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62회)

죽으나사나 | 2025.11.03 18:28:15 댓글: 0 조회: 108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85821

너를 망가뜨릴 시간 (62회) 난 아직도, 네게 반응해

연일 내리던 비는 이들의 나들이를 돕기라도 하듯, 하루 종일 맑고 기분 좋은 햇살이 비쳤다. 데이트를 하기엔 제법 완벽한 날씨였다.

오전 잠깐 숙취로 힘들어하던 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한 얼굴로 돌아다녔다.

정말 오랜만인 거 같기도 하고, 처음인 것도 같은 번화한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걸 원한 적이 있었던가, 몰라서 찾아오지 않았겠지 싶으면서도 왠지 또 알았던 거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던 유하가 이끄는대로 찾아온 곳 모두가 마음에 쏙 들었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유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루 종일 꾹 눌러썼던 블랙 캡과 마스크를 벗어버린 유하의 멀끔한 얼굴을 저도 모르게 한참 들여다보았다.

곧바로 인정하기 싫지만 유하는 잘생겼다. 그것도 그녀의 취향대로 잘생겨서 대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잘 생긴 유하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빨간 신호등에 걸린 차량은 잠시 멈춰섰고 유하는 커다란 눈동자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창밖을 구경하는 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신호가 바뀌면서 차량은 다시 출발했고 전방을 주시하며 유하가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유하의 말에 채이가 창밖을 향한 몸을 돌려 정자세로 앉았다.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군것질을 많이 해서 딱히 고프지는 않았지만 유하는 별로 먹은 것이 없어서 고프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시게요?“

채이는 앞서 가는 차량의 뒤꽁무니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스테이크 썰러.“

커다란 눈만 깜빡이는 채이를 힐끗 쳐다보던 유하는 엔진 속도를 냈다.

...

우와,

유하를 따라 걸으며 통유리창으로 어둠이 깃든 바깥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채이는 연신 감탄했다. 혹여나, 앞서 가는 유하가 들을까 봐 소리를 낮추어 가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도시의 불빛을 품은 저녁의 한강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강 위로 가로지르는 다리가 그 풍경에 멋을 더하고, 멀리서 반짝이는 자동차 불빛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며 사람을 홀린다.

레스토랑 안의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음악은 그 분위기를 한층 더 살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배인이 안내한 자리에 다다른 유하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서 채이가 앉기 편하게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채이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지배인은 유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바로 자리를 떠 시야에서 사라졌다. 채이가 커다란 눈으로 바깥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안, 준비된 음식이 하나씩 테이블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봐."
유하의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 채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왜 우리밖에 없어요? 정말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비싸서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건가 봐요."

누구도 없는 공간에서 혹시라도 들을까 봐, 채이는 손으로 입을 반쯤 막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유하는 덤덤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둘만 있고 싶어서 빌린 거야."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한 답변을 하며 수저를 들었다. 채이는 그의 말을 이해한 듯 놀란 눈으로 유하를 바라보다, 다시 넓은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큰 식당을 빌리는데 얼마나 드는 데요?"

채이가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묻는데, 정말이지 귀여워 까무러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음, 좀 비쌌지."

정확한 가격을 언급하지 않은 채, 유하는 로브스터 수프를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향이 입 안에 퍼지는데, 수프는 목구멍으로 금세 사라졌지만 진한 향은 그대로 입안에 맴돌았다. 6년 만에 찾은 이곳은, 여전히 그의 입맛에 맞았다.

채이는 상상도 안 간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입술을 삐쭉 내밀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부자신데 이런 것쯤이야 껌이겠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유하를 따라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 몇 초 동안 천천히 음미하던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크고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는 말 대신 엄지를 척 내미는데, 그녀로써는 정말 맛있다는 표현이었다.

그 후로도 맛있는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채이는 이건 뭔가요, 저건 뭐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맛있는 건가요, 이 가게 고기는 왜 이렇게 연하고 맛있는 건가요, 정말 비싼 한우인가봐요. 등등 궁금한 것이 많은 건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오랜만에 하는 채이와의 데이트는 달라도 꽤 많이 달랐다.

5년 전과 똑같이 맑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를 바라보는 눈빛도, 나누는 대화의 결도 달랐다.

"요즘 새로 떠오르는 건 없어요? 아직도 아저씨, 아니, 회장님께서 남기신 중요한 자료를 어디에 둔 건지 기억에 없어요?“


채이는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떠들던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던 유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어, 그게…"


그 ‘중요한 자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기억나지 않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목이 텁텁해진 듯,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흐음."


채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지다 이내 미간을 좁혔다.


"이제 정말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어쩌죠? 빨리 기억을 찾아야 할 텐데…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요즘 홍 여사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채이는 거의 죽어가는 표정을 한 채 끼니를 거르고 방에서 꼼짝을 안 한다고 했다.
스무 살의 채이와 데이트할 때 즐겨 찾던 번화가, 연인들이라면 한 번쯤 가보았을 법한 장소들을 함께 걸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 뒤에야, 그녀는 비로소 유하에게 닥친 문제거리를 기억해낸 듯 싶었다.

"이제야 관심이 가?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더니.“

유하의 말투에 묘한 서운함이 배어 나오자, 채이는 살짝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미안해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그녀는 애꿎은 입술만 안으로 말아 넣었다. 마주 앉은 게 아니라 곁에 있었더라면, 예전부터 고쳐주고 싶었던 그 버릇을 또 한 번 지적했을지도 몰랐다.

"뭐, 남친이랑 헤어지고 우울해서?"
유하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입술을 꾹 눌러줄 뻔한 충동을 애써 누르며 툭 던졌다. 순간, 채이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서로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입 밖에 낸 적 없는 그녀의 이별 이야기였으니.

"아니, 그걸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삐쭉 내민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원망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좀 풀려?"

생각지 않은 의외의 말이 들려오자, 채이는 고요한 눈으로 유하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좀 풀렸냐니.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묻는 거지?
오늘의 나들이는 그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마련된 게 아니었던가? 옛 연인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고 과거의 순간들을 되새기며, 허울 뿐인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던가.

짝퉁인 채이는 금세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네, 좀..."

얼버무리는 것으로 이 얘기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한채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 그 순간, 문득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는 알까,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의 짧았던 삶이 안타까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부러움으로 가득찬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런 복을 누릴 수 없을 테니.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간절히 기억되고 그리운 존재가 될 일은 없을 테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랑이라 믿었고, 그래서 결혼하자는 말에도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이렇게 큰 변화를 겪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관계가 어그러지고 나니, 문득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조차 의문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언가를 노력했고, 더 나아지려 애썼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점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런 사람은 잊어. 그래야 또 다른 인연이 찾아오지."

유하의 말에 채이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유하는 이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녀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마디 핀잔이라도 주려던 차였다.

그때, 지배인이 마지막 디저트를 들고 나타났다.

유하는 잠시 열려던 입을 다물었다.

누구 앞에서 다른 사내와 이별했다고 감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지 따지고 싶다가도, 저와의 기억을 깡그리 잊은 그녀를 원망해봤자 저만 기분 잡칠 거고 기운이 빠질 거였다.

저녁 식사의 마지막으로 가벼운 후식이 나왔다. 한 입 크기의 고급 디저트였는데 입안에 넣으면 언제 들어오기나 했었나 싶을 정도로 쏙 사라졌다.

채이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디저트의 맛을 무한 감상하는 듯했다. 반면, 유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입안에 넣고는 배시시 눈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아직도, 좋아하려나.”

작게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슝—

짧은 파열음 뒤에,

팡!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이 순식간에 수많은 빛으로 물들었다. 불꽃 하나가 피어나고, 이내 연달아 터지며 밤을 수놓았다.

“우와…”

채이는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흘렸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은 어린 아이 같았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불꽃을 쫓으며,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유하는 그런 채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맺혔다.

너는 여전히, 불꽃놀이를 좋아하는구나.
유하 오빠,

오빠,

빨리 불꽃 축제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 난 불꽃이 팡팡 터질 때가 정말 예쁜 거 같아.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예쁜 것을 만들어냈을까.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온통 반짝반짝 빛나는 불꽃을 담은 채 곁에서 재잘재잘대던 스무 살의 채이가 언뜻 보이는 거 같아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채이야, 한채이.

넌 나를 다시 알아볼 생각은 없는 거니.

넌, 어찌 그리 쉽게도 나를 다 잊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떡해야 할까. 너를 정말 어떻게 해야…

“전무님.”


애틋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하를 불렀다.

유하는 감정을 지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채이가 초롱한 눈빛을 가득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불꽃 축제가 있나 봐요. 혹시… 이것도 다 염두에 두고 여기로 오신 거예요?”

유하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일부러 고개를 돌려, 밤하늘에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아니, 몰랐어.”

그녀를 위해 준비한 불꽃이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이 여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던 순간, 생각보다 깊은 절망이 밀려왔다.
그래서일까.

사고가 난 뒤 나에게서 떨어져나가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간 그녀가 미워야 하는데,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죄책감 하나 없는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는 걸 보면, 단단했던 마음이 흔들린다.

설레임이 끝없이 차오른다.
잊어야 할 감정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번져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그래서 미칠 것 같다.

그래, 일단, 일단은 살아있으니 다행이야, 내 앞에 이리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만 생각하고 싶은 날들도 있다. 분명.


“채이야.”

부드러운 목소리와 잔잔한 눈빛이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채이가 유하를 바라보았다.

“나 사실은 너한테 할 말이…”

슈웅— 팡!

멀지 않은 곳에서 폭죽이 터지며 밤하늘을 밝게 물들였다. 요란한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고, 유하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뭐라고요?”

채이가 상체를 앞으로 하며 귀를 기울였다.

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니야.”

싱긋 웃는 그를 보며, 채이는 싱거운 듯한 표정으로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와 별 얘기 다 하고 싶다. 너만 보면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던 그때처럼.

9살 때 수영장에서 빠져 죽을 뻔한 사고가 있었다고요?

어떡해… 우리 유하 오빠, 어떡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는 나보다 더 슬퍼했지. 작은 몸으로 나를 감싸 안으며, 마치 그날의 고통이 네 일인 양 안타까워했다.

너는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나를 네게 빠져들게 만들고, 너는 내 전부가 되었지.

아픈 기억은 흐릿해지고 좋은 기억들만 네 앞에서는 선명했다. 네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어 주었으니까.

그때는 정말, 진정한 내 편이 생긴 것만 같아서…
너무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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