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64회)
가짜가, 감히 전무님을
적당한 크기의 방 중앙에는 웅장한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책장이 가득히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피아노와 관련된 음악책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옆에는 큰 유리장 안에 정갈하게 배열된 트로피들이 반짝였다. 트로피의 모양이나 크기도 다양했으며, 유리와 크리스탈, 금속 재질 등 멋스러운 장식들이 돋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받은 거예요?"
채이는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트로피의 수가 어마어마해 놀라며 유하를 돌아보았다. 그때, 유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글쎄, 세어본 적은 없어서."
마치 트로피의 주인이 아닌 듯 무심하게 답한 유하에게 채이는 입술만 삐쭉거렸다. 잘 알지는 못해도 트로피의 수를 보아 유하는 정말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었다는 건 알 수가 있었다.
말은 무심해 보여도 어느새 채이처럼 트로피들에 시선을 길게 주고 있는 유하를 발견한 채이는 그의 얼굴을 더 유심히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읽어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만 쳐다봐."
유하가 태연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돌려 채이를 보았다.
흠, 채이는 무안한 마음에 헛기침한 뒤, 피아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매끄럽고 고급스러운 깊은 색을 자랑하는 피아노는 전문가에 의해 정밀하게 다듬어져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며, 조명의 변화에 따라 미묘한 색깔의 변화를 보였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조화롭게 배열된 건반을 멍하니 바라보던 채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건반을 눌러 보았다.
건반이 부드럽게 눌리는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채이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앉아봐."
유하의 말이 떨어지자, 채이는 조종당하는 듯 자연스럽게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대로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굳어 있는 채이에게 유하는 조용히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따뜻한 숨결이 귓가를 스치는 듯했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 뒤에 선 유하의 존재가 가까이 느껴지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하는 부드럽게 채이의 손을 잡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기 손을 그녀의 손 위에 겹쳐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손끝이 건반에 닿는 순간, 피아노의 깊고 풍부한 울림이 조용히 방 안을 감쌌다.
건반을 누른 것은 채이의 손이었지만, 실상 그녀의 손은 유하의 리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맑고 섬세한 선율이 퍼지며 부드럽게 귀를 간질였다.
짧은 연주가 끝나고 정적이 흐르자, 채이는 긴장을 풀며 조심스럽게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유하는 그녀의 손가락을 더 깊숙이 감싸 쥐었다.
"없으니 좋네."
"…뭐가요?"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채이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아차 싶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유하와 눈이 마주치었으니.
당황한 채이는 얼굴이 달아올랐고, 귓불까지 붉어졌지만, 유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켜주지도, 그렇다고 덧붙여 말하지도 않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채이는 결국 시선을 피아노 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반지 말이야, 없어지니 좋다고."
유하가 그녀의 약지에 살짝 손끝을 스치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그의 말뜻을 깨달은 채이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수호가 사라진 뒤에도 그녀는 반지를 쉽게 빼지 못했다.
연락이 오겠지. 무슨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도 없이 사라질 리가 없잖아.
수호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적어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날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와 걱정은 점점 실망과 좌절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어젯밤, 마침내 반지를 빼버렸다. 더 이상 그 반지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채이."
깊은 생각에 잠긴 채이를 유하가 부르자, 그녀는 가까운 거리란 사실도 잊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상대방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반지 이야기로 다시금 기분이 가라앉은 채이를 바라보던 유하는 이내 허리를 곧게 펴며 입을 열었다.
"술 마시자. 오늘의 마지막 코스."
...
오늘도 유하는 채이가 좋아하는 소주와 맥주를 너튜브에서 배운 황금 비율로 섞어 준비했다. 채이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잔을 받아서 들며 기분 좋게 한 모금 넘겼다. 유하는 그녀의 기분과 속도에 맞추려는 듯 조용히 소주를 선택했다.
"자, 건배!"
술기운이 오르며 기분이 한결 좋아진 채이는 들뜬 목소리로 잔을 높이 들었다. 유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흥을 맞춰주듯 잔을 부딪쳤다.
"캬아~! 이 맛이야."
그러다 문득, 채이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참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잔을 단숨에 비우고 감탄을 연발하던 채이가 의문을 가지자, 유하가 물어왔다.
"전무님이 이렇게 소맥을 기가 막히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완전 전문가네, 전문가!"
술기운에 혀가 살짝 꼬였지만, 채이는 헤벌쭉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 정도라면 자주 마시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그럼 자주 마시면 되지."
"아니, 내가 어떻게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자꾸 타달라고 하겠어요. 아, 그래! 내가 배우면 되지! 이거 비율 어떻게 맞춘 거예요?"
금방이라도 배울 기세로 들이대는 채이를 보며 유하는 가볍게 웃었다.
"어허, 소맥 노예로 안 살고 싶으면 빨리 가르쳐 주세요. 이젠 혼자서도 타 마시게!"
채이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도발했다.
"안 가르쳐줘. 이 맛을 보려면 나를 찾아."
태연하게 받아치는 유하의 말에 채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쁜 사람이 과연 내가 마시고 싶을 때마다 같이 마셔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입술을 삐쭉 내밀던 채이 시선이 어느덧 자기 잔에 소주를 채우는 유하의 손에 닿았다.
무언가 떠오른 채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전무님한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아까 피아노 방에서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질문. 망설였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채이는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며 유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고, 그녀의 질문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김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전무님께서 사고로 피아노를 더는 칠 수 없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상처를 건드릴까 망설였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아까 들었던 피아노 연주는 정말 대단했는데…
입안에서 맴돌던 칭찬은 끝내 삼켜버렸다.
유하는 말 없이 천천히 손가락을 펴 보이며 채이 앞에 내밀었다. 채이는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다렸다.
"피아노를 잘 다루려면 손가락 하나하나가 유연해야 하고, 정확해야 해. 극도의 섬세함이 필요하지."
유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손목이 부러지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치면서 감각이 많이 무뎌졌어. 아까 연주할 때도 실수가 몇 번 있었고."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채이는 그 속에 감춰진 깊은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마치 남의 이야기인 듯 담담한 표정을 짓는 유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보던 채이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만지는 듯 조심스레 그의 손등을 감싸 쥐며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많이 아팠겠어요. 얼마나… 얼마나 아팠을까요."
채이는 나직이 읊조렸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져 가고 있었지만, 채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아니면 감정이 더 이상 억제되지 않아서인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땐…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리고—
그녀를 잃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불쌍한 사람.
가여운 사람.
그래서 안아주고 싶은 사람.
하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물기가 스며든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눈물의 의미는 뭘까.
결혼까지 약속했던 남자와 헤어진 슬픔? 그래서 우는 걸까? 끝났다는 걸 인정하게 돼서 이제야 눈물이 나는 걸까?
아니야.
아니, 그건 아니야.
스스로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몸속 깊숙이 퍼지며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눈앞의 유하를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에 희미하게 주름을 잡은 그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 미친 것 같아.
나, 아까까지만 해도 당신이 그저 안타까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나 봐요.
…나, 미쳤나 봐요.
정말, 미쳤나 봐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언제부터였을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마음이 이미 오래전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가슴이 점점 답답해졌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어, 채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죄송해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흐트러지지 말자.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쓰며 짧게 말한 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내일 물어보면, 그냥 취해서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되겠지.
그렇게 도망치듯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한채이."
유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채이는 깨달았다.
…그래, 한채이.
넌 정말 나쁜 여자야.
연인이 있으면서도, 관심을 보이는 남자의 집에 머물렀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어.
그러다 마침내—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서야,
이제야 마음껏 흔들리는구나.
…혹시, 기다렸던 건 아닐까? 그 사람의 이별을.
그래서 이제야,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넌 정말 형편없는 여자구나.
그런데도…
"가지 마."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채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같이 있자."
…어떡하지.
같이 있자는 말이 싫지 않은 지금 이 마음을.
미친 이 마음을.
눈물이 차올라 시야를 가렸다. 이제는 그의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걸.
"미안해요. 전 전무님을 속였어요."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뭐를?"
"저, 사실..."
구슬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 또렷해진 시야 너머로, 그가 보였다.
"전 전무님이 사랑했던 그 한채이가 아니에요."
그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
"돈 때문에, 빚을 갚으려고 거짓말하고 생쇼 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전, 가짜에… 거짓말쟁이라고요."
2억.
가진 게 하나 없는 나한테는,
그건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제 내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말해야 했다.
빠져들지 말라고.
이 여자는 가짜라고.
"알아."
"그러니까, 아니까 이제는…… 네?"
채이는 미간을 좁히다가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알고 있다...고요?"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그게 맞는 거 같아서.
하지만 유하는 여전히 담담했다.
"어. 돈 때문에 생쇼 한 거 다 안다고."
그저 담백한,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목소리.
채이는 숨을 삼켰다.
"이게 아닌데..."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다 알고 있었다면, 화를 내야 했다. 속았다고, 사기당했다고 분노해야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무서울 정도로.
"충격적인 말도 해줄 거예요."
채이는 마침내 벼랑 끝에 서듯 입을 열었다. 유하는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말해 봐."
어디 한 번 제대로 끝장을 내보라는 듯, 턱을 살짝 들었다. 채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기억을 잃으셨다고 했는데, 실장님은 전무님한테 자극을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
"내가 알던 한채이는 5년 전에 죽었다는 거?"
헙.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말에, 채이는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유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것도 알아."
머리가 하얘졌다. 채이는 할 말을 잃고 고개만 저었다. 그런데도 유하는 침착했다. 그의 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근데 왜 갑자기 이실직고해? 거짓말했다고."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은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채이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해야 했다.
"이 가짜가, 이 가짜가..."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해야 하는 말,
"이 가짜가, 감히 전무님을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그러니, 날 내쳐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하의 동공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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