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63회)

죽으나사나 | 2025.11.03 18:38:02 댓글: 0 조회: 115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85833

너를 망가뜨릴 시간 (63회) 따뜻한 피아노 선율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고단했는지, 레스토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채이는 조수석에서 조용히 잠에 빠졌다.

평소보다도 더 속도를 늦추며 조심히 운전하는 유하의 두 눈동자에는 어두운 그림자만 서려 있었다.

채이와 마주했을 때만큼의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건 강유하, 그 아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조건이야. 적은 돈이 아니니 한국을 떠나도 편히 살 수 있을 거고.>

강미정, 강씨 집안 유일한 나의 고모.
오래전부터 계속된 의심이 불씨처럼 타올랐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애써 외면해 왔다. 하지만 USB에 담긴 차가운 목소리는 그 모든 의심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녀의 음성이 담담할수록, 진실은 더욱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강유하, 그 아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조건.


목구멍이 타들어 가듯 쓴맛이 치밀었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를 없애달라는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순간,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죽이고 싶었구나. 나를, 강유하를.


하지만 끝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아 있으니… 강미정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얼마나 간절히 내 죽음을 바랐을까. 아마 5년 전 그 사고 때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래… 이제는 정말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 사실만큼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네가 유하구나? 반갑다. 난 네 고모야.


처음 마주한 그날, 강미정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속에 감춰진 추악한 의도를 알 리 없던 어린 나는, 순진하게도 그녀를 반겼다.

내 가족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내일이 지나면, 친조카를 죽이려 한 고모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또 한 번 떠들썩해지겠지.


누군가는 나를 불쌍하다고 여길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우스운 이야기라며 조롱하겠지.


유하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오직 운전에만 집중했다.

***

집 앞에 도착할 즈음, 채이는 깨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눈을 떴다. 운전하느라 피곤할 유하를 옆에 두고 태연히 잠들었다는 사실이 미안했던 걸까.

차에서 내려 정원을 가로지르는 내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앞서 걷던 유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홱 돌아섰다. 채이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할 말 있어 보이는데.”


먼저 입을 연 건 유하였다.


망설이던 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죠?”


그제야 굳게 닫혀 있던 유하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채이가 눈치를 본 이유는 단순히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잔잔했던 유하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알아챌 리 없을 텐데.

이 복잡한 마음이 들킬 리 없는데.


넌, 예전의 채이가 아니잖아.


"그게..."


채이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망설였다. 고민하는 듯 손끝을 꼼지락대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민이 많아 보여서요. 무슨 일 있는 거죠?"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하게 건네는 물음. 그 한마디에 순간, 속이 울컥했다.


"아니."


짧고 단호한 부정.


"거짓말."


채이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번에 그의 말을 쳐냈다. 단단히 힘을 준 눈동자가 유하를 곧게 응시했다.

"이것 봐, 요즘 안 보이던 그 표정이 다시 올라왔는데 뭐."


그 표정.


"무슨 표정?"


"나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 날 제발 봐달라는 표정. 처음 만났을 때도 딱 이 표정이었어요."


유하가 기억을 잃은 채이를 처음 마주했던 그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이런 저라도 도움이 될 구석이 있다면 이용하세요.

뱉어버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고, 욕받이가 필요하면 욕해도 되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다는 듯, 주절주절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게 느껴졌다.

유하의 반응을 무심코 살피고 있었다.


그때,


"더 해봐."


유하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더 이어가 보라고 채이를 붙잡았다.

더하라고 하니, 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는요, 정말 힘들 때 그냥 울어버려요. 다 큰 성인이 운다는 게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거든요."

하아, 너는 진짜.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올려다보는 순간, 잠시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떡하라는 건지.


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길게 내려다보던 유하의 얼굴에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혹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일까? 작은 기대를 가득 담은 눈으로 유하를 올려다보았다.


"내일, 하루 더 같이 있자."


그 한마디를 남긴 유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별채로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채이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처음 마스크를 쓴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유하는 분명 달랐다.


그의 낯빛은 지나치게 어두웠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고민 같기도, 어딘가에 맺힌 슬픔 같기도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아마 그래서 쓸데없는 말들을 마구 쏟아냈던 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서.

창피했지만, 정말 이상한 소리를 많이 했다.

***

"사장님, 이제야 퇴근하세요?"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소은은 부동산 중개업소 앞에서 김 사장이 가게 문을 잠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어? 타투샵 사장님이네."


사십 대 중반쯤 되는 김 사장은, 예전 고객이었던 소은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 타투샵 사장이 아니라, 고깃집 알바생이에요."


소은은 싱긋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처음 타투샵을 시작할 때, 김 사장의 도움 덕분에 좋은 위치의 상가를 꽤 저렴한 가격에 임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장사가 잘됐지만, 건물주가 재계약 시 임대료를 크게 올리는 바람에 결국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 사장에게만큼은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까지 가게에 계신 거예요?"

"어... 네. 저 앞 골목에 있던 편의점 건물 있잖아요."


김 사장은 문을 잠그던 손을 멈추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편의점 점주가 나가고 나서 줄곧 공실이었는데, 요즘 들어 관심을 보이는 손님이 있더라고요. 그때는 이상하리만큼 무리해서 가격을 올리며 편의점 사장을 내쫓으려 하더니..."


그는 마치 먼지를 털어내듯 정장 재킷을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은이 천천히 입을 뗐다.


"사장님, 그때 갑자기 건물주가 바뀌었다고 하셨죠?"


"그랬죠. 갑자기 시세의 세 배 되는 금액을 내놓았으니, 혹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겠죠."


"세 배요?"


"네. 새 건물주는 아주 젊은 사람이었어요. 무얼 해서 부자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건물을 사는 데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더라고요."


김 사장은 당시를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혹시 건물주 이름이..."


"이름이요? 음… 강… 강…"


"강유하요?"


"아, 맞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신기하다는 듯 소은을 바라보는 김 사장. 그러나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제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요. 별거 아니에요. 사장님, 너무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김 사장의 아쉬운 표정 속에서, 소은은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렇게 마무리된 찝찝한 작별 인사에 김 사장은 여전히 소은을 ‘사장님’이라 부르며 보내주었다.


"네, 곽 사장님, 들어가세요~"


이미 사장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김 사장의 성격상 영업의 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소은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누구한테라도 들킬까 봐 정신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어떻게 집까지 걸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발걸음은 그저 급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현관에 들어서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참아왔던 숨을 깊이 내쉬었다.


식당에서 나은이가 했던 말을 떠올릴 때까지만 해도, 누가 자신에게 그랬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김 사장에게서 강유하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이 그제야 실감 나기 시작했다.


강유하.


소은 씨도 알아요?


순간, 수호가 자신에게 강유하에 관해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채이에게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던 그 이름, 강유하.


그가 다시 채이 곁을 맴도는 이유가 궁금하다... 왜 지금 와서?


헤어진 지 5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조용히 잘 살아가고 있던 채이에게 다가오는 걸까? 그럴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채이가 그를 완전히 잊었다는 걸 아는 걸까? 그녀와 접촉했다면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고. 그럼, 알게 되었다면 지금 하는 행동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걸까? 왜 이제 다시 채이 주변에 나타나는 걸까?


소은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무릎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감싸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잘 생각해 보자, 곽 소은. 확실히 생각해 보자.”


혼자 중얼거리며 집중했다.


먼저 강유하는 시세의 세 배나 되는 큰 금액을 지불하고 건물을 사들였고, 그가 먼저 한 일이 바로 편의점 점주를 쫓아내는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채이는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채이가 일자리를 잃는다......

소은은 무언가 깨달은 듯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채이야, 너 갈 데가 없으면 타투 샵에 와서 배우면서 일할래?'


타투샵을 닫아야 했던 이유, 그것도 채이를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채이의 밥줄을 끊어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합의금으로 받은 2억을 다시 가져갔으면 됐잖아!'


김나은은 합의금으로 2억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것도 채이한테서. 채이가 갑자기 어디에서 그런 큰돈을 구했을까...


"설마..."


생각이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소은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친 채이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 씻어서 더 뽀얘진 얼굴에 스킨을 발라 톡톡 두드리며 피부를 정돈했다.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을 내려놓고 빗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한 채이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무심코 걸어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며, 피아노 소리에 집중했다.


부드럽고 평온한 피아노 선율은 집안을 감싸며 더욱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집에서 듣는 피아노 소리는 처음이었다. 채이는 그 소리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을 느끼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귓가에 부드럽게 퍼지며 마음을 울리는 피아노 선율은 그녀가 문이 조금 열려있는 방문 앞에 다다르자, 마침 마지막 음이 끝나버렸다.

따뜻한 선율 음이 사라지니 여운만이 공기 속에 남아 아쉬운 마음만 잔뜩 들어섰다. 채이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들이밀어 방안을 엿보았다.

유하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선반 위에 손을 올린 채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애틋한 손길로 피아노를 쓸었다. 여운이 남는 건 채이 뿐이 아닌 거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일어서려던 유하는 고개를 돌리다 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모습 하나도 놓치지 않을세라 뚫어져라 쳐다보던 채이는 당황해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그게,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서..."


"들어와."

쭈뼛거리며 문밖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채이는 유하의 턱짓에 얼른 발을 들였다. 그제야 방 안을 제대로 살펴보게 된 채이는 신기한 듯 둘러보며 고개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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