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61회)

죽으나사나 | 2025.11.01 16:52:49 댓글: 0 조회: 75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85332

너를 망가뜨릴 시간 (61회)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

"술 마신 다음 날, 너는 숙취 해소제보다 이런 걸 더 찾곤 했잖아."

그는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딸기 우유를 빨대로 꽂아 쪽쪽 빨아 마시던 채이의 얼굴에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강유하는 자꾸만 예전의 한채이와 비교했다.

그게 참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은 그 여자가 아닌데,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난 그 여자가 아닌데. 아무것도 모르는 유하 곁에서 쇼하고 있는 짝퉁일 뿐인데.

채이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복잡한 도심을 뚫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차가 마침내 멈춰 선 곳은 남산 타워의 입구였다.
유하는 차에서 내리기 전 미리 준비해 둔 블랙 모자과 마스크를 채이에게 내밀었다. 채이가 선뜻 받지 않자,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모자를 깊이 눌러 씌워 주었다. 그러고는 저 자신도 맞춘 듯 똑같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가볍게 당겨 얼굴을 가렸다. 채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깊이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차에서 내린 후, 우뚝 솟은 남산 타워를 올려다보던 채이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가린 유하를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는 모습인 듯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날 알아봐서."

대충 얼버무리듯 변명을 내뱉고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다시 남산 타워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채이를 바라보았다.

"왜? 남자 친구랑 한 번도 와본 적 없어?"

유하의 말에 채이는 순간 움찔하더니, 볼 끝이 붉어진 채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진짜 한 번도 안 와봤다고?"


유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채이를 바라보았다.

"굳이 이런 데 와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채이는 콧대를 세우듯 새침하게 말하며 남산 타워를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하는 애정을 담은 눈빛을 하다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따라 남산 타워를 향해 걸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연인들이 다정하게 나란히 걷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지만, 채이는 조금 앞서 나가며 빠른 걸음을 유지했다.

연인이 아니기에 나란히 걷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채이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고, 유하는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일부러 느린 걸음으로 뒤따랐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간격을 유지한 채 올라온 끝에, 채이는 어느새 타워 외부의 야외 테라스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복잡한 서울의 전경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던 유하가 그녀의 곁에 조용히 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채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강유하 씨."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유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채이 역시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트하자고 해서 나온 거니까, 이름 부르는 거… 괜찮죠?"

유하는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하 씨 기억 속에서, 한채이는 어떤 여자였나요?"

채이의 고요한 갈색 눈동자엔 단순한 궁금증 외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 관해 묻는 듯한 차분한 시선이었다.

"어떤 여자라…"

유하는 복잡하게 얽힌 도심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채이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착한 여자."

유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한 단어씩 뱉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무엇보다, 미칠 듯이 사랑스러운 여자. 그래서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

마지막으로 내뱉은 유하의 말에 채이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

하지만 강유하는 그 여자와 영원히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면, 그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채이의 가슴 깊숙한 곳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돌을 얹은 듯, 알 수 없는 통증이 퍼졌다.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며 말하는 유하의 눈빛에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미련일까. 참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였다.

곧이어,

유하는 싫다는 채이의 손을 잡고 타워 내부의 기념품샵으로 향했다. 그녀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전망대 난간에 걸 자물쇠를 고르기 시작했다.

대충 넘어가려던 채이의 바람과는 다르게, 유하는 원하는대로 각인할 수 있는 자물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물쇠에 ‘유하 하트 채이’ 라고 새겨 넣었다.

진짜 연인도 아닌데 이건 좀 오버 같았다.

"그냥, 기본으로 하지."

툴툴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채이와는 달리, 유하는 태연하게 많은 자물쇠 틈 속에 자신의 자물쇠를 끼워 넣었다. 철컥, 단단히 고정된 자물쇠를 확인한 후, 그는 마치 큰일을 해낸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채이는 그런 유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항상 바빴던 수호였고, 채이 역시 매일 야간 근무에 지쳐 있었기에, 연인이라면 한 번쯤은 온다는 남산 타워에 와본 적이 없었다. 수호와의 데이트는 언제나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나곤 했다.

그래서 저번 1박 2일 여행이 처음으로 제대로 계획한 데이트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수호의 얼굴이 떠오르자, 채이는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딴 데로 가자."

채이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던 유하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채이가 묻자 유하는 말 없이 빙긋 웃으며 앞서 걸음을 옮겼다.

어딘지도 모른 채 유하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사동의 쌈지길이었다.

처음엔 별 관심 없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채이였지만,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선 공간에 들어서자 어느새 커다란 두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는 저처럼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붐비는 인파 속을 헤치고 가던 채이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장난기 가득한 터키인 직원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님을 놀려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 유하는 어느새 직원에게 아이스크림 두 개를 주문하고 있었다.

***

“또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주말이라 연속으로 오고 가는 손님 때문에 소은은 눈코 뜰 새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은 씨, 3번 테이블 주문 받아줘요.“

홀 매니저가 다른 테이블로 향하면서 소은에게 당부했다.

”네~“

밝은 목소리로 응대하며 소은은 메뉴판을 들고 3번 테이블로 향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은은 커플로 보이는 손님의 앞에 메뉴판을 내밀었다.

”여보, 삼겹살 할까? 아니면 모둠으로 할까?“

남자가 여자한테 메뉴판을 펼치며 말했다. 복잡한 홀 상황을 둘러보던 소은은 남자 손님에 이어 곁에 앉은 여자한테 무심결에 시선을 주었다.

”어?“

소은이 여자를 보자마자 놀란 소리를 냈다. 둘의 시선이 메뉴판에서 소은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처음 보는 소은의 얼굴을 보고 머리를 갸우뚱하는 반면, 소은을 단번에 알아본 여자의 얼굴은 대번에 파래져 갔다.

이내, 곁에 있는 남편이 눈치 못 챌 정도로 검지를 올려 입에 대었다.

쉿, 아는 척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왜 그러세요?”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은에게 묻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밖에 아는 사람이 지나가는 거 같아서요.”

누구도 없는 바깥에 괜히 목을 빼들며 쳐다보자, 남자도 덩달아 쳐다보다 금세 관심을 잃었다.

“모듬으로 하나 주세요.”

남자가 주문하며 메뉴판을 내려놓자, 소은은 금방 자리를 떴다.

그렇게 또다시 이 테이블 저 테이블에서 부르는 호출에 정신없이 움직였다.

“저기요,”

꽉 찬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가게를 나왔는데 누군가 소은을 불렀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3번 테이블의 여자 손님이었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소은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대놓고 아는 척을 하면 어떡해요.”

질책 담긴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아, 죄송해요. 아는 얼굴이라 갑자기 반가운 마음에…”

소은이 멋쩍게 웃었다. 왜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는지 몰랐지만, 상대방은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웁~ 하며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켜더니 입술을 떼었다.

“우리가 서로 반가워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나은이 더욱 열받은 얼굴을 하며 소은을 노려보았다.

“아니, 저는…. 어찌 되었든 아량을 베풀고 합의도 해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아는 척을 했던 건데… 불쾌했다면 죄송했어요.”

소은이 고개를 떨구었다. 왜인지 모르게 발끈하는 나은에게 그냥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할 거 같았다.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잃은 슬픔이 어떠한지, 죽도록 힘들어하는 이를 곁에서 보았으니, 본인이 직접 겪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의 슬픔인지 알 수가 있었다.

타투 시술을 받기 전에 임신 여부를 밝히지 않은 나은의 부주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시술을 한 건 본인이었으니, 무거운 자책이 따랐다.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서 사과할 수가 있어서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제가 다 헤아릴 방법은 없지만…”

“그만! 그만 좀 해요! 그 입을 좀!”

나은은 누구라도 소은의 말을 엿들을 까봐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요? 울 남편이 들으면 어떡하라고 아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정말 나랑 끝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합의금으로 받은 2억을 다시 가져갔으면 됐잖아! 나를 얼마나 더 짓밟으려고? 설마, 이혼까지 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어느덧 반말까지 서슴지 않으며 나은이 목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으르렁거렸다.

소은이 황당한 얼굴을 한 채 눈꺼풀만 오르내렸다.

“다시는 날 아는 척하지 마요! 그때 일 생각하면 열 받아서 죽을 거 같으니까.”

나은이 씩씩거리며 가게 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소은이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합의금으로 받은 2억이라니? 2억이라고 하셨어요?”

처음 듣는 합의금 액수에 소은은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을 한 나은을 보챘다.

나은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저를 간절하게 쳐다보는 소은을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당신이 잘못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누군가가 있는 거 같네요. 아니라면 타투 샵을 신고할 알바를 구하지는 않겠죠. 잘 생각해 봐요. 누구한테 큰 잘못을 한 적이 없는지. 어쨌든 난 그 누구더라, 한…“

”한채이요?“

”맞아요. 그 여자한테 받은 합의금 2억을 다시 그 의뢰인한테 보냈으니까 난 이득 본 게 없다고요. 그러니 더 이상 날 아는 척하지 마요. 우리 남편이 나 임신 했던 걸 알면 죽일 수도 있으니까.“

나은이 꽤 차분한 목소리로 얼빠진 소은에게 할 얘기를 마치고 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소은은 방금 나은에게서 들은 말들을 곱씹었다.

이게 다 무슨 얘기지.

합의금 2억이 있었다니….

채이는 분명 소정의 합의금으로 끝났다고 했었는데…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리고 누군가가 일부러 알바까지 찾아가며 타투샵을 접게 했다는 얘기는 또 뭐고?

누가, 왜? 왜 굳이 나한테?

머리를 아무리 굴려보아도 답은 그리 쉽게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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