 하던 것보다 물을 적게 넣었다. 이 집에서 처음 사용해 보는 전기밥솥이지만 뭐 밥하는 기구가 다 똑같겠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 물을 맞췄다.
냉장고 안에서 감자, 양파, 당근, 호박 그리고 투 플러스 한우고기를 꺼냈다. 너무나도 신선해 보이는 한우고기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오므라이스를 할 때
보통은 스팸을 넣는데 채이는 야채를 볶을 때 스팸 대신 고기를 넣었다. 씹히는 게 좋은 채이는 고기를 너무 작지 않게 썰고 조리대 위에 대기시켰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달구었다.
고기 순으로 시작해서 야채들을 넣어 간을 하며 볶아주었다. 풀어놓았던 계란을 다른 프라이팬에 곱게 펴서 지단도 만들었다. 그 위에 볶은 밥을 올리고 뒤집으며 이불을 감싸 듯이 지단으로 돌돌 말았다.
소스를 만들어야 했다. 보통은 흔히들 알고 있는 시큼한 맛이 강한 케첩으로 하는데 채이표 오므라이스 소스는 청양고추가 들어가는 매운 간장 소스였다.
강유하는 케첩으로 먹으려나,
채이는 저도 아침을 이걸로 때우려고 강유하가 혼자 먹을 양보다 많이 했다. 소스는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케첩으로 만든 일반적인 소스, 또 하나는 저 자신만의 입맛으로 만든 간장 소스였다. 빌트인 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길쭉하고 세련된 그릇을 꺼낸 채이가 완성된 오므라이스를 접시로 옮겼다.
완벽해.
오늘따라 지단이 주름 하나 안 가고 정말 곱게 펴졌다. 케첩 소스를 위에 뿌려주고 유하가 먹을 접시는 옆으로 놓고 저 자신이 먹을 오므라이스를 다른 접시에 담았다. 그 위에는 간장 소스를 조금 뿌려줬다.
이제 일어났으려나?
일단 다이닝 룸에 갖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채이가 몸을 돌려 발을 떼려고 했을 때였다.
“으앗!!”
깜짝 놀란 채이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그대로 바닥에 떨굴 뻔했다. 언제부터 주방 입구에 그러고 서있었을지 모를 유하가 문에 기댄 채 채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인기척도 없이….”
정말 심장이 고장 날 것 같았다. 좀 인기척을 내고 다니라고!! 속으로 몇 번을 외친 채이였다.
채이 심장이 여전히 크게 벌렁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하는 주방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채이 앞에 멈춰 서더니 케첩 소스가 뿌려져 있는 오므라이스에 시선을 박았다.
“저만의 방식대로 했는데, 맛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채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맛에 대한 자부심은 있는지 턱을 올려들었다. 그런 채이의 얼굴을 살피던 유하가 피식 웃었다.
턱을 올리며 가까이서 마주친 유하의 얼굴을 찬찬히 볼 수가 있었던 채이는 그와 몇 초 마주쳤던 시선을 내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바짝 말리지 않은 유하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고여있었다. 느릿하게 감았다 올리는 시원한 눈매는 채이가 더 이상 그를 이대로 직시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고용주와 고용인, 강유하와 채이는 딱 그런 사이인데 편안한 옷차림으로 갓 씻고 내려온 유하와 마주하고 있는데 왜인지 그와 동거를 하는 커플이 된 느낌이 들었다.
미쳤네. 한채이.
결정적으로 미쳤다고 느낀 건 갓 씻고 내려온 유하의 몸에서 좋은 향이 났다. 향수 냄새가 아닌 보디워시 향이었는데 강하지도 않고 은은하면서 채이가 정말 좋아할 만한 향이라 자꾸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난 그거 말고, 저걸로 줘.”
유하를 피해 몸을 돌리던 채이에게 그가 눈짓으로 아직 조리대 위에 있는 채이 몫의 오므라이스를 가리켰다.
“저건 제가 먹으려고 한 거라 소스가 매운데…“
“응, 바꿔서 먹어. 두 개 다 갖고 와.“
채이 말을 끊어먹은 유하가 은은한 향만 남기고 저는 주방에서 빠져나갔다.
난 케첩 소스 안 좋아하는데,
구시렁대며 채이가 그의 말대로 접시 두 개를 다 챙겨서 다이닝룸으로 갔다.
“정말 이거 드시려고요? 청양고추를 넣어서 생각보다 많이 매울 거예요.”
“괜찮아, 나 매운 거 잘 먹어.”
채이의 우려에도 유하는 그녀가 아직 식탁에 내려놓지도 않은, 간장소스가 들어간 접시를 잡아 제 앞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유하 손에 잡힌 숟가락이 본래 채이 몫이었던 오므라이스에 꽂혔다. 우아하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오물오물 씹던 유하가 행동을 멈추었다.
”어… 때요?“
거봐, 맵지??
조심스레 물었지만 채이는 속으로 쌤통이다를 외우며 유하에게 물이라도 갖다 줘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틀었다.
”맛있네.“
산뜻하게 뱉은 그 음성에 채이가 고개를 돌렸다.
“안 매워요?”
“응. 안 매운데?”
반달로 접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흘린 유하 때문에 그의 차갑던 검은 눈동자가 사라졌다. 채이가 그의 낯선 모습에 얼빠져있을 동안 유하는 몇 숟가락을 더 떠먹었다. 정말 매운 걸 잘 먹는지 힘들어하는 티가 전혀 안 났다.
채이는 그의 앞에 앉아 케첩 소스가 들어간 오므라이스를 제 입안에 넣었다.
케첩 소스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맛은 괜찮았다.
오므라이스는 채이가 잘하는 요리 중의 하나였다. 모양도 잘 내고 맛도 있다 하여 동생 서준이나, 소은이 항상 엄지를 내밀며 좋아해 주던 요리였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오므라이스는 정말 자신이 있었는데,
강유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필 또 채이가 가장 잘하는 오므라이스를 해달라고 했고 그 역시 그녀가 한 오므라이스가 맛있는지 한 그릇 뚝딱 다 먹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