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59회)
도와주고 싶어
어린 유하는 강진욱과 함께 살고 있는 유선영을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여겼다. 강진욱의 아내라면, 당연히 엄마일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엄마 사랑해, 엄마는 유하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야!"
아이는 유치원에서 배운 걸 거리낌 없이 그대로 표현했다.
강진욱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 감정이 아이에게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없어 적막했던 집안에 활기로 가득 찼고, 유선영은 점점 그 아이를 제 자식처럼 아끼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이 흐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강진욱이 점점 유선영이 아닌 유하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도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역할은 충실히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하가 온 이후로 그는 점점 유선영과 거리를 두었고, 심지어 아이와 함께 자는 날이 늘어나면서 안방에 들어오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고, 부부 사이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초등학생이 된 유하를 바라보던 유선영의 머릿속에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강진욱과 나는 지금쯤 어여쁜 우리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을까.
이 아이만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진짜 엄마라고 믿고 따랐다. 그런데도 가끔 아이를 향한 애틋한 감정 속에서 어두운 원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면, 유선영은 그럴수록 더욱 괴로워졌다.
저벅, 저벅.
추억 속에 잠겨 가슴이 먹먹해질 즈음,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조용한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선영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유하가 눈앞까지 와 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짧게 인사한 뒤,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마주한 두 사람.
선영의 얼굴에는 애틋한 감정이 서려 있었지만, 유하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차가운 얼굴이었다.
"무슨 일로…"
선영이 북받치는 감정을 다잡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선영은 어색한 기침을 삼키며 몸을 조금 바로 세웠다.
"아, 그게…"
망설이던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강미정 부사장이 요즘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저를 걱정해서 오신 거라면 헛걸음하신 겁니다. 보다시피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유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선영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래 보이네. 저번보단 얼굴이 한결 나아 보인다."
선영은 옅게 미소 지으며 안도하는 눈빛을 보냈다.
"여사님."
낯선 호칭이 유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사님이라...
그래, 엄마에서 남이 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유하에게는 그 말이 적당했을 것이다. 선영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어쩐지 씁쓸함이 먼저 스며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로 찾아오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던진 말. 섭섭할 법도 했지만, 선영은 그저 고개를 떨궜다.
어떤 말을 들어도 당연했다. 원망을 쏟아내도, 차갑게 돌아서도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선영은 숨이 막혔다. 모든 걸 바쳐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엄마! 어, 엄... 사, 살려...]
수영장 근처에서 놀던 유하가 메이드에게 떠밀렸던 날.
마침, 정원에서 돌아오던 선영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순간 발이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아이가 사라진다면...
그렇다면...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남편의 시선도, 텅 빈 마음도.
그 생각이 스쳤다. 아주 잠깐.
그새 유하는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메이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나가던 김지한이 유하를 건져 올렸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유하는 감정을 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어렴풋이 흔들리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잠깐만, 유하야. 내 말 좀 들어줄래?"
애타는 목소리로 선영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하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선영은 마른 입술을 적시듯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강미정 부사장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여자야. 너를 짓밟고 망가뜨리는 것도 서슴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내가 도와주고 싶어."
유하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떴을 뿐, 그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때, 선영이 마침내 오래전 봉인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수영장에서 있었던 그날, 기억하지?"
유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빛 속에서 순간적으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선영은 멈추지 않았다.
"너를 해치려 했던 그 메이드... 내가 찾아냈어."
오래된 이야기를, 그것도 이 사람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불편함과 짜증이 치밀어 오르던 순간, 예상치 못한 말에 유하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래서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안에 감춰진 감정은 복잡했다.
이제 와서 뭐 어쩌려고.
난 너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뭐 그런 해명이라도 할 셈인가,
유하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며들었다.
"그날, 잠깐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너를 향해 뛰어가지 못했던 나를, 나는 오늘까지도 미워하며 살았어. 어른으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그래서는 안 됐어. 그날 나는 널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어. 정말... 정말 미안하다, 유하야."
선영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묻어 있었지만, 유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로서, 엄마로서.
그 말이 우습게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회장님도 사라진 메이드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가셨지. 그 메이드는 그날 이후 바로 한국을 떠났더라고.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지 최근에 다시 입국한 기록이 있어서 찾아낸 거야."
"그래서, 이제 와서 어쩌시겠다는 거죠?"
유하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말 그대로, 오래 전의 일이다. 20년도 훨씬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들춘다고 한들 달라질 게 있을까.
"강미정 부사장이 사주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
"......"
유하는 순간적으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네 아버지든 강미정이든 자신을 찾아내면 무사하지 못할 거란 직감을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도망친 거였고, 돌아오고 싶어도 두려워서 숨어 지냈던 거야. 하지만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미정과의 대화를 녹음해 둔 파일을 갖고 있더라고."
"......"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더라. 어린 네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걸 깊이 후회하며 살았다고. 비록 얼굴을 마주할 용기는 없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어."
***
끝없이 쌓인 결재 서류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던 유하는 선영과의 만남을 끝으로,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1층 복도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복도 끝 방에 있는 채이가 문득 떠올랐지만, 망설이다가 이내 발걸음을 2층으로 돌렸다.
"전무님이세요?"
가벼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유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주방에서 채이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주방 식칼이 들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말없이 그녀의 손에 머물자,
"아, 오랜만에 뭐 좀 해 먹으려고요."
채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만들 건데?"
그는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담담히 물었다.
"오므라이스요. 아주 매운 소스를 얹어서요."
매운 고추를 썰었는지 그녀는 코를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내 것도, 할 수 있겠어?"
부탁이라기엔 좀 차가운 말투였지만, 채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딴생각하다가 재료를 많이 준비해 버려서 어쩌나 했는데 잘됐네요. 씻고 오세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던 유하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유하는 차가운 물을 틀어 하루의 피로를 씻어냈다.
문득, 녹음 파일이 담긴 USB를 건네주며 마지막으로 건강을 잘 챙기라고 했던 유선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아버지와 이혼한 후, 유선영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왔다. 사람들과의 연락도 끊은 채, 조용한 시골에서 지내왔다고 했다. 마치
자신에게 외로움이라는 벌을 주듯.
이젠 희미한 기억이 되었지만, 유하는 이 집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 그러나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맛있는 간식을 내밀던 모습.
외삼촌은 조카를 각별히 아껴주었지만 몸이 많이 아팠기 때문에, 어린 유하에게 목욕을 제때 시켜주지 못해 늘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고용인이 유하를 씻기려 했지만, 낯선 환경과 사람들 탓에 어린 유하는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였다.
[유하야, 내가 도와줄까?]
고용인들 사이로 유선영이 다가왔다.
외삼촌이 알려준 대로라면,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아빠였다. 그리고 이 여자는 그를 ‘여보’라고 불렀다.
엄마겠구나.
유하는 유치원에서 소꿉놀이하던 아이들이 ‘여보’와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떠올리며 그렇게 믿어버렸다.
이 예쁜 아줌마는 내 엄마구나.
[네, 엄마.]
어린 유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유선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유하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이제 나에게도 엄마 아빠가 있다. 그냥 가족이 생겼다고 즐거워하기에 바빴다.
샤워를 마친 유하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
"다 했어?"
"으아! 깜짝이야!"
예쁜 접시에 오므라이스를 담아 소스를 정성스럽게 붓던 채이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던 유하가 조용히 물어온 것이었다.
하마터면 소스를 한꺼번에 쏟을 뻔했다.
"미안, 많이 놀랐어?"
사과의 말과는 달리, 그의 입가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음식의 향을 맡으며 나직이 말했다.
"매운 냄새가 확 올라오네. 맛있겠다."
따뜻한 숨결이 가까이서 스치자, 채이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문득, 그한테 나는 왠지 모를 익숙한 비누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괜히 손끝이 바빠졌다.
"다, 다 끝났어요. 가서 기다리세요."
채이는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하며 움직였고, 그 덕분에 유하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이닝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한 채이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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