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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망가뜨릴 시간 (66회)

죽으나사나 | 2025.11.20 05:31:04 댓글: 0 조회: 106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688750

너를 망가뜨릴 시간 (66회) 기억을 잃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한채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폰을 귀에 갖다 대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소은의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미안, 언니. 진동으로 해놔서 전화 온 줄도 몰랐어.]


사실은 폰을 아예 멀리 두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후우….]


소은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채이, 너 지금 어디야? 나랑 만나.]


[갑자기 왜? 나 지금…]


[그래, 너 지금 어디인데. 내가 갈 테니까 거기 있어.]


[여긴….]


오면 안 되는데.


[무슨 일인데 그래, 언니?]


망설이는 채이에게 다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 묻지 말고, 그냥 말해 주면 안 돼? 나 너한테 갈 거야.]


언제나 다정하기만 했던 소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날이 서 있었다.

그렇게까지 다급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어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너, 왜 나한테 제대로 말하지 않았어.]


채이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합의금이 2억이나 된다는 걸,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숨길 수가 있어?]


질책이 아니라, 이제는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언니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언니가 하는 말을.


"왜 그래, 채이야?"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서 불안을 가득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해, 채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수없는 착각 했다.

혹시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그도 나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을까?


설렘과 기대가 함께했기에 곁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별을 준비한 건 내가 아니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이 마음을 깨달았다면, 어쩌면 이별을 선택한 건 수호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그 생각,


떠난 건 수호였는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몰아세웠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자석처럼 그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갈대처럼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이 남자는 붙잡아 줄 수 있을까.


아무런 확신도 없이, 막연히 기대해 보았다.

미련하게, 바보처럼.


[채이야, 너 혹시 강유하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강유하.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편의점 건물 누가 사들였는지 알아? 그리고 왜 샀는지도?]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었잖아.


그런데 왜. 왜 나한테—


[그리고 합의금 2억, 다 가짜야. 김나은은 2억을 돌려줬다고 했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단 하나, 분명한 사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순수한 의도로 내게 다가온 게 아니라는 것.


[채이야, 정신 차려. 또다시 강유하한테 휘둘리면 안 돼. 빨리 그 집에서 나와.]


소은의 거듭된 다그침에도, 선뜻 이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 남자와 어제 같은 밤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분명 그랬을 거야.


그랬을 텐데…


"한채이."


유하가 걱정 어린 눈길로 채이를 내려다보았다. 망설이는 듯,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며. 그의 얼굴엔 불안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진실해 보이는 게,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이 남자는—

마치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해, 채이야.

사랑해. 사랑해…


머릿속이 울렸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었어.


"전무님."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응."


그의 짧은 대답이 바로 떨어졌고 채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할 말은 많았지만, 묻는 게 두려웠고 이제 더는, 이 사람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렸다.


"한채이."


당연하게도 그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고, 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말해 줘야..."


"알면서. 눈치챘잖아요."


몸을 홱 돌려,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알면서, 대체 뭘 더 말하라는 거예요?"


감정을 누르려 애썼다. 그냥, 이대로 보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남자는 끝까지.


나를 이렇게 만들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채이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유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언젠가는 마주할 일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이 집에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유.


"미안해."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변명이 필요할까. 그런다고 네가 믿어줄까.


"뭐가 미안한데요? 어떤 점이 미안해요?"


나를 버린 네가 행복해 보이는 게 싫어서, 네 일상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그랬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면, 넌 나를 믿어주려나.


사실은… 아직도 너를 잊지 못했다고 하면,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너는 나를 용서해 줄까.


"왜 이러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지만, 닫을 생각이 없었다.


"그럼 기억해 내."


"……무슨 말이에요?"


"한채이, 네가 왜 나를 버리고 떠났는지, 그것부터 기억해 내라고."


이런 식으로 우리의 과거를 끄집어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죽어가는 나를 두고 떠난 너를,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설명해 봐.


그때의 너는 왜 그랬어, 한채이.


유하의 단단한 눈빛이 채이를 옭아맸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당혹감과 의문이 가득했다.


아직 따질 게 많은데.

무슨 핑계를 대든,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수호에게까지 찾아간 이유도 묻지 못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뭘 어떻게 했다고요?"


나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맑기만 한 얼굴.


유하는 허공을 잠시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넌, 내가 만났던, 5년 전의 한채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내게 벌어진 지저분한 일들을 먼저 해결하고, 그것만 정리하면 너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는데.


"기억을 잃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한채이."


너의 잃어버린 기억
. 이런 식으로 알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니까 날 다시 기억해 내. 5년 전,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너부터 해명해 봐."


유하의 손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끝에서 차가운 긴장감이 전해졌다. 핏기가 가신 유하의 얼굴. 그를 바라보는 채이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무슨…

채이는 넋이 나가 버렸다.


내가,

내가 5년 전 그 한채이라고?

내가?


말도 안 돼.


"기억을 잃은 너로선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겠지."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본 듯, 유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한 그녀를 바라보니, 그동안 혼자서 끙끙 앓아 온 시간이 억울해졌다.


"나한테 왜 그랬냐고 했지."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두 달을 같은 공간에서 보냈음에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도 간절히 바랐던 여자인데. 이 여자는 나를 그저 그런 남자로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린 거였으니.


"너를 망가뜨릴 생각이었어. 내가 말했었지? 넌 나를 엄청나게 좋아했었다고."


"……."


"그러니, 약혼한 남자가 있으면서도 다시 나를 좋아하게 된 거 아니겠어?"

뾰족한 칼날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뱉으면 뱉을수록, 곱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에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너만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내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어. 고맙다, 한채이."


이게 아닌데.


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눈에서 당혹과 불안이 서린 채 떠는 걸 보면서도, 난 독한 말만 내뱉고 있었다.


멈춰야 하는데.


"넌, 내 손바닥 안에 있어. 그동안 고마웠다고? 또 짐 싸고 나가려고?"


유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가 봐. 나가기만 해. 네가 문을 나서는 순간, 내 다음 타깃은 네 동생이 될 거니까."


"미, 미쳤어요?"


채이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 반응을 보며, 유하는 낮게 웃었다.


"넌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이 집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어. 물론, 네 동생이 무사하지 않은 꼴을 보고 싶다면 나가도 되겠지만."


쐐기를 박아 버렸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넌 내 곁에 있어야 해. 내가 웃으라면 웃고, 내가 울라면 울면서, 그저 내 옆에서 감정 없는 인형처럼 살아가."

이대로 나가면, 너를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부탁이 아닌, 치졸한 방법으로 너를 붙잡고 있었지만, 난 괜찮아. 네가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으니까.

***

월요일 아침, 강미정은 여느 때처럼 스틸레토 힐을 신고 현관 앞 거울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칼, 고급스러운 의상, 완벽하게 세팅된 화장까지.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지만, 그녀의 걸음은 문밖에서 기다리던 낯선 남자들을 보고 멈춰버렸다.

"누구?"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자,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검은 지갑을 꺼내 들었다.

"서울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강미정 씨, 저희랑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왜요?"

아침부터 황당한 소리에 강미정이 코웃음을 쳤다.

"23년 전, 하남동 자택에서 조카인 강유하 씨를 죽이라고 사주했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뭐?"

여유롭던 강미정의 표정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뭘 잘못 알고 오신 거 아니예요? 23년 전이라면 수영장 사건 얘기하는 거 같은데 그거 유하가 절로 빠져서..."

"증거가 나왔습니다. 발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강미정의 말을 끊어버렸다.


"증거?"

잠시 긴장이 깃들었던 강미정의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빨갛게 칠한 입술 끝이 서서히 올라갔다.

"무슨 증거요?"

그만큼 꿀릴 게 없었다.

"당시 가정부였던 조미숙 씨와의 대화가 녹음된 파일이 있습니다. 인제 그만 가시죠."

말도 안돼. 녹음 파일이라니.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뭘 사주했다는 거야."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경찰이 다가오자, 강미정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열린 현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경찰들도 재빠르게 안으로 진입했다. 하이힐이 딱딱한 바닥을 사납게 울리며 복도를 내달렸다. 하지만 높은 굽 때문에 몸이 흔들렸고, 결국 벽에 크게 부딪혀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쾅!


전실 복도에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유리가 산산조각 났고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볼품없이 구겨진 그림이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경찰은 떨어진 그림을 사이에 두고 강미정에게 접근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강미정은 더 이상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저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오직 그 그림만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미정아, 어때?

나중에 이렇게 조용한 시골에서 우리 둘이 살면 좋겠다.


누구보다 자상하고, 착했으며,

무엇보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그때 그 사람이 떠올랐다.

이 집안의 화려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아하고 소박한 그림.

젊은 시절, 한때 강미정도 그런 남자라면 모든 걸 내려놓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아주 잠시 고민했던 남자. 그러나 결국엔 부와 명예를 위해 그녀가 매몰차게 내쳤던 남자.

훗날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짧게나마 아릿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남자.

오늘, 그 사람이 문득 너무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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