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60회) 그와의 저녁 식사
채이는 요즘 늘 늦게 귀가하는 유하를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므라이스 재료를 넉넉히 준비해 두곤 했다. 늦은 밤까지 일하다 돌아오면 배가 고플 테고, 마침 한가한 내가 한 끼 정도는 차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혼자서 조용히 먹을 생각이었던 식탁에 유하가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채이는 말없이 접시 두 개를 트레이에 담아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유하는 상당히 배가 고팠던 건지, 아니면 채이가 만든 음식이 입맛에 잘 맞았던 건지, 별다른 말 없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다.
그는 여전히 절반 이상 남은 오므라이스를 천천히 씹고 있는 채이를 바라보았다. 매운 소스 때문인지 그녀는 종종 물을 마셨다. 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물컵을 들려 하자, 유하가 재빠르게 컵을 낚아챘다.
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하를 바라봤다.
"물 없어. 내가 따라줄게."
유하는 옆에 있던 물병을 들어 컵을 채운 뒤, 조용히 그녀 앞으로 밀어두었다. 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컵을 집어 들고 연거푸 들이켰다.
"설마 물로 배 채우려는 건 아니지?"
유하의 갑작스러운 말에 채이는 그만 물을 뿜을 뻔했다. 가까스로 삼키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스가 매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바로 앞에 유하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복잡한 마음 때문인지 자꾸만 목이 막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유하는 그걸 알 리 없었다.
채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마지막 한입까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유하도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서더니, 그녀가 다 먹은 접시와 자신의 접시까지 들어 올렸다.
채이는 잠시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의식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싱크대 위에 어수선하게 놓인 조리도구를 힐끗 살펴보던 유하는 하부장에 걸려 있던 고무장갑을 꺼내 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채이가 다가서며 물었다.
"요리는 네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채이는 순간 말문이 막힌 채 유하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에요? 정말 하겠다고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응."
유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채이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마치 손을 털어내듯 가볍게 두 번 치고는 주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문턱을 넘기 직전, 그녀는 다시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설거지 끝나면 마지막에 행주로 싹 닦는 거 잊지 마세요."
유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전하네, 공평한 가사 분담 정신.
***
설거지를 마친 유하는 채이가 어디에 있을까 싶어 집 안 곳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채이는 TV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하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채이는 화면에 완전히 몰입한 듯,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따라가고 있었다.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린 채 몸을 웅크린 모습이 어딘가 편안해 보이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유하는 채이와 멀지 않은 자리에 앉으며 TV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재밌어?"
갑작스러운 유하의 등장에 채이는 흠칫하며 다리를 황급히 내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그냥... 보고 있어요."
TV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채이가 대꾸했다. 유하도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TV를 들여다보았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마침 TV 화면 속에서는 연인 간의 이별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하는 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유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한채이."
"네?"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네.
"맥주 마실래?"
채이는 유하의 의외의 발언에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는 지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오며, 눈에 띈 소주 한 병까지 챙겼다. 거실로 돌아오자 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다 마시자는 거예요?"
"뭐, 들어가면 다 마시는 거고. 오늘 불금이잖아."
"아..."
불금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은 요일 감각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강유하같은 바쁜 사람도 이런 걸 챙기는구나.
채이는 캔맥주를 따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재벌도 설거지하고, 소주도 마시고 그래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묻는 채이를 보고 유하는 피식 웃었다.
"음…"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하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내가 좀 특별해서지."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요?"
"너 소맥 좋아하잖아. 잔 가져올게."
말을 남기고는 자연스럽게 지하 바(Bar) 룸으로 향했다.
채이는 멍하니 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소맥을 섞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채이는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꽤 익숙한 솜씨인데, 어디서 배운 거예요?"
너 때문에, 너튜브로 연습했잖아.
유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기억조차 못 하는 사람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채이는 술을 잘 마시지는 못했지만, 가끔 기분이 울적할 때면 찾곤 했다. 맥주는 배가 부르다며 싫어했고, 소주는 알코올 냄새가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유하는 직접 소맥 비율을 검색해 연습했었다.
문제는 늘 맛있다며 감탄하더니, 결국 주량을 넘겨 금방 취해버린다는 거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대충 얼버무리는 유하를 보며, 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 유하가 내민 잔을 받아 들고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어? 이거 생각보다 맛있는데요?"
놀랍다는 듯 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한 모금 더 마셨다.
"이렇게 만든 거 처음 마셔봐?"
"네! 이런 비율은 처음이에요. 엄청 맛있어요!"
감탄하듯 연거푸 잔을 기울이는 채이를 보며, 유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은 무슨, 내가 만들어준 것만 해도 꽤 될 텐데.
유하는 말없이 캔맥주를 들이켰다.
그사이 채이는 유하가 만든 소맥을 몇 잔 더 비웠고,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뜨거운 기운이 오르는지 후후— 가쁜 숨을 내쉬더니, 정신을 붙잡으려는 듯 두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도 많이 힘들어?"
유하는 시선을 광고가 흘러나오는 TV 화면에 둔 채, 무심한 듯 낮게 물었다.
"네?"
머리를 가로저으며 정신을 차리려던 채이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되묻자, 유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채이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게."
수호와 헤어졌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여행을 간다던 사람이 가지 않았고, 넋을 잃은 얼굴로 떠돌았으니 유하가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채이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힘들긴요, 힘든 일 없어요."
굳이 유하와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래?"
유하는 짧게 대꾸하며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은 캔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더니, 빈 캔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았다.
"그럼 내일 놀러 가자."
"네?"
뜻밖의 말에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유하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계약도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는데, 기억이 도통 돌아오질 않잖아. 옛날처럼 데이트라도 해보면 좀 나아지려나 싶어서."
유하는 다 마신 캔과 잔을 정리하며 가볍게 일어섰다.
"그러니까 일찍 자 둬. 내일 꽤 바쁠 테니까."
그리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남겨진 채이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로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유하가 섞어준 소맥이 너무 맛있어서, 아니면 술의 힘이 필요했던지 모르겠지만 채이는 자신의 주량을 넘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술만 마시면 몸 안에 가득한 열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밤잠을 거의 설치고 말았다.
***
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깨트렸다.
“한채이, 일어나! 데이트 하러 가야지!”
강유하의 경쾌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채이는 반쯤 잠에서 깬 상태로,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데이트?"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채이가 잠이 덜 깬 눈을 깜빡이었다.
[우리 계약도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는데, 기억이 도통 돌아오질 않잖아.
옛날처럼 데이트라도 해보면 좀 나아지려나 싶어서.
그러니까 일찍 자 둬. 내일 꽤 바쁠 테니까.]
아,
“다음에 가면 안 될까요?”
채이는 침대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안 돼, 너 잊었어? 네가 이 집에 있는 이유는 빚을 갚기 위해서야. 자그마치 2억.”
유하의 단호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채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나한테는 2억이라는 빚이 있었지.
“알겠어요...”
채이는 무거운 몸을 이끌며 침대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후,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의 채이가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유하의 앞에 나타났다. 그런 채이를 힐끗 쳐다보던 유하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했다.
"어제 술을 쭉쭉 들이킬 때부터 알아봤다. 주량이 늘었나 싶었는데 아니었네."
유하가 혀를 차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칫, 내 주량이 얼마인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은."
채이가 투덜대며 혼자 중얼거리자,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하가 한마디 덧붙였다.
"잘 알았지, 네 주량. 적어도 5년 전까지는."
채이는 고개를 들어 유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미안함으로 번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언제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게 정말 맞는 건지 혼란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준비 다 끝났으면 가자."
유하는 금세 눈꼬리가 처진 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네,네..."
채이는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도살장에 끌려가듯 유하에게 끌려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채이는 유하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배고프지? 이거라도 먹고 있어."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나더니, 유하가 비닐봉지를 꺼내 조수석에 앉은 채이의 무릎 위로 무심하게 던지며 말했다.
채이는 고개를 들어 이제 막 시동을 걸고 있는 유하를 바라보았다. 유하는 운전에만 집중하는 듯, 앞만 보고 있었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이는 비닐봉지 안을 살펴보았다. 삼각김밥, 딸기 우유, 다양한 과자들… 여러 가지 간식들이 들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삼각김밥은 아직 따뜻했다.
언제 이런 걸...
김밥의 비닐을 뜯어 한입 베어 물며 채이가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채이는 볼에 가득 찬 밥알 때문에 발음이 뭉개지는 걸 느끼며, 입을 꼭 다문 채 남은 밥을 삼켰다.
"예전에 가봤던 곳이야."
유하는 애매모호한 대답만 내놓으며, 김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채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잘 먹네."
예상이라도 한 듯, 운전대 위에 올려놓은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기분 좋은 듯 가볍게 까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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