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22회)

죽으나사나 | 2024.10.30 18:30:19 댓글: 0 조회: 65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10508
너를 망가뜨릴 시간. (22회) 희한하단 말이지.

유하는 달달한 과일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입안에 수입 멜론 한 조각을 넣고 맛을 느끼는 거 같더니 이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는 반면 채이는 달달한 과일을 정말 좋아했다. 이것저것 입안에 넣으며 맛을 즐기던 채이를 가장 즐겁게 하는 건 그래도 딸기였다. 벌써 몇 개나 집어먹은 채이가 덩치가 큰 딸기를 입에 가득 문 채 TV 속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 유하에게 말했다.

”딸기 먹어봐요. 음~ 청 다라요.“

발음이 뭉개지며 오물오물 맛있게 딸기를 먹고 있는 채이에게 고개를 돌린 유하가 다시 TV 화면에 집중했다.

”나 딸기 알레르기 있어.“

아주 별게 아닌 듯 덤덤하게 내뱉은 유하의 말에 채이가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나머지 말도 버벅거렸다.

”따, 딸기 알레르기요? 그, 그럼 저번에 드린 딸기우유는…“

”안 먹었지.“

아…

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안 먹었구나. 다행이다.

우유갑에 그렇게 큰 딸기 그림이 있었는데 안 보고 그냥 먹었을 리는 없겠네.

채이가 바보스러운 제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강유하한테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보였겠네.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프로그램에 빠진 건지 화면에만 시선을 꽂고 있는 유하의 얼굴을 살폈다. 발작급으로 저 혼자 놀라고 안도하는 채이에게 관심이 없어 보여서 다행이라 여겨졌다.

”어제는, 남자친구 만났어?“

저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던 채이와 눈을 마주하며 유하가 물어왔다.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유하를 살피다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랐지만 짐짓 아닌 척 채이는 태연하게 답했다.

”네, 만났죠.“

“남자친구가 잘해줘?”

무덤덤했다. 유하가 뱉은 어투는.

“네. 당연히 잘해주죠.”

채이는 싱거운 남자한테 흔쾌히 답해주었다.

”만난 지 얼마 되었어?“

”일 년 좀 안 됐어요.“

“결혼 약속을 했다고?”

“네.”

그래서 수호한테 말 못 할 일을 더 만들면 안 된다고 채이는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일하는 것도 3개월이 지나면 수호한테 다 말해줄 생각이었다.

“많이 사랑해?”

“네?”

많이 사랑하냐고 묻다니…. 사랑하니까 결혼까지 약속을 한 거 아니겠어요?

채이는 그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를  전 여자친구로 여기고 있을 유하한테 자극을 주는 말은 삼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거식증이 있다던 유하는 오늘 아침 채이가 한 오므라이스를 너무나도 맛있게 다 먹었었다. 요즘 채이가 본채에서 갖고 온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던 유하인데…

내가 그 한채이라고 생각되어서 마음이 편해진 건가…. 정말 난 강유하의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여자일까.

채이는 생각이 많아졌다.


유하는 쭉 별채 안에 있었다. 소파에 본드를 붙였는지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유하가 아까까지만 해도 바닥을 닦으면서 왔다 갔다 하던 채이가 안 보이자 그녀를 찾아 나섰다. 분명 자신을 피해서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밖에 나갔나?

유하는 소파에서 몸을 떼며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찾았다.

채이의 모습을 금방 찾은 유하의 시선이 앞마당 잔디 밭에 머물렀다. 제초기로 잔디를 깎으려던 김 씨와 마주 선 채이 손에 뭔가가 있었다.

과일?

소파에서 일어나 느슨하게 두 팔을 가슴안으로 말아 팔짱을 낀 유하가 조용히 채이의 모습을 주시했다.

유하의 시선을 전혀 못 느낀 채이는 김 씨와 일상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김 씨는 체형이 마르고 크지 않은 키의 중년으로 채이
엄마가 만일 살아 계셨다면 그녀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정원관리사였다. 인상이 좋고 친근한 이미지라 홀로 별채에 있는 채이와 오가다가 마주치면 간단히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날씨도 더운데 고생이 많으세요. 아저씨.”

잔디 위에 서있은지 얼마 안 되는데도 벌써 등에 땀이 찼다.

“이 더운 8월도 빨리 지나야 할 텐데.”

“그러게요.”

밀짚모자를 벗어 부채 삼아 흔들며 푸념하는 김 씨의 말에 호응하며 채이가 손에 든 접시를 내밀었다.

“아저씨, 과일 드세요. 아까 전무님이 드신다고 해서 많이 잘라놓았는데 생각보다 잘 안 드시더라고요. 엄청 달고 맛있어요.”

“이거 어제 저택에 갓 들어온 비싼 과일들이네.”

김 씨가 접시에 담긴 과일들을 훑었다.

“아저씨 보기에도 그렇죠?  전무님은 더 드실 거 같지 않아서 아저씨 드시라고 제가 갖고 나왔어요. 아깝잖아요.“

“고맙네. 나를 다 신경 써주고. 잘 먹을게. 채이 씨.”

김 씨와 채이는 그늘이 진 커다란 나무 아래로 갔다. 김 씨는 벤치에 앉아 일본에서 수입해 들어온 블랙 포도를 입안에 넣었다.

“맛있네.”

김 씨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걸 보니 채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아저씨.“

김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어제 쉬었다며? 하루 종일 채이 씨가 안 보여서 그만둔 줄 알았어.“

“그만두긴요. 하핫,”


그만둘 수가 없죠. 3개월이 끝나기 전에는.

예의 바른 채이가 예쁘게 웃으며 입을 가렸다. 김 씨는 과일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언제 여기에 들어왔어? 아침 일찍 왔었지만 채이 씨를 못 봤었는데.”

“아, 저 어젯밤 늦게 들어왔었어요.”

“그랬구나. 이제 전무님 식사를 책임진다고 했지?“

김 씨는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저씨한테도 벌써 소문이 갔어요?”

누가 듣는 사람도 없는데 채이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 반쪽을 가리며 김 씨한테 가까이했다. 목소리는 최대한 낮추었다.

“그럼 알지. 어제 홍 여사님이랑 몇 명이 별채 주방에 음식을 옮기는 걸 보았거든.”

김 씨의 말에 채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희한하단 말이지.“

”네?“

저 멀리 마당 끝 어딘가에 시선을 둔 김 씨가 저 혼자 중얼거리자 채이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김 씨가 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전무님은 요리하는 냄새를 엄청 싫어하거든. 그러나 처음부터 별채에 음식을 날라다 준 게 아니었어. 그래도 처음엔 본채에서 식사를 조금 하셨는데 어느 때부턴가 아예 안 가시더라고. 메이드가 얘기하길 어느 날 본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구역질을 하더라는데.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봐.“

”그 정도예요?“

김 씨의 말에 귀를 쫑긋하며 경청하는 채이의 표정이 무거웠다.

”응. 원래는 안 그랬대. 나도 여기서 일을 한 지 1년 좀 안 되어서 내부 상황은 잘 모르는데 홍 여사가 그러더라고. 원래는 저러지 않았는데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전무님이 음식을 잘 못 드시고 그런다고 하더라고.“

”아… 그렇군요.“

거식증에 대한 이야기는 거짓말은 아니네. 아침에 오므라이스를 너무도 잘 먹길래 거짓말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근데 아저씨의 말대로라면 요리 냄새를 거부해야 할 유하가 아침에 주방까지 들어왔었는데 이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거지?

채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주방에 들어온 유하는 구역질을 한다거나 하는 거부 반응 같은 게 안 보였다.

뭐지? 갑자기 나아졌나?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사색에 잠겨있는 사이 김 씨는 과일을 다 비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채이 씨 덕분에 비싼 과일로 배를 채웠네. 고마워. 이제  일을 좀 시작해야겠구먼.”

김 씨는 허허 웃으며 밀집모자를 다시 썼다.

“수고하세요~ 아저씨!”

밝게 인사하는 채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김 씨는 제초기를 작동했다.
채이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별채를 향해 걸었다. 돌길을 한 번 두 번, 오른발로 폴짝폴짝 뛰던 채이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별채 유리창에 시선을 두었다.

“엄마야!!”

저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유하와 눈이 마주친 채이가 깜짝 놀라며 들었던 한쪽 발을 바로 내리지 못 한 채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과일을 담았던 비싼 접시를 살리려고 품에 꼭 그러쥐는 통에 몸은 그대로 자빠져 버렸다.

“으읏,”

평소 아프던 왼쪽 발을 조심하려다 오른쪽 발이 살짝 꺾인 채이가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괜찮아?!“

별채 현관문이 쾅 하고 부서져라 열리고 아까까지 오만해 보이던 남자가 놀란 얼굴을 하고 성큼 다가왔다.

”아, 조금 접질려서…“

채이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다 발목 통증에 쿵 하고 다시 엉덩방아를 찧자 참다못한 커다란 손이 채이의 몸을 감쌌다.

”어어??“

한 번도 이렇게 높게 몸이 붕 뜬 적이 없던 채이 두 눈망울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가며 저도 모르게 유하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한 손에는 과일 접시가 떨어질 세라 손가락에 힘을 바짝 주었다.

금세 별채 안으로 들어왔고 유하의 발걸음이 거실 소파 앞에서 멈추었다. 몇 초 그렇게 말없이 서있던 유하의 잔잔한 음성이 채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허업,

그제야 바닥에 떨어질까 봐 유하의 목을 여태까지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채이가 황급히 팔을 풀었다. 유하에 의해 채이는 소파 위에 사뿐히 내려졌다. 채이가 어찌나 꽉 끌어안았는지 유하는 발개진 제 목덜미를 살짝 문지르며 어딘가로 향해 가버렸다.

당황함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채이에게 유하가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얼음을 담은 수건이 들려있었다.

채이 앞에 무릎을 내리고 앉은 유하가 제 접질린 발을 살피고 있는 채이의 다리를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어머!”

채이가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리다가 유하에 손아귀에 종아리를 잡히고 말았다.

“의사 불러?”

“네? 아,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요.”

“그럼 가만히 있어.”

무거운 그의 음성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다친 채이의 발목 위에 차가운 얼음을 담은 수건이 닿자 그녀는 조금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다.

“많이 차?”

부드러워진 눈매와 걱정스레 묻는 유하와 시선이 얽힌 채이는 머리만 끄덕이었다.

“차가워도 참아. 접질렸을 땐 냉찜질이 좋아.”

뭐야…, 왜 물어본 거야.

입술을 오므리며 삐쭉거리던 채이가 정성스레 제 발목 위에 수건을 얹고 있는 유하의 손길에 표정이 차분해져 갔다.

몇 분을 그리했을까, 차가운 수건 때문에 채이 발목이 얼얼해 감각이 무뎌졌을 때였다. 접질린 발은 조심스레 내려놓은 유하가 채이의 왼쪽 발을 들어 올리며 커다란 제 손아귀에 넣었다.

“여긴 언제 다쳤어?”

발목을 스윽 문지르는데 채이의 몸이 한 번 더 움찔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모, 몰라요. 어릴 때 다쳤나 봐요.”

거짓말. 나랑 만날 때의 넌 정신없이 뛰어도 발목을 아파한 적이 없었어.

채이가 버벅대며 유하의 손에 잡힌 발목을 빼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놓아줄 생각이 없는 유하 때문에 발목은 빠질 듯 말 듯 그의 손아귀에 여전히 잡혀있었다.

이유 모를 간질간질함이 채이의 속을 살살 긁었다. 당황한 채이가 입술을 떼었다.

“놔, 놔줄래요?”

유하의 입매가 호를 그리며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왜 웃는 거지?

잡았던 채이의 발목을 소파 아래로 살포시 내려놓으며 유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건을 챙겨 돌아서며 유하는 채이가 안 보이는 그곳에서 활짝 웃었다.

발목을 문지르면 넌 여전히 예민하구나.
무척이나 당황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현재 너의 남자친구는 모르는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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