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베스트 월간 베스트 3개월 베스트 베스트 게시물
연길시 신화서점 조선말 도서

너를 망가뜨릴 시간 (58회)

죽으나사나 | 2025.10.21 07:29:05 댓글: 0 조회: 169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83142

너를 망가뜨릴 시간 (58회)
너무 많이 아파하지는 마라

"한채이. 나 기운이 없어서 도저히 집에 못 가겠어. 네가 도와줘."

그날 유하는 고열에 시달리며 40도를 넘는 체온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강진욱 회장 시절부터 왕진을 오던 대학병원의 교수가 직접 방문해 상태를 점검한 뒤, 링거를 연결하고 해열제를 투여했다.

열이 내려간다 해도 방심해선 안 된다는 당부를 했다.

교수가 돌아간 뒤, 채이는 다시 유하의 방으로 들어섰다. 유하는 여전히 힘든 듯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유하를 바라보던 채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대체 왜 따라왔던 거야…

채이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유하의 이마 위에 올려진 수건을 만졌다. 처음엔 차가웠던 수건이 이미 미지근하게 변해 있었다. 새것으로 갈아줘야겠다는 생각에 채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지 마."

낮은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채이가 돌아서자, 유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곁에 있어. 교수님이 그러라고 했잖아."

언제 그걸 들어서는.

채이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 씹었다.

"안 가요. 다른 수건 챙겨올게요."

"수건은 됐고, 이리 와 봐."

유하는 고갯짓으로 다가오라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채이는 그의 요구대로 조용히 곁으로 다가갔다.

"앉아."

유하는 침대 옆 빈자리를 두드리며 자리를 권했다. 채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손."

유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자, 그는 다시금 짧게 말했다.

"손 줘."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유하는 망설임 없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채이가 손을 빼려 하자, 유하는 더욱 단단히 손을 쥐고선 자신의 이마 위에 올렸다.

"수건보다 이게 더 좋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채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하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불편해도 5분만 참아 줘. 나 지금 엄청 졸려. 딱, 딱 5분이면 잠들 것 같으니까."

열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먹은 약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유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하는 이마 위에 올려두었던 채이의 손을 잡아 옮기더니,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게 더 좋아."

채이의 손을 잡은 유하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마치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전무님, 손에 힘 좀 빼요."

채이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유하는 오히려 더 세게 움켜쥐었다.

"조금만 더 있어 줘."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열에 지쳐 힘이 빠졌을 텐데도, 손을 잡은 힘만큼은 단단했다.

채이는 한숨을 삼키며 가만히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마지못한 듯하면서도, 그 온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

열이 가라앉고 깊이 잠들었던 유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가 낯설어 시선을 내리자, 자기 손을 꼭 쥐고 있는 채이가 보였다.

그녀는 침대에 기대어 앉은 채 스르르 잠이 들어 있었다. 유하가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잠결인데도 채이는 더 강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순간 놀란 듯 미세하게 올라갔던 유하의 눈썹이 곧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는 남은 한 손을 들어 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너무 많이 아파하지는 마라."

그러면 내가 심통이 날 거니까.

유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스며들었다.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채이가 잠결에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

며칠째 계속된 비에 정원사 김 씨가 애써 가꾼 배추 모종들이 물에 잠겨 모두 쓰러져 있었다. 채이는 비옷을 단단히 여미고 조용히 텃밭이 있는 뒤뜰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뒤뜰에 나온 건 채이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정원사 김 씨와 지아가 먼저 와 있었다. 김 씨는 삽으로 고랑을 깊게 파며 물길을 정리하고 있었고, 지아는 쓰러져 뿌리가 드러난 배추 묘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땅속으로 심고 있었다.


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거세지는 빗줄기에 결심한 듯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김 씨와 지아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손을 보태기 시작했다.

잠시 후,
흙탕물에 잠겼던 텃밭은 새로 낸 물길을 따라 서서히 정리되었고, 쓰러졌던 배추 모종들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채이는 비옷을 걸쳤지만, 거센 바람에 흩날린 빗물에 흠뻑 젖은 김 씨와 지아를 별채로 이끌었다.

별채에서 옷을 갈아입은 김 씨와 지아가 각자의 공간에서 나오자, 채이는 그새 우려낸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지아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김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해도 됐는데...나설 필요 없었어요."

평소처럼 웃으며 말을 건네던 김 씨의 모습과 달리, 어딘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아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만 조용히 홀짝이었다.

잠시 시선을 들어 올려다본 천장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집안의 웅장한 내부를 천천히 훑던 지아는 새삼스레 이곳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이렇게 거실 중앙의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사정이 있어요."

채이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걸 느끼며,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토해내듯, 채이는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어이구, 뭐 저희까지 신경 쓰시느라고."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마음고생이 많았나 보네요. 처음엔 조금 의아했지만, 다 사연이 있겠지 싶었어요.
저희야 그저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인데요. 이런 부잣집에서 20년 넘게 일하면서 별별 일 다 봤습니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지요. 그러니 우리한테 미안한 마음 가질 필요 없어요. 기만했다고도 생각 안 하고요."

김 씨의 따뜻한 말에 채이는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하는 동료인 척 지내다가 멋대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서는 이번엔 집주인의 손님으로 대하라고 하던 상황. 분명 이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 씨는 연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일하면서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요. 착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채이를 바라보는 김 씨의 눈빛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시선 하나에, 채이는 조금이라도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김 씨는 빗줄기가 살짝 잦아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원의 상태를 살피겠다며 별채를 나갔다. 지아만이 채이를 마주 앉은 채, 찻잔에만 멀뚱멀뚱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따뜻할 때 마셔요."

채이가 조용히 말을 건넸지만, 지아는 미동도 없이 찻잔만 바라보았다.

"채이 씨..."

오랜 침묵 끝에 지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 솔직하지 않았던 건, 사실 조금 서운했어요."

채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근데... 채이 씨도 사정이 있겠다 싶으니 그런 마음은 사라지더군요."

지아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히 덧붙였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얘기해줄 수 있으면 해줘요. 전무님과의 이야기, 솔직히 좀 궁금하거든요."

지아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예상치 못한 말에 채이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지아는 더욱 장난스러운 눈빛을 빛냈다.

"이렇게 넓은 별채에서 단둘이 지낼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어요."

장난스레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던지는 지아를 향해 채이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닌데..."

채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손을 내젓다가 내렸다.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어딘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유하가 그녀를 옛 연인이라 믿으며 다가오는 상황과, 빚을 갚기 위해 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겠다며 여자 친구인 척하는 채이의 상황. 이 모든 걸 남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설명할 수나 있을까, 과연.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거 같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 상황은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슬픈 건,

그가 옛 연인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지 못 한 강유하에 대한 연심이요,

웃긴 건,

남자 친구도 있는 자가 돈 때문에 딴 남자의 여자 친구인 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이런 웃긴 상황은 아마 시간이 지나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채이는 난감한 마음에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심심하거나 그러면 저 찾아요. 채이 씨와는 나이가 비슷하기도 해서 그런지 꽤 재밌었으니까."

지아는 함께 청소하며 도란도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듯 환하게 웃었다. 마음이 복잡해 쉽게 미소를 짓지 못하던 채이도 그녀의 따뜻한 표정에 이끌려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요, 지아 언니.

답답한 요즘, 지아가 주는 온정이 채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

"누구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1층 로비에서 걸려 온 유선 전화를 받은 유하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되물었다.

"유선영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비 데스크 직원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다시 올리자, 유하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유선영. 뜻밖의 이름이었다.

"전화번호를 남기고 가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

"번호 주세요."

직원이 불러주는 번호를 받아 적으며, 유하는 잠시 멈칫했다.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이미 오래전에 끝난 관계인데.

***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한적한 카페. 유선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단정한 옷차림과 세월이 지나도 흐트러짐 없는 고운 얼굴은 여전히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의 우아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방금 전 걸려온 유하의 전화를 받고 나서 유선영의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강미정이 억지로 주선한 자리에서 불편한 식사를 한 이후,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언제 적이었지?

유하는 아홉 살이던 그때까지만 해도 또래보다 작은 키에 한없이 사랑스러웠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다 자란 어른이 되어 있었다.


평범하기만 했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집을 찾았다. 자신을 아이의 외삼촌이라 소개한 그는, 아이가 강진욱의 아들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꽤 당황했지만, 아이를 받아들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엄마 아빠 없이 자라서인지 아이는 조금 주눅 든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정말 해맑고 순수했다. 낯선 집에 들어와서 얌전하게 지냈고, 떼를 쓴 적도 없었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추천 (1) 선물 (0명)
IP: ♡.214.♡.18
23,059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
65880
마도라
2025-12-01
4
289
마도라
2025-12-01
4
251
죽으나사나
2025-11-27
1
139
죽으나사나
2025-11-20
0
178
죽으나사나
2025-11-20
0
92
죽으나사나
2025-11-19
0
101
죽으나사나
2025-11-19
0
134
보나르
2025-11-19
2
320
yina1004
2025-11-06
2
484
워킹맘1004
2025-11-04
0
328
죽으나사나
2025-11-03
1
193
죽으나사나
2025-11-03
1
174
마도라
2025-11-03
6
605
죽으나사나
2025-11-01
0
139
죽으나사나
2025-10-24
0
172
죽으나사나
2025-10-21
1
149
죽으나사나
2025-10-21
1
169
죽으나사나
2025-09-10
4
532
죽으나사나
2025-09-08
1
354
죽으나사나
2025-08-28
1
428
죽으나사나
2025-08-27
1
332
죽으나사나
2025-08-21
2
337
LMATF
2025-08-21
0
409
죽으나사나
2025-08-21
1
304
LMATF
2025-08-14
1
411
죽으나사나
2025-07-29
1
308
죽으나사나
2025-07-29
1
32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