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68회) 덮어야 하는 이유
"내 말 듣고 있어? 유하 앞에서 나 좀 좋게 말해달라고!"
채이가 말없이 그를 쳐다만 보자 교남은 갑자기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실성한 듯 비웃으며 말했다.
"하, 씨 X, 내가 이 나이에 새파랗게 젊은 조카한테 무릎도 꿇었는데. 왜! 내가 네년한테도 무릎 꿇어야 하냐? 어??"
점점 난폭해지며 화를 못 이기고 철문을 마구 걷어찼다.
채이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교남은 채이를 째려보다가 갑자기 거친 손길로 그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야, 어디서 바보인 척 나 몰라라 하는 거야. 또 한 번 그때 기억 떠오르게 해줄까? 다시 갇혀 봐? 어?"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멍한 표정으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교남은 그녀를 마구잡이로 끌어갔다. 유하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지 전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술에 취해 있는 까닭이었다.
"이, 이거 놔요."
차 앞까지 끌려가던 채이가 힘없이 입을 열었지만, 교남은 전혀 듣지 않는 듯 기어이 차 문을 열려고 했다. 채이는 이대로 끌려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술에 취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교남은 그대로 넘어졌고, 채이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야, 야! 너 거기서!!"
교남은 멀어져가는 채이를 쫓아 가려다가 차에 올라타 급히 기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협박이든 어떤 방법이든 자신은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다짐했다.
붕ㅡ
차는 시끄럽게 울리며 채이가 도망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채이는 숨이 가쁘게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왼쪽 발목에서 어김없이 통증이 밀려왔지만 최대한 뛰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그에게 잡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교남은 일부러 채이를 골리듯 큰 경적을 울리며 난폭하게 운전했다. 채이는 골목길을 빠져 큰 도로에 거의 다다랐을 때,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의 달리는 속도는 차의 속도를 따를 수가 없었다.
채이를 쫓던 교남은 차를 급히 도로 한가운데 멈추고 차창을 내렸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이를 보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야, 한채이. 다 뛰었냐? 넌 뛰어봤자..."
빠아아앙 ㅡ
교남이 목소리를 단번에 집어삼킨 큰 경적이 울려 퍼졌다. 채이와 교남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또 다른 골목길에서 트럭이 빠른 속도로 나오다가 도로 중간에 세워있던 교남의 승용차를 뒤늦게 발견하고 무서울 정도로, 크게 경적으로 경고했다.
교남은 급히 출발하려고 핸들을 잡았지만, 코너에서 갑자기 빠져나온 다른 차량을 보고 얼어붙었다. 뒤에서 멈추지 못하고 달려오는 트럭을 번갈아 보며, 마지막으로 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허예진 두 눈에는 세상 끝의 공포로 가득 찼다.
쿵ㅡ 콰앙!
눈앞에서, 평생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느릿하게 채이의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교남을 향해 달려오던 두 차량은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도로 중앙에 차가 멈춰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강교남이 차창 밖으로 튕겨 나가는 장면을 채이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수라장이 된 도로 위에는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한채이 씨? 반갑습니다. 저는 유하의 큰아버지 강교남입니다.]
아까 그 아저씨다.
오래전 일인 것 같으면서도 또 생각보다 생생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우리 유하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아가씨가 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했는데,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네요.]
아까처럼 무섭게 느껴졌던 얼굴이 아닌, 온화하고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형수님이랑 분위기 자체가 정말 많이 닮았네요. 아, 유하를 낳아준 친모 말입니다.]
커피숍에서 처음 본 그 아저씨가 웃으며 말을 건 모습이 채이에게는 낯설었다. 채이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무슨 기억이지? 왜 아까 그 아저씨와 그렇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그 아저씨는 분명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보니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그 아저씨는, 그 아저씨는...
채이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려운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변을 살폈다. 손목에 뭔가 걸려있는 느낌에 내려다보니, 링거가 꽂혀 있었다.
하얀 커튼으로 구분된 이곳은 병원 응급실이었다.
채이는 응급실에서 황급히 나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쉬었다. 손끝이 마른 것 같아 두 주먹을 꼭 쥔 채 아무 방향으로든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아까 그 장면은 무엇이었지? 꿈인가?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진짜 겪은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이게...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 아닐까?
강유하의 말대로 기억을 잃은 걸까?
채이는 발걸음을 옮기다 멈춰 서서 급하게 병원으로 들어가는 구급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까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크게 다쳤을 것 같은데...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어 다시 병원을 향해 걸어갔다.
"흐어, 어떡해. 정말 어떡해...으어어...."
병원 입구 근처에서 한 여자가 흐느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채이는 고개를 돌려 그 소리를 들었다.
"이제 우리 주연이 어떡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텐데. 어제도 죽으려고 자해하고... 흐윽, 나 못살아. 연우가 잘못되면 나도 죽을 거야."
서럽게 울면서 여자는 자신의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또 다른 통증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상처를 메꾸고 싶었던 것처럼.
채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을의 차가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려 팔을 올렸다. 그 순간 왼쪽 손목에 새겨진 진한 타투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이번엔 다른 글귀네? 뭐야 이거?]
소은과 나누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라틴어야.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좋은 글귀네.]
오른쪽 손목과 비교해 왼쪽 손목에 새긴 타투 자리는 피부가 거칠고 오돌토돌했다. 짙은 색상 덕에 본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문득 타투가 없는 자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평소엔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일상의 작은 부분들이 갑자기 궁금해지면, 그 호기심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택시를 찾았다.
소은과 함께 살던 집에 도착한 채이는 곧바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티커 타투 리무버가 어디 있을지 몰라 이곳저곳을 살폈다. 한참을 찾던 중, 발끝에 무언가가 닿았고 그녀는 몸을 숙여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타투숍을 정리했지만 여전히 타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소은은, 남은 짐 몇 개를 정리한 뒤 침대 아래에 두었다.
채이는 그 안을 둘러보다가 소은이가 집안에서 들고 다니던 작은 박스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꺼냈다.
뚜껑을 열자, 예상대로 타투 스티커와 리무버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이 솜에 리무버 액을 적셔 왼쪽 손목을 문질렀다.
진한 컬러의 스티커가 점점 흐려지더니, 결국 본래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채이는 손목을 빤히 바라보며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집 밖으로 나섰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점점 속도를 높였고, 결국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집에서 멀지 않은 가게로 뛰어들자,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저, 저 혹시 이게 어떤 상처인지 알 수 있을까요?”
채이는 다짜고짜 손목을 내밀며 약사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젊은 약사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곧 안경을 고쳐 쓰며 그녀의 손목을 살폈다.
몇 초 동안 조용히 흉터를 응시하던 약사는 슬쩍 채이의 얼굴을 살펴본 뒤 다시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흉터이긴 한데요.”
채이는 숨이 막힐 듯한 초조함을 느꼈지만, 약사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가며 천천히 이어갔다.
“날카로운 물건에 긁힌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 이 정도면 찔린 상처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당시 상처가 꽤 깊었을 것 같은 생각에 약사는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자기 손목을 내보이며 대뜸 이게 무슨 상처냐고 묻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순간 고민이 들었다.
“보통은… 어떤 경우에 이런 흉터가 생기나요?”
초조함이 가득하던 채이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약사는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 약국을 열기 전까지 대학병원에서 일하며 수없이 보아왔던 상처들. 익숙한 흉터의 모양과 흔적들. 그 모든 경험이 단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인에 의해 생긴 상처라기보다는… 자해에 가까운 흔적입니다.”
약사의 마지막 설명을 끝으로 채이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진 듯한 기분으로, 어딘가 불안정한 걸음으로 약국 문을 나섰다.
바삐 움직이는 행인들 사이 그 어디쯤 우뚝 멈춰선 채, 구름 뒤에 해가 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쌌지만, 그 차가움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내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고, 누군가는 소란스레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채이는 혼자 고립된 듯했다. 마치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된 것처럼.
그때, 갑자기 어깨에 가벼운 충격이 전해졌다. 핸드폰을 보며 걷던 행인이 그녀를 보지 못하고 부딪쳤다.
행인은 반사적으로 사과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곧 멈춰 서더니,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채이의 두 눈은 감정을 잃은 듯 텅 비어 있었고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가득 채우더니, 이내 조용히 흘러내렸다.
후두둑,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더욱 행인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채이는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올라,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그만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한편,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병원 복도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를 급히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와보니 사라졌더라고요."
응급실 간호사가 전하는 말을 전해 들으며 망연자실한 듯 등을 벽에 기대섰다.
어디에 간 거야, 어디에 간 걸까.
어디에 있는지만 알아도 이 정도로 미치지는 않을 텐데.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무님."
낮고 묵직한 지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가슴의 저릿함이 느껴졌다.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알 것만 같았기에.
"…상무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다리 옆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들이 온 이유는 강교남 개인의 인맥 때문이 아니라, 태산 그룹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홀로 남게 된 유하를 위로하고자 나타난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강교남과 길지 않은 결혼생활을 했던 여성도 사망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녀는 장례식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문객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장례식장이 한산해지자, 지한이가 유하에게 다가갔다. 어두운 표정의 유하를 바라보던 지한이가 입을 열었다.
"오늘 채이 씨와 연락이 닿았다고 합니다."
유하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지금 곽소은 씨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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